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panda78 > [퍼온글] 라파엘로 Sanzio Raffaello (2)




르네상스 정점에 선 거장(巨匠)
라파엘로
Sanzio Raffaello(1483~1520)

 


三美神

  작품 <騎士의 꿈>과 한 쌍으로 취급되고 있는 이 그림은 고대 조각 이래, 일반적으로 삼미신으로 불리어지고 있으며, 그 소재는 그리이스 신화에서 발취한 것이다. 세 여인은 각기 손에 사과를 갖고 있으며, 정숙, 청순, 사랑을 상징하고 있다. 인체의 표현은 유연한 곡선과 부드러운 육체감을 미묘한 색조로 나타내고 있으나, 조형적인 구체성이 부족한 면이 있다. 그러나 젊음의 생동감은 탄력있는 육체의 표출로 시사되어 있고, 우아한 분위기는 여인들의 조용한 자세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대자연이 전개되고 있는 공간에서 세 여인의 형상은 꿈이나 환상을 연상케 한다. 주제나 그리스 신화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내용이 전설적인바, 작가는 이 성격을 존중하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다.


마리아의 결혼

  라파엘로의 초기를 장식하고, 페루지아 시대의 최후의 걸작이라고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이 그림은 카스텔로 시의 성 프란체시코 성당을 위하여 당시의 명문 알바치니가의 의뢰로 제작된 것이다. 그림의 구상에 있어서나 그 구도에서도 라파엘로의 스승 페루지노가 그린 <성 베드로에 게 천국의 열쇠를 주는 그리스도>와 직결되어 있다. 이그림의 특징은 전면과 후면과의 관계를 공간 구성으로 통일시키고 있고, 공간의 원근과 넓이를 통합하고 있는 점이다. 그것은 배후에 있는 사원 건축물의 구조에 따라 그 기본선이 광장을 규제하고, 또 전면의 인물 배치도 이에 따라 이루어 지고 있다. 르네상스 미술의 공간성에 대한 엄격한 탐구가 엿보이는 그림이다.


수염이 없는 聖요셉과 성가

  수염이 없는 성 요셉의 상은 드물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도상학(圖像學)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이례적인 것이다. 성가족은 라파엘로의 특기인 묘사력으로 뚜렷하게 개성이 선적(線的)으로 표출 되어지고 있다. 그 묘사적인 선은 항상 유연하고 부드러워 온화한 인물상을 낳게 하고 있다. 여기에 라파엘로의 특기의 감정 어린 표현은 평화롭고 다정한 3인의 성가족을 보게 한다. 성모와 아기의 눈길과 자세는 가장인 성 요셉에 향하고 있으며, 성요셉은 깊은 정감으로 아기에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구도상의 중심은 아기로 되어 삼각형을 형성하고 있으나, 정신적인 중심은 가장이 중심이 되고 있다. 3인이 화면을 크게 지배하고, 배경은 실내 벽면이 대부분이 지배하고, 배경은 실내 벽면이 대부분이 되어, 가정적인 분위기를 강조시키고 있다.그러나 배경의 한 부분은 실내의 문을 통하여 원경의 자연을 보이게 하여, 르네상스의 원근법을 시사해 준다.


바티칸궁 서명실 천정도

마달레나 도니의 초상

 


책을 읽고 있는 聖母子

  라파엘로는 수많은 성모자상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그 많은 작품 하나하나가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 그림은 라파엘로의 초기 성모자상 시리즈에 해당되는 것이다. 경건한 자세의 성모의 모습이 특징이며, 이와 대조적으로 아기예수는 천진스럽고 장난기가 있는 상으로 그려졌다. 특히 성모는 모정과 종교적 경건함이 얽힌 표정을 보이고 있다. 이 그림의 배경은 평온한 자연 경관으로 전개되고 있으나, 이것은 상징적인 세속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평온하고 성스러운 분위기는 온화한 색채와 부드러운 색조로 더욱 강조되고 있다. 1871년에 이 작품은 러시아 황제에게 양도되어 오늘날 레닌그라드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젊은 부인의 초상(라 포르나리나)

시대적인 인물을 나상으로 보이는 초상화는 드문 예가 된다. 상반신이 나상으로 나타나 있는 이 젊은 부인은 라파엘로의 애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만년에 이르러 라파엘로는 세속적인 화풍의 표현이 강해지고 있음을 이 초상화에서도 보여 주고 있다. 여인의 머리 위에 있는 두건은 그 질감의 사실성인 성격에서 촉각적인 상태를 나타내고, 또한 복부를 가리는 의상은 육감적인 여체를 느끼게 할 정도의 질감의 사실성을 보여 준다. 여인의 표정에 있어서도 지난날의 고귀성과 우아함은 사라지고 감각적이거나 육감적인 표현이 나타나고 있다. 젊음의 생기는 탄력 있는 피부로 감지케하여 주고 있으며, 또한 인물의 외양적 모습은 어두운 배경에서 부상시키고 있다. 인품이나 정신적 고귀성을 반연하는 초상화는 이제 외면적이고 세속적인 모습의 초상화로 변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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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퍼온글] 라파엘로 Sanzio Raffaello (1)




르네상스 정점에 선 거장(巨匠)
라파엘로
Sanzio Raffaello(1483~1520)

 


솔로몬의 심판


갈라테아의 勝利

  라파엘로 작품 중에서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삼은 것은 드물다. 라파엘로의 후견인이었던 당시의 은행가 아고스티노 기지의 별장 파르네지나의 벽면을 장식하기 위하여 작품이 제작되었다. 바다의 여신 갈라테아는 두 마리의 돌고래에 이끌려 개선하고 있으며, 그 주변에는 반인반어의 바다의 신 트리톤과 바다의 요정들이 환희에 찬 모습으로 갈라테아를 반기고 있다. 이 그림의 내용은 생의 즐거움과 찬미를 나타내는 비유적인 것이다. 한편 라파엘로는 이와 같은 신화의 소재를 통하여 당대의 고전에 대한 가치관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자못 그림은 동적이고 또한 극적인 성격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의 종교화의 정적인 숭고함에 비교를 할 수 있다. 이 그림의 형상은 형체 구조의 정확한 묘사로 입체감을 주는 조각적인 성격을 보이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카니지아의 聖家族

  이 그림은 원래 피렌체 시의 카니지아니 가(家)의 소장 작품이었던바, 이 작품을 그 가문의 이름에 따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후세에 이르러 1801년 프랑스군의 약탈을 피하기 위해 뮌헨으로 옮겨졌었다고 한다. 라파엘로가 제작한 많은 성가족 작품은 구도가 간결하고, 분위기 또한 정적이며 명상적인데 비하여, 이 작품은 그 예외가 되고 있다. 우선 삼각형 구도를 형성하는 인물의 수가 많고, 자세나 표정이 동적이고 다양하다. 감미롭고 우아한 표정 대신 감정적이고, 설명적인 표현과 자세를 볼 수 있다. 따라서 성가족의 분위기는 속된 기미를 풍기고 있다. 이 성가족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 또한 설명적인 경관(景觀)이며, 변화되고 있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어 영구한 정적인 종교적 정취(情趣)를 멀리 하고 있다. 이 정적인 변화는 배경에 감동적인 색채를 또한 보게 한다.


