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욤 드 마쇼와 유대인'은 르네 지라르의 책 <희생양>(민음사)의 1장 제목이다. 작년 가을에 나온 신장판과 영역본을 도서관에서 오래 전에 대출했는데(내가 갖고 있는 구판은 박스에나 들어가 있는 모양이다) 고작 1장 정도 읽어보고 반납하게 생겼다(무얼 집중해서 읽을 만한 여유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반납하기 전에 단순오역 두 가지를 교정해둔다. 새로운 장정으로 책을 내기 전에 번역이라도 한번 더 살폈으면 좋았을 뻔했다.

 

 

 

 

약간 어이없기도 한데 첫 '오역'은 맨 첫문장에 나온다. "기욤 드 마쇼(Guillaume de Machaut)라는 16세기 중반에 활동한 프랑스 시인이 있는데, 그의 <로이 드 나바르의 판단(Jugement du Roy de Navarre)>은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아니지만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7쪽)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면 중세의 중요한 시인이자 작곡가이기도 했다는 기욤 드 마쇼의 생몰연대는 1300-1377년이라고 나온다. 16세기 시인이 아니라 14세기 시인인 것이다. 역자가 부주의했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아마도 불어본에는 로마숫자로 세기가 표기됐던 게 아닌가도 싶다(간혹 그런 경우에는 혼동이 가능하니까. 영역본에는 'mid-fourteenth century'로 돼 있다). 그렇더라도 본문을 주의깊게 읽었다면 그의 '궁정식 문체의 장시(長詩)'가 다루고 있는 사건이 "1349년부터 1350년 사이에 프랑스 북부 지방을 휩쓸었던 그 유명한 페스트"(8쪽)라거나 "14세기에는 에피디미라는 이 유식한 말에서 항상 '과학성'의 향내가 풍겨나고있었는데"(12쪽)라는 문구들에서 착오를 눈치챌 수도 있었겠다.

그리고 지라르가 분석하고 있는 그의 작품 <로이 드 나바르의 판단>은 영어로 'Jugement of the King of Navarre'라고 옮겨진다. '로이'가 고유명사가 아닌 이상 '로이 드 나바르'는 '나바르의 왕'이라고 옮겨져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내용상 '판단'보다는 '심판'이 더 적절한 번역어로 보인다.

이 장시의 서두에서 기욤은 전혀 믿기지 않는 이야기와 제법 그럴 법한 이야기들을 뒤섞어 놓는데, 간추리면 이렇다: "돌들이 쏟아져 내려와 생물체들을 죽여버리고, 마을은 벼락을 맞아 모두 파괴된다.(...) 기욤이 살고 있던 마을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 사악한 유대인들과 기독교도이면서 그들과 공범인 사람들에 의해 사람들이 살해된다.(...) 그것은 그들의 강과 식수원을 오염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행을 저지른 자들을 하늘이 폭로함으로써 하늘의 정의가 이들을 일소한다."(7-8쪽)

대략 역사가들은 이 작품에 페스트의 재앙과 유대인 대학살이 묘사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어 보이는 기욤의 텍스트가 말해주는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지라르는 마치 '(추적) 사건과 진실'의 나레이터처럼 하나하나 따져들어간다. 그걸 다 따라가볼 만한 처지는 아니어서 한 가지 오역만 더 지적한다.

"어쨌든 여기서 사건이 일어난 정황은 그다지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 그것을 모른다 하더라도 현대의 독자들은 결국 우리가 제시하는 해석에 이르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독자들은 정당하게 살해된 희생양일 거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이 희생양은 무고한 것이므로 이 텍스트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희생양이 실재하였기 때문에 이 텍스트는 동시에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15쪽)

세번째 문장 이하는 영역본에서 이렇게 옮겨졌다. "He would conclude that there were probably victims who were unjustly massacred. He would therefore think the text is false, since it claims that the victims were guilty, but true insofar as there really were victims."(5쪽) 

"독자들은 정당하게 살해된 희생양일 거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는 주술관계가 모호한데, "독자들은 필시 부당하게 학살당한 희생자들이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정도로 옮겨질 수 있겠다. '정당하게'가 오역인 것은 바로 다음에 "이 희생양은 무고한 것이므로"라고 나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사소한 부주의가 낳은 오역들이지만 덕분에 희생양이 되는 것은 독자들이다...

