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편의 문학관련기사가 왠지 겹쳐지기에 나란히 옮겨놓는다. 채희윤의 신작 장편소설 <소설 쓰는 여자>(현대문학, 2008)에 대한 소개기사와 '문학상 인플레'에 대한 '최재봉의 문학풍경' 기사다. "자본주의 시대에 사양산업인 소설"이란 작가의 자조가 무색하게 문학상 '현상금'은 갈수록 치솟고 있다(문단의 주도권 다툼처럼도 보인다). 해서 작가들에겐 소설 쓰기 어렵다는 사회이지만 동시에 소설 쓰기를 권하는 사회가 현재의 한국사회다(중견 작가들은 창작스쿨 강사로 뛰게 하는 사회이기도 하다). 장편소설에 걸린 상금만 일년에 몇 억이니까 앞으로 우리는 해마다 토탈 몇 억짜리의 소설들을 읽게 될 것이다!  

세계일보(08. 01. 12) 소설가 지망생 눈에 비친 가정, 그곳은 감옥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은 문학을 하기 위해선 “교도소 같은 곳에 정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체제 순응자의 범상함에서 뜨거운 예술혼이 분출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미국 소설가 오 헨리도 감옥에서 소설가로 거듭났다. 예술의 영감을 얻기 위해 파출부를 자처한 여자는 어떨까. 확신범만큼 강렬하지 않지만, 적어도 평범하지는 않다.

소설가 채희윤(54)씨의 첫 장편 ‘소설 쓰는 여자’(현대문학)에는 신선한 글감을 찾기 위해 일부러 ‘부엌데기’ 노릇을 하는 여성이 등장한다. 32세 소설가 지망생 서주희는 부족한 상상력을 자책하며 일탈을 꾀한다. 심야 주차안내원, 생맥주집 아가씨,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거쳐 파출부로 변신한다. 월수금은 공인회계사의 저택으로, 화목토는 퇴역 장성의 집으로 출근한다. 파출부 주희에게 비친 가정은 감옥 같은 곳이다.

“존경이란 신비함이 바탕이 되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죠. 그 신비함을 조성하는 강력한 인자가 미지와 거리감인데 그것이 가장 쉽게 깨지는 장소가 바로 가정이죠. (…) 일종의 유형지가 아닐까 싶어요.”(92쪽)

공인회계사의 아내는 남편보다 애완견을 사랑하고, 퇴역 장군은 낡은 반공주의와 나르시시즘을 고수하며 노추(老醜)를 보인다. 주희는 이들 인간 군상의 위선, 피폐, 좌절된 꿈을 면밀히 관찰한다. 파출부를 빙자한 문학 수업은 공인회계사와의 불륜이 발각되던 날 종결된다. 결국 주희는 간통죄로 구치소에 갇히며 토마스 만이 설정한 예술가의 조건을 충족시킨다.

소설의 뼈대는 주희가 두 가정에 ‘잠입’해 겪은 체험이다. 이야기의 다른 축은 주희가 감춰온 쓰린 개인사다. 주희는 기생 딸로 태어나 17살에 요정 지배인에게 성폭행당했다. 상처와 죄책감 때문에 첫사랑을 떠나보내야 했고, 이후의 사랑도 엉망진창이 된다. 소설에 생을 거는 주희의 집요함은 상처 치유의 의지이기도 하다.

“정말이지 나는 소설가가 되기 위해 소설을 쓰려는 것인가요, 아니면 소설 쓰기를 통하여 나를 구원하려고 하는 것일까요?”(61쪽)

수희가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들었던 소설 강의가 중간중간 인용되며 이야기 전개를 돕는다. 이를 테면, 주희는 퇴역 장성과 진보 교수 며느리의 살벌한 다툼에서 소설적 요소를 포착하며 “요약과 장면, 묘사 이 모두가 다 들어 있어야 합니다”란 강사의 가르침을 상기한다. 예비 소설가 주희가 세상을 묘사할 때 쓰는 비유는 일상적이지 않다. 흉물스러운 퇴역 장성은 표도르 카라마조프, 장형보, 딤즈 데일 등 문학적 인물에 비견되며 더욱 사악하게 표현된다. 파출부의 시선으로 본 두 가정의 삐걱거림도 흥미롭지만, 상투적 문장을 결벽증 환자처럼 피하는 문체가 읽는 맛을 돋운다.

작가 채씨는 첫 장편에 대해 “매우 자기고백적인 소설”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1989년 등단해 소설집 ‘한 평 구 홉의 안식’ ‘곰보 아재’ 등을 펴냈다. 장편은 등단 20년 만에 처음으로 썼다. “처음으로 내가 자신을 한번 풀어봤습니다. 이 자본주의 시대에 사양산업인 소설에서 제가 무슨 영화를 구하겠습니까. 주희가 소설로 과거의 상처를 스스로 극복하고 첫사랑에 다시 다가가듯, 자신의 삶을 깊이 성찰할 뿐이지요.”(심재천 기자)

한겨레(08. 01. 12) 문학상, 현상금 인플레 시대

문학 월간지 <문학사상> 신년호를 보니 ‘문학사상 장편소설상’이라는 새로운 문학상을 제정한다는 안내문이 있다. 국내 출간과 동시에 해외에서 영어로 출간한다는 사실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1억5천만원의 상금 규모가 놀랍다. 안내문에서 밝히고 있는 대로 ‘국내 최고 상금’에 해당한다. 세계일보사가 주관하는 세계문학상, 그리고 조선일보사가 지난해 새로 만든 ‘대한민국 뉴웨이브 문학상’의 1억원 상금에서 50% 인상된 것이다. 10여 년 전 국민일보사에서도 1억원 상금을 걸고 장편소설을 공모한 적이 있으니, 1억5천만원 상금은 한국 장편소설 현상공모의 기록을 깬 셈이다. 국문 및 영문 번역 출판저작권을 출판사가 영구 확보한다는 단서가 붙기는 했어도, 기록은 기록이다.

비록 억대에는 못 미치지만 상금 액수가 수천만원대에 이르는 고액 장편소설 현상공모는 여럿 있다. 문학동네소설상이 5천만원의 상금을 내걸고 있으며, 한겨레문학상 역시 올해부터 상금을 5천만원으로 늘렸고, 지난 가을호로 창간된 <문학의 문학>도 5천만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를 시작했다. 이밖에도 창비의 창비장편소설상과 민음사의 오늘의작가상이 각각 3천만원, 문학수첩의 문학수첩작가상과 문학동네의 문학동네작가상이 각각 2천만원의 상금을 걸고 작품을 모집하고 있다.

