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신문들이 인문학 위기 관련기사들로 도배돼 있다. 며칠전 고려대 문과대학 교수들이 '인문학 위기 선언'을 터뜨린 이후에 여론이 총동원된 듯한 인상이다(기자들로서도 '일거리'가 생긴 것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또 내주는 학술진흥재단과 인문학계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인문학 주간'이라고 한다. '벼랑끝'에서 탈출하기 위해 플라멩코춤에 사이코 드라마까지 선보인다고 하니까 '노력하는 모습'은 보여준다고 해야겠다.

 

 

 

 

'인문학위기'에 대한 진단과 반응은 언제나 두 가지이다. 한 신문의 타이틀이 뽑은 대로, 인문학자/전공자들이 변화에 소통에 무신경함으로써 위기를 자초했다는 자성과 학문의 전당마저 신자유주의 시장판으로 만들어야 하느냐는 분노이다. 이러한 정황은 소설가 김훈이 한 대담에서 든 예를 비틀어서 옮겨오자면, 마치 청나라의 대군을 성밖에 두고 주전파와 주화파가 서로간에 설전을 벌이고 있는 형국처럼도 보인다(내가 '담론들'을 신뢰할 수 없는 이유이다. 인문학이 살아있다는 자기증명은 말이나 선언이 아니라 '실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신문 세 곳의 특집기사들을 아래에 옮겨놓는다. 인문학 주간 행사 일정은 맨마지막에 붙여놓았다(시간이 나면 몇 마디 코멘트를 덧붙여놓도록 하겠다).

한국일보(06. 09. 20) 벼랑끝 인문학 자성과 분노

인문학이 죽어 간다. 대학사회에서 ‘인문학의 위기’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고 위기의식마저 마비된 상태다.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전공자가 해마다 줄고, 각 대학의 인문ㆍ문과대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통폐합 또는 폐지 대상 1순위가 됐다.

이 같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인문학계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한국학술진흥재단은 올해를 ‘인문학 부흥의 해’로 정하고 ‘새로운 국가 발전 전략으로서의 인문학’을 위한 갖가지 실천 방안을 내놓고 있다. 15일 고려대 문과대 교수 선언에 이어 각 대학 인문대 교수들의 연대 서명도 예정돼 있다. 그러나 아직 반향은 크지 않다. 인문학을 연구하는 전공자들을 통해 위기의 원인을 짚어보았다.

■ 변화에 둔감한 눈높이
서울 모 대학의 철학과 조교 황모씨는 얼마 전 지도교수의 신문 기고문을 약간 손질했다 심하게 혼이 났다. 기고문에 실린 한문투의 표현을 쉬운 우리 말로 바꿔 썼다가 “왜 글의 웅혼함이 떨어지게 만들었느냐”는 질책을 받았다. 황씨는 “다른 분야에서는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학문적 시도가 많지만, 순수 인문학 분야는 아직도 중세적 사고에 갇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안대회 명지대 교수(한문학)도 “학문적 깊이만 있으면 인정받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대중과의 소통이 학자에게도 필수인 시대”라며 “학문적 업적을 대중과 공유하려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최원식 인천문화재단 이사장(인하대 국문학)은 변화에 무딘 인문학 교수 사회에서 위기의 원인을 찾았다. 그는 “이공계는 산업현장의 수요에 따라 커리큘럼을 짜는 등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했지만 인문학계는 교수의 협소한 전공지식이 수십 년 째 반복ㆍ전수되고 있다”며 “취업뿐 아니라 학생들이 원하는 교양교육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인문학이 외면받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 시장 만능주의 극복이 과제
구체적 ‘성과’보다는 추상적 ‘계획’에 연구 자금을 지원하는 정부에도 비난이 쏟아졌다. 올 초 학술진흥재단이 주최한 ‘인문학위기 포럼’에 참석한 이진경(본명 박태호) 서울산업대 교수(철학)는 “인문학 위기는 김대중 정부 초기 ‘연구결과’가 아닌 ‘연구계획’으로 지원여부를 결정하면서부터 더욱 불거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연구자들이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한 연구계획서를 쓰느라 사회와의 소통을 통한 연구라는 본업에 오히려 소홀해진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김영미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장(사학)도 “정부의 인문학 연구지원비는 해마다 줄어들고 있는데 논문 발표수 등 인문학 연구방법과 어울리지 않는 계량법으로 학문성과를 평가하려는 시도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며 “정부의 잘못된 정책방향이 인문학의 깊이 있는 성찰을 방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공자들이 한결같이 위기의 원인으로 지적하는 것은 역시 ‘시장 만능주의’라는 현실이다. 경제적 부가가치 생산에 이익이 되는 것만 대접받는 현실이 이미 대학을 완전히 접수해 버렸다는 지적이다. 이승환 고려대 교수(철학)는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이 학문의 전당까지 시장판으로 만들어 버렸다”며 “심지어 국제화라는 미명아래 한국학 관련 학문까지 영어로 강의하도록 강요하는 게 바로 한국 인문학계의 현실”이라고 개탄했다.(유상호기자)

