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나무, 웬디고 - 코즈믹 호러, 만물의 의식에 가닿다
앨저넌 블랙우드 지음, 장용준 옮김 / 고딕서가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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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결코 이해하거나 대적할 수 없는 존재가 주는 공포가 있다. 이 우주에서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 존재인지 깨닫게 해 준다고나 할까. 코즈믹 호러라고도 불리는데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가 그런 공포를 잘 보여준다.


처음 <버드나무>를 읽었을 때, 러브크래프트가 떠올랐다. 그저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버드나무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듯 했으나, 어느 순간 그 자연은 인간을 집어삼킬 거대한 두려움으로 변했다. 러브크래프트는 블랙우드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블랙우드의 <버드나무>는 정말 읽다보면 스산하고 음산한 분위기에 뒤이어 어딘가로 끌려가서 사라져버릴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자연의 무시무시함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하찮은가. 나와 스웨덴 친구는 다뉴브 강을 따라 가다 만난 버드나무 늪지대에서 기이한 경험을 한다. 누군가를 내주어야만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희생양은 인간의 손(제의, 문명)을 허락하지 않고 자연이 그러한대로 처리된다.


이 책에 나오는 단편들은 모두 희생양을 요구한다. <웬디고>는 우리가 어느 정도 인식할만한 존재다. 하지만 그 존재는 인간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으며, 자신을 본 인간에게 불타는 발과 피 흘리는 눈을 주었다. 의기양양하게 의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인간은 반드시 좌절을 맛보게 될 것이다.


<막스 헨직>은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간 우리에게는 친숙한 이야기다. 세균전은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소재이지만 블랙우드가 살아간 시절에는 정말로 놀라울 이야기였겠지. 인간의 촉도, 인간의 집요함도 모두 공포스러웠다. 특히나 인간의 생명을 자기 뜻대로 없애려는 그 집요함이 예나 지금이나 존재한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무서웠다. 


<엿듣는 자>는 어쩌면 흔한 공포 소설 같기도 하다. 하지만 <막스 헨직>과 더불어 도시가 주는 삭막함과 인간이 모여사는 곳임에도 비인간적인 느낌으로 가득하다. 우주적 공포는 경외감만은 아니었다. 비정한 도시에서 비인간적인 사람들이 남긴 흔적 역시 우리가 대적할 수 없는 공포였다. 그저 나에게 일어나지 않길 바랄 뿐, 벗어날 길은 요원하다.


인간은 세상을 안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가 아는 것은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른다. 저 깊은 바닷속이나 까마득하게 높은 저 우주가 아니더라도 내 옆에 있는 사람의 마음 한 자락조차 모르는데 말이다. 

그는 매우 거칠고 맹렬하게 떠들었다. 비참한 공포에 휘둘린 채 그저 아무 말이나 내뱉고 있었다. 그가 오래 저항해온 공포, 그러나 마침내 그를 사로잡고 만 공포. - P86

나는 진실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랐다. 그저 싸늘한 두려움이 내 몸을 덮치는 감각만을 인지할 뿐이었다. 순전한 공포가 내 몸에서 신경을 찢어내 이리저리 비틀더니 떨림만 남게 만들었다. 나는 완전히 눈을 감았다. 목구멍에 무언가가 기도를 틀어막았다. 내 의식이 확장해 저 멀리 우주를 향해 뻗어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더니 순식간에 내가 의식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 죽어가고 있다는 또 다른 느낌으로 변했다. - P89

나는 풍경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시점이 바뀌어 풍경이 변한 게 아니었다. 변화는 분명 텐트와 버드나무 숲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분명 숲은 지금 훨씬 더 가깡이 다가와 있었다.
... 수시로 모양이 바뀌는 모래밭 위에서 버드나무들은 조용한 발로 부드럽게, 서둘지 않는 움직임으로 서서히 조금씩 더 가까이 기어온 것이다. - P47

