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에는 아직 뜨지 않고 있는 신간 중에 린 마굴리스의 <공생자 행성>(사이언스북스, 2007)이 있다. 마굴리스는 '공생 진화론'을 주창한 과학자이며 국내에도 몇 권의 책이 소개돼 있다. 아들인 도리언 세이건과의 공저 <생명이란 무엇인가>(지호, 1999), <섹스란 무엇인가>(지호, 1999) 등이 대표적이다(그녀의 전 남편이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었다).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8. 02. 02) 지구 생명 과거와 현재그 안에 공생이 있다

‘공생’ 하면 흔히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를 떠올린다. 하지만 공생은 지구의 모든 생명을 하나로 연결하고 있는 ‘고리’다. 공생이 없었다면 생명의 진화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었다.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첫번째 부인으로 알려진 린 마굴리스 암허스트대 교수는 이 같은 주장을 ‘공생 진화론’을 통해 전개한다. ‘공생 진화론’은 세포핵을 가진 진핵세포가 세포핵이나 미토콘드리아 또는 엽록체와 비슷한 고대세균들이 공생하면서 탄생했다는 이론이다. 장기적인 공생이 처음으로 세포핵을 지닌 복잡한 세포를 진화시켰고 거기에서 곰팡이, 식물, 동물 같은 생물들이 유래했다는 것이다.

그는 아울러 각각의 생물들이 새로운 종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도 공생이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기능을 수행했다고 주장한다. 책은 이 같은 공생 진화론의 탄생과 발전, 현대 과학계에 미친 영향과 발전 등을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함께 소개한다. 공생이라는 개념 안에 지구 생명의 과거와 현재라는 거대한 맥락이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공존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케 하는 책이다.

한겨레(05. 12. 31) 세포여, 살림을 하라 린 마굴리스

2005년 줄기세포는 위조 로또였다. 일희일비하던 잔치는 끝났고, 몰래카메라 앞에서의 소동은 마무리 중이다. 하지만 줄기세포가 아니어도 생명의 기본단위 세포는 그 자체로 놀라운 생명의 복음서다. 생명의 단위인 세포, 요술 지팡이처럼 생긴 바늘로 그걸 콕콕 치며 황금을 길어내겠다고 연기를 펼친 황 마술사의 일거수일투족에 더 이상 가슴 졸이지 말고, 슬픈 군중이여, 부디 더 기쁜 소식을 들어주시라!

이른바 ‘적자생존’의 법칙을 따른다며 생명의 진화를 얘기할 적에, 삼엽충과 공룡의 화석 등 죽은 동물 뼈다귀들을 늘어놓고 강자가 약자를 공격하고 정복하는 ‘먹이사슬’이며 ‘힘의 법칙’을 얘기할 적에, 메탄가스로 뒤덮인 돌덩어리 지구 곳곳에 푸른 이끼가 돋아나며 40억 년 동안 지구어머니가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설파한 과학자가 있었다.

1970년대 린 마굴리스는 지구별만큼 정교하고 신비한 시스템인 세포를 들여다보며, 이 둘은 장구한 세월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진화한 존재라는 사연을 발표했다. 결론적으로 지구어머니의 모든 자식은 늘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진화한 ‘공동살림체’임을 밝히고, 놀라운 존재 ‘지구’의 애칭으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라는 이름을 헌정했다. 한편, 세포들은 수십억 년 생명 진화의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니 가장 놀라운 사연인즉, 이들을 더 높은 차원의 생명활동으로 이끈 진화의 동인은 공격과 정복을 일삼는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이 아니고, 세포 내 기관들이 각자의 살림을 하다 더 큰 일, 진화의 도약을 위해 공동살림, 즉 공생을 시작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녀의 이야기에 정통 과학자들은 “가이아는 암컷 들개”라며 길들여지지 않는 그녀의 야생적 학문 태도를 조롱했고, 박사 논문으로 제출한 ‘세포 내 공생설’에 대해선 입을 다문 채 반대 의견조차 아까워했다. 그러나 20여 년 세월이 흐르며 ‘세포 내 공생’은 고도로 발달한 생명의 전략이며 자연의 질서임이 확인돼 대학 교과서에 자리잡았고, 이에 대해 마굴리스는 “남자들이 물리적 힘의 법칙으로 수백만 년의 진화를 이해하고 설명한 데 비해, 나는 수십억 년에 걸친 생화학적 조화와 절묘한 변화를 겪은 생명체의 공생에 주목했다”고 활짝 웃었다.

‘가이아설’과 ‘세포 내 공생설’ 등 파격적인 진실로 논란을 일으키고 대중들에게 과학의 생각거리를 던져주던 그녀는 <코스모스>와 <콘택트> 등의 과학 저술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천문학자인 첫 남편 칼 세이건과 함께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했을 때부터 과학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토론하며 열심히 연구했다. 또 아이 넷을 낳아 기르며 연구활동을 이어가는 동안, 생명의 진화는 ‘로또’를 차지하는 조급한 꾀나 힘이 아니라 수십억 년을 거쳐 ‘공생의 길’을 가는 자연의 진리임을 가슴으로 이미 느끼고 깨달았다고 고백한다.(김재희/ <이프> 편집인)

08. 02.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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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08-02-09 17:49   좋아요 0 | URL
역시 한가지 사실을 바라보고 느끼는 것이 그 사람의 심성과 인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바라봅니다. 물론 그 이야기에 평가하는 것도 모두 그 자신의 몫이지만요. 공생진화론의 논리는 그럴수 있다는 긍정도 같이 하게 됩니다

로쟈 2008-02-09 20:27   좋아요 0 | URL
저도 방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공동 살림체'라곤 하지만 자연계에는 공생관계도 있고 천적관계도 있는 것이니까요...

자꾸때리다 2008-02-09 18:42   좋아요 0 | URL
제가 알기론 마굴리스는 진화론자이면서도 신다윈주의 점진론적 진화론에 대해서는 "역사는 궁극적으로 신다윈주의를 앵글로-색슨 생물학이라는 널리 퍼진 종교적 신념에 속하는 20세기 소수종파로 평가할 것이다."라며 거부한 인물인 것으로 아는데요. "동물학적, 자본주의적, 경쟁적, 비용 편의적 해석을 오가면서 다윈을 잘못 이해했다. ...돌연변이의 점진적 축적을 고집하는 신다윈주의는 완전히 무력해졌다." 이런 진술도 했다는데...


