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새물결, 2008)를 지난주에 구입해서 며칠 동안 읽었다. 다른 일들에 매이지 않았다면 하루나 이틀 안에 통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속독이 가능한 건 국내에 소개된 그의 책들 가운데 비교적 쉬운 책 범주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번역의 가독성이 그만큼 좋기 때문이다. 몇몇 부주의한 오역들이 눈에 띄긴 하지만 교정해가며 읽을 수 있는 수준이다. 사실 이론서의 경우 이 정도 번역도 드물며 역자의 노고를 기억해둘 만하다. 

2001년에 나온 <전체주의가 어쨌다고?>는 국내에 번역된 지젝의 책들을 연도별로 펼쳐놓으면 중간쯤에 위치하는 책이다. 2000년대 이후의 저작들로 한정하자면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인간사랑, 2004)에 바로 이어지는 책이면서 <진짜 눈물의 공포>(울력, 2004), <믿음에 대하여>(동문선, 2003),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인간사랑, 2003),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 <신체 없는 기관>(도서출판b, 2006), <죽은 신을 위하여>(길, 2007), <이라크>(도서출판b, 2004), <HOW TO READ 라캉>(웅진지식하우스, 2007)에 앞서는 책이다. '신간'이긴 하지만 진작에 소개되었어야 하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그래서 든다. 영어본을 기준으로 거슬러 올라가본다.

2006, How to Read Lacan, London: Granta Books (also New York: W.W. Norton & Company in 2007).

 

 

 

 

2004, Iraq: The Borrowed Kettle, London: Verso.

 

 

 

 

2003, The Puppet and the Dwarf, Cambridge, Massachusetts: MIT Press.

 

 

 

 

2003, Organs Without Bodies, London: Routledge.

 

 

 

 

2002, Revolution at the Gates: Žižek on Lenin, the 1917 Writings, London: Verso.


 

 

 

2002,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 London: Verso. 


 

 

 

2001, Opera's Second Death, London: Routledge.(*근간 예정으로 안다)

2001, On Belief, London: Routledge.

 

 

 

 

2001, The Fright of Real Tears: Krzysztof Kieślowski Between Theory and Post-Theory, London: British Film Institute (BFI).

 

 

 


2001, Did Somebody Say Totalitarianism?, London: Verso.

 

 

 

 

2000, The Fragile Absolute, London: Verso.

 

 

 

 

가장 읽기 쉬운 축에 속한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만만한 건 아니어서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의 경우에도 지젝에 대한 사전 숙지는 얼마간 필요하다. 라캉 정신분석의 용어들이 걸림돌이 될 수 있는데, 여차하면 그냥 넘어가도 좋겠다. 그럼에도 읽을 만한 대목들은 많이 있으니까. 여기서는 몇몇 오역과 역자와 의견을 달리하는 대목들만 나열해둔다(다섯 편의 에세이에 대한 '읽기'는 그 자체로 상당한 견적을 필요로 하며 여기서 다룰 수 없다). 지젝을 읽을 독자들에게 약간의 도움이 되면 좋겠지만 어디까지나 '약간'이다.  

먼저 고유명사와 관련된 대목들인데, 사실 이런 건 일반 독자들에게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겠다. 그럼에도 나로선 '교정의지'를 억누르지 못한다. 13쪽에서 한나 아렌트에 대한 재평가('아렌트 르네상스'란 말까지 쓰지 않는가!) 분위기에 대해서 지젝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고 언급하는 대목인데, 가령 1970년만 하더라도 학술 토론장에서 "당신의 논의 전개는 한나 아렌트와 비슷한 것 아닌가요?"란 말이 나왔다면 당사자가 꽤나 곤경에 빠져 있다는 신호가 됐지만 이젠 달라졌다는 것(90년대 이후겠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아렌트가 의당 경의를 표해야 할 인물로 여겨진다. 기본적 성향으로 보건대 당연히 아렌트에게 반기를 들어야 할 것처럼 생각되는 학자들조차도 자기 이론의 근본적 신조들을 아렌트와 화해시켜 보려는 불가능한 작업에 빠져 있다."

그러한 학자들로 지젝이 거명하고 있는 사람이 크리스테바와 리처드 번스타인이다. "해서 줄리아 크리스테바 같은 정신분석학자가 정신분석 이론을 묵살해버린 아렌트를 평가할 때나, 리하르트 베른슈타인 같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후계자들이 아도르노에 대한 아렌트의 극단적인 증오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처럼"이 인용문에는 삽입돼 있다. 

'정신분석가'인 크리스테바가 아렌트를 높이 평가하거나(크리스테바는 아렌트의 평전을 썼다) 프랑크푸르트학파 계열의 번스타인이 아도르노를 증오한 아렌트를 중요하게 다룬다는 게(번스타인은 <아렌트와 유태인 문제>란 책을 썼다) 지젝으로선 납득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여기서 'Richard Bernstein'을 역자는 '리하르트 베른슈타인'으로 읽었는데, 독일 학자라면 그렇게 읽겠지만 번스타인은 미국 학자이다(이름으로 미루어 독일계이긴 할 테지만). 때문에 나는 '베른슈타인'이라고 읽어줄 이유가 없다고 본다. 더구나 국내에 '번스타인'이란 이름으로 <존 듀이 철학 입문>(예전사, 1995), <객관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보광재, 1996) 등이 소개돼 있기까지 하므로(후자는 절판된 게 유감이다. 좋은 책이다). 미국의 프래그머티즘과 하버마스, 가다머 등의 독일철학이 그의 주된 전공 분야다.   

 

 

 

 

그리고 29쪽 등에서 <순수의 시대>의 작가 '이디스 워튼(Wharton)'을 '훠튼'이라고 읽어주고 있는데 이미 국내에 <순수의 시대>(오리진, 1993)을 필두로 하여 여러 작품들이 소개된 작가를 다르게 읽어줄 필요는 없다고 본다. 마틴 스콜세지가 영화화하기도 한 <순수의 시대>는 지젝이 다른 책들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어서 나도 뒤늦게 번역본을 구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후에 '피터 셰퍼'와 '허버트 드레퓌스', '존 브록만'의 표기에 관한 지적들을 적다가 날려먹었다(임시저장도 안돼 있다). 유감스럽지만 그런 걸 포함하여 몇몇 오역들(대표적으론 83, 148, 288, 306, 312쪽 등에 나온다)과 불만들(나는 'act'를 상용되고 있는 '행위' 대신에 굳이 '행동'으로 옮긴 것 등에 대해서 동감하지 않는다)은 중국에 다녀와서 다루도록 하겠다...