그리스도의 변용(變容)


추기경의 초상

  로마 체류 시기의 작품인 이 초상화는 인물의 개성적인 표현이 강력히 표출돼 있고, 귀족적인 성품이 뚜렷이 부상된 인물화로 알려져 있다. 날카로운 골상과 안면의 선, 그리고 깊은 선이 인물의 강한 성품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으로 지극히 소박한 색채를 사용하고 있는 반면에, 인물의 표정은 그 심리적인 면까지 표출시키고 있어, 라파엘로의 초상화에 대한 깊은 탐구가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한 때는 이 그림의 주인공이 줄리우스 데 메디치로 알려져 있었으나 입증된 바 없고, 오늘날에는 볼로냐 시의 대주교 알세리 추기경이라고 있다. 인물의 정적인 면과 심리적 묘사가 개입된 이 초상화는 라파엘로 미술의 성숙을 보여 주는 대표적 작품이 되고 있다.


폴리뇨의 聖母

  <아테네 학원>, 바티칸 궁의 대벽화 등을 완성한 후 라파엘로는 이 작품을 제작하였다.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비서였던 명문가의 시지스몬도 데 콘티가 성모에게 바치기 위해 이 작품이 있게 됐고, 로마의 아라카엘리 성당 제단화로 이용되었다. 대작과 여러 작품을 제작한 경력을 쌓은 라파엘로는 이 그림에서 새로운 색채를 나타낸다. 그것은 색채의 다채로움과 그 명도의 강조이다. 사람들은 이 점을 두고 작가가 베네치아 화풍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온화하고 감미로운 라파엘로의 채색 세계는 사실 여기서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그의 특유의 삼각형 구도는 상부의 성모를 기점으로 하부 좌우로 연결되어 형성되고 있다. 기증자인 콘티는 우측에 무릎을 꿇고 있고, 좌측에는 성 프란체스코가 같은 자세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


발다사르 카스틸료네의 초상

  라파엘로가 제작한 초상화 중에서 걸작의 하나이다. 로마 체류시의 초상화로서, 강한 개성의 표출이 인물의 성품을 나타내고 있는 점이 특징으로 되고 있다. 이 작품의 인물은 라파엘로의 친구이며 당시의 저명한 문예가이며 또한 정치가였다. 밀라노와 우르비노 궁전에서 봉사하였으며, 정신론의 자로서도 유명하다. 라파엘로는 이 그림에서 현명한 자기의 친구의 모습을 예지에 차 있는 표정으로 보여 주고, 활달한 정신력의 소유자임을 눈의 총기로 시사해 주고 있다. 확고한 인물의 자세는 안정감을 나타내 주고 있고, 차분한 색채는 인물의 성품을 대변하고 있다. 17세기의 네덜란드의 대가 렘브란트는 이 작품을 보고 감동되어 모사를 한 바 있으며, 그의 자화상 및 초상화의 영향을 보이기도 했으며, 또한 플랑드르의 대가 루벤스도 이 작품을 모사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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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잉크냄새 > 지상에서 영원으로

얼마전 호빌밭님의 슈렉2 관련 페이퍼에서 <지상에서 영원으로> 를 패러디한 부분이 있다고 읽었을때 머릿속에 스친 장면은 두 장면이었다. 이 중 패러디된 부분은 해변의 키스씬이라고 한다.

1. 해변의 키스씬

 - 버트 랭카스터와 데보라 커의 해변 키스씬이다. 어렸을적 토요명화와 명화극장의 타이틀 부분에 키스후 뛰어가는 데보라 커를 버트 랭카스터가 한박자 쉬고 쫓아가는 장면으로 이 장면이 <지상에서 영원으로>인 것은 아마도 한참 지나서 알게된 것 같다.


2. 진혹곡을 나팔로 연주하던 부분

- 프랭크 시나트라가 어네스트 보그나인에게 죽임을 당한후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어네스트를 살해하고 연병장에서 나팔로 진혼곡을 부는 장면인데 꽤 오랫동안 상당히 감동적인 장면으로 남아있다. 어슴프레한 황혼녘인지 여명이 밝아오기 전의 새벽녘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 부분도 사진을 찾아보려 인터넷을 헤매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현재 대문에 걸려있는 사진도 영화의 한 장면이다. <The Great Escape> 에서 스티브 맥퀸이 오토바이로 철조망을 뛰어넘는 장면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라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게리 쿠퍼의 마지막 사격씬이다. 중상을 입은 게리 쿠퍼가 잉글리드 버그만을 떠나보내면서 말한다. [ 당신이 가면 나도 가는거야. 당신이 있는 곳엔 어디에나 내가 있어. 자, 가는거지. 우리는 작별 인사를 할 필요가 없어. 우린 헤어지는게 아니니까. 자, 어서 빨리....] 그리고 이어지는 기관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장면, 마지막으로 종이 울린다.


""어떤 이의 죽음도 나 자신의 소모려니 그건 나도 또한 인류의 일부이기에, 그러니 묻지 말지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느냐고,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다.(Any Mans Death Diminishes Me, Because I am Involved In Ja ankinde; and Therefore 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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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자리 (3월 21일~ 4월 19일)

황도의 첫번째 별자리 양자리에 태어난 사람은 자기주장이 강하고 외향적인 성향을 띈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제일 잘난줄 알고 남들은 다 자기 꼬붕으로 여긴다.
남의 기분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배려할줄 모르는 엄청난 뻔뻔함으로 일단 자기 마음에 조금 들었다 싶은 상대는 그게 심지어 동성이라해도 무턱대고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에 빠지게 되며, 언제나 자만에 차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약한 척, 착한 척, 피해자인 척 연기의 대왕이다. 따라서 양자리의 사람이 슬퍼하는 모습에는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한번 쯤 생각해보아야한다. 주위 사람들이 피곤해지는 성격이 아닐 수 없다.
혹시 주변에 양자리 친구가 있다면 일단 그 앞에서 뭘 잘하고 못하고하는 능력에 관계된 얘기는 하면 안돼며, 질질 짜거나 심각한척 하거든 한대 때려줘라.
잘난 것도 없이 잘난척 하는 양자리는 12개 별자리 중 가장 재수없는 성격이다.
양자리는 성도착증 환자와 강간범들이 많다.


