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슬지 않는 세계
김아직 지음 / 북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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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이드는, 로봇은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은퇴한 노신부 레미지오는 비 오는 어느 밤, 병자성사를 요청 받는다. 병자성사를 요청한 신도는 루치아. 레미지오는 자신이 이제 늙고 치매 증상도 있어 쓸모없는 존재라는 느낌을 받던 터라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성사라 여기고 비 오는 거리를 헤치고 달려가 루치아에게 병자성사를 내린다.


성사를 받은 대상은 누구이든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인간이 아니라 개나 고양이라든지 염소나 원숭이라든지 아니면 로봇이라든지 말이다. 천국에 갈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오로지 인간이여야만 하는 걸까? 인간이 가장 잔인한 존재임에도 인간이기 때문에 천국의 문이 열려 있단 말인가. 


레미지오는 병자성사를 집전한 후 루치아가 인간이 아닌 안드로이드임을 깨닫는다. 루치아가 자신은 그 자체로 유효한 은총의 예식을 받았으니 천국에 갈 수 있다 말하지만 레미지오는 계속해서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너는 천국에 갈 수 없다 외쳤다. 기계가 갈 수 있는 천국을 찾아보든지. 


레미지오는 요양촌의 책임자인 묜시놀 유안석에게 자신이 로봇에게 성사를 내린 사실을 말한 뒤 사라졌다. 보수적인 기독교 종파의 일원인 유안석은 제이에게 사라진 로봇 루치아와 레미지오를 찾으라고 명령한다. 선택받은 자들의 도시인 메가시티에서 기억을 잃은 채 유안석의 수하로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제이는 루치아와 레미지오를 찾으며 놀랍고 새로운 사실들을 알아가게 되는데...


인간이 로봇에게 성사를 내린 게 어째서 큰일이 되는걸까. 다름을 틀림으로 해석하고, 배척하는 것을 신의 뜻이라고 의미 지어 권력을 얻기 때문이겠지. 이것이 유안석이 몸담고 있는 근본주의 교회의 모습이었다. 중세 시대에 휘둘렀던 '마녀의 망치(말레우스 말레피카룸)'를 이 시대로 불러내어 '안드로이드'에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새로운 마녀의 출현이었다. 감히 신의 피조물인 인간의 자리를 탐냈다는 이유로 루치아 아니 루시는 근본주의 교회의 추격을 받았고, 보통의 생각과는 다른 사고 회로를 가지고 있는 루시는 다소 엉뚱한 방향으로 일을 해결하고, 제이는 자신이 거짓 세계에 살고 있었단 사실을 깨닫는다.


여자는 죄악이라고 생각하면서 제이를 이용하고, 일자리든 천국의 자리든 인간의 자리를 대체한다고 여겨지는 안드로이드는 죄악이자 마녀라고 생각하면서 강화인간을 만드는 그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정말 신이 있다면 그들을 칭찬하기는커녕 그들에게 가장 깊숙한 지옥에 자리를 마련해두지 않았을까.


마지막에 '녹슬지 않는 세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듯 하지만, 난 그 미래가 너무나 가슴 아팠다. '영원'을 말할 만한 가치가 과연 존재하는 지 알 수 없었기에. '영원'은 결국 혼자 살아남는 것을 뜻할테니, 아끼고 사랑하던 모든 존재들을 떠나보내야만 할테니. 그리하여 인간의 천국에 들려던 로봇은 오히려 지상의 천국을 잠시 엿보고 영원의 지옥에 들어선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아니면 그 '녹슬지 않는 세계'가 기계들의 천국일까.


세상에 '구원'은 있는지, 천국에는 누가 갈 수 있는지, 나는 어떤 '천국'을 꿈꾸는 지, 어떤 가치를 가슴 속에 품고 살아야 하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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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백수의 크리스마스 NEON SIGN 1
조동신 지음 / 네오픽션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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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러리 퀸을 좋아하는, 비밀을 가진 권 사장과 누나 집에 얹혀 사는 백수였던 오만의 유쾌한 탐정 수사. 그리고 권 사장의 까페인 E퀸의 알바생 지희까지 힘을 합쳐 사건을 해결하는데, 가볍다면 가볍고 무겁다면 무거울 사건들을 기분 좋게 풀어나간다. 안타까운 사연도 있으나 결말이 좋았다. 오만의 결말 역시. 모두의 힘든 일도 잘 풀리면 좋겠다.

