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대학원신문에서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이학사, 2007)에 대한 서평을 옮겨온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8072). 서평에 관한 글을 쓸 일이 있어서 서평들을 간간이 둘러보는데, 읽다 보니 재미있기에 스크랩해놓는 것이다. 책은 예전에 소개하고(http://blog.aladin.co.kr/mramor/1584851) '이달의 읽을 만한 책' 목록에도 올려놓았었지만 개인적으론 극히 일부분밖에 읽지 못했다(책상에 쌓여 있는 책들 가운데 하나다). '견물생심'이라고 서평 덕분에 또 읽고 싶은 충동을 갖게 되지만 여러 사정을 고려해 일단은 참아두기로 한다...

연세대 대학원신문(157호) 질 들뢰즈의 수업 시기

하나의 텍스트가 국경을 넘어 올 때 변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아마 우리의 경우에는 저자의 생각을 알아들을 수 없게 하는 번역도 한 몫 할 것이다). 변하는 것들 중 하나는 바로 제목일 텐데, 그것을 원서의 제목과 비교해 번역본 앞에서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대략 ‘생각 없는 제목’과 ‘생각 있는 제목’으로 나눌 수 있다면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박정태 옮김, 이학사, 2007)는 ‘생각 있는 제목’에 속한다.

번역본의 프랑스어 텍스트는 들뢰즈 사후, 들뢰즈가 생전에 이런 저런 지면들을 통해 발표했지만 하나의 단일한 텍스트로 묶여 출판되지는 않았던 글들이 라퓨야드(David Lapoujade)의 편집을 통해 두 권의 텍스트(L’i^le deserte et autres textes : textes et entretiens, 1953-1974 Paris : Editions de Minuit, 2002, Deux regimes de fous : textes et entretiens, 1975-1995, Paris : Editions de Minuit, 2003)로 출판된 것이다.

한국어 번역본은 이 두 텍스트에서 12편의 소논문과 철학저널에 발표되었다가 나중에 단행본에 실린 것들 가운데 7편의 소논문을 번역하여 싣고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후에 묶여 나오는 텍스트들의 특징인 발표 시기에 따르는 연대기적 배열과는 상관없이 철학자들에 대한 소논문들이 플라톤부터 연대기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철학사의 재구성
이렇게 사후에, 생전에 여기저기에 발표했던 글들이 독립된 텍스트로 묶여 나오는 것은 들뢰즈만의 고유한 것은 아니어서 이미 푸코의 경우도 Dits et ecrits(Gallimard)로 그의 이런 저런 짧은 글들이 사후에 묶여 나왔으며 그렇게 실린 글들은 우리에게 푸코의 철학을 이해하는데 더 없이 소중한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이것은 들뢰즈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텐데, 이렇게 두 권의 텍스트가 ‘철학사’에 초점을 맞춘 제목과 플라톤에서 푸코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에 대해 연대기적으로 배치된 내용을 가진 하나의 텍스트로 출판된 사연은 역자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한국에서 들뢰즈 철학의 유행에도 불구하고 그의 철학이 지니는 난해함 때문에 수용에 있어서 어려움이 많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한 난해함을 체계적으로 공략하기 위해 역자가 제안하는 방법은 그의 철학적 연대기를 구분하여(1953년 『경험주의와 주관성』에서부터 1968년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까지의 첫 번째 단계, 1968년 『차이와 반복』과 1969년의 『의미의 논리』의 두 번째 단계, 마지막으로 실제적이며 실천적인 문제로 관심을 돌리는 1972년의 『앙티 오이디푸스』이후의 세 번째 단계) 초기의 철학사 연구를 중심으로 들뢰즈 철학의 굵은 줄기를 잡은 다음에 중기의 수렴과 후기의 발산을 따라 들뢰즈의 사유를 이해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역자의 생각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의 중추에 해당하는 제3장「사유의 이미지」에서 보여준 작업은 서양고전철학에 있어서 사유의 임의적인 전제들을 추출하여 고전적 사유의 임의성을 보여주고 이에 대해 필연적인 사유의 형식을 마주침의 사유로 설립하는 작업이었으며 이러한 임의적인 전제를 추출하는 방식은 동일하게 『앙티 오이디푸스』에서 욕망의 임의적인 전제(오이디푸스)를 추출하는 작업과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임의적 전제’의 시굴작업은 그의 니체 연구시기에 이미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완료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초기의 철학사 연구를 통해 들뢰즈의 중기로 수렴해 들어갈 수 있으면서 또한 후기의 발산들을 따라 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그래서 나는 들뢰즈 철학의 가장 좋은 입구는 『니체와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들뢰즈에 도달하는 간략한 지도
그렇다면 들뢰즈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초기의 철학사 연구의 효용성은 지적된 셈인데, 과연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에 실린 철학자들에 대한 소논문들과 들뢰즈의 초기의 철학사 연구는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질 들뢰즈의 수업 시기’의 결과물들은 이미 우리에게 『베르그손주의』, 『니체와 철학』, 『칸트의 비판철학』,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등과 같은 개별적인 연구서로 출간이 되어있다.

그러나 이런 연구서들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연구대상인 철학자의 생각을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전유하는 들뢰즈의 사유 스타일(스피노자와 니체 그리고 베르그손 연구자들에게서 들려오는 끝없는 비난들-그것은 스피노자의, 니체의, 베르그손의 것이 아니다!)과 그 스타일을 통해 전개되는 들뢰즈 사유의 만만치 않은 두께에 고전을 면치 못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에 실린 짧은 소논문들은 문제의식과 그 전개에 있어서 큰 차이 없이 개별적인 연구서를 요약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초기의 철학사 연구 시기가 들뢰즈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중요하다면 이 소논문들은 우리를 들뢰즈에게 가장 빠른 길로 안내하는 간략한 지도와도 같다.

