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유튜브 알고리즘에는 세 가지가 언제나 반복된다. 날씨, 괴담 그리고 카페 혹은 킷사텐 브이로그. 그리고 가끔 미니어처 요리 하시는 분이랑 뉴스 기사, 고양이 관련 영상이 올라오고 전시회 같은 것을 알려주는 영상도 올라온다.


처음에 킷사텐 재즈 영상을 보고 킷사텐이 뭐지 싶었다. 한자로 끽다점(喫茶店)이고 일본어로 킷사텐이라고 읽는다. 다점은 알겠는데 '끽'자를 몰라서 찾아봤더랬다. 우리에겐 일제강점기 때 쓰던 말이고 이제는 까페나 커피숍으로 대체된 말인 끽다점이 일본에선 계속 쓰인다는 점이 신기했다. 


 1920년대에 가벼운 식사나 음료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던 찻집인 킷사텐(喫茶店)이 등장하면서 준킷사는 '술이나 접객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 순수한 킷사텐'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최근에는 술을 제공하는 가게도 많아 '레트로한 분위기의 킷사텐'이라는 뜻으로 그 의미가 달라진 듯합니다.(4쪽)


이 책은 처음부터 나를 사로잡았는데, 내가 영상으로 보던 곳은 한 군데 뿐이었지만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예전에 읽었던 <카카듀> 생각이 나면서 그 시절 경성에 있던 카카듀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생각했다.


이 책에서 제일 맛있어 보이던 건 초콜릿 파르페와 나폴리탄이었다. 내가 어릴 때는 파르페 파는 곳이 많았는데 언젠가부터 파르페는 메뉴에서 사라졌고, 나폴리탄 괴담이란 말이 유행할 정도로 일본에선 흔한 메뉴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음식이라서 그런걸까.




괴담 하니까 또 생각나는 책이 있다. 바로 <커피 괴담>이다. 커피도 좋아하고 괴담도 좋아하는 나에게 이 책은 그냥 날아와 꽂혔다. 


이야기는 영적인 능력이 있는 듯한 다몬이 옛 친구인 오노에의 초대를 받아 교토의 오래된 카페로 가면서 시작한다. 그곳에서 다몬은 오노에와 미즈시마, 일 때문에 늦게 온 구로다를 만난다. 그들은 별 것 아닌 듯한 이야기부터 으스스한 이야기까지 두서없이 쏟아내고, 그 와중에 검사인 구로다는 사건을 해결하며 다몬은 이야기의 주인공들과 조우한다. 


이 책에서 가장 신기하고 흥미로운 점은 어쩌면 중년 남성 넷이 꾸준히 괴담 모임을 카페나 찻집에서 가진다는 점일라나. 레코드 회사의 프로듀서인 다몬, 작곡가 겸 스튜디오 뮤지션인 오노에, 외과의사인 미즈시마, 검사인 구로다. 이 네 사람은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비현실적인 이야기나 무서운 이야기를 나누며 커피나 술을 마시는 이 모임을 은근히 좋아한다. 아무리 바빠도 늦게라도 모임에 꼭 참석하는 구로다는 이 모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사건을 해결한다고 좋아하는데, 아무래도 사고의 전환을 가져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들이 말하는 괴담은 무섭거나 소름끼치거나 하지는 않지만 어딘가 으스스한 것들이다. 주변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아서 꺼림칙하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야기 중에 다몬의 우산 이야기는 독특했다. 그 우산엔 누가 깃들어 있을까? 우리 식으로 말하면 도깨비일라나?



그리고 <도쿄 킷사텐 도감> 외에도 파르페를 먹고 싶게 한 책이 있다. 어쩌면 뜬금 없을지도 모르지만, 파르페와 괴담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혼자 웃었다.


이케다가 고바야시 씨랑 이야기를 하다가 파르페를 먹고 싶다거나 주문해 달라고 하는 장면이 있다. '변태 오두막'과 '천국 병원' 부분에서 그러는데, 나도 모르게 외쳤다. "나도!!"


주변에 파르페 파는 곳을 검색했다. 생각보다 파는 곳이 없어 실망하던 차, 남편이 검색하더니  맛집이 있다는 거다. 그런데 따뜻한 봄이 이렇게나 빨리 오다니... 싶다가 저기압의 영향으로 계속되는 비와 흐린 날씨 때문에 추워져서 먹으러 가지를 못하고 있다. 