하여튼 예쁘십니다. 어린 시절 사진은 더...ㅎㅎㅎ

로쟈 2008-02-09 20:25   좋아요 0 | URL
주류 진화론에는 거리를 두었다는 것이죠? 비주류로 치면 스티븐 제이 굴드도 마찬가지였고, 기독교 내에 다양한 분파들이 존재하듯이 진화론 또한 사정은 비슷한 거 같습니다...

이네파벨 2008-02-09 21:27   좋아요 0 | URL
앗 마침 요즘 파운드스톤이 쓴 "칼 세이건" 평전을 읽고 있었는데.........!!!

사실...솔직히...세이건의 사생활이 궁금해서 이 두껍고 비싼 책을 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예전에 세이건 책 번역하면서..세이건의 전기, 바로 이 책-파운드스톤의 글도 좋아하기에-을 번역출간하자고 출판사에 제안했다가 시큰둥한 반응을 얻었는데... 결국 다른 출판사에서 책을 냈더군요...)

이런 책(평전)은 지적 가치에 비해서 값이 너무 비싸다는 단점이 있지만...

재미로만 놓고보면...너무너무 재미있어요. 웬만한 소설보다 더 흡인력있네요.

린 마굴리스의 본명은 린 알렉산더였죠. 마굴리스는 두번째 남편인 결정학자 토마스 마굴리스의 성을 따른거라고 합니다. 그와도 80년대에 이혼했더군요...

세이건은 개성 강하고 매력적이지만 엄청 자기중심적이고, 아들을 떠받드는 에고 강한 어머니에게 spoiled되어 자란(세이건 어머니는 참 호감 안가는 분이더군요..쩝) 남편이었고 린은 자신의 일에 열정과 야심을 가진 독립적이고도....한성깔하는 여성으로 그려지더군요. 젊을때 둘은 결혼 전이나 후나 자주 박터지게 싸웠다고 해요...

인생주기로 볼 때....두 사람 모두 젊고 아름다울 때지만..또 그만큼 미성숙하고...성취한 것에 비해 야심이 더 큰...배고프고 갈길 바쁜 시기였기 때문이겠죠..

(전 이런 과학자나 사상가들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는 고약한 취미가 발달해서...책읽다가도 맘에 드는 저자가 있으면 구글 들어가서 이미지검색해서 관상도 보고..가족관계도 파헤치고...하이에나같은 파파라치본성...ㅡ,.ㅡ)

로쟈 2008-02-09 22:05   좋아요 0 | URL
뭐 '스타급' 과학자들이니까요.^^ 찾아보니 세이건은 세 번 결혼했더군요. 자신에게 맞는 반려자를 한 사람에게 찾는 이도 있지만 여러 사람에게서 얻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장회익, 최종덕 교수의 대담 <이분법을 넘어서>(한길사, 2007)를 읽다가 검색해본 기사를 옮겨놓는다. 작년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을 다룬 경향신문의 기획기사 가운데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대화'를 다룬 꼭지이다.

경향신문(07. 06. 18)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대화

현재 우리나라 고등학교에서 더 이상 문과와 이과의 구별이 공식적으로는 없다. 원칙적으로 학생들은 1학년에 공통 과목을 끝내고 2학년부터는 자신들의 지적 관심사와 졸업 후 진로를 고려해 다양한 선택 과목 중에서 골라 듣게 된다. 그러나 물론 실제적으로는 문과와 이과의 구별은 학생들 사이에서 분명히 존재한다. 이는 학교가 다양한 선택 과목 모두를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학생들이 스스로(?) 과거 문과와 이과의 전형적인 방식으로 선택 과목을 고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수학을 싫어한다면 덩달아 과학 심화 과목도 더 듣지 않고 주로 사회과학 과목을 더 듣는 식이다. 이런 현상을 볼 때 형식적 제도의 변화만으로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문화적 편견을 극복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절감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최근 소개된 민족사관고등학교 교사의 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민사고는 외국 대학 준비반이 따로 있는데 이곳은 외국 대학 입시를 위해 학생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선택과목을 조합하여 공부한다고 한다. 재미있는 점은 1학년 때는 별 차이가 없던 학생들이 졸업할 때쯤 되면 문과와 이과로 나뉘어 교육 받은 학생과 그런 구별없이 교육 받은 학생들 사이에 아주 분명한 차이가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세상에 정말로 문과형, 이과형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동료압력, 문화적 동질화 등을 통해 그런 틀에 박힌 인간형이 나타나게 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렇게 키워지다보니 우리 대학생들은 왜 철학수업 시간에 최근 영장류학의 성과를 소개한 책을 읽어야 하느냐고 의아해하기 십상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인문학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우리와 근연관계에 있는 영장류들과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을 보이는지 경험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상식적인 생각이 그들에게는 잘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과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윤리란 도둑질 안 하고 거짓말 안 하면 되는 것이지 자연에 대해 사실에 입각한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과는 철저하게 무관하거나 주변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 오래 연구해 온 박성래·김영식 등이 ‘중인 의식’이라고 이름 붙인 이러한 생각이 널리 퍼지다보면, 과학자들은 현대 과학연구는 수많은 사회적 자원과 지원을 필요로 하며 그 파급 효과도 크기 때문에 연구 설계와 진행 과정 모두에서 윤리적 고려가 필수적이라는, 연구 선진국에서는 널리 공유되고 있는 사회적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물론 대체적으로 분류해서 인문사회계열의 지적 배경을 가진 사람과 이공계열의 지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문화적 차이는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이 차이와 그 차이로 인한 폐해가 우리나라에서 특히 더 심한 것은 분명하다. 일찍이 과학 배경을 가진 영국의 문필가 스노는 ‘두 문화’라는 개념을 통해 자연과학자와 인문학자들 사이의 사고방식과 문화적 차이가 그들 사이의 생산적인 의사소통을 가로막아 결국에는 영국이 산업부문에서 다른 나라에 뒤처지게 되는 피해를 끼쳤다고 주장했다. 스노의 주장은 산업부문에서의 영국의 절대 우위가 경쟁국들의 급속한 성장으로 무너지고 난 이후에 나온 것으로 실제로 이러한 결과에 ‘두 문화’의 폐해 때문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두 문화’ 문제가 유독 심각한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폐해가 현실적으로 나타나고 있고 이 주제에 대해서는 김용준, 홍성욱 등의 연구가 있다.

실업이나 환경오염과 같은 현대사회가 직면한 중요한 문제들은 경제학이나 환경공학처럼 그 문제와 직결되어 보이는 한 가지 전문분야의 지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실은 여러 측면의 복잡한 쟁점이 얽혀 있는 특징 때문에 이 문제들을 만족스럽게 해결하려면 다양한 분야 전문가의 협력 작업이 필수적이다. 실업은 단순히 일자리와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 사이의 수적 불일치가 아니라 일자리를 잃은 사람의 심리적 박탈감에 대한 고려와 적절한 일자리 창출을 위한 과학기술정책 등과 연계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환경문제는 환경오염을 기술적으로 해결하는 일만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사회의 전망에 맞추어 우리 삶의 태도를 적절하게 변화시키는 것과 관련이 있다.

