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8, 갑자기 다가온 IMF 여파로 직장을 잃으신 부모님으로부터 요즘 들어 부쩍 살기 어려워졌다는 말을 듣는 횟수가 증가하였다. 50, 노후 대책은 커녕 현재의 생활을 감당하기 위해 무언가 일은 하지만 들어오는 돈 보다 나가는 돈이 더 많은 현실은 암울함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에게는 늘 잊지 않으시고 말씀하신다. 9급이나 7급 공무원에 머무르기에는 내가 너무 아깝다고. 얌전히 직장생활을 하시던 지난 날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그 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게 중산층 이상의 삶을 물려주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우리는 뉴스에서 계층간의 양극화가 점차 심화되고 있다는 소식을 자주 듣는다. IMF 로 많은 이들이 고통스러워할 때 부유층의 자제들은 지금이 더 좋다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고도 하던데, 지금과 같은 흐름이라면 머지 않아 그들만을 위한 세상이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마저 갖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본 한 뉴스 기사에서는 강북에 살기 때문에 미팅에도 참여할 수 없다는 어떤 대학생의 철없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었다. 참 어이없는 세상이구나 라며 그냥 넘기긴 했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겪는 소외감은 아마 앞으로 더욱 커질 듯 싶다. 그런데 이는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닌가 보다. 미국의 한 모녀가 저술한 이 책은 철저하게 미국의 현실을 담고 있다. 하지만 중산층 가정의 위기와 그 대책이라는 부제 앞에서 나는 이유 모르게 숙연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것도 전 세계적으로 말이다.

여권의 신장은 많은 여성들로 하여금 결혼과 출산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직장 생활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것은 여성들에게 하나의 축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족을 부양해야만 한다는 가부장적 무게에 짓눌렸을 남성들에게도 궁극적으로는 바람직한 태도라고 난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의 직장 생활의 결과는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물론 과거 전업 주부보다 오늘날 일하는 여성들이 가계의 수입을 증대시킨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전체 가계 소득의 증대와 동시에 매달 사용할 수 밖에 없는 고정비용 역시도 증가했고 이로 인해 실질적인 여유자금은 더욱 감소한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또한, 저자들은 과거 전업 주부로서의 여성은 남편의 실직 등으로 인한 소득 상실시 언제라도 노동할 수 있는 예비 근로자로서, 가족 구성원 중 아픈 사람이 존재한다면 무료로 그를 간호할 수 있는 예비 간호사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보고 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은 과거 전업주부에 의해 무료로 제공되던 이러한 서비스들이 더 이상 불가능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정을 버리고 사회로 진출한 여성들을 다시 가정으로 돌려보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한 가정은 고정비용 조차 감당하지 못해 경제고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여성의 노동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맞벌이를 통해 벌어들이는 그 많고 많은 소득에도 불구하고 왜 오늘날 파산하는 이들이 그리도 많단 말인가? 저자는 교육으로부터 그 이유를 찾고 있다. 오늘날 교육은 중산층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매김한지 오래다. 부모는 자신의 자녀가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좋은 학교에 진학하길 바라고, 이를 위해 부모는 좋은 학교가 존재하는 좋은 학군으로, 경제적으로 무리를 해서라도 이사를 감행한다. 매달 감당해야 되는 집세와 자신의 직장생활을 위한 차량 유지비 등으로 인해 오늘날의 중산층들은 굳이 과소비를 하지 않아도 파산의 위기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한가지 더, 대출조건의 완화 등 보다 시장 질서에 부합하는 정책이라며 정부가 내세우는 정책들이 중산층의 파산을 독촉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과거에는 집값의 30%에 해당하는 돈을 갖고 있어야 모기지 대출이 가능했으나, 이제는 3% 정도의 돈만 있어도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NCBC 가 내세운 소비자 파산신청 권리 제한이 결과적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을 파산의 늪으로 몰아넣으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것이다. 지금 당장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는 이에게 카드 융자를 통해 빚을 갚을 수 있다고 제안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지만, 그 유혹은 실로 달콤하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금융회사들이 이러한 비윤리적인 방법을 통해 많은 이윤을 얻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사회복지제도는 여전히 많은 논란을 끌고 다닌다. 한 개인의 경제적 어려움은 그 사람의 나태, 과소비 등으로부터 비롯되며 복지에의 집착은 개인으로 하여금 노동에 대한 동기를 저하시킨다고 많은 이들은 주장해왔다. 그렇기에 많은 사회는 정말 빈곤한, 그냥 놔두면 우리 사회의 안전에 위협이 될 정도의 빈곤층에 대한 복지제도를 운영하는 것으로 자신의 몫을 다했노라고 말한다. 과거와 같았으면 이는 문제될 리가 없겠지만, 오늘날과 같이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현실이 지속되는 속에서 이는 충분한 사회적 안전망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기존의 중산층은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체 신 빈곤층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계층을 형성할 뿐이다.