08. 0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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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1-29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은 지름신의 사도요, 모든 탐욕의 샘이시옵나이다.......;ㅅ;
1.로쟈님 글을 읽고 지젝거리기 시작했다.
2.지젝은 굉장히 열심히, 계속해서 글을 쓴다.
3.역자들(과 출판사들)은 굉장히 빠르게, 계속해서 번역/출간한다.
4.나는 굉장히 허겁지겁, 무리하게 쟁여놓는다.
5.읽으며 머리를 쥐어뜯........거나 혹은 책값을 마련하러 일터로 간다.
라는 순환입니다. (웃음)

로쟈 2008-01-30 00:22   좋아요 0 | URL
사실 지젝은 그 정도의 '보상'은 하지요. 엉터리 번역들만 아니라면...

bongsun 2008-01-31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저는 이 책의 편집을 담당했던 사람입니다.
로쟈 님의 글은 항상 감탄스러운 마음으로 읽고 있습니다.
사실 저희 같은 편집자에게 로쟈 님은 감사와 두려움의 대상이죠.^^
이번 글도 너무나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하고요.^^;)
그런데 한 가지 밝혀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로쟈 님께서 지적하신 인명 표기에 관한 것인데요,
책의 '일러두기'에 밝혀놓았듯이
인명은 원칙적으로 브리태니커 사전의 표기를 따르는 것이 출판사 방침이어서,
역자 선생님도 그 방침을 따라주시도록 설득했습니다.
따라서 인명 표기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편집자(인 저의) 책임입니다.

중국에 다녀오시는 모양이네요.
몸 건강히 잘 다녀오시고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로쟈 2008-02-03 11:47   좋아요 0 | URL
'브리태니커'에 '베른슈타인'이나 '훠튼'으로 표기돼 있나요? '한국어판 브리태니커'를 말씀하신다면 그 또한 음역인데요... 음, 어쨌거나 제 생각은 고유명사 표기의 '고유성'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발터 벤야민'과 '한나 아렌트'라고 굳어진 이름을 '원칙'을 이유로 '발터 베냐민'이나 '해나 아렌트'로 표기하는 건(한겨레 같은 경우가 그런데) 원칙의 남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성 표기에서도 '두음법칙'에는 위배되지민 '류'씨 성 같은 표기를 허용/인정하고 있는 것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은 제가 편집자들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bongsun 2008-02-04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국 잘 다녀오셨는지요.
(한국어판) 브리태니커 사전에 책에 언급되는 모든 인물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경우 같은 철자의 다른 인물명 표기에서 따오거나,
다른 책이나 언론 등에서 쓰는 표기를 참조하거거나 했는데,
아무튼 문제점이 꽤 있는 것 같네요.
특히 베른슈타인은 명백히 제가 오해했거나 제대로 조사하지 못한 경우입니다.
인명 표기에 나름대로 신경을 쓴다고는 했는데,
허술한 부분이 상당히 있군요.
지적과 충고에 감사드립니다.
문제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로쟈 님과 모든 독자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리며,
앞으로는 더욱 신경을 곤두세워 만전을 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로쟈 2008-02-04 14:06   좋아요 0 | URL
'번스타인'은 '번슈타인'이라고 옮긴 경우도 있습니다. 저로선 기간된 책의 경우 오류가 아니라면 고유명사들은 일치시켜주는 게 독자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죠. 처음 번역되는 고유명사라면 상관없는 일이라고요.^^;

bongsun 2008-02-04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무튼 충고 감사드립니다.^^
(앗, '참조하거거나'(?) - 편집자의 자질이 의심된다는... ㅜㅜ)

로쟈 2008-02-04 15:13   좋아요 0 | URL
저도 덩달아 오타를 냈네요. '일이라고요'라니요.^^;
 

비릴리오 읽기 리스트를 만든 김에 리뷰기사도 하나 옮겨놓는다. 개인적으론 '최근에 나온 책들' 연재에서 다룬 적이 있는데(http://blog.aladin.co.kr/mramor/882648) 책을 완독하진 않았다(책이 나오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러시아로 떠났었다). 최근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들 중의 하나와 연관되기에 영어본을 찾는 대로 조만간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기본적으론 '전쟁학'에 대한 관심이다. '제자백가'의 사상을 낳은 '조건'으로서의 전쟁).

한겨레(04. 03. 12) '속도’는 어떻게 희망서 악몽으로 바뀌었나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폴 비릴리오(72)는 살아서 재발견된 학자다. 1975년 전쟁 건축물을 철학적으로 살핀 첫 저서 〈벙커의 고고학〉을 내놓으며 자기만의 정치적 사유를 시작한 그는 자신의 주요한 저서들이 나오고도 한참 뒤인 1990년대에 들어서야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군사학적 상상력으로 정치의 흐름을 살펴온 그의 이론은 유고슬라비아내전, 9·11 뉴욕 테러와 같이 서구 내부에서 벌어진 파괴적 사건을 거치면서 진지한 연구와 참조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국내에서 그는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의 사상과 연관돼 이제 막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구사한 개념의 상당수가 비릴리오에게 연원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의 사상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것이다. 실제로, ‘노마디즘’이나 ‘탈영토화’와 같은 들뢰즈·가타리의 핵심 개념은 비릴리오가 1976년에 펴낸 〈영토의 불안정성〉에서 처음 선을 보인 개념이다.

〈속도와 정치〉는 그의 저작 가운데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책이다. 1977년에 나온 이 책은 정치를 속도의 개념으로 사유함으로써 전통적인 정치학의 사고방법을 새로운 상상력으로 내파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제껏 주로 ‘공간’을 중심으로 하여 논의되던 정치 영역을 ‘시간’을 중심으로 한 정치학으로 뒤집어놓고 있는 것이다.