다만, 누나의 시어머니께 오만이 사부인 이라고 해서 놀랐다. 사돈 어른이 맞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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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미용실 - 교제 살인은 반드시 처단되어야 한다
박성신 지음 / 북오션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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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세간에 데이트 폭력이라고들 하는 범죄를 다루고 있다. 데이트 폭력이라고 하면 뭔가 개인적이고 덜 폭력적으로 느껴지는데, 이를 교제살인이라고 하면 뭔가 더 잔인한 범죄처럼 느껴진다. 살인이라는 말 때문인걸까. 


요즘 사적제재가 큰 이슈이다. 각종 드라마나 영화들도 소재로 삼고 있고, 유튜버들은 20년 전 일어났던 끔찍한 사건 가해자들을 폭로한다고 난리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피해자가 직접 가해자를 처단할 때는 너무 안타깝고, 제 3자가 피해자 대신 가해자를 벌 줄 때는 과연 피해자는 괜찮아지는 걸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언제나 늘 피해자보다는 가해자나, 죄를 지은 사람이 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하는 제 3자의 욕망이 더 중요시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사람들이 사적(私敵)으로 복수를 하려고 하는 이유는 사법(司法)이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일 확률이 높다. 사적 복수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고, 주로 가벼운 벌을 받거나 법망을 피한 가해자는 권력이나 돈을 쥐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런 부조리에 사람들은 분노한다. 


로라미용실은 무산에 있는 미용실이고 탐정이 있다. 25년 전 교제 살인으로 엄마를 잃은 찬서는 경찰을 그만두고 무산으로 왔다. 엄마를 죽인 범인이 곧 출소하기 때문에 복수를 하려는 이유였다. 삶의 목표가 복수라니, 가슴이 아팠다. 복수라는 목표가 있었기에 찬서가 경찰이 되고 살아있을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 더 가슴이 아팠다. 웃지 않는, 아니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단련한 몸, 상대가 거짓을 말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 가려내는 눈을 가진 사람. 찬서는 그런 사람이었다. 


복수를 위해 무산으로 왔지만 찬서는 로라미용실을 알고 탐정으로 일하게 되면서 점점 사람다워진다. 그녀가 맡은 사건들이 모두 끔찍했으나, 로라미용실의 정 원장, 가해자의 가족이었던 세린과 함께 피해자들을 도우며 인간적인 감정이 되살아나는 듯 보였다.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했기에 더 끔찍했다. 정말 옛날에는 자신을 성폭행 하려 했던 사람이랑 결혼하라는 판사도 있었으니, 어떻게 피해자가 제정신으로 살 수 있었을까.


각각의 사건들 속에서 진심으로 뉘우치는 가해자는 없었다. 어떻게 가해자들은 그렇게 뻔뻔할까. 유부남이면서 총각인 척 찬서의 엄마를 꼬셨던 남자는 이별 통보에 그녀를 찌르고 불을 질렀다. 감방에 갔다 와서는 모든 것이 찬서의 엄마 탓이라고. 왜 내 사랑을 받아주지 않았냐고. 헤어짐을 받아들이지 못한 남자들은 여자를 스토킹하고 급기야는 살해하려 했다. 거절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살았고, 찬서는 그런 그들을 응징한다.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아 후배들에게 성폭행을 지시한 남자는 그녀와 결혼하며 결혼하면 나를 좋아해줄 줄 알았다라고. 


일련의 사건들을 해결하면서 찬서는 복수에 한 발짝씩 다가간다. 살인자의 아들이 운영하는 이자카야에 드나들며 가해자의 가족에 대해 생각한다. 만약 가해자가 아니더라도 가해자의 가족 중 누군가가 진심으로 사죄하고 참회하면 피해자의 마음은 좀 풀릴 수 있을까. 아니면 가해자의 가족도 그 가해자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이니 피해자와 공감이 가능할까.


