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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주목하는 작가의 소설집이 출간됐다. 정미경의 <내 아들의 연인>(문학동네, 2008). 표제작 외에 몇 작품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 특히 '내 아들의 연인'은 소위 '대한민국 1%'의 내면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특출한 작품이었다. 평론가 김형중의 평을 빌면, "'내 아들의 연인'은 유한계급에 속하는 중년 부인을 화자로 등장시켜 계급간 단절의 강고함을 다룬다. 계급은 경제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부르디외 식으로 표현해 문화적 ‘구별짓기’의 산물이기도 하다는 사실, 그리고 계급간 갈등이란 강자가 약자에 대해 베푸는 온정이나 약자가 강자에 대해 행사하는 투쟁만으로 해소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란 사실을 세심하게 보여준다. 19세기 영국 소설들의 예에 육박하는 섬세한 세부묘사와 심리묘사가 가히 압권이거니와, 손쉬운 온정주의와 도식적인 화해를 거부한 작가적 치열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내가 바라는 건 이런 작품들을 더 많이 읽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한국일보(08. 06. 14) 자본주의에 새겨진 계층의 골 선연히…

정미경(48ㆍ사진)씨가 2001년 늦깎이 소설가 등단 이후-1987년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당선됐지만 큰 활동 없이 가정주부로 살아왔다- 보여주는 활력은 대단하다. 2002년 오늘의작가상 수상작<장밋빛 인생>을 비롯한 두 편의 장편과 2004, 2006년 각각 출간한 소설집에 이어 이번에 세 번째 소설집을 펴냈다. 2006년 이상문학상 수상작 ‘밤이여 나뉘어라’와 같은 해 한국일보문학상과 황순원문학상 최종 후보에 올랐던 표제작을 비롯, 수록작 7편은 외적 후광 없이도 스스로 빛을 발하는 완성도를 갖췄다.

한국소설에서 드문 “유한계급의 삶의 세밀한 묘사”(평론가 김형중)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화제가 됐던 표제작은 가난한 여자와 교제하는 아들의 연애를 지켜보는 상류층 여성의 복잡한 심사를 그리고 있다. 가족과 컨테이너에 산다는 아들의 애인을 직접 만나보고 호감을 품으면서도 그녀는 “어째 착 붙는 느낌이 오지 않”음을, 그 이물감이 단순히 “컨테이너 때문은 아니”란 점을 직감한다.
아들의 일기를 통해 두 연인의 관계가 점차 멀어지고 있음을 알아채면서 그녀는 아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스스로도 “우울한 안도감”을 느낀다. “현이, 넌 걔의 가난이 싫은 거야. 간단한 얘기 복잡하게 하지 마라.” 끝내 빈부의 아비투스(습속) 차이를 극복 못하는 연애담에, 상류층의 삶의 감각을 보여주는 일상적 에피소드를 여러 겹 덧씌우면서 작가는 자본주의 사회에 아로새겨진 계층의 골을 선연히 보여준다.

물질사회 속 비틀린 관계의 양상은 ‘너를 사랑해’에서 더욱 극적으로 드러난다. 한 재력가의 개인 자산관리사로 고용된 ‘나’는 저조한 실적을 무마하려 7년을 사귀어온 애인 Y를 여동생 친구로 속여 ‘영감’(재력가의 별칭)에게 소개한다. 영감이 Y에게 호의를 품고 물량 공세를 퍼붓는 것은 바라던 바이지만, 영감의 구애에 점차 끌려들어가는 Y를 향한 나의 질투와 원망은 미처 예측 못한 감정이다. 분노와 무기력으로 참담해하는 ‘나’에게 Y가 말한다. “우린 꽤나 멀리 왔어. 돌아서면, 그 순간 우린 둘 다 소금기둥이 되는 거야.” 돈과 욕망을 연료로 폭주하는 영구기관에서 도로 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른 다섯 편은 욕망의 문제에 집중한다. ‘밤이여, 나뉘어라’는 의대 출신 영화감독 ‘나’와, 평생 그를 주눅들게 한 의사 친구 P의 이야기다. 주체 못할 재능과 욕망 속에 몰락해가는 P와, 그를 의식하며 꾸려온 자기 삶을 지키고자 친구의 추레한 모습을 기억에서 지우려 하는 ‘나’의 전도된 관계가 삶을 추동하는 욕망의 본질을 들춘다.

어긋난 욕망의 비극적 이중주는 ‘들소’와 ‘매미’에서도 들을 수 있다. ‘바람결에’는 한 불임부부의 거듭된 인공수정 시도가 정상가족 회복의 욕망에서, 파탄난 결혼생활을 기신기신 잇는 수단으로 전락해가는 과정을 묘파한다.

안정된 서사 구조, 미세한 정서를 포착해내는 문장이 정씨의 작품을 빛낸다. “계층이나 직업을 묘사할 때 입체감을 주려 디테일 리서치를 많이 한다”는 작가의 성실성은 의사, 영화감독, 조각가, 대학강사 등 작품집 속에 등장하는 다종한 전문직 종사자들의 생생한 모습을 통해 증명된다.(이훈성기자)

08. 06. 14.

P.S. 작가에 대한 간략한 소개는 http://blog.aladin.co.kr/mramor/99455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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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부 2008-06-14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함 읽어볼께요..감솨!

