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한 미술 전시회장에서 본 작품을 소재로 한 시를 옮겨놓는다. 작품의 제목이 '유리컵 안의 생'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여하튼 여러 유리컵 안에 붉은 액체들이 들어 있었고 그 중 하나에는 깨진 유리들이 들어 있었던 듯하다. 그에 대한 감상을 적은 것이다.

유리컵 안의 생

안국동 어딘가에서 한 여자는 유리컵마다에 붉은 포도주를 담아 진열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스물넷이나 서른셋의 유리컵일는지도 모른다. 유리컵들은 저마다의 앙칼진 꿈으로 무장하고 깨진 유리 조각들을 제 몸의 변두리로 밀쳐내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간혹 속살을 파고드는 미물들을 껴안고 오래 고민할는지도 모른다. 생의 바깥과 안을 구별하느라 오래 주저할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널브러져

주정할는지도 모른다. 안국동 어딘가에서 한 남자는 유리컵 속에 담긴 붉은 포도주가(아니면 또 어떤가) 내내 남의 일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고만고만하게 생을 담은 유리컵들이 거리의 구석구석을 배회하기도 하고 차가 막히게도 하고 취해 쓰러지기도 한다는 사실에 미련이 남을는지도 모른다. 하여 유리컵들은 저마다의 오해로 제 몸을 지탱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사태는 너무도 투명하여 믿어지지 않는다.

 

안국동 어딘가에서 한 여자는 유독 한 유리컵에 깨진 유리 조각들을 담아 놓을는지도 모른다. 유독 맨 정신의 유리컵은 온통 제 살점을 물어뜯고 있는 것처럼 보일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유독 한 유리컵의 생만이 유난한 것일까. 나는 내내 골몰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결국 언제부턴가 나 또한 인육(人肉)을 먹고 있었던 거라 단정 짓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이 너무도 분명한 사태가 믿어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08. 01. 19.

 

 

P.S. 유리컵 이미지들은 시에서 묘사하고 있는 작품과 무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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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20 0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1-20 01:35   좋아요 0 | URL
재미있다는 뜻으로 듣겠습니다.^^

필라멘트 2008-01-20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 좋네요. 유리컵이란 은유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듯 합니다.^^

로쟈 2008-01-20 10:27   좋아요 0 | URL
많은 의미는 그 작품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깐따삐야 2008-01-20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아보니 저의 스물넷도 붉은 포도주 같았네요. 서른셋에도 설마 또 그럴까요?
이젠 매사 시큰둥해져서 말이지요. 벌써 이러시면 안 되는데. -_-;

로쟈 2008-01-21 14:35   좋아요 0 | URL
아직 '청춘'이시군요.^^
 

영국의 저널리스트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책들이 출간된 김에 '도킨스와 히친스 읽기' 목록을 어제 만들었는데(히친스의 책은 예전에 나온 <키신저 재판>까지 세 권밖에 되지 않는다) 내친 김에 리뷰들도 옮겨놓는다. 나는 <자비를 팔다>(모멘토, 2008)를 어제부터 가방에 넣어다니고 있다(<신은 위대하지 않다>는 재정 형편상 약간 미뤄두었다)...

한겨레(08. 01. 19) ‘성녀’ 마더 테레사는 없다

“그녀의 성공은 겸손과 소박의 승리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미신적인 유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리고 교활한 자와 한 가지 목적에 전념하는 자들이 소박하고 겸손한 자들을 착취하는 것에 기댄, 천년왕국 이야기의 또 다른 장이다.”

저널리스트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자비를 팔다〉(The Missionary Position: Mother Teresa in Theory and Practice)(모멘토)에서 내린 평가다. ‘그녀’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1979년)요, 20세기의 성녀로 추앙받은 테레사(1910~1997) 수녀. 〈자비를 팔다〉는 자기희생의 화신인 ‘그녀’가 실은 다국적 선교사업체의 수장, 근본주의 종교사업가에 지나지 않았던 게 아니냐고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히친스의 전복적 사고는 다음과 같은 글에도 집약돼 있다. “니카라과 정부에 대한 전쟁에서 고의적으로 살해된 사람의 수는 콜카타의 모든 선교자들이 우연으로라도 목숨을 구한 사람 수보다 훨씬 많다.”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정부에 대한 우익 콘트라 반정부군의 공격 배후에는 돈과 무기를 대준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도사리고 있었으며 로마 교황청과 현지 추기경은 그들을 지원했고 산디니스타에 훈계를 늘어놓았던 마더 테레사의 ‘사랑의 선교수사회’는 교황 직속 조직이었다.

1994년 의학전문지 〈랜싯〉의 편집장 로빈 폭스 박사는 테레사 수녀가 45년간 봉사한 인도 콜카타의 ‘죽어가는 이들을 위한 집’을 방문했다. 선행과 영웅적 덕행의 표본 마더 테레사를 ‘콜카타의 성녀’로 우러르게 만든 그곳에서 폭스는 삭발한 채 한 방에 오륙십 명씩 수용돼 죽어가고 있는 말기 환자들을 목격했다. 아스피린 이상의 진통제를 받지 못한 채 지독한 고통에 시달리며 죽어가는 사람들에겐 어쩌다 운 좋으면 항염증제인 브루펜 같은 약이 주어졌다. “(링거와 같은)점적장비들도 충분치 않았습니다. 주삿바늘을 쓰고 또 쓰고 너무도 여러 차례 사용했고, 종종 바늘을 수도꼭지 밑에서 찬물로 헹구는 수녀들이 눈에 띄고는 했을 정도였어요. 그중 한 사람에게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깨끗이 해야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말했지요. ‘그래요. 한데 왜 소독을 안 하는 거죠? 물을 끓여서 바늘을 소독해야잖아요?’ 그러니까 그 여자 말이 이래요. ‘그럴 필요가 있나요. 시간도 없고요.’”

돈과 일손이 부족해서? 그게 아니다. “마구잡이식 날림시설”을 그런 식으로 운영한 것은 “심사숙고의 결과”다. 목적은 “고통을 덜어주는 게 아니라 죽음과 고통, 그리고 굴종에 기반한 일종의 신흥종파를 선전하는 것”이었다.

105개 이상의 나라에서 500개가 넘는 수도원을 운영했다는 테레사의 사랑의 선교회 소속 수녀는 4천여명에 이르고 평신도 일꾼도 4만명이 넘었다. 기부금은 전세계에서 홍수처럼 밀어닥쳐 뉴욕 브롱크스 선교회의 한 당좌계좌에만 무려 5천만달러가 들어 있었다. 수녀들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돈 쓰는 일을 좀처럼 허용받지 못했고, 대신 “가난을 호소할 것, 그리하여 손이 크고 어수룩한 사람과 기업들이 더 많은 재화와 봉사와 현금을 내도록 조종할 것을 강요받았다”고 히친스는 지적한다. “의지할 데 없는 아기들, 버려진 낙오자들, 나환자와 말기 환자들은 동정의 과시를 위한 원자재들”이었다. 하지만 테레사 수녀 자신은 심장질환 및 노환과 싸울 때 서구에서 가장 우수하고 값비싼 병원들에서 치료받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라!

