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탄생 100주년을 맞은 여성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에 대한 연구 붐이 국내외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소위 '한나 아렌트 르네상스'를 짚어보고 있는 학술동향 기사를 교수신문에서 옮겨온다. 개인적으로 아렌트는 지젝과 함께 지난 2002년인가부터 읽고서 가장 강한 인상을 받은 철학자이다. 그간에 리뷰와 페이퍼들을 꽤 쓰기도 했는데, 한동안은 적요했다. '르네상스'라니까 관심을 되살려볼까도 생각중이다(어차피 갖고 있는 자료만 해도 차고 넘치는 탓에. 한데,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한가지 반가운 소식은 올해 안으로 새롭게 나오거나 개정판이 나올 번역서들이 꽤 된다는 사실이다. 지출을 고려하면 반가운 소식도 아니지만 아무려나 아렌트 연구자들이 가장 바지런하다는 인상은 받게 된다.

교수신문(06. 10. 30) 한나 아렌트 ‘르네상스’의 주요 내용들

아렌트 탄생 1백주년을 맞이한 올해에 아렌트의 삶과 사상을 성찰하는 학술행사가 세계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혁명과 폭력의 세기 한 가운데 살다가 타계한지 30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아렌트는 왜 학계의 ‘우상’이 되고 있는가. 과거의 사상을 현재에 재현시키는 요인은 아렌트의 학문세계에 내재돼 있는가, 아니면 외재하는가. 아렌트 연구자든 애호자든 이런 질문을 스스로 제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최근 아렌트 연구는 정치학과 철학 영역에 머물지 않고 문학, 역사, 사회학, 심리학, 교육학, 신학 등으로 확장되고 있다. 아렌트의 저작들은 출판 당시에도 엄청난 논쟁을 야기했듯이, 최근의 아렌트 연구 역시 복잡한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외형적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을 ‘타락(왜곡)’과 ‘순수’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전제하고 논의하고 있다. 이는 전체주의의 타락한 정치를 극복하고 순수한(또는 진정한) 정치를 모색하고자 했던 아렌트의 의도가 연구에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구도에 따라 최근 연구의 특징적 양상을 중점적으로 고찰한다.

아렌트 르네상스를 주도하는 분야는 단연 (정치)철학이다. 전체주의의 악을 규명하고자 했던 아렌트의 집착은 이 분야 연구자들에게도 그대로 반영된다. 9·11테러 이후 이데올로기 정치와 테러를 연결시키려는 논문들이 다수 출간되고 있는 것. 아렌트 전기작가인 영 브륄은 ‘전체주의의 기원’을 현재의 세계 상황과 직접적으로 연계시키는 요소로서 이데올로기를 들고 있으며, 나치의 ‘자연’이데올로기와 스탈린주의의 ‘역사’이데올로기에 이어 오늘날 도덕적 순수성을 옹호하는 ‘도덕’이데올로기의 충돌을 강조하고 있다(*영-브뢸의 책은 아렌트에 관한 가장 자세한 전기이다).

아렌트는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의 정치적 악을 극복하는 수단으로서 정치행위와 세계사랑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 사랑을 정치학적 개념으로 발전시키고 이를 순수한 정치의 근거로 삼고자 한 아렌트의 열망은 신 치바의 논문 ‘사랑과 정치적인 것: 사랑, 우정, 시민권’에 의해 명료하게 해석되고 있다. 아울러, 시작능력을 말살한 전체주의 악에 의한 인간성 상실에 주목해 아렌트의 인권사상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은 아렌트 정치철학의 국제정치적 확장에 기여하고 있다. 코소보 사태 등을 계기로 아렌트의 인권사상을 현실에 적용시키려는 시도들도 다수 있다(*일반적인 연구경향에 대해서는 <캠브리지 컴패니언>(2000)을 참고하는 게 좋겠다. 편자인 다나 빌라는 <아렌트와 하이데거>(교보문고, 2000)의 저자이다).

문학예술 분야에서 아렌트 붐이 일어나고 있는 것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이 분야에선 특히 이분법적 구도가 뚜렷하다. 아렌트와 오든의 사상을 조명한 수잔나 영 고트리브의 ‘고통의 영역’은 두 사람의 사상에 나타난 메시아니즘을 부각시켰다. 두 사람은 대재앙을 공동으로 경험했으며 새로운 현상, 즉 전례없는 뿌리상실감을 경험했다. 고트리브는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과 고든의 ‘고뇌의 시대’가 메시아적 사고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의 주장대로, 아렌트는 새로운 시작으로서 행위를 역설한 ‘인간의 조건’에서, 오든은 그의 시 ‘깐조네’에서 의지에 내재된 가능성을 추구하고 있다. 물론 이들의 메시아니즘은 정치적 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인간적 희망에 기초를 두고 있다. 아렌트 연구에 있어서 정치(철학)과 문학을 연계시킨 탁월한 연구다.

아렌트는 정치적 삶의 우연성과 특이성을 강조하기에 구조적 인과론에 집착하는 학문인  사회학과 심리학의 특정 연구경향에 불편함을 드러냈다. 그래서 이 분야에서 전체주의를 연구한 피터 베어는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지적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즉 전례없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즉, 전체주의 연구에 있어서 방법론 문제가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현실이다. 심리학 분야에서 아렌트 연구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빌스키의 연구는 괄목할만하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이히만의 행태를 심리학적으로 탁월하게 분석해냈다. 빌스키는 ‘아이히만 재판의 다른 목소리’라는 논문에서 정치적 악에 대한 재판과 관련된 논쟁을 심리학적으로 심도 있게 분석하고 있다.

교육학에서도 아렌트를 응용해 적절히 수용하고 있는데, 특히 아렌트 사상에서 ‘탄생’의 근본성을 구체적으로 적용시킨 적절한 수용이라 할 수 있다(*'탄생'은 'natality'의 역어인 듯하다). 전체주의의 악이 시작능력의 말살이란 점에서 새로운 시작, 탄생은 죽음에 대한 안티테제다. 따라서 새로운 시작을 가능케 하는 기초로서 교육은 정치적 악과 투쟁하기 위한 중요한 기초다. 레빈슨은 ‘아렌트 교육사상에서 탄생의 역설’을 제시한다. 교육의 보존기능과 재생기능은 상반되면서도 상호 연계돼있다는 점을 중점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신학분야 역서 선악문제와 관련해 아렌트를 통해 관심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 버밍햄은 ‘망각의 소용돌이: 근본적 악의 평범성’이란 주제아래 전체주의의 ‘근본적 악’에 내재된 악의 평범성을 지적하고 있다. 매튜 역시 ‘두 가지 판단에 관한 이야기’라는 논문에서 아렌트가 지적한 악의 신화를 벗겨내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아렌트의 선악이론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뚜렷하게 부각시켰다.

역사학 분야의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아렌트는 역사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아렌트의 저작들은 역사적 지식을 광범위하게 의존하고 있으며 ‘이야기하기’로서 역사와 ‘시대의 비판적 중재자’로서 역사가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라케르의 논문 ‘아렌트 우상: 정치평론가로서 한나 아렌트’에서는 정치평론가나 정치철학자보다 시대의 탁월한 비평가로서 아렌트의 위상을 부각시키고 있다.

각 학문분야의 특징적 양상을 고려하면, 선과 악, 타락과 순수라는 이분법적 구도에 대한 전제가 기저에 깔려 있다. 그 어느 측면만을 분석할 때 장점을 고려할 수 있지만, 인간의 삶에 대한 이해에서 내적 긴장구조를 상정하고 있는 아렌트의 의도는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아렌트의 경우, 타락과 순수, 선과 악을 구분짓는 기준은 시작 능력의 유지와 상실이다. 최근 아렌트 연구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보면, 학문 영역에 관계없이 ‘새로운 시작’ 또는 ‘탄생’이란 범주를 소개함으로써 아렌트의 ‘출생의 철학’을 부각시키고 있다.

아렌트 연구가 현대인의 삶에 주는 의미는 크다고 하겠지만, 아렌트 르네상스의 한 요인으로 정서적 또는 낭만적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여성 정치철학자’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아렌트 정치철학을 서예의 필치로 특징화하자면, 섬세한 선과 굵은 선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가운데 한 측면만을 집중할 때, 우리는 아렌트의 정신세계를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렌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이해와 곡해의 양면성이 존재하지만, 최근 경향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연구자들에게 새로운 의무로 남게 된다.(홍원표 / 한국외대·정치철학)

국내 아렌트 연구 붐 - 번역서 속속 출간 … 불교학으로까지 확대

아렌트 탄생 1백주년을 맞기 전부터 아렌트에 대한 국내의 관심은 상당했다. 연구자들의 숫자는 몇 안되지만 아렌트 주요 저작들은 속속 번역돼 나왔다. 김선욱 숭실대, 홍원표 한국외대, 서유경 경희사이버대 교수 등 정치철학자들을 주요 멤버로 해서 얼마 전에는 ‘한나아렌트연구회’가 본격 출범되기도 했다. 이들이 주축이 되고 정치사상학회와 사회와철학연구회가 뜻을 모아 지난 14일 ‘한나 아렌트와 세계사랑’이라는 학술대회를 열기도 했다.

탄생일인 10월 14일에 맞춰 김선욱 교수가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길사)을 번역·출간했으며, ‘전체주의의 기원’(이진우 옮김), ‘정신의 삶 2’(김석수 옮김), ‘정신의 삶 3: 칸트정치철학강의’ 등도 곧 번역돼 나온다. 또 ‘공화국의 의지’(김선욱 옮김)는 재번역판이,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권영빈 옮김)은 개정판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하지만 아렌트 사상은 이들만의 관심사는 아니며 이미 여러 곳으로 뻗쳐나가고 있다. 정치학에선 아렌트의 정치적 입헌주의 뿐만 아니라, 그의 윤리학 및 막스 베버와 비교해 고찰하는 등 연구가 활발하다. 페미니즘, 교육학, 나아가 불교연구자의 응용연구도 주목할만하다. 이은선 세종대 교수(세종대)는 아렌트의 ‘탄생성’과 왕양명의 ‘치량지’의 교육관을 비교해 연구물을 내놓았으며, 김인순 동국대 강사(정치철학)는 논쟁이 많은 아렌트 사상의 페미니즘적 측면을 고찰했다. 특기할만한 건 가산불교문화연구원의 고옥 스님이 발표한 ‘탈속과 귀환의 중도에서 만난 아렌트’로서 아렌트 사상의 확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이은혜 기자)

06. 10. 31.

 

 

 

 

P.S.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과 <폭력의 세기>까지 포함하여 현재까지 번역/소개된 아렌트의 저작은 8권 가량이며 이 중 5권이 2002년 이후에 나온 것들이다. 거기에 조만간 네댓 권이 보태진다고 하니까 '아렌트 르네상스'란 말이 빈말은 아닌 셈이다...