비릴리오가 이 책에서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로 내놓은 것이 ‘질주학’ 혹은 ‘질주의 이론’이다. 그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현상인 ‘가속화’가 역사적으로 볼 때 정치의 본질적 현상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가 말하는 정치는 일상적인 의미의 정치라기보다는 전쟁·혁명과 같은 폭력적 상황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정치 현상이다. 무엇보다 그는 군사적인 차원에서 정치현상을 분석하고 있다. 그런 분석을 통해 지은이는 정치 자체뿐만 아니라 경제·사회 등 인간의 삶 일반의 변화를 통찰한다.

이 통찰의 바탕에 놓인 아이디어가 ‘군사학적 속도 개념’이다. 가령, 봉건제 시대의 유럽에 존재했던 요새화한 도시는 도시 대중의 순환과 운동량을 규제하고자 등장한 부동의 전쟁기계였다고 지은이는 이해한다. 이 ‘난공불락의 전쟁기계’는 거주의 관성이 지배했던 정치적 공간이자 정치의 특정한 배치였으며 봉건제 시대의 물질적 토대였다. 18세기 말 프랑스대혁명은 이런 ‘정지된 속도’의 상황이 일변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프랑스대혁명은 “봉건적 농노제로 상징되던 부동성의 억압에 맞서는 반란”이었고, “임의적인 유폐나 한 곳에 거주해야 한다는 의무에 맞서는 반란”이었다.

그러나 ‘이동의 자유’를 주장했던 이 반란의 요구는 부르주아지가 정치적 주도권을 틀어쥐면서 ‘운동의 독재’로 변질했다. 그리하여 부르주아지는 산업혁명을 통해 기계적 운송장치를 획득하고, 달리기와 같은 생체의 속도, 말·코끼리 등의 동물적 속도를 능가하는 ‘기계적 속도’를 얻었다. 질주가 시작된 것이다. 지은이는 서구인들이 인구가 적은데도 동양인들을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은 이처럼 서구인들이 기계적 속도를 선점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속도는 서구인의 희망’이 된 것이다.

하지만 한번 탄력을 얻은 속도는 그 가속화를 멈추지 못한다. 비릴리오는 ‘핵 억지력’, 곧 핵무기의 등장으로 전쟁은 ‘순수 전쟁’의 상태에 들어섰다고 말한다. 이 순수 전쟁의 상태에서 속도는 ‘절대 속도’가 된다. ‘단 1초 만에’ 모든 것을 파괴해버릴 수 있는 핵무기는 ‘속도의 희망’이 ‘속도의 악몽’으로 뒤바뀌었음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비릴리오가 이 ‘저주의 예언’으로 이야기를 끝내는 것은 아니다. 그는 권력의 ‘절대 속도’가 지배하는 이런 상황에서 저항의 가능성을 ‘상상력’을 동원해 찾아내려 한다. 그 저항의 형태는 속도의 폭주를 중단시키고 방해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를테면 총파업은 ‘시간 속에 쌓아놓은 바리케이드’이다.(고명섭 기자)

08. 0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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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1-28 22:33   좋아요 0 | URL
Virilio는 후일의 독서를 기약하며 '꿍쳐둔' 사상가였는데, 이 소개글과 아래의 리스트가 왠지 '불씨'를 당기는 느낌입니다. 아시다시피, 이는 제게 건조한 계절에 특히 조심해야 할 불씨로 보입니다.^^;

로쟈 2008-01-29 00:33   좋아요 0 | URL
네, 조심해야죠. 꺼진 불도 다시 봐야 될 판인데요.^^;
 

뒷북치는 이야기인데, 작년 12월에 창간된 한 비평저널의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지젝과 가라타니 고진 등의 책을 내고 있는 도서출판b 에서 창간한 <악트>가 그것이고, 찾아보니 알라딘에도 뜨긴 뜬다. 필진의 다수는 나도 참여하고 있는 다음카페 '비평고원'의 멤버들이다. 표제는 'Art', 'Critique', 'Theory'의 앞글자를 딴 것이기도 하지만 지젝과 정신분석에서의 키워드이기도 하다(지젝에 관한 글이 많은 건 그래서 자연스럽다). '실험적인' 잡지이기에 대중성은 고려되고 있지 않지만 뭔가 '악트'한 비평세계가 개척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컬처뉴스(07. 12. 11) "기존에 없던 저널을 만들겠다"

예술과 비평, 이론을 망라하는 비평저널 『Act』(악트) 창간호가 출간됐다. 『Act』는 'Art', 'Critique', 'Theory'의 첫 글자를 딴 비평저널로, 현대예술, 문학비평, 번역, 리뷰 등 장르에 상관 없이 진취적이고 도전적이며, 실험적인 ‘젊은 글’들이 실려 있다.

창간호가 나오기까지는 인문학을 전문적으로 출판하고 있는 ‘도서출판 b’, 현대철학 세미나팀 ‘난곡연구소’, 인터넷 비평 공간 ‘비평고원’, 실험성이 강한 예술가 발굴을 목표로 하고 있는 ‘갤러리 정미소’의 협력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성민 난곡연구소 기획위원은 “기존에 읽어본 적 없는 비평저널을 만들고 싶었다”면서, “‘악트’는 예술과 이론, 비평이 진정한 의미에서 서로를 지지해 주는 저널이 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더불어 이성민 기획위원은 “이름 그대로 ‘악트’에는 세가지 주제가 장르에 상관없이 실릴 예정이지만 현실적으로 음악비평 등은 필자를 구하는 데에 한계가 있어 당분간은 문학과 미술, 영화 등이 주를 이룰 것”이라면서, “잠재적 필자 속에는 정치학이나 사회학을 전공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고 전했다.