이상하게 이 책도 그렇고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도 그렇고 오디오북으로 들으면 너무 잠이 온다. 듣다가 졸다가 깜짝 놀라서 깨서 종이책을 뒤적인다. 유튜브 영상으로 보는 괴담은 잘 보고 잘 듣는데 오디오북은 왜 그런지 좀 의아하긴 하다.


책 표지에 나오는 '죽어, 죽어, 죽어'라는 외침을 보며 꼭 파르페를 먹으러 갈테야!!라고 다짐한다. 그렇다. 파르페 못 먹어 죽은 귀신이 내 주변을 맴도는 걸까. 


아무리 미운 사람이 있어도 너무 증오하지 말자. 증오란 감정은 타인을 향한 것만이 아니다. 자기 자신부터 갉아먹은 뒤 타인에게도 가는 것이라 결국 모두를 파국으로 몰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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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6-02-28 2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온다 리쿠 책 커피 괴담 라디오 방송에서 이야기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못 들었지만, 낮에도 잠깐 들었습니다 재방송이어서... 조금 뒤에 또 나오겠습니다

이월 마지막 날이네요 꼬마요정 님 이월 마지막 날 밤,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꼬마요정 2026-03-02 22:56   좋아요 0 | URL
책이 재미있어서 좋았습니다. 조금 옛스럽기도 하지만 고즈넉하니 좋았네요.

희선 님 3월입니다. 봄비가 내려 춥긴 하지만 그래도 건조주의보와 안녕할 수 있는 단비네요. 큰 일교차에 감기 조심하시구요, 편안한 밤 보내세요^^

카스피 2026-03-01 1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본에 괴담 소설이 과거부터 많았던 이유는 일본 특유의 정령신앙과 원령신앙이 맞불린데다가 에도시대들어 사화가 안정되면서 서민들의 오락거리로 괴담 소설이 발전했다고 하더군요.근데 한국에선 괴담 소설이 발전하기 힘들었던 이유가 일본은 여러 사유로 사람들이 죽을 경우 이를 대부분 귀신이나 오니탓으로 돌렸지만 한국의 경우는 사람들이 죽은 경우가 호랑이 탓이 커서 괴담이 발달할 소지가 아예 원천 봉쇄 됬다고 들은 적이 있네요.

꼬마요정 2026-03-02 23:00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는 뭐만 하면 호랑이가 물어가고, 호패 제도가 잘 정비되어 있는데다 낯선 사람이 오면 바로 티가 나서 귀신이든 사람이든 숨을 곳이 없었다 하더군요. 게다가 온돌 때문에 귀신이 이불 밑에 숨어있기도 힘들었다는 우스개소리도 있는 거 보면 괴담이 발달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그래도 <설공찬전> 같은 게 남아 있으니 다행이지 않나요 ㅎㅎㅎ

카스피 2026-03-04 11:58   좋아요 0 | URL
설공찬전은 뒷부분이. 없어진게. 넘. 안타깝지요.
 
리듬 난바다
김멜라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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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현실 속에 허구를 끌어들이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다. 누군가는 자신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욕받이를 자처한다. 어떤 사랑은 뭇사람들에게 지탄 받는다. 어떤 범죄들 사이에 숨겨둬도 귀신 같이 찾아내 그것만을 물어뜯는다. 이 책은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의 치열한 사랑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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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디지몬 - 길고도 매우 짧은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아무튼 시리즈 67
천선란 지음 / 위고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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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다락방 님이 <아무튼, 피트니스>의 한 구절을 적어주신 뒤로 아무튼 시리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어떤 아무튼들이 있을까 살펴보던 중 제일 먼저 읽은 건 <아무튼, 야구>였고, 그 다음이 <아무튼, 피트니스>였다.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아무튼, 디지몬>이다.


디지몬 어드벤처.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애니메이션이다. 나는 만화 영화를 좋아해서 어릴 때부터 본방 사수를 하려고 무척이나 노력하는 사람이었는데, 진짜 중학교 때는 '웨딩피치' 보려고 학교 끝나자 마자 부리나케 집으로 왔던 게 기억 난다. 물론 만화 영화 본다고 인생 다 망한 거라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웨딩 피치>, <세일러 문>, <태양의 기사 피코>, <마법기사 슬레이어스>, <포켓몬스터> 등등 수많은 만화 영화들이 있었다. 그리고 <디지몬 어드벤처> 역시 그 중 하나였다. 갑자기 디지털 세계로 소환된 아이들이 자신의 디지몬을 만나고 성장하고 헤어지기까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드라마를 만들었다. 