예를 들어, 이 텍스트에 실린 「베르그손, 1859~1941)」은 그간 들뢰즈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베르그손에게 있어서의 차이의 개념」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던 소논문이다. 그러나 “지속duree”, “기억memoire”, “생의 약동elan vital”, “직관intuition” 과 같은 베르그손 고유의 개념으로 베르그손의 철학을 정리할 때 들뢰즈는 베르그손의 핵심에 가장 빠르게 다가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차이와 반복』의 구조를 앞서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이 짧은 소논문은 사후적으로 우리가『차이와 반복』으로 들어갈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물론 『차이와 반복』으로 들어가는 소논문은 이 뿐만이 아니다. 「드라마화의 방법」은 『차이와 반복』의 다른 방식의 요약이기도 하다).



철학사 해설을 위한 최대치의 변화
따라서 들뢰즈의 저서가 거의 대부분 번역되어 있으면서도 수용에 있어서의 어려움이 여전히 크다는 것이 현재 우리의 상황이라면, 한국어로 번역·재구성함에 있어서 이렇게 배치하는 것은 우리를 기대에 들뜨게 하는 초청장일 듯하다.

하지만 나는 역자의 친절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려움은 남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소논문들을 통한 접근이 주는 효용은 읽어야할 텍스트의 페이지수가 줄어드는 정도의 효용에 불과할 뿐, 들뢰즈의 사유 그 자체를 따라가기 위한 어려움은 그리 크게 감소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르그손, 1859~1941)」을 읽으면서 우리는 당연히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관한 시론』이나 『물질과 기억』과 같은 베르그손의 저작을 꺼내보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며 베르그손 본인의 생각이 정말 그러했던가? 라는 어리둥절함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베르그손은 그의 가장 난해한 저서에서”와 같은 들뢰즈의 표현을 보면 울화가 치밀 수도 있다(“이봐 들뢰즈! 당신이 더 어려워!”).

그러나 들뢰즈 철학에 대해 관심이 있지만 『차이와 반복』같은 대작 앞에서 시간적으로 망설여진다면, 우선적으로 「드라마화의 방법」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한글 번역의 페이지수를 계산하면 『차이와 반복』은 708페이지이만 「드라마화의 방법」은 23페이지밖에 되지 않는다.

한편으로 이런 식의 배치는 단지 난점들에 대한 효과적인 공략법만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역자도 언급하고 있지만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 서문에서 니체적 영감에 힘입어 말하고 있는 콜라쥬(collage)의 문제이기도 하다. 니체 이후로 현대 철학이 처한 어떤 비가역적 상황 가운데 하나는 바로 철학 책 쓰기의 문제이다.

철학사는 이미 고정된 것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철학 자체의 재생산이다.” 따라서 “철학사에서 해설은 [해설되는 철학의] 진정한 분신으로 기능해야 할 것이며, 이 분신에 적절한 최대치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방식을 들뢰즈는 「어느 가혹한 비평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철학자들에 대한 비역질을 통해 괴물을 낳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따라서 플라톤에서 푸코에 이르는 들뢰즈의 소논문들의 연대기적 배열은 들뢰즈에 의해 변용된 하나의 사유의 계보 또는 괴물의 계보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유일무이한 철학사를 만나게 된다. 역자가 붙인 제목처럼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를.



마지막으로 책의 표지에 대해서 한 점의 불만을 토로해보자.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에 등장하는 철학자들 가운데 일부의 초상화를 이 책은 표지에 배열했는데. 과연 그 철학자들에 대한 들뢰즈의 글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얼굴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을까? ‘최대치의 변화’를 겪은 얼굴인데도?(정재화│철학 박사과정)

08. 0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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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책소개)『이미지와 생명, 들뢰즈의 예술철학』
    from 도서출판 그린비 2008-08-11 14:34 
    ‘생명의 철학’으로 다시 읽는 들뢰즈『시네마』—탈인간의 가능성을 창조하는 예술의 역능 『이미지와 생명, 들뢰즈의 예술철학』클레어 콜브룩 지음 정유경 옮김|도서출판 그린비|갈래 : 철학, 인문발행일 : 2008년 8월 5일 | ISBN : 9788976823151신국판변형(150*220mm)|304쪽리좀 총서의 네 번째 권으로서 들뢰즈의 독특한 이미지론을 통해 철학과 영화 그리고 예술의 역능을 살핀다. 살아 있는 인간 신체가 이미지화하는 능력으로 세...
 
 
2008-01-15 1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5 2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08-01-16 16:58   좋아요 0 | URL
순간적인 착오였지만, 처음에 제목을 "이봐 들뢰즈, 당신이 더 더러워!"로 읽었다는.ㅜㅜ

로쟈 2008-01-16 17:57   좋아요 0 | URL
'더럽게 어려워'로 정리하면 될 거 같네요.^^

람혼 2008-01-18 10:47   좋아요 0 | URL
저는 정말 개그에 약한 것 같습니다. 또 혼자서 웃고 말았다는.^^;

린(隣) 2008-01-18 02:39   좋아요 0 | URL
들뢰즈 어려운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 뭐라 할 말은 없고..^^;;

그래서 이 페이퍼와 아무 상관없는 소리지만, 작년 말 나온 옵세르바퇴르의 미셸 투르니에 대담 기사를 읽었는데, 들뢰즈를 거론하는 내용이 있어요. 들뢰즈보다 한 살 많은 그가 표현하길 들뢰즈는 가장 친한 친구였고, 나의 형제였다. 나는 그를 보호했고, 나는 그의 노예가 됐다. 허참 두 사람이 친구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돌 줄이야...
고교 2학년 때 신입생인 들뢰즈를 만나 철학을 알려준 이도 투르니에 자신이었다는데, 들뢰즈가 철학을 공부하고는 모두를 그에게 무너졌다는..후후 완죤 무협지? 투르니에는 그걸 어떤 거대한 창조자였다고 회고하더군요.
저는 사실 그 다음 이야기가 더 흥미롭더군요. 저역시 들뢰즈가 얼마나 피로와 권태, 자신의 비관주의와 싸우며 철학했던가를 느끼지만, 투르니에는 그에게 모든 것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고, 모든 것이 불가능했다고 표현하더군요. 아예 고흐와 비교된다고 보더군요.

