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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 기담집 - 기이하고 아름다운 열세 가지 이야기
나쓰메 소세키 지음, 히가시 마사오 엮음, 김소운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4월
평점 :
'무덤도 움직이라고 우는 소리에
무덤이 움직이고
가을바람 밤새도록 불어
새벽이 희미하게 밝았도다
초저녁에 꾼 꿈의 흔적을 보니
잡초가 무성하게 새벽이 밝았도다.' (p.9)
1904년 경 나쓰세 소세키가 썼다는 <귀신이 곡하는 절에서의 하룻밤>이라는 신체시의 일부이다. 이 절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된 사연이 무엇일까 궁금해지는 시였다. 그리워하던 이를 떠나보내고 쓴 시일까, 사랑을 잃고 쓴 시일까, 지나는 길에 그저 빗소리와 곡소리를 듣고 쓴 시일까. 김소월의 <초혼>처럼 처절하지는 않지만 어딘가 쓸쓸한 느낌이 드는 것은 그저 내 기분 때문인걸까 생각했다. 죽음은 어떻게 해도 되돌릴 수가 없다. 무덤이 움직일만큼 울어도, 밤이 지나지 않도록 붙잡고 싶어도 결국 새벽은 오고 떠난 이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피눈물이 흐를 정도로 미친듯이 울어서 얻을 수 있는 건 남은 이가 함께 갈 수 있도록 무덤이 갈라지는 일(양산백과 축영대 설화 혹은 영화 '양축') 뿐이다. 날이 밝으면 세상은 어제와 같을 뿐, 나만 슬픔에 잠겨있다.
나쓰메 소세키의 환상문학은 도대체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다. 서양 작가인 찰스 디킨스나 코난 도일이 매료되었던 유령이 아니라 동양 작가인 그가 생각하는 요괴나 귀신은 어떤 존재이며, 그것들에 대해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말이다. 이 기담집은 총 13가지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중 <긴 봄날의 소품>이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중 일부를 발췌한 장도 있다. 신체시도 있고, 짧은 이야기들이 엮어져 있기도 하고, 아서 말로리의 <아더왕의 죽음>이나 세익스피어의 <멕베스>나 <해로가>와 같은 다른 이야기들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드러내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 중 <취미의 유전>의 경우 러일 전쟁 승전 후 기차역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좀 불편한 부분도 있었다. 아무래도 일제 강점기 시절 때문이리라. '만세'의 의미를 생각하며, 전쟁을 옹호하지는 않지만 드러내놓고 비판하지도 않으면서 친구였던 '고'를 떠올린다. 러일전쟁에서 죽은 친구 '고'와 '나'가 알지 못한 고의 여자와 고의 어머니 이야기이다. '유전'이란 단어보다는 '족보'나 '계보'가 더 어울리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취미로 알아 본 계보 혹은 호기심에서 시작한 계보 추적 이야기가 좀 더 우리에게 와 닿을 것 같다. 그리고 취미라고는 하지만 결말이 제법 다정해서 기억에 남았다.
<열흘 밤의 꿈>은 말 그대로 꿈 이야기이다. 꿈에서 여인은 자신이 죽은 뒤 100년을 기다리라고 한다. 꿈에서 자신의 아이는 눈이 멀었다. 꿈에서 원수를 만나고 배에서 높이 뛰어 물로 뛰어든다. 꿈에서 100년 전에 죽인 원수를 만나고 여자에게 납치된 쇼타로를 구하지만 구하지 못한다. 꿈은 환상이고 무의식이다.
<긴 봄날의 소품> 중 몇 가지 이야기를 발췌하여 실었는데, 그 중 '고양이 무덤'이 기억에 남았다. 살아있을 적 고양이의 신호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죽고 나니 난리법석을 떠는 모양새가 쓸쓸했다. 무덤에 좋아하던 밥을 가져다 둔들, 좋아하던 장난감을 놓아준다 한들 더 이상 그것들을 먹고 놀 고양이가 없으니 말이다. 죽은 뒤에야 비로소 관심을 주었으니, 하찮은 보상을 던져주고 죄책감을 덜 것인가, 애초에 무언가를 돌본다는 자신의 모습이 흡족해서 애정을 쏟는가. 인간이란 참 이상한 생명체임이 틀림없다.
