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장정일의 신간 <장정일의 공부>(랜덤하우스, 2006)에 대한 소개 페이퍼를 올리면서 인터뷰기사 한 꼭지를 옮겨놓았었는데, 내친 김에 북데일리에 실린 인터뷰 또한 옮겨놓는다. 대충 읽어보고 말 생각이었지만 이 인터뷰 기사의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저, 독서광 아닙니다, 다들 안 읽기 때문이죠."

 

 

 

 

장정일만큼 책을 읽는 건 아니지만 나도 책에 대해 아는 체를 많이 하다보니 간혹 엄청나게 책을 많이 읽는 것으로 오해받곤 한다. 그런 기대와는 반대로 평소에 나는 책을 너무 안 읽는다고 자책하며 사는 편이다(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투정하는 게 사실은 더 많지만). 마일리지도 쌓인 김에 이번에 <장정일의 공부>와 함께 몇 권의 책을 더 주문했는데(책은 이미 학교로 배달되었지만 아직 확인해보지 못했다) 분량상 <공부>를 제외하면 내가 빨리 완독할 수 있을 책은 <언어학과 정치>(역락, 2006) 정도이겠다.

 

 

 

 

거기에 현재 읽고 있거나 대출해놓은 책들이 10여권. 강의준비나 필요 때문에 읽어야 하는 책들이 또 두서없이 그만큼이다. 지난 주말부터 가방에 들어가 있는 책은 아이리스 장의 <역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미다스북스, 2006)와 김경주 시인의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중앙, 2006)이고, 집에 와서 잠시 펼쳐본  책이 <계몽의 변증법>(문예출판사, 1995), 그리고 엊그제부터 행방을 찾고 있는 책이 비릴리오의 <정보과학의 폭탄>(울력, 2002)이다(나는 국역본과 함께 러시아어본을 갖고 있는데, 최근에 영역본도 구했다).

 

 

 

 

전업작가라면 나름대로 책읽기에 질서를 부여해서 '로쟈의 공부'라도 내놓을 준비는 돼 있지만 장정일만큼 쌓아놓은 공덕이 없기에(내가 읽은 '장정일' 가운데 베스트 네 권이다. 나는 그의 <삼국지> 등을 읽지 않았다) 그럴 경우 생계를 책임질 수 없다. 그러니 울적하다. "다 읽으면 굶기 때문이죠." 더불어 아무리 부지런히 읽는다고 해도 이젠 책들을 다 읽을 수 없다. 그러니 막막하다. "다 읽을 수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말하건대, "저, 독서광 아닙니다!"

북데일리(06. 11. 20) "저, 독서광 아닙니다, 다들 안 읽기 때문이죠"

지난 2월. 중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소설가 장정일(45)이 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 초빙교수로 임용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학교 측은 “교육부 학력 규정상 장 씨를 전임교수로 임용할 수 없어 초빙교수로 채용했지만, 임기를 마치면 발탁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다.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로 음란물 비시에 휩싸여 구속되기도 했던 ‘화제의 작가’ 장정일. “나는 문학이 직업이 아니라면 구역질이 난다”라고 스물한 살 일기장에 그렇게 적었던 그는 시인도 됐고, 소설가도 됐고 교수까지 됐다. 모두 ‘책’ 덕분이다. 밤낮으로 읽은 책 이야기. 그가 쓴 6권의 <독서일기>는 독서광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전설적인’ 책이다. 책 전문 프로그램 ‘TV 책을 말하다’의 진행자로 발탁 되었을 때 그의 어눌한 말솜씨에 불만을 갖던 사람들도 “그럴 만하다”며 독서력만큼은 인정했다.

학교에 ‘덜’ 다닌 대신 ‘더 많이’ 읽은 장정일. 그가 <장정일의 공부>(이하 '공부')(랜덤하우스코리아. 2006)라는 책을 펴냈다. 이번에는 읽은 책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뾰족한 일침까지 던졌다. 관심분야는 달라졌지만 여전히 책에 미쳐있는 그를 간곡한 설득 끝에 ‘어렵게’ 만났다. 정면의 시선을 던지지 못하는 그의 수줍음 사이로 마흔 다섯 해의 기나긴 책의 역사가 사라졌다 피기를 수 없이 반복했다.

- 시인, 소설가로 살다가 직장인이 되신 소감이 궁금합니다.

“백수로 있는 것만 못 하죠. 작가는 24시간 365일이 자유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고, 학생들을 위해 내 삶을 쪼개야 하니까 작가가 낫지요”

- 그 좋은 자유를 포기한 것이나 나고 자란 대구를 떠나 서울 살이를 시작한 것이나 자신에게는 큰 변화일 텐데요. 대구와 서울을 비교해 보면 어떻습니까.

“서울은 재입성이에요. 90년도에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사 왔다가 96년도에 다시 대구로 내려갔죠. 그리고 10년 만에 올라 온 거에요. 대구와 서울을 굳이 비교하자면 도시와 지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 사회에서는 ‘은거’ 에 비할 수 있는 지방생활이라는 게 별 의미가 없어요. 인터넷, 신문. 아무것도 없는 ‘은거’가 불가능한 시대죠. 저는 젊은 작가들을 만나면 꼭 서울살이를 해보라고 해요.

사실, 대구에 가도 서울 생활하고 비슷하거든요. 그럴 바에는 대도시에서 부대끼며 살아보는 게 경험상 낫다는 거죠. 젊은 작가라면 특히, 대도시 생활을 겪어 봐야 해요. 촌으로 가겠다는 젊은 작가들한테는 나이 50, 60되서 가도 괜찮으니까 지금은 대도시에서 생활해 보라고 말해요. 대도시 문명과 호흡하면서 글감과 문젯거리 같은 것들을 만나봐야 해요. 경제적인 여유가 있다면 외국 생활도 좋은 경험이 될 거에요. 누구든 문명에 노출 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은거의 장점도 살리지 못할 바에야 중소도시 보다는 대도시에서 살아 보는 게 경험상 좋다는 거죠”

“지금은 민주주의 아닌, 과두제”

- <독서일기>와 <공부>의 공통점이 있다면 역시, ‘책’입니다. 책읽기라는 것은 마흔 다섯이 된 지금의 자신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 같습니다.

<독서일기>가 ‘책 속에 길이 있다’고 이야기 했다면 <공부>는 ‘책 속에는 길이 없고, 책과 사이사이에 난 길을 내가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 한 책입니다. 사실, 책은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못해요. 만약 길이 있다면 남이 만들어 놓은 길이겠죠. 길은 스스로 만드는 거에요. 텍스트를 가지고 콘텍스트 속에 스스로 길을 만드는 겁니다. <독서일기>는 책이 먼저 독후감이 뒤에 있는 책이지만 <공부>는 반대로 관심 있는 테마를 정한 후 관련된 책을 읽은 것 입니다. 책이 먼저가 아니라 뒤에 선택 된 거죠. 그게 가장 큰 차이점이에요. 책을 읽는 이유를 물으면 저는 늘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해 책을 읽는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교양이 모자란 사람이 아니라, 나쁜 시민이라는 뜻이에요. 사람들은 ‘공부’하면 지긋지긋하다고 하는데 너무 입시위주의 공부를 해서 그런 거고, 공부는 평생 함께 가야 할 좋은 친구입니다. <공부>는 나이 마흔 다섯 된 제가 공부라는 게 참 재미있다고 말하는 책이에요”

- '책 읽기를 통해 스스로 길을 만든다'는 말씀에서 ‘길’이 의미하는 것은 다른 텍스트로 옮겨 가는 길이 아니라 사회 안으로 들어가는 길 같습니다. '비행기의 1등석에 탈 수 있는 사람에게는 국경이 없지만 3등석 밖에 탈 수 없는 사람들에게 국경의 벽은 높다'며 현 사회를 ‘과두제’에 빗대는 등 사회를 향한 통렬한 비판도 쏟아 내셨는데요.

“지금은 민주주의 시대가 아닙니다. 이미, 과두제에 들어갔죠. 미국도 우리도 모두 마찬가지에요. 과두제란 특권층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모든 부와 권력을 나눠 갖는 시대죠. 프랑스 혁명 이후 세금 내는 사람들에게만 투표권이 주어졌잖아요. 지금이야 형식적으로 1인1표제가 시행되고 있지만 돈 있는 사람이 권력을 차지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선거비용을 많이 낸 사람이 당선확률이 높고, 돈 있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을 만들어 내고 결국 그들이 법을 만듭니다. 그러니 민주주의에 살고 있다는 생각은 큰 착각이죠. 그래서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겁니다. 책을 읽지 않으면 속게 되죠. 정치권력, 자본주의에 휘둘리기 쉬운 사람, 만만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면 책을 읽어야 합니다. 단돈 몇 천원만 사기 당해도 속았다고 분해하면서 책을 안 읽는 다는 건 문제죠. 엠마뉘엘 토드, 촘스키 모두 ‘책 읽는 능력이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말을 했습니다. 책읽기를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을 기르고 보다 철저히 기업과 정치를 감시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증인, 소수종파의 문제 아니다”

- 아직도 여호와의 증인을 믿고 있는지요. 본문에 보면 '학력이 중학교 졸업밖에 되지 않는 것은 여호와의 증인 신도로서 당시에 치러지던 고등학교의 군사훈련(교련)을 피하고자 진학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1만 명의 신도를 감옥에 보내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해온 사람은 여호와의 증인이 유일하다'고 밝히셨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사이비로 지탄 받아온 것. 대체복무는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특혜시비라고 지적한 개신교에 대해서도 분노를 표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입장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까?

