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드리면 덧나는 문제이긴 한데, 성매매 문제와 관려하여 스크랩해놓은 기명 칼럼 몇 개를 옮겨놓는다. 며칠전 한겨레에 김기원 교수의 칼럼 '성매매 여성의 인권'이 게재되었는데, 그가 이전에 쓴 칼럼 '성매매 처벌법의 허와 실'을 나는 읽은 바 있고 많은 대목에서 공감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송경숙 성매매문제 해결을 위한전국연대 대표의 반론이 제기됐었던 모양이다. 생각할 자료서의 가치가 있는 듯하여 모두 옮겨놓는다. 

한겨레(06. 07. 28) 성매매 처벌법의 허와 실

-성매매 처벌법이 시행된 지 2년이 되어간다. 성매매처벌법으로 성병검진 대성 여성이 준 게 질병관리와 관련이 있는 게 아니냐는 최근 발표도 물의를 빚었지만, 이 법을 둘러싸고는 지금까지 뜨거운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시장논리에 어긋난 법률이라고 비난한 학자가 있는가 하면, 재계총수는 사회의 하수구가 있어야 한다고까지 이야기했다. 중산층여성을 위해 한계층여성을 희생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한 여성운동가도 있다. 반대로 여성단체는 엄격한 법집행을 요구한다. 도대체 어느 쪽이 옳을까.

 

 

 

 

-인간의 서비스는 대부분 훌륭한 상품인데 유독 문제가 되는 것은 성적 서비스다. 세계적으로 성매매는 옛날엔 합법적이었으나 현대에 와서 여권신장과 더불어 사정이 달라졌다. 우리나라도 광복 이후 비로소 공창제도를 폐지하고 1960년대에 성매매를 불법화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불법은 기껏 교통신호 위반 정도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성매매처벌법은 그런 관행을 바꾸어 징벌을 강화하는 조처였다.

-그러면 이 법률의 효과는 어떠한가. 먼저 다른 나라의 예를 보자. 미국은 라스베이거스가 있는 네바다 주만 성매매를 합법화하고 있다. 거기선 성매매를 단속하는 다른 주에 비해 성매매의 거래량은 많다. 하지만 시설이 제대로 갖춰진 공개장소에서 영업을 하며 정기적 검진을 실시하므로 성병 등 거래행위에 따른 위험은 현저하게 낮다. ‘어느 업소는 어떻더라’는 소문을 들을 수 있고, 서비스에 문제가 있을 때는 업주에게 항의할 수 있다. 성매매 여성에 대한 부당한 착취도 줄어든다.

-성매매가 불법화한 주에서는 성병 걸린 성매매 여성들이 거리를 배회한다. 음성적 매춘행위에 대해선 서비스의 질을 보장받기가 어렵다. 그리고 여기선 폭력이나 부패와 같은 범죄가 자라나기 쉽다. 폭력배가 불법 매춘업에 기생하며 관련 업주들이 단속공무원에게 뇌물을 상납하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집창촌 지역을 담당했던 김강자 서장이 공창제도를 주창한 것도 이런 폐해들 때문이다.

-스웨덴이나 네덜란드는 둘 다 선망의 복지국가다. 그런데 성매매에 대한 시각은 판이하다. 스웨덴은 성매매를 불법화했고, 네덜란드는 성매매를 양성화했다. 그 결과는 미국의 예에서와 마찬가지다. 성매매여성 비율은 네덜란드가 훨씬 높은 반면, 스웨덴에선 성매매여성이 뚜쟁이에게 종속된 정도가 크고 위험에 노출되는 확률이 높다.

 

 


 


-요컨대 성매매의 양적 축소를 중시하느냐, 아니면 성매매와 관련된 성병과 범죄의 축소를 중시하느냐 하는 가치판단에 따라 성매매 단속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다. 양쪽 입장 다 일리가 있다. 이런 게 모의 국민투표의 대상이 아닐까. 물론 어떤 방향으로 가든 성매매 여성에게 다른 생계수단을 제공해야 하고 건강한 노동의식도 함양시켜야 한다. 또 사회의 투명화로 술자리 접대문화를 바꾸어야 한다. 장애인과 같은 성소외자에 대한 배려도 빠져선 안 된다.

-성매매처벌법 시행 이후 우리 집창촌 종사자 숫자는 줄었다. 하지만 성매매가 더욱 음성화한 것도 분명하다. 이에 대한 가치판단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런데 법 제정 때 여론수렴이 충분했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이 역시 졸속정책의 사례가 아닌지 모르겠다. 또한 엄중단속의 방향을 선택하더라도 시행시기를 잘 잡았어야 했는데, 하필 경기가 나쁠 때였으니 부작용이 크고 저항도 거셌다. 조폭관련 업소부터 단속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집행단계도 신중히 밟아 나갔어야 했다. 이런 부분들을 경시해 정부는 결국 법도 흐지부지되게 만들었고 관련 하층서민의 지지도 잃었다. 지금이라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하지 않을까.(김기원 방송대 교수·경제학)

한겨레(06. 08. 12) '성매매 처벌법 논란'의 남성주의

-7월28일치에 실린 김기원 방송대 교수의 ‘성매매 처벌법의 허와 실’이라는 칼럼을 보고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겨레는 이에 앞서 ‘셩매매 특별법과 남신숭배’(6월23일치)라는 제목의 외부필자 칼럼에서도 성매매 방지법 관련 내용을 다루면서 법의 문제를 제기하는 차원을 넘어 법을 무력화시키는 것으로 읽힐 수 있는 내용을 실었다.

 

 


 


-김 교수의 칼럼은 ‘성매매 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과 ‘성매매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하 성매매 방지법) 중 처벌법에 대한 문제를 주로 짚고 있다. 물론 법이 만능은 아니고 현행법 또한 한계가 있는데, 법 취지에 맞게 성매매 방지 및 피해자에 대한 인권보호와 자활지원이 확실히 보장되고 있는가에 대한 법 집행력의 문제는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다. 그러나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이 근거가 불분명한 내용과 추측에 기반하여 사실을 왜곡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김 교수는 마치 성매매가 합법화한 나라에서 여성들의 인권이 보장되고 잘 관리가 되어 범죄 발생이 줄어든 것처럼 사실을 왜곡하고, 성매매를 합법화해서 여성들을 관리하는 것이 범죄 축소에 효과적인 양 선전하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문제의 본질을 크게 훼손하는 것이다. 성매매 합법화가 여성들의 인권을 보장해주는 대안이 아니라는 점과 오히려 합법화한 나라에서 불법 영역이 확대되고 국제적 인신매매 범죄의 온상지가 되고 있는 사실에 눈감으면서 다른 한쪽의 입장만을 옹호하는 것은 옳지 않다(*어느 주장이 팩트인가?).