08. 01.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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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1-09 14:39   좋아요 0 | URL
'roy'는 'roi'의 고어 표기인데ㅡ예를 들어 Montaigne의 Essais만 보더라도 'moi' 또한 'moy'로 표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죠ㅡ, 그것을 '로이'라는 표기로 옮겼다는 사실에서 역자가 아마도 'roy'를 보고 엉뚱하게도 영어 이름 'Roy'를 생각했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군요(최소한 '루아'라고만 표기했어도 이런 의심은 없었을 텐데요).
희생양으로서의 독자가 되는 경우는 거의 '일상다반사' 수준이라 이제는 좀 '무감각'해질 법도 하련만, 이런 쪽으로 촉수를 뻗은 예민함 때문에 '꿋꿋한' 독서가 방해 받곤 하는 경험은 언제나 다시금 독한 편두통을 불러일으킵니다...

로쟈 2008-01-09 14:42   좋아요 0 | URL
그렇죠. 마음놓고 읽을 수 있는 번역서들이 정말 드뭅니다.--;

람혼 2008-01-09 15:19   좋아요 0 | URL
여담이지만, 저는 이렇게 신속한 댓글이 달리는 로쟈님 서재 방문자 여러분들의 민첩한 기동성이 언제나 부럽습니다.^^; 그나저나 'roi'의 한글 표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말씀드리자면, 일전에 'Guattari'의 표기에 대해서 로쟈님이 언급하셨던 부분을 가끔 떠올려보게 되는데요, 예를 들어 'roi'나 'bourgeois' 등 [-wa-] 발음이 들어가는 단어의 한글 표기에 있어서 현재는 '-우아-'가 일반적인 표기법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루아', '부르주아'). 로쟈님께서 보셨던 책이 구체적으로 어떤 책인지는 모르겠지만ㅡ알려주세요~^^;ㅡ'Guattari'를 '구아타리'로 표기했던 이는 아마도 저러한 발음과 표기법의 원칙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현재의 원칙 상으로는 분명 '구아타리'라고 표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이렇게 되면 이게 또 당장은 여간 어색한 것이 아니고, 또 예를 들어 '손탁'이냐 '손택'이냐, 혹은 '벤야민'이냐 '베냐민'이냐 등과 관련하여 여러 번 로쟈님께서 쓰셨던 것처럼, 이러한 인명 표기에 있어서 원칙을 적용하느냐 아니면 '관습'과의 타협을 적용하느냐의 문제는ㅡ물론 이것이 이렇게 단순히 양자 사이의 결정의 문제도 아니겠지만ㅡ참 사소한 듯 하면서도 난해한 문제라고 느껴진다는 인상 한 자락 첨부해봅니다.^^ 고견들을 듣고 싶습니다.

로쟈 2008-01-09 16:17   좋아요 0 | URL
구아타리는 <시각문화의 매트릭스>에 나옵니다. 저도 '과타리'까지는 봐주겠는데, '구아타리'는 오버라는 새각을 합니다. '망구엘'의 경우도 '망겔'이란 표기를 찾아줄 수는 있지만, 국내에 그렇게 번역/소개된 이상 '망구엘'을 존중해줄 수 있지 않나 싶어요. 그러니까 제 주요한 기준은 '통용'입니다. '베르그손'보다 '베르그송'을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사실 지금 든 사례들은 발음상 대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다고 '통용'만을 고집할 수는 없는데, 벤야민의 연인 '아샤 라시스'는 최근에 나온 선집에서 '아샤 라치스'로 바로 잡혔더군요(역자조차도 예전에는 '라시스'로 표기했었습니다). 이런 경우는 교정된 표기를 선호하는 것이죠...