테레사 수녀가 타계하기 2년 전인 1995년에 발간된 〈자비를 팔다〉는, 2001년 마더 테레사를 성인으로 추대하는 작업을 진행하던 교황청의 직접적인 요청에 따라 히친스가 반대쪽 증거와 주장들을 제출할 때 모본으로 삼은 책이다. 그런데도 교황청은 2003년 테레사 수녀를 준성인인 ‘복자’ 반열에 올렸다. 히친스가 테레사 수녀의 시성(諡聖)에 반대하는 증거로 제시한 사례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1981년 아이티에 간 테레사 수녀는 나중에 결국 돈가방을 들고 외국으로 도망친 폭군 장 클로드 뒤발리에를 두고 “가난한 사람들이 국가의 우두머리와 이토록 친근한 경우는 처음 보았다”고 칭송했다. 또 “현대세계의 가장 냉소적이고 천박하며 못된 여성 중 하나”요 “위선자이자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이라고 히친스가 쏘아붙인 그의 부인 미셸의 두 손을 정답게 감싸쥐고는 “영부인은 느끼시고, 아시며, 자신의 사랑을 말뿐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실체적인 행동으로도 보여주고자 하시는 분”이라 예찬했다. 사진에 담긴 그 장면을 독재자 뒤발리에는 잘도 이용해먹었다. 이런 게 마더 테레사의 ‘본질’이라고 히친스는 말한다.

사이비 종파 지도자 존 로저한테서 1만달러를 기부받고 함께 사진을 찍어 그의 사기모금 행각을 도왔다. 미국 역사상 최대 사기사건 가운데 하나인 저축대부조합 스캔들로 10년형을 살고 있는 가톨릭 근본주의자 찰스 키팅한테서 125만달러를 기부받고는 자신의 권위를 써먹도록 허락했다. 1992년 테레사 수녀는 키팅한테 관용을 베풀어 달라며 법원에 편지를 보냈는데, 그때 답장을 보낸 로스앤젤레스 지방검사보 폴 털리는 2억5천만달러를 낭비와 사치를 위해 가로챈 키팅의 범죄행각을 설명한 뒤 기부받은 125만달러를 원래 소유자들에게 돌려주라고 정중하게 권했다. 그러나 답장은 없었다. 그 돈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답지한 거액의 다른 성금들의 행방도 묘연했다.

테레사 수녀는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와, 그리고 스페인 우익 프랑코주의자들과 만나 낙태 및 산아제한 반대 캠페인에 힘을 실어주었다. 1985년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주는 자유훈장을 받았는데, 그때 수상식장 지하실에선 올리버 노스 대령이 이란-콘트라 사건을 꾸미고 있었다. 테레사 수녀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이라고 했고 1984년 미국 다국적기업 유니언 카바이드의 인도 보팔 공장에서 수천명이 즉사한 유독가스 참사가 일어났을 때 분노한 유족들에게 말했다. “용서하세요. 용서하세요.”

히친스는 결국 세계의 구조적 모순에 눈감고 지배자들 위주의 질서를 긍정하며 현상유지를 꾀하는 종교세력을 문제 삼고 있으며, ‘자비를 파는’ 마더 테레사야말로 그 첨병이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한승동 선임기자)

한겨레(08. 01. 19) 히친스의 또다른 도발 “신은 인간의 발명품”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와 영국 정치평론지 <프로스펙트>가 2005년 실시한 ‘100대 공적 지식인’ 순위투표에서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5위에 올랐다는데, 무얼 기준으로 삼았는지, 그게 순위투표로 가려질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1위가 노엄 촘스키고 2위가 움베르토 에코, 3위 리처드 도킨스, 4위 바츨라프 하벨이라는 걸로 봐서 히친스란 이름이 허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자비를 팔다>도 그렇지만 2001년에 낸 <키신저 재판>(아침이슬 펴냄)이란 책도 상식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히친스가 천착해온 지적 작업의 방향성을 확인할 수 있다. 히친스는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을 베트남전쟁 전범으로, 칠레 아옌데 정권을 뒤집고 방글라데시와 동티모르, 키프로스 등의 정변에 개입해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 모략가로 규정하며 단죄하라고 촉구한다.

그의 이런 전복적인 사고가 종교를 대상으로 종횡으로 구사된 게, <자비를 팔다>와 동시에 번역·출간된 <신은 위대하지 않다>(알마)다. “하느님께서 모든 나무와 풀을 초록색으로 만드셨어요. 우리 눈에 가장 편안한 색깔 말이에요. 만약에 식물들이 전부 자주색이나 오렌지색이었다면 얼마나 끔찍했겠어요?” 세속적 인본주의자, 그리고 무신론자에 불가지론자요 반종교주의자인 히친스에게 어릴 적 학교 선생의 이런 얘기는 터무니없다. 그것은 하느님이 인간을 위해 그렇게 만들어 놨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그런 자연에 적응한 결과다. 녹색식물에 적응하지 못했다면 인간은 애초에 등장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우리 인체 구조가 이렇게 기막히게 치밀하고 적절한 구조를 갖고 있는 게 신의 뜻이라는 얘기도 완전히 거꾸로 서 있다.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되고 창조된 게 아니라 자연의 변화에 적응하며 장구한 세월 동안 진화해온 결과가 그것이다. 뉴턴이 태양계의 불안정성을 발견하고 행성의 궤도가 다시 안정을 되찾게 하기 위해 하느님이 가끔 개입할 것이라고 하자, 라이프니츠는 그럴 바에야 왜 하느님이 처음부터 궤도를 제대로 만들어놓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요컨대 히친스에게 신은 잘못된 전제 위에 서 있는, 세속의 욕망과 공포를 반영한 인간의 발명품이고 그런 신을 앞세운 종교는 오히려 인간의 행복을 해치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는 의문이 배제된 철학, “화석화한 철학”일 뿐이며, 신 없는 삶이 가능할 뿐 아니라 없는 게 훨씬 더 낫다는 얘기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새로운 계몽주의 운동이다. 인류의 견본은 바로 인간 그 자체라는 의식을 바탕으로 한 계몽주의 운동 말이다.” ‘종교는 생명을 죽인다’ ‘지적 설계론’ ‘종교가 사람을 착하게 만드는가?’ ‘종교의 형이상학적 주장은 거짓’ 등 모두 19가지 흥미로운 항목을 설정하고 아주 친근한 사례들을 무수히 동원해 종교에 관한 ‘상식’들을 현란한 화법으로 하나하나 논파해나간다.(한승동 선임기자)

08. 01. 18.

P.S. 히친스의 비판에 대한 반대 시각도 옮겨놓는다. <마더 테레사의 아름다운 선물>,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등을 우리말로 옮기기도 한 이해인 수녀의 옹호이다. “신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면 테레사 수녀가 평생 그렇게 살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 인상적이다(뜻밖이기도 하고)...

중앙일보(07. 08. 29) 이해인 수녀 “테레사 편지도 신을 부정 안 해”

맑고 고운 언어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노래해온 이해인(62·사진) 수녀가 자신도 신의 존재를 회의한 적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28일 평화방송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열린 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에 출연한 이 수녀는 “수도공동체 안에서 40여 년간 수도 생활을 해왔는데 내 한계를 느끼거나 하느님 혹은 동료와의 관계에 어려움을 느낄 때 문득 ‘정말 그분이 계실까’라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이 수녀는 “모태신앙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걸림돌이 될 때도 있었다”며 “성인들의 고백록을 읽으면서 극복해왔고 지금은 너무 행복하게 모든 것을 섭리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밝혔다. 또 “비바람을 견뎌 한 그루의 나무가 더 성숙하게 자라듯 우리 믿음도 마찬가지”라며 시련의 극복을 강조했다.