-어느 성매매 여성도 대안이 제시된다면 성매매를 지속하지 않겠다고 한다(*미용사가 대안인가?). 성적 서비스를 직업으로 인정해 달라는 요구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또한 대안을 마련해 줄 것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전세계적인 ‘빈곤의 여성화’로 수많은 여성들이 성매매와 인신매매로 내몰리는 상황에서, 이들을 노리는 알선업자들은 돈벌이를 위해 여성들을 모으고 이동시키면서 착취하고 있다.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오히려 합법화가 대안인 양 선전하는 것은 또다시 모든 이에게 거짓된 환상을 심어주는 무책임한 발언이다.

-칼럼은 또한 성매매의 주요 원인이기도 한 성차별적인 남성 중심의 성 의식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성 구매자인 남성들의 안전을 위한 성병 검진의 필요성과 장애인(남성)의 성적 욕구 해결에 대한 요구가 그것이다. 남성의 성적 욕구를 해결해주는 성적 서비스로서의 성매매는 당연히 보장되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쓰인 이 글은, 성매매와 성 구매자로 인해 오히려 심각한 각종 질병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성매매 여성의 건강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장애인 남성의 성을 살 권리(?)를 논하기 전에 성매매 여성의 인권을 먼저 살펴보길 바란다.

-성매매가 합법화하지 않아서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인권침해가 발생하는것이 아니라 ‘성매매는 필요악’이라고 허용하면서도 동시에 여성들에 대해서는 도덕적 낙인을 가하는 이중적인 남성 중심적 성 의식과 문화가 성매매 구조를 만들어내고, 그 구조에 유입된 순간부터 여성들은 인권침해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송경숙 /성매매문제 해결을 위한전국연대 대표)

한겨레(06. 08. 18) 성매매 여성의 인권

-성매매처벌법을 다룬 필자의 7월28일치 칼럼을 두고 송경숙씨가 8월12일치 신문에서 반론을 제기했다. 반가운 일이다. 이런 식으로 토론이 활발해져야 성문제를 제대로 처리하는 사회가 앞당겨진다. 다만 송씨의 글에는 필자의 뜻을 오해하고 사실을 왜곡한 부분이 있어 이를 해명하면서 논의를 진전시켜 보자.

-성매매에 관한 필자의 글이 남성주의라고 몰아세우면 남성이라는 원죄(?) 때문에 대응하기 난처하다. 하지만 필자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성매매처벌법이 중산층 여성을 위해 한계층 여성을 희생시킨다는 어떤 여성운동가의 지적과, 주류 여성계의 냉대 속에 성매매 여성들이 50일 동안 단행한 천막농성이었다. 여성 전체가 남성에 의해 차별받지만 동시에 여성 사이에도 차별이 존재한다. 이는 자본에 의해 차별받는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과 중소기업 노동자를 차별하는 것을 연상시킨다(*여성 내부의 차별은 남성중심사회의 필연적인 결과인가? 때문에 나중에 처리되어야 하는? 혹은 남성중심적 사회구조를 혁파하면 자동적으로 소멸되는?).

-성매매 불법화는 송씨의 주장과 달리 해당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기보다 침해할 가능성이 더 크다. 미국 성매매 여성 중 에이즈 감염자는 성매매가 합법인 네바다주엔 거의 없는데, 불법인 워싱턴과 뉴저지주엔 절반가량이다. 또 합법인 네덜란드에선 투명한 거래 덕분에 인신매매 등 관련범죄가 잘 드러나는 반면, 불법인 미국에선 은폐되기 쉽다. 불법인 경우에 화대 갈취나 단속 공무원 부패도 더 심하다.

-성매매는 술이나 마약처럼 사람들이 효용을 과대평가하고 폐해를 과소평가하는 비가치재(demerit goods)다. 비가치재에는 국가가 여러 규제를 가한다. 성매매의 폐해는 성병 감염, 결혼제도에 대한 위협, 인간관계의 황금만능화다. 그런데 술은 극소수 국가만 금지하고 마약은 극소수 국가만 허용한다. 성매매는 그 중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서른 나라 중 네 나라에서만 불법이다. 근래 유엔도 모든 성매매를 범죄시하던 과거의 태도를 바꿨다. 다수파가 항상 옳지는 않지만 다수 선진국이 성인의 자발적 성매매를 인정한다면 우리도 그 이유를 곰곰이 따져봐야 한다.

-사랑 없이 재벌가문에 시집가는 것과 성매매를 하는 것은 어떤 점이 다를까. 결혼여성은 전속 매춘부고 성매매 여성은 프리랜서 매춘부라고 말한 과격한 여성운동가도 있지만, 성매매 여성보다 더 열악한 처지의 주부도 없지 않다. 중요한 문제는 성적 거래를 포함한 남녀관계의 실제상태다. 군산 매춘여성이 숨졌을 때 정부는 거래상태를 개선하는 대신 업종을 폐쇄하는 성매매처벌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이 법은 성매매를 더욱 음성화하고 관련 하층서민의 생활을 악화시켰다.

-한국의 성매매 여성 비율은 네덜란드의 네 배, 미국의 두 배가 넘는다. 불법인 미국이 합법인 네덜란드보다 비율이 높고, 또 한국은 그들보다 더 높다. 성적 서비스에 자원배분이 과다한 현실을 시정하는 데 처벌이 능사가 아닌 셈이다. 북한처럼 인민의 삶을 철저히 통제할 수도 없다. 사회보장 제도의 충실화, 사회의 투명화가 관건이다. 그를 향한 과정에서 대안도 없으면서 성매매 여성을 내몰아선 안 된다. 또 송씨는 장애인 남녀의 성욕을 하찮게 여기는데, 그래도 되는 걸까. 성욕은 억압대상이 아니라 관리대상이다. 성매매가 합법인 네덜란드에서 장애인에 대한 성적 자원봉사도 활발하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양대 노총과 민주노동당은 성매매 여성을 외면했다. 이처럼 지지기반조차 챙기지 못하니 헤매는 게 당연하다. 성매매처벌법 재검토를 용기있게 제기할 다음 대선 후보가 있을까. 정치인은 민감한 문제를 피해 간다. 하지만 양극화에 신음하는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지도자란 성매매 여성 같은 서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인물이 아닐까.(김기원 방송대 교수·경제학)

06. 08. 21.

P.S. 송경숙 대표의 이어지는 반론을 기대한다. 해법은 당위와 현실의 이분법을 넘어서 현실적합성을 갖는 당위를 찾아가는 데 있지 않나 싶다. 혹 이 문제에 해법이 있다면... 

