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 안전가옥 앤솔로지 8
김혜영 외 지음 / 안전가옥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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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 정말 더웠는데 어느새 해 뜨는 시간은 늦어지고 해 지는 시간은 빨라졌다. 하늘은 높고 파랗고 바람이 분다. 시간은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어쩌면 견디기 쉽게 도와주기도 한다. 상처 받은 이가 그렇게 시간에 기대어 견디는 동안, 상처를 준 이는 어떻게 지내는 걸까. 여기 다섯 가지 이야기 중에 상처를 주고 받은 이들의 이야기가 세 개,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상처 받은 세상을 헤쳐나가는 이들의 이야기가 두 개가 있다.


<습습 하>, <엔조이 시티전(傳)>, <김민수(학부재학생)>이 끔찍한 상처를 극복하는 이야기라면, <우리 안에>, <편의점의 운영원칙>은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인해 상처 받은 이들이 함께 사태를 극복하는 이야기이다. 


<습습 하>에서 성범죄의 희생양이 된 그녀는 나와 룸메가 사는 방 옆 방에 산다. 큰 방을 억지로 두 개의 방으로 나눈 탓에 전기요금은 늘 하나의 고지서만 나왔고, 나와 룸메는 고지서를 먼저 챙겨 옆 방의 그녀로부터 5천원을 더 받아 계란을 사 먹었다. 그랬기에 사라진 고지서는 옆 방으로 잠입(?)하기 딱 좋은 이유였다. 엉망진창 쓰레기장인 그녀의 방은 망가진 그녀의 삶과 같았다. 가해자는 자유롭고 피해자인 그녀는 계속 고통 받고 있다. 그런 그녀의 언니가 속을 알 수 없는 상자 하나를 보내온다. 그리고 그 상자는 그 가해자의 식도와 통한다. 자, 그 상자 안에 무엇을 넣고 싶은가. 과연 그녀와 그녀의 언니와 나와 룸메는 어떻게 될까. 그녀는 그 고통으로부터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계란 없는 열불라면은 너무 매워 스읍스읍 소리가 났다. 


<엔조이 시티전(傳)>은 가상현실 RPG 게임 이야기이다. 장화홍련전(傳)이나 아랑전설이 떠오르는 이야기인데, 나도 모르게 숨 죽이며 게임 하듯 읽었다. 엔조이 시티라는 게임을 하며 방송을 하는 나는 게임 속 이름이 '춘향'이며 '남원 마을' 길드장이다. 이제 회사가 나몰라라 던진 이 게임을 좋아하던 터라 마지막까지 이 곳에서 게임을 하며 방송을 하던 나는 이 남원 마을에 귀신이 나타난다는 소문을 듣고 그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려 한다. 게임에 귀신이라니 그게 무슨 말일까 싶어 읽다보니 사뭇 공포 영화 보는 것 못지 않게 흥미진진했다. 억울하게 죽은 장화와 홍련이 사또 아니 춘향이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 게임 속 미션을 던지고 미션을 완수한 후 아이템을 획득해서 다음 미션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일반 게임과 같지만 어쩐지 책 밖에 있는 나에게도 손짓을 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장화와 홍련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리고 그 억울함은 풀 수 있는 것일까.


<김민수(학부재학생)>은 현재 젊은이들의 슬픈 이야기인 동시에 이제 당하지만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이야기이다. 전염병 때문에 화상 수업이 당연하게 된 시국에 비대면 강의를 듣는 사람 중에 김민수(학부재학생)이라는 계정이 아무래도 도강을 하는 것 같다는 소문이 돌았다. 모든 게 미상인 그 계정은 유령인지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채로 그렇게 계속 비대면 강의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계정과 같은 강의를 듣는 제인은 졸업이 코 앞이고, 연인인 현준은 졸업해서 인턴 생활을 하다 재계약에 실패한 상태다. 둘은 제주도로 놀러 가기로 했는데, 제주도 펜션의 부부는 어딘가 이상하다. 현준은 떠도는 소문을 이용해 김민수(학부재학생) 계정을 만들어 제인을 스토킹 하고, 제인을 혼자 내버려두고, 온갖 나쁜 말로 제인을 괴롭힌다. 상대를 칼로 찌르는 건 자신을 찌르는 것과 같다는 걸 언제쯤 알게 될까. 그런 걸 안다면 그런 짓을 하지 않겠지. 제인은 이제 가만히 폭력에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불태웠고 실천에 옮겼다. 그래서 김민수(학부재학생)의 존재는 누가 우선이었던 걸까.