(2) 황소자리(4월 20일~ 5월 20일)

황소자리는 고집이 세고 자신의 원칙에 지나치게 엄격하다.
굉장히 신중하게 판단을 하기 때문에 점심으로 라면을 먹을지 밥을 먹을지를 결정하는 데도 수만년은 걸리고 대부분의 경우 남들의 판단에 휩쓸려 자기주장 없이 살아가게된다.
양자리와 황소자리가 친구가 된다면 황소자리는 철저히 양자리의 시녀 노릇을 해야하며 둘이 싸운다해도 먼저 사과하는 건 언제나 황소자리다. 나약함, 게으름, 우유부단함, 태만 등 인생에 실패하기 위한 조건은 모조리 갖추었으니 혹시라도 황폐한 인생을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잘 맞는 별자리다.
연애운을 말하자면 원래부터가 자기주장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여왕노릇을 해줄 사람을 찾는 것이 좋을것이다. 그래도 자기인생 실패하느니 남의 시종으로나마 좀 살아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황소자리는 알콜중독자와 자폐증이 많다.


(3) 쌍둥이자리(5월 21일~ 6월 21일)

쌍둥이자리는 영리하고 재치있으며 매혹적인줄 착각한다.
웃기지도 않는 장난을 치면서 상대가 즐거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장난을 끝없이 반복하는 정신박약의 기질이 보인다. 스스로 섹시하다고 생각하는 변태이며, 그와 함께 있는 한 적어도 심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원래 미친사람과 함께 있으면 피곤할 뿐 지루하지는 않으니까. 정신상태가 이상하므로 쌍둥이자리가 변덕을 부리고 미친행동을 해도 당황하지는 말자. 쌍둥이자리와 사귀기 시작했다면 어서 빨리 헤어지는 것이 백익무해할 것이다.
한달 내내 깊이 사랑했다가도 양말 색깔 하나 때문에 " 우리 헤어져. " 라고 쑈를 하는 것이 바로 쌍둥이자리. 누가 고민에 빠져있어도 장난이나 하는 미친X라 굉장히 짜증스럽다.
쌍둥이자리는 당연하게도 정신박약아와 조울증이 대부분이다.


(4) 게자리(6월 22일~7월 22일)

게자리는 감성이 예민하고 동정심이 풍부해서 조금이라도 잘났다간 주변 사람들을 다 거지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꼴에 돈은 무지 밝혀서 부자가 많으니 주변에 게자리 친구가 있다면 아부를 조금 떨어줘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돈만 빼면 이 사람은 시체나 다름없다. 남다른 재능이나 성격적인 장점이 하나라도 있다면 기적이며, 외모도 아주 못생긴 경우가 대부분이다. 돈 좀 많이 벌면 수술이나 한번 해라.
부자들이 다 그렇듯이 겁쟁이에다 지극히 수동적인 삶을 사는 인생 실패자니 돈 많다고 부러워하지 말고 좀 불쌍하게 생각하자.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이렇게 걸어다녀야만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과대망상증이기도 하다.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절대로 책임지지 않고 도망쳐버리는 유치한 놈들이니 같은 팀에 들어가 일을 하거나하면 굉장히 괴로울 것이다.
게자리는 노출증과 도벽으로도 유명하다.


(5) 사자자리(7월 23일~8월 22일)

그의 낙천적이고 관대한 마음씨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 과연 이 놈은 뭘 믿고 이따위로 사는 걸까. "란 의문이 들게한다.
비범한 결단력과 창조력으로 쌍둥이자리와 함께 정신병동 부동의 공동 1위를 지키고 있으며 도덕적 감각이 결여되어 있어 범죄를 저질러도 떳떳한 불한당이다. 만화나 영화의 명대사나 명장면을 따라하는 재능이 있어 조금 멋있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단순한 쑈라는 것을 언제나 잊어서는 않된다.
모든 사람과 자고 싶어하는 박애주의적 성경향을 띄며 결코 한사람만 사랑하거나 할 수 없는 줏대없는 성격이다. 인생관 역시 한가지 길로 계속가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늙어서 만나면 거지나 범죄자 중 하나가 되어있을 사람이다. 즉 이 사람과 친해질 필요는 전혀 없다. 인생에 도움이 안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사자자리는 노숙자와 양성애자가 많다.


(6) 처녀자리(8월 23일~9월 23일)

처녀자리는 육체보다는 마음을 높이 평가할 줄 아는 안목으로 돈을 밝히고 기회주의적 악인들이다.
이 인간들은 고상한척이나 얌전한척은 타고 났으며 사람에 따라 차별적인 대우를 해서 기분을 망치는 것 역시 천부적이다. 반면 지능지수가 딸려 거짓말을 못하기 때문에 바보스럽다는 말도 항상 따라다닌다.
약속을 잘지키는 자리로도 유명하기 때문에 처녀자리 사람들과 원한 관계를 맺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이 사람들은 벽에 똥칠하는 나이가 되어서도 복수를 하고야 마는 집착증이 굉장하다. 조그만 잘못이라해도 다 따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피곤한 성격이며 소심해서 어깨만 부딫혀도 한달은 고민하고야마는 엄청난 인간들이다.
혹시 처녀자리의 사람을 죽이고 있으면 뒤에서 소근소근 험담만해도 알아서 자살해 줄것이다. 트랜디 드라마에 나오는 겉 다르고 속 다른 악녀들은 죄다 처녀자리 인간형이다.
처녀자리는 앞서 말했듯이 기회주의가 많고 선악의 구별이 모호해 범죄자도 많다.


(7) 천칭자리 (9월 24일~10월 22일)

이 별자리는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재능과 뛰어난 이해력, 순발력으로 천부적인 사기꾼이라고 하겠다.
이 사람들이 아주 좋은 친구로 느껴진다면 당신은 사기를 당한 것이다. 천칭자리는 조직 내게 불화를 만드는 것이 취미인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루머나 누명들은 모두 천칭자리가 지어낸 것이며, 이런 헛소문을 퍼뜨리는 이유는 순전히 자신의 취미생활 때문이다. 따라서 천칭자리에게 고민 상담을 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고민 상담을 하자마자 모든 사람들에게 부풀려져서 유포될 것은 뻔한 일이다.
관능적인 매력이 있어 강간을 당하기 쉬우며 이중적인 성격으로 살해당할 위기에 처해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천칭자리는 사기꾼의 별자리라고도 한다.


(8) 전갈자리(10월 23일~11월 22일)

남보다 앞서가려는 진취적인 성향과 엄청난 야망의 소유자이지만 재능이나 소질은 눈꼽만치도 없는 불쌍한 인생이다.
이 인간들은 언제나 최고가 되려고 노력은 하지만 언제나 노력만하다 끝나버리는 인간들이다. 역사적으로도 전갈자리가 뭔가 이루어낸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 위인이 가장 희박한 별자리.
이성적일 때는 다분히 어른스럽고 통찰력도 가지고 있지만 스팀만 받았다하면 모든 걸 다 뒤엎어버리므로 주의하자. 물론, 이 사람들은 20대 전후만 넘기면 대부분 종신형을 선고받고 감옥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조금만 참아주면 눈 앞에서 사라져준다. 과대망상증도 있어서 스스로 엄청난 운명에 휩쓸린 불운의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늘상 웃기지도 않는 우수에 젖어 있다.
성생활에 대해서도 다분히 심심한 사람이기 때문에 불능이나 불임은 전갈자리가 대부분.
전갈자리는 피해망상증에 사로잡혀 있으며 살인자가 흔하다.