P.S.2. 마이페이퍼 작성시 저작권 침해 예방에 동참해달라는 알라딘의 요구에 따라 앞으로 다른 사이트의 글을 페이퍼에 옮겨오는 일은 중단할 예정이다(따라서 이 페이퍼가 마지막 '인용'이다). 그리고 이제까지 옮겨왔거나 인용한 글들은 상황을 봐서 비공개로 전환시키도록 하겠다(단, 얼마간의 유예기간을 갖도록 하겠다). 책에 관한 리뷰들을 알라딘에서 참조할 수 없는 건 유감스럽지만 덕분에 책 읽을 시간이 좀 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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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8-21 19:10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저도 송경숙 대표의 반론이 기대됩니다. 성매매에 원칙적으로 반대하는 까닭은 역시, 성노동이 다른 노동과는 다른 성격을 갖는다는 전제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물론 이는 '질적'인 문제이고, 이 '질적' 문제는 '양적'인 차이들의 누적 때문에 생기는 것은 맞지만, 김교수의 '사랑 없이 재벌가문에 시집가는 것과 성매매를 하는 것은 어떤 점이 다를까'라는 말은 폭력적인 것 같습니다.

로쟈 2006-08-21 19:30   좋아요 0 | URL
제 생각은 좀 다른데, '사랑 없이'란 전제를 단 것 자체가 오류이죠. 일반화된 성매매(성의 계약)는 그러한 주관적 감정과 무관하게 작동하는 것 아닌가요?..

yoonta 2006-08-21 19:50   좋아요 0 | URL
제 개인적으로는 송경숙씨의 의견보다는 김기원교수의 의견에 동조하는 편입니다. 송씨는 기본적으로 성매매에 대한 터부시를 바탕으로 깔고 이야기하는 건데 전 왜 성매매가 다른 매매행위와는 다르게 유독 터부시되고 금기시되어야만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심지어는 노동력도 상품화되는 자본주의적 현실이 <불가피한> 지금의 현실이라면 성매매라는 매매행위도 <불가피한> 매매행위의 하나로 보지 말아야될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봅니다. 성매매는 오히려 자본주의보다 더욱 역사가 오래된 매매행위중 하나죠.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여성들의 성노동을 터부시하고 죄악시하는 것은 그와 같은 성차별적 시각을 처음에 만든 남성주의적 시각을 재전유하는 것에 다름아니라고 봅니다.

성매매을 터부시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논거로 제시하는 것이 인신매매와 같은 범죄와의 관련성 때문입니다. 이것도 위에서 김교수가 이야기한 것처럼 공창제를 운영했을때 오히려 감소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술이나 마약 그리고 매매춘등은 금지하고 터부시하면 할수록 더욱 법의 사각지대로 숨어버리게 될 뿐입니다. 결코 없어지지 않죠. 그것은 쉽사리 제어되지 않는 인간의 욕망이 그와같은 상품들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욕망에 대한 절제라는 문제를 "당위"라고는 할수있지만 그것이 결코 "범죄행위"는 아니라는 거죠. 이처럼 각 개인의 윤리 내지는 도덕에 의해 판단되어져야 할 문제를 (성매매금지)법으로 규율하려고 한다는 것은 어떤점에서 보면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일수도 있다고 봅니다...

로쟈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로쟈 2006-08-21 20:08   좋아요 0 | URL
본문에 살짝 적어놓지 않았나요?^^ 성매매를 합법화하고 있는 나라와 불법화하고 있는 나라가 공존하고 있는 것처럼 문제가 일방적이지 않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성매매를 불법화하는 것이 진보라고 믿는 것은 착각이죠). "요컨대 성매매의 양적 축소를 중시하느냐, 아니면 성매매와 관련된 성병과 범죄의 축소를 중시하느냐 하는 가치판단에 따라 성매매 단속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다. 양쪽 입장 다 일리가 있다." 적어도 그런 전제하에 토론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로쟈 2006-08-21 21:45   좋아요 0 | URL
이 글을 포함한 인용 페이퍼들은 일주일 후에 모두 비공개로 전환하겠습니다. 그동안 댓글을 달아주신 분들의 깊은 양해를 바랍니다...

로쟈 2006-08-22 15:13   좋아요 0 | URL
**님/ 본문에 덧말로 적었는데, 알라딘의 지침이 펌글을 자제해 달라는 것입니다. 해서, 제가 군말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적은 페이퍼들은 전부 비공개로 돌리려고 하고 있습니다(이 페이퍼는 방주에 남겨놓을까 생각중입니다)...

로쟈 2006-08-22 16:11   좋아요 0 | URL
**님/ 예, 앞으로는 별문제이지만 이미 상품넣기를 한 페이퍼들이 처치 곤란이어서요(더불어 알라딘쪽 주문은 퍼오는 것 자체를 자제해달라는 것입니다). 집주인이 나가주었으면 좋겠다는데, 버팅기기도 그렇고... 해서, 쇠뿔도 단 김에 빼버렸습니다...

로쟈 2006-08-22 18:02   좋아요 0 | URL
**님/ 알라딘은 카피라이트를 확실하게 챙기기로 방침을 정한 거 같습니다. 집주인의 방침이 그러하다면 따라줘야지요. 다소 불만스럽지만, 장기적으로 순기능이 될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3794 2006-08-25 11:58   좋아요 0 | URL
<전세계적인 ‘빈곤의 여성화’로 수많은 여성들이 성매매와 인신매매로 내몰리는 상황에서> 전세계적 빈곤의 여성화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 일까요? 3업종이라 불리는 업종은 많이 있습니다. (사람이 없어 외국에서 노동력을 수입하고 있죠) 그러한 업종에 종사하는 최저 빈곤층이 우리사회에 존재하구요. 가난을 벗어날 큰돈을 받는 댓가로 베트남의 빈곤한 가정에서 20살난 여자아이를 한국의 3,40대의 노총각에게 시집보냅니다. 하지만 명품빽을 사기위해 매춘하는 여고생처럼 우리나라의 매춘을 빈곤과 연계시킬수 있는걸까요?


로쟈 2006-08-25 14:21   좋아요 0 | URL
정말로 빈곤한 여성들(하위주체들)은 그걸 사회적 의제로 만들거나 이론화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결여돼 있죠. 페미니즘 담론의 딜레마 중 하나는 그러한 '대변'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 얘기가 아닌 것이죠...
 

장인, 장모님이 아침 일찍 친구분 문병을 가신 터라 오전시간에 잠시 처갓집을 지키고 있다. 처조카 혼자 집에 남게 되었기 때문인데 농구하러 나가고 나니까 집에 남은 건 결국 나 혼자이다. 문병이라고는 하지만, 한 달전쯤 말기암을 통보받고 오늘내일 하신다고 하는지라 이승에서의 마지막 인연을 확인하러 가신 걸음이겠다.  

