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의 고전읽기에서 일본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의 <탐구>(새물결)가 다루어지고 있길래 옮겨놓는다. 지난주에 나는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민음사)을 도서관에서 대출하고 그 영역본을 타대학 도서관에 대출신청했다(내가 갖고 있는 국역본은 '고아원'에 가 있다). 올 문단의 큰 논쟁거리를 가져온 <근대문학의 종언>(도서출판b)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 그 '기원'에 관한 이야기도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자연스레 생각했기 때문이다(고진 스스로가 문제삼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트랜스크리틱>에 대한 내용정리를 마저 끝내는 일도 아직 미뤄둔 숙제로 남아있다.

 

 

 

 

개인적으로 가라타니 고진에 관한 페이퍼들을 자주 올렸다고 생각되는데, 내가 제일 처음 읽은 책도 <탐구1>이었다. 그의 '비평'은 '고진식 비평'이라고 따로 분류해도 좋을 만큼(적어도 국내에서는 그런 종류의 비평을 접하기 어려웠던 거 아닌가? 철학과 문학을 횡단하는 쪽으로는 김우창 교수의 비평 정도가 예외적이었을 뿐) 독특하고 흥미로웠는데, 게다가 '읽히는' 비평이었다(아래의 기사를 보니 <탐구>는 '90년대 일본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고진급의 비평가가 흔한 건 아니라는 데에서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 그리고 읽은 게 <은유로서의 건축>이었던 듯하며 나는 이 책을 영역본과 나란히 놓고 읽었다.

 

 

 

 

영역본을 위한 이 선집이 <탐구>에서 더 나아간 것처럼 여겨지진 않았지만, 어쨌거나 이후에 나는 고진의 애독자가 되었다. 당연히 이후에 출간된 고진의 모든 책을 사들였으며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정도를 빼고는 다 읽어본 듯하다. 그리고 아직 번역되지 않은 그의 몇몇 저작(가령 <의미라는 질병> 같은 비평집)을 은근히 고대하고 있다. 혹 당신이 아직 이 거물급 비평가를 만나본/읽어본 적이 없다면 (뚜쟁이로서 말하건대) 한번쯤 시간을 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대충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되면 당장 비평을 써보시라. '고진을 넘어선 비평'이 탄생하는 흔하지 않을 장면을 나는 목도하고 싶다...

경향신문(06. 09. 30) ‘타자’와 ‘윤리’에 대한 치열한 성찰

한 권의 책이 생각하는 감각을 바꾼다고 할 때, 이는 날카로운 칼에 베는 일과 같다. 한 번 벤 자리는 아물어도 예전 같지 않다. 벨 때의 고통은 떠나겠으나 몸은 이미 전과 다르며, 미열이 가시지 않는 혼미함 속에서도 정신은 각성되어 있다. ‘탐구’를 읽고 나서는 전처럼 생각하기 힘들다.

저자인 가라타니 고진(1941~) 자신에게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는 ‘탐구’를 ‘전환’이라 일컫는다. ‘탐구’의 글들은 1985년에서 88년까지 잡지 ‘군조우(群像)’에 연재됐는데, 그 2년은 첨예한 논쟁의 연속이었다. 고진이 ‘기존 철학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진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 대결해야 했다. 국내에서도 유명한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1978), ‘일본근대문학의 기원’(1980) 이후 고진은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그는 이 시기 자신의 사상적 고투를 ‘패배한 전쟁’이라 일컫는다. 그의 싸움은 이러한 것이었다. “나는 일부러 나 자신을 ‘안’에 묶어 두려고 했다. …나는 바깥을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상정되지 않도록 하였는데, 바깥이란 일단 그렇게 파악되면 이미 안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내성과 소행’)

그는 형이상학과의 지난한 싸움에 나섰다. 경제학, 문학, 철학의 영역으로 전략적으로 자리를 바꿔가며 형이상학과 맞섰다. 자리를 옮겼을지언정 고진은 한 번도 쉽사리 자신을 형이상학 밖에 있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오히려 끊임없이 형이상학의 내부로, 사유되지 않은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갔고, 종국에는 형이상학을 안으로부터 무너뜨리기 위해 철저한 논리적 작업을 거쳤다. 그 결과가 ‘은유로서의 건축: 언어, 수, 화폐’(1983)이다.

그러나 그는 패배했다. 초월적인 의미를 제거하기 위해 전투에 나섰으나, 그 전투가 자신에게 남긴 것은 메마른 감각과 갑갑한 논리였다. 거기에서 빠져 있는 것은 ‘타자’라는 생명력이었고, ‘윤리’로서의 소통이었다. 이제 고진은 형이상학으로는 닿을 수 없는 곳을 사유하기 시작한다. “내가 ‘탐구’를 연재하면서 계속 질문했던 것은 ‘사이’ 혹은 ‘외부’에서 살기 위한 조건과 근거였다고 할 것이다.”(‘탐구’ 후기)

‘탐구’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타자(他者)’이다. ‘타자’라는 말은 그 함의와는 달리 결코 낯설지 않다. 빈번히 사용되는 이 개념은 낯선 존재를 범박하게 처리하는 상투어가 되고 만다. 그 까닭은 타자라는 말이 자기 확장의 의미를 띠고 사용되기 때문이다. 고진은 이러한 용법을 가장 경계한다. 그에게 타자는 주체의 ‘바깥’이지만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바깥’이다. 만약 그 ‘알 수 없는 거리’가 빠져있다면 타자는 그저 주체 ‘안’의 존재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서 상정되는 신은 자기의 확장일 따름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의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소리이다. 자신의 말을 마치 누군가의 말인 양 듣는다. 그때 타자와의 ‘거리’는 발생하지 않는다. 신이 전지전능하게 나를 꿰뚫고 있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바를 내가 안다는 사실과 동일하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원하는 바를 가장 잘 아시는 신의 상정, ‘기복 신앙’은 자기독백이다.