이러한 비극적인 현실에 대해 저자는 간단하면서도 명확한 논조로 이야기한다. 교육과 의료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통한 이들 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전제되어야만 지금의 파산 경쟁(!)은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또한, 직접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목소리를 내는 속에서만이 지금의 맞벌이의 함정을 벗어날 수 있다고 말이다. (이는 단지 미국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역자가 책의 말미에서 우리나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을 찬찬히 읽어보길 권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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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슈렉 2의 반데라스 고양이 눈 총총 버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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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플라시보 > 영화속 그녀들과 그들의 차이

예전에 리허설이라는 한국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터프가이 최민수(정말이지 진부해 죽겠다.) 와 모델 박영선 (앙드레 김의 패션쇼 단골 모델로 한복 8겹 입고 차례로 벗어던지기 쇼의 1인자였으나 지금은 뭘 하는지 통 보이질 않는다.) 이 나오는 영화인데 내용은 이러하다.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말보로를 피우며 잭다니엘을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키는 마초 최민수는 연극 무대에서 박영선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박영선은 오르가즘을 소재로 한 연극의 주인공인데 신음소리가 일품인 여자이다. 최민수는 마초답게 박영선에게 사귀기를 제안하는 구차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그녀를 바로 덮친다. 일을 보다가 생각지도 못하게 당한 박영선은 처음에는 반항을 좀 했으나 이내 최민수와 하는게 너무 좋음을 알게 되고 둘은 그때부터 서로를 탐닉하다가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 영화에서 두 남녀는 그야말로 눈만 마주치면 삐리리 해서는 서로를 안고 자빠진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백번을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하지 못하는게 있다면 바로 강간한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제정신이 아닌 여자라 하더라도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남자한테 당하고 싶은 여자는 없다. 그러나 이 여자는 자신을 강간한 남자를 사랑씩이나 하게 된다. 이건 자칫하면 강간을 하던 뭘 하던 화려한 테크닉과 넘치는 힘으로 소위 홍콩만 보내주면 여자가 자기를 사랑하게 된다는 위험한 생각을 가지게 한다.

이상하게도 영화에서 강간을 당한 여성들은 하나같이 너무 멀쩡하다. 얼머전 칸에까지 갔다온 홍상수 감독의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성현아 역시 강간을 당했으나 자기 남자친구에게 마치 ‘나 친구들이랑 놀러 갔다 왔다’ 정도의 심드렁한 말투로 고백을 한 다음 남자친구와 섹스를 하면서 ‘나 정말 깨끗해 지는거지?’ 하고 반문한다.(그 이전에 남자친구가 나와 섹스를 하면 강간을 당한 니 몸이 깨끗해진다고 말한다.) 비록 미친년이라는 설정이 있기는 하지만 꽃잎에서의 이정현도 자신을 강간을 남자를 따라가서 지내며 나쁜남자에서는 아예 강간을 가능토록 한 남자를 위해(자기가 강간한 것은 아니지만 멀쩡하던 여대생을 하루아침에 사창가에 묶어놓고 처음인 그녀가 손님에게 강재로 당하도록 한다.)기꺼이 창녀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영화에서 강간은 최소한 아무일 없이 넘어가거나 아니면 강간을 당한 여성이 남성을 좋아하게 혹은 받아들이게 되어있다. 이러니 강간에 대한 판타지가 안생기고 베기겠는가.


이래서인지 강간으로 고소를 당한 남자들이 하나같이 주장하는 것이 ‘그녀도 좋아했었다.’(더욱 역겹게는 젖어 있었다 어쩌고 한다.) 이다. 하지만 그들의 역겨운 주장처럼 설사 몸의 반응이 그러하다 하더라도 강간은 엄연한 강간이다.