<우리 안에>는 손톱 먹고 사람이 된 쥐 이야기가 떠오르는 이야기였다. 김 순경과 아내는 곧 부모가 될 것이었다. 그런데 바깥에는 점점 인간의 지능을 닮아가는 거대한 쥐 떼가 있다. 처음에는 작은 동물부터 나중에는 성인 남자에 이르기까지 공격을 한다. 마치 싸이코패스나 연쇄살인마들이 단계를 밟아가듯이 말이다. 재난은 예고 없이 온다고 재난에 대비해 보지만 막상 닥친 위험 앞에서 김 순경은 '골든 아워'를 놓치고 약하다 생각했던 아내는 오히려 든든한 김 순경의 조력자이자 배우자였다. 마치 좀비 떼와 싸우는 영화를 보듯, 연쇄살인마로부터 도망치는 영화를 보듯 눈에 힘을 주고 읽었다. 부디 둘 다 아니 셋 다 무사하길. 험난한 세상에 아기를 빼앗기지 않기를, 되찾을 수 있기를. 살아남을 수 있기를 모두가.


<편의점의 운영 원칙>은 마치 나폴리탄 괴담을 보는 듯 했다. 규칙들을 나열하고 어딘가 모순되는 규칙을 하나 넣어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그 모순이 편의점 알바생인 변정희를 구하고, 편의점 점장의 딸을 구할 희망을 주게 된다. 세상은 마물 따위의 저승에 속한 것들이 나타나고 있었고 그들의 먹잇감이 되지 않으려면 정신을 차리고 그들을 해치우던지 피하던지 해야하는 무슨 영화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 특히나 이 편의점은 심령 스폿이라고 그런 마물들이 자주 출현하는 곳이라 야간 알바하는 것이 무척이나 힘든 곳이다. 아니, 그런데 그렇게 위험한데 밤에 꼭 문을 열어야 하는 것일까. 편의점 본사에 항의라도 해서 밤에는 영업을 안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싶은데 말이다. 한국인은 부지런하다 뭐 이런 괴담은 아닐까... 좀비물이 한창일 때 한국인은 좀비 출현을 대비해서 일찍 출근하고, 붙잡는 좀비를 퇴치하면서 출근하고는 동료 직원과 오늘 만난 좀비에 대해 뒷담화 한다는 우스개소리가 뭔가 현실성 있게 다가온다고나 할까. 


어차피 마물이든 귀신이든 모두 인간에게서 비롯한 것이니 결국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건 불변의 진리인 것일까.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또 사람이 사람을 살리니 세상 일이 참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제 더 이상은 울고만 있지 않고 맞서 싸워야 할 것 같다. 그래야 덜 아프고 더 나은 세상을 살아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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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2-09-15 22: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칼을 찌르는 사람도 상처받는건 가해자들이 외면하는 가장 큰 진실같아요. 열불라면ㅋㅋ^^*

꼬마요정 2022-09-16 14:04   좋아요 2 | URL
그쵸... 그 사실을 살아서 뼈저리게 느껴야 하는데 안 그런 경우가 많아서 안타깝습니다. 그들에게 양심이란 게 있어서 평생 죄책감을 짊어지고 살아야 할텐데요. 열불라면 맵겠죠? ㅎㅎㅎ

기억의집 2022-09-16 09: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튭에 클린어벤저스인가 하는 청소업체가 청소했던 사연 중에 성폭행 피해자분들이 폭행이 후 자신의 세계에 갇혀 살면서 집에 쓰레기가 쌓이고 쌓이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웠는데… 그분들 가만히 이야기 들어보면 가해자들의 법적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어서 인 것 같더라고요. 지금은 그나마 법원에서 가해자들에게 엄격하게 처벌하긴 하지만.. 불과 오육년전만해도 솜방망이 처벌이었거든요. 안타까워요. 피해자분들이 다시 일어나길..

