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멈추자 생각도 멈추었다
사납게 울부짖던 제주 겨울바람
야자수들의 뒷덜미가 서늘하겠지
너무 바짝 올려친 뒷덜미

생각의 능선에는 휘어진 나무들이
고개를 젖히며 허리를 편다
조선인 짐꾼은 200킬로그램의 짐을 지고
8킬로미터를 간다고 리플리는 적었다

믿거나말거나박물관을 세운 리플리
바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을 터
야자수들이 이주해오기 전일 테지만
휘어진 나무들은 예나 지금이나

바람이 부는 내내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바람은 어디로도 데려다주지 않았기에
그 오랜 바람에도 제주는 제 자리를 지켰을 터
바람이 멈추자 나는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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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맘 2019-01-28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을 원한건 아니지만,
바람에게 감사까지는 아니지만, 숨을 멎게하듯 갑작스런 바람과
함께하고 있구나 하고 웃을때가 있습니다ㅎ

모맘 2019-01-28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선생님,
‘자아폭발‘은 품절 상태던데
‘어두운그리스‘관련 먼저 읽어보면 좋은 책 부탁드립니다
2015년에 올려주신 책소개에 몇권 있던데 잘못 선택했다가 어려워서 깜놀 할까봐 부탁드립니다ㅎ

로쟈 2019-01-29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어두운 그리스‘를 보시거나 고대 그리스 관련 교양서들을 보시는게 좋을 것 같은데요. 더 특화된 책은 없는 것 같아요.

모맘 2019-01-29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대구공항 만남의 장소에서
나는 만날 사람이 없는 표정으로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태국 여자가 핸드폰으로 나를 찍는다
나를 보고 찍은 셀카일 뿐
내국인과 외국인이 언제나 구별되는 건 아니다
쾌락독서와 내성적 여행자 사이에서
머뭇거리다가 나는 발터 벤야민을 손에 든다
아침에 가방에 넣을 때만 해도
대구공항까지 오게 될 줄
벤야민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이력서가 그렇지 않던가
대학시절 그에게 자극을 준 책은
전공과 무관한 책들
(벤야민의 전공이 뭐였지?)
후기 로마의 미술산업이라거나
횔덜린의 시 빵과 포도주 분석 같은
대학시절 그는 여러 민족의 언어구조에
대한 강의와 후기 괴테의 언어에 대한
강의에 자극을 받는다 인생은
자극에 대한 반응인가 나는
어떤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여기까지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에까지 이르렀는지
벤야민이 알지 못한다면
나 또한 마찬가지다
국제공항에 있으면서 나는
중국어와 태국어를 일지 못하고
나는 내성적인 여행자의 표정으로
벤야민의 카프카를 읽는다
막스 브로트에게 카프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신의 머리에 떠오른 자살적 사고들이야˝
신은 고개를 바로 내저었을까
그래도 한번 떠오른 생각은 신과 함께 불멸하는 것일까
˝우리가 사는 세계는 신의 기분이 나쁜 날일 따름이야˝
찌푸린 날이 있듯이 신도 기분 언짢은 날이 있는 것이지
신의 한번 언짢은 기분도 불멸하는 것일까
˝희망은 충분해. 다만 우리를 위한 희망이 아닐 뿐이지˝
나는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책을 덮는다
그래 아무도 만날 사람이 없을 때
우리는 카프카를 만나지
아무런 희망도 없을 때 카프카의 친구가 되지
카프카처럼 유쾌해지지
카프카와 함께 불멸하는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대구공항 만남의 장소에서 나는
잠시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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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50 2019-01-25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망이 안보여서 외로울 때
<나의 카프카>를 읽으면 유쾌해질까요? 더 우울해지는 거
아닙니까? 책두께에서 고민이...^^;;

수년 전 뒤늦게 김연아 선수의 스토리에 빠져서 그녀에게
관심 가지던 차,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 신간 안내를 접하고,
그녀가 가는 러시아의 도시를 알아
보자며 구입했지요. 근데 책이 너무
좋았어요~ 이후 여기저기 인용되는
그는 제게 너무 높은 사람, 그에
대한 탐구는 거기까지 라고
맘 잡았습니다 *^^*

로쟈 2019-01-25 23:52   좋아요 1 | URL
네 모스크바 일기는 저는 리뷰를 쓴 기억이 나네요. 모스크바에서.~

베터라이프 2019-01-25 2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의 초판본을 갖고 있는데요. 3번 정도 읽었는데 오래전이라 기억이 가물합니다 ㅋㅋ 제에게 벤야민은 비참한 죽음으로 기억되어 있어서 안타까운데요. 충분한 여생을 더해 지성사에 더 기여할 수 있었음에도 순수한 신념으로 비롯된 그의 노력이 죽음으로 귀결되었으니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로쟈 2019-01-25 23:52   좋아요 0 | URL
불운의 대명사가 되었죠.^^;

two0sun 2019-01-25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벤야민의 벽돌 평전을 이제 막 읽기 시작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는 수월하게 책장이 넘어가는중~
다음주 강의를 계기로 벤야민의 다른책들도 읽을수 있었으면.
카프카는...쏟아지는 책들을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감당이 안되는데도 또
벗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로쟈 2019-01-25 23:54   좋아요 0 | URL
벤야민 카프카면 상당한 견적이죠. 감당하기 어려운.^^
 