그런데 남자들을 강간한 영화들은 그렇지 않다. 영화 슬리퍼즈를 보면 강간을 당한 남자 아이들은 결국에는 복수를 하며 신부님도 강간한 자를 살해한 것을 눈감아 줄 정도이다. 이렇게 복수를 하는 타입이 있는가 하면 또 희대의 살인을 저지르는 잔혹한 악마가 되기도 한다.(더셀, 미스틱 리버, 양들의 침묵, 프라이멀 피어 등의 영화를 보면 굳이 강간이 아닌 성적 학대만 받아도 남자는 충분히 살인마와 괴물이 된다.) 즉 남자는 영화에서 강간을 당하면 절대로 멀쩡하지 않다. 복수를 하거나 아니면 괴물이 되어버린다. 좀 극단적으로 여자가 강간을 당하는 영화와 남자가 강간을 당하는 영화를 비교해 보자면 여자는 강간을 당해도 괜찮지만 남자가 강간을 당하면 큰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여자가 강간을 당하고 난 다음 선택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삶. 아니면 창녀이다. 


남자들은 가끔 강압적으로 하는 섹스가 자신을 남성답게 보이게 하리라는 착각을 하는 것 같다. 남자들은 어제도 오늘도 싫다고 하는 여자를 덮치고 또 덮친다.(배우자 사이에도 엄연히 강간이 존재하지만 내 여자 내가 데리고 하는데 왜 라는 오랜 악습은 좀처럼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과거 아동학대라는 개념이 희박했을때 자기 자식을 개패듯 패면서도 내새끼 내가 잡겠다는데 왜 라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리허설처럼 쓰레기 같은 영화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자는 은근히 남자가 강간해 주기를 바란다’라고 생각하는 인간들도 있다.


나는 영화에서 무조건 남녀가 평등하게 등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조디 포스터가 나왔던 피고인 같은 영화가 강간당한 여자들이 강간한 남자를 사랑하거나 심지어 그를 위해 창녀가 되는 영화보다는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자만 강간을 당한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게 아니라 여자도 마찬가지다. 둘 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걸 가지고 항문과 질의 차이라고 헛소리를 해댄다면 대체 질보다 항문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그 발상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참으로 궁금하다.)


아직도 여자를 강간할 때 등짝에 돌을 끼운다음 여자가 돌을 빼고 하자고 하면 강간이 아니고 바닥에서 강간할 때 신문지라도 깔자고 하면 강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족속들이 있다는 것이 나로 하여금 이런 글을 쓰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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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퍼온글] 라파엘로 Sanzio Raffaello (4)



르네상스 정점에 선 거장(巨匠)
라파엘로
Sanzio Raffaello(1483~1520)

 


천사

  확실히 라파엘로의 작품이라고 인정되는 최초의 그림이다. 이 작품에서 그의 스승이었던 페루지노의 감미롭고 품위있는 표현의 영향을 볼 수 있으나, 라파엘로는 이 그림을 제작하기 이전에 레오나르도와 접촉이 있었고, 그의 작품을 열심히 연구한 바 있어, 작품의 고귀한 풍은 이러한 관계에서 생각해 볼 일이다. 이 작품은 1500년 12월 10일 카스텔로시의 성 아우고스티노 성당의 예배당 제단화(祭壇畵)로 제작이 의뢰된 것이나, 1789년의 지진으로 제단화는 손상되고, 그 후 남아 있는 부분이 이 그림의 <천사>이다.


聖세바스티아누스

  구도적인 짜임새와 안정감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림이다. 순교자 성세바스티아누스를 초상화로 시대 적인 인물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인물의 세속적인 측면은 부분적으로 장식화된 의상의 특징을 강조한데서 엿보이고, 또한 성자를 실제로 모델삼아 묘사한 듯이,머리의 사실적인 표출과 그 세부적인 묘사가 현실감을 나타내주고 있다. 그러나 인물의 개성적인면이 라파엘로에게 중요시되어 그 성품의 표현을 보게 한다. 온화하고 체념된 표정은 세속적인 탐욕을 멀리하고 있는 눈빛과 정적인 성자의 자세에서 엿보게 하고 있다. 이 부드러운 성자의 모습은 평온한 느낌을 주게 하는 채색과, 배경이 되고 있는 적막한 자연의 평온한 전개로 이루어지고 있다. 라파엘로의 젊은 시대가 이 작품으로 표상되고 있는 것이다.