밀레니엄 버그를 극복한 인류가 아직 디지털 세상을 빛나는 청사진으로 볼 때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는 게 놀라웠다. 디지바이스를 통해 디지털 세상으로 넘어가고 디지털 세상에 0과 1로 존재하는 어떤 프로그램을 백신으로 진화시키고, 바이러스에 감염된 한 세계를 정상화한다는 게 말이다. 빛나기만 한 미래란 존재하지 않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인간이 느낀 불안을 이렇게 표현했는데, 이는 자유를 누리던 홍콩이 반환되면서 느낀 존재론적 불안을 떠올리게 했다. 다만 그들에겐 희망보다는 절망의 틈새에서 배어져 나오는 절박함이 주로 느껴졌다면, 여기서는 결국은 이겨낼 거란 희망을 읽을 수 있었다. 


처음 <디지몬 어드벤처>가 나왔을 때 <포켓몬스터> 따라 한 거 아니냐는 말도 있었더랬다. 하지만 이야기는 완전히 달랐는데, 가장 좋았던 점은 디지몬이 진화했다가 다시 진화 전으로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피카츄가 이야기가 끝나가는 데도 라이츄로 진화하지 못했던 건 피카츄가 계속 진화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마스코트가 되어버린 피카츄를 진화시키기엔 부담이 컸을 테다. 그렇게 피카츄는 지우와 함께 모험을 하면서 성장했다. 친구들을 만나고 어려운 일을 헤쳐 나가며 이별과 고통도 겪고 만남과 기쁨을 겪었다. 


디지몬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은(그리고 나는) 디지몬과 함께 디지털 세계를 구하며 수많은 좌절과 이별을 겪으면서도 희망과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포켓몬스터>의 악당 로켓단보다 더 무서운 검은색 톱니바퀴에 오염된 데블몬이나 아포카리몬을 상대하면서 많은 상실을 겪기도 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성장했고, 아이러니하게도 더 이상 디지털 세계에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책은 천선란 작가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만난 <디지몬 어드벤처> 덕분에 다른 세상을 꿈꾸며 현실의 시련을 감당했더랬다. 뇌출혈로 쓰러진 엄마를 돌보는 일은 갓 스물된 작가의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아픈 가족을 돌보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꿈 꿀 때 죄책감이 정말 심해진다.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병원비는 사람을 지치게 한다. 아빠와 언니가 있음에도 작가는 그런 죄책감과 불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그럴 때 디지몬 세상은 작가에게 구원과도 같았다. 자신의 어린 디지몬이 된 엄마를 돌보는 작가는 그렇게 엄마와 세상을 탐험하며 성장한다.


디지몬 친구들! 렛츠 고 렛츠 고! 세상을 구하자! 렛츠 고 렛츠 고! 승리는 언제나 우리의 것!!! 13년이나 지난 만화 영화의 주제곡이 아직도 기억나는 건 이 디지털 세계로 가는 문이 언제고 다시 열릴 것이란 기대가 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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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6-02-24 16: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튼 시리즈는 저도 두어개 읽어봤는데, <아무튼, 디지몬>은 오늘 알게 됐네요. 디지몬으로 현실의 시련을 감당해냈다는 작가 이야기 무척 마음에 와닿네요. 돌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지만, 스무 살의 청년이 엄마를 돌보는 일이라는 건 말이지요 ㅠㅠㅠㅠㅠ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꼬마요정 2026-02-26 10:20   좋아요 0 | URL
디지몬이라기에 가볍게 생각했다가 의외로 무거운 이야기에 좀 놀랐습니다. 하지만 디지몬이 작가에게 큰 의지가 되었다하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구요. 돌보는 일이 정말 어렵지만 그래도 작가가 잘 해냈고 해 나가고 있다는 데 박수를 치고 싶습니다.^^