“지금은 여호와의 증인이 아닙니다. 18세에 신앙을 버렸어요. 여호와의 증인 때문에 양심적 병역 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고요. 어느 종교든 간에 살생, 살인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겁니다. 우리나라 종교는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아요. 이는 한국 종교의 현 위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부분입니다. 신앙인이라면 ‘나는 양심에 의해 살인은 못하겠다’고 하고 ‘그러니까 양심적 병역대체를 하게 해다오’라는 문제의식을 갖는 게 당연 한 건데. 우리나라 종교는 그렇지가 않아요.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이 소수종파의 문제인 것처럼 보인 겁니다. 또 불합리 한 건 종교 안에도 계급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군대나 살인문제에 대해 평신도가 고민을 하면 감옥에 가고 성직자는 면죄가 된다는 거에요. 성직자라면 평신도를 위해 발언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그 고민에서 벗어나 있어요. 성직자라고 면죄 되어서는 안 되죠”

- 40년간 문학을 한 편도 읽지 않았다는 일본의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를 향해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한 동문 오에겐자부로에 대한 열등감을 표출한 것은 아닌지’라는 반문을 던지셨습니다. 문학을 읽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요. 인문, 교양 분야의 책들로 포진되어 있는 <공부>를 보면 스스로도 문학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다치바나 다카시와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최근 20년간 문학작품을 안 읽었다고 합니다. 다카시는 21세기 교양의 총체는 자연과학으로 넘어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문학은 늘 사회 현실과 조우했지만 어느 날 그게 “끊어졌다”고 말합니다. 일본 문학이 언젠가부터 자아나 내면도피로 방향전환을 했다는 거죠. 그래서 문학을 안 읽는다고 해요. <문학의 종언>에서 하는 얘기가 그런 겁니다. 작가들이 점점 사회와 괴리 될 때 문학도 독자와, 사회와 끊어진다는 거죠.

문학이 살아나려면 내면에서 벗어나 사회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그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옛날 시인, 소설가들에게 사회는 “여기 앉으세요”라며 자리를 마련해 줬습니다. 그건 문학하는 사람들에게 “당신 말을 듣고 싶다”는 뜻이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아요. 그건 작가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작가도 한국사회에 대해서 발언하지 않죠. 이렇게 사회에서는 멀어지고 내면 도피나 자아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니까 ‘미래파’라는 시가 나오는 겁니다. 작가들도 내면 도피에서 벗어나서 사회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저는 종종, 작가들은 ‘야반도주’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야반도주’는 내면 도피 문학을 말합니다. 작가는 사회에 빚이 많습니다. 그러니, 빚지고 도망가서는 안 된다는 뜻이죠”

“책은 반드시 도서관에서 읽은 후 구입”

-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다는 대목을 읽었습니다. 아무리 빌려 읽는다 해도 워낙 오래 된 책탐이니 모은 분량이 엄청나겠습니다.

“도서관에서 자주 빌려 읽습니다. 책은 꼭 도서관에서 읽어보고 사요. 신간은 도서관에 늦게 도착하기 때문에 3달 정도 늦게 사게 되지만 그래도 읽어 보고 삽니다. 이런 구매법을 권해주고 싶습니다. 도서관, 출판계 모두를 활성화 시킬 수 있는 방법이니까요. 소장권수는 그렇게 많지 않아요. 5년 전에 중학교 때부터 모았던 책을 헌책방에 모두 내다 버렸거든요. ‘나는 왜 이렇게 살까’라는 자책에서 벗어나고 싶었거든요. 그건 아마 모든 수집광, 마니아들이 한번쯤 겪는 관문일 거예요. 다 내다 버리고 ‘재생의 길’을 걸어보고 싶었다는 생각을 한 거죠.

전에 집에 쌀이 떨어졌는데 한 선배가 라면 사라고 돈 3만원을 줬어요. 그런 선배를 참 좋아 하는데 “지금 무슨 글 써?”라고 묻는 선배보다 “너 요새 먹고는 사나? 돈은 있나?”라고 묻는 선배가 정말 좋은 선배에요. 글이야 다 알아서 쓰니까. 아무튼 그 선배가 준 돈 3만원으로 쌀을 안사고 교보문고 가서 책을 사버렸죠. 그러면서 자책했어요. “나 정말 왜 이러고 살까” 결혼기념일에 아내 선물 사줄 돈으로 책 사버리고. 그러면서도 멈출 수가 없는 거예요. 귀한 책도 많았고 도서관이 안 부러울 만큼 갖고 있었는데 그런 내가 싫어서 다 갖다 버렸어요. 결국 재생의 길을 걷지 못한 거죠. 지금 다시 사 모으고 있으니까“

- 아직은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으니 저는 아직 그 수준이 되려면 먼 것 같습니다. 책 읽기 전에 손을 씻는다고 들었는데요. 다른 특별한 버릇 같은 것이 있나요. 접는다거나 줄을 친다거나 포스트잇을 붙인다거나....

“그런 시기가 마니아들에게는 꼭 한 번씩 온다니까요.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지만...(웃음) 시기야 다 다르겠죠. 책은 사면 커버부터 버려요. 책 읽는데 방해가 되거든요. 책은 이방 저 방에 두고 오가며 읽어요. 한 가지 테마를 정해 놓고 10권 정도를 동시에 읽는 편입니다. 그래야 시너지가 생기거든요. 관심 있는 싶은 주제는 그렇게 접근해요. 접거나 줄치지는 않아요. 읽으면서 파악하려고 노력해야지 줄을 치거나 포스트잇을 붙이면 거기에 묶이죠. 두 번, 세 번 다시 읽더라도 그건 좋은 독서법이 아니에요”

- 독서광들이 정말 어려워하는 질문이지만, 빼놓고 싶지 않은 질문입니다. 자신에게 가장 큰 감동을 준책이 있다면.

“책 많이 읽은 사람들은 그 답을 뽑아 낼 수가 없어요. 그래도 말하라면 카프카에요. 젊은 시절 무척 좋아했죠. 최근에 읽은 책 중에는 엠마뉘엘 토드의 <제국의 몰락>을 권해주고 싶고....또....아! KBS 박성래 기자가 쓴 <레오 스트라우스>(김영사. 2005)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에요. 제가 한겨레21에 그 책 서평을 쓰면서 “이 책을 읽거나 레오 스트라우스에 대해 아는 것은 독도를 얻는 것과 똑 같다”고 했어요. 레오 스트라우스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합니다. 그가 쓴 <마키아벨리>(구운몽. 2006)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에요”

 

 

 

 

- 소설 집필 계획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공부>를 바탕으로 2003년 대선 이후의 한국 풍속을 다루는 이야기를 쓸 예정입니다”

- 시인으로 데뷔해 교수의 자리에 오기까지 글쟁이로, 독서광으로 20년을 보내셨습니다. 꿈을 이룬 지난 시간 동안 행복했나요.

저는 독서광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너무 안 읽으니까 그런 말을 듣는 것뿐이죠.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한 달에 10권 읽는 건 기본 아닌가요. 저는 조금 더 읽었을 뿐이에요. 모두가 그렇게 읽었다면 제가 독서광이 될 이유가 없었겠죠. 행복요? 음....행복했죠. 지금도 행복하고. 정규교육을 못 받은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는데 그걸 긍정적인 방향으로 활용했어요. 명문대를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땄다면 세상을 뀄다는 자신감에 아마 책을 안 읽었을 거예요. 조금 배웠기에 많이 읽어야 했고, 덕분에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언제나, 행복했습니다”(김민영 기자)

06. 11. 20.

P.S. 결론은 이렇다. "기본을 갖추자!"

P.S.2. 생각이 난 김에 장정일의 시 '삼중당문고'도 다시 읽어보록 한다. '정규교육'을 못 받은 그에게 삼중당문고는 그의 '학교'였고 '교사'였으며 또한 '친구'였으리라.

삼중당문고

열 다섯 살,
하면 금세 떠오르는 삼중당 문고
150원 했던 삼중당 문고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두터운 교과서 사이에 끼워
읽었던 삼중당 문고
특히 수학시간마다 꺼내 읽은 아슬한 삼중당 문고
위장병에 걸려 1년간 휴학할 때 암포젤 엠을 먹으며
읽은 삼중당 문고
개미가 사과껍질에 들러붙듯 천천히 핥아먹은 삼중당문고
간행목록표에 붉은 연필로 읽은 것과 잃지 않은 것을
표시했던 삼중당 문고
경제개발 몇 개년 식으로 읽어 간 삼중당 문고
급우들이 신기해 하는 것을 으쓱거리며 읽었던 삼중당문고
표지에 현대미술 작품을 많이 사용한 삼중당 문고
깨알같이 작은 활자의 삼중당 문고
검은 중학교 교복 호주머니에 꼭 들어맞던 삼중당 문고
쉬는 시간 10분마다 속독으로 읽어내려 간 삼중당 문고
방학중에 쌓아 놓고 읽었던 삼중당 문고
일주일에 세 번 여호와의 증인 집회에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는다고 교장실에 불리어가,
퇴학시키겠다던 엄포를 듣고 와서 펼친 삼중당 문고
교련문제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을 때 곁에 있던 삼중당 문고
건달이 되어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와 쓰다듬던 삼중당문고
용돈을 가지고 대구에 갈 때마다 무더기로 사 온 삼중당 문고
책장에 빼곡히 꽂힌 삼중당 문고
싸움질을 하고 피에 묻은 칼을 씻고 나서 뛰는 가슴으로
읽은 삼중당 문고
처음 파출소에 갔다왔을 때, 모두 불태우겠다고 어머니가
마당에 팽개친 삼중당 문고
흙 묻은 채로 등산배낭에 처넣어 친구집에 숨겨둔 삼중당 문고
소년원에 수감되어 다 읽지 못한 채 두고 온 때문에
안타까왔던 삼중당 문고
어머니께 차입해 달래서 읽은 삼중당 문고
고참들의 눈치보며 읽은 삼중당 문고
빳다맞은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읽은 삼중당 문고
소년원 문을 나서며 옆구리에 수북이 끼고 나온 삼중당문고
머리칼이 길어질 때까지 골방에 틀어박혀 읽은 삼중당 문고
삼성전자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문흥서림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레코드점 차려놓고 사장이 되어 읽은 삼중당 문고
고등학교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고시공부 때려치우고 읽은 삼중당 문고
시공부를 하면서 읽은 삼중당 문고
데뷔하고 읽은 삼중당 문고
시영물물교환센터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박기영형과 2인 시집을 내고 읽은 삼중당 문고
계대 불문과 용숙이와 연애하며 잊지 않은 삼중당 문고
쫄랑쫄랑 그녀의 강의실로 쫓아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여관 가서 읽은 삼중당 문고
아침에 여관에서 나와 짜장면집 식탁 위에 올라 앉던 삼중당 문고
앞산 공원 무궁화 휴게실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파란만장한 삼중당 문고
너무 오래되어 곰팡내를 풍기는 삼중당 문고
어느덧 이 작은 책은 이스트를 넣은 빵같이 커다랗게 부풀어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네
집채만해진 삼중당 문고
공룡같이 기괴한 삼중당 문고
우주같이 신비로운 삼중당 문고
그러나 나 죽으면
시커먼 뱃대기 속에 든 바람 모두 빠져나가고
졸아드는 풍선같이 작아져
삼중당 문고만한 관 속에 들어가
붉은 흙 뒤집어쓰고 평안한 무덤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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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6-11-21 03:57   좋아요 0 | URL
로쟈님, '다 읽으면 굶기 때문'이라... 가장 현실적인 답이네요.
전 '다 읽으면 폐인 되기 때문' 을 생각했었는데...

