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의 '18.0'을 훑어보다가 주목하게 된 키워드는 '개중'과 '대중 지성'이다(이 두 단어가 한때 유행했던 '다중'을 밀어젖히는 것인가?). 각각 두 가지 기사에서 키워드로 쓰이고 있는데,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최근의 출판 트렌드를 읽기 위한 키워드로 '개중'을 들고 나오고, 고명섭 기자는 '수유=너머'의 '대중 지성 프로젝트'를 소개하면서 '엘리트 지성'의 상대어로 '대중지성'을 자리매김하고 있다. 과문한 탓인지 '개중'이란 말은 생경한데, 한기호 소장의 칼럼에서 처음 보았다(번역어인가?). 여하튼 어감상(아마 이 어감도 고려됐을 터인데) 약간 불편한 느낌을 주는 '개중'과 다른 한편으로 모순형용처럼 느껴지는 '대중지성'이 최근의 출판계와 인문학 동네를 특징지어줄 수 있는 키워드들이라는 건, 키워드들일 수 있다는 건 알아볼 수 있겠다. 관련기사들을 옮겨놓는다.  

한겨레(07. 01. 26) [한기호의출판전망대] 실리 추구 나서는 ‘개중’들

지난해 3월 나는 이 칼럼에서 문화시장의 변화로 ‘87’이 지고 ‘97’이 뜬다고 한 적이 있다. 87은 민주화의 원초적 체험인 6월 항쟁을 말하고 97은 세계화의 원초적 체험인 외환 위기를 말한다. 그렇다면 올해 2007년 출판시장은 우리에게 어떤 체험을 안겨다줄까? 나는 감히 ‘개중화’의 원초적 체험이라고 말하고 싶다.

‘개중’이란 개인과 대중을 합한 말이다. 대중은 세중(細衆)의 단계를 거쳐 이제 개중이 되었다. 작년에 <타임>에서 ‘개중’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을 정도다. 개중, 그들은 혼자이고 원룸에 살면서 휴대전화나 메신저로 타인과 대화를 나누며 블로그를 통해 자신을 발신하는 등 철저하게 ‘1인용’으로 생활하지만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지혜가 필요할 때는 대중에게 손을 내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군중(crowd)과 아웃소싱을 합한 ‘크라우드소싱’이라는 신조어는 그래서 등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미 기업이나 개인이 어려운 과제에 직면할 경우 그 해답을 인터넷을 통해 대중에게 묻는 일이 잦다. 물론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디지털 기술과 웹 2.0이라는 기구이다. 출판에서의 시민저널리즘은 크라우드소싱의 개념을 바탕으로 등장한 것이다.

지난해에 ‘나만의 행복’을 갈구했던 개중은 올해 ‘현명한 삶’을 추구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현명이란 철학자들이 갖는 지혜를 뜻하는 게 아니다. 영악스럽다고 할 정도로 일과 개인생활에서 실리를 추구하는 삶을 말한다. 2006년, 한때 책과 ‘거리’를 두던 20대 여성이 책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들의 손에 쥐어진 책은 문학작품이나 인문사회과학서적이 아니라 자기계발서였다. 이 분야에서 가장 많이 팔린 <마시멜로 이야기>나 <배려> 같은 책은 어린이용으로도 따로 출간되고 있으니, 20대가 대학의 교문을 나서기도 전에 ‘처세’의 기술부터 배우는 것을 탓할 수도 없다.

그들은 올해 나만의 ‘스타일’에서 한 단계 진전한 ‘뷰티블 에이징’(beautiful aging)을 더욱 열렬하게 추구할 것으로 예상되며, 실행의 방향을 세밀하게 제시하는 미용, 패션, 여행, 건강, 문화 등의 책을 많이 찾을 것으로 보인다. 젊은 여성들이 즐겨 읽는 문학을 우리는 ‘칙릿’이라 부른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헬렌 필딩 지음, 문학사상사 펴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로렌 와이스버거 지음, 문학동네 펴냄), <달콤한 나의 도시>(정이현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등은 이 땅에서도 통한 대표적인 칙릿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편집자다. 특히 <악마를 프라다를 입는다>에 등장하는 패션지의 편집장은 자본주의의 신기루로 묘사되기도 한다. 하긴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잘 나가는’ 편집자가 등장하는 예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우연일까? 결코 아닐 것이다. 이야기의 중심에 서는 인물이 ‘잘 나가는’ 학자나 저널리스트에서 편집자로 바뀌는 이유는 분명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인간이 지녀야 할 최고의 미덕으로 편집자적 안목을 꼽기 시작했다는 것에서 찾고 싶다. 과거에는 정보의 원천 생산자나 전달자가 세상을 주도했지만 정보의 소유권마저 개중에게 넘어간 지금은 그 위력이 크게 떨어졌다. 편집자는, 거미집처럼 얽혀있으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정보를 자기만의 이야기로 꿰어서 다시 대중용으로 포장해내는 기술에서만큼은 거의 최고의 수준이다. 그래서 편집 능력을 갖춘 자여야만 새로운 시대를 주도할 수 있게 됐다. 그 능력이 바로 개중의 속성이라는 것도 여러분은 이미 눈치 챘을 것이다.(한기호/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한겨레(07. 01. 26) 죽은 지식인의 사회 ‘대중 지성’ 깨어나다

“요즘 아카데미에서는 엉뚱한 열정이 불타오르고 있다. 앎에 대한 의지 속에서 삶의 형태가 바뀌는 게 아니라 돈에 대한 의지 속에서 앎의 형태가 바뀌고 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대표 고병권)의 공부 모임 ‘2007 대중지성 프로젝트’는 이런 선언으로 시작하고 있다. 열정의 불길에 휩싸인 대학은 이들의 선언을 빌리면, 지식의 죽음, 지식인의 죽음을 재촉하고 있다(*사실 지식/지식인의 종언은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의 한 지류이기도 하다. 새삼 문제되는 건 아니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악극 <신들의 황혼>에서 주인공 지크프리트가 화염에 휩싸여 세계와 함께 무너지듯이, 돈에 대한 열정의 불길 속에서 지식인은 대학과 함께 소멸하고 있다는 것이다. 계몽의 주체, 진보의 전위였던 지식인이 붕괴한 자리는 그러나, 단순한 폐허가 아니다. 그 황량한 땅에서 새로운 주체, 새로운 지성이 태어나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믿음이다. 다름 아닌 ‘대중 지성’이다.

대중 지성이란 지식을 독점하던 특권적인 소수의 지성에 대한 대항 개념이다. 선생이 학생에게 일방적으로 지식을 주입하는 전통적 아카데미즘 바깥에서 대중이 스스로 지식을 생산하고 유통하고 공유하는 것을 가리킨다. 대중이 지식인화하고 지식인이 대중으로서 나서는 것, 그리하여 대중의 집합적 지혜 속에서 창조적 지성이 솟구치는 것, 대중 지성은 그 새로운 현상을 지시하는 말이다.

대중 지성이 가장 날렵하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곳은 인터넷 공간이다. 인터넷은 익명의 개인들이 특정한 주제 아래 모여 지식을 만들어내고 퍼뜨리고 재생산하는 대중 지성의 현장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사태를 보자. 자유무역협정을 기획하고 추진하고 협상하는 주체인 정부 관료들은 지난 몇 년 동안 협상의 주요 내용 공개를 거부했다. 기밀이 알려지면 국익이 침해당한다는 것이 이들이 내세운 방어 논리였다. 한 나라의 명운이 걸린 중대한 국가적 의제가 소수 관료들의 밀실에 맡겨진 채, 국가의 주인인 국민이 국외자로 밀려난 꼴이었다.

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인터넷이었다. 서로 한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카페’를 만들고 문제를 제기했다. 협상의 진행 상황을 알려주는 정보를 찾아내고 그것을 분석하고 거기에 새로운 전문 지식이 더해져 믿을 만한 자료가 탄생했다. 그리고 그 자료들이 팸플릿으로, 자료집으로, 선언문으로 가공돼 시민들에게 전달됐다. 비밀에 싸여 있던 자유무역협상이 서서히 실체를 드러냈다. 이제 정부 관료들은 미국과 협상하기 전에 시민과 협상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고병권 대표는 “이런 사태 전개야말로 대중 지성의 힘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말했다. “대중 지성은 대중의 집합적 지성이지만 지식인으로 대표되는 전통적 지성보다 더 전문적이고 더 풍부하며 더 심층적인 지식을 산출한다”고 그는 말한다.

대중 지성은 분명히 새로운 현상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아무런 지적 계보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말은 아니다. 대중 지성의 연원은 카를 마르크스에게로까지 올라간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대공장의 기계화 현상을 ‘일반 지성’이라는 말로 설명했다. 기계가 발전할수록 생산은 점점 더 사회적 협업 형식이 되고, 점점 더 생산자의 집합적 지성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 마르크스가 일반 지성이라는 말로 이야기하려는 것의 요지였다. 1970년대 말 이탈리아의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는 마르크스의 일반 지성에서 힌트를 얻어 ‘대중 지성’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네그리는 그의 지적 협업자인 마이클 하트와 2004년에 함께 쓴 <다중>이라는 저서에서 이 대중 지성을 ‘스웜 인텔리전스(swarm intelligence)라는 말로 더욱 구체화했다. 메뚜기떼나 개미떼에게서 볼 수 있듯이 개별적으로는 무력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들이 무리를 지어 활동하면 무시무시한 힘을 드러내듯이, 인간도 정보혁명이라는 새로운 국면에서 집합적 지혜를 통해 놀라운 창조성을 보여준다고 진단한 것이다. 대중 지성이란 이렇게, 흩어져서는 특별한 지적 성과를 낼 수 없지만 모이면 거대한 창조적 활력을 일으켜 세우는 현상에 어울리는 이름이다. 다만 이때의 ‘모임’은 한 공간에 꽉 들어찬 집회의 형식이라기보다는 개별적 존재들이 거미줄처럼 연결된 네트워크 형태라고 보아야 한다. 인간의 지성 자체가 두뇌 속 수많은 신경들의 연결(링크)을 통해 작동한다. 신경 하나하나는 아무런 지성도 없지만 그것이 일시에 연결될 때 지성의 공간이 형성되는 것이다. 두뇌야말로 집합적 지성 혹은 대중 지성의 표본이다.