<하룻밤> 속 여인은 누구일까. 그저 개미인가, 환상인가. 수염 없는 남자와 수염 있는 남자와 서글서글한 눈매를 가진 여자는 같이 있었을까, 같이 있었다는 환상일까, 그저 한 명이었을까. 졸린 사람들의 중첩된 세상일까. 아니면 그저 하룻밤의 꿈일 뿐인가.
<환청에 들리는 거문고 소리>는 제법 괴담 같은 이야기이다. 무슨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과 연락이 닿지 않는 여인과 갑자기 몸이 아픈 남자와 개 짖는 소리, 그리고 할멈. 그렇게 사람은 소문과 생각에 홀리고 어쩌면 모든 것은 너구리의 짓일지도 모른다.
<런던탑>은 나쓰메 소세키가 런던에 있을 때의 경험을 살린 이야기이다. 권력에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은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의 한 구절을 불러온다.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그렇게 에드워드 5세와 동생 리처드의 슬픈 사연이, 까마귀들의 날개짓이, 알아보지 못할 낙서를 읽어내는 여자가 저 구절과 만난다. 나쓰메 소세키가 만난 유령들은 그에게 몽환을 선사했고, 집주인은 잔인하게도 그 환상을 깨부수었다.
<환영의 방패>는 지극한 사랑이야기이다. 누군가를 섬기는 자가 어쩔 수 없이 주인을 배신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배신해야 할 상대의 딸과 어떻게 사랑을 이룰 것인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그 '환영의 방패'에 답이 있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답이 될까. 그들은 그곳에서 행복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을 버리고. 끝없이 불타오르다가도 끝없이 어둠이 이어지고 검은 연기가 자욱한 그 세계에 모든 것을 남기고. 어쩌면 윌리엄과 클라라 둘 모두를 남기고.
<해로행>은 아서 말로리의 <아더왕의 죽음>을 모티브로 쓴 글이다. '해로가'는 만가(輓歌. 죽은 이를 애도하는 시가)이다. 랜슬롯과 기네비어를 위한 만가인가, 아더를 위한 만가인가, 랜슬롯을 사랑했던 여인들을 위한 만가인가. 끝내 성배를 조우하는 임무를 자신의 아들인 갤러해드에게 빼앗긴 랜슬롯과 다음 왕을 선택할 수 있는 지위를 잃은 기네비어는 각기 다른 곳에서 평생을 참회하며 지내야 했다. 둘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아더는 배신자 모드레드에게 치명상을 입고 모르가나가 다스리는 아발론으로 떠났다.
<맥베스의 유령에 관하여>는 정말 말 그대로 <맥베스>에 나온 유령에 대한 이야기이다. 맥베스는 덩컨에 이어 뱅쿠오를 죽인 후 유령을 두 번 만나는데, 이 유령이 한 명인지 두 명인지를 말하고 있다. 나쓰메 소세키는 두 번 나타난 유령이 모두 뱅쿠오라고. 확실히 유령에 대한 이야기이며, 맥베스의 배경인 스코틀랜드의 황량한 분위기와 매우 잘 어울리는 이야기였다.
<소세키 요괴 구절 모음집>은 말 그대로 소세키가 언급한 요괴글들을 모아둔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정말 요괴를 만났을까? 그들이 말하는 텐구나 설녀를 만났을까? 해골을 두드려 본 제비꽃은 누구일까.
스산하고 아름다운 구절들이 많아 요괴에게 홀린 것인지, 소세키에게 홀린 것인지,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기와지붕에서 새는 빗물 소리 고즈넉하고 슬픔 가득한 내 몸에 저승의 죽은 이가 왔도다. - P7
무덤도 움직이라고 우는 소리에 무덤이 움직이고 가을바람 밤새도록 불어 새벽이 희미하게 밝았도다 초저녁에 꾼 꿈의 흔적을 보니 잡초가 무성하게 새벽이 밝았도다. - P9
아무리 큰 태산이라도 작은 카메라 속에 담기고, 수소도 식으면 액체가 된다. 목숨을 건 달콤한 사랑을 한 점에 응축시킬 수 있다면-그러나 평범한 사람에게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 강렬한 경험을 한 사람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오직 윌리엄 뿐이다. - P270
무시무시한 쓰나미가 지나가자마자 닥친 장마 비 한 모금 마시고 객실을 빠져나가는 반딧불이인가 - P331
3 해골을 두드려본 제비꽃인가
9 인형 홀로 움직이는 긴 낮인가 -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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