동아일보(06. 09. 20) “취업과 너무 먼 文·史·哲” 폐과 잇따라"

최근 대학 구조조정의 강도가 높아지면서 더욱 위기에 몰린 분야가 바로 인문·사회학이다. 대학에 시장논리가 팽배해져 문학 사학 철학 등 이른바 문사철(文史哲) 학과들은 취업률이 낮거나 가시적인 성과가 적다는 등의 이유로 폐과 대상 1순위가 된 것이다. 지난해 전국 대학 졸업자의 취업률을 보면 공학계열 71.7%, 자연계열 69.2%, 사회계열 55.8%, 인문계열 53.4% 등 계열별로 큰 차이가 난다.

▽비인기 학과 폐과 속출=경원대가 2003년에 철학과를 없애는 등 최근 3년간 철학과 12개가 폐과됐고 독문과와 불문과도 각각 4곳이 문을 닫았다. 경북대는 5월경 독문과와 불문과를 사범대에 통합하려다 교수들의 반발로 계획을 일단 접었다. 90년 전통의 대구가톨릭대는 인문대 철학과를 비롯해 외국어대 불어불문학과 독어독문학과 이탈리아어과 등 문과 분야 주요 학과에 대해 내년부터 학생 모집을 중단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현재 1학년이 졸업하는 4년 뒤에 이들 학과는 폐과된다.

1982년 개설된 철학과의 경우 모집정원을 50명에서 40명으로 줄였지만 입학생은 갈수록 줄어 현재는 10여 명에 불과하다. 독문과도 사정은 비슷하다. 부산지역 대학들이 최근 2학기수시 학생을 모집한 결과 인문학 분야의 지원자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부산외대의 경우 영어학과는 1.2 대 1, 중국어학과는 미달됐으며 동의대는 인문학부 중 2 대 1을 넘는 학과가 드물었다.

경남대는 지난해부터 국제언어문화학부 4개 학과 가운데 중국어를 제외한 독일어 러시아어 프랑스어과 등 3개 학과의 신입생 모집을 중단하고 이들 학과 소속 교수들은 일단 유사 전공으로 전보시키는 고육책을 내놓았다. 취업이 어려운 인문계열 및 야간학과의 통폐합 과정에서 실직을 우려한 교수들의 반발도 있었으나 고용 안정을 약속하고 협조를 유도했다. 이 대학은 과거 시간강사가 담당하던 상당수 강의를 정규 교수에게 맡기면서 시간강사가 일자리를 잃었다.

▽전공보다 취업이 우선=인문학의 위기는 전국적이지만 위기의 정도는 지역에 따라 다르다. 서울 소재 대학들이 이제 인문학의 위기를 체감하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면 지방대는 이미 무너지는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이대로라면 지방대의 현주소는 서울 소재 대학의 가까운 미래를 보여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학입시 면접 때 수험생들에게 “왜 인문학 관련 학과에 지원했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의 학생은 “교직에 진출하기 위해” 또는 “공무원으로 취직하기 위해”라고 대답한다.

전남대 사학과의 경우 4학년생 36명 가운데 대학원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은 5명, 전공을 살려 취업을 하려는 경우는 4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학생들은 취직 시험에 인생을 걸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가하게 철학을 논하고 역사를 고민하는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사그라질 수밖에 없다. 대학과 교수들의 고민은 여기서 시작된다.

▽학생 없는 대학원=학부의 빈곤은 대학원으로 가면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대학원생이 아예 없는 학교도 적지 않아 교수들은 학문의 맥이 끊어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지난 1학기 강원대는 독문과와 불문과 대학원생이 전무했다. 정교수 6명에 대학원생이 1명뿐인 모 대학의 불문과 교수는 “가르칠 학생이 없는데 어떻게 학문을 이어 가겠느냐”며 “학부생들을 붙잡고 대학원에 오라고 사정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취업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다”고 말했다.

