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상하이에서 서울(인천)로 돌아오는 기내에서 몇 종의 신문을 읽을 수 있었는데 마침 토요일이라 북리뷰들을 싣고 있었다. 두 가지 점이 놀라웠다. 하나는 지젝의 <전제주의가 어쨌다고?>(새물결, 2008)에 대한 기사가 전혀 없었다는 점과 다른 하나는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아케넷, 2008)가 번역됐다는 점. 후자의 경우엔 놀라움이라기보다는 반가움이라고 해야겠지만. 나머지 새로 나온 책들도 몇 권 눈길을 끌었지만 새로운 책들을 매주 나오는 것이니까 특별한 감흥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제임스의 <실용주의>와 함께 또 한권의 시리즈 책으로 눈길을 끈 건 루틀리지의 '크리티컬 씽커즈'의 하나로 나온 <포스트모더니즘을 구하라>(앨피, 2008).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가'로 아예 굳어버린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에 대한 '다시 읽기'이다. '실용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제목에서 '와'는 단지 이 두 권의 우연한 접속관계만을 지시할 뿐이다. 이 달에 내가 관심을 갖고 읽어볼 두 권의 책(그 '우연'이 만들어낼 수도 있을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다).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실용주의>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사가 눈에 띄지 않아서 한 칼럼을 대신 옮겨놓는다.

중앙일보(07. 12. 22) [분수대] 실용주의

실용주의(프래그머티즘)의 어원은 행동·실행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프라그마(pragma)’다. 그만큼 행동과 실천을 중시하는 철학이다. 유용성이 진리 판단의 기준이다. 지식도 인간에게 유용하게 쓰이기 위한 도구로 본다. 실용주의는 현대 미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미국이 내놓은 거의 유일한 철학 브랜드이고, 미국적 가치·프런티어 정신의 요체이기도 하다.

실용주의의 뿌리로는 19세기 말 공리주의가 꼽힌다. 당시 유럽 자본주의는 극심한 빈부격차, 노동운동에 직면했다. 부르주아에겐 사회주의에 끌리는 노동자 계층에 맞서는 새로운 이념이 필요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내세운 공리주의가 그 대안이 됐다. 실용주의는 이런 공리주의의 미국적 전개로 불린다. 당시 미국 역시 남북전쟁의 후유증으로 통합을 위한 지적 치유가 필요했다. 시기적으로도 독점 자본주의의 문턱에 접어들고 있었다.

187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는 지식인 살롱 ‘메타피지컬(형이상학) 클럽’이 문을 열었다. 기호학자 찰스 S 퍼스, 법학자 올리버 웬들 홈스,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 교육철학자 존 듀이 등 4명이 핵심 멤버였다. 클럽은 9개월 만에 문을 닫았지만 책 『메타피지컬 클럽』은 여기서 실용주의와 오늘의 미국이 탄생했다고 썼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상이 ‘저 멀리’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포크나 나이프, 마이크로 칩처럼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처하기 위해 고안한 도구라고 믿은 점”이다. 이들은 “사상의 생존은 그것의 불변성이 아니라 적응성에 달려 있다”며 “실용주의란 생각하는 방식에 관한 설명” “사람들의 신념이 쉽게 폭력으로 변질되지 않게 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말했다. 내용이라기보다 태도로서의 실용주의다.

철학자 탁석산은 한 강연에서 “민생을 우선시하는 정치적 용어로 오해받고 있지만 실용주의야말로 지난 1세기 동안 한국인이 택해 온 철학”이라고 주장했다. “산업화·민주화를 거치며 그때그때 어떤 것이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가를 선택하는 사상적 틀로 실용주의를 채택해, 시대에 필요한 과제를 해결해 왔다”는 설명이다.

새로 출범하는 이명박 정부가 ‘실용의 정부’를 내세우며 ‘실용’이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제 관심은 그저 정치적 차별화를 노린 수사로서의 실용주의가 아니다. 실용의 내용을 실용적으로 잘 채워, 실용주의의 실용성을 입증하는 일이다.(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해럴드경제(08. 02. 01) 리오타르사상 다시 읽기

포스트모더니즘을 꺼내드는 것은 철 지난 이야기일까. 혹자는 언제 포스트모더니즘이 제대로 논의된 적이 있느냐고 물을 수 있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특히 IMF라는 한국적 특수성 아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소개와 소멸은 너무도 신속하게 진행됐기 때문이다. 아전인수격, 코끼리 코만지기식 해석과 이해만이 한차례 유행처럼 불고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이먼 말파스의 ‘포스트모더니즘을 구하라’(윤동구 옮김,앨피)는 옮긴 이의 표현대로, 오랜기간 풍문으로만 전해지며 숱하게 오독된 포스트모더니즘의 태두 리오타르의 사상 전반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말하자면 리오타르 다시 읽기다. 저자는 무엇보다 리오타르가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 개념과 본질을 명확히 밝히고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복잡하고 시급한 문제들을 사유하는 틀로써 그의 사상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리오타르 오독의 핵심은 그가 ’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밝힌 "메타서사들에 대한 불신"이라고 포스트모던을 정의한 부분이다. 거대서사의 붕괴가 상실, 허무주의, 역사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돼왔기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을 제대로 읽는 단서를 리오타르가 붙인 부제에서 읽어낸다. ‘지식에 대한 보고서’라는 부제야말로 결정적 단서라는 것이다. 리오타르는 후기산업시대로 접어들면서 지식의 위상이 변화하고 있으며 이는 정보저장과 의사소통과정에서 나타난 변화들이 우리가 지식을 사용하고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방법을 변형시키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거대서사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리오타르는 지속적으로 역사를 사유하고 서술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리오타르는 특정한 방향을 조직하는 서사로 돌아가자고 제안하는 대신 서로 다른 목소리와 가능성을 출현시키는 서사와 양식의 무한한 출현을 꾀한다. 보편성, 합리성으로 불리는 역사적 사건들의 모순은 그 균열속에서 드러난다고 보는 것이다. 가령 아우슈비츠의 경우, 증거나 통계자료 등 지식의 규칙들 너머로 어떤 감정이 이 단어에 따라붙는데 이런 것들이 오늘날의 정치와 문화에 끼친 영향을 탐구하도록 요청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아우슈비츠를 변형시킴으로써 경험주의적 역사를 뒤엎는 하나의 기호가 된다고 본다.

