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월요일부터 서재의 문을 닫아놓았지만 아직 버리지 못한 습관(!)대로 흥미를 끄는 기사들은 간간이 스크랩해놓는다. 남의 얘기 같은 않은 기사가 눈에 띄기에(나의 오랜 고민거리이기도 하고) 옮겨놓는다. 중대 대학원신문에 게재된 것이지만 학술저널 담비에서 가져왔다.  


중앙대 대학원신문 제239호(07. 05. 30) 주여, 책으로부터 구원하소서!

나는 가끔 사람들을 만날 때 책을 선물한다. 새 책을 주기도 하지만, 내가 이미 읽은 책들 중에 그 사람들에게 맞을 법한 것을 골라 안겨주기도 한다. 선물의 의도는 두 가지. 그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인 동시에 방을 가득 메우고 있는 책의 양을 줄이기 위해서다.

대체 책이 얼마나 되기에 그러냐고? 많지는 않지만, 남들만큼은 된다. 대충 이천여 권 정도. 고향집에 천 권, 서울에 천 권. 서울에 있는 내 방 책장이 열 개인데, 이것으로 책들을 다 정리할 수가 없어서 방 안이 온통 난잡하다(*나는 그 네 배 정도 되는 듯하다).

당연히 이사 따위는 엄두도 못 낸다. 이전에 살던 기숙사에서 나올 때 책 박스가 서른 개 정도였다. 그 때 고향에 보낸 책 박스가 스무 개. 부모님에게 더 이상 책 사지 마라는 질책을 일 년 넘게 들었건만 이제 그 때를 훌쩍 넘어서는 분량으로 늘어났다(*나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그런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책이 늘어나는 만큼 고뇌도 늘어간다. 사랑은 집착을 낳고, 집착은 고통을 낳는 법. 무소유를 외치는 법정 스님도 유일하게 책에 대한 소유욕만은 뿌리치지 못하셨다지 않는가. 책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리 되지 못하는 것이 나의 솔직한 현실이다.

이는 아마 나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대학원생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고민인 듯하다. 대학원생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책을 사서 모은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이다(*하물며 대학강사는?). 생물학적 연령과 주름이 비례하듯이 재학기간과 장서량 또한 비례하기 마련이다. 성욕은 감퇴할지라도 책 욕심은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이 대학원생들의 잔혹한 현실이다

내세의 이미지는 현세의 욕망을 반영한다고 보면, 대학원생에게 있어서 천국의 이미지는 도서관이다. 원하는 책으로 둘러싸여 있으면 그게 곧 천국이 아닌가! 다치바나의 ‘고양이 빌딩’처럼 내게도 개인 도서관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욕망은 향락의 근원인 동시에 고통의 원인이기도 하다(苦集). 어린 자식 키울 때는 마냥 예쁠지 모르지만, 다 크고 나면 말썽만 피우듯이 새 책을 손에 쥘 때는 행복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방바닥을 굴러다니는 꼬락서니를 보면 번뇌만 쌓여간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원생의 지옥 또한 도서관일 것이다. 책을 감당 못해 허덕이면 그게 바로 지옥인 것이다. 대학원생에게 텍스트의 외부는 없다. 바벨의 도서관을 벗어날 방도가 없는 것이다(*아래는 다치바나의 서재).



내가 바라는 구원은 책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사진 같은 기억력이나 번개같은 속독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나는 알라딘의 서재가 짐을 덜어줄 걸로 기대했지만 오산이었다.) 그러니까 브로델처럼 한 번 본 책은 본문과 쪽수까지 다 암기한다거나 장정일처럼 십여 권의 대하소설을 하루 만에 다 읽어치운다거나……. 아니다. 설혹 그런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절판 도서에 대한 나의 페티시즘은 해결되지 않는다. 오, 주여, 이 대학원생을 책의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소서!(이원석 문화연구학과 박사과정) 

07. 06.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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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돌이 2007-06-03 10:29   좋아요 0 | URL
어디 납치된줄 알았습니다 ㅋㅋ.

마늘빵 2007-06-03 11:31   좋아요 0 | URL
로쟈님 뜸하십니다. :)
저도 책 욕심은 점점 커지고 있으니 큰 일 입니다. 이제 플래티넘은 기본입니다. 그게 수치가 얼마나 올라가느냐에 문제지요. 집안에 책 놔둘데는 없고 어여 독립해서 서재를 꾸리고픈 생각뿐.

로쟈 2007-06-03 11:37   좋아요 0 | URL
전에 말씀드린 대로 지금 '휴가중'입니다. 잠시 '나의 서재2' 테스팅을 해보고 있습니다. 글자꼴 바꾸기를 몇 번 했더니 바로 에러가 뜨네요. '새 서재'라고 정을 붙여보려고 하지만 워낙에 굼뜬 타입이라 적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알라딘 구세대'는 물러가야 되는 게 아닌가도 싶고.--;

푸른괭이 2007-06-03 15:29   좋아요 0 | URL
오, 로쟈님! 그냥 여기에 머무르시지요 ^^ 돌아오셔서 너무 반갑습니다 ㅋㅋㅋ

Mephistopheles 2007-06-03 17:26   좋아요 0 | URL
저도 일이 지치고 힘들 때 가끔 머리속에 개인 도서관 생각이 난답니다..
저푸른 초원위에 붉은 벽돌로 나선형 계단이 들어갈 수 있는 원통형 서가와
함께 벽난로와 푹신한 소파에서 조용히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요..^^
다른 사람들은 동호인 주택이라고 끼리끼리 모여살기도 하는데 저는 이곳
서재분들이 모여서 개인서고식으로 도서관 만들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자본이..들지만요..^^) 서고를 구분해서 "로쟈관"이라던지 "물만두관"
처럼 말이지요..

작은앵초꽃 2007-06-03 20:25   좋아요 0 | URL
아멘!
남 얘기 같지 않아요. ㅋㅋㅋ

Joule 2007-06-03 23:23   좋아요 0 | URL

흐음. 로쟈님도 새로운 혹성에 적응하는 연습을 좀 해보신 게로군요. 저는 대략 이틀 정도를 만지작거리다가 도무지 맘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는 투덜거림만을 남기고 자포자기했습니다. 하나마나한 소리지만 서재 2.0이라는 새로운 혹성에 혹하시는 분들이 많은 만큼 비슷한 숫자만큼의 행성민들이 저나 로쟈님처럼 마음 못 붙이고 갈팡질팡 우왕좌왕 설왕설래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근데 적응 못해도 다른 데 가지 말고 여기서 놀아요, 우리. 그나마 책 읽는 낙 있는 사람들이 책 있는 데서 놀아야지 어디 간답니까. 글은 올리셔도 댓글 달기에 좀 소원해지면 알라딘 서재질도 할 만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아참, 로쟈님 새로 글 올리셨길래 기분 좋아 한잔했습니다. (한잔하다가 동사라는 거 아세요? 그러니까 붙여 써야 한대요.) 


