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자들 오늘의 젊은 작가 32
이혁진 지음 / 민음사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에 한창 논란이 된 사건이 있다. 한 대형 건설사가 짓는 아파트가 철근을 빼 먹어서 무너져 내린 것. 그런 까닭으로 그 건설사는 '순살자이', '뼈 없는 아파트' 등의 조롱을 들어야 했고, 소비자인 우리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작년인가 재작년에도 짓고 있던 아파트가 무너져 현대건설 측에서 철거하고 다시 짓는다고 했다. 수십 층에 달하면서 수천 세대의 사람들이 살아야 할 곳이 그렇게 어이없이 무너지는 건 너무 끔찍한 일이 아닌가.


이 이야기를 읽다보면, 어느 정도 답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에 너무나 만연해 있는 '도덕적 해이'나 '책임 회피', '무사안일주의', '비겁한 변명으로 점철된 자기합리화' 등이 이야기 곳곳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관리자로 나오는 소장은 야비하기 그지없게도, 다른 사람의 생계를 손에 쥐고 그들을 휘두른다. 자기 주머니에 한 푼이라도 더 넣기 위해 작업반장들을 경쟁으로 내몰고, 가장 약한 고리인 이들을 착취한다. 작업반장들 역시 어쩔 수 없이 휘둘리고, 소장 밑에 있는 한 대리도, 작업 기사인 현경도, 베테랑인 목 씨 아저씨도, 갈 데 없이 몰려버린 선길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의 공사현장에 얽힌 이들은 수없이 많다. 관공서 뿐만 아니라, 수주 받은 건설사, 하청 받은 업체들, 인력공급업체들, 현장마다 딸린 함바집들 등등 말이다. 우리 사회가 점점 무사안일주의와 책임회피에 빠져드는 건 어쩌면 이렇게 얽힌 이들이 어떤 때는 익명성을 띄고, 어떤 때는 단체성을 띄면서 각자 져야 할 책임에서 등을 돌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등은 따뜻하면 좋겠고, 자신의 일에 책임은 지기 싫은 그런 마음들 말이다. 


관료제의 단점이 극대화 되어 감독을 해야 할 기관이 불법에 눈을 감고, 사고가 나면 그제서야 책임 지울 곳을 찾아 누군가를 억울하게 만드는 것이 과연 사리에 맞는 일일까. 얽혀버린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단 한 명도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운 것은 개인의 도덕성의 문제만일까.


어느 새 우리 삶 깊숙이 자리잡은 빌어먹을 그 '돈'이, 입고 먹고 살고 행복하려고 버는 그 '돈'이 우리의 삶을 도리어 구속하고 양심의 소리 앞에 귀 먹게 만들었다. 가진 자든 덜 가진 자든, 관리자든 비관리자든 만족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사실 '돈' 그 자체만으로 만족감을 얻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모두가 돈 앞에 인간성을 내려놓다가도 단 한 명이라도 돈을 내려놓기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관리자라고 모두 나쁜 사람은 아니기에 여기 나오는 소장 역시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소장이 오기 전 일을 맡았던 회사는 잘못을 인정했다가 파산했다. 어떤 현장이든 수칙을 잘 지킨다하더라도 사고가 날 수 있고, 사람이 하는 일에 실수가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실수 한 번에 다시 일어설 기회를 박탈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물론 소장이 잘 했다는 것도, 사고가 난 현장이 잘못이 없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어느 순간부터 괴물들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제도나 환경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느냐, 사적인 복수를 하느냐, 보다 나은 현장을 만드느냐를 개개인의 도덕성이나 인격에만 맡길 수는 없으니까. 우리 사회가 성인군자를 키우는 곳은 아니니까. 그렇게 키우고 싶다고 키워지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현경의 선택에 그나마 속이 풀렸으나,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될까. 현경이 끝까지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선길의 아내는 어떤 선택을 할까? 소장은 살면서 후회하지 않을까? 목 씨 아저씨는 다음 번에는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사회 경험이 없던 한 대리는 이제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을까? 소장은 관리자의 자질에 대해서 생각이나 해볼까?


인간은 경험에서 배우고, 그 배움을 바탕으로 행동한다. 우리 사회가 개개인의 경험들이 보다 인간적이고 상식에 맞는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수 있다면 좋겠다.  