P.S.2. 국내 아렌트 학자 중 한 사람인 서유경 교수의 '아렌트 이야기'를 보충자료로 옮겨놓는다. 아렌트 입문에 값할 만큼 자세하고 친절하며 우리 현실과의 접점에 대해서도 짚어주고 있는 글이다. 서교수는 아렌트의 <과거와 미래 사이>와 함께 다나 빌라의 <아렌트와 하이데거>를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프레시안(06. 10. 23) 2006년 가을, 한나 아렌트를 생각한다

1996년 가을이었다. 당시 박사과정에 있던 나는 '현대정치철학'이라는 강의을 듣고 있었다. 푸코, 하버마스, 가다머, 롤즈, 료타르, 데리다, 아렌트의 저서들을 두루 읽게 된 것도 그때였다. 맨 처음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란 책 제목을 보았을 때 내 머릿속을 스쳐간 것은 서머셋 모옴의 소설 <인간의 굴레>였다. 지금 되돌아보면 나는 그것이 얼마나 정확한 직감이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인간의 '다수성(plurality)', 즉 '세계 속에서 타인들과 더불어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조건'을 인간의 실존적 조건(굴레)으로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가벼운 마음으로 <인간의 조건>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채 한 장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바다 한 가운데 턱 버티고 있는 홉스의 웅장한 리바이어던의 흉상, 바로 그것이 내 눈 앞에 어른거리고 있다고 느꼈다. 호메로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헤겔, 맑스, 후설, 하이데거, 야스퍼스, 비트겐슈타인에 이르는 서구 철학 2500년 역사의 광활한 대지 위를 종횡무진하는 그의 거침없는 행보는 내게 놀라움 바로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런 지적 충격 속에서 나는 아렌트 사상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 때 우리 사회는 87년 6월 민주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한 후, 민선 2기 김영삼 문민정부 시절에 접어들었다. 문민정부는 과거 정권과 달리 시민단체 인사들을 정부의 각종 위원회에 참여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이런 급격한 변화상에 부응하기 위해 정치학자들은 그때까지 별 의미를 두지 않았던 '시민'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주목하게 됐다.
  
그런데 내가 발견한 아렌트는 소수의 대표자가 국정을 주도하는 대의민주주의 제도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서 고대 폴리스에서 행해졌던 방식의 시민의,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정치를 복원하자고 제안하는 정치이론가였다. 아렌트가 주창하는 시민 주도의 참여민주주의 패러다임이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90년대 중반, 당시까지만 해도 하버마스는 잘 알아도 아렌트는 모른다는 것이 학계와 일반의 반응이었다. 물론 하버마스가 이미 70년대 중반에 자신의 의사소통 패러다임의 원출처가 아렌트의 정치행위 모델이었음을 공개적으로 밝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아무튼 그 때 나는 아렌트를 통해 우리 사회 내에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시민이 주도하는 정치지형의 이론적 타당성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었고, 3년 뒤 그것을 아렌트의 정치적 실존주의 맥락에서 '정치행위와 인간실존의 역학'으로 설명하는 학위논문을 제출했다.
  
하지만 지난 10년을 거치며 우리 학계에 나처럼 전문적으로 아렌트를 연구하는 '아렌티안(Arendtian)'들의 수가 제법 늘어났다. 그 덕분에 아렌트의 주요 저작들 대부분이 번역 출간되었고 관련 논문들도 꾸준히 발표돼 왔다. 이런 연구 성과의 축적에 힘입어서인지, 요즘 아렌트에 대한 관심이 하루가 다르게 확산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근래 크고 작은 신문과 잡지의 칼럼이나 기사에서 그의 이름이 거명되는 경우가 부쩍 잦아진 것이 이 점을 잘 말해준다고 하겠다.
  
또 한 가지 예로 지난 14일 경희대에서 "한나 아렌트와 Amor Mundi(세계사랑)"라는 제하에 열린 아렌트 탄생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도 예상 밖으로 많은 청중이 모여들었다. 이런 광경은 최근 우리 사회 일각에서 제기됐던 '인문학의 위기'라는 우려의 목소리를 무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오늘 왜 우리 한국인들이 아렌트 사상에 그처럼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나는 이 글을 통해 이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한나 아렌트의 본명은 Johannah Arendt로 1906년 10월 14일 프러시아 영토인 하노버의 유태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성장했는데 그곳은 칸트가 태어나서 평생을 보낸 것으로 유명한 고장이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아렌트는 16세에 이미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을 정도로 철학적 소양이 뛰어난 매우 명석하고 지적인 소녀였다. 그가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을 졸업한 후 마르부르크 대학의 박사과정에 진학하게 된 것은 당시 철학계에 혜성같이 나타난 하이데거에게 배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잘 알려진 대로 그곳에서 아렌트는 스승인 하이데거와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그리고 이듬해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동의 하에 프라이부르크로 떠난다. 그곳에서 후설에게 반년에 걸쳐 현상학을 배운 다음, 다시 하이데거의 친구인 실존철학자 야스퍼스가 있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옮겨 그의 지도 하에 1929년 <사랑 개념과 성 어거스틴>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곧이어 아렌트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만난 동급생이자 유태인 저널리스트인 귄터 슈테른과 결혼하여 베를린의 한 신문사에서 서평 담당기자로 일한다.
  
그러던 중 1933년 히틀러 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유태인 핍박이 시작되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파리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려는 청년들을 교육시키는 한 유태계 기관에서 일하는 한편, 발터 벤야민, 레이몽 아롱 등과 친교하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던 슈테른과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역시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독일인 하인리히 블뤼허와 재혼한다. 그들은 1970년 블뤼허가 사망하기까지 30년 가까이 서로에게 지적 동반자이자 생의 반려자가 되었다.
  
1940년 프랑스가 독일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이어 비시정부가 더 이상 자국 내 유태인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발표를 하자 미국행을 결심한다. 1941년 미국에 도착한 아렌트는 뉴욕에 정착한 뒤 1975년 사망할 때까지 미국시민으로 살았다. 그는 유태계 잡지사 편집장을 거쳐, 시카고, 버클리, 프린스턴, 뉴스쿨 등의 대학의 정치학과와 철학과에서 강의했다. 생전에 그는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쳤고, 특히 기성의 틀을 깨는 급진적인 주장과 거침없는 언변으로 늘 화제를 몰고 다녔다.
  
아렌트는 인류에 대한 지적 공헌을 인정받아 1959년 레싱상, 1967년 프로이트상, 1975년 소니그상을 수상했다. 또한 1972년에서 1974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앙리 베르그송, 가브리엘 마르셀, 레이몽 아롱과 같은 세기의 지성들이 초빙되었던 철학계의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영국 아버딘 대학의 기포드(Gifford) 강연의 최초의 여성 연사로, 그것도 두 번 연속해서 초빙되는 영예를 안기도 하였다. 이처럼 확고한 사회적 지위와 학문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생전에 아렌트는 늘 '국외자'였다. 적어도 1990년대 중반 이후 서구 학계에 불어 닥친 아렌트 재해석 열풍과 더불어 화려한 부활을 하기까지는 그랬다.
  
이른바 '아렌트 르네상스'로 일컬어지는 이런 아렌트 사상의 부활 현상에 기폭제가 된 것은 동유럽 시민사회의 태동이었다. 이들 나라들은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사이 구소련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한 후 각기 새로운 민주주의 정치공동체 운영 실험에 돌입했다. 오랜 기간 유지했던 사회주의 국가통제 체제가 하루아침에 시민들이 세운 민선체제로 바뀌게 됨에 따라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이 요구됐고, 그런 그들에게 정치이론가로서 한나 아렌트는 가히 독보적인 존재로 떠올랐던 것이다.
  
물론 이것으로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아렌트 사상이 부활하게 된 이유까지 설명할 수는 없다. 서구 사회가 아렌트를 다시 주목하게 된 것은 1990년대 유행한 탈근대적 사회이론들이 지니고 있는 한계 때문이었다. 정치적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한계 말이다. 예컨대 "해체할 것이 없을 때까지 해체하라"는 주장으로 유명한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해체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만일 해체가 기존 체제의 비판을 넘어서는 게 될 수 없다면, 그것은 단지 무정란(無精卵)에 불과한 이론이 될 것이다.
  
반면 아렌트의 정치행위 이론과 판단행위 이론은 시민들 각자의 행위와 정치적 결과의 상관관계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무책임하게 보이는 탈근대 사회이론과 차별화되었다. 이 점이 바로 서구 사회가 아렌트를 다시 주목하게 된 이유이다. 

1972년 한 학회에서 "당신의 정체가 뭐요?"라고 현실주의 정치학자 한스 모겐소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을 때, 아렌트는 "좌익은 나를 보수주의자라고 하고, 보수주의자들은 때때로 나를 좌익이라고 하거나 이단자라고 하기도 하는 것 같던데, 그것 말고 또 다른 이름으로 부를지도 모르겠군요"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요즘 학자들은 아렌트를 '반정초주의자'라고 지칭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서구 철학전통 속에 나타난 어느 학파로도 분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굳이 아렌트의 학문적 정체성을 규명해야 한다면 그는 첫번째 '아렌트주의자'로 불려야 마땅할 것이다.
  
아렌트 사상의 대가 다나 빌라는 "아렌트의 사유 방주(方舟)는 정치악의 문제를 규명하려는 것이었고, 전체주의로 시작하여 우리가 이런 현상들을 다룰 때 의존하는 정신기능들의 탐색으로 끝나고 있다"고 논평한다. 사실 철학도였던 아렌트는 1930년대 유럽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현실정치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1950년대와 60년대에는 자신의 경험에 기초한 정치이론을 통해 진정한 정치의 복원과 공적 행복을 주창하였고, 70년 중반 사유(思惟)의 정치적 의미를 밝힌 정치철학자로서 삶을 마치게 된다.
  
무명의 독일-유태계 망명 지식인 아렌트가 미국 학계에서 처음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51년, 그의 첫 번째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의 출간 이후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와 스탈린 군국주의라는 전체주의 체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 때 미국은 매카시즘의 광기가 정점에 달했던 시점이었다. 따라서 이 책이 스탈린 공산주의 체제에 대해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결과적으로 아렌트는 냉전의 반공 이데올로기 기류 속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이름을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전체주의 분석을 단순한 전체주의 체제 비판으로 보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아렌트는 나치와 스탈린 전체주의 체제의 무고한 생명 대학살을 서구 역사 속에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반유태주의나 민족주의의 잔재로 간단히 치부할 수만은 없으며, 그러한 체제들은 "이데올로기와 테러에 기초한 신종 통치형태"라고 주장했다.
  