성모의 대관(戴冠)

  이 작품은 라파엘로가 페루지아에서 머물고 있었던 시대의 후기에 제작된 것이다. 특히 작품의 구도면에서 그가 영향받은 페루지노와 핀투릭키오의 흔적이 뚜렷하다. 화면이 상하로 이등분되어 각기 독립적인 구성이 돼 있고, 또한 양면이 분리될 수 없는 내용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라파엘로 고유의 표현은 지상의 많은 성자들의 개성적인 표정에 있고 정적이고 온화한 자세에서 다시 엿볼 수 있다. 그림의 주제가 어떻든 라파엘로는 항상 채색면에서 부드럽고 감미로운 색감과 색조를 나타내며 명쾌함을 주고 있다. 이 그림의 유래는 페루지아의 명문(名門)의 여인 오디의 의뢰로 당시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을 위하여 제작된 것이다. 1797년 프랑스 군은 이 그림을 파리로 약탈해 갔으나, 1815년에 이탈리아로 반환되어 바티칸 궁에 소장되어졌다.


레오 X世와 두 추기경의 초상

  이 초상화는 라파엘로의 만년의 작품이며, 또한 초상화로서의 그 사실성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 사실성은 인물의 심리적 묘사를 질감 표출과 세부적 사실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의상의 질감은 촉각적 성격까지 유발시키고 있으며, 탁자 위의 서적과 초인종의 세부적인면은 정밀묘사 기법까지 등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는 라파엘로 화풍의 고유한 고전적인 고귀성과 우아함이 없고, 감각적이고 세속적인 리얼리티가 지배하고 있다. 레오 10세 우측 후면에 있는 인물은 그의 친척인 줄리오 데 메디치이며 훗일 클레멘스 7세 교황이 된다. 또한 좌측 후면에는 레오 10세의 비서를 볼 수 있다. 3인의 위치를 보아 삼각형의 구도로 보이나 각자의 방향은 다르고 표정과 자세도 상이하여 일종의 불안전감을 분위기에서 느끼게 하여 준다. 


알랙산드리아 聖女 카다리나

SANTA CHTERINA DALESSANDRIA

1508년 판 油彩 71.5×55.7Cm

런던 국립 미술관 소장



자화상

  이 자화상은 라파엘로가 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암법을 배우고 있을 무렵에 제작한 것이라 추측되는 것으로, 1506년 후반에 해당된다. 따라서 화가가 23세 때에 그린 것이고 청년기의 그의 모습을 여기서 볼 수 있다. 온화하고 청순한 용모와 부드러운 눈길 등은 라파엘로의 청년기의 작품에 공통된 특색이다. 이 시기의 그의 많은 작품 중에서 이 자화상만큼 인간미의 이상적인 표현이 엿보여지는 작품이 드물다. 단조로운 색조의 배경과 검은 단일색으로 표출한 채색은 수식 없는 자신의 참된 모습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 방법이다. 차분한 채색 분위기는 인물 표정에 초점을 두고 성품의 선명한 표출과 안면의 선을 뚜렷하게 하여 준다. 르네상스의 고상한 정신은 이와 같은 라파엘로 자신의 모습에서 상징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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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퍼온글] 라파엘로 Sanzio Raffaello (3)




르네상스 정점에 선 거장(巨匠)
라파엘로
Sanzio Raffaello(1483~1520)

 




聖게오르기우스와 惡龍

  같은 주제의 일련의 작품이 있는데, 그 중의 일부가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의 주제는 성인전에서 발취한 것이다. 그는 3세기 로마의 군인이었고,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에서 악룡을 퇴치하여 왕녀를 구출하고, 이 나라를 기독교로 개종케 하였다. 그러나, 그는 로마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를 받고 참수(斬首)되었다. 이 그림에서 보여지는 소녀는 카파도키아의 왕녀이며, 이야기의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이 작품은 서정적인 성격을 나타내었고, 또 이점이 라파엘로의 독특한 정취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작품은 다분히 설명적이고 또 지역적인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라파엘로 미술에서 특징이 되고 있는 정적인 면이 왕녀에 반영되고, 이에 동적인 성 게오르기우스로 대조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매장(埋葬)