새벽이 깊어 갈수록 선길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였다. 날이 밝는 것, 무엇이 있는지 모를 시커먼 산에 다시 빛이 비치고 사람들이 와서 사무실에도 다시 전등이 켜지고 식당에 밥짓는 김이 솟아 창문 없는 방 같은 이 밤에서 벗어나는 것. 하지만 그럴수록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어둠은 가뭇없이 짙어 가기만 했다. - P32

목 씨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이기적인 게 아냐. 자기를 중심에 놓는 거지. 나한테 이로운 걸 하는 건 남도 그럴 수 있다는 거지만, 날 중심에 놓는 건 남은 그러면 안 된다는 거거든. 그건 다른 소리야."
현경의 얼굴에서 옅은 웃음기가 사라졌다. 목 씨의 말이 턱 걸리는 느낌이었다. 별것 아닌 별일은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선길을 마주칠 때마다 머뭇거리거나 피한 것이라고, 께름칙한 미안함과 죄책감도 사람들이나 상황에 탓하고 미루려 하기나 했다고. 별것 아닌 일도 못한, 별것 아닌 자신을 감추고 잊어버리려. 현경은 조금 전 은연 중에 자기를 변호하려고 했던 것까지 포함해, 자신이 아주 작고 하찮은 존재가 된 기분이 들었다. 싫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었다. - P57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3-07-16 17: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그래서 순살치킨을 안 좋아합니다…..(응?)

꼬마요정 2023-07-16 18:30   좋아요 1 | URL
통닭은 뼈닭이 맛있긴 하죠. 전 날개를 좋아합니다 ㅎㅎ 순살은 편해서 가끔 먹어요. 순살치킨은 죄가 없어요!!!!

미미 2023-07-16 17: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하주차장은 물이 새서 백숙자이라고 하더군요.
철근을 빼먹어도 너무 빼먹어서 인명피해없이 걸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층간소음도 그렇고 국토교통부가 원흉인데 장관부터가....어휴

꼬마요정 2023-07-16 18:32   좋아요 1 | URL
아이고 백숙자이… 진짜 입주한 뒤에 사고 났으면 어쩔 뻔 했어요ㅠㅠ 주차장, 층간소음 등등 돈이 얼만데 제값을 못할까요. 국토교통부 정신 차려야죠ㅜㅜ 정신.. 차릴 수 있을까요..?
 
블라드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김현철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일단 내가 블라드 체페슈를 좋아하기에, 그를 희생양 삼은 것이 맘에 안 들어 별 넷에서 하나를 뺐다. 그가 정말로 권력만을 탐하며 잔혹했는지, 그를 방치한 기독교 세력과 그를 폄하하고픈 투르크의 이미지 메이킹인지 묻는다면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답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 이야기에서 진실은 무엇인가. 영원한 생명? 끝없는 부? 어쩌면 잊히기 싫은 존재들의 발버둥일지도.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3-07-16 14: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푸엔테스 작품 괜찮은게 많은데 저도 이 작품은 좀 별로더라구요.... ㅋ

꼬마요정 2023-07-16 17:08   좋아요 1 | URL
오, 그러셨군요. 저는 재밌게는 읽었는데 불멸의 존재들이 좀 하찮게 느껴지고, 블라드가 굳이 왜 마그달레나를? 하는 생각과 그의 과거가 좀 그랬어요. 다른 이야기지만, 블라드는 한국에는 못 올 거 같아요 ㅋㅋㅋ 마늘 나오는 장면에서 웃었어요 ㅋㅋㅋ

푸엔테스 다른 작품 괜찮은 게 많다구요? 안 그래도 <아우라> 읽으려고 쟁여뒀거든요. 읽으러 갑니다!!!
 