게다가 최근에 부쩍 관심을 끌고 있는 지구 온난화 문제의 경우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대안으로 논란거리인 원자력 발전이 제시되고 있다. 이 경우 중요한 선택은 단순히 발전단가에 대한 산술적 효율성 계산을 넘어선 국민적 수준의 공감대 도출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회적 합의라는 개념 자체가 원자력과 같은 과학기술과는 전혀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 절박한 문제의 해결은 원점에서 머물 수밖에 없다.

이처럼 복잡하고 여러 분야에 걸쳐 있는 현실적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지적 배경을 가진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궁리할 필요가 있는데 각자의 좁은 전공분야의 시각에 갇힌 전문가들에게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종종 이러한 ‘학제적’ 논의는 본질적인 논의에 접근하기도 전에 ‘윤리적’이나 ‘합리적’ ‘효율적’ 등과 같은 기본적인 개념이 분야마다 다르게 정의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문과형 전문가와 이과형 전문가들의 소모적 논쟁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해버리기 일쑤다.

예를 들어 이과형 전문가는 특정 정책이 기술적으로 비용절감을 높일 수 있더라도 사회적 비용을 많이 지불하게 되어 결국에는 사회적 효율성을 달성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문과형 전문가들은 관련 과학기술의 내용을 꼼꼼하게 따져보거나 평가하기 전에 손쉽게 권력이나 이해관계에 근거한 분석에만 호소하기 일쑤다. 최근 중저준위 방폐장 건설을 둘러싼 전문가들 사이의 의견충돌은 이 같은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비슷한 상황이 정도는 좀 다르겠지만, 국제적 경쟁에서 문·이과 복합형 인재들을 두루 갖춘 세계 유수의 기업을 상대해야 하는 국내 기업의 기획팀에서 벌어지고 있지 않을까? 기업의 생존이 달린 만큼 이 경우에는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생산적 소통에 대한 요구가 훨씬 더 절실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생산적 소통에 대해 우리 지식인들은 어떤 고민을 해왔을까? 필자의 능력 부족으로 체계적인 분석을 시도하기는 어렵지만 몇 가지 주목할 만한 현상들은 찾아볼 수 있다. 우선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이 분야에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는 학자가 매우 극소수라는 사실이다. 이는 어쩌면 ‘두 문화’가 뿌리 깊은 우리의 지적 현실에 비추어볼 때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과학이나 기술에 대해 인문학적·사회과학적 분석을 시도한 예는 부지기수이고 역으로 과학기술자가 상당한 수준의 인문학적·사회과학적 소양을 보여주는 글을 쓴 경우도 꽤 된다. 중요한 점은 이와 같이 두 문화를 넘나든 글의 대부분이 현대사회 대부분의 문제 배후에는 과학기술의 기계적 합리성이 자리잡고 있다는 추상적 비판이나 생산력으로서의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 혹은 과학기술의 내용을 일반인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글쓴이의 인문학적 재능을 발휘하는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지성계에서 인문학과 자연과학 사이의 생산적인 대화가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이와 같은 두 문화 ‘가볍게’ 넘나들기를 뛰어넘는 일이다. 가볍게 넘나들기는 유용하기는 하지만 대화 상대방의 지적 깊이를 제대로 평가해주지 못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학 저술은 수식과 도표가 잔뜩 나오는 본문은 제쳐둔 채 서론과 결론만 읽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인문학자와 인문학에서 경쟁하는 이론이란 경험적 근거도 없이 주장하는 사람의 개인적 선호를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과학자 사이에서 생산적 협동을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와는 조금 다른 형태이지만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까지 대중적으로까지 꽤 유행했던 신과학 운동에 대해서도 비슷한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신과학 운동이 관심을 끌었던 주요 이유는 쿼크 이론과 같은 당시 최신의 물리학 이론에 내재한 원리들이 동양사상의 고전적 저술에 이미 담겨져 있다는 주장의 신선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과학 운동은 두 학문 분야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하는 데 그치고 말았을 뿐, 각자 분야의 고유한 학문적 논점을 진행시키는 데 별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라카토슈식으로 말하자면 적극적 발견법이 부족했던 신과학 운동은 그로 인해 금방 지적 추동력을 잃어갔다.

이와는 달리 최근 유행하고 있는 ‘통섭’의 움직임은 여러 학문 분야들 사이의 유사한 이론적 구조와 개념적 연관성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욱 본격적으로 학문들 사이의 생산적 협력관계를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진화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유행시킨 ‘통섭’은 단순히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대화가 아니라 ‘정합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진화 심리학자들은 현대 사회과학의 이론들이 가정하는 개인의 인격이나 사회성에 대한 가정들은 오랜 수렵 채집 시절에 인간의 마음이 어떤 방식으로 형성되어 왔는지에 대한 생물학적 제한조건과 부합하는 방식으로 걸러질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에너지보존법칙에 만족하지 않는 화학법칙이 허용되지 않듯이, 진화심리학적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사회과학 이론은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통섭의 움직임은 학문들 간의 대화를 강조하긴 하지만 많은 경우 그 대화의 성격은 위계적이고 환원적이다. 국내에서 이 논의를 이끌고 있는 최재천은 비환원적 통섭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데 그 추이를 지켜볼 만하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생산적 소통에서 깊이 있는 이론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학자가 장회익이다. 그는 온갖 이상스러운 일이 일어나는 양자역학을 이해하기 위해 서울 해석이라는 독특한 입장을 제안함으로써 우리 이론의 자생적 능력을 보여준 바 있다. 그후 그는 서울 해석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기반을 확장하여 과학이론 일반에 대한 모형을 제안하였고, 최근에는 그 모형을 보완하고 확장하여 온생명으로 요약되는 생명의 본질과 인간 의식의 문제까지 해명하려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장회익이 과학자의 시각에서 인문학적 주제들을 통합하여 연구하고 있다면, 송상용 등의 과학기술학자들은 인문학 및 사회과학의 시각에서 자연과학의 주제들을 탐구하고 있다. 앞으로는 이 양방향에서의 생산적 소통의 노력이 좀더 활성화되기를 기대해본다.(이상욱|한양대 교수·철학과)

08. 02. 09.