이날 방송은 최근 공개된 테레사 수녀의 비밀 편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됐다. 테레사 수녀의 10주기인 9월 5일 발간될 『마더테레사:내게 와서 빛이 되라(Mother Teresa:Come Be My Light)』에서 테레사 수녀는 고해 신부에게 보낸 40여 통의 편지에서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다”며 신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고통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 수녀는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누구나 영혼의 어둠을 경험한다”며 “(편지는) 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테레사 수녀 본인의 존재론적 고백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해석했다. 또 “수십 년간 빈자들에게 헌신적 봉사를 하면서 스스로 신처럼 추앙을 받은 마더 테레사는 신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 같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수녀는 또 테레사 수녀의 신앙을 비판했던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 크리스토퍼 히친스를 재비판했다. 『신은 위대하지 않다』를 쓴 무신론자 히친스는 책에서 “테레사 수녀도 종교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계속된 그의 신앙고백은 자신이 빠진 함정을 더 깊이 파는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 꼬집었다. 이 수녀는 “(히친스의 비판은)자기 좋을 대로의 아전인수격 고백”이라고 일축했다.

이 수녀는 “신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면 테레사 수녀가 평생 그렇게 살지 않았을 것”이라며 “1994년 일주일 정도 (데레사 수녀가 만든) ‘사랑의 선교회’에 머물며 그에게 ‘신앙과 수도생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에서 회의나 불안을 느낀 적이 있냐고 물었을 때 테레사 수녀는 ‘하느님이 계신데 내가 왜 걱정하는가. 모든 것은 그분이 해결해준다’고 단호하게 답했다”고 기억했다. 이어 “항간에서 40여 통의 편지를 가지고 테레사 수녀의 신앙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사랑과 기도의 시인인 이 수녀는 1964년 수녀원에 입회해, 76년 종신 서원했다.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는 200만 부 넘게 팔렸으며, 많은 시와 수필을 통해 인간의 종교적 심성을 표현해왔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겸임교수도 맡고 있다.(이에스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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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하트마 간디의 불편한 진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8-16 23:40 
    '비폭력 성자' 마흐트마 간디의 불편한 진실을 들추는 책이 출간됐다.남부디리파드의 <마하트마간디 불편한 진실>(한스컨텐츠, 2011). 1958년에 쓰인 책이라고 하니 '오래된 진실'이기도 하다. 간디 자서전, 혹은 간디에 관한 책을 읽을 때같이 읽어보는 게 균형잡힌 시각을 갖는 데 도움이 되겠다.연합뉴스(11. 08. 16) '위대한 영혼' 간디를 보는 또다른 시선'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의 '마하트마(Mahatma)'가 이름처럼 따라다닐 정
 
 
라주미힌 2008-01-18 23:02   좋아요 0 | URL
테레사 수녀도 그런 '스캔들'이 있었군요...
저 밑에 문장 웃기네요.. '히친스는 이 책으로 지옥에 갈 것이다.' ㅎㅎㅎ

로쟈 2008-01-18 23:07   좋아요 0 | URL
껍데기는 책을 사면서 바로 버렸는데, 그런 문구가 있었군요.^^

2008-01-18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8 2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혜덕화 2008-01-19 10:15   좋아요 0 | URL
"히친스는 히친스의 진실 대로, 테레사는 테레사의 진실 대로"
언제나 내 안경으로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조사하고 관찰하면서
나는 말하죠.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무엇이 진실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어요.
히친스조차도 자신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을지 의문입니다.
테레사 수녀님을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 한 수 배우고 갑니다.

필라멘트 2008-01-19 12:50   좋아요 0 | URL
히친스 식으로 하자면 간디의 <비폭력주의를 팔다>, 슈바이처 박사의 <인술을 팔다>, 백범 김구 선생의 <민족주의를 팔다> 등과 같은 유사서적들도 한번 내봄직 합니다. 아무리 존경받는 위인들일지라도 들춰보면 인간적인 결점이나 모순들은 다 있게 마련이니까요. 한마디로 히친스의 전복적 의도에는 세인들의 흥미를 자극해서 상업적 수익을 노리려는 또다른 의도를 의심케 합니다. 아니면 평소 그런 걸 즐기는 새디스트적인 체질이거나.

우리는 마더 테레사라는 한 개인에 대한 집중적인 존경에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마더 데레사라는 존재가, 점점 개인주의화로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해져가는 현대인들에게 잠들어 있는, 봉사정신을 일깨워주는 하나의 이펙트(effect)의 상징적 존재로서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정치인들에 대한 이펙트도 마찬가지구요. 즉 혼돈의 자장 속에서 하나의 좌표역할을 해주는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작은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인들에 대한 환상을 유지하는 게 결코 나쁘지는 않다고 봅니다. 히친스의 '뒤집어 보기", '까보기', '삐딱하게 보기'의 진의가 무언지, 또한 그렇게 해서 뭘 얻겠다는 건지.. 하기야 본인에겐 세인들의 관심과 책 판매 수익이라는 현실적인 열매가 들어오겠지만요. 히친스식의 전복시도는 세인들의 관심을 끌어보자는 과잉적인 제스처라 봐지는군요.

그리고 데레사 수녀의 '신에 대한 회의'가 언론에서 회자되었을 때, 역시 언론의 속성인 한건주의를 떠올렸습니다. 즉 색다른 소재를 전면적으로 이슈화해서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켜 판매부수나 시청률을 올리는 그런 작전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어둠에의 체험'은 가톨릭의 성인, 성녀전을 읽다보면 다 알수 있듯이 누구나 다 겪는 과정입니다. 평신도들이야 말할 것도 없구요. 즉 긴 믿음의 여정에서 일시적인 신존재에 대한 회의와 불신에의 체험은 신자들이라면 누구나 다 겪는 과정이거든요. 즉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가기 위한 일시적인 필요악인 거죠. 근데 언론들은 무슨 대단한 발견이나 한 것처럼 야단법썩을 떨던데. 뭐.. 언론의 속성이 원래 그러니 어쩔 수는 없습니다만.

어찌보면 평범한 사람들은 이러한 '새로운 발견'들로 하여금, 데레사 수녀도 별거 없구나 하며 자신의 봉사정신의 결핍을 은폐하고, 편리주의나 개인주의를 더 공고히 해나갈 수 있는 안도의 체험으로도 삼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어 잠시 주제넘는 글을 남기고 갑니다. 로쟈님 좋은 주말 보내세요.^^;


P.S. 이해인 수녀님의 반론적 기사도 함께 실어주셨네요. 균형을 맞춰주시려는 로쟈님의 깊은 배려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로쟈 2008-01-19 23:15   좋아요 0 | URL
균형은 맞추려고 했지만 제 입장은 히친스쪽으로 기울어 있습니다(그래야 '균형'이 맞을 거라고 봅니다). 리뷰기사의 마지막 문단에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필라멘트님도 히친스의 책을 직접 읽어보시고 판단하시면 좋겠습니다. 히친스가 보는 마더 테레사는 가령 얼마전 이천의 냉동창고 폭발 참사가 일어났을 때 분노와 비탄에 빠져 있는 유족들을 찾아가 위로하면서 '용서하세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큰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사랑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지지는 않습니다...

virtuepeak 2008-01-19 14:00   좋아요 0 | URL
간디의 비폭력주의는 자기를 대신해 총칼을 받았던 무수한 불가촉천민 덕에 관철될 수 있었고, 김구의 민족주의는 이미 해방 정국에서 중요한 정치 지도자들이 암살되는 와중에 좌우 합작의 가능성이 거의 사라진 시점에서 생뚱맞게 발휘되었죠. 자선을 팔아서 장사를 했다는 구체적인 사실을 외면하고 막연한 상징으로서 테레사를 흠모하며 봉사 정신을 다잡아 보는 것은 '안도의 체험'과 본질적으로 상이하지 않아 보이네요. 이러한 사실들이 '위인'들의 '작은' 결점인지는 잘 판단해야 할 일입니다.