부디 찬서가 분노와 고통에서 벗어나길 바라지만, 그럴 수 있을까.


덧붙이자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면 운동 하나씩은 하면 좋겠다. 스트레스 훈련이라는 것도 있던데, 이 훈련은 극단적 상황이 되면 사람은 몸이 얼어붙기 마련인 상황을 연습을 통해 극복하도록 한다. 몸이 얼어붙을 상황에서도 움직일 수 있다면 적어도 도망칠 수는 있지 않을까. 저 놈들이 약한 이들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니 그렇게 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는 세상이라 화가 난다. 


사법기관이 고민을 많이 해서 이런 끔찍한 범죄가 줄어들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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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6-13 04: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복수해도 얻을 건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피해자 식구는 다르겠지요 피해자나 피해자 식구한테는 관심을 가져야 할 텐데... 남을 속이고 사귀고 죽이기까지 하다니... 그런 사람도 없어야 하는데...


희선

꼬마요정 2024-06-13 10:11   좋아요 1 | URL
복수가 해답은 아니지만, 피해자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시스템이 부족하다면 피해자는 복수하고 싶을 것 같아요. 정말 저런 나쁜 놈들은 없어져야 합니다!! 너무 슬퍼요.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물건 취급을 하는 거잖아요ㅠㅠ

stella.K 2024-06-13 1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으려고 대기중에 있는데 그런 내용이군요. 정말 우리나라 사법체계는 넘 문제가 많기도 하지만 쉬쉬하는 가족들도 문제가 많아요. 얼마 전 양할아버지가 양손녀를 낮잠 잘 때 범했는데 가족이 처벌을 원치않아 무혐의 처리됐다고 하던데 그런 것과 상관없이 법의 엄중함을 보여야하잖나요? 그 아이가 어떻게 자랄지 걱정되더군요.

꼬마요정 2024-06-13 16:59   좋아요 1 | URL
맞아요!! 가해자는 무조건 나쁜 거고, 피해자 가족들 문제 많아요ㅠㅠ 피해자를 보듬어주고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지, 부끄럽다고 쉬쉬하는 거 진짜 나빠요!!! 그 양할아버지 미친 거 아니에요? 그 아이는 어쩌나요ㅠㅠ 자기 잘못이라 느낄텐데ㅠㅠ 진짜 어른들이 더 나쁩니다. 나이가 어리든 많든 그런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죠. 어리면 앞날이 창창해서 봐주고, 나이가 많으면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봐주고... 그럼 피해자는 어쩌라고 말입니다. 피해자는 앞으로 어떻게 살라는 건지.... 화가 나네요!!!!

단발머리 2024-06-14 1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런 극단적인 피해가 여전한 이유는 사법당국의 무책임한 대응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술 먹었다고 정상참작되고, 우발적이었다고 변명하고, 기껏해야 몇 년 살고 그것도 집유로 풀려난다면... 피해자들의 억울함은 어쩔까 싶습니다. 문제는 이게 공기처럼 ㅜㅜㅜㅜ 20대 여성들의 공포를 사회는 정말 모르는 걸까요.
삶의 목표가 복수라는 말, 너무 아프네요. 오직하면 사적 복수를 다짐할까요.....

꼬마요정 2024-06-14 22:08   좋아요 1 | URL
우리나라는 가해자를 너~무 염려해 주더라구요. 반성도 재판부에 하면 형량 줄여주고 피해자가 싫다고 해도 공탁하면 또 줄여주고 앞날이 창창하다고 줄여주고... 비단 20대 여성들만이 아니라 30대 이상의 여성들도 무서운 것 같아요ㅠㅠㅠㅠ. 화장실이나 탈의실에 불법카메라나 설치하고... 아니, 볼일 보는 거 보면 흥분되나요? 진짜 이상해요ㅠㅠ