요컨대 전체주의 체제는 체제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하나의 집체적 정체성을 만들어 내고, 시민 개개인의 개별성을 그 아래 복속시킨다. 그들은 개별 시민들 사이의 모든 대화 장치들을 분쇄함으로써 정권의 공식 대화채널만이 작동하도록 하며, 이에 저항하는 자들은 테러로 응징하는 이중의 통치방식으로 체제를 운영한다. 결국 시민들은 원자화되고, 정치적으로 무력한 체제 순응적인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
  
이런 연장선 상에서 아렌트는 우리가 살아가는 근대사회 역시 이런 전체주의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우선 대중 민주주의 하에서 시민들 대다수는 정치로부터 소외되어 있으며, 사적인 영역에서 상품의 소비와 향락산업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있다. 또한 국가의 근대화된 행정체계는 시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하고 규율하는, 미셸 푸코의 표현인 '파놉티콘'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런 맥락에서 근대 국가의 시민은 전체주의 사회 내에서 못지않게 원자화되고 정치적으로 무력한 존재인 것이다.

이런 근대 사회에 대한 비판은 그의 두 번째 저서 <인간의 조건>에서 정치행위론을 정초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아렌트는 여기서 인간은 정치행위를 통해서만 인간답게 살 수 있다고 역설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일찍이 지적했듯이 인간은 본래 '정치적 존재(zoon politikon)', 즉 정치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정치적 존재로서 인간의 삶의 원형을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찾아낸다. 폴리스에서 자유인, 즉 시민들은 정치의 장에서 동료 시민들과 함께 자신이 살고 있는 공동체의 대소사를 함께 심의하고 결정했다. 요컨대 그들은 이러한 '정치행위'를 통해 자신의 사적인 삶과 별개로 시민으로서의 공적인 행복을 향유했던 것이다.
  
이에 아렌트는 고대 폴리스라는 직접 민주주의의 정치무대를 배경에 깔고 자신의 독특한 정치행위 개념을 제시하게 된다. 그에 따르면, "정치행위는 유일하게 사물 또는 물질의 직접적인 개입 없이, 언어를 매개로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자유로운 인간의 활동"이다. 이 정의에서 방점은 '언어'와 '자유로운 인간의 활동'에 주어져 있다. 바꿔 말해서 아렌트의 정치행위는 사적인 삶의 관심에서 해방되어 공적인 장에서 진행되는 의사소통 행위를 뜻한다. 나중에 하버마스는 이러한 아렌트의 정치행위 개념에 기초하여 자신의 "이상적 담론상황"과 의사소통적 행위론, 그리고 심의 민주주의 이론을 구축하는 개가를 올리게 된다.
  
<인간의 조건> 이후 정치이론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아렌트에게 또 한 번의 학문적 전환점이 찾아온다. 그는 1961년 <뉴요커>의 특파원 신분으로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하게 되며, 1963년 자신이 재판정에서 본 것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으로 출간한다.
  
자신이 만난 아이히만이 평범한 소시민이었을 뿐 악마의 화신이 아니었다는, 이른바 '악의 평범성' 주장을 담고 있는 이 책은 당시 유태인 사회 내에서 하나의 필화사건으로 전화한다. 결국 아렌트는 유태인 사회로부터 "유태민족에 대한 애정을 결핍한 자"로서 파문을 당한다. 하지만 그는 아이히만의 경우를 통해 사유의 결여가 곧 악행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견고한 확신을 얻게 된다.
  
아렌트의 유작 <정신의 삶>은 바로 이 때 얻은 확신을 논증하는 정치철학적 저술이다. 이 책에서 그는 우리의 사유행위와 정치행위의 연계성을 밝힐 목적에서 우리의 정신 기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현상학적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정신이 사유작용(thinking), 의지작용(willing), 판단작용(judging)의 세 가지 기능을 분리하여 수행하는 동시에 상호간의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예컨대 사유작용은 의지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선택사양을 제공해주고, 판단작용은 의지작용의 과정에서 선택된 것의 타당성을 검토함으로써 개별 행위자가 주관성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렌트의 논점은 개인의 사유행위는 보편타당한 정치행위로 이어진다는 것이라고 하겠다. 결국 그는 이런 설명 방식을 통해 '사유의 정치적 중요성'을 적시하는 한편, 서구 지성사에서 소크라테스 이래로 분리되었던 정치와 철학이 결합되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아렌트의 사상은 시기별로 혹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다. 이는 아렌트의 학문여정이 철학, 정치학, 정치철학으로 세 번의 전환을 하면서, 주장의 강조점이 달라졌다는 점에 기인한다. 1996년 당시 내가 처음 아렌트를 만났을 때 나는 그의 정치학적 주장들에 주목했었다. 그 때 우리 사회는 그의 정치행위 개념에 담긴 시민정치 사상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87년 6월 혁명 이후 지난 20년간 우리 시민사회는 매우 강력한 정치력을 획득했다. 우리 시민들은 더 이상 정치적으로 무력한 대중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우리의 시민 정치는 때로 과열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그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번지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가 하면 시민들 사이에 각자 자기주장과 입장만 내세우는 이기주의적 행태도 빠르게 번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사회는 이제 아렌트의 '정치학' 이론보다는 '정치철학'적 지혜에 주목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이히만의 무책임한 범죄행위는 그의 사유행위가 선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아렌트의 정치철학적 평결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오늘 아렌트는 우리에게 행동하기에 앞서 사유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이는 우리 사회 속에서 생각과 입장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실존적 조건이기 때문이다.(서유경/경희사이버대 NGO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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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나무 2006-10-31 10:14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열린 생각과 마음을 그냥 늘 지나기가 미안해서 메모 남깁니다. 그런데 이 많은 책을 언제 어떻게 다 읽는지 비결이라도 있으면 알려주실랍니까. 책을 이렇게 읽다보면 머릿속엔 활자들만 살진 않나요.^^

로쟈 2006-10-31 10:18   좋아요 0 | URL
다 읽지 않고 읽을 수도 없습니다(소설책들도 아니구요).^^ 다만, 저는 마치 '지도제작자'처럼 그 책이 어디에 있는지 정도를 가늠해놓을 따름입니다. 급하게 읽는 편도 아니어서 주로 우선적으로 손에 잡히는 책들만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는 편입니다...

로쟈 2006-10-31 15:30   좋아요 0 | URL
빗발은 아니고, 바람만 좀 부는 거 같습니다.^^ 소설들 만큼은 재미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시면 됩니다(수습이 된 건가)...
 

TV에서 상상플러스가 나오는 걸 잠시 보다가 채널을 돌리니까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띈다. '세계적 석학'이란 말이 미리 나오는 자크 아탈리다(그에게서 내가 받는 인상은 딱 이어령 선생의 그것이다). 아마도 'TV, 책을 말하다'에서 아탈리와의 인터뷰를 특집으로 꾸민 모양인데, 손석춘 한겨레 기획위원이 패널로 나와서 거들고 있다. TV를 끄고 책상으로 와서 무슨 일로 온 건지 '아탈리'를 검색해본다. 얼마전 열린 '세계지식포럼'에 참석차 내한했다가 방송분을 녹화한 모양이다. "21세기는 이타주의자들이 지배"한다는 게 이번 포럼에서의 그의 메시지였던 모양이다(그럼, 지금까지는 이기주의자들이 지배해왔구만).

 

 

  

 

따져보니까 아탈리의 책을 내가 완독한 건 한권도 없는 듯하다. 한데, <합리적인 미치광이>, <21세기 사전>, <호모 노마드>를 구입했었고 부분적으로 읽었다(<인간적인 길>과 <마르크스 평전>은 읽어볼 요량으로 있다). '형제애'나 '노마드'에 대한 방점 같은 게 키워드로 떠오르지만 그의 핵심적인 메시지에 대해서는 아직 가늠하고 있지 못한 형편이다. 비슷한 처지라면 아래 기사가 요긴한 도움이 되겠다.

 

뷰스앤뉴스(06. 10. 20) 자크 아탈리 "21세기는 이타주의자들이 지배"

유럽부흥개발은행(EBRD) 총재를 지낸 세계적 석학인 자크 아탈리(63) 플래닛파이낸스 회장이 앞으로 세계경제는 '이타주의자'들이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서울 쉐라톤워커힐호텔에서 열린 세계지식포럼에 참석한 자크 아탈리(63)는 19일 OECD 사무총장 출신인 도널드 존스턴 국제리스크관리위원회(IRGC) 이사회 의장 사회로 수파차이 운크타드 총장과 함께 '창조 경제의 시대'를 주제로 가진 대담에서 선진국의 과도한 지적재산권 보호 정책을 질타했다.

그는 "지적재산권(IPR) 보호가 오히려 사람들의 창의력을 억제하고 전 세계적인 지식의 확산을 막고 있다"며 "앞으로 세계 경제에서 지적재산권은 보호받는 경우보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아이디어나 지식은 희소성이 있는 게 아닌데 지적재산권이라는 인위적인 장치로 이를 희소한 것으로 만들었다"며 "지식은 전 세계적인 확산을 통해 성장을 촉진해야 하는데 지적재산권이 이를 막고 있다"고 질타했다.

그는 "인터넷을 통해 들을 수 있는 음악의 수는 2백억개로 이 가운데 절반 정도는 무료로 들을 수 있다"며 "음반산업이 CD 판매를 통해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시대는 끝났고 더 이상 음악이 무료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한국에도 번역소개된 저서 <호모 노마드> <마르크스 평전> 등을 통해 강조해온 이타주의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그는 "현재 세계경제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이타주의"라며 "앞으로 이타주의적 새로운 엘리트집단이 출현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과거에는 희소성에 가치가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네트워크경제 시대에는 오케스트라에서 다른 연주자가 잘 해야 나의 연주도 빛을 발하는 것과 같이 정보는 많이 공유할수록 이익이며 이를 위해 지식 네트워크를 구성해야 한다"고 이타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우리는 지금 타인의 성공이 나에게도 이익이 되는 이타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다"며 "좋은 자동차는 나 혼자 갖고 있는 게 좋지만 좋은 휴대전화는 나 혼자 갖고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구체적 예를 들기도 했다. 그는 또 시야를 세계문제로 넓혀 "테러나 지구온난화 등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빈곤과 어려움이 나에게 이득이 아니라 해를 끼칠 것"이라고 이타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향후 50년 간 장기적으로 세계화와 전쟁, 권력 이동과 같은 일련의 현상들을 겪고난 후 새로운 엘리트 집단이 생길 것이며 이 '새로운 엘리트 집단'은 기본적으로 '이타주의자'들로 구성될 것"이라며 "나아가 반세기 전 자본주의가 미친 영향만큼 비정부기구(NGO) 인사들, 예술가들, 과학자들 특히 뇌 연구 과학자들이 미래 사회에서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며 그들은 이미 세계 총생산의 10%를 담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85년 처음 사용한 '유목주의'(노마디즘)에 대해 "당시와 달리 기술의 발전으로 오늘날은 유목성이 보편적 규범이 됐으며, 계속 이동하고 변화하는 유목성이 낳는 창의성은 오늘날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었다"며 " 한국의 젊은이들은 사회가 뭐라고 생각하든 간에 자신의 꿈을 좇아야하며, 예술가, 과학자, 요리사, 광대 등 어떤 꿈이더라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조언했다.

