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panda78 > [퍼온글] Dominique Davoust


 

 

 

 

 

 

 

 

 

 

 

 

Mother's Day for interflora, uk


 

 

 

 

 

 

 

 

 

 

 

 

Africa, for Donatello

 

 

 

 

 

 

 

 

 

 

 

 

Italy, for Donatello

 

 

 

 

 

 

 

 

 

 

 

 

Spain, for Donatello

 

 

 

 

 

 

 

 

 

 

 

 

Italy(2), for Donatello

 

 

 

 

 

 

 

 

 

 

 

 

Malta, for Donatello

출처 : klimt-악마적 퇴폐와 고질적 순수의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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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퍼온글] Classicism VS Romanticism

Classicism VS Romanticism

 

고전주의는 이전에 풍미했던 바로크-로코코 양식에 반한 미술 양식으로 지나친 장식적 성향을 띤 이전 사조와 달리 이상적인 미와 규범과 원칙을 다시 살려보자는 것이었다. 또한 문학적 성향이 강한 낭만주의는 고전주의가 작가의 감성이나 화법을 억제하고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것과는 달리 작가의 감성을 작품에 반영한 양식이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듯한 낭만주의 작품은 역동적이며 정열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리스-로마의 정신과 고전의 미를 추구한 ‘고전주의’

복고풍은 거듭 유행한다. 유행이 극에 치닫는 막다른 골목에서 다시 과거의 것에 대한 향수, 즉 복고적인 성향은 어김없이 찾아오곤 한다. 미니스커트가 극에 달하면 다시 긴치마가 유행하고 지나치게 전위적인 새로운 패션이 유행하면 결국 고전적인 복고풍 양식이 어김없이 찾아오듯….
그것은 진리다. 사랑도 그렇다. 한 사람과의 사랑이 알 만큼 알고 나면 결국 새로운 사랑에 탐닉하게 되고 그 사랑은 이전과는 다른 스타일의 이성에 매료되곤 하니까. 결혼이라는 굴렁쇠가 없으면 그 사랑을 지켜나가기 힘들지 않다던가. 그처럼 사랑은 변한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다.
이전에 어떤 이성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 다음 상대의 스타일이 결정된다. 미련이 남으면 비슷한 스타일에 집착하고, 질리면 정반대의 스타일을 원하듯. 어쨌든 이전의 경험은 미래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로마 시대 미술이 중세의 암흑기를 거쳐 다시 이전의 그리스-로마 미술의 부활을 외치던 르네상스. 이후에 보다 활력과 자유로움을 강조하던 바로크. 그것이 극에 달해 지나치게 장식적이고 치장적이기까지 하던 로코코 미술. 이미 장식성으로 극에 달한 미술 양상에 반격의 목소리가 가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기까지 하다.
르네상스가 고전의 부활을 외쳤듯이 로코코 이후 다시 그리스-로마의 정신, 고전의 미를 찾자는 목소리가 높아가면서 신고전주의 미술이 도래한다. 그래서 미술사에 있어서 고전주의란 주로 그리스-로마 시대에 형성된 양식상의 동질 성격을 추구하는 유파나 양상을 통칭하며, 현시점에서 주로 고전적이라는 의미는 그러한 고전주의 미술이 가지는 사실적인 묘사법과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안정된 그림 스타일을 말한다.
그래서 흔히 현대 미술이 전위적이고 새롭고 다양한 재료와 기법으로 선보이는 데 반해 그래도 붓과 물감을 사용해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들을 볼 때 우리는 “고전적이다” “아카데믹하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미술사에서 신고전주의는 17~18세기의 바로크, 로코코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18세기 말, 19세기 초 유럽 예술 양식으로 합리적 질서에 바탕한 통일성, 안정된 구축성, 조화가 이루어진 정밀한 표현, 부분과 전체와의 명확한 관계, 절대적-영원적인 특성을 말한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창시자겸 지도자를 주저없이 ‘자크 루이 다비드’를 꼽는다. 지금 보는 이 그림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에서 한눈에 그 특징을 볼 수 있다.
로마 양식의 건물인 반원의 아치형 기둥은 화면에 안정감과 질서를 깔아준다. 중심에 주제를 담아내는 ‘아버지를 향해 맹세하는 세 아들’ 그리고 반대편엔 ‘실의에 빠진 자매들’ 의상 모두 로마 시대를 고증한 것들이다.
이 그림은 18세기 말 고전 미술의 복고적 성향뿐 아니라 엄격한 윤리적 미덕과 자기 희생을 통한 영웅주의로 이전의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그림과는 다른 성격을 보인다.
쿠라티어스 가의 세 아들과 대결하기로 한 호라티우스 삼형제. 가문의 명예를 걸고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다짐의 목소리가 쟁쟁히 들리는 듯한 이 한 폭의 그림은 애국심 고취와 정치적 역할까지 해내게 된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그림을 봄으로써 잠재적으로 자기 희생을 불사하게 하는 의식을 잠재적으로 고취당했던 것이다.
무엇을 보는가는 확실히 사람들의 정서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남자들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여인에게 매료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탐닉이 멈출 수 있는 것은 결국 정신과 영혼을 채워주는 여성 아닐까.