 

 

 

 

P.S. <이분법을 넘어서>를 읽은 소득 중의 하나는 '가이아론'과 '온생명론'의 차이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더불어 러브록과 린 마굴리스의 가이론, 그리고 장회익의 온생명론을 한데 묶어서 읽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회익 교수의 주저는 <과학과 메타과학>(지식산업사, 1990)과 <삶과 온생명>(솔출판사 1998) 두 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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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8-02-09 12:42   좋아요 0 | URL
로쟈님 잘 읽었습니다. 지금도 고등학교엔 문과와 이과로 나누어져 있고, 대개는 수학을 잘하냐 아니면 국어를 잘하냐의 여부에 따라서, 자신의 방향을 정하는 경향이 있죠. 예전엔 또 이런 식도 있었어요. 남학교에서는 공부 잘하면 이과, 못하면 문과. -_- 누가 만든 기준이고 분위기인지 모르지만, 참 거시기하더라고요. '적성'이란건 어쩌면 잘하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는건지 모른단 생각이 듭니다. 적성검사를 하면 언제나 토목, 기술 이랬는데 저는 그쪽엔 전혀 매력을 못느끼니.

로쟈 2008-02-09 20:23   좋아요 0 | URL
고등학교 때 제 적성은 '전자공학'이었습니다. 이후로 적성검사란 게 다방에서 뽑는 오늘의 운세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사인 21호에 실린 북리뷰를 옮겨온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77). 히친스의 책을 다루려다가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새물결, 2008)가 출간되었기에 급하게 방향을 틀어 일독하고 쓴 글이다. 편집부에서 군더더기들을 덜어낸 덕에 보다 깔끔한 모양새가 되었다. 처음 두 문단 정도가 요점이고(그러니까 '전체주의란 딱지'를 프레임화하는 데 이 글의 목적이 있다) 나머지는 분량을 채우기 위한 '레크리에이션'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어차피 책을 직접 손에 들 독자는 많지 않아 보이니까...

시사인(08. 01. 30) 자유주의에 이용되는 전체주의란 ‘딱지’

굿바이 레닌!’이라는 영화는 만들 수 있지만 ‘굿바이 히틀러!’라는 영화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스탈린의 생일날 강제수용소 죄수들은 스탈린에게 축하 전보를 보냈다. 하지만 유태인이 아우슈비츠에서 히틀러에게 그러한 전보를 보낼 수 있었을까? 연설을 마친 뒤 당원의 열광적인 박수와 나치식 경례를 히틀러는 흡족해하며 받아들였지만, 스탈린은 전당대회에서 다른 동지와 똑같이 박수를 쳤다. 그는 자신을 ‘지도자’가 아니라 한갓 역사의 ‘대행자’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흔히 ‘전체주의’로 통칭되는 나치즘과 스탈린주의의 이 ‘사소한’ 차이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새물결 펴냄)에서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묻고, 또 답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의식이 개입되어 있다. 하나는 아직도 나치즘과 차별되는 체제와 이데올로기로서 스탈린주의에 대한 만족할 만한 이론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 다른 하나는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 이래 통용되는 ‘전체주의’라는 관념이 엄밀한 이론적 개념이 아니라, 자유주의 헤게모니에 봉사하는 일종의 ‘구멍마개’라는 점. ‘빨갱이’라는 용어처럼 ‘전체주의’라는 딱지는 모든 사유를 금지시키고 비판의 가능성을 봉쇄해버린다. 그래서 지젝은 묻는다.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그러한 질문에 이끌려 우리가 초대받는 곳은 마치 숭고한 그리스 비극과 쾌속 질주하는 롤러코스터를 한데 모아놓은 듯한, 현란한 이론적 향연과 진지한 숙고의 장이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크메르 루주 치하의 캄보디아에서 대규모 숙청과 기아로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버리자 그들은 이번에는 인구를 늘리는 일에 혈안이 된다. 그래서 매달 3일씩 ‘짝짓기의 날’을 정해 결혼한 부부가 동침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러고는 경비병이 순찰을 하면서 실제로 섹스를 하는지 안 하는지 감시했다. 하지만 하루 열네 시간씩 강제 노동에 시달리던 캄보디아 인들은 경비병을 속이기 위해 사랑을 나누는 척하며 가짜 신음소리를 내는 수밖에 없었다. 어째 좀 비인간적인가? 하지만 지젝은 이렇게 되묻는다.

 “그렇지만 타자의 응시 아래에 놓여 있는 그와 같은 장면들이 성행위의 일부라면 어떨까? 오직 그런 타자의 응시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떨까?”

현대인, 노출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
실제로 사생활과 성관계를 찍은 이런저런 동영상과 캠코더로 점령되다시피 한 것이 우리의 웹사이트이고 보면 이러한 물음은 과장된 것이 아니다. 지젝이 보기에 오늘날 우리의 불안은 오히려 타자의 응시에 노출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으로 채워진다. 실제 삶을 연기하는 ‘리얼리티 쇼’가 시사하는 것처럼 어떤 허구 세계가 우리의 도피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가 궁극적인 도피처가 되는 전도된 상황까지 빚어지고 있다. 과연 우리는 ‘인간적 가치를 거부하는’ 전체주의보다 훨씬 나은 체제에 살고 있는가?

지젝은 한 가지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반(反)차우셰스쿠 쿠데타가 성공한 1991년에도 루마니아 비밀경찰은 여전히 건재를 과시하고 있었는데, 수도인 부쿠레슈티를 방문한 한 미국인 친구가 도착 일주일 만에 미국에 있는 애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나라는 가난하지만 사람들은 다정하고 쾌활한 데다 배우려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어”라고 칭찬을 늘어놓고 전화를 끊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 속 목소리는 자신을 비밀 경찰이라고 소개하고, 루마니아에 대해 좋게 말해준 것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안녕히 계세요’라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지젝은 이 책을 그 익명의 비밀경찰 요원에게 바치고 있다.

08. 02. 08.

