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 직전에 발견하고 보관함에 넣어둔 책의 하나는 김윤식 교수 <백철 연구>(소명출판, 2008)이다. 출간일은 1월 중순으로 돼 있지만 아마도 지난주에 출고된 책인 듯싶다. 비평가 평전으로 김교수의 <임화 연구>(문학사상사, 1989)를 오래전에 읽은 적이 있는데 그 후속 타자가 '백철'이라는 건 약간 의외이다. 하지만 책소개와 관련기사를 읽어 보면 그럴 만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한없이 지루한 글쓰기, 참을 수 없이 조급한 글쓰기'란 부제에서도 암시되듯이 저자의 화두는 문학이나 비평 이전에 '글쓰기', 보다 구체적으론 '자동사적 글쓰기'로 모아지고 있는 듯해서이다(이와 관련해서는 고종석의 기사 '나는 '쓰다'의 주어다'(http://blog.aladin.co.kr/mramor/896390)를 참조). 최재봉기자의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08. 02 13) "백철 연구는 백철론 아니라 김윤식론”

흔히들 말하길 ‘백철처럼 글 많이 쓴 사람 없고, 백철처럼 알맹이 없는 글 쓴 사람도 드물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막상 백철이란 인물을 파고들어가 보니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알겠습디다. 지금 한국에서 문학평론 하는 사람들, 그리고 대학에서 문학 가르치는 사람들 치고 백철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봅니다. 백철은 그 누구보다 민첩한 평론가였고, 무엇보다 국어학과 고전문학으로 양분되었던 대학 국문학과에 현대문학을 처음으로 도입해 오늘의 삼분할 편제를 만든 장본인입니다.”

국문학자 겸 평론가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가 선배 국문학자이자 평론가인 백철(1908~1985)의 생애와 업적을 천착한 전기 비평서 <백철 연구>(소명출판)를 내놓았다. 고은 시인과 더불어 문단의 양대 다작가로 꼽히는 김 교수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제까지 쓴 책이 120권은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로 탄생 100년을 맞은 백철은 <문학개론>(1947)과 <신문학사조사>(1948~9)를 쓴 문학 이론가이자 문학사가이며 열정적으로 당대의 작품을 읽고 평을 쓴 현장비평가였다. 도쿄 유학 시절에는 나프(일본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가담해 활동했으나 식민통치 말기에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학예부장과 베이징 특파원을 지냈다. 해방 후에는 동국대 국문학과 교수 및 중앙대 문과대학장으로서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미국발 신비평(뉴크리티시즘)의 한국 소개에 앞장섰다. 그처럼 다양한 활동의 바탕에는 고향인 평북 신의주에서부터 집안의 종교였던 천도교라는 중심이 확고히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이 김 교수의 분석이다.

얼핏 갈팡질팡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이는 백철의 행보에 김 교수는 ‘웰컴주의’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새로운 사상이 들어오면 대번에 ‘웰컴!’ 하고 외치며 물불 가리지 않고 수용하여 흥분하다가도 또 다른 사조가 들어오면 전의 것을 헌신짝모양 던져버리고 다시 ‘웰컴!’을 외치기”(546쪽)라는 뜻이다. “이 ‘웰컴주의’에 민감한 비평가로 백철 오른편에 설 자는 일찍이 없었다.”(546쪽) 그러나 그게 또 어찌 백철만의 문제이랴. “근대를 문제 삼는 한, 그 누구도 많건 적건 이 웰컴주의에서 자유롭기 어렵다.”(547쪽)

선배 비평가 백철에 관한 이런 양가적 평가에서는 근대문학 연구자로서 김 교수의 어쩔 수 없는 자의식이 만져진다. 사실 700쪽에 가까운 두툼한 책 <백철 연구>를 읽다 보면 수시로 연구 대상인 백철의 모습에 연구의 주체인 김 교수의 모습이 포개지곤 한다. “이 책은 사실 백철론이 아니라 김윤식론이다. <백철 연구>를 완성하는 데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린 데에는 그런 까닭도 작용했다”고 11일 오후에 만난 김 교수는 말했다. 책에는 일제 말기 백철의 활동 무대였던 베이징의 북경반점 앞에서 포즈를 취한 김 교수 자신의 사진도 들어 있다.

<백철 연구>의 부제는 ‘한없이 지루한 글쓰기, 참을 수 없이 조급한 글쓰기’로 되어 있다. 전자가 문학사가로서의 저술을 가리킨다면 후자는 현장비평가로서 쓴 글들을 이르는 말이다. 이 두 가지 글쓰기에서 지은이 김윤식 교수 역시 백철에 못지않았다. 작고한 김현과 함께 쓴 <한국문학사>와 카프 연구서인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 그리고 <임화 연구> <이광수와 그의 시대> <염상섭 연구>와 같은 숱한 작가론저들은 김 교수의 돌올한 업적을 이룬다. 그와 동시에 벌써 수십 년째 계속해 오고 있는 소설 월평 역시 그만의 독보적인 영역으로 꼽힌다. “그만큼 소설을 매달 열심히 읽은 자도 없으며 이를 괴발이든 개발이든 월평으로 써낸 비평가도 백철을 빼면 신문학 생긴 이래 아무도 없었다”(669쪽)고 김 교수가 쓸 때 그것은 백철의 이름을 빌린 김 교수의 자기 평가라 할 법하다.

국문학자와 비평가가 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을 했을 것 같냐는 질문에 김 교수는 그저 머리를 저었다. 다른 길을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다만 “대학 시절에 쓴 소설 습작 원고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는 말로 창작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내비쳤다.(최재봉 문학전문기자)

08. 02. 13.

P.S. 개인적으로 상당수의 책을 읽었거 갖고 있다곤 하지만 120여권에 이르는 목록에 비하면 중과부적이다. 그래도 <이광수와 그의 시대>로부터 시작된 작가나 비평가 평전들을 대개 따라 읽었는데 유일하게 <염상섭 연구>만은 그러하질 못했다. 다행히 아직 절판되지 않았으니 문제는 970쪽이 넘는 이 두꺼운 책을 꽂아놓을 '공간'이다. 이번에 검색해보니 백철의 경우에도 <신문학사조사>(신구문화사, 1999)와 <문학개론>(신구문화사, 1982)이 아직 절판되지 않았다. 이 또한 의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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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2-13 19:26   좋아요 0 | URL
백철에 대한 김윤식 선생의 한 권의 책은, 그간 백철에 대한 선생의 언급들을 떠올려볼 때, 한 번은 나와야 하는 책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김윤식 선생의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은 로쟈님이 말씀하신 저 '자동사적' 성격과 모종의 '고아 의식'ㅡ어쩌면 조금 더 정확하게는(?) '사생아적 의식'ㅡ사이의 어떤 결합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오고 있습니다.

로쟈 2008-02-13 22:31   좋아요 0 | URL
제가 강의시간에 들었던 멘트는 '백철처럼 글 많이 쓴 사람 없고, 백철처럼 알맹이 없는 글 쓴 사람도 드물다'란 것이어서요.^^;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아직 20대였던 시절에 쓴 글을 옮겨놓는다. 대학원 강의의 기말 페이퍼로 쓴 것인데 무더운 장마철에 학교 연구소에서 1박 2일 동안 썼던 기억이 떠오른다(날밤을 샌 건 아니고 커다란 강의용 책상 위에 드러누워 눈은 붙였었다). <어느 망명작가의 참인생>(청하, 1988)이라고 국내에는 소개된 나보코프의 첫 영어소설 <세바스챤 나잇의 참인생>에 대한 '읽기'인데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그냥 내키는 대로 써나간 글이어서 자랑할 만한 구석은 별로 없지만 내겐 기억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글이고 나보코프에 관해 쓴 가장 긴 글이기도 하기에 보존해놓는다(각주는 본문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나보코프의 영어본 일부 표지들은 본문과 무관하게 집어넣었다).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약간의 흥미는 가질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라면 굳이 애써서 읽어볼 필요는 없겠다. '망명작가' 나보코프에 관한 개인적인 흥미를 적어놓은 것이니까...

OPENING

0.1. “반어적인 과학ironic science은 우리를 어디로도 데려가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최소한,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무언가 우리에게 할일을 줄 수는 있다. 영원히.” 존 호건, <과학의 종말>(까치, 1997), 222쪽.

아침에 이런 걸 읽다가, 나는 반어적 과학으로서의 문학비평 또한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이번엔 거꾸로 말이다. 즉 문학비평은 최소한,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무언가 우리에게 할일을 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를 어디로도 데려가주지 않는다. 정말 그런 듯싶으니 이를 어찌할까. 할일은 주어지지만, 정작 거기에 상스sens, 즉 의미와 방향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런 것이 일종의 일시적인 무기력증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우리가 처한 사태의 본질이라면 정말 어찌할까. 나는 또다시 아주 친숙한 근심에 발목이 잡힌다. 장마철이어서일까?

0.2. 나보코프에 대한 기억이 이젠 희미해지질 즈음에, 이런 자리에 불려나와서 몇 마디 해야 하는 것은 일종의 고역이다. 네댓장쯤 쓰다가 다시 고치고 지우고 짜깁기하면서 나는 벌써 진을 다 빼버렸다. 사실 그럴 만한 여유도 재간도 없는 처지에, 남들이 뜯어먹지 않는 부분을 골라서 뜯어먹으려니 이 고생이지 싶다. 하지만 뒤져보면, 이미 먹을 만한 부분은 다 거덜나 있다.(이 글에서 몇 마디 주석을 달려고 하는 The Real Life Sebastian Knight이 대충 어떻게 뜯어먹혔는가에 대해서는 Vladimir Navokov (New York & London: Garland Publishing, Inc., 1995), p. 634 참조.) 그러니 정성이 갸륵하지 않고서야 새로운 것이 얻어질 리 만무하다. 대략 입막음의 글이라도 작성하고자 일을 벌이긴 했지만, 이미 예전의 정(신)력은 아닌 모양이어서, 나는 지레 지치고 지레 나앉는다. 이래서야 어디 밥은커녕 죽 구경이라도 하겠는가? 참으로 걱정은 걱정이다.

0.3. 어제 나는 무얼 했던가? 아니 지난주에 난 무얼 했던가? 막바지까지 <어느 망명작가의 참인생 The Real life of Sebastian Knight>(이하 <참인생>, 텍스트로 사용한 것은 V. Nabokov, The Real Life of Sebastian Knight (Penguin Books, 1995); <어느 망명작가의 참인생>, 권택영 옮김(청하, 1988)이다. 본문에서는 국역/영어의 쪽수만 표기하며, 국역의 경우 일부 수정해서 인용한다.)을 읽었다. 그리고 이제와서, 또다시 마감에 닥쳐 이렇게 몇 자 적어내려 가고 있는 것이다. 계획은 이랬다. 나보코프의 초기 러시아 소설과의 연관성 속에서 <참인생>을 읽어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제서야 나는 이 작품을 손에 들었고, 불과 몇 분 전에야 손에서 놓았다. 그리고 그새 다시 손에 들지 않았다. 한번 읽은 것이다. 소설에 관한 나보코프의 지론은 읽고 또 읽으라는 것이다. 한 대담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소설은 읽고 또 읽는 거지요. 아니면 읽고 읽고 또 읽든가요. You can only re-read a novel. Or re-re-read a novel.”(Charles Nicol, "The Mirrors of Sebastian Knight," L. S. Dembo (Ed.), Nabokov: The man and his work (Th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67), p. 85에서 재인용.)