기인 2006-11-21 07:03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

라주미힌 2006-11-21 09:05   좋아요 0 | URL
대단하고 흥미롭네요.
요즘 레오스트라우스 읽고 있는데, 정말 재미있습니다.

비로그인 2006-11-21 10:05   좋아요 0 | URL
장정일씨가 언젠가 말했지요.
"동사무소에 취직하여 퇴근후 맘편히 책만 읽으며 살고싶다"
책을 많이 좋아하는 분인가 합니다.


로쟈 2006-11-21 11:45   좋아요 0 | URL
가을산님/ 아마 굶기 이전에 쫓겨날 거 같습니다.^^
기인님/ 출근하셔야죠!
라주미힌님/ 레오스트라우스의 책은 저도 소개만 하고 들춰보진 않았는데 읽어볼 마음이 드네요.
hansa님/ 요즘은 9급도 쉽지 않다지요...

뽀르르 2008-08-15 14:40   좋아요 0 | URL
장정일씨 검색하다 읽어보고 글 남깁니다.
집에도 빛 바랜 누런색의 삼중당문고가 몇몇 보이네요.
단어 단어 한자로 쓰여진게 많아서 편히 읽을수는 없지만
작은 크기는 정말 매력적이네요. 그리고 의외로 세로 인쇄 읽기가 부담스럽지 않네요.

거의 매일 저공비행에 들어와 독서 지침으로 참고 하고 있습니다.
 

자기계발서 붐과 심리학 열풍이 최근 가장 눈에 띄는 출판 트렌드로 자리잡은 게 아닌가 싶다(그러니까 이건 2006년 출판사회학의 중요한 주제이다). 한해를 정리하기엔 조금 이른 감도 있지만, 이러한 트렌드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시류와 무관하게)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일단은 참고자료가 될 만한 기사들을 모아놓는다.

 

북데일리(06. 11. 16) 자기계발서를 위한 변명

우리는 흔히 문학을 경외의 대상으로 본다. 그리고 인문학은 어렵고 실생활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대체로 외면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계발 도서들이 베스트셀러 수위에 오르는 것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낸다. 충분히 공감 가는 말이다. 기초학문의 기반 없이 응용학문의 발전이 있을 수 없듯이 인문학의 토대 없이 수준 높은 문화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모든 문학과 인문학 서적들이 외면 받지는 않듯이 모든 자기계발 도서들이 각광 받지는 않는다.

기초적인 교양이 부족한 시대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바뀌고, 자기관리를 통해 자신을 수양을 할 수 있는 계기를 주고, 동기 부여를 하게 하는 '자기계발' 도서에 대해 너무 인색한 평가를 하는 것은 아닌가. 자기계발 도서로 분류되는 책들은 비슷비슷한 내용들을 이리저리 다른 색깔로 편집하고, 누가 말하느냐 등의 차이만 있을 수도 있다. 제목만 다를 뿐 얘기하는 것들은 다들 별 차이가 없는 '말들의 향연'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독자들이 그런 책을 찾는 이유는 제도권 교육에서 배우지 못한 삶에 대한 태도와 자기 자신에 대한 경영 등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식에 비해 삶의 지혜를 얻는 것에 무지한 경우가 많다. 현대사회 이전까지만 해도 이런 것들은 소위 '가정교육'을 통해 부모로부터, 대가족 생활을 통해 습득하고, '고전'들을 통해서 배웠지만 이제 그 역할을 '자기계발' 도서가 대신하는 것은 아닐까?

늘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전통과 고전도 꼭 필요하지만, 지금 현재의 현실을 다룬 실용서들도 필요하다. 실용서적에 대한 천대는 조선시대에 경학(유교 경전)만 중시하고, 실학(잡학)을 천시하던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또 현대사회는 복잡한 생활만큼이나 챙겨야 하고 기본적으로 알아두어야 할 것들 투성이다.

학문의 근간인 인문학의 중흥 못지 않게 실용서적에 대한 정당한 권리 찾기도 중요하다. 더이상 '처세서'라는 부정적인 인식으로 자기계발, 실용서적에 대한 서자 취급은 그래서 온당하지 않은 처사다. 개인적으로 <가슴 두근거리는 삶을 살아라>(시대의 창. 2004)는 책을 보고 정작 내가 하고 싶은 건 무엇인지, 행복한 일을 하는 건 죄의식을 가질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행복한 이기주의자>(21세기북스. 2006)는 이런 나의 마음을 더 튼튼하게 굳히게 하고, 더 큰 용기를 준 책이다. 이 책은 비슷한 내용을 말하지만, 말하는 방식이나 받아들여지는 느낌이 또 다르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스타일이 있듯이 자신에게 맞는 상품을 고르면 된다.

책도 이미지 상품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소비하는 제품 중에 디자인을 고려하지 않는 제품이 있는가? TV나 MP3, 문구, 어느 회사 제품이든 성능의 차이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지식상품인 책도 결코 다르지 않다. 예술영화만 영화가 아니듯 같은 메시지라도 어떻게 풀어가고, 설득하고 표현해 내느냐에 따라 A급 영화가 되기도 하고, B급 영화가 되기도 한다. 어떤 상품을 만드는 회사가 소비자가 자신들의 물건을 구매하지 않는다고 소비자를 비난하는가? 소비자가 원하는 책, 독자들이 찾는 책에 대한 고민은 진정으로 했던가?

책도 이젠 어렵고 난해한 책은 좋은 것이고,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책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거두어야 한다. 인문학이 더 낮게, 더 쉽게 독자들에게 다가가야 그 가치를 발견할 것이다. 지식와 학문의 성채를 높이 쌓아 위세를 보일 게 아니라, 함께 논의하고 즐길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어야 한다. 빵을 먹는 사람들에게도 수준이 있다. 앙코 있는 빵이 맛있다는 사람은 빵에 관한 한 초보자고, 앙코 없이 달지도 않고, 그윽한 뒷맛을 아는 사람이 고급 빵을 먹을 줄 아는 소비자이듯이 독서에도 수준이 있다. 스토리는 별 상관도 없는 액션영화를 좋아하면서 영화 보는 재미를 붙이듯이 처음엔 다들 그렇게 시작한다. 그렇게 차츰차츰 영화 보는 눈이 생겨 내용이 심오한 영화로 넘어가듯이 독서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사부'를 만난다는 건 정말 삶에 있어서 한 줄기 '태양'이다. 역할 모델을 가진다는 건 내게 있어 확고한 가치관을 갖는 것 이상이다. 책은 그런 점에서 나를 수양하게 하는 전범이기도 하지만, 늘 나를 게으르지 않게 하고, 깨어 있게 하는 활력소다. 그리고 그런 책들 중에서 자기계발 도서로 분류되는 책들이 나에겐 수위를 차지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고급 인문학을 즐기지 못하는 질 낮은 독자라는 혐의를 씌워도 어쩔 수 없다.(신기수 시민기자)

한겨레(06. 11. 03) 행복찾는 언니들의 ‘눈칫밥’ 해결

행복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 행복만 찾는다면 이기주의자라는 소리를 듣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21세기북스에서 낸 <행복한 이기주의자>는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들의 불안을 정면으로 찌르고 들어간 책이다.

이른바 ‘자기계발서’는 미국 시장과 국내 시장이 짧은 시차를 두고 연동하는 분야다.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면 거의 즉각 한국에서도 번역돼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다. 그런 점에서 보면 <행복한 이기주의자>는 예외에 속한다. 미국에서 출간된 지 20년이나 된 이 분야의 고전이기 때문이다. 20년이면 자기계발서 분야에선 거의 선사시대에 속한다고 할 터인데, 2000년대 한국에서 싱싱한 현재형으로 통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이 책은 전 세계에서 1500만부 가까이 팔렸다고 한다. 국내에서 지난 4월 말에 출간돼 15만부 넘게 독자 손에 들어갔다. 초대형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 독자의 마음을 잔잔히 그리고 단단히 사로잡은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목의 호소력을 제쳐 놓으면 이 책은 우선 디자인이 눈에 띈다. 형광빛이 도는 짙은 분홍으로 표지를 덮은 것은 이전의 자기계발서에서는 흔치 않은 시도다. 인터넷서점 예스24에 서평을 올린 한 독자(아이디 do8633)는 “올해 읽은 책 중 가장 훌륭한 편집 디자인”이라고 평가했다. 캘리그래퍼 강병인씨가 손으로 쓴 제목 글씨도 독자의 시선을 자극한다. 강병인씨는 전통술 ‘산사춘’의 글씨를 쓴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21세기북스에서 그의 글씨를 채택한 것이 선도를 높인 것으로 보인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도 시원시원한 필선이 이 책이 전하려는 행복의 이미지와 맞아 떨어진 듯하다. 이 책의 출간 이후로 여러 종의 책에서 강병인씨의 글씨가 제목으로 등장했다. 디자인의 흐름을 주도한 책이 된 것이다.