이 상들이 대체로 신인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별다른 문단 경력이 없어도 장편소설 하나만 잘 쓰면 순식간에 수천만원 내지는 억대의 상금을 거머쥘 수 있다는 말이 성립한다. 실제로 신인 작가 서유미씨는 지난해 문학수첩작가상과 창비장편소설상을 연달아 수상하면서 5천만원을 ‘벌었다.’ 소설책 한 권 값을 1만원이라 쳐도 5만 권을 팔아야 얻을 수 있는 인세 수입에 해당한다. 몇몇 잘나가는 베스트셀러 작가들을 제하고는 웬만한 기성작가들조차 1만 권은 물론 초판 3천 부도 소화하기 어려운 시장 상황에서 이런 고액 상금은 상당한 특권이라 할 수 있다.

고액 상금을 내건 문학상이 느는 데에는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없지 않다. 문학의 위상이 갈수록 저하되고 있는 상황에서 높은 액수의 상금을 통해서나마 문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제고하고, 재능 있는 잠재 작가들의 참여와 문학적 투신을 유도하는 효과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연한 말이지만, 상금 액수의 고저가 작품의 질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다.

상금 액수를 경쟁적으로 늘리는 것은 상대적으로 나은 작품을 확보하기 위한 방책으로 이해되지만, 장기적으로 보아 그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것은 아닌지 따져 볼 일이다. 가령 프로스포츠 선수들의 과도한 몸값이 경기 발전에 별로 기여하지 못하는 상황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른바 ‘먹튀’가 문학에서라고 없으란 법은 없지 않겠는가.

고액 문학상을 문학에 대한 사회적 투자라는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이유는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이 혹시라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성장 이데올로기의 문학적 반영은 아닌지 점검해 볼 일이다. 문학적 논리와 맥락에 따른 자연스러운 문학 부흥은 물론 바람직스럽되, 인위적인 경기 부양 식의 ‘쏟아붓기’는 곤란하다. 거품 경기가 경제의 건전한 기반을 갉아먹는 것처럼 과도한 ‘투자’는 작가와 문학을 타락시킬 수도 있다. 문학과 돈, 적당한 거리와 긴장이 필요하다.(최재봉기자)

08. 0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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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로맹 가리 읽기' 리스트를 만들었는데, 이번에 <하늘의 뿌리>와 <새벽의 약속> 두 작품이 번역돼 나와서였다. 주말 북리뷰란에 기사들이 올라왔기에 하나를 옮겨놓는다. 두 작품 모두 예전에 번역됐었다고 하고, 그제서야 나는 <새벽의 약속>을 표지로는 보았었다는 기억을 떠올린다. 85년이라. 고등학교 때 아닌가. 흠, 지방 소도시의 서점들을 순례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한국일보(08. 01. 12) 소설처럼 살다 간, 로맹 가리의 잊혀진 소설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자기 앞의 생> 등의 작품으로, 궁핍한 이민자의 아들에서 전쟁 영웅ㆍ외교관ㆍ세계적 작가로 승승장구하다 느닷없는 권총 자살로 마무리한 극적인 삶으로 프랑스 소설가 로맹 가리(1914~1980)는 문학 독자에게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이다. 그의 또다른 대표작 <하늘의 뿌리>와 <새벽의 약속>이 출간됐다(문학과지성사 발행). 각각 68년, 85년에 첫 번역된 후 절판됐던 작품으로, 둘 다 가리의 작품 이력에 있어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하늘의 뿌리>는 가리가 볼리비아 주재 영사로 재직하던 1956년 발표해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받은 작품이다. 첫 소설 <유럽의 교육>(1945)으로 비평가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던 가리의 문명(文名)을 결정적으로 드높인 이 출세작은 출간 3개월 만에 10만 부가 판매되는 등 전후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주인공은 코끼리 구호 운동가인 프랑스 사람 모렐이다. 2차대전 독일군 강제수용소에 갇혔다가 출감한 그는 해마다 수만 마리씩 학살되는 코끼리를 구하고자 프랑스 식민지인 아프리카 차드로 온다. 비참한 아우슈비츠 생활을 아프리카 대평원을 질주하는 코끼리를 상상하며 견뎌낸 그에게 이 덩치 큰 동물은 “우리와 다르기는 하나 우리보다 열등하지 않은” 존재다.

자신의 노력을 물 밖으로 나와 허파가 생기길 기다리며 숨쉬던 선사시대 파충류에 빗대며 “그놈처럼 여러 번 해보면 아마도 우리는 결국 필요한 기관, 예를 들면 존엄이나 우애 같은 기관을 갖게 될 거요”라고 말하는 모렐의 의지는 단단하다. 그는 야생보호 국제회의에 보낼 청원서 서명을 받으러 다니는 한편, 사냥꾼, 무기 밀매업자, 가죽 가공업자 등 코끼리 학살 공범들에게 가차없는 테러를 가한다.

주인공이긴 하지만 모렐이 독자와 직접 대면하는 일은 좀체 없다. 3인칭인 이 소설에서 그의 발언과 행적은 여러 주변인물의 시점과 대화를 통해서 전달된다. 다종한 주체로부터 비롯되는 이야기들은 서로 겹치고 반복되며 단순하다(출간 당시 일부 프랑스 비평가들은 내용의 장황함과 중복을 공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리는 독자를 지루하게 하지 않는다. 그는 제각기의 입장과 경험을 가진 생생한 캐릭터를 창조함으로써 다채롭게 이야기를 변주한다. 아울러 인물들이 모렐의 맹목적이지만 순수한 열정에 감화돼 가는 모습을 설득력 있게 묘사하면서 자신이 ‘최초의 생태학적 소설’로 칭한 이 작품의 주제의식을 분명히 한다.

1960년작 <새벽의 약속>은 가리의 소설 중 가장 자전적이란 평을 듣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러시아에서 가난한 유대계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프랑스로 이민한 ‘나’의 유머러스한 성장기다. 동유럽에서의 어린 시절, 프랑스 정착 후 학창 시절, 2차대전 참전으로 이어지는 주인공의 인생 여정은 작가의 실제 생애와 고스란히 겹친다. 아버지의 부재를 상상으로 메우고, 소수계 이민자에서 사회 주류로 편입되려 애쓰면서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형성해가는 ‘나’의 성장 과정은 소설의 틀을 빌린 로맹 가리의 은밀한 고백처럼 느껴진다.