한국전쟁의 기원 1 - 해방과 분단체제의 출현 1945~1947 현대의 고전 16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선은 대한제국이 되었고, 일본제국주의에게 주권을 빼앗겼다. 일본의 패망으로 광복을 맞이했으나, 우리는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없었다. 우리는 쪼개졌고, 한국전쟁은 다른 나라의 이해관계로 좌지우지 되었다. 이 책은 미국이 분단에 책임이 있음을 아는 저자가 비밀문서 등을 연구한 결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안한 완벽주의자를 위한 책 - 자기증명과 인정욕구로부터 벗어나는 10가지 심리학 기술
마이클 투히그.클라리사 옹 지음, 이진 옮김 / 수오서재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적응적 완벽주의자를 위한 책. 사람은 완벽할 수 없다. 사람이 하는 일에 실수가 없다면 그건 사람이 한 일이 아닐 것이다. 이 마음으로, 결과가 아닌 과정에 집중하자. 결국 자신에게 친절하며 마음을 챙기는 것이 제일 중요한 듯.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마음을 여는 연습을 하기에 앞서왜 그래야 하는지 생각해보자. 불편한 느낌을 없애버리면 될 것을 왜 굳이 그 느낌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야 할까? 첫 번째 이유는 명백하다. 불편한 느낌을 없애는 것은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고 당신은 경험을 통해 이미 그 어려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불완전함을 밀어내는 것, 훌륭함에 미치지못하는 것에 극도로 예민하고, 대수롭지 않은 실수에도 스스로를 비난하고,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잔소리를 하는것은 피곤할 뿐 아니라 자기파괴적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이유는 고통은 당신이 진정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기때문이다. 거절당해 상처받았다면 그 고통은 당신이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임을 말해준다. 구조적 불평등에 분노를 느꼈다면 사회적 정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당신은 무관심한 것들로부터 상처받을 순 없고, 관심을 끄지 않는 한 상처받는 것을 피할 수 없다. - P85

실용성 여부를 떠나서 느낌은 그 자체로 유효하다. 당신의 느낌이 현재 욕구와 상황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서 덜 유효한 건 아니다. 유효하다고 해서 느낌에 반응하거나, 대응하거나, 혹은 합리화(일관성의 덫이다)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저 느낌이 존재한다는 것이며, 그뿐이다.
아마도 오랜 세월 당신이 터득한 것과는 상반된 개념일 것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당신의 느낌을 설명하는 것으로스스로를 무장해야 했을 것이다. "왜 울어?", "왜 그렇게 불안해해?", "왜 화를 내?"라는 질문에 느낌을 설명해야 할 뿐 아니라 그설명은 일관적이고도 질문자가 만족할 만한 것이어야 했다. 결국 당신의 느낌이 유효한지에 관한 여부를 다른 사람이 판단하 - P81

들만 허용된다는 듯이.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깐깐한‘, ‘예민한,
도록 두었다. 마치 이사회가 상황에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느낌
‘징징거리는‘, ‘정신나간‘, ‘맛이 간‘사람이 된다.
부당한 일이다. 당신의 느낌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있고, 저조할 수도 있고 활기찰 수도 있고, 가벼울 수도 있고 무거울 수도 있다. 어떤 느낌이든 받아들일 수 있고 유효하다는 명제를 받아들인다면 "진정해야지", "네가 너무 예민한 거야" 같은 말들은 모두 의미가 없어진다. 그것은 마치 노을이 조금 더 분홍빛이어야 한다거나 나뭇잎이 조금 더 초록빛이어야 한다고 말하는것과 같다. 느낌들의 존재를 허용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좀 더 폭넓게 느낌을 체험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어떤 느낌이건 전부다 받아들일 수 있다면 왜 느낌을 억누르거나 그것들이 존재하는 것을 사과하겠는가? - P82

현재에 머물기로 선택하는 능력을 기르면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여길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었나?"에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했나?"로 옮겨가는 기술이다. 물론 사회는 당신이 어떤 방식으로 일을 했는지 별로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무엇을 이루었는지에만 관심이 있다. 사회가 결과 중심으로 성공을 정의하도록 몰아가더라도 무엇을 추구하며 살지는 여전히 당신이 결정할 수 있다. 당신에겐 성공의 개념을 과정 중심으로 정의할 능력이 있고, 결과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주의력을 발휘해 과정을 향해 방향을 전환할 힘이 있다. - P14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삼개주막 기담회 3 케이팩션
오윤희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780년에 연암이 함께 갔던 사행은 청나라의 황제인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이었다. 정사로 연암의 삼종형 박명원이 임명되었기에 연암은 이 사행길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청나라로 여행을 다녀오며 듣게 될 기담들을 기억하기 위해 선노미를 데려가게 되었다.