2008-01-09 1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1-09 16:21   좋아요 0 | URL
그냥 웃고 즐기는 건 괜찮은데, '유료'라서요. 그것도 비싼!^^;

소경 2008-01-09 21:28   좋아요 0 | URL
저도 1장만 대강 읽고 남겨 두었는데. "독자들은 정당하게 살해된 희생양일 거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에 구절에 대해서 전 옯다고 생각 했습니다. 평소 물론 희생양을 두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는 말은 현용하기 어렵지만 지라르는 유태인을 희생양을 둠에 정당하다고 말하는 당시대의 풍토에 대해서 역설하는 것이니. 누구에게로 책임을 둠으로써, 즉 희생양으로 남김으로 흡족할 수 있는 풍토를. 물론 당시 유태인의 박해에 맞물려, 고개를 끄덕이는 독자를 향한 것이라 '정당하게'가 성립되야 하는 것이......

(얼핏 읽고 적으니; 자신이 없네요.)

로쟈 2008-01-09 22:08   좋아요 0 | URL
희생자들이 정당하게 살해됐다는 건 텍스트 서술자의 관점입니다. 오늘날의 독자가 읽기에는 희생자들이 무고하게 살해됐다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텍스트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것이고요, 그럼에도 희생자들이 존재했다는 건 말해주니까 그 점에서는 진실을 말했다는 의미입니다...

소경 2008-01-10 06:41   좋아요 0 | URL
현대의 독자들을 향한 글에 다른 내용을 은근히 집어 넣었군요. 맥락을 잘못 집었네요 ^^:;
 

작년말 크리스마스 시즌에 서점에서 몇 번 손에 들었다가 놓은 책은 '초기 교회의 비밀을 담은 쿰란의 문서'란 부제를 단 <사해사본의 진실>(위즈덤하우스, 2007)이다('사해사본'은 가장 오래된 구약성서 사본이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마침 지난달부터 올 6월까지 전쟁기념관에서 ‘사해사본과 그리스도교의 기원’이란 전시회가 개최되고 있기에 한번 읽어볼 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 박자 늦게 올라온 리뷰가 있어서 옮겨놓는다.   

한겨레(08. 01. 08) "사해사본 내용 은폐·왜곡됐다”

사해사본 전시회를 기다렸다는 듯이 〈사해사본의 진실〉(위즈덤하우스 출판)이라는 책이 출판됐다. 그러나 ‘초기 교회의 비밀을 담은 쿰란의 문서’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전시회가 그리스도교인들의 신앙을 고취하는 데 목적을 둔 것과 달리 사해문서를 둘러싼 의혹과 진실 규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책은 사해문서가 발굴된 지 5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사해문서의 중요한 내용들이 공개되지도 않은 채 사해문서를 관리하는 ‘국제학자단’이란 조직에 의해 은폐되거나 왜곡되어 전달되고 있다는 비판적 시각에서 시작한다. 저서는 사해문서가 발견된 사해의 쿰란공동체가 1세기의 공공사건들이나 주류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숨어 있던 은둔자들이 아니라 당시 시대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의인’으로 꼽히는 예수의 동생 야고보는 물론 예수까지도 그 연관 가능성이 감지되지만, 정통 그리스도교의 수호에만 집착하는 국제학자단이 그리스도교 기원의 독창성에 대한 침식을 우려해 이를 철저히 은폐하는 데만 앞장서고 있다는 것이다. 책은 또 예수 이전에 기록된 사해문서의 존재는 이미 예수의 가르침과 유사한 가르침들이 그전에도 있었음을 말해준다고 밝히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하늘 아래 새것은 없다’는 성서의 말씀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 20세기 성서고고학의 최대 발견으로 꼽히는 사해사본 가운데 길이가 7.34m 인 이사야서 복원본을 지난해 12월 4일 오전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특별전시관에서 전시관계자들이 살펴보고 있다. 기원전 250년에서 기원후 68년 사이에 쓰여져 이스라엘 사해 서쪽 쿰란 지역의 동굴에서 지난 1947년~1956년 발견된 사해사본 진본 5점과 소장국인 이스라엘에서도 진본이 공개되지 않고 있는 복원본 3점 등 그리스도교 관련 유물을 볼 수 있는 '사해사본과 그리스도교의 기원'전은 5일 개막해 2008년 6월4일까지 열린다.(김정효 기자)

