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들(랜드마크)
박서련.한유주.한정현 지음 / 아침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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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릴 때, 난 몇 번이나 엄마를 잃어버렸다. 엄마를 잃어버렸다는 표현에 대해 둘째 동생은 살짝 비아냥거리긴 하지만. 늘 시장 가는 엄마를 따라나섰다가 늘 두리번거리며 시장 구경 하다가 엄마 손을 놓쳤다. 난 두 번 밖에 기억 나지 않는데, 몇 번을 엄마 손을 놓친 그 자리에서 울고 있어서 찾을 수 있었다 했다. 한 번은 울고 있으니 어떤 언니가 나를 파출소에 데려다줬다. 지금 생각하면 난 운이 참 좋았다. 그 다정하고 착한 언니가 파출소에 데려다줬으니까. 파출소에 갔더니 엄마 손을 놓친 애가 나만은 아니었다. 나보다 덩치 큰 남자애는 정말 큰소리로 울고 있었다. 경찰 아저씨가 집주소나 전화번호 등을 아무리 물어봐도 울기만 했다. 나는 그 언니를 만난 후부터 울지 않았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해도 뭔가 안도했던 것 같다. 경찰 아저씨가 나에게 물었다. 난 또박또박 전화번호를 알려줬고 곧 나를 데리러 온 엄마랑 할머니 손을 잡고 집으로 갔다.(크으, 그 때 영리해서 다행이야.) 그 와중에 단팥빵도 하나 얻어 먹었다. 경찰 아저씨들 고맙습니다.


난 그 기억을 떠올리면 '그' 약국이 떠오른다. 국제시장에 있는 그 약국을 지나서 파출소로 갔으니까. 나에게 내 삶의 사물들에 대해 글을 쓰라고 한다면 '천우사 약국'은 꼭 들어갈 것 같다. 그 때 그 언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파출소에서 울다가 전화번호를 말하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박서련 작가는 어린 시절 장소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고 한다. 정말 집과 학교, 교회만 왔다갔다 했다고.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을지 짐작도 안 가지만(사연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가상 세계를 바탕으로 한 멋진 글이 나왔다. 블러바드라는 단어와 달리 폐허 같은 그 모텔은 좀비와 미션을 수행하는 '나' 뿐이다. 그리고 방 하나 하나 탐색하며 목적인 듯 목적 아닌 목적 같은 '그래니 온 그래니'를 찾는다. 그냥 미션이니까 찾는다고, 생각하기 싫어하는 나 앞에 '소냐'가 나타난다. 좀비가 출몰하는 세상에서 딸을 찾는다는 그녀와 함께 하게 된 나는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고 딸을 찾을 수 있을까. 


삶이란 것도 그렇지 않을까.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살게 된다는 말처럼, 죽음이 목적이자 끝이라면 사는 동안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야 허망하지 않을 것 같다. '나'가 마체테를 습관처럼 휘둘러 사는 대로 살아버려 불안해 하는 모습은 결코 좋아보이지 않았으니까.


한유주 작가의 수많은 6월들은 여행 같았다. 뉴욕의 브루클린 다리는 내가 자주 보던 미드의 장면들을 떠오르게 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너무 많이 보았던 그 곳. CSI:NY에서, 블루블러드에, FBI 에서 보던 곳들이 머리속을 스쳐 지나간다. 난 가보지 않은 곳의 여행자가 되어 다리와 지하철과 히잡 쓴 남자를 상상한다. 


홍콩은 우산혁명이 일어나기 전 갔었다. 시어머니의 장례가 끝나고 더 이상 응급실이든 어디든 전화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던 그 때, 홍콩 가는 비행기 표를 사고 숙소를 예약했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트도, 장국영이 뛰어내린 만다린 오리엔탈도 보았다. 슈퍼마켓에서 과일도  사 먹었고, 항구에서 페리도 기다렸다. 그렇게 읽는 내내 추억을 더듬었고 가슴 한 켠이 아려오는 것도 느꼈다.