조정환 갈무리 출판사 주간은 네트워크로 작동하는 대중 지성의 한 모습으로 ‘플래시 몹’을 거론한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인터넷상에서 의기투합해 특정한 시간, 특정한 장소에 모여 반전·평화 구호를 외치며 퍼포먼스를 벌이는 것, 이것이 대중 지성의 발현이다. 인터넷에 기반한 운동의 대부분은 이 대중 지성의 작품이다.” 특정한 지도부가 없다는 것, 다시 말해 운동의 꼭대기, 전위를 따로 두지 않는다는 것도 대중 지성의 한 양상인데, 플래시 몹에서 그런 지성의 작동 방식을 엿볼 수 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대중 지성 프로젝트’는 대중 지성의 가능성을 의식적으로 실험하고 실천하는 공부 모임이다. 1년을 4학기로 나눠 44주 동안 계속되는 이 프로젝트는 현재 30명 정도가 공부에 참여하고 있다. 철학, 동양고전강독, 문화·예술 세 강좌로 이루어진 이 커리큘럼은 이름만 보면 여는 대학 강의와 달라 보이지 않지만, 참여하는 사람이나 공부하는 방식에서 기존의 대학 강의와 뚜렷이 구분된다. 여기서는 공부에 뜻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대학생도 있고 회사원도 있고 제대병도 있다. 강의의 방식도 대학 아카데미즘과 차이가 있다. 선생에게서 학생에게로 지식이 일방통행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과 학생이 같이 공부하고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동양고전 강의에서는 <논어> 암송을 하고 있는데, 암송이라는 옛 방식을 따온 것도 이유가 있다. “지식이라는 게 단순이 머리로 들어가기만 해서는 안 되고 그것을 외움으로써 신체에 각인하고 삶에 녹아들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지식이 생체의 리듬을 타는 것 생체가 지식의 리듬을 타는 것이 진정한 지식 습득이라는 생각이다. 공부에 참가한 사람들은 매달 마지막 주에 한달 동안 공부한 것을 글로 쓴다. “글로 표현하지 않은 지식은 지식이 아니며,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면 아는 것이 아니다. 표현과 내용이 하나로 합쳐질 때 비로소 지식이 된다.”

이런 독특한 방식의 공부를 통해 이들이 실현하고 실천하려는 것이 말하자면 대중 지성이다. 신체에 녹아들고 글로든 말로든 표현되고 그리고 그것들이 네트워크로 연결돼 집합적 지성으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표인 셈이다. ‘대중 위에 군림하는 엘리트’라는 전통적 지식인의 정체성 대신에 ‘대중인 채로 지식인이고 지식인인 채로 대중인’ 새로운 대중 지식인의 정체성을 이들은 모색하고 있다. 대중 지성은 지식의 새로운 존재 형식이자 지식인의 새로운 삶의 양식이다.(고명섭 기자)

07. 01. 26.

 

P.S. 네그리의 비유를 빌면, 메뚜기떼 혹은 개미떼의 '지성'이 대중지성이겠다. 나의 관심은 대중이 지성을 체득할 때 그는 무엇으로 여전히 대중인가, 이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고전적인 정의에 따르면, "대중은 개념상 사회를 통치할 수 없음은 물론 자신의 실존도 조율할 수 없고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대중의 반역>). 물론 '고전적인' 정의에 따를 때 그렇다는 얘기이다(고로, 우리에겐 '대중'에 대한 다른 정의가 필요하다). 개인이면서 대중인 개중처럼 '양서류'로 우리는 점점 진화해가고 있는 것인지. 한편, 출판에서도 이 '양서류'적 양태는 이미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블룩'을 다루고 있는 지난 가을의 한 기사를 옮겨놓는다.

동아일보(06. 09. 27) 'Blook’ 블로그를 뛰쳐나와 세상의 책이 된다

회사원 박성빈(27) 씨는 지난해 10월부터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블로그를 만든 뒤 취미로 배운 사진을 틈틈이 올리기 시작했다. 실연의 아픔을 달래려 떠났던 2001년 유럽여행 등을 기록한 그의 사진은 로맨틱한 분위기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고, 포털사이트 초기화면에 6번이나 올랐다. 방문자가 하루 수천 명 단위로 늘어난 그의 블로그의 내용은 이번 주 ‘그리우면 떠나라'란 책으로 나왔다. 박 씨의 책을 펴낸 랜덤하우스코리아 도정원 씨는 “프로 작가 못지않은 콘텐츠를 생산해 내는 ‘천연 블로거'가 요즘 떠오르는 새로운 작가군”이라며 “주제가 뚜렷한 ‘천연 블로거'를 찾다가 박 씨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1인 매체인 블로그(blog)를 책(book)으로 만든 ‘블룩(Blook)'이 쏟아지고 있다. 블룩은 거의 매주 1권 이상 서점에 나오고 실용서 시장의 베스트셀러 상위 순위에서도 비중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특히 요리책 분야는 블룩이 휩쓰는 추세다. 현재 요리책 분야 부동의 베스트셀러 1위인 ‘2000원으로 밥상 차리기'를 비롯해 ‘베비로즈의 요리 비책' ‘꼬마마녀의 별난 빵집' ‘야옹 양의 두근두근 연애요리' 등은 모두 블룩형 요리책. 블룩의 원조 격인 ‘2000원으로 밥상차리기'는 ‘독신남이 직접 해 본 쉬운 요리'를 표방하고 2003년 출간돼 지금까지 56만 부가량 팔렸다.

그간 블룩은 요리책, 인테리어 등 매뉴얼형 실용서가 대세였지만 최근엔 미술 경제 에세이 영어교육 쪽으로도 외연이 확대되고 있다.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으로 유명한 박경철 씨의 경제에세이 ‘시골의사의 부자경제학', 미술 에세이인 ‘그림 읽어주는 손가락' ‘꿈을 꾸다가 베아트리체를 만나다', 장사 체험담을 간추린 ‘머리핀 장사에 돈 있다', 괴담집 ‘잠들 수 없는 밤의 기묘한 이야기', 20대 여성의 고단한 삶을 기록한 ‘라오넬라 새벽 두시에 중독되다' 등이 그런 책들이다. 산여고 영어교사 하명옥 씨의 홈페이지를 토대로 태어난 책 ‘영어일기 표현사전'과 ‘영어일기 영작패턴'처럼 양질의 콘텐츠는 블룩 시리즈로 선보이고 있다.

블룩은 개인이 매체이자 브랜드가 되는 1인 전문가 시대의 한 상징이다. ‘일하면서 책쓰기'의 저자이자 자기계발 전문가인 전미옥 CMI연구소 대표는 “책의 생산과 소비도 블로그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시대가 왔다”며 “직장인에게도 브랜드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공격적 글쓰기로서 블로그와 이를 통한 책쓰기를 권하고 있다”고 말했다.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려 있고 프로를 능가하는 아마추어들이 활동하는 곳이 인터넷 공간이다. 따라서 블로그 글쓰기의 장점은 진입 장벽이 없다는 것이 꼽힌다. 또 출판사에는 독자의 반응이 확인된 콘텐츠를 확보하고 참신한 저자를 ‘싼값'에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블룩이 뜨자 미국에서는 한 출판사가 픽션, 논픽션, 코믹 분야에서 우수 블룩을 시상하는 ‘루루블루커 상'을 만들기도 했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일본 출판계에서도 인터넷 콘텐츠를 책으로 만든 ‘넷셀러'란 말이 쓰인다”면서 “블룩은 대중적이지만 유동성 정보라는 한계 때문에 일관된 세계관과 깊이를 바탕으로 한 교양서를 배출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김희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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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mer 2007-01-26 17:51   좋아요 0 | URL
네그리의 '귀환'에서처럼, 대중을 괴물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의 실체는 오락 프로그램에서 티비의 하단에 시청자의 감정을 대변하듯 '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글귀'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개중과 대중지성에 실제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보다도 '누군가' 대신 그러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겠지요. 개중에는, 걔중에는, 말이야...누군가...

로쟈 2007-01-26 17:55   좋아요 0 | URL
suture님도 한 유머 하시는군요.^^
 

'인문학 위기' 관련 기사를 하나 더 옮겨놓는다. 직접적인 건 아니고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한 것인데, 한국일보의 '지평선'란에 실린 'MIT!!!'가 그것이다. 무엇이 그토록 감탄스럽다는 것인가, 는 읽어보면 안다.

한국일보(07. 01. 22) MIT!!!

“자, 여기서 두 일차 방정식을 하나의 매트릭스로 표현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자, 어떻게? 잘 하면 되지! (학생들 웃음). 잘 하려면, 이 쪽을 하나로 묶어서 이렇게….” 난해한 선형대수학 강의 2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길버트 스트랭 교수가 응용수학의 대가이기도 하지만 쉽고 요령 있는 교수법 때문인 것 같다. 수학의 대가가 막상 한 자릿수 덧셈 뺄셈은 손가락 꼽아가며 더듬더듬 하는 것을 보니 우습다. 이렇게 교실 풍경을 그대로 담은 강의를 본다면 책으로만 보는 것보다 공부가 한결 재미있겠다.

■이 강의는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이 오픈 코스 웨어(OpenCourseWareㆍ http://ocw.mit.edu/OcwWeb/index.htm)라고 해서 인터넷에 올려 전세계 어디에 있든지 누구든지 로그인도 할 필요 없이 그냥 공짜로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아직 이런 동영상 강의는 26개 과목에 1,000시간 분량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더욱 늘려갈 계획이라고 한다. 오디오나 텍스트만 올린 강의는 물리학에서부터 컴퓨터 엔지니어링, 철학, 인류학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모두 1,550건이다. 계속 업데이트된다.