여기에 창조적 예술가의 책무가 부각된다. 인간존재의 안정성에 대한 감각을 훼손시키는 다양한 표현방식을 통해 인식의 전복을 꾀하기때문이다. 리오타르는 변기와 같이 일상적으로사용되는 물품을 낯설고 불온한 어떤 것으로 변형시키는 현대작가 뒤샹의 방식에 주목한다. 해석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우리가 예술에 응답하도록 자극하기때문이다. 이 책은 숭고, 사건, 분쟁 등 리오타르 사상의 핵심개념이자 오해의 소지가 많았던 부분들을 명쾌하게 제시할 뿐만아니라 리오타르 논의가 어떻게 가지치기를 하고 있는지도 폭넓게 보여준다.(이윤미기자)

08. 02. 03.

 

 

 

 

P.S. 제임스의 <실용주의>와 함께 읽어볼 만한 책들은 <메타피지컬 클럽>을 비롯해 몇 권의 프래그머티즘 관련서이다(대부분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책들이다). 가장 대표적인 실용주의 철학자 듀이와 신실용주의의 주창자 로티를 듀엣을 다룬 이유선의 <듀이 & 로티>(김영사, 2006)가 입문서격으로는 좋겠다. 개인적으론 리쩌허우의 '실용이성'과도 연관해서 이 현대 미국철학과 중국철학의 접속점을 찾아보려고 한다.

 

 

 

 

리오타르의 책은 몇 종 출간됐지만 의외로 심심한 편이다. <포스트모던의 조건>이 두 가지 번역본으로 나왔었고 <지식인의 종언>(문예출판사, 1993)이 추가되지만 리오타르의 전모를 조감하기엔 턱없이 모자라다. 스튜어트 심의 <리오타르와 비인간>(이제이북스, 2003)은 심심한 책이었고, 그의 숭고론을 이해하기 위해선 <칸트의 숭고미에 대하여>(현대미학사, 2000)와 <숭고에 대하여>(문학과지성사, 2005)를 참조할 수 있지만 좀 '전문적'이다. 줄리언 페파니스의 <이질성의 철학>(시각과언어, 2000) 등 몇 권의 현대철학이나 포스트모더니즘 관련서에서 '개관'을 읽을 수 있는 게 거의 전부가 아닌가 싶다. <포스트모더니즘을 구하라> 역시 개관 범주에 속하지만 그래도 가장 미더운 분량이다...

P.S.2. <실용주의>의 구 번역이 있나 찾아보니 김용배 역의 <실용주의>(민중서관, 1956)가 나와 있다. 223쪽 분량. 이번에 나온 국역본은 383쪽 분량이다. 내가 아는 원저는 얇은 책이어서 예전 번역본과 얼추 분량이 맞는데, 새 국역본의 분량이 두툼해진 이유는 실물을 봐야 알 것 같다. 또 다른 번역으론 '윌리엄 젬즈'의 <프래그머티즘>(미네르바, 1971)도 눈에 띈다. 덧붙여 'Essays in Pragmatism'을 옮긴 이남표 역의 <프래그마티즘의 철학>(중앙문화사, 1962)도 출간됐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난주 한겨레21에서 강준만 교수의 칼럼을 옮겨놓는다. 며칠 눈감고 있어서 궁금하기도 했지만 속 편했던 '한국 시사'를 따라잡기 위해 언론 사이트들을 둘러보다가 읽게 된 글이다(http://h21.hani.co.kr/section-021128000/2008/01/021128000200801310696017.html). 역시나 뉴스거리들은 차고 넘치는 나라가 한국인 것 같고 다른 기사들까지 정리할 엄두도 나지 않아서(굳이 '정리'해야 할 이유도 없지만) 그냥 이 칼럼 정도만 '사회적 독서'에 올려놓는다(아직 알라딘에 퍼온 분들도 없고 해서). 돌아오는 기내에서 읽은 국내신문들에서 '영어 몰입'에 대한 유익한 비판칼럼들도 옮겨올 만하지만 좀 뜸을 들일 생각이다. '한국 시사'에 가장 강한 강준만의 칼럼은 역시나 대단히 한국적인 '댓글 문화'에 칼을 대고 있다. 우리의 '실생활'이기도 하므로 일독해봄 직하다. 개인적으로 '악플' 때문에 고생한 적은 없으나(비정규직 강사가 '유명세'까지 치른다면 너무 가혹한 일이다) 불미스런 기억들은 몇 되기에 나름으로 '실감'나는 기사이기도 하다.

한겨레21(08. 01. 31) 댓글 민주주의에 대한 착각

한국의 ‘댓글 문화’는 악명이 높다. 물론 ‘악플’ 때문이다. 악플이 범람하는 이유에 대해선 설이 분분하지만, 그것이 지극히 한국적 현상이라는 데엔 이견이 없다. 한국 대학의 한 외국인 교수는 한국의 ‘댓글 문화’는 서방 국가가 200년에 걸쳐 이룬 민주주의를 50년 만에 압축 도입하면서 계층·세력 간에 형성된 ‘뒤집기 문화’에서 연유한다며 ‘내 이름’으로 책임지는 문화를 가진 선진국에는 한국처럼 무분별한 댓글 문화는 없다고 비판했다.