나름 힘들게 사유했던 사람이니, 그에게 연민을..

로쟈 2008-01-18 23:09   좋아요 0 | URL
제가 듣기에도 투르니에가 들뢰즈 때문에 철학을 접었다고 하더군요...
 

일본의 현대사상에 관한 책들의 출간이 최근 몇 년간 부쩍 늘었다. 예전에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일반 독자라면 이 분야에 관한 읽을 거리가 모자란다고는 말 못하겠다. 최근 출간된 후지타 쇼조의 <전향의 사상사적 연구>(논형, 2007)은 '연구'란 말이 붙은 제목부터가 이제 보다 '본격적인' 저작들이 소개되는 듯하다는 인상을 준다. 당장에 읽을 일은 없어 보이지만 리뷰기사는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08. 01. 12) 천황제와 ‘전향’의 함수관계

패전을 맞이했을 때 후지타 쇼조(1927~2003)는 18세의 육군예비사관 후보생이었다. 그는 귀향하던 도중 서점에서 마루야마 마사오의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를 읽은 것이 계기가 되어 마루야마의 제자가 되었다. 전후 일본 사상에서 마루야마 마사오, 다케우치 요시미 등이 제1세대에 속한다면 후지타는 요시모토 다카아키, 이로가와 다이기치 등과 함께 제2세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다지 많은 글을 남긴 것은 아니지만 마루야마 학파를 대표하는 논객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그가 ‘사상의 과학 연구회’의 ‘공동연구·전향’ 상중하의 3권에 기고한 4편의 논문을 엮어 출판한 것이다. ‘사상의 과학 연구회’는 마루야마 마사오, 쓰루미 순스케, 다케다 기요코를 비롯하여 문자 그대로 전후 일본 민주주의를 리드하는 지식인들의 모임으로 1946년 발족되었다. 특히 이들의 전향에 대한 공동연구가 1959~1962년에 걸쳐서 집필-번역본의 편자 해제에서는 상권이 1952년으로 되어 있지만 59년의 오기일 것이다-되었다는 것은 당시 전후 일본의 사상 상황이 커다란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1955년의 육전협(일본공산당 제6회 전국협의회)과 스탈린 비판, 1956년의 헝가리 동란, 1960년의 안보투쟁과 그 좌절 등을 배경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적인 영향력이 퇴조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대신해서 근대주의적인 이론과 사상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마루야마의 ‘일본의 사상’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을 비롯하여 이시다 다케시, 가미시마 지로, 하시가와 분조 등 마루야마 학파의 연구가 거의 이 시기에 집중되고 있었던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 책에서 나타나는 후지타의 입장도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1956년 발표한 ‘천황제국가의 지배원리’와 이듬해의 ‘천황제와 파시즘’에서 이미 배태되고 있었다. 사노 마나부와 나베야마 사다치카의 전향 성명이 일본 민중의 천황숭배에 대한 ‘굴복’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천황제와 전향은 밀접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후지타의 전향론의 기본적인 시각도 이러한 천황제의 지배원리에 대한 관심과 ‘보편주의로서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만나는 곳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후지타는 1933년을 정점으로 한 ‘급진주의자’들의 집단전향, 1940년의 신체제운동에서 정점을 이루는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강제적 전향, 그리고 패전에 의한 권력의 이동에 따른 ‘반동주의자’들의 전향과 냉전체제의 심화에 따른 점령정책의 역코스와 1952년의 노동절 탄압 직후에 정점에 달한 ‘급진주의자’들의 전향을 각각 단계별로 나누어 총론을 시도하고 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전향, 비전향, 위장전향, 표면적 전향, 실질적 비전향 등에 대한 일면적인 판단을 배척하고 다의적인 양상의 내면으로 들어가 파악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향은 단순한 강제성이나 자발성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한 사상이나 심경의 변화도 아니다. 그것은 곧 자발성의 문제와 강제성의 문제를 동시에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 장의 표제가 ‘쇼와’라는 원호를 사용해서 표기한 점에 대해서 저자는 당시에는 “이러한 종류의 연구 집단과 그 지도자조차도 원호 표기에 위화감을 느끼지 않고 있었음을 나타낸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쇼와’라는 원호를 사용하는 그 자체에 천황제와 전향의 관계가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닐까. 역자 후기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넓은 의미에서의 전향이란 국가와 민족을 다른 어떤 것보다 절대적이고 선험적인 것으로 자신의 내면세계에 받아들이기를 강요하는 국가권력의 강제적 행위를 가리키며, 일본의 경우 그러한 강제성과 자발성의 구분을 애매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천황제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후지타의 글은 난해하다. 마루야마 학파의 글들이 모두 그렇지만 특히 석사과정 때 읽은 후지타의 ‘천황제국가의 지배원리’는 정말 난해했다. 지금 다시 펼쳐보면 새까맣게 줄이 그어져 있지만, 여전히 난해하기는 마찬가지다. 난해한 후지타의 글을 옮기는 작업도 여간한 집중력과 끈기가 없이는 힘들었을 것이다. 역자의 노력에 새삼 감탄한다.

끝으로 이미 반세기 전에 집필한 ‘전향’을 주제로 한 연구서가 오늘날 번역된 의미를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역자는 후기에서 한국의 ‘운동권’과 ‘진보적’ 지식인의 ‘전향’을 날카롭게 꼬집고 있는데, 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만이 아닐 것이다. 식민지시대의 친일파가 해방 후 민족주의자로 ‘변신’한 것은 과연 ‘전향’인지 ‘변절’인지 되씹어보고 싶은 부분이다. 우리 주변에 있는 ‘전향’과 ‘비전향’, ‘변신’과 ‘변절’에 대해서도 사상사적인 연구가 심화되어야 할 것이다.(박진우|숙명여대 일본학과 교수)

08. 0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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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1-14 08:19   좋아요 0 | URL
저의 '강박적 전공분야'(?)와 관련된 반가운 출간 소식이군요.
소중히 갈무리해두겠습니다. 감사드려요, 로쟈님.^^

로쟈 2008-01-14 08:23   좋아요 0 | URL
저는 리뷰만 기다리면 되겠네요.^^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제3판) 읽기의 계속이다. 이 논문에 대한 체계적인 해제를 목적으로 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내키는 대로 몇 대목을 짚어보고 있다. 이 페이퍼에서 다룰 대목은 10절의 후반부로 내용 자체는 간명하며 어렵지 않다. 