■예를 들어 지난해 ‘19, 20세기 유럽 제국주의’ 강좌의 경우 강의 개요와 독서 목록, 과제물 내용 등이 완벽하게 올라 있다. 전문가라면 이 정도만 보면 이 분야에서 새로운 조류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금세 눈치챌 수 있다. 2002년 외신에서 MIT가 OCW(강의 공개 프로그램)를 통해 인터넷에 강의 내용과 참고자료 등을 모두 올린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정말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 지금은 매달 전세계에서 140만 명 정도가 접속해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MIT가 아이디어와 인적 자원과 콘텐츠를 제공하고 기업과 개인이 수천 만 달러의 운영 기금을 기부한 OCW는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지식을 공짜로 보급해 세상과 삶을 바꾸는 데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수익 모델은…? 그런 생각할 시간은 강의에 활용된 제3자의 지적 생산물을 공개하기 위해 일일이 본인의 동의를 얻는 데 보냈다. 가히 노벨상 감이다. 그래서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지는 “아낌없이 주는 지성”으로, BBC 방송은 “교육 혁명”으로 평가했다. 되지도 않은 콘텐츠를 가지고 표절이니 인문학의 위기니 해 가며 돈에 눈이 먼 한국의 현실이 참으로 초라하다.(이광일 논설위원)

07. 0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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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2 1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인 2007-01-22 20:21   좋아요 0 | URL
오 MIT 즐찾해야겠어요. ㅎㅎ 서양사에 관심이 생겨서, 그 쪽 요즘은 뭐 공부하나 보게요 ^^;

로쟈 2007-01-22 21:08   좋아요 0 | URL
**님/ 짧은 시론에서 너무 많은 걸 이야기하려다 보니까 압축/비약이 있는 건 맞습니다. 제가 공감하는 건 '위기' 담론의 허실입니다. 정말 가만히 앉아서 '위기'만 주워섬겨온 게 아닌가 하는...
기인님/ 여행준비에도 바쁘실 분을 더 바쁘게 해드렸네요.^^

마노아 2007-01-22 23:55   좋아요 0 | URL
정말 '혁명'이네요. 놀라워요.

나비80 2007-01-23 01:04   좋아요 0 | URL
어떤 '위기'에 대처하는 대학과 인문학자들의 자세가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 건 동감합니다. 결국 '돈을 달라'는 옹아리만 하는 부류와 좀 배고파도 여전히 변함없이 정신의 풍요만을 누리겠다는 부류만 있는 것 같아 가상의 '위기'가 실제의 위기로 발전한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뒤늦게 알게 된 것이지만 '레디앙'의 토요연재-책읽기에 월간 북매거진 <텍스트>의 필진들이 가세를 했다. 지난 11월부터의 일이다. 게스트 필자로 참여했던 잡지를 부분적으로 온라인에서도 읽을 수 있게 되어 반갑다(이게 '중복' 게재되는 기사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몇 꼭지를 읽다가 어제 인디고와 관련해서 올린 페이퍼와도 연관되는 '인문학 위기'에 관한 기사 세 편을 연달아 옮겨놓는다(글이 뱀 꼬리를 물듯이 이어진 탓이지 나의 계산 탓은 아니다). 필자는 <텍스트>의 권희철 기자이다.  

레디앙(07. 01. 20) 인문학의 위기? 인문학자의 위기?

지난해 ‘페렐만’이라는 러시아 수학자 이름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는 수학사의 난제 ‘푸앵카레의 추측’을 푼 뒤 인터넷에 이를 올렸다(*페렐만에 대해서는 나도 페이퍼를 올린 적이 있다). 학계는 응분의 보상을 하려 했으나 모두 거부했다. 최근에는 연구소 일도 그만두고 노모와 함께 은둔해 살고 있다. 이처럼 몇 안 되는 제한된 정보들이 페렐만에 대한 모든 것인데, 그럼에도 페렐만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묵직하게 다가왔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가 유별난 삶을 살아서일까. 그런 기인의 풍모가 느껴질 만한 존재들을 학계에서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그런 개인을, 그런 삶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제도와 사회가 떡하니 버티고 있기 때문일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학자는 모름지기 이래야 해’라며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비 정신을 촉구해야 하기 때문일까. 황우석은 이런데, 페렐만은 저렇지 않느냐면서.

페렐만 소식이 전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점잖으신 학자분들께선 ‘인문학 위기 이대로 둘 수 없다’며 일갈하고 나섰다. 실상 양치기 소년의 호소에 가깝게 들리기도 했다. 글자깨나 쓴다는 분들이라면 저마다 위기의 징후를 담지하고 분석한 지도 너무 오래된 일이니, ‘죽었다’ ‘위기다’ 소리는 지겹기도 하고 뒷북처럼 느껴져 뒷맛이 영 개운치 않다. 강정구 교수 강의를 수강한 학생에 대한 재계의 공갈 협박에는 모르쇠로 일관하던 분들, 이건희 철학박사 학위 수여가 무산되자 매체를 빌려 읍소하거나 보직 사퇴를 결행하던 분들, 학생들이 좀 버릇없게 굴었다고 교문 밖으로 영구히 쫓아내신 분들과 이에 침묵으로 눈감아 주던 분들. 그런 분들이 계시기에 ‘인문학 위기’는 ‘인문학자들만의 위기’라는 조롱을 받을 만도 하다.

다시 페렐만으로 돌아오자. 페렐만의 아래와 같은 발언은, 그가 단지 돈 키호테나 세상을 등지고 은둔해 사는 계룡산 도사가 아님을 보여준다. “다수의 수학자들이 개인적으로 정직하다고 해도, 정직하지 않은 ‘권력자들의 횡포’를 그냥 수용하는 순응주의자에 불과하다.”(박노자, 「페렐만이 괴짜라고?」에서 재인용)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흔히 학문의 위기, 좁게는 인문학의 위기를 말할 때면,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사리가 밝아 고전을 탐독하는 등의 행위를 수지타산 맞지 않는 것으로 몰아가는 사회를 탓하게 된다. 인문학 위기의 발언은 곧 문명 비판이 된다(싸잡아 다 욕할 수 있는). 좁게는 교육을 비롯한 관련 제도의 허점을 지적할 때도 있다. 넓게는 ‘삶의 무늬를 새기는’ 게 인문학의 본령이라며 그것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기양양한 낙관론과 인문학의 위기는 곧 ‘삶의 위기’라며 비분강개의 목소리를 높이는 비관론이 묘하게 공존하기도 한다. 어느 하나 틀린 말은 아닐 거다.

그러나 어느 하나로도 사태를 충분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여기에 페렐만에 대한 상상은 질문 하나를 덧붙인다. 인문학의 위기는 학문의 위기인가, 아니면 학문 권력의 위기인가. 몇 개의 글을 사례로 삼아 인문학 위기의 논의를 따라가 보려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추적은 국지적일 수밖에 없고, 한편으로는 문제를 정리하지도 못한 채 다시 흩뜨려놓는 꼴이 될 것이다.

지난 겨울 복간된 『비평』 13호의 한 꼭지(‘인문학과 인간적인 것’)에는 한국의 인문학을 대표하는 김우창과 이어령의 글이 실렸다. 먼저 김우창의 글을 본다. 그는 페렐만을 사례로 이야기를 풀어 간다.

“그가(페렐만이) 보여준 것은 간단히 말하여 사람이 자신의 삶을 자신의 생각대로 선택하여 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동시에 거꾸로 우리가 그러한 자유 선택의 가능성을 얼마나 멀리하고 살고 있는가를 보여준다.”(p.94)

옳으신 말씀이다. 학문 차원까지 갈 것 없이, 뭣 하나 제 힘으로 제 의지대로 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좁게는 가족의 요구에 등 떠밀려 살아야 하고, 넓게는 세상의 상식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조금 더 읽어보자.

“불편한 마음들이 이는 것은 학문 연구가 연구자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데 대한 사실적인 원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여러 작은 일들에서 표현되고 있는, 근본적인 상황을 조성하는 오늘의 정세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학문의 자유와 가치의 쇠퇴에 대한 당연한 불행의식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p.95)

김우창의 발언은 자유롭지 못한 개인 이전에 그것을 야기하는 사회를 떠올리게 한다. 즉,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고 있는가. 오늘의 사회 조건이 어떻기에 페렐만 같은 경우가 우리 사회에서는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흔히 신자유주의를 말한다. 많지는 않지만 자본주의 자체를 문제 삼는 경우도 있다. 한국 현대사 특유의 굴절된 경험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우창의 답은 다르다.

“인간의 자유와 자율적 존재를 위한 여유라는 관점에서 우리 사회는 극히 좁은 공간밖에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단순히 신자유주의 체제보다도 우리의 삶과 사고의 유일 체제적인 성향에 깊이 관계되어 있는 일일 것이다.”(p.98)

‘삶과 사고의 유일 체제적인 성향’이라면, 다른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를 말하려는 것일까. 또는 그런 분위기 아래 도저하게 깔려 있는 거대한 ‘문화의 유산’을 언급하려는 것일까. 따라잡기 쉽지 않은 사색이다. 다만 김우창의 글을 읽으면서 인문학 위기를 대하는 그의 근본적인 태도를 보게 된다. 인문학의 위기와 사회 위기는 따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모든 문제를 아우르는 것이 있지 않을까, 독자는 추측하게 되는 것이다. 억측해 보자면, 다양성을 수용할 수 없는 사회 또는 문화의 위기가 곧 인문학의 위기라는 것.

“오늘날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담론의 장을 펼치게 된 것은 수돗물은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벽 뒤에 그리고 땅속에 묻혀 있는 수도관을 통해서 나온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인문학의 위기를 외치는 인문학자들의 목소리는 머리띠를 두르고 거리에 나온 각종 이익집단의 목소리와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p.85)

이어령 또한 인문학 위기를 단순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권유한다. 물이 말랐는데 다들 모여 수도꼭지만 바라보거나 그것만 고치면 죄다 해결될 것처럼 구는 건 옳은 해법이 아닐 것이다. 이어령에게 인문학이란 깊은 수원(水原)을 탐색케 하는 것이다.

“인문학이란 문사철(文史哲)의 분야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밝히고 깨닫게 하는 학문입니다.”(p.86)

그렇다면 이어령에게 있어 인문학의 위기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다음의 발언에서 단서를 찾아보자.