로쟈 2007-06-04 00:09   좋아요 0 | URL
네 약간 적응 안되네요. 저는 이사 가기 싫어서 8년째 같은 집에서 사는데, 아무리 더 좋아진 서재라지만 느닷없는 '이주민' 신세가 아닐까 싶습니다. 세간들이야 다 갖고 가겠지만서도...

paviana 2007-06-04 10:51   좋아요 0 | URL
약간 안 되세요? 전 미리보기 들어갔다가 화들짝 놀라서 제집에서 길을 잃고 못 나와서 창 닫아서 다시 로그인해서 옛집으로 들어갈 정도에요.흑흑흑

바벨의도서관 2007-06-04 16:17   좋아요 0 | URL
저 글을 쓴 사람입니다. 로쟈 님의 고작 1/4에 불과한 책을 가지고 푸념해서 죄송합니다(그래도 작년과 올해에 쓸데없이 바지런을 떤 탓에 올해가 다 가기 전에 삼천 권을 넘어버릴 것 같습니다).

로쟈 2007-06-04 17:02   좋아요 0 | URL
Paviana님/ 낼모레면 그 돌아갈 집도 없어지는 것 아닌가요?--;
카이로스님/ 죄송하긴요.^^; 다들 저마다의 책 무게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죠. 대학원생 시절에 저도 일년이면 300-400권씩 책이 불어나서 애를 먹었습니다(문제는 나이 들어도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인데요). 암튼 잘 버티시고, 아주 관대한(!) 배우자를 만나시길...
 

최근 박노자의 신간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한겨레출판, 2007)가 출간되었고, 이 책은 구입 예정도서 목록에 올라가 있다. 대개는 한겨레21에 연재된 칼럼들이 아닌가 한다. 가장 최근에 한겨레21에 게재된 그의 칼럼을 옮겨놓는다. 한국 교회에 대한 비판이어서이다(나는 그의 교육론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종교론에는 대부분 공감한다. 그에 대한 정리는 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aperId=862545). 가까운 가족들이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태신자'인 내가 대놓고 교회비판을 늘어놓을 수는 없고 다만 이런 믿음직한 칼럼들을 즐겨 읽음으로써 '내적 무신앙'을 다질 따름이다.

한겨레21(07. 05. 23) 교회, 장기적 보수화의 일등공신

거의 한 세기 전인 1906년에, 자칭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독일의 저명한 경제사학자 좀바르트(Werner Sombart·1863∼1941)는, <미국에 왜 사회주의가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책을 펴낸 적이 있었다. 노동자 사이에서 이미 헤게모니를 확립한 독일 사민당과 정반대로 미국 사회주의자들이 주변적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좀바르트가 문제의식을 갖게 된 출발점이었다. 좀바르트는 노동계급의 권리투쟁에 자극을 줄 수 있는 봉건적 잔재의 부재나 비교적 높은 임금 수준, ‘기회 균등’ 신화의 설득력 등을 들어 미국의 ‘예외성’을 설파했다. 이후 미국에서 좌파 운동이 지지부진한 이유를 고민해본 진보적 지식인들은 인종들 사이에 위계서열을 두어 교묘한 분리통치를 해온 미국 지배층의 사회통제 정책과 ‘적색 공포’ 등을 그 이유로 꼽았다.

그리고 늘 지적되는 또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일부 정통 가톨릭 국가들을 논외로 한다면 어떤 산업사회보다도 미국인들의 의식 세계에 종교가 강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대체로 미국 성인의 약 40∼44%가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고, 약 73% 정도는 신의 존재를 믿는다. 교회에 출석하는 이들이 성인의 3∼4%에 불과한 스칸디나비아 같은 지역과는 천양지차다. 빈곤과 같은 사회적 문제들을 ‘개인 문제’로 환원하고 권리투쟁 대신에 신앙적인 ‘개인적 해결’ 방향을 제시하는 교회가 사회적 헤게모니를 장악한다면 과연 ‘모두를 위한 해결’을 모색하는 좌파적 담론이 쉽게 확산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교회의 영향력이 사회 전체의 보수화를 가져온다는 것은 미국만의 상황인가? 한국의 경우에도 1980년대 후반까지 자본주의에 대한 본격적 문제 제기의 결여를, 단지 ‘위로부터의 억압’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한국 평민들을 ‘시키는 대로 일하는’ 순치된 ‘산업 전사’로 만든 것은 학교에서의 체벌부터 군대에서의 ‘얼차려’까지 병영국가의 폭력적 ‘국민화’ 과정, 그리고 중앙정보부의 고문실로 상징되는 ‘백색 공포’였다. 그런데 박정희 체제와 크게 다를 것이 없는 싱가포르에서조차도 1970년대에 노동자 1천 명당 쟁의로 인한 노동 손실 일수가 한국(연평균 약 4천 일)에 비해서 두 배나 높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1980년대 후반까지 한국 노동자들은 다른 권위주의 국가의 노동자에 비해서는 물론, 일제 강점기의 노동자들에 비해서도 매우 순치된 모습을 보였다. 예컨대 노동자 수가 식민지 시절에 비해 몇 배로 늘어난데다 정치적 분위기까지 자유로웠던 1960년에 파업 참가자 수(6만4천 명)는, 일제의 탄압이 자행됐던 1923년 노동쟁의 참가 인원(6만1천 명)과 비슷한 수준이다. 이와 같은 순치 효과를, 박정희 시대를 ‘대중 독재’로 개념화하는 일군의 연구자들처럼 애국주의적 ‘이념적 동원’으로만 이해할 수 있을까?

물론 탄압과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의 철저한 주입이 노동자들 사이에 계급의식이 형성되는 것을 원천 봉쇄했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자신의 계급적 존재를 깨닫지 못하는 ‘국민화된’ 노동자의 탄생을 이끌었던 주역은 반공주의, 성공 이데올로기, 자본주의와 친미주의의 기수 노릇을 해온 이른바 ‘대형 교회’들이 아니었나 싶다(*이건 거꾸로 한국교회의 자화자찬이 될 만하겠다!). 어떤 측면에서는 대형 교회들이 보급했던 신앙 형태야말로 1950∼80년대 무수한 민초들의 진정한 이데올로기였기 때문이다.

해방 당시 겨우 조선인의 2∼3%에 불과하고 주로 서북 등 일부 지역에서만 밀집해 거주했던 기독교인들은 과연 어떻게 해서 오늘날처럼 총인구의 약 24%를 차지하게 됐는가? 물론 6·25 전쟁 이후의 폐허 속에서 ‘근대·문명’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던데다 미국의 구호물자를 재분배할 능력을 갖추고 ‘기독교인 대통령’ 이승만을 그 ‘힘’의 표징으로 자랑할 수 있었던 교회는 이미 제1공화국 시절에 남한 사회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1950년대에 교회의 성장은 빠르지 않았다. 개신교의 경우 1950년 50만 명 정도였던 신도 수가 1960년에 70만 명 정도까지 늘어났을 뿐이다.