저자는 쿰란공동체가 예수의 동생 야고보를 추종하던 ‘나조레안들’일 것으로 추정한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장로들로 구성된 평의회를 이끄는 초기 교회의 지도자였으나 바울에 밀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인물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한 번도 예수를 직접 보지 못한 바울은 단지 광야에서 의사 신비주의적인 체험만을 근거로 그만의 신학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예수에서 기인한 것처럼 거짓으로 꾸며 정당화해 예수를 직접 만나고 가르침을 받았던 야고보 등 초기 공동체 구성원들이 생각했던 ‘예수’와는 전혀 다른 예수를 전했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이로 인해 초기 교인들로부터 죽음을 당하기 직전 로마병 수백명의 도움으로 위기를 피해 자취 없이 사라진 바울의 행적은 로마에 도움을 주는 밀고자나 비밀 정보원을 돕는 ‘증인 보호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의인 야고보’와 바울을 대척점에 놓고 그리스도교의 기원을 다시금 되짚어보게 하고 있다. 마이클 베이전트·리처드 레이 지음, 김문호 옮김.(조현 기자)

08. 01. 08.

 

 

 

 

P.S. <사해사본의 진실>은 결국 구입하게 됐는데, 아직 서두만을 읽었지만 잘 씌어지고 잘 번역된 책이다. 덕분에 같은 저자들이 쓴 <성혈과 성배>(자음과모음, 2005), 그리고 같은 역자의 <신의 전기>(지호, 1997)까지 독서목록에 올려놓았다. 역자는 신학대학을 나와서 사진작가로도 활동하는 분인데 사진쪽뿐만 아니라 기독교 관련서 번역에서도 손에 꼽을 만하지 않나 싶다. 최근에 나온 책으로는 스티븐 랭의 <바이블 키워드>(들녘, 2007)가 눈길을 끈다. 가격이 만만찮아서 미뤄두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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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1-09 15:25   좋아요 0 | URL
저도 '이쪽 계통'의 책들을 서재 한 구석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몰래 모아두고 있는데요, 얼마 전 '정통 기독교도'인 한 친척에 의해 이 코너가 '사해사본처럼 발굴된' 이후로 그 친척이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전 같지가 않습니다.^^;

로쟈 2008-01-10 10:27   좋아요 0 | URL
저도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가끔 교회에 나가는데 기독교 서적도 좀 읽는 게 인문학 공부라고 자위하고 있습니다...

비로그인 2008-01-10 10:18   좋아요 0 | URL
하하. 로쟈님. 저도 종교는 로만 가톨릭인데,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가끔 교회에 나가야 한답니다. 의외로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교회에 나가는 분들이 많군요... 인문학공부. 맞겠지요? (웃음)

로쟈 2008-01-10 10:27   좋아요 0 | URL
네, 인문학 공부 맞구요, '평화'가 중요합니다.^^
 

종로의 대형서점에 잠시 들렀다가 손에 든 책은 아론 구레비치(1924-2006)의 <개인주의의 등장>(새물결, 2002)이다. 예전에 '개인'과 '개인주의'를 주제로 한 몇 권의 책을 꼽으면서 가장 먼저 염두에 둔 책이긴 했는데, 출간 당시에는 너무 비싸 보여서 구입하지 않았다. 5-6년을 흘려보내니 그래도 '정상' 가격으로 다운된 효과가 있다. 개인적으론 단테의 <신곡>에 대한 강의를 준비하는 데 필요하다는 '핑계'에다가 저자가 최근(재작년)에 세상을 떠났다는 점도 고려했다. 책은 유럽의 5개 출판사에서 기획한 '유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총서의 일환으로 출간됐는데, 국역본의 경우 댓 권에서 목록이 더 늘어나지 않는 걸 보면 주줌하고 있는 모양이다(아직도 스무 권쯤이 더 나와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완간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몇년 전 관련서평과 구레비치에 대한 간단한 코멘트를 붙여둔다.   