책읽는나무 2026-02-25 0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옛날 <아무튼 피트니스>를 시작으로 아무튼 시리즈 이게 뭐야?! 그러면서 막 찾아 읽었었죠. 아무튼 시리즈는 다 재미난 거 같아요. 작가들의 삶의 에세이자 본인들의 덕후 인생기를 읽는 듯한 느낌이라 감동스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어요.(아니, 이런 것에 이렇게도 진심이라고?…그러면서 괜스레 친근해지기도 했죠.)
그나저나 <아무튼 디지몬> 제 딸이 도서관에서 빌려왔거든요. <아무튼 메모>랑 두 권 가져왔길래 메모는 예전에 읽었어서 디지몬 천선란 작가가 썼길래 나도 읽어야지! 눈독 들이고 있었는데 요정 님 리뷰 보니까 반갑네요.^^
저는 지금 <아무튼 인터뷰>랑 <아무튼 데모>를 자기 전 오디오북으로 몇 주째 듣고 있네요. 틀어 놓고 듣다 보면 계속 자고 있어서…ㅜ.ㅜ
근데 은유 작가랑 정보라 작가의 아무튼은 책으로 찾아 읽는 게 답인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내용이 좋은 것 같아요.

꼬마요정 2026-02-26 10:44   좋아요 0 | URL
저도 오디오 북만 틀면 어느 순간 자고 있더라구요 ㅋㅋㅋㅋㅋ <아무튼, 데모>는 정보라 작가 이야기라 꼭 읽어보려고요. <아무튼, 인터뷰>도 좋다구요? 그 책도 찾아 읽어야겠어요. 책들이 얇아도 만만치 않네요. ㅎㅎㅎ

‘디지몬어드벤처‘ 재미있어요. 한 편에 이야기가 끝나는 것도 좋고 귀여운 캐릭터들이 많이 나오는 것도 좋아요. 아구몬이나 파닥몬, 피요몬 귀여워요 ㅎㅎㅎ 그런데 어린애들이 봐도 되나 할 정도로 이별 장면도 있고 잔인하게 느껴질만한 장면들도 있죠. 요즘 애들은 많이 성숙해서 타격이 없을라나요...

만화 시작할 때 나오는 노래가 참 신난답니다. ‘디지몬 친구들 렛츠코‘라고 신나요 ㅎㅎㅎ 그리고 ‘포켓몬스터‘ 노래인 ‘우리는 모두 친구‘도 좋거든요. 재밌는 만화가 참 많군요 ㅎㅎㅎ
 
죽은 집에 관한 기록
전건우 지음 / 한끼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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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빌라에 살던 김도형 씨의 기록. 그 집엔 험한 것들이 있다. 김도형 씨와 함께 일 한 적이 있는 다큐멘터리 팀은 그의 도움 요청에 그 빌라에 발을 들이게 되고… 이제 돈이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가 된 지금, 하찮게 된 영혼들이 죽어서야 말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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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2-22 1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 책속의 주인공의 이름이 제가 아는 이름이라 무척 친근감이 드네요.이름때문이라도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꼬마요정 2026-02-22 19:44   좋아요 0 | URL
앗 그러시군요!! 김도형 씨의 기록을 보고 집의 저주를 파헤치는 내용입니다. 이 소설 짧아서 금방 읽으실 거예요^^

2026-02-22 17: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2-22 1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무튼, 야구 - 화가 난다는 건,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다 아무튼 시리즈 79
김영글 지음 / 위고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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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가끔 일요일에 아빠는 야구를 보셨다. 아니, 야구를 틀어놓고 주무셨다. 하지만 내가 티비 채널을 바꿀라치면 안 잔다고, 보고 있다고 하셨더랬다. 아빠는 대구 사람이라 삼성을 응원하셨고, 야구를 안 즐기는 엄마는 부산 사람이라 괜히 롯데 편을 드셨다. 그러던 어느 날, 롯데가 결승까지 갔고 아빠는 롯데를 응원하셨다. 나랑 동생은 야구를 잘 모르지만 그날 아빠, 엄마와 함께 롯데를 응원했다. 1992년이었다.


자라서 어른이 될 때까지 그날 이후 야구를 본 기억이 없다. 야구를 잘 몰라서 안 보기도 했고, 볼 시간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중, 고등학교 때에는 농구가 대세였다. 농구 규칙은 알아도 야구 규칙은 몰랐는데, 지금 남편을 만나고 알게 됐다. 축구와 야구를 좋아하던 구남친이자 현남편은 야구를 할 때면 귀에 이어폰을 꽂고 다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왜 이 남자를 만났지? 싶다. 데이트 할 때에도 야구를 듣고 있고, 데이트 안 할 때는 야구를 보고 있고 뭐 그랬더랬다. 게다가 EPL도 즐겨 봐서 새벽에 일어나서 축구 보고 이런 일들도 있었다.