 

 

 

 

'책벌레'인 나는 그러한 인연마저도 책을 통해서 떠올리게 되는데, 알다시피 제목으로 단 '죽음 앞의 인간'은 필립 아리에스의 방대한 저서명이기도 하다(아직은 서가에 죽음을 들여놓을 자리가 없어서 구입을 미뤄두고 있는 책이다). 아리에스의 <죽음 앞의 인간>(새물결, 2004)은 <죽음의 역사>(동문선, 1998)와 짝을 이룬다. 국내에서는 몇 년 전 원로 국문학자 김열규 교수의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궁리, 2001)가 한때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었다. '죽음학'에 대한 본격적인 (학적)연구는 '근사체험'을 다룬 최준식 교수의 <죽음, 또 하나의 세계>(동아시아, 2006)부터가 아닌가 싶다. 가벼운(?) 책으로는 '죽음의 철학적 의미'란 부제를 단 유호종 박사의 <떠남 혹은 없어짐>(책세상, 2001)과 종교학자 정진홍 교수의 <만남, 죽음과의 만남>(궁리, 2003) 등을 꼽아볼 수 있겠다.   

 

 

 

 

얼마전에 출간된 책으로는 시인 원재훈씨의 에세이집(유언모음집) <네가 헛되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문학동네, 2006)와 미셸 슈나이더의 <죽음을 그리다 - 세계 지성들의 빛나는 삶과 죽음>(아고라, 2006)은 각각 삶의 마지막 말과 순간들을 담고 있다. 보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세종서적, 2003)이나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궁리, 2002) 등이 있다(<죽음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룬 책들이 이 방면으로 트렌드를 이룬다). '미학적인' 죽음에 대해선 두루 아시다시피, 진중권의 <춤추는 죽음>(세종서적, 2005)을 참조할 수 있다. 그래봐야 여기서 거명한 책들은 일부분일 뿐이다. 이 중에서 가장 최근에 나온 책 <네가 헛되이...>에 대해선 스크랩해놓은 리뷰 기사를 읽어보도록 한다.

세계일보(06. 08. 19) "본래 나고 죽음도 오고감도 없는 것"

-시와 소설의 장르를 넘나들며 활발한 전업문인으로 살아온 원재훈(45)씨가 자신의 삶을 완전히 불태운 사람들이 지상에 남기고 간 마지막 한마디를 모은 에세이집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문학동네)를 펴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같이 살다간 50여명의 삶과 마지막 한마디를 채록한 이 책은 권태와 짜증으로 귀한 ‘오늘’을 소모하는 이들에게 청량한 자극을 주기에 충분하다.

-지은이가 찾아낸 이들은 죽음 앞에서 애통해하거나 아등바등 삶을 구걸하지는 않았다. 당당하고 헛헛하다. 헝가리 출신 작가로 89세의 나이에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권총으로 자살한 산도르 마라이는 “지나치게 오래 사는 것은 분별없는 짓”이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빈센트 반 고흐는 동생 테오의 품에서 죽어가며 힘겹게 “이 모든 게 끝났으면 좋겠어”라고 힘겹게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고흐는 죽음을 별까지 걸어가는 환상적인 여행으로 생각했다.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듯,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별에 갈 수 없다.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건, 별까지 걸어간다는 거야.”

-악성 베토벤도 죽음 앞에서 당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의 마지막 한마디는 “박수를 치게, 친구들, 희극은 끝났네”였다. 그가 평소에 죽음을 향해 던졌던 도발적인 대사. “죽음이 언제 오든 기쁘게 맞으리라. 내가 가진 예술적 재능을 모두 발휘하기 전에는, 설령 운명이 아무리 나를 괴롭히더라도 죽고 싶지 않다. 그러니 죽음이여, 용감히 너를 맞으리니 언제든지 오라.” 소크라테스는 “이제 삶이라는 족쇄에서 풀려나니 즐겁다”고 마지막 말을 던졌다.

-이들이 죽음 앞에서 이처럼 담담하고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생을 누구보다도 충실하게 미련 없이 살았기 때문일 터이다.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와 맞서 대승을 거두었지만 그 싸움의 와중에 죽어갔던 영국 넬슨 제독의 말이 그 증거다. “신이여. 고맙습니다. 저는 소명을 다했습니다.” 당나라 승려 혜능도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행여 말하지 말라, 내가 왔다 갔다고. 본래 나고 죽음도, 오고 감도 없는 것이다.”

-물론 죽음 앞에서 비감이 없을 수 없다. 성삼문은 죽음을 앞둔 절명시에서 “북소리 목숨을 재촉하는데/ 돌아보니 날은 저물었구나/ 황천에 주막이 없다 하니/ 오늘밤 뉘 집에 묵어갈꼬”라며 서러워했다. 하지만 이렇게 가든 저렇게 죽든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 다만 죽음을 미리 걱정하기에 앞서 오늘을 충실하게 사는 지혜가 더 절실할 따름이다. 지은이 원재훈은 “여기에 소개한 사람들은 죽기 전에 스스로 죽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다간 사람들”이라며 “죽기 전에 죽는 날, 그날이 바로 다시 태어나는 날이며 또 하나의 생일”이라고 적었다.(조용호 기자)

책에 덧붙인 '자전거 레이서' 김훈의 말: "원재훈이 모아놓은 '임종 자리의 말'들을 읽어보니 우리는 말 안 하고 살 수 없을 뿐 아니라, 말을 해야만 죽어지는 모양이다. 원재훈의 글은 옛 고승대덕의 죽음에서부터 대구 지하철 참사의 희생자에 이르기까지 죽는 순간의 말들을 두루 챙겨서 장관을 이루었다. 그 마지막 말들은 대부분 죽음을 사절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말을 데리고 죽음으로 건너갈 수는 없었고 말은 끝내 살아 있는 자들의 편이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좀더 빛을" 또는 "초록색으로 해줘" 또는 "매화 화분에 물을 주어라"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한들 그 빛과 초록과 매화는 산 자들의 것이다. 죽음은 인문화될 수 없는 자연현상이고, 공유할 수 없는 사생활인 것이다. 그래서 말은 산 자들의 몫으로 남는다. 그 마지막 말들이 살아가는 날들의 고난을 공정하게 해주고, 이제는 잃어버린 삶에 대한 경건성을 일깨운다. 죽는 자리의 마지막 말이 시작하는 날의 말이다."

그러니 좀더 사는 수밖에...

06. 0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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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2006-08-21 11:51   좋아요 0 | URL
오옷 역시 김훈의 필력은...

가끔 죽음에 대해 떠올립니다. 결혼하기 전에 가졌던 죽음에 대한 이미지와 상당히 다르지요. 이젠 두려움이 되었어요. 내 아이들이 성장하기까지라도 열심히 울타리가 되어 주고 싶은 소망과 두려움...