프랑스의 경제학자이자 역사학자로 프랑스 최고 지도자 양성소인 국립행정학교(ENA)를 졸업하고 경제학ㆍ정치학 2개 분야 박사학위를 취득한 아탈리는 <21세기의 승자>(1995) <21세기 사전>(1997년) <호모노마드-유목하는 인간>(2003) <인간적인 길>(2005) 등의 많은 저서를 펴냈고 그의 모든 책은 국내에서도 번역됐다. 오랜 기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의 경제고문과 유럽부흥개발은행(EBRD) 초대 총재를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올해 노벨평화사 수상자 무하마드 유누스 박사가 빈곤층을 위해 설립한 마이크로크레딧 금융기관인 그라민은행에서 힌트를 얻어 1998년 ‘플래닛 파이낸스’를 설립해 현재 회장을 맡고 있다.(김홍국 기자)

06. 10. 31.

 

 

 

 

P.S. 오늘부터 이타주의자가 되는 연습을 해야겠다(이기주의자들, 너넨 이제 끝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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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파벨 2006-10-31 09:49   좋아요 0 | URL
듣기만 해도 기분좋은 글이군요...^^

정말 저 분의 예측이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딸기 2006-10-31 09:49   좋아요 0 | URL
아 큰일이다... 나의 시대는 갔구만... (혼잣말입니다)

로쟈 2006-10-31 13:22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이타주의자들은 향후 50년간 참호 속에서 숨어지내야 될 거 같습니다. 그 담에 진짜로...
 

오랜만에 '한겨레21'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눈에 띈 칼럼을 옮겨온다 제목이 '지구에서 인류가 사라지면?'이니까 '로자의 방주'라는 카테고리에 딱 맞는 테마이기도 하다. 필자는 저명한 과학칼럼니스트 김동광씨이다. 예전에 교양과학서 전문번역집단이었던 과학세대의 리더격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요즘은 저술에도 주력하고 있는 듯하다(그와 함께 과학 저술가로서 기억해둘 만한 이름은 이인식씨이다). 그가 번역한 책들을 검색해보니 내가 갖고 있는 것만 해도 상당한 수에 달한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스티븐 제이 굴드나 스티븐 호킹의 책들이다. 국내에서도 굴드급의 과학 저술가가 나오기를 은근히 기대해본다(강조는 나의 것이다).

 

 

 

 

한겨레21(06. 10. 24) 지구에서 인류가 사라지면?

진화생물학자들은 생물의 기나긴 진화 과정에서 인류가 차지하는 위치를 밝혀내려고 노력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생물의 진화 과정을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했고, 단세포 생물에서 영장류에 이르는 과정을 일직선이나 계단처럼 매끄럽게 이어지는 단일한 경로로 간주하곤 했다. 인류의 탄생이 지극히 우연적인 과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생물 총회’가 열리면 인간은 퇴출 대상

그런데 인류가 등장한 세상은 그 이전에 견줘 너무나 크게 변화했다. 이제 인류가 등장하기 이전의 세계를 상상하기 힘들 정도이다.


△ 인간들이 생태계 깊숙이 들어가면서 자연의 자리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의 해안에서 하마 떼가 떠내려가고 있다.(사진/ REUTERS)

그 변화는 대부분 부정적인 방향으로 진행됐다. 일부 추정에 따르면 인류는 자연이 만들어내는 생산성의 약 40%를 무단으로 징발해서 오로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한다고 한다. 상당 부분이 먹고사는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른바 생활 수준의 향상으로 인해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화적 생활을 위해 들어가는 엄청난 양의 에너지와 물자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로 인해 불과 100여 년 전과 비교할 수도 없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쏟아낸다. 사람들이 도시를 짓고 농장을 만들면서 전유하고 있는 토지는 지구 전체 면적의 3분의 1에 이른다. 울창하던 숲과 지구의 허파이자 생물다양성의 보고로 알려진 열대우림도 이제는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오대양의 주요 어장들 중 상당수는 이미 오래전에 어자원이 고갈됐다. 남획과 오염, 그리고 서식지 파괴로 생존 기로에 서 있는 생태계의 다른 구성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인류는 터무니없는 탐욕과 횡포를 부리고 있는 셈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인류는 자신들끼리의 다툼으로 시시각각 생물권 전체의 존재 가능성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도박판을 벌이고 있다. 미국과 소련은 냉전 종식 이후 상당량의 핵무기를 해체하면서 핵으로 인한 절멸 가능성을 크게 줄이는 듯했지만 얼마 전부터 파키스탄 등이 다시 핵무장을 하면서 일촉즉발의 위험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더구나 북한과 미국이 핵을 둘러싸고 마주 달리는 폭주족처럼 누가 끝까지 버티느냐를 가리는 ‘겁쟁이 경기’를 벌이면서 자칫 한반도가 재앙의 터전이 될 수도 있는 위기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핵으로 인한 재앙은 생물권 전체의 파국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쯤 되면 유엔이 아니라 생물들의 대표가 한자리에 모여서 한반도를 둘러싼 위기 고조를 생물권 전체의 위기로 간주하고 시급한 해결책을 논의하는 생물권 임시 총회가 열릴 법도 하다. 거기에서는 사람과 도롱뇽, 귀신고래, 들국화 그리고 미생물까지 모든 생물종이 똑같은 의결권을 가진다고 가정한다면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과연 어떤 결정이 내려질까? 진화의 역사에서 가장 늦게 무대에 등장해서 가장 빠른 시간 동안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온갖 포악과 전횡을 해대는 골치 아픈 막내둥이를 영원히 퇴출하기로 결론짓지 않겠는가? 사실 그런 결정이 나도 우리로서는 별로 할 말이 없는 셈이다.

인간이 퇴출되어 어느 먼 외계 행성에서 재교육을 받기 위해 강제 송환됐다면, 지구는 어떻게 될까. <뉴사이언티스트> 최근호는 ‘사람이 없는 지구를 상상해보자’라는 특집 기사를 통해 지구에서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이 모두 사라졌을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예측했다(*이 기사는 아래에 옮겨놓았다). 미국 샌타바버라에 있는 국립생태분석종합센터의 보전생물학자인 존 오록은 사람의 자취가 사라지는 순간 지구의 생태계는 즉각적으로 호전되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한다. 가장 먼저 나타나는 변화로 밤하늘에서 인공 조명이 사라지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 돌아오게 된다. 지구 전체의 18.7%가 인공 불빛에 오염됐다지만, 웬만한 도시 지역에서는 별을 보기 힘든 지경이다. 한동안 재생 가능 에너지를 이용하는 자동 전등들이 빛을 내더라도, 유지·관리가 되지 않기에 지구의 밤에서 문명의 불빛이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원전의 방사능 누출도 빨리 복원돼

건물들과 도로는 어떻게 될까? 오늘날의 건물은 약 60년, 교량은 120년, 댐은 250년가량 견딜 수 있게 설계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수치는 누군가가 유지·관리를 하고 벌어진 틈을 메워주는 등 수리와 보수를 해줄 때 지속될 수 있고, 아무도 돌보지 않으면 훨씬 빨리 무너진다. 체르노빌 사고로 사람들이 철수한 프리프야트시가 실례이다. 올해로 체르노빌 사고가 일어난 지 꼭 20년이 된 이 도시의 건물들은 이미 붕괴가 진행 중이다. 그리고 태풍, 홍수 등의 자연재해로 입는 손상이 누적되면서 훨씬 빨리 폐허로 변할 수 있다. 그렇지만 건물이나 도로의 잔해들, 특히 콘크리트와 돌로 된 구조물의 일부는 수천 년 동안 남아 있을 것이다.


△ 지구촌의 약 19%가 인공 불빛에 오염됐다. 거대 건축물이 즐비한 이 지역은 인간이 사라진 상태에션 느리게 복구 될 수 밖에 없다(사진/ 한겨레 이정아 기자)

현재 가동 중인 원자력 발전소는 어떻게 될까? 핵폐기물 관리 전문가인 로드니 윙은 원자력발전소를 유지·관리하던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면 냉각수가 증발하고 결굴 원자로가 녹아내리는 참사가 빚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로 인해 엄청난 양의 방사능이 누출된다. 그렇지만 자연의 복원력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고 한다. 체르노빌의 경우에도 사람들이 철수한 뒤, 몇 년 만에 생태계가 복원되기 시작해서 현재는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늑대까지 번성하고 있다.

생태계의 복원 속도는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온난하고 습윤한 지역은 추운 지역에 비해 복원이 빠르게 진행된다. 사람의 토지 이용을 연구하는 생태학자 브래드 스텔폭스가 캐나다 지역을 대상으로 시뮬레이션한 결과 숲은 약 50년이 지나면 전 지역의 80%를 덮고, 200년 뒤에는 95%를 차지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반면 벼나 밀처럼 단일 품종이 경작되던 지역이 자연 상태로 돌아가기까지는 수세기가 걸릴 것이라고 한다. 보전생태학자들은 일부 지역의 경우 사람이 사라져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가축이나 애완동물의 운명은? 일부는 그 선조였던 야생동물의 상태로 돌아가겠지만, 오랜 세월에 걸친 인위 선택의 결과로 스스로 먹이를 찾거나 번식한 능력을 상실한 동물들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미국 환경보호국의 제이 라이히맨은 “사람이 사라진 들판에 푸들이 떼를 지어 달릴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고는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 유전자조작(GM) 작물들은 어떻게 될까? 일부는 야생종으로 살아남겠지만, 제초제 내성을 갖도록 조작된 식물들은 제초제가 없는 상황에서 경쟁종에 비해 유리할 것이 없기 때문에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사람이 사라지면 현재 멸종 위기에 처해 있는 동물들이 다시 번성할 수 있을까? 서식지 파괴가 멸종의 큰 원인이기 때문에 상황이 나아질 수 있지만, 일부 종은 이미 개체 수가 더 이상 복원될 수 없는 정도로 줄어들었기 때문에 크게 상황이 나아지기 힘들 전망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명맥을 유지하던 멸종위기종 가운데 상당수는 사람이 사라지면서 더 빨리 자취를 감출 수도 있다. 그 원죄는 인간에게 있지만 사람들을 그리워할 생물종은 이들이 유일한 셈이다.