정말 사적 복수할 능력이 없으면 내 삶을 던져서라도 가해자를 찌르고 싶은 심정이지 않을까요ㅠㅠ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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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릴 때부터 회나 멍게, 해삼 같은 해산물을 무척 좋아했다. 그런데 엄마 따라 친척 계모임이 열린 횟집에 갔다가 충격을 받았는데, 생선 머리가 달린 채 회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날 이후 한동안 회를 먹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다시 회를 먹기 시작했지만 생선 머리가 달린 회는 먹기 힘들다. 안 보인다고 그 생선의 죽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안 보이면 마음이 좀 더 편안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있는 것을 먹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을 잘 알기에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화장품이나 가방 등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게 아닌 것들은 비건이나 동물 실험 안 한 제품들을 사려고 한다. 그리고 나의 이런 마음은 어쩌면 비겁한 것도 같지만 또 나름의 행동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 책에서 문어를 만나, 아니 외계 문어를 만나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는 말을 듣고, 대게를 만나 러시아 어로 '도와주시오'란 말을 듣고 사연을 알게 되면, 웃기면서도 허탈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생선 머리를 앞에 두고 눈을 감는다고 해서 생선의 죽음이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문어가 말을 하고 대게가 술을 마신다 해서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 뒤에 수많은 문어와 대게의 눈물이 없어지지 않는다. 또한 그런 어처구니 없어 보이는 이야기들 뒤에 약하고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의 눈물이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의 화자인 '나'가 해양정보과로 끌려가면서 지독한 비린내에 멀미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비린내가 검은 덩어리들, 문어 등 해양정보과와 관련된 이들 특유의 비린내 일수도 있지만, 비정규직 강사였다가 노조의 일원이었다가 가족 내에서는 돌봄 종사자가 되어버린 자신의 상황에 대한 것일지도 모른다. 눈 감을 수 없어 행동하지만, 성공을 보장할 수 없어 허탈한 그런 상황 말이다. 


<문어>는 <그리고 문어가 나타났다>에 실린 단편이다. 강사법 때문에 농성을 하던 위원장님이 난데없이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고 말하는 문어를 잡아 먹었다. 그러면서 해양정보과라는 곳을 알게 되고, 문어에 얽힌 이야기들을 알게 되고, 더 나아가 위원장님과 '나'가 인연을 쌓고 연인이 되었다. 


한 번 인연을 맺은 해산물(?)은 꾸준했다. 문어 문제가 해결되자 이번에는 대게가 나타났다. <대게>는 '나'가 수산 시장에 해산물을 사러 갔다가 러시아 어로 구해달라고 말하는 대게를 사 오면서, 그것도 손질하지 않은 채로 사 오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이 대게의 이름은 '예브게니'. 푸시킨의 작품 <예브게니 오네긴>이 아니라 <청동기마상>에서 가져왔다고. 오네긴의 예브게니가 아니라 페테르부르크에서 절망한 예브게니라니, 비극적이지만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후회보다는 절망 속에서도 행동하는 모습이 닮았다고나 할까. 어쨌든 예브게니 대게는 먹성도 좋고, 술도 잘 마셔서 이제는 남편이 된 위원장님과 죽이 잘 맞았다. '아닐 비(非)'자로 뻗은 채 헤롱거리던 예브게니는 알고 보니 장기 집권 중인 러시아 대통령 모 씨의 감언이설에 속아 한국까지 잡혀온 것이다. 이 눈물겨운 이야기를 듣던 위원장님은 대게더러 조직을 만들어 원하는 바를 전달하라고 하지만, 인간인 그들이 말해도 들어주지 않는데 하물며 대게가 말을 하면 전부 잡아 삶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않을까. 한창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던 때, 어찌 알고 왔는지 해양정보과의 검은 양복들이 나타났다. '나'와 남편은 또 그들에게 연행되었고, 지독한 비린내와 함께 풀려났다. 대게들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상어>는 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있는 해양 생물을 만난 이야기이다. 남편의 암이 재발한데다 시어머니 역시 응급수술을 받았다. 정신없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가던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옆 침대 아저씨가 건넨 명함의 주소지를 찾았다. 무슨 바이오 기술을 이용하여 암도 고친다는 그 곳은 거대한 수조였고, 앞서 만난 예브게니와 닮은 대게와 상어 등 많은 해양 생물들을 만났다. 바이오는 개뿔, 그들은 그 곳에 갇힌 채 인간의 보양식을 위한 약재로 쓰일 것이었다. 역시 인간이란 지극히 이기적인 존재라는 생각이 들 때 또 다시 등장한 검은 양복들이 이처럼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행히 남편과 시어머니 역시 퇴원했다. 