책의 내용은 사회생활에서 좌우의 눈치를 봐야 하는 젊은 세대의 고민을 풀어준다. 특히 사회적 약자의 처지에 놓여 자신의 소망이나 욕망을 차압당하기 쉬운 젊은 여성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한다. 책을 기획한 21세기북스 류혜정씨는 “독자의 70% 정도가 여성이고, 그 중에서도 20~30대 여성이 주요 독자층을 이룬다”고 밝혔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행복을 찾아 누리고 싶은데, 그렇게 살면 욕먹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덜어주고 있는 것이다.

지은이 웨인 다이어는 심리학자로서 임상심리를 통해 터득한 ‘행복 비법’을 독자에게 털어놓는다. 그가 강조하는 요점은 ‘합리적 개인주의자’인데, 그것은 ‘저밖에 모르는 에고이스트’와는 다른 사람이다. 남들이 뭐라 하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자기답게 삶으로써 자신의 행복도 얻고 주위에 그 행복을 나누어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행복 쟁취 전략은 이렇다. 1.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말라. 2. 자신에게 붙어 있는 꼬리표를 떼라. 3. 자책도 걱정도 하지 말라. 4. 미지의 세계를 즐겨라. 5. 의무에 끌려다니지 말라. 6.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말라. 7. 화에 휩쓸리지 말라.

지은이의 조언 가운데 특히 이채로운 것이 ‘정의의 덫을 피하라’이다. 지은이는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단언한다. 정의가 중요하지 않다라는 뜻이 아니라, 내가 받은 부당함이나 불공평에 대한 분노로 괴로워하기보다는 내 마음을 다잡음으로써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메시지다. 행복한 이기주의자의 전형적인 태도를 지은이는 이렇게 요약한다.

나의 가치는 다른 사람에 의해 검증될 수 없다. 내가 소중한 이유는 내가 그렇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의 가치를 구하려 든다면 그건 다른 사람의 가치가 될 뿐이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연연해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너무도 열심히 살아가는 나머지 주위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아차릴 여유가 없다.”

한겨레(06. 11. 10) 심리학 '빅뱅'

“무엇에 기대 살아야 하는지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 세상이 됐습니다. 이제는 삶의 근거를 저마다 자기 내부에서 찾아야 합니다. 자기의 삶, 자기의 사랑의 서사를 스스로 써야 하는 때가 된 거죠. 자기 정체성을 다시 세우는 데 심리학만큼 좋은 길잡이가 있을까요?”

심리치료에 관심이 많은 작가 ㄱ씨는 심리학에 보통사람들의 흥미가 커지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연인관계, 부부 관계, 부모-자식 관계를 비롯한 수많은 인간관계의 숲 속에 외로운 나그네처럼 떨어져 있는 상황인데, 날은 어두워지고 길은 보이지 않는다. 각자 나그네가 된 사람들은 혼돈 속에서 갈팡질팡한다. 이럴 때 심리학이 등불 구실을 해준다는 것이다.

심리학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인터넷서점 ‘예스24’ 검색창에서 ‘심리학’으로 검색하면 무려 900종 가까운 책이 뜬다. 행복·공감·욕망·만족·성격 따위 수많은 주제어 뒤에 ‘심리학’이 따라붙은 책들이 사흘이 멀다 하고 출간된다. 가히 심리학의 시대다. 심리학 책들이 출판 시장의 흐름을 형성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1990년대에 한 차례 출간됐고 2002년 개정판이 나온 <설득의 심리학>(로버트 치알디니 지음, 21세기북스 펴냄)은 지금까지 수십만 부가 팔렸다. 그러나 이 책은 엄밀히 말하면 영업 기술을 알려주는 책에 가깝다. 타인 혹은 고객의 심리를 정확히 읽어냄으로써 판매 목표를 달성하려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실용서인 셈이다.

심리학 책의 최근 흐름에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은 관심의 방향이 ‘나’로 돌아섰다는 데 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엿보는 눈치의 심리학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보는 자기 분석 심리학이 사람들의 관심사가 된 것이다.

‘나’를 주목한 전환점 <사람 풍경>

<나르시시즘의 심리학>을 펴낸 교양인 출판사의 이승희 편집집은 “책을 읽은 사람들이 자기 블로그에 올린 글을 읽어보니 대다수가 ‘나를 알고 싶어 이 책을 샀다’고 쓴 게 의외였다”고 말했다. 타인의 심리가 아니라 자기의 심리가 1차적 관심사인 셈이다. <미친 뇌가 나를 움직인다>를 낸 사이 출판사 권선희 대표도 같은 말을 한다.

“책을 내기 전에 시장조사를 했는데, 대형서점 심리학 코너를 찾는 독자들이 하나같이 책의 내용을 꼼꼼히 살펴봍는 거예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호기심 차원을 넘어 나를 제대로 알아봐야겠다는 진지한 태도가 잡히더라고요. ‘이거 내 얘긴데’ 느낄 때 책을 사는 거죠. 그래서 일부러 ‘나’를 넣어 책 제목을 지었습니다.”

<미친 뇌가 나를 움직인다>는 지난 7월에 나와 지금까지 7천부 정도가 팔렸다. 가볍지 않은 내용인 걸 감안하면 만만찮은 부수다. 심리학 책 흐름을 ‘자기’로 돌린 상징적 계기가 된 책으로 소설가 김형경씨의 <사람 풍경>(예담 펴냄)을 꼽는 이들이 많다. ‘심리 여행 에세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지은이가 자기 자신의 심리를 알아가는 과정을 홀로 떠난 세계 여행과 겹쳐놓음으로써 설득력 있게 읽힌다. 여행중에 만난 사람들의 풍경이 곧 자기 안에 펼쳐진 내면의 풍경임을 이 책은 알려준다. 2004년 12월에 초판 발간 후 5만부 남짓 나간 이 책은 지난달 출판사를 바꾸고 책표지도 재단장해 새로 나온 뒤 1만4천부 정도가 더 나갔다.

최근에 나온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씨가 쓴 <관계의 재구성>(궁리 펴냄)도 ‘관계의 가시에 찔려 휘청거리는 내 마음’을 이해하고 치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사람 풍경>과 비슷한 노선에 서 있다. 다만 <사람 풍경>이 여행을 소재로 했다면, 이 책은 영화를 소재로 했다는 점이 다르다.

심리학에 관한 관심이 진지해지면서 처세서의 심리 실용서와는 무게가 다른 책들도 속속 출간되고 있다. 지난해 7월 나온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로렌 슬레이터 지음, 에코의서재 펴냄)는 미국에서 발달한 실험심리학 속으로 직진해 들어간다. 행동주의 심리학 창시자 버러스 프레데릭 스키너의 심리학을 비롯해 10가지 심리 실험을 흥미로운 이야기체로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출간 이후 4만부나 팔렸다. 비슷한 시기에 북폴리오 출판사에서 나온 <유혹의 심리학>(파트리크 르무안 지음)도 그리 만만한 책이 아니다. 그런데도 1만5천부 가량 팔렸다. 내용만 좋으면 사서 읽는다는 독자군이 형성된 셈이다.

북폴리오는 <유혹의 심리학> 성공에 힘입어 아예 ‘마인드북스’라는 심리 시리즈를 세우고 <욕망의 심리학> <마음의 치유>를 잇따라 펴냈다. 이 시리즈의 하나로 최근에 나온 책이 <여자의 심리학>이다. 나르시시즘 문제 가운데 특히 ‘여성의 나르시시즘’에 초점을 맞춘 이 책은 화려함과 초라함, 자주성과 의존성 사이를 극단적으로 오가는 ‘자기애적 인격장애’ 여성들의 자기 진단과 자기 치유를 돕는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성적 나르시시즘에 빠진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자립과 의존이라는 두 개의 대조적인 행동양식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극단적인 방법으로 그 딜레마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즉 자기 정체성을 상실할 정도로 남에게 의존하거나, 타인의 도움을 일절 거부하면서 지나치게 자주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모 아니면 도’라는 식의 이런 해결방식은 이들의 삶 전체를 관통한다.”

사회과학의 시대 가니 심리학이…

이 책은 나르시시스트 여성들의 고통과 극복을 보여줌으로써 같은 장애로 힘들어하는 여성들에게 ‘마음의 길찾기’ 를 함께 해보자고 권유한다. 책의 부제도 그래서 ‘자신감과 열등감 사이에서 방황하는 당신을 위한 심리분석’이다.

박미라(한겨레문화센터 ‘치유 글쓰기’ 진행자·전 <이프> 편집장)씨는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다보니 사람들이 심리적 고통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부모 세대는 ‘가족 부양’이라는 지상과제 앞에서 목숨 걸고 돈만 벌었는데, 그 거친 삶이 자식 세대의 내면에 상처를 안겼고, 그 결과로 자기 마음을 알고 다스리는 데 관심이 커졌다는 것이다.

지난 시대가 사회과학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심리학은 시대라고 해야 할 것 같아요. 고통의 원인을 구조적 불합리에서 찾았던 것인데, 이제는 내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치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구조적 고통은 그것대로 극복해야 하지만, 그 구조를 바꾸는 것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죠. 저마다 마음이 평화로워지면 그만큼 세상을 개선하는 일도 잘 할 수 있겠죠.”(고명섭 기자)

06.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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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11-17 12:43   좋아요 0 | URL
'베스트 트렌드'라고 해야겠군요(제가 기억하는 기점은 류시화의 책들입니다). 그렇다면, 최근의 경향은 새로운 '공세국면'인가 봅니다...