소속 집단 중심의 연대 ‘마을 의식’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교수 박노자가 최근에 출간한 <박노자의 만감일기>에서 한국 특유의 ‘관계 문화’를 지목한 게 더 가슴에 와닿는다. 그는 가족이든 동창이든 친한 지인이든 정말 ‘관계’가 있는 사이라면 한국인만큼 잘해주는 사람은 없으며,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대면해서 이야기하는 경우라면 ‘상대방’이라는 ‘관계’가 성립되니까 속마음이야 어떻든 간에 일단 얌전한 척이라도 한다고 했다. 맞다. 누구든 동의할 수 있는 한국인의 유별난 특성이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밀물이 있으면 그만큼 썰물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특성은 완전한 타인들이 익명으로 서로 접촉하는 인터넷이라면 바로 정반대가 된다는 게 박노자의 분석이다. 그는 이런 성향을 ‘마을 의식’으로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기 마을 안에서는 예의범절을 다 챙기지만, 바깥에 나가면 속을 풀대로 푸는 전근대적 ‘소속 소집단 중심의 사회적 연대’인 셈이다. 글쎄, 나 같은 사람들은 ‘민족주의’ 등의 거대 담론들을 자꾸 문제 삼지만,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범주는 사실 무슨 ‘민족’보다도 이 ‘마을’(가족, 동창 집단, 친구 등 가까운 사람들)인 듯하다.”

골수 악플러들이 일상에서는 자기 주장이 강하지 않고 소심한 편이라는 조사 결과는 이 분석의 설득력을 높여준다. 신촌세브란스병원 정신과 교수 남궁기는 “상사의 불합리한 주문에는 순응하는 듯하다가 자기보다 힘이 약한 후배의 말에는 버럭 화를 내는 사람처럼, 특정 환경에서 평균 이상으로 공격성을 표출하는 사람은 ‘악플’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고 했다. 이 또한 악플이 현실의 결핍에 대한 분풀이 또는 보상심리의 산물이라는 걸 말해준다.

박노자가 지적한 ‘마을 의식’은 댓글 문화뿐만 아니라 한국 정치의 작동 방식도 설명해준다. 왜 한국 정당들의 수명은 포장마차 수명보다 짧은가? 왜 한국 정치인들은 자주 철새떼나 들쥐떼가 되는가? 왜 선량한 보통 사람들은 정치 참여만 했다 하면 무조건적 열성 지지자로 변하며, 왜 또 그들 중 일부는 반대파 처단에 앞장서는 홍위병 흉내를 내지 못해 안달하는가? 이 물음들에는 ‘마을 의식’이 좋은 답이 될 것 같다.

소설가 조선희가 수년 전 ‘악취 진동하는 사이버 토론장’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온라인 공간이 “한국 정치의 드잡이 난투극을 그대로 닮아가면서 토론 문화의 첨단이 아니라 게토가 되어버렸으며, 오히려 오프라인 시절의 토론 수업 교양 과정을 훌쩍 월반해 최소한 게임의 룰조차 실종된 흑색선전과 편가르기와 극단적 주의·주장의 거점이 되어버”렸다고 개탄한 것도 바로 그런 ‘마을 의식’에 대한 고발이 아니고 무엇이랴. 조선희는 “‘욕설·비속어·인신공격’ 글이 횡행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수질 관리를 하든가, 게시판이나 댓글 공간을 관리 가능한 만큼 줄이던가, 그것이 아니라면 쌍방향 소통의 대의를 당분간 접고 온라인 토론 공간을 폐쇄하는 고육지책이 필요할는지 모른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그 어느 것 하나도 이뤄지지 않았다.

‘첨단’ 인터넷에 주눅들다
왜 그럴까? 왜 우리는 악플에 너그러운가? 이 물음에는 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가 답을 제시한 바 있다. 그는 댓글이 특정 여론의 움직임을 읽게 하는 지표 구실을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합리와 이성, 절도가 없는 댓글의 폐해는 정도가 지나쳐 건전한 여론 형성 과정을 망가뜨리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인터넷 강박증에 눌려버린 언론들은 댓글이 불러올 수 있는 민주주의 파괴 현상에 대한 성찰이 부족했고, 애써 눈을 돌리기도 했다. 세계적인 권위지라는 미국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의 인터넷판은 현재 기사에 대한 댓글 제도가 없다. 한때 기사 댓글을 운영했지만 쓰레기 글들이 너무 많이 올라와 명예훼손이나 프라이버시 침해와 같은 법적인 문제가 제기되자 폐지했다. 절제가 없는 의견은 시민 여론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 기사 댓글 폐지의 이유이다. …언론은 댓글 민주주의에 대한 착각과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사 댓글을 과감히 폐지하고 제대로 된 시민의 추임새를 들을 수 있는 토론 광장을 활성화하자.”

언론의 ‘인터넷 강박증’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터넷에 대해 주눅이 들어 있는 ‘인터넷 콤플렉스’라고 해도 좋겠다. 텔레비전을 시청하지 않는다고 해서 ‘텔레비전 맹(盲)’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오히려 수준이 높다고 본다. 그러나 인터넷을 하지 않으면 ‘인터넷 맹’이라고 한다. 시대에 뒤떨어진 부적응자로 본다. 인터넷은 첨단을 상징한다. 모두 다 주눅이 들어 있다. 어느 정도인가? 명예훼손이나 프라이버시 침해와 같은 법적인 문제조차 눌러버릴 정도다.