 

 

 

 

일단 8절부터 벤야민은 영화라는 기술복제 매체가 배우의 연기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분석한다.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영화는 배우에게서 인격의 아우라를 제거한다는 것이다. 아우라는 무엇보다도 '여기'와 '지금'에 결부되어 있는데, 관객이 현장에서 직접 배우의 연기를 관람하는 연극무대와는 달리 영화에서는 그러한 현장성이 부재하는 것이니까 아우라의 결여는 당연하다. 벤야민은 이렇게 말한다.

"무대 위에서 맥베스를 둘러싸고 있는 아우라는 관객이 입장에서 보면 맥베스 역을 해내는 배우의 주위를 감돌고 있는 아우라와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러나 영화 제작소에서 행해지는 촬영의 특징은 관객의 자리에 카메라가 대신 들어선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연기자를 감싸고 있는 아우라는 사라지기 마련이고, 동시에 그가 연출하는 인물의 아우라 또한 사라지게 된다."(최성만, 124쪽) 

"무대 위에서 맥베드를 둘러싸고 있는 아우라는,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맥베드 역을 해내는 배우의 주위를 감돌고 있는 아우라와 분리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제작소에서 행해지는 촬영의 특징은 관객의 자리에 카메라가 대신 들어선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연기자를 감싸고 있는 아우라는 사라지기 마련이고, 동시에 그가 그려내는 인물의 아우라 또한 사라지게 된다."(반성완, 214쪽)  

"무대 위에서 맥베드 주변에 있는 아우라는, 현장에 있는 관객에게는 맥베드를 연기하는 배우 주위에 있는 아우라와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영화제작소에서의 촬영의 특이한 점은, 촬영이 관객의 자리에 기계장치를 설정한다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배우를 둘러싼 아우라는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고 그와 동시에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의 아우라도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강유원, 10쪽)

이 대목에서 최성만과 반성완본은 대동소이하다. '분리될 수가 없는 것이다'가 '떼어놓을 수 없다'로, '그려내는'이 '연출하는'으로 바뀐 정도이다. 한데, 배우가 "연출하는 인물"이란 표현은 아무래도 좀 어색하다. 강유원본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그냥 '연기하는 인물' 혹은 '그려내는 인물'이 아닌가 한다. 강유원본에서는 '카메라' 대신에 '기계장치'가 들어섰는데, 이 또한 직역인지는 모르겠으나 너무 '기계적'인 번역이다.   

아무튼 같은 연기라고는 하나 연극연기와 영화연기는 그 본질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벤야민의 따르면, 그 차이란 "무대 위에서 움직이는 배우는 자신을 그가 연기하는 역할과 동일시하지만 영화배우의 경우에는 대체로 그러한 동일시가 실패한다는 점이다."(최성만, 125-6쪽) 강유원본은 이 대목은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는 자신을 하나의 역할 속에 옮겨 넣는다. 영화배우에게는 그러한 것이 거의 허용되지 않는다."로 옮겼는데, '거의'는 너무 강한 표현이다.

영어본은 '매우 자주', 러시아어본도 '자주' 정도로 옮겼는데, 영화연기의 경우는 여러 테이크로 나누어 찍으니까 연기의 몰입과 연속성을 확보하기가 어렵다는 정도의 뜻이고 사실 오늘날에는 거의 극복되는 게 아닌가 싶다(벤야민은 김태희의 연기를 떠올리는 듯하지만 전도연처럼 하는 연기도 가능하니까). 해서 요즘 현실에 맞게 수정하자면 "영화배우는 그가 연기하는 역할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데 종종 어려움을 겪는다" 정도겠다.  

물론 그러한 어려움의 이유로 벤야민이 제시하는 건 연기력 자체가 아니라 연기를 둘러싼 환경이다. 아무리 뛰어난 연기력을 갖춘 배우라 하더라도 영화연기에서는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영화배우의 연기는 하나의 통일된 작업이 아니라 여러 개의 개별적 작업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이다. 거기에는 예컨대 촬영소의 임대료, 동료 배우들의 사정, 무대장치 등과 같은 것에 대한 부차적인 고려 말고도, 연기자의 연기를 일련의 조립할 수 있는 에피스드로 쪼개어놓을 수밖에 없는 기계장치의 기본적인 필연성들도 작용한다."(최성만, 126쪽)

"영화배우의 연기는 하나의 통일된 작업이 아니라 여러 개의 개별적 작업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이다. 거기에는 예컨대 촬영소의 임대료, 공연자(共演者)의 사정, 장치 등과 같은 것에 대한 부차적인 고려 말고도, 연기자의 연기를 일련의 조립할 수 있는 에피소드로 쪼개어 놓는 기계의 기본적인 필요들도 작용한다."(반성완, 215쪽)

"그[영화배우]의 연기는 어디까지나 통일된 연기가 아니라 많은 개별적인 연기들이 합해진 것이다. 촬영소의 임대료, 상대 역의 변동, 무대장치들과 같은 것에 대한 부수적인 고려 외에도, 연기자의 연기를 일련의 조립가능한 에피소드로 나누는 기계도 기본적으로 필요하다."(강유원, 10쪽)

여기서도 최성만본과 반성완본은 대동소이하다. 몇 단어가 바뀌었을 뿐이다. 영화연기의 결정적인 특징은 그것이 연극에서처럼 한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나뉘어서 이루어진다는 것. 하나의 연기 신(scene)이 보통 여러 쇼트로 이루어진다는 걸 생각해보면 되겠다. 게다가 하나의 쇼트조차도 여러 차례, 곧 여러 테이크로 촬영되는 게 일반적이다. 그렇게 분리해서 찍은 걸 나중에 편집과정에서 이어붙이는 게 영화인 것이다. 부차적인/부수적인 고려가 아닌 '기본적인 필요'란 영화가 필름조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고 그에 따라서 연기의 분할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해서, 강유원본에서처럼 '기계'가 필요한 게 아니다. 영화를 만드는 기계장치는 이미 주어졌다. 필요한 건 그 기계장치의 필요/요구에 연기를 맞추는 것이다.  