P.S. 기사의 첫문단은 지젝의 글 '두 개의 전체주의'(http://blog.aladin.co.kr/mramor/885349)를 참고한 것이다. 기사에 들어간 사진은 지젝의 <시차적 관점(The Parallax View)> 출간을 계기로 이루어진 한 강연회 장면으로 보인다(2006년 이후라는 얘기이다). 그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주저 네 권의 하나인 이 책이 올해 출간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형편이 좋았다면 번역을 맡을 뻔하기도 했던 이 책이 개인적으론 올해 출간을 가장 고대하는 책들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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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8-02-09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시인(08. 01. 30) 이라.... 사법고시생들이 지젝도 공부하나 보내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로쟈 2008-02-09 09:37   좋아요 0 | URL
좋은 시력이십니다.^^
 

'지젝이 어쨌다구?'(http://blog.aladin.co.kr/mramor/1873059)에 이어지는 페이퍼이다. 가독성이 좋은 번역이지만 몇 가지 오역들이 교정되면 좋겠다는 의견을 말미에 피력했는데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내용은 적어두어야겠다. 그 전에 고유명사 표기에 대해 조금만 더 덧붙이면 <에쿠우스>의 극작가 'Peter Schaffer'는 '피터 셰이퍼'(62쪽)이 아니라 '피터 셰퍼'이며 '하이데거적인 인지과학'을 주창하는 철학자 'Hubert Dreyfus'는 국내에 '허버트 드라이푸스'(306쪽)가 아니라 '허버트 드레퓌스'(혹은 '허버트 드레피스'로 소개되었다. 가장 유명한 푸코 연구서의 하나였던 <미셸 푸코: 구조주의와 해석학을 넘어서>(나남, 1989)의 공저자 중 한 사람이었고 <인터넷상에서>(동문선, 2003)도 그의 책이다(<인터넷에 대하여>라고 해야 한다. '하버트 드레퓌스'는 또 뭔지?).

 

 

 

 

그리고 <제3의 과학>(대영사, 1996)의 편자로 유명한 'John Brockman'은 물론 '존 브로크먼'(324쪽)으로도 표기될 수 있지만 <위험한 생각들>(갤리온, 2007)을 비롯해서 최근에 나온 책들은 모두 '존 브록만'이라고 읽어주고 있다. 통일시켜주는 게 독자들의 혼동을 줄일 수 있다. 그리고 또 내 생각을 적자면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 'Le Mythe de Sisyphe'는 물론 그리스 신화의 '시시포스'를 다루고 있지만 통례에 따라 <시지프의 신화>라고 읽어주는 게 낫다(김화영 교수의 번역으론 <시지프 신화>). 그건 '카뮈'의 책이기 때문이다('시지프'가 아니라 '시시포스'라고 교정해주는 건 과잉친절이다).

 

 

 

 


몇 가지 오역들을 거론하기 전에 한마디 덧붙이자면, 최근의 출판물에서(TV 자막에서는 더 심하다) 여전히 빈발하고 있는 '-로서/-로써'의 혼동이 좀 교정되었으면 싶다(사실 '혼돈/혼동'도 혼동되기 쉬운데 그럼에도 시인들까지 혼동해서 쓰는 건 좀 어이없다. 얼마전 한 영화잡지의 칼럼을 읽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완전히 '혼돈'이다).

가령 얼마전 서평을 쓰기도 했던(http://blog.aladin.co.kr/mramor/1884175) <논어는 진보다>(포럼, 2008)에서도 서문에서부터 "공자가 제사를 중시한 것은 그 예禮로의 기능을 중시했기 때문이지 죽은 귀신의 은덕을 바라서가 아니었다."(18쪽)라는 오기가 나온다. 당연히 '예로서의 기능'이라고 표기되어야 하는 대목이다. 부주의에서 빚어진 오타일 수도 있지만(편집자에게서도 걸러지지 않았다는 건 의문이다) 이런 실수는 이 책을 진지하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보게 만든다(더구나 책은 <논어>의 자구 하나하나를 '제대로' '다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가!). "언어는 전달수단으로의 한계를 가지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효과적인 전달수단인 것도 사실이다."(220쪽)에 이르면 저자가 한문공부만큼 한글공부에도 신경을 써주었으면 싶은 것이고.

<지젝이 어쨌다구?>(새물결, 2008)에도 그런 오기가 한군데 나온다. "모더니즘이 동시대를 이야기하기 위해 해석적 준거틀로 신화를 이용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간극들에 무언가를 끼워넣음으로써 신화를 직접적으로 다시 쓴다."(54쪽) 얼핏 '준거틀로써'와 '끼워넣음으로써'가 호응하는 듯이 보이지만 '해석적 준거틀로서의 신화'는 'the myth as the interpretative frame of reference'(30쪽)를 옮긴 것이다.

그럼 자질구레한 디테일들은 가급적 넘어가고 번역에 대한 몇 가지 '이견'을 적도록 한다. 먼저 83쪽이다. 책의 1장인 '신화와 그것의 변쳔'에서 마지막 두 절(74-96쪽)은 내가 읽기에 <죽은 신을 위하여>(길, 2007)에 대한 아주 요긴한 요약이다. 번역된 순서와는 달리 <죽은 신을 위하여>가 <전체주의가 어쨌다구?>보다 나중에 나온 책이므로 지젝이 먼저 제시한 자신의 생각을 이후에 상술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죽은 신을 위하여>가 읽기에 버거웠던 분들은 이 대목만 꼼꼼하게 읽어도 좋겠다.

다시 돌아가, 83쪽의 한 대목은 이렇다. "헤겔이 말했듯이,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은 인간으로 육화된 초월적 신이 아니라 자기 너머 피안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원문은 "As Hegel put it, what dies on he Cross is not the human incarnation of the transcendent God, but the God of Beyond himself."(50쪽)이다. 

여기서 '초월적 신'은 'transcendent God'을 옮긴 것이고 칸트철학의 번역어를 쓰자만 '초재적 신'으로 옮겨도 된다. 말 그대로 '저 너머에 존재하는 신'을 뜻한다. 그걸 다시 받은 말이 'the God of Beyond '이다. 역자는 'Beyond'를 'himself'에 걸리는 전치사로 보았지만 내가 보기엔 명사다(그래서 대문자로 씌어진 게 아닐까?). 그렇게 다시 읽으면, "헤겔이 말했듯이,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은 인간으로 육화된 초월적 신이 아니라 피안의 하나님 자신이다."

참고로, 이것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더이상 저 너머의 피안에 거하지 않고 (종교적 공동체의) 성령으로 변해간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한편으로는 아버지 하나님이 성령으로 '번해가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공동체 그 자체가 새로운 영적 단계로 '변해가게' 하는 소멸하는 중개자/중간자이다." 여기서 '소멸하는 중개자'는 'vanishing mediater'를 옮긴 것이다(다른 번역본들에서는 '사라지는 매개자'로 옮겨졌다).

지젝의 기독교론은 기회가 되면 다른 자리에서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고 스핑크스에 대한 헤겔의 유명한 격언만을 여기에서는 챙겨두도록 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남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이집트인들 자신에게도 수수께끼였다."(90쪽) "The Enigmas of the Egyptians were also enigmas for the Egyptians themselves."(56쪽) 

이 대목을 인용한 건 이 책이 아니라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 잘못 옮겨졌기 때문이다(이 책의 몇몇 오역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루겠다). 거기서는 똑같은 문장을 "이집트 사람들의 비밀은 이집트 사람들 자신을 위한 비밀이기도 하다."고 오역했다(224쪽의 각주). 지나는 김에 보태 적자면 지젝은 이어서 데리다의 '해체'가 갖는 문제점(아포리아)에 대해 지적한다.