최근엔 좀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기도 하지만, 그간 언론은 악플 피해자들이 법에 호소하는 방법도 있다고 말은 하면서도 “악플의 상처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둔감해지는 것이다”라는 식의 조언을 많이 해왔다. “피해를 당하면 극히 일부 미성숙한 아이나 열등한 성인의 행동으로 치부하고 스스로를 달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라는 조언이 제시되기도 했다. 이런 기사엔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악플을 다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객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신경정신과 의사의 조언까지 곁들여진다.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한국에선 어느 영역에서건 이름깨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자질은 ‘악플을 참아내는 법’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왜 그럴까? 무언가 또 다른 이유도 있는 게 아닐까? 문화평론가 강명석은 언론은 때론 악플러를 비난하지만, 대부분은 실질적으로 공생관계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터넷에서 악플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그것이 개개인의 윤리적·도덕적 판단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해 수익을 얻는 언론매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들을 통해 방문자를 끌어들이는 포털 사이트의 문제와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즉, 악플의 문제는 단지 개개인의 인격적인 문제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다. 이는 어떤 방법으로든 ‘주목’을 받아야 살아남는 포털 사이트와 그 속에서 활동하는 언론매체가 얽혀 있는 산업적인 문제다. 이것이 단지 몇몇 비정상적인 악플러들만을 비난할 수 있는 문제일까.”

인터넷 강박증, 인터넷 콤플렉스
한국을 가리켜 ‘인터넷 강국’이라고 한다. 껍데기만 그럴 뿐이지만, 그 껍데기조차 그런 ‘인터넷 콤플렉스’와 ‘인터넷 상업주의’를 먹고 자란 것이다. 웬만한 나라에선 법적인 문제 때문에 불가능했을 일이 한국에선 마구잡이로 저질러져도 아무런 법적 제재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찬사를 받기까지 했다. 한국 인터넷의 ‘도덕적 해이’에 대한 관용은 ‘새것’과 ‘첨단’과 ‘세계 최고’에 걸신 들린 한국인들의 굶주림과 무관치 않다. 여기에 자유주의적 착각과 진보주의적 착각이 가세했다.

자유주의적 착각은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했던 과거에 대한 반작용에서 비롯된다. 악플의 폐해가 아무리 심각하다 해도 그걸 통제하는 것보다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에서 얻을 게 더 많다는 논리다. 권력감시, 내부고발, 창의력 발휘 등의 장점이 열거된다. 대놓고 말은 않지만, 이게 명예훼손이나 프라이버시 침해와 같은 문제보다 더 중요하다는 식이다. ‘흑색선전과 편가르기와 극단적 주의·주장’의 사회적 비용은 잘 거론되지 않는다. 거론된다 해도 ‘분열과 혼란은 민주주의 꽃’이라는 원론이 답으로 준비돼 있다.

내가 궁금한 건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내부고발자를 보호하는 법을 제대로 만들고, 모든 공적 영역을 투명하게 만드는 법과 규칙을 완비하는 노력이 기울여지지 않는 가운데, 왜 그런 기능을 인터넷으로 대체하려는가 하는 점이다. 아니 인터넷을 그런 노력에 이용해야 할 텐데 과연 그게 이루어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진보주의적 착각은 기존 거대 매체를 보수 세력이 사실상 장악했던 과거와 비교해 인터넷을 진보세력의 대안매체로 보는 시각에서 비롯된다. 일종의 이념적 ‘편가르기’ 논리가 인터넷에 적용된 셈이다. 실제로 ‘인터넷 실명제’만 하더라도 찬성하는 측은 대부분 보수파였고, 반대하는 측은 대부분 진보파였다.

초기엔 인터넷이 진보세력의 대안매체였을지 모르지만, 인터넷이 점점 더 돈이 되는 산업으로 커가면서 이제 그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옛날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특히 노무현 정권이 보수 신문에 대한 견제 매체로 인터넷을 택해 큰 공을 들이면서 포털과 밀월 관계를 누린 건 정권 교체와 함께 부메랑이자 자충수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럼에도 습관과 관성 때문인지 아직도 인터넷에 대한 진보주의적 착각이 횡행하고 있다.



‘배설물’ 염두에 두고 자기 검열하는 지식인들
지난 2006년 8월 전 미국 부통령 앨 고어는 영국 에든버러 국제TV 페스티벌에서 행한 연설에서 “권력과 돈으로 인한 미디어 통제 때문에 민주주의가 큰 위협을 받고 있으며 해결책은 인터넷뿐입니다”라고 주장했다. 반의 반쪽짜리 진실일 뿐이다. 기존 미디어 재벌들이 앞 다투어 인터넷 매체들을 사냥해온 건 보지도 못했나? 언제건 권력과 돈이 없는 사람이나 세력이 쉽게 생산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인터넷의 매력은 여전하지만, ‘쏠림’ 현상을 그 속성으로 삼는 인터넷 공간에서 그 가능성의 실질적 가치는 상징적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터넷을 포기하자는 것도 아니고 강력 통제하자는 것도 아니다. 거대 담론적 가치를 앞세워 인터넷의 ‘표현의 자유’를 무작정 예찬해온 자유주의·진보세력의 자세가 과연 옳은 것이었는지 한 번 더 생각해보자는 뜻이다. 예컨대, 악플의 ‘표현의 자유’엔 너그러우면서 그로 인해 박탈되는 다른 ‘표현의 자유’엔 무관심했던 건 아닌가? 악플이 지식인의 자기 검열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아 오히려 공론을 위협하는 결과를 낳은 건 아닌가?

윤태진 연세대 영상대학원 교수는 “지인 한 명이 칼럼을 쓴 뒤 느꼈던 참담함을 사석에서 토로한 적이 있었다. 인터넷 게시판의 악의적인 댓글들 때문이었다. 그는 왜 정당하지 않은 비난과 욕을 감내하면서까지 자기가 글을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푸념했다. 그냥 무시하라고 위로했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그 불쾌감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공감하고 칭찬하리라 기대하며 글을 싣는 이는 없게 마련이다. 하지만 욕설과 비꼼, 비방과 인격적 모독으로 가득 찬 댓글은 글 쓰는 이들 대부분의 힘을 쏙 빠지게 한다”고 했다.