“단순하게 말해서 휴머니티라는 말 그대로 인문학의 힘은 시스템을 중시하는 다른 학문과 달리 수리(數理)나 기계가 할 수 없는 공감empathy의 능력을 길러주는 데 큰 역할을 해왔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공감’은 타자에 대한 ‘열림과 소통’의 기능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오늘날과 같이 글로벌화하는 세계 환경 속에서는 절대에 가까운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p.88)

굳이 ‘절대’라는 단정적 화법을 쓰면서 ‘글로벌’까지 말해야 하는가 싶지만, 문장의 골자는 ‘공감’에 있음을 주지한다. 현 세태가 공감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므로 인문학의 처지가 땅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인지, 인문학의 무능으로 개인과 사회의 공감 능력마저 상실되었다는 것인지, 인문학 내에서 서로 공감할 수 없는 언어와 논리를 사용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인지, 그 모두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여기서 인문학 위기를 대하는 또 하나의 접근법을 얻을 수 있다. 인문학의 문제는 소통의 문제와 관련이 깊다는 것. 김우창이 유일 체제의 문화를 언급했다면 이어령은 인문학(자)가 지녀야 할 태도에 집중한다.

“우리는 그동안 남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어려운 말을 사용하다가 인문학의 고립과 위기를 자초했는지도 모릅니다.”(p.84)

상식선에 그치는 분석이지만, 그 상식이 무서울 때가 이런 경우일 것이다. 그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이 인문학을 멀리하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인문학 고유의 난해한 어법과 문체가 문제의 본질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쉽게 쓰고 말하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도 꽤 오래 전 일이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미 ‘쉬운’ 고전 읽기와 ‘쉬운’ 철학·역사 서적 등이 서가를 잠식했다.

아카데미 안에서는 파리 날리고 하품만 나와도, 바깥에서 열리는 각종 인문학 강좌들은 반응이 뜨겁다. 매체는 항상 인문학 위기와 위의 사례들을 대비하여 설명한다. 그것이 맞다면 인문학 위기는 그저 학계의 위기, 제도의 위기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적어도 출판계와 강단 바깥의 인문학이 건재하다면 인문학 위기의 목소리는 점차 줄어들어야 할 텐데 사태는 그렇지가 않다. 단지 강단만의 위기라고 단정 짓기엔 사태를 호도하는 게 아닐까. 어쩌면 인문학의 소통 능력은 해당 인문학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리트머스지와 같은 것이 아닐까. 소통 문제를 위기의 본질로 삼기보다는 위기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유력한 시험이라고 보는 게 보다 타당하지 않을까. 이 논의를 보충할 만한 책 한 권이 있다.('희망의 인문학'으로 이어짐) 

레디앙(07. 01. 20) 모두와의 소통 또는 낮은 곳을 향한 소통

“모든 사람들과 소통해야 합니다. 다양성과 보편성 그리고 옛것과 새것이 항상 공존하는 둥지의 알들이야말로 인문학의 희망입니다.”(p.91)

이어령의 ‘둥지의 알’로 충분한 것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지만, 적어도 소통의 측면에서는 얼 쇼리스가 쓴 『희망의 인문학』이 꽤 적절한 사례가 될 듯싶다. 물론 이어령은 모두와의 소통을 말하지만, 얼 쇼리스는 누구와 소통할 것인지 묻는 데서 차이가 제법 크기는 하다. 얼 쇼리스의 소통은 싸잡아 모두가 아니라 낮은 곳과의 소통이다.

책이 처음 소개된 것은 2004년 8월의 일이다. KBS의 <가난한 자의 철학자 얼 쇼리스의 희망수업>이라는 다큐멘터리가 그것인데, 이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클레멘트 코스 이야기가 관련 당사자들에게 끼친 영향력은 상당했던 모양이다(‘클레멘트’라 붙여졌지만, 이 말은 야구선수이자 선행의 대명사 ‘로베르토 클레멘테’에서 비롯된 것이다). 책 안팎을 살피려 취재한 도중 만난 번역자와 어느 사회복지사 얘기에서도 그 충격적 경험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가령 이런 사례들이다. 책이나 예술 근처에 가지도 못하던 가난한 사람들의 놀라울 만한 변화.

“1996년 12월, 헨리 존스는 바드대학 흑인학생회의 회장으로 추대됐다. …… 데이비드 이사코프는 자신의 생물학 수업에서 과일파리를 이종 교배하고 있었다. 그녀의 여동생 수산나는 그때까지도 화학자의 꿈을 놓지 않고 있었지만, 아주 뛰어난 어느 교수의 수업을 듣고 난 다음에는 생물학을 전공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으로 고려하고 있었다.”(p.265~66)

더 나아가 정치적 각성에 이르게 된 가난한 학생들의 사례도 소개되고 있다. 책은 가난한 자가 가난한 이유를 다른 데서 찾는다. 가난에 대한 통상적인 생각들이 있다. ‘그 사람은 게으를 거야’, ‘타고난 성품이 그렇게 만들었을 거야’ 등 가난의 이데올로기라 불릴 만한 생각부터 적절한 동기 부여와 직업 교육과 알선이 뒤따른다면 빈곤은 어느 정도 해소될 것이라는 생각도 있다. 얼 쇼리스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가난과 가난한 사람에 대한 기존 관점을 완전히 바꾸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기존 관점이 매우 잘못되었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설사 가난에 대한 기존 관점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치더라도, 그런 관점이 대물림되는 가난 속에서 사람들을 구해내는 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p.24)

가난이 선천적이라는 생각은 편견을 더 강하게 만들 것이며 일반인과 빈자를 분리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직업 교육이나 훈련이 소득의 크기를 좌우하는 것도 아니다. 생산성을 높이려는 것의 다른 이름일 뿐이니까. 그렇다면 얼 쇼리스가 생각하는 가난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는 비니스라는 재소자에게 사람들은 왜 가난한 것 같냐고 묻는다. 비니스의 대답.

“우리 아이들에게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얼 선생님. 그 애들을 연극이나 박물관, 음악회, 강연회 등에 데리고 다녀주세요. 그러면 그 애들은 그런 곳에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배우게 될 겁니다. …… 그렇게 하면 그 애들은 결코 가난하지 않을 거예요.”(p.168)

이 대화는, 얼 쇼리스가 미국에서 클레멘트 코스를 기획하고 곧장 행동에 옮기게 만든 주요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얼 쇼리스는 비니스의 언급에서 ‘인문학’의 필요성을 읽는다.

“비니스는 고대 고리스에서 정치가 탄생했던 과정과 똑같은 길을 걸어 왔다. 그녀는 성찰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것은 이후 계속된 대화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었는데, 그녀가 말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은 바로 인문학을 의미했던 것이다. 인문학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자연의 경이로움을 제대로 경험하기 위해서 줄곧 세상 사람들의 성찰적 사고를 가능하도록 해준 근본적인 원천으로 기능해 왔던 것이다. 정치적 삶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길이라면, 인문학은 성찰적 사고와 정치적 삶에 입문하는 입구였다.”(p.173)

인용문에서 보듯, 얼 쇼리스 생각의 기본 모델은 고대 그리스의 교양과 덕성을 갖춘 시민에 있다. 그런 시민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단다.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과 똑같은 교육을 받을 수 있다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그리고 그가 든 사례들은 이러한 생각을 경험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얼 쇼리스의 실험은 한국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성프란시스대학이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책이 번역되자 언론의 반응도 뜨거웠다. 그런데 “가난 벗어나는 열쇠, 인문학”, “빈자에게 적선 대신 인문학을”과 같은 기사 제목을 보게 되면 책의 내용을 과장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얼 쇼리스 말마따나 인문학 교육이 자기를 성찰하게 하고 삶의 동기를 만든다고 하는 것이야 동의하더라도, 그것이 곧 부富로 직결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인문학이 여전히 배고픈 학문이라는 건 우리의 상식이고 경험이니까. 마음의 부를 말한 게 아니라면 말이다.

물론 또 다른 우려 또한 든다. 요컨대 이런 논의는 한편으로는 (그 의도와 달리) 빈곤의 실제와 원인을 은폐하는 효과를 지닌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논지에서 벗어난 것이니 넘어가자. 언론의 과장된 홍보보다 더 심각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한국에서 지금 펼쳐지고 있는 클레멘트 교육이 그것이다. 이런 비유를 들자. 빵과 장미가 있다. 세상은 지금까지 가난한 자들에게 줄 빵이 필요하다고 말해 왔다. 그런데 빵이 아니라 장미를 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장미가 빵을 산출할 수도 있다고까지 말한다. 게다가 그것은 ‘경험적으로’ 옳(았)다. 사실상 논리적으로 반박하기 곤란하다. 논리적 판단을 떠나 유의미한 사회적 실천의 문제이기도 하며 어설픈 논리로 가늠할 수 없는, 책의 표현을 빌자면 ‘클레멘트의 기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다음의 질문은 가능할 것이다. ‘장미를 주는 것이 맞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런 장미가 있기나 한 것인가. 혹여 그 장미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여기서 인문학자들이 인문학을 성토하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한쪽에서는 인문학의 위기와 죽음을 말하는데 한쪽에서는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인문학이라……. 의문에 대한 접근은 두 가지로 나뉜다. 그런 장미는 없다는 것이 하나라면, 또 하나는 ‘낮은 데로 임할 수 없는’ 한국 인문학 자체의 문제이다. '노숙인 다시서기 지원센터'가 주관한 ‘한국형 클레멘트 코스 설립을 위한 실제’ 워크숍 자료집을 보며 우려는 거의 불신이 되었다.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에 참가한 저명한 교수들의 강의 요약문은 이랬다(*이 자료는 처음 보는데, '저명한 교수들'답다).

“자기 의식은 자기 확신은 물론 타자로부터의 인정도 필요하다. …… 전자는 자립적 의식으로서의 주인Herr, 후자는 비자립적 의식으로서의 노예Knecht.” “페이디다스는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신 그것을 나타냈다’고 할 정도로 칭찬되었는데, 조각의 형태를 통해 그 배후의 정신을 표현하려고 했다.”