하이드 2006-08-21 12:14   좋아요 0 | URL
얼마전에 뉴요커에 실린 존 업다이크가 쓴 ' edward Said의 “On Late Style: Music and Literature Against the Grain” 에 관한 리뷰가 생각나네요.http://www.newyorker.com/critics/content/articles/060807crat_atlarge
예술가들의 말년 작품들에 대한 책이래요. 사이드가 죽기직전까지 콜롬비아에서 강의하던 내용이라고 하는데, 업다이크.의 리뷰만으로도 다 읽은 기분.이라지요. 책찾아볼 생각은 안나지만요. 관심있으면 읽어보시길. ^^

로쟈 2006-08-21 12:22   좋아요 0 | URL
비자림님/ <강산무진>이 전부 '죽음'에 관한 책인데요, 뭐.^^
하이드님/ 저도 리뷰만 읽겠습니다. '다 읽은 기분'이면 되는 거 아닌가요?^^
 

이번주 경향신문의 21세기 책 깊이 읽기는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1901-1991)의 <현대세계의 일상성>(1968)을 다루고 있다. 그 친숙한 '일상성'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보도록 한다.

 

 

 

 

경향신문(06. 08. 19) 로봇화된 일상…탈출구를 찾아라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 앞에서 느끼는 당혹스러움을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묻는 이가 없으면 알 듯하다. 하지만 막상 묻는 이에게 설명하려 들면 말문이 막히고 만다.” ‘일상’도 마찬가지다. 일상이란 너무 자명해서 굳이 장황한 설명이 필요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작 일상이 무엇인지 말해보라고 하면 어떨까. 너나 없이 손사래치며 뒤로 물러날 것이다.

-성긴 언어의 올로 일상을 붙잡으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거칠게나마 윤곽마저 그려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일상은 철로 만든 새장 같다. 새장 안은 온갖 자질구레한 물품들로 꽉 차 있다. 옷장, 냉장고, 침대, 주방기구, 장난감 따위의 물품 목록은 끝이 없다. 거기에서 줄거리 없는 인생들이 하품나는 나날을 견디고 있다. 일상은 지루하고 공허하며, 일상의 삶은 초라하고 지리멸렬하다. 권태와 환멸은 일상에 딸린 부록이다.

-일상이 오랫동안 방치되어 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상은 내동댕이쳐진 채 부패해왔다. 일상이 비로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였다. 보들레르는 현대 도시의 세속적 일상을 생생한 감각으로 묘파해냄으로써 최초의 모더니스트로 불렸다. 발터 베냐민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19세기 파리의 일상을 거대한 몽타주로 재현하려 했다. 비록 미완으로 그치고 말았지만, 현대적 이미지들의 백과사전이라 할 만했다(*여기에도 베냐민 지파 사람이 또 있군).



-현대의 일상에 대한 가장 방대하고 체계적인 분석과 성찰은 앙리 르페브르의 ‘현대세계의 일상성’을 기다려야 했다. 이 책은 현대의 일상을 치장하고 있는 가면을 벗겨내고, 그 밑에 감춰져 있는 현대 세계의 내면을 폭로한다.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나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는 르페브르의 저작에서 풍부한 영감을 얻었다. 1960년대 유럽 사회가 분석 대상이지만, 르페브르의 문제 의식은 시간의 풍화를 견뎌내며 여전히 유효하다.

-르페브르는 왜 하필이면 일상을 문제 삼았을까. 그가 보기에 일상의 견고성은 혁명의 가능성을 봉쇄해버렸다. 더구나 일상을 문제 삼지 않는 태도 자체가 문제였다. 일상을 변혁시키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게 르페브르의 문제 설정이었다. 그는 현대인을 ‘호모 코티디아누스’(Homo Quotidianus, 일상인)로 명명한다. 일상인은 로봇을 닮았다. 특정한 행위만을 반복하도록 프로그램화된 로봇 말이다.

-로봇화된 현대 일상인의 행태를 잘 관찰할 수 있는 곳은 소비의 영역이다. 르페브르는 현대 세계를 ‘소비 조작의 관료 사회’로 이름 붙인다. 현대인들은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상품을 소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바깥의 힘과 의지에 종속된다. 그 ‘바깥’은 자본가나 기술관료, 정치권력이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등이다. 소비 조작 사회에서는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보다 우월하고, 이미지나 기호가 상품의 본질을 집어삼킨다.

-르페브르는 소비사회의 전형적 표본으로 자동차를 꼽는다. 자동차의 쓸모는 이동수단이다. 현대인은 이동 목적으로만 자동차를 구입하지 않는다. 자동차에는 여러 겹의 이미지와 기호가 포개져 있다. 그것은 신분과 위엄, 안락과 힘, 모험과 속도의 상징이다. 소비자들은 자동차에 덧씌워진 상상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이다. 또한 자동차는 도로교통법으로 자신의 법을 일상에 강제한다. 이처럼 자동차는 현대인의 욕망을 비틀고 일상을 정복한다. 상품의 이미지를 조작하는 것은 광고의 마법이다.

-르페브르에 따르면 광고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상품의 언어다. 그것은 소비자를 유혹한다. 블루진은 영원한 젊음으로, 고급 주택은 부와 성공으로, 다이아몬드는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첨단 가전제품은 가정의 행복으로 변주되어 일상을 포위한다. 광고 이미지의 후광을 빌리지 않으면 상품은 빛을 잃는다. 오늘날 광고는 이미지의 독재자로 군림하며 지배 이데올로기를 설파한다.



-소비 조작 사회에서 벗어날 탈출구는 과연 있는가. 르페브르는 마르크스의 정신적 후예답게 유토피아주의자다. 그람시의 어법을 빌리면 ‘지성의 비관주의자, 의지의 낙관주의자’다. 르페브르의 기획은 영구 문화혁명이다. 문화혁명의 강령은 간결하다. “일상이 작품이 되게 하라!” 자신의 육체와 욕망, 시간을 타인에게 저당 잡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되찾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소외를 넘어 인간의 총체성을 회복하자는 선언이다(*강령만을 놓고 보자면, 나는 '르페브르주의자'에 속하겠다).

-르페브르의 어떤 명제들은 이미 진부해져버렸다. 상품의 이미지와 기호가 소비세계를 지배한다는 주장은 오늘날 문화분석의 상투어로 통한다. 장 보드리야르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은 르페브르의 통찰을 넘어섰다. 그것은 선구자의 운명이기도 하다. 일상의 냉혹성과 가능성을 발견한 것은 르페브르의 탁월한 안목이었다. 오늘날 일상의 성채는 더욱 견고해지고 아무도 혁명을 꿈꾸지 않는다(*거꾸로 혁명은 일상을 꿈꾸는가?). 그럼에도 인간의 총체성을 향한 열망은 결코 훼손되지 않는 가치로 남아 있다. 우리가 르페브르를 다시 읽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박천홍|도서평론가)

06. 08. 19.

P.S. 르페브르의 주저들이 더 소개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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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식민주의와 페미니즘의 대표적인 이론가이자 인도 출신의 미국대학 교수 가야트리 스피박(1942- )의 저서가 한권 더 번역되었다. <교육기계 안의 바깥에서>(갈무리, 2006)가 그것인데, 이전에 출간된 <포스트식민 이성비판>(1999), <다른 세상에서>(1987) 등을 포함하면 스피박의 알짜들은 챙길 수 있게 되었다(신간은 1993년에 나온 책으로 <다른 세상에서>와 함께 양대 주저로 꼽히는 <포스트식민이성 비판>보다 먼저 나온 책이다).