버드나무 숲은 무슨 대홍수 이전의 괴물 같은 생명체 무리처럼 한데 몰려 물을 마시러 다가오는 것 같았다. - P19

그림자가 깊어질수록 내 주변 사방에서 점점 더 검게 물들며 빽빽이 늘어선 그 행렬, 광포한 바람 속에서 기묘할 정도로 부드럽게 움직이는 버드나무들이 내 안 어딘가에 달갑지 않은 암시를 보내고 있었다. 우리의 존재가 필요치 않은 낯선 세상에 초대받지도 않은 우리가 무단 침임했다는 암시였다. 우리는 침입자였다. 위험한 모험을 품은 이 낯선 세상에서!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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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스 비크의 마지막 하루 - 2023 브라게문학상 수상작
프로데 그뤼텐 지음, 손화수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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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되돌아보는 일은 곧 사랑을 기억하는 일'이라는 문구는 이 책을 설명하기에 너무나 충분했다. 새벽 5시 15분 닐스 비크는 일어났고, 마지막 하루를 살기 시작했다. 그는 죽은 아내의 흔적과 자신의 흔적을 차분하지만 조금은 감정적인 채로 정리했다. 불타는 매트리스를 보는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닐스 비크는 평생을 섬과 육지를 배로 연결하는 페리 운전수였다. 그는 이제 그의 삶에 흔적을 남긴 이들을 되살려냈다. 자신이 구했던 개 '루나'부터 말이다. 그는 배를 몰며 자신이 배에 태웠던 수많은 사람들과 그 상황들을 기억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모든 곳에 아내 마르타가 있었다. 자신보다 먼저 죽은 이들을 차례대로 만나며 인사를 나누는 장면들은 가슴 한 켠을 시리게 하면서도 뭉클하게 했다. 사람이 죽기 전 펼쳐진다는 주마등보다도 더 개인의 의지가 가득한 인사라고나 할까.


최선을 다해 살아간 사람의 마지막에 이렇게 사랑의 흔적이 가득한 것이 아름다웠다. 후회도 많고 실수도 많았지만 결국 모든 것에 애정과 관심이 있었고 결코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과 삶은 맞닿아 있으며 슬픈 기억도 있겠지만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의 기억이 그 삶과 죽음을 끝이 아니게 만드는 것 같았다.


닐스 비크는 어쩌면 자신이 불태웠다고 생각한 매트리스 위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영혼이 자신이 평생 몰았던 페리에 자신이 사랑했던 이들의 기억을 태우고 저승으로 가는 강, 삼도천이든 스틱스 강이든 건너가는 걸지도. 


남은 이들은 사랑했던 닐스를, 사랑했던 다른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각자의 강이나 바다를 건널 것이다. 그렇게 끝과 시작은 다르지 않고 같은 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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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트 솔티
황모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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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슐러 르 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인상깊게 읽었더랬다. 황모과 작가는 그 이야기를 오마주하여 <오메라시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썼다고 했다. 한 아이의 희생으로 번영하는 세상에서 그런 세상을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은 오멜라스를 떠난다. 오메라시는 오키나와의 남쪽 끄트머리 어딘가라고 한다. 도쿄에 만화를 그리기 위해 온 '나'는 무뚝뚝한 옆집 할머니에게 아들이 오메라시로 돌아가자는 말을 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할머니는 고향으로 돌아가길 완강하게 거부하는데 왜 그럴까...


'나'는 일본어에도 익숙해져 오메라시를 검색했다. 오키나와가 아닌 다른 곳도 찾을 수 있었는데, 오키나와의 오메라시는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이 오메라시는 괴담의 장소였다. 터널을 메우고 그 위에 거대한 도시를 세웠는데, 그 터널에 사람이 남아 있었고 그 사람이 절규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공사를 끝내버린 뒤 밤마다 터널에서 사람 비명 소리가 들린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오메라시에서 일상 생활을 영위했다. 오메라 신사도 가고 동물원의 라쿤 소리와 비명 소리를 비교한 영상도 올렸다. 할머니가 살던 오메라시에도 학살의 역사가 있었다. 히메유리 학도대 사건으로 평범한 여중생 200명이 종군 간호사로 전쟁에 동원되었다가 종전 직전 격전지에서 해산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폭격과 자살 집단 종용으로 모두 죽었다. 오메라시 터널에 갇힌 사람과 집단 학살을 당한 오메라시 여중생들은 슬픈 역사로 서로에게 맞닿아 있고, 할머니가 돌아가고 싶지 않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일본 내에서 이방인이 된 할머니와 피폭 3세인 '나'가 함께 안고 있는 학살의 역사이기도 하다. 일본에 강제 징용으로 끌려 와 원폭의 피해자가 된 외할아버지는 피폭이 됐음에도 히로시마를 복구하는 데 동원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그런 식민지인들의 피해는 모른 척 한다.