이런 논의가, 이런 교육이 어떻게 자기 성찰을 이끌어내고 삶의 의지를 북돋우며 정치적 삶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인지 과문한 기자로서는 판단키 어렵다. 다만 적어도 위에서 이어령이 언급했던 ‘공감’의 문제를 상기해 본다면 이런 이야기는 거의 소통 불가능에 가까운 게 아닐까. 장미가 있느냐 없느냐는 논외로 하더라도, 장미를 전달하는 태도가 고압적이다. 게다가 이 장미 전달식 주최 측의 마인드를 알 수 있는 대목에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인문학 강의를 위한 강사의 조건은 사회적 지명도, 강의 실력, 노숙인에 대한 애정 등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사회적 지명도는 참여자들의 자긍심을 세우기 위해서 중요하다.” 인문학이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현실의 인문학은 어떠한지, 인문학이 죽음에 이르렀을 만큼 한심한 작태라면 그 대안적 인문학은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는 언사이다. 혹여 이들에게 인문학이란 ‘뽀대 나고’ ‘그럴싸한’ 게 아니던가. 물론 문제는 간단치 않다. 다음과 같은 노숙인 수강생들의 반응을 보자니 ‘환상의’ 허울 좋은 장미도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전달된 셈이니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고, 생활하는 것이 점점 불편해지고, 나 혼자서 생각하는 공간이 없어서 불편하다. 내가 편안하고,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이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과연 내가 인문학 과정을 마치고 난 뒤에, 내가 원하는 이상이 높아져서 내가 처한 현실과 맞지 않는다면 그 차이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철학 책이 말하는 자기 성찰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직접적인 그들만의 ‘성찰’.

이 책은 양면적인 문제작이다. 빈곤의 사회적 문제를 환기하고 그 해결책을 달리 상상하게 한다는 점에선 긍정적이지만, 적어도 한국에서의 인문학 교육을 염두하고 읽노라면 황당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클레멘트 코스에서 교육 예술’이라는 문화예술 관계자 워크숍에서 몇몇 논자들의 지적도 기자의 이런 시선과 맥을 같이 한다.

“클레멘트 과정에 비록 비판적 글쓰기가 있지만, 대부분 과거의 원천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은 확인되어야 합니다. 현재 하부구조 자체를 파고드는 직접성을 피하고 있습니다. 가난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목적은 언젠가는 그 직접성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얘기하고 싶습니다”라는 김지섭의 말이나 “텍스트 중심주의에 있는 아카데미 인문학은 정전 해석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세계와의 대화, 삶과의 대화, 현장과의 대화를 외면하는 인문학자 또는 예술가가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러한 인문학적 풍토에서 ‘대화’는 사교에만 필요할 뿐입니다”라는 이광준의 지적이 그렇다.

요컨대 문제는 클레멘트 코스의 한국적 적용이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다. 이미 노출된 인문학의 여러 문제들이 한참이나 선행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무엇이 인문학 위기의 원인이고 진정 무엇이 문제냐는 질문에는 딱 부러지게 대답하기 어렵다. 그저 여러 양상들을 보면서 문제가 생각보다 더 복잡하고 간단치 않다는 것만 확인하게 된다. 다만 인문학 위기 이전에 인문학에 대한 편견과 이데올로기가 만만치 않게 자리 잡고 있음을 본다.

어쩌면 그러한 편견들이 인문학의 위기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는 그것은 한국의 인문학이 만든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이런 점에서 『장정일의 공부』 서문은 이에 대한 적절한 대답으로 읽힌다.('장정일의 공부'로 이어짐)

레디앙(07. 01. 20) 중용, 사유도 고민도 없는 허위거나 기만

장정일은 평소 존경받던 원로들이나 지식인들의 엉뚱한 말들에 실망할 때가 있다고 한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늙으면 다 저렇게 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어떤 동기에 의해 사상적 전향이 이루어지는 건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장정일은 그 원인을 잘못된 중용의 태도에서 찾는다. 기계적 중립을 취하려 애쓰다 보면 현실과는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발언을 할 수밖에 없고 시대착오적인 생각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용의 본래는 칼날 위에 서는 것이라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사유와 고민의 산물이 아니라, 그저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는 것을 뜻할 뿐이다. 그러니 그 중용에는 아무런 사유도 고민도 없다. 허위의식이고 대중 기만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는 무지의 중용을 빙자한 지긋지긋한 ‘양비론의 천사’들이 너무 많다.”(p.5)

그리고 이어 자신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중용이 미덕인 우리 사회의 요구와 압력을 나 역시 오랫동안 내면화해 왔다. 이 말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한번 생각해 보라. 모난 사람, 기설을 주장하는 사람, 극단으로 기피받는 인물이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언제나 ‘중용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날 알게 되었다. 내가 ‘중용의 사람’이 되고자 했던 노력은, 우리 사회의 가치를 내면화하고자 했기 때문도 맞지만, 실제로는 무식하고 무지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렇다. 어떤 사안에서든 그저 중립이나 중용만 취하고 있으면 무지가 드러나지 않을 뿐더러,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로까지 떠받들어진다. 나의 중용은 나의 무지였다.”(p.4~5)

솔직하면서도 읽는 이를 뜨끔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심지어 중용의 태도와 가치를 폄하하는 사람조차 장정일의 고백을 듣노라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라도 중용에 젖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장정일의 고백이 날카로운 것은, 중용 비판으로 사회와 문명의 허위를 까발리는, 하나마나한 그럴싸한 이야기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중용을 취하려는 태도를 앎(무지)의 문제와 연결한다. 이는 인문학 위기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한국에서 인문학이 잘 안 되는 건 다 이유가 있는데, 뼛속 깊이 스며든 우리의 ‘둥글게 둥글게’ 의식/무의식들 때문이다. 장정일을 응용하자면, ‘중용을 취하고 있으면 인문학의 허세가 드러나지 않을 뿐더러, 원만한 교양의 소유자로까지 떠받들어진다. 인문학의 중용은 인문학의 결여였다.’ 책의 세부 내용은 물론 서문의 주장들과는 거리가 있다. 그저 꼼꼼한 텍스트 읽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만 장정일은 스스로에게 공부가 필요했다고 말한다.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것은 그런 공부의 과정 자체란다.

공부하겠다 마음먹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고백은, 인문학에서 커다란 범위를 점하고 있는 문학 입장에선 다소 충격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무게를 지닌다. 허세와 허위에 빠진 철학도 문제라지만, 상서롭기 그지없고 세상에 태평하며 나오는 것마다 문제작 범주에 드는 문학 판의 문제를 생각한다면 말이다.

“내 무지의 근거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상급학교 진학을 하지 않았다는 결점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한때 내가 시인이었다는 사실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시인은 단지 언어를 다룬다는 이유만으로 최상급의 지식인으로 분류되어 턱없는 존경을 받기도 하지만, 시인은 그저 시가 좋아 시를 쓰는 사람일 뿐으로, 열정적인 우표 수집가나 난이 좋아 난을 치는 사람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들의 열정에는 경의를 표하는 바이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우표 수집가나 난을 치는 사람을 지식인으로 존경할 수 없다. 시인의 참고서지는 오직 시집밖에 없으니, 시인이란 시 말고는 모르는 사람이다. 나는 청춘을 그렇게 보냈다.”(p.5~6)

07. 01. 22.

P.S. 개인적으론 기사를 며칠 전에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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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80 2007-01-22 16:13   좋아요 0 | URL
모두들 인문학의 위기를 걱정하고 있지만 사실 지난 10년은 수준높은 담론들도 많이 나오고 치열한 논쟁의 공방전이 펼쳐졌던 때가 아니었나 합니다. 인문학 위기의 근간이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이윤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만 국한된다면 굳이 애써 그 위기를 과장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인문학이야 말로 새롭고 거대한 시장을 창출할 새롭고 기막힌 창구가 되어줄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마는... ^^

로쟈 2007-01-22 16:24   좋아요 0 | URL
'위기 담론'이 바깥에서 보기엔 실상 '엄살 담론'이기도 하지요(물론 당하는 사람들에겐 '엄살'이 아니지만). 어느 분의 말씀을 들으니까 한국사회에선 또 이런 엄살이 통한다고 하네요. 특히 인문학의 엄살에 대해서는 그래도 관심을 가져준다고. 한데, 그런 식으로 '안주'해 온 게 아닌가란 반성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말씀하신 '수준 높은 담론들'과 '치열의 논쟁의 공방전'이 얼마간 위안이 될 수도 있겠지만, 과연 기대치에 부응하는 것인지는 의문이고,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존경 자체가 과거와는 판이한 현실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나비80 2007-01-22 19:26   좋아요 0 | URL
네 그렇지요. 현실은 엄연한 자본주의 체제니까요.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에 따라 '사회적 존경'도 경중이 갈리는 국면을 무시할 수도 없는 형편이구요. 로쟈님께서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언급하신 대목도 충분히 납득이 갑니다. 다만 제가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논쟁의 장이 마련됐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논쟁과 담론의 질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경쟁력을 강화한다면 인문학의 위기란 말도 곧 사라질 수 있을 테지요. 저는 사실 인문학이야말로 우리가 파먹을 수 있는 마지막 양식이란 믿음엔 변함이 없습니다.

로쟈 2007-01-22 21:15   좋아요 0 | URL
저보다는 낙관적이시네요.^^ 여러 가지 도전과 요구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현재의 인문학이 정말 갖고 있는 건지 좀 회의적입니다. 고작 '인문학 콘텐츠'나 '디지털 인문학' 정도에서 타협점을 찾으려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어쩌면 그런 대응능력도 필요도 의지도 없는 건 아닌가 싶은 게 더 자주 갖게 되는 느낌입니다...
 

어제는 '인문학 위기'에 대한 한 좌담회에 불려나가 몇 마디 거들 일이 있었다. 이 주제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차고 넘치지만(화제에 오른 지 한 10년은 됐으니!) 지난주초에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이 'TV, 책을 말하다' 코너에서 다루어진 걸 계기로 해서 과연 '인문학에 희망은 있는지' 혹은 '희망의 인문학'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끔 됐다. 이와 관련하여 연구공간 수유나 철학아카데미 등과 같은 재야 학술공간 외에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 것이 '인디고서원'이다. 그건 얼마전 이 고등학생들의 '독서토론교실'에서 내는 잡지 <인디고잉>에 지젝 등의 저명한 외국 학자들이 기고하여 화제가 됐다는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겸사겸사 관련자료들을 모아보았다. 