그래도 힘을 쏙 빠지게 하는 건 다행이다. 아예 글을 안 쓰려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글을 쓰더라도 논쟁적인 글은 피하려고 한다. 실제로 어느 언론매체에도 기사화되진 않지만, 시사적인 글을 쓰는 많은 지식인들이 인터넷에서 튀기는 ‘배설물’ 세례를 염두에 두고 자기 검열을 하고 있다. 물론 그런 ‘배설물’에 전혀 개의치 않고 자기의 소신을 더 세게 밀고 나가는 지식인도 있지만, 그것도 문제다. 아주 독하거나 상처받지 않는 기계적 인간들만 제 목소리를 내고, 나머지 대다수가 ‘배설물’을 피하려는 글만 쓰려고 하는 공공 커뮤니케이션 시장이 건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악플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건, 한국 사회에 만연한 ‘인터넷 콤플렉스’만큼은 다시 생각해보면 좋겠다.

‘내 이름’으로 책임져도 될 일
이 글의 첫머리에 소개한, ‘내 이름’으로 책임지는 문화를 가진 선진국에는 한국처럼 무분별한 댓글 문화는 없다는 비판엔 불편하게 여겨지는 점이 있다. ‘내 이름’으로 책임지는 문화를 가질 수 없었던 독재정권 시절의 아픈 과거가 떠오르며, 아직 그 상흔이 다 치유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이름’으로 책임져도 될 만한 일까지 자꾸 역사적 상흔을 앞세우거나,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익명성의 예외적인 사회적 가치를 앞세워, 계속 익명성의 보호막에 안주케 하는 건 우리 모두를 위해 이제 더 이상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기존 댓글 문화의 장점도 생각하는 동시에 그 사회적 기회비용에도 눈을 돌려보자.

08. 02. 03.

P.S. <박노자의 만감일기>에 대한 표정훈의 리뷰는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32 참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지난주 한겨레21에서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옮겨놓는다(http://h21.hani.co.kr/section-021162000/2008/01/021162000200801310696099.html). 지난 며칠간 중국 여행을 다녀온 김에 몇 마디 이야기를 덧붙이려고도 했지만 개인적으론 최악의 항공기 지연 운항으로 어제 오후에 도착했어야 할 일정이 9시간 가까이 지체되는 바람에 생각을 접었다(다시 기운을 차리게 되면 적어놓을지도 모르겠다). 집에 돌아와 씻고 몇몇 메일을 확인한 시간이 이렇게 남들 다 자는 시간이 돼 버렸다. 잔뜩 피곤하던 차였지만 막상 메일들을 확인하는 사이에 잠이 달아나버렸고 막간에 밀린 일들을 해놓도록 한다. 사실 이번주 기사는 월요일에 가판에서 잠깐 제목만 확인했는데, ''논어'를 읽었다는 자 누구인가' 같은 '센' 제목은 내가 붙이는 게 아니라 담당 편집자가 붙인다. 그냥 내 얘기는 오랜만에 <논어> 번역본들을 뒤적이다 보니 해석과 주석이 상충되는 곳들이 많더라는 것이다.

한겨레(08. 01. 31) ‘논어’를 읽었다는 자 누구인가

“논어를 뒤집는다. 공자를 바로 본다, 다시 본다”라는 문구가 눈에 띄어 집어든 책은 박민영의 <논어는 진보다>(포럼 펴냄)이다. 일반인들이 공자에 대해 알고 있는 상식(혹은 편견)을 바로잡고자 하는 게 저자의 의도인데, 제목으로 미루어 그가 문제 삼는 건 공자와 논어를 ‘보수’로 보는 태도다. 비록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주장에 박수친 바 없으나, 크게 보아 나 또한 그런 태도에서 예외가 아니었으니 정확히 책이 목표로 하는 독자이겠다. ‘공자님 말씀’을 모아놓은 고전이니 기꺼이 여러 종의 번역본을 모셔두긴 하지만 진지하게 읽어볼 생각은 하지 못한 독자 말이다.

사실 유교 문화권에서 공자와 논어가 가진 영향력은 기독교 문화권에서 성경이 가진 영향력에 비견될 만큼 크고 방대한 것이다. <논어금독>을 펴낸 리쩌허우에 따르면, 서양문명과 다르게 중국에는 진정한 종교전쟁이 없었던 것도 유학의 포용성과 큰 관계가 있으니 그 영향은 ‘말씀’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유가와 법가가 혼용된 윤리적·정치적 규범 혹은 법칙이 중국 역사 2천 년을 지배해왔다고도 말해지는 것이니 자세를 바로 하고 좀 진지하게 ‘선생님’의 말씀에 귀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예의를 갖춰서 논어를 대할 때, 두 가지 점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먼저, 리쩌허우의 지적대로 기원전 500여 년에 공자가 한 말을 기록한 내용(말하자면 어록)의 대부분을 오늘날에도 읽고 이해할 수 있다는 점. 물론 한문에 대한 기본 지식을 갖고 있는 독자의 경우지만 한국인이 중세 국어를 더듬더듬 읽을 수밖에 없는 것과 비교하면 분명 놀라운 일이다. 저자에 따르면 논어에 쓰인 한문은 “약간의 한문학적 지식만 있으면 누구나 해석할 수 있을 만큼 쉽다”.

하지만 그렇듯 평이하게 읽힘에도 논어에 대한 번역과 주석은 각양각색이며 놀랍게도 심지어는 모순적이기까지 하다. 역시나 리쩌허우에 따르면 “고대문자는 간단하면서도 포괄적이어서 오늘날의 언어로 정확하고 분명하게 바꾸어야만 잘 파악할 수 있다”. 문제는 ‘정확하고 분명하게’ 바꾸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는 데 있다. 논어의 이름난 주석자만 하더라도 2천 명이 넘는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예컨대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란 첫 구절만 하더라도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익힌다는 의미인지, '시’(時)의 의미가 ‘때에 따라’인지 ‘때때로’인지 아니면 ‘계속’인지 저마다 의견들이 다른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구절은 “(仁을) 배워서 때에 따라 (禮를) 익히니”로 해석되어야 한다. ‘위정’편 16장에 대한 해석은 더 현격한 차이를 드러낸다. ‘공호이단, 사해야이’(攻乎異端, 斯害也已)란 구절을 “이단을 전공하는 것은 해로울 뿐이다”로 읽는 게 전통적인 해석이었지만 저자는 “이단을 공격하는 것은 그 자체가 해로운 것이다”로 새긴다. 이 모두가 가능하다고 친절하게 소개해주는 번역서도 있지만 전혀 상반되는 해석이 양립 가능하다면 공자가 한 입으로 두말한 것이 되는가?