뭔가 적어가며 읽긴 했지만, 한번 읽고 모든 걸 손아귀에 다 틀어쥘 수는 없는 법이다. 하물며 무슨 연관성이랴? 해서 계획은 남아나지 않았다. 그저 나는 <참인생>을 비교적 자세히 읽음으로써 나보코프의 입이나 일단 틀어막아보기로 했다(그리고 비로소 읽기 시작해야지!). 바로 옆에선 푸줏간 주인 같은 나보코프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나의 이런 꼴을 쳐다보고 있지만, 별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는 것이지. 자신의 체험에 충실할 밖에. 이런, 벌써 몇 시간이 지나갔다. 또 어느새 자정을 넘긴 것이고. 하여간에 나는 나보코프에 대해 쓴다. 쓰기 시작한다. 일단은 이 “무의미의 부메랑boomerangs of nonsense”(218/149)을 던져보는 것이다... Hello, Mr. Nabokov!.. 어쿠!



SCENE 1

1.1 <참인생>(1938)은 마지막 러시아어 장편인 <재능Gift>(1936)에 바로 이어진 소설로서 일단 나보코프의 작가적 경력에서 경계에 자리한다. 이 경계를 지나면서 그는 러시아어 작가에서 영어 작가로 변신한다. 나보코프에 관한 가장 방대한 두 권짜리 전기는 각각 ‘러시아인 시절’과 ‘미국인 시절’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Brian Boyd, Vladimir Nabokov: The Russian Years (London, Chatto & Windus, 1990), Vladimir Nabokov: The American Years (London, Chatto & Windus, 1992).)



아무리 재능있는 작가라지만 이 과정에서 자신의 작가적 장래에 대해 염려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런 의미에서 <참인생>은 나보코프의 약한 고리이다.(Field 같은 이는 <참인생>을 가장 허술한weakest 작품으로 평하기도 한다. Vladimir Navokov (New York & London: Garland Publishing, Inc., 1995), p. 634.)

이 시기에 나보코프는 점차 암울해지던 유럽을 떠나 영국이나 미국으로의 이주를 계획한다. 즉 영어-사용권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한다. (John Lanchester, "Afterword," The Real Life of Sebastian Knight, p. 178.) 이러한 정황에서 볼 때, 이 제2의 데뷔작은 자못 비장한 의의를 가진다. 한 직업작가의 밥숟가락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염려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지.

1.2. 모두 2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참인생>의 1장에서 화자인 ‘나’(브이V)가 존경해 마지 않는 노장 비평가 사우스 케징턴South Kesington이 세바스챤 나잇Sebastian Knight의 때이른 죽음을 접하면서, “가엾은 나잇! 그는 두 시대를 살았지, 먼저는 엉터리 영어로 글을 쓰는 멍청한 작가로, 나중엔 멍청한 영어로 글을 쓰는 엉터리 작가로 말이야. Poor Knight! he really had two periods, the first - a dull man writing broken English, the second - a broken man writing dull English.”(12/6)라고 말하는 부분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이 ‘고약한 농담nasty dig’의 대상에 나보코프라고 걸려들지 말라는 법은 없다(더구나 자신이 놀던 물이 아닌 데야!) 이것이 그 염려의 내용이 될 수는 없을까. 과거에 그는 똑똑한 러시아어 작가였지만, 이제는 한낱 엉터리, 멍청이 ‘영어’ 작가로 전락할 수도 있는 것. 그럼 어떡해야 하나? 가장 자신 있는 걸로,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걸로 밀고나가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건 우리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인 바, 나보코프의 지능이 우리보다 못할 리가 없다. 때문에 그가 이전에 쓴 러시아어 소설들에서 주제와 구성뿐만 아니라 많은 모티브를 <참인생>에 빌려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참고로, J. W. Connolly는 Nabokov's Early Fic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 pp. 220-222에서 <참인생>에 나타난 <재능>의 그림자를 몇 가지 지적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은 ‘나’와 ‘세바스찬’의 관계(<참인생>)가 ‘나’와 ‘표도르’의 관계(<재능>)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 이것을 그는 에셔M. C. Escher의 그림 <드로잉 핸즈Drawing Hands>(서로가 서로를 그리고 있는 두 손)의 이미지로 이해한다. 이때 작가 나보코프는 이 두 손을 그리고 있는 제 3의 손이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심적인 것은 작가-화자(‘나’)와 인물-작가(세바스챤)의 관계 속에서 정체성의 문제를 탐구하는 것이다. 사실 <참인생>은 바로 이 ‘나’(브이)와 세바스챤의 정체성, 그들의 관계에 대한 수수께끼/퍼즐 풀기에 다름아니다.

1.3. 허구적 인물과 작가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는 러시아어 소설에서 나보코프의 작가-예술가로서의 자기탐구와 자기확인에의 요구가 빚어낸 것이다. <재능>은 이러한 탐구의 정점으로서, 이 작품은 주인공 표도르가 결국 나보코프와 같은 작가적 반열에 이르게 되는 여정을 형상화함으로써 그것을 일단락짓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전기적 이력을 놓고볼 때, 우리는 이 <참인생>에서 나보코프가 무엇을 기대하고 요구할지에 대해 미리 짐작할 수 있는 바, 그것은 영어 작가로서 러시아어 작가 못지 않은 장래성(재능)의 확인/확보 문제이다(따라서 이것은 <재능>의 반복이자 번안이다). <참인생>의 ‘진짜’ 주인공은 포르 레크노이로 분한 나보코프란 주장도 있다.(“Nabokov's novel has one "real" character, Nabokov himself, who poses as Paul Rechnoy.", Charles Nicol, op. cit., p. 91.)

이 작품에서의 화자-작가인 ‘나’는 나보코프의 그러한 기대의 대리인이다. 이 작품이 ‘나’가 이복형인 세바스챤의 전기를 완성하는 여정의 형식이면서, 동시에 세반스챤을 닮아가는, 세바스챤이 되어가는 여정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나보코프답지 않은 염려와 나보코프다운 기대 속에 <참인생>은 놓여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나보코프의 생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것이다.



SCENE 2

2.1. “1938년 프랑스 파리의 어느 단칸방 아파트. 당시 가난한 러시아의 망명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문제의 소설 한편을 탈고한다. 1940년 미국 이주 후 영어로 출간되어 “찬란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호평과 함께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책이 아니냐”는 혹평을 받은 이 소설은, 우리들의 책읽기 방식에 중대한 도전을 던진다.” 여기까지는 국역본의 광고인데, 문제는 우리들의 책읽기 방식이 아니라 바로 나보코프 자신일 테다(그래서 보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우스꽝스러울” 수 있겠지).

2.2. 세바스챤 나잇(1899-1936)이라는 러시아 태생 영국작가가 5권의 소설을 남기고 36세의 나이로 죽는다(한편으론 이 6이란 숫자는 브이를 상징하는, 대변하는 숫자인데, 이것은 뒤에서 자세하게 밝혀질 것이다). 아래 이복동생인 나, 브이는 이복형의 출판매니저였던 굿맨Goodman의 전기 <세바스챤 나잇의 비극 The Tragedy of Sebastian Knight>이 결함 투성이임을 발견하고 세바스챤의 새로운 전기를 쓰고자 유품들을 뒤적거리고 생전에 세바스챤과 가까웠던 인물들을 찾아가 얘기를 들으며 자료수집에 전력을 기울인다. 그렇지만 결국 대단한 무얼 얻지는 못하고 그런 과정을 그럭저럭 기술하여 우리 앞에 내놓은 것이 <참인생>이다. 여기서 일차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세바스챤 나잇과 작가 나보코프 사이의 많은 유사점이다.(John Lanchester, op. cit., p. 177-8.)

1899년은 나보코프가 태어난 해이고 1936년은 <재능>을 쓰고 러시아어로는 절필한 해이다. 그러니까 러시아어 작가로서는 생명이 끊어진 해이다. 이런 사정을 고려해본다면, 세바스챤 나잇을 나보코프의 러시아어-작가적 분신으로 보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세바스챤은 영어로 창작을 했으니까 정작 나보코프와는 차이가 난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차이는 그저 일종의 은폐전략에 불과할 테다. 그것도 보일 거 다 보이는 은폐전략 말이다.

2.3.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이 해결되지 않고 독자는 저자와의 게임에서 승부를 기대할 수 없다"(권택영, "쓰면서 지워가는 소설", <어느 망명작가의 참인생> 역자 해설, 255쪽.)는 이 소설의 맨 마지막 문장의 내용은 우리의 기대를 전혀 벗어나지 않는다. “나는 세바스챤이다, 아니 세바스챤이 나다, 아니 아마도 우리 둘 다 우리 둘이 다 모르는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다. I am Sebastianm or Sebastian is I, or perhaps we both are someone whom neither of us knows.”(251/173)

이 문장에서 ‘나’(브이)는 나보코프의 영어-작가적 분신이다. ‘나’ 브이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지만, 이때의 V는 Vladimir Nabokov가 아닐까. 그는 나보코프의 일부이기 때문에 풀네임은 갖지 않는다. 한편, 세바스챤이 브이에게 보낸 편지에 Sevastian이라고 서명돼 있는 것은 이 둘의 분신성을 보강해준다. 러시아어 철자 ‘B’가 지닌 이중성(‘B’이면서 ‘V’)이라는 글자퍼즐을 나보코프는 인물퍼즐과 겹치게 만들고 있는 것.

그리고 이들이 둘 다 모르는 어떤 사람은 바로 나보코프인 것이지. 이 두 분신은 모두 전체-나보코프Total-Nabokov의 일부이며 장기말/기사knight이다. 이 점에서 굿맨이 세바스챤을 “그는 완벽한 포우저였다. [H]e was the perfect ‘poser’.”(141/97)고 본 것은 조금 다른 문맥에서이긴 하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다. 브이와 세바스챤, 두 인물-작가는 모두 나보코프 자신이자 그의 가면이며 포우저이다. 그리고 사실 이 정도만이 내가 나름대로 읽은 <참인생>의 내용이다. 즉 나보코프의 작가적 경력 속에서 <참인생>이 차지하는 의의와 성격을 브이와 세바스챤의 관계가 그대로 반영하고, 반복하고 있다는 것.



2.4. 이런 맥락에서 브이가 성 다미에르St Damier 병원에서 얻은 깨달음 이해할 수 있을까. 먼저 옮겨본다. 그것은 이렇다. 나보코프 자신은 <참인생>을 탐탁찮게 생각한 모양이지만, 이런 대목 같은 부분은 단순한 재능 이상의 통찰을 보여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종의 영혼의 메타모포시스metamorphosis라고나 할까.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향수>에서 도미니크가 어린 아들의 뒤를 좇으며 걸음을 맞추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무얼 더 해줄 수 있을까? 우리는 서로에게 얼마나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영혼이란 오직 존재의 방식에 불과한 것으로 영원불변의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만일 당신이 영혼의 맥박을 발견하여 따라간다면 어떤 영혼도 당신의 것이 될 것이다. 이제부터는 어떤 선택된 영혼, 어떤 수의 영혼들 속에서 그들 모두가 서로 바뀔 수 있다는 부담을 의식하지 않은 채, 의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충만한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세바스챤 나잇이다.