(9) 사수자리(11월 23일~12월 24일)

그는 열정에 빠져있을 때 한없이 관대하고 화끈한 기분파다.
그러니 그의 기분만 잘 맞춰준다면 술자리에서 돈을 낼 필요는 없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사수자리는 언제나 빚더미에 앉아있다. 요즘들어 카드빚으로 동반자살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수자리다. 그러니 사수자리와는 결코 결혼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본질적으로 인생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기에 거지같이 살아도 잘산다고 생각한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남발하며 건망증의 대가이다. 기분파이기 때문에 오랜 헌신과 사랑을 기대할 수 없으며 순간적인 쾌락을 사랑하고 쾌락으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는 인생의 도피자. 사회적 통념에 대해 반항심이 심하기 때문에 사회에서 벗어난 트랜스젠더나 밀입국자들이 많은 편.
치매에 쉽게 걸리고 폭행죄로 구속된다.


(10) 염소자리(12월 25일~1월 19일)

자기합리화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염소자리는 다분히 정치가적 성격이 강하다.
보잘것 없는 이기심도 부풀려서 원대한 사상으로 변화시키고 범죄자들을 옹호하는 악인지상주의이다.
수전노이기도하지만 필요할 때 도와달라고하면 자기 일이 있어도 도움을 주는 멍청함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언제나 천칭자리의 먹이감이 된다. 속아 넘어가고도 자기합리화 시켜버리는 이 별자리는 살인되로 사형을 당한다고 해고 할말은 있는 변명의 천재다.
염소자리는 학대당하는 것을 즐기기 때문에 잠자리에서는 언제나 당하는 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집단 속에서 있는지도 모르는 흐지부지 인간형이며, 평범한 삶을 살지만 절대 그 평범함 이상이 될 수 없는 따분한 사람들이다. 이런 인생을 사느니 절에 들어가 중이 되는게 더 낫다. 다만 원대한 거짓말을 잘하기 때문에 잘만하면 희대의 사기꾼이 될 수도 있다.
마죠키즘과 우울증이 심하다.


(11) 물병자리(1월 20일~2월18일)

물병자리는 정직하고 객관적이며 가끔 영리하다.
아주아주아주 가끔이지만 말이다. 무당의 팔자를 타고 났다고도하는 이 별자리는 섬뜩할 정도의 신기가 있으며 역시 대부분 무당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랑과 인생에 대해 탁월한 대화를 나누지만 그것은 언제나 너무 포괄적이고 원론적이라 그가 타고난 무당임을 증명해주는 한가지 요소다.
나이에 비해 애늙은이들이나 정작 성숙해야할 나이에는 자기 나이를 망각할 정도의 피터팬 증후군에 걸려버리는 신기한 놈들이기도 하다. 끊임없는 진실에 대한 탐구를 즐기는 물병자리는 사이비 종교의 교주나 포주에 재능을 보이며 찔러도 피 한방울 안나오는 냉혈한에 누가 죽어가고 있어도 그 이유를 탐구할 뿐 구해주지는 않는 끔찍한 분석력도 자랑한다.
물병자리는 무당과 고리대금업자가 적격이다.


(12) 물고기자리(2월 19일~3월 20일)

모든 별자리 중에서 가장 다방면에 뛰어난 이 별자리는 아쉽게도 그 많은 능력에 0.001%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인생이다.
어렸을적 굉장한 수재로 칭송받다가 성인이 된 후에 노숙자로 걸식하며 사는 사람들이 이 별자리의 대표적 인간형이다. 전교 1등이 엄청 재수없고 숙제나 공부도 잘 안한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비웃어주어라. 물고기자리인 그 인간은 얼마안가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 났다.
물고기 자리에게 무언가를 시키려면 항상 그의 불성실함을 생각해야하고, 물고기자리와 얘기하는 중에는 그 사람의 위선적인 면을 생각해야하며, 물고기자리와 사귀고 있다면 그의 수동적인 면을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한다. 즉 그는 수많은 능력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응력이 전무하다.
정신적으로도 조금 이상한 물고기자리는 술, 담배, 마약, 섹스 등으로 오염된 인생을 사는 것을 즐긴다.
물고기자리는 약물 중독자의 별자리다.


* 난 양자리인데..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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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06-25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전 사수자리인데 섬뜩하네요.
치매, 폭행, 트랜스젠더, 밀입국...흐미~~

꼬마요정 2004-06-25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자리는 가장 재수없는 별자리라네요...ㅜ.ㅜ
성도착증 환자에 강간범...ㅡㅡ;;

데메트리오스 2004-07-13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염소자리인데... 별자리들이 하나같이 무섭네요... (ㅡ_ㅡ;;)

꼬마요정 2004-07-13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나 말이죠~ ^^ 저두 첨에 이거 보고 어찌나 웃기던지..
 

< 日本(Japan) >

 Ⅰ. 日本經濟의 상황

日本經濟가 지난 2002년 하반기 이후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다. 버블붕괴 이후 92년부터 2002년까지 10년 간 연평균 1.1%에 불과하던 日本經濟의 성장률이 2003년 들어 2.5∼3.5%의 고성장을 실현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일본 내에서 경제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확산되고 있다. 日本 민간 연구기관 뿐만 아니라 정부도 지난 9월 2003년 日本 經濟성장률 전망치를 대폭 상향조정하였는데, 각각 1.8∼2.6%, 2.1% 성장으로 상향조정하였다. 그러나 日本經濟가 회복기로는 접어들었으나 2004년 이후의 성장률은 둔화되고 있다. 버블붕괴 이후 日本經濟가 안고 있는 고질적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어 급속한 회복은 기대하기 곤란하다는 전망이다. 즉 내수와 개인소비 부진, 부실채권과 부실기업 처리지연, 과잉고용 상태 지속, 중소기업의 부진 등의 고질적인 문제가 日本經濟의 본격적인 성장에 걸림돌이라는 분석이다.
그러나 日本은 여전히 미국 다음가는 경제대국이다. 그간의 저성장으로 미국과의 경제력 차이가 벌어졌지만 지금도 기술강국, 제조업 강국이다. 기술관련 특허출원은 많은 분야에서 미국을 앞서고 있으며, 디지털전자 분야에서는 독보적이다. 日本 經濟산업성이 2003년 6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 각 분야 상위 10사중 정보통신기기 6사, 승용차 3사, 반도체제조장비 5사, 철강 2사, 종이펄프 2사, 그리고 건설기계 5사중 2사, 유리 7사중 3사, 전선케이블 6사중 2사가 日本기업이다.
日本은 세계 GNP의 1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무역에서도 거의 비슷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95년 수출액에서는 미국과 독일에 이어, 수입액에서도 미국과 독일에 이어 각각 제 3 위를 차지하였다. 日本이 자본의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바뀐 것이 1년 간의 플로(flow;흐름)에서는 65년이고, 스톡(stoke;殘高)에서는 68년의 일이었다. 그 뒤 2차례의 석유 파동시기를 제외하고는 경상수지의 흑자기조와 그 누적을 배경으로 대외증권투자·차관·직접투자가 모두 급증하였다. 특히 83년부터 84년에 걸쳐 대외자산에서 대외부채를 공제한 순자산은 373억 달러에서 743억 달러로 늘어 영국에 이어 제 2 위 국가로 부상하였다.