여기에서 빠져 있는 것은 ‘비대칭적 관계’이다. 타자는 내가 품는 의미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존재이다. 이쪽에서 자명하다고 저쪽에서도 자명하지는 않다. 이때 고진이 ‘타자’로 문제 삼으려는 것은 ‘독아론(獨我論)’이다. 독아론은 나에게 타당하면 다른 이들에게도 타당하다는 사고방식이다. 독아론에서 남은 나와 동일한 주체로서, 동일한 규칙을 소유하는 사람으로 설정된다. 하지만 이들은 내면화된 존재일 따름이다.

고진은 플라톤 이래의 서구 형이상학은 바로 이러한 독아론의 소산이었다고 지적한다. 거기에서 배제된 존재들은, 광인(푸코, ‘광기의 역사’)처럼 규칙을 공유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실제의 삶이란 무수한 존재들간의 차이, 그리고 그 차이들을 뛰어넘는 ‘가늠할 수 없는’ 도약으로 이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타자를 성찰하는 일은 ‘윤리’적이다. ‘윤리’란 타자와의 ‘비대칭성’을 품으면서도 관계를 실현하는 행위이다. ‘탐구’는 이렇듯 ‘타자’와 ‘윤리’에 관한 책이다.

일본의 사상지 ‘유레카’는 90년대 일본 최고의 책으로 ‘탐구’를 선정했다. 80년대 후반의 저작이 90년대 최고의 책으로 꼽힌 것은 ‘탐구’가 90년대의 맥락에서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90년대 소위 동구권의 몰락 이후 ‘역사의 종언’이 고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서구이성 혹은 자본주의의 독백일 따름이다. 문제는 그에 맞서는 해체주의가 90년대에 이르러서 파괴력을 잃고, 지적 유희의 경향을 걸었다는 점이다. 그 때 빠져있는 것 역시 ‘타자’와 ‘윤리’였다. ‘탐구’는 역사에 대한 목적론을 부정하면서도 그 반편향으로 어려운 지적 수사에 이르지도 않았다. 다만 실제의 삶에 대해 말한다. 이제 고진이 ‘탐구’에서 자주 인용하는 비트겐슈타인의 한 구절을 이해할 수 있다. “세계 안에 신비는 없다.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신비이다.”(윤여일|‘수유+너머’ 연구원)

06. 10.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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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02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0-02 1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0-02 16:40   좋아요 0 | URL
**님/ 잘 모르겠는데요. 저는 아닙니다.^^ 저도 같은 내용의 전화를 받았었는데, 별로 애로사항이 없다고 답했지요. 워낙에 가족이 단촐해서...
**님/ '고아원'이 좀 다른 뜻인데요(^^;). 제가 책을 보관해두고 있는 곳을 '고아원'이라고 부릅니다. 시화공단에 있습니다. 그리고 맞춤법은 제 잘못이 아니라 원고 필자의 잘못입니다요(^^;)...

2006-10-02 2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0-02 22:04   좋아요 0 | URL
**님/ 좀 헷갈리실 수도 있겠습니다. 이전엔 '-' 표시라도 앞에 달았었는데, 요즘은 그냥 전후 문맥에 맡겨놓고 있습니다. 특별히 퍼오는 글들이 많은 것도 아니어서요...
 

교수신문에서 며칠전 기사를 읽었다. '나의 학문적 우상은 무엇이었나'란 기획기사인데, 내용이 흥미로워서 옮겨놓는다. 더불어, 잠시 '나의 학문적 우상'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최장순 기자의 기획의 변은 이렇다: "偶像. 보통, 신처럼 떠받들어지는 사람이나 대상을 우리는 우상이라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초년병 시절 우상을 만들어내고, 그 우상을 좇아 자기와 동일화하는 과정을 겪게 마련. 우리시대의 학자들은 어떤 우상화의 과정을 겪어왔을까. 그리고 학문적 우상은 어떻게 학자의 내면을 장악했다가 결국 쓸쓸히 떠나고 마는 것일까. 그 내밀한 풍경을 살펴보았다." 당신들의 우상은 안녕하신가?..

교수신문(06. 09. 23) 기획취재_나의 학문적 偶像은 무엇이었나

“나는 그 분의 지대한 영향을 입은 사람이다. 1980년대 초반엔 내 논문을 지도해주시기도 해,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박지향 서울대 교수(영국사)가 에릭 홉스봄을 떠올리며 남긴 말이다. 박 교수의 회상은 이어진다. “그 분의 영향을 받아 노동사 공부도 했다. 나도 언젠가 이런 글을 써야지 하는 걸 느끼게 한 유일한 분이었다. 나에게 우상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홉스봄에 대한 박 교수의 마음이 맹목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홉스봄에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은 세계 정치지형의 변화 속에서 홉스봄의 문제점을 조금씩 발견했기 때문이다.

박 교수가 홉스봄과 거리를 두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지난 2003년 발간된 ‘Interesting Times: A Twentieth-Century Life’였다. 이 책에서 홉스봄은 젊은 시절의 행동에 대한 자기변명을 일삼으며 총체적 시각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이유다. 박 교수는 “가령 스탈린이 행한 악행을 두둔하려는 홉스봄의 태도는 못참겠다”며 “80세 넘게 살았으면 자기 삶과 20세기를 연관지어 당시 현장에 좀 더 거리를 두고 써도 될 것을… 그런 걸 발견하지 못해 많이 실망했다”고 전했다(*박정희를 두둔하려는 태도와는 어떻게 연관되는지?). 홉스봄에 대한 진한 애정에서 나오는 진심어린 충고다. 조승래 청주대 교수는 “동구권이 몰락하는 등 세계의 정치적 판도가 변화하자 영국 좌파 연구자들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가 많이 사라져갔다”며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다.

홍성욱 서울대 교수(과학기술사) 역시 토마스 쿤에 대한 소회를 풀어놓았다. 쿤의 두 제자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홍 교수는 자연스럽게 토마스 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쿤의 방법론은 “텍스트 이해에는 도움이 되지만 과학의 내용을 넘어 사회 문화적인 측면을 보는 데 한계가 있”어 현재 홍 교수는 “쿤의 방법론을 버리고 있는 중”이다.