대기과학자인 수잔 솔로몬은 화석연료 사용 등으로 대기 중에 방출된 이산화탄소가 기후에 미치는 영향은 1천 년 이상 계속되고, 남아 있는 과잉의 이산화탄소를 바다가 모두 흡수하기까지는 2만 년 이상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모든 요소들을 종합해서 지구상에서 인류가 남겼던 자취가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10만 년으로 예측된다. 먼 외계의 방문자가 지구를 찾아와 겉으로만 훑어본다면 어떤 문명의 흔적도 찾지 못할 것이다.

기후변화, 핵전쟁보다 무섭다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생각되는 인류 문명이 사라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며, 지배적인 종으로 군림하던 인간이 하루아침에 사라져도 지구와 생물권이 운행되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다. 오히려 피폐해지던 생태계는 즉각 복원 작업을 시작하고, 그 누구도 인간을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다. 생태학자들은 핵전쟁보다 더 심각한 위기가 갑작스런 기후변화와 그로 인한 생태계의 교란이라고 주장한다. 요즘 한반도는 들어보지도 못한 가을 더위에 시달리고 있다. 핵위기에 떠밀려 하찮은 현상으로 치부되지만, 어쩌면 우리를 더 낯선 상황으로 몰아갈 전조일지도 모르지 않은가.(김동광 과학저술가·고려대 강사)

Cover of  issue of New Scientist magazine 

Imagine Earth without people

  • Bob Holmes
  • Humans are undoubtedly the most dominant species the Earth has ever known. In just a few thousand years we have swallowed up more than a third of the planet's land for our cities, farmland and pastures. By some estimates, we now commandeer 40 per cent of all its productivity. And we're leaving quite a mess behind: ploughed-up prairies, razed forests, drained aquifers, nuclear waste, chemical pollution, invasive species, mass extinctions and now the looming spectre of climate change. If they could, the other species we share Earth with would surely vote us off the planet.

    15,589 Number of species threatened with extinction

    Now just suppose they got their wish. Imagine that all the people on Earth - all 6.5 billion of us and counting - could be spirited away tomorrow, transported to a re-education camp in a far-off galaxy. (Let's not invoke the mother of all plagues to wipe us out, if only to avoid complications from all the corpses). Left once more to its own devices, Nature would begin to reclaim the planet, as fields and pastures reverted to prairies and forest, the air and water cleansed themselves of pollutants, and roads and cities crumbled back to dust.

    "The sad truth is, once the humans get out of the picture, the outlook starts to get a lot better," says John Orrock, a conservation biologist at the National Center for Ecological Analysis and Synthesis in Santa Barbara, California. But would the footprint of humanity ever fade away completely, or have we so altered the Earth that even a million years from now a visitor would know that an industrial society once ruled the planet?

    9.7 Average eco-footprint of a US citizen, in hectares

    If tomorrow dawns without humans, even from orbit the change will be evident almost immediately, as the blaze of artificial light that brightens the night begins to wink out. Indeed, there are few better ways to grasp just how utterly we dominate the surface of the Earth than to look at the distribution of artificial illumination (see Graphic). By some estimates, 85 per cent of the night sky above the European Union is light-polluted; in the US it is 62 per cent and in Japan 98.5 per cent. In some countries, including Germany, Austria, Belgium and the Netherlands, there is no longer any night sky untainted by light pollution.

    18.7 Percentage of Earth's surface affected by light pollution

    "Pretty quickly - 24, maybe 48 hours - you'd start to see blackouts because of the lack of fuel added to power stations," says Gordon Masterton, president of the UK's Institution of Civil Engineers in London. Renewable sources such as wind turbines and solar will keep a few automatic lights burning, but lack of maintenance of the distribution grid will scuttle these in weeks or months. The loss of electricity will also quickly silence water pumps, sewage treatment plants and all the other machinery of modern society.

    The same lack of maintenance will spell an early demise for buildings, roads, bridges and other structures. Though modern buildings are typically engineered to last 60 years, bridges 120 years and dams 250, these lifespans assume someone will keep them clean, fix minor leaks and correct problems with foundations. Without people to do these seemingly minor chores, things go downhill quickly.

    The best illustration of this is the city of Pripyat near Chernobyl in Ukraine, which was abandoned after the nuclear disaster 20 years ago and remains deserted. "From a distance, you would still believe that Pripyat is a living city, but the buildings are slowly decaying," says Ronald Chesser, an environmental biologist at Texas Tech University in Lubbock who has worked extensively in the exclusion zone around Chernobyl. "The most pervasive thing you see are plants whose root systems get into the concrete and behind the bricks and into doorframes and so forth, and are rapidly breaking up the structure. You wouldn't think, as you walk around your house every day, that we have a big impact on keeping that from happening, but clearly we do. It's really sobering to see how the plant community invades every nook and cranny of a city."

    With no one to make repairs, every storm, flood and frosty night gnaws away at abandoned buildings, and within a few decades roofs will begin to fall in and buildings collapse. This has already begun to happen in Pripyat. Wood-framed houses and other smaller structures, which are built to laxer standards, will be the first to go. Next down may be the glassy, soaring structures that tend to win acclaim these days. "The elegant suspension bridges, the lightweight forms, these are the kinds of structures that would be more vulnerable," says Masterton. "There's less reserve of strength built into the design, unlike solid masonry buildings and those using arches and vaults."

    But even though buildings will crumble, their ruins - especially those made of stone or concrete - are likely to last thousands of years. "We still have records of civilisations that are 3000 years old," notes Masterton. "For many thousands of years there would still be some signs of the civilisations that we created. It's going to take a long time for a concrete road to disappear. It might be severely crumbling in many places, but it'll take a long time to become invisible."

    The lack of maintenance will have especially dramatic effects at the 430 or so nuclear power plants now operating worldwide. Nuclear waste already consigned to long-term storage in air-cooled metal and concrete casks should be fine, since the containers are designed to survive thousands of years of neglect, by which time their radioactivity - mostly in the form of caesium-137 and strontium-90 - will have dropped a thousandfold, says Rodney Ewing, a geologist at the University of Michigan who specialises in radioactive waste management. Active reactors will not fare so well. As cooling water evaporates or leaks away, reactor cores are likely to catch fire or melt down, releasing large amounts of radiation. The effects of such releases, however, may be less dire than most people suppose.

    The area around Chernobyl has revealed just how fast nature can bounce back. "I really expected to see a nuclear desert there," says Chesser. "I was quite surprised. When you enter into the exclusion zone, it's a very thriving ecosystem."

    The first few years after people evacuated the zone, rats and house mice flourished, and packs of feral dogs roamed the area despite efforts to exterminate them. But the heyday of these vermin proved to be short-lived, and already the native fauna has begun to take over. Wild boar are 10 to 15 times as common within the Chernobyl exclusion zone as outside it, and big predators are making a spectacular comeback. "I've never seen a wolf in the Ukraine outside the exclusion zone. I've seen many of them inside," says Chesser.

    The same should be true for most other ecosystems once people disappear, though recovery rates will vary. Warmer, moister regions, where ecosystem processes tend to run more quickly in any case, will bounce back more quickly than cooler, more arid ones. Not surprisingly, areas still rich in native species will recover faster than more severely altered systems. In the boreal forests of northern Alberta, Canada, for example, human impact mostly consists of access roads, pipelines, andother narrow strips cut through the forest. In the absence of human activity, the forest will close over 80 per cent of these within 50 years, and all but 5 per cent within 200, according to simulations by Brad Stelfox, an independent land-use ecologist based in Bragg Creek, Alberta.

    In contrast, places where native forests have been replaced by plantations of a single tree species may take several generations of trees - several centuries - to work their way back to a natural state. The vast expanses of rice, wheat and maize that cover the world's grain belts may also take quite some time to revert to mostly native species.

    At the extreme, some ecosystems may never return to the way they were before humans interfered, because they have become locked into a new "stable state" that resists returning to the original. In Hawaii, for example, introduced grasses now generate frequent wildfires that would prevent native forests from re-establishing themselves even if given free rein, says David Wilcove, a conservation biologist at Princeton University.

    Feral descendants of domestic animals and plants, too, are likely to become permanent additions in many ecosystems, just as wild horses and feral pigs already have in some places. Highly domesticated species such as cattle, dogs and wheat, the products of centuries of artificial selection and inbreeding, will probably evolve back towards hardier, less specialised forms through random breeding. "If man disappears tomorrow, do you expect to see herds of poodles roaming the plains?" asks Chesser. Almost certainly not - but hardy mongrels will probably do just fine. Even cattle and other livestock, bred for meat or milk rather than hardiness, are likely to persist, though in much fewer numbers than today.

    3.3bn Global population of cattle, sheep and goats

    What about genetically modified crops? In August, Jay Reichman and colleagues at the US 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s labs in Corvallis, Oregon, reported that a GM version of a perennial called creeping bentgrass had established itself in the wild after escaping from an experimental plot in Oregon. Like most GM crops, however, the bentgrass is engineered to be resistant to a pesticide, which comes at a metabolic cost to the organism, so in the absence of spraying it will be at a disadvantage and will probably die out too.

    Nor will our absence mean a reprieve for every species teetering on the brink of extinction. Biologists estimate that habitat loss is pivotal in about 85 per cent of cases where US species become endangered, so most such species will benefit once habitats begin to rebound. However, species in the direst straits may have already passed some critical threshold below which they lack the genetic diversity or the ecological critical mass they need to recover. These "dead species walking" - cheetahs and California condors, for example - are likely to slip away regardless.

    784 Number of species that have gone extinct in the wild since 1500 AD

    Other causes of species becoming endangered may be harder to reverse than habitat loss. For example, about half of all endangered species are in trouble at least partly because of predation or competition from invasive introduced species. Some of these introduced species - house sparrows, for example, which are native to Eurasia but now dominate many cities in North America - will dwindle away once the gardens and bird feeders of suburban civilisation vanish. Others though, such as rabbits in Australia and cheat grass in the American west, do not need human help and will likely be around for the long haul and continue to edge out imperilled native species.

    388 Number of species listed on the invasive species database

    Ironically, a few endangered species - those charismatic enough to have attracted serious help from conservationists - will actually fare worse with people no longer around to protect them. Kirtland's warbler - one of the rarest birds in North America, once down to just a few hundred birds - suffers not only because of habitat loss near its Great Lakes breeding grounds but also thanks to brown-headed cowbirds, which lay their eggs in the warblers' nests and trick them into raising cowbird chicks instead of their own. Thanks to an aggressive programme to trap cowbirds, warbler numbers have rebounded, but once people disappear, the warblers could be in trouble, says Wilcove.

    On the whole, though, a humanless Earth will likely be a safer place for threatened biodiversity. "I would expect the number of species that benefit to significantly exceed the number that suffer, at least globally," Wilcove says.