조선대의 한 교수는 “대부분의 학생과 학부모들이 고교 때부터 취업을 지상 목표로 정하고 대학에 들어온 마당에 순수학문을 강조하는 것이 과연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인지 자문해 보게 된다”고 털어놨다. 모든 학생이 학자가 되려는 것도 아닌데 거의 모든 대학의 커리큘럼이 학자 양성 코스로 되어 있어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과 큰 차이가 있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대부분의 대기업에서 원어민과의 자유토론식 면접시험을 보는 마당에 정규 대학교육만으로는 그 틀에 맞추기 어렵다는 것.

전남대 최정기(사회학) 교수는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소위 순수학문이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강의실에서는 시험문제 풀이식 강의가 될 수밖에 없고, 논문의 소재 또한 현실과 접목되는 분야의 정책 대안 위주로 흐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수년 전 하버드대 총장이 신년사를 통해 ‘기술의 진보가 빨라질수록 학문의 기초를 다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며 “결국 인문학이 새로운 변화를 수용할 그릇이 된다는 생각을 사회적으로 공유하지 않는다면 대안이 없다”고 지적했다.

▽인문학 지원 절실=학문은 기초순수학문과 응용학문이 균형을 이뤄 발전해야 시너지 효과가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고사 위기에 놓인 인문학에 대한 인식 전환과 정부의 과감한 지원이 절실하다고 학계는 촉구한다. 그러나 정부의 연구개발(R&D)비 중 인문학 연구지원비를 보면 △2003년 6조5000억 원 중 480억 원(0.74%) △2004년 6조9000억 원 중 590억 원(0.86%) △2005년 7조7000억 원 중 556억 원(0.72%) 등으로 열악한 수준이다. 교수들은 인기 분야는 사립대에 넘기고 국립대는 사립대가 꺼리는 기초·순수학문 분야를 집중 육성하는 등으로 역할 분담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공립인문대학장협의회 윤평현(전남대 교수) 회장은 “학부제와 신자유주의 등으로 인문학 위기가 가속화됐다”면서 “학부제를 없애 학생들이 원하는 전공에 깊이 빠져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북대 김영기 인문대학장은 “프랑스처럼 인문학을 집중 육성하는 정책연구소를 만들거나 국공립대만이라도 인문학 육성책을 의무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자들이 스스로 부르고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 영남대 최재목(철학) 교수는 “자연과학과 첨단기술 분야와 인문학을 연계시켜 현실 문제에 접근하는 노력을 보여 주는 게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박사 학위는 해외서” 세계화 물결로 우수인재 눈뜨고 뺏겨▼
인문학의 위기를 심화시키는 요인 중 하나는 학문의 식민지화다. 1980년대 한국 지식사회는 학문의 토종화를 주창하고 나섰지만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인문·사회학계가 내세울 만한 보편적 이론의 등장은 여전히 요원하다. 여기에 학문 영역에도 세계화의 물결이 밀어닥치면서 세계 최고 수준의 강의가 아니면 우수한 국내 인재를 해외 교수들에게 모두 뺏기는 형편이다. 이에 따라 국내 대학은 학사만 양산한 채 석박사 과정은 아예 해외 대학에 위탁하다시피 하면서 학문적 종속성이 더욱 심화됐다. 이는 주요 대학 인문·사회과학 전공 교수의 국내 박사 비율이 1980년 이후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학술진흥재단을 통해 1980년부터 2005년까지 5년 단위로 전국 대학 전임강사 이상 교원들의 국내외 박사학위 비율을 추적한 결과 해외 박사 비율은 25.0%에서 35.5%로 10.5%포인트가 늘었다. 기초 학문이라 할 인문학 전공자의 경우 해외 박사 비율은 1980년 이전 25.1%에서 2001∼2005년 48.0%로 22.9%포인트나 증가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명문대 대학원들도 본교 출신의 일급 인재들을 해외로 뺏긴 채 하위권 대학에서 충원하거나 중국과 동남아에서 돈을 주고 연구원들을 데려오는 형편이다.