저자는 “공자의 본래 문제의식이 무엇이었는지, 공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직접 원문을 읽어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동시에 “논어를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한문학적 지식보다는 오히려 광범위한 인문학적 지식과 철학적 사고능력”이라고 덧붙인다. 사실 논어에 대한 허다한 번역과 주석들이 모두 원문 읽기에서 나온 것이니 ‘원문 읽기’만으로 그간의 오해와 편견이 모두 불식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리쩌허우조차도 모호한 대목들은 그대로 놔두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송나라의 유학자 정이(程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논어를 읽는데, 논어를 읽기 전에도 이런 사람이고 논어를 읽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이런 사람이라면 읽지 않은 것과 같다.” 우리의 문제는 이렇다. “논어를 이렇게도 읽을 수 있고, 저렇게도 읽을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읽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08. 02. 03.

P.S. 상하이 푸동국제공항에서 장시간 대기하고 있어야 했는지라 구내서점에도 둘러보았는데, 자세히 둘러볼 만한 면적도 아니었지만 기대했던 '중국 고전들'이 눈에 띄지 않아 실망스러웠다. <삼국지>, <서유기> 등의 제목이 보이긴 했으나 나는 <논어>나 <도덕경> 정도는 진열돼 있을 줄 알았다. 중국어-일어 대역/주석본 <논어> 한권이 꽂혀 있는 게 전부였다. 서울의 10배 정도 된다는 상하이의 크기가 갑자기 작아보였다.

돈도 별로 없었기에 나는 남송의 수도였던 항저우의 운치있는 정경들을 담은 사진엽서와 함께 (직원이 잔돈이 없다고 해서) 상하이의 '새 건축물'들을 담은 사진엽서를 구입했다. 중국의 두 얼굴처럼 여겨진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주니다 2008-02-03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장 9시간의 연착은 중국에 내렸다는 폭설 때문이었나요? 푸동 공항 면세점은 별로 구경할 것도 없던데 시간 보내시느라 고생하셨겠습니다. 하긴 한 두시간도 아니니 면세점 구경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겠지만서도...시사인을 보니 2008년 출간 예정 도서목록에 선생님 이름도 있더군요. 언제쯤 나올 예정인지요? 이래저래 바쁜 한해가 되시겠습니다.
새해 인사를 한번 더 해야겠군요. 설 연휴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로쟈 2008-02-03 19:55   좋아요 0 | URL
상해쪽은 '폭설'이라기보다는 그냥 눈이 좀 쌓인 편 같은데 워낙에 눈이 잘 내리지 않는 지역이라네요. 공항이나 도로 모두 눈에 취약한 것 같았습니다. 덕분에 여행의 기억은 대합실 바닥에서 다 증발해버렸지요.^^; 책은 이것저것 내야 하는 것들이 많은데 정신없이 또 일년이 지나가게 생겼습니다... 고향엔 가시는 거지요?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소원 성취하시길.^^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라서 오늘 구입한 책은 가야트리 스피박의 신간 <경계선 넘기 - 새로운 문학연구의 모색>(인간사랑, 2008)이다. 국역본의 제목은 좀 '의역'돼 있는 것인데, 원제는 <한 분과학문의 죽음>(2003)이다. 본문의 첫문장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년 후인 1992년부터 비교문학은 새로운 학문으로 거듭나기 위해 애쓰고 있다."(31쪽)인 것으로 미루어 그냥 <비교문학의 죽음>이란 제목을 붙여도 좋았겠다. 그래서 문득 떠오른 것이 20년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에 들은 비교문학 강의이고 그때 읽은 몇 권의 책이다(지금은 대부분 절판됐다). 최근의 비교문학 교재로 이미지가 뜨는 책들 몇 권을 나열해본다.

 

 

 

 

스피박의 책은 원서의 경우 100여쪽 남짓의 분량에 불과한데 평은 후한 편이다.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의 『경계선 넘기-새로운 문학연구의 모색』은 문학연구의 미래뿐만 아니라 그 과거를 읽는 새로운 방법을 그려낸다. 이 책은 눈부신 시야와 비전을 제시하고, 문학적 지형을 바꾸어 놓으며, 역동적이고, 명료하며, 훌륭하다. '죽음'이 이러한 영감을 제공해 준 적은 드물다."고 주디스 버틀러는 적었고,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도 "[스피박]은 '지구화'에 반대하는 '전지구적' 관점에 토대를 둔 매혹적인 지적 프로젝트의 윤곽을 그려낸다. 필독서이다."라고 거들었다.

그래서 집어들 수밖에 없었는데, 특이한 건 국역본의 역자들이다. '문화이론연구회 옮김'이라고 돼 있는데 역자 소개를 보면 무려 8명이 번역에 참여했다. 원저의 분량을 고려하면 1인당 10-20쪽 정도를 옮겼다는 것인가? 세 장으로 구성돼 있는 만큼 얇은 책이지만 3명의 역자가 공역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8명? 기이하게 보인다.

'역자서문'은 이런 문장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이 책을 번역하는 작업이 쉽지 않았다. 역자들은 지적 한계를 실감했다. 혹시 있을 수 없는 오역은 전적으로 역자들의 책임이다. 스피박의 사유체계와 통찰력과 한계가 한국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되길 바란다." 솔직한 것인지, 겸양인 것인지는 읽어봐야 알겠다...