로쟈 2008-06-14 16:21   좋아요 0 | URL
^^

다락방 2008-06-14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신문에서 정미경의 이 소설집이 나왔다는 걸 알고(조선일보였어요 --)앗 정미경이로구나, 하면서 구매하려고 알라딘에 들어왔는데 로쟈님의 이 페이퍼가 있네요. 정미경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국내 작가예요. 그녀의 모든 작품을 읽은 것 같은데(확실치는 않지만) 저는 특히 [장밋빛 인생] 과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가 좋았어요. 로쟈님께서도 주목하시는 작가로군요!

로쟈 2008-06-15 11:04   좋아요 0 | URL
네, 안정감을 주는 작가입니다...

비로그인 2008-06-15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미경의 소설집이 나왔군요. 저도 좋아하는 작가인데 기대가 되네요.

비로그인 2008-06-15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ss에 추가해서 수시로 들르는 눈팅유저입니다.^^

로쟈 2008-06-15 11:04   좋아요 0 | URL
99%에 속하시군요.^^
 

중대 대학원신문의 서평기사를 담비에서 옮겨온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10644). 아주 두툼한 책 <The left, 1848~2000: 미완의 기획, 유럽 좌파의 역사>(뿌리와이파리, 2008)에 대한 리뷰이다. 전국민적인 촛불집회 덕분에 우리는 현단계 민주주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볼 기회도 얻게 되었는데, 그러한 성찰/상상에 요긴한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담비(08. 06. 07) [구양봉의 橫書竪說] 민주주의의 확장을 상상하기 위한 필독서

무려 1천28쪽에 달하는 <The left, 1848~2000: 미완의 기획, 유럽 좌파의 역사>(2002)는 영국의 역사가 제프 일리가 20여 년에 걸쳐 집필한 역작이다. 20여 년에 걸쳐 유럽 좌파의 150여 년을 정리한 이 책을 10여 개월에 걸쳐 전문 번역가 유강은씨가 깔끔히 번역해냈고, 이런 노고가 빛을 발했는지 5만 원의 고가인데도 불구하고 벌써 3쇄(총 발행부수 3천500 부)까지 찍었다고 한다.

현재 미국의 미시건대학 칼 포트 석좌교수로 재직 중인 일리는 원래 독일사 전문가이다. 일리가 먼저 유명세를 타게 된 것도 독일사 부문으로서, 동료인 데이비드 블랙번과 공저한 <독일 역사기록의 신화>(1984)는 독일이 여타 유럽 국가들과는 다르게 발전해왔다고 주장하는 독일 역사계의 이른바 ‘특수한 길’(Sonderweg) 테제를 정면으로 비판한 ‘숨겨진 걸작’ 이다. 이 책은 같은 해에 <독일사의 특수성(The Peculiarities of German History)>이라는 제목으로 영역됐고, 국내에도 작년에 <독일 역사학의 신화 깨트리기> 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물론 이 책은 적어도 지금까지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고, 그래서 유독 ‘한국에서만’ 숨겨진 걸작이 되어 버렸다.



일리의 정치적 성향을 굳이 추적하자면 정통 맑스주의자는 아니지만 넓은 의미에서 좌파이고, 좀 더 한정해서 말하자면 그람시주의자에 가깝다. 일리의 이런 성향은 이처럼 자칫 헛발을 내딛기 쉬운 거대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동력의 하나가 된 듯하다. 일례로 일리는 좌파 역사가들이 좌파가 밟아온 지난날의 영광과 오욕을 다루면서 종종 누락하고 있는 여성운동과 환경운동 등을 정당하게 복권하고 있는데, 이 점은 일리의 이 책에 버금갈 만한 유일한 책인 도널드 사순의 <사회주의 1백 년: 20세기의 서유럽 좌파>(1988)가 상대적으로 여성운동과 환경운동에 지면을 아끼고 있는 점과 비교해 볼 때 더욱 더 빛을 발한다.



이런 점에서 일리가 자신의 책에 원래 “민주주의 벼리기”(Forging Democracy)라는 제목을 단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일리가 좌파의 역사를 기록하게 된 이유가 바로 “모름지기 좌파의 역사는 인간의 잠재력을 제한하고 왜곡하며, 공격하고 억압하고, 때로는 심지어 완전히 없애버리려고 하는 불평등의 체제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좌파가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에 별반 기여하지 않았다면 일리는 좌파의 역사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일리가 유럽 좌파의 역사를 뒤바꿔놓은 분기점 중의 하나로 꼽는 1968년의 유산을, 그리고 그 유산에 기대어 등장한 정체성의 정치학(특히 동성애 운동과 성애의 정치학 등), 혹은 말 그대로 새로운 정치학(반문화 운동과 빈집점거 운동 등)을 비교적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일리가 보기에 이 새로운 운동‘들’은 “민주적 실천의 새로운 영토들을 지도상에 기입”함으로써 “민주주의가 가질 수 있는 의미 역시 변화”시켰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이런 점에서 이 책은 J. 호머먼의 재기발랄한 책 <붉은 아틀란티스: 공산주의가 부재한 공산주의 문화>와 겹쳐 읽을 만하다. 공산주의를 ‘20세기 최대의 미학적 프로젝트’로 해석하는 이 책은 공산주의가 열어놨지만 우리가 간과해 왔던 ‘새로운 영토들’을 보여주고 있다.)