 Ⅱ. 日本經濟의 잃어버린 10년에 대해서

ⅰ) 원인
80년대 말 과잉 유동성, 재테크 붐으로 발생한 버블경제는 91년의 긴축금융과 부동산 규제 강화로 인해 붕괴되었다. 그리하여 버블관련 업종인 부동산, 건설, 유통 등에 대한 대출이 부실채권화하게 되었다. 90년대 내내 경기침체, 주가·지가 하락으로 부실채권이 계속 증가하였는데, 버블붕괴로 사라진 자산의 10%에 달하는 100조엔이 은행들의 부실채권이 되었으며 10년 간 16개 은행이 파산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 때 생긴 부실채권을 정리하지 못한 것이 日本經濟의 잃어버린 10년이 시작과 지속의 원인 중 하나이다.
그밖에도 구조조정 실패, 정치 리더십 부재와 정책의 실패, 관료의 보수성과 조직 이기주의, 변화를 거부하는 사회분위기와 국내적 시야, 국수주의, 日本의 왜곡된 역사인식 등이 日本經濟의 위기를 불러 온 원인들이다. 특히, 日本의 왜곡된 역사인식에 대해서 노벨 문학상 수상자 오엔 겐자부로는 "日本의 성숙되지 못한 역사인식이 日本의 폐쇄성과 더딘 변화를 부추기고 있음."이라고 말했고, 가미가제 자살 특공대를 미화하는 역사교과서는 폐쇄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ⅱ) 경과
日本의 부동산거품 붕괴의 결과를 한 마디로 요약하는 말이 ‘잃어버린 10년(The Lost Decade)’이다. 말 그대로 日本經濟가 10년을 허송세월 했다는 의미다.
잃어버린 10년의 구체적 내용을 보면 더욱 참혹하다. 91년부터 98년까지 日本 6대 도시 상업지가는 평균 16.4% 하락했다. 결국 98년 지가는 90년 최고점과 비교할 때 23% 수준으로 떨어졌다.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자 89년 12월말 사상 최고치인 3만8915를 기록했던 닛케이지수는 1년쯤 후인 90년 10월 2만 수준으로 수직하락 했다. 1년도 채 안 돼 반토막이 난 것이다. 주가와 부동산이 폭락하면서 금융회사와 개인의 파산도 늘어났다. 日本 정부는 95년 말∼96년 간 부동산금융을 주로 하는 주택금융전문회사의 부실이 가시화하면서 천문학적 규모의 공적자금을 조성했다. 90년대 중반에는 日本 역사상 최초로 예금인출사태가 발생했으며 해마다 결산기만 되면 금융위기론이 日本經濟계를 유령처럼 떠돌았다. 97년 말에는 산요증권, 북해도척식은행, 야마이치증권등 日本을 대표하는 금융사들이 연이어 도산하면서 경영에 책임을 졌던 사람들이 日本식 할복으로 종업원과 고객들에게 사죄하는 일까지 이어졌다. 특히 97년 아시아 외환위기로 日本經濟가 더욱 어려워지자 영국 런던등 세계금융의 중심지에서는 日本의 금융인이나 종합상사맨들이 저녁만 되면 술에 취한 채 “日本은 끝났다”라며 눈물을 흘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日本 히토쓰바시대 야마모토 지야키 연구원은 “日本經濟는 90년대 부동산거품이 붕괴된 뒤 본격적인 회복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 채 21세기를 맞았다”며 “최근 日本經濟가 다시 회복되는 기미를 보이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본격적인 회복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했다.

ⅲ) 결과
잃어버린 10년을 겪으며 日本經濟는 지금 사면초가의 상태이다. 實物經濟의 침체와 금융불안의 악순환, 국내요인과 해외요인의 악순환 등으로 매우 어려운 상태이다. 經濟분야만 어려운 게 아니다. 사회·문화적으로도 日本은 매우 어려운 지경이다. 일에 대한 욕망과 에너지를 상실하고 있다는 것도 큰 변화 중 하나다. 일에 매여 살지 않으려는 젊은이들이 크게 늘었다. 소비자본주의의 말로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고도성장기에는 소유, 즉 일에 대한 욕망이 컸지만 이제는 소유에 대한 애착이 없거나 약화했다.

日本의 한 사회학자가 70년대부터 “뭘 갖고 싶은가”라는 똑같은 질문을 초등학생들에게 던졌다. 70년대에는 자동차 전화기 에어컨 등 집안의 소유물을 갖고 싶어했고, 80년대에는 컴퓨터 게임기 등 개인적인 물건으로 선호도가 옮겨갔다. 그러다 같은 질문에 대해 99년의 초등학생들은 대다수가 “없다”라고 대답해 놀랐다고 한다.
과거에는 ‘열심히 하면 출세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 신화가 있었다. 그러나 잃어버린 10년을 지나면서 노력해봐야 소용없다는 사실을 아이들까지 깨닫기 시작했다. 출세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절망, 보이지 않는 유리벽에 갇혀 있다는 자각에 부모들이고 아이들이고 손을 들어 버린 것이다. 거기다가 日本정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내놓고 있지 못 할 정도로 허약해져 있다. 日本은 잃어버린 10년을 겪으며, 문화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모두 희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현재 日本經濟는 서서히 회복되고 있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 지는 두고 볼 문제이다.

 Ⅲ. 日本經濟에 대해서

ⅰ) 강점
日本人의 친절함과 성실성이야말로 현재의 日本을 우뚝 세운 강점일 것이다. 기업 내에서 사원 및 이사진 등의 성실성은 도요타, 닛산 등의 대기업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전 세계 어디를 가나 日本人에 대한 태도는 협조적이다. 학사논문자격밖에 없는 사람도 노벨상을 받을 만큼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하는 태도는 무척 존경받을 만하다.
게다가 日本經濟의 견인차 역할을 하던 제조업 부문이 회복되고 있는 것은 좋은 조짐이다.
ⅱ) 약점
많은 강점에도 불구하고, 현재 日本이 가지고 있는 부실채권은 日本經濟의 발목을 잡고 있다. 10년 간 90조엔의 부실채권을 정리했으나 아직도 미해결 상태이다. 또한 日本식 구조조정만을 고집하며, 정책적으로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것도 日本經濟의 약점이다. 게다가 實物經濟의 침체와 금융불안의 악순환, 국내요인과 해외요인의 악순환 등 역시 日本經濟의 골칫거리이다.