    On the rebound

    In the oceans, too, fish populations will gradually recover from drastic overfishing. The last time fishing more or less stopped - during the second world war, when few fishing vessels ventured far from port - cod populations in the North Sea skyrocketed. Today, however, populations of cod and other economically important fish have slumped much further than they did in the 1930s, and recovery may take significantly longer than five or so years.

    The problem is that there are now so few cod and other large predatory fish that they can no longer keep populations of smaller fish such as gurnards in check. Instead, the smaller fish turn the tables and outcompete or eat tiny juvenile cod, thus keeping their erstwhile predators in check. The problem will only get worse in the first few years after fishing ceases, as populations of smaller, faster-breeding fish flourish like weeds in an abandoned field. Eventually, though, in the absence of fishing, enough large predators will reach maturity to restore the normal balance. Such a transition might take anywhere from a few years to a few decades, says Daniel Pauly, a fisheries biologist at the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in Vancouver.

    With trawlers no longer churning up nutrients from the ocean floor, near-shore ecosystems will return to a relatively nutrient-poor state. This will be most apparent as a drop in the frequency of harmful algal blooms such as the red tides that often plague coastal areas today. Meanwhile, the tall, graceful corals and other bottom-dwelling organisms on deep-water reefs will gradually begin to regrow, restoring complex three-dimensional structure to ocean-floor habitats that are now largely flattened, featureless wastelands.

    Long before any of this, however - in fact, the instant humans vanish from the Earth - pollutants will cease spewing from automobile tailpipes and the smokestacks and waste outlets of our factories. What happens next will depend on the chemistry of each particular pollutant. A few, such as oxides of nitrogen and sulphur and ozone (the ground-level pollutant, not the protective layer high in the stratosphere), will wash out of the atmosphere in a matter of a few weeks. Others, such as chlorofluorocarbons, dioxins and the pesticide DDT, take longer to break down. Some will last a few decades.

    The excess nitrates and phosphates that can turn lakes and rivers into algae-choked soups will also clear away within a few decades, at least for surface waters. A little excess nitrate may persist for much longer within groundwater, where it is less subject to microbial conversion into atmospheric nitrogen. "Groundwater is the long-term memory in the system," says Kenneth Potter, a hydrologist at the University of Wisconsin at Madison.

    Carbon dioxide, the biggest worry in today's world because of its leading role in global warming, will have a more complex fate. Most of the CO2 emitted from burning fossil fuels is eventually absorbed into the ocean. This happens relatively quickly for surface waters - just a few decades - but the ocean depths will take about a thousand years to soak up their full share. Even when that equilibrium has been reached, though, about 15 per cent of the CO2 from burning fossil fuels will remain in the atmosphere, leaving its concentration at about 300 parts per million compared with pre-industrial levels of 280 ppm. "There will be CO2 left in the atmosphere, continuing to influence the climate, more than 1000 years after humans stop emitting it," says Susan Solomon, an atmospheric chemist with the US National Oceanic and Atmospheric Administration (NOAA) in Boulder, Colorado. Eventually calcium ions released from sea-bottom sediments will allow the sea to mop up the remaining excess over the next 20, 000 years or so.

    Even if CO2 emissions stop tomorrow, though, global warming will continue for another century, boosting average temperatures by a further few tenths of a degree. Atmospheric scientists call this "committed warming", and it happens because the oceans take so long to warm up compared with the atmosphere. In essence, the oceans are acting as a giant air conditioner, keeping the atmosphere cooler than it would otherwise be for the present level of CO2. Most policy-makers fail to take this committed warming into account, says Gerald Meehl, a climate modeller at the National Center for Atmospheric Research, also in Boulder. "They think if it gets bad enough we'll just put the brakes on, but we can't just stop and expect everything to be OK, because we're already committed to this warming."

    That extra warming we have already ordered lends some uncertainty to the fate of another important greenhouse gas, methane, which produces about 20 per cent of our current global warming. Methane's chemical lifetime in the atmosphere is only about 10 years, so its concentration could rapidly return to pre-industrial levels if emissions cease. The wild card, though, is that there are massive reserves of methane in the form of methane hydrates on the sea floor and frozen into permafrost. Further temperature rises may destabilise these reserves and dump much of the methane into the atmosphere. "We may stop emitting methane ourselves, but we may already have triggered climate change to the point where methane may be released through other processes that we have no control over," says Pieter Tans, an atmospheric scientist at NOAA in Boulder.

    No one knows how close the Earth is to that threshold. "We don't notice it yet in our global measurement network, but there is local evidence that there is some destabilisation going on of permafrost soils, and methane is being released," says Tans. Solomon, on the other hand, sees little evidence that a sharp global threshold is near.

    All things considered, it will only take a few tens of thousands of years at most before almost every trace of our present dominance has vanished completely. Alien visitors coming to Earth 100,000 years hence will find no obvious signs that an advanced civilisation ever lived here.

    Yet if the aliens had good enough scientific tools they could still find a few hints of our presence. For a start, the fossil record would show a mass extinction centred on the present day, including the sudden disappearance of large mammals across North America at the end of the last ice age. A little digging might also turn up intriguing signs of a long-lost intelligent civilisation, such as dense concentrations of skeletons of a large bipedal ape, clearly deliberately buried, some with gold teeth or grave goods such as jewellery.

    And if the visitors chanced across one of today's landfills, they might still find fragments of glass and plastic - and maybe even paper - to bear witness to our presence. "I would virtually guarantee that there would be some," says William Rathje, an archaeologist at Stanford University in California who has excavated many landfills. "The preservation of things is really pretty amazing. We think of artefacts as being so impermanent, but in certain cases things are going to last a long time."

    Ocean sediment cores will show a brief period during which massive amounts of heavy metals such as mercury were deposited, a relic of our fleeting industrial society. The same sediment band will also show a concentration of radioactive isotopes left by reactor meltdowns after our disappearance. The atmosphere will bear traces of a few gases that don't occur in nature, especially perfluorocarbons such as CF4, which have a half-life of tens of thousands of years. Finally a brief, century-long pulse of radio waves will forever radiate out across the galaxy and beyond, proof - for anything that cares and is able to listen - that we once had something to say and a way to say it.

    But these will be flimsy souvenirs, almost pathetic reminders of a civilisation that once thought itself the pinnacle of achievement. Within a few million years, erosion and possibly another ice age or two will have obliterated most of even these faint traces. If another intelligent species ever evolves on the Earth - and that is by no means certain, given how long life flourished before we came along - it may well have no inkling that we were ever here save for a few peculiar fossils and ossified relics. The humbling - and perversely comforting - reality is that the Earth will forget us remarkably quickly.(From issue 2573 of New Scientist magazine, 12 October 2006, page 36-41)

    06.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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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의 기사들을 훑어보다가 '번역가의 괴로움'이란 칼럼을 읽게 되었다. 제목 자체가 최근에 문제된 '대리번역' 파문과 연관이 있을 거라는 건 칼럼을 읽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특이할 만한 사항은 가브리엘 마르케스 전문 번역가로 유명하다는(아마도 마르케스의 노벨상 수상에도 일조했을 듯싶다) 그레고리 라바사를 소개하고 있는 대목이다.

     

     

     

     

    <백년의 고독> 혹은 <백년 동안의 고독> 영역본의 그의 작품이라는데(국내에도 여러 번역본이 출간돼 있다), 마시멜로보다는 라바사에 흥미를 느껴서 몇 가지 검색을 해보았다. 한겨레의 칼럼과 함께 재작년 뉴욕타임즈 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06. 10. 24) 번역가의 괴로움

    <마시멜로 이야기>라는 책의 대리번역 또는 이중번역 논란으로 모처럼 번역가들한테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 덕분에 번역가들의 어려운 처지도 약간 드러났으나, 아무래도 나쁜 인상이 더 클 것 같다. 굳이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번역가들이 주목받는 건 흔히 부정적인 사건이나 경험을 통해서다. 독자들은 번역이 너무 엉망이라고 느낄 때나 ‘도대체 누가 번역했어’ 하며 이름을 확인하는 게 보통이다. 번역의 어려움을 알 만한 학자나 전문가들 사이에도 원전을 강조하고 번역서와 번역가를 낮춰보는 경향이 꽤 있다.

    하지만 훌륭한 번역가가 문화에 이바지하는 바는 셈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이 점은 미국의 유명 번역가 그레고리 라바사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1922년 쿠바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60년대 초부터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를 쓰는 작가 약 30명의 작품 60권 정도를 영어로 번역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남미 문학이 이렇게 세계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70년에 번역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백년의 고독>은 또하나의 훌륭한 창작품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이 말엔 긍정과 부정의 의미가 함께 담겨 있다.

     

    라바사에게도 번역은 쉽지 않은 작업인 듯하다. 책 전체를 미리 읽지 않고 읽어가면서 번역하기로 유명한 그는 지난해 쓴 회고록 <이것이 반역이라면>에서 번역을 모순적으로 규정한다. 어떤 대목에서는 그저 ‘단어들을 따라가기’로 묘사하다가, 다른 대목에서는 ‘개인적인 선택에 근거한’ 아주 주관적인 작업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만큼 번역은 미묘하고 까다로운 일이다. 독자들이 이런 어려움까지 알 필요는 없겠지만, 책을 잡을 때 ‘이름 없는 봉사자’인 그들을 한번 생각해주는 정도의 관심은 필요할 것이다.(신기섭 논설위원)

    A Translator's Long Journey, Page by Page

    By ANDREW BAST

    Published: May 25, 2004

    On Gregory Rabassa's crowded bookshelves is a first edition of "Rayuela," the experimental 1963 novel by the Argentine novelist Julio Cortázar. Mr. Rabassa had just finished his Ph.D. in Portuguese in the mid-1960's when an editor at Pantheon — who had noticed his work editing a failed literary magazine at Columbia University — asked him to translate Mr. Cortázar's book from Spanish into English. Without having read what has been called a "fiendishly esoteric" novel, Mr. Rabassa sat down and typed a draft in English, word by word. In 1967 Mr. Rabassa's work, titled "Hopscotch" in English, won the first National Book Award for translation.

    "I've got 50 of them behind me," Mr. Rabassa said, reflecting in the Upper East Side apartment he shares with his wife, Clementine. He has a slight build and white hair that he wears like a crown. He is surrounded by novels written by literary giants like Jorge Amado, Mario Vargas Llosa, José Lezama Lima and Gabriel García Márquez, the original Spanish or Portuguese edition beside his published English translation.

    Now, at 82, Mr. Rabassa is finally going to publish his own first full-length book, "If This Be Treason: Translation and Its Dyscontents," a playful reflection on his life's work that New Directions is planning to bring out next spring.

    "My thesis in the book is that translation is impossible," Mr. Rabassa said. "People expect reproduction, but you can't turn a baby chick into a duckling. The best you can do is get close to it."