한겨레의 자투리 소개는 이렇다: "포스트식민주의와 페미니즘의 이론가로 알려진 가야트리 스피박은 난해한 저술로도 유명하다. 스피박의 사유체계를 국내에 소개해온 태혜숙 대구가톨릭대 교수가 <교육기계 안의 바깥에서>를 번역했다. 제목이 반영하듯 이 책은 제국주의 교육기관에 종사하는 지식인 전반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따져 묻는다. 그 질문은 인도출신으로 미국 명문대 교수로 재직중인 스피박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제국의 안에서 어떻게 (제국의) 바깥을 사고할 것인가’라는 화두가 이 책을 관통한다."

그리고 서울신문: "해체론적 마르크스주의적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서술한 문화연구서. 인도 출신으로 포스트식민주의 이론의 거장인 저자는 초국가적 문화연구를 통해 미국의 다원주의 또는 다문화주의가 유포하는 새로운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한다. 저자는 오늘의 지구촌 현실에서 영어를 매개로 한 문화접촉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만큼 무엇보다 번역의 필요성과 효과를 집중 조명하는 ‘번역의 정치’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비판의 정치학에서 이제 번역의 정치학 또는 협상의 정치학으로 바뀌어야 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하면, 이 책에 대한 우리의 접근은 스피박의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 될까? 예전에 소개한 바 있지만, 이미 <스피박 넘기>(앨피, 2005)도 출간돼 있고, 역자인 태혜숙 교수의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여이연, 2001)에도 스피박식 페미니즘을 소개는 논문들이 포함돼 있다. 가장 최근에 나온 얇은 책으로는 박종성 교수의 <탈식민주의에 대한 성찰>(살림, 2006)도 있으므로 스피박 읽기의 '초보'를 대신해도 되겠다. 그나저나 '번역의 정치학'과 관련한 주제라면 건너뛸 수도 없겠는데, 스피박 넘는 게 어디 또 쉬운 일인가...

06. 0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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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08-19 14:55   좋아요 0 | URL
스피박 넘기를 번역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어서, 이 책 어려워 보여요. 읽으면 어떨까요? 하니까, 읽지 말라고 하더라구요. 이해 못할 거라고. 저도 동의했어요ㅡ.ㅜ

로쟈 2006-08-19 15:15   좋아요 0 | URL
스피박도 동의할 겁니다.^^
 

필요 때문에 번역 문제에 관한 자료들을 검색하다가 작년 봄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발행하는 <기획회의> 18호(2005년 4월) 특집이 '번역출판의 오늘을 말한다'였다는 걸 알게 됐다. 특집기사들 중에서 한기호 소장의 글 '문제의 본질은 번역자다: 번역출판의 제도적 측면'을 옮겨온다.

 

 

 

 

-이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내내 나는 <아타 트롤>(창비, 1991)의 경험을 순간적으로 떠올렸다. 뛰어난 서정시인이자 정치풍자시의 대가 하인리히  하이네의 대표적 장편풍자시 <아타 트롤>과 12편의 시사시를 번역 수록한 이  책은 1991년에 시인 김남주의 번역으로  창비에서 출간됐다(*이 책은 현재 절판중이다). 당시 그 회사 영업책임자이던 나는 교정지에서 접한  번역문의 유려한 문장에 반해 <아타 트롤>에 대해 더 상세하게 알고 싶었다. 그래서 <아타 트롤>을 다룬 석사논문을 찾아 읽어보았는데 논문 속의 인용문은 교정지의 번역문과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석사논문 속의 인용문은 그냥 뜻이나 통하게 옮겨놓았다고나 할까? 내가 만약 그 인용문 수준의 글부터 읽었다면 과연 <아타 트롤>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게 되었을지, 책이 만약 그런 수준이었다면 책을 구해 읽었을지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오늘날 표면적으로는 번역출판의 비중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전체 발행종수 가운데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1995년 15%에서 2003년 29.1%로 2배 가까이 늘었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 만화와 아동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 두 분야를 제외하고는 역사 분야가 평균 성장률과 비슷하고 나머지는 모두 밑돌고  있다. 결국 출판시장의 성장에 비추어보면 질적으로 상당한 퇴보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동안 번역출판을 놓고 단순한 통계수치만으로 ‘상당한 양적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는 분석이 없지 않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속빈 강정’임을 알 수 있다.  

-이런 흐름은 2004년에도 어느 정도 유지됐다. 2004년에  번역서는 전체 발행종수 35만394종의 28.5%인 10만88종으로 2003년과 비슷하다. 만화(3108종)와 아동(2245종)을 합하면 여전히 번역서의 절반을 넘는다. 단지 아동은 늘어나고 만화가 줄어들었을 뿐이다.

 

 

 


-번역서의 번역 수준은 우리 출판의 아킬레스건이다. 한 마디로  앞에서 예를 든 석사학위논문 인용문 수준의 번역문을 그대로 담은 책들이 줄줄이  출간되고 있다. 영미문학연구회 번역평가사업단이 영미 문학 대표작 가운데 ‘친숙하게 읽혀온’ 작품의 변역 수준을  평가한 결과에 따르면 “영미문학의 번역은 양적인 풍요와 질적인 빈곤으로  요약될 수 있다. 대상 작품들의 번역서로 최종 검토 대상이 된 완역본은 총 573종인데 이중 추천할 만한 번역본은 모두 61종(11%)에 불과하다.

-대략 10권  중 한 권 정도가 믿고  읽을만한 번역본인 셈이다. 추천본이 없는 작품도 전체 작품의 3분의 1이 넘는다. 소설의 경우에는 추천본이 전체 번역본의 6%에 불과”했다. “비소설의  경우는 추천본 비율이  높으며(29%), 추천본의 종수가 가장 많은 것도 ‘햄릿’(10종)”이었지만 “검토본 가운데 반수 이상(54%ㅎ310종)이  표절본으로 그대로 베낀 것부터 짜집기, 윤문潤文까지 다양한 형태를 확인” (1) 할 수 있었다.

-여기서 표절의 책임은 대부분 출판사에 있다. 특히 잘 팔리는 책, 독자에게 친숙하게 읽혀온 문학서적의 경우에는 출판사가 기존에 출간된 책을 적당히 윤문해 중복 출판하는 경우가 성행했기 때문이다. 번역출판으로 꽤 명성을  날린 출판사들도 실제로 이런  행태를 자행하고 있음을 수없이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영미문학연구회의 평가결과는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왜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 책임은 먼저 번역가가 질 수밖에 없다. 미디어 평론가 변정수는 그 자신을 비롯해 수많은 편집자들이 “번역 텍스트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거의 ‘공역자’ 수준의 역할을 떠맡고 있다”고  지적한다. “명목상의 역자는 결과적으로 고작해야 초벌 번역의 수고를 해 주는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게 되고 편집자가 “사실상의 번역자 노릇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내 저작물에  빗대자면 거의 ‘섀도 라이터’에 해당될 정도의 역할”(2)을 하고 있는 셈이다.