08. 01. 2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수신문에서 서평 특집호를 냈는데(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502) '내가 생각하는 서평'이란 꼭지에 몇 마디 보탠 글을 옮겨놓는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506). 국내에서도 전문 서평지가 꾸려진다면 출판문화에 좋은 자극이 되지 않을까 싶다.  

교수신문(08. 01. 29) '소개’와 ‘비평’ 사이에 놓인 판관의 칼

바늘 가는 데 실 간다고 책이 있는 곳에 서평이 따라붙는 것은 자연스럽다. 서평은 말 그대로 책의 됨됨이에 대한 평이니까 책이란 물건이 존재하는 이상 서평은 불가피하다. 책에 대한 평이라고 했지만 이때 評은 좋고 나쁨 따위를 평가하는 말이다.그럼으로써 값을 매기는 일이다. 책도 모양새를 갖추고 있는 것이니까 풀어서 말하자면 한 책에 대해 품평한다는 것은 그것이 어원적 의미 그대로 ‘꼴값’을 하고 있는지를 판별하는 것이다. 그러한 판별을 위해서 보통은 책을 한 번 읽고 마는 게 아니라 한 번 더 읽어야 한다. 적어도 넘겨보기라도 해야 한다. 그래서 리뷰(re-view)다.

이 ‘리뷰’란 말 자체에 ‘비평’이란 뜻도 포함돼 있지만 나는 서평의 존재론적 위치는 책에 대한 ‘소개’와 ‘비평’ 사이가 아닌가 싶다. ‘소개’의 대표적인 유형은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보도자료’와 언론의 ‘신간소개’일 것이다. 그것은 주로 어떤 책의 ‘존재’에 대해서 말한다. 그래서 “어, 이런 책이 나왔네!”란 반응을 유도한다. 반면에 ‘서평’은 그것이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인가를 식별해줌으로써 아직 책을 접하지 못한 독자들의 선택에 도움을 준다. 그것은 일종의 길잡이다. “이건 읽어봐야겠군.”이라거나 “이건 안 읽어도 되겠어.”가 서평이 염두에 두는 반응이다. 그에 대해 ‘비평’은 책을 이미 읽은 독자들을 향하여 한 번 더 읽으라고 독려한다. 그것은 독자가 놓치거나 넘겨짚은 대목들을 짚어줌으로써 “내가 이 책 읽은 거 맞아?”라는 자성을 촉구한다.

물론 소개-서평-비평은 일종의 스펙트럼을 형성하는 것이어서 경계를 확정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책에 관한 담화와 담론들은 이 세 요소들을 약간씩이라도 모두 포함하기 마련이다. 다만 분류는 그 비율과 방점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다. 서평의 존재론적 위치가 그렇게 가늠될 수 있다면 서평의 바람직한 역할이란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적어도 일반론적인 차원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보다 세분해서 서평의 유형학을 가정할 경우에는 초점이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서평의 유형은 다양한 기준에 따라 나뉠 수 있는데, 먼저 그 서평의 주체에 따라서 일반독자, 전문독자, 전문가 서평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일반독자란 자신의 관심과 흥미에 따라 책을 사서 읽게 되는 보통의 독자를 가리키며, 전문독자는 주로 출판평론가나 도서평론가란 직함을 달고 여러 매체에 정기적으로 북리뷰나 칼럼을 게재하는 이들이나 언론의 출판면 담당기자들이 지목될 수 있다. 그리고 전문가란 서평을 정기적으로 담당하지는 않지만 해당 분야의 전공자로서 식견과 조예를 갖고 있는 이들을 말한다. 물론 이러한 독자 유형 또한 중복 가능하다. 한 사람이 모든 분야의 전문가인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서평의 주체가 이렇게 구분될 수 있다면 바람직한 것은 이들이 유기적인 분업체계를 구축하는 것이겠다.

두 번째로, 서평의 또 다른 분류기준은 분량이다. 원고지 매수로 따지자면 5매, 10매, 20매,  30매 등의 유형학이 가능하다. 분량의 제한이 없는 자유서평이 아닌 이상 대개의 ‘공식적인’ 서평들은 분량의 제한을 요구받으며 이러한 분량 자체가 서평의 내용을 상당 부분 한정한다. 어느 정도로 자세하게 평하느냐는 전적으로 이 분량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물론 서평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비평만큼은 아니더라도 보다 많은 분량이 확보될 필요가 있다. 주요한 학술서나 교양서를 평하면서 원고지 10매 분량도 할애하지 않는 것은 ‘서평 문화’ 자체의 피상성을 양산할 따름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서평을 다루는 매체 또한 서평의 분류기준이다. 이것은 서평의 주체와도 얼추 상응하는데, 주로 일반독자들의 서평이 올라오는 온라인서점이나 개인 블로그, 그리고 전문독자들의 리뷰들이 게재되는 일간지, 주간지 등의 언론매체, 끝으로 전공자들의 학술서평이 실리는 학술지 등이 서평의 유형학을 구성한다. 여기서도 물론 바람직한 것은 각 매체별 서평들의 역할 분담이고 특화이다. 매체에 따라서 요구되는 서평의 성격과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 거론할 수 있는 것이 그 성격과 내용에 따른 분류이다. 서평은 대상도서의 학술적, 사회적 의의를 거론할 수도 있고, 도서 상태의 문제점과 오류들에 대한 지적으로 채워질 수도 있다. 그것은 곧 책에 대한 권유/만류와도 맞물리는데, ‘반드시 읽어보시길’ 권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낭비하지 마시길’이라고 충고를 던질 수도 있다. 물론 그 두 가지 양 극단 사이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며 독자의 관점에서 볼 때 바람직한 서평이란 그러한 권유/충고가 요긴하게 사용되는 것이다.