특정 지식인에 대한 학문적 우상화는 학자라면 누구나 거치는 관문이다. 이와 관련해 정대현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박사논문을 쓰는 동안에는 학문적 우상이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학위를 받고 나서 지식인으로 바로 서야 할 때는 곤란하다”라고 말했다(*학위논문을 쓰면 자립/분가해야 하는 것인가). 우상을 냉철하게 비판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실행하는 것이 그리 간단치 않다. 특정 대가들을 뛰어넘는 걸출한 학자가 드문 게 사실. 누군가를 넘어서려면 ‘부단한 노력’ 외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다고 연구자들은 입을 모은다.

누군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은 다른 대상들을 향해 미끄러지는 작업을 동반한다. 임지현 한양대 교수(서양사)는 90년대 폴란드 문제와 시름하던 시절을 회상했다. 그는 “스탈린을 좇다가 문제가 생기면 레닌으로 돌아가고, 그게 또 문제면 볼셰비키로, 그리고 다시 청년 맑스로 돌아가면 된다는 게 하나의 흐름”이었다고 전했다. “우상이란 결국 신화화 작업을 동반하므로, 다채로운 프리즘을 갖고 대상에 접근해야 한다”는 말도 이어졌다. 이와 관련해 장석만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은 “지적 우상에 대한 모방은 필수적인 과정인데, 그것이 자기 자유를 신장하기 위한 것이 아닌 권위에 기댄 기계적 모방이 되면 교조주의나 근본주의에 빠지게 된다”고 설명했다(*너무 당연한 말씀들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지적 탐구 대상을 우상화하는 일. 그 내부에 어떤 심적 기제가 작동하는 것일까. 이창재 프로이드정신분석연구소 소장에 따르면,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정신을 안정시키며 동시에 확장시켜주는 이상적 대상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소장은 “특히 연구를 하려고 하는 사람의 경우엔 연구 욕구를 유지시켜주기에 일정한 지식활동의 모델이 긍정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정 인물 및 그 연구작업과의 동일시를 통해 연구활동을 지속할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 그는 특정 인물에 대한 우상화 작업이 과도하게 진행되더라도, 처음에는 괜찮다고 한다. 하지만, “동일시가 한 사람에게만 고정되다 보면 발전이 정체”되기에 “주체적으로 새로운 대상을 선택해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더 나아가 이 소장은 학자 일반의 정신을 분석하면서 “학계에 남는 사람들의 경우 학문의 목적이 자기 고양이나, 개발, 개성 실현에 있는 게 아니라, 대상 결핍 때문에 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자기에게 평생 보호자가 될 사람이 필요하기에 ‘정신의 아버지상’이 있는 학계에 남게 된다는 설명인데 흥미로운 주장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손종업 선문대 교수(국문학)는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자신을 탕진하고 싶은데 그 대상의 거짓 내지는 오류를 발견했음에도, 그에 대한 열정을 철회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전했다.

가령, ‘황우석’을 믿었던 사람들은 ‘황우석’의 일정한 문제점이 발견되었기에, 그에 대한 열정을 접어야 하는데, 오히려 합리화하기 위해 사태를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이게 학자들의 케이스인가?). 그런데 손 교수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요즘 젊은 학자들이 점점 더 현실주의화해가고 있다”며 “더이상 그럴 듯한 것도 없고 모든 존재가 점점 더 왜소해지고 냉소적으로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그는 “오히려 적절한 우상을 갖는 일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닌가”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진정한 우상이 없는 시대”라는 것(*내가 동의하는 바이다. 학문에서 자신의 우상을 절대화하는 건 바보 같은 일이지만, 우상을 갖지 못하는 건 불행한 일이다). 그리고 몇몇 학자들은 학문적 우상에 관한 취재를 한다고 하자 “특정 학자나 학문에 대한 단순한 개인적 열정 보다 패거리 안에서 확대, 재생산, 조직화되는 열정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최장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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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페이퍼'에 이런 거창한 제목이 달릴 리는 만무하다. 조간신문에 게재될 김우창 교수의 칼럼을 미리 읽어보려고 했을 뿐이다. 요 며칠 자주 다루었던 시사적인 주제여서 따로 옮겨놓기도 하면서. 주로 하버마스의 '보편적 화용론'에 기대어 인문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재차 강조하는 칼럼으로 읽힌다. 내가 안 갖고 있는 책을 포함하여 몇 권의 책을 나열해본다. 내키면 <하이데거, 하버마스, 그리고 이동전화>(이제이북스, 2003) 정도는 바로 읽고 생각할 거리를 마련해도 좋을 듯싶다. "여보세요? 저, 인문학도인데요. 예? 안 들린다고요?"

 

 

 

 

경향신문(06. 09. 28) 공적공간의 윤리성과 인문교육

하버마스의 글에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호 이해에 이를 수 있는가, 또 그것을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들이 선행돼야 하는가를 논하는 것이 있다. (“보편적 실천 어용론(語用論)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대화의 기본 조건 가운데 그가 강조하는 것은 주로 네 가지, 즉 해독가능성, 진실, 진실성, 정합성이다(*'어용론'은 pragmatics의 번역이겠다. 일반적으론 '화용론'이라고 옮긴다).