소설은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좌절된 연극배우의 꿈과 실패한 두 번의 결혼생활을 딛고 어머니는 생애를 온전히 아들의 성공을 위해 투입한다. 늘 “넌 프랑스 대사가 될 거야. 위대한 극작가가 될 거야”라고 축원하는 어머니의 사랑은 수혜자인 아들마저도 종종 부끄러움에 고개를 돌리게 하는 극성스러움이었다.

라켓 몇 번 잡아본 것이 전부인 아들을 프랑스의 고급 테니스 클럽에 가입시키려 마침 그곳을 방문한 스웨덴 왕에게 매달리는 그녀의 모습엔 우습다 못해 연민이 느껴질 정도다. 자기 조카를 내세워 에밀 아자르란 가상 작가를 창조해서 ‘몰래’ 공쿠르상을 또 받는 등 가리의 광대 같은 생애 뒤로 허영에 찬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해야 했던 그의 어린 시절이 드리운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이었고, 그래서 헛웃음 지은 뒤엔 가슴이 뭉클하다. 특히 전선에 나간 장성한 아들에게 꼬박꼬박 부쳐진 어머니의 편지에 숨은 사연이 소설 말미에 밝혀질 땐 독자는 더 이상 어머니 없는 로맹 가리를 상상하기 힘들어진다.(이훈성기자)

08. 01. 12.

P.S. 기사를 읽어보니 내 취향에 더 맞는 소설은 <새벽의 약속>이다. 2월에 읽을 책으로 찜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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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대학원신문에서 한 서평기사를 옮겨온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MAIN&rsec=MAIN&idxno=8070). 피에르 바야르라는 한 프랑스 비평가의 책 두 권에 대한 서평으로 '어느 ‘탐정 비평가'의 새로운 책 읽기'란 타이틀이 붙어 있다. 최근에 읽은 서평들 가운데 가장 신선하며 흥미롭다. 가령, '독서와 비독서의 경계'에 관한 고민 같은 건 아주 실제적이기도 하다. 오래전에 읽은 작품에 대해 강의해야 할 때 맞부딪치는 문제이기도 하고, 또 학생들의 독서 여부를 평가해야 할 때 봉착하는 딜레마이기도 하다(어느 정도 읽은 것을 읽었다고 평가해야 하는가?). 거기에다 바야르의 '탐정 비평'도 매우 흥미롭다. 그의 책들이 대거 소개되면 좋겠다...

 

 

 

 

 

 

 

 

연세대 대학원신문(157호) 독서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편집광적이고 망상적인 독서

●피에르 바야르(Pierre Bayard)
 『책을 읽지 않고 이야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Comment parler des livres que l’on n’a pas lus?)』(Editions de Minuit, 2007)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Qui a tue Roger Ackroyd?)』(Minuit, 1998)

책읽기의 괴로움, 책은 꼭 다 읽어야 하는 것일까?
지식인 집단의 착각 혹은 위선 한 가지. 우리는 끊임없이 진리, 지식에 대한 자발적 선의지를 상정한다. 지식의 추구는 그 자체로 즐거운 것이고 독서는 일종의 연애이며 자신을 풍요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기타 등등. 하지만 들뢰즈가 지적하는 것처럼 “어떻게 한 초등학생이 단번에 라틴어에 숙달되게 되는지, 어떤 기호(記號)들이 (사랑이나 고백하기조차 창피한 욕구로 인해) 그의 배움에 도움을 주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거꾸로 짝사랑이든 지적 스노비즘이든 이러한 개인적 동기부여를 얻지 못할 때 우리의 독서 경험은 흔히 생각보다 괴롭고 지루한 일이 되곤 한다. 더구나 (21세기 초반의 대한민국에서는 너무나 낯선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의 문명사회에서 일정 수준의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교양’이라는 명목으로 수백수천권의 필독서를 읽을 의무, 책을 끝까지 다 읽을 의무,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끝까지 다 읽고 얘기해야할 의무 같은 구속에 짓눌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결국 책이라는 것, 독서라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커다란 스트레스를 주는 부담스러운 일이 되며 그 중 가장 무시무시한 것은 역시 ‘읽지 않은 책’의 존재이다. 하지만 모든 책을 읽을 수 없는 것도 자명한 노릇이고 습관이 되면 곤란하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책을 읽지 않고 읽은 척 떠들어야할 상황도 있는 것이다. 도발적인 주제와 제목 선정으로 악명 높은 프랑스의 문학 이론가 피에르 바야르가 올해 초 펴낸 『책을 읽지 않고 이야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독서 행위를 둘러싼 이러한 작은 오해와 환상들을 폭로하면서 독서에 대한 새로운 개념 정의를 시도하는 책이다.

하지만 분명 이론적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저작은 책을 안 읽어도 된다는 이론적 면죄부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히 있고 그 때문에 출간 즉시 언론의 주목을 받아 순식간에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동시에 (슈퍼마켓과 공항 서점에까지 깔렸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필요 이상의 가혹한 비난을 받아 저자를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뜨렸다. 다행히 독서와 교양에 대한 죄의식이나 부담감이 전무한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오히려 이러한 선정적 논란에 휩쓸리지 않고 객관적으로 이 책의 논의를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독서와 비독서의 모호한 경계
저자는 책의 1부에서 ‘안 읽은 책’의 여러 양상을 검토하고 있는데 (모르는 책, 훑어본 책, 본 적은 없고 들어만 본 책, 읽었는데 잊은 책 등) 여기서는 기본적으로 ‘읽은 책’(독서)과 ‘안 읽은 책’(비독서)의 구별이 생각만큼 분명하지 않다는 점을 밝히려 하고 있다. 읽다가 만 책은 읽은 책인가 아닌가? 책의 몇 퍼센트를 읽어야 읽은 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려워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책은 무엇인가? 오래 전에 읽어 다 잊어버린 책, 심지어 읽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책은 펼쳐본 적도 없지만 대충 들어 개요를 알고 있는 책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더구나 모든 책은 읽고나면 즉시 점진적 망각의 대상이 되게 마련이고 심지어 책을 읽는 동안에도 망각은 벌써 진행 중이게 마련인데. (보르헤스가 들려주는 푸네스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지속적 망각이 없는 완전한 기억은 실질적으로 전적인 무의미를 만들 뿐이다).