가을산 2006-11-17 13:39   좋아요 0 | URL
서점에 가보면 신간 서적매대에 갈 수록 많은 면적을 차지해 가는 자기계발서, 부자되기 책들 보면 심란해요.

비로그인 2006-11-18 14:53   좋아요 0 | URL
행복한 이기주의자는 다른 명칭으로 오래전 출간된 적이 있었지요..
워낙 번역이 엉망이라서 독자가 재해석 해야할 지경이었는데..
이번 책은 좀 낫더군요. 괜찮은 책입니다.

내가 견지하는 삶의 양상이, 또는 아이덴티티가 크게 빗나간 것은 아니라는
안도 감을 주는 책.. 자기계발서


로쟈 2006-11-18 23:57   좋아요 0 | URL
저는 성격이 좀 고약해서인지 저를 '불안하게' 만드는 책들을 더 좋아합니다.^^
 

한국일보의 '이재현의 가상인터뷰' 코너에서 '헨리 조지'편을 읽었다. 미국의 저명한 이 사회사상가가 인터뷰에 등장하게 된 건 최근 국가적 이슈가 되고 있는 부동산 정책(실패) 때문이겠다. 필자의 순발력을 높이 살 수밖에 없는데, 비록 대담이라기보다는 '독백'에 가깝지만(헨리 조지가 '우리'라고 말할 때 '우리'는 누구인지?) 일독할 만하다. 더불어, '시장친화적 토지공개념 도입'이라는 '제3의 길'(?)에 대해서 한번 검토해봄 직하다(개헌까지 고려해야 한다면 상당한 '견적'의 일이긴 하지만).

한국일보(06. 11. 14) "시장친화적 토지공개념 도입이 해결책"

이재현(이하 현) 노무현 정권의 부동산 정책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대통령이 부동산 투기는 꼭 잡겠다고 여러 번 단언했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돼버렸습니다. 저는, 낙향하면 고향 시골집에 가서 살겠노라는 대통령의 말을 진심으로 믿는 편이라 참여정부 부동산 정책의 실패를 참으로 안타깝게 보고 있습니다.

헨리 조지(이하 조지) 정책 추진 과정에서 우왕좌왕해서 그런 거야. 8.31 대책 수립시 보유세 실효세율을 선진국형 구조로 만들겠다고 했는데 목표를 도중에 스스로 포기했지, 또 보유세 강화와 함께 패키지로 추진해야 할 거래세 부담 인하를 적절한 시기에 시행하지 못했지, 그래서 종합부동산세, 양도소득세, 취득세 및 등록세에 관한 애초의 정책 목표를 찔끔찔끔 수정玖?상황 악화 때마다 땜질 식으로 처방하다 결국 용두사미로 끝나버렸으니까 말이야. 대통령의 호언장담만 믿고 있던 실수요자들이 분노하는 것도 당연해.

결국 노무현 정권의 책임인 거죠?

조지 그야 그렇지만, 노무현 정권의 책임을 신나게 질타하고 있는 보수언론도 책임이 상당해. 보수언론은 종합부동산세에 대해 ‘세금 폭탄’ 운운하며 참주선동했지. 열린우리당도 여기에 부화뇌동해서 정책을 거꾸로 후퇴시켰고 말야. 10억원짜리 아파트가 14억원으로 올랐다면 양도차익이 4억원이니까 연 1,000만원 종부세를 40년이나 납부할 수 있는 거야. 게다가 6억원 이하 주택에 거주하는 서민이 98.8%야. ‘세금 폭탄’이라는 말은 완전히 ‘생까는’ 얘기지.

노무현 정권 자체의 문제점은 뭔가요?

조지 투기적 가수요 세력을 우습게 본 것과, 투기의 광풍이 불어대면 결국 돈이 없는 무주택 실수요자들이 피해를 입는다는 것을 간과한 거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투기로 인한 당장의 상황 말고도, 일부 경제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현재 아파트 가격의 3분의 1이 거품이고, 이 거품 요인의 70% 가량이 저금리 때문이고 나머지는 부통산 투기 등 기대심리 때문이라는 데요. 잘못하면 거품이 꺼지면서 한국 경제가 다시 크게 망가질 수도 있지 않나요? 그렇게 되면 결국 다시 그 피해는 서민들에게만 닥치는 것 아닙니까? 일부에서는 정부는 공급확대만 하고 나머지는 시장원리에 맡기라는 주장이 있고, 또 다른 쪽에서는 금리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마는….

조지 여기서 주의할 것은 땜질식 처방으로는 안 된다는 거야. 노무현 대통령이 당황해서는 안돼. 정책 실패에 분명한 책임이 있는 관료들을 데리고 회의를 해서 조잡한 대책을 내놓아 봐야 별 수가 없어. 현재까지의 실패를 겸허하게 인정하고 더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사태를 봐야지. 내 대안은 ‘시장친화적인 토지공개념’을 도입하자는 거야. 토지보유세는 강화하고 다른 세금은 감면하는 패키지형 세제개혁을 하자는 거지.

130여년 전에 주장하신 바로 그 내용이로군요. 그런데 그것을 하려면….

조지 시장친화적 토지공개념을 헌법에 규정해야지. 부동산 문제는 당리당략이나 정략을 벗어난 문제이고 또 단기적으로 쉽게 해결할 수 없으니까 토지보유세 강화는 10년에서 20년 정도의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추진해야 해. 집권 정당이 바뀌더라도 토지공개념에서는 전혀 후퇴가 있을 수 없도록 말이야. 정책의 장기적 목표와 소위 로드맵을 미리 밝히고 국민들의 동의와 정치적 합의를 이끌어내야지.

당장 현재의 투기 광풍을 어떻게 처리하는가가 과제인데요.

조지 그건 어렵지 않아. 버블 세븐 지역 등을 포함해서 투기 수요나 초과 수요가 있는 곳에서는 소유 제한 제도를 과감히 도입하고, 현재의 청약제도를 확 바꿔서 무주택 실수요자가 집을 갖게 하고, 후분양제 및 원가 공개 등을 통해 분양가격을 낮추되 당첨자의 경우 매각을 할 때 국가나 주택공사에게 반드시 팔게 하면 되는 거야. 보유세는 현재의 계획대로 틀림없이 과세를 해야지. 그리고 임대소득은 과세를 강화하고 임대소득의 세원은 국세청이 철저히 추적, 관리해야지. 그러면서 임대주택 중심으로 주택 공급을 서서히 확대해나가면 투기 광풍은 잡히게 돼 있어. 이미 싱가포르 등에서 하고 있는 건데 왜 우리라고 못하겠나? 부동산 문제는 전 국민적 의지가 있으니까 이를 바탕으로 해서 장기적으로 ‘시장친화적인 토지공개념’을 헌법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합의해나가면 되는 거야.

저야 선생님 주장에 찬성이지요. 하지만, 구체적으로 이런 프로젝트를 현재의 정치 국면에서 어떻게 실현시키는가가 문제겠군요.

조지 바로 그걸 하라고 대통령과 국회의원과 정무직 공무원에게 각종 특권과 월급을 국민이 주고 있는 거야. 정책으로 승부하려 하지 않고 정계개편 따위의 조잡한 정치공학적 수작으로 집권 연장을 꾀하고 있는 정당이 있다면 국민들이 선거에서 혼내면 돼.

네, 그렇군요. 그런데, 선생님 혹시 환생하셔서, 토지공개념을 중심으로 한 개헌을 공약으로 걸고 내년 대선에 출마하실 수는 없나요?

조지 허허…, 그건 정치인들이 할 일이지. 난 미국 사람이니까 북미간 직접 대화에만 신경 쓸 거라네. 그럼 또 보세.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1897)

미국의 경제학자, 사회사상가, 사회운동가. 1879년에 출간된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은 처음에는 출판사의 거부로 자비 출판했으나 그 후 폭발적인 주목을 받으며 수백만 권이 팔려 19세기 말까지는 영어로 쓰인 논픽션 분야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보급됐다.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영세 출판업자인 아버지와 전직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열두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13세 때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가세가 기울어 중퇴하고 갖가지 직업에 종사하다 16세 때 선원이 되기도 했고 그 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사금을 캐기도 했다. 인쇄공으로 일하다 성년이 되자 즉시 인쇄노동조합에 가입했고 일간지 인쇄부서에서 일하며 간간히 글을 쓰기도 했다. 1865년 링컨 대통령 피살 소식에 격분해 기고한 글이 신문 편집인의 주목을 받아 보수를 받는 기자가 됐으며 그 뒤로 신문사 특파원, 편집인 등을 지냈다. <진보와 빈곤>의 성공 후에 그는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 여러 나라를 다니며 강연을 했고, 1886년에는 뉴욕시장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뒤 1897년에 재출마했으나 투표일을 4일 남기고 사망했다. <진보와 빈곤>의 한국어 완역본은 1997년에 출간됐다(김윤상 역, 비봉출판사).