기독교의 ‘붐’은 고속성장과 대량이농의 시대인 1960∼80년대에 일어났다. 개신교의 경우 교인 수가 1980년 600만 명, 1990년 약 800만 명에 이르러 한국 도회지의 야경은 네온 빛이 번쩍이는 ‘십자가의 숲’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교회는 해체된 농촌 공동체를 대체해 이농 인구를 통합하면서 국가가 제공하지 못하던 일부 복지 서비스(자녀 장학금, 직업 알선 등)를 제공해주는 사실상의 ‘국가 안의 또 하나의 국가’로서 위치를 굳혔다.

물론 교회가 열악한 생활에 지친 서민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만성적인 불안을 약간이나마 덜어주었던 것은 긍정적 구실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문제는, 그 시대의 경제가 몇 개 재벌들을 위주로 해서 성장했듯이, 그 성장에 편승한 교회의 성장도 ‘교계의 재벌’이라고 할 대형 교회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다. 예컨대 이미 1980년에 대표적 ‘초거대형 교회’라 할 순복음교회가 10만 교인을 기록해 단일 교회로는 ‘세계 최고의 규모’를 자랑했다. 이 ‘종교 재벌’들이 서민들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그 귀에 무엇을 속삭여온 것인가?

‘민족의 중흥’과 보조를 맞춘 ‘민족의 복음화’를 외치고, ‘기독교인들의 총화안보와 반공궐기’를 이끌고 ‘해방신학, 혁명신학, 흑인신학’을 ‘악마적 공산주의의 앞잡이’로 봤던 한국대학생선교회의 김준곤 목사나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 등이 유신 독재를 열성적으로 지지하면서 반공 담론 대중화의 일익을 맡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그들이 외쳤던 ‘상징적 반공국가 만들기 위한 분골쇄신’(‘기독교와 공산주의 갈림길에서’, 김준곤, <크리스챤신문>, 1975년 7월26일)과 같은 끔찍한 전체주의적 언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초고속으로 늘어나는 교인들이, 주일마다 교회에 출석하고, 정기적으로 헌금을 내고 ‘평신도 합숙전도훈련’이니 ‘철야기도’니 특정 도시의 ‘성시화’를 위한 집회니 하는 각종 대형 행사에 동원되면서 권력에의 복종으로서 ‘규율적 근대’를 교회를 통해 익히게 됐다. 그런데 예컨대 1992년에 한국의 가장 독자적인 신학자이었던 변선환 목사를 감리교 교단에서 출교하는 데 앞장서면서 “자유주의 신학이 사탄의 도구다!”라고 외쳤던 김홍도 목사의 모습에서 그 신도들이 주체적 개체들 위주의 ‘해방으로서 근대’를 발견할 수 있었겠는가? 교련 수업과 ‘얼차려’의 군사주의 못지않게 극우적 교회의 ‘유일사상’은 민중 사이의 비판적 이성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었다.

지금부터 한국이 장기적 보수화에 들어간다면 그 일등공신 중 하나는 바로 여태까지 ‘한국적 파시즘’의 버팀목 구실을 해온 대형 교회들일 것이다. 이 섬뜩한 시나리오를 막기 위해 무엇보다 기독교 신도 사이에 사랑과 평화의 화신으로서, 일종의 ‘원시 무정부 공산주의자’로서 예수재발견이 절실할 것이다.(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참고 문헌

1. “군사정권기 한국교회와 국가권력: 정교유착과 과거사 청산 의제를 중심으로”장규식,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24호, 2006, 103∼133쪽
2. “박정희 체제의 지배담론과 대중의 국민화”황병주, 임지현·김용우 엮음, <대중독재> 제1권, 책세상, 2004, 475∼517쪽
3. <변선환 신학 새로 보기> 대한기독교서회, 2005
4. 〈American Fascists: The Christian Right and the War On America〉 Chris Hedges, Free Press, 2007

07. 0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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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05-28 05:27   좋아요 0 | URL
최근 돌아가신 권정생 선생도 -교회에 다니기는 하셨지만- 원시 무정부 공산주의자로서의 예수(정확히 그런 표현이 옮바른지는 모르겠으나.) 를 그리고 계셨던 듯 합니다.대게 기독교와 예수의 본질을 짚고 실천하는-지극히 소수겠지만 - 사람들은 그런 성향이 있더군요,^^ 오늘은 아침에 일찍 출근했어요.5시...^^
자..이제 바닷바람 좀 맞으러 가 볼까...좋은 아침,좋은 한 주 되세요.

로쟈 2007-05-28 08:41   좋아요 0 | URL
한국형 대형교회들의 번성이 기이한 현상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건 기독교와도 무관한 '한국적' 현상이 아닐까 싶어요. 근데, 바닷가로 출근하시나요?^^
 

프레시안에서 독일의 저명한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프레시안에서 인터뷰한 건 아니고 독일신문 '디 차이트'(독일의 '더 타임스'쯤 되나?)와의 인터뷰 기사를 우리말로 옮겨놓은 것이다. 주제는 이민 문제이다. 최근에 나온 하종오 시인의 시집 두 권도 우리 주변의 이민 노동자들 문제를 다룬 것이어서 리뷰 기사를 같이 옮겨놓았다. 유럽에서만큼 '직접적'으로 실감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우리도 다민족, 다국적 사회로 진입해가고 있는 상황이므로 참고할 만하겠다(최근 '국경'이란 주제가 한국문학의 주된 관심사가 되고 있다는 점도 덧붙여 챙겨둘 만하고).   

프레시안(07. 05. 23) "왜 사람은 자본처럼 '超國'하면 안 되는가?"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점점 더 세계를 불평등하게 구획한다. 못 사는 나라의 국민들은 생존을 향하여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꿈꾸며 위험을 감내하고 국경을 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복잡하고 비싼 비자 발급의 절차를 완수하지 못하고 국경을 넘는 순간 그들은 곧장 범죄자가 된다. 현대사회에서 누군가 범죄자라는 것은 시민사회로부터 합법적인 격리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그들은 법의 이름으로 기본권의 상당 부분을 제약당한다.


  
다시 한 번 끔찍한 여수의 출입국 관리소 화재 사건을 떠올려 보자. 한번쯤 왜 그들이 한반도 남단의 어느 항구 도시에 범죄자로 낙인 찍혀 상당한 날들 동안 감금되어 지내야 했는지, 과연 그것이 정당한 조치였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게다가 그들은 정말로 화재 경보 시설도, 화재 진화 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어느 인권 후진국의 감옥에 갇혀 원인 모를 화마를 당해 자신의 생을 마감해도 마땅할 악행을 저질렀던 사람들이었던가?


  
한참 전부터 이민으로 들끓고 있는 유럽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해결책을 내놓고 있는가? 이미 1980년대에 현대 사회학의 명저로 손꼽히는 <위험사회>를 저술해 우리의 지성계에도 잘 알려져 있으며, 노무현 대통령도 탐독했다는 <적이 없는 민주주의>의 저자인 세계적인 석학 울리히 벡 독일 뮌헨대학 교수(사회학) 역시 자신의 지역이 앓고 있는 이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진지한 처방을 모색하고 있다.
  