앞표지

물론 이 책에서 굳이 아쉬운 점을 찾으면 없는 것도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일리가 스페인, 더 나아가 세계 곳곳의 아나키즘에 별반 주목하지 않은 게 못마땅하다. 일리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또는 적어도 내가 유럽 근대사회의 위대한 헌법제정 국면들이라고 부르는 몇몇 집중적인 변화의 시기를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었다”고. 그렇다. 일리의 이 말을 되받아 말하면 나는 아나키스트들이야말로 이런 혁명, 이런 국면들을 앞장서 열어젖힌 인물들 중의 하나라고 말하련다. 어떤 점에서 사회주의자들(공산주의자들)은 아나키스트들이 맺어놓은 열매를 받아먹거나 망쳐오지 않았을까? 1848년, 1871년, 1917년, 1968년이 모두 그랬다.



올해는 “잃어버린 10년”에 분통을 터트리던 보수 우파들이 승리의 샴페인을 터트린 해이다. “잃어버린 10년” 운운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해방 이후 50여 년을 도둑맞았다”라고 비웃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손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일리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20세기의 좌파가 추구했던 미래의 일부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우리는 미래의 나머지를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 ‘나머지 미래’에 뭔가를 변화시키려면, 우리는 20세기 좌파의 유산 속에서 “실행 가능한 형태의 민주주의의 확장을 다시 상상하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것이 이 책이 갖고 있을지 모를 단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일독을 강력히 권하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08. 06. 11.

P.S. 리뷰를 읽다가 개인적으로 일리의 <민주주의 벼리기>보다 더 관심을 갖게 된 책은 호버만의 <붉은 아틀란티스>다(도서관에 없길래 해외주문을 넣었다). 찾아보니 LRB에 피터 울른(웰렌)의 리뷰가 지난 1999년에 실린 바 있다(http://www.lrb.co.uk/v21/n23/woll01_.html). 울른은 언젠가 언급한 적이 있는데, <영화의 기호와 의미>(영화진흥공사, 1990)의 저자이다. 리뷰의 제목이 'Stalin at the Movies'인 것으로 보아 책은 스탈린시대를 다루고 있는 듯하다. 궁금하고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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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akim 2008-06-11 22:04   좋아요 0 | URL
피터 월렌은 작가-구조주의를 표방한 이론가로 바쟁의 리얼리즘을 비판하죠.^^ 근데 저 책의 번역은 좀 그래요^^ 워낙 월렌의 글이 명료해서 그나마 의미가 통한다고 해야하나....

로쟈 2008-06-12 08:07   좋아요 0 | URL
그래서 영어본까지 구했던 기억이 나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06-12 23:22   좋아요 0 | URL
돕 -스위지 논쟁이 자본주의 이행논쟁의 전부인줄 아는 이들에게 일리-블랙번의 주장을 들어보라고 하고 싶어요.저는 독일 역사논쟁 중 두번째로 흥미로왔어요(가장 흥미로운 논쟁은 하버마스_놀테 논쟁).
독일은 시민계급이 약해서 절대주의에 가까운 프로이센,제 2제국,나치 등의 독재가 생겼다는 기존의 주장에 맞서 독일도 이미 자본주의의 길은 걸었으며 독일의 특수한 길과 반대되는 정상적인 그런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게 있느냐...영국 자본주의라고 순탄했는줄 아느냐고 일갈했는데 어쩐지 이진경이 사과방에서 식민지 반봉건론자를 비판할 때 내세운 주장과 비슷하다고 여겼어요.외국인이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했기에 독일역사학계에서 대단한 논쟁이 일어났다는데...우리나라에선 진짜 조용하네요.

로쟈 2008-06-12 23:54   좋아요 0 | URL
그런 대목들을 짚어주는 글을 한번 써보시죠.^^

노이에자이트 2008-06-18 23:52   좋아요 0 | URL
사회사학파(빌레펠트 대학학파)의 구조적 연속론(독일의 시민계급이 약해서 제2제국,나치가 생겼다는 이론)에 대항해서 싸우던 독일 보수파(기민-기사당 지지자)들은 일리ㅡ블랙번의 이론을 대대적으로 환영합니다.진보파(사민당 지지자)인 사회사학파들은 난데없이 같은 편인줄 알았던 좌파에게 얻어맞죠.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너 자이퉁의 문화부장이던 요아힘 페스트는 1982년경 이 신문에 일리-블랙번을 호의적으로 소개합니다.이어 후속편은 1986년 역사논쟁.여기서는 페스트,놀테에게 콜 수상이 편들어 주면서 하버마스와 사회사학파의 거물들을 난타합니다.이때 페스트,놀테는 <나치는 볼세비키를 방어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주장을 내세웁니다.당연히 반공색채가 강한 미국 레이건 정부까지 독일 보수파의 손을 들어주죠.결국 독일 통일로 보수파 승리.역사논쟁은 당파성이 강하다는 걸 증명해주는 사건입니다.

로쟈 2008-06-18 23:58   좋아요 0 | URL
놀테와 역사논쟁은 지젝도 자주 언급하기 때문에 익숙한데, 사회사학파 얘기는 처음 듣습니다. 해서, 댓글로 읽기에는 아까운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6-19 23:26   좋아요 0 | URL
사회사학파의 대표인 한스 울리히 벨러와 위르겐 코카의 책은 국역도 되어 있고 요즘 신문에 글 자주 쓰는 김호기 씨가 빌레펠트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어요.역사가 논쟁 때 벨러는 당연히 하버마스 편에 섰고 보수파인 미하엘 슈티르머(당시 콜 수상 브레인)는 놀테 편에 섰습니다.벨러와 슈티르머는 똑같이 비스마르크 전공인데 벨러는 독재자로 그리고 슈티르머는 사회주의 탄압법을 옹호하는 등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지젝 신드롬의 허와 실'을 다룬 한겨레의 '우리시대 지식논쟁'에서 마지막 꼭지를 옮겨놓는다. '지젝 전문' 번역자이기도 한 이성민씨의 글이다(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91981.html).