꼬마요정 2022-09-16 14:07   좋아요 2 | URL
정말 가해자들 제대로 처벌 받아야죠.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짓밟았으니까요. 부디 피해자분들 다시 일어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그런 잔인한 범죄를 저지르는지... 이건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겠죠. 남성의 성에게 너무 관대하고 여성을 대상화 하면서 피해자에게만 손가락질 하고 말이죠.ㅠㅠ

scott 2022-10-07 14: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정님 이달상 추카 합니다

진짜 무서운 건 사람!

요정님은 안무서우신 분 ^^

꼬마요정 2022-10-08 19:26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진짜 무서운 건 사람이지만, 스콧님은 안 무서우신 분!!
저도 안 무서운 사람이에용^^

이하라 2022-10-07 14: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정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꼬마요정 2022-10-08 19:26   좋아요 1 | URL
이하라님 늘 고맙습니다^^

thkang1001 2022-10-09 10: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꼬마요정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연휴 보내세요!

꼬마요정 2022-10-08 19:27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새파랑 2022-10-07 16: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꼬마요정님 당선 축하합니다~!!!

꼬마요정 2022-10-08 19:35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즐거운 저녁 시간 보내세요^^

mini74 2022-10-07 2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꼬마요정님 감축드립니다 *^^*

꼬마요정 2022-10-08 19:36   좋아요 1 | URL
미니님 고맙습니다. 뭔가 맞절해야 할 것 같아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2-10-07 22: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꼬마요정 2022-10-08 19:36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서니데이님도 즐겁고 행복한 연휴 보내세요^^
 
악마의 계약서는 만기 되지 않는다
리러하 지음 / 팩토리나인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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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이란 무엇일까.


주인공인 서주는 어떤 사연인지는 몰라도 어린 시절 강복주 할머니의 단독주택에서 세입자들과 함께 살았다. 할머니가 업둥이처럼 거둬줘서 이 곳에서 숙식을 해결하지만 할머니와 피 한 방울 섞이지도 않았고, 계약서 상 임대인과 임차인의 관계도 아니다. 그저 함께 한 세월만이 그들의 관계를 증명할 뿐이다, 법이란 잣대를 들이대면 부질없을. 그렇게 십여 년을 살았고, 할머니의 주택은 낡았고, 세입자는 이제 겨우 두 명만 남았다. 3층까지 있는 듯한 이 집은 할머니의 삶 만큼이나, 서주의 아픔 만큼이나, 지나 온 세월의 무게 만큼이나 낡고 낡았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끝나야 하기에 정리를 위해 또 하나의 인연을 만나게 된 것이 말이다. 어느 날 우연히 굴러가는 대추 열매를 따라가서 아귀와 지옥의 악마 혹은 마귀를 만난 할머니는 대뜸 지옥에 세를 주게 된다. 그래서 이 집에 사는 할머니와 서주에게 빈 방마다 지옥의 불꽃이 넘실대고 죄수들의 비명 소리가 열린 문틈으로 새어 나오고 살았을 적 장난 친 음식들을 양푼이에 담아 먹어야 하는 죄수가 부엌에서 밥을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린다.


우리는 늘 삶이 잔잔하기를 바라지만 때론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에 삶을 싣기를 바라기도 한다. 하지만 서주와 강복주 할머니는 늘 거센 파도 위에서 살아왔기에 그 지옥이라는 것이 새삼 새로울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늘 그랬으니까. 이 삶이 지옥이라고, 오히려 지옥에 돈까지 주고 있다고. 아들이 둘인 할머니는 똑똑했던 큰아들을 잃었고, 덜 똑똑한 아들을 내쫓았다. 홀로 자식들을 키우고 엇나간 자식들을 잃으면서 할머니는 얼마나 지치고 힘들었을까. 그래서 집에 들어 온 서주를 내치지 못했을 것이다. 저 어린 것이 이 세상 풍파 앞에 어떻게 살아남을까 싶어서. 그래서 서주에게 욕을 퍼부으면서도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의지처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할머니 역시 서주 때문에 이 지옥 같은 세상을 버리지 못하고 서주를 의지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그렇게 할머니와 서주는 아무 관계도 아니지만 누구보다 끈끈하게 이어진 관계였다. 그리고 그 연대를 가족이라 부르지 못하면 도대체 무엇을 가족이라 불러야 할까.