[T]hat the soul is but a manner of being - not a constant state - that any soul may be yours, if you find and follow its undulation. The hereafter may be the full ability of consciously living in any chosen soul, in any number of souls, all of them unconscious of their interchangeable burden. Thus - I am Sebastian Knight. (250/172)

브이와 세바스챤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보자면, 여기서의 ‘영혼’은 ‘언어’란 뜻으로 번역해서 이해해도 무방할 듯하다.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영혼)이란 바로 언어가 아니겠는가. 그럴 경우, 브이의 깨달음은 언어(영혼)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즉 그것이 교체가능interchangeable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언어(영혼)의 맥박과 리듬을 잘 찾아내고 따라가는 것이다. 이 소설은 견습작가인 브이가 세바스챤의 행적과 작품세계를 더듬어가면서 이 이복형의 맥박(리듬)을 배워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 소설의 끄트머리에 와서 브이(=영어 작가로서의 나보코프)가 마침내 자신의 반쪽half-brother인 세바스챤(=러시아어 작가로서의 나보코프)을 따라잡은 것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제 대신하게 된 것이다.(그의 브이는 승리의 브이이다).

2.5. 이러한 결말의 의미는 작품의 초반부(4장)에서 브이가 세바스챤에 대해서 갖고 있는 정서적 동질감과 이질감을 대비시켜보면 더욱 확연해진다.

언젠가 나는 두 형제가 테니스 챔피언으로서 경기를 벌이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두 사람이 치는 힘은 완전히 달랐다. 그러나 경기장을 휩쓰는 행동의 리듬은 정확히 같았다. 만일 그 두 개의 리듬을 그릴 수만 있다면 똑같은 그림이 나타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바스챤과 나도 역시 공통된 리듬을 가졌으리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렇다고 나와 세바스챤이 마음의 풍요와 재능의 일면이라도 공유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의 글쓰는 방식을 나는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다.(...) 그 재능의 높이에 다다를 수는 없지만 나를 도와줄 어떤 심리적 유사점들을 나도 갖고 있다는 것에 자신을 얻은 것이다.

Once I happened to see two brothers, tennis champions, matched against one another; their strokes were totally different, and one of the two was far, far better than the other; but the general rhythm of their motions as they swept all over the court was exactly the same, so that had it been possible to draft systems two identical designs would have appeared. I daresay Sebastian and I also had some kind of common rhythm. (...) This is not meant to imply that I shared with him any riches of the mind, any facets of talent.(...) I cannot even copy his manner{...] I feel that inspite of the toe of his talent being beyond my reach certain psychological affinities which will help me out. (43-45/28-30)

브이와 세바스챤의 관계는 이 인용에서 테니스를 치는 형제의 관계를 닮았다. 즉 두 작가는 힘과 기량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동작의 리듬에 있어서는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장에 세바스챤을 따라갈 수는 없지만, 브이에겐 세바스챤을 따라갈 만한 바탕(=심리적 유사성)은 마련되어 있는 것이고, 그런 바탕이 결국에 가서는 “나(브이)=세바스챤”이라는 당당한 고백을 가능하게 한다.

전기를 쓰기 위해 세바스챤의 아파트에서 유품을 뒤적이다가 브이가 발견한 러시아어 문구 “언제나 찾아야 할 당신의 방식 [T]hy manner always to find...”(48/32)을 마침내 그는 찾아낸 것인데, 그것이 바로 세바스챤의 맥박이고 리듬이며 “특이한 글쓰기 방식queer way”(50/33)이다. 브이는 작가로서 세바스챤의 뒤를 이을 준비가 다 된 것이다. 이것이 이 소설의 결말이 뜻하는 바이다.

SCENE 3

3.1. 다시 인용하겠다. 나름대로 좋아하는 대목이어서 조금 더 거창한 해석을 덧붙여보기 위해서이다.

영혼이란 오직 존재의 방식에 불과한 것으로 영원불변의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만일 당신이 영혼의 맥박을 발견하여 따라간다면 어떤 영혼도 당신의 것이 될 것이다. 이제부터는 어떤 선택된 영혼, 어떤 수의 영혼들 속에서 그들 모두가 서로 바뀔 수 있다는 부담을 의식하지 않은 채, 의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충만한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세바스챤 나잇이다.

여기서 ‘맥박’은 한 영혼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생의 리듬이다. 이 리듬의 공유를 통해서 영혼은 서로 교환(교체)되고 합일된다. 이것을 통해 브이(그리고 나보코프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주적인 차원에서의 동시화cosmic synchronization라는 형이상학이다. 이때의 동시화는 곧 시간적인 동시성의 구현인데, 이에 의해서 개체적, 개별적 존재가 지닌 시간의 단속성(=불연속성)과 유한성은 극복될 수 있다. 즉 우리의 영혼은 불멸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나보코프가 시간을 믿지 않는다고 한 것 은 이런 맥락에서 음미해볼 수 있다.( V. Nabokov, Speak, Memory (London, Weidenfeld & Nicolson, 1967), p. 139.)



3.2. 20세기 전반기 서구 형이상학의 주조음은 시간에 대한 것이다(대표적인 철학자로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를 들 수 있다). 즉 시간은 이 시기의 주된 관심거리이면서 이런저런 입장들을 찍어내는 거푸집이다. 이 시기에 시간이 문제된 것은, 비로소 그것이 과거-현재-미래라는 일직선적인 공간화로부터 이탈하여 제값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보이지 않는 시간, 순수한 지속으로서의 시간은 이때부터 서구 형이상학이란 유구한 깡통에 흠집을 내고 그것을 찌그러뜨리기 시작한다. 이때의 형이상학이란 바로 기하학적 사유(=공간에 대한 사유)로 특징지어지는 것인바, 개념화되지 않는 어떤 것, 그러니까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것으로서의 시간 앞에서 제대로 기운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은 형이상학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며, 시간이 낳는 불안은 실존적인 차원의 것이면서 동시에 인식론적인 것이다. 이러한 도전과 불안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가?

3.3. 저마다의 생애가 시간-내-세계에서 그것을 초월하기 위한 필사적인(더러는 게으른) 도주라고 한다면, 전기bio-graphy는 바로 그 도주의 궤적이다. 전기는 한 인간의 손에 잡히지 않는 생애를 이야기(=형태)의 장속으로 끌여들여 가시화함으로써 시간에 저항한다. 이것이 한가지 대처방법이다. 그리고 신화가 있다. 이때의 신화는 저마다의 생애를 ‘동일한 것의 영원한 되돌아옴’의 자리에 갖다 놓음으로써 그것의 고유성과 유한성을 희석시킨다. 신화는 비유컨대, 모든 이의 생애를 닳고 닳은 동전의 그것으로 바꿔놓는 것이다. 이것이 또다른 대처방법이다. 그리고 나보코프가 제안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우리들 모두의 시간(=리듬)을 동일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만인이 만인의 영혼이 되고, 마스크가 되는 것, 바로 이것이 나보코프가 말하는 동시화synchronization의 세계이다.

이 동시성의 세계에서 “오직 단 하나의 참 숫자는 하나이고 나머지는 그저 반복일 뿐이다. The only real number is one, the rest are mere repetition.”(<잃어버린 재산Lost Property>)(127/89) 즉, 저마다의 죽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죽음이 있는 것이며, 이 전체로서의 하나는 시간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기에 결코 시간-내-존재로서의 유한성에 구속받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나보코프의 게임으로서의 소설은 형이상학으로 승격된다.



3.4. 세바스챤의 네번째 소설 제목인 ‘잃어버린 재산’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패러디한 것인바, 여기서 ‘재산property(=고유성)’이란 말과 ‘시간’의 대응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비록 명시적인 형태로는 아닐지라도, 이미 나보코프는 하이데거-데리다가 지적하게 될 인간의 종언, 인간의 고유성의 종언을 미리 앞당겨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바로 데리다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부분을 말이다.

인간의 종언은[시작과 끝]은 존재의 사유와 그 언어 안에 처음부터 언제나 지시되고 등재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시는 텔로스와 죽음과 유희 안에서 ‘끝’의 이중적 의미를 변주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유희를 읽어갈 때, 다음과 같은 연관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즉 인간의 끝[완성]은 존재의 사유이며, 인간은 존재 사유의 끝[목적]이며, 인간의 끝[정점]은 존재 사유의 끝[정점]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언제나 그 자신의 고유한 끝[목적]이며, 다시 말해서 그 자신의 고유성의 끝[목적]이다. 존재는 처음부터 언제나 그 자신의 고유한 끝[목적]이며, 다시 말해서 그 자신의 고유성의 끝[목적]이다. (김상환, <해체론 시대의 철학> (문학과지성사, 1996), 340쪽.)



"In the thinking and the language of Being, the end of man has been prescribed since always, and this prescription has never done anything but modulate the equivocality of the end, in the play of telos and death. In the reading of this play, one may take the following sequence in all its senses: the end of man is the thinking of Being, man is the end of the thinking of Being, the end of man is the end of thinking of Being. Man, since always is his proper end, that is, the end of his proper. Being , since always, is its proper end, that is, the end of its proper." (J. Derrida, "The Ends of Man," Margins of philosophy, Trans. by Alan Bass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2), p. 134.)

인간의 고유성에 대해서 사유한다는 것은 곧 그 고유성의 끝(한계와 목적)에 대해 사유한다는 것이다. 나보코프의 메타모포시스적인 세계는 바로 그러한 사유의 한 끝을 보여준다. 타인의 영혼과 같은 리듬 속에 공속됨으로써 “나는 세바스챤이다, 아니 세바스챤이 나다.”라는 비분리성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은 한 개인이 지닌 고유성의 종언이면서, 정점이며 또한 완성이 아닐까. <참인생>은 이러한 물음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도덕적이며, 그러한 형이상학적 물음이 다차원적인 게임의 형태로 발산되고 있다는 점에서 유희적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나보코프의 고유성이며, 그 고유성의 끝이다.



3.5. 인간의 종언을 말하면서 세바스챤의 죽음을 빼놓을 수는 없다. 세바스챤의 일생에서 마지막해인 1936년으로 접어들면서 브이는 이 죽음의 연도와 사람 사이의 “신비한 유사점occult resemblance”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이 유사점에 의해 암시되는 것은 그 죽음의 필연성이고, 비고유성이다. 이 부분이다.

세바스챤 나잇 d. 1936... 이 연도는 나에게 잔물결이 이는 연못 속에 그 이름을 비추어 본 것같이 보인다. 마지막 세 숫자의 곡선은 물결 모양 같은 윤곽이 웬일인지 세바스챤의 개성을 상기시켜준다.(...) 만일 내가 여기저기에서 적어도 그가 생각하는 것의 그림자조차 파악하지 못했거나, 이따금씩 무의식적인 뇌의 작용이 은밀한 미로에서 올바른 방향을 잡도록 나를 이끌지 않았다면, 내 책은 서툰 실패작에 불과하다.