결국 우리가 책들과 맺는 관계는 결코 연속적이고 동질적인 과정이 아니고 투명한 지식의 장소도 아니며 기억의 여러 파편이 섞여 있는 공간, 이 책에서 읽은 구절과 저 책에서 읽은 구절이 맥락에서 분리되어 유령처럼 배회하고 서로 결합하고 혼동되는 ‘변신-분리-합체’의 공간이다. 따라서 우리의 독서 경험은 대부분이 ‘철저한 완독’과 ‘아예 들어보지도 못한 책’의 중간에 있고 이 중간 지대에는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 양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수많은 단계와 가능성이 있다.

더구나 애초에 꼼꼼한 완독이 어려운 작품도 있다. 바르트의 지적처럼 “묘사 · 설명 · 고찰 · 대화를 건너뛴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다(아무도 우리를 감시하지 않는다) …… 누가 프루스트를, 발자크를, 『전쟁과 평화』를 한자 한자 다 읽었단 말인가?” 이렇게 독서와 비독서의 구별이 애매해진다면 거꾸로 독서 자체의 규정도 어려워지며 결국은 텍스트의 개념 역시 교란될 수밖에 없어 문학 텍스트는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사물이 된다.

문학 텍스트는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사물, 텍스트를 창조하라
그래서 바야르는 이러한 기억/망각의 문제를 텍스트 자체의 지위에 관한 논의로 이끈다. 아무리 텍스트를 꼼꼼히 읽더라도 우리는 일부만을 기억할 수밖에 없고 기억하는 부분들, 개요는 사람마다 다르므로 텍스트는 결코 단일한 대상이 아닌 것이 된다. 특히 문학 텍스트의 경우 그 근본적 다의성으로 인해 한 명의 독자가 그 다양한 의미망을 모두 알 수도 없고 설사 안다고 해도 그에 대해 말하는 순간에는 기껏해야 한두 개의 의미망밖에 실현시킬 수 없으므로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원론적으로 말해 애초에 글로 된 텍스트는 조각이나 그림과는 달리 우리가 그것에 대해 기억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면 존재한다고 할 수가 없다. 바야르가 기대고 있는 미셸 샤를르(Michel Charles)의 해석학적 구조주의의 입장을 따를 경우 글이란 언어 기호로 되어 있고 그것을 읽는 사람이 독서 행위를 통해 그것을 음성과 의미로 실현시키지 않을 경우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잉크로 더럽혀진 종이 뭉치일 뿐인 것이다.

더구나 문학 작품은 우리가 사는 세계처럼 완전한 세계가 아니어서 묘사하는 세계에 대해 일련의 단편적 정보만을 제공할 뿐이고 이 정보들은 독자의 개입 없이는 충분할 수 없다. 문학 작품에서 우리가 한 인물에 대해 접하는 것은 여러 개의 문장뿐이다. 하지만 험버트가 롤리타의 눈썹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서 롤리타가 눈썹이 없는 소녀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렇듯 문학 텍스트란 독자의 보충 없이는 불완전한 파편들의 공간일 뿐이어서 텍스트의 문면을 넘어서는 독자의 상상과 해석은 나이브한 문학소녀들이나 저지르는 주제넘은 투사 독서가 아니라 텍스트가 텍스트로 존재하는데 필수불가결한 구성적 요소이다. 그런데 (그 자체로는 언제나 모자란) 텍스트를 보충하는 이러한 독서 작업에는 개인적 경험, 세계관, 우리가 속한 문화적 틀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보니 주관적 · 사회적 필터와 무관한 객관적 독서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한 마디로 말하면 내가 읽는 카다레의 『부서진 사월』은 당신이 읽는 『부서진 사월』과는 다른 텍스트이다. 결국 존재하는 것은 단일한 텍스트가 아니라 독자의 수만큼이나 많은 다수의 텍스트이며 텍스트의 단일성은 주어진 사실이 아니라 구축해야할 픽션이다. 더구나 책을 처음에서 끝으로 나가는 진행 방향으로 읽는 선조적 독서 말고도 다양한 다른 독서/비독서 방식이 있고 (읽다 관두기, 뒤쪽부터 보기, 훑어보기, 필요한 챕터만 찾아 읽기, 이곳저곳을 뒤지며 마구잡이로 읽기, 구입해서 책장에 꽂아두고 언젠가는 보겠다고 다짐하기 등등) 그 방식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독서 경험을 결정하는 다음에야.

물론 피에르 바야르가 대중을 독서의 중압감에서 해방시키려고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텍스트, 책, 독서 등에 대한 지나치게 이상화된 관념이 문학 이론 자체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보니 완전히 폐기할 이유는 없지만 경직된 면이 없지는 않은 개념들을 더 세련되게 다듬기 위해 개별 독자의 실제적 구체적 독서 경험을 끊임없이 참조하면서 (텍스트의 모든 굴곡에 일일이 반응하는 모범적인 모델 독자를 세운 것은 에코와 문학 구조주의의 훌륭한 업적이지만 텍스트의 모든 단어를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고 책을 읽다가 잠깐 화장실에 가지도 않는 독자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한계를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묵직한 이론적 논의에도 불구하고 미디어와 대중의 호감을 얻을 수 있었던 이 책의 실용적 조언들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으리라. 책을 읽지 말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조적 완독’이 아닌 책을 읽는 다양한 방식을 시험해보라고, 창조성과 즐거움을 잃을 정도로 부담감을 갖고 책을 읽지는 말라는 조언 말이다(바야르는 한 대담에서 ‘끝없이 읽기만 하고 논문 집필을 결코 시작하지 못하는 박사과정 학생들의 병리학적 증상’을 언급한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결국 읽지 않을 책이 있다는 것을, 읽을 시간이 없는 책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작품의 신성함을 부인하는 ‘비평적 개입주의’  
바야르는 최근에 있었던 한 대담에서 자신의 모든 저작은 아무리 사소한 이론적 결함도 트집을 잡으면서 억지스런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편집증적 서술자를 내세운 픽션 작품이라고 밝힌 적이 있는데 (보통은 이런 개념의 극한을 탐구하는 훌륭한 기제로 사용되지만 『책을 읽지 않고…』의 경우처럼 오해를 받기도 했던) 이러한 역설적 서술자의 역할이 가장 빛을 발한 것은 그의 출세작인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일 것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고전 『로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에 대한 해석서인 이 책에서 바야르는 ‘지금까지 비평가들은 문학을 해석하는데 그쳐왔다.