첫번째 조건으로 거론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써야 한다는 조건은 자명한 것이라고 할 것이나, 이것이 문법이나, 논리나, 상황의 적절성을 포함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자명한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두번째의 조건은, 말이, 일단은 진실 또는 진리라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실을 담은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세번째 조건은, 말이 진지한 또는 성실한 태도에서 나온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네번째는, 대화자들이 보편적인 타당성의 기준을 받아들이고 그것으로써 자신들의 말의 옳고 그름을 헤아려 볼 용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의 의미는 그의 전체적인 관심의 틀 안에서만 바르게 평가될 수 있다. 하버마스는 사회문제에 대한 이성적 해결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믿고 있는 철학자다. 다만 그에게, 이성은 사람이 사는 소란하고 번거로운 세계를 넘어 초월적 공간이나 역사의 큰 움직임 안에 존재하는 높은 원리가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접하고 이야기하고 논의하고 타협하고 하는 사회공간 안에서 태어나는 원리이다. 그러면서도 이 원리는 잡다한 경험적 현상의 일부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형식적 정형성을 갖는다. 그러니까 이성적 원리는 경험적 현상 속에 존재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초연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대화의 네 가지 조건은, 현실 상황에서 우연적으로 발생하는 대화에도, 문법이나 의미를 떠나서, 그 아래에 일관된 어떤 바탕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위의 조건들에서, 두드러진 것은 대화의 진행에는 말의 내용에 관계없이 어떤 실제적인 합의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관찰이다. 그것은 세번째의 진실성 또는 성실성이라는 조건에 가장 분명하게 나와 있다. 그것은 대화에 임함에 있어서 대화자는 화제의 대상 또는 자신이나 대화의 상대자에 대하여 일정한 도덕적·윤리적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조건에도 그에 비슷한 윤리적 태도가 들어 있다. 사람이 자기 주장을 내놓는 것은, 이 주장과 함께, 진리를 존중하며, 그 기준에 의한 여러 주장들의 평가를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내놓는 것이다.

하버마스가 같은 글의 뒤편에서 다시 설명하듯이, 전제의 하나는 누구의 것이든지 논증된 주장에는 승복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말도 틀린 것으로 판명되면, 그 주장을 고집하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증명되면, 그것이 실천적으로 함의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겠다는 약속이다. 건설적 대화가 성립하려면, 대화자들은 그들의 상호연계성을 받아들이고 그 관계가 합리적 또는 이성적 바탕 위에 서야 한다는 것에 승복해야 한다. 즉 대화에는, 간단히 말하여, 실제적 전제로서, 공동체적 상호인정 그리고 공동체의 기반으로서의 이성적 원칙의 수락-이것이 선행돼야 한다.

대화의 선행조건에 대한 하버마스의 말은, 그 이론 전개의 까다로움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단순하고 큰 현실적 의미가 없는 말로 들린다. 문제는 대화의 전제 조건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어떻게 하여 그러한 조건을 성립하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사회적 균열이 심한 사회는 대체로 그러하다고 하겠지만, 우리 사회의 문제는 그러한 공론의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 데에 있다. 공동체적 상호존중이나 진리에의 순응의 태도를 전제하는 공론의 공간이 사라지고 공동의 진리가 설 자리가 없는 것이 오늘의 우리 사회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 대신 공적인 광장에서 발언한다는 것은 다른 가능성은 고려할 것도 없이 자기주장을 밀어붙이는 것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태도이다. 문학논의의 지침으로서 레닌이 내세운 것에 당파성(黨派性)이라는 말이 있거니와, 요즘의 발언과 논쟁들을 보면, 진보와 보수의 구분이 없이, 이 원칙을 지상으로 받든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판국에 하버마스가 말하는 진리성과 윤리성의 조건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순진한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사람이 가지게 되는 생각들의 물질적·사회적 기초를 중시하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나온 철학자이다. 대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현실적 요인들을 모르고 그가 대화의 조건에 대하여 논의를 펼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실적 상황의 어려움에 대한 의식이 그로 하여금 바로 경험의 혼란 속에서 생겨나는 이성을 중시하게 한 것이다. 더 나아가, 사회가 진리 공동체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도외시하는 입장들의 역사적 파국을 직시한 까닭에 위에 말한 원칙들을 천명하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에게는 그러한 공동체의 원칙을 살려 나가는 것이 좋은 사회를 위한 중요한 실천적 작업의 일부로 생각된 것이다.



어떻게 하여 진리와 공동체적 상호존중에 입각한 대화적 상황이 조성될 수 있는가? 여기에 간단한 답이 있을 수가 없다. 삶의 교사는 현실이다. 우리는 이웃들이 행하는 바를 모범으로 하여 우리 스스로의 행동 방안을 만들어 간다. 이렇게 보면, 대화적 조건이 성립되지 않는 사회는 그러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도리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악순환의 고리 속에 있으면서도 새로운 길들이 트이는 것이 또한 인간사이다.

최근에 여러 곳에서 인문과학의 위기에 대한 논의가 일고 있는 것을 본다. 인문과학은, 인식과 윤리에 있어서의 보편적 원리를 배우고 그것을 몸의 습관으로 지니게 하는 데에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는 학문이다. 물론 모든 학문적 수련에는 이러한 원리에 대한 수련이 따른다. 그러나 그중에도 끊임없는 상상적 연습을 통하여 실천적 현실에서 비판적 그리고 자기비판적 이성을 끌어내려는 훈련이 인문과학의 방법론적 기본을 이룬다. 이 점에서 인문과학은 다음 세대의 공동체적 대화자를 기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론 경직된 교리 학습이 인문과학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인문과학 옹호론이 많이 나와 있는 이 시점에서 이런 이야기가 새삼스럽게 보탬이 되지는 아니할는지 모른다. 필요한 것은 실제적 조처에 대한 궁리이다. 한 가지만 말한다면, 모든 인문과학의 제도적 바탕은 인문과학을 포함한 기초 과학의 교육을 대학 교육의 핵심이 되게 하는 데 있다. 오늘의 산업 사회의 필요에 맞는 기능 교육을 무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될 수 있는 대로 대학원이나 직장의 직업 훈련에 미루고 대학은 기초과학의 교육에 주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뒤따를 기능 교육에도 좋은 준비가 되는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에 맞추는 학제, 재정, 연구 조직의 적응도 물론 별도로 생각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사회 구조 자체가 진리 공동체로서의 이념을 수용할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일이다. 이 공동체는 경제 성장 또는 그 과실의 분배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열매가 아니다. 하버마스의 대화적 이성철학은 이 사실에 대한 역사적 반성의 일부이다.(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06. 0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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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8 1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0-01 23:21   좋아요 0 | URL
**님/ 몇년전에 방한했었지요. 저는 '얼굴'보다 '목소리'가 신기했었습니다...
 