창간호에는 조영일 문학평론가의 「황석영과 가리타니 고진’(입답 대 비평)」, 회사원이자 ‘비평고원’에서 활동중인 김도영의 「최소차이의 미장센을 위한 배경 설정하기」, 미국 남가주대 시네마틱아트 박사 과정에 재학중인 박제철의 「(예술-비평을 가지고)무엇을 할 것이나? : 욕망의 레닌주의적 재발명」 등이 실려있으며, 「아티스트와의 만남」에서는 미술작가 오용석과 김소연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조금은 어렵게 읽히기도 하는 박제철의 글은 맑스의 잉여가치 개념과 라캉의 잉여향유 개념, 지젝의 ‘최소차이’ 혹은 ‘시차’ 개념 등을 연동시킨 선언적 성격이 강한 글이다. 그는 이러한 몇 가지 이론을 돌파함으로써 이론-실천적 유효성을 해명하고 거기에 역사적 계기를 할당하는 시도를 보여줌과 동시에 ‘잉여가치를 넘어서’라고 표현해볼 수 있을 실천적 테제를 제시한다.

김도영의 글은 리뷰하기 어렵기로 손꼽히는 슬라보예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김정아 역, 길, 2007)를 이야기하면서, 이 저작에서도 볼 수 있는 “변증법적 역설을 자신이 논의하고자 하는 주제에 맞게 정교하게 다듬고 적재적소에 변주할 수 있는 탁월한” 지젝의 능력을 높이 평했다. 이 글과 더불어 최근 한 블로그에 실렸던 영화 <300>을 다룬 지젝의 글 「진정한 헐리우드의 좌파」도 함께 실려있다(*내가 정리해놓은 건 http://blog.aladin.co.kr/mramor/1475998 참조).

한편 창간호에서 유일하게 컬러도판이 실린 ‘아티스트와의 만남’에는 간단한 작가 소개 외에 어떠한 텍스트도 없이 소수적인 것에서부터 역겨운 것을 작품의 소재로 삼고 있는 오용석 작가와 현대성의 불안, 현대자본주의의 구조 등을 인터넷에 떠도는 이미지들로 구현하고 있는 김소연 작가의 작품이 실려있다.

김소연 작가는 “보통 미술잡지에서는 내 작품 자체가 아닌 내 작품을 텍스트로 한 비평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내 작품을 접하는 이들의 시각이 좁아질 수 있는 데 반해 ‘악트’에서는 작품 자체가 그대로 실려있어 보는 사람 마음대로 읽힐 여지가 있어 좋다”고 전했다. 비평저널 『Act』는 앞으로 연 2회로 출간될 예정이며, 책은 서점에서 만날 수 있다.(태윤미기자)

08. 0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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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1-27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한국판 'Lacanian Ink'의 탄생 같은 느낌을 주는 잡지로군요. 얼마 전 무용평론가 김남수 선생의 글을 통해 알게 된 잡지인데, 로쟈님도 소개를 해주시니, 한 번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로쟈 2008-01-27 21:03   좋아요 0 | URL
은근히 그런 걸 겨냥했을 수도 있지만 라캉주의에 편향된 잡지는 아니구요.^^

2008-01-27 14: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1-27 21:03   좋아요 0 | URL
이래저래 독자들을 겨냥한 책은 아니지요.^^;

비로그인 2008-01-27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고계신곳일지도 모르겠지만,
오늘 신촌 '글벗서점'이라는 책방에 갔더니, 다른 이들 손을 거친 러시아어 원서들이 책장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더군요. 저야 노어에는 까막눈이라 어떤 책이 있는지 전혀 모르지만, 혹 필요하신 책이 있을까 해서 알려드립니다.
헌책방이고, 오전 11시 경 부터 자정까지 문을 엽니다. 홍대입구역 2번출구에서 내려 신촌역 방향으로 죽 길을 따라 걷다보면 왼쪽으로 크게 책방이 보인답니다 :)
혹 들를 일 생기거든 필요한 책 발견하시길 바래요.

로쟈 2008-01-28 00:01   좋아요 0 | URL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끔 전공 공부를 그만두는 분들이 처분하는 책들이 있지요.^^;
 

이번주 한겨레21에서 절판본에 관한 기획기사를 옮겨온다(http://h21.hani.co.kr/section-021015000/2008/01/021015000200801240695053.html). 인문서 절판본과 관련하여 몇 마디 보태기도 한 때문이다(그대로 기사회될 줄은 몰랐다!). 최근 일고 있는 재출간 붐이 저작권법상 계약기간의 주기와 맞물려가는 게 아닌가란 진단과 일본 등지에서의 ‘조직적인’ 절판책 복간 움직임에 대한 소개가 눈길을 끈다. 

한겨레21(08. 01. 24) 가혹한 절판의 운명을 거부하라

“우리는 어떤 책이 타고난 절판의 운명에 순응하기만 해야 하는가? 그 운명에 대한 심판을 다시 한 번 붙일 수는 없는가?” 이윤기는 <비밀의 계절> ‘개정판에 붙이는 말’에서 이렇게 썼다. <비밀의 계절>은 이렇게 ‘엄숙한 물음’과 함께 재탄생했다. 도나 타트의 <비밀의 계절>은 오랫동안 헌책방 탐사자들의 ‘쇼핑 리스트’에 올라 있던 ‘절판의 전설’이다. 1992년 까치에서 나왔던 이 책은 지난해 12월 문학동네 장르문학 시리즈 ‘블랙펜 클럽’의 1권으로 재출간됐다. “책은 그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책의 운명은 절판이다, 라고만 하면 왠지 아쉽다. 출판평론가 표정훈이 로마의 작가 테렌티아누스 마우루스의 말을 따 붙인 ‘책 제목’이기도 한 이 말이, ‘절판본’에서는 ‘절박’하게 느껴진다.

표정훈은 ‘절판 도서 살리기’(kungree.com)의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비록 ‘그 나름’의 운명이라고는 해도, 절판이라는 운명은 책의 물리적 소멸보다 훨씬 더 가혹하다. 가치의 윤리학보다는 효율의 경제학이, 생각의 깊이보다는 생각의 속도가, 역사의 무게보다는 순간의 가벼움을 중시하는 풍토라면, 가혹한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 되살아날 수 있는 책의 숫자도 그만큼 적을 것이다.”

최근 이 ‘운명’을 거역한 책들의 거대한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새벽의 약속> <하늘의 뿌리> <대성당> <황금나침반> <황금노트북> <암스테르담>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 <핀란드 역으로> <연을 쫓는 아이>….