아무튼 나는 그때 야구 규칙을 알았다. 그냥 보다보니 알게 됐다. 그리고 야구를 좋아하게 됐다. 제리 로이스터가 롯데 감독으로 있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 시절에 열정 넘치던 롯데 야구를 기억한다. 나도, 남자친구도, 동생들도,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 모두 가을 야구로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당시에 정독실 선후배들과 함께 야구장에 갔는데, 선배네가 횟집을 운영하셔서 회를 잔뜩 싸왔고, 우리는 학교에서 유명한 닭집에서 통닭을 사갔다. 비록 그날 경기는 졌지만 우리는 맛있게 먹었고 즐거웠다. 야구는 져도 즐겁고 이겨도 즐거운 스포츠라고나 할까.


또 한 날은 서울에서 친구가 내려왔다. 롯데 팬인 그녀와 나는 비가 오는데도 둘이서 비옷을 뒤집어쓰고 야구장에서 열심히 응원했다. 그날도 롯데는 졌지만 아직까지 내가 본 야구 중 손에 꼽을만큼 재미있었다. 


스포츠 하면 징크스 혹은 미신도 빼 놓을 수가 없는데, 이 책에 나오는 한화의 연승 행진 때문에 두꺼운 후드티를 벗지 못한 감독님 이야기가 웃겼다. 그래도 감독님은 우승에 대한 것이었지만 내 막내동생은 좀 슬픈 생각을 했더랬다. 자기 친구들도 다 그렇다는데 롯데가 92년 이후 우승이 없는 건 그들이 태어나서인가 싶다고. 내가 보면 진다의 엄청난 확장 버전인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하면 슬프지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고 한다. 여전히 롯데를 응원하는 동생은 야구 시즌에는 욕을 달고 산다. 그럼에도 야구를 놓지 못하고 계속 본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런 게 아닐까. 승부의 짜릿함도 좋지만 승부와 관계없이 그 상황 자체를 좋아하는 것. 그렇기에 김영글 작가는 자본주의가 주는 화려한 야구도, 스포트라이트가 없는 순수한 여자 야구도 다 좋아하는 것이리라. 그리하여 결국 걸어서 야구를 볼 수 있는 곳에 살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져보고 말이다. 


작년 7월까지 롯데는 분명 가을 야구를 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생각보다 너무 잘해서 놀라기도 하고 두근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8월부터 시작된 연패는 이번 경기는 이기겠지란 기대를 열 번은 더 짓밟고서 끝났다. 한 두번 지는 거야 당연할 수도 있는 거지만 12연패는 상상도 못했었다. 그럼에도 야구를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벌써 2월도 중반을 넘어가려 한다. 곧 3월이 올테고 프로야구 시즌이 시작될테지. 올해 야구팀들은 어떤 경기를 보여줄까. 그리고 어느 팀의 드라마가 우승을 할 것인지 자못 기대가 크다.

그런데도 야구팬은 매일 경기를 본다. 못하면 못한다고 화를 내고, 잘하면 이렇게 잘할 수 있으면서 어제는 왜 못했냐고 화를 낸다. 그렇게 감독이나 선수를 한껏 원망하다가도, 하룻밤 자고 나면 다시 성심을 다해 응원한다. 이 분노는 어디에도 쓸 데가 없다. 내가 화를 낸다고 선수가 갑자기 잘할 리 없고, 그렇다고 야구를 끊을 것도 아니다. - P57

그럼에도 팬은 경기를 꺼버리지 않는다. 한번 마음을 준 이상, 손바닥 뒤집듯 팀을 바꾸지도 않는다. 절망을 끝까지 지켜보며, 다시 뜰 내일의 태양을 기다린다. 다만, 화를 내면서 말이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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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6-02-14 13: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야구가 시간이 정해진 게 아니라서요. 한 회가 30분 넘어가고 그럴 때가 좋더라구요. 약간 인생 같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열심히 안 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야구가 좋아요. 내내 놀면서, 쉬면서, 딴 선수 하는 거 구경하다가, 막 뛰어갈 때, 그런 느낌이 좋아요.

