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게 저은 다음 5분 동안 놓아둔다
아직은 아니다

다시 세게 저은 다음 5분 동안 놓아둔다
무엇을 젓는가는 묻지 말고
세게 휘저은 다음 딱 5분 동안
왜 5분인가는 묻지 말고
세게 거세게 휘저은 다음
아니 5분 동안 젓는 게 아니라
그냥 휘저은 다음 놓아둔다
그냥 내버려둔다고 
그게 다냐고 묻지는 말고
그리고 기다린다
무엇을 기다리는가는 묻지 말고
언제까지 기다리느냐고도 묻지 말고
세게 저은 다음 놓아둔 다음에
기다리고 기다린 다음에
퇴장한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5분간 기다린다거나 그러지 말고
그냥 퇴장한다
아무것도 휘젓지 않고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았다면
이제 완성되었다
세게 저은 다음 5분간 기다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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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9-09-03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다시 읽었네요.
무엇을 저었는지 묻지 말라고 했지만
혹시나 싶어서
나도
머리를, 마음을, 시간을, 그 중 뭐라도
세게 저은 다음 5분간 기다리면
시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해봤네요.

로쟈 2019-09-03 14:17   좋아요 0 | URL
첫문장이 책에 나오는 비문학 예시문이에요. 시가 되기 어려운.

two0sun 2019-09-03 14:52   좋아요 0 | URL
어제 강의 듣고 저 책 주문했는데~
책 오면 잘? 읽어봐야겠네요.
 

그날 아무도 취하지 않았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아무도 취하지 않았다는 이유가 아니다
아무도 만취하지 않았고 시비를 걸지도 않았다

아침이었다 아침부터 취할 수는 없다
추한 일이다 비틀거린 기억은 있다

그랬지 그건 당신도 기억나는 일
당신도 발을 뺄 수 없는 일

취하지 않아도 횡설수설이 가능했다
맥주 한잔으로도 만취할 수 있었다

만취하고도 나는 말이 없었다
기쁜 표정이었지만 기쁘지 않았다
나는 스무살

비틀거리며 이태원에서 귀가했을 때
하숙집 사람들은 모두 자고 있었지

아침에야 보았다 촛불을 켜지 못한 케익
단 한번 촛불을 끄지 못한 케익

아무도 전날의 일은 묻지 않았다
하숙집 사람들은 하나둘 떠났고
나도 떠났다 

스무살을 그렇게 지나쳤다
단 한번의 스무살이 당신에게도 있었지

당신은 비틀거리며 택시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갔지 고개처럼
올라가야 숨이 찰 때쯤 하숙집이 있었지

하숙집 사람들은 모두 자고 있었지
하숙집 사람들은 모두 떠났지

영국으로 유학을 가고 또 군대에 갔지
나는 군대에 갔지

그랬지 그건 당신도 기억나는 일
이듬해 신촌에서 마지막으로 본 영화 욜
터키 영화 욜이었지 길이었지

그날도 지금도 취하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횡설수설하는군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나는 여전히 기쁜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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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를 위한 꽃이 필요해
장미가 아닌 야생초
절벽 위에 핀 야생초 헤더꽃
그게 히스클리프
캐서린을 위한 히스클리프는
에밀리를 위한 꽃이기도 해
에밀리에게 바치는 꽃이어야 해
오빠의 장례식에서 비를 맞고
폐결핵으로 죽은 에밀리
서른에 죽은 에밀리
에밀리가 세상을 떠나던 날
살럿이 에밀리에게 건넨 꽃
히스클리프
절벽에서 꺾은 야생초 헤더꽃
히스클리프를 창조해낸
에밀리에게 어울리는 꽃
헤더꽃이 만발한 황야에 가볼 수 있을까
폭풍이 휘몰아치는 언덕에 서볼 수 있을까
에밀리를 위한 꽃을 들고서
에밀리를 기억하기 위해서
에밀리가 사랑한 개 키퍼처럼
에밀리를 애도하며 울부짖은 키퍼처럼
수주간 울부짖은 키퍼처럼
에밀리를 위하여
에밀리만을 위하여
잠시 절벽에 서볼 수 있을까
절벽 위에 핀 헤더꽃처럼
히스클리프
에밀리를 위한 히스클리프처럼
에밀리만을 위한 야생초처럼
에밀리 브론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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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2 0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너는 라스콜니코프다
전당포에 가는 게 너의 일과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살해하는 게 
너의 주특기
너는시베리아로 가야 하지
너는 소냐와 함께
그런데 시베리아의 아침은 왜
이리 더딘가
라스콜니코프는 늘어지게 하품을 한다
아침은 아직 준비가 안된 표정이다
더 멀리 가야 했던가
블라디 블라디보스토크
오늘의 너는 어제의
너가 아니다
너는 라스콜니코프가 아니다
너는 대학생이 아니다
도끼를 언제 손에 쥐어봤던가
도낏자루가 썩는 줄 몰랐던가
블라디 블라디보스토크
시베리아의 어둠은 끝나지 않았다
너는 전당포에 가지 않았다
너는 도끼를 들지 않았다
너는 그러고도 소냐와
너는 시베리아로 가지 않았다
더 멀리 가야 했던가
라스콜니코프는 왜 이리
늦는가 너는
누구인가
너의 여권은 어디에
도끼는 반입할 수 없다
도끼는 검색대를 통과하지 못한다
너는 시베리아로 가야 한다
더 멀리 가야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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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맘 2019-08-27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도 같습니다!!!
로쟈쌤은 어제의 로쟈가 되고 싶으셨던(싶으신)거죠?ㅎㅎ
(쌤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한건지
제 멋대로 까불어봅니다ㅎㅎ)

로쟈 2019-08-27 22:52   좋아요 0 | URL
대학생 때 읽고, 이젠 더이상 대학생이 아닌 나이.^^
 

매일 13명이 술 때문에 죽는다
다른 이유는 없다는 듯이
죽는다, 죽는다고 한다
매일 13명이, 이 순간에도 주정을 한다
술주정을 하다가 숨이 넘어간다
정말 다른 이유는 없다는 것인가
이 얼마나 순도 높은 죽음인가
매일 13명이, 작당하지도 않은 채로
분명 주정의 이유는 있을 테지만
아아, 과묵하게도 매일 13명이
순전히 다른 이유는 없다는 듯이
술을 토하는 심정으로
죽는다, 죽어간다
하필이면 13명인가
하지만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마다
매일 13명이 채워진다
어디선가 술에 취한 인생들이
차례로 순번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그날을 맞이하는 것인가
오랜 습관과 염원이 만나는 것인가
마지막 한방울과 마지막 호흡이라니
생각하면 눈이 뜨끈해진다
매일 13명의 명단이 뜨는 건 아니지만
나는 이 죽음을 기억하기로 한다
비록 13명이 모두 시인은 아닐지라도
한두 명은 시인일 거라고 믿는다
얼마나 많은 술주정이 시가 되었던가
얼마나 많은 푸념과 탄식이 안주가 되었던가
생긱하면 얼굴이 붉어진다
다른 이유는 없다
매일 13명이 술 때문에 죽는다
나는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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