Sebastian Knight d. 1936... This date to me seems the reflection of that name in a pool of rippling water. There is something about the curves of the last three numerals that recalls the sinuous outlines of Sebastian personality.(...) If here and there I have not captured at least the shadow of his thought, or if now and then unconscious cerebration has led me to take the right turn in his private labyrinth, then my book is a clumsy failure. (224-5/154)

여기서 브이는 자신과 세바스챤의 관계가 운명적인 분신double이면서 동형isotopie이며 거울 관계에 놓여 있다는 걸 무의식적이지만 알게 된다. 1936년에서 936은 잔물결(3)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본 형상이다(9↔6). 여기서 9가 세바스챤이라면 6은 브이이다. 머릿 숫자 1은 이들이 한몸임을 말해준다. 세바스챤은 자신의 운명의 소용돌이를 안고 이제 서서히 종국을 향하고 있고, 브이는 바야흐로 작가로서 입문하고 있다. 이렇듯 서로 하강하고 상승하는 운명을 9와 6은 도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참인생>의 시작인 1장에서 언급되는 한 러시아 여인은 “올가 올레고브나 오를로바Olga Olegovna Orlova라는 달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 여인의 일기에서 브이는 세바스챤이 태어난 1899년 12월 31일의 날씨 기록을 본다. 여기서 이 “달갈 같은 이름”은 세바스챤의 태생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는 O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6년 후에 브이 또한 같은 집에서 태어난다. 여기서 세바스챤과 브이를 나타내는 숫자인 9과 6은 O에 운동성(꼬리)이 부여된 형태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숫자 상징은 20장에서 세바스챤이(나중에 Kegan이란 다른 환자임이 밝혀지지만)이 입원해 있는 병실은 36호라는 데에도 이어진다. 936에서 9(=세바스챤)가 떨어져나간 것이니 세바스챤이 이 병실에 입원해 있을 리 없다. 그는 이미 죽은 것이다. 세바스챤 나잇Knight은 나잇night(=어둠) 속으로 이미 사라져버린 것이다. 브이는 성 다미에를 병원을 찾아가 세바스챤을 찾으며 이렇게 말한다. 'I have come,' I said, 'to see Monsieur Sebastian Knight, K, n, i, g, h, t. Knight. Night.'(168) 이렇듯 나잇의 이름은 몇 차례에 걸쳐 낱낱으로 분해되고 결국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12장에서 로이 카스웰Roy Carswell(이것 또한 루이스 캐롤의 아나그램이다) 속의 초상화가 보여주는 세바스챤, 즉 연못 속의 자신을 들여다 보고 있는 모습(144/99)을 이제 브이 또한 반복하고 있는 것인데, 사실 <참인생>의 이야기 전체가 바로 이 연못 속의 자신 들여다보기인 것이다. 브이는 세바스챤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욕실로 가서 거울looking- glass 앞에 몇 분 동안 서 있는다.”(234/160)

3.6. 브이가 세바스챤의 아파트를 찾아갈 갔을 때 발견한 이상한 문구 또한 이러한 거울보기의 연장선상에서, 그리고 시간의 동시화synchronization라는 관점에서 읽을 수 있다.

그는 깊게깊게 잠드는 자였기에 로저 로저슨, 늙은 로저슨은 늙은 로저스가 산 것을 샀다. 깊게 잠드는 자가 되는 게 그토록 두려운 늙은 로저스는 내일을 놓치는 게 그토록 두려웠다. 그는 깊이 잠드는 자였다... 그는 숙명적으로 내일의 사건의 영광, 이미 훈련의 영광을 놓치는 것을 두려워하였기에 그가 하는 것은 사고 그날 저녁을 사기 위하여 집으로 옮겨 놓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가 아니고 여덟 개의 각기 다른 크기와 강도로 똑딱거리며 9, 8, 11시를 지나치는 자명종 시계는 그는 시계를 침실에 놓았고 그 모습은 마치 9개의 알람시계가 9마리의 고양이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As he a heavy A Heavy sleeper, Roger Rogerson, old Rogerson bought old Rogers bought, so afraid Being a heavy sleeper, old Rogers so afraid of missing tomorrows. He was a heavy sleeper. He was mortally afraid of missing tomorrow's event glory early train glory so what he did was to buy and bring home in a to buy that evening and bring home not one but eight alarm clocks of different sizes and vigour of ticking nine eight eleven alarm clocks of different sizes ticking which alarm clocks nine alarm clocks as a cat has nine which he placed which made his bedroom look rather like a (50/33)

무슨 말인지 잘 알아먹기 힘들지만(번역도 부분적으로 맞는 것 같지 않다), 여기서도 로저스Rogers와 로저슨Rogerson은 트윈twin이며 분신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내일의 어떤 사건(영광)을 놓치지 않기 위해 서로 크기도 다르고 똑딱소리도 다른 8개의 알람시계를 사서 9시, 8시, 11시 등에 맞춰놓는다. “깊은 잠”이란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한다면, 이 말장난word-play이 배면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 죽음 극복에의 욕망이다. 이 욕망이 세바스챤에게서 자신의 창작으로 나타났다면, 동생 브이에게는 형의 삶을 전기의 형식으로 다시 복원하려는 의지로 나타난다. 그래서 이들은 로저스Rogers와 그를 따르는 로저슨Rogerson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방법이다. 8개(9개?)의 알람시계를 동원하는 것, 바로 이것이 이미 앞에서 얘기한 동시화의 세계가 아닐까.

SCENE 4

4.1. 나보코프의 이전의 러시아어 작품들이 그렇듯이 <참인생> 또한 게임적인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이미 세바스챤 나잇Sebastian Knight의 기사Knight와 그의 애인인 클레어 비숍Clare Bishop의 주교Bishop가 이미 장기의 말이름이다. 그리고 세바스챤이 죽은 장소인 성 다미에르St Damier에서 다미에르Damier는 불어로 장기판을 뜻한다. 이렇듯 게임소설novel as a game적인 성격과 자기 정체성의 탐구novel as a quest for identity의 병치라는 나보코프 특유의 전략은 어떤 효과를 유발하는가? 이 문제를 세바스챤이 쓴 소설들과 그에 대한 브이의 읽기를 따라가면서 생각해보기로 한다.

4.2. 세바스챤이 제일 처음 쓴 소설은 <무지개빛 단면The Prismatic Bezel>(1924)이다. 여기서 ‘무지개빛’이라는 건 프리즘을 통해서 투과된 빛의 분광을 뜻한다. 우리 눈에 그저 단순하게 한 가지로 보이는 빛이 실제로는 여러 가지 빛의 종합이라는 걸 프리즘은 보여주는 것인데, 이 프리즘이 바로 세바스챤에게서(그리고 나보코프에게서) 바로 소설이란 허구적 세계가 아닐까. 이 <무지개빛 단면>은 일종의 탐정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10장). 열두명의 사람들이 한 하숙집에 묵고 있는데, 아베슨G. Abeson이란 미술판매상이 자신의 방에서 살해된 채로 발견된고, 런던에서 탐정이 어렵사리 도착해 수사를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투숙객들이 다양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지는데, 이때 시체가 사라져버린다. 그러면서 이곳을 어슬렁거리던 행인인 늙은 노즈박Nosebag이 자신의 가발과 거은 안경을 벗어던지면서 자신이 아베슨임을 드러낸다. 여기서 노즈박Nosebag은 아베슨G. Abeson의 아나그램이다.

이렇듯 철자변환의 게임을 존재의 동일성 문제, 정체성의 문제와 관련짓는 세바스챤의 방식은 바로 나보코프의 그것이면서 이 <참인생>의 그것이기도 하다. 브이와 세바스챤 또한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아나그램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세바스챤의 이러한 방식을 브이는 ‘문학적 구성의 방법methods of literary composition’(114/79)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허구적 작품이 구성되는 원리인바, 그것을 브이(그리고 세바스챤)는 아나그램(=구성․편집의 문제)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세바스챤의 이러한 인식과 방법은 그의 마지막 소설인 <의심스러운 아스포델The Doubtful Asphodel>에도 이어지는 바, 거기서 그는 기법의 완벽함을 과시한다. 브이의 주석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부분들이 아니고, 그것들의 조합이다. It is not the parts that matter, it is their combination.”(216/148)

4.3. 두번째 소설인 <성공Success>에서 다루어지는 ‘인간 운명의 방법methods of human fate'은 이와 관련하여 작가의 문제를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소설 속에 나오는 윌리엄과 마술사의 대화를 보라.

“제가 토기 한 마리 사 드릴까요?” 윌리엄이 말한다. “필요하면 내가 하나를 만들지.” 마술사는 ‘필요한’이란 말이 무슨 끝없이 긴 리본이라도 되듯이 길게 빼면 대답한다. “괴상한 직업이예요, 소매치기가 미치죠, 주문만 외면 되니가요. 거지의 모자 속에 든 동전과 당신의 마술모자에 든 오믈렛, 말도 안되지만 같거든요.” 윌리엄이 말한다.

"May I buy you a rabbit?" asked William. "I'll hire one when necessary," the conjuror replied drawing out the "necessary" as if it were an endless ribbon. "A ridiculous profession," said William, "a pickpokek gone mad, a matter of patter. The pennies in a beggar's cap and the omelette in your top hat. Absurdly the same." (120/83)

마술모자 속의 오믈렛과 거지의 모자 속에 든 동전을 “말도 안되지만” 같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작가-마술사의 허구적 세계가 아닌가.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인간의 운명을 다루는 방법이다. “필요하다면” 한 인간의 운명을 만들어낼 수 있고, 또 조종할 수 있는 세계, 허구적 세계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무지개빛 단면>에서 피력된 구성방법과 더불어 <참인생>이 어떻게 읽혀야 하는가에 대한 안내 지침의 역할을 한다.



4.4. 세번째 소설인 <우스운 산The Funny Mountain>(1932)은 세 개의 단편 모음집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다른 방법으로 세 명의 불쌍한 여행자를 도와주는 실러Mr Siller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 실러가 문제되는 것은 세바스챤의 마지막 여인을 찾아가는 브이의 여정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인물인 실버만Silverman이 이 실러를 빼닮았다는 데 있다. 즉 실버만은 허구적 인물인 실버의 현실적 구현체이다. 거꾸로 말하면, 실버만은 브이의 허구적 성격을 드러내주는 인물이다.(최유미, <The Real Life of Sebastian Knight 연구>(서울대 석사논문, 1992), 36-38쪽.)

“가장 정직한 중개인을 조심하라. 당신이 들은 것은 정말이지 세번 굴절된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Beware of the most honest broker. Remember that what you are told is threefold.”(66/44)는 브이의 내면의 메아리는 이제 그 자신의 실재성에 대한 의혹으로까지 확산된다(사실 <참인생>의 가장 믿음직한 브로커 행세를 하는 인물이 바로 화자-작가인 브이가 아닌가). 그러한 의혹은 사실 브이 자신에게서 먼저 터져나오고 있기도 하다. 바로 이어지는 대목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누가 세바스챤 나잇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가? 내 양심 속에서 같은 음성이 반복된다. 정말이지 누구인가? Who is speaking of Sebastian Knight? repeats that voice in my conscience. Who indeed?” 만약에 <참인생>이 세바스챤의 여섯번째 소설이라면, 6이란 숫자와 브이와의 연관성은 앞에서 여러 번 지적한 바 있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론 결국 허구적 주인공인 브이가 작가 세바스챤의 삶에 대해 궁리하고 탐색하고 있는 형국이 된다. 이런 식의 읽기 또한 ‘가능한’ 읽기이다.



4.5. 사실 다른 나보코프의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참인생>에서도 어떤 고유한 유일한 읽기란 가능하지 않다. 그런 읽기를 통해 굿맨이 세바스찬 나잇의 문학세계를 규정지으면서, ‘불쌍한 나잇poor Knight’이 “소위 우리시대의 산물이며 희생자product and victim of what he calls ‘our time’”(77/52)라는 걸 보여주려한 것이 한낱, 브이에 의하면, “굿맨의 소극The Farce of Mr Goodman”이 되고 마는 것은 그런 유일한 읽기를 고집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심한 손가락innocent blind fingers”(98/67)으로 작품(열쇠)를 만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결국 브이가 실재적인 인물이든, 허구적인 인물이든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데, 다만 그의 존재가 그렇듯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것만을 유의하면 되겠다.