 

 

 

 

이러한 영화연기의 사례로 벤야민이 들고 있는 건 도주 장면의 몽타주(편집)이다. 스튜디오(제작소)에서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을 찍은 다음에, 도주 장면은 나중에 옥외촬영을 해서 두 장면을 이어붙이면 되는 식이다. 이 경우 연극이나 실제에서라면 연속적인 행동이지만, 영화연기에서는 상당한 시간차를 둘 수도 있다. 또 한가지 드는 사례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는 배우의 반응쇼트를 찍을 경우이다. 이때 원하는 연기가 나오지 않았을 경우(연극에서라면 낭패이겠지만) 감독은 며칠 뒤에 아무런 예고 없이 배우의 등뒤에서 총을 쏨으로써 그를 놀라게 하고 그 장면을 찍어서 영화에 끼워넣을 수도 있다는 것. "예술이 지금까지 그것이 피어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으로 여겨져 온 '아름다운 가상'의 왕국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최성만, 126쪽)

물론 최근에는 CG 때문에 실제 연기 장면이 벤야민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기이하게 보일 수도 있다. 가상의 상대역을 고려하면서 연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아름다운 가상'이라기보다는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가상이라고 해야겠다.  

여하튼 그런 식으로 영화에서 배우의 아우라는 상실되며, "영화는 아우라의 위축에 대항하기 위해 스튜디오 밖에서 '유명인물'이라는 인위적 스타를 만들어낸다."(최성만, 128쪽; 반성완, 216쪽) 인용문에서 '유명인물'은 짐작에 영어단어 'personality'를 옮긴 것이다. 강유원본에는 그냥 '퍼스낼리티'라고 옮겨진 것으로 보아 벤야민의 원문이 그렇게 돼 있는 듯하다. 영화 안에서는 이 퍼스낼리티가 구축될 수 없기 때문에 영화 '바깥'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얘기. 이 스타 숭배 현상에 대한 벤야민의 시각은 이렇다.

"영화 자본에 의해 장려되고 있는 스타 숭배는 이미 오래전부터 상품성의 부패한 마력에 지나지 않았던 그런 개성의 마력을 보존하고 있다. 영화 자본이 발언권을 쥐고 있는 한 오늘날의 영화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혁명적 업적은, 영화가 전통적인 예술관에 대해 혁명적인 비판을 촉진하고 있다는 점이다."(최성만, 128쪽)

"영화 자본에 의해 장려되고 있는 스타 숭배라는 이 마력은 실제로는 이미 오래전부터 상품성의 타락한 마력 속에서 겨우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자본이 발언권을 쥐고 있는 한은 오늘날의 영화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혁명적 업적은, 영화가 전통적인 예술관에 대해 혁명적인 비판을 촉진하고 있다는 점이다."(반성완, 216쪽)

"영화자본에 의해 촉진되는 스타숭배는 인격성이라는 마력을 간직하고 있는데, 이 마력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의 상품적 특성이라는 타락한 마력에서만 존립하는 것이다. 영화자본이 발언권을 쥐고 있는 한, 오늘날의 영화에게는 일반적으로 예술에 관한 전래의 표상에 대해 혁명적인 비판을 촉진한다는 것 이외의 다른 혁명적 기여를 인정해줄 수가 없다."(강유원, 11쪽)

벤야민이 보기에 스타숭배 현상은 상품성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으며, 영화산업 자체를 소위 영화자본이 쥐락펴락하고 있는 이상은 영화에서 혁명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비록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다만 벤야민이 기대하는 것은 영화가 전통적인 예술관, 혹은 예술의 전통적인 표상에 대한 혁명적인 비판을 촉진하는 것이다.    

전통적 예술에서라면 예술작품의 대상은 한정돼 있었다. 하지만 "현대의 인간은 누구나 영화화되어 화면에 나올 수 있는 권리를 제기할 수 있다."(최성만, 129쪽) 혹은 "모든 오늘날의 사람들은 영화화되려는 요구를 가질 수 있다."(강유원, 12쪽) 곧, "스크린에 내가 나온다면'이란 욕망을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벤야민이 예로 드는 영화는 지가 베르토프의 <레닌에 관한 세 노래>(http://www.youtube.com/watch?v=eIdeEgY4LTo, http://www.vunet.org/videos/story-313.html)나 요리스 이벤스의<탄광광부> 등이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일별해보기 위해서 벤야민은 글쓰기(문학)이 처한 역사적 상황과 비교한다.

수백년 동안 문학계/문필분야에는 소수의 글쓰는 사람이 있었을 뿐이지만 19세기말부터는 사정이 바뀌어 "오늘날에 와서는 직업을 가진 유럽인치고 직업 체험담이나 항의, 르포르타주와 이와 유사한 것들을 발표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사람은 원칙적으로 거의 없다".(인터넷이 보급된 20세기말은 또 한번의 분기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필자와 독자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그 의미를 상싱하게 되었다. 필자와 독자의 차이는 이제 다만 기능상의 차이가 되었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이렇게되 될 수 있고 저렇게도 될 수 있게 되었다. 독자는 언제든지 필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최성만, 129쪽) 바로 이런 것이 변화된 상황이다. 이어지는 대목.