서주의 아르바이트 하는 식당부터 할머니의 둘째 아들 정효섭과 중간에 야릇한 인연으로 엮인 악마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는 마치 톨스토이가 말하는 '불행한 가정'의 이야기 같다. 안나 까레니나는 파국으로 치달았지만 키티는 행복을 거머쥐었다. 서주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아니다, 불행 속에서도 행복은 살아있고, 행복 속에서도 불행은 숨쉬고 있으니 그것이 삶일테지.


악마가 불행을 즐거워하고 결핍에서 달콤함을 찾는다면, 그 존재가 할머니나 서주를 선택한 건 당연한 일이다. 이 주택에는 저 먼 나라의 오래된 저택이 갖고 있을만한 비탄이 서려있으니까. 타인이 베푸는 친절을 그대로 받아들일만큼 따뜻함을 느껴보지 못한 서주와 사랑을 주는 법을 잘 몰랐던 할머니와 어리석고 겁 많은 아들들과 돈에 미쳐 돌아가는 이 세상이 함께 만든 상처와 슬픔이 이 주택에 잘 버무려져 있으니까. 사실 지옥은 달리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온갖 슬프고 더럽고 악한 생각들이 지옥인 것은 아닐까. 굳이 지옥에 세를 주지 않더라도 내 마음 속 지옥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누군가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누군가의 불행에 슬그머니 미소 짓는 그런 추악한 일들이 일어난다. 마음 속 생각을 경계하고 내뱉는 말을 조심해야 하는데 그런 감정들을 어쩌지 못하는 게 사람이라, 누군가 이 세상이라는 감옥을 탈출한 건 부처와 노자 뿐이라 했던 말이 새삼 떠오른다.


책을 읽다보면 여기 나오는 '악마'는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진다. 저승사자가 따로 나오기 때문에 지옥의 죄수들을 고문하고 관리하는 이 '악마'는 도대체 뭘까. 할머니는 마귀 새끼라고 하고 서주는 악마라고 하는데, 뭔가 동양이 생각하는 지옥의 간수보다 서양이 생각하는 악마에 더 가까운 듯 한데 뭔가 또 묘하게 정이 많은 게 동양적인 느낌이다. <파우스트>에 나오는 메피스토펠레스 같다가도 만화 <흑집사>에 나오는 세바스찬 같기도 하다. 아니면 <신과 함께>에 나오는 저승사자들이나 <내일>에 나오는 저승사자가 더 가까울까. 사실은 '유혹'에 제일 가깝지 않을까 싶다. 빠져들면 안 되는데 빠져들고 싶은 그런 유혹. 절제를 모르는 탐닉이야말로 이 책이 말하는 악마에 제일 들어맞을 듯하다. 그래서 서주의 선택은, 심지어 만기가 없을 것 같은 그 계약은 사뭇 무섭기까지 하다. 


어떻게 보면 아름답고 영원한 사랑 같지만, 어떻게 보면 이제 헤어나올 수 없는 마약 같은 것에 중독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언제나 자신의 삶을 책임져야 했던 서주니까 이해할 수 있다. 어릴 때부터 어른에게 의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던 서주가 기댈 데가 생겼으니 축하해줘야 할까. 부디 그 악마가 인간적인 면을 잃지 않았기를, 다정함을 독으로 사용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어차피 악마든 사람이든 누구나 부족한 면이 있고 완전하지 않으니까. 그 부족함을 사랑으로 채울 수 있기를, 그리하여 꼭 죽어서 천국에 가기보다 살아서도 천국을 느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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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프픽션
조예은 외 지음 / 고블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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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프픽션'은 1940~1950년대 미국에서 크게 히트했던 하드보일드 범죄소설의 값싼 문고판을 부르는 용어였다고 한다. 이 소설들은 주로 대도시 뒷골목 범죄세계를 무대로 하여 왜곡된 인간관계를 고발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또한 쿠엔티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펄프 픽션>은 1970, 80년대 미국 대도시의 ‘그라인드 하우스’라 불리던 극장에서 2, 3편씩 동시에 상영하던 야하고 폭력적인 싸구려 영화들을 의도적으로 모방하고 재현한 영화다.(출처 : <영화사를 바꾼 명장면으로 영화 읽기>, 신강호, 커뮤니케이션북스) 