우리시대 지식논쟁/ 지젝 신드롬의 허와 실 ③ 지젝을 제대로 읽는 법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에 대한 마지막 글이다. 3주 전, 논쟁의 운을 뗀 이현우씨는 우리 시대의 이념적 지형을 이해하고 돌파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다며 지젝의 급진성에 주목했다. 박정수씨는 이러 주장을 반박하며 지젝의 사유에 새로운 세계를 창안하는 실천적 돌파구가 결여돼 있다고 했다. 이 논쟁의 마지막 글을 맡은 이성민씨는 박정수씨를 다시 반박한다. 지젝이 말하려는 것은 혁명 그 자체가 아니라 ‘혁명의 조건’이라고 지적한다. 그 조건의 핵심은 욕망하고 향유하는 각 개인, 곧 주체다. (제도로서의) 대안을 말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바로 욕망을 향유하는 개인의 변화다. 그런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지젝이 던지는 급진적 사유의 중핵이라는 게 이성민씨의 생각이다.(안수찬 기자)

한겨레(08. 06. 07) 혁명의 주체가 혁명의 대상이다

오늘날, 미국식 세계 자본주의가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지구상에서 혁명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물론 오늘날 미국적 문명 자체의 궁극적인 위태로움이 조금씩 감지되고 있지만 말이다. 아마도 빙하가 녹아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정도로 사람들은 또한 저 위태로움을 감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마치 혁명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기라도 하는 듯 끊임없이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한 명 있는데, 그가 슬라보예 지젝이다. 그런데 그의 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누구보다도 혁명이 오늘날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유럽문명의 미래와 관련하여, 혁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젝의 정치적 저술들을 읽을 때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혁명에 대한 직접적인 요청으로 읽을 때 반드시 그를 잘못 읽게 된다. 박정수씨는 지젝의 정치적 기획이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결합한 글로벌한 국가체제(제국)를 수립하는 것에 있다고 하면서, 이현우씨의 글을 오독했을 뿐 아니라, 지젝 자신을 오독했다. 지젝은 그런 말을 한 적이 단적으로 없다. 게다가 이러한 오독을 염려하여, 지젝은 레닌의 반복이 레닌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님을 명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오히려 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비롯한 레닌의 방식들을 따져보면서, 오늘날 혁명의 조건 그 자체를 탐색하고 있다.

이렇게 말해본다면, 지젝은 혁명 가능성의 조건을 탐구하는 사람이다. 그는 오늘날 혁명이 가능하다고 말하기에 앞서서 반드시 묻지 않으면 안 될 물음을 묻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생략될 수 있는 물음이 아니다. 그것은 혁명에서 혁명적 주체를 생략할 수 없는 만큼 생략할 수 없는 물음이다. 그런데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으면서 지젝은 전통적으로 정치적 혁명에 대해 가장 회의적이었던 사상을 끌어들인다. 그것은 바로 프로이트에 의해 개시된 정신분석이다. 프로이트는 볼셰비키 혁명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회의적이었다. 라캉이 서유럽의 68혁명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회의적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지젝의 혁명에 대한 단적인 규정은 이렇다. “근본적 혁명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오래된 해방적인 꿈을 실현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의 꿈꾸는 양태 그 자체를 재발명해야만 한다.” 정신분석적 통찰을 담고 있는 이 말은 무의식을 건드리지 않는 혁명은 혁명이 아니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혁명은 단지 국가를 전복하는 행위에 불과하지 않다. 그런 일이라면 사실, 서유럽인들은 몰라도 한국인들은 이미 여러 번 해본 경험이 있다. 정신분석이 혁명에 대해 회의적인 이유는 주체 편에서의 변화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술에 의지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저 유명한 남자들이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지젝이 이와 같은 정신분석적 통찰을 자신의 정치적 사유에 끌어들이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혁명을 하지 말자고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혁명에 대한 더욱 근본적인 규정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다.

그런데 혁명에 대한 이와 같은 규정은 생각해보면 결코 새로운 규정이 아니다. 그것은 예컨대 새로운 학문적 발견이 아니다. 그것은 실상 우리가 심중에서 잘 알고 있는 진리이다. 하지만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어떤 것이다. 오늘날 진보적인 정치학자들이나 활동가들은 지금도 새로운 변혁의 전략을 짜느라고 분주할지 모른다. 혹시 그들이 진보를 믿고 있다면 말이다. 오늘날의 상황이 좌파에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이명박씨의 눈물 나는 참회가 잘 알려주듯이, 우파에게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우리의 자부심인 민주주의는 바로 이만큼 정치가들에게 공평한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해서 조금 더 말해보자. 한때 지젝은 민주주의를 최선책은 아니지만 차선이라고 하면서 옹호했다. 서유럽 학자들이 근본적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을 때, 그도 이러한 희망에 동참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얼마 후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취소했으며, 민주주의는 궁극적 대안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궁극적 대안이 무엇인지 자기 나름의 의견은 전혀 밝히지 않으면서 말이다. 언뜻 위선적으로 보이는 그의 제스처에서 진리를, 이 시대의 증상을 읽어보자.