필라멘트 2008-01-19 19:57   좋아요 0 | URL
따지고 보면 히친스의 전복적 제스쳐에 문제를 제기하는 저나, 히친스나 사실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저나 히친스나 과연 단 하루라도 캘커타에 가서 버려진 아이를 안고 울어본 적이 있는가. 버려지고 고통에 신음하는 아이들과 함께 밤을 새어 본 적이 있는가. 그런 적이 없다면 데레사 수녀님의 빈자들에 대한 사랑 앞에 그저 침묵하고 겸손해지고 싶을 뿐입니다. 히친스가 제기한 데레사 수녀님의 결점이 큰 결점이든 작은 결점이든..

virtuepeak 2008-01-20 01:11   좋아요 0 | URL
죄송합니다만 히친스의 문제 제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을 적시한 것이고, 필라멘트님의 지적은 그냥 반문일 뿐입니다..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는 만사가 경이로와 보이는 법이지요. 권위를 유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정보 통제이듯이요.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수록 세상에 별 거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리뷰에서 언급된 사례 중에 콜카타의 죽어가는 이들을 위한 집의 실상을 보십시오.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과 함께 밤을 새어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관리하는 영역에 들어온 환자에게 제대로 된 치료는 해주지 않고 방치했다면 이건 엄연히 유기죄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사망에 임박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논란이 있을 수는 있겠군요.

qualia 2008-01-20 09:42   좋아요 0 | URL
이런 유형의 논란거리에서 문제의 핵심은 “증거의 유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우리 한국인 (대부분)은 바다 건너 테레사 수녀님의 진실이나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주장을 직접적으로 목도한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얻어 들었을 뿐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즉 우리는 테레사 수녀님과 함께 직접 빈민촌 현장에서 함께 봉사한 적도 없으며, 히친스의 신랄한 고발을 증거해줄 만한 명백하고도 객관적인 자료를 직접 제공받은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님이나 히친스를 우리는 언론 매체나 2차 자료, 혹은 간접적인(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주장 따위들을 통해서만 접했을 뿐입니다. 그것들은 명백하고도 객관적인 3인칭적 증거가 될 수 없다고 봅니다. 따라서 현재 永革 님께서나 필라멘트 님께서 내세우시는 판단이나 주장은 사태의 진실/진리와는 분명한 거리가 있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이고 불확실한 추정/추측/기대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에 기반한 논쟁은 소모적인 순환논쟁(도돌이 논쟁)이 될 뿐입니다.

둘째, 우리는 언론 매체의 보도나 2차 자료, 한 개인인 주장/견해(저서나 논문 따위를 통한)를 “자연스런 태도”로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여기서 하나의 사태를 “자연스런 태도”로 대한다는 것은, 그것을 처음부터 무조건 진리나 허위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일단 “사태 그 자체”로서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언론 매체의 보도, 2차 자료, 어떤 개인의 주장을 처음부터 무턱대고 완전한 진리로 받아들이거나, 반대로 꾸며낸 거짓말로 일축할 수도 없다고 봅니다.

따라서 테레사 수녀님에 대한 히친스의 파괴적인 비판도 일단은 진리 여부, 찬반 여부를 떠나 “사태 그 자체”로서만 참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명확하고도 적법한 증거가 없다면 우리는 일단 (전략적으로) 판단을 중지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명백한 직접적 증거가 없는 사태에 대해 우리가 판단을 중지하는 자연스런 태도는 모든 탐구와 → 사실 규명과 → 주장/견해 제시의 단계에서 반드시 견지해야 할 사전적 필수 요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건/사태의 진상을 파헤쳐 나가는 단계에서 우리는 이러한 상식을 거의 언제나 망각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머릿속에 사적 이해관계, 정치적 입장, 이데올로기적 편향, 계층/계급 의식 따위의 노골적인 전제들을 미리 깔아놓고 사건/사태의 진상을 입맛대로 왜곡하는 경우, 자신의 편견과 선입견과 억측을 마치 객관적인 사실인 양 강변하는 경우가 요즈음 횡행하고 있습니다. 소위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인사들일수록 그러한 경향이 더 강합니다. 그들의 왜곡과 강변은 매우 교묘하고 영악스런 논리/논증적 형태를 띤다는 점에서 더욱 치명적으로 보입니다.

요컨대, 우리는 보도된 테레사 수녀님의 진실이나 히친스의 폭로 따위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일단은 참조 사항일 뿐입니다. 이런 난세에서는 모든 보도/소문/주장/견해 따위를 일단은 “사태 그 자체”로서만 받아들이는 자연스런 태도가 우리한테 강력하게 요청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 이러한 자연스런 태도에 기반하여 증거 확보, 진리와 진실 탐구의 엄밀한 작업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자꾸때리다 2008-01-19 20:01   좋아요 0 | URL
평소에 성인이라는 범주는 거짓 범주라 생각했었는데 정말 흥미있는 내용이네요. 저 정도면 테레사 수녀는 긍정적이라기 보다는 부정적인 인물이네요. 부패 정치인 뺨치는 수준. 우왕ㅋ굳ㅋ

로쟈 2008-01-19 22:24   좋아요 0 | URL
'인물'이 문제라기보다는 '구조'의 문제요. 구조적 모순과 적대를 가리기 위해서 성자/성녀를 요구하고 또 필요로 하는 구조...

qualia 2008-01-20 10:04   좋아요 0 | URL
Grimaud 님, 안녕하세요. 제 생각에 히친스의 비판을 보고 테레사 수녀님의 진실/정체를 히친스식으로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봅니다. 테레사 수녀님이 옳을 수도 있고, 히친스가 그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테레사 수녀님의 진실을 (무조건)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일단은 테레사 수녀님의 기존 이미지를 그것 자체로서 받아들입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테레사 수녀님의 모습이란 바다 건너에서 날아온 간접적인 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히친스의 주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로선 그의 주장과 비판은 명백한 사실도, 타당성 있는 진리도 아닙니다. 그저 하나의 자료일 뿐입니다. 한낱 참고 자료에 지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위와 같이 Grimaud 님께서 섣부른 판단을 하신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로쟈 2008-01-20 10:25   좋아요 0 | URL
님의 논리에 따르면 우리에게 확증적인 진실은 아무것도 없는 셈이네요. 홀로코스트까지도 포함해서 말이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모든 정보란 '한낱 참고자료'에 불과할 테니까요...

소경 2008-01-19 22:22   좋아요 0 | URL
요지에는 어긋나지만 결국 돈 문제가 깊숙히 연관 되어 있군요...방금 전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과거 없는 남자>의 웃음 넘치는 돈문제로 기분 좋게 보았는데 이 사실은 씁쓸하기 그지 없는 내용이군요. 현실로 빨리 복귀한 기분이...