여기서 제3의 중재적인 해석도 생각해볼 수 있는데, 그것은 나보코프가 두 세계, 혹은 더 나아가 다(多)세계 모델을 세계관으로 견지하고 있었다는 관점이다. 그 관점에 의하면, 거울 안의 세계와 거울 바깥의 세계는 동일한 지위의 현실성을 갖는다. 이미 앞에서 6과 9의 숫자를 통해 브이와 세바스챤이 거울상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걸 지적한 바 있는데, 세바스챤의 시점에서 볼 때, 브이는 자신의 허구적인 거울상에 불과하고, 또 브이의 시점에서 볼 때, 세바스챤은 이미 죽은 인물로서 자신의 전기를 통해 재생되어야 하는 인물이다. 중요한 것은 이 두 시점 가운데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비해 우월한 현실성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는 점이다. 이런 식의 두 세계 모델은 시간의 힘을 상대화시킨다는 강점을 가진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 세바스챤의 마지막 소설인 <의심스러운 에스포텔>에서 다루어지는 주제이기도 하다.

4.6. 세바스챤의 네번째 소설 <잃어버린 재산>은 브이에 의하면, 문학적인 발견의 여정에 있어서 일종의 정지halt이며 요약summing up이다. 이 소설의 한 장은 비행기 추락사고를 다루고 있는데, 떨어진 항공우편물 가방에 남아있는 편지들을 브이는 다시 소개하고 있다. 이들 중 연애편지는 당시 클레어 비숍과의 멀어져가는 관계에 대한 세바스챤의 안타까움이 직접 토로되고 있는 것으로도 읽히는데, 사랑에 대해 언급되고 있는 부분은 재미있으면서도 우리가 앞에서 지적했던 동시화의 문제와 연관해서 중요한 시사를 제공해준다.

사람은 천명의 친구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하렘은 이 문제와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나는 체조가 아니라 댄스에 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또는 사백 명의 부인들을 모두 다 사랑한 어느 거대한 터키인의 사랑을, 내가 당신을 사랑한 것처럼 상상해볼 수 있나요? 왜냐하면 만일 내가 <둘>이라고 말하면 나는 세기 시작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끝이 없지요. 오직 단 하나의 참 숫자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 그리고 사랑이란 이 단수 개념을 설명하는 최고의 대표자입니다.

One may have a thousand friends, but only one love-mate. Harems have nothing to do with this matter: I am speaking of dance, not gymnastics. Or can one imagin a tremendous Turk loving every one of his four hundred wives as I love you? For if I say "two" I have started to count and there is no end to it. There is only one real number: One. And love, apprently, is the best exponent of this singularity. (137/94)

여기서의 하나, 즉 단수성singularity은 앞에서 언급한 단수화synchronization과 유사한 의미연관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두 개인 것, 혹은 복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하나One라는 것은 정념론적 원리이면서 인식론적 원리이다. 아니 원리라기 보다는 차라리 가능조건이다(적어도 체조가 아니라 댄스가 문제되는 것이라면).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나보코프 소설에서의 여러 인물들은 작가 자신의 분신들이며, 또 이 분신들은 전체-나보코프Total Nabokov로 수렴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일(一)과 다(多)의 수렴, 발산운동이 그의 소설을 직조하는 원리가 되는 것이라. 한편으론 이 일과 다, 부분과 전체는 마치 프랙탈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부분은 전체를 고스란히 자기 안에 내포해 가지고 있다. 부분과 전체를 서로 닮은 꼴인 것이다. 브이가 세바스챤을 닮고, 세바스챤이 작가 나보코프를 닮는 과정은 이러한 일/다의 운동, 프랙탈 운동 과정에 다름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아마도 나보코프의 창조원리가 아닐까 싶다.



SCENE 5

5.1. 일/다의 수렴 발산 운동 대신에 왔다리 갔다리 식으로 이야기가 여기까지 뻗어나오게 되었다. 비는 여전히 줄기차게 내리는구만. 세바스챤의 마지막 소설로 넘어가기 전에, 그의 마지막 여인(마지막 사랑?)이었던 니나(=르세프)에게 브이가 정작 묻고 싶었던 질문을 하지 못하고 넘어간 이유를 잠시 음미해본다.

물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런 종류의 여인들에게 책이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을, 자기 자신의 삶이 백 권의 소설이 주는 스릴보다 더 야단스러울 텐데 만일 그녀가 만 하루 동안 도서관에 갇혀서 보내라는 선고를 받는다면 아마 점심 때쯤 죽은 시체로 발견되리라.

What was the asking! Books mean nothing to a woman of her kind; her own life seems to her to contain the thrills of hundred novels. Had she been condemned to spend a whole day shuy up in a liberary, she would have been found dead about noon.(213-4/146)

그런 니나가 세바스챤의 마지막 사랑이었을까? 사랑이었다니! 어쨌든 지금이라고 사정이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다. 무수한 니나들이여! 가련한 얼간이들이여! 돼먹잖은 천사들이여!



5.2. 세바스챤의 마지막 소설 <의심스러운 아스포델>은 죽어가는 한 남자의 얘기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가 곧 책이다. 다른 건 그저 본문main subject에 딸린 주석commentary에 불과하다. 죽음에 대한 생각들과 상념들의 조합이 이 소설의 기법이면서 장기이다. 그는 마침내 삶과 죽음에 관한 온갖 질문의 대답인 ‘절대적인 해결’을 발견하는 데 이른다. 그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보아온 야생의 시골도, 자연스런 현상의 우연한 종합도 아니고 이런 산과 숲, 들과 강을 한 문장으로 집약시킬 수 있는 책 속의 지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여행자와 같은 것이었다.

[I]t was like a treaveller realizing that the wild country he surveys is not an accidential assembly of natural phenomena, but the page in a book where these mountains and forests, and fields, and rivers are disposed in such a way as to form a coherent sentence. (219/150)

이 깨달음은 단순하면서 아름답다. 그걸 감상할 수 있는 여유가 우리에게 있는가? 이어지는 문장은 <의심스러운 아스포델> 전체에서, 그리고 이 <참인생>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적인 문장이다.

이제 수수께끼는 풀렸다. ‘그리고 모든 것의 의미가 그들의 형태를 통해서 빛나면 최상으로 중요한 것같이 보였던 여러 생각들과 사건들은 사소한 것조차 되지 못한다. 이제 아무것도 사소한 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한때는 중요성을 부정하기도 했던 다른 생각들과 사건들과 같은 크기로 축소된다.’ 그렇게 하여 과학, 예술, 혹은 종교와 같은 우리 뇌의 빛나는 업적들은 분류의 친근한 계보로부터 떨어져나오고 합세한 손들은 서로 혼합되어 즐겁게 하나가 된다. 버찌의 씨와 어느 낡은 벤치, 그 페인트칠한 나무토막 위에 놓여 있던 그것의 조그만 그림자, 혹은 찢어진 조그만 종이조각, 혹은 수천 수백만의 사소한 것에서 떨어져 나온 어떤 다른 사소한 것은 신기한 크기로 자란다. 다시 조형되고 재조립되어 둘 다 숨쉬듯 자연스럽게 세상은 영혼에 그 의미를 제공한다.

Now the puzzle was solved. ‘And as the meaning of all things shone through their shapes, many ideas and events, which had seemed of the utmost import!ance dwindled not to insignificance, for nothing could be import!ant now, but to the same size which other ideas and events, once denied any import!ance, now attained.’ Thus, such shining giants of our brain as science, art or religion fell out of the familiar scheme of their classification, and joining hands, were mixed and joyfully levelled. Thus, a cherry stone and its tiny shadow which lay on the painted wood of a tired bench, or a bit of torn paper, or any other such trifle out of millions and millions of trifles grew to a wonderful size. Remodelled and re-combined, the world yield its sense to the soul as naturally as both breathed.(219-20/150)

다소 길지만, 내용은 대단히 의미깊다. <참인생>과 같은 “뇌의 빛나는 업적”을 스스로 무화시키면서, 재조형되는 세계, 그래서 새롭게 의미가 생성되는 사소한 세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사실, 브이가 세바스챤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떤가. 또 세바스챤이 “상대방에게는 법칙들을 알려주지도 않고 계속 자기가 고안해낸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 것 같”(222)으면 또 어떤가. 문제는 우리의 고유성 너머에 자연스레 숨쉬면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는 또다른 세계이다. <참인생>에 지시되어 있지만, <참인생> 저편에 있는 어떤 세계, 책장 너머의 세계, 그리고 이 “뇌의 빛나는 업적들”이 이루어놓은 자질구레한 제도들과 그 틈바구니 너머의 세계, 아니 이런 언어 저편의 세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숨은 가벼워지는 것을.

브이는 <의심스러운 아스포델>을 세바스챤의 모든 책 가운데 가장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그 책 자체로서 그걸 좋아한다고. 그 책의 전모를 다 읽은 것은 아니니까 나로선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위의 대목 같은 부분은 그냥 그 자체로 좋아할 수 있는 부분이다. 제대로 왔든 거꾸로 왔든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면 이제 사다리는 버려도 좋다.



ENDING

E.1. 나는 무얼 얘기했는가? 예전만큼의 정(신)력이 안된다는 걸 자백했는가? 이 피로 속에서(엄살이다). 어쨌거나 나보코프에 대해 몇 마디 할 얘기가 있었고, 그걸 <참인생>을 빌미로 삼아 하고자 했지만, 구성상의 문제로 말미암아 제대로 다 털어놓은 것 같지는 않다. 굿맨과 브이의 전기를 비교하는 것, 세바스챤의 여자 관계를 추적하는 것 따위가 얼른 생각에 여기에 담겨지지 않은 부분들이다. 사소한 걸로 내버려두면 되는 것인지?... 이젠 다 잊어버리기로 한다.

E.2. 그렇다고 전혀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다. 1장에서 “살갗을 따스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눈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펼쳐진 구름 한점 없는 하늘이 안겨주는 완벽한 사치. [T]he pure luxury of a cloudless sky designed not to warm the flesh, but solely to please the eye.”(10/5)라는 대목은 이 소설의 초점이 처음에는 시선(게임)의 측면에 있었음을 미리 말해준다. 그렇지만 이후의 전개과정에서 이 유희적 측면은 형이상학, 도덕적 측면에 너무 많은 걸 양보했고, 결국은 끝에 와서 죽음에 대한 성찰에까지 이르러버렸다. 이건 혹 작가 자신도 예기치 못한, 통제하지 못한 부분은 아니었을까(나는 “버찌 씨와 낡은 벤치”를 염두에 두고 있다).

Владимир Набоков Соглядатай

나보코프 자신이 이 작품을 불완전하다고 본 것은 바로 그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추측을 나는 내 식으로 해본다. 육체(살갗)/시선(눈)의 대립구도가 막판까지 유지되지 않은 것이다. 나보코프에게서 ‘눈(시선)’은 한 인간의 분신으로서 기능할 만큼 중심적이다(그의 <스파이Eye> 같은 작품). 즉 고골의 ‘코’를 대신하는 것이 바로 나보코프의 ‘눈’이다. 또 그의 여러 작품들에서 시선(시각)은 주인공-인물에 대한 작가-화자의 지배-권력 자체이다. 작가는 시선의 지배권자이기에. 이런 걸 좀더 잘 말할 수 있는 날이 조만간 오길 바란다. 그리고 지금은 무엇보다도, 살갗을 따스하게 해주는 햇빛이 좀 있었으면! 오갈데 없는 비만 줄기차게 내리고 있다...