로마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이번 생에 더 이상 해외여행을 갈 수나 있을까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로마의 피제리아는 어떨까. 여행자에게 낯선, 그래서 들뜨게 하는 이 도시들은 흑백영화처럼 아련하게 지나간다. 이야기는 그렇게 거주민들에게는 가혹하고 여행자들에게는 설레지만 동시에 무섭게 느껴지는 도시들을 노래한다. 그리고 서울, 무너진 다리를 추모한다.


한정현 작가의 '지금부터는 우리의 입장'은 가슴 아프게 읽었다. '코타르 증후군'이라는 병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자신이 죽어 영혼만 남았다고 생각한다는 그 병에 걸린 이모, 박덕자 씨는 자영이란 이름의 영혼이 되어 자신의 지난 날을 증언한다. 평생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그녀는 영혼이 되어서야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강남의 커다란 백화점이 무너지던 때, 그 안에 있던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끝내 다 들어주지 못했기에, 평생을 소외된 사람들의 억울한 이야기를 들었던 걸까. 뻔하디 뻔한 통속극 같은 위장 취업한 대학생 남자와 공장에서 일하는 여자의 사랑 이야기 같은 그런 상황이 사실은 뻔하지 않았다. 성별이 어떻든 한 쪽은 자신의 위선에 죄책감을 느꼈고, 다른 한 쪽은 모르겠다. 나오지 않으니. 하지만 둘은 함께일 때나 떨어져 있을 때나 서로를 생각하며 행복해했다. 진정한 자신을 마주할 수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 


삼풍 백화점과 관련한 에세이는 좀 생소했다. 나나 내 주위 사람들은 삼풍 백화점 붕괴 사건은 당연히 백화점 사장 및 경영진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말하니까. 그 곳에 여자들이 명품에 미쳐서 혹은 돈 쓰러 가서 죽었다며 백화점을 이용한 사람을 욕하지 않으니까. 먼저 빠져나간 사장놈들이 미쳤다며 욕 하니까. 그 처참한 현장에서 도둑질하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하니까. 


서울, 강남의 사건은 대한민국의 사건이 된다는데, 지방에 사는 내겐 삼풍 백화점이 강남에 있는 줄 몰랐다. 어른이 되어서야 삼풍 백화점이 서울에 있었던 것을 알았다. 나 역시 이제 강남을 생각하면 삼풍 백화점을 떠올리게 될까.

당사자만이 아는 슬픔, 이라는 말에 나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역시나 낯설었다.자신이 이 세상에 없는 존재라고 확신하는 병이라니... 그로부터 이모가 요양병원에 들어가기까지 1년여를 나는 자신을 영혼이라고 주장하는 죽은 이모와 함께 살았다. 자칭 영혼, 죽은 이모. 아니, 죽었지만 산 이모. 어느 쪽이 진짜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모는 그제야 자신의 ‘생전 이야기‘를 시작했다. - P105

그런 이모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한편으로는 섭섭하기도 했고 또 어떤 면에서는 애틋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역시 삶은 기억만으로 이뤄지는 건 또 아니다. 비록 이모의 마음에서 이모는 죽었겠지만, 현실에서 이모는 진짜 죽은 것이 아니니까.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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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공주 해적전 소설Q
곽재식 지음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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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지애’란 드라마를 아시려나 모르겠다. 성유리가 백제의 공주로 나오는 그 드라마는 내용보다 “나는 남부여의 공주, 부여주다.”라는 대사로 더 유명하다. 망한 나라의 공주가 힘겹게 살아가다 사랑하는 남자를 잃고 죽음의 문턱에서 천 년 후의 세상으로 넘어온다. 비슷한 이야기로 ‘비천도’도 있다. 그 이야기는 결은 좀 다르지만 중요인물이 현대로 넘어오고, 일본과 관련 있다는 점이 비슷하다.