"고도록 전문화된 노동 과정에서 싫든 좋은 전문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독자는 필자가 될 기회를 얻게 된다. 노동 자체가 곧장 말로 표현된다. 노동을 말로 서술하는 것은 노동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능력의 일부가 된다. 글을 쓰는 권한은 이제 특별한 전문교육이 아니라 종합기술교육에서 그 기반을 얻게 되고, 그럼으로써 그러한 능력은 공동재산의 성격을 띠게 된다."(최성만, 129-130쪽)

"고도록 전문화된 노동 과정에서 싫든 좋은 전문가가 될 수밖에 없는 독자는 필자가 되는 기회를 갖기 마련이다. 소련에서는 일 자체가 곧장 말로 표현된다. 일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노동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능력의 일부가 된다. 글을 쓰는 문학적 능력은 이제 특별한 전문교육이 아니라 다방면에 걸친 기술교육을 통해서 배양되어지고, 그럼으로써 그러한 능력은 공동소유의 성격을 띠게 된다."(반성완, 217-8쪽)

"독자는 좋든 싫든 고도로 전문화된 작업과정에서 전문가가 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전문가로서 저자로 등장할 기회를 얻는다.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노동 자체라야 발언권을 가진다[말발이 선다]. 그리고 노동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노동의 수행에 요구되는 능력의 일부를 이룬다. 글을 쓰는 권능은 이제 더이상 전문 교육이 아닌 다방면의 기술교육에 기초하며 그리하여 공동의 재산이 되는 것이다."(강유원, 11-12쪽)

세 가지 번역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지만 최성만본에서는 '소련에서는'이란 구절이 누락됐다. 그리고, 글을 쓰는 권한/글을 쓰는 문학적 능력/글을 쓰는 권능 등으로 옮겨진 대목은 영어본에 따르면 'literary competence'이고, 러시아어본에 따르면 (직역하자면) '저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아무려나 이젠 누구든지 저자/필자가 될 수 있다는 것. 벤야민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은 영화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글쓰기에는 수백 년이 걸렸던 변화가 영화에서는 단지 십 년 사이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으론 러시아 영화의 경우가 그렇다.

"러시아 영화에서 보게 되는 배우의 일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의미의 배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연출하는 사람들이다. 서구에서는 영화의 자본주의적 착취로 인하여 복제되기에 대한 현대인의 정당한 요구는 무시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화산업은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생각들과 애매한 투기로써 대중의 관심을 자극하는 데만 열을 올리고 있을 따름이다."(최성만, 131쪽)

"러시아 영화에서 보게 되는 배우의 일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의미의 배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연출하는 민중이다. 서구에서는 영화의 자본주의적 착취로 인하여 자기자신을 재현/연출해보려는 현대 인간의 정당한 요구는 외면 내지 무시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영화산업은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스펙타클과 아리숭한 상상력을 통하여 대중의 참여를 자극하는 데만 관심을 쏟고 있을 따름이다."(반성완, 218쪽)

"러시아 영화에서 접하게 되는 배우의 일부는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배우가 아니라 스스로를 연출하는 사람들이다. 서유럽에서는 영화의 자본주의적 착취가, 현대인이 자신의 복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당한 요구를 고려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영화산업은 환상적인 생각이나 모호한 사색을 통해서 대중의 참여를 자극하는 데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강유원, 12쪽)

세 가지 번역 모두 대동소이한데, 다만 마지막 대목에서는 차이가 있다. 강조 표시한 대목들이 영어본에서는 'illusory displays and ambiguous speculations'로 옮겨졌고, 러시아어본에서는 (영어로 직역하자면) 'illusory images and dubious speculations'로 번역됐다. 최성만본에서는 '영화산업'이 주어란 점을 고려해서 'speculations'를 '투기'로 옮긴 듯하다. 한데, 영어본이나 러시아어본에서처럼 'speculations'가 'displays'/'images'와 댓구를 이룬다면 '투기'는 어색하다. 나는 의역으로 보이지만 맥락상 반성완본이 가장 자연스러운 게 아닌가 싶다...

08. 01.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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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 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 2004)을 다룬 "시조차도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http://blog.aladin.co.kr/mramor/1812887)에 이어지는 페이퍼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역사에 대한 철학의 무관심이 18세기 중반까지 서구의 전통을 지배했다고 했는데, 여기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프랑스 혁명'과 '미국 혁명'이었다. 이 두 역사적 사건은 현재가 과거와 근본적으로 단절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었고, "그때서야 비로소 철학은 이성이 본질적인 도덕적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근거를 바탕으로 철학이 역사와 좀더 능동적인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했다."(23쪽)

 

 

 

 

그리하여 보수적인 성향의 칸트조차도 "과거의 권위를 비롯한 모든 권위에 맞서 개인들에게 자기 독립심을 부여하는 혁명적 정신을 찬양했다. 칸트를 비롯한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이성의 자기 확신이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분명하게 인식했는데, 왜냐하면 이성만이 현재를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역사와 철학의 관계에 대한 칸트와 계몽철학자들의 인식은 아직 철저한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 "이들 철학자들에게 있어서 이성은 단지 인간 종에 속함으로써 모든 개인들이 갖게 되는 하나의 정신적 능력일 따름이며, 이성의 힘은 역사의 우발적 사건들과는 완전히 독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성은 역사에 대해서 초월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에(What if?)'라는 역사에 대한 가정법, 혹은 '대체역사'는 아마도 '역사 이후의 이성' 혹은 '역사 바깥의 이성'에 가장 잘 상응하는 사례일 것이다. 역사적 사건의 연쇄에서 오직 한 가지 변수만을 분리해내 다른 것으로 대체한다면 어떻게 됐을 것인가를 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대체역사의 전제는 역사를 마치 물리학에서의 사고 실험 대상처럼 간주하는 것이다). 칸트에서 헤겔로의 이행은 그러한 가정/대체의 불가능성과 상관적인 게 아닐까. 그것은 '역사 바깥의 이성'으로부터 '역사 속의 이성'으로의 이행이다.