한겨레21(03. 05. 08) 개인은 진화하고 있다

‘개인’(individual)은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된 개념이 아니다. 서양의 개인은 유일신 앞에서 얼굴을 감추고 엎드려 있어야 했고, 동양의 개인은 가족과 친척, 사회의 제도윤리에 칭칭 감겨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개인의 자각은 언제 이루어졌을까 러시아의 역사가 아론 구레비치는 <개인주의의 등장>(이현주 옮김, 새물결 펴냄)에서 복잡다단한 개인의 역사를 파헤친다.(*아래는 책의 스페인어본.)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사람’(person)이란 말조차 없었다. 그리스어 ‘프로소폰’(prosopon)과 라틴어 ‘페르소나’(persona)는 무대에서 사용되는 가면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한명의 배우가 무대 위에서 여러 개의 가면을 바꿔쓰며 그 가면에 맞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프로소폰 또는 페르소나는 한명의 개인을 가리키지 않았다. 성격(character)과도 유사한 개념의 페르소나는 제도와 사회가 정해준, 외부에서 결정된 정체성이었다. 프로소폰·페르소나가 한명의 사람으로 진화한 것은 중세 기독교 때였다. “그리스도 교회의 세례를 통해 인간(human being)은 한 사람이 된다”고 13세기 문헌은 말한다.

그러나 물론 이때의 사람은 여전히 현대적 의미에서의 ‘개인’이 아니다. 아론 구레비치에 따르면 개인은 “씨족적 존재에서 벗어나 사회적 신분에 따른 여러 제한에서 자유로워진 인간”이다. 지은이는 이런 개인의 전형이 르네상스 시대 때 갖춰졌다는 많은 역사가들의 지적을 거부하고, 중세 이전 스칸디나비아 문학의 전통까지 거슬러올라가 곳곳에서 출몰한 개인의 계보를 더듬는다.

고대 노르웨이 서사시에는 뛰어난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 중 대표적 영웅인 ‘에갈’은 거친 바이킹이자 세련된 궁정시인, 자애로운 아버지, 부와 선물을 기대하는 남자이며 충성스런 친구 등 모순적인 성격의 인물로 나타나는데, 에갈이 구현하는 개인성은 집단의 윤리에 자신을 완전히 동화시키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인간적 겸손함을 요구하는 기독교가 개인에 대한 관심이 자라나는 것을 방해한 것은 확실하지만, 중세 시대에도 역시 개인의 탐구는 계속됐다. 이 중 <고백록>을 쓴 성 아우구스티누스(AD 354~430)는 기독교 안에서 개인의 ‘내적 공간’을 탐구하는 데 큰 진전을 이뤘다. 방종한 생활로 젊음을 탕진하며 살다 어느 날 진정한 신을 발견하게 된 그는 “나는 운명도 아니요, 숙명도 아니요, 악마도 아니다”라고 외쳤다. 그가 바라본 세계의 중심은 “창조자를 대면하는 에고”였다. 중세의 다른 저자들이 스스로를 이교도, 성서적 영웅, 복음서·역사·문학의 인물에 비교하는 것과 달리, 아구구스티누스는 자신에 대해 묵상하고 본래 그대로의 자신에 대해 판단을 내린다.

글을 쓰는 지식인 집단말고도 개인은 여러 계급에서 발견됐다. 8세기의 한 조각가 밀라노 대성당의 황금 제단 위에서 왕관을 씌워주는 성자 앞에 무릎을 꿇은 인물로 자기를 묘사했으며, 다른 장인들 역시 곳곳에 자기의 서명을 남겼다. 기독교 윤리에 직업의식이 덧씌워지면서 기사와 상인 역시 각자 소명대로 자신의 직업에 만족하며 개인성을 형성해나갔다.

지은이는 “개인은 단선적으로 발전하지 않았다”고 결론내린다. ‘개인’은 중세 이전부터 싹을 틔웠지만, 자아에 대한 개인의 태도, 자각을 의미하는 영어의 접두어 ‘self’는 종교개혁 이후에야 등장했다. ‘개인’은 느리고 더디고 힘겹게 일상의 영역으로 편입돼온 것이다.(이주현 기자)

08. 01. 08.