로쟈 2008-01-19 22:26   좋아요 0 | URL
원래 면죄부도 돈 주고 팔던 거였으니까요...

에링 2008-01-19 22:18   좋아요 0 | URL
결과의 부정적 측면만으로 의도의 순수성을 단정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보이는데요. 무슨 대가를 바라고 45년간을 봉사하는게 쉬운 일은 아니죠.

로쟈 2008-01-19 22:23   좋아요 0 | URL
이해인 수녀의 해석에 따르면 (일시적인 회의에도 불구하고) '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그러한 봉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죠. 신앙은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하지요...

Octopus 2008-01-21 08:03   좋아요 0 | URL
물타기 같지만, 크리스토퍼 히친스라는 인물이 전향한 트로츠키주의자이며, 대선에서 부시를 지지했고, 이라크전과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찬성했으며,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 측을 옹호하는 글을 썼고, 네오콘들의 사이좋은 친구라는 점도 곁들여 고려해보는 게 어떨지요. 대충 신자유주의 세상에 잘 적응한 리버럴한 뉴라이트(?)지식인 같은데, 그래도 참 복잡하긴 복잡한 인간이군요. http://en.wikipedia.org/wiki/Christopher_Hitchens

책을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기사에 수록된 내용만 가지고 보면 테레사 수녀의 개인적인 문제점이 어리버리한 성격인지 교조적이고 독단적인 신념인지 잘 와닿지가 않습니다. 물론 가톨릭 교단 또는 종교집단 전체의 문제는 끊임없이 점검되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히친스의 책이 어느 정도까지 그런 문제를 심도 있게 파고들었는지, 종교혐오적 사고로 인한 편견 때문에 대상의 맥락을 곡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이미 히친스에 대한 선입견이 생겨버린 저로서는 의심스럽네요, 쩝.

로쟈 2008-01-21 14:31   좋아요 0 | URL
저도 마저 읽어봐야 할 거 같은데, 히친스가 제시하고 있는 건 '종교혐오적 사고'가 아니라 이미 알려진 '사실'들의 모듬 정도입니다. 그의 비판 이전에 '대상의 맥락'은 이미 곡해돼 있는 거 아닌가 싶네요. 히친스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고(요컨대 그는 스탈린이나 김정일 체제에 지극히 비판적이죠), 그건 어떤 '입장'이건 간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국내에서도 민노당 내 '종북주의'에 대한 논란이 있었던 것처럼요...

네모선장 2008-01-28 12:50   좋아요 0 | URL
이곳에 자주 오는 현직 수학교사 입니다.^^
저는 이번 책 소개를 보고는 참 놀라웠던게 아주 오래전 한겨레21이란 주간지에서 (아마 제가 군대에 있을 때(95~96년) 읽었던 맨 마지막 기사였는데 스크랩도 어딘가에 해놓긴 했습니다. 함 찾아볼께요~)어느 교수님의 A4한면 칼럼이 있었는데 거기에도 히친스와 유사한 글이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던 마더 테레사의 또다른 면이었죠. 그 글을 보고 아~ 이런 면도 있구나 했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위인도 모든 영역(공적인 영역+사적인 영역)에서 일관되게 자기 철학을 실천하난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있다면 있다면 그를 우린 성인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잘 몰랐던 인물의 또다른 측면을 보여주는 책이라면 기꺼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읽어보고 새로운 토론의 장을 여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그리고 한가지 더요. 캘커타의 버려진 빈자를 안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면 우리는 아무런 말도 섣불리 할 수 없는건가요? 빈자를 안으며 테레사 수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찌 아나요? 제 말은 쉽게 판단할 수 없다해서 반론이 되는 생각 의견제기 자체를 무시하는 듯한 발언이야 말로 모럴테러의 한 유형이라 봅니다.

로쟈 2008-01-28 12:5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질문은 저에게 주신 건가요? 다른 분에게 던지신 것 같아서 따로 답변을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자주 좋은 의견을 남겨주시길...

네모선장 2008-01-28 20:27   좋아요 0 | URL
^^네~ 노력하겠습니다.
 

중앙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세계적 철학자 7명 릴레이 인터뷰에서 알랭 바디우 편을 옮겨놓는다(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012416). 그는 올 7월 한국에서 개최되는 세계철학자 대회에 참석할 예정인 것으로 알고 있다. 바디우의 책들이 몇 권 번역돼 있지만 아직도 더 많은 책들이 소개를 기다리고 있다. 그동안 모아놓은 책들을 읽을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면 좋겠다.

중앙일보(08. 01. 16) “진리는 혁명적 … 기존 지식체계 깨며 생겨”

서양 철학사에서 현대 프랑스 철학이 차지하는 위상은 독특하다.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속칭되는 각종 해체주의의 진원지다. 탈근대 해체주의 철학은 신·이성·본질(실체)을 중심으로 사유해온 서양 철학 2500년 역사를 뒤흔들었다. 그같은 해체는 급기야 철학의 존립 근거까지 위협했고, 철학의 역할과 목적을 다시 세우는 반성적 사고로 이어졌다. 푸코·데리다·들뢰즈 등 해체철학자들에 이어 새로운 거장으로 평가받는 알랭 바디우(Alain Badiou·71) 파리고등사범학교(ENS) 교수가 서 있는 자리다. 바디우는 탈근대 철학의 ‘차이의 사상’과 상대주의를 배격하고 다시 고전적인 형태의 철학 체계를 수립하려 한다. 진리가 하나 뿐이라고 강변하는 서양 전통의 ‘동일성 철학’으로 바디우가 회귀하는 것은 아니다.

e-메일 대담=김상환 서울대 교수
바디우 역시 해체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진리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며 대신 ‘복수(複數)의 진리’를 세우는 새로운 사유의 실험을 전개하고 있다. 바디우는 외국인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위해 직접 피켓을 들고 시위에 나서는, 행동하는 철학자로도 유명하다. 탈근대적 ‘차이의 철학’과는 다른 관점에서 각종 소수자들을 배려하는 철학을 그는 지향한다. 이는 프랑스 좌파 철학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프랑스 철학을 전공한 김상환 서울대 교수가 인터뷰 안하기로 ‘악명’높은 바디우 교수와 수차례에 걸쳐 이메일 대화를 나눴다.
 
김상환(이하 김)=한국 사회도 외국인이 급증하면서 다인종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민족주의가 강하게 지배했던 한국 사회에 새로운 윤리관을 수립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은 탈근대 철학자들의 ‘차이의 철학’이나 ‘차이의 정치학’에서 문화적 다양성을 끌어안는 새로운 윤리학을 탐색하고 있다. 그런데 바디우 교수는 탈근대 철학자들을 소피스트라고 비판하고 있다.

알랭 바디우(이하 바디우)=일상적인 삶이나 정치적인 삶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은 다른 사람들이 나와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나와 남을 봄에 있어서 ‘차이’보다는 ‘같음’을 이해하는 것이 진정 어렵고 중요한 일이다. 가장 핵심적인 정치적 문제는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류 전체의 근본적인 일체성, 즉 모든 인간의 평등이라는 문제가 핵심적이다. 나는 모든 사람들의 문화적 권리를 지지한다. 문화적 차이들이 다양한 물결을 이루지만 그 안에는 인류의 근본적인 일체성이 함축돼 있다는 나의 신념 때문이다.