 

중앙일보(07. 01. 16) 인디고 혁명

16년 전 부산이다. 국문과 새내기 여대생 허아람이 거사를 감행한다. 고교 시절 내내 품어왔던 꿈이다. 중.고생 대상의 독서토론교실을 연 것이다. 영어.수학 과외에 열 올리던 친구들은 비웃었다. 지금처럼 논술 광풍이 불 때도 아니었으니 얼마나 뜬금없었겠나. 하지만 그저 책 읽는 재미에 빠져 살았고 그럴수록 좋은 책을 향한 목마름이 더했으며 읽고난 뒤 벅찬 감동을 나눌 상대가 없어 안타까웠던 기억들이 아람을 이끌었다.

그렇다고 자선사업은 아니었다. 친구들이 과외교습하며 받는 만큼 돈을 받았다. 비웃음 소리가 더 커졌다. 그 돈 내고 올 학생들이 있겠나. 하지만 알음알음으로 찾아온 수강생 수가 이내 40명이 됐다. 주말에만 하다 보니 그 이상 받을 여력도 없었다. 대학원 때까지 7년 동안 매주 그만큼의 학생들에게 책을 골라주고 함께 읽고 느낌을 나눴다.

잠시 고민을 했다. 박사학위를 따서 학교에 남느냐, 아니면 본격적인 독서교실을 운영하느냐. 선택은 후자였다. 박사과정에 등록할 돈으로 40평 정도 되는 공간을 구했다. 이제 독서토론을 위해 학생들 집을 전전할 필요가 없을 터다. 수강생 수를 80명으로 늘렸다. 업으로 나섰다 해도 역시 주말에만 하기 때문에 그 이상은 무리였다. 그렇게 9년을 더 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독서토론교실 학생들은 '인디고 아이들'이라 불린다. 인디고(Indigo)의 쪽빛처럼 주체적이고 창의적이란 뜻이다. 그들은 '아람샘(아람 선생님)'과 매주 1~2권의 책을 읽고 토론한다. 문학.역사.사회.철학.교육.예술.생태.환경 등 편식 없이 고른 분야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저자를 직접 초청해 토론회를 연다. '주제와 변주'라는 제목으로 22회를 이어온 토론회에는 정재서 교수와 김용택 시인, 성석제 작가 등 인기 저자들이 참석해 학생들과 속 깊은 대화를 나눴다. 토론 내용을 정리한 책도 벌써 두 권이나 냈다.



아람샘과 인디고 아이들은 지난해 또 한번 일을 저질렀다. 국내 최초의 청소년 인문교양지 '인디고잉(INDIGO+ing)'을 창간한 것이다. 지난해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무하마드 유누스와의 e-메일 인터뷰는 물론 '옥스포퍼드 철학 사전'으로 유명한 영국의 사이먼 블랙번(케임브리지대 철학과) 교수와 '동유럽의 기적'이라 일컬어지는 슬로베니아의 문화비평가 슬라보예 지젝 등 세계적 석학들의 글을 받아 실었다. 학생들의 순수한 열정에 감동한 석학들이 무료 기고한 것이다.

이처럼 인디고 아이들은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토론하고 실천하며 국내외 저자들과 지적 교류를 하고 있다. 논술고사 원고지에 모든 것을 쏟아붓기 위해 프린트물로 요약된 명작을 읽고 뜻도 모르는 용어를 외우며 문장 기술을 배우고 있는 또래들과는 사뭇 다르다. 아람샘 교실에는 100여 명의 대기자가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을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특강을 해야 할 정도다. 분명 수요가 있는 것이다. 독서마저 입시도구로 전락한 어긋난 교육제도 속에서도 철학과 교양이 용해된 실천적 삶을 원하는 학생들이 분명 있는 것이다.

아람샘은 그들을 위해 3년 전 책방을 하나 냈다. '인디고 서원'이다(www.indigoground.net). 그 흔한 베스트셀러나 참고서.학습교재는 팔지 않는다. 아람샘이 고르고 학생들과의 토론으로 검증된 책들뿐이다. 그러니 경제적 어려움은 쉽게 상상이 간다. 한 번 만드는 데 1000만원이 들어가는 격월간지 '인디고잉'도 아직은 크게 적자다. 하지만 아람샘은 포기할 생각이 없다. 자신의 일이 "'대안'이 아니라 훼손된 '본질'을 되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 철학자 칼 포퍼는 "누군가 망쳐 놓을 수 있지만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길이 뭔지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고 했다. 이 땅에서 꺼져가는 참교육과 인문학의 불씨는 이념의 기치를 든 전교조 교사나 인문학 위기를 외쳐대는 노교수들이 아니라 한 가냘픈 여성 혁명가에 의해 지켜지고 있다.(이훈범 논설위원)

국민일보(07. 01. 06) 13평 동네책방 ‘문화혁명+ing’

부산 남천동 부산KBS 맞은편. 골목을 따라 조금만 들어가면 찻집처럼 예쁜 책방이 하나 나온다.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서점 ‘인디고 서원’. 문을 열면 13평 공간이 아늑하게 펼쳐진다. 철학,역사,문학,예술,교육,생태·환경 등 6개 코너로 구분된 서가에는 3000여권의 책들이 빼곡하다. 청소년들이 찾는 서점이라고 해도 참고서나 학습교재는 한 권도 없다. 만화책도 없다. 문구도 팔지 않는다.

서가를 훑어보니 ‘강의’ ‘빈곤의 종말’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현대예술의 거장 시리즈’ 등 어느 책 하나 만만치 않다. 여기서 판매하는 책들은 모두 주인 허아람(37)씨가 적접 선정한다고 한다. 허씨는 베스트셀러 목록이나 광고를 철저히 무시한다. 십수년째 중·고생 대상의 독서토론교실을 운영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이 책을 고르고 학생들의 검증을 거친 후 서점에 내놓는다. 교사들과 학부모들이 이 서점의 도서목록을 신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인디고 서원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저자 초청 독서토론회가 열린다. ‘주제와 변주’라는 제목으로 지금까지 22회를 이어왔다. 시사평론가 진중권,박홍규 영남대 교수, 시인 김용택, 장영희 서강대 교수,소설가 성석제 등 인기 저자들이 학생들과의 만남을 위해 이곳을 찾았다. 방문자들은 하나같이 이 작은 서점에 매료돼 후원자가 되었다.

허씨가 청소년 서점을 시작한다고 할 때,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꿈 같은 짓”이라는 것이었다. 2년 반이 지난 지금 그 ‘꿈 같은 짓’은 ‘주목할만한 현실’이 되었다. 속수무책으로 무너져가는 지방 중·소형 서점의 대안적 모델로,책을 읽고 자란 아이들의 경이로운 힘을 보여주는 증거로,이 서점을 거론하는 이들이 많다.

허씨는 지난해 또 하나의 ‘꿈 같은 짓’을 저질렀다. 청소년 인문교양지 ‘인디고잉(INDIGO+ing)’을 창간한 것이다. 청소년을 위한 인문교양 잡지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잡지의 기자들은 인디고 서원을 자주 드나드는 중·고생과 대학생 10여명이다. 순수 아마추어들이 전인미답의 길을 개척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런데 이 아마추어들이 신년 초 ‘대형 사고’를 쳤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문화이론가 슬라보예 지젝,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 사이먼 블랙번 등 세계적인 석학들이 이 잡지 신년호에 글을 기고한 것이다. 지젝은 한국 청소년들의 원고 청탁을 받고 ‘철학,아는 것을 모르는 것,그리고 이성의 사회적 사용’이란 제목을 단 A4용지 10장 분량의 글을 보내주었다.

인디고잉 기자로 활동하는 박용준(고려대 철학과 3)씨는 “슬로베니아에 있는 지젝에게 메일을 보내 인디고 서원을 소개하고 소통하길 원하는 우리의 마음을 전달했더니 흔쾌히 글을 주었다”면서 “노엄 촘스키 MIT 명예교수에게도 원고를 청탁했는데 이번엔 어렵고 다음 번에 꼭 글을 주겠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말했다.

창간호(2006년 9월호)에는 200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무하마드 유누스의 이메일 인터뷰가 실렸다. 유누스의 책을 읽고 감동한 학생기자들이 그와의 인터뷰를 기획해 성사시킨 것이다. 지난해 10월 노벨상을 받은 후 한국을 방문한 유누스는 이화여대 강연장에서 인디고잉 기자들과 포옹하기도 했다.

청소년 잡지,그것도 창간한 지 반 년밖에 안된,아마추어들이 만드는 잡지가 세계의 지성들과 직접 소통하는 모습은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어떤 힘이 석학들을 움직였을까. 허씨는 “학생들의 진정성과 순수함,그리고 용기에 감동한 게 아닐까요. 그리고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힘은 바로 그런 데서 나오는 것이라고 격려하기 위한 게 아닐까요”라고 말했다.

인디고 서원이 보여주는 것은 책 읽는 아이들의 힘이다. 오는 3월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는 이슬아(18·부산 분포고 3)양은 “독서는 교과서에서 배우는 얕은 지식이 아니라 굉장히 깊은 지식,놓치면 안 되는 지식,예를 들어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고 포용하는 방법 같은 것을 알게 한다”면서 “대학생이 돼서도 계속 잡지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인디고 서원을 방문하고 나서 “미래를 위해 이렇게 하자고 떠들기만 하는 일이 인디고에서는 현실로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 동네에도 하나 있었으면 하는 서점의 모습을 제시했고,우리 아이들에게 읽혔으면 하는 잡지를 만들어냈다. 무엇보다 모두가 포기했던 책과 청소년들의 만남을 성사시켰고,책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청소년 문화를 싹틔우고 있다.

이 유쾌한 문화혁명을 이끌어온 허씨는 “진실하고 정의롭고 순수한 꿈이 현실에서도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도 이 작은 공간에서 부지런히 새로운 길을 만들고 세상을 놀래킬만한 성공사례를 만들어갈 작정이다. “꿈이 이루어지는 사례를 보여줘야 사람들이 따라오고 사회가 변해요. 그걸 보고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꿈을 꿀 용기를 얻거든요. 인디고 서원이란 이름이 그런 희망의 상징이 되고 싶어요.”(김남중 기자) 

07. 01. 21.