<시대지체자와 시대 공백>은 왜곡된 역사가 현실이 되어버린 세상을 그리고 있다. 사실 그들은 시대지체자가 아니라 시대를 열심히 살아내는 사람들이 아닐까. <순애보 준코, 산업위안부 김순자> 역시 왜곡된 역사를 현실로 만들려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속아서 일본으로 끌려 간 이들은 어느 순간 스스로 선택해서 매춘한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런 식으로 기억을 조작하는 이들은 전범 기업 미쓰마루 탄광 기업의 자회사인 아소후토 연구소였다. 피해자들의 기억을 왜곡하여 순애보 준코를 만들어 버린 그들의 후안무치함에 치가 떨렸다.


<타고나 시절>과 <나의 새로운 바다로>는 아이 한 사람을 키우는 데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떠오르는 이야기였다. 스스로 생명을 잉태할 수 없게 된 인류는 이제 스스로 성장해야만 했고, 죽은 딸의 뇌를 로봇 벨루가에게 이식한 엄마는 '벨카'를 벨루가들 공동체로 독립시켜줘야만 했다. 엄마의 사랑은 아이를 자라게 하고, 아이의 독립은 엄마의 사랑을 빛나게 했다.


<스위트 솔티>는 모두가 난민이 되어버린 세상을 그리는 듯 했다. 엄마의 나라 '바다의 거품'에서는 글을 읽고 쓸 줄 알거나 안경을 쓰면 죽임을 당했다.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난민이 되었다. 빙하는 녹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난민이 되었다. 난민들은 각기 다른 곳으로 흩어졌다 다시 만나지곤 했다. '달콤짭쪼름한' 무티하라는 어디서는 스스로 이방인이 되었고 어딘가에서는 토착민들에게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빙하는 모두 녹았고, 인류는 모두 난민이 되었다. 부산에서 그들은 희망을 찾아 우주로 떠날 수 있을까.


<브라이덜 하이스쿨>은 처음엔 마그리드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의 한국판 같은 이야기에 주인공이 빙의된 줄 알았다. 하지만 수빈은 수면형에 처해졌다 노파 가죽을 뒤집어 쓴 채 허드렛일을 하는 형벌을 받은 거였다. 여자들은 요조숙녀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았고, 브라이덜 하이스쿨을 졸업하려면 남자들의 선택을 받아야 했다. 일부다처제에 강력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자들은 어릴 때 호르몬 조절기를 몸에 삽입한 채 남성의 욕구에 순응하는 존재로 키워졌다. 그곳에서 수빈은 '이야기'로 그녀들을 각성시켰다. 무시무시한 디스토피아가 아닐 수 없었다.


<여행이 다시 찾아옵니다>는 팬데믹 시대에 여행을 다닐 수 없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여행을 다니는 로봇의 이야기를 다룬다. 어쩌면 앞으로 더 강력한 바이러스가 창궐한다면, 그래서 더 이상 여행을 다닐 수 없게 된다면 이런 서비스가 유행할지도 모르겠다. 여행이 찾아오는 세상, 이 세상은 우리의 미래가 아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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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5-05-29 05: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몰랐는데 황모과 작가는 지금 일본에 사는가 봅니다 그래서 일본 이야기가 나오는가 싶기도 하네요 일제강점기 이야기, 그걸 SF로... 그런 일 없으리라는 법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지금은 2020년에는 괜찮아지려나 했는데, 지금은 그때를 잊고 사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다음에 나타나는 바이러스는 더 심해서 여기에 나온 것처럼 로봇이 여행을 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런 때가 오지 않아야 할 텐데... 저는 어디 가는 거 안 좋아하지만... 빙하가 다 녹는 것도 무서운 일입니다 그때는 겨울이 없어질지도, 사람이 살 수 있을지...