이제는 문학을 뜯어고칠 때이다’라는 제라르 쥬네트의 모토를 따라 작품의 자기완결성을 상정하는 수동적 비평이 아니라 작품의 신성함을 부인하는 ‘비평적 개입주의(interventionnisme critique)’를 주창한다(이러한 개입주의는 위고, 모파상, 프루스트, 뒤라스 등 대가들이 써낸 졸작의 실패 원인을 분석하고 개선을 위한 처방을 제시하는 『망친 작품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Minuit, 2000)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나며 스토리라인과 무관해 보이는 여담으로 가득한 프루스트 책에서 여담을 실제로 제거할 경우 어떤 일이 생기는지를 검토하는 『주제 이탈 - 프루스트와 여담』(Minuit, 1996)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의미의 다의성, 해석의 다양성이라는 구호가 문학 비평에서 유행한지도 이미 수십 년이 되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추상적 차원에 머물고 있고 기껏해야 작품의 작은 디테일 차원에 적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바야르는 이 유명한 추리소설을 빌어 작품의 플롯, 줄거리, 결말 자체도 완전히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실 추리소설이란 원칙적으로 가장 열려 있는 서술문학 장르이다. 작품이 진행되는 동안 ‘일어난 사건’(범죄와 그 주변 상황)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여러 인물의 시각에서 제시되며 개별 인물 자체도 자신의 해석을 여러 차례 수정한다.

그러므로 추리소설은 단일한 플롯에 대한 여러 개의 버전을 내부에 갖고 있는 장르이다. 하지만 작품 마지막에 이르러 탐정이 다른 모든 해석의 선(線)들, 가능한 모든 스토리라인을 폐기하고 단 하나의 ‘옳은 추리’, 확고부동한 진실을 제시하는 관습 때문에 추리소설은 거꾸로 가장 닫힌 내러티브 양식이 된다. 바야르가 도전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바야르는 『로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의 말미에 에르큘 포와로가 밝히는 살인의 진상과 범인의 이름이 과연 옳은지를 재검토한다. 분명 텍스트에는 포와로의 최종 설명과는 다른 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들이 있고 포와로의 논리에는 결함이 없지 않다. 그래서 바야르는 적지 않은 이론적 우회를 거치면서 공식적인 작품의 결말을 폐기하고 포와로가 지목한 범인이 사실은 누명을 쓴 것이며 왜 그가 억울한 처벌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를 성공적으로 설명한다. (바야르가 말하는 편집증적 서술자가 실행하는 ‘망상적 독서’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추리소설이므로 이러한 해석은 작품 전체의 줄거리가 완전히 달라지는 결과를 낳는다. 바야르는 이 책의 서론에서 『애크로이드』 이외의 다른 추리소설도 마찬가지로 진범을 다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며 (실제로 이 책에서는 크리스티의 다른 작품 몇 개의 진범을 새롭게 폭로한다) 추리소설이 아닌 작품에 나오는 의문사도 마찬가지로 재수사를 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라퐁텐의 우화에서 숱하게 죽어나가는 주인공들(동물들)의 진정한 사인(死因)은 무엇인지, 춘희의 죽음이 진짜 자연사인지, 『제르미날』의 광산 참변의 진짜 흉수는 누구인지도 질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히는데 바야르는 실제로 다음 저작인 『햄릿 사건 수사』(아마 지금껏 나온 바야르의 책 중 가장 이론적인 저작일 것이다)에서 셰익스피어의 고전으로까지 ‘탐정 비평(critique policier)’의 영역을 넓혀 햄릿왕의 살인범이 동생 클로디어스가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왜 햄릿이 그토록 복수를 미루고 망설였는지를 해명한다.

물론 한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바야르 자신이 애크로이드의 살인범이 셰퍼드 의사가 아니고 햄릿왕의 살인범이 클로디어스가 아니라고 실제로 믿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편집광적 역설과 망상적 독서가 문학과 텍스트와 독서에 대해 가져다주는 이론적 함축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이충민│프랑스 빠리 8대학 불문과 박사과정 재학중)

08. 01. 11.

P.S. 찾아보니 바야르의 책들 가운데서는 서평에서 다뤄진 책 두 권만 영역돼 있다. <책을 읽지 않고 이야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국내에도 곧 소개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 후 1년만에 두 권이 모두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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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1 2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1 2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1 2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1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08-01-12 04:30   좋아요 0 | URL
두 책 바로 '찜'했습니다. 어서 주문하고픈 마음입니다.^^
여담이지만, 아직 애크로이드 사건을 읽지 않으신 분께는 살짝 '스포일러'의 기능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습니다...ㅎㅎ

로쟈 2008-01-12 09:22   좋아요 0 | URL
그런 걱정은 하지 못했군요.^^ 곧 번역돼 나온다고 하니까(읽어본 분에 따르면 아주 재밌다고 합니다) 기대를 걸어봅니다...

jalousies 2008-01-13 08:25   좋아요 0 | URL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2007년 100권의 책에도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http://www.nytimes.com/2007/12/02/books/review/notable-books-2007.html?_r=1&oref=slogin) 며칠전에 그의 저서 한권이 또 발간되었더군요. 이번에는 코난 도일의 소설에 대한 책이네요. (http://www.leseditionsdeminuit.eu/f/index.php?sp=liv&livre_id=2562)

로쟈 2008-01-13 09:56   좋아요 0 | URL
네, 영어권에도 활발하게 소개되겠군요. 최근에 접한 가장 흥미로운 비평가입니다...

닉네임을뭐라하지 2008-01-13 14:29   좋아요 0 | URL
정말, 간단한 소개와 제목만으로도 굉장히 흥미로운 책들이 많네요.
로쟈님 말씀대로 그의 책들이 대거 소개, 아니 대거 번역되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로쟈 2008-01-13 21:43   좋아요 0 | URL
^^

2008-01-15 16: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6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린(隣) 2008-01-18 02:44   좋아요 0 | URL
재밌군요. 여기 지도교수의 세미나 중에 이 분이랑 함께 여는 세미나가 있어 한달에 한번 뵙는 분인데, 이렇게 페이퍼에서 보니 색다르군요. 앞으로 귀를 쫑긋 세워 들어봐야겠습니다.^^

로쟈 2008-01-18 22:41   좋아요 0 | URL
예, 쫑긋 세우셨다가 이 동네에도 전해주시길...
 