-꼼꼼하게 공들인 번역으로 소문난 유명 역자들은 편집자가 거의 손을 볼 필요가 없는 완벽에 가까운 텍스트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더 이상 이야기할 것도 없겠지만 대부분은 편집자가 ‘공역자’에 준하는 역할을 하거나 심지어 거의 ‘재번역’을 해야 하는 수준의  번역문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편집자가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다. 사실상 대다수의 편집자는 원문대조도 하지 않고 오탈자나 잡아내는 수준의 교열에  머무른다. 그래서 전문편집자의 필요성이 절실하지만 그런  편집자들이라도 ‘교수’의 직함을 달고 있는 학자 번역자의 경우에는 십중팔구 재번역해야 하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교수들과 일하는 것을 매우 꺼린다.  

-학자들이 번역에서 그들만이 이해하는 용어로  그들만의 ‘언어게임’을 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앞에서 언급한 <아타 트롤> 수준의 번역보다 못한 번역 원고가 그대로 출판사로 들어오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럴 경우  편집자들은 ‘교수’가  직접 번역한  것이 아니라 ‘조교’나 다른 대행자들이 번역을 대신한 것으로 간주해버리는 것이 다반사다.  

-상황이 이런데도 편집자들이 ‘사실상의 번역자’ 노릇을 감수하면서 십중팔구 믿지 못하는 교수에게 매달리는 것은 ‘손을 볼 필요가 없는’ 번역가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유능한  몇몇 번역가들은 밀린 일이 많아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차선으로 선택하는 것이 전문번역회사다. 한 출판번역전문회사의  대표는 “국내 산업번역 규모가  1조원 대에 달하고 그리고 영상미디어 번역이 5천억 원, 출판번역시장이 5천억 원에 달한다”고 전망했는데 시장은 이렇게 크지만 양질의 번역을 빠르게  해줄 수 있는 번역가가 많지 않아 이런 업체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번역전문회사는 대부분  번역지망생과 출판사를 연결시켜주고  커미션을 챙기는 중간업자에 불과하다. 이 회사들은  보통 번역료의 30% 가까이를 챙긴다.  출판사가 지급번역을 요청할 경우에는 원고를 여러 사람에게  쪼개서 번역한 것을 모아 한두  사람이 죽 읽어가면서 획일성만 기하기 마련인데 이런  원고의 수준은 ‘눈 뜨고 봐주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전문번역회사들은 출판사와 번역자들이 만나는  것을 철저하게 차단해 번역자들이 편집자와 만나 번역의 질을 상승시키는 길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해 버리고 번역자가 교열을 볼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하는 병폐가 있다. 하지만 속도를 요하는 분야에서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출판사들까지 이런 전문번역회사를 애용하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더 많은 전문번역자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연히 번역료가 낮기 때문이다. 상위 출판사의 경우 영어는 3500-4000원, 일본어는 2500-3500원, 프랑스어나 독일어는 3500-4000원 수준이다. 물론 수준이 보장되는 전문번역가는 이보다  높은 경우도 있지만 실제로는 낮은 경우가 더 많다.  일본의 법인 또는 단체가 일본책의  한국어 번역료를 통상 10,000-15,000원 수준에서 지원하는 것과 비교하면  우리 번역료가 어느 수준인가를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다.

-더구나 지금의 번역료는 몇 년  전의 수준에 머문 것이어서 물가상승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갈수록 뒤쳐지고 있어 번역에 ‘목숨’을 거는 번역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최근 학술진흥재단 등에서 시행하고 있는 고전 번역 지원사업에서는 번역 원고료를 10,000원 안팎으로 책정하고 있다. 나도 신청중인 과제가 있긴 하지만 이 정도의 대우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번역에 나서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더구나 인세일 경우 한달 평균 100여 만원 정도의 보상을 기대하면서 번역에 '목숨' 걸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특히 전문영역에 속하는 책들을 맡아주어야 할 학자들은 번역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사명감에 충만하거나 특별한 인간관계가 아니면 일부러 나서려  들지 않는 것이다. 우선 번역료가 너무 싸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번역을 학문적  업적으로 여겨주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출판사는 고육책으로  번역료와 인세를 병행하는 정책을 쓰기도  한다. 기본 번역료는 보장하되 번역료 이상으로 책이 팔리는 경우에는 인세를 추가로 지급하는 방식인데 실제로는 추가 인세가 지급되는 경우가 흔치 않아 확실한 ‘유인책’이 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셜록 홈즈’ 시리즈의 사례처럼 인세로 계약한  대중서가 1백만 부나 팔려 평생의 고생을 보상할 수준의 인세가  나오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런  경우가 매우 드물기는 해도 이런 제도가 도입되면 번역자가 어느 정도 번역에 책임을 지려 들 것이다. 하지만 출판사는 기본 번역료를 감당하기도 어렵다.

-인문학, 철학, 과학 분야의 전문분야 출판사인 이제이북스는 지난 3년 동안 60권의 책을 펴냈지만 2쇄를 발행한 책이 단 2종에  불과하다고 밝히고 있다.(3)  이 출판사가  나름대로 번역에 매우  많은 공을  들여왔고 초판을 1000부 밖에 발행하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출판사의 출혈투자가 없이는 도저히 책 출간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제이북스의 경우는 며칠 전에 다룬 바 있다). 15,000원  정가의 책인 경우 1000부가 다 팔린다  해도 매출액은 1천만 원 내외다. 이 금액 모두가 번역료로  지급되어도 시원치 않을 텐데 여기에 제작비, 인건비, 일반관리비 등을 부담해야 하므로 출간 즉시 적자가 발생하는 일이  다반사니 대다수 출판인은 출판을 기피한다.

-번역료가 낮은 근본적인 원인을 출판사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책을 읽지 않는 독자를 탓해야 할까? 물론 탓해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독자들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독자들은 철학을 쉽게 풀어주고 독해가 가능한 책을  만들어주지 못하고 부실한 번역이 독자들을 떠나가게 만들었다는 이제이북스 전응주 사장의 뼈아픈 지적을 더 수용하려 들 것이다.

-결국 이 땅의 번역출판 부실은 어느 일방의 책임이라기보다는 구조적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내수시장이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시스템을  극복할 수 있는 사회제도적 후원시스템을 ‘억지로’라도 만들어야 한다. 그 점에 대해서는 선험적인 연구자들이 결론내린 바  있다.