이 책을 읽는데 문득 부여주가 떠올랐다. 무술을 잘 해서 멋있었는데. 여기 나오는 ‘장희’ 역시 무술을 아예 못하지는 않는다. 말솜씨가 뛰어나고 머리가 잘 돌아가고 눈치도 빠르다. 한 마디로 능글맞지만 아주 매력적인 인물이다. 반면 ‘한수생’은 좀 멍청하지만 우직하고 곧이곧대로인 인물이다. 큰 욕심이 없고 정직하게 일을 해서 태평성대를 만났다면 아무 탈 없이 적당히 행복하게 살았을테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태평성대가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서기 861년이면 신라가 망해가고 있을 즈음이다. 장보고가 큰 뜻을 품고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적들로부터 신라인들을 보호하다가 점점 권력에 빠져들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듯, 신라 자체도 점점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장보고 밑에 있던 장희는 장보고가 죽은 지도 15년이나 지난 뒤에 돈이 떨어져 경제 활동을 시작하면서 한수생을 만난다.

“항해만사”
무슨 문제든 말만 하면 다 풀어준다는데, 막상 맡은 일이라는 게 인간의 어리석음과 탐욕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무슨 개미와 베짱이도 아니고, 열심히 일해서 가을에 수확하여 먹을거리를 마련한 한수생과 학문을 닦고 눈을 높인다며 매일 서라벌 구경을 하는 바람에 먹을거리가 다 떨어진 마을사람들 사이에 다툼(?) 아니 일방적인 폭력이 있었던 거다. 베짱이는 여름 내내 갈고 닦은 노래 실력으로 가수가 되어 떼돈을 벌었다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리 서라벌 구경을 다니면서 돈 벌 기회도 잡지 못해 남의 것을 탐하다니 여기나 거기나 사람 사는 게 비슷하다.

여튼 한수생은 도망을 치고 장희는 그를 돕는 듯 아닌 듯 돕게 되면서 한바탕 모험이 시작된다. 백제가 멸망한 게 외우기도 쉬운 660년이니까 벌써 200년도 전에 사라진 나라다. 그러니 백제부흥운동이니 풍 태자니 하는 것들이 무슨 소용일까. 게다가 백제 왕실의 핏줄이라는 공주가 있다니… 저기 그 쪽도 타임슬립 했을까나? 작은 섬에 공주도 있고 장군도 있고 부마도위도 있구나.

명분이라는 게 참 중요하다. 여기 이렇게 백제 공주까지 상징적으로 모셔두고 정부를 구성했다 한들, 풍 태자가 보물이랍시고 ‘그것들’을 만들든 나라가 만들어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900년에 세워진 후백제가 더 어엿한 나라가 아니던가.

풍자와 해학이 있고 기지가 넘치는 인물이 있고 멋지진 않지만 모험도 있고, 이기적인 사람들과 부정부패와 함께 몰락해가는 나라가 있는 이야기. 하하하 즐거웠다.

장희와 백제 공주 너무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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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22-05-10 07: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기적인 사람들과 부정부패와 함께 몰락해가는 나라가 있는 이야기.
어딜 가나 존재하는 것 같아요,
특히 오늘은.... 이런 생각이 더 드는 날이네요.

꼬마요정 2022-05-10 10:47   좋아요 1 | URL
어쩌면… 국민에 의해 철저히 견제 당하는 정부를 만들어 볼 지도 모르죠, 우리가. 이번 선거를 통해 우리 사회에 있던 혐오들이 드러났잖아요. 보다 살기 좋은 사회로 가기 위해 겪는 시련일거라 믿어봅니다. 지난 5년이 그리울 거에요ㅠㅠ
 
[김이랑 x 알라딘] 투명 북마크 - 딸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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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는 제법 크지만 투명해서 크게 느껴지지 않고 거슬리지도 않는다. 딸기꽃 너무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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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2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 문학사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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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계속되는 건 희망일까, 고문일까. 


결국 모두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 나라를 빼앗긴 건 위정자들의 잘못인데, 대가는 백성들이 치렀고, 전쟁 역시 소수의 인물들이 일으켰으나 그 피해는 국민들이 고스란히 떠앉았다. 사기 쳐서 조선의 여인들을 성노예로 만든 건 일본과 그 하수인들이었는데 아직까지 피해자의 잘못인 양 가해자들은 사과하지 않는다. 선자가 임신한 건 선자의 잘못이 아님에도 선자는 늘 죄책감에 짓눌려 살아가고, 경희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건 경희만의 잘못이 아님에도 경희는 늘 미안해하며 다른 이들을 위해 살아간다. 정체성을 잃은 노아와 모자수와 솔로몬은 와세다 대학을 가도, 돈을 많이 벌어도, 미국에서 유학을 해도 공동체에서 유리된 채 인정받지 못한다. 