최근 벡 교수는 독일의 <디 차이트(Die Zeit)>와의 인터뷰에서 이 문제에 대한 그의 견해를 밝혔다. 이 신문 5월 12일자에 실린 인터뷰에서 그는 "이민은 범죄가 아니며 인권이다"라는,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인식의 출발점을 보여준다. 그는 "이민문제는 이민자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며 우리 스스로 구축한 경계체제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나아가 그는 이민에게 씌워진 범죄라는 굴레를 벗기기 위해 그것을 합법화하되 '이민세'의 도입과 같은 방식으로 새로운 대안적인 관리체계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유럽과 우리의 맥락은 다소 상이하지만, 이주 노동자의 사회통합 과제의 심각성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한국 사회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에 분명 그의 주장에는 진지하게 경청할 부분이 있다. 이에 <프레시안> 독자에게 인터뷰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아래는 벡 교수의 인터뷰 기사를 필자가 전문 번역한 것이다(☞원문 보기)(박명준/기획위원ㆍ전 막스플랑크 사회연구소 연구원)

- 당신은 국경을 열자는 말을 하려는가?
  
"우선 이민 문제의 상당부분이 이민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 스스로 협소하게 구축한 '경계체제(Grenzregime)'를 통해 이민문제를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 하지만 이민 문제라는 게 오랜 역사를 지니는 것인데….
  
"그렇다. 이민문제는 오랜 국민국가체제에 뿌리 박고 있다. 국민국가라고 하는 틀 안에 있으면서 우리는 사람을 움직이도록 만들려 한다. 오늘날 유연성과 이동성–스스로를 변화시킬 태세를 갖추는 것–은 높게 평가된다. 그렇지만 누군가 보다 잘 지낼 수 있고, 보다 좋은 삶의 기회를 예상할 수 있는 그 어디로 이동해 가려는 태세를 지니는 것은 그가 국경을 넘어서는 바로 그 지점에 이르러 우리에 의해 범죄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그때부터는 더 이상 이동성(Mobilität)이 아니라 이민(Migration)이라고 명명되며, 이는 우리가 구축해 놓은 '경계체제'를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국경을 아예 없애야 한다는 말인가?
  
"문제의 핵심을 짚자면, 이동성이 극대화되고 있는 세계에서 이민은 정상적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민은 인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경계 안에 갇혀 국민국가적인 컨테이너 안에서 하는 영토적인 사고가 만들어 내는 범죄와 같은 것으로 취급될 행동이 결코 아니다. 우리(독일)의 교회는 정당이나 노조에 비해 이러한 관점에서 이민을 보다 잘 정의내리고 있다. 이민자들은 잠재적인 범죄자가 아니다. 그들은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며 그것을 위해 위험을 감내할 준비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일 뿐이다."
  
- 이민을 인권으로 간주하는 것은 엄청난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는데….
  
"지금껏 우리는 높은 이동성을 지니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자본이 세계적으로 이동하는 것을 경험해 왔다. 자본가들은 자본의 이동성에 맞추어 명백히 국경을 넘어서는 행동을 하고 있다. 정보라는 것도 이미 오래전부터 경계를 초월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유독 사람이 국경을 넘어서려 하면 바로 그 순간 엄청난 긴장과 갈등이 나타난다. 한편으로 우리 특히 서구는 인권을 인정하고 진지하게 수용하는 것에 경주해 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삶의 조건을-내지는 생존의 조건을–향하여 국경을 넘어서 움직이려 할 때에 우리는 정지 신호를 보내고 있다. 우리가 보내는 정지 신호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 순간, 그들은 불법을 저지르는 범죄자로 취급된다. 왜 국경을 넘는 이민도 한 국가 내에서의 이동과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어떤 것이라는 질문을 던지고 논쟁을 하려 하지 않는가?"
  
- 이민을 규제 없이 진행되도록 하자는 말인가?
  
"우리는 이민을 즉각 위험한 것으로 매도하는 상황을 만들고 있으며, 그러한 방식으로 이민을 저지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저지는 성공할 수 없다. 유럽에서는 이민에 대항하여 더 견고한 법률과 외부를 향해 점점 더 높은 장벽을 세워 우리들을 보호하려고 해 왔다. 하지만 불법 이민은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는 불법 이민자들이 없다면 우리의 많은 사회적인 서비스들이 결코 정상적으로 영위되지 못하리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문제는 기업가적인 에너지에 충만하여 보다 나은 자신의 삶을 살아보려는 사람들을 위하여 어떻게 합법적인 길을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인가에 있다."
  
- 그렇다면 하나의 길이 존재할 것 같다. 바로 유럽연합(EU)의 확대 같은 것 말이다.
  
"옳다. EU의 확대로 인하여 과거의 경계체제는 이제 모든 회원국들을 위하여 제거되었다. 그것은 '국가들의 이민(Lädermigration)'이라고 볼 수 있다. 유럽은 EU의 확대를 통해 사람들이 오랫동안 가능하지 않다고 여겨 온 새로운 통행질서(Durchlässigkeit)를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반면 이제 우리는 이민을–우리가 필요로 하는 바–법적으로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관리(steuern)할 수 있는지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이민세(Migrationssteuer)의 도입과 같은 것은 그것을 가능하도록 만들 수 있다.
  
- 이민자들에 입국금(Eintrittsgeld)을 부과하자는 말인가?
  
"그렇다. 이리로 와서 일하려는 사람으로 하여금 적절한 기여금을 내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민세다."
  
- 그것이 어떻게 제정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민세의 부과방식에 대해서는 보다 면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본다. 이 시점에서 이민세 관련 법안의 제정 방식이나 그 이민세의 부과 수준은 아직 쟁점이 아니다. 이민세의 도입과 같은 방식을 선택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사고 실험이 우선 중요하다. 이민의 합법화는 새로운 긍정적인 영향력을 지닐 수 있다. 이미 합법적인 산업화 단계에 이른 범죄 도주 행각의 기반을 없애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출입국 통제업무를 담당하는 관료체계를 철폐하도록 할 것이다. 이민을 하나의 부정적인 현상으로 간주해 온 유럽식의 사고의 고착도 이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이민자들이 우리가 그들을 수용토록 하기 위하여 분담금을 지불하고 그것을 통해 우리 사회의 부가가치의 창출을 위해 기여하는 가운데 도달될 수 있을 것이다. 이민세는 이민에 대한 우리의 관념 자체를 변화시킬 것이다."
  
- 만일 이민세가 이민자들의 '관리'를 위해 쓰인다면, 그것이 이민을 더 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금 또 다른 불법적인 방식의 이민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새로운 장애물로 기능할 가능성이 있지 않나?
  