이 시대는, 이렇게 말해본다면, 문명사적 문제를 우리에게 서서히 내밀고 있다. 이는 단지 국가와 국가의 관계가 문제라거나 어떤 전지구적 문제가 있다는 모호하거나 동원력이 없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류가 스스로의 소비와 향유방식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재고해야 하는 때가 도래하고 있다는 말이다. 예컨대 오늘날 인류가 처한 환경적 재앙의 문제가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본연의 환경 운동은 오늘날, 정치적 장을 벗어나 광범위한 소비 운동과 병행되고 있다.

이러한 문명사적인 문제는 단지 정치적 제도나 경제적 제도 내에서만 제기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이나 예술이나 교육이나 연애 등을 비롯해서 인간의 문명적 활동 전 영역에서 제기되는 것이다. 지젝은 향유를 정치적 요소로서 보아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향유와 향유의 방식 그 자체가 문제라는 핵심적 요점을 담고 있기에 올바른 방향에 서있는 말이다.

아마도 미국인들이 북한에서 발견하고 싶은 첫 번째는 코카콜라나 맥도널드 광고판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의 향유 방식이 이슬람권이든 북한이든 가리지 않고 전세계에 유통되기를 원할 것이다. 아시아인들이나 유럽인들은 그 방식이 얼마나 저급한 것인지를 알 정도의 문명적 존엄감을 아직은 잃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라캉의 가르침에 따라서, 향유를 정치의 핵심적 요인으로 제출하는 지젝의 제스처를 우리가 함께 떠맡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동시에 우리는 민주주의나 여타의 대안적 정치 체계에 대한 논의보다 훨씬 중차대한 과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감각을 획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안적인 구체적 정치 체계에 대한 지젝의 집요한 침묵에서 내가 읽고 싶은 진리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문명을 구성하는 일체의 것을 재발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다면, 오늘날 각자가 스스로 선택한 영역에서 해야 할 일은 실로 너무나도 많은 것이다. 이것이 내가 지젝의 통찰을 빌려, 욕망을 상실한 오늘날의 우울한 주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이성민/도서출판 b 기획위원)

08. 06.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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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2008-06-07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을 접하게 된 것이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였는데, 당시 지젝이라는 이름조차 생소했던 상태에서 무엇인가 '발견했다'는 기쁨을 느끼게 해준 책이었습니다. 물론 '이해한다는 것'은-그것이 창조적인 오독이라 할지라도- 무척 어려웠지만.....때로는 이해에 앞서서 무엇인가 전율과 진실을 느끼게 하는 글들이 있는데 지젝의 경우가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습니다. 선생님(?)의 번역 덕분에 느낄 수 있는 행복이었습니다.
이제는 이 서재에 매번 들르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건강하시길 빕니다. 앞으로도 멋진 번역 부탁드립니다.....

참, 우문 한 가지~ 지젝이 꼽은 네번째 주저 "The Parallax View"는 현재 번역 중에 있는건가요?^^+

로쟈 2008-06-08 22:13   좋아요 0 | URL
제가 번역한 게 아닌데요.^^; <시차적 관점>은 짐작에 하반기나 내년에 나올 거 같습니다. 저도 번역을 맡을 뻔하긴 했지요. 저는 좀 짧은 논문 한편을 번역하게 될 거 같습니다...

김상호 2008-06-10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근데요. The Parallax View를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건가요? 똑같은 이름의 영화는 '암살단'으로 번역되거든요. 궁금궁금

p.s. 그 책 뒷 날개 사진이 참 재미있던데요.

로쟈 2008-06-10 13:12   좋아요 0 | URL
'시차적 관점' 정도로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요. 시간차가 아니라 시선(시각)의 차란 뜻의 '시차'로...
 

한국식으로 하면 '재야 철학자' 이정우씨의 새로운 책이 출간됐다. 좀 뜸하다 싶었는데, 작년에 나온 <세계의 모든 얼굴>(한길사, 2007)에 이어지는 것이니 격조했다고 할 수는 없겠다. 어째 표지는 그럴 듯해 보이지 않지만 흥미로운 철학사 이야기가 될 듯싶다. 관련리뷰를 챙겨놓는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91979.html).

한겨레(08. 06. 07) 서양철학사는 플라톤과 니체의 전쟁사

대학 제도 바깥에서 사유의 길을 닦고 있는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이 새 저서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을 펴냈다. 제목만 보면 <반지의 제왕> 부류의 판타지 소설을 연상하기 쉽지만, 이 책은 서양철학사 전체를 철학의 근본문제인 존재론 차원에서 조망한 책이다. ‘이데아와 시뮬라크르’라는 부제가 이 책이 겨냥하는 바를 제대로 보여준다. 여기서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은 존재와 비존재, 실재와 가상, 진짜와 가짜, 이데아와 시뮐라크르라는 이원적 대립항들의 철학적 투쟁에 대한 은유다.

이 은유는 플라톤의 후기 저작 <소피스테스>에 등장한다. “실재를 둘러싼 논쟁이 너무나도 격렬해서 사실 우리는 그들 사이에 마치 (신족과) 거인족의 전투라도 벌어지는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되는구려.” 이 싸움을 플라톤은 자기 앞세대 그리스 철학사를 명료하게 정리하는 차원에서 불러들이는데, 지은이는 이 플라톤의 싸움을 서양 철학사 전체의 근본적인 싸움으로 확장한다. 플라톤을 필두로 한 신족에 대항해 거인족들이 벌인 싸움으로 철학사를 보는 것이다. 그 거인족의 선두에 프리드리히 니체가 서 있고, 앙리 베르그송이 니체의 계보를 잇는다.