선자는 이 책에서 마치 거대한 어머니처럼 자녀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이삭은 하나의 이상향으로 남아 노아와 선자의 삶에 이정표가 되어준다. 마치 이삭의 희생이 그들 모두를 구원한 것처럼 여겨지는 건 기분 탓일까. 그의 무덤에는 그를 그리워하는 친족들이 꼬박꼬박 찾아온다. 


노아는 이삭을 동경했으나 자신이 이삭의 아들이 아닌 야쿠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깊이 절망한다. 일본인이고 싶은 마음을 깊이 숨기더라도 박식하고 다정한 이삭의 아들인 것은 좋았는데, 조선인 중에서도 폭력배의 아들이라니... 자신이 태어난 세계에서 인정받고 싶었던 그는 선자를 원망하며 사라진다. 태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걸까. 일본인인 척 살아가더라도 삶을 이어가는 것은 희망일까, 고문일까. 


자기가 사랑한 선자와 노아에게 사랑받지 못한 한수가 오히려 노아를 이해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오히려 사랑받지 못하기에 상대를 더 잘 이해하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선자는 삶과 사랑을 주었다고 생각했으나, 노아는 자신이 부정당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부모가 스스로는 사랑을 준다고 생각해도 자식에겐 억압과 폭력으로 느껴지는 건 흔히 있는 일일테다. 외골수 같던 노아는 선자와 한수의 도움으로 쌓았던 것들을 통해 남은 생을 살면서 늘 조마조마하고 남의 삶을 사는 느낌이 들어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노아가 도망쳤다면 모자수는 맞서는 쪽을 택했다. 굳이 훌륭하고 착한 조선인일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어찌됐든 인정해주지 않을 거면서. 공부는 하기 싫지만 사교적이고 장사 수완이 있었기에 일본에서 조선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사업에 뛰어들어 성공한다. 파친코. 만약 재일조선인에게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더라면 모자수는 틀림없이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일 뿐이다. 


솔로몬은 미국에서 대학을 나와 일본에 있는 영국계 은행에 들어간다. 하지만 일본인 상사에게 이용당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 당한다. 처음 관청에서 등록증을 받으며 지문을 찍어야 했을 때처럼 말이다. 손톱 밑에 남은 잉크 자국처럼 솔로몬의 마음엔 큰 상처가 새겨졌겠지. 아버지도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신도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결코 일본인이지 못하고, 갈라진 조국에서는 일본인 취급을 받는 그 철저한 이방인 같은 상태는 아주 부당한 것인데. 


한국전쟁 이후 경제가 활발하게 성장하는 일본을 보니 화가 치밀었다. 전범 국가이면서도 전쟁 때문에 그 죄가 묻혀 버리고 오히려 발전해서 아시아에서 대접 받는 나라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너무 화가 났다. 거기다가 어쩔 수 없이 일본에 살게 된 조선인들을 그렇게 더러운 인종, 이방인 취급을 하다니...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잘못이 없는 척, 고고한 척, 예의바른 척 하는 이중적인 모습에 화가 나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는 데 참을 인을 계속 새기면서 읽었다.


선자에게 딸이 없다는 건 아쉬웠다. 마치 모계에서 부계로 이동한 듯한 느낌이랄까. 여자의 삶은 고통이라 작가가 딸을 주지 않은걸까. 책 속에 나오는 여자는 조선 여자든 일본 여자든 고통 속에 살거나 결핍 속에 사는 것 같다. 문득 한수의 딸들은 원하는 것을 얻었을까 궁금해졌다.


이삭이나 노아, 모자수 등에게는 하고 싶은 일이나 어떻게 살고 싶다 하는 소망이 있는데 선자에겐 그런 선택지 자체가 없어 보여서 안타까웠다. 어린 시절이 제일 행복했다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이렇게든 저렇게든 고통이 가득하더라도,

삶이 계속되는 건 희망일까, 고문일까.