  이 작품의 제작 과정은 많은 밑그림과 구상이 필요하였고, 또한 완성된 성과에 대한 논리도 많았다. 이 작품을 제작할 무렵의 라파엘로의 화풍은 극히 종교적인 명상과 고귀한 정관의 경향이었음에 비하여, 이 그림은 너무나 동적이고 격정적이며, 극적인 세속성까지 표출되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라파엘로 작품에서 특성이 되고 있는 구도의 통일성과 그 간결한 일체성은 여기서 찾아볼 수 없고, 사방으로 분산되는 동세로 복잡한 선을 구성하고 있다. 부드러운 음율적인 선은 여기서 찾아볼 길이 없다. 그리스도의 사체는 미켈란젤로의 < 피에타 像>을 연상시키며, 한편 기절한 성모를 떠받들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같은 작가의 <聖家族>에서 빌어온 상이라고 한다. 미켈란젤로의 영향이 어느 정도 사실인지는 모르나, 지적된 점은 양자의 관계를 시사해 준다.


젊은 부인의 초상

  이 작품은 <라 그라비다> 초상화 제작 시기와 같은 때에 그려진 또 하나의 여인 초상화이다. 여인의 의상, 손 등 여러 부분이 손상되어 수정이 가해진 상태의 그림이다. 특히 여인이 안고 있는 순결을 상징하는 일각수도 손상되어 그 흔적이 아직도 역역하다. 작품의 구성은 <모나리자>를 연상시키고 있으며, 이에 다 빈치의 영향을 생각하게 한다. 구도는 배경에 좌우로 원주를 두고 여인의 좌상이 크게 중간에 배치하고 있다. 따라서, 방향은 실내에서 외부로 향하게 된다. 여인의 격(格)있는 의상과 장신구, 머리의 질감, 개성 있는 얼굴의 표정 등이, 모델이 되고 있는 여인의 품위를 알려 주고 있다. 넓게 멀리 내다보이는 자연과 하늘은 원근의 법칙에서 인물상을 돋보이게 한다.

 

부인의 초상

  라파엘로가 피렌체에 와서 감명 받은 것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 <모나리자>였다. 1505년부터 6년에 걸쳐 제작한 라파엘로의 초상화 작품은 이러한 감명 밑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또한 여기에 소개되고 있는 초상화도 그 하나인 것이다. 이 그림의 별제(別題)인 < 라 그라비다>는 수태(受胎)한 여인이라는 뜻이며, 라파엘로는 임신한 여인을 모델로 삼고 있다. 모델이 되고 있는 여인의 자세는 부자연스러우나, 세속적인 평범한 상과 그 표정이 인물의 성격을 나타내 주고 있다. 온화한 색조와 의상의 구체성이 인물을 개성화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세 또한 인물을 간접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이 초상화는 배경이 배제되어 인물이 더욱 부상되고 있다.


騎士의 꿈

  이 작품의 주제는 '악덕과 미덕 사이에 있는 헤라클레스' 또 기타 몇 주제로 해석되고 있다. 우의적(友誼 的)인 이 그림은 라파엘로가 성숙기에 다가서고 있는 시기의 것으로, 후기 그의 미술의 능숙한 표현력을 엿 보게 하여 준다. 라파엘로 미술의 발전은 그의 성장 과정의 도표로 볼 수 있는 우르비노, 페루지아, 피렌체 시 등으로 엮어진다. 따라서, 이 작품은 라파엘로가 피렌체로 옮겨 갈 무렵의 것이라 할 수 있다. 화면은 중심에 나무 하나가 배치되어 좌우로 정확히 양분되어 있고, 그 밑에 기사가 누워 있으며, 또 좌우로 인물이 배치되어 삼각형의 구도를 나타내고 있다. 이 삼각형 구도를 통하여, 농촌의 풍경이 넓게 전개되고 원근법이 이에 적용되고 있다. 간결한 구성과 시정(詩情), 그리고 환상이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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