‘다시’ 플러스 새로운 의미
‘새 생명’을 부여받는 데는 명확한 ‘계기’가 있는 경우가 많다. <황금노트북> <황금나침반>처럼 ‘황금’ 붙은 세 권짜리 책들이 그렇다. <황금나침반>(김영사 펴냄)은 동명의 영화 개봉을 계기로, <황금노트북>(뿔 펴냄)은 저자 도리스 레싱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다시 나왔다. 길찾기에서 나온 권교정의 만화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1>은 월간 장르문화 매거진 <판타스틱>의 연재 재개와 함께 재출간됐다. 할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열림원 펴냄)는 같은 저자의 <천 개의 찬란한 태양>(현대문학 펴냄)의 반응이 좋자, 2005년 책을 표지갈이해서 ‘개정판’으로 나왔다.

그러나 ‘재출간’은 나왔던 작품을 ‘다시’ 펴낸다라는 뜻에 새로운 의미가 더해진다. 올 초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로맹 가리의 <새벽의 약속> <하늘의 뿌리>는 각각 고려원에서 1985년, 신구문화사에서 1968년 출간된 책의 재출간본이지만, 번역도 다시 했고 흩어져 있던 작품을 모았다는 의미도 더해졌다. 부커상 수상작인 이언 매큐언의 <암스테르담> 역시 미디어2.O에서 새로 나왔는데 1999년 현대문학에서 나왔던 작품을 새로 번역한 것이다. 최근 김연수 번역으로 나온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은 문학동네에서 재출간하고 있는 ‘레이먼드 카버’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다. 이전에 나온 집사재의 ‘레이먼드 카버’ 시리즈(1996)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번역한 일본판으로 추정되는) 원본이 불분명한 ‘편집본’이었다면 문학동네에서는 미국에서 출간된 원본대로 펴내고 있다. 집사재 시리즈는 3권으로 끝났는데, 문학동네 시리즈는 여기에 더해 올해 말이나 내년 초 김연수의 번역으로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가제)가 나올 예정이다.

다시 내려면 의미가 있어야 한다. 장단점을 살피고 의미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2005년 여름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을 새로 출간하고 ‘예상외’의 반응을 얻었던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의 말이다. ‘스테디셀러 복병’으로 자리잡기까지 ‘출간 결정’은 ‘재고·삼고’의 시간이 필요했다. 1996년 까치에서 나온 <눈에 대한 스밀라의 감각>(재출간본은 제목이 살짝 바뀌었다)은 추리소설 동호회에서 “이런 책이 절판이라니 말이 안 된다”라는 말을 들었던 작품이다. “그래도 좀 망설여졌다. 그런데 김연수씨가 적극적으로 추천을 했다. 그렇게 되고 안 낼 이유가 없었다.” 마음산책은 <스밀라…>에 대한 좋은 반응이 있고 나서 4권의 ‘리메이크작’을 펴냈다. 로맹 가리의 <가면의 생>, 에프라임 키숀의 <개를 위한 스테이크>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그리고 박찬욱의 <오마주>다. 이런 리메이크 작품이 반응이 좋자 마음산책에서는 회의를 할 때 구간본 출간에 대한 논의를 병행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50~100권의 재출간 목록을 뽑아 에이전시에 문의한 적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70% 이상이 다시 저작권 계약이 이루어져 있었다.”

재출간 붐, 1996년부터 5년마다 주기로?
기획자들에게 “구간을 살펴라”는 자주 이야기되는 ‘기획 원칙’이다. 궁리 출판의 김현숙 편집장도 “최근 옛날 출판 잡지를 뒤지며 잊혀진 책들을 찾고 있다”고 말한다. 인문서 시장에서 또한 마찬가지다. 산책자의 김수한 편집주간은 “지난해 인문 쪽 기획의 키워드가 ‘옛날 책을 찾아라’였다. 1980년대 정당한 계약 없이 봇물처럼 쏟아졌던 책들이 인문학의 보고다”라고 말한다. 산책자에서는 보드리야르의 <아메리카>(문예마당·1994), 롤랑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민음사·1997) 계약을 맺고 출간을 서두르고 있다. 지난해 11월 나온 에드워드 윌슨의 <핀란드 역으로>는 그 이전에 두 번 나왔던 책이다. 1962년 을유문화사에서 <근대혁명사상사>, 1990년 실천문학사에서 <인물로 본 혁명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정치학자 해나 아렌트의 책 역시 ‘민주주의’ 담론에 대한 연구 붐을 타고 거의 다 복간됐다.

이러한 ‘재출간’ 붐에 대해 김현숙 편집장은 “저작권법이 원활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시기를 기점으로 재출간 사이클이 형성되는 것 아닌가 한다. 요즘 2001년, 2002년에 나왔으나 책의 가치에 비해 호응이 적었던 작품을 눈여겨보고 있다”고 말한다. 외국 저작물과의 계약은 보통 5년을 단위로 갱신된다. 우리나라에서 저작권법이 발효된 것은 1996년. 1987년 10월 가입한 세계저작권협약(UCC)이 먼저이긴 하지만, 1996년부터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와 8월 가입한 베른협약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외국과 계약 후 출간’이라는 지금은 당연해 보이는 ‘관행’이 정착했다. 김 편집장의 말대로라면 2006~2008년, 1996년을 기점으로 하는 5년 단위의 새로운 ‘계약철’이 도래하는 것이다.