"'해체'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타자의 해체적 정화는 우상화의 궁극적 형태이다. 타자를 해체하고 남는 것은 타자의 자리 - 메시아적 약속으로서의 타자성의 순수 형식 - 밖에 없다. 해체의 한계는 여기 있다. 즉 해체가 근원적이 될수록, 해체에 내재하는 해제 불가능의 조건 - '정의' 라는 메시아적 약속 - 에 의지해야 하는 정도도 커진다(데리다는 이것을 20년 전에 깨달았다). 메시아의 약속은 데리다의 믿음의 진정한 대상이며, 데리다의 궁극적인 윤리 원칙은 이러한 믿음이 환원 불가능하고 해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죽은 신을 위하여>, 224쪽)

이 대목은 데리다의 해체론에 대한 지젝의 비판을 집약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데리다 자신의 답변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대한 심포지움에서 발표된 '마르크스와 아들들(Marx & sons)'에서 읽을 수 있다. 이 글/책은 조만간 번역돼 나온다고 한다(http://blog.aladin.co.kr/balmas/1862975 참조). 곁다리로 지적하자면 인용문에서 "데리다는 이것을 20년 전에 깨달았다"는 오역이다. 원문은 "as Derrida himself has realized in the last two decades"(139쪽)에서 보듯이 현재완료형 문장이기 때문이다('20년 전'에 깨달은 것이 아니라 '20년 동안' 깨달아온 것이다).  

이어서 148쪽. "여기에는 권력에 반대하는 '민중들'에 대한 지식인들의 뿌리 깊은 불신이 도사리고 있다."는 문장은 오역은 아니지만 우리말로 중의적이다. 무엇에 대한 불신일까? 'people as opposed to Power'에 대한 불신이다. 권력에 대립한다고 하는 민중에 대한, 그러한 민중상에 대한 불신이다. 즉, 여기서 표명되는 건 민중은 궁극적으로 권력에 반대하지 않을 거라는 지식인들의 인식이다(지난 대선 결과에 대해서도 일부 '좌파 지식인들'이 그러한 실망/환멸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때문에 1989년의 시점에서 동독의 지식인들은 '자유선거'에 반대했다. "만약 자유선거가 실시된다면 다수의 민중들이 혐오스러운 자본주의적 소비주의를 선택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대개의 경우 지식인과 민주주의는 불편한 관계이다.)

그런 맥락에서 읽어야 하는 대목: "반체제 인사들보다는 '개혁적 성향을 지닌' 공산주의자들에게 더 많은 공감을 느끼고 있던 서구 사회의 몇몇 민주주의자들도 이와 동일한 게임을 벌이고 있었다." 여기서 '서구 사회의 몇몇 민주주의자들'은 'Some Western Social Democrats'의 번역이다. '서구의 몇몇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오역이라고 해야겠다(혹은 '사민주의자들').   

'우울증과 행동'을 다루고 있는 4장의 끄트머리인 288쪽에서는 한번 잘못 읽은 오역이 몇 차례 반복되고 있다(사실 제목에서 'act'를 굳이 '행동'이라고 옮긴 것도 불만이다. 그간에 대부분의 번역서들에서 'action'과 구별하여 'act'를 '행위'라고 옮겨왔기 때문이다. 역자는 'action'에는 어떤 번역어를 할당하려는 것인지?). 내용은 좀 선정적인데, '강간'에 대한 환상을 다루고 있어서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수치심이 단순한 수동성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떠맡은 수동성이라고 강조해왔다. 만약 내가 강간을 당했다고해보자. 거기에는 아무것도 수치스러울 게 없다. 그러나 내가 강간당하는 것을 즐겼다면, 나는 수치심을 느껴 마땅하다."(287쪽)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부끄러움은 오직 그러한 수동적 처지가 사회적 현실 속에서 (자기는 부인하는 내밀한) 환상과 접촉할 때만 나타난다."

"가령 두 여자가 있다고 해보자. 한 사람은 자기주장이 강하고 활동적인, 이른바 해당된 여성이다. 다른 한 여자는 남자 친구가 자신을 거칠게 다루고, 심지어 강간하는 공상을 은밀하게 즐기고 있다. 만약 두 여자가 모두 강간을 당할 경우 두번째 여자가 첫번째 여자보다 훨씬 더 외상적인 충격을 받게 되는데, 이는 강간이 '그녀의 꿈의 소재들'을 '외적인' 사회 현실 속에서 실현하게 되리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287-8쪽, 강조는 지젝)

강조된 부분의 원문은 "for the very reason that it will realize in 'external' social reality the 'stuff of her dreams"이다. 문제는 이것을 부연설명하는 대목이다.  "왜 그런가? 환상의 핵심에는 주체의 존재가 있고, 그보다 표면 쪽에는 그혹은 그녀의 상상적인 그리고/혹은 상징적인 자기동일시가 있는데, 그 사이에 둘을 영원히 갈라놓는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288쪽) 원문은 "why? There is a gap which forever separates the fantamatic kernel of the subject's being from the more 'superficial' modes of his or her symbolic and/or imaginary identification"이다.

역자는 'the fantamatic kernel of the subject's being'을 '환상의 핵심에는 주체의 존재가 있고'라고 풀어서 옮겼는데, 이 '주체의 환상적 중핵', 곧 '주체를 떠받치는 핵심적 환상'이 가리키는 것은 '주체라는 존재'가 아니라 주체의 '내밀한 꿈' 혹은 '꿈의 소재들(stuff of dreams)'이다. 그리고 이러한 꿈(환상)과 상상적/상징적 동일시('외적인 사회 현실') 사이에는 영원한 간극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 때문에 "내가 환상의 핵심인 나의 존재를 (상징계 안으로 통합해 들인다는 뜻에서) 완전하게 떠맡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에서도 완전하게 떠맡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환상의 핵심으로서의) 나의 존재'가 아니라 '나의 존재의 핵심적 환상(fantasmatic kernel of my being)'이다. 미묘하지만 둘 사이엔 차이가 있고 번역문은 계속 이를 혼동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나의 존재에 너무 바짝 접근할 때, 나의 존재를 너무 가까이할 때, 주체에는 아파니시스(성적인 욕망의 사라짐)라는 사태가 벌어질 뿐이다."라는 식으로 계속 오역이 반복되고 있다. 이것은 "when I approach it too closely, when I get too near it, what occurs is the aphanisis of the subject"를 옮긴 것인데, 역자가 '나의 존재'로 받은 'it'이 가리키는 것은 '핵심적 환상'이다. 다시 옮기면, "내가 나의 핵심적 환상에 너무 바짝 접근할 때, 그 환상에 너무 가까이 다가갈 때, 벌어지는 일은 주체의 아파니시스이다." 바로 이어지는 문장에서 '나의 존재라는 환상의 핵심'은 '내 존재의 핵심적 환상'으로 교정되어야 한다. 그렇게 교정하여 정리하면 이렇다.