 Ⅳ. 韓·日 관계

ⅰ) 과거
日本(Japan)의 선조가 한반도의 백제인이라고 할 만큼 두 나라의 교류는 각별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아직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겠다.
고대부터 한반도는 日本(Japan)에게 정치·문화·경제 모든 분야를 걸쳐 문물을 전해줬다. 그 예로 日本 천황의 시조문제나 서기 610년 고구려의 담징이 日本의 호류사에 금당벽화를 그려준 것, 日本 목조 미륵보살 반가사유상과 한반도의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의 유사성, 고구려 수산리 고분 벽화와 日本 다카마쓰 고분 벽화의 유사성 그리고 日本이 한반도와의 무역을 통해 물자를 공급하던 모습 등이 있어 日本과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또한 임진왜란, 정묘왜란, 을미사변, 쇠말뚝 풍수침탄, 강제병탄, 성노예 문제 등은 씻을 수 없는 아픔으로 우리 역사에 남아있다.

ⅱ) 현재
㉠ 韓國의 對日정책 - 經濟
북한과 미국 다음으로 중요한 나라는 日本과 中國이다. 中國과 수교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응당 日本이 美國 다음으로 중요한 우방이자 정책협조대상국이었다. 그런데 中國과 수교가 이루어진지 10년이 경과하면서 양국 간 교역과 인적교류가 급속히 확대되면서 中國의 비중이  높아지고 북한 변수에 대한 中國의 영향력이 높게 평가되면서  최근에는 어느 쪽이 더 중요한 우방이고 정책협조대상국이어야 하는지 모호해지고 있다.
경제적으로 보면 아직은 전체 교역에서 거래규모가 더 크고 주요자본재와 기술을 수입하는 日本이 더 중요한 국가이지만 수출로만 본다면 對中國 수출액이 이미 對日本 수출액을 넘어섰다. 인적교류도 입출국자 모두를 고려하면 일본이 더 많지만 출국자수만 보면 수년 전부터 中國지역 출국자가 더 많다. 현재 같은 추세로 5년 정도 더 경과하면  교역과 인적교류의 양면에서 中國이 日本을 앞설지도 모른다.
요컨대 정치와 안보측면에서는 북한변수의 중요성이 커지면 커질수록 中國이 日本 이상으로 주요 정책협조대상국으로 자리 매김 할 것이다. 또 경제적으로도 中國經濟의 규모가 현재처럼 빠르게 커지고 그와 더불어 對中 교역량이 확대되며 인적 교류가 활성화할수록 中國이 日本보다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정책협조대상국이 될 전망이다.

㉡ 日本의 對韓정책 - 經濟
日本의 한반도 정책 특히  韓國에 대한 전략은 21세기에 접어들어 다소간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20세기 후반 韓國經濟가 급속히 성장하면서 韓國은 인근 시장으로서 또 규모가 큰 무역파트너국 정도로 인식되어 왔다. 구 식민지국가로서 군대위안부 문제 등 청산하지 못한 빚도 없지 않아 마음속으로 껄끄러운 상대이기도 했지만 정치나 안보 면에서 美國, 中國, 러시아 등에 비해 비중이 월등히 작았기 때문에 애써 무시하거나 가급적 모른 채 하고 지내려 했던 것이 對韓정책의 기본흐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던 韓國이 21세기에 접어들어 정치나 안보측면에서 日本의 주요 정책협조대상국의 하나로 급부상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北韓 변수가 자리하고 있다. 90년대 중반 이후 北韓의 핵 개발 의혹이 부상되고 대포동 미사일이 日本 쪽으로 발사되며 北韓의 괴선박이 日本연해를 들락거리고 게다가 국내적으로는 납치자 문제가 사회문제로 부각되면서 北韓 발 위협이 日本人들에게 가시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때 韓國의 DJ정부는 발족이후 긴밀한 대북협상루트를 가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한국이 日本의 주된 정책협조대상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울러 中國經濟의 급부상으로 위기감을 느낀 日本은 수 년 전부터 韓日 양국 간 자유시장 확대를 목표로 韓國 측에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조기에 체결하자고 촉구하고 있다. 양국은 수년간의 준비모임을 거쳐 2003년 말부터 정부간 공식교섭에 들어가기로 합의한 바 있다. 양국의 기본적인 방침은 관세장벽, 비자 등 기왕의 각종 장벽을 허물어 확대된 시장을 만들자는 것으로 이 협약이 체결되면 日本은 이를 바탕으로 韓日 양국이 정치, 안전보장 등 각 부문을 포괄하는 전면적인 파트너쉽 체제를 확립해 나가자고 촉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 역사·사회적 문제
日本 지배계층의 왜곡된 역사인식이 엄청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나 계속되는 日本 고위층들의 망언은 점점 도를 더해가고 있다. 과거의 만행을 사죄하고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잘못한 게 없다는 식의 발언과 태도로 韓國을 비롯한 中國, 동남아 지역의 국가들에게 불쾌감을 넘어선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게다가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 등은 다음 세대의 日本人 역시 과거를 모르는 부끄러운 인간으로 교육시키려는 日本 우익층의 음모이다.
올해부터 日本 문화가 전면적으로 개방되었다. 우리는 좋은 것은 받아들이되, 우리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日本이 가지고 있는 국수주의와 만행을 기억해야 한다. 그 이후에 문화를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아닌 것은 버려야 한다. 우리의 인식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기이다.
 
ⅲ) 미래 ( 전망 & 대책 )
한창 韓·日간 FTA 문제가 논의되고 있다. 멀지 않은 미래에 韓·日 양국 사이에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어 경제적인 면에서는 국경이 없어지게 될 전망이다.
中國의 급부상과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은 日本이 가지고 있던 경제적 영향력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지난 12월 11일∼12일 간 日本의 동경에서 개최된 日本-아세안 특별 정상회담에서 中國의 뒤를 이어 "아세안 우호 및 협력조약(Treaty of Amity and Cooperation : TAC) 에 서명하는 행사를 치렀다. 아세안을 둘러싼 中國과 日本의 경쟁이 매우 치열해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아직은 日本과 中國이 비슷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中國이 日本의 영향력을 앞지를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中國과 日本을 잘 관찰하고 분석해서 그 사이에서 기회를 잡아야 한다. 예전에 고려가 송나라와 거란 사이에서 이익을 취했듯이 우리의 약점을 드러내지 않고 우호적인 태도로 두 나라를 이어주는 교량역할을 하면서 이익을 취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다보면 언젠가 韓·中·日, 동남아 지역이 유럽처럼 단일경제체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 먼저 해결되어야 할 과제는 몇 십 년 동안 계속 논쟁거리가 되어온 日本의 과거 참회이다. 인정해야 할 과거의 잘못들을 인정하고, 왜곡된 역사 교과서를 개정하고, 성노예 문제 등 사과해야 할 문제는 사과하고, 야스쿠니 신사에 있는 전범들의 위패를 격하시키거나 없애야 할 것이다. 日本이 과거를 참회하지 않는 한 동남아가 가지고 있는 과거에 대한 아픔은 동남아시아 단결의 걸림돌이 될 것이다.