남자들이 대부분 엄마 같은 여성을 원한다는 것은 바로 과거 속에 자리잡은 정신적 기둥이기 때문이다. 비록 아내는 어머니와 다른 존재일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어머니와 같기를 원하는 것. 그것은 이처럼 로마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과거 대로마에서 살아 숨쉬던 그 정신과 아름다움을 그리워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 그래서 그것은 단지 ‘로마’라는 틀을 벗어나 ‘고전주의’로 시대를 초월해 거듭 존재하는 것 아니겠는가.
어머니와 같은 존재가 ‘모성애’란 틀로 거듭 여성에게 요구되는 것처럼 말이다.


작가의 감성이 작품에 잘 반영돼 드러난 ‘낭만주의’

낭만주의 그림은 과연 낭만적일까?
낭만주의 그림은 매우 서정적이고 로맨틱할 것 같다는 선입견을 갖게 마련이지만 사실 낭만주의 그림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격정적이고 생생한 감정을 표출한 미술운동이다.
낭만주의라는 말은 18세기 말에 유행한 중세 모험담에서 유래했다. ‘아서왕’과 같은 중세의 모험담들이 라틴어가 아닌 로망스어로 쓰여진 것에서 ‘낭만주의’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로맨스라는 어원에서 보듯 낭만주의는 문학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낭만주의 회화는 실제로 문학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게다가 당시 나폴레옹 원정을 계기로 동방 세계에 대한 흥미와 동경으로 이국적 취향도 낭만주의 회화의 특징으로 꼽힌다. 신고전주의가 르네상스라는 고전주의 이후 로코코로 치달은 장식성에 대한 반발로 거듭 도래하였듯.
르네상스라는 고전주의의 엄격함에 자유를 외치며 탄생한 바로크처럼 신고전주의와 맞물려 신바로크라고도 불리는 낭만주의 미술이 탄생한다. 자유분방함과 유동적인 그림 양식으로. 그 대표적인 화가는 드라크루아.
명확한 형태, 안정되고 균형잡인 구성의 법칙을 요란하게 부르짖던 신고전주의와는 달리 대담한 색채와 정열적인 표현을 하였던 그는 당시 상당히 격렬한 공격을 받기도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낭만주의의 대표주자였고 또 모네, 르누아르, 세잔, 고흐, 고갱, 마티스, 피카소와 같은 화가들이 드라크루아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토로할 만큼 미술사에선 현대 표현주의 미술의 선구자이기까지 한 존재다.
‘그림에 있어서는 소묘보다는 색채가, 지식보다는 상상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믿었던 그.
<사르다나 팔루스의 죽음>이라는 이 그림은 당시 이국적 성향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킬 뿐 아니라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과거의 에피소드를 소재로 탄생한 작품이다.
기원전 7세기 앗시리아의 왕이 적군에게 포위되어 포섭되기 직전, 자신의 애첩들과 애마 모두를 죽이고 보물들을 한데 모아 불지르고 자신도 타죽었다는 비극적인 최후의 한 장면이다. 그 역사적 기록이 사진으로 남은 것도 아니고… 맘껏 자신의 상상력을 꽃피워낸 그림. 드라크루아는 최대한 격정적이고 격렬한 움직임을 포착해낼 수 있는 소재로서 그 이야기를 택했을 것이고, 더구나 모로코와 알제리 같은 나라의 여행을 통해 얻은 오리엔탈의 풍물과 신비로움에 매료되어 종종 작품 속에 반영하곤 했는데... 이 그림 속에서도 그 이국적 분위기는 물씬 풍긴다. 확실히 이색적이고 격렬하고 자극적인 그림이다. 새로움을 주어야 한다는 화가의 몫은 이렇게 갈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역사성과 이국적 분위기와 사랑과 죽음과 시각적 흥분과 심리적 자극으로 감상자들에게 극적 효과를 주는 이 그림. 영화가 없던 시기였지만 그야말로 영화 같은 그림 같다는 표현이 적절할 듯하다.
그 고통의 울부짖음, 격렬한 움직임과 사방에 번지는 피얼룩이 감상자의 상상의 날개를 타고 자유자재로 장면들을 전개하니까. 화가의 생생한 상상력을 통한 과거로의 시간 여행. 바로 이런 그림으로 가능한 것 아닐까?