저는 오랫동안 해태를 응원했습니다. 하하하 ㅋㅋㅋㅋㅋㅋㅋ

꼬마요정 2026-02-19 11:35   좋아요 1 | URL
오옷!! 해태 팬이셨군요! 야구는 아무래도 연고지 구단을 좋아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단발머리 님도 그럴까나요? ㅎㅎㅎ 지금 기아는 어떠신지... ㅎㅎㅎ

야구는 알면 알수록 묘한 매력이 있더라구요. 말씀처럼 계속 집중해서 안 봐도 되고, 투수나 타석에 선 타자 외에 다른 선수들 구경도 하고 그러다가 공이 하늘 높이 올라서 선수들이 막 달리면 뭔가 설레는 게 너무 좋습니다. 멋진 스포츠예요^^

감은빛 2026-02-15 00: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보관함에 담았습니다. 부산 사람으로서, 아주 오랜 롯데 팬으로서 이 글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ㅎㅎㅎㅎ

저는 아마 이천년대부터 거의 20년 넘게 야구를 제대로 보고 즐기지 못했어요. 롯데 소식은 간간히 접했지만, 야구 경기 자체를 즐기지 못했었죠. 24년 봄부터 다시 경기를 보기 시작했어요. 야구를 다시 보면서 내가 이렇게 재미있는 걸 너무 오래 못 보고 살았구나 했어요.

92년 롯데 우승했던 그 시절이 엊그제 같기도 하고, 또 아주 먼 과거 같기도 하네요. 여전히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선수들은 그해 활약했던 선수들입니다.

어제 아니 그제 롯데 스프링캠프에서 주전선수 네 명이 불법 도박시설에 다녀와서 귀국조치 당하고, 징계 절차를 밟을 거라는 소식이 나왔더라구요. 그래서 SNS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네요. 나승엽은 정말 괜찮은 중심타자가 되리라 여겼는데, 많이 실망이네요. 작년에도 초반에 정말 좋았는데, 그렇게 긴 슬럼프에 빠질 줄이야. 고승민은 타격은 나쁘지 않은 편인데, 수비는 상당히 좋다고 생각했어요. 에휴. 김동혁은 작년에 주전들의 부상과 헤드샷 등으로 얻은 기회를 잘 살려 교체 멤버로 눈도장을 찍었는데, 이런 불미스런운 일이 생기다니. 나머지 한 명은 유격수 자원이라고 하던데 한번도 경기를 본 적은 없어요. 넷 중 나승엽과 고승민이 포함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너무 실망스럽고 화가 나더라구요. 뭐, 벌어진 일을 되돌릴수는 없으니 그들 없이도 롯데가 잘 해내기를 바랄 수 밖에 없겠지요.

꼬마요정 2026-02-19 11:49   좋아요 1 | URL
감은빛 님 롯데 사랑은 제가 잘 알죠 암요 암요!! ㅎㅎㅎ 이 책 재밌게 봤습니다. 감은빛 님도 즐거우시면 좋겠네요^^

야구란 게 못 보다가도 다시 보면 또 재밌고 좋다는 게 신기합니다. 응원가도 금방 입에 붙어서 더 신나기도 하구요. 새로운 선수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계속 보던 선수들이 구단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작년에는 상대팀이었는데 올해는 우리팀에 있다는 것 말이에요. 그리고 우리팀이었던 선수를 상대팀에서 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야구를 볼 때면 우리팀이 이기기를 원하지 상대팀이 지기를 바라지는 않는 듯 해요. 모순일까나요? ㅎㅎㅎ

며칠 전에 롯데 소식은 진짜 어이가 없더군요. 작년에는 경험 부족으로 그렇다고 위로하면서 올해 잘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이 선수들 유니폼 산 팬들은 또 무슨 죕니까ㅠㅠ 도박이라니... 그러나저러나 롯데가 잘 해내기를 바랄 뿐입니다. 혹시 아나요, 멋진 드라마가 나올 지... 그러면 좋겠습니다.

희선 2026-02-22 2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운동 경기는 이기는 팀이 있으면 지는 팀이 있겠습니다 그저 경기를 즐기면 좋겠다 생각해도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이기면 더 기분 좋겠네요 야구 선수도 야구를 하는 걸 즐기면 좋겠다 싶습니다


희선

꼬마요정 2026-02-23 22:09   좋아요 0 | URL
너무 승패를 보다보면 운동 경기 자체가 주는 즐거움을 놓칠 수도 있겠습니다. 승리도 중요하지만 함께 만들어가는 경기 그 자체를 즐길 수 있으면 좋겠네요.

제발 불법도박이나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만한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