헨리 조지의 사상 중 오늘날 받아들여지는 합리적 핵심은 “노동 생산물의 경우 개인에게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이 옳지만 토지는 사유화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권리를 인정하는 게 옳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번영하는 뉴욕에서 극도의 사치와 지독한 빈곤이 공존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진보 속에서 빈곤이 존재하는 원인을 경제학적으로 찾아내려 애썼다. 그래서 그는, 지대의 폭등이 노동자 빈곤을 낳으므로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지대 전체를 사회화하는 토지가치세 도입이 필수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헨리 조지는 토지를 소수의 사람들이 배타적이고 독점적으로 소유함으로써 발생하는 불로소득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동시에 그는 소득세, 소비세, 각종 기업 관련 조세 등 경제적 노력에 의해 얻는 소득에 대한 과세야말로 사유재산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다른 세금들을 없애고 단일한 토지가치세를 징수하는 것만이 불의를 타파하고 ‘개인의 것은 개인에게, 사회의 것은 사회로’ 돌리는 정의의 도덕법칙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그는 토지 문제를 분배적 정의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적 효율성의 차원에서도 깊이 있게 논의했던 것이다. 정부의 간섭과 과세를 혐오하면서 시장 만능주의를 설파하는 우파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조차 헨리 조지의 토지가치세에 대해서는 ‘가장 덜 나쁜 세금’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더 나아가 헨리 조지는 토지 가치에 대한 기대가 소득 분배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 바로 그 기대를 불황의 원인으로 설명했는데 이는 케인즈 경제학이 나오기 한참 전에 이뤄진 아주 획기적인 이론적 설명이었다. 형평과 효율을 함께 충족시키려는 헨리 조지의 토지가치세 정신을 오늘날 이어받고 있는 사람들에는 크게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정통파 조지주의자(Georgist)들인데 이들은 헨리 조지의 이론이 주류 신고전파 경제학이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대체할 수 있는, 진정한 대안적 패러다임이라고 보고 있으며, 자신들의 경제학을 Geonomics로 부른다. 여기서 'Geo'란 바로 지구란 말에서의 ‘지(地)’를 뜻하는 것이기도 해서 헨리 조지의 이론이 갖는 생태학적 함의를 부각시키고 있다. 한편 온건파 조지주의자들은 단일한 토지가치세만을 주장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보고 토지가치세를 우선적으로 징수하되 다른 조세도 복수적으로 징수할 수 있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한국의 경제학자들 중에서 헨리 조지의 이론을 선구적으로 받아들여 연구한 그룹은 김윤상, 이재율, 전강수, 이정우 교수 등과 같은 대구 지역 경제학자들이다. 이정우 교수는 참여정부의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내면서 개혁적 경제정책을 수립ㆍ추진하다가 안팎의 압력으로 인해 중도하차한 것으로 보도됐다.

06. 11. 14.

 

 

 

 

P.S. 헨리 조지의 주저인 <진보와 빈곤>(비봉출판사, 1998)은 뒤늦게/진작에 번역돼 있다(알라딘에 이미지는 뜨지 않지만). 개인적으론 이 책을 부분적으로 읽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건 '토지문제'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라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기 위해서였다. 흔히 쳥년시절 카츄사의 정절을 유린한 귀족 네흘류도프가 중년의 배심원으로 나선 법정에서 살인혐의까지 뒤집쓴 창녀 카추샤를 다시 만나면서 참회와 부활의 길을 걷게 된다는 줄거리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작품의 상당 부분은 토지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애쓰는 '지주' 네흘류도프의 모습으로 채워져 있다(비록 지주계급에 대한 의심 때문에 농민들은 그의 '선의'를 받아들이지 않지만). 이때 톨스토이가 크게 감화를 받아서 참조한 것이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이었던 것. 그러니, (비단 현재의 부동산 정책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는 일이 아니라) <부활>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진보와 빈곤>은 참조해둘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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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sculp 2006-11-14 23:33   좋아요 0 | URL
이 대담글에도 두가지 빠졌군요. 교유문제와 토지보상비로 인한 지가상승.
친척어른이 건축하시는 분인데 2년전부터 경기도 어디를 다녀도 길가는 다 평당 천이 넘는다고 사서 건축할만한 땅이 없다는 애기를 하셨는데 이런게 집값과 분양가 상승의 기본적인 요인인데가 신도시가 평준화없어지면서 강남으로 모이는것이 수요의 촉발이라고 아줌마들 사이에서는 애기하죠.
제가 사는곳이 안양인데 여기 중학교중 이름난 중학교가 있습니다. 며칠전 들은 애기로는 옆 의왕시 학군에서 초딩 6학년이 30명이 조금 넘는데 지금 남았는 애들은 10명조금넘게. 나머지는 전학가거나 아니면 주소 다 옮겨놓았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 중학교에서는 이번에 특목고로 180명인가 써서 거의 다 가고요. 안양은 고등학교가 근거리 배정이 아니라 무작위추첨이라 집옆에 학교가 있어도 못갈가능성이 있어 돈있으면 근거리 배정인 강남으로 가고 아니면 중학교때 특목고로 가거든요.
제 친구나 아는 사람들 대치동으로 지금 12억대의 30평 아파트로 이사가는 이유도 교육인데. 물론 돈 더많은 사람들은 투자용을 사놓겠지만.
그리고 지금 돈이 있는 사람도 투자해서 돈버는것보다 서류작성해서 집 사고팔면 투자이익보다 더 나오는 상황인데 여전히 부동산 자체에서 공개념이니 뭐니 하면서 해결하려는것 보면 이건 아닌것 같은데 생각이 듭니다.

로쟈 2006-11-14 23:51   좋아요 0 | URL
교육문제가 부동산과 밀접하게 연루돼 있는 건 한국적인 특수성이 아닐까요. 헨리 조지의 일반론으로 카바되지 않는. 그 둘 간의 접점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사실 토지에 상한선을 두자는 주장은 연암 박지원의 글에도 나온다고 하니까 '남의 얘기'만은 아니고,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오마이뉴스의 해외리포트란에 흥미로운 기사가 떠서 옮겨온다. 최근에 발표된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 곧 공쿠르상의 시상식에 작가가 불참했다는 것. 그것이 '수상거부'를 뜻하는 건 아닌 듯하지만, 주최측에 낭패감을 떠안긴 것만은 분명하다. 전세계에서 아마도 가장 많은 문학상을 주고받는 나라가 아닌가 생각될 만큼 '문학상'이 넘쳐나는 우리의 처지에서 한번쯤 음미해볼 만한 소식이다(믈론 프랑스에서도 이런 일은 예외적이며 아주 드문 일이지만). 작성자는 박영신 기자이다.

오마이뉴스(06. 11. 10) "최고 문학상?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시상식에 나타나지 않은 수상자

공쿠르는 프랑스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상이다. 그 해 출판된 산문 중 최고의 작품을 선정하는 것이 원칙이나 오로지 소설 부문에만 수여해 왔다. 수상과 함께 작가에게 명성과 대중적 성공을 보장하는 공쿠르 문학상의 상금은 달랑 10유로. 명예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수상작이 발표되면 프랑스인들은 자연스럽게 서점으로 달려간다. 그 해의 작품을 보기 위해. 때문에 공쿠르 문학상 수상작은 통상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반면 공쿠르 문학상은 한 작가가 평생 단 한 번 수상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예외는 있었다. 1956년 <하늘의 뿌리>(les Racines du ciel)로 공쿠르를 거머쥔 작가 로맹 가리는 1975년 <자기 앞의 생>(La Vie devant soi)으로 두 번째 공쿠르 수상의 영예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때 이름은 에밀 아자르였다. 결국 '에밀 아자르와 로맹 가리는 동일인물'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로맹 가리가 권총 자살하기 직전까지 세상은 철저히 속았던 것.

지난 6일 올해의 공쿠르 문학상 수상작이 발표됐다. 미국인 작가 조너선 리텔(39)의 소설 <호의적인 사람들>(Les bienveillantes)이 그 주인공. 나치 친위대(SS)의 회고 형식으로 유대인 학살을 다룬 <호의적인 사람들>은 지난 8월 불어로 출간된 이후 25만 부 이상이 팔려나간 베스트셀러다. 지난달 리텔은 이미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뉴욕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리텔은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가족과 함께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살고있다. 그러나 올해의 공쿠르가 발표된 지난 6일 주인공 리텔은 시상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바르셀로나에서 가족과 함께 단란한 일상을 즐기고 있는 리텔은 방해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리텔의 대리인은 <프랑스 2 텔레비전> 저녁뉴스를 통해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으나 이것은 분명 '대수로운' 일이었다. 심사위원단은 애써 태연하려 했어도 시상식 현장은 '당혹' 그 자체였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지난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 때도 불참한 경력이 있는 리텔은.



"문학상이 도대체 문학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두 달 전으로 돌아간다. TV를 병적으로 혐오하는 리텔은 이때 라디오 <유럽 1>과 인터뷰를 가진 일이 있다.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의 수상자 후보 명단이 발표된 시점이었다. 여기서 리텔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내 작품만큼 뛰어난 작품은 얼마든지 있다. 무엇보다 문학상이라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이다. 문학상이 도대체 문학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한편 이와 때를 같이 해 프랑스의 여성정보 웹사이트인 <마드모아젤 닷 컴>은 문학상을 주제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8일 현재 총 332명의 누리꾼이 참가한 가운데 절반이 넘는 52.1%가 이렇게 대답했다.

"(문학상은) 작가들이 자기 친구에게 표를 던지는 바보들의 잔치."


'문학의 질을 평가하는 바른 지침'이라거나 '떠도는 작가들을 위한 귀중한 원조'라는 대답은 각각 30.1%, 17.8%에 불과했다. 시인 조르주 페로스의 냉소와 만나는 지점이다.

"문학상은 심사위원에 우월감을, 수상자에 열등감을 준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말. 리텔의 '반항'은 지금으로부터 42년 전의 '사건'을 환기시킨다. 리텔과 페로스의 '불평'을 넘어 혁명에 가까운 '사건'을 만들어낸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문학의 기념비적인 인물 장-폴 사르트르. 사후 26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살아숨쉬는 사르트르는 전세계에서 노벨상을 거부한 유일한 작가다. '살아있는 동안 누구도 평가받을 자격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노벨상을 거절한 유일한 작가, 장-폴 사르트르

기실 사르트르는 '기관'이 주는 영예를 꾸준히 거절해왔다. 이를테면 전후인 1945년 레지옹도뇌르 훈장 수훈자로 선정된 사르트르는 '정부에 내 친구들이 있다'는 이유로 훈장을 거부한 바 있다. 프랑스 최고 권위의 교육기관인 꼴레주 드 프랑스에서 수차례 강의할 것을 요청 했으나 역시 거절했다. 같은 이유였다, '인맥'을 등에 업지 않겠다는. 그러나 굳이 '인맥'이 아니었어도 사르트르의 자격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노벨상 수상자 명단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1964년이거나 그 후거나 나는 (노벨상 수상의) 영광에 응할 수 없고 응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사르트르는 자신이 노벨문학상 수상자 후보 명단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노벨상을 심사하는 왕립 스웨덴 아카데미 사무국장에게 위의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편지를 열어볼 틈도 없이 1964년 10월 22일 투표는 진행됐으며 아카데미 심사위원단은 공식적으로 사르트르의 수상을 발표하고 만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재차 수상 거부를 알리는 편지를 쓰게 된다.