글-한젬마(화가,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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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마그리트 그림들 마지막

재현되지 않다

 



제가 무지 좋아하는 그림입니다. ^^  <향수>

 


 

The Red Mode

 

 


Carte Blanche (백지 위임장)

 

 


제목 모름

 

 


L'aimable Verite

 

 


Lautomate

 

 


Ages ago

 

 

이 밖에도 무지 많지만, 다 올릴 수는 없으니 이 정도만 올릴 게요. 연달아 보시니 좀 지겨우셨죠? ^^;;;

끝까지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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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

한번 날려 먹고 다시 쓴 거라 처음 썼던 페이퍼와는 차이가 납니다. T^T

마지막 한 줄 쓸 때 날아가다니, 너무 한 거 아냐....

 

다이달로스(Daedalus)

'명장(名匠)이라는 뜻. 아테네의 전설적인 장인(匠人)으로서 다양한 기술과 발명으로 유명했다. 그의 아버지는 에렉테우스 왕의 자손이라 전해지는 '현명한 손을 가진' 에우팔라모스 또는 '유식한' 메티온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다이달로스의 자손이라고 했다.

다이달로스는 성장하면서 아테네의 최고의 화가, 조각가가 되었다. 그의 작품은 너무도 사실성이 풍부하여 마치 진짜인 것처럼 보였다. 그의 누이는 자기 아들 페르딕스(탈로스 또는 칼로스라고도 불린다)를 그의 제자로 삼게 했다. 이 소년은 다이달로스 보다 더 훌륭한 장인이 될 소질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그는 뱀의 턱뼈 또는 물고기의 등골을 본떠 톱을 발명하고, 컴퍼스와 녹로도 발명했던 것이다. 이에 다이달로는 소년을 몹시 질투하게 되어, 아크로폴리스의 산정 (또는 벼랑)에서 떨어뜨려 죽였다.

그의 놀라운 재주 때문에 페르딕스를 사랑하고 있던 아테나 여신은 그가 추락하는 것을 보고 산메추라기로 변신시켰다. 그후 이 새는 페르딕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다이달로스는 조카를 죽인 죄로 인해 알레이오스 파고스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 판결을 따랐기 때문인지 자발적인지는 모르나, 어쨌든 다이달로스는 아테네를 떠나 크레타 섬으로 갔다.