리메이크작의 성공은 기획자들을 자극해왔다. 그중 ‘고려원 리스트’는 복간의 주요한 대상이다. 파울루 코엘류의 ‘초베스트셀러’ <연금술사>(문학동네 펴냄·2001)는 고려원의 <꿈을 찾아 떠나는 양치기 소년>(1993)을 리메이크한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 직전 최종 부도처리된 고려원은 연평균 270여 종의 책을 펴내던 당시 ‘단독’ 매출 1위의 출판사였다. 당시 200억원 규모의 연매출을 기록했는데, 2위는 100억원 미만이었다. 고려원의 부도로 총 2만여 권의 문학, 인문, 실용, 여러 전집이 한꺼번에 ‘절판’됐다. 2004년 고려원북스가 고려원 재고와 판권에 대한 권리를 법원으로부터 인정받고 영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재출간이 순조롭지는 않다. <연금술사>처럼 재출간 형태로 다시 발간된 책도 적지 않다. 고려원북스의 편집자는 “소설 <캠든에서의 그 여름>과 아동책 몇 권을 재출간했다. 몇 권의 판권을 알아보고 있으나 신간에 주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새로운 출판 환경도 재출간 붐을 이끈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은 팔린 책의 반 정도가 한 인터넷 서점 사이트를 통해서 판매됐다. 알파 블로그의 역할이 커진 것이다. 기술문명이 바뀌면서 소비구조가 바뀌고 있다. 소비에서 개인의 역량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특히 이런 블로거들의 활약은 장르문학에서 두드러진다. ‘일본 미스터리문학 즐기기’ 카페의 운영자이자 번역가인 권일영씨는 ‘장르 마니아’들과 ‘절판’의 상관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장르소설은 ‘품절’되는 사태를 겪는 일이 많다. 그래서 정보 교환을 위해 카페 활동이 활발하다. 품절이 자주 되니 소장 욕구도 강하다. 당장 읽지 않더라도 사다 쟁여놓는 경우가 많다.” 이런 소비자들의 ‘계속되는 애절한’ 요구는 재출간 결정으로 이어진다. 절판됐던 다카무라 가오루의 <마크스의 산> <석양에 빛나는 감>은 손안의책이, <영원의 아이>는 북스피어가 새롭게 준비하고 있다.

일본의 9개 출판사 ‘공동 복간 프로젝트’
외국에서는 더 ‘조직적인’ 절판책 복간 움직임을 만날 수 있다. 일본의 복각닷컴(www.kinokuniya.co.jp)은 독자들이 자신이 원하는 복간작 리스트를 모으고 의견이 많이 모이면 출판사에 의견을 전달한다. ‘서물복권(書物復권) 프로젝트’는 출판사 쪽에서 진행한다. 도쿄대학출판회, 호세이대학 출판국, 미스즈출판사, 기노쿠니야, 미라이샤, 게이소 출판사, 하쿠수이샤, 이와나미 등 8개 출판사에 2006년부터는 신요사(新曜社)가 참여하고 있다. 사이트를 통해 복간작을 예고하고 독자들이 신청한 도서를 종합해 최종 복간을 결정한다. 영어권에서는 에이어 컴퍼니(Ayer Company Publishers)가 ‘책의 형태로 남아 있어야 할 목록’을 정하고 재출간을 단행한다. 어떤 형식이든 언제라도 한국에서 가능한 형태로 보인다.

김현숙 편집장은 이런 재출간 붐에 대해 “쉽게 기획을 하려는 건 아닌가 하는 자기 반성이 들기도 한다”고 말한다. 한 문학 출판사의 편집자는 “판권을 보유한 출판사가 오랫동안 출판을 하지 않는 경우를 더러 볼 수 있다. 독자들의 기다림을 헤아려주었으면 좋겠다”고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한기호 소장은 이러한 재출간 기획이 한 걸음 더 나갈 것을 요구한다. “한때 서점에 나가 있는 책 중 95%는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다닌 적도 있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책이 정보의 제왕으로서 경쟁자가 없었다. 지금은 무료 정보와 경쟁해야 하는 입장이다. 새로운 물성을 탐구하고 책의 신체성을 새롭게 하는 재출간 기획이 필요하다.”(구둘래 기자) 
 
열렬복간 리스트
2007년 신간 출간 종수 5만3226종(대한출판문화협회 자료). 벌써 사라진 책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열렬한 복간의 선택을 받는다는 것은 ‘축복’이다. 알라딘 서재 리뷰어 로쟈와 문학평론가 신형철씨에게 재출간을 바라는 책 3권을 부탁했다. 장르문화 매거진 월간 <판타스틱>은 ‘올해는 이 번역소설을 읽고 싶다’라는 주제로 다음카페 ‘일본 미스터리 문학 즐기기’, 행복한책읽기 출판사 사이트 ‘해피SF’, 네이버 ‘SF카페안드로메다’ 카페에서 설문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를 ‘절판’본만으로 한정해 정리해보았다. 설문조사 결과와 추천작들은 <판타스틱> 2월호 특집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로쟈의 선택 3: 첫 번째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인류학>(종로서적). 이전에 2권짜리의 절반 분량이 나왔는데, 다시 나온다면 당연 완역·완간돼야 한다. 레비스트로스가 워낙에 연로하기 때문이고 한편으로 그의 주저를 서점에서 구경할 수 없다는 건 좀 ‘쪽팔린’ 일이다. 레비스트로스와 절친했던 로만 야콥슨의 <문학 속의 언어학>(문학과지성사)도 다시 나와야 할 책이다. 나온 책은 발췌역이었는데 다시 나온다면 완역돼 나와야 한다. 야콥슨 전집은커녕 이 정도 책도 시중에서 못 구한다면 역시나 ‘쪽 팔린’ 일이다. 두 번째 책은 일본의 A급 학자 이마무라 히토시의 <역사와 인식>(한실·1992). 그의 <근대성의 구조>도 품절인데, 절판됐다면 다시 나와야 할 책이다. 얇고 재밌는데, 왜 안 나오는지 모르겠다. 세 번째 책은 제이 레이다의 <소련영화사1>(공동체·1983). 1권이 나오고 그걸로 절판됐다. 80년대 초반에도 이런 책들이 나왔는데, 요즘은 왜 그럴까. 이왕이면 최근의 러시아 영화사들도 소개되면 좋겠다. 타르코프스키의 <순교일기> 같은 책도 ‘품절’ 혹은 ‘절판’으로 뜨는데, 이것도 창피한 일이다.