희선

꼬마요정 2025-06-01 23:15   좋아요 0 | URL
저도 잘 모르지만 일본에 있다가 한국에 있다가 하는 모양이더라구요. 일제강점기 이야기를 sf로 풀어내는데 sf로도 가슴이 저미는 게 너무 화가 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습니다. 바이러스 때문에 로봇이 여행을 다닌다는 생각은 너무 현실성이 있어서 무섭기도 했어요. 빙하가 다 녹는 것도... 먼 미래의 일만은 아닌 것도 같구요. 슬픕니다.ㅠㅠ

Falstaff 2025-05-29 17: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황모과식˝이라 해서 황, 노란 모과를 생각했지 뭡니까. ㅋㅋㅋㅋ
또 ‘과식‘이 있어서 얼마나 맛있으면 노란 모과를 과식했을까? 이렇게 막 ㅋㅋㅋ

꼬마요정 2025-06-01 23:16   좋아요 1 | URL
아하, 진짜 재밌는 생각입니다. ㅋㅋㅋㅋ 노란 모과가 얼마나 맛있으면 과식을 할까요.. 그런 모과 저도 먹어보고 싶습니다. ㅋㅋㅋ 저는 곧 수박을 사 먹을 생각입니다. 하루만에 수박 한 통도 먹을 수 있어요!! 수박 과식하고 말겁니다!!!
 
마천대루
천쉐 지음, 허유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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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마천대루'는 우리가 아는 대도시를 닮았다. 작가의 나라인 대만의 타이페이도 보이고 서울도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곳. 친밀한 관계도 있고 아예 모르는 사람들도 있고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도 있고 범죄자도 있다. 신분제도가 없는 곳임에도 계급이 존재하고 신분상승을 꿈꾸는 사람과 몰락한 사람이 있다. 그리고 시체가 발견되었다.


범죄소설이지만 이야기는 느리고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흘러간다. 사람들은 제각각 결핍을 안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지옥 속을 헤매는 것만 같다. 마천대루 1층 아부까페에서 인기 많은 매니저인 중메이바오 역시 그랬다. 아름다운 그녀는 불행한 가정의 희생자였다.


마천대루는 상승과 하강, 상실과 탐욕이 공존하는 곳이다. 애초부터 고층을 차지했더라도 끊임없이 하강하다 결국 그곳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부푼 꿈을 안고 이곳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은 각자의 욕망을 따라다닌다.


마천대루 부동산 중개인인 린멍위는 공실에서 불륜 정사를 나누는 인간이다. 로맨스 작가인 우밍웨는 집 밖으로 나올 수 없다. 셰바로워는 죄책감에 짓눌려 자신을 버리다시피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이 마천대루에서 상실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중메이바오의 상처와도 닿았다.


메이바오의 동생인 옌쥔도 첫사랑인 다썬도 죽기 전 만났던 셰바로워도 모두 그녀에게 구원을 줄 수 없었다. 그녀의 비참함은 과거 가족에게서 나왔고 결국 벗어날 수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비정하고 비참한 가족사에서 빠지지 않는 양부의 성폭력은 화가 날 지경이었다. 세상은 왜 이렇게 막되먹고 나쁜가. 실제로 생부도 딸을 성폭행 하는 세상이니 개연성이 없다 화를 낼 수도 없고 너무 현실적이라 욕할 수도 없고 그저 그런 짐승같은 놈들 거세나 시켰으면 하고 투덜거리기나 할 뿐이다. 그런 내가 너무 못나 보였다. 


벗어나지 못한 그녀가 사라진 이후에도 마천대루는 사람들이 살았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메이바오를 알던 사람들의 삶은 조금씩이나마 변화가 있었다. 어쩌면 다음에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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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5-05-28 05: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천쉐인데, 이름 보고 찬쉐를 생각한 듯합니다(찬쉐 책은 한권도 안 읽었지만) 이름이 비슷하지만 다른 사람이네요 중국말로 쓰는 건 많이 달라서 헷갈리지 않겠습니다 천쉐(陳雪) 찬쉐(殘雪) 쉐는 둘 다 눈이군요


희선

꼬마요정 2025-05-28 22:20   좋아요 0 | URL
사실 저도 처음엔 찬쉐인 줄 알았어요. 천쉐더라구요. 쉐는 ‘설‘이었군요. 이쁩니다. 책은 잔잔하지만 좀 먹먹하기도 합니다. 어디든 현대인들은 자기만의 지옥이 있네요.