"내 존재의 핵심적 환상이 사회적 현실에서 강제적으로 실현되는 것이야말로 주체에게는 최악의 사태이며 가장 모욕적인 형태의 폭력이 될 것이다. 그 폭력은 나를 견딜 수 없는 수치심에 노출시킴으로써 나의 정체성을 지탱하는 토대 자체를 뒤엎어버리고 만다."

 

 

 


 

5장('문화연구는 정말 전체주의적인가?'로 넘어가서, 306쪽에 나오는 건 단순오역이다. "철학과 과학 사이를 건너뛰는 이러한 단락은 오늘날 하이데거적인 인지과학(허버트 드라이푸스)이나 인지과학적 불고(프란시스코 바렐라)에서부터 양자물리학과 동양사상의 결합(카프라의 물리학의 도), 심지어 해체론적 불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태들로 나타나고 있다." 이어서 대표적인 두 가지를 간단히 살펴보겠다고 하고서 '해체론적 진화론'과 '인지과학적 불교'를 도마에 올려놓는다. 그런데, '해체론적 진화론'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앞에서 'deconstructionist evolutionism'을 '해체론적 불교'로 오역하는 바람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309쪽의 인용문에 나오는 건 '멋진 오역'이다. '멋진 오역'이라고 한 건 우스개이고 사실 오역이 아니라 원서에 잘못이 있는 드문 경우다. 지젝이 데넷의 <해명된 의식>에서 인용한 대목: "'서사적 중력장의 중심으로서의 자기라는 생각'이 아직 내 독자적 사상으로 완성되어 책으로 출간되기도 전에 이미 어떤 소설이 그걸 풍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내 심경이 얼마나 복잡했겠는지 한번 상상해보라. 그 책은 데이비드 로지의 <멋진 세계(Nice World)>였는데 해체론자들 사이에서는 이 책이 열띤 토론을 불러일으키는 중인 모양이다."

문학이론가이자 소설가인 데이비드 로지의 <아주 작은 세상(Small World)>(영웅, 1991)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어서 <멋진 세계>란 책도 썼나 싶었지만 찾아보니 그게 아니었다. 로지가 쓴 소설은 'Small World'와 'Nice Work'였다. 그러니까 데넷이나 지젝이 'Nice Work'를 'Small World'와 혼동하여 'Nice World'로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 겸사겸사 바람을 적자면 두 권 모두 번역/소개되면 좋겠다. 

그리고 또 데리다를 다루고 있는 312쪽에서 'differance(디페랑스)'를 그냥 '차이'라고 옮겼는데, 소리에서는 차이가 나지 않지만 'difference'와는 구별해주어야 하므로 '차연'이라고 옮겨주거나 '차이' 옆에 원어를 병기해주어야겠다. 그리고 'animal nature'을 '생물의 본성'이라고 옮기는 건 좀 특이한 감각이 아닌가 싶다(동물론은 데리다가 말년에 많은 관심을 쏟았던 주제이다). 340쪽에서도 '주체적 입장(subjective position)'은 문맥상 '주관적 입장'이라고 옮기는 게 더 적절해 보인다(더불어 지적하자면 역자는 'existence'를 모든 경우에 기계적으로 '실존'이라고 옮겼는데 보통 일감은 '존재'다. '실존'이란 번역어가 적합한 경우는 상대적으로 제한돼 있다. 'existence'의 번역은 내가 요즘 이론서 번역의 수준을 가늠하는 한 가지 지표이다). 그리고 343쪽에서 '부상하는 질서(emerging order)'는 '창발적 질서'라고 옮기는 게 일반적이다. 린 마굴리스와 프리고진 그리고 복잡성 과학에서 핵심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다.   

끝으로 흥미로운 내용 한가지. 현실과 허구(쇼)사이의 경계가 점점 지워져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결론에서 지젝의 한 가지 예로 들고 있는 것은 미국의 플로리다에 있는 마을 '셀러브레이션'이다. 디즈니에서 만든 '기획마을'인데 인구는 (2000년 기준으로) 2,700여명이다.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미국식의 아담한 전원풍 마을에서 실생활 레크리에이션을 즐긴다는 이 마을의 거주자들 또한 '자기 자신을 연기하고' 있거나 혹은 '자신들의 삶을 무대 위에서 살고 있다. 텔레비전은 우리의 실제 사회적 현실과 한참 동떨어진 어떤 허구적 세계를,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도피적 오락거리로 제공한다고 여겨져 왔다 - 하지만 '리얼리티 쇼'에서는 마치 현실 그 자체가 궁극적인 도피적 허구로 제공되고 레크리에이션(재-창조)되는 것만 같다... 어떤 면에서, 하나의 원이 그렇게 닫혀버린다."(384-5쪽)

인용문에서 '실생활 레크리에이션'은 'real-life re-creation'의 번역이다. 마치 아메리칸 드림을 구현한 듯한, 이 가장 '전체주의적'인 마을이 '당신이 영혼이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축복받은 마을'이라는 건 뭔가 지독한 아이러니가 아닐까? 이거 뭐라고 불러야 하나? 미국인들의 수수께끼?..

08. 02. 08.

P.S.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에 대해 시사IN에 쓴 리뷰는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7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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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우스 2008-02-10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주문해 놓고 있는데 좋은 길잡이가 될 듯싶습니다. 사시인에 쓰신 것도 잘 읽었구요. 물론 저는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사람은 아니고요. ^^ 퍼갑니다. 감사감사 그리고 늦었지만 새해 복 마니 받으시구요.