아침 출근길 전철에서 여느 때처럼 조간신문을 읽었다. 수요일인지라 한국일보를 사들었는데 최근의 '인문학 사태'와 관련하여 강준만, 전봉관 두 교수의 칼럼이 눈길을 끌었다. 이 시사적인 이슈에 대한 나의 생각과 닮은 점이 많아서 옮겨놓도록 한다. 강조는 나의 것이다.

한국일보(06. 09. 27) 오락공화국

한국의 40대 남성 사망률은 세계 최고다. 한국인의 스트레스 지수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국인의 자살율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특히 대학입시 경쟁은 전쟁을 방불케 해 매년 200여명의 어린 학생들이 성적 문제로 자살을 한다. 한국인의 행복도는 세계 중하위권 수준이다.

● 전쟁 같은 한국인의 삶
이런 기록만 살펴보자면 한국은 지옥에 근접한 나라로 보이겠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지옥과 천국을 수시로 왔다갔다 할 정도로 나름대로의 대비책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한국은 세계 50대 교회 중 제1위를 포함하여 23개를 갖고 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겐 음주ㆍ섹스ㆍ도박ㆍ스포츠가 있다. 음주ㆍ섹스ㆍ도박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스포츠는 세계 최고 수준은 아니지만, 스포츠 국가주의에 열광하는 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여기에 더하여 세계 최고 수준의 오락이 있다. 영화는 히트만 쳤다 하면 천만명의 관객을 끌어들인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비롯한 오락프로그램은 세계에서 가장 재미있다. 한국은 인터넷 강국이되 인터넷이 주로 오락용으로 소비된다는 점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1등이다. 한국은 게임 강국이며, 비보이 문화의 새로운 종주국으로 떠올랐다. 오락 기능이 강한 각종 방(房) 문화의 발달도 세계 1위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한국은 '오락 공화국'이다! 냉소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자신을 정확히 이해하자는 뜻이다. 한류 열풍은 '오락 공화국'의 역량을 보여준 사건이다. 나라를 빼앗긴 일제 치하에서도, 민주주의를 박탈당한 군사독재정권 치하에서도, 오락문화는 전혀 주눅들지 않았으며 내내 번성했다. 한국인이야말로 이른바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의 전형이다.

'오락 공화국'은 한국인의 기질만으로 이루어진 건 아니다. 그럴 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땅 좁고 자원 없는 나라가 살 길은 근면과 경쟁 뿐이다. 한국은 그냥 생존하는 것만으론 만족하지 못하고 선진국 되는 걸 국가종교로 삼고 있는 나라가 아닌가. 그래서 택한 게 바로 '삶의 전쟁화'였다. 전쟁 하듯이 산다는 것이다. 그런 전쟁을 지속할 수 있게 만든 조건 중의 하나가 바로 오락이었다(*그러니까 각종의 오락은 한국인들의 지옥 같은 삶을 지탱해주는 '마약'이다).

한국인들은 정치를 욕하지만, 정치야말로 고급 오락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욕하면서 즐기는 오락, 이건 오락의 최고봉이다. 특정 정치인을 열광적으로 지지하고 따르는 이른바 '빠' 문화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국정치에 대해 말이 많지만 매우 재미있는 범국민 오락을 제공한다는 점에선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오락 공화국'에선 삶의 속도가 빠르다. 오락은 유행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싫증나게 만드는 건 죄악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이런 속도전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다는 건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속도의 폭력에 치이는 분야가 생겨났다.

인문학도 그런 분야 중 하나이다.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의 위기를 선언하고 나섰지만, 인문학만 위기인 건 아니다. 오락적 가치가 사회의 전 국면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오락적 효용이 떨어지는 건 모두 다 위기다. 신문을 보라. 신문을 구독하지 않는 대학교수들이 의외로 많다.

● 오락 외에는 대안 없나
문화관광부가 이름을 문화체육관광부로 바꾼다는데, 그 이유가 재미있다. "세계 10대 레저스포츠 선진국 진입을 달성하기 위한 조치"라나. 한국은 이미 세계 1위의 '오락 공화국'인데, '세계 10위'를 목표로 삼다니 우리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다.

'오락 공화국'은 한국적 삶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택한 대안이었겠지만, 이를 계속 밀어붙일 것인지 본격적인 공론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인문학자들이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기에 앞서 '오락 공화국'에 대한 문제 제기를 했더라면 더욱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다(*나의 아쉬움이기도 하다).(강준만 전북대 신방과 교수)

한국일보(06. 09. 27) "이 녀석아 진리가 변하냐?"

인문학을 전공한 노교수는 30년 가까이 같은 학교에서 똑같은 과목을 강의했다. 30년을 사용하다보니 강의노트가 너덜너덜 해어졌다. 대학원생 조교는 노교수의 해어진 강의노트를 타이핑해 컴퓨터 문서로 정리하면서 이렇게 권했다. "선생님, 이참에 내용도 한번 정리하시죠?" 노교수는 무례한 제자를 한심한 듯 한참동안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녀석아! 진리가 변하냐?"

● '인문학 위기 선언'을 보고
필자가 다니던 대학원에서 '전설'처럼 전해지던 이야기다. 실화인지 허구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실화라고 믿는 대학원생이 더 많았다. '인문학 위기 선언'을 접하고,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한동안 잊고 지내던 그 전설이었다.