바람돌이 2025-05-28 0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 자체가 약간 스포일러 느낌. 대만 작가들 책은 몇권 읽었는데 아직까지 딱히 맞다는 느낌이 안 들더라구요. 그냥 나쁘지 않다 정도? 이 작가는 또 어떨지 궁금해지네요. ^^

꼬마요정 2025-05-28 22:23   좋아요 1 | URL
저도 대만 작가 책이 딱 맞다는 느낌은 못 받았어요. 이 작가도 그렇긴 해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가지지 못한 것을 원하는 건 때론 절망입니다.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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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는 '없는 장소'란 뜻이지만 '이상향'을 가리키는 말이다. <홍길동전>의 율도국, 제주도의 이어도, 불교의 극락, 기독교의 에덴, 북유럽 신화의 발할라, 중국의 무릉도원, 아더왕 신화의 아발론 뭐 이런 곳들이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겠다. 깨닫거나 신에게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세계는 결국 '없는 세계'라고 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만도 하겠다.


하지만 깨닫거나 신에게 선택 받아야 갈 수 있는 세계라서 없다기보다는 모두가 원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없는 세계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유토피아와 당신이 원하는 유토피아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당신은 싫어할 수도 있을테고, 당신이 원하는 것들을 나는 버리고 싶어할 수도 있고, 나는 당신과 함께 하고 싶지만 당신은 다른 이와 함께하고 싶을 수도 있을테니까. 모두가 원하는 바를 충족시키는 세계, 생각만 해도 짜릿하지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계. 그 세계가 바로 '유토피아'가 아닐까. 그래서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세계는 세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구성원들을 획일화 시켜 그 세계 최고 권력자에게 맞추는 것 같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정보라 작가의 많은 이야기들이 우리 사회의 모순과 억압으로 인한 상처를 안고서도 어떻게든 원하고 바라는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아마 그런 세상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의 주인공들은 상처 받으면서 애도하고 아파하면서 위로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 과정이 아무리 처절하더라도 조금이나마 세상이 바뀌었다면 위로가 될까. 어차피 '유토피아'는 없는 세상이라지만 나의 유토피아는 조금이나마 이루어질 가능성이 생겼으니까.


인간이 정착한 행성, 그리고 떠나버린 행성. 정착해서 살 수 있을 거라 여겼던 행성에서 인간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떠났다. 인간들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각종 생산시설이나 편의시설, 인간을 돕던 로봇들, 교통수단들을 모두 버리고 떠났다. 인간들은 남겨진 기계들의 동력인 중앙 발전기를 분해해서 가져갔다. 태양광 패널을 가진 '나'는 짧게 뜨는 해를 보며 조금씩 충전하여 살아남았다. 그리고 응급로봇을 구조했다. 기계들만 남은 그곳은 기계들이 서로 결합하여 만들어진 '괴물'이 있고, 인간 시체를 흔들며 다른 기계들을 유인하는 살아있는 '건물'이 있었다. 사람을 뒤에 태웠던 나는 응급로봇을 뒤에 태우고 안정감을 느끼고, 응급로봇은 끊임없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너의 유토피아는 어때? 1부터 10까지" '나'는 충전이 얼마나 되었는지를 보며 수치를 매긴다. 


이 기계들은 만들어진 목적이 있었다. 그 목적에 맞는 상황이면 안정감을 느꼈고, 동력을 얻으면 기뻐했다. '나'의 상황은 뒤에 내가 보호하거나 목적지에 데려다 줘야 할 누군가가 타고 있는 것이고, 움직일 수 있도록 충전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나'는 자유로워야 했다. 어디든 갈 수 있도록. 하지만 기계인 '나'는 목적을 뛰어넘었다. 상실을 겪었고 애도할 줄 알았다. 이제 '나'는 자유를 위해 안정적인 충전을 포기하고 달리고 응급로봇을 고치기 위해 달린다. 자유롭고 소중한 이를 위해 달리는 '나'의 유토피아의 수치는 얼마일까. 확률 계산을 하는 '나'의 생각 너머에 언뜻 비치는 것은 '희망'일까. <너의 유토피아>는 희망의 수치일까.


<영생불사연구소>는 직장 생활을 하는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관료주의의 폐해를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영원히 이것이 끝나지 않을 거라는 불안감 역시. 하지만 같은 생각을 하는 집단에 있는 것으로도 안정감을 느끼는 모습 역시 보여준다. 영원하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니 갑갑하고 끔찍할 수도 있지만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 편안한 느낌 역시 공존할테다.