그렇다면 이 다섯 가지 이야기들이 주제부터 이야기 서술 방식까지 자유로우면서도 실험적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래서 조예은 작가가 '펄프픽션'이라는 말을 듣고 패스트푸드를 떠올렸다든지, 류연웅 작가가 피를 뽑아 투자하는 시대를 상상한다든지, 홍지운 작가가 자신에게 가장 두려운 일이 무엇일까 생각한다든지, 이경희 작가가 이서영 작가의 <노병들>을 떠올리며 싸움의 허무함을 느낀다든지, 최영희 작가가 '고시랑고시랑' 말을 걸어 줄 로봇을 꿈꾼다든지 하는 일들이 참신하다고 느끼면서도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소위 '속되다(저속, 키치)'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첫 번째 이야기인 '햄버거를 먹지 마세요'는 사실 누구나 짐작 가능한 이야기이다. 불행한 가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입시 기숙학원을 선택한 루루와 제이는 그 기숙학원이 숨기고 있는 비밀을 알게 된다. 우리가 쉽게 볼 수 있고 먹을 수 있는 그 '햄버거'가 이유라니. <스위니토드>도 그렇고 만두집 괴담 같은 것도 그렇고 그 '재료'를 쓰는 건 장사가 잘 되게 하기 위해서다. 이 명문 기숙학원이 그 '재료'를 쓰는 건 명문대 합격생을 배출하기 위해서다. 결국 진짜 목적은 모두 '돈'이지만. 단순하지만 그들이 비밀을 알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나 그 곳을 탈출하는 방식은 웃기기까지 하다. 명문대에 갈 수 있다면 알 수 없는 재료로 만든 햄버거를 매일 먹으면서 옳고 그름을 생각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광기나 명문대 합격생을 계속 늘려 평판을 유지해서 돈을 많이 벌려는 원장의 광기나 자신의 투자 실패를 제이의 탓으로 돌리는 김사장의 광기는 폭발하는 믹서 기계만큼이나 우스꽝스럽다. 이건 마치 개구리가 알을 많이 낳기 때문에 개구리를 먹으면 정력에 좋다라고 말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두 번째 이야기 '떡볶이 세계화 본부' 역시 웃기다. 맵지리인 나는 1단계를 넘어가는 매운맛은 혀에 불이 나서 못 먹는데, 영국의 뱀파이어인 스네이크 씨는 어떠할까. 사망분식의 떡볶이는 진짜 혀에 불이 날 정도로 매웠고, 스네이크 씨는 불을 뿜는 뱀fire가 되었고, 매혈이 불법인 영국에서 한국으로 건너 와 뱀fire의 무지막지한 힘으로 건설 노동자가 되었고, 그의 능력은 한국의 건설 노동자들이 피를 뽑아 줄 만큼 매력적인 것이었다. 스네이크 씨는 피를 대가로 환대받는 노예가 되지만, 마이너한 존재였던 그가 환영받는다는 그 자체에 감격하며 만족해하는 모습이 좀 짠하기도 했다. 제일 짠한 건 그의 혀와 위였지만. 그의 능력을 알게 된 영국과 영국 내 뱀파이어들과 사망분식의 레시피를 원하는 사람들과 한국의 상황은 참 골치 아프다.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은 불과 아버지와 예수님의 재림(?)으로 해결이 되는걸까. 스네이크씨 우리집 좀 리모델링을 해주면 내 피 좀 뽑아줄텐데...

세 번째 이야기는 '정직한 살인자'이다. 내가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제일 부러웠다고나 할까.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를 아는 외계인이라니. 시체를 던졌더니 외계인이 금시체, 은시체를 보여주며 니가 던진 게 무어냐고 하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마장동 도끼 김형관이 그래도 조폭이고 덩치가 좀 있다고 한다면 키는 170cm는 넘고 대충 80키로 정도라고 한다면 말이다. 금시체의 시세는 얼마일까. 지금 시세로 60 ~ 70억 정도 되지 않나. 우와 부럽다. 그렇다. 이 이야기는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나라는 독자가 얼마나 속되고 속된지 보여주는 이야기인 것이다. 아내가 없어지는 게 제일 슬플 것 같다는 작가님께 미안하다.