P.S. '러시아의 역사가'로 소개된 아론 야코블레비치 구레비치는 러시아의 저명한 중세사가이면서 문화학자이다. 이 분야의 전공자에 따르면 중세 연구 분야에서 드미트리 리하초프, 보리스 우스펜스키와 함께 러시아의 3대 석학으로 꼽히는 대학자이다(현재는 우스펜스키만 생존해 있다). 아래는 그의 사후에 출간된 두 권의 선집.

Арон Гуревич Арон Гуревич. Избранные труды. Культура средневековой ЕвропыАрон Гуревич Арон Гуревич. Избранные труды. Древние германцы. Викинги

<개인주의의 등장>은 구레비치가 이 시리즈의 책임자인 자크 르 고프의 의뢰를 받고 쓴 것이다(구레비치의 대표작은 <중세의 세계>, <중세의 역사인류학>, <중세의 민중문화> 등이다). 그가 서론격인 1장에서 토로하듯이 "개인은 파악하기 힘"든데, 그럼에도 개인주의의 기원을 '고대 스칸디나비아 문학'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유럽의 개인주의는 여러 차례 부침을 겪으면서 산발적으로 나타났다는 주장을 제시한다. 같은 주제를 다룬 여타의 책들과 같이 읽어보면 도움이 되겠다. 참고로, 국역본은 영어본을 옮긴 것이고, 영어본은 또 러시아어본을 옮긴 것으로 돼 있다. 한데, 러시아본의 실물이 어떤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영어본을 대출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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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8-01-08 22:49   좋아요 0 | URL
로쟈님이 강의하시는 '신곡'이라니. 강의 들으시는 분들 정말 부럽네요!

로쟈 2008-01-08 22:53   좋아요 0 | URL
전공 분야도 아니기 때문에 심도 있는 강의는 어렵고요, 다만 '대표 독자' 역할을 맡은 것뿐입니다.^^;
 

밤참을 먹으며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뒤늦게 훑어보았다. '신춘문예'에 가슴을 뛰던 때는 진작에 지난 터이라 심상하게 둘러보다가 시 부문 당선작이 좀 특이해서 옮겨놓는다(당선소감은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12311639581&code=960205 참조). 제목이 '페루'다. 그리고 산문투로 돼 있다. 신춘문예 시의 전형성에서 탈피하고 있는 게 일단 호감을 갖게 한다. 게다가 페루, 하면 떠올릴 수 있는 게 라마, 마추픽추, 그리고 로맹 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등이던 차에 '페루는 고향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를 하나 더 추가할 수 있어서 반갑다.

페루

이제니

빨강 초록 보라 분홍 파랑 검정 한 줄 띄우고 다홍 청록 주황 보라. 모두가 양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양은 없을 때만 있다. 양은 어떻게 웁니까. 메에 메에. 울음소리는 언제나 어리둥절하다. 머리를 두 줄로 가지런히 땋을 때마다 고산지대의 좁고 긴 들판이 떠오른다. 고산증. 희박한 공기. 깨어진 거울처럼 빛나는 라마의 두 눈. 나는 가만히 앉아서도 여행을 한다. 내 인식의 페이지는 언제나 나의 경험을 앞지른다. 페루 페루. 라마의 울음소리. 페루라고 입술을 달싹이면 내게 있었을지도 모를 고향이 생각난다. 고향이 생각날 때마다 페루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아침마다 언니는 내 머리를 땋아주었지. 머리카락은 땋아도 땋아도 끝이 없었지. 저주는 반복되는 실패에서 피어난다. 적어도 꽃은 아름답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간신히 생각하고 간신히 말한다. 하지만 나는 영영 스스로 머리를 땋지는 못할 거야. 당신은 페루 사람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미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한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한국 사람은 아니지만 한국 사람입니다. 이상할 것도 없지만 역시 이상한 말이다. 히잉 히잉. 말이란 원래 그런 거지. 태초 이전부터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무의미하게 엉겨 붙어 버린 거지.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미쳐버린 채로 죽는 거지. 그렇게 이미 죽은 채로 하염없이 미끄러지는 거지. 단 한번도 제대로 말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안심된다.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한다. 길게 길게 심호흡을 하고 노을이 지면 불을 피우자. 고기를 굽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술을 마시자. 그렇게 얼마간만 좀 널브러져 있자. 고향에 대해 생각하는 자의 비애는 잠시 접어두자. 페루는 고향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스스로 머리를 땋을 수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양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말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비행기 없이도 갈 수 있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다.