신형철의 선택 3: 시바타 쇼의 <그래도 우리 젊은 날>.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동시대 코즈모폴리턴들의 소설을 읽느라 우리가 놓친 일본 소설들 중 하나. 전공투 세대의 ‘후일담’소설이다. 내가 읽은 가장 아름다운 후일담 소설. <청춘>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된 적이 있으나 반드시 원래 제목으로 다시 나와야 한다.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 비트제너레이션의 성서. 그러나 그런 얘기는 이제 그만 듣고 싶다. <전후미국문제소설집>(신구문화사·1962)에 수록돼 출간된 적 있으나 그 이후로는 본 적이 없는 물건. 실물을 보여달라. 이세룡의 시집들 <빵> <채플린의 마을> <종이로 만든 세상> 등. 김종삼의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시가 애틋할 것이다. 평균 열 줄을 넘지 않는 짧은 시들이 주는 맑고 슬픈 여운들. 이 시인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일본 미스터리 문학 즐기기’의 선택: 오사와 아리마사의 <신주쿠 상어> 시리즈. 우리나라에선 3부까지 나오고 절판됐는데, 일본에선 계속 나오는 것 같더군요. 흔한 형사물인 줄 알았는데, 뒤로 갈수록 그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일단 속도감 있는 재미가 일품이죠.(몬스터) 일본 최고의 문학가 다카무라 가오루 <마크스의 산> <석양에 빛나는 감>. 두 작품은 소개가 되었으나, 절판된 뒤 컬렉터들의 제1표적이 됐습니다. 생생한 상황묘사와 사실적인 캐릭터, 결말의 큰 감동. 이렇듯 최고의 요건들을 두루 갖춘, 고다 시리즈 전작이 출간됐으면 합니다.(이웃 변태) 재닛 에바노비치의 스테파니 플럼 시리즈 코미디와 추리의 즐거운 만남, 제 취향에 딱 맞는 소설입니다. 시공사에서 펴낸 2편을 재밌게 읽었습니다. 시리즈가 10편이 넘는 걸로 아는데 모두 나오길 희망합니다.(다크 워크) 아야쓰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가 재출간됐으면 합니다. 시계관, 십각관, 암흑관 제외하고는 너무 구하기가 힘드네요. 발품을 팔아도 보이지 않는 그 소설들! 정말 저를 너무 애태우더군요.(가을이/ 사요코/ whitebong7)

‘해피SF’의 선택: 올래프 스태플튼의 작품들. <이상한 존>은 70년대쯤에 어린이용으로 한번 나오긴 했지만, 어린이용이고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어린이용이 아닌 완전 번역본으로 보고 싶습니다. <스타메이커>나 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구요^^(HAMANE) <지저 세계 펠루시다>를 추천합니다. 아동용 축약본 외에는 제대로 출간된 적이 없는 것으로 압니다. 인간은 누구나 새로운 세계를 동경하지요. 그것이 종종 외부로 나아가는 것만 떠올리게 하는데,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알게 해준 작품입니다. 우리가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지구를 다시 바라보는 계기가 됐답니다.(펠루시다) 국내에서 출간 중이지만 자꾸 지연되는 어슐러 K. 르귄의 책들을 어서 보고 싶습니다. 절판된 책도 그렇지만 아직 출간되지 못한 책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철학적이고 감수성이 풍부한 르귄만의 공상과학(SF), 판타지에 맛을 들이면 헤어나올 수가 없어요.(whitfume) 존 윈덤의 <트리피드의 날>이 나왔으면 좋겠네요. 어릴 적에 아동용 축약본으로 감명 깊게 읽었던 SF소설인데 아직까지 국내에 완역본이 소개된 적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dopeLgangER)

‘SF카페 안드로메다’의 선택: 존 윈덤의 작품이 나왔으면 좋겠네요. 아동용으로 나온 걷는 식물 트리피드 정말 재미있게 봤었는데, 그의 다른 작품 <저주받은 마을>도 침략을 테마로 한 SF 스릴러라고 하네요. (엽기부족)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 재간을 바랍니다.(이다)

08. 01. 25.

Клод Леви-Строс Структурная антропология

P.S. '로쟈의 선택' 목록과 관련하여 덧붙이자면, <구조인류학>과 <소련영화사1>은 대학시절에 손에 여러 번 들었던 책들이지만 결국 구입하지는 않았고 이제는 도서관이나 이용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 좀 유감스럽다. 그나마 <구조인류학>의 영어본(2권)과 러시아어본, 그리고 <소련영화사>의 영어본을 갖고 있는 걸로 위안을 삼는다(사진은 러시아어본 <구조인류학>). 이마무라 히토시의 <역사와 인식>은 <근대성의 구조>를 재미있게 읽고 나서 찾았던 책인데 알튀세르 연구서이다. 뜻밖에도 국역본이 있었지만 몇몇 도서관에만 소장돼 있다. 나도 아직 실물을 보지는 못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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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1-25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절판본의 매력이란... 참 저도 이번에 시공사 로고스 총서를 급히 모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답니다. 다행히 절판 후 두달만에 소식 듣고 찾은 덕에 한권(프로이트)을 제외하곤 모두 갖추었지만... 읽는 속도보다도 판이 끊기는 속도가 빠르니 왠지 서글퍼지네요...

로쟈 2008-01-25 23:00   좋아요 0 | URL
비교적 저렴하고 괜찮았던 총서였는데요...

비로그인 2008-01-25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가격도 저렴하고, 내용도 철학사 전체를 한번 훑기엔 제격이었는데 말이죠.. 문지 스팩트럼도 한권 두권 판이 끊겨 가고... 역시 믿을건 내 책장과 도서관 뿐이군요... 서점의 책은 언제 사라질지 모르니.(웃음)

로쟈 2008-01-25 23:15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런 생각이긴 하지만 '민폐'도 만만찮습니다.^^;

드팀전 2008-01-25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한겨레 21 봤는데...안그래도 구석에서 로쟈님 이름을 보았답니다.인터넷에서는 크게 보이지만 실제 잡지에서는 조그맣게 편집되었다는 ㅋㅋㅋ

로쟈 2008-01-26 00:01   좋아요 0 | URL
저도 지면기사는 오늘 읽었습니다.^^
 

지난달 구스타프 야누흐의 <카프카와의 대화>(문학과지성사, 2007)이 출간되어 카프카 읽기 목록(http://blog.aladin.co.kr/mramor/1757923)을 만들어놓았었다. 책은 아직 구입하지 않았는데(예전 번역본을 갖고 있어서) 시사인에서 이에 관한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50). 과문한 독자들에겐 길잡이가 될 듯하다.