네 번째 이야기는 '서울 지하철도 수호자들' 이다. 풍수지리와 주역에 통달한 듯한 민원인 명현과 출근하자마자 아니 어젯밤 잠들자마자 퇴근하고 싶어하는 신입 한나의 기묘한 동행은 처음에는 어이없다가 점점 진지해지는 모양이다. 철도로 '땅밟기'를 해서 한양에 모여있는 여섯 용의 기운을 누른다는 등의 이야기는 재미있고, 경의선과 중앙선을 연결하여 이상한 마계 같은 것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웃기면서도 슬펐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잊혀져 가는 풍속들이 안타까웠다. 개발 논리에 계속 땅을 조각내고 첨탑들을 세우면 천재지변에 취약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빌딩풍에 걷기도 힘든 경우가 많고, 배수가 되지 않아 침수가 일어나는 건 특이한 일이 아니게 됐다. 한 때는 같은 뜻으로 싸우던 이들이 분노와 좌절 때문에 다른 길을 가는 것 역시 특이한 일이 아닌 것처럼. 인간과 자연의 조화가 최우선이 아닌 돈이 최우선이 된 세상에서 인간성을 지키고 자연을 지키는 길은 무엇일까.

다섯 번째 이야기는 '시민 R'이다. 청소로봇으로 개발된 알옛은 <스타워즈>의 R2D2를 모델로 했으며 무성적이고 무조건적으로 귀엽다. 알옛은 개발자이자 재벌가 출신인 강희원의 로봇인데, 그의 서재 청소도 한다. 즉, 책정리를 한다는 말이다. 있는 책을 다 읽고 분류도 하며 버릴 책 보관할 책을 구분해서 정리한다. 여기서 나는 비명을 질렀다. "나도 갖고 싶어!!!!!" 그렇다. 이 이야기 역시 나의 속되고 속된 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래서 펄프픽션인가. 알옛이 로봇이었다가 어떻게 '시민 R'로 성장하는지, 타자가 처한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정의로운 존재인 시민이 되기까지 알옛이 얼마나 많은 생각을 거듭했는지보다 나 편하게 청소해주는 로봇, 나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존재를 벌하는 로봇으로의 알옛에게 더 관심을 가졌으니 말이다. 

이 책을 읽는 건 낄낄거리면서 웃다가도 잠시 슬퍼하다가 다시 애절하다가도 계속 비루해지는 내 마음을 확인하는 여정이었다. 금시체에 제일 혹했던 나 역시 돈이 최고였던 걸까, 잠시 반성해본다. 모두의 능력이 돈으로 환산되는 건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이다. 선의는 선의 그대로, 옳은 일은 옳은 일 그대로, 사랑은 사랑 그대로, 정의는 정의 그대로 그렇게 주고 받는 사회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이 설사 꿈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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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28 2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29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ni74 2022-09-08 09: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꼬마요정님 당선 축하드려요. 추석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

꼬마요정 2022-09-09 21:12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추석 연휴 행복하고 즐겁게 보내세요^^

thkang1001 2022-09-08 09: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꼬마요정님!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하고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꼬마요정 2022-09-09 21:12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추석 명절 행복하고 풍성하게 보내세요^^

이하라 2022-09-08 13: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꼬마요정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려요.
즐겁고 행복한 추석연휴 되세요.^^

꼬마요정 2022-09-09 21:13   좋아요 2 | URL
고맙습니다. 추석 연휴 행복하고 즐겁게 보내세요^^

새파랑 2022-09-08 16: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꼬마요정님 당선 축하합니다. 기쁜 추석 즐거운 추석 스트레스 없는 추석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꼬마요정 2022-09-09 21:13   좋아요 2 | URL
고맙습니다. 새파랑님도 즐거운 추석 스트레스 없는 추석 보내시길 바랍니다^^

서니데이 2022-09-08 18: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추석연휴 보내세요.^^

꼬마요정 2022-09-09 21:14   좋아요 2 | URL
고맙습니다.
추석 연휴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2-09-10 12: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꼬마요정님, 오늘은 추석 입니다.
즐거운 한가위 되세요.^^

꼬마요정 2022-09-10 20:06   좋아요 2 | URL
즐거운 추석 보내시길 바랍니다^^

thkang1001 2022-09-10 15: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꼬마요정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꼬마요정 2022-09-10 20:06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추석 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전복과 반전의 순간 Vol.2 - 강헌이 주목한 음악사의 역사적 장면들 전복과 반전의 순간 2
강헌 지음 / 돌베개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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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리를 하다가 이 책을 읽고 어떤 말도 남기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우리의 삶이 그러했듯 음악 역시 오랜 시간을 살면서 많은 부침을 겪었다. 다양한 장르들이 나타났고 가지각색의 사람들을 대변하는 음악들이 태어났다.