이는 일본 도쿄(東京)대 교수들 중 90%가량이 국내 박사인 점과 대조를 이룬다. 도쿄대 출신인 양일모(동양철학) 한림대 교수는 “일본에서는 박사과정 2년차 정도에 해외로 나가 언어 연수와 학위 과정을 거치도록 하지만 논문은 국내에서 발표하는 것만 인정하는 학풍이 정착돼 있다”며 “이는 일본 학계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자부심의 발로”라고 설명했다.

한국 인문학계가 자생력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 결과를 생산하고, 이를 교육으로 연결하는 시스템의 복구가 가장 중요하다. 또 석박사 과정을 포함해 학문에 뜻을 둔 학생들이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백종현(서양철학) 서울대 교수는 “한국에서는 대학원생들이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아서 학문에 전념할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지만 외국에 나가면 5∼6년간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기 때문에 내공의 차이가 커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권재현 기자)

동아일보(06. 09. 20) 인문학은 학문의 ‘생명수’"

인문학의 위기에 관한 문제가 광범하게 제기되고 있다. 최근 고려대 문과대 교수들은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결의를 담은 ‘인문학 선언’을 발표했다. 인문학자로서의 반성과 각오가 포함되어 있는 이 선언은 인문학의 중요성을 새롭게 부각시켜 주었다.

돌이켜 보건대, 상당수 대학에서는 인문계 학과를 선택하는 학생 수가 급격하게 감소하고 지원하는 학생들의 성적 등도 과거와는 달라졌다는 말도 있다. 여러 대학에서는 인문계열 학과 대학원 지망생의 비율이 줄어들고 있음을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심지어는 인문계 학과가 폐과되는 사태도 계속되고 있다. 대학 교양강의에서 인문계가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낮아지며, 실용적 학문이 교양의 주류인 양 주장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인문학의 위기 상황에는 다 원인이 있다. 우선 인문학이 처해 왔던 외적인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광복 이후 한국사회는 급격한 변화와 압축성장의 길을 걸어 왔다. 이 과정에서 성장에 급급했던 우리 사회는 너무 실용과 효율만을 강조해 왔다. 여기에서 인간 삶의 기본을 탐구하는 인문학의 중요성은 점차 망각되어 갔다.

인문학 위기의 본질이 인문학 자체에 있지 않고 인문학자들의 위기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는 진단도 가능하다. 분명 인문학과 인문학자는 구별되어야 한다. 인문학의 위기는 무한대로 뻗어나갈 수 있는 인문학의 가치를 제대로 밝히지 못했던 인문학자들 때문에 나타난 사태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굳이 그 위기의 더 큰 책임 소재를 찾는다면 역시 인문학에 대한 무관심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인문 정신은 인간의 진정한 가치와 삶의 의미를 따진다. 인문학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윤리와 도덕의 기준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러한 인문학이 빈사상태에 빠지고 인문 정신의 중요성이 망각된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눈앞의 이윤만을 추구하는 행동이 인문적 가치에 앞서게 된다면, 사회적 갈등과 충돌의 해소는 요원한 일이 되고 만다. 과학자에게 건강한 인문정신이 결여된다면, 과학이 인류의 행복에 기여하기보다는 인간과 자연을 황폐화하는 도구로 전락되고 만다. 그러므로 인문학은 우리의 구체적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서 절실히 필요하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창업자로 세계적 갑부인 빌 게이츠 씨는 어찌 보면 인문학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인문학이 없었더라면 나도 없고 컴퓨터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인문학적 상상력이 모든 이에게 필수적으로 요청되고 있다는 말이다.

인문학은 학문의 세계에서 지하수의 수맥과 같다. 사람들은 지하수에서 생명에 필수적인 물을 끌어올려 마신다. 지하수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의 보전과 개발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지하수가 오염되거나 고갈되어 버리면 지상의 생명체도 위협을 받고, 산업 활동마저도 마비되어 버릴 것이다. 인문학이 없이는 다른 학문도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므로 인문학의 발전을 위한 사회의 인식과 국가의 배려가 요청된다. 인문학 분야에 관한 2005년도의 통계를 들여다보면 한숨이 절로 난다. 지난해 연구개발에 관한 정부의 총예산은 7조8000억 원이었다. 그러나 인문학 연구 지원비는 556억 원으로 0.71%에 불과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 들어 많은 사람이 인문학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발 이런 말들이 구두선에 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하여 인문학의 연구 성과가 다른 학문의 발전의 토대가 되고 나아가 국민 모두가 그 인문학의 열매를 향유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조광 고려대 문과대학장·한국사)