경희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P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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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1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 문학사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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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로 시작해야할까 고민했다. 읽는 내내 갑갑하고 화가 났으니까. 모든 것을 다 떠나서 개신교와 가부장제의 결합이 여성에게 얼마나 억압적인지, 나라를 빼앗긴 백성들이 얼마나 비참한지 이 두 가지가 화가 났다. 


188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4대의 이야기를 그린다는 이 소설은 처음부터 막 읽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엄청난 돈을 들여 만든 드라마의 원작이라고 하고, 미국에서 극찬을 받았다고 하고, 윤여정과 이민호가 나온다고 하는 와중에 판권 문제로 일시품절이라고 하는 거다. 책이 늘 있으면 나중에 읽으면 되지만 없으면 못 읽지 않나. 괜히 하나 남았어요, 이러면 사는 것처럼 책을 구할 수 없게 된다고 하자 미친듯이 읽고 싶어졌다. 물론 책이야 다시 나올테다. 어쩌면 표지도 더 예뻐지고, 번역도 더 좋아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니까. 남편의 지인분이 너무 고맙게도 구해서 남편 생일선물로 주셨다. 고맙습니다^^


아직 2권을 읽지 않은 시점에서 일단 1권은 기대보다 평범해서 놀랐다. 이 소설이 왜 그렇게 난리일까. 이건 예전에 <블라인드 사이드>를 봤을 때 느꼈던 기분이었다. 아주 미국적인, 미국 중산층 이상의 백인이 갖춰야 할 덕목을 보여주던 그 영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책은 미국인이 추구하는 인간상을 백인이 아닌 유색인이자 아시아인이자 식민지를 경험한 여성에게 입혀 이야기를 하는 것이 된다. '선자'는 미국이 생각하는 가치를 표현하는 인물인 거다.


그리고 개신교도 빼 놓을 순 없겠다. 이삭과 요셉에서 노아와 모세로 모세에서 솔로몬(1권에는 나오지 않지만)으로 이어지는 이들의 이야기는 성경책의 구절이 떠오른다. 하지만 또 이렇게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시경'(주 무왕의 조상들)에서도 볼 수 있고, '용비어천가'(이성계의 조상들)에서도 볼 수 있고, '고려사'(왕건의 조상들)에서도 볼 수 있다.(앗, 아들에서 아버지로 이어지는 건가..) 


이제껏 미국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 대륙으로 와서 자신과 다른 인종, 자신의 가치와 다른 가치를 지닌 사람들을 무시하고 경멸하고 파괴했다. 하지만 그들은 청교도가 뿌리에 있기에 도덕적인 가치가 그들에게 있기를 바랐다. 그랬기에 겉과 속은 다를지라도 '선'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길 원했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럴 필요가 없다. 주인공이 피해자이니까. 


유색인, 아시아인, 식민지인, 여성, 미혼모, 가난한 이. 이보다 더한 약자가 있을까.


선자는 아버지인 훈이와 어머니인 양진이 사랑으로 키운 딸이다. 아버지의 사랑과 어머니의 훈육은 그녀를 강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식민지 시대의 가난한 평민의 과년한 딸이 세상을 아름답게만 살 수는 없었다. 어시장에서 영도로 돌아오는 길에 일본인 남학생들에게 희롱당하는 것을 '한수'가 구해주면서 선자는 남자를 알게 된다. 평범하게 가정을 꾸려 아내로서 본분을 다하기를 기대했던 선자는 현지처가 되라는 한수의 말을 거절한다. 온전히 사랑받길 원했다. 그와의 아이를 낳고 그렇게 가정을 이루며 살기를 바랐다. 게다가 아버지가 주신 사랑이 있는데, 어머니가 힘들게 일해서 자신을 키웠는데 어떻게 그들을 손가락질 받게 할 수 있을까. 선자는 강한 여성이었다. 그리고 구원처럼 그녀 앞에 이삭이 나타난다.


이삭은 고귀한 이상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고자 선자와 결혼하고, 형인 요셉이 있는 오사카로 함께 떠난다. 요셉은 목회자는 아니지만 가부장적인 사람이다. 남자라면 당연히 집안을 책임져야 하고, 아내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은연중에 양반이 아닌 선자는 일을 해도 상관없고 그녀가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걸 드러낸다. 