<개복치>는 화자인 '나'의 시조카 선우의 모험담이다. 순수한 아이는 자신과 다른 존재를 미끄덩한 느낌과 비린내를 불편해하면서도 받아들였다. 처음에 개복치를 알지 못할 때에는 그저 물컹하고 비린 존재였으나 함께 모험을 떠나 '예브게니'를 만난 뒤에 선우는 개복치의 물컹함이 싫지만은 않았다. 작은 어머니에게 개복치를 만나고 예브게니를 만난 이야기를 전해주면 좋으련만. 앞서 나온 예브게니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해파리>는 이제 드디어 우주 및 지구의 해양 생물들의 인정을 받은 '나'의 이야기이다. 바다도 없는 고속도로 쉼터에서 잠깐 잠들었던 '나'는 해파리와 접응했다. '나'와 남편은 구미에서 한국의 혜택은 다 받으면서 세금도 안 내던 국제 기업이 노동자들 마저 해고하려 하자 그것을 막기 위해 있었던 집회에 갔다. 이것은 마치 살해당했거나 위험에 처한 해양 생물들이 해파리를 통해 신호를 주고 받는 것 같은 절박함이었다. 우리, 아니 모두의 바다에 오염수를 방출해서 고통받는 생명들은 얼마일 것이며, 북한이 쏜 미사일이 '다행히' 바다에 빠졌다고 하지만 그 미사일로 인해 피해 입은 생명들은 얼마일 것이며, 우크라이나가 흑해에서 파괴한 러시아 미사일들이 만들어 낸 물기둥 뒤로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죽었을 것이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침공하면서 또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죽을 것인가. 각종 세제 혜택 등을 받은 국제 기업이 지켜야 할 것은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것인데 자신들의 배를 불리고자 노동자들을 해고하면 그들은 어떻게 먹고 살 것이며, 그 땅을 기업에게 내주면서 그 곳 노동자들에게 먹을 거리 등을 팔던 자영업자는 어떻게 먹고 살 것이며, 암에 걸린 환자의 절박함을 이용하여 신기술이랍시고 돈을 뜯어가는 사기꾼들 때문에 병원비마저 날린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게 인간은 지구도, 지구상에 사는 다른 생명체들도, 같은 인간마저도 나락으로 끌고 가는 종인 것만 같아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마지막 단편인 <고래>가 마음에 남았다. 구룡포에 있는 귀여운 해치가 인간의 더러운 욕망을 정화시켜 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판도라의 상자에 남은 것은 희망이었다.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이제 더 이상 지구에 살 수 없다 생각한 생물들이 지구를 탈출한다 하더라도, 지구를 망가뜨리는 데 일조한 권력자들이 먼저 탈출한다 하더라도 지킬 것이 있는 이들은 저항하고 싸울 것이다. 아무리 힘들다 하더라도 분명 나아지는 부분들은 있었으니, 희망을 잃지 않고 저항하면 다음 세대에게 조금은 덜 망쳐진 지구를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쟈(남편을 뜻한다)는 교수가 될 줄 알았는데 빨갱이가 돼가지고 데모하는 게 뉴스에 나오더니 이제는 게한테까지 데모하는 걸 가르치고 남세스러워서 원..."
어머니가 이렇게 불평하셨고 대게가 러시아 출신이므로 아마도 원래 빨갱이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려드려야 하는지 내가 고민하는 사이에 ‘너도 얼른 자라‘ 하시더니 안방으로 표표히 들어가 문을 닫으셨다. - P63