몇 가지 기준에 따라 나열한 대로 우리의 ‘서평 문화’는 다양한 층위의 서평들로 구성되며 따라서 일률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사회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언론 서평의 경우에 신간들 위주의 표면적인 소개보다는 일정 분량 이상이 전제된 깊이 있는 리뷰들이 보다 많이 다뤄지기를 기대해볼 수는 있겠다. 이런 정도의 소감밖에 피력할 수 없는 것은 ‘주요 서평자’로 거명됐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로 해온 일이 본격적인 서평이라기보다는 주변적인 서평 혹은 책에 대한 수다 정도이기 때문이다.

책을 좋아하다 보니 책에 관한 잡다한 이야기들을 모아놓거나 늘어놓는 일을 즐겨 하게 됐고 덕분에 본의 아니게 얻은 직함이 ‘인터넷 서평꾼’에다 ‘북리뷰어’다. 자임한 직함은 아니기에 정확한 규정 근거는 모르겠지만 ‘서평꾼’은 아무래도 ‘서평가’나 ‘서평자’와는 급이 좀 다르다(무슨 학술서평에 ‘서평꾼’이 등장할 리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하는 일도 약간 좀스럽다. 가령 나는 이런 지적들을 늘어놓는다.



국내에 다수의 책이 번역 소개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대표작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의 한 대목이다. “모든 이데올로기적인 보편성은, 그 통일성을 깨트리며 그 허위성을 드러내는 어떤 특별한 경우를 필연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이상(理想), 또는 ‘허구’이다.” 이 경우 나의 의문은 “모든 이데올로기는 이상 또는 허구이다” 같은 ‘이상한’ 주장이 어떻게 나오는가이다. 저자가 멍청이라서? 대개 그런 경우는 없다. 문제는 역자 혹은 편집자의 부주의다. ‘이상(理想)’으로 번역돼 있는 것은 실상 영어의 ‘so far as’(~인 한에서)를 옮긴 것이다.

짐작에, “모든 이데올로기는 어떤 특별한 경우를 포함하고 있는 이상, ‘허구’이다”라는 번역문에 편집자가 부적절한 개입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다음 문단에 ‘시장의 이상(理想)’(이때는 ‘ideal’을 번역한 ‘이상’이다)이란 말이 나오는 것을 보아서도 그렇다. 알고 보면 정상 참작이 가능한 실수이긴 하지만 순진한 독자들을 골탕 먹이거나 자학하게 만드는 ‘오류’이다.



같은 저자의 『향락의 전이』(인간사랑)도 마찬가지다. 국역본은 초판의 오역들을 교정한 개역판까지 나와 있지만 대중문화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영화감독과 제목명의 오역을 어느 정도 바로잡았을 뿐 근본적인 교정은 이뤄지지 않았다. 영화명과 주인공에 대해서도 ‘시라노’를 여전히 ‘키라노’로, 그의 여인 ‘록산느’는 ‘로잔느’라고 옮기고, 유고의 영화감독 ‘쿠스투리차’는 ‘쿤스투리카’로 개명하고 거기에 ‘Kunsturica’라고 엉뚱하게 병기까지 해놓았다.

이런 지적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데, 정작 문제적인 것은 서평이다. 허다한 오류와 오역이 속출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대해서 한 일간지 서평은 “지젝은 라캉 정신분석학 이론에 충실하면서도 독창적이고 ‘재미있게’ 글을 쓰는 사람으로 이미 국내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독자들은 지젝의 이 책을 통해 인간의 비밀인 향유의 세계를 탐험하는 모험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해놓았다(서평자들이 자주 잊어먹는 것은 서평의 대상이 원저가 아니라 번역서라는 사실이다). 물론 지면의 성격과 분량의 제약이 서평의 일차적인 한계로 작용한다.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읽을 만한 책을 판별해내고 엉터리 책들을 감시하는 서평의 고유한 자기 역할을 망각하지 않는 것이다. 서평을 통한 학문적 교류에 이르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 

08. 01. 29.

P.S. 나대로의 서평 사례로 인용한 대목은 '오역의 모험'(http://blog.aladin.co.kr/mramor/429942)에서 발췌한 것이다.


댓글(6) 먼댓글(1)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잃어버린 학술서평을 찾아서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1-09 18:41 
    학술서평의 문제점을 짚은 대학신문의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지난주에 전화로 잠깐 기자의 질문에 답한 적이 있다. 출판대국의 면모에 걸맞은 (학술)서평문화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지적인데, 하루아침에 달라지긴 어려운 것이 아닐까(일단은 '학술'이 먼저 돼야 학술서평도 뒤를 따를 것이고). 그것도 '문화'라면 매일매일의 한 걸음이 그래도 먼훗날 어떤 궤적을 보여줄지도 모를 따름...    대학신문(09. 11. 09) 잃어버린
 
 
파란여우 2008-01-29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우리는 갈고 닦으면서 가야하는거겠죠?
전 이걸 '글의 길로 가는 차력'이라고 부릅니다.

로쟈 2008-01-29 21:38   좋아요 0 | URL
차력도장 가는 길이기도 하네요.^^

비로그인 2008-01-29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향락의 전이. 저도 개정판을 구입하긴 했는데. 늘 찜찜하네요... 조금만 막히면 불안해서 검색하곤 경악하고- 고쳐읽기를 계속하게 된답니다 :)

로쟈 2008-01-30 00:21   좋아요 0 | URL
우리말로 번역해서 읽어야 하는 번역서죠...

노자읽기 2008-01-30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의 문제는 기억의 패턴이 거짓말을 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사실 어떤 책을 보더라도, 거기서 자신이 확인할 수 있은 사실, 알 고 있었던 것 만을 본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새로운 지식을 늘인다거나 새로운 견해를 배운다는 것을 있을 수 없을 테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 만큼 새로운 지식이나, 견해가 이해받기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로쟈 2008-02-03 11:41   좋아요 0 | URL
말씀대로 관성적인 읽기와 이해도 한가지 변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