이 책의 출발점은 ‘신족과 거인족’ 비유가 등장하는 플라톤의 <소피스테스>다. 이 책은 “존재 물음을 체계적으로 다룬 최초의 텍스트다.” 지은이는 이 텍스트를 꼼꼼히 분석해 존재의 문제가 어떻게 철학의 근본문제로 탄생하고 확정되는지를 보여준다. <소피스테스>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이 텍스트는 흔히 궤변론자로 번역되는 소피스트(그리스어로 소피스테스)가 누구인가라는 현실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텍스트다.

이 텍스트는 플라톤의 모든 저작이 그렇듯이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지은이는 이 ‘대화’라는 텍스트 성격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철학은 대화에서 태어났다는 것인데, 좀더 강하게 표현하면, 대화 형식의 투쟁에서 철학이 생겨났다는 것이 지은이의 설명이다. 무기를 들고 벌이는 전쟁이 아니라 말로, 로고스(말·논리·이성)로 하는 전쟁, 아고라(광장)에서 입으로 벌이는 정치적 전쟁이야말로 철학의 발생지점이었다. 그러니까 철학은 단순한 관조나 사유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싸움, 정치적 공방에서 시작됐다는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정치적 주도권을 둘러싼 ‘담론투쟁’이 철학의 자궁이었던 셈이다. 그 자궁의 풍경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텍스트 가운데 하나가 이 <소피스테스>다.

그런데 왜 소피스트라는 문제에서 존재론적 문제인 ‘이데아’가 도출되는 것일까. 플라톤에게 소피스트는 ‘가짜 지식인’ ‘가짜 철학자’였다. 문제는 그들이 대단한 지식과 논변으로 진짜처럼 보이는 외관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스 후기의 혼탁한 시대에 가짜들이 진짜 행세를 하고 다녔던 것이다. 어떻게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인가. 거기서 플라톤은 가짜와 구별되는 ‘영원한 진짜’를 상정하게 된다. 이 ‘영원한 진짜’, 참된 실재가 이데아다.

정치가를 들어 설명하면 더 이해하기 쉽다. 수없이 많은 가짜 정치가들 사이에서 진짜 정치가를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 것인가. 플라톤은 정치가의 이데아, 곧 참된 정치가의 형상이 따로 있으며, 현실의 정치가는 그 이데아를 나누어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데아를 적게 나눠 가질수록 저급한 정치가이며, 많이 가질수록 훌륭한 정치가가 된다.

그 이데아의 관점에서 보면 현실은 이데아의 모방·모사인데, 그것이 바로 시뮐라크르다. 시뮐라크르는 실재인 듯 보이지만 진정한 실재가 아닌 일종의 환영, 외관, 거짓 이미지일 뿐이다. 소피스트들은 철학자의 외관만 갖춘 가짜가 된다. 플라톤은 여기서 시뮐라크르를 기각하고 이데아를 참된 존재, 곧 실재로 삼는다. 그 플라톤주의 이분법이 2천년 서양 철학사를 규정했다.

이 장대한 역사에 반기를 들고 단기필마로 전쟁을 벌인 사람이 바로 니체였다. 거인족의 반격이 시작된 셈이다. “니체 이후 철학은 하나의 모토를 반복해 왔다. ‘플라톤주의를 전복하라!’” 플라톤주의의 전복이란, 이데아를 내치고 시뮐라크르를 복권시키는 일이다. 플라톤에게 시뮐라크르는 이데아의 모사일 뿐만 아니라 변화무쌍한 것, 끝없이 바뀌고 운동하고 흩어지고 사라지는 어떤 것이었다. 니체의 전복은 바로 이 변화와 생성과 운동이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실재인 존재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을 뜻한다. 지은이는 니체의 ‘영원회귀’가 말하는 생성, 그리고 베르그송의 ‘생명과 지속’이 가리키는 생성이 그 새로운 존재론, 다시 말해 ‘생성존재론’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니체도 베르그송도 그 생성존재론을 구체적으로 파고들지 못했다. 따라서 지금 중요한 것은 생성존재론의 구체적 양상을 해명하고, 거기에 입각해 윤리학과 실천철학을 구성해 내는 일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고명섭 기자)

08. 06. 06.

P.S. 사실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은 저자의 근간으로 이미 작년부터 예고된 책이다(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96726.html). 아니 작년에 나온다고 했던 책이니까 다소 늦어진 책이다. '예고'는 이랬으니까.

“지금까지 쓴 책들은 대체로 대중 교육용 책이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철학서를 쓰겠다.” 그가 계획한 책 가운데 일부는 올해부터 출간될 예정이다. 그 중 가장 먼저 나올 책이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이데아와 시뮐라크르>다. 이 책은 서양 철학을 신족과 거인족의 싸움으로 규정한다. 플라톤이라는 신족이 펼친 ‘존재의 철학’에 대항한 것이 니체·베르그송·들뢰즈라는 거인족의 ‘생성의 철학’이라고 그는 말한다.