김=진리에 대한 당신의 접근은 독특하다. 하나의 진리가 아닌‘복수의 진리’를 이야기한다.



바디우=진리는 혁명적이고 기존의 지식체계를 교란하면서 일어난다. 나는 진리가 생겨나는 4가지 절차가 있다고 본다. 정치·과학·예술·사랑이 그것이다. 중요한 것은 네가지 절차가 언제나 공존한다는 점이다. 기존의 철학은 이 점을 무시하고 진리를 과학이나 정치 혹은 예술과 같은 한가지 절차로 환원시켜 봉합했다. 가령 마르크스주의는 진리를 정치에, 영미 분석철학은 과학에, 하이데거의 추종자들은 예술에 봉합했다.

김=당신의 철학을 흔히 ‘사건의 철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디우=사건은 미증유의 진리가 생산되는 절차다. 철학의 과제는 스스로 진리를 생산하는 데 있지 않다. 현재의 언어를 벗어나면서 출현한 진리에 개입해 사후적으로 명명하는 일이 철학의 과제다. 사건의 1차적 의미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사건의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김=한국은 대통령 선거가 막 끝나서 보다 성숙하고 선진화된 사회로 나아가길 희망하는 분위기가 짙다. 그런데 당신은 대의 민주주의나 정당 정치에 회의적인 발언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바디우=선거는 정치적인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어떤 합의에 기초한 제도이다. 사회가 대충 어떠한 형태를 띠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경쟁 그룹들 사이의 의견일치가 없다면, 상대편이 권좌에 오르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선거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면, 이는 딱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선거에 참여하는 어떠한 세력도 실질적으로는 과격하고 혁명적인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상환=선거가 어떤 합의 위에 서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바디우=자본주의라는 합의 위에 놓여있다는 의미다. 소위 민주주의적인 나라치고 자본주의가 지배하지 않는 나라, 시장경제가 군림하지 않는 나라, 대기업 CEO가 선거에서 뽑힌 정치인보다 더 큰 권력을 쥐지 않은 나라, 그런 나라를 본 적이 있는가. 선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다. 인간 해방은 자본주의적인 경쟁체제에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다.

김=그럼 인간 해방을 추구하는 길은 어디에 있나.

바디우=첫 번째 관문은 국가의 선거 형식 바깥에서 움직일 수 있는 대중적 조직을 만드는 데 있다. 핵심 과제는 서로 다른 출신의 사람들을 묶는 일이다. 가령 지식인·청년·직장인 그리고 사회 밑바닥에 있는 노동자 사이에 어떤 행동 단위나 조직 단위를 구성해야 한다.



김= 사도 바울을 주제로 한 당신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고 있는데, 종교 갈등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다.

바디우=오늘날 일어나는 수많은 갈등이 종교나 문명 간 충돌이라 보지 않는다. 내가 볼 때 신은 죽었고, 종교는 무력해졌다. 우리는 더 이상 중세시대에 살고 있지 않는 것이다. 진정한 갈등은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에서가 아니라, 미국과 서방을 중심으로 하는 고삐 풀린 자본주의와 가난하고 헐벗은 인민 대중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런 충돌은 때로 종교적 성향의 집단들에 의해 조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전 세계에 걸쳐 자본주의에 의해 창조된 여러 가지의 거대한 불평등이 없다면, 이 집단들은 아무런 힘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김=당신의 철학에 따른 정치적 주체는 투사의 형태를 취해야 할 것 같은데, 종교적 근본주의자나 테러리스트와 어떻게 다른가.

바디우=테러리스트는 전혀 인간 해방의 보편적 비전을 수호하지 않는다. 테러리스트는 종교적 경전에 의해 확립된 폐쇄적인 정체성의 옹호자다. 과거의 열성적인 파시스트 신봉자도 마찬가지다. 내가 말하는 충실과 참여의 정치학은 이런 종류의 폐쇄성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김=요즘 한국 학계는 인문학의 위기를 실감하고 있다.

바디우=내가 볼 때, 인문과학에서 ‘과학’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것은 마르크스 전통에서 정의하는 역사, 프로이트가 창시한 정신분석, 소쉬르 이래의 언어학 등 세 가지 정도다. 그 밖의 것들은 보통 ‘고전 연구’라 불리는데, 예술에 관계하는 학술적인 형식에 해당한다. 고전 연구를 중심으로 한 인문학은 자본주의에 의해 위협 받고 있다. 수익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예술에 대한 실천적 관계를 조직한다는 점에서 인문학은 대단히 중요하다. 다시 말하지만, 내 철학에서 예술은 과학·정치·사랑과 더불어 보편적 진리의 본질적 유형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다. 인문학의 가치를 옹호해야 하는 근거도 거기에 있다. 대학이 자본주의의 요구만을 따라가선 안된다. 대학이 몰두하고 헌신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진리 자체이고 여기에는 어떠한 제약이나 구속이 있어서는 안된다.(정리=배영대 기자)

◆도움되는 책=탈근대 해체주의 관련한 번역서로는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민음사),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민음사), 자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민음사) 등이 있다. 해체주의 비판서로는 알랭 바디우의 『조건들』(새물결), 슬라보예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등이 출간됐다.



◆알랭 바디우=1937년생. 수학과 철학에서 모두 박사학위 취득. 프랑스 현대철학국제연구센터 소장. 문예 창작, 연극 연출로도 명성이 높은 전방위 작가. 마르크스 이론가 알튀세와 함께 활동하다 1968년 5월혁명 이후 결별했다. 80년대 들어 새로운 철학의 길을 모색했고, 88년 대표작 『존재와 사건』을 출간 했다.

◆김상환=1960년생. 연세대 철학과 졸업. 파리4대학 철학박사. 『해체론 시대의 철학』 등의 저서가 있 다.

07. 01. 17.

P.S. 바디우의 강의장면은 유튜브에도 많이 올라와 있다. 대개 유럽대학원에서의 강의를 담은 것들인데('민주주의, 정치 그리고 철학' 등이 주제다) 영어로 진행하고 있어서 들어볼 만하다(http://www.youtube.com/watch?v=J_cqyxA5b4A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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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8 0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8 2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8 0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8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08-01-18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반가운 마음에 종이신문을 붙잡고 읽어 내려갔었는데, 아무래도 일간지 기사인데다가 이메일 인터뷰라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만, 생각보다 '심심해서' 의외였습니다.^^

로쟈 2008-01-18 23:03   좋아요 0 | URL
일간지에 실리는 인터뷰야 그냥 맛보기죠...

겨울나기 2008-01-19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필라멘트 2008-01-19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바디우.. 반가운 분의 기사네요.^^ 제가 철학서적은 많이 못읽었지만, 그래도 바디우의 국역본들은 다 읽었다는.. ㅎㅎ(그래봤자 4권이지만) <존재와 사건>이 빨리 번역되어 나왔으면 좋겠네요. <람혼>님을 여기서 뵙는군요. 반갑습니다. 저, 폴리니입니다.^^
 

드문 일이긴 하지만 일간지 지면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할 때가 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1161803331&code=990000). 좀 낯설게 느껴지는데, 오늘 아침에 경향신문의 오피니언란을 읽을 때도 그랬다. 어제 갑작스레 전화연락을 받고 블로그의 기사가 실리게 될 거라는 건 알았다. '블로그 속으로'라는 소위 '블로그 탐방' 연재인데, 목요일에는 주로 경향신문을 집어들기 때문에 몇 주 전 처음 연재가 시작될 때부터 읽어본 기억이 있다(우석훈, 이택광 교수의 블로그들이 이 서재보다 먼저 다루어진 블로그들이다). 지면에 게재된 건 작년말에 작성한 '벤야민 읽기의 우울'(http://blog.aladin.co.kr/mramor/1797977)이고 글의 선정과 발췌에 나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기억을 위한 자료로 창고에 넣어둔다.   