세계일보(06. 09. 20) "취업 안되는데…" 문학·역사·철학 폐강 속출

한국의 인문학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정부·사회의 무관심과 실용학문의 거센 파고 속에 인간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인문학이 고사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대학마다 수강생이 없어 폐강되는 강좌도 속출하고 있다. 급기야 교수들이 공동선언을 통해 우리 사회에 호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세계일보는 한국 인문학이 처한 실상과 더불어 위기의 원인과 해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취업률은 바닥권, 취업 후 직무수행에 가장 도움이 안 되고….’ 우리나라 인문학계 출신자들의 현주소다. 인문학만으로 경쟁력이 없다 보니 인문학 관련 학과생이 다른 전공을 함께 이수하는 게 필수처럼 된 지 오래다. 인문계열 학과 졸업 후 취직이 안 되자 교대나 한의대, 법대 등에 진학하려는 ‘늦깎이 재수생’도 많다.


19일 오후 서울 H대학 인문대 도서관. 150여석의 좌석에서 공부하는 학생 중에 인문학 전공서적을 펴놓고 있는 학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대부분 토익·토플책이나 공무원시험 문제집을 펴들고 있었고 전공서적을 보는 소수 학생도 경제학원론과 민법총칙 등과 같은 서적을 읽고 있었다. 이 대학에 따르면 이 대학의 인문대 학생들의 복수전공 비율은 30.6%로 교육대를 제외하고 단과대 중에 가장 높다. 인문대 학생들은 대체로 경영학과 사회과학 계열을 복수전공하기를 가장 선호한다.

서울 Y대의 경우 경영학과를 복수전공하는 학생 399명 중 181명이 인문계열 학생이다. 서울 J대 경영학부 복수전공자 225명 중 78명도 인문계열 전공자들이다. 모 대학 국문학과에 다니는 김용훈(24)씨는 “같은 과 친구들은 학점이 좋은 순서대로 교직 이수나 복수전공으로 눈을 돌리고 일부는 일찌감치 사범대나 경영대 쪽으로 전과한 친구도 많다”며 “경영대 수업은 항상 만원이라 수강신청 매크로(자동입력 기능)까지 등장했다”고 말했다.

일부 대학은 아예 인문학 전공을 폐지했다. 2001년 호서대가 철학과를 폐지하고 문화기획과를 신설했고, 2003년 경원대도 역사철학부를 없앴다. 인문학도들의 수난은 졸업 후로도 이어진다. 한국교육개발원이 2005년도 4년제 대학교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취업실태를 조사한 결과 진학·입대 등을 제외한 순수취업률은 인문계열(어문학 포함)이 53.4%로 자연계열을 제외하고 가장 낮았다. 사학이나 철학 등 순수 인문학 전공자 취업률은 최하위권을 형성했다.

3년 전 명문 사립대 국문과를 졸업한 조모(26·여)씨는 현재 교대에 다시 입학하기 위해 재수 아닌 재수를 하고 있다. 대기업에 취직하려고 했지만 국문과 졸업생의 경우 원서조차 받아주지 않아 취직이 잘되는 학과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조씨는 “아동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국문과에 입학했는데 먹고살 길이 막막하다”며 “나 같은 재수생 중에 인문계열 출신이 예상보다 훨씬 많다”고 귀띔했다.(백소용 기자)

세계일보(06. 09. 20) "바뀐 교육환경에 맞춰 학자들 스스로 변해야”

서울대 인문대학장 이태진 교수(국사학과·사진)는 19일 인문학의 위기는 바뀐 교육환경에 맞춰 학자들 스스로 변하는 모습을 보일 때 극복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국가의 무관심도 문제지만 ‘그들만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문학계 내부의 잘못도 크다는 것이다.

이 학장은 “우리가 먼저 변해 국가 경쟁력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을 들게 하면 국가도 관심을 가질 것”이라며 “서울대도 변신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서울대 인문대는 당장 내달부터 공대, 경영대 등 단과대학들과의 교류를 활성화하기 위한 포럼을 정기적으로 개최할 예정이며 일본의 도쿄대, 중국 베이징대와 함께하는 학술회의도 추진하고 있다.