 Ⅴ. 임나일본부에 대해서. (任那日本府說)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 간 日本이 任那日本府라는 통치기관을 두어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로 경영했다는 학설.
이 학설은 日本이 조선을 침략하고 그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날조한 식민사관의 하나인 타율성이론의 대표적 산물로서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과 궤를 같이한다.
日本人들은 우리나라의 역사가 태고부터 외세의 간섭과 영향을 받아 타율적으로 발전했다고 주장하면서 任那日本府說을 제기했는데, 쓰에마쓰는 이를 체계화한 바 있다. 그의 설에 의하면, 3세기 중엽에 이미 왜인은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즉 임나가야(任那加耶)를 점유하고 있었으며, 왜왕은 그 중계지를 통하여 三韓을 통제했다. 또한 370년경에는 대규모 군대를 보내 백제와 신라에 편입되지 않은 대부분의 三韓 소국을 정복하여 직접 지배하고 양국을 간접 지배했으며, 任那의 지배체제를 이때에 성립시켰다. 왜는 任那의 지배범위를 계속 확대하여 북서쪽은 금강 유역, 북동쪽은 낙동강 상류유역까지 이르렀다. 任那는 400년 무렵에 광개토왕이 파견한 고구려군 5만 명의 침입을 받은 이래 쇠퇴를 거듭하다가 562년 신라의 대가야 정벌 때에 임나관가(任那官家)가 토멸됨으로써 멸망했다. 그 뒤에도 왜는 任那 故地에 대한 연고권을 가져서 646년까지 任那에게 공납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는 〈니혼쇼키 日本書紀〉를 주된 사료로 이용했는데 이 책은 8세기 초에 왜의 왕가(王家)가 자신들을 미화하기 위해 편찬한 사서로서 原 사료 편찬과정에서 많은 조작이 가해진 것이다. 특히 5세기 이전의 기록들은 그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려운 설화적인 서술들로 가득 차 있다. 여기에 왜가 任那지역을 200년 동안이나 군사 지배했다면, 그 지역에서 그들의 문화요소가 강하게 나타나야 하는데, 가야지역에 대한 고고학 발굴자료는 4세기 이전의 이 지역 문화요소가 연속적으로 계승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처럼 문헌사료의 해석과 고고학 유물의 분석에서도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던 쓰에마쓰의 任那日本府說을 정설로 받아들였던 日本 학계는 1960년대 北韓의 김석형이 '삼한 삼국의 日本열도분국설'을 제기하자, 큰 충격을 받아 1970년대 이후 기존의 任那日本府說에 대해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주요한 연구경향은 〈니혼쇼키〉 사료의 신빙성 문제를 치밀하게 고증한 다음, 그에 입각하여 종래 任那日本府의 성립시기나 그 실체를 제한시켜 설명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 이후 대부분의 日本人 연구자들은 〈니혼쇼키〉에 나오는 5세기 이전 사료의 신빙성을 부인함으로써 任那日本府의 성립시기를 6세기 전반 무렵으로 늦추어보고, 그 실체 또한 왜가 任那를 군사 통치한 지배 기관이라기보다는 왜왕이 한반도의 선진문물을 독점적으로 수용하려는 목적으로 任那에 파견한 사신 또는 관인집단으로 보았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任那日本府의 존재 이유도 왜 왕권의 지배 욕구보다는 백제·신라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가야세력의 노력에서 구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그러나 이들의 연구도 역시 왜가 설치한 任那日本府가 가야지역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음으로써 식민사관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한편 국내 학자들은 한동안 이에 대해 무시해오다가 최근에 이르러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국내 연구자들은 대세론(大勢論)에 근거하여 우선 〈니혼쇼키〉에 나오는 왜의 任那 지배를 부정하고 대신 백제의 가야지배라는 해석을 시도했다. 따라서 任那日本府의 실체도 왜가 가야지역을 정벌하고 설치한 지배기관이 아니라 백제의 근초고왕이 369년에 가야지역을 정벌한 다음, 그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파견군사령부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연구경향은 가야지역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이 매우 강했다는 것을 밝힌 점에서 그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200년 간에 걸쳐 가야가 백제의 지배를 받았다는 설명은 앞에서 언급한 고고학 유물의 분석결과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니혼쇼키〉에 보이는 任那日本府가 반백제적인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 있으므로 그것을 백제의 가야지배기관으로 해석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국내연구자들의 한계는 가야사 및 日本 고대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에 기인한다.

◈ 고대사논쟁의 일각을 차지했던 任那日本府說은 1875년 발굴된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의 한 구절에 그 유래를 두고 있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 以爲臣民.
- 『광개토대왕비문』 신묘년 조 -
▶위에 신묘년 기사에 대한 해석을 놓고 일본측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였으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근거: 日本서기.
·비문해석: 신묘년 왜가 바다를 건너 와서 백제와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
           日本은 任那지방에 日本府를 두고 한반도 남단을 지배하여 신라와 백제가 약               200년 간(369∼562) 日本의 야마토 조정에 조공을 바쳤었다.

이에 대한 반박은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를 근거로 하였을 때 日本의 한반도 지배에 관한 사료가 없다.
·日本이 지배했다고 주장하는 영역에서 日本의 유물이 발견된 바 없다.
·日本서기의 신빙성 자체에 대한 의문.
·비문의 변조가능성에 대한 의혹.

▶위당 정인보의 해석 : 왜가 신묘년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격파했다.
北韓의 박시형도 주어를 고구려로 해석하는 데 동의한 것처럼 주체가 왜인지 고구려인지도 논란 중이다. 정인보나 박시형은 신라를 공격한 주체 세력을 왜가 아니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호태왕의 공적비이므로 주어는 당연히 고구려의 호태왕이 되어야 한다.

▶추가
1981년 이 비문을 연구해 온 이형구는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들어, '倭'는 '後'를, '來渡海破'는 '不貢因破'를 日本人이 위작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럴 경우 그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 뒤 신묘년(33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왜구·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의미가 된다. 