08. 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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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3 0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2-13 08:57   좋아요 0 | URL
반성만은 저도 게으르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2008-02-13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2-13 09:26   좋아요 0 | URL
네,새해 복많이 받으시길. 원서를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 거구요, 저는 보통 번역본을 읽다가 좀 불분명하다거나 중요한 대목이다 싶은 곳은 대조해서 봅니다. 장편소설의 경우도 마찬가지구요. 특별한 노하우는 없습니다.^^;
 

연휴의 후유증인지 숭례문 화재의 여파인지 머리는 무겁고 가슴은 답답하다. 주기적인 우울증인지도 모르겠다. 원래 '시인을 위한 물리학'이란 제목의 페이퍼를 쓸 생각이었으나(이런 일과 욕심에서 언제쯤 해방될 수 있을까?) 시간도 없고 기력도 부족해서 <롤리타>에 관한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강의준비를 겸하여 몇 자 적어두는 것이기도 한데, 국역본 첫문단의 오류에 관한 것이다.

 

 

 

 

알다시피 이 작품은 이렇게 시작한다. 제레미 아이언스 주연의 <롤리타>(1997) 서두(http://www.youtube.com/watch?v=8D_Bo0UFxq4)를 먼저 참조하시길. 주인공 험버트 헙버트(제레미 아이언스)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되는데, 특이하게도 이 영화에서는 소설의 처음 문단과 두번째 문단 순서가 바뀌어서 나온다. 여기서 읽을 건 유명한 첫문단이다. 같은 대목을 관련서들에서는 어떻게 옮기고 있는지 비교해보겠다.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 리. 타."(<롤리타>, 민음사, 15쪽)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입천장을 세 번 굴러 세 번째는 이를 톡 치는 혀끝. 롤. 리. 타."(<롤리타>, 이룸, 47쪽)

"롤리타, 내 인생의 빛, 내 사타구니의 불길, 나의 죄이자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나의 혀끝은 입 천장에서 세 번을 움직여 그 이름을 두드린다. 한번씩 움직일 때마다 혀는 아래로 내려와 마지막 세번째는 이를 건드린다. 롤. 리. 타."(<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 31쪽)

이 한 문단에서만 '롤리타(Lolita)'란 이름이 세 번 반복되는데, 말 그대로 '롤리타'란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이건 말 그대로 '유희적인' 시작이다.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이라는 거창한 '호명'과 롤리타란 이름이 입안에서 어떻게 발음되는가에 대한 묘사/음미가 병치되고 있는 것이다. 잔뜩 무거운 분위기로 처연하게 시작한 에드리안 라인의 <롤리타>가 막바로 이러한 나레이션으로 시작할 수 없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와 달리 나보코프는 이렇게 대놓고 시작한다.

"Lolita, light of my life, fire of my loins. My sin, my soul. Lo-lee-ta: the tip of the tongue taking a trip of three steps down the palate to tap, at three, on the teeth. Lo. Lee. Ta."

이 서두가 의미심장한 것은 작품의 맨마지막 문장과도 호응하기 때문이다. <롤리타>는 어떻게 끝나는가? "그리고 이것이 너와 내가 나눌 수 있는 단 하나의 불멸성이란다, 나의 롤리타."(422쪽) 원문은 "And this is the only immortality you and I may share, My Lolita." 이 서두와 결어 사이의 여정(trip)이 바로 <롤리타>의 여정이며 그것은 또한 '불멸성'에 이르는 여정이다. 그리고, 그 여정이 혀끝(tip)의 이동으로 대변될 수 있는 '언어적 여정'이라는 데 이 소설의 비밀이 놓여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그 비밀에 대해서 자세히 늘어놓을 자리는 아니고, 인용한 국역본의 번역에서 문제가 되는 것만 살피도록 한다. 먼저 사소한 불만을 적자면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이라는 첫마디가 나는 나보코프의 원문처럼 동사가 빠진 명사구 형태로만 제시되는 게 더 적절하다고 본다. '내 삶의 빛이요'라는 식으로 늘어지는 게 개인적으론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세번째 제시한 번역에서처럼 "롤리타, 내 인생의 빛, 내 사타구니의 불길" 하는 식이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이 경우엔 왜 잘 나가다가 "나의 죄이자 나의 영혼이여"라고 늘어진 것인지?). 즉, 내가 원하는 건 "롤리타, 내 인생의 빛, 내 허리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하는 식으로 옮기는 것이다.

 

 

 

 

'허리'라고 옮긴 'loins'는 원래 '허리'란 뜻이다. 내가 갖고 있는 주석본 <롤리타>(신아사, 1997)에서 윤효윤 교수에 따르면 "문학에서 말하는 loin은 '허리'를 의미하기보다 생명 또는 생식기를 의미"한다. '생명'이나 '사타구니'란 의역은 그래서 가능하다. 나는 다만 그런 걸 감안하면서도 ' 내 허리의 불꽃' 정도로 옮기는 게 나보코프의 짓궂은 취향에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러시아어본에서도 그냥 '허리'를 뜻하는 단어가 쓰였다).  

그리고 두번째 마디.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 리. 타."라고 번역됐는데, '롤-리-타'를 발음해 보면 바로 알 수 있지만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면서"는 발음할 수 없다. 정상적인 경우 'Lo-Lee'를 발음할 때는 혀끝이 이빨이 닿지 않기 때문이다. 그 발음의 과정을 풀어서 번역한 것이 "나의 혀끝은 입 천장에서 세 번을 움직여 그 이름을 두드린다. 한번씩 움직일 때마다 혀는 아래로 내려와 마지막 세번째는 이를 건드린다."이다. 이게 혀끝의 여정이다. 'Lo'를 발음할 때는 입천장을 치고, 'Lee'를 발음할 때는 약간 앞쪽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Ta'를 발음할 때 비로소 혀끝은 이빨을 톡 치게 된다.

나대로 다시 옮기면, "롤리타, 내 인생의 빛, 내 허리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세 단계로 톡톡 치며 내려오다가 세번째에는 이빨에 가닿는 여정. 롤. 리. 타." 그런 여정의 끝에 네가 있다. 롤리타, 내 인생의 빛, 내 허리의 불꽃, 내 허벅지의 경련, 내 발가락의 가려움, 아무도 가려주지 못할 나의 슬픔, 나의 공허, 롤. 리. 타...

08. 0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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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보코프와 예술이라는 피난처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3-04 00:17 
    저녁강의가 있어서 늦게 귀가해보니 식탁에 이번달 <출판저널>(3울호)이 놓여 있다. 원래는 지난달에 실려야 할 '로쟈가 읽은 책 속의 한 장면' 원고가 한달 늦춰졌고, 이번이 마지막 글이 됐다. 나대로의 '이어 읽기'로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다루고 있으며, 4월호 원고까지 썼더라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 이어질 참이었다. 그래도 원고 부담이 하나 줄어서 다행이
 
 
2008-02-12 0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12 0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2-12 10:02   좋아요 0 | URL
저도 파일은 없고 프린트된 것만 갖고 있었습니다. '활력소'를 이런 곳에서 찾으시면 안되는데요.^^;

parksang 2008-02-12 14:19   좋아요 0 | URL
색깔 구분 안된 뒷부분 번역문 몹시 맘에 드네요.

로쟈 2008-02-12 17:20   좋아요 0 | URL
^^;

2008-02-12 1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2-12 17:20   좋아요 0 | URL
저도 후보들을 더 생각해봤지만 대체할 만한 게 떠오르지 않네요.^^;

섬나무 2008-04-14 10:06   좋아요 0 | URL
문장의 미세한 결을 드러내는 솜씨로 보면 로쟈님은 인문학 번역보단 문학류 번역에 적합하신것 같습니다.^^ 롤리타를 읽으면서 저 롤리타 발음에 대한 묘사를 따라하다가 어떻게 이빨을 세 번이나 치나? 하면서 다른 뜻의 표현일거라 생각했어요. 세번째에는 이빨에 가닿는 여정.롤.리.타. 확연해지고 한결 좋네요. 그런데 저렇게 세 군데의 책을 모두 읽어보시나요? 역시 보통의 열정은 아닙니다. 검은 글씨 두 줄은 '롤리타'의 전부네요.

로쟈 2008-04-14 23:58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론 문학작품 번역이 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문체'도 옮겨야 하기 때문에요.^^;

섬나무 2008-04-15 18:43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문자 번역이 아니라 문체를 번역하고 싶은 로쟈님의 부담이야 이해되는데요 로쟈님의 깊은 감수성이면 충분히 가능해보입니다. 어쩌면 숨은 능력을 발휘하지 않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요.^^

로쟈 2008-04-15 21:43   좋아요 0 | URL
사실 제가 맡은 번역들도 문학쪽이 더 많습니다.^^;

섬나무 2008-04-16 11:20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러시아문학 쪽인가요? 번역작품들을 알려주시는 게 불법은 아닐테니 소개해주시면 좋겠는데요......

로쟈 2008-04-17 23:41   좋아요 0 | URL
물론 러시아문학쪽이구요, 내년쯤부턴 나올 예정입니다.^^;
 

2월 10일은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푸슈킨(1799-1837)의 기일이(었)다. 구력으로는 1월 29일이지만 신력으로 환산하면 2월 10일이고 공식적인 기념행사는 이날 행해진다. 푸슈킨에 대해서는 예전에 몇 차례 다룬 바 있고 새로 무얼 쓸 형편은 아니어서 관련자료나 검색해보다가 옥사나 체르카소바의 애니메이션 <당신의 푸슈킨>(1999)을 발견했다(http://www.youtube.com/watch?v=WZB6oQVZMrM).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된 듯한 9분짜리 애니메이션이다. 간단한 설명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시인과 관련한 자신에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시인의 전기적 에피소드들이 거기에 결합되어 그려진다고. 더불어 나탈리야 본다르추크(<전쟁과 평화>를 찍은 세르게이 본다르추크의 딸이다)의 영화 <푸슈킨. 마지막 결투>(2006)도 눈에 띈다(예고편은 http://www.youtube.com/watch?v=0VysCTzuBJA). 영화의 스틸사진 몇 장을 옮겨놓는다.

Кадр из фильма

Кадр из фильм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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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адр из фильма

Кадр из фильма

Кадр из фильма

Кадр из фильма

Кадр из фильм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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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사진은 단테스와의 결투에서 복부에 총상을 입고 쓰러지는 푸슈킨의 모습이다. 그리고 아래는 아내 나탈리야 곤차로바와 함께 한 푸슈킨. 두 사람은 1831년 2월 18일에 결혼했으며 둘 사이엔 2남 2녀가 있었다.

바실리 곤차로프 감독의 <푸슈킨의 삶과 죽음>(1910)은 이번에 발견한 '희귀자료'다(http://www.youtube.com/watch?v=8gbVw1yk3gA). 시인의 전기를 주요 에피소드를 따라가면서 요약하고 있다...

08. 02. 11. 

 

 

 

 

국내에는 두 종의 작품 선집이 출간돼 있지만 소개된 푸슈킨의 전기로는 구드룬 치글러의 <푸슈킨>(한길사, 1999)이 거의 유일하다. 쯔베또바의 <푸슈킨>(건국대출판부, 1997)은 그의 삶과 문학세계에 대한 간결한 소개이다. 알라딘에서 구할 수 있는 영어본 전기로는 비뇬(Binyon)과 드루주니코프(Druzhnikov)의 것이 있다. 러시아문학 연구자들이나 애호가들에게 추천할 만한 필독서에는 "The Pushkin Handbook'(2006)이 있다. '푸슈킨학'의 현재를 가늠해볼 수 있는 책이다...

Анри Труайя Александр Пушкин PouchkineЛеонид Гроссман 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Пушкин. Биография

참고로, 내가 갖고 있는 전기 가운데 가장 두툼한 책은 저명한 망명 저술가 앙리 트루아야(Henri Troyat)의 <푸슈킨>이다(국내에는 그의 <고리키>가 번역돼 있다). 원래 불어본 저작을 러시아어로 옮긴 것인데 무려 1056쪽 분량이다(영역본은 발췌본이다). 레오니드 그로스만(1888-1965)의 <푸슈킨>은 가장 대표적인 전기 중 하나인데 소비에트 시절 시인의 서거 100주기를 기념하여 쓰여졌다. 분량은 480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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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1 1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2-11 19:59   좋아요 0 | URL
애니매이션이라고도 적었는데요.^^ 새해 복많이 받으시길...
 