"상은 투쟁이 끝났을 때만 수여되는 것"

"(…) 내가 '장-폴 사르트르'라 서명하는 것과 '노벨상 장-폴 사르트르'라 서명하는 데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작가는 설령 그것이 가장 명예로운 방식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기관화 되는 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오늘날 문화전선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투쟁은 동서양의 문화가 평화적으로 공존토록 하는 것입니다(...) 인간과 문화는 '기관'의 간섭 없이 존재해야 합니다.

(...)비록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으나 내 호감은 두 말할 필요없이 사회주의와 동구권을 향해 열려있습니다(…) 나는 '최고'가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사회주의 입니다. 최고 기관에서 수여하는 어떤 영예에도 내가 응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나는 사회주의자이나 누군가 내게 레닌상을 제안했어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레닌상을 제안받은 일은 없습니다.

(…) 알제리 전쟁 중 ‘121인의 선언’에 우리가 서명했을 당시 상이 주어졌다면 나는 기꺼이 수락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가 쟁취하기 위해 싸운 '자유'도 함께 평가되는 의미가 있기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은 없었습니다. 상은 투쟁이 끝났을 때만 수여되는 것입니다."


자유를 향한 인류의 투쟁은 여전히 진행형인 것이다. 그러나 투사가 아닌 작가로서 사르트르의 소망은 이뤄졌다. 세상과의 '투쟁'을 끝내고 사르트르가 땅에 묻힌 1980년 4월 19일 5만여 파리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와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던 것이다.

사르트르의 일생을 통틀어 프랑스 국민이 선사한 감사의 인사인 동시에 그가 허락했을 유일한 상이었다. 프랑스인의 가슴에 새겨진 이날의 기억은 '귀여운' 일화로 남아 상징이 됐다. 어린 소년 하나가 후다닥 집으로 들어서며 외쳤던 것이다.

"아빠, 사르트르의 죽음에 반대하는 시위에 갔다 왔어요!"


06. 11. 10.

P.S. 마지막 소녀의 멘트가 귀엽고 천진하다. 사르트르의 노벨문학상 거부에 대해서는 이전에 모스크바통신에서 한번 다룬 바 있지만, 내가 알기에 사르트르는 상금마저 거부하지는 않았다(그 점을 나는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이번 수상작인 <호의적인 사람들>의 경우 이미 독자들로부터 충분한 인정을 받고 있는 작품이기에 작가로선 거들먹거리는(?) 심사위원들의 권위에 기댈 필요가 없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실, 문학상은 새로운 재능을 발견한다는 의미에서 '신인문학상' 정도로 족한 게 아닌가 싶다. 대신에 상금은 '10유로' 정도. 그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문학상의 권위와 함께 대중과의 교감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전제들이 빠질 경우에 모든 걸 '상금'으로 카바할 수밖에 없다. 노벨문학상에 거액이 상금이 걸려있는 게 예외이긴 하지만...  

 

 

 

 

 

 

 

 

 

 

 

 

'공쿠르상 수상작'으로 얼른 검색되는 몇 권의 책들이다(물론 더 많은 수상작들이 번역/소개돼 있다. 알라딘에는 21권이 등록돼 있다). 이 중 파스칼 로즈의 <제로전투기>(열린책들, 1999)는 바로 책상맡에 있는 책이고 150여쪽밖에 안되지만 아직도 읽지 못했다(나도 어지간하다). 시간을 좀 내야겠다. 그나저나 <호의적인 사람들>도 아마 국내에 발빠르게 소개되지 않을까 싶은데 900쪽이 넘는 분량이라고 하니 역자(들)의 진을 뺄 만하다. 내년 하반기쯤에나 구경해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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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11-10 20:46   좋아요 0 | URL
오웃. 퍼갑니다. ㅋ 문학상이라.. 가까이서 지켜보면 이것만큼 어리둥절한 것도 없지요 쩝;;

마노아 2006-11-10 22:49   좋아요 0 | URL
와, 기사도 좋았지만 코멘트도 역시 좋습니다^^

마태우스 2006-11-11 12:34   좋아요 0 | URL
잘 읽었습니다. 공쿠르상을 거부한 미국 작가라, 으음. 전 그게프랑스 작가만을 대상으로 하는 상인 줄 알았습니다. 글구 샤르트르의 거부 이유, 늘 궁금했는데 답이 여기 있군요!

마태우스 2006-11-11 12:35   좋아요 0 | URL
그래서 전 다음주 '이주의 리뷰'상을 거부하기로 했습니다. "리뷰랑 적립금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게 거부 이유입니다. (다음주만 그렇다는 거구요, 그 다다음주는 괜찮습니다^^)

로쟈 2006-11-11 19:11   좋아요 0 | URL
'프랑스어'로 씌어진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상은 거부하시더라도 상금은 다 챙기시길 바랍니다!(제가 보관해 드릴 수도 있구요)...

마태우스 2006-11-12 01:48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로쟈님 친절한 설명에 감사. 글구 바람구두님, 열심히 해서 다담주부턴 적립금 한번 타보겠습니다^^

테렌티우스 2007-07-30 23:26   좋아요 0 | URL
스트라스부르서 한국영화제할 때 오마이 뉴스 박영신 기자님이 너무도 좋게 글을 써주셔서 감동먹었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보네요.

제가 논문 제출하고 발표 기다리는 동안 바로 이 책을 불어 독해, 발표 준비한답시고 심심풀이 삼아(!) - 거의 900인가 1000페이지 되는 불어책을 겁도 없이! - 읽었는데, 나치 전쟁 범죄의 탁월한 소설판 백과사전이예요, 한 해의 공쿠르 상과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상을 둘 다 같이 탈 정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하나는 분명 타야만 했던 그런 책이지요(하나도 못 탔다면 그것도 문제가 될만큼은).

문학적으로는 걸작은 아니더라도 수작임에 분명하고, 정치적으로 2차 대전 시기에 대하여는 올바르고, 오늘날엔 약간 애매할 수도 있는, 그런 글이지만, 알자스 출신의 주인공(아버지가 독일인, 어머니가 프랑스인) 법학 박사, 즉 지식인 장교를 주인공으로 출연시켜, 독자여 당신이 그때 태어났으면, 과연 어떤 '논리로'(감성이 아니라, '논리', 이게 이 소설의 미덕이자 핵심입니다, 중간에 환상 부분도 나름 탁월하고요) 세상을 살았겠는가 하는가... 라는 상투적 질문을 철저한 논리와 힙리성으로 무장시켜 - 가히 '프랑크푸르트 학파적으로' -, 역설적으로 논증하는 뉴욕에 사는 이 젊은 미국인 유태인 소설가가 불어로 쓴 (어릴때 살았답니다...^^) 소설 데뷔작은 우리나라 출판시에도 상당한 논쟁과 흥미꺼리를 가져다 줄 것이 분명합니다...

뱀발. 주인공이 일종의 행정, 정훈 장교로 각 파리, 베를린에서 러시아, 수용소, 장교 요양소(여기 나오는 언어학에 대한 묘사는 일품이예요, 조르주 뒤메질이 왔다가 울고갈(?) 박학을 보여줍니다)까지 각 전장을 돌아다니며, 아이히만, 괴벨스, 괴링(히틀러도 만나던가?)을 다 만나고, 전후 프랑스 국적을 위장 취득해 성공한 사업가로서 나름 행복한 오늘을 살며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이거 책 맨 첫 10쪽 안에 다 나오니 스포일러 아닙니다, 저도 그 정도 상식은...^^)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주인공에 대해 드는 생각은 딱 하나 밖에 없어요(여기 이런 표현을 써도 될라나?^^), "개자식!"

2007-07-30 2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 '사이버과시족'에 관한 기사가 어제 경향신문의 기획기사였는데(요즘 가장 다이내믹한 신문이다), 생각을 더 보태서 옮겨놓을까 하다가 일단은 자료로서 스크랩해놓는다. 그냥은 멋쩍으니까 나대로의 '과시'를 덧붙이자면 '인정'과 '인정투쟁'에 관한 책들을 이 참에 읽어보시라는 것. 그게 <정신현상학>에서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까지 이어지면 과시란 것도 전혀 만만하지 않은 것이 되겠지만.

 

 

 

 

경향신문(06. 11. 09) 나는 과시한다, 고로 존재한다 ‘사이버 과시족’

직장인 김모씨(26)는 외식할 때 카메라가 없으면 안절부절못한다. 멋진 분위기의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블로그에 올리는 게 생활화됐기 때문이다. 누구나 흔히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나 체인점 음식은 사진을 찍어 올리지 않는다. 조금은 특별하고, 남들과 다른 자신의 선택을 과시할 수 있는 음식만 찍는다. 주말에 좋은 식당을 찾아 음식을 먹고 일요일 저녁이면 간단한 작업을 거쳐 블로그에 올린다.