-김선남(원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한 연구논문(4)에서 “전문 번역가의 부족, 낮은 번역료, 오역 및 중복 출판, 출판사의 과도한 저작권 확보 경쟁 등과 같은 출판사 내·외적인 문제”를 극복하고 번역출판이 활성화되기 위한 방안으로  전문번역인 양성 프로그램 개발, 번역활동 지원 단체의 확충, 번역 출판물 기획의 다양성 확보 등을 제시했다.

-이런 결론은 지난 수십 년간 내려졌고 물론 간헐적인 대응책은 있어왔지만 근원적인 대책은 세워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전문 번역인은 어떻게 양성할  것인가? 지원자만 모아놓고 교육만 시키면 해결이 될 것인가? 그보다는 전문적인 번역자가 전문편집자와 함께 일을 해가면서 번역의 질적 수준을 높여가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그래서 ‘연구공간 수유+너머’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주요 인문출판사와 공동작업을 하면서 번역학교를 따로 꾸리고 있는  것은 모범적인 사례가 된다. 이 단체는 이미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책을 여럿 내고 있으며 고전을 재해석한 ‘리라이팅’ 시리즈처럼 저작의 단계로도 올라서서 인문출판의 성공적인  모델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앞으로 이런 모임이 더욱 많아져야 할 것이다(*한데, 이 리라이팅 시리즈도 작년부터는 한 권의 책도 내지 못하고 있다).

 

 

 


-다음으로 출판시장이 갈수록 자본의 논리에 지배되는 상황에서 상업성이 부족하지만 꼭  필요한 번역출판이 이뤄지려면 공공적인  지원시스템이 본격적으로 가동되어야  한다. 국가나 기업에서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이 근원적으로 가동되어야  할 것이다. 비단 이것은 번역서뿐만이 아니라 출판 전반에 적용되는 것이지만 도서관의 기본적인 존립목적인 정보 접근 평등성을 위해 도서관 스스로가 양서를 다양하게 구비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공공도서관은 너무 ‘빈약’하다.

-따라서 소기의 성과를 빨리 이루려면 각급 학교도서관의 활성화가 시대적 소명이다. 학교도서관을 활성화하고 이를 지역 주민도 이용하는 기초생활문화공간으로 거듭나게 한 다음  공신력 있는 기구가 선정한 우수도서를 학교도서관이 의무적으로 구비할 수 있는  정책적·사회적 시스템을 갖추어 양서의 경우 5000-10,000부 정도가 소비될 수 있다면, 출판사들은 구태여 시류에 영합하는 책을 만들지  않고도 안정된 경영을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출판뿐만 아니라 기초학문과 교육이 사는 길이고 결국 국가가  경쟁력을 갖는 일이다. 우수한 번역서를 여기에서 제외시킬 이유가 없기에 번역출판도 자연스럽게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다. 정책당국자들은 예산타령만을 일삼지만 이런 일이 이뤄지지 않는 것은 예산이 없어서가 아니라 의지가 없어서일 뿐이다.

-다양성은 무척 중요하다. 그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전문성도 중요하다. 지금 구조에서는 번역출판을 통해 한 분야의 전문성을 갖기가 쉽지 않다. “어떤 약삭빠른 출판사가 입도선매식으로 저자권계약을 맺어놓은 다음”에 “자격 없는 역자들을 동원하여 오역·졸역본의 출판을 남발하는 경우”에는 “저작권을 보호함으로써  마구잡이 번역을 막겠다는 원래의 정신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역설적 결과”(5)가 수시로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물건이나 언어에는 반드시 그 배경에 주류와 계통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런 계통도에서 상위에 올라있는 책을 먼저 계약해놓고 책을 출간하지 않으면 하위에  해당하는 책을 펴낸 출판사는 고통만 겪을 확률이 높다. 이것은 원저작은 보지 못하고 비평서만 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상호 협조와 양해를 통해  바람직한 조정이 이뤄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상황이 매우 열악하지만 우리에게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다.  앞의 ‘연구공간 수유+너머’도 희망적인 사례지만 영미문학연구회가 분석한 책들이 출간된 같은 시기에도 “고전  번역에 가담한 새로운 세대 전문연구자들의 활약은 고무적이다. 또  초기에 나온 번역본이 이후 어떤 번역본보다 더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 경우도 적지 않아 우수한 번역진의 층이 얇다고 만은 할 수 없다. 더 좋은 번역환경이 마련되고, 다수의 독자들이 좋은 번역을 선별해  읽을 수 있다면 번역 풍토의 획기적인 개선도 기대”(6)할 수 있다는 지적도 우리에게 기대를 갖게 만든다. 따라서 바람직한 비평을 통해 좋은 책을 선별해주는  사회적 시스템이 다양하게 정착되는 일 또한 바람직한 번역출판이 이뤄지기 위한 필요조건이라 할 것이다.

(1)「번역 평가 왜 필요한가」<한국일보> 2004.2.16
(2)변정수,「번역 출판의 원숭이들」<기획회의> 8호 2004.11.5
(3)김현미,「우리말로, 철학하기, 출판으로 철학하기 - 이제이북스 전응주 사장」
   <기획회의>10호 2004.12.5
(4)김선남,「국내 번역 출판물의 현황과 화성화 방안 연구」<한국출판학연구> 제43호 2001
(5)한정숙,「학술서적 번역 이것이 문제다」<국민일보> 1996.8.12
(6)김영희, 같은 글

06. 0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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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8-18 03:49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

로쟈 2006-08-18 08:15   좋아요 0 | URL
제목에 오타가 났었네요. 번역가 ->번역자.

이네파벨 2006-08-18 10:45   좋아요 0 | URL
저도 퍼갑니다...
눈물날만큼 공감가는 이야기들이지만...제가 번역 시작한지 수년이 되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질게 없는 이야기들이어서.....갑갑합니다.

릴케 현상 2006-08-18 13:19   좋아요 0 | URL
아타 트롤이지 않나요?

열매 2006-08-18 13:39   좋아요 0 | URL
인문학술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곳이 바로 대학 출판부입니다. 서울대학이나 연세대학, 이화대학(*그나마 요즘은 뜸하지만) 등을 제외하고 고전 번역이나 학술서를 제대로 출판하는 곳이 어디 있었나 싶습니다. 성균관대의 경우 이런 대학 본연의 출판 임무보다 상업성을 고려한 기획으로 여타 출판사 뺨치더군요. 대학출판부라면 명색이 대학이 해야할 일부터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더군요. 한국엔 언제 일본의 호세이(法政)대학이나 켐브릿지, 옥스퍼드, 하버드 출판부같은 명성있는 출판부가 나올지...

로쟈 2006-08-18 14:11   좋아요 0 | URL
이네파벨님/ 아마도 수십 년은 걸리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자명한 산책님/ 수정했습니다.^^
열매님/ 결정적인 건 재정 문제겠지요. 요즘은 대학출판부 책들도 안 나갈 경우 심히 눈총을 받는다더군요(대학구성원들도 다들 경영마인드로 무장해가고 있는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