이번주 한겨레21의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옮겨놓는다(http://h21.hani.co.kr/section-021162000/2008/01/021162000200801100693008.html). 올해 가장 먼저 읽은 책이 이상수의 <한비자, 권력의 기술>(웅진지식하우스, 2007)이었고, 이 글은 그 독후감이다. 분량 때문에 못다 적은 말들도 있어서 따로 리뷰를 쓰려고도 했지만 다른 일들에 밀리고 있다. 대저 리뷰를 쓰는 일이 생계를 책임져주지 못하는 탓이다. '못 쓰면 말지'란 태도는 아마도 거기서 나오는 것이겠다... 

 

한겨레21(08. 01. 10) 목숨이 붙어 있다면 개혁가가 아니다

중국에 ‘내법외유’(內法外儒)란 말이 있다고 한다. “겉으로는 유학의 대의명분을 내세우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법가의 사상과 학술과 방법론을 신봉”하는 걸 가리킨다. 이른바 표리부동이다. 스스로를 진시황에 빗대기도 한 마오쩌둥이 제자백가 가운데 가장 숭상한 것도 법가라고 하니 중국사를 이해하는 데 유가, 도가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법가가 아닌가도 싶다. 하지만 중국만 그러할까? ‘동방예의지국’은 어떠한가?

얼마 전 대선에서 40% 가까운 유권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침묵’으로 표시했다. 일부 정치적 냉소주의자들을 제외한다면 마땅한 후보가 없다는 불편한 심기의 표현이겠다. 마땅한 후보? 국민을 움직이고 국가조직을 이끌 진정한 리더가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후보들만의 탓이겠는가. 자업자득은 아닌가. 한국 사회의 개혁을 바라는 유권자들이, 그리고 진보 진영이 진정한 정치적 리더를 양성하는 데 소홀하거나 인색했던 것은 아닌가.

이상수의 <한비자, 권력의 기술>(웅진지식하우스 펴냄)을 새해 벽두에 읽으며 여러 차례 무릎을 쳤다. 저자는 제왕학과 리더십의 교과서로서의 한비자, ‘법가의 집대성자’로서의 한비자를 리더십의 관점에서 다시 읽으며 재구성해놓았는데, 그게 우리의 당면한 고민들과 무관하지 않다. 전국시대의 한 사상가가 했던 고민들이 피부에 와닿는 걸 보면 사회의 기본구조는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무엇이 기본 구조인가? 권력 커뮤니케이션의 구조다. 한비자가 살았던 절대군주 치하의 궁정사회에서 이 구조는 군주와 개혁가, 권세가라는 세 항으로 구성된다(오늘날의 민주주의 체제하에서는 이 군주의 자리에 ‘국민’을 갖다놓으면 되겠다). 대망을 품은 개혁가라면 자신의 뜻을 펼쳐보기 위해서 일단 군주의 마음을 얻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유세해야 한다. 그런데, 이때 필요한 것이 권력의 심리학이다. 군주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라면 아무리 좋은 말을 늘어놓아도 귀에 들어갈 리가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비자는 유세객 또는 개혁가가 무엇을 알고 있느냐보다 그 지식을 어떻게 세상에 내놓아 실행되도록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만만치가 않다. 개혁가와 권세가, 곧 기득권 세력 사이에는 모순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개 군주는 이러한 권세가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그것을 뚫고 군주의 마음을 얻어야 하지만 모함과 누명을 뒤집어쓰기 일쑤다. 한비자는 형리의 처벌에 죽지 아니하면 반드시 자객의 칼에 죽게끔 되어 있는 게 개혁가의 운명이라고 단언해놓았다(한비자 또한 진시황과 대면할 기회를 가졌지만 곧 모함을 받아 자진했다). 개혁을 말하는 이들이 아직 목숨이 붙어 있다면 “제대로 된 진정한 개혁론이 아직 헌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게 한비자의 일갈이었다.

이러한 곤란 속에서도 개혁가에게 기회가 없지 않은 건 군주와 권세가들의 이해 또한 상충하기 때문이다. 한비자가 보기에 신하들은 오로지 사리사욕만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여차하면 세력을 규합해 군주의 자리까지 넘보는 자들이다. 군군신신(君君臣臣)이니 군신유의(君臣有義)니 하는 건 유가의 한담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듯 군주와 권세가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작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 개혁가의 생존전략이다.

왜 구태여 그런 어려움을 자처하는가? 예컨대 공자는 군주가 나의 말을 들어주느냐 마느냐에 노심초사하지 않았다(알다시피 공자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 게 군자라고 하였다). ‘아니면 말고’가 공자의 유세관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비자는 달랐다. ‘목숨 걸고’가 그의 유세관이다. 그는 500년에 한 번 나온다는 유가의 ‘성인 대망론’을 믿지 않았다(우리는 5년에 한 번씩 대선을 치른다!). 한비자는 ‘중간치 수준의 통치자’ 혹은 ‘평범한 지도자’가 나라를 통치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을 모색했다. 우리가 가지 않은 길이 혹 여기에 있는 건 아닐까?

08. 01. 11.