(권력기관은 인간이 만들었지만 인간의 생명조차 존중하지 않아요. 인간이 아닌 생물도 똑같이 이 지구에서 살아갈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거예요.) - P84

"이길 것 같아 싸우는 건 아니잖아요."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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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an 2024-06-11 0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주토끼‘와 ‘고통에 관하여‘를 읽으며 정보라 작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는 제목을 보고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꼬마요정님의 리뷰를 보니 빨리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꼬마요정 2024-06-11 09:59   좋아요 1 | URL
제목이 신기해서 저도 읽게 되었어요. 물론 정보라 작가의 책이라는 점이 제일 큰 이유지만요. 읽는데 웃기지만 씁쓸하더라구요. 작가 개인의 삶이 많이 녹아있는 작품이라 더 안타까웠구요. 그런데 그렇게 무거울 수 있는 이야기를 이렇게 재미있게 풀어내다니... 재밌게 읽었습니다. 코난 님도 재밌으셨으면 좋겠어요.

오늘 날이 많이 덥다는데, 건강 유의하시구요, 즐거운 독서 하시기 바랍니다^^

단발머리 2024-06-14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대게>편이 참 좋더라구요. 대게가 진짜 살아있는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어요. 같은 시기에 같은 책을 읽는 기쁨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꼬마요정님 서재에서 제가 맘껏 누립니다^^

꼬마요정 2024-06-14 22:14   좋아요 0 | URL
아아 단발머리 님!! 저도 <대게>편이 참 좋았어요. 예브게니 대게가 행복해지면 좋겠어요. (인간은 나빠요!!) 같은 시기에 같은 책을 읽고 같이 좋아하다니!!! 너무 기뻐요!!^^ 저도 단발머리 님 서재로 쓩 가서 누릴래요!! ㅎㅎㅎ
 
카카듀 - 경성 제일 끽다점
박서련 지음 / 안온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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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어 슈니츨러가 쓴 <초록 앵무새(원제 ‘Der grüne Kakadu’, 1899)>는 프랑스 혁명 때 '초록 앵무새'란 술집을 다루는 이야기이다. 그 곳에는 진짜와 진짜인 척 하는 사람들이 현실과 꾸며낸 현실 사이를 오가며 벌이는 일들을 그리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귀부인이 창녀인 척 웃음 짓고, 순진한 귀족 나으리는 절도범인 양 허풍을 떨어대는 반면, 진짜 살인을 저지른 청년의 말은 허세로 여겨지는 곳에서 우리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알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책의 '카카듀'는 바로 그 '초록 앵무새'의 앵무새에서 따왔다.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에서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이 일본식 끽다점, 유럽식 까페와 살롱, 우리식 다방, 다원 등등이 있었다고 한다. 독일식 까페는 주로 빵과 함께 커피를 마시는 베이커리 까페 형태였다고 하고, 미국 방식은 주로 술의 사이드로 커피가 나오는 형태이고,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의 영향을 받은 곳은 음식점에서 디저트로 커피가 나오는 형태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독일식이 먼저 들어오고, 음식과 함께 커피를 파는 끽다점 형태가 그 다음 유행이었다고. 


경성 관훈동에 조선인이 만든 끽다점인 '카카듀'가 들어섰다. 조선 최초의 한국계 미국 국적자인 현앨리스와 사촌 이경손이 함께 만든 까페였으며, 여러 예술인들이 모여 문학과 영화를 이야기하고 낭만을 노래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진짜인지 꾸며낸 진실인지는 알 수 없는 법. 불안하고 아프던 시대에 평안해 보이는 것은 신기루에 불과할지도 모를 일이다. 일제는 미국인인 현앨리스를 건드리는 대신 이경손을 불러다 매타작을 했다. 알지 못하는 일로 어쩌면 알면서도 모른 체한 일로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어버린 그는 불안해하면서도 끝까지 살아냈다. 