 Ⅵ. 韓·中·日 3국 관계

ⅰ) 과거
韓中日 삼국의 관계는 아주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中國의 시조 헌원황제 시절부터 中國과 韓國의 관계는 경쟁적이었다. 헌원황제와 치우천왕의 전쟁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치우천왕은 B.C. 2716년부터 B.C. 2696년까지 실존했던 인물이다. 또한 지나(中國)족의 대족장 공손헌원(헌원황제. 中國의 시조)과 10여 년 동안 70여 차례가 넘도록 싸운 오랑캐의 황제이면서 마지막 전투에서 헌원에 의해 목이 잘렸다. 그리고 다들 잘 아는 당태종이 고구려를 함락시키기 위해 원정 갔을 때 전쟁의 신으로 추앙 받던 치우천왕기를 떠받들고 갔다가 안시성에서 한쪽 눈을 잃기도 했다. 그러나 근래 발굴되고 있는 유적지나 유물들, 싸움터 그리고 먼 선조 대부터 치우의 무덤을 지켰다는 무덤 지킴이의 말까지 모두 치우천왕의 패배는 부정되고 있다고 한다. 그 때부터 시작해서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한사군을 설치한 한무제, 고구려를 호시탐탐 노리던 수와 당, 신라와 손을 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린 나당 연합군, 발해를 멸망시킨 여진족, 고려와 대등 외교를 했던 송나라, 서희의 한 마디에 강동 6주를 내주고 돌아간 거란족, 고려를 짓밟은 원나라 몽골족, 조선과 사대관계를 맺었던 명나라, 병자호란으로 치욕적인 항복을 받아낸 청나라, 그리고 6·25 때 인해전술로 南北韓 분단에 큰 역할을 했던 中華人民共和國까지 韓中의 역사는 뗄레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 사이사이 많은 문화와 경제의 교류가 있었고, 中國이라는 거대 왕국을 옆에 두고서도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했던 韓國의 자주성과 독자성도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다. 또한 日本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위에서 기술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韓國과 日本 사이에는 역사적으로 많은 교류가 있었다. 日本과 中國 사이에도 역시 많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주로 한반도를 거쳐 日本에 문화 등을 전파하였는데, 유교, 불교, 도교 등의 종교와 성리학이나 주자학 등의 전파가 주된 문화였다. 또한 원나라는 고려를 통해 日本을 침공하려 했으나 태풍 때문에 두 차례나 실패했으며,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침공한다는 목적으로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왜란과 정묘재란이 발생했다. 이 때 유명한 장군이 바로 이순신 장군이다. 그 후 격동하는 근대로의 전환을 거쳐 日本에서는 메이지유신의 성공으로 근대화가 빨리 진행되어 동남아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淸日 전쟁, 러日 전쟁 등을 일으켜 한반도 및 만주 지역의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고, 난징대학살, 관동대학살, 대한제국에 대한 약탈, 성노예 문제, 731부대의 생체실험 문제 등 엄청난 만행을 자행했다. 결국 日本은 진주만 공격으로 제국주의적 성격을 드러내다가 무참히 패배하여 1945년 8월 15일 항복을 선언했다. 그 뒤 패전을 딛고 韓國전쟁 때 전화위복을 맞이하여 현재의 日本이 서게 된 계기를 마련했다.   

ⅱ) 현재
잃어버린 10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日本과는 달리 中國은 빠른 경제성장으로 동아시아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韓國의 경우 對日本 수출액보다 대중국 수출액이 많고, 中國에 투자하는 회사도 많고, 中國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다. 그러나 작년부터 日本이 회복하는 기미를 보이면서 韓中日 자유무역협정지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ⅲ) 미래
韓中日 3국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본다면, 역사적 문제가 해결되고, 관세가 없어지며, 단일통화가 등장하여 결국에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문제의 해결이 매듭지어지지 않는다면, 경제가 통합된다 하더라도 단일공동체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히 中國人과 韓國人이 가진 反日정서를 감안해 볼 때 경제통합 역시 필요악으로 치부될 가능성도 있다. 미래에 경제통합 및 동아시아 단일공동체 형성은 꿈이 아니라 이루어질 수도 있는 가능성을 지닌 아시아가 살아남을 수 있는 대안이 될 것이다.

ⅳ) 경제통합문제
동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동북아 지역에서는 자유무역협정을 통한 지역경제통합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금융위기 이후 동북아의 韓中日 3국은 다양한 형태의 FTA 체결을 추진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3국간 FTA도 검토하기로 함으로써 동북아지역의 경제통합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역패권 경쟁, 영토분쟁, 과거사 문제, 中國의 사회주의적 경제체제, 경제적 격차 지속 우려 등으로 동북아 3국간 경제통합에 대한 논의가 어려웠으나, 냉전의 종식으로 정치 및 군사적 대립관계가 약화되고, 금융위기 이후 韓中日 3국은 인근국가와의 경제협력 강화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동북아 韓中日 3국간 FTA를 통한 3국의 긴밀한 경제협력은 상당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줄 것으로 예상되며, 경제발전 단계 및 인적·물적 자원의 차이에 따른 보완성에 비추어 일단 뭉치면 세계 최강의 경제블록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韓中日 3국간 갈등관계를 협력의 동반자관계로 발전시키는데 경제적 협력 강화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정치, 이념, 역사인식의 차이에 기인한 韓國과 中國의 對日本 관계와 中國과 日本간 패권경쟁 등이 지역적 갈등과 불안정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경제적인 부분부터 협력하여 만든 화해 분위기가 이념 등의 풀기 어려운 문제들을 풀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참여정부는 동북아 경제 중심국가 건설을 국정운영지표의 하나로 설정한 만큼 韓中日 FTA 체결을 시작으로 단계적으로 동북아 경제협력체를 형성하고, 장기적으로 이를 유럽의 EU와 같은 경제공동체로 발전시킨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 中國과 日本은 동아시아 패권경쟁국으로 동북아 경제통합을 주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지리적, 경제발전단계면에서 중간자적 입장에 있으며, 지역패권을 추구한다는 우려가 작은 韓國이 韓中日 FTA 추진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Ⅶ. 세계 속의 日本

항복문에 따라 일본은 1895년 이후에 획득한 영토는 모두 포기하였다. 日本을 점령한 연합국은 日本의 비무장화·민주화를 추진하였고 1947년에는 정치·사회·교육 개혁안을 포함시킨 새 헌법이 통과되도록 하였다. 장기간에 걸친 보수적인 자민당정권 아래에서 日本의 經濟는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비무장화에 따라 국방비의 부담이 없어졌고 韓國의 6·25에 따른 특수 등을 발판으로 삼아 성장을 거듭하여 20세기 후반에는 세계 대부분 나라의 가장 큰 무역상대국이 됨과 동시에 가장 큰 무역흑자국이 되었다. 그러나 日本은 막강한 경제력에도 불구하고 과거 주변국들을 침략한 역사를 왜곡하고 무역에 있어서 불공정한 행위를 함으로써 각국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20세기말에 들어와 日本은 경제력에 걸맞게 세계평화를 위해 기여하는 나라가 되기를 요청받고 있다.

 <참고문헌>

1.  삼성경제연구소. 日本經濟 되살아나고 있는가.
2.  韓國일보 - 세계2위 경제대국 유지비결.
3.  www.empas.com 백과사전
4.  삼성경제연구소. 잃어버린 10년, 日本의 교훈
5.  <韓國經濟 희망을 찾아서> 日本의 '잃어버린 10년'
6.  韓國일보. '10년 잠 깬 日 보통국가로 변화 모색' 전문가 좌담
7.  韓日역사문제연구소. 우리역사 바로알기
8.  日本의 21세기 대외전략과 韓日관계. 배준호 한신대 교수
9.  삼성경제연구소. World Report 제100호
10. 한국브리태니커 온라인
11. 살아있는 한국사 1권
12. www.cyworld.com  미니홈피 화양연화
13. 대외경제정책연구원. 韓中日 FTA 필요성과 韓中日의 입장.
14. www.daum.net 다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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