시사인(08. 01. 22) 죽은 카프카와의 ‘소리 없는 인터뷰’

남한의 정치학자 K는 북한에서 열린 남북 교류 학술대회에 참가하고 막 돌아온 참이다. 우연히 펼쳐든 신문에서 자신에 관한 기사를 발견하고 그는 경악한다. 신문 기사는 정치학자 K가 북한에서 남한 체제를 강하게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북한에 남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지 않은가. 때마침 연구실에 들른 조교는 K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교수님, 어떻게 여기에!



K는 신문사 편집국장을 찾아가 항의한다. 편집국장은 진심으로 미안해하지만 이번 경우만은 정정 보도를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국정원에 가보길 권한다. 국정원에서도 뭔가 착오가 있었음을 인정하지만, 당장은 어떠한 조처도 취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별일 없을 테니 그저 조용히 지내고 있으라는 식이다. 그러나 조용히 지낼 수가 없다. 도청과 미행 때문에 악몽에 시달리던 K는 마침내 정치적 망명을 시도한다. 오보가 결국 사실이 되고 만 것. 



이 이상한 이야기는 밀란 쿤데라가 쓴 카프카에 관한 에세이(‘저 뒤쪽 어디에’, <소설의 기술>)에 있는 원본을 가져와 우리 식대로 다시 각색한 것이다. ‘카프카에스크(Kafkaesque)’라는 형용사가 있다. ‘카프카적인’이라는 뜻이다. 저런 이야기가 ‘카프카적인’ 이야기다. 한 작가가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가 되어버린 사례다. 조빔(A.C.Jobim)이 곧 보사노바이고 피아졸라(Piazzolla)가 곧 탱고인 것처럼.



카프카 월드로 초대하는 유용한 가이드가 출간됐다. 구스타프 야누흐가 쓴 <카프카와의 대화>가 그것. 1920년 3월 어느 날, 17세의 문학 소년 구스타프 야누흐는 ‘변신’의 작가 카프카를 직접 만나게 된다. 소년의 아버지가 노동자재해보험공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것. 그곳은 카프카의 직장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이 억세게 운 좋은 소년에게 카프카는, 부러워라, ‘아빠 친구’였던 것이다. 카프카 역시 이 문학 소년을 총애하여 두 사람의 만남은 꾸준히 지속된다. 1924년 6월3일 카프카가 사망할 때까지.

구스타프 야누흐, 4년간의 만남 기록해
삶의 가장 불안정한 시기에 카프카를 만난 것은 구스타프 개인의 행운이겠지만, 그가 그 만남의 기록을 보존해두었다가 막스 브로트에게 보내 이 책이 출간된 것은 우리 모두의 행운일 것이다. 카프카는 어느 편지에서 ‘책은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트리는 도끼여야 한다’라고 쓴 적이 있다. 이 책은 카프카의 그 ‘도끼’ 같은 소설들이 어떤 맥락에서 탄생했는지를 카프카의 육성으로 들을 수 있게 한다. 이것은 마치 ‘죽은 작가와의 인터뷰’ 같지 않은가.

인간 카프카의 모습을 지인의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의 매력이다. 카프카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결벽증적으로 엄격했다. 그는 자기 책이 출판되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았다. 친구들의 강권으로 출간했을 뿐. 구스타프가 그의 단편 세 편을 가죽 장정으로 제본해서 갖다 주었을 때는 숫제 화를 내기까지 한다. 이 따위는 불에 태워 없애버려야 한다고. 

“… 내 서투른 글은 모두 없어져야 해요. 나는 빛이 아니에요. 나는 그저 내 자신의 고통의 근원으로 빠져들 뿐이에요. 나는 막다른 골목이에요.”(341~342쪽) 그러니 카프카가 이 책의 존재를 반기지 않을 것임은 명백하다. 그러나 카프카라는 ‘막다른 골목’이 누군가에게는 출구로 나아가는 ‘빛’이 되기도 하는 것을 어쩌랴. 

그 빛에 눈이 부셨던 경험이 필자에게도 있다. 10여 년 전에 이 책을 처음 읽었다. 소설가 오정희 선생이 어느 글에선가 이 책이 당신의 젊은 날에 버팀목이 되어주었다고 회고하고 계셨다. 곧장 도서관으로 달려가지 않을 수 없었고 거기서 한 권의 책을 찾았다. G. 야노욱흐, <카프카와의 대화>, 가정문고, 1976. 한동안 그 책을 파먹었다. 그 책이 다시 나왔다. 반갑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다.(신형철_문학평론가)

08. 01. 24.

P.S. 필자가 읽은 <카프카와의 대화>는 전희수 역으로 원래는 신양사(1960)에서 출간된 것이다. 알고 보면 거의 반세기 전에 나온 책인 셈. 그리고 내가 (빌려)갖고 있는 책은 정규화 역의 <카프카와의 대화>(녹진, 1988)이다. 카프카 평전으론 클라우스 바겐바하의 <카프카>(홍성사, 1986)가 기억나는 책이고(이후에 개정판과 또다른 번역판이 나왔다), 내가 예전에 도서관에서 복사한 책들은 엘리아스 카네티의 <카프카의 고독한 방황>(홍성사, 1978)과 막스 브로트의 <프란츠 카프카 평전>(문예출판사, 1981)이다.

Макс Брод О Франце Кафке Uber Franz KafkaФранц Кафка Неизвестный Кафка

브로트의 이 평전은 <프란츠 카프카에 대하여>란 제목의 러시아어본으로도 출간돼 있는데 분량은 국역본의 두 배다(러시아에서 오래 망설이다가 구입하지 않은 책이다). 그의 <알려지지 않은 카프카>도 러시아어본이 나와 있다.  

Вальтер Беньямин Франц Кафка Franz Kafka

그나마 내가 챙겨둔 건 발터 벤야민의 <프란츠 카프카>이다. 길출판사에서 나오고 있는 '발터 벤야민 선집'의 7권이 <카프카와 현대의 미로>인데, 그의 카프카론을 포함하게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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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da 2008-01-25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문한 독자, 보관함에 집어넣고 갑니다.
카프카 책보다 항상 카프카에 대한 책이 더 재미있어요. -.-

로쟈 2008-01-25 00:24   좋아요 0 | URL
야누흐가 꾸며적기도 했다는 의혹도 제기돼 있습니다. '카프카에 대한 책'들만으로도 한 트럭은 될 듯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