"현실적으로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험을 해야 한다. 이민세가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관찰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세금을 상이한 방식으로 부과해 볼 수 있다. 이민을 인권이라는 관점에서 탈범죄하기 위해서는 이런 실험이 필요하다. 이민을 범죄화하여 생산해 내는 경계체제를 완화시켜야 하며, 불법화는 종식되어야 하고, 그것으로부터 현재 이득을 취하고 있는 (진짜) 범죄자들의 기반을 뿌리 뽑아야 한다. 우리에게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알콜 금지의 사례와 비교해 보고 싶다. 알콜을 금지하는 곳에서 국가는 알콜의 남용을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범죄를 만들어 내 왔다. 스웨덴이나 1930년대 미국에서의 알콜 금지가 높은 범죄율을 만들어냈던 것을 생각해 보라."
  
- 하지만 만일 이민세가 사고실험을 넘어서 현실화 되려면, 전 유럽 차원에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당신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단순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나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국가로 하여금 이민자들의 통합을 위한 재정 지출 부담을 덜고 이를 통해 사회 적응 프로그램 같은 것들을 만들어 그들이 사회의 새로운 하층민이 되거나 새로운 문맹집단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도록 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을 개발할 수 있도록 하는 세금의 부과에 의견일치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예컨대 프랑스에서 이제 막 시작되고 있듯이 그러한 논의는 현재 출발단계에 있다. 아직 어떤 모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구조는 기초임금의 보장을 완전고용에 대한 대안으로 삼아 보려고 사고했던 과거 프랑스의 상황과 유사하다고 본다. 그것에 대해서는 그 사이에 많은 논의가 더 진전되었고 구체적인 모델들도 논의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민세에 대한 사고를 통해 지금 우리에게 유효한 경계체제에 대한 사고가 고정화되는 것을 해체시키는 작업이다. 우리는 '코스모폴리탄적인 시각'을 발전시켜야 하고, 국경을 넘어서서 사고해야 한다."
  
- 합리화와 포퓰리즘의 수단을 통한 코스모폴리탄적 제안이라고 보면 될까? 과연 그것이 실현될 수 있을까?
  
"기꺼이 그 작업을 나의 과제로 삼도록 하겠다."

한국일보(07. 05. 23) 詩, 한국의 아시아인들을 말하다

이제 물러설 데가 없다. “낯선 남자 둘이 문 열고 들어 오자 / 젊은 네팔리는 창문을 뒤어 넘었다“(<단속>) 적어도 골절이다. 그러나 이면을 들여다 보자. “동남아인 노동자들이 돈 모아서 돌아가면 / 자기네 나라에서는 부자가 된다고 / 한국인 노동자들은 모을 돈이 없다고 / 동남아로 기계를 옮겨가는 게 더 남은 장사라고”(<체불>) 어설픈 동정은 금물이다. “비수기에 봉급 제때 챙겨 받고도 / 성수기 오면 봉급 더 올려 받으려고 / 동남아인 여종업원 둘 직장을 옮겼다.”(<몸값>)

공장주들이 철저히 ‘생계형’일 때, 문제는 달라진다. 자본 대 임노동, 착취와 피지배의 도식을 선뜻 들이댈 수 없다. “공장주는 늙은 장모를 모시고 와서 / 전기 재봉틀 앞에 앉혔다 / 밤새워 옷을 박지 않으면 / 젊은 네팔리의 진료비를 댈 수 없었다”(<단속>). 모두 한국 사회의 없는 자들이다. 중견 시인 하종오(53)씨가 뿌리 뽑힌 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큰 공장은 아예 불법 체류자들을 고용할 수조차 없게 돼 있으니까요.” 21세기 한국판 프롤레타리아는 시적으로 어떻게 존재하는가.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다룬 <국경 없는 공장>, 동남아 국제 결혼 문제를 시로 옮긴 <아시아계 한국인들>(이상 삶이보이는창 발행)을 나란히 냈다. 별세계의 사람들처럼 여겨졌던 그들이 그의 삶 속으로 들어 온 것은 3, 4년 전. 사업 하는 지인의 주변에서 풍경처럼 눈에 띄던 그들이 정서와 내면을 가진 인간들로 비치기 시작했다.

“25년째 살고 있는 면목동의 오래 된 지하 가내 공장에서 외국인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통역은 엄두도 못 낼 상황, 다만 고통의 무게만이 가슴에 와 닿았을 뿐이다. 그래서 이번 시들은 서정적 접근보다 서사적 접근이 강하다. 설익은 다민족 사회, 한국의 적나라한 모습은 <아시아계…>에 그려져 있다. 열차 객석에 앉아 동남아 말로 잠꼬대하던 그들은 칭얼대는 아이를 한국말로 달랜다.

다르게 생겼다 해서 학교에서 따돌림 받는 아들을 보며 냉가슴 앓는 필리핀인 어머니, 한국 남자와 외국 여자가 결혼은 했지만 서로 속내가 달랐음을 확인하고 돌아 서는 한 쌍의 이야기 등 수록 시들은 날만 새면 부르짖는 세계화 타령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고발한다. “이제 3세대까지 확산될 그들에게 가난의 재생산 구조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시는 차갑기까지 하다. “시인은 감정이입해서도, 동정이나 연민해서도 안 되죠. 있는 그대로 보여주자는 겁니다.” 냉정한 시선, 소설과 같은 시란 올 초, 도달한 결론이다. “이제 소설 같은 시를 써 보고싶어요. 감정 개입 없이 서사가 진행되는, 소설 같은 시죠 .” 감정의 진정성이 사라진 이 시대에 대한, 하종오식 대응책이다. “진실은 시인의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 곳에 있어요.”

강화도에 칩거하면서 김포의 공장, 외국인 노동자 등 급변한 우리 현실을 똑똑히 봐 온 시인에게는 현재 600여 편의 미발표작들이 햇빛 볼 날을 기다리고 있다. “집착을 끊어 버리니 3개월째 담배에 손 안 대고 살아요. 단, 시에 대한 집착만 못 끊고 이러는 거죠.”

07. 05.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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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05-25 01:21   좋아요 0 | URL
아직은 '사고실험' 단계라니까 더 두고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민자들의 통합을 위한 재정 지출 부담'을 누가 질 것이냐의 문제일 텐데, 사회적 합의란 게 쉽게 도출될 거 같지는 않습니다...

비로그인 2007-05-29 21:00   좋아요 0 | URL
이전에 어떤 분이 이주노동자들에게도 자본가들이 그런 것처럼 지자체에 어느 정도의 돈을 기부하고 시민권을 주는 방식을 검토해보자 라고 얘기하시는 걸 본 적이 있는데요. 자본가가 돈을 투자한다면, 노동자는 노동으로 그 사회에 역할을 하고 있는데, 거기다 돈까지 내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국현실에서는 더욱 맞지 않는 것이, 이주노동자들이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을 받으면서 생산을 담당하고 있는데, 거기다 재정부담까지 져야 한다는 건 더 말이 안 되죠. 이민자들이 그 사회에서 생활할 수 있는 권리가 인권이라면, 그것은 전체 사회의 부담이 되어야지 이민자들에게 그 부담을 지울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우리가 장애인의 사회통합(통합이란 말은 때로 참 웃기죠)을 위해 장애인에게 재정부담을 지우지는 않잖아요?