올해 나올 또하나의 책은 <천하나의 고원-소수자 윤리학을 위하여>이다. 들뢰즈가 <천 개의 고원>에서 보여준 사유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새로운 윤리학을 정립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서구에서 68혁명이 새로운 실천철학을 낳은 계기였다면 우리의 경우엔 1987년 6월항쟁이 그런 계기를 마련해주었다고 그는 평가한다. 그의 관심은 지배적 다수의 윤리학이 아닌 소수자의 윤리학, 소수자들의 연대를 통한 보편적 윤리의 정립에 있다. 세 권짜리 <세계철학사> 시리즈도 올해부터 나올 예정이다. 첫쨋권 <지중해 세계의 철학>은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서양 철학의 흐름을 살피는 책이며, 둘쨋권 <아시아 세계의 철학>은 동북아를 중심으로 하여 아시아 지역 철학사의 맥을 짚는다. 셋쨋권 <근현대 세계의 철학>은 앞의 두 권으로 철학사의 흐름을 잡은 뒤 그 위에서 오늘날에 직접 영향을 주고 있는 철학 사조들을 검토하는 책이 될 예정이다.

그의 철학사가 순조롭게 완결되기를 기대한다. '재야'에서의 이러한 노력에 견줄 만한 강단철학의 성과들도 덩달아 나온다면 더욱 좋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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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young 2008-06-07 21:29   좋아요 0 | URL
김상환씨도 책 한 권 낼 때가 된 것 같은데 아직 감감 무소식이군요...

로쟈 2008-06-08 22:17   좋아요 0 | URL
강단쪽에서도 사실 몇 분 안되죠. 책을 내시는 분들이...
 

오늘은 스페인의 시인 가르시아 로르카가 태어난 날이라고 한다. 언젠가 <사랑의 시체>(솔, 1995), <강의 백일몽>(민음사, 1994/2003) 등의 시집을 뒤적거려본 게, 그리고 책을 만들면서 몇 마디 인용한 게 개인적인 '인연'의 전부이지만 왠지 친숙하게 느껴지는 이름이다(그의 생애를 다룬 영화 <데스 인 그라나다>는 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최근 선보인 펭귄 클래식의 1차분 11권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띈 건 그의 산문집 <인상과 풍경>(펭귄클래식코리아, 2008)이었다. 로르카가 스무 살 때 쓴 것이라 하니 그의 '스무살, 내 청춘'이라 할 만하다. 장마가 끝나면 햇볕 아래서 읽어볼 만하겠다.

한국일보(08. 06. 05) [오늘의 책<6월 5일>] 인상과 풍경

1898년 6월 5일 스페인의 시인ㆍ극작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태어났다. 로르카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그의 시 한 편을 발견했다. 작가 고 이병주가 대하소설 <지리산>에 인용한 로르카의 시다. ‘어디에서 죽고 싶으냐고 물으면 카탈루냐에서 죽고 싶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어느 때 죽고 싶으냐고 물으면 별들만 노래하고 지상에선 모든 음향이 일제히 정지했을 때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유언이 없느냐고 물으면 나의 무덤에 꽃을 심지 말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다.’ 로르카 시의 울림에 놀라고, 그를 인용한 이병주의 박학에 놀란다. <지리산>을 다시 읽고 싶어진다.

로르카의 생은 38년으로 짧았다. 프랑코가 스페인 내전을 일으킨 1936년, 그 해 8월에 로르카는 그의 고향인 그라나다를 점령한 파시스트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는 화가 살바도르 달리, 영화감독 루이 브뉘엘 등과 교유하며 20대 때부터 천재시인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스페인의 전통과 정서가 담긴 희곡을 잇따라 발표해 스페인 민중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면서 국제적으로도 명성을 떨치고 있던 로르카는 이미 좌파 인민전선을 지지하는 지식인 서명운동에 동참한 터였다. 그를 눈엣가시로 보았던 프랑코 정권은 로르카의 사후에도 20여년 동안 그에 대한 논의를 금지시켰다.

하지만 로르카의 3대 비극으로 불리는 <피의 결혼> <예르마>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한국에서도 연극과 무용으로 지금도 공연되고 있다. 그의 시집 <강의 백일몽>을 번역한 정현종 시인은 세계 3대 시인으로 괴테와 네루다, 그리고 로르카를 꼽을 정도다.

최근 펭귄클래식 번역판으로 나온 <인상과 풍경>은 로르카가 카스티야, 안달루시아 등지를 여행하면서 보고 느낀, 조국 스페인의 지역과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인상을 담은 산문집이다. 로르카가 스무살 때 출간한 첫 책인데, 아직 덜 여문 청년의 우수와 정열이 짙게 느껴지면서도 그 나이에 쓴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섬세한 시선과 내면, 그것을 표현하는 문장이 놀랍다.(하종오기자)

08. 06. 05.

P.S. 앤디 가르시아가 로르카 역으로 연기한 영화 <데스 인 그라나다>(원제는 '가르시아 로르카의 실종')의 한 장면은 http://kr.youtube.com/watch?v=O8-eQLb8p3A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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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6-05 17:20   좋아요 0 | URL
천재시인에 잘생기기까지 했지만 세상은 공평한지 그에게 단명이란 핸디캡을 줘버렸군요.^^

로쟈 2008-06-06 12:04   좋아요 0 | URL
'장수한' 시인이란 말은 왠지 어색하지요.^^;

노이에자이트 2008-06-05 23:40   좋아요 0 | URL
전두환의 심정을 대변하겠다며 자진해서 나선 이병주 씨...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임은 분명하지만 로르카의 치열한 삶과는 전혀 대조적인 기회주의자! 그가 스페인인이었다면 프랑코를 미화한 전기를 썼을 겁니다.