 

 

 

 

P.S. 고등학교 이름은 아니지만, '인디고'는 왠지 '민사고'의 짝처럼도 들린다. <희망의 인문학>의 원제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부'인 것처럼 인디고 또한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만큼이나 '인문학'도 필요한 것. 그런 인문학과 그런 은행이 좀더 많아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쇼리스의 표현을 빌면, "인문학이란 지적 동력 없이 민주주의가 발전한다는 것은 실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27쪽) 우리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건 '87년 체제'니 '새로운 헌법'이니 하니 거창한 틀이 아니라 어쩌면 동네의 마땅한 청소년 서점 하나일 수도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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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새로운 시대의 가치혁명을 위하여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4-07 00:53 
    엊저녁엔 저녁 강의가 있어서 저녁을 일찍 먹었더니 강의가 끝나곤 허기가 졌다. 자정이 다 돼 귀가해 라면을 끓여먹고 또 내일 강의 준비를 하기 전에(아직 책도 다 안 읽었다) 잠시 숨을 돌린다. 어제, 아니 그제 저녁 다지원 강의가 끝나고 인디고 유스 북페어 프로젝트팀이 만든 <가치를 다시 묻다>(궁리, 2010)을 뜻밖의 선물로 받았는데, 다시금 무릎에 놓는다. '새로운 시대의 가치혁명을 위하여'는 그 부제다.   그
  2. 인문학 혁명가의 꿈꾸는 책방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4-30 08:58 
    4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또하나의 책읽기책은허아람의 <사랑하다, 책을 펼쳐놓고읽다>(궁리, 2011)다. 저자의 이름이 생소하더라도 '인디고 서원'은 혹 들어보셨을지 모르겠다.부산에 있는 청소년 인문학서점이자 한국 청소년 인문학 활동의 메카이다. 그 인디고서원의 대표가 바로 '아람샘'이다. 책날개에 실린 소개에는 '매 순간 생의 혁명을 꿈꾸는 투사, 이 땅의 인문혁명을 도모하는 전사'라고 돼 있다(또 한 가지는 '사랑이 아니면 인생은 아무것도
 
 
기인 2007-01-21 13:32   좋아요 0 | URL
예전에 마태우스님이 알라디너와 함께 만들고 싶어하신 서점과 비슷하네요. :)

아포지 2007-01-21 14:06   좋아요 0 | URL
한 방 크게 먹은 느낌입니다. "희망의 인문학"과 함께 여운이 꽤 오래 갈 것 같습니다.

클리오 2007-01-21 21:36   좋아요 0 | URL
꼭 중앙일보는 기사에 티를 내는군요.. 참교육이념 어쩌고 하면서...--; 그나저나 저분, 대단하십니다!!

3794 2007-01-22 00:58   좋아요 0 | URL
부산에 있으면서도 이런 서점이 있는것도 몰랐군요. 시간 나는데로 구경가봐야 겠습니다.

로쟈 2007-01-22 01:10   좋아요 0 | URL
기인님/ '알라고 서원'이요?^^
apouge님/ 글쎄, 동네마다 이런 서점이 하나씩 있으면 어떨까 싶습니다...
클리오님/ 인디고잉도 수익을 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3794님/ 몇 권 팔아주시길.^^
 

약속이 취소되는 바람에 하루종일 집에 붙어 있게 된 탓에 신문을 보지 못했다. 물론 인터넷으로 주요 기사들을 훑어보게 되지만 '신문지'를 읽는 것만큼 개운하지는 않다. 구닥다리 활자문화세대이면서, 신문지 세대여서 그런가 보다. 온라인 기사들을 훑어보다가 눈에 띈 기사를 옮겨놓는다. 아마도 내일자 지면에 실리게 되는 듯하다. <자본론>의 한국어판 출간 20주년에 관한 기사이다.

경향신문(07. 01. 15)  이보게, 마르크스 다시 얘기해보세…‘자본론’ 재조명 활발

직선제 헌법 20주년,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20주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 20주년…. 올해는 유난히 ‘20주년’이 많다. 1987년 6월 민주화의 산물들이다. 또 하나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한국어판 출간도 20주년이다. ‘무시무시한 금서’로 일본어판, 북한 번역본 등이 은밀히 떠돌던 자본론이 당당하게 일반인들 손에 쥐어질 수 있었던 것도 민주화의 세례 중 하나다.



당시 한국사회에 자본론을 공개적으로 처음 소개한 사람은 강신준 동아대 경제학부 교수(53)와 김수행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65). 김교수 책이 더 많이 알려지긴 했지만 빗장을 열어젖힌 것은 강교수의 ‘자본’(이론과실천)이다. “87년 농협중앙회 조사부 근무 시절이었어요. 이론과 실천의 김태경 사장이 와 뭔가 건넸는데 집에 와서 뜯어보니 ‘자본론’이더군요. 익명의 서울대생들이 초벌 번역한 것이었죠. 밤을 새워가며 다듬어 ‘익명의 역자들’로 해서 출간이 됐습니다. 당시 문화공보부에 납본(納本)하기까지 1주일간 책은 불티나게 팔려 나갔어요. 난리가 났죠.”

잠적했던 김태경 사장이 결국 잡혀 법정에 섰다. 민주화 물결 속에서 김사장의 부인이었던 당시 강금실 부산지법 판사, 김수행 한신대 교수 등의 탄원에 힘입어 기소유예 처분이 내려졌다. 사실상 ‘해금’이었다. 강교수는 이어 자본론 2, 3권을 실명으로 번역해냈다.

“실명으로 책을 낼 때는 학교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당시 학계는 마르크스 경제학을 받아줄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하지만 민주화 이후 동아대에서도 학생회가 대학 당국에 ‘정치경제학’ 강의를 요구했죠. 그래서 박사논문 쓴 지 6개월도 안된 제가 임용됐어요.” 강교수는 절판된 자신의 번역본 출간 20주년을 맞아 주석까지 모두 담은 자본론의 독일어판 번역본을 새로 낼 예정이다.

김수행 교수의 ‘자본론’(비봉출판사)은 좀더 완결된 번역으로 89년 2월 출간돼 대중에게 파고들었다(*영역본을 옮긴 것으로 안다). 72년 외환은행 런던지점 근무 시절이던 자본론을 접하고 문화충격을 받았던 김교수는 80년대 초부터 이미 자본론 번역에 들어갔다. “서울대 교수가 출판하니 공안당국에서도 손을 댈 수 없었다고 봅니다. 당시 내 강의는 수강생이 1000명이 넘었어요. 다 수용하지 못해 후배 학자들을 동원해 강의를 맡겼을 정도였죠.”

주황색 표지에 마르크스의 초상화가 그려진 ‘자본론’(1~3권) 완역본은 불온서 해금의 상징이 됐다. 비봉출판사에 따르면 책은 지금도 매년 1000여권씩 나가는 스테디셀러로 제1권 상(上)편 기준으로 3만여권이 팔린 것으로 추산된다(*나도 이 책만 갖고 있는 듯하다). 김교수는 “93년 한꺼번에 몰아 받은 인세로 산본의 아파트 분양대금을 치렀다”며 “마르크스가 나를 먹여살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생명은 짧았다. 소련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90년대 중반까지 한국 경제가 호황을 누리면서다. 많은 학자들이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했고, 대신 그람시, 알튀세르 등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가 유행했다. ‘시차를 갖고’ 도입된 마르크스주의였지만 그나마도 대중화되기에 시간이 짧았던 것이다.

그러나 자본론은 97년 외환위기 이후 다시 조명을 받게 됐다. 김수행 교수는 “경제적 불안정성, 공황의 반복과 실업 증가, 빈부격차의 증대 등 자본주의의 모든 문제가 드러났다”며 “자본론의 수요가 다시 생겨났고, 연구자들도 조금 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강신준 교수는 “97년 외환위기 이후 경제적으로 소수만 더 행복해지고, 더 많은 사람이 불행해지는 상황을 보며 지금이야말로 마르크스를 다시 얘기해볼 수 있는 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일부 학자들에 의해 꾸준히 명맥을 이어온 마르크스주의는 자본론 번역 20년을 맞아 중흥을 꾀하고 있다. 김수행, 김세균, 이진경 교수 등이 문화사회연구소에서 마련한 ‘한국 마르크스주의 지형 연구’ 강좌를 진행 중이다. 또 한국사회경제사학회는 오는 4월 학회 설립 20주년을 맞아 ‘민주화 이후의 한국자본주의’를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다루는 학술대회를 열 예정이다.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있는 학자들로 구성된 맑스코뮤날레 등도 마르크스주의를 주제로 한 문화제인 제4회 ‘맑스코뮤날레’를 열 계획이다.

이 외에 장상환, 정성진 교수가 주축이 돼 마르크스 경제학 이론 연구를 주도해온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은 ‘마르크스주의 연구’ 6호를 냈다. 20년전 자본론 한국어판을 처음 내 옥고를 치른 이론과 실천 김태경 사장은 최근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를 다시 펴내며 이렇게 밝혔다.



“‘수고’가 쓰였던 1844년에도, 출간됐던 1932년에도, 한국에 번역됐던 1987년에도, 그리고 지금에도 인간 사회 저 심연에 똬리 틀어 입 벌리고 있는 악의 본질이 존재하는 한, 그에 대항하기 위한 강력한 사유의 무기로 ‘경제학-철학 수고’는 아직 유효하다.”(손제민 기자)

07. 01. 25.

P.S. 국내 마르크스 학자들 간에도 의견/노선 차이가 심한 것으로 아는데, 그 중 한 축을 대표하는 정성진 교수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한울, 2006)가 작년말에 출간됐다. 564쪽이니까 두툼하다. 나로선 마르크스보다 트로츠키에 대한 관심 때문에 한번 들춰볼 듯한데, 알라딘 세일즈 포인트가 현재까지는 제로이군(최근에야 깔린 것인가?)...

P.S.2. 생각난 김에 시 한 편도 옮겨둔다. '자본론' 하면 떠오르는 시가 내겐 황지우의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이다. 나도 프로그레스출판사의 양장본 마르크스를 모스크바에서 잠시 찾은 적이 있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이빨 닦고 세수하고 식탁에 앉았다.
  (아니다. 사실은 아침에 늦게 일어나 식탁에 앉았더니
  아내가 먼저 이 닦고 세수하고 와서 앉으라고 해서
  나는 이빨 닦고 세수하고 와서 식탁에 앉았다.)
  다시 데워서 뜨거워진 국이 내 앞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침부터 길게 하품을 하였다.
  소리를 내지 않고 하악을 이빠이 벌려서
  눈이 흉하게 감기는 동물원 짐승처럼.
 