나는 인문학 위기 선언이 그동안 학자들이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것, 뼈를 깎는 자기혁신을 단행하지 않은 것, 학문 후속세대에게 희망을 주지 못한 것, 사회의 통합은커녕 분열에 앞장선 것 등에 대한 진지한 자기반성에서 시작될 줄 알았다. 인문학 전공 대학원생으로 보낸 10여년 동안, 내가 경험한 인문학의 위기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대학에 입학할 때도, 대학원에 입학할 때도 과정이 끝나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는 단 한번도 기대하지 않았으므로, 인문학자가 처한 경제적 곤란은 위기가 될 수 없었다. 같은 국문학자끼리도 전공이 고전문학이냐 현대문학이냐에 따라 서로의 논문을 읽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으므로, 인간성 회복이니 사회적 통합이니 하는 거창한 구호가 인문학의 존립 근거가 될 수도 없었다. 논문과 학술서는 전공자가 아니면 도저히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지엽적이고 난해했으므로, 대중의 무관심 역시 위기의 본질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젊음을 인문학에 바치면서 절망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대학원생이 열심히 연구해 제출한 논문을 교수들이 대충 읽고 깎아내릴 때, 학술지 논문심사가 형식적으로 이루어질 때 절망했고, 신진학자의 새로운 견해가 학계의 낡은 기준으로 난도질당할 때, 후배들이 '형처럼, 교수들처럼 살기 싫다'고 하나둘씩 대학원을 떠날 때 절망했다. 무엇보다도 인문학자들이 '나태'를 '영혼의 자유'로 분식(粉飾)하려 들 때 절망했다.

● 해어진 강의노트부터 찢어라
아무리 '남 탓'이 우리 시대의 '정신'이라지만, 인문학자들마저 남 탓만 해서는 안 된다.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지원은 그 어느 때보다 크고, 청춘을 인문학을 공부하는데 바치려는 무모한 젊은이들이 아직은 대학원에 남아있다. 사회는 인문학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를 얻고 싶어하는데, 인문학자는 전공자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독백만 하고 있다.

젊은이들을 인문대 대학원에서 내쫓는 것은 '무차별적 시장논리와 효율성에 대한 맹신'이 아니라, "이 녀석아! 진리가 변하냐?"는 오만과 만용, 시대착오와 자가당착이다. 해어진 강의 노트는 찢어버려야 한다. 진리가 변하지는 않지만, 해어진 강의노트에 적힌 것은 진리가 아니다. 설령 진리라 하더라도, 진리를 전달하는 방식은 대상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 인문학자들마저 남 탓에 내몰리면, 이 나라는 정말로 희망이 없어진다.(전봉관ㆍ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절충적인 결론을 말하자면, 우리의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기 전에 먼저 '오락공화국'의 문제를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아야 하며 자신의 해어진 강의노트를 찢어버려야 한다(내 강의노트는 어디에 처박혀 있나?). 그러니까 문제는 인문학 일반의 위기가 아니다. 문제는 '한국'의 인문학이고, 인문학자들 자신의 인문학이다(혹 무늬만 인문학은 아닌가?). 그리고 사실 이러한 반성이야말로 (몰염치한 정치와 무반성적인 과학에 대하여) 인문학의 장기이자 특권 아닌가?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 "네 주제를 알라!" 

06. 0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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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09-27 15:36   좋아요 0 | URL
아, 서늘합니다. 칼럼도, 님의 결론도.

biosculp 2006-09-27 17:00   좋아요 0 | URL
인문학의 위기 애기는 10년도 더된 애기 아닌가요.
인문학의 위기라는것이 더 나아가면 문제 해결능력의 위기는 아닐런지.
10전부터 나온 애기에 무슨 뭘 했다는 애기는 없고 선언과 돈 지원해주세요.이게 전부.
국민들은 능력있는 진보세력을 원한다는 신문보도가 있던데 능력있는 인문학자들이 필요한것은 아닌지. 여기서 능력은 돈버는것은 아닙니다.

로쟈 2006-09-27 17:03   좋아요 0 | URL
웰-다잉도 웰-빙만큼 의미있는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대세라면. 정현종 시인의 시에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라는 게 있는데, 인문학에 대해 제가 느끼는 감정의 대부분은 슬픔입니다. '슬픔의 종언'을 굳이 말릴 이유도 없다고 생각되구요. 왜? 우리는 '오락공화국'에 사니까요...

페일레스 2006-09-27 17:34   좋아요 0 | URL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인문학 종사자들의 위기' 같은데요. 탁석산씨가 100분 토론에서 몇 마디 했더군요.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번 건 좀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페이퍼로 옮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마천 2006-09-28 08:42   좋아요 0 | URL
낡은 강의 노트부터 찢어라. 정말 와 닿는 말이네요. 스스로 구원하지 않으려 한다면 남이 구원에 나서줄 수 없겠죠
 

오전에 '벼랑끝 인문학'에 대한 기사들을 모아두었는데, 사실 내가 더 공감하는 것은, 그리고 보다 근본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한국사회의 위기'이다. 소득 양극화는 OECD국가 중에서 미국, 멕시코와 함께 가장 심각한 나라에 속한다고 하고 어제 보도로는 자살율도 2년 연속 세계 1위라고 한다. 각종 통계수치에 대한 신뢰도를 조금 낮추더라도 '살맛나는 사회'의 그림과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정치권 안팎으로 갈수록 사회적 갈등과 분쟁의 골은 깊어만 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게 '길잃은 한국' 사회의 현실을 짚어본 지난주 경향신문의 창간 60주년 특집기사를 버리지 못하고 책상 한쪽에 모셔두고 있는 이유이다(지금 보니까 가방에 있다). 기사는 주로 '진보개혁의 위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공감하는 내용이 많았다. 그 중에서 김헌동 경실련 국책사업감시단장, 아니 보다 실감나게 '아파트값 거품빼기운동본부장'의 비판은 여러 모로 정곡을 찌르고 있다(사실 '아파트값 안정'과 '사교육비 경감', 이 두 가지가 대내적으론 가장 핵심적인 국정과제 아닌가? 정부나 정치권에도 난다긴다하는 '전문가들'이 많은데, 왜 해결이 안되는 것일까? 거꾸로 사정은 왜 더 악화되기만 하는 것일까?). 진단에 걸맞는 해법이 현실화될 수 있는 방도는 과연 없는 것일까, 의문을 던지면서 한번 더 읽어보고자 한다(강조는 나의 것이다).  