월요일이면 친구들은 김씨의 블로그를 찾아 “맛있겠다” “어디냐? 가격대를 가르쳐달라”고 리플을 단다. 김씨는 “음식을 앞에 두고 사진을 찍을 때면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기도 하지만, 리플을 통해 나만의 가치있는 선택을 인정받으면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신(神)에 의한 인정을 중시하던 중세식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인간 스스로 자신을 인정할 수 있다는 근대 철학의 자신감 넘치는 출발점이었다. 이어 프랑스 철학자 메느 드 비랑은 데카르트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나는 의욕적이다, 고로 존재한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데카르트나 비랑의 선언을 패러디해 21세기 한국의 인터넷 세상을 묘사해보면 어떨까. “나는 과시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사이버 스페이스의 유목민들은 이 광대한 공간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부모, 형제,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채 꺼내지 못한 얘기를 얼굴도 모르는 인터넷 저편의 네티즌에게 건넨다. 그러나 단순히 자신의 사생활을 미주알고주알 드러내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다. 현대인들은 타인의 비루한 일상을 꼼꼼히 챙길 만큼 한가하지 않다. 남들과 똑같아서는 자신을 드러낼 수 없다. 남들과 조금은 다른 자신의 특별한 취향을 드러내기. 드러내는 사람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독특한 것이 결국은 사람의 이목을 끈다.

세계 최대의 동영상 공유 커뮤니티 유튜브는 1억건, 한국 최대인 판도라TV에는 85만건의 동영상이 하루에 올라온다. 그 중 네티즌의 이목을 끄는 건 극소수다. 오프라인에서 마주쳤다면 ‘미친놈’ 소릴 듣기 딱 좋은 황당한 퍼포먼스 정도가 돼야 네티즌들은 환호한다. 전세계를 돌며 우스꽝스러운 막춤을 춰서 인기를 얻은 미국 청년도 있고, 인기 가요에 맞춘 어설픈 립싱크로 인기인이 된 한국 청년도 있다.

블로그도 마찬가지다. 프로페셔널을 뺨치는 아마추어들이 예민하게 갈고 닦은 취향의 집적물을 전시한다. 방대한 DVD나 CD컬렉터들이 남들에게는 없는 리스트를 자부하면서 내밀고, 대중 앞에 내놓기 쑥스러워 골방에서 그려냈던 그림을 광활한 네트 갤러리에 전시한다.

유치하다고 해도 좋고, 어설프다고 해도 좋다. 다만 이건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고, 그 취향을 인정받아 좋은 사람으로 여겨지고픈 당연한 욕망의 발로다. 공자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으면, 이 또한 군자가 아닌가”하고 말했다지만, 이는 사람은 누구나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한다는 점을 돌려서 말한 데 불과하다. 새로운 세대의 족속들의 손에는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도구가 쥐여졌다. 최신형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빠른 통신망을 탄 채, 우리는 우리를 드러냄으로써 타인의 시선을 갈망한다. 외로우니까, 나 하나만으로는 외로우니까.(백승찬 기자)

06. 11. 10.

P.S. 마지막에 '외로우니까'란 멘트는 감상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저널리스틱한 것이지만 문제를 축소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인정'은 인간의 본질에 관한 문제이면서 존립/존재에 관한 문제이기에 그러하다. 그러한 인정투쟁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 '애니멀'이다...

P.S.2. '인터넷 나르시시즘'에 대한 문화학자의 진단을 덧붙인다. 같은 기획기사의 하나이다.

경향신문(06. 11. 09) 소통·공유·행복 ‘인터넷 나르시시즘’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르키소스’라는 미소년 이야기가 있다. 그는 어느 날 숲으로 사냥을 하러 갔는데 옹달샘에 비친 자신의 몸에 반해 먹지도 않고 자기 얼굴만 보다 말라 죽은 후 한 떨기 수선화가 되었다. 19세기 말 독일의 정신과 의사 네케는 나르키소스의 신화를 차용해서 리비도의 대상이 자신이 되는 심리상태를 ‘나르시시즘’으로 명명했다. 한 마디로 자기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 말이다.

 

 

 

 

신화 속 나르키소스의 이야기는 오늘날 인터넷에서 자기 과시에 몰입하는 네티즌들의 원형 서사 같아 보인다. 나르키소스의 옹달샘이 자기도취의 거울이었다면 네티즌들에게 그것은 바로 ‘블로그’ 혹은 ‘미니홈피’쯤 될 것이다. 나르키소스가 멋진 자신의 얼굴을 옹달샘에 비추듯, 네티즌들은 자신들이 만든 멋진 콘텐츠를 ‘블로그’나 ‘미니홈피’에 올린다.

자신이 만든 특이하고 맛깔난 음식 정보를 블로그에 올리는 ‘가정주부들’. 디지털 카메라로 자신의 독특한 스타일을 직접 찍어 미니 홈피에 올려놓은 ‘셀카족들’. 취미가 유사한 익명의 네티즌들에게 자신만의 고유한 정보를 제공하며 즐거워하는 네티즌들. 이들이 우리 시대 인터넷 나르시시즘의 주인공들이다. 온라인 공간에서 자신의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익명의 네티즌들과 공유하길 원하는 이들은 자생적인 공간에서 콘텐츠를 직접 생산하고 유통, 소비하는 ‘생비자들’(prosumers)이다.

디지털 시대 콘텐츠 생비자들은 근대적, 물리적 공간에서의 자기도취자들과는 다른 욕망을 꿈꾼다. 온몸을 명품으로 치장한 ‘사모님들’이나 고소득 전문직에 종사하며 주말에 고급 사교파티를 즐기는 ‘문화귀족들’의 자기과시는 오로지 폐쇄적이고 독선적이다. 일반 서민들이 이들을 재수 없게 보는 것도 타인과의 소통과 공유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인터넷 유저들의 나르시시즘은 소통과 공유를 원칙으로 한다. 맛있는 해물 떡볶이, 내가 만든 가구, 알콩달콩한 우리가족 이야기, 이 모든 정보는 내가 잘났다는 과시이기에 앞서, 익명의 네티즌들과 소통의 기쁨을 공유하려는 소망을 담고 있다. 그래서 아무리 자기만족을 위해 만든 콘텐츠라 해도, 타인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이른바 ‘댓글의 행복’이 없으면 인터넷 유저들의 나르시시즘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터넷에서 자기과시는 하나의 게임이다. 마치 고대 원시 부족사회에서 행해졌던 ‘포틀래취’(potlatch) 선물 게임처럼, 콘텐츠를 만드는 것은 도전과 응수를 위한 반복적인 게임이다. 내가 맛있는 ‘해물 떡볶이’를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블로그에 올리면, 누군가가 더 맛있어 보이는 ‘치즈 떡볶이’로 응수하고, 다시 나는 최고로 맛있어 보이는 ‘카레 떡볶이’로 도전하는 게임 말이다. 게임의 장에 참여한 유저들의 도전과 응수는 배타적, 폐쇄적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개방적, 다방향적 나르시시즘이다.

오로지 자신이 만든 콘텐츠를 다른 유저들과 소통하기 위해 고통과 헌신을 감내하는 것은 블로그가 주는 일상의 행복과 천상의 기쁨 때문이다. 어느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제공한 ‘해피해피 라이프’라는 네티즌 참여 코너의 사례처럼, 아기자기한 콘텐츠를 생산하는 유저들의 나르시시즘은 탈권위적이면서 자기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 있다.

물론 유저들이 만든 콘텐츠가 모두 사심 없는 것은 아니다. 네티즌들의 시선을 모으기 위해 특정 연예인들을 조롱하고 희화화한다거나 아니면 스스로 연예인이 되고 싶어 댓글 자작극을 벌이는 현상들도 일어난다. 인터넷 자기과시 행동이 지나칠 경우 오직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려 인터넷 감옥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어떤 정치인들은 애초부터 진정한 정보 소통에는 관심이 없고, 의정활동을 위한 홍보 도구로 사용하기도 한다. 블로그에 올려놓은 사적인 정보들이나 미니홈피의 ‘디카놀이’ ‘일촌 놀이’들이 사이버 커뮤니티를 지극히 개인화하고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로부터 도피하려는 정치적 불감증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인터넷에서 자신을 뽐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직하고 열정적이다. 자신이 만들어 낸 자생적 콘텐츠는 무기력증에 빠진 가정주부들에게 생활의 활력소를 준다. 이제 부엌과 거실은 가사노동의 현장에서 풋풋하고 따근따근한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스튜디오로 전환된다. 인터넷 나르시시즘이 가정주부들에게는 가사의 불평등 현실을 망각하게 하는 자기 최면술일 수도 있지만, 가사의 반란을 꿈꾸는 쾌락의 에너지일 수도 있다.

소비 자본주의 시대 상품화된 나르시시즘은 결핍에 대한 편집 증세를 보인다. ‘명품중독’과 같은 상품 나르시시즘의 욕구는 끝이 없다. 소통과 공유를 위한 인터넷 유저들의 대중 나르시시즘은 비록 폭력과 집착의 위험성을 갖고 있지만, 타인에 대한 에로스의 열망을 담고 있다. 자신이 만든 정보를 미치도록 소통하고 공유하고 싶은 에로스적 욕망, 물질적 보상은 없지만 그것만으로도 인터넷 나르시시즘은 행복하다.(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전통예술원 한국예술학)

(*)하지만 이 '행복'은 쾌락원칙의 경제 안에 있을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 아닌가? 그 경제를 넘어선, 주이상스 곧 향략으로서의 나르시시즘은 때로 인생을 망치고 거덜낸다. '자기도취'의 이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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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tournelle 2007-02-01 02:28   좋아요 0 | URL
로자님은 사회학적 통찰력도 꽤 괜찮은 것 같습니다.

로쟈 2006-11-10 15:11   좋아요 0 | URL
그 '통찰'은 제게 아닌데요. 저는 퍼오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로쟈'입니다.^^

비로그인 2006-11-10 15:27   좋아요 0 | URL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읽히시던가요? 대단하군요...저는 책을 집어 던지려다가 사뿐히 내려놓았습니다^^

로쟈 2006-11-10 15:44   좋아요 0 | URL
'전혀 만만하지 않다'고 했습니다!(사실 새로 나온 번역은 아직 구입하지도 못했습니다.^^;)

기인 2006-11-10 18:53   좋아요 0 | URL
호옴 퍼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