 

 

크레타 섬의 미노스 왕은 그를 크게 환영했다. 다이달로스는 왕의 요청에 따라 훌륭한 공예의 솜씨를 발휘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은 인공의 암소였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미노스에게 기증한 황소에 심한 욕정을 느끼고 있던 파시파에 왕비는 자신의 욕정을 채우기 위해 다이달로스가 나무로 만든 그 암소 속으로 들어갔다.

 

1세기 경, 폼페이 벽화


포세이돈의 황소는 그 암소가 진짜인 줄로만 알고 교미했기 때문에, 그 결과 파시파에는 반은 사람이고 반은 소인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을 낳게 되었다.

 

미노스는 이 괴물을 부끄럽게 여겨 그를 감추기 위해, 다이달로스에게 지하의 미로인 라비린토스를 만들게 했다. 이것은 많은 터널과 복도와 하나의 입구로 이루어졌으며, 안에 들어간 사람은 두번 다시 밖으로 나올 수 없게 고안되어 있었다. 미노타우로스는 그 중심부에 가두어져 사람 고기를 먹고 살았다. 미노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아테네인(->안드로게오스)은 해마다 (일설에 의히면 9년마다) 7인의 소년과 7인의 소녀를 공물로 미노스왕에게 바치도록 되었고, 이들 소년 소녀는 미노타우로스의 먹이가 되기 위해 한 사람씩 라비린토스에 보내졌다.

몇 년 후 테세우스가 크레타 섬에 왔을 때 미노스의 딸 아리아드네가 다이달로스가 고안한 실꾸러미를 그에게 주어,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뒤 그 실꾸러미 덕택으로 미로에서 빠져나와 라비린토스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루스

 


미노타우루스를 죽이는 테세우스


 

미노스는 다이달로스의 배신을 알자, 그와 그의 어린 아들 이카로스(다이달로스와 미노스의 여자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를 라빈토스에 가두었다.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탈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다이달로스는 새의 날개와 같은 것을 만들어 하늘로 날아서 탈출하려고 했다. 그는 밀납과 깃털을 이용하여 자신과 아들을 위한 날개를 만들었다.


이카루스

 

 

이카로스와 함께 도망하기 위해 날개를 만드는 다이달로스.
이카로스는 다이달로스 앞에 서 있다.
부조, 그리스 작품에 근거한 로마시대 模刻. 1세기 (로마, 빌라 알바니)

 


 

그런 뒤 너무 높이 날면 태양열 때문에 날개의 밀납이 녹고, 너무 낮게 날면 바다의 물보라에 날개가 젖어 무거워진다고 아들에게 주의를 주고 하늘로 날아 올랐다.

 

                                        Lord Leighton  다이달로스와 이카루스

 

Charles Landon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

 



 

그들은 북동쪽으로 날아 파로스 섬, 델로스 섬, 사모스 섬 등을 지났다. 그러나 스포라데스 제도와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해안 사이를 지날 때, 이카로스는 흥분한 나머지 높이 올라가고 말았다. 태양열이 날개의 밀납을 녹였기 때문에 그는 바다에 추락했다.


이카로스의 추락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

 

 


브뢰헬(브뢰겔) ---  이카루스 추락의 풍경

 

그 바다는 이카로스의 이름을 따서 이카리오스 해라 불리게 되었다.


다이달로스는 그 바다 가까이에 있는 섬 (오늘 날의 이카리아 섬)에 착륙하여 바다에서 아들의 시체를 건져 매장했다. 이때 산 메추라기로 변한 다이달로스의 조카 페르딕스는 삼촌이 슬퍼하는 모습에 미소를 보냈다.