돈 문제가 생겼을 때, 선자는 한수가 준 시계를 팔아 빚을 갚는다. 이 때 요셉은 심하게 화를 냈는데, 그 이유가 자신의 '체면'이 깎였기 때문이다. '힘들게 일하는 아내들에게 붙어사는 다른 남자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게 생겼다.'(p.227)고 화가 난 것이다. 이는 어쩌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구시대 인물과 변하는 시대를 살아갈 인물의 충돌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과거의 관습에 머물러 있는 요셉과 경희는 아무리 노력해도 헤쳐나가지 못하지만, 선자와 이삭은 다르다. 그리고 이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아니지만 화가 난다. 


2차 세계대전은 점점 끝으로 치닫고, 일본은 패망하기 직전이다. 전쟁으로 물자가 부족한데다 검열도 심해져 이삭은 일본 경찰에 끌려간다. 그리고 한수가 나타난다.


선자에겐 노아와 모자수 두 아들이 있고, 요셉과 경희가 있다. 아프고 힘든 시대를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제발.


굳이 김창호의 성생활이 필요한 장치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창호가 사랑하는 경희는 성녀다. 그런 그녀를 창녀의 위치로 끌어내리지 않기를. 아니, 그냥 한 인간으로 봐주길.


덧붙이자면 한수라는 인물이 신기하다. 아이까지 가지게 해놓고 아들임을 알면서도 몰아붙이지는 않는다. '거절'을, 선자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게 신기했다. 물론 계속 아이들을 미끼로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조종하는 것 같지만. 먹고 사는 문제는 정말 어렵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 P11

"빌어먹을 양반 나리들이 우리를 팔아버렸으이. 배짱 있는 양반이 한 놈도 없지예."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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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22-05-02 2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스탈의 소설은 아닌 것 같어요. 읽다 갑갑해서 폭팔할 듯 싶어요!! 유투브 보니 남편이 일본인이던데.. 남편이 이 작품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궁금은 해요!

꼬마요정 2022-05-03 14:50   좋아요 0 | URL
그렇네요. 저도 궁금해집니다. 남편이 일본계 미국인이라 더 일본 내 조선인에 대해 알게 됐다고 하더라구요. 일본인은 잘못을 드러내는 걸 수치스러워하기 때문에 자꾸 역사를 묻으려 한다네요. 지금 일본 젊은이들은 2차 세계대전 때 자기들이 미국 편인 줄 알고 있기도 한답니다. 그들이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된다면 좋겠는데요. 사실 어찌보면 작가나 남편이나 다 미국인이니까요. 그래도 한국의 역사를 제대로 알려주면 고맙죠.

갑갑한 거에 비하면 책은 잘 읽힙니다. 재미있어요. 다만 선자가 마음에 참 걸려서요. 윤여정님 연기 얼마나 잘 하셨을지 드라마 보려구요.

scott 2022-05-09 16: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다가 집어 치우기를 수 개월! 했습니다

영상을 보니 그나마 고구마가 조금 해소 되었지만,,,,

작가님 시어머니가 현재 일본에 살고 계신데

이 책은 안 읽으셨다고 ㅎㅎㅎ

이번에 다른 출판사에서 개정판 나올때
번역 대폭 수정 한다고 하네요 ^ㅅ^

꼬마요정 2022-05-10 09:52   좋아요 1 | URL
남의 나라 이야기는 폭력이나 착취가 심해도 제국주의는 나쁘다며 읽으면서, 우리 역사인 일제강점기나 독재 이야기는 참 견디기 힘드네요. 한국사 특히 근대 이후 역사를 전공하시는 분들 대단하신 듯 합니다.

인세가 어마어마 하던데요. 다시 나와도 여전히 이슈가 되고 잘 팔릴지 모르겠습니다만 다시금 역사를 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되네요. 아울러 세계적으로도 이런 일이 있었다 알려진 것도 고맙구요. 번역 수정 되면 또 읽어야 하나요ㅠㅠㅠ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