P.S. 책은 고전 '리라이팅'의 탁월한 모델이 될 만하지만 약점도 없지는 않다. '리더'란 말이 '개혁가'를 가리키기도 하고 '군주'를 가리키기도 해서 빚어지는 혼선이 그것이다. 가령, 각 장별 주제이기도 한, 리더에 대한 일곱 가지 요구 가운데 첫째 "리더는 용의 등에 올라탄다"에서 리더는 개혁가를 가리키지만, 둘째 "리더는 상황을 탓하지 않는다"에서는 그냥 모호하게 '지도자'를 뜻하고 일곱째 "리더는 마지막까지 책임을 진다"에 이르면 주로 군주를 모델로 한다. 이 책의 흥미로운 대목은 '용'이 아니라, '용'의 등에 올라탄, 올라타야 하는 개혁가-리더를 다루는 장들이다. 그 개혁가-리더와 군주-리더가 그냥 똑같이 '리더'로서 동일시될 수 있을까? 개혁가의 유세론을 다룬 전반부를 나는 '한비자의 발견'이라고 일컬으며 흥미진진하게 읽었다(나는 이런 대목에서만큼은 한비자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보다 앞선다고 생각한다). 군주의 리더십을 다룬 후반부는 상대적으로 덜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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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매인 일들만 없다면 가장 먼저 손에 들었을 법한 책은 마이클 폴란의 <잡식동물의 딜레마>(다른세상, 2008)이다. 저자는 이미 <욕망하는 식물>(황소자리, 2007), <욕망의 식물학>(서울문화사, 2002)란 책으로 소개된 바 있는 저술가이다(제목은 다르지만 뒤의 두 책은 같은 원서를 옮긴 것이다). 원저는 2006년에 출간됐으니까 일년 남짓만에 한국어로도 소개된 셈.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선정 2006 최고의 책"이라는 게 발빠른 소개의 이유가 되었음 직하다. 서점에서 이 책을 보자마자 내가 앨런 와이즈먼의 <인간 없는 세상>(랜덤하우스코리아, 2007)을 떠올린 건 아마도 그런 사정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겠다. 여하튼 대중성을 갖춘 양질의 교양서라는 점에서 모범이 될 만한 책들이지 싶다. 일단은 리뷰들을 챙겨놓도록 한다.   

문화일보(08. 01. 11) '무엇을 먹을 것인가’ 해답없는 현대인의 고민

“당신이 무엇을 즐겨 먹는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겠다.” 프랑스의 법률가이자 미식가였던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1755~1826)이 남긴 말이다. 사람이 무엇을 먹는지를 찬찬히 살펴보면 그 사람의 인격과 마음상태까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질 급한 사람은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하고, 먹는 속도도 빠르다. 느긋한 사람은 천천히 식사하면서 반찬도 골고루 먹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처럼 먹는 것, 즉 음식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인간의 본능에서 성욕이 근본적이라고 하지만, 성욕보다 식욕이 더욱 강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섹스를 하지 않고 살 수 있지만 먹지 않고는 일주일도 버티기 힘들지 않은가. 하지만 인간의 식욕은 여타 동물의 먹을거리에 대한 욕구와는 다르다. 예를 들어, 육식 동물이나 채식 동물은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지 않는다. 자신이 먹을 수 있는 것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배 고픈 고양이 앞에 아무리 채소를 갖다 놓아도 고양이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소 앞에 고기를 덩어리째 던져 주어도 외면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인간은 어떤 것을 먹어야 하는지를 놓고 고민한다. 바로 잡식동물의 딜레마다.

책은, 잡식동물로서의 인간이 갖고 있는 먹을거리에 대한 고민을 파고든다. 수십, 수백만년에 걸친 진화 과정에서 인간은 먹을거리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아냈다.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던 원시인들은 들판에 돋아난 수많은 풀들과 나뭇잎, 열매 중에 먹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놓고 골머리를 싸맸을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식물의 독성으로 인해 생명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기나 생선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부위를 다 먹을 수 있는 건 아니며 특히 상한 고기를 먹었을 경우엔 즉시 복통으로 이어지고 심각한 손상을 감당해야 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원시인들은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을 것이다. 일단 맛을 보고, 몸에 이상이 없는지 일정 시간을 기다려본 후에야 마침내 ‘먹어도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화식(火食), 즉 불에 익혀 먹는 방법을 찾아낸 이후 인간은 먹을거리에 있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냈다. 이전엔 먹을 수 없었던 것들도 불에 익히면 얼마든지 섭취가 가능하게 됐다. 이에 따라 먹을거리가 훨씬 다양해졌으며, 무엇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에 대해 나름대로의 틀을 세울 수 있었다. 지역마다 식문화가 형성돼 전통으로 굳어졌다.

그러나 현대인은 다시 한번 잡식동물의 딜레마에 빠져 버렸다. 화학비료의 개발과 이에 힘입은 농산물의 대량생산, 숱한 가공식품, 패스트푸드와 유전자 조작식품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이후 인간이 이뤄낸 먹을거리의 혁명은 가히 인류사적으로도 획기적인 ‘업적’이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오늘날 우리는 대형마트 식품매장의 진열대 위에서 무엇을 집을 것인지 망설이게 됐다. 한국인이라면 미국산 쇠고기와 한우, 유기농 채소와 일반 채소를 놓고 과연 비싼 가격을 치를 만한 가치가 있는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또 과자봉지에 ‘화학조미료(MSG) 무첨가’라는 문구가 명시돼 있는지, 유전자 조작 식품(GMO)은 아닌지 등에 대해서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소위 ‘건강정보’는 또 어떤가. 온갖 학설과 이론에서부터 신문·방송 등이 쏟아내는 정보들, ‘카더라’ 통신의 유언비어에 이르기까지 음식에 대한 단정과 주장들은 차고 넘친다. 지방이 비만의 원흉으로 지목받다가 어느새 탄수화물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 난무하는 ‘설’에 따라 현대인은 또다시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게 된 것이다.

저자는 이 같은 딜레마를 직접 몸으로 추적한다.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의 식사를 지탱하는 세 가지 음식사슬의 처음과 끝을 보여준다. 산업적 음식사슬, 전원적 음식사슬, 수렵·채집 음식사슬 등이다. ‘산업적 음식사슬’에서 저자는 옥수수의 비밀을 파고든다. 옥수수는 산업적 음식사슬에서 가장 중요한 음식 중 하나다. 저자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옥수수야말로 오늘날 식품매장의 다양성을 담보하는 대표적 식품임을 알게 된다. 가공된 옥수수는 패스트푸드의 주원료이며, 우리가 청량음료를 마실 때 사실은 옥수수를 마시는 것이나 다름없음을 저자는 보여준다.

또 ‘전원적 음식사슬’에선 우리가 과신하고 있는 유기농 식품이 사실은 유기농 방식으로 생산되지 않으며, 오히려 더 많은 화석연료를 소비하고, 더 많은 오염물질을 배출하고 있음을 충격적으로 펼쳐 보인다. ‘수렵·채집 음식사슬’에선 보다 철학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우리는 사냥꾼으로서 말 그대로 선사 시대의 본능을 갖고 있다”며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사냥을 통해 이런 본능을 일깨움으로써 가능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멧돼지 사냥과 버섯 채집 과정을 통해 저자는 인간의 본능과 먹을거리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하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책은, 단순히 오늘날의 식품산업에 대한 고발장만은 아니다. 저자가 직접 몸으로 부닥치는 체험들을 따라가다보면 마치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 속엔 철학과 생태학, 인류학 등 식문화와 관련된 다양한 관점들이 녹아 있다. 또한 현대사회가 어떤 정치·사회·문화적 시스템 하에 돌아가고 있는지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이 책을 읽고나면 식탁에 올라 있는 먹을거리들이 예전과는 전혀 다르게 보일 것이다.(김영번기자)

경향신문(08. 01. 12) 뭘 먹지? 아니, 그게 옥수수였어?