경향신문(06. 09. 14) “현실 모르는 ‘반쪽 진보’ 권력 맛본뒤 퇴화”

진보개혁 세력이라는 사람들 정치는 잘 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독재냐 반독재냐, 직선제냐 간선제냐 같은 선악이 뚜렷한 이분법적 정치 문제에는 상당한 능력이 있다. 독재자를 타도하고, 부패한 정치 세력을 교체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렇지만 ‘경제는 바보’다. ‘실물’에 참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경제 문제는 정치 문제처럼 이분법적이거나 단선적이지 않다. 복잡하다. 또 정치 문제와 달리 바로 느끼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야 느낀다. 그걸 교묘하게 이용하는 세력이 관료다.

나는 그걸 DJ 때부터 봐 왔다. DJ는, 태생적으로 DJP연합이다. 정치는 진보, 경제는 보수를 택했다. DJ때 경제 정책은 모두 개발 관료에 의존해 나온 것이다. 부동산 경기 부양, 건설 경기 부양, 신용카드, 외자 유치 등이다. 그러다 말미에 아들과 측근이 개발 세력들에게 뇌물을 받거나 부패 사건에 연루되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가 들어섰다. YS, DJ보다 나은 진보 정부라 여겼기에 서민·중산층을 위한 진보적 경제 정책을 내놓을 줄 알았다. 또 재벌·기업의 특혜를 파헤치는 경제 과거사의 진상 규명을 통해 경제 민주화를 이룰 줄 알았지만 오히려 반대였다.

◇정치만 유능, 경제는 바보
참여정부는 집권 1년간 법안을 통과시킬 의석이 적다고 변명했다. 2004년 4월 ‘탄핵풍’으로 진보개혁적 정치인들이 여의도에 대거 입성했다. 민노당도 거저 들어갔다. 여대야소 정국 의미도 있지만 더 큰 의미가 있다. 총선 승리로 진보개혁 세력이 청와대뿐만 아니라 여의도까지 점령한 것이다. 그리고는 그게 다였다. 의미있는 입법 하나 못했다.

경제에 대한 인식도 문제다. 단적인 예를 들면, 아파트 선분양은 그것 자체가 특혜다. 진보라는 사람들이 아파트는 분양받는 거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자기 돈주고 사는데 ‘구입’이고 ‘매입’이지, 왜 분양이냐. 분양이라는 말에 나눠 준다는 뜻이 있다. 강아지 분양하듯 이해하는데, 누가 주체인지 잊고 산다. 신도시 개발 방식도 들여다보자. 정부가 농민들의 농지, 임야를 30년간 헐값으로 뺏어서 건설업자에게 팔아넘겼다. 택지 조성도 하기 전에 말이다. 농민은 도시민에게 당연히 빼앗겨야 하고, 국가는 농민의 땅을 뺏어도 된다는 인식이었다. 빼앗은 농지를 건설업자에게 30년간 판 것이다. 그것도 아주 값싸게. 그리고 소비자는 분양받는다. 분양이란 말이 ‘값싸게’를 뜻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그것도 아니다. 시세보다도 높다. 그 자초지종을 알아야 한다.

◇기득권층 얘기만 들어
청와대에 들어간 진보개혁 세력 이야기도 해보자. 학자 출신이 많은데, 이들의 공통점도 현장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두번째 공통점이 통계와 자료를 관료에게 의존한다는 것이다. 실제 상황, 현실을 잘 모르는 학자 출신들이 청와대 들어가서 외국에서 배운 이론만 접속시키려다가 항상 관료와 재벌 민간 연구소 연구원들에게 ‘역이용’ 당한다.

집권 이후에 청와대나 열린우리당 내 진보개혁 세력들이 주로 만나는 사람들이 관료, 재벌, 재벌 이익단체, 재벌 민간연구소 연구원, 국책연구기관 연구원들이다. 시민단체 사람도 만나지만 열에 한두번 정도일 뿐이다. 경제부문의 무능함을 외부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이다. 관료, 이익단체 사람들을 계속 만나다 보면 ‘진보’가 어느날 자기도 모르는 사이 ‘보수’가 된다. 권력의 맛도 느낀다. 그런데 정치권내 진보개혁 세력들은 어떻게 접대와 로비를 피해야 하는지 모른다. 결국 즐기게 되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진보한 사람들? 경제 관료나 재벌에게 팽팽당한다. 재벌들이 다 공부시켜 준다. 운동권 출신 국회의원들 예전에 경제 공부한다고 했지만, 요즘은 제대로 스터디하나. 관료나 재벌, 이익집단의 연구소 연구원들이 다 공부시켜 준다. 자료에 데이터에 논리까지 만들어주니까 편하다. 가만 있어도 가져다 준다. 그러다 보니 그게 맞는 것 같다고 느낀다. 그런 사람들만 만나고, 또 그런 세상이니까.

각종 국가정책 용역 생산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관료를 통해 나오면 관료를 위한 용역 보고서만 생산된다. 국회나 정당에서 현장 중심의 연구 보고서를 만들어야 한다. 국책 연구소도 100% 독립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미국처럼 관료나 행정부는 법안을 발의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관료는 국민을 위한 머슴이다. 머슴한테 의존하는 법안은 안된다. 대의 기구인 국회의원과 정당이 정책·제도를 파고들고 연구해 내놓아야 한다.

보수적 관료들이 진보개혁 세력에게 지시받는다고 갑자기 진보가 되는 게 아니다. 사람이 안 바뀌는 데 무엇을 바꾸겠는가. 미국의 연방 공무원은 정권이 교체되면 고위 공무원 절반이 바뀐다. 우리도 헌법이나 공무원법을 싹 바꿔야 한다. 한국처럼 ‘고시’로 평생을 보장받는 나라는 없다.

개발독재 때도 대다수 국민은 희망과 꿈을 가졌다.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다, 현재보다 나을 수 있다는 거였다. 자신감과 희망 있었다. 지금은 우선 열심히 일할 곳조차 없다. 일해도 언제 잘릴지 모른다. 미래가 안 보인다. 항상 위기 의식에 사로잡힌다. 결국 부동산 문제다. 개인 자산의 80%가 부동산이고, 대한민국 국민의 고민 80%가 부동산이라고 보면된다. 집값 폭등하니까, 5년 10년 일하면 집 사고, 평수 늘리고 했는데 지금은 그게 잘 안 된다. 투기 잘 하는 사람이 선망받는 시대이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 기를 죽여놓는다.