로쟈 2007-05-29 23:27   좋아요 0 | URL
하지만 현실적으로 원하는 이민자/이주노동자를 아무런 제한없이(쿼터 제한 없이) 수용하는 나라도 없는 것 아닌가요?(통장에 돈 한푼 없이 이민갈 수 있는 나라가 얼마나 될까요?) 실제로 한국만 하더라도 상당한 비용부담을 떠안고서(빚을 지고서) 이주해온 노동자들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이민세에는 그걸 '양성화'한다는 취지도 포함돼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게 웃기는 노릇일 수 있지만 웃기는 일이야 워낙에 널려 있으니 예외적인 경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오마이뉴스의 기사들을 잠시 둘러보다가 의외의 기사를 읽게 됐다. 기사의 내용이란 게 나의 '빈곤한' 상상력과 너무도 '평범한' 도덕의식을 비웃는 것이었는데 한달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이 온라인 게임으로 만들어졌고 그걸 아이들이 즐기고 있다는 것(나는 게임을 하지 않는지라 그게 얼마나 '재미있는' 게임인지는 모르겠다. 아이들의 감수성이 놀라울 따름이다). 얼마나 '놀랄 만한'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지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아이들은 아마 이런 뉴스에도 더이상 놀라지 않겠지만 말이다. '새로운 세기'의 풍경을 '무서운, 멋진 신세계'라고 부른 한 문학평론가의 예감은 더이상 예감이 아니다. 이젠 실감이다!..

오마이뉴스(07. 05. 21) '버지니아텍 학살게임' 즐기는 아이들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버니지아텍 총기 사건이 일어난 지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버지니아텍은 평소와 다름없이 모든 학사 일정이 진행되고 있으며, 조용히 졸업식도 치러졌다. 그렇게 모두들 경건한 마음으로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희생자들에게 애도의 뜻을 전하면서 시간이 흘러갔다.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그렇게 끔찍한 사건이 난 지 한 달, 그 일만큼이나 등이 오싹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 일이 생겼다. 그것도 필자가 가르치는 학생으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 듣고, 그 광경을 목격하게 되서 충격은 더 컸다.

영호(가명)는 본인이 근무하고 있는 어드로이트 칼리지에서 중고등생을 위해 마련한 SAT(미국 대학 입학시험) 한국어 준비반에서 가장 어린 7학년 학생이다. 영호는 다른 날과 달리 무척 싱글거리면서 교실에 들어섰다. 무슨 좋은 일이 있냐고 묻는 필자에게 재미있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하면서 교사 책상 위에 놓인 컴퓨터로 다가왔다. 아직 수업 시작 전이고 다른 학생들이 다 오지 않은 상황이라서 영호의 행동을 그대로 바라보았다.

바쁘게 움직인 영호 손에 잡힌 마우스와 키보드에 의해서 켜진 화면에는 'V-Tech Rampage(버지니아 공대 광란)' 이라는 글자와 함께 게임을 시작하자 피가 터지는 듯한 화면으로 버지니아 공대에서 일어난 사건을 재현해내고 있었다. 그 게임이 유투브에 버젓이 올라가 있었다. 정말 끔찍했다. 그런데 더 끔찍한 것은 그 게임을 재미있다는 듯이 하고 있는 영호의 웃는 얼굴이었다. 영호는 그 게임을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다. 옆에 있던 민수는 한 술 더 떴다.

"너무 시시하다. 이게 뭐야?"
"화면도 너무 멋이 없고, 32명만 죽이면 게임 끝이야?"


정말 눈물이 핑 돌았다. 이 아이들은 정말 이런 게임을 만든 사람이 잘못됐고 그런 것들이 많은 희생자들의 가족들에게 어떤 또 다른 아픔을 줄지 못 느끼는 것일까? 정말 무섭기까지 했다. 게임은 범행 당시 조승희의 생각을 마치 모두 알고 있는 듯 상세히 표현하고 있다. 첫 번째 희생자 에밀리를 그녀의 남자 친구 칼이 기숙사에 데려다 주는 것부터, 이제 파티를 시작할 때라는 등의 말을 하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전지적 작가시점에 의해서 그려지고 있다.

또한 조승희가 경찰에게 걸리지 않게 잘 피해 다니면서 첫 번째 기숙사에서의 살해를 감행한 뒤에 NBC에 보내는 비디오를 찍는 장면과 학생들이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총을 쏘아서 그 학생들을 죽이는 장면 등이 생생하게 재현되고 있었다. 게임 요령에 보면 총을 쏘려면 'A'를 누르라고 되어 있다. 이 게임을 하는 사람들한테 있어서 'A'는 바로 총인 셈이다.

그렇게 'A'를 누르면 화면 속의 학생들이 죽으면서 자신의 점수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 승리의 쾌재를 부르게 된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 했다. 이 아이가 총을 갖게 되고, 그 총을 쏨으로써 다른 사람이 죽으면서 자신의 점수가 올라간다고 착각할 수 있다.

물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현실과 게임 세계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실제의 사건을 재현해 게임으로 만든다면, 특히 분별력이 없고 인터넷 게임에 빠져 사는 아이들에게는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버지니아텍 사건보다 먼저 일어났던 콜롬바인 고등학교 총격 사건의 경우에도 후에 게임으로 만들어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

몇 년 전에 친구들과 함께 스포츠클럽에 간 적이 있었다. 그 곳에서는 간단한 게임들을 즐기며 음식이나 음료도 함께 먹을 수 있었다. 거기서 나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게임은 스크린에 실제 사람 크기의 인물들이 영화처럼 나오고, 거기에 대고 총을 쏘면 그 사람들이 피를 흘리면서 죽었고, 점수가 올라갔다.

그러한 실물 크기의 화면 속의 사람에게 총을 쏘면서 실제로 그 사람을 죽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진짜 총을 쥐어줘도 무서워서 쏘지 못 하는 경우가 태반이겠지만, 이렇게 게임 속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에 익숙한 아이들은 자신이 갖고 놀던 게임을 위한 총과 실제 총의 차이를 느끼지 못 할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아이들일수록 사이버 세상에서 만족을 찾으려 들고, 그러한 사이버 세상과 현실 세상을 구분하지 못해서 더욱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악순환을 거듭된다고 한다. 버지니아텍 총기 사건과 관련된 게임을 아무렇지도 않게 즐기고 있는 영호의 얼굴에서 난 섬뜩함을 느꼈다. 32명을 모두 죽이고 자신까지 자살해야 마치는 이 게임에서 32명을 다 못 죽이고 경찰에게 잡혀서 게임을 끝까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하는 그 아이의 모습에서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게임 속에서 죄 없는 학생들을 죽여야 점수가 올라가고 그래야 게임에서 이길 수 있는 것처럼, 세상도 다른 사람을 죽이고 이겨야 내가 살고 높은 자리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은 아닐까? 어른들이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대목이다.(구은희 기자) 

07. 0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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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5-21 23:17   좋아요 0 | URL
아 정말 어찌... 이런걸 누가 만들어가지고.