그는 “인문학이 인간에 대한 학문인 만큼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면서 “예전엔 다른 단과대에서 인문대 교수들을 불러주기만 기다리고 있었지만 앞으로는 우리가 불러들일 것”이라고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인문학에 대한 국가적 무관심에 대해선 “나무에 물을 주는 마음가짐으로 꾸준히 지원해줘야 하는데 눈앞에 보이는 성과에만 집착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학장은 “공부를 열심히 해도 나와서 갈 데가 없다면 누가 의욕을 갖겠느냐”면서 “선진국처럼 학교와 국가가 나서 석·박사 과정생에 대한 학비와 생활비 지원, 일자리 모색에 도움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공대가 기여한 부분이 크지만 그것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면서 “국가 차원에서 인문계에 대한 지원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경희 기자) 

한국일보(06. 09. 20) 내주 人文주간… 7개 단체 온·오프서 다채 행사

인문학이 대중 속으로 뛰어든다. ‘열림과 소통의 인문학’이란 기치도 내걸었다. 한국학술진흥재단과 인문학계가 손잡고 25일부터 6일간 온ㆍ오프라인 공간을 넘나들며 펼치는 ‘인문 주간’행사는‘인문학의 위기’를 대중과의 접촉을 통해 정면 돌파하려는 절박한 몸짓이다. 행사를 위해 각 대학 인문대학은 물론 한국학 중앙연구원 등 정부 출연 연구기관과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등 대학 부설 연구기관, 그리고 그 동안 일반인 대상 학술 강좌 등으로 인문학 대중화에 힘써 온 재야 연구단체까지 모두 7개 단체가 손을 잡았다.

‘인문학은 고리타분하고 어렵고 딱딱하다’는 편견을 벗어 던지기 위해 세미나 강연 전시 시연 체험ㆍ참여 등 61개의 다양한 행사를 마련했다. 인문학계 전체가 ‘상아탑 안의 인문학’이 아니라 ‘생활 속의 인문학’만이 활로라는 데 뜻을 모은 것이다. 학술진흥재단 관계자는 “인문학의 위기는 연구자 스스로 대중과 소통하기를 꺼려서 생겼다는 자체 반성에서 출발했다”며 “연구 성과를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장을 마련해 보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규장각은 고문서를 통해 주택을 사고 파는 과정, 고발ㆍ고소 같은 송사를 어떻게 진행했는지 등 조선시대 서민들의 일상 생활을 살펴 보는 ‘고문서를 통해 본 생활사’ 강연을 연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든 과정도 풀어낼 예정이다.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는 ‘서울의 어제와 오늘’을 주제로 내걸었다. ‘서울 100년, 시간 공간 그리고 인간’전시회와 함께 ‘영화 속에 나타난 서울의 이미지’와 같은 이색 강연이 기다린다.

철학아카데미는 다채로운 행사를 마련했다. 플라멩코 춤 마임 행위예술 사이코 드라마를 선보이고 요가 최면술 무속 선(禪) 수행 등 참가자들이 직접 참여하는 기회도 제공한다. 인문학 연구 모임 ‘연구공간 수유+너머’는 ‘공부ㆍ몸ㆍ 언어의 하루’ 등을 주제로 한 영상제와 세미나를 함께 연다. 학술진흥재단과 인문학계는 앞으로 매년 한글날(10월9일)을 전후한 1주일을 공식 ‘인문 주간’으로 정해 인문학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을 계속 이끌어 갈 계획이다.(박상준기자)

06. 09. 20.


댓글(5)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쟈 2006-09-20 19:25   좋아요 0 | URL
행사의 구체적인 내용을 정확히 모르겠지만, 저도 좀 회의적인 건 사실입니다. 그다지 '인문학적'이지 않은 이벤트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더불어, 빌 게이츠나 소로스도 인문학 공부를 했다는 식의 접근법이 오히려 제 살 깎아먹기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한마디로 '돈'에 기대지 않는 인문학의 존립 자체를 부정하는 거 아닌가 해서요. 한가지 덧붙이자면, 요즘 거론되는 '인문학의 위기'의 실내용은 '인문학 교수들의 위기'이기도 합니다(학생이 모이지 않고 학과 자체가 없어지는 경우도 있으니까)...

나의왼발 2006-09-21 14:35   좋아요 0 | URL
저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것이 인문학의 탐구 결과가 만들어낸 것도 크다고 봅니다.
더 이상 니체, 비트겐슈타인 이후의 인문학은 진리의 추구라는 목표를 포기했고
더 이상 인간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할 능력도 없음을 자인했는데 그런 학문에
과연 누가 열정을 가지고 공부할런지....