최근 들어 부쩍 자주 출간되고 있는 교양과학서는 뇌과학에 관한 것이다. 교수신문에서 푸짐하게도 네 권의 뇌과학 관련 신간들을 다루고 있는 서평기사를 옮겨온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516). 책들을 다 읽어볼 여유는 없지만 무슨 내용들이 쓰여 있는지는 일람해두는 게 유익하겠다.  

교수신문(08. 01. 29) 의식과 영혼의 네트워크

마음을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 마음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기는 더욱 쉽지 않다. 최근에 소개된 네 권의 번역서로 마음을 현대적 의미로 비교 분석해보는 작업은 마음의 행로를 살피기에 흥미로운 일이다. 인지신경과학과 철학이 만난 『스피노자의 뇌』, 숨겨졌던 의사의 일대기와 뇌과학이 만난 『영혼의 해부』, 신경회로망과 진화론이 만난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철학과 뇌과학이 만난 『마인드』가 대상이 됐다. 네 권의 책을 읽고 나서 아쉬운 점은, 동양에서는 ‘마음’을 어떻게 보았나 하는 것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마음을 말할 때 가슴을 손바닥으로 가리킨다. 마음을 말하는 한자어인 心과 情에는 모두 심장을 뜻하는 心자가 들어간다. 동양의 마음에 대한 견해는 성리학자의 四端七情論에서 엿볼 수 있다. 이황은, 사단은 理에서 나오는 마음이고, 칠정론은 氣에서 나오는 마음으로, 인간의 마음은 이와 기를 함께 지니고 있지만 마음의 작용은 이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과 기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 두 가지라는 理氣二元論을 주장했다. 옛말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 “애간장이 탄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라는 재미난 표현이 있다.



뇌는 여러 절차를 거쳐 필요한 몸의 부분을 움직이도록 명령한다. 뇌의 변연계에 자리 잡고 있는 편도체는 두려움과 관계가 있으며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만약 쥐에게 편도체가 없어지면 고양이를 봐도 놀라지 않는다. 두려움이 사라져 잡혀 먹히는 난처한 일이 일어난다. 에크만(Ekman)은 화, 공포, 혐오, 행복, 슬픔, 놀람을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기본적 정서라고 보았다. 정서는 대뇌 좌우반구에서 비대칭적으로 처리된다. 만약 좌반구가 손상되면 두려움, 우울증이 나타나며 우반구가 손상되면 무관심해진다. 우반구는 정서를 만들어 내고 좌반구는 정서를 언어를 사용해 해석한 후, 정서의 개념적, 인지적 수준을 형성한다.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에 관한 생각은 시대에 따라 변했다. 이집트 사람은 선악은 ‘머리’가 아닌 ‘가슴’에 기록된다고 믿었다. 그들은 미라를 보존하기 위해 뇌를 제거한 반면, 심장은 그 사람의 존재와 지성을 상징한다고 여겨서 잘 보존했다. 심지어 사람이 죽으면 심장을 저울에 올려놓고 깃털의 무게와 비교했다. 악한 사람은 심장이 무겁고, 선한 사람은 심장이 깃털처럼 가볍다고 여겼다. BC 5세기 알크마이온이나 아나사고라스에 이르러서야 뇌의 기능이 중요하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피타고라스의 제자였던 알크마이온은 최초로 사람을 해부했으며, 시신경과 귀의 ‘유스타키오관(Eustachian tube)’을 발견했고, 뇌가 지적활동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플라톤은 ‘화’를 다루는 신체의 부분은 ‘간’이라고 여겼다. 우리의 옛 말 “애간장이 탄다”와 일맥상통하는 점이다. 플라톤은 지능을 ‘뇌’에서 다스리고 공포, 화, 용기는 ‘간’에서 다스리며 욕망, 고민, 탐욕, 무절제는 ‘장’에서 다스린다고 했다. 또 사람이 죽으면, ‘간’과 ‘장’에서 다스리는 부분은 사라지지만, ‘뇌’에서 다스리는 지능과 이성은 불멸하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뇌를 심장의 열기를 식히는 냉각장치로 여겼고, 고대와 중세까지 해부학 최고의 권위자였던 갈레노스도 뇌를 우주적 정기가 잠시 머무는 텅 빈 공간으로 보았다. 뇌가 불멸을 상징하는 영혼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은 신성 모독에 가까운 생각이었기 때문에, 서양에서는 뇌가 영혼의 서식처라고 여긴 플라톤보다는 심장을 중요시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가 우세했다. 히포크라테스는 저서 『On the Sacred Disease』에서 “사람은 뇌에서 기쁘고, 슬프고, 즐거운 것을 느낀다. 우리는 뇌를 통해 지혜와 지식을 얻고, 보고 들으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정당한지를 알아낸다. 또한 뇌를 통해 공포도 느끼고, 화를 내기도 한다. 이렇게 뇌는 사람에게 막강한 힘을 발휘하게 해준다”라고 주장했다.



『스피노자의 뇌』를 쓴 다마지오는 아이오와 주립대 의과대학 신경학부 교수다. 그는 『데카르트의 오류』를 저술했으며, 체감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탐색했다. 다마지오는 스피노자의 정서에 관한 저서에서 영감을 받아 스피노자의 발자취를 좇았다. 17세기 유대인 철학자 다마지오는 사고에는 위계가 있다고 보며, 그의 이론은 루스 바클리, 가자니아와 비슷하다. 스피노자는 우리 주변, 우리 자신의 안과 밖 어디에든 신이 있으니 찾아보라고 했다. 다마지오는 인지신경과학과 스피노자 철학의 만남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이해하고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해 과학적으로 지혜롭게 설명하고 있다.



『마인드』를 저술한 마음의 철학 분야 권위자 존 R. 설(John R. Searle)은 버클리대 철학과 교수로 『마음의 재발견』, 『의식의 신비』, 『마음, 언어, 사회』, 『현실 세계에서의 철학』, 『의식과 언어』 등을 저술했다. 저자는 생물학적 자연주의(biological naturalism)입장을 취한다. 그는 인간이 자유의지를 갖고 자신의 환경을 만들어가는 존재라 생각한다. 인간은 의식을 가졌으며, 이 의식은 두뇌에서 일어나지만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독특한 질적 특성을 가진다는 점을 주장했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면서, 믿음이나 욕구와 같은 ‘지향적 행위’를 통해 자신의 환경을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입장을 철학적으로 압축해 제시한다. 그는 많은 철학적 이론 중에서 특히 이원론과 유물론은 진실을 말하고자 하지만, 철학을 더욱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고 비판한다.



『마인드』는 독자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끄는 철학자들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밝히고 있다. 인간의 사유 활동은 삶 그 자체이며, 언어는 궁극적으로 마음이 가지고 있는 생물학적으로 근본적인 능력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물리적 입자로 구성된 세계 속에서 의식을 가진 존재로서, 지적이고 합리적으로 언어를 사용하며, 물리적 실재를 인간적 실재로 변형시키고, 그 실재를 주체적 의지로 가공해 나간다. 마음의 철학에서 탐구하는 심신문제란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이 누구이며, 외부 세계와 자신을 어떻게 연결시키는지, 그리고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인간적 실재를 어떻게 구축하는지 탐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최근의 마음의 철학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거의 대부분의 이론이 오류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짧지만 명쾌한 필치로 ‘철학과 과학적 세계관’을 다뤘다.

유물론자에게 의식은 두뇌 과정일 뿐으로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존 설은 “의식은 두뇌 과정일 뿐이지만, 질적, 주관적, 일인칭적, 구체적 형상이 없는, 촉각으로 느끼는 현상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의식이 두뇌 안에서 진행되는 과정”이라고 강조한다. 이원론자는 의식이란 삼인칭적 신경생물학적 과정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일상적인 물리적 세계의 부분이 아니며, 그 세계를 넘어 존재하는 별개의 어떤 것이라 말한다. 존 설은 이에 대해, 의식이란 인과적으로 환원될 수 있지만 존재론적으로는 환원될 수 없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의식은 일상적인 물리적 세계의 부분이지 그 세계와 다른 별개의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존 설은 “과학적 세계관”이란 말은 잘못된 의미라고 밝히면서, 똑같은 실재라도 마음에서는 경제적 관점, 미학적 관점, 정치적 관점, 과학적 탐구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학적 방법”이란 일단 발견되고 나면 과학의 소유물이 아니고 완전히 공공의 재산이기 때문에, ‘과학적 실재’ 혹은 ‘과학적 실재 같은 것’은 전혀 없고, 여러 개의 사실이 있을 뿐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과학적 세계는 없으며, 그저 세계가 있을 뿐이며,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세계 속에서 인간의 위치가 무엇인지를 기술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 기본원칙은 원자물리학과 진화생물학”이라는 매우 독자적이고 강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영혼의 해부』를 쓴 칼 지머는 <뉴욕 타임스 북 리뷰>로부터 “우리 시대의 가장 훌륭한 과학 평론가”라는 찬사를 받았다. 미국 과학 잡지 <디스커버> 수석편집장을 역임한 과학저널리스트다. 『영혼의 해부』는 국왕으로서 참수형을 당한 찰스 1세 시절 의사였던 토머스 윌리스(1621~1675)의 이야기를 다룬다. 성직자를 꿈꾸던 윌리스는 옥스퍼드 의대에서 의학을 공부한 후 의사가 됐다. 그는 혈액 순환의 원리를 밝혀낸 윌리엄 하비(1578~1657)로부터 의학을 배웠다. 그는 해부 실험을 통해 영혼이 심장이 아니라 뇌에서 작동함을 과학적으로 입증했고, 이를 토대로 『뇌와 신경의 해부학』을 저술했다.

윌리스는 1660년 왕정복고와 함께 옥스퍼드 대학 자연철학 교수가 되었다. 윌리스는 뇌의 혈액 흐름을 밝혀내기 위해, 뇌 질환으로 사망한 환자의 뇌를 꺼내 물감을 주입하는 실험을 했다. 그는 뇌신경이 화학물질을 통해 전기충격(정기)을 발생시키는 방식으로 기억을 형성하고, 상상을 이뤄내며, 꿈을 꾸게 한다고 밝혔다. 그는 일련의 실험을 통해 뇌가 인체의 중심이며 뇌에서 기억과 상상과 꿈이 형성되고, 감정과 욕망, 식욕도 뇌에서 이루어진다고 밝혔다. 신경학이란 용어도 윌리스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영혼의 해부』표지에 실린 정물화는 네덜란드 화가 에두바어르트 콜리에르(Edwaert Collier)가 그린 바니타스 정물이다. 바니타스(vanitas)란 라틴어로 ‘덧없음’을 의미하며, 죽음에 대한 경고, 인생무상과 같은 메시지와 기독교적 세계관을 벗어난 철학을 담은 그림이다. 아마도 이 그림은 자유주의 철학자가 된 로크의 유명세 그늘에 가려져, 정작 로크의 스승이었던 윌리스의 이름조차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아이러니를 상징하기 위해 선택됐을 수도 있다. 저자 칼 지머는 새로운 의학에 대한 윌리스의 두려움은 뇌와 자아에 대한 서구의 견해를 지배해온 이분법에서 비롯됐다고 보았다.