로쟈 2008-06-06 12:13   좋아요 0 | URL
공지영씨의 회고는 좀 다르던데요. "이병주…. 나는 그를 생각하면 하는 수 없이 나의 이십대를 함께 생각하고야 만다. 1980년대 초,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아래서, 젊은 날이 하염없이 한심해지고 있을 때 도서관 안에 도피하듯 틀어박혀 읽은 것이 그의 소설들이었다. 이 세상에서 되고 싶은 것도 하나 없고 되어야 할 것 하나 없던 것 같은 시절, 과연 생을 걸고 우리가 도전할 만한 것이 하나라도 있을까 하는 고민이 아마도 세상은 어차피 불의하고 불우하다는 확신으로 나른하게 굳어져 가고 있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라로 2008-06-06 01:45   좋아요 0 | URL
제목을 보니까 갑자기 카잘스가 생각이 나네요~.^^;;
잘 지내시죠???(뜬금없는 인사에도 끄떡 없으실 로쟈님,,,)

로쟈 2008-06-06 12:14   좋아요 0 | URL
네, 그냥저냥 지내고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6-07 00:24   좋아요 0 | URL
공지영 씨가 이병주 소설을 탐독하고 있었을 무렵.이병주 씨는 이미 전두환 씨를 비롯한 5공의 실력자들과 가깝게 지내고 있었습니다.그래서 5공 비리 청문회로 사면초가일 때 전두환은 가장 친한 문인이었던 이병주를 불러 자기의 심경을 구술하게 했습니다.그 무렵 검은 세단에서 두 사람이 같이 내리던 광경이 눈에 선합니다.
그가 타계 1년 전인 1991년에 <대통령들의 초상 우리 역사를 위한 변명> 서당 을 냅니다.박정희 시절 투옥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인지 박정희 욕은 많이 하지만 이승만과 전두환에 대한 평가는 후합니다.이승만에 대한 이병주의 평가는 관두고...
전두환에 대한 평가는 이렇습니다-한 마디로 전 대통령은 꾀를 부릴 줄 몰랐다.약은 데라곤 조금도 없었다.이를테면 직정경행이다.옳다고 믿는다면 추진하는 성미이다.술책을 꾸민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었다.내가 그의 실수로 치는 언론통폐합이 바로 그 증거이다.언론통폐합을 위한 이유와 근거가 없진 않았겠지만 언론을 건드린다는 것은 벌집을 쑤셔놓는 거나 다를 바가 없다...중략..아무튼 전 정권의 언론통폐합이 실수였다는 것은 6공이 들어서자마자 폐합된 신문사들이 부활운동을 시작한 것을 봐서도 알 수 있는데 이것이 또한 전두환에게 꾀가 없었다는 것,약은 구석이 없었다는 것의 증거가 된다. 위의 책276-277쪽에서
5공 비리에 대해선 특히 친인척 비리에 대해선...
효도와 우애가 넘쳐 나라의 체통을 크게 상했다거나 국고를 비웠다거나 했을 지경이면 문제는 달라지겠지만 다소의 무리가 있었다고 해서 그것을 꼬투리로 잡아 나라의 수장이었다는 사람을 비리로 몰아부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위의 책 282쪽에서
한길사에서 이병주 전집을 낼 때 임헌영 씨같은 인사가 그의 작품에 대해 찬사 일변도의 추천사를 냈는데 저는 좀 거시기했습니다.

로쟈 2008-06-07 00:31   좋아요 0 | URL
부분적인 인용은 장정일의 책에서 읽어본 거 같네요. 문단은 원래 '좌우 합작'도 잘하는 곳이죠...

노이에자이트 2008-06-07 01:08   좋아요 0 | URL
이 책이 꽤 희귀본인데 장정일 씨는 독서일기에서 저보다 훨씬 더 살벌하게 이병주를 욕했죠.이 책도 이병주 특유의 그 현란한 박학다식을 늘어놓았기 때문에 문헌 해독력이 부족한 이들 넘어가기 딱 좋게 되어있습니다.불어를 잘하기 때문에 사르트르,레이몽 아롱,루이 아라공 등을 들먹이고...

로쟈 2008-06-07 12:01   좋아요 0 | URL
언제 한번 찾아보고 싶군요.^^

연두부 2008-06-07 13:20   좋아요 0 | URL
우연히 들렀다 두분의 댓글에 댓글..감동받고 갑니다...쩝

로쟈 2008-06-07 19:54   좋아요 0 | URL
의도적으로도 들러주시길.^^

노이에자이트 2008-06-07 23:43   좋아요 0 | URL
이인모 씨가 출옥한 뒤 이병주의 <지리산>을 읽고 엄청나게 분노했어요.역사허무주의라고...장기수들이 그때 출옥해서 제일 많이 읽은 책이 이태<남부군>과 이 책이었는데 역시 하나같이 분노하더라는 겁니다. <이인모 전 인민군 종군기자 수기> 이인모 기록 신준영 정리 (주)월간 말1992 153-154쪽에서

로쟈 2008-06-08 22:18   좋아요 0 | URL
<지리산>, <남부군> 모두 20년쯤 전에 회자되던 책들이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06-10 00:17   좋아요 0 | URL
네...그렇습니다.
그리고 로르카 전기도 나왔으면 좋겠습니다.그의 친구인 네루다 전기는 나왔는데...스페인 내전에 대해서 의외로 스펜인인에 대한 책이 별로 없어서요.두루티 전기는 나왔는데...프랑코 전기가 있어서 그럭저럭 도움이 되긴 한데(대현출판사 간)...너무 얇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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