07. 01. 07.

P.S. 윤성희의 소설집을 다룬 문학평론 당선작 '길위의 나무와 소설의 의무'(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12311640181&code=960205), <웰컴 투 동막골>을 다룬 대중문화평론 당선작 '먹고 배설하는 신체로 회귀하라'(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1011722371&code=960205)도 링크해놓는다. 정독하지는 않았지만 유망한 평론 지망생들이 우리 주변엔 아직도 많다는 걸 확인시켜준다. 특히 대중문화(영화) 평론 분야는 강세라고 하는데, 이번 당선작 역시 수작이다(수상소감은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1011703001&code=960205). '슬로베니아의 비평가 미란 보조비치'가 언급되기에 곧장 문학평론가 복도훈씨를 떠올렸는데, 알고 보니 대학원 동문이다. 평단에 '동대 마피아'라도 만들어질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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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08 04: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08 2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08-01-08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도 페루가 소재던데요.
이번 신춘문예엔 페루가 대세군요.

로쟈 2008-01-08 21:11   좋아요 0 | URL
우연의 일치겠지만 재미있네요...

수유 2008-01-08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평론입상자의 이름을 기억해야 할것 같습니다. 특히 영화평론.

로쟈 2008-01-08 21:12   좋아요 0 | URL
역량있는 젊은 평론가들은 많지만 평론집은 점점 읽히지 않는 기이한 시대입니다...

깐따삐야 2008-01-08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인식의 페이지는 언제나 나의 경험을 앞지른다.
- 이 부분 와닿네요. 고로, 페루에 가 본 것 같아요. 저도.^^

로쟈 2008-01-08 22:54   좋아요 0 | URL
머리를 좀 땋아본 사람들은 다 고향이 페루인 것이죠.^^

2008-01-09 2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1-09 22:05   좋아요 0 | URL
수정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 '두 모녀'를 살해하다'의 자투리 글로 쓰다가 분량이 길어져서 따로 자리를 만든다. 외국어 표기에 관한 것이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러시아어 '라스콜리니코프(Раскольников)'를 영어로 음역한 표기는 'Raskolnikov'이다. 여기서 [l(ль)]'이 연음이기 때문에(구개음화된 [l]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l']이라고 표기하지만 보통은 경음 과 구별없이 [l(л)]로 표기한다.

해서 우리말로 적을 때도 '라스콜코프'라고 적어야겠지만(나도 그렇게 적었던 적이 있다), 이 경우 우리말에서는 자음동화가 일어나서 '라스콜코프'로 발음하게 된다. 짐작에는 그렇게 되면 어차피 원음과는 차이기 있기 때문에 연음 [l]을 'ㄹ'이 아니라 '리'로 옮기던 관행이 이 경우에는 계속 남아서 '라스콜리니코프'로 굳어졌다(나도 동의하는 표기이다). 역시나 같은 연음 [l]이 쓰인 '고골리(Gogol)'의 경우 '고골'로 표기가 바뀐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하지만 '고리키(Gorky)'의 경우는 계속 '고리키'라고 표기한다(언젠가 국문과 대학원생이 찾아와서 고리키의 작품을 도서관에서 찾을 수 없다고 문의를 해온 적이 있는데, 짐작에 그는 'Gorky'가 아니라 'Goriky'를 검색했다). 경음 표기를 선호하는 전공자들은 '라스꼴리니꼬프'라고 적는다. 이런 단편적인 사례에서도 알 수 있지만 외국어 표기 원칙이란 어느 정도 관행을 존중하고 임시변통을 허용하는 수밖에 없다. 즉 곧이 곧대로가 아니라 융통성있게 적용해야 된다는 말이다.  