21세기인 현재 프로작(Prozac), 팍실(Paxill) 등 항우울제의 미국 내 판매는 연간 120억 달러에 달한다. 재미난 것은 프로작을 복용한 사람이 우울증이 호전됐을 때 뇌영상 사진을 찍어보니, 그들의 뇌가 건강한 사람의 뇌와 비슷하게 변했다. 그러나 심각한 우울증 환자 중 유명한 항우울제를 6~8주간 복용한 후, 기분이 좋아진 사람의 경우는 35~45%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약간만 기분이 좋아지거나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 과학자들은 대다수 환자들에게는 약에 들어 있는 화학물질의 효력보다 약효에 대한 믿음, 즉 위약효과(placebo effect)가 효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만약 서양의 이분법이 사실이라면, 때로는 설탕으로 만든 가짜약이 프로작과 똑같은 효과를 정신에 미친다는 위약효과를 설명할 수 없다. 우울증을 완화시켜줄 때 심리치료와 항우울제가 아주 흡사한 방식으로 뇌의 활동을 변화시킬 수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저자는 우리의 영혼은 물질적인 동시에 비물질적이며, 화학작용의 산물인 동시에 다른 사람과 주고받는 정보의 네트워크라고 주장한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의 저자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는 캐나다의 몬트리올에서 태어났다. 맥길대학에서 실험심리학을 전공하고,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1년간 MIT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하버드대 심리학과에서 언어심리학과 진화심리학을 강의하고 있다. 이 저서는 마음의 존재, 출처, 역할을 본문만 865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설명하고 있다.

현대에 들어 과학적인 마음의 연구는 MRI를 이용해 뇌사진을 찍고, 사랑하는 연인들의 호르몬 작동을 탐색하고, 티베트 고승들이 명상에 들었을 때 뇌파를 측정하는 등의 방법을 사용한다. 핑커는 이러한 연구 성과를 종합해 통일성 있는 이론의 틀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 과정에서 계산주의 마음 이론과 현대적인 진화이론인 자연선택 이론이라 두 개의 큰 이론을 이용했다.

계산주의 마음 이론은 과학적인 방법, 추론, 실험을 통해 마음의 작동 방식을 설명한다. 수학자 앨런 튜링, 컴퓨터과학자 앨런 뉴웰, 마빈 민스키, 철학자 제리 포더 등은 최초로 계산주의 마음 이론(computational theory of mind)을 정립했다. 인간의 마음은 진화의 산물로, 설계된 수많은 연산기관으로 구성된 체계로서, 유전자 프로그램에 의해 지정되어 특정한 상호작용을 전담한다. 인간의 마음은 입력장치, 기억장치, 중앙처리장치, 출력장치로 구성된 컴퓨터와 같은 네트워크를 가졌으며, 믿음과 욕구와 같은 ‘정보’가 기호의 배열로 표시된다고 설명한다.

핑커는 계산주의 마음 이론이 없으면 마음의 진화를 이해하기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의 사고와 행동이 아무리 섬세하고 융통성이 크다 해도 대단히 복잡한 프로그램의 산물일 수 있으며, 또한 그 프로그램은 자연선택이 우리에게 부여한 것일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생물학의 전형적인 명령은 “…할지니라(Thou shalt)”라는 십계명의 첫머리가 아니고, “만약…라면…이고, 그렇지 않으면…(If…then…, else…라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문장 형태)”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사람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마음을 로봇공학의 관점에서 다룬다. 사람이 걸어가면서, 주변의 경치를 보고, 해야 할 일을 계획해 실행에 옮길 때, 어떻게 마음에서 논리, 추론, 판단 및 의사결정 과정이 일어나는가를 밝히는 것은, 달 표면에 착륙하거나 사람의 유전자 지도를 읽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복잡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마음의 기본 능력들이 로봇으로 구현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지적하면서, 인간이 가진 특별한 기능을 추론한다. 연결주의학파는 간단한 신경망으로 인간 지능을 설명한다. 마음은 수많은 신경망의 연결이며, 지능은 환경이 연결가중치를 조정해서 생긴다. 사람은 기본적이고 간단한 지식을 합성해 수, 언어, 법과 같은 복잡하고 어려운 특수한 경험 영역에 대한 모듈을 형성한다. 저자는 어려운 신경회로망의 원리와 알고리즘의 기본 가정을 쉬운 예를 들어 풀어 써, 마음이 작동하는 기본적인 방식을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다. 즉 사람이 생각하고, 말할 때에는 뇌에서 문법과 문장 체계를 효과적인 방식으로 연결해서 산출하는 것이다.

또 저자는 사람의 시각이 움직임을 분석해서 외부 물체를 정확하게 감지하는 놀라운 처리 능력을 가진 것이라는 점을 쉽게 설명하고 있다. 사람은 망막에 맺힌 물체의 형태가 보는 각도에 따라 각기 다름에도, 그 물체가 같다는 대상영속성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인공지능 공학자 데이비드 마르가 내린 시각에 대해 정의를 가장 적절하다고 본다. 마르는 시각처리 과정이란 자신이 본 외부 세계의 상을 자신에게 가장 유용한 정보로 재생산 하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한 예로 책을 보면 망막에는 사다리꼴 형태가 투사되지만, 우리는 책이 직사각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책을 들 때도 손가락을 직사각형으로 만들고, 책장도 직사각형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추론한다. 시각이 일단 망막 위에 상으로 맺힌 물체의 형태를 추론하면, 마음의 모든 부분이 그 발견을 활용한다.

핑커가 설명하는 신경회로망의 예에서 들고 있는 여러 문장의 생성과 이해과정을 읽다보면 노암 촘스키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힐 수 있다. 촘스키는 저명한 히브리어 학자였던 아버지로부터 언어학적 소양을 물려받고, 정치와 이데올로기 문제에 민감했던 어머니로부터는 정치적 성향을 물려받은 언어학자다. 촘스키는 전 세계에는 약 6 천여 개의 언어가 있지만, 언어가 공유하는 ‘보편 언어’가 사람의 유전자 속에 있기 때문에 어린이도 짧은 시간 내에 언어를 습득하게 된다고 했다.

재미난 것은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마인드』를 저술한 존 R. 설(Searle)의 ‘중국어 방’을 예로 든 논쟁이 잘 언급된 점이다.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방안에 있으며, 그 사람은 중국어와 다른 기호가 섞인 복잡하고 긴 지시 사항 목록을 가졌다. 그 남자는 중국어를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단지 기호를 조작하여 답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방에 있는 사람은 중국어를 알고 있을까. 물론 문밖에 있는 사람이 보기에 방안에 있는 사람은 중국어를 알고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이해는 기호 조작이나 연산과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존 설은 이 사고실험을 통해, ‘중국어 방’에 있는 남자에게 없는 것이, 기호와 기호가 의미하는 것의 관계인 지향성이라고 지적한다. 지향성, 의식, 그리고 그 밖의 마음 현상들은 정보처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제 인간 뇌의 실제적인 물리-화학적 특성들’에 의해 야기된다는 게 존 설의 결론이었다. 이 사고실험에 대해 100편 이상의 논문이 출판되었고, 인터넷에서도 격렬한 토론이 있었다. 이에 대해 ‘핑커’는 사람의 언어 규칙은 무의식적으로 빠르게 사용돼야 하며, 언어의 내용이 사용자의 믿음과 연결돼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학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어떤 단어의 현실적인 예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대상의 작동 원리가 무엇인가를 묻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이 책의 후반부는 지각, 생각, 감정, 사회성, 미술, 음악, 문학, 유머, 종교, 철학 등에 나타난 마음의 기능을 해부하고 있다. 아쉬운 점은 총 8장으로 이루어진 저서 중 7장 ‘가족의 소중함’, 8장 ‘인생의 의미’는 재미는 있으나 지나치게 주관적인 예화가 많아 인류학, 사회학 자료 박물관 같다는 느낌이 든다. 한 예를 들면 그는 “왜 인간이 예술을 추구 하는가”라는 이유로 예술은 미적 심리를 반영할 뿐 아니라, 지위 심리를 반영한다고 주장하면서, 예술의 가치는 대체로 미학과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대형 박물관을 관람하다 보면 한 번에 보기에는 너무 볼 것이 많고 다리가 아파서, 그만 중간에 놓인 푹신한 의자에 주저앉아 쉬고 만다. 이 책은 전반부와 후반부의 내용상 연결에도 무리가 있어, 두 권으로 분권을 해서 제목을 달리 하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있다. 책을 맺으며 저자는 우리가 잠시 자신의 마음 밖으로 걸어 나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계의 훌륭한 고안품이라는 점을 발견하기 희망한다.

『율리시즈』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블룸에게 일어난 약 19시간의 일을 800여 쪽에 25만여 단어로 묘사한 소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19시간(68,400초)동안 사람의 두뇌를 뇌영상으로 찍으면 그 분량이 얼마나 될까. 뇌영상 연구를 하는 경우 보통은 3초마다 머리 위에서 아래로 5mm 간격으로 20장을, 수십 분 동안 찍는다. 만약 19시간 동안 사람의 두뇌에서 일어난 생각과 느낌을 뇌영상으로 찍는다면, 해석해야 할 뇌영상의 분량은 매우 많다. 뇌영상 사진을 분석하는 경우, 찍는 동안 머리를 2mm만 움직여도 그 자료는 오차가 너무 커서 분석대상에서 제외된다.

이러한 여러 연구 제약 때문에 뇌영상 연구에서 발표되는 논문의 피험자의 수는 실제로는 십여 명 내외다. 그렇다면 수억의 인구가 느끼고 생각하는 ‘마음’을 과연 수십 명을 대상으로 한 뇌과학 연구 논문 수십 편에서 정리했다고, 일반화시킬 수 있을까. 물론 의공학이 나날이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지만, 단편적인 뇌과학 연구 결과를 지나치게 맹신하면 안 된다. 그만큼 사람의 마음이 작동하는 두뇌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복잡하고 놀라운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네 권의 뇌과학 책을 읽으며 생각해 봐야할 첫 번째는 진정한 의미의 “너 자신을 알라!”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지나는 사람에게 다음의 질문을 수없이 했다고 한다.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당대의 현인도 이 질문을 받으면,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무지함을 자각하라는 의미로, 그리스 델파이(Delphi)의 아폴론 신전에 새겨져 있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외쳤다. “너 자신을 알라!”의 현대적 뇌과학적 의미는 무엇일까.

두 번째는 “덕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행복한 결말에 도달할 수 있을까”이다. 다마지오는 『스피노자의 뇌』에서, 스피노자를 찾은 이유를 그의 저서 『에티카』에 나온 “덕의 일차적 기반은 자기 자신을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이며, 행복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란 구절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스피노자의 말이 종소리처럼 선명하게 울려 퍼진다는 느낌을 표현했다. 다마지오는 열정과 지혜를 추구하는 영적 삶을 통한 과학 지식과 심미적 경험이 행복한 결말에 이르는 한 가지 길이라고 제안했다. 뇌와 나는 포함 관계도 아니고, 교집합도 아니고, 등호가 성립하는 것도 아니며 유동적이다. 이제는 여러분이 이 네 권의 뇌과학 도서로 각자의 행복을 찾을 차례다.(한종혜/ 고려대·인지신경과학연구실)

08. 02.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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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2-09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쌩뚱맞은 말이겠지만 전통적인 사형방법이였던 단두(斷頭)는 그 시대때 결코 과학적인 근거나 이유가 없었겠구나란 생각을 해버렸답니다.

로쟈 2008-02-10 13:26   좋아요 0 | URL
자유연상도 뇌의 신비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