"칸트 이후 단지 한 세대가 지난 다음에, 헤겔은 이성 그 자체가 역사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역사와 철학 사이의 간격을 좁히는 최후의 일보를 내디뎠다. 헤겔에게 이성은 모든 인간이 구비하게 되거나 또는 자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추상적인 정신적 능력이 아니라, 개인이 자신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이해하는 방식에서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러한 인식의 전환에서 파생되는 결과는 무엇인가? "만약 생각하는 능력이 시간과 문화에 의해 지속적으로 형성된다면, 역사에 대한 연구만이 우리의 본성과 세계속에서의 우리의 위치를 알려줄 수 있다. 헤겔의 관점에서 보면, 이성 그 자체는 역사-의존적이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철학을 제외하면 역사보다 더 철학적인 것은 없다.'"(23-4쪽) 즉, '역사적 인간'은 우리의 선택지가 아니라 조건 자체이다.  

역사와 철학의 관계를 이렇게 바로잡게 된다면 자유의 의미 또한 달라진다. "만약 이성이 역사에 선행하는 것으로 간주된다면, 합리적 행위자가 자신을 자율적 단위로 경험할 여지가 있"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이 입장에 대한 헤겔의 반응이나 또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비롯하여 헤겔을 따랐던 사람들의 반응은, 그것이 허구적인 생각이라는 것이다."('허구적인 생각'은 'illusory conception'의 번역이다.) 왜인가?

"왜냐하면 그 입장은 표면 아래에 있는 심층을 깊이 있게 탐구하지 않으며 또한 개인들이 왜 그러한 선택을 하는지도 묻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선택은 개인들이 모든 종류의 자원들, 즉 경제적, 문화적, 교육적, 심리적, 종교적, 기술적 자원들에 전급할 수 있는가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 따라서 사람들이 홀로 남겨진 상태에서 타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을 그 시대의 지배적 힘에 종속되게 만든다."(24-5쪽)

이에 따른 결론: "역사보다 더 철학적인 것은 없다는 믿음은 다음과 같은 것을 함축한다. 외부의 힘과의 영구적인 절충을 통해 개인의 선택이 이루어진다는 점을 깨달을 때 진정한 자유가 시작된다. 따라서 자유는 우리가 이러한 힘을 통제할 수 있게 되는 정도에 의해서 평가되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힘이 우리를 통제하게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철학은 9.11의 의미에 대한 공적 토론에 기여할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렇게 해야 할 책임도 있다."

08. 01. 12.

P.S. 예전에 책을 읽으면서 빼놓았었는데, 보라도리의 서론 '테러리즘과 계몽주의의 유산'은 잘 씌어진 글이다. 하버마스와 데리다 철학의 '입문'으로서 간략하면서도 요긴하다. 해서 몇 차례 '브리핑'을 시도해볼까도 한다. 우선은 '공적 참여의 두 가지 모델'에 관한 절을 브리핑의 대상으로 삼으려고 했는데(이 절은 저자가 한권의 책으로 발전시켜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전에 역사와 철학의 관계에 대하여 지난번에 미진하게 끝내놓은 듯해서 마저 정리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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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cinema 2008-01-13 09:55   좋아요 0 | URL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8-01-13 09:59   좋아요 0 | URL
덕분에 한번 더 읽어보고 오타들을 수정했습니다.^^
 

두 편의 문학관련기사가 왠지 겹쳐지기에 나란히 옮겨놓는다. 채희윤의 신작 장편소설 <소설 쓰는 여자>(현대문학, 2008)에 대한 소개기사와 '문학상 인플레'에 대한 '최재봉의 문학풍경' 기사다. "자본주의 시대에 사양산업인 소설"이란 작가의 자조가 무색하게 문학상 '현상금'은 갈수록 치솟고 있다(문단의 주도권 다툼처럼도 보인다). 해서 작가들에겐 소설 쓰기 어렵다는 사회이지만 동시에 소설 쓰기를 권하는 사회가 현재의 한국사회다(중견 작가들은 창작스쿨 강사로 뛰게 하는 사회이기도 하다). 장편소설에 걸린 상금만 일년에 몇 억이니까 앞으로 우리는 해마다 토탈 몇 억짜리의 소설들을 읽게 될 것이다!  

세계일보(08. 01. 12) 소설가 지망생 눈에 비친 가정, 그곳은 감옥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은 문학을 하기 위해선 “교도소 같은 곳에 정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체제 순응자의 범상함에서 뜨거운 예술혼이 분출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미국 소설가 오 헨리도 감옥에서 소설가로 거듭났다. 예술의 영감을 얻기 위해 파출부를 자처한 여자는 어떨까. 확신범만큼 강렬하지 않지만, 적어도 평범하지는 않다.

소설가 채희윤(54)씨의 첫 장편 ‘소설 쓰는 여자’(현대문학)에는 신선한 글감을 찾기 위해 일부러 ‘부엌데기’ 노릇을 하는 여성이 등장한다. 32세 소설가 지망생 서주희는 부족한 상상력을 자책하며 일탈을 꾀한다. 심야 주차안내원, 생맥주집 아가씨,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거쳐 파출부로 변신한다. 월수금은 공인회계사의 저택으로, 화목토는 퇴역 장성의 집으로 출근한다. 파출부 주희에게 비친 가정은 감옥 같은 곳이다.

“존경이란 신비함이 바탕이 되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죠. 그 신비함을 조성하는 강력한 인자가 미지와 거리감인데 그것이 가장 쉽게 깨지는 장소가 바로 가정이죠. (…) 일종의 유형지가 아닐까 싶어요.”(92쪽)

공인회계사의 아내는 남편보다 애완견을 사랑하고, 퇴역 장군은 낡은 반공주의와 나르시시즘을 고수하며 노추(老醜)를 보인다. 주희는 이들 인간 군상의 위선, 피폐, 좌절된 꿈을 면밀히 관찰한다. 파출부를 빙자한 문학 수업은 공인회계사와의 불륜이 발각되던 날 종결된다. 결국 주희는 간통죄로 구치소에 갇히며 토마스 만이 설정한 예술가의 조건을 충족시킨다.