경향신문(08. 01. 17) [블로그 속으로]우울한 ‘벤야민’ 읽기

수전 손택의 ‘우울한 열정’에서 벤야민에 관한 장을 다시 읽어보려고 찾았으나 눈에 띄지 않는다. 원저인 ‘토성의 영향 아래’를 내가 안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도서관에서 주로 빌려 읽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책을 찾아보려는 열정 역시 이럴 땐 ‘우울한 열정’이다(손택은 벤야민이 우울증적 기질의 비평가였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런 우울 모드는 오전부터 간간이 붙들고 있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도 빚지고 있다. 야심차게 출간되기 시작한 이 선집이 적어도 한국어 정본의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내가 읽기에 독어본이나 영어본 등 다른 판본의 도움 없이 국역본만으로 벤야민을 읽고 이해하기는 여전히 지난해 보인다. 가독성을 경계해 마지 않았던 아도르노만큼은 아니더라도 벤야민 읽기 역시 팍팍한 여정이다.

걸음을 지체시키는 원인은 번역자들이 원칙으로 삼은 듯이 보이는 ‘직역주의’에 있다. 원저에 대한 ‘충실성’이 이유인 듯한데, 덕분에 한국어 독자는 들러리에 머문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의문스러운 건 벤야민에 대한 충실성이 부자연스럽거나 어색한 한국어까지 정당화하느냐는 것이다(벤야민 자신이 그런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독일어 문장을 구사한다면 물론 정당화될 수 있다. 하지만 독일 최고의 문학비평가를 자임했던 벤야민이 과연 그런 식의 독일어를 구사한 것인지?).

아직 이번에 나온 국역본들을 전반적으로 훑어보진 않았기 때문에 내가 사안을 침소봉대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벤야민의 가장 대표적인 ‘논문’의 경우는 사실 지난 1983년에 나온 반성완 교수의 번역보다 더 낫다고 말하지 못하겠다(내가 읽을 수 있었던 대여섯 종의 우리말 번역본들을 고려할 때 그렇다). 물론 반성완본의 여러 오역들에 대해서는 여러 후학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만 나는 우리말 문장력에서만큼은 반성완본이 가장 낫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예컨대 벤야민의 에피그라프격으로 인용한 발레리의 첫문장은 이렇다.

“제반 예술이 정초되고 그것들의 여러 유형이 생겨난 것은 우리의 시대와는 판이하게 달랐던 시대에서 시작되었고, 사물과 상황에 대한 그 권력이 우리 시대에 비하면 미미하기 짝이 없던 사람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최성만, 99쪽)

“예술이라는 개념과 예술의 여러 상이한 형식은 오늘날의 시대와는 크게 다른 시대, 즉 사물과 상황을 제어하는 힘이 우리들의 힘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미미한 시대에 생겨났다.”(반성완, 197쪽)

여기서 무엇이 맞는 번역이냐는 부수적이다. 다만 나의 관심은 문장이고 문체이다. 그리고 어차피 이 대목의 원문은 불어이기에 두 판본 모두 ‘중역’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벤야민에 대한 충실성이 아니라 발레리에 대한 충실성이며 불문학 쪽에서도 뛰어난 문장가로 꼽히는 발레리라면 보다 유려한 문장을 구사하지 않았을까. 인용문의 끝문장을 읽어본다.(…)

머리말에 이어지는 1절의 첫문장도 부자연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예술작품은 원칙적으로 항상 복제가 가능했었다.”(100쪽) 왜 ‘가능했다’가 아니라 ‘가능했었다’인가? 우리말에서 ‘가능했었다’라고 하면 ‘현재는 가능하지 않지만’이란 뜻을 함축한다. 물론 벤야민이 뜻하는 바는 아니다. 2절에서도 첫문장은 좀 어색하다.(…)

가장 완벽한 번역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복제와 마찬가지로 원저가 갖고 있는 현존성, 곧 아우라를 갖지는 못한다. 다만 근접해보고 싶을 따름이다. 번역에 대한 불만은 그런 근접에의 욕망이 불가피하게 빚어내는 ‘착시 효과’일 수도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무난하게 읽힐 수도 있는 대목들에 대해 괜한 투정을 부리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욕망은 언제나처럼 끝간 데를 알지 못하는 법. 해서 ‘사람들이 번역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생겨나도록’ ‘번역 자체를 가장 마법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데’ 이를 때까지 이런 투정은 결코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08. 01. 17.

P.S. 이 연재에서 제일 처음 다루어진 건 우석훈의 '유관순 그리고 좌파소녀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1021744581&code=990000) 이다. 그의 블로그는 일일 방문자수가 이곳의 세 배가 넘는 '최강 블로그'의 하나다(http://fryingpan.tistory.com/). 요즘 경부운하에 대한 글들이 연이어 올라오고 있으므로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방문해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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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와 신경과학

며칠 매달렸던 일이 끝나서 30분 정도 쉬기로(놀기로?) 했다. 그래봐야 도서관에서 새로운 책을 몇 권 대출하고 서재에 새로 페이퍼를 올리는 것 정도이지만. '만남'이 오늘의 화제인 듯해서 컬처뉴스의 한 칼럼기사도 옮겨놓는다. 조나 레러의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지호, 2007)는 지난달에 소개 페이퍼를 올려놓기도 했는데, 그동안 책상에 올려놓고 아직 펴보지도 못한 책이다. 막간에 리뷰를 하나 더 읽어둔다.

컬처뉴스(08. 01. 16) 예술과 과학의 매혹적인 만남

우리는 감각을 통해 살아 있음을 느낀다. 보고 듣고 맛보고 만지는 행위를 통해 세상과 접촉하고 타인을 인식하면서 자아를 형성해간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의 모습은 일차적으로 우리의 감각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달려 있다. 그래서 우리의 세상은 감각계가 우리와 다르게 작동하는 동물들의 세상과 다르다. 외계 지성이 존재한다면 그들이 인식하는 세상의 모습도 분명 우리와 다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의 모습을 흥미롭게 재구성하기도 한다. 예술 활동이 대표적인 예이다. 예술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을 배울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고 이상적인 미를 구현해낸다. 이것 역시 감각 기관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 인간들에게 새의 소리가 아름답게 들리고 나비의 무늬가 매혹적으로 보이는 것은 순전히 우연의 일이다. 아서 클라크의 SF 소설 『유년기의 끝』에서 오버로드 종족이 인간의 음악을 들으며 당혹해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감각이 우리와 다르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유기체의 감각 기관의 작동 방식에 따라 달리 인식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세상이 객관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 의해 ‘구성’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예술은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가 된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예술의 본분이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자연을 충실하게 묘사하는 것이라 믿어왔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과학적 사고가 사회과학의 방법론에 파고들면서 역으로 예술가들은 인간의 심리적 내부, 주관적인 세계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당대의 대중들은 이런 예술에 놀라워하고 일부는 혐오감마저 드러냈지만 역사는 결국 이들 예술가의 판단이 옳았음을 보여준다. 세상은 주관적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예술과 과학이 흥미진진하게 만난다. 지난 2-30년 동안 신경과학이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면서 우리의 인식의 비밀이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실험 장비가 개선되고 실험 방식이 정교해지면서 이제 우리는 인간의 뇌가 어떻게 보고 듣고 느끼는지, 그리고 이런 감각자료들이 어떻게 종합적인 인식으로 구성되는지 상당히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의 인식이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양상을 띤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모더니즘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 드러냈던 경험의 양상이 과학에 의해 하나씩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조나 레러의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는 바로 인간의 인식의 비밀을 두고 예술과 과학이 어떻게 서로 조응되는지를 흥미롭게 파헤친 책이다.