    If that is true, then Mr. Rabassa has gotten about as close as one can. He is widely considered one of the greatest practitioners of his craft. "Rabassa's great gift is to find the music in English that is true to the language of a wide range of writers in Spanish," said Dan Simon, the founder of Seven Stories Press, which has published some of Mr. Rabassa's translations. "Had Rabassa become a diplomat or brain surgeon, we could easily imagine not having readable translations of Cortázar and García Márquez."

    Yet for all the accolades, translation is still a difficult and poorly understood art. Often the translator's name will not even appear on the cover of the book, Mr. Simon said, yet "a poor translation of a text kills it in the market."

    Walter Benjamin, the German literary critic, once wrote, "No translation would be possible if in its ultimate essence it strove for likeness to the original."

    Mr. García Márquez has said that Mr. Rabassa read "One Hundred Years of Solitude," sat down and then rewrote it in English. (He also said that Mr. Rabassa's translation improved on the original.)

    But Mr. Rabassa contends that rewriting is not at all what he does: "I'm reading the Spanish, but mostly I'm reading it in English, and it comes out that way.

    "When I talk about it, I say the English is hiding behind his Spanish. That's what a good translation is: you have to think if García Márquez had been born speaking English, that's how a translation should sound."

    In the case of Cortázar, Mr. Rabassa developed a relationship with him, and they became good friends, spending days and nights listening to 78's of Count Basie and Lester Young. Mr. Rabassa translated Luis Rafael Sánchez and lounged with him on the beaches of Puerto Rico. And after translating "Seven Serpents and Seven Moons" by Demetrio Aguilera-Malta, a former Ecuadorian ambassador to Mexico, he ended up with one of the author's paintings hanging on his apartment wall.

    Yet Mr. Rabassa has also produced brilliant translations without developing any relationship with the author. Jorge Armado and Mr. García Márquez wanted nothing to do with their books in English.

    Mr. Rabassa said he typed his translation of Mr. García Márquez's "One Hundred Years of Solitude" page by page, just as he did with Cortázar's novel. Yet unlike his blind excursion with "Hopscotch," Mr. Rabassa had already read Mr. García Márquez's magical epic about the Buendía family, before he tried the translation. "I knew it was a damn good book, but it wasn't as much fun knowing all about it," he said.

    Sitting in his armchair, nibbling on a greek pastry, Mr. Rabassa explained that titles pose their own challenge. He translated the 19th-century Portuguese classic "Memórias póstumas de Bráz Cubas" by Joaquim Maria Machado de Assis, which literally means "The Posthumous Memoirs of Brás Cubas." When Noonday Press issued the novel with the title "Epitaph of a Small Winner," Mr. Rabassa complained.

    "You don't mess around with a classic," he said. "That's like calling `Madame Bovary' the story of a middle-class adulteress." (Oxford University Press published the book with Mr. Rabassa's translated title in 1997.)

    Half of Mr. Rabassa's book will consist of reflections on each of the many authors he has translated, and half will be a memoir of how he ended up as a translator. The epilogue, he said, will be printed unfinished, as "translation is never finished."

    Mr. Rabassa was born in Yonkers in 1922. His father was a Cuban sugar broker, but, he said, "the old man didn't speak much Spanish around the house." The young Mr. Rabassa studied French and Latin in high school; then at Dartmouth, he said, he "began collecting languages." There he studied Portuguese, Russian and German. In conversation, his voice wanders seamlessly among the five he still speaks.

    "I'd dabbled in Italian," Mr. Rabassa said. "But then I bought a beautiful edition of Dante. I used Spanish and Portuguese — they're so similar to Italian — as I went along, substituting the real Italian words, and finally I was talking Italian."

    In 1942 Mr. Rabassa volunteered for the Army and, because of his language skills, ended up in the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Mr. Rabassa translated encryptions, or what he called English into English, and he also conducted interrogations.

    When he returned to the United States after spending time in Italy and Northern Africa, Mr. Rabassa lived on Morton Street, watched Charlie Parker play in Greenwich Village and wrote poetry. He studied for his master's in Spanish at Columbia, then, tired of the language, kept on with his studies but finished his doctorate in Portuguese. At a cocktail party Mr. Rabassa met an administrator at Queens College and he ended up being hired as a professor there. He still teaches the freshman lecture course Hispanic Literature in Translation.

    "When I began teaching," he said, "I was the same age as my students, and I still labor in the delusion. So it's a good, youthful operation."

    Mr. Rabassa says that although he is translating a new generation of Hispanic writers, little has changed since he translated the giants. Despite the differences in writing styles, the way he approaches the text is essentially the same.

    "They're all so different, the ones I did," he said. "I think it works because I don't think I have a translation style. It's a positive feeling I have about them. I find a lot of instinct in what I do. You have to just hit it right. I'm never sure whether something is right, but I know damn well when something is wrong."

    06.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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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itournelle 2006-10-24 01:48   좋아요 0 | URL
    * 퍼 갈께요...요즘 정지영씨와 관련되어 있는 일련의 사건을 보면서 맘이 찹작함을 많이 느끼는데, 괜찮은 글인 것 같습니다.

    이네파벨 2006-10-24 10:11   좋아요 0 | URL
    저도 퍼갈께요...고맙습니다.

    sommer 2006-10-24 17:29   좋아요 0 | URL
    익명의 내면성을 외재화하는 게 번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마치 헤겔의 변증법을 외재화된 자기 의식으로 귀환하는 것의 불가능성에 대한 고찰로 파악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기인 2006-10-24 21:46   좋아요 0 | URL
    저도 퍼갑니다. 공익하면서는 번역 알바나 할까 생각중인데, 페이와 노고를 대비해보면 정말 답 안나오는 일이기도 해서... 고민중입니다. 다시 사교육계에 투신(?)해야 하나 하고 ㅠㅜ

    로쟈 2006-10-24 23:00   좋아요 0 | URL
    호의적인 반응들을 보여주셔서 다행입니다. 번역, 더 나아가 '좋은 번역'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대우가 좀 달라져야 한다는 지론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것이 '새로운 계몽'에 가장 긴요한 수단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구요...
     

    점잖은 제목을 달긴 했지만 원제는 '역자에게 멱살잡힌 사연'이라는 '출판인의 편지'이며, 철학 전문출판사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이제이북스 전응주 사장의 글이다(전사장의 언론 인터뷰를 이전에 옮겨놓은 기억이 있다). 재작년 여름 교수신문에 게재됐던 것인데(그러니까 내가 한국에 있지 않을 때이다) 뒤늦게 옮겨놓는 것은 담뽀뽀님의 서재에 옮겨진 걸 보고서 '번역 관련'인지라 많은 분들과 공유해도 괜찮겠다고 판단해서이다. (인문서) 번역 출판에서의 역자와 편집자간의 관계와 윤리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보도록 하는 글이기에.  

    교수신문(04. 08. 26) 역자에게 멱살잡힌 사연

    번역서의 경우, 책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은 역자다. 편집자의 역할은 역자에게 필요한 자료와 정보를 제공하고, 윤문을 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번역과 편집이라는 것이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하는 작업이고 내용을 놓고서 따지는 일이다보니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번역이 바라는 정도의 완성도를 갖추지 못한 채 편집자에게 넘어오는 경우, 편집자는 고심해서 결단을 내려야한다. 문제 있는 부분을 다시 번역하거나, 새로운 역자를 찾든지, 아니면 어는 정도 수위에서 교열작업을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번역자와 편집자 사이에 마찰이 생기기 마련인데, 제대로 책을 내자는 뜻을 서로 잘 이해해 별다른 대립이나 갈등이 없이 작업이 이루어지면 다행이지만, 서로의 자존심 내지 자신의 의견에 대한 고집 때문에 불편한 관계에서 작업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 책이 나오더라도 감정의 앙금이 꽤나 오랫동안 지속되며, 책의 완성도도 떨어진다.

     

     

      

     


    50여종의 번역서를 내는 동안 겪은 몇 가지 경우를 말하려 한다. 먼저 <헤겔 또는 스피노자>를 번역하신 진태원 선생을 들고 싶다. 번역자의 원고가 너무나도 공을 들인 결과물이었고, 그 분야를 전공한 사람에게 외주교열자 역시 최선을 다해 부족한 부분을 보충했기에, 편집자는 편안한 마음으로 교정과 윤문을 하면서 번역자와 의견을 교환했으며, 결과도 만족스러웠다. 사실 번역자는 번역이 끝난 후 주변의 동료들과 번역을 같이 읽고서 내용과 용어를 여러 번 고친 후 출판사에 원고를 넘겼던 것이다. 이는 분명 번역자와 편집자가 이상적으로 작업을 한 경우이며, 그 이후 2종의 책을 번역하고 있다(*현재까지 출간된 건 <헤겔 또는 스피노자>와 <스피노자와 정치> 두 권이다. 곧 한권 더 출간되는 것인지?).

    이와 달리, <서양 철학사>의 경우 어떤 번역자의 원고는 거칠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빠진 부분도 있으며 앞뒤의 내용이 서로 맞지 않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이 있는 상태로 넘어왔다. 빠진 부분들을 채우고 내용상 문제 있는 부분들을 고치면서 번역자와 직접 만나 내용을 고치거나 몇 번 교정지가 오고갔으나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 별수 없이 편집진이 달라붙어 하나하나 다시 고치기 시작했고, 몇 달에 걸쳐 작업이 끝났을 때는 사실상 새로 번역한거나 진배없었다. 이 과정에서 번역자의 후배이기도한 편집자는 멱살까지 잡히는 일도 겪었다.

    (*)거명된 <서양철학사>는 앤서니 케니가 공저자들고 함께 엮어낸 욕스포드판 철학 개론서이다. 나는 이 글과 무관하게 이 번역서에 문제가 좀 있다는 이야기를 접했었고 당연히 구입하지 않았었다. 참고로 케니가 단독으로 쓴 <서양철학사>(동문선, 2003)도 번역/출간돼 있다. 알라딘의 리뷰에 따르면, 칸트의 정언명령을 "다만 당신이 할 수 있는 동시에 하게 될 처세법에 따라서 그것이 보편법칙이 될 것을 행동하라", "자신의 몸에 대해서건 다른 사람들의 몸에 대해서건, 언제나 인류를 다루는 방식으로, 수단으로 뿐만 아니라 늘 목적으로 그렇게 행동하시오"라는 식으로 '독특하게' 번역해놓은 만큼 역시나 손에 집어드는 데에는 무모한 용기와 남아도는 돈이 필요한 책으로 보이지만.