소설의 뼈대는 주희가 두 가정에 ‘잠입’해 겪은 체험이다. 이야기의 다른 축은 주희가 감춰온 쓰린 개인사다. 주희는 기생 딸로 태어나 17살에 요정 지배인에게 성폭행당했다. 상처와 죄책감 때문에 첫사랑을 떠나보내야 했고, 이후의 사랑도 엉망진창이 된다. 소설에 생을 거는 주희의 집요함은 상처 치유의 의지이기도 하다.

“정말이지 나는 소설가가 되기 위해 소설을 쓰려는 것인가요, 아니면 소설 쓰기를 통하여 나를 구원하려고 하는 것일까요?”(61쪽)

수희가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들었던 소설 강의가 중간중간 인용되며 이야기 전개를 돕는다. 이를 테면, 주희는 퇴역 장성과 진보 교수 며느리의 살벌한 다툼에서 소설적 요소를 포착하며 “요약과 장면, 묘사 이 모두가 다 들어 있어야 합니다”란 강사의 가르침을 상기한다. 예비 소설가 주희가 세상을 묘사할 때 쓰는 비유는 일상적이지 않다. 흉물스러운 퇴역 장성은 표도르 카라마조프, 장형보, 딤즈 데일 등 문학적 인물에 비견되며 더욱 사악하게 표현된다. 파출부의 시선으로 본 두 가정의 삐걱거림도 흥미롭지만, 상투적 문장을 결벽증 환자처럼 피하는 문체가 읽는 맛을 돋운다.

작가 채씨는 첫 장편에 대해 “매우 자기고백적인 소설”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1989년 등단해 소설집 ‘한 평 구 홉의 안식’ ‘곰보 아재’ 등을 펴냈다. 장편은 등단 20년 만에 처음으로 썼다. “처음으로 내가 자신을 한번 풀어봤습니다. 이 자본주의 시대에 사양산업인 소설에서 제가 무슨 영화를 구하겠습니까. 주희가 소설로 과거의 상처를 스스로 극복하고 첫사랑에 다시 다가가듯, 자신의 삶을 깊이 성찰할 뿐이지요.”(심재천 기자)

한겨레(08. 01. 12) 문학상, 현상금 인플레 시대

문학 월간지 <문학사상> 신년호를 보니 ‘문학사상 장편소설상’이라는 새로운 문학상을 제정한다는 안내문이 있다. 국내 출간과 동시에 해외에서 영어로 출간한다는 사실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1억5천만원의 상금 규모가 놀랍다. 안내문에서 밝히고 있는 대로 ‘국내 최고 상금’에 해당한다. 세계일보사가 주관하는 세계문학상, 그리고 조선일보사가 지난해 새로 만든 ‘대한민국 뉴웨이브 문학상’의 1억원 상금에서 50% 인상된 것이다. 10여 년 전 국민일보사에서도 1억원 상금을 걸고 장편소설을 공모한 적이 있으니, 1억5천만원 상금은 한국 장편소설 현상공모의 기록을 깬 셈이다. 국문 및 영문 번역 출판저작권을 출판사가 영구 확보한다는 단서가 붙기는 했어도, 기록은 기록이다.

비록 억대에는 못 미치지만 상금 액수가 수천만원대에 이르는 고액 장편소설 현상공모는 여럿 있다. 문학동네소설상이 5천만원의 상금을 내걸고 있으며, 한겨레문학상 역시 올해부터 상금을 5천만원으로 늘렸고, 지난 가을호로 창간된 <문학의 문학>도 5천만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를 시작했다. 이밖에도 창비의 창비장편소설상과 민음사의 오늘의작가상이 각각 3천만원, 문학수첩의 문학수첩작가상과 문학동네의 문학동네작가상이 각각 2천만원의 상금을 걸고 작품을 모집하고 있다.

이 상들이 대체로 신인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별다른 문단 경력이 없어도 장편소설 하나만 잘 쓰면 순식간에 수천만원 내지는 억대의 상금을 거머쥘 수 있다는 말이 성립한다. 실제로 신인 작가 서유미씨는 지난해 문학수첩작가상과 창비장편소설상을 연달아 수상하면서 5천만원을 ‘벌었다.’ 소설책 한 권 값을 1만원이라 쳐도 5만 권을 팔아야 얻을 수 있는 인세 수입에 해당한다. 몇몇 잘나가는 베스트셀러 작가들을 제하고는 웬만한 기성작가들조차 1만 권은 물론 초판 3천 부도 소화하기 어려운 시장 상황에서 이런 고액 상금은 상당한 특권이라 할 수 있다.

고액 상금을 내건 문학상이 느는 데에는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없지 않다. 문학의 위상이 갈수록 저하되고 있는 상황에서 높은 액수의 상금을 통해서나마 문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제고하고, 재능 있는 잠재 작가들의 참여와 문학적 투신을 유도하는 효과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연한 말이지만, 상금 액수의 고저가 작품의 질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다.

상금 액수를 경쟁적으로 늘리는 것은 상대적으로 나은 작품을 확보하기 위한 방책으로 이해되지만, 장기적으로 보아 그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것은 아닌지 따져 볼 일이다. 가령 프로스포츠 선수들의 과도한 몸값이 경기 발전에 별로 기여하지 못하는 상황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른바 ‘먹튀’가 문학에서라고 없으란 법은 없지 않겠는가.

고액 문학상을 문학에 대한 사회적 투자라는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이유는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이 혹시라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성장 이데올로기의 문학적 반영은 아닌지 점검해 볼 일이다. 문학적 논리와 맥락에 따른 자연스러운 문학 부흥은 물론 바람직스럽되, 인위적인 경기 부양 식의 ‘쏟아붓기’는 곤란하다. 거품 경기가 경제의 건전한 기반을 갉아먹는 것처럼 과도한 ‘투자’는 작가와 문학을 타락시킬 수도 있다. 문학과 돈, 적당한 거리와 긴장이 필요하다.(최재봉기자)

08. 0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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