감각과 인식의 선구자들
어렵고 따분한 줄로만 알았던 신경과학이 가장 역동적이고 흥미진진한 학문 분야로 떠오를 날이 올 줄 누가 알았으랴. 인간의 뇌의 미묘한 비밀을 밝혀내는 신경과학은 올리버 색스라는 스타급 필자를 낳으며 흥미로운 책들을 쏟아내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조나 레러도 만만치 않다. 대학에서 신경과학과 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인문학적 사유와 과학적 데이터를 오가며 우리를 인간 두뇌의 내밀한 세계로 안내한다.

이 책에는 모두 여덟 명의 예술가들이 등장한다. 다들 고정관념을 깨고 우리의 인식의 틀을 새롭게 정의한 예술가들이다. 오귀스트 에스코피에는 현대 요리의 기초를 확립한 프랑스의 전설적인 요리사이다. 그의 요리의 비밀은 송아지고기 육수에 있었다. 고기를 적절히 눌어붙게 해서 단백질을 화학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기막힌 소스를 만들어냈다. 그가 경험적으로 터득한 이 맛의 비밀은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마침내 과학적으로 설명되었다.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의 입맛을 끄는 음식에 글루타메이트라는 분자가 공통적으로 들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그 맛을 해독할 수 있는 수용체의 존재가 우리 혀에서 발견되었던 것이다. 한편 에스코피에는 음식의 풍미가 그저 혀에서 감도는 맛일 뿐만 아니라 후각적인 경험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았고, 우리의 혀가 상황에 좌우되는 변덕스러운 존재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이 또한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블라인드 테스트를 통해 우리의 기대감이 맛을 규정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같은 맛과 냄새라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 그 인식이 달라질 수 있음이 신경학적으로 설명되었다.

에스코피에는 다행히도 당대에 인정을 받아 부와 명성을 누렸지만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화가 폴 세잔과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대중들의 편견과 몰이해로 고통을 받은 사례에 속한다. 폴 세잔이 회화에서 이룩한 혁신은 빛이란 보는 과정의 시작일 뿐임을 간파했다는 점이다. 그는 눈이 아니라 뇌로 그리는 그림을 그렸다. 세잔의 화폭은 어떻게 보면 미완의 그림처럼 보일 만큼 본질적인 요소들만을 남겨둔 다분히 추상적인 경향을 띤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거기서 비어 있는 요소들을 찾아내 그림에 채워 넣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불완전한 감각들을 취해 의미를 만들어내는 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감각자료들을 일관된 재현으로 묶어내는 뇌의 작용이 없이는 세상을 인식할 수 없다. 우리는 현실을 사진처럼 이미지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추상화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의 능동적인 작용을 통해 이미지를 조합해낸다. 이런 신경학적 진리를 세잔은 이미 알고 있었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음악사상 가장 떠들썩한 스캔들이었다. 조성 화음을 근간으로 하는 예측과 해결의 익숙한 패턴을 벗어던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불협화음으로 밀어붙이는 이 곡은 아름다움과 가장 거리가 먼, 청중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 음악이었다. 스트라빈스키는 왜 이런 음악을 작곡했을까. 그것은 아름다움도 학습을 통해 새롭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누구보다 음악의 경계를 확장시키고 싶어했다. 여기서 조나 레러는 우리에게 피질푸가 네트워크라는 것을 설명한다. 아무리 흉한 소음도 반복적으로 들으면 패턴을 기억해 점차 수월하게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기제이다. 그리고 여기에 도파민이라는, 음악적 정서와 관련 있는 신경전달물질이 관여한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그의 말대로 <봄의 제전>의 초연은 청각의 경계를 밀어붙이는 극단적인 실험이었지만, 이후 청중들은 점차 여기에 익숙해졌고 그래서 현재 이 음악은 나름의 아름다움을 갖춘 고전적인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위의 세 명이 미각, 시각, 청각이라는 개별 감각의 본질에 대해 알려주었다면, 작가들은 주로 우리의 정신 작용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기억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우리의 기억이 늘 현실을 왜곡하는 불완전한 것임을 간파했다. 우리의 뉴런은 고정된 회로로 연결되어 전기적 자극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시냅스라고 하는 틈새를 통해 소통한다. 그래서 기억은 회상의 순간에 시냅스 간의 전이를 통해 매번 새롭게 활성화된다. 우리의 기억이 변덕스러운 것은 우리의 욕망 때문이 아니라 신경적 기제 때문이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자동기술을 통해 언어에서 의미와 구조를 분리하려고 했는데, 훗날 촘스키에 의해 언어 배후에 심층구조가 있음이 드러나면서 그녀의 시도가 정당했다는 것이 확인된다. 인간 심리의 내면을 파고든 버지니아 울프의 양식은 우리의 자아가 감각자료들을 해석하는 가운데 창발하는 것임을 선취한다. 자아가 단절된 순간들이 끝없이 이어지면서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환영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현대 신경과학을 통해 밝혀진 바이다.

이렇게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는 과학과 예술이라는 상이한 두 분야를 흥미진진하게 오가면서 우리에게 모더니즘 예술가들이 벌인 작업이 얼마나 과학적인 개연성을 확보한 실험이었는지 확인시켜 준다. 이를 통해 저자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과학의 오만함을 경계하자는 것이다. 과학이 제아무리 인간의 모든 비밀을 풀 것처럼 보여도 여전히 신비는 남을 수밖에 없으며, 과학이 전지전능한 신처럼 군림하는 시대에도 예술은 여전히 맡은 바 소명이 있다는 것이다. SF 소설가들의 상상이 미래사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해주듯, 오늘날 예술가들의 작업에서 인간의 인식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발견될지도 모른다. 예술가의 상상력은 일종의 과학 실험실인 셈이다. 이렇게 과학과 예술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정이창_문화비평가)

08. 0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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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학과 뇌과학이 만나는 곳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8-14 11:47 
    어제 주문한 책 중의 하나는 석영중의 <뇌를 훔친 소설가>(예담, 2011)이다. 지난주에 나온 가장 흥미로운주제의 책인데다가 저자가 러시아문학 연구자여서더더구나 놀랍다.소개기사를 미리 읽으니 문학과 뇌과학의 만남이불가능한 만남은 아니다. 오히려 앞으로 더 장려되면 좋겠다...연합뉴스(11. 08. 14) 문학과 뇌과학이 만나는 곳"공상의 행복한 힘으로/ 다시 살아난 허구의 인물들,/ 쥘리 볼마르의 연인,/ 말렉 아델과 드 리나르,/ 격정의
 
 
2008-01-17 08: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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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7 10: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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