    번역자도 편집자도 서로 책임을 회피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했으며, 결국 대표인 내가 최종 책임을 지고 직접 교열 작업에 들어갔으며, 약 8개월이 소요되었다. 번역자 중 몇몇은 예전부터 꽤나 가깝게 지내던 사이인데, 이 일로 지금까지도 소원하다. 최악의 경우는 도저히 번역이라고 말할 수 없는 원문에는 없는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진 창작물로 원고를 넘긴 경우로, 고심 끝에 계약을 파기하고 다른 사람에게 새로이 번역을 맡기게 되었다. 처음의 번역자의 이름으로 책을 낸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경우였으며, 아직 그 책은 출간되지 못하고 번역 중이다. 번역자와 편집자 둘 다 이 일을 떠올리며 몹시 불쾌해하고 있을 것이다(*절친한 사이라면 서로간에 번역과 편집을 맡지 말아야 하는 모양이다. 친구끼리 빚보증 서지 않는 것처럼).

    번역자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대체적으로 번역자는 해당 분야를 어느 정도 이상 공부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번역한 것이 최고이며, 편집자 누구도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그런 아집을 가지지 않기를 바란다. 편집자를 완성도 높은 책이 나오기까지의 동반자로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 진정 좋은 책이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으로 나오는 번역이니만큼, 번역에 책임을 지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번역에 임하기를 부탁드린다. 번역은 몹시 힘든 작업이다. 번역자의 노고에 비추어볼 때, 번역자가 받게 되는 보상은 분명 적다. 하지만 보상은 적지만 번역자가 보람을 느끼게 되는 일은, 편집자와 호흡을 맞춘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리라 믿는다. 그리고 이것을 실현하는 것이 편집자의 행복일 것이다(*요컨대, 편집자가 행복한 나라, 그게 번역/출판의 선진국이다!).

    06.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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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드 2006-10-18 00:47   좋아요 0 | URL
    진선생님의 이름을 보게 되는군요. ^^

    로쟈 2006-10-18 01:08   좋아요 0 | URL
    지금쯤은 아마 파리에 가 계시겠네요...

    바라 2006-10-18 04:04   좋아요 0 | URL
    또 나올 그 한권은 <마르크스의 유령들>일지도 모르겠네요...

    자꾸때리다 2006-10-18 09:42   좋아요 0 | URL
    아직 한국에 있사옵니다.

    로쟈 2006-10-18 16:03   좋아요 0 | URL
    바라님/ 제 짐작에도 그런 거 같습니다. 고대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완소지윤님/ 잘 아시나 보네요. 북핵문제가 발목을 잡고 있는 건가요...

    자꾸때리다 2006-11-25 00:00   좋아요 0 | URL



    왜 이렇게 거짓말이 하나의 진실로서 난무하고 그것을 마치 사실처럼 믿고 거기에다 의미까지 부여하는 멍청한 놈이 나타나는지 모르겠다. 내 생각에 그는 지독한 열등감이 사로잡힌, 그러나 매우 똑똑한 자였다고 기억한다. 그가 출판사를 열었을 때 아마도 모두가 마치 자신의 일처럼 그것을 좋아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기념으로 여럿이 철학사 책 하나를 번역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당연히 출판계약을 한 적도 없었고, 번역료를 인세로 할 것인지, 아니면 매절로 할 것인지, 매절로 한다면 얼마나 할 것인지조차 계약을 한 적이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사실 그런 것들을 따질 필요도 없는 그런 관계였다.




    번역 원고는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제 날짜에 맞추어 진행되었다. 원문과 확인하여 틀린 부분이 있으면 수정하면서 우리말로 읽히지 않는 것을 우리말에 맞게 고쳤다면 이 원고가 책으로 나오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사정인지 모르지만 번역된 원고를 자기 입맛에 맞추어 고치기 시작했다. 고친 원고의 내용이 틀린 부분이 생겨나 다시 고쳐야 하는 경우도 일어났다. 그런 <헛수고>를 하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하여튼 예상보다 어렵게 책이 나왔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났던가 <교수신문>에 번역자와 편집자에 관련된 그와 관련된 기사가 실렸다. 그 내용은 선배인 번역자의 하나가 후배인 편집자의 멱살을 잡았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꾸며 만드는 놈이나 이야기를 퍼 나르는 놈이나 이야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놈들이 이 기사의 내용을 거의 사실로서 간주한다. 이야기를 꾸며 내는 놈은 지가 꾸며 내면서 마치 이 이야기가 사실인 것처럼 여길 수도 있겠다. 이 이야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놈은 마치 자신이 이 책을 사지 않은 것이 이 책의 번역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따라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사실처럼 확신하고 있다. 게다가 고약한 것이 이 책의 원래 편집책임을 맡은 철학자의 다른 번역서의 오역까지 지적함으로써 읽기에 따라 이 책이 오역의 온상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호기심이 강한 멍청한 인간들이 이 꾸며진 이야기가 감명을 받거나 흥분하면서 마치 진리인 것처럼 간주하고 있다.




    번역에 관여 했던 한 사람은 그를 고발하겠다고 흥분했다. 고발의 이유는 인신공격이며, 없는 사실을 마치 있는 사실처럼 날조했다는 것이다. 분명히 이 책은 편집책임을 맡은 철학자나 그 글을 쓴 몇몇 철학자가 대단히 유명한 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좋은 책은 아니다. 책 가운데 나오는 멋있는 사진이나 그림을 제외하면 그 책이 일반 독자를 의도하는 것인지 전문가를 의도하는 것인지조차 불분명하다. 게다가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번역 부분은 사실 원문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렇게 되어 있다. 원문이 제대로 이해될 수 없게 되어 있으니 번역을 해보았자 우리말로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적절하게 되어 있지 않은 원문조차 고쳐 나가면서 번역을 했더라면 훨씬 좋아질 수 있지만, 그러나 이런 종류의 책에 그러한 수고를 해야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번역을 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책의 성격을 정확하게 지적한 역자 서문조차 그 출판사는 아무런 허락도 없이 바꾸어 버렸다. 한 마디로 그 바뀐 내용은 그 책이 최고의 철학사 책이라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출판사가 임의로 바꾸어 버린 내용에 대해서 책임을 질 필요가 없고 다만 거기 이름이 박힌 역자들이 책임을 진다는 사실이다.




    매우 오래 동안 나는 그와 친교를 맺어 왔지만, 바로 이 일 때문에 그를 다시 만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교수신문>에서 꾸며낸 이야기처럼 번역과 관련된 그 일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잘못을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 그의 성향이 싫었고, 친한 사람에게 오히려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기본적 품격조차 그에게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을 만나 이야기하기에도 바쁜 세상에 인간 아닌 것들을 만나 이야기하는 것은 참으로 시간 낭비일 것이다. 출판사를 만들 때부터 철학책을 간행하자고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상업적인 이유를 제시하면서 그럴 수 없다고 했다. 내 기억으로는 죽어도 철학책을 내지 않겠다는 그가 마치 몇몇 고전적 철학책을 간행한 후에 인문학 부흥의 기수처럼 신문에서 평가받는다. 흘러간 가수의 노래, <거짓말이야>라는 것이 유치하게도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게다가 여기에 놀아나는 소위 인터넷 <먹물>들의 거짓말과 허풍이 참으로 비지성적이다. 이 꾸민 이야기에 감격하는 그대여, 인터넷 공간에서 사기 치지 말고 공부하라.

    자꾸때리다 2006-11-25 00:00   좋아요 0 | URL
    김영건 선생의 글입니다.

    로쟈 2006-11-25 00:41   좋아요 0 | URL
    정확한 출처를 밝혀주시면 좋겠네요. 친한/친했던 사람들끼리의 티격태격은 관심사가 아니고 독자로선 어떤 책이 제값을 하는 것이지만 궁금할 따름입니다. 역자들 스스로가 별로 좋은 책이 아니라고 한다면 사실 (일반 독자로선) 오역이냐 아니냐도 별 문제일 거 같습니다...

    페일레스 2006-11-25 05:21   좋아요 0 | URL
    http://blog.naver.com/sellars/100031118805 완소지윤님이 퍼오신 글의 출처입니다. 얼마 전에 저 책에 대해서(정확히 말하면 저 기사에 대해서) armarius.net에서 좀 얘기가 있었습니다. 저 블로그가 김영건님의 블로그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로쟈 2006-11-26 13:3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amarius.net에서의 '얘기'는 못 찾겠군요. 여하튼 '동업자들'끼리 '친구'가 되기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지요...

    Octopus 2007-08-12 13:17   좋아요 0 | URL
    음 이런 경우는 흔히 있는 일이기는 합니다만. 이런 상황을 방지하려면 시스템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만약에 출판사가 역자를 보는 안목이 있다면(또는 자기 입맛에 맞는 역자를 고를 안목이 있다면), 아니면 적어도 출판사측에 체계적인 계약 원칙이 있어서 먼저 원고의 한 꼭지를 받아보고 그 원고에 대해 평가한 뒤 역자와 서로 대화를 나눠보고 나서 서로의 의견이 맞지 않으면 계약을 파기한다든가, 미리 받아본 꼭지가 오케이 나올 수준일 경우 공동의 번역-교정 원칙을 먼저 정한 다음에 이후 계약과 작업을 진행한다면 이런 일은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겠습니다. 위의 경우 아마도 번역원고에도 문제가 있었겠지만 저로서는 먼저 한국의 후진적인 출판 시스템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출판사로서는 좋은 역자 만나는 일이 하늘의 별따기라고 하겠지만 도돌이로 역자가 좋은 출판사를 만나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니깐요. 일도 지지리 못하는데다 함부로 전횡 부리는 출판사도 많습니다.

    사실 좋은 역자보다 더 귀하고 높이 쳐주어야할 것은 안목있고 유능한 편집자입니다. 대학이 좋은 번역자를 길러내지 못하는 한 좋은 역자를 발굴하고 북돋워주는 것(공동 작업, 높은 원고료)은 좋은 편집자와 출판사일 수밖에 없습니다.

    위 책은 공동 필자의 개론서 같은데, 번역도 공동역으로 여러 분이 나눠 하셨군요. 이런 경우 말썽이 날 가능성이 정말 높죠. 보통 이렇게 학계 인맥에 대충 기대서 기획하고 번역되는 책들은 원고나 출판 과정에 문제가 있어도 인간관계 때문에 출판사에서 대충 넘어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위 출판사 사장님은 아주 용감하게 이를 글에 발표하셨는데 어떤 사람은 이를 두고 그만큼 번역자들이 문제가 많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엔 많은 부분 출판사의 책임회피로 보입니다. 애초 이런 기획 자체, 역자 선정 모두 출판사의 몫이니까요.

    로쟈 2007-08-12 14:28   좋아요 0 | URL
    이 페이퍼 때문에 뒤에서 욕을 먹기도 했는데, 출판사측과 역자들간의 반목이 생각보다 심각한 경우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