이 책은 어둡고 춥고 가혹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우울하고 처참하지만은 않다. 그 시절에도 사람들은 살았고, 경성에도 딴스홀을 허하라고 할만큼 즐기는 이들도 있었고, 그 이면에 조국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거는 이들도 있었다. 이경손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로 대대로 의원 일을 하는 집안을 뒤로 한 채 신학에 발을 담갔다가 극작가와 영화 감독의 길로 들어섰다. 젊은 시절 이경손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적당히 실패할 것만 같았다. 그가 만든 '장한몽'은 대흥행 했으나 '숙영낭자전'은 실패했다. 스스로를 '촙수이 문사'라고 칭하며 씁쓸해 했으나 조선 최초의 영화 소설을 신문에 연재했고, 근대 문예작품(이광수의 <개척자>)을 최초로 영화화 했으며, 나운규를 발탁했고, 자신의 마지막 영화 <양자강>을 만들었다. 그는 흥하든 망하든 꾸준히 여러 영화들을 만들었고, 능력에 비해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한 비운의 작가(이영일)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이경손의 눈으로 본 현앨리스는 처음에는 그저 미옥이었으나 어느 순간 자신이 추앙하던 현손의 모습이 되어가는 듯 했다. 결코 자신이 가지 못할 길을 걷는 그녀를 미워했다가 사랑했다가 다시 그리워했다. 그리고 상하이의 그 날 이후 둘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한 명은 태국으로,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남한에서 미국으로 추방되었다가 북한으로 갔다.


현앨리스는 일제가 패망한 뒤 주한 미24군 정보참모부 예하의 민간통신검열단(CCIG-K)에 군무원으로 배속됐다. 계급은 소위. 정말 대단한 여자였다. 그 당시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에 경도된 경우가 많아서인지, 박헌영과 친해서인지 결국 현앨리스는 주한미군에서 해고된 후 미국으로 추방되었고, 그 곳에서도 입지를 잃고 북한으로 '귀국'했으나 끝내 미제 앞잡이라는 죄명으로 처형당했다. 


그렇다. 사실 이 책은 현앨리스의 마지막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이경손이 태국으로 건너가 사업가로 변신한 이야기까지를 다루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비극적으로 끝나버린 현앨리스에게 지면으로나마 다른 삶을 주고 싶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보헤미안'을 꿈꾸던 이경손보다 더 자유롭지만 끝내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던 이방인이었던 그녀에게 말이다. 어쩌면 현앨리스가 조선의 독립을 원했던 건, 일제에 묶여 비참한 조선의 모습에서 자신이 가부장제나 신분, 성별에 묶여 자유롭지 못했던 삶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전부는 아니지만 하나의 이유가 될지도. 그리하여 모든 것에서 벗어나 원하는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이경손의 마음이 그녀의 마지막을 열어놓았을지도. 


<숙영낭자전>은 백선군이 선녀인 숙영에게 반해 아직 인연이 아닌 때에 인연을 맺은 이후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으나, 어찌어찌 숙영 낭자가 다시 돌아오게 된 이야기이다. 물론 시기와 질투를 하는 여종도 있고, 며느리를 믿지 못해 죽음으로 몰았던 시아버지도 있고, 숙영 낭자가 죽었다고 아들의 혼처를 물색한 남편을 말리지 않은 시어머니도 있다. 결국은 모두 행복하게 살다가 한날 한시에 죽었습니다가 되었지만, 숙영 낭자의 기구한 삶은 결말만 빼면 불안한 시대에 태어나 찬란한 불꽃처럼 살았던 현앨리스와 닮아 있었다. 사랑과 예술과 이데올로기를 논하던 그녀가 정말로 원하던 것은 무엇일까. 


경성의 끽다점 <카카듀>에서 현앨리스가 내려주는 커피 한 잔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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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4-06-01 2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꼬마요정님 편안한 주말 보내고 계신가요.
오늘부터 6월입니다.
행복하고 좋은 일들 가득한 한 달 되시면 좋겠어요. 즐거운 주말 보내시고 좋은밤되세요.^^

꼬마요정 2024-06-02 16:22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 벌써 6월입니다. 서니데이 님도 행복하고 즐거운 한 달 보내세요^^ 늘 건강하시구요. 남은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