<여행의 끝>은 흥미진진한 좀비 스릴러물이다. 전염병을 치료하기 위해 파견된 우주선에서 병자가 발생하자 지구는 통신을 끊었다. 어쩌면 지구 역시 전염병으로 인간은 멸종되고 없을지도 모른다. 우주선 안은 그야말로 아수라장. 나는 우주선에서 친해진 우주항공기술자인 그녀석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결국 이 우주선과 우주선에 탑승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인간에게 가장 강렬한 욕구가 '식욕'일까 잠시 고민해봤다.


<아주 보통의 결혼>은 너무 슬픈 이야기였다. 연애에 도통 재주가 없는 선혁은 다니던 치과에서 본 지영에게 고백했고 결혼했다. 지영은 선혁 뿐 아니라 선혁의 가족에게도 곧잘 연락을 하며 다정했고 결혼 생활은 순탄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느 날 새벽에 누군가와 통화를하는 지영을 보게 된 선혁이 지영을 의심하면서 이야기는 반전된다. 지영의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 뭐냐는 질문에 손이라고 답한 선혁이 '눈'이라고 대답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장면에서는 나 역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는 화장실 변기 뒤쪽을 못 볼것만 같다. 


모습이 같으면 그 사람일까, 한 사람을 정의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오늘도 선혁은 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지영'과 함께 한다. 


<One More Kiss, Dear>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사물인터넷이든 그 무엇이든 우리의 삶이 모두 온라인 상에 노출된다면 -지금도 그렇지만- 잊혀지거나 알리고 싶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미래의 어느 날 엘리베이터인 '나'는 5305호 거주자가 나를 만진 이후부터 그녀를 잊지 못했다. 기계를 잘 사용하지 않아 그녀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지만 단 하나 그녀가 들었던 노래를 알게 된 '나'는 그녀가 엘리베이터를 타자 그 노래를 들려줬다. 그 노래에 담긴 사연은 무엇이며, 그녀가 그토록 잊혀지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엘리베이터의 인공지능은 어째서 그녀에게 집착하는 것일까.


<그녀를 만나다>는 변희수 하사의 이야기가 모티브가 되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팬데믹 상황에서 항체를 만들고 힘겹게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던 때 갑자기 누군가가 내 귓가에 말을 하며 침방울을 튀었다. 그리고 폭발이 있었다. 120살을 눈앞에 두고 있던 나는 이런 사고에 너무나 취약하였으니 나노봇이 대거 투입되어 겨우 살아났다. 하지만 여전히 소변줄을 꽂은 채로 로봇의 도움을 받아 화장실을 가야 했고 머리 감기도 힘들었는데 그 바람에 귓가에 튄 범인의 침방울에서 DNA를 채취할 수 있었던 것은 아주 작은 행운이라고 해야 할까. '나'가 젊었던 시절에 기계는 사람들을 죽였다. 얼마 전에도 SPC에서는 또 한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고 혼자 운행하던 지하철이 광고판 갈던 사람을 죽였고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 죽었고 크레인이 무너져 죽고 그렇게 억울하게 죽는 일이 많았다. 사람 목숨값이 수치화되어 헐값처럼 매겨지던 시절을 살았던 '나'가 120살이 될 때까지도 이렇게 혐오가 폭발을 일으켜 사람을 다치게 하는 일이 있다는 게 참담했다. 하지만 팬클럽 회원들은 살아남았고, 그녀 역시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행복해졌다. 그렇게 모두가 살아남아 원하는 대로 살면 좋겠다. 팬미팅에서 그런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게 '나'의 유토피아일지도.


<Maria, Gratia Plena>는 가슴 아픈 이야기이다. 공권력이 포함된 가정폭력은 그 자체로 공포다. 어디로 도망쳐도 따라와서 총을 겨눈다. '나'는 법에 정한 대로 범죄자이고 대상자에 대한 기록은 전적으로 기존 범죄 사건의 해결과 미래에 있을 수 있는 범죄 사건의 예방을 위해서만 의식 스캔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정보는 절대 발설해서는 안 되었다. 나는 혼수상태에 빠진 '그녀'의 의식을 스캔한다. 그녀는 약을 제조하고 대중에게 유포한 악질적인 약쟁이지만 약을 팔아 돈을 번다기엔 사업적이지 않았다. 그저 약에 취하는 것이 목표인지, 모두를 약에 취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점점 그녀가 궁금해졌고 그녀는 죽음에 가까워만 갔다.