인간이 코알라라고 가정해보자. 그럼 우리를 괴롭혀온 고민 하나가 해결된다. ‘무엇을 먹을까’라는 고민 말이다. 코알라라면 유칼립투스 잎만 찾아 먹으면 된다. 하지만 잡식동물인 인간은 다르다. 선택의 폭이 너무 넓다. 그래서 ‘무엇을 먹을까’ 결정하는 일은 스트레스와 불안을 낳는다. 특히 눈앞의 먹거리가 병을 일으키거나 목숨을 앗아갈 가능성이 있을 때는 더 그렇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잡식동물의 딜레마’(The Omnivore’s Dilemma)다.

풍요로 넘쳐난다는 오늘날 이 딜레마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저자가 보기에 미국-어쩌면 전 세계-은 ‘국가적 섭식장애’를 앓고 있다. 모두 날씬해지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비만 인구는 늘어만 간다. 먹거리를 살 때마다 ‘저지방’ ‘저칼로리’ ‘트랜스지방 제로’ 등의 문구를 확인하느라 바쁘다. 음식들은 넘쳐나지만 ‘무엇을 먹을까’라는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다.

왜 이같은 일이 생겼을까.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음식에서 너무 멀어져서다. 우리가 먹는 음식에 대해 너무 무지하고 무관심해서다. 그래서 ‘음식사슬’(먹이사슬)을 따라 우리가 먹고 있는 음식의 기원을 추적한다. 거대 농업기업을 의미하는 산업적 음식사슬을 비롯해 산업 유기농, 초유기농, 수렵·채집 음식사슬이 그 대상이다.

슈퍼마켓과 패스트푸드점에서 끝나는 산업적 음식사슬의 시발점은 ‘옥수수’다. 원래 풀을 먹는 소를 비롯해 닭, 돼지, 칠면조, 양, 메기, 심지어 연어의 사료로 쓰인다. 치킨 너깃·탄산음료·프렌치프라이 등 인간 식욕의 한계를 시험해온 온갖 가공식품과 치약·화장품·기저귀 등 일상용품도 옥수수 투성이다. 슈퍼마켓에 있는 4만5000가지 물품 중 4분의 1 이상에 옥수수가 들어있다고 한다. “우리 대부분은 가공된 옥수수”라 할 만하다.

문제는 옥수수가 엄청난 규모로 재배되면서 다른 식물들과 동물들, 심지어 사람들까지 농촌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점. 또 옥수수 재배를 위해 뿌려진 합성비료는 환경문제를 일으킨다. 무엇보다 자연선택에 의해 풀을 먹어야 할 소가 옥수수를 먹고 집중가축사육시설에서 자라면서 소는 물론 이를 먹는 인간의 건강에까지 해를 끼친다.

그렇다면 유기농은 괜찮을까. 유기농도 농업 기업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면서 원래 자신이 대체하고자 했던 산업시스템을 똑같이 닮게 됐다. 유기농 인증 사료를 먹는다는 사실만 빼면 유기농 소나 닭이 다른 소나 닭과 다르게 사는 것 같지도 않다. 푸른 들판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닭과 소의 모습은 제품포장에나 인쇄되어 있는 ‘슈퍼마켓 목가극’이다. ‘산업 유기농’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 아닌가. 결국 저자가 문제삼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문명과 음식시스템을 지배하고 있는 ‘산업의 논리’다. 이 논리에서는 균일성, 기계화, 예측가능성, 교환 가능성, 규모의 경제가 중시된다. 다양성, 복잡성, 공생 같은 생태학적 가치는 설 자리가 없다. 소떼가 목초지에서 집단가축사육시설 안으로 걸어들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산업의 논리’는 또한 끊임없이 화석 에너지를 고갈시켜야 한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음식사슬은 선형이다. 하지만 자연의 ‘효율’은 모든 것이 연결되는 원형을 지지한다. 저자가 일주일간 고된 노동을 한 버지니아의 폴리페이스 초유기농 농장은 후자에 가깝다. 캘리포니아 숲 속에서의 야생돼지 사냥도 마찬가지다. 그곳에는 태양·흙·참나무·돼지·인간으로 이뤄지는 음식사슬이 작동한다.

저자는 “음식은 오늘날 위협받고 있는 모든 가치의 강력한 상징”이라고 역설한다.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은 건강을 위한 일일 뿐 아니라, 산업화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가 상실한 모든 문화적 가치들을 회복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음식을 먹느냐는 것은 우리 삶과 세계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정치적인 행위다.

인간 음식문화의 양극단에는 슬로푸드와 패스트푸드가 있다. 슬로푸드는 자연의 다양성을 반영하지만 패스트푸드는 산업의 창의력을 반영한다. 패스트푸드의 가격은 싼 것처럼 보이지만 정확한 비용은 숨겨져 있다. 이 비용은 자연이나 공중 보건, 공적 자금, 미래가 부담하게 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모두 비현실적이고 지속 가능하지 못하다. “음식은 예전에는 언제나 그랬지만 슬로푸드나 패스트푸드가 아닌 그냥 푸드가 되어야 한다”는 게 저자가 내린 결론이다.

여기서 책은 처음의 문제의식으로 다시 돌아간다. “우리가 먹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것이 어떻게 우리가 먹는 음식이 되었는지, 그리고 정말로 얼마만한 비용이 들었는지 잘 안다고 상상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식탁에서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다름 아니라 세상의 몸이다.”

저자 마이클 폴란은 사람과 식물간의 욕망과 진화의 역사를 그려낸 ‘욕망하는 식물’로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저널리스트다. 이번 책에서도 음식이라는 주제를 통해 인간과 정치·경제·문화·생태 등 사회 전반에 대한 철학적인 통찰을 자유롭게 풀어냈다. 500쪽이 넘는 분량이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맛깔나게 요리된 책이다.(김진우기자)

08. 0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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