2권에서는 19세기를 지나 20세기를 다룬다. 격랑의 시대답게 하고 많은 일들이 있지만 저자는 처음에 ‘민족음악’을 내세운다. 민족국가가 생겨났으니 민족음악이란 것도 자연스럽게 나왔다. ‘러시아 5인조’와 ‘조선음악가동맹’ 같은 음악가들의 단체(?)들이 그 민족음악의 험한 길을 걸었다. 기억나는 사람은 저자가 천재라고 극찬한 김순남. 기억나는 이야기는 해방 후 우파의 <독립행진곡>이 일본 관동군의 군가 <만주행진곡>의 표절에 가까운 노래라는 것이다. 이 노래는 전형적인 일본 군가의 임계인 요나누키 장조 5음계로 쓰였다(p.80)고 한다.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음악사는 여전히 폭력에 저항하거나 체제에 순응하거나를 반복한다.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이 음악 역시 사람이 하는 것이라 누군가를 위로하기도 하고 돈에 굴복하기도 한다. 스윙마저 백인에게 빼앗긴 아프리칸 아메리칸은 즉흥연주를 통해 그들의 정신을 되살렸다. 비밥이라는 이름으로. 80년대 시장경제 체제는 문제점도 많았으나 다양한 음악이 발전하여 예술의 스펙트럼을 넓혔다. 우리도 아는 조용필, 마이클 잭슨, 들국화 등이 위대한 음악성을 보여줬다.

마지막으로 지배계급의 문화였던 오페라를 대중적 예술로 전환시킨 뮤지컬에 대해 이야기한다. 미국의 브로드웨이와 영국의 웨스트엔드. 우리나라의 경우 이제는 모든 수준이 세계적이라고 하는데 딱 하나가 비어있다고 한다. 크리에이터. 뮤지컬 제작의 핵심이라는 크리에이터는 곡을 쓰고, 드라마를 만들고, 가사를 쓰는데 한국 뮤지컬계는 뮤지컬에서 가장 핵심적인 유닛인 그 퍼즐이 비어있다고(p.344) 한다. 이 책이 17년에 나왔으니 지금은 어떨까. 창작 뮤지컬이 계속 무대에 올라오고 있는데 세계에 통할만한 크리에이터의 새싹이라도 보일까. 사뭇 궁금하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25] 히포크라테스가 남겼다고 알려진 명언으로, 실은 그리스어가 라틴어로, 그것이 다시 영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그 의미가 약간의 왜곡을 거쳐 지금껏 전해지는 것이다. 여기서 히포크라테스가 쓴 원어‘Ars’는 예술 또는 기술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로마 시대의 사상가 세네카가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라는 저술에서 히포크라테스의 명언을 "인생은짧고 예술은 길다"로 인용하면서 이 경구의 오랜 오해 誤解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라틴어: Ars longa,
vita brevis, occasio praeceps, experimen-tum periculosum, judicium difficile. 영어:The art is long, life is short, opportunityis fleeting, experiment is uncertain, judg-ment is difficult. 한국어: 기술은 길고, 생명은 짧고, 기회는 빨리 지나가고, 실험은 불완전하고, 판단은 어렵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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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립백 브라질 산타 루시아 - 12g, 5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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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예쁜 달이 뜬 밤 숲 속 동물들이 잔치를 벌이는 듯한 느낌의 봉지가 따뜻하다. 포장봉지 색이랑 같은 색깔의 커피는 찰랑거리면서 고소한 곡물이 입 안에서 춤추고 쌉싸름하지만 달달한 맛이 혀 끝을 맴돈다. 신 맛은 없고 부드러우면서 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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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24 10: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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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24 16: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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