로쟈 2006-09-21 22:57   좋아요 0 | URL
'인간에게 나아갈 길'이란 건 좀 거창하다 싶습니다. 개인사에서도 그렇고 인류사 또한 궁극적으로는 멸망과 멸종을 향해 나가는 것 아닌가요? 과학은 어떤 길을 제시하고 있는 걸까요?..

biosculp 2006-09-22 11:55   좋아요 0 | URL
근데 인문학하면 고등학교나 중학교선생님하면서 하면 안되나요. 임용고시의 벽이 있긴있지만 서울대 통합논술이니 논술의 시대로 접어들었는데, 애들 상대하고 잡일이 있지만 방학도 있고 욕심안부리면 먹고 사는것은 해결이 될텐데요.
그리고 인문학 위기애기하면서도 80년대 부터 나온 번역의 학술적 인정은 왜 아직 안되는것인지요(되고있는데 제가 모르고있나요)
학위한 분이 중고등학교 선생님 되어서(대학에 자리 많으면 모르겠지만 현상황은 이건아니잖아요) 수업은 수업대로 방학이면 특강형식으로 자기 전공분야 강독을 한다든지 뭐 이런식으로 전국학교에 몇명씩만 투입되서 특공대는 아니더라도 해나가면 나라수준이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는데. 공상입니다.

로쟈 2006-09-22 19:03   좋아요 0 | URL
식혜bean님/ 예리한(!) 지적이십니다. 인문학이 '배고픈' 학문인 게 맞는데, 사실 배곯아가면서 인문학을 한다는 것도 좀 넌센스가 아닌가란 생각이 듭니다. '생존'의 문제가 아닌 '인간다운 삶'과 '삶의 기쁨/향유'를 다루는 학문이 인문학이 아닌가란 생각 때문에...

biosculp님/일본만 하더라도 박사급 교사들이 상당수 되는 걸로 압니다(국내에도 아주 없지는 않구요). 그런데, 교원자격증을 갖고도 교사자리를 얻지 못하는 교직지망생들이 아직 많은 상황에서 인문학 박사들에게 논술교사 자격을 부여한다면 시비거리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게다가 학교마다 원어민 영어교사들을 배치하는 데 교육당국과 학보모의 관심이 더 집중돼 있을 것도 같고...
 

프랑스의 저명한 진보저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한국판이 창간되었다. 어제(14일) 날짜의 일이다. 예전에 홍세화 한겨레신문 시민편집인이 등이 한국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필요성을 역설한 기억이 있는데, 그것이 '한국판'으로 구체화된 모양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프랑스에서는 발행인인 이냐시오 라모네가 방한하여 간담회까지 가졌다고. 그의 저서로는 공저인 <프리바토피아를 넘어서>(백의, 2001)를 넘어서 외에도 <소리없는 프로파간다>(상형문자, 2002) 등이 번역/소개돼 있다(나는 그 두 권의 책을 갖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국내에 가장 널려 알려진 프랑스 언론인이 아닐까 싶다.

 

 

 

 

여하튼 새로운 언론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하는 소식인바, 관련기사를 읽어본다.

경향신문(06. 09. 14) “독립적 언론만이 진정한 비판 가능하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창간을 계기로 한국지식인 사회에 진지한 토론의 장이 마련되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빨라진 인터넷 환경이지만 긴 호흡을 가진 디플로마티크 같은 언론을 원하는 독자가 분명히 있을 겁니다.”

국제문제에 대한 심층 분석과 독립적 비평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14일 한국판(발행인 박승흡)을 창간했다. 창간행사와 토론회 등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이냐시오 라모네 발행인(64)은 이날 ‘세계화와 미디어·문화 민주주의’를 주제로 국내 미디어 기자들과 간담회를 열었다.




라모네 발행인은 모두 발언에서 “정치와 경제로부터 독립적인 언론이야말로 사회에 대한 진정한 비판을 가할 수 있다”면서 재벌들의 언론사 소유로 인해 다양한 여론이 반영되지 않고 비판이 약화되는 미디어 현상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다. 라모네는 “프랑스의 경우 에르상과 라가르데르 등 양대 언론사가 닷소 등 거대 군수기업에 합병돼 언론으로서의 비판성을 거의 상실했다”고 지적했다.