닉네임을뭐라하지 2007-05-22 00:16   좋아요 0 | URL
와...

자꾸때리다 2007-05-22 00:32   좋아요 0 | URL
전 제목만 보고 스타크래프트 2 이야긴 줄 알았는데...헐....
 

'거대담론의 몰락', 아니 그 불가능성은 리오타르에 따르면 '포스트모던의 조건'이기도 하므로 무슨 뉴스거리는 아니겠다. 다만 우리의 경우엔 약간의 연착륙이 있는 듯하다. '평화-인권' 같은 거대담론이 "지나치게 거시적이고 추상적"이라는 최장집 교수의 비판이 최근에서야 제기되는 걸 보면. 마침 얼마전 김우창 교수도 비슷한 칼럼을 실은 적이 있기에 모아놓는다.  

한겨레(07. 05. 17) "평화·인권같은 거대담론 보통사람 삶에 기여 못해”

최근 현 정부 시기 들어 민족주의 과잉을 경계한 논문을 발표한 최장집 고려대 교수가 이번에는 “평화와 인권과 같은 거대담론”을 대상으로 비판적 논의를 펼쳤다. 최 교수는 18~19일 전남대 5·18연구소 등이 전남대에서 여는 국제학술대회 ‘5·18과 민주주의, 그리고 한반도 평화’에 발표할 논문 ‘5·18과 한국의 민주주의’에서 “(평화와 인권과 같은 거대 담론들은) 구체적 삶의 현실을 정치의 중심이슈로 두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거대 담론들이 “보통 사람들의 실생활에 직접 기여했고, 할 수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며 “거대담론은 삶의 현실에서 발생하는 미세하고 구체적인 문제를 다루기에는 지나치게 거시적이고 추상적”이라고 규정했다. “한반도에서의 평화는 그 어떤 이슈보다 중요하지만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을 일상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현실이기보다 이데올로기일 경우가 많다.”

최 교수는 “평화의 이슈가 진보파와 보수파 사이에, 대북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에 레토릭(수사)의 수준에서 격렬한 대립을 불러일으킬지는 몰라도, 실제 이들의 정치갈등이 평화 대 전쟁이라는 양자택일을 둘러싼 것일 수는 없다”며 “평화의 이슈는 (…) 과장된 현실에 기초한 갈등이 되기 쉽다”고 규정했다. 이런 그의 주장은 과도한 민족주의는 사회내 갈등이 정당히 자리잡을 수 없도록 해 민주주의 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는 기존 견해를 좀더 구체화한 것으로 해석된다.

최 교수는 또 이런 거대 담론은 “위로부터 정치엘리트들에 의한 대중동원의 성격을 띤다”면서 우리 정치의 지역정당 구조와 연결시켰다. 그는 “광범위하고 전국적이고 일반적인 이슈를 정치화하는 데 적합하지 않은” 지역주의 정당과 정치인들이 전국적 수준에서의 대중동원을 위해 이런 거대 담론들을 끌어들였다고 했다. 최 교수는 “운동에 의한 민주주의 실천은 민중을 국가에 대한 소극적 비판자 이상의 역할을 갖지 못하게 하는 효과를 낳는다”며 “정당이 그 중심 수단이요, 행위자가 되는 민중 참여”의 정당성을 강조하면서 글을 마무리했다.

정대화 상지대 교수는 같은 행사에 발표할 논문 ‘민주화 과정에서 민간권력의 형성과 역할’에서 “민주주의가 지역주의에 의존하는 무능력한 정당의 존재로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는 최 교수의 기존 견해를 반박했다. 그는 6월 항쟁 이후 낙선운동과 같은 시민적 정치개입을 통한 정치적 세대교체가 이뤄졌고, 민주화 운동 세력의 지속적인 정당정치 참여,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에 이른 ‘진전’ 상황들을 열거하며 “정당정치의 발전을 위한 노력이 적지 않았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따라서 “문제의 핵심을 (…)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정치권과 정당에서 발견할 것이 아니라 민주화 과정에서 생존을 보장받고 지금까지도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구세력의 지역주의적이고 수구적인 권력정치에서 발견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대응도 민주화와 개혁을 저해하는 구세력의 청산에 맞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에 이르는 ‘권력 구성’의 두 가능성으로 △민주세력의 연대를 통한 새로운 권력의 창출 방안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관계 복원과 한계 극복을 통한 정치 지평의 확보를 제시했다.

이번 학술대회에는 이밖에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교수(주제: 5·18과 한국 현대사)와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동아시아와 남북한), 윤영관 서울대 교수(21세기 세계변화와 남북관계의 전망), 이해영 한신대 교수(한-미 자유무역협정과 민주주의) 등이 발표자로 나선다. (강성만 기자)

 

경향신문(07. 05. 10) 정책의 여러 차원

다음 대통령 선거전과 관련하여 얼마 전 어느 회의에서 대통령 후보자가 어떤 정강 정책을 내놓아야 하느냐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질의서를 작성 배부하는 문제가 나왔다. 예상되는 정책안은 남북관계, 경제성장, 고용확대, 빈부격차, 입시제도, 부동산과 주택, 환경오염 등등에 관한 것이었다. 이러한 것들이 정책의제의 범주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되풀이되는 이 의제들에 대하여 유권자들은 피로감을 느낄 가능성이 없지 않다.

모든 것이 매체적 흥밋거리가 되는 시대에 있어서, 되풀이되는 주제는, 그 중요성에 관계없이,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어렵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참 이유는 이러한 항목에 대한 우리 정치계의 정책이 대체로 추상적인 신념 표현의 차원에 머물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정책의 중요성은 그것이 현실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일 터인데 큰 이야기가 현실로 쉽게 번역되지 못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경험이다.

특히 생활 현실과 관련해서 그렇다. 교육 문제에 있어서, 평준화냐 아니냐, 3불이냐 아니냐, 또는 다른 어떤 신앙에 따른 논쟁이 누적되어 있는 본질적인 교육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의료보험 같은 것을 볼 때, 제도는 그 관료적 외형을 넘어 세부에 대한 구체적 주의가 없이는 인간적 내용을 갖추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의 의료 제도 안에서 충분히 인간적이고 전문적인 배려가 있는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할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렇다하더라도 우리 보험이 의료비용 중 잔돈이 아니라 큰 돈 걱정을 없애준다고 말할 수 있을까?