길 위에서 중얼거린 건 기형도였지
중얼거림도 시가 된다는 걸
알았던 거지 아니 중얼거림도
기형도의 입을 거치면서 시가 되었지
그런 걸 중얼거린다고 시가 되려나
나는 다만 길 위에 있을 뿐
중국어방송과 일어방송을 들으며
부산행 기차에 타고 있네
차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눈부셔 하면서
이것이 현재라고 말하는 순간
지나가버리는 현재에 승차해 있네
광명을 지나고 대전을 지나갈 터
그런 것이 언제부턴가 인생의 경유지가 되었다
인생의 기차는 다만 도착을 지연하는 게 목적
그렇게 늦추는 게 예술의 목적이라고 했지
예술은 지각에서 인지까지의 거리를
간격을 늘리는 기술 그렇다고
둔갑술까지는 아니야
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뒤늦게 알아보게 만드는 화장술
인생의 예술은 서울에서 출발하되
부산에 늦게 도착하는 게 목적
그래서 나는 대구에서 내릴 참이지
대구에서 다시 제주로 건너갈 생각이지
서귀포에도 가고 성산포도 둘러볼 참이지
아직은 길 위에 있기 위해서
철로 위에 있는 셈이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사이
광명역 지난다 기형도문학관이 있는 곳
그렇군, 종착역을 지나서도
중얼거리는 게 시라는군
터널을 통과하면서야 나는 알게 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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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9-01-25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가을 기형도문학관을 가기전
그의 글과 관련서를 읽으면서
가슴 먹먹했던 기억이~

로쟈 2019-01-25 23:54   좋아요 0 | URL
곧 30주기가 되네요.~
 

전주 남원을 언제 가보았나
전주는 작년에 가보았지
전주 향교 은행나무를 보지 않았겠나
대성전과 명륜당 앞 은행나무
은행나무 황금 물결을
그 물결의 끝물을 보지 않았겠나
전주 지나며 생각하니
그게 가을이고 늦가을이지 않았겠나
그런데 남원은
남원 광한루는 어찌 되었나
이제 남원은 바래봉 눈꽃축제도 열린다는데
언제적 남원을 보고
이제껏 못본 체한단 말인가
언젠가 고창 선운사 가는 길에
잠시 들른 광한루
하지만 춘향사당도 둘러보지 않고서
남원에 가보았다니
인연이란 그런 게 아니지
강의 때마다 춘향이 흉을 보고서도
그렇게 입을 닦는 건 아니잖은가
그건 동백꽂도 보지 못하고
선운사에 가보았다 하는 것이지
가도 가보지 못한 것이지
인연도 인연이 아닌 것이지
전주 남원을 언제 가보았나
전주에서 수제비 먹은 적 있다고
입을 닦는 건 아니란 말이지
남원을 가본 체하는 건 아니란 말이지
남원이 어디에 있는가
오며가며 남보듯 지나갈 일이 아니지
어서 남원에 가야지
남원은 추어탕 아니겠나
상계동의 남원추어탕으로 될 말인가
어서 남원에 가봄세
이 봄에 가봄세
이건 언약이라네
춘향과의 언약이라네
남원으로 오게나
하는 틈에 공주 지난다
전주에서 공주까지
남원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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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백색을 메고 나선 길
지하철을 타고 용산으로 간다
이렇게 적으면 시도 아니라고
배변활동이 불규칙적이신 분
아랫배에 가스가 차는 분
옆에서 참견하는 광고판
아랫배에 가스가 찬 건가 생각하기 전에
이것도 각운이지 싶다
기름진 음식을 자주 드시는 분
장이 예민하여 화장실 출입이 잦으신 분
이건 나열법에 해당하지
백석 시가 그렇고 김수영 시가 그래
기본이라서 그래
화장실 출입이 잦은 건가
운동 부족으로 배변 기능이 약해지신 분
인지도 몰라 하지만 그게 중요한가
시작활동이 불규칙적이신 분
쓰려고 하면 머리에 안개가 끼는 분
기름진 음식을 먹어도 메마른 시만 쓰는 분
장이 예민하여 시만 생각하면 화장실 출입하는 분
이 모든 게 운동 부족이라는 말이지
시운동이 부족한 거야
아침마다 3음보, 4음보씩 걷고
끼니 때마다 직유와 은유를 챙겼어야 해
아이러니와 역설을 연마하고
주말이면 시어를 채집하러 다녔어야지
제주 성산포에 가지 못한다면
광명 동굴에라도 내려가보든가
이제는 용산역에서 다시 기차로
무진기행에 나선다 여기까지
써도 시가 될 기미가 없으니
이 모두가 운동 부족이란 말이지
기차는 광명역을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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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공 2019-01-19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근대 프랑스문학 강의 정말 재밌었습니다! 점점 문학의 바다에 빠져듭니다.나눠주신 프린트물 내용 역시 읽기 쉽고 유익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붙들고 있었습니다^^푹쉬시고 낼 뵙겠습니다. 먼 길 발걸음 감사합니다^^

로쟈 2019-01-20 11:34   좋아요 0 | URL
네 오후에 뵐게요.~

PATAGON 2019-01-20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 너무 좋은데요.
리드미컬하면서도 위트있고,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이 모든 게 운동부족때문일 줄은..ㅎㅎ

로쟈 2019-01-21 23:56   좋아요 0 | URL
재밌다니 그나마 다행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