1780년 5월 25일 출발하여 1780년 10월 27일에 도착하기까지 장장 6개월 정도의 기간 동안, 선노미는 다양한 기담들을 듣고 같이 슬퍼하고 안타까워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기담이란 행복하고 즐거운 이야기는 아닌데다, 의주에서 시작해서 책문을 지나고 성경을 지나 열하까지 그들의 여정은 덥고 질척이고 힘든 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연암은 청나라의 발전상을 보기도 했고, 100년도 더 전에 있었던 병자호란으로 끌려 온 조선인들을 보며 가슴 아파하기도 했다. 더불어 볼모로 끌려왔던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는데, 아무래도 가장 가슴 아픈 이야기 중 하나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더 글로리>에서 보았던 재준이의 적녹색약이 여기도 적용될 줄이야... 


뱃사공의 이야기부터 열하로 가기 위해 강을 건널 때 휩쓸려서 가게 된 마을 '낙원'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모든 이야기에서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것을, 사람의 '말'이, 사람의 '편견'이 제일 무섭다는 것을 알게 된다.


뱃사공이 들려 준 죽은 이들을 안내하는 '안내자'는 살아 있을 적 삶이 너무 고단하여 죽은 줄도 모른 채 이승을 떠도는 불쌍한 영혼이었다. 신분제와 남존여비가 만든 부조리와 불합리는 능력 있는 사람들을 체념과 상실에 허우적거리도록 만들었고, 이는 사회의 불안으로 축적되었다. 그리하여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은 자신이 죽은 지도 모르고 이승에서 자신의 이름조차 잊은 채 그렇게 떠돌고 있는 것이다. 


돌아 온 탕아는 조선시대 때도 비켜갈 수 없었던 부동산 문제가 숨어있었다. 여가탈입(양반이나 관리가 백성들의 집을 빼앗는 일)으로 시작된 이야기에서 한 가족의 가슴 아픈 사연은 가족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게 했다. 간 적도 없는 탕아가 돌아오면 그 집은 어떻게 될 것인가.


마마신이 찾은 마을은 신념을 가진 자가 얼마나 무서운지, 그 신념이 삐뚤어진 데다 이기적이기까지 하면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 지 알 수 있는 이야기였다. 인간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은 두렵지만, 타인에게 닥친 불행은 마음대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그리고 겁이 나서 순응하는 이들 사이에 모순과 불합리를 깨닫고 저항하는 이는 선구자가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배척당하고 만다. 이 이야기 역시 그러했다. 이기적이었던 춘삼과 용감했던 용주는 그렇게 같지만 다른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붉은 비단의 저주는 세자빈 강씨와 관련된 기이한 이야기였다. 인조의 질투로 억울하게 죽은 세자빈 강씨는 한참 후에나 복권되는데, 그녀가 죽게 되는 데 이유가 되었던 그 붉은 비단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정말로 그 비단에 얽힌 저주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사람들의 삿된 말과 임금의 죄의식에 합리화를 대신 해주려고 속살거린 탐욕스러운 인간들 때문이었을까. 


화피는 익히 알려진 이야기이다. <요재지이>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사람 가죽에 그림을 그려 뒤집어 쓰면 인간의 모습을 하게 되는 요괴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 역시 사람의 눈이, 선입견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려 주었다. 또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소중한 것을 얻지 못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처음에 아름다운 외모에 홀리지 않았더라면 잃지 않았을 것을. 하지만 잃은 대가로 또한 사물의 본질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이 또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지막 이야기는 낙원이다. 앞도 보이지 않고 과거도 기억나지 않은 채 마을에서 기계처럼 일하는 이들이 사는 마을의 이야기였다. 낙원이라는 말이 너무나 섬뜩하게 보일만큼 끔찍한 곳이었고, 사람의 탐욕이 또한 얼마나 참혹한 지 알 수 있었다. 어딜가나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건 만고의 진리가 틀림없다. 실제로 열하로 가는 길에 강물에 휩쓸렸던 연암의 사연이 들어간 이야기라 더 몰입해서 읽었더랬다. 선노미는 과연 자신의 어둠에서 돌아나올 수 있을까?


그렇게 기담이라면서 귀신이나 요괴의 입을 빌어 하는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살면서 우리가 알든 모르든 짓게 되는 죄들을 나열한다. 생각없이 뱉은 말 한 마디가 누군가의 삶을 망쳐버릴 수 있다든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신의를 저버린다든지 하는 일들 말이다. 그리 거창하지도 의도하지도 않은 일들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니 언제나 말을 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이고, 사람의 외모로만 판단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가장 어려운 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