  하루가 또 이렇게 나에게 왔다.
  지겨운 食事. 그렇지만 밥을 먹으니까 밥이 먹고 싶어졌다.
  그 짐승도 그랬을 것이다; 삶에 대한 想起, 그것에 의해
  요즘 나는 살아 있다.
  비참할 정도로 나는 편하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이빨 닦고
  세수하고, 식탁에 앉아서 아침밥 먹고,
  물로 입 안을 헹구고, (이 사이에 낀 찌꺼기들을 양치질하듯
  볼을 움직여 물로 헹구는 요란한 소리를 아내는 싫어했다.
  내가 자꾸 비천해져 간다고 주의을 주었다.)
  나는 소파에 앉았다.
  그러나, 소파!
  '소파'하면 나는 '비누' 생각이 났다가 또 쓸데없이
  '부드러움'이라는 형용사가 떠오르다가 '거품-의자'가 보인다.
  의자같이 생긴, 젖통이 무지무지하게 큰 舊石器時代의
  이 多産性 여인상은 사실은 비닐로 된 가짜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데
  "오우 소파, 나의 어머니!" 나는 속으로 이렇게
  영어식으로 말하면서, 그리고 양놈들이 하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소파에 앉았던 거디었다.

  
  나는 오늘 아침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소파에 앉았다.
  소파에 앉으면 거실이 飜譯劇 무대 같다.
  중앙에 가짜 가죽 소파 하나, 그 뒤엔 오전 9시를 가리키고 있는
  괘종시계가 걸려 있고, 세잔風 정물화 한 점, TV세트,
  窓을 향한 幸運木 한 그루, 그리고 폼으로 갖다놓은 읽지도 않은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모스크바, 프로그레스 출판사) 양장본 3권이
  가로로 쓰러져 있는 서투른 書架와 끊임없이 부글거리는 수족관;
  그렇지만 이 무대에서 번역될 만한 비극은 없다.
  다만 한 사나이가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소파에 앉았다.
  젊었을 적 사진으로는 못 알아보게 뚱뚱해진,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최근엔 입에서 나쁜 냄새가 난다고 아내에게 비난받은 바 있는
  이 사나이가 멍하니 소파에 앉아, 마치 동물원 짐승이 그렇게 하듯이,
  하품을 너무 길게 하고, 눈물이 난 눈을 두 번 깜, 빡, 깜, 빡하고 있을 때
  무대 왼편(주방)에서 그의 아내가 등장했으며, 그녀가 소파에 걸터앉아
  그의 턱을 쓰다듬어주면서 면도 좀 하라고 하자,
  그가 아내를 껴안으면서 "엄마!"라고 불렀을 뿐이다.
 
  하마터면 피아니스트가 될 뻔했던 아내가 출장 레슨 나가기 전에
  그에게 와서 나를 어루만져줄 때가 나는 좋다.
  나는, 아내가, 소파에 앉아 있는 그의 머리카락을 커트해 줄 때,
  낮잠 자고 있는 그에게 가만히 다가와 나의 발톱을 잘라줄 때,
  혹은 그를 자기 무릎에 눕혀놓고 내 귀지를 파줄 때, 좋다
  아침마다 그에게 녹즙을 갖다주고, 입가에 묻은 초록색을 닦아주자
  나는 그녀를 보면서 방그레 웃었다.
  나는, 아내가 그를 일으켜주고 목욕시켜주고 나에게 밥도 떠먹여주고
  똥도 받아주고, 했으면 좋겠다.
  나는 그의 남은 생을, 그녀에게 몽땅 떠맡기고 싶다.
  코로 쉼만 쉴 뿐, 꼼짝도 않고 똥그란 눈으로 뭔가 간절히 바라고 있으면
  그녀가 다 알아서 해주는 식물 인간이고 싶다.
  가끔 햇빛을 보고 싶어하므로 창문을 열어줄 필요만 있을 뿐.
  동정할 수는 있어도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이 幸運木, 나는
  이 病室에서 나가고 싶지 않다.
 
  나는 오늘 아침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소파에 앉아서,
  아내가 나갔기 때문에 하루종일 집에서 혼자 놀았다.
  비계 덩어리인 구석기 시대 어머니상에 푸욱 파묻혀서
  괘종시계가 내 여생을 사각사각 갉아먹는 소리를 조용히 들었다.
  너무 많이 남아도는 나의 시간들이 누에 똥처럼 떨어졌지만
  나는 수락했다. 이것도 삶이며
  이제는 그것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걸.
  사람이 喜劇이 되는 것처럼 견딜 수 없는 일이 있을까마는
  그러므로 무위는 내가 이 나머지 삶을 견딜 수 있게 하는 格이랄까,
  사람이 만화가 되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에
  비록 사나이 나이 사십 넘어서 "내가 헛, 살았다"는 깨달음이
  아무리 비참하고 수치스럽다 할지라도, 격조 있게,
  이 삶을 되물릴 길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이것 인정하기 조금은 힘들지만
  세상에 조금이라도 복수심을 갖고 있는 자들의 어쩔 수 없는 천함보다야
  無爲徒食輩가 낫지 않겠는가! 나는 소파에 앉아서 하루종일,
  격조 있게, 놀았다.
  탄식하는 시계가 분침과 시침을 벌려
  역광을 받는 공작새처럼 화사한 오후를 만들고,
  내가 손대지 않은 無垢한 시간을 뜯어먹은 누에가
  다른 종류의 생을 예비하는 동안
  수족관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얼굴에
  橫으로 도열한 수마트라 두 마리, 열대어 화석처럼 박혀들어왔을 때
  나는 내가 담겨 있는 空氣族館을 느꼈다.
  거기서 나는 고기처럼 또 하품을 했고,
  MBC 뉴스데스크에서는 前해군참모총장이 검찰청 앞에서
  검은 라이방을 쓰고 사진 기자들에게 포즈를 취하는 거디었다.
 
  내가 "오우 소파, 마마이야!" 외치면서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것은
  아내가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대 오른쪽에서 등장했다.
  슈퍼마켓에 들렀는지 식료품 봉다리를 들고.)
  나는 오늘, 밥 먹고 TV 보고 잤다.
  자기 전에 아내가 이 닦고 자라고 해서 이빨도 닦았다.
  화장실 앞에서 前해군참모총장처럼 포즈를 취했더니
  아내가 쓸쓸하게 웃었다는 것도 적어야겠다.
  아 참, 오늘 날씨는 대체로 맑았고 서울과 중부 지방 낮 28도였다.
  내가 안방 문을 열면 무대, 불이 꺼진다.
  어둠 속에서 한 사나이가 외친다; "지금, 옥수수밭에 바람 지나가는
  소리, 들리지?" 저 15층 아래 강;
  밤에는 강이 긴 비닐띠처럼 스스로 광채를 낸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
  가련한 空氣族들이여, 안녕, 빠이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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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1-15 20:29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우울한 시대 이상 새롭게 쓰기. 학부 때 주위에 황지우-주의자 들이 많았었는데, 그 황지우-주의자들은 다 무얼하고 있을까. ^^;

로쟈 2007-01-15 22:05   좋아요 0 | URL
황지우-주의자들이란 소파족들인가요?..

yoonta 2007-01-16 01:14   좋아요 0 | URL
강신준씨가 독어 번역본을 새로 내시나보군요..반가운 소식이네요. 김수행씨의 번역본은 북한본을 많이 참조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강교수의 새로나오는 번역본과 비교해서 읽어보면 재미나겠네요. ^^

로쟈 2007-01-16 08:44   좋아요 0 | URL
나중에 꼭 비교한 글을 올려주시길.^^

나비80 2007-01-16 14:35   좋아요 0 | URL
'읽지도 않은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 양장본 3권' 이 구절이 인상적이네요.
저도 그런책 수다하거든요.^^ 디스플레이 용이랄까.
김수행 역 <자본론>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존재하는 듯 합니다. 지금 서점이나 대학가에 깔린게 거의 김수행 역이라 그렇지 정치경제학을 전공하는 교수님들 말씀을 들어보면 번역이 좀 조야한 수준이라네요. 저도 오역과 패역에 대한 문제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이상하게도 교수님들이 그럴때마다 '그럼 당신이 해보시지'라는 말이 턱 밑까지 치고 올라오긴 합니다. 솔직히 조금 편안한 문장으로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 없는 것도 아니죠. 그래도 저 오렌지 빛과 고등학교 수학 정석 같은 표지는 여전하네요. 저는 사실 시초축적(본원적 축적) 부분만 심하게 발췌독을 해 놓은 형편이라 <자본론> 전반에 대해 가타부타 할 입장이 못 됩니다.

로쟈 2007-01-16 14:43   좋아요 0 | URL
사정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로선 말씀대로 '수학 정석' 같은, 혹은 고시서적 같은 권위적인 모양새가 별로 마음에 안 들거든요(게다가 처음엔 한자 투성이었죠). 그리고 중요한 책이면, 소프트카바에 문고본으로도 나와야 정상 아닌가라는 게 제 지론입니다...

천재뮤지션 2007-01-22 09:55   좋아요 0 | URL
손제민 기자. 제 고등학교 선배인데 이렇게 멋진 기사를 선물해주시다니!
그나저나 빨리 강신준씨 새 번역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로쟈님께 질문 하나만.
(사실 누군지도 모르고 항상 눈팅만 하다가 처음 남깁니다)

자본 번역본이 국내에 한 3개 정도 되는 걸로 아는데 그 중 제일 볼 만한 번역본이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로쟈 2007-01-22 11:16   좋아요 0 | URL
그건 제 판단을 넘어서는 질문입니다.^^; 제가 강신준 번역은 안 갖고 있고, 본문에 적은 대로 김수행본도 일부만을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독어본과 대조해볼 능력이 안됩니다. 아마 다른 분들이 지적해놓은 게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은 듭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