서민, 중산층의 삶의 질은 계속 떨어진다. 선진국 돼간다지만 재벌만 선진국이고 ‘그들만의 천국’이다. 집권 세력이 95% 대다수 국민이 아니라 5%의 기득권 세력에게 점점 살기 좋은 환경, 시스템을 만들어주고 있다. 95%는 박탈감에 점점 힘들어지는데 5%는 불로소득으로 자산 늘리면서 잘 산다. 이런 게 위기의 본질이다.

대통령, 정부, 여당은 ‘성장률’에 집착한다. 성적표이기 때문이다. 성적표를 잘 받으려면, 계속 성장해야 하고, 그러려면 거품을 조장해야 한다. 국민들은 자기 주머니, 집 마련, 저축, 일자리 이런 것 고민한다. 그렇지만 대통령, 정치인, 관료들은 ‘자기만의 성장률, 성적표’에 집착하고 결국 거품 유혹에 빠지게 된다. 거품 조장하면 결국 투기라는 병이 생긴다.

참여정부가 재벌에게 특혜를 늘려줬다. 주택 공급을 확대하고 기업도시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각종 개발 계획을 남발하고, 거품 조장을 해왔다. 주택과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2백만~2백50만명이다. 그중 15% 정도만 정규직이고 지식 노동자다. 나머지는 비정규직, 일용직 노동자다. 참여정부 들어 50만~1백만명 고용이 창출됐다. 그중 30%는 외국인 노동자다. 건설경기 부양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란 게 우리 지식을 배운 청년, 젊은이들이 기피하는 일자리만 나오는 것이다. 게다가 외국계 투기 자본이 ‘부동산 투기장’에 투입됐고, 지금도 투입되고 있다. 자꾸 돈이 모이니까 개발과 부동산에 집중되고, 지식 산업과 거리가 멀어지고, 일자리는 점점 감소하고 병리가 나타나는 것이다.

일자리 없는 청년들은 결혼이 늦어지거나 못한다. 주택값은 폭등한다. 미래에 대한 위기, 불안 때문에 결혼 못하고 아이를 낳지 않고 저출산 문제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빈부격차 심화, 양극화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산 양극화를 심화시킨 자들이 세금 더 내라고 하니까, ‘미친 놈’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반대만 말고 대안 내놔야
진보는 그게 지식이든, 돈이든 자기 것을 남과 나눌 줄 아는 사람이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없는 사람을 생각하는 철학을 가진 사람이다. 내가 보는 진보는 그런 것이다. 그런데 민노당이나 민노총을 보자. 대한민국 1천5백만 노동자의 10%도 안 되는 귀족형이다. 그 10%도 다 재벌 기업, 보수 기업, 공기업, 언론, 교사, 병원 등 기득권을 누리는 세력의 종사자들이다. 1천만 자영업자를 대변하는 단체가 없다. 1천만명에 육박한 비정규직을 위한 조직도 사실상 없다. 민노당, 민노총이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주장하지만, 자기 것을 내놓으려고는 안 한다. 내건 빼앗지 말고 소수에게, 권력자에게, 자본가에게 저들(비정규직)을 위해 더 내놓으라는 식이다. 유럽을 봐라. 자기 근무 시간 줄이고 하면서 같이 하지 않는가.

한·미 FTA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고 진보인가. 반독재하고 길거리 행동했다고 진보인가. 지금 진보개혁세력은 ‘머리만 진보’거나 ‘행동만 진보’가 많다. 머리와 행동이 다 진보인 경우는 극히 드물다. ‘참진보’가 없다. 이것이 또 위기의 요인이기도 하다.

시민단체도 마찬가지다. 요즘 시민단체에는 ‘시민’이 없다. 시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정치, 관료 사회 진입하기 위한 시민단체인가 싶을 정도다. 진보는 인재양성소가 없다. 그래서 인재도 탄생하기 힘들다. 학생운동하다 노동계로 가고, 정보도 자료도 차단된 상황에서 행동하고 일했다고 해서 본인이 인재가 될 수는 없다. 내가 속한 경실련도 마찬가지다. 무슨 정부나 지자체 위원회에 왜 그리들 많이 가는지, 시민단체가 무슨 이력 관리하는 곳인가.

우리 사회가 왜 위기가 왔고, 중병이 걸렸느냐. 황우석 거품, 부동산 거품 이런 것이 대한민국에서 선진국 진입단계에 왜 발생했나? 브로커 천국이 된 근본 원인은 뭔가. 엉터리 진단에 엉터리 처방만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위기를 예견해야 하는데 중병이 들어야 치료법을 생각한다. 그나마 병치료 늦어지고 치료하다 마는 게 반복된다. 어쩌다 먼저 떠들면 미친놈 되기 일쑤다. 지금 권력에 반대하는 자들은 많은데 견제하고 감시하고 대안을 내놓는 자들이 없다. 그것이 위기의 실체다.(정리 김종목·사진 권호욱기자)


-김헌동 단장은?-

경실련 김헌동 국책사업감시단장은 195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81년부터 19년 동안 대기업 건설회사에서 일했다. 97년 시민운동에 뛰어들었다. 2000년에는 사표를 내고 운동에 전념하고 있다. 2004년 2월 경실련 아파트값 거품빼기운동본부 출범과 함께 본부장을 맡아 분양원가 공개운동을 벌여왔다.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김태동씨가 친형이다.(*다른 건 몰라도 '아파트값 거품빼기' 같은 게 한국사회의 진보이다. 어려운 이슈들을 제기할 것도 없다. 이게 정치적 진보를 표나게 내세우는 것보다는 좀 복잡한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일까? 김헌동 본부장은 아파트 반값 공급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데, 그건 시민단체쪽의 탁상공론이 아니다. 지난 92년 대선에서 정주영의 대선공약이 아파트 반값 공급이었다. 문제는 혹 '의지'가 아닐까?)

06. 0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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