허버트 드레이퍼 - 이카루스를 위한 탄식

 


Copy  of  Paris Louvre  Icarus


 

 

 

다른 설에 따르면, 파시파에가 다이달로스를 라비린토스로부터 구출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배를 만들고 배를 추진시킬 돛을 처음으로 고안하여 이카로스와 함께 배를 타고 섬에서 도망쳐 나갔다는 것이다.

 

그는 시칠리아 섬으로 가서 카미코스의 왕 코칼로스의 궁전에 몸을 숨겼다. 그러나 복수심에 불타는 미노스왕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그의 소재를 알아냈다. 그는 서방의 모든 지배자들 한테 가서 소용돌이 모양의 조개껍질에 실을 꿰려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코칼로스가 실을 꿴 조개껍질을 미노스에게 보이자, 그는 코칼로스가 다이달로스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다이달로스 이외에는 아무도 그 문제를 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이달로스는 조개껍질 끝에 구멍을 뚫고 허리에 실을 맨 개미를 그 구멍으로 들여보냈다고 한다.

 

미노스는 다이달로스의 인도를 요구했으나 코칼로스는 이를 거절했다. 다이달로스가 그를 위해 난공불락의 도시를 건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미노스는 도시를 포위했다. 그러자 코칼로스는 다이달로스를 인도하겠다며 화해하려는 체하면서 미노스를 초대하여 그에게 목욕하기를 권했다. 그리고 예로부터의 관습에 따라 코칼로스의 세 딸이 그를 목욕시키기로 했다. 그런데 배관 기술을 알고 있는 다이달로스가 목욕탕에 연결된 수도관을 통해 끓은 물을 나오게 하여, 미노스는 고통을 당하다가 데어 죽었다. 다른 설에 의하면 코칼로스는 미노스의 군대와 싸우다 전사했다고 한다.

 

수많은 건조물과 고안물이 다이달로스의 창의에 의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는 쿠마이의 아폴론 신전을 설계하여, 자기 자신의 생애를 이야기하는 그림으로 그곳을 장식했다고 한다. 시칠리아에서는 아라본 강 연안의 저수지, 셀리노스의 증기 목욕탕, 아크라카스(아그리겐톰)의 요새, 엘릭스의 아프로디테 신전의 주랑(柱廊) 등이 그의 건축에 의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또 그는 황금으로 만든 벌집의 모형도 시칠리아에 남겼다.

 

그는 돛을 고안한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리고 아교, 도끼(만일에 페르딕스가 발명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톱, 연추의 실, 나선형 끌 등 목수가 쓰는 기구의 대부분도 그의 창의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아테네의 아테나 폴리아스 신전에 전시되어 있던 접는 의자도 다이달로스의 작품이라고 여겨졌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많은 목상(木像)도 조각했다고 알려졌는데, 이 가운데는 눈과 손을 움직이거나 걸어다니는 것도 있었다. 이와 같은 작품은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도처에서 발견되었다.

 

사르디니아에서는 다이다레아라 불리는 몇몇 탑이 그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이집트의 피라밋(예컨대 멤피스의 파타하 신전)도 다이달로스의 설계에 의한 것이라는 말이 그리스에 전해지고 있다.

 

 쿠시  ---  이카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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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새벽별님께- 마그리트 그림들 3

여름

더위는 진작부터 와 있었지만, 7월이 되니 정말 여름인 것 같습니다. 이 여름 잘 보내야 할 텐데..;;

 

 

The oasis

 

 

 

The New years

나뭇잎 모양의 나무라니.. ^^

 

 


길 잃은 기수

저 하얀 것들은 체스 말 같이 보이는데, 과연 무엇이려나요? ^^;;

 

 


 
Le joueur secret

불어는 하나도 모릅니다. 무슨 뜻인가요? 알려주세요- <(_ _)>

 

제게 낯선 그림들 위주로 몇 점 올려봤습니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새벽별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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