로쟈 2008-02-10 13:20   좋아요 0 | URL
^^
 

별로 주목받지 않은 지난주의 신간 가운데 하나는 영국의 좌파 문화이론가 스튜어트 홀의 <대처리즘의 문화정치>(한나래, 2008)이다. <스튜어트 홀의 문화이론>(한나래, 1999)이라는 논문모음집과 몇 권의 교재용 공저가 출간된 적은 있지만 그의 단행본 저작이 소개되는 건 이번에 처음인 듯하다(두 책은 역자가 같다). 두툼한 고가의 책이지만, 그리고 20년전 저작이지만, 손에 들어볼 마음이 생기게 하는 건(사정상 도서관에 들어오길 기다려봐야겠지만) 역시나 이명박 정부의 출범이라는 한국적 정세와 관련이 있다. 관련기사의 초점도 거기에 맞춰지고 있다.

한국일보(08. 02. 05) 노동자·농민·88만원 세대는 왜 좌파를 등졌을까

중소자영업자, 노동자와 농민, 88만원 세대들…. 좌파진영에 표를 던져야 할 이들은 왜 보수정권의 등장을 염원했을까? 이명박 후보의 압승으로 귀결된 지난 대선은 좌파진영에 심각한 과제를 던져주었다. 성별, 지역, 세대를 가리지 않고 계급적 정체성을 배반하는 투표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경제위기를 배경으로 등장한 이명박 정권은 1970년대 노동당 정권의 경제실정을 비판하며 장기집권(1979~1990)에 성공한 마거릿 대처의 출현을 연상하게 한다. 대처의 성공은 오로지 신자유주의 경제드라이브의 성공 때문이었을까?

최근 발간된 영국의 좌파 문화 이론가인 스튜어트 홀의 대처리즘 분석서 <대처리즘의 문화정치>(한나래 발행)는 문화정치의 관점에서 대처리즘의 성공요인을 들여다본다. 경제정책의 성공 뿐 아니라 대중의 도덕적 복고주의를 자극함으로써 정치적 성공을 거뒀다는 것이다. 전통적 계급장벽을 뛰어넘은 이 같은 성공을 저자는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예컨대 대처는 탈학교화, 관용적 교육 등이 떠받들여지던 학교현장에 높은 교육수준의 회복과 권위의 수호 같은 이데올로기를 전파했고, 권위와 사회적 가치의 위기를 강조함으로써 필요하다면 도덕적, 법적 무력을 정상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부과해도 좋다는 가치관을 대중들에게 전파시켰다.

좌파의 복지정책에 대해서는 “씀씀이가 헤픈 국가가 벌지도 못하는 부를 함부로 써버리고 일반인들의 자립을 해친다”는 담론으로 대항했다. 또한 복지정책의 수혜자를 사회가 주는 혜택으로 살아가며 제 몫의 일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로 규정하고, 이들을 자신들과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다른 문화권 출신의 사람이라는 이미지로 치환해 인종주의를 자극하기까지 했다.

결국 이런 도덕적 리더십을 포기한 좌파정당은 정책의 유효성과는 별개로 대중들로부터 외면 받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더 타임스> <선> <이코노미스트> 같은 대중매체들의 도덕주의 전파도 대처리즘의 성공에 한몫을 했다. 그렇다면 좌파들이 대처리즘의 성공에서 배워야 할 점은 분명하다. 전통적인 계급정치에서 탈피해 문화적 주제에 주목해 대중을 블록화하는 방식으로 지지를 결집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역자인 임영호 부산대 교수는 “홀은 1980년대의 영국사회라는 특수한 사례를 다루고 있지만, 그의 분석은 시공간차이를 넘어서 문화의 정치성을 주목하게 한다”며 “진보 역시 전통적 지지자를 결집하기 보다는 이른바 전통적인 진보세력 속에 내재한 보수적 요소(인종주의, 가부장주의, 배타적 민족주의)를 성찰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진보의 정체성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이왕구기자)

08. 02. 07.

P.S. 대처리즘 이후를 장식한 건 18년만에 정권을 탈환한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정부이다. 알다시피 그가 기치로 내건 건 '제3의 길'(기든스)이다. 홉스봄과 스튜어트 홀의 제3의 길'에 대한 비판은 <제3의 길은 없다>(당대, 1999)에서 읽을 수 있다. "이 책은 블레어 정권의 1년 6개월간의 공고에 대한 세밀한 분석으로, 그가 드러내고 있는 다양한 문제점에 대해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으며 비판과 지지라는 서로 다른 목소리를 대비시키고 있다. 특히 영국의 대표적 사학자 홉스봄과 문화이론가 홀은 서로 다른 시각에서 제3의 길이 허구임을 비판한다." 지난 30년간의 영국 정치사가 우리의 반면교사가 되어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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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한알 2008-02-07 21:39   좋아요 0 | URL
우연히 이 블로그를 알게 되어 작년말부터 찾아오고 있습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은 아니나, 나이 40이 넘어 직업과 관계없이 공부를 제대로 한 번 해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큰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다만, 책 값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서....
제가 이 블로그 이야기를 했더니 제 처가 로쟈선생님께 몇 달 전 미학 강의를 한 동안 들은 적이 있다 하더군요. 새해에도 건강하세요.

로쟈 2008-02-07 21:44   좋아요 0 | URL
앗, 한 다리 건너면 '2촌관계'쯤 되는 건가요?^^ 책값 때문에 애를 먹는 건 저도 마찬가지고요(거기에 '공간' 문제도 심각합니다).--; '제3의 길'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입니다.^^; MEME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좋은 책들과 자주 만나는 한해가 되시길...

박균호 2008-02-08 08:47   좋아요 0 | URL
MEME님..방갑습니다. 저도 40넘은 나이에 공부를 해보겠다고 이곳 저곳 알아보고 있는 처지라서 더욱 방갑네요. 로쟈님의 리뷰보러 자주 들립니다만 여기에 흔적을 남기는 것은 처음이네요. 저는 영어교사로 일하고 있는데 교육대학원을 이미 졸업해서 무슨 대학원을 또 갈까 고민중입니다. 경북지역에 거주하고 있어서 제약도 많고요. 저도 물론 직업과는 상관없는 공부를 하고 싶기도 하고요. 로쟈님이 혹시 이 글을 본다면 괜찮은 분야를 소개해주시면 더욱 감사하겠고요. 여튼 복많이들 받으세요.

로쟈 2008-02-08 10:42   좋아요 0 | URL
인문학은 누굴 위한 공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40넘은 나이에' 할 만한 공부라면 삶을 이해하고 향유하기 위한 공부여야 하지 않을까 싶고요, 제가 아는 분야야 한정돼 있기 때문에 역사나 고전학 분야를 말씀드릴 수밖에 없네요.^^; 관심사에 따르시면 되지 않을까요...

모래한알 2008-02-08 09:02   좋아요 0 | URL
파크님, 말씀 감사합니다. 새해에는 뜻에 맞는 공부의 길을 찾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저도 정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