원칙 천명 차원에서의 합의를 끌어내는 처음의 단계를 지나면, 문제는 실제로 그것이 현실의 삶을 어떻게 더 편안하게 해주느냐 하는 것이다. 앞에 언급한 회의에서는, 거창한 정강이나 정책의 천명이 아니라 실제로 국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지극히 구체적으로 조사하여 그것을 정책 구상의 자료로 삼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제안이 나왔다. 학교 교복 값을 내린다든가, 건축현장의 중첩된 하청제도를 개선한다든가--이런 작은 요구들을 알아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으로 먹고 입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정치의 중점이 거창한 구호로부터 일상 현실로 돌아오는 데 도움을 주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며칠 전에 끝난 프랑스의 대통령 선거 기간 중, 결선 투표 직전 두 후보의 텔레비전 토의가 있었다. 외신에 소개되었던 내용을 보면 우리로서는 정책 토의가 지극히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차원에서 행해지는 데에 놀라게 된다. 가령 사회당후보 세골렌 루아얄 후보의 교육 관련 제안에는 중학교의 학생수를 학교당 600명, 한 학급당 17명이 넘지 않게 하는 것과 같은 방안이 있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민중운동연합(UMP)의 니콜라 사르코지 후보의 제안에는 미망인의 연금을 높이고 의료보험에서 안경비용을 부담하게 한다는 것이 있었다. 두 후보의 토론 과정 중 가장 열띤 순간은 장애자의 교육문제를 논할 때였다. 장애자 교육을 정상 교육에 통합하는 인도적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사르코지 후보의 말을 위선적이라고 루아얄 후보가 감정적으로 비난하면서 날카로운 말이 오고 갔다.

많은 나라에서 주택문제는 자주 등장하는 사회문제이다. 프랑스 대통령 후보들의 토의에서는 임대주택의 세입자가 세를 내지 못하였을 때 임대인과 임차인을 금전적으로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실업 등으로 세가 미불이 될 때 국가에서 보조금을 줄 것인가, 임대계약을 갱신하는 경우 임대료 인상 금지기간을 얼마로 할 것인가, 젊은 가구주들의 주택 확보에 어떤 사회적 보조가 필요한가 등의 문제가 거론되었다. 조금 큰 제안으로는 두 후보는 다 같이 투기 방지 조처를 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했지만, 루아얄 후보는 매년 공공주택 12만가구를 짓고 새로운 건축물에는 친환경적인 시설로서 조명과 난방에 태양열이나 풍력 등의 장치를 설치하게 하여야 한다는 제안을 했고 이에 대하여, 사르코지 후보는 대체로 유보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의 생각은 주택문제 해결에는 금융 지원이 더 적절하다는 것이었다.

세부적이라고 하여 정책에 근본적 입장의 차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르코지 후보가 당선된 것은 주 35시간 노동시간 변경, 감세, 정부 기구 축소 등을 통해서, 시장경제 체제를 강화하겠다는 것을 국민이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것은 반드시 시장 자체를 절대시하는 것이라기보다 경제를 활성화하여 고용과 청년실업 문제 등을 해결하겠다는 사회정책적 고려에 기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시간 반 이상 계속된 대선 후보들의 토의의 특징은, 내놓은 정책들이 극히 구체적이라는 것이었다. 토론의 내용들이 지나치게 세말적이라는 논평도 없지 않았지만, 신문에 실린 논평들에도 예산이나 비용, 사회적인 부작용 등을 면밀하게 계산하는 비판적 검토들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선거전에서 논의되는 정책의 추상성과 이번 프랑스 대통령 선거전에 나왔던 정책의 구체성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그것은 두 나라가 처해 있는 처지가 다른 데에 연유한다. 우리의 정책 의제들이 거창하고 추상적인 것은 우리의 문제가 거창하고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필요한 것은 거창하고 추상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방안들이다. 이제는 우리의 문제들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구체적이라는 것은 반드시 정책이 한 사안에 한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정책은 구체적이면서도 사회 일반에 현실적 반향을 일으키는 것이라야 한다. 어떤 구체적인 정책은 단발로 끝난다. 또 어떤 것은 구체적이면서도 실제는 극히 추상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작년 말에 투르크메니스탄의 니야소프 대통령이 사망하였다. 연초에 한 외지는 그의 업적을 열거하는 기사를 실었다. 그의 업적에 드는 일에는--풍자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풍자될 만한 것만을 고른 것일 수 있는데--지방 도서관과 병원 폐쇄, 오페라, 발레, 서커스 금지와 함께 국립 교향악단 해체, 텔레비전 출연자의 화장 금지, 학교 교사의 금이빨 금지, 립싱크 가창 금지-이러한 문화 정비 작업, 그리고 수도 주변에 천년을 갈 숲 가꾸기, (여름 온도가 40도가 넘는 나라에) 펭귄이 살 수 있는 연못 만들기, 자신과 자신의 가족, 친지의 이름이 붙은 것은 제외하고, 거리 이름, 달력의 달과 주의 명칭 바꾸기 등이 있다.

대통령의 치적으로 금이빨 금지 같은 것은 참으로 기이하다 하겠지만, 니야소프 대통령의 생각으로는, 금이빨은 순수한 트루크만 문화 전통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오페라 금지 등도 민족 문화의 순수성 수호라는 명분 하에 발상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정치도 반드시 이러한 종류의 정책 발상으로부터 멀리 있다고만 할 수는 없다. 길거리에서 머리 길이와 치마 길이를 단속하던 일은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 다음 선거에서 금이빨 금지, 오페라 퇴치, 천년의 숲 가꾸기나 펭귄 연못 설치와 비슷한 계획들이 정책 항목으로 등장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지금도 아주 구체적인 것 같으면서도, 발의자의 순수 신앙 속에서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추상적인 사업들은 우리 정치 프로그램의 중요 항목이다.(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07. 05. 17-21.

P.S. 중요한 것은 레토릭 수준의 거대담론이나 추상적인 자기확신적 동어반복들이 어떤 류의 아주 구체적인 정책들과 동일하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다. 이게 '대립물의 통일성'이면서 '적대적 공범관계'이다. 가령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란 연예인성 멘트의 수사학은 바로 옆에 있는 구체적인 개인들에 대한 혐오(혹은 비호감)와 정확하게 짝패인 것이다. '신한국'을 만들겠다는 구호나 '한나라', '열린우리'를 만들겠다는 구호가 결국엔 금이빨을 금지한다거나 펭귄 연못을 설치하겠다는 발상과 하등의 차별성을 갖지 못한다는 깨달음이, 따라서 공유될 필요가 있다. 혹은 이것들간의 공모성을 드러내주는 '번역기'라도 있으면 좋겠다. 내가 문학을 존중하는 이유는 그것 거창한 레토릭도 도취적 디테일도 거부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플랜카드'나 '찌라시'에 의해 변화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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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05-17 23:58   좋아요 0 | URL
거대 담론이 없는 실천이 있을 수 있을까요?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금지된다."

로쟈 2007-05-21 09:40   좋아요 0 | URL
Mravinsky님/ 그게 '실천'이 아니라 '실천의 알리바이'라는 게 요점인 것이죠.
juin님/ 그리고 결론은 그 둘이 같은 거라는 걸 덧붙여야겠습니다...

심술 2007-05-22 00:02   좋아요 0 | URL
김우창 교수님 글 밑에서 넷째 문단 마지막 문장에 '토론의 내용들이 지나치게 세말적'이라고 적혀 있는데 여기서 나오는 세말이 미세분말(fine powder)의 준말입니까?

로쟈 2007-05-22 00:08   좋아요 0 | URL
저도 '쇄말적'의 오타인가 싶었는데, '세말적(細末的)'이란 뜻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