개정된 표기안에 따라 '도스토예프스키' 혹은 '도스또예프스끼'로 표기돼 오던 'Достоевский(Dostoevsky)'는 '도스토옙스키'라고 표기되고 있다(알라딘에서도 표제어를 그렇게 잡고 있다). 이 경우 '도스또옙스끼'라는 이형까지 가능해지기 때문에 과도기적으로 네 가지 표기가 혼용되는 수밖에 없다.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는 아직 러시아어 표기에까지는 주의를 두지 않아서 그냥 '도스토예프스키'라고 표기한 경우이다(언론이나 출판물에서 아직 '도스토예프스키'와 '도스토옙스키'가 혼용되고 있다).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의 6장은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를 다루고 있는데, 'Rushdie'는 예전에 '루시디'로 통용됐던 이름이다. 즉 국내에 번역돼 있는 <악마의 시>는 '루슈디'가 아니라 '루시디'의 작품이다('루슈디'란 표기는 내가 알기에 <분노>에서부터 등장했다). 'sh'를 [시]가 아니라 [슈]로 표기하는 걸 새로운 원칙으로 정한 탓이겠다(그리고 이를 관행과 무관하게 일률적으로 적용한 것이고).

흥미로운 것은 러시아어 표기의 경우에는 정반대의 원칙이 적용된다는 것. 가령 '푸슈킨'으로 표기돼오던 'Пушкин(Pushkin)'의 경우 개정 표기법에 따르면 '푸시킨'으로 표기되어야 한다(물론 'Pushkin'은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굉장히 다양하게 표기돼 왔었다). 'sh'를 [슈]가 아니라 [시]로 읽도록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해서 똑같은 'sh'가 나오더라도 이게 영어인지 러시아어인지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읽어주어야 한다(원래 발음은 별 차이가 없다). 러시아 영화감독 '에이젠슈테인'이 '에이젠시테인'으로, 문학이론가 '슈클로프스키'가 '시클롭스키'로 표기되는 건 이러한 원칙에 따른 것이다. 물론 이렇게 바뀐 이름들로 검색되는 책은 아직 한권도 없다. 나는 별로 동의하지 않기에 '에이젠슈테인'과 슈클로프스키'를 고수한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선집까지 나오고 있지만 일부 언론의 공식 표기는 '발터 베냐민'이다. 심지어는 '월터 베냐민'이라고 표기된 적도 있다!(이 문제에 대해서 예전에 쓴 페이퍼는 http://blog.aladin.co.kr/mramor/429974 참조). '베냐민'으로 검색되는 책은 역시나 한권도 없다. 이 정도면 좀 우스운 원칙 아닌가? 한글로 외국어를 '정확하게' 표기할 수 있는 원칙은 가능하지 않다. 그저 근접하게 표기해주면서 우리말에서의 혼동/혼선을 피할 수 있으면 좋은 것이다(프랑스 작가 'Balzac'을 왜 '발작'이 아니라 '발자크'라고 표기하겠는가?). '원칙'을 자주 바꿔가면서(외국어 표기안은 여러 차례 개정돼 왔다) '원칙주의'를 고집하는 건 보기에 흉하다...  

08. 01.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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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8-01-07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나. 월터 베냐민이 누군가요? ㅋㅋㅋㅋ

로쟈 2008-01-07 19:33   좋아요 0 | URL
실수라고 보야겠죠. 한데 '베냐민'이라고 교정돼 있어서 좀 코믹한 효과를 유발하지만...

와넬 2008-01-07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르스타인 베블렌이냐 소스타인 베블렌이냐 하는 문제보다 더 심각한 문제였군요.

로쟈 2008-01-07 23:22   좋아요 0 | URL
그 경우는 모로 가든 '베블렌'이니까요. 고유명사 표기는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이면서 해법이 잘 보이지도 않는 난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