결국 그녀가 원한 것은 무엇일까. 가장 편안하고 안전해야 할 집과 가족이 끔찍한 공포로 변했을 때, 홀로 살아남은 그녀가 보고 싶어한 이는 누구일까. 가슴이 아팠다. 자신보다 약한 상대를 대상으로 한 폭력은 비열하기 그지없었다.


<씨앗>은 마지막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30년 정도 전에 과학잡지에서 읽었던 소설을 떠올리게 했다. 그 소설은 인간이 음식을 먹지 않고 식물처럼 광합성을 하여 살아가게 된 세상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지구에 빙하기가 닥쳐 모두 죽었다는 결말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는데, <씨앗>은 다른 이야기였다. 절망적이지만 희망을 잃지 않는 이야기라고나 할까. 탐욕과 거짓, 거대 자본에 먹힌 배양된 인간과 식물과 결합하여 살아남은 인간 중 누가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씨앗을 품지 못하지만 거대자본이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작물과 씨앗을 널리 퍼트리는 식물 중 땅에 단단하게 뿌리내리는 쪽은 어디일까. 어쩌면 인간 자체가 사라지는 게 지구를 위해서 더 나을 것도 같지만 자연과 하나가 됨으로써 자연에 순응하는 인간은 지구도 싫어하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다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라면 또 다른 유토피아가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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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5-05-26 04: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다 바라는 게 다르겠습니다 모두가 바라는 세상은 없겠지요 모두가 다 잘 살 수 없는 것처럼... 자신이 바라는 걸 생각하고 사는 게 좋을 듯합니다 세상에 이런저런 사람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겠네요 한사람이 바라는 걸 모두가 따르는 게 아니고... 앞날은 어떨지 지금도 감시 받고 사는 느낌이 아주 안 드는 건 아닌데, 나중엔 그게 더 심해질지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 인공지능이 스토커 같은 이야기도 있군요


희선

꼬마요정 2025-05-27 11:45   좋아요 1 | URL
자신이 바라는 걸 아는 것도 대단하단 생각이 듭니다. 각자가 바라는 바를 모두 이루는 건 어렵겠죠? 그래서 모두의 유토피아가 상상이 안 갑니다.

인공지능이 스토커 짓을 하면 우리는 어떻게 도망칠 수 있을까요ㅠㅠ

바람돌이 2025-05-26 0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보라 작가의 책은 읽다보면 엄청 좋지는 않은데 또 계속 끌리는 맛이 있더라구요. 묘한 매력이 있달까? 너의 유토피아도 읽을까말까 했는데 꼬마요정님 글 보니 읽어야겠네요. ㅎㅎ

꼬마요정 2025-05-27 11:46   좋아요 1 | URL
저는 정보라 작가가 너무 좋더라구요. 콩깍지가 씌여서 객관적인 평가가 안 됩니다. ㅋㅋㅋㅋ 이 책 저는 참 좋았습니다!! 바람돌이 님 리뷰 기대할게요 ㅎㅎㅎ

책읽는나무 2025-05-26 2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보라 작가가 쓴 소설들은 늘 눈여겨보게 되는 것 같아요.
작가의 올곧은 시선들이 중심을 잡아주는 듯한 생각이 들더라구요.
요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두 단어에 꽂혀 있는데 이 책의 제목도 유토피아네요?^^

꼬마요정 2025-05-27 11:49   좋아요 1 | URL
정보라 작가 너무 좋아요! 생각도 좋고 표현도 좋구요. 무슨 상이든 받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에 꽂혀 계신다니 이 책이 딱입니다요!!! 근데 밀양 위양지랑 밀면만 생각나요. ㅎㅎ

꼬마요정 2025-05-27 11:50   좋아요 1 | URL
심지어 위양지는 바람돌이 님 글이었… ㅠㅠ

2025-05-27 0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5-27 1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5-27 1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5-27 1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5-27 1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5-27 1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