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밭처럼 펼쳐지지 않았다면
시간은 뻘쭘했을까
하지만 거품 한줌 쥐지 못할 테지
시간은 깃발을 흔들지 못하고
시간은 날갯짓도 하지 못할 테지
시간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테지
그 모래밭에 누군가 등장하기 전에는
그 누군가 세월을 곱씹으며 등장하기 전에는
그 누군가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세월을 탓하기 전에는
비로소 
시간은 늘 하던 일이라는 듯이 
그림자를 거둬들일 채비를 한다
그 누군가의 그림자가 
모래밭을 빠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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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사강의 책이었지
프랑수아즈 사강이어야 하지
프랑스 작가니까
내가 열아홉 살에 슬픔이여 안녕을 읽은
삼중당문고였거나 범우 사르비아문고
왜 정확히 기억 못하는지는 나도 몰라
어떤 미소만큼은 사르비아문고였지
열아홉 살에 썼다고 해서 읽었지
슬픔이여 안녕
찾아보니 주인공은 세실이었어
사강이라고 해도 무방했어
다른 건 기억나지 않기에
내가 기억하는 건 
바칼로레아를 준비하던 세실이 읽던 책이지
베르그송을 읽고 감정교육을 읽던 세실
베르그송은 어떤 책이었을까
설마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아니면 물질과 기억이었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 건 그때 
실물이 없었기 때문일 거야
내가 다니던 책방에 
베르그송은 없었으니까
아마 서울에도 없었을지도
그래야 베르그송이지
프랑스 철학자니까
세실이 따분해하던 감정교육은 
머리에 각인이 되었지
마담 보바리보다 나중에 읽었지만
그것도 한참 나중에야 읽었지만
제목은 더 멋지다고 생각했지
프랑스식 교육이지
그 사강의 잊혀진 책이 
가죽푸대들의 피난길
잊을 것도 없어
안 읽은 책이니까
사강과 헤어진 다음에 나온 책
서점에서 집어들었다가 옛애인과 
헤어지듯 내려놓았어 그러고는
가죽푸대들의 행진이라고 기억하다니
오늘 그런 것처럼 가끔 생각나는 책
읽을 것도 없는 책인지 몰라도
가죽푸대들의 피난길에 서 있다 보면
생각이 나고 사강을 기억하지
열아홉 살에 슬픔이여 안녕을 쓰고
예순아홉에 세상을 떠났어
벌써 오래전이군
봉주르 슬픔이여
사강은 슬픔과 오십 년간 동거한 셈인가
열아홉 살에 만났기에 
열아홉 살로 기억하는 사강
삼십년도 더 지나서 
헤어진 옛애인처럼 기억나는 사강
우리 사이엔 아무일도 없었던 거지
그래서 이건 슬픔이 아니라네
가죽푸대들은 눈물 흘리지 않는다네
다만 행진할 뿐이라네
그대의 피난길을
가죽푸대들의 피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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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9-04-28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강전집에도 없는 책이네요.
그런데 가죽푸대는 무얼 말하는건지?
제게 사강은 오드리 헵번이나 샤넬 같이 이미지로 기억되는~

로쟈 2019-04-28 21:44   좋아요 0 | URL
사람들을 가리킬 거 같은데요. 책은 문학사상에서 나왔었어요.~
 

머나먼 바닷가
바닷가로 가는 길은 길고 홀쭉하여라

바닷가에는 바닷가의 풍경이 주인이지
바닷가의 선을 긋는 건 파도의 일
쓰고 지우고 반복하는 건 파도의 변덕이지

내가 적은 이름도 있었을 테지
파도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을 테지만
머나먼 바닷가의 머나먼 이름

바닷가의 무대에선 동선을 알려달라는 듯
갈매기가 끼룩댄다

갈매기의 대사는 누가 적는 것일까
머나먼 바닷가로 함께 가자던

개를 데리고 가자던
머나먼 바닷가에 가보면
다시금 멀어지는 머나먼 바닷가

언젠가 벗어놓은 신발이 있었지
우리도 한때는 바닷가의 풍경이었지
바닷가의 그네와 바닷가의 벤치 사이로

얼마나 많은 변덕이 덮쳤던 것일까
지금은 갈매기마저 퇴장하고
나 혼자 쓰다 지우다 반복한다

머나먼 바닷가 이제는 텅빈
머나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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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9-04-26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덕이 바닷가만 덮쳤던 것은 아니었으니
한때 바닷가의 풍경이기도 했던 난
이젠 그저 스쳐 지나가는 풍경일뿐이네요.
바닷가에게

로쟈 2019-04-27 00:00   좋아요 0 | URL
세월의 힘이죠.~

로제트50 2019-04-27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적 바다는 놀이터.
커서는 그냥 바라만 보는 바다.
몇 해전 케이블카 타고 물결 위로
건너던 바다.
머나먼 바닷가 (표현이 맘에 들어요).
이렇게 바다는 점점
관념적으로 변해가네요...

로쟈 2019-04-28 09:18   좋아요 0 | URL
네, 청춘이 관념적으로 변해가는 것처럼요..
 

오래전 하숙집 이층 작은 독방에는
창문이 있고 햇살도 있어서
천원짜리 화분도 갖다놓았다
강낭콩 화분이었다
강낭콩 콩깍지를 본 기억은 없지만
연보라색 꽃잎은 본 듯하다
강낭콩은 손길이 닿지 않아도
저 혼자 강낭콩이 되어 가는가
어느 날은 푸른 잎사귀에 달팽이 한 마리
하숙집 이층까지 기어서 올라올 리 없는
그런 달팽이가 강낭콩 잎새에 얹혀 있었다
생명의 자연발생설을 믿지 않지만
달팽이는 예외라고 하는 수밖에
그때도 달팽이에 대한 시를 쓴 건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강낭콩 화분에 대해서도 달팽이에 대해서도
하숙집 이층 독방은 책장 하나로도 비좁았지만
강낭콩과 달팽이는 많은 걸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생을 짧게 사는 데 익숙했던가
어느 날 달팽이가 홀연 사라졌고
나는 화분을 한번 뒤집어보았을 뿐이다
강낭콩 꽃이 지고 열매도 맺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모두가 콩깍지였는지도
오래전 일이란 게 으레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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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맘 2019-04-07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티비프로에서 젊은 날엔 기억하는 프레임이 많다하더라고요 나이들면 그게그거라 기억할것도 없어서 세월도 더 빨리간다고 생각된답니다 지금 와 생각하니 콩깍지처럼 느껴지는 그날들도 다 이유가 있었던것 같네요 용서해주기로~ㅎㅎ

로쟈 2019-04-08 07:24   좋아요 0 | URL
나이 들면서 새로운 경험이 줄어드니 그렇게 되는 거 같습니다. 대개 반복이니까요.^^;
 

언제 달팽이가 집으로 들어가는지
언제 항아리가 입을 오므리는지
언제 봄볕은 외출나간 마음을 불러들이는지
언제 마지못해 적은 답안지를 제출해야 하는지
언제 돌이켜보기엔 너무 먼 길을 걸어왔다는 생각이 드는지
언젠가 그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던 그 언제던가
봄날은 가고 낙엽이 떨어지던 날 또
흰눈이 내리고 또 내려서
집으로 가는 길이 벅찬 모험이었던 그
언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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