라모네는 “소유구조가 독특한 르몽드만이 정치와 재벌로부터 독립을 유지한 가운데 사회에 대한 진지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르몽드 독립성 유지의 바탕에 관해 “다른 언론과 달리 편집인집단 주주, 소액주주(독자), 사원주주 등 3대 그룹이 주식을 소유한 독립적 구조로 돼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라모네 발행인은 세계화의 흐름에 대해 “모든 것을 상품화하려는 움직임”이라고 규정하고 “이 흐름 안에서는 문화도 상품이 되며, 상품화된 문화는 획일화된다”고 비판했다. 그는 “상업화가 진행되면 겉으로는 다양한 미디어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 미디어는 거의 동일한 가치를 옹호한다”고 말했다. 라모네는 “문화와 미디어 부문에서 세계화는 다양한 지역의 문화와 미디어의 소멸을 초래하고, 그 결과 미국문화와 미디어만 살아남는다”고 경고했다. 이 때문에 문화다양성을 위한 투쟁과 미디어 다양성을 위한 투쟁은 일맥상통한다고 설명했다.

라모네 발행인은 문화적 다양성이 사라지면 국가와 민족이 가진 정체성과 창조성이 소멸된다고 걱정했다. 그는 이런 현상을 강자만 살아남는 ‘다위니즘’에 비유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미디어의 다양성이 사라지면 동시에 비판성도 사라지게 된다고 말했다. 문화다양성 운동에 오랜 기간 관여해 온 라모네 발행인은 작년 10월 문화다양성협약이 탄생한 것에 대해 “약소 문화나 국가가 승리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는 문화다양성협약이 발효하려면 30개국의 비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근 세계적으로 진행중인 FTA에 대해 라모네는 “미국은 FTA를 통해 세계화 반대세력을 무력화하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FTA를 통해 미국이 원하는 것은 각국의 무역장벽을 없애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은 군사적·정치적·경제적 지배에 더해 문화적 지배도 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미국은 한국에 대해 FTA를 통해 자국 상품에 대한 장벽을 없애려 한다는 얘기였다. 라모네는 한국의 스크린쿼터 문제에 관한 질문을 받고 “쿼터가 절반으로 줄었다”고 들었다면서 “한국 문화계가 타격을 입을 것이며 결국 미국 문화가 그 빈 자리를 메우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프랑스 68혁명세대 출신인 라모네는 에밀 졸라, 앙드레 지드, 사르트르 등 프랑스 앙가주망 운동을 계승하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지난 15년간 디플로마티크를 이끌어 온 라모네는 파리 7대학 커뮤니케이션학과의 교수이기도 하다. 그의 저서 ‘아메리카-미국, 그 마지막 제국’ ‘커뮤니케이션의 횡포’ 등은 국내에서도 번역·출간됐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1954년 프랑스의 유력지 르몽드의 자매지로 창간된 이래 세계 56개국에서 22개 언어로 매월 2백만부 이상 발간되고 있으며 이번에 한국판이 생기는 것이다. 디플로마티크는 인터넷판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판은 주로 오프라인 신문에 집중하겠다는 방침이다.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은 디플로마티크에서 선별한 기사 70%, 한국판 편집진이 집필한 기사 30%의 비율로 편집할 계획이다. 편집위원회는 위원장 박순성 동국대 사회과학대 북한학과 교수를 포함해 이기언 연세대 불문과 교수, 이혜정 중앙대 정외과 교수, 홍세화 한겨레신문 시민편집인 등 모두 21명으로 구성돼 있다.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은 40면으로 매월 발행되며, 초기 발행부수는 1만부다.(설원태 기자)

06. 09. 15.

P.S. 참고로, 아래는 지난 5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한국판 창간예정 소식을 전하고 있는 레이버투데이의 관련기사이다. 필자는 이대호 기자이다.

레이버투데이(06. 05. 26)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창간

‘명품’ 국제관계 전문지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Le Monde diplomatique)> 한국판이 오는 9월 공식 창간된다. 르몽드코리아(대표이사 박승흡)는 지난해 12월 프랑스 본사와 독점판권계약을 맺고 6, 7, 8월 세 번의 창간준비호를 거쳐 9월15일 한국판을 공식 창간한다고 밝혔다. 온라인사이트(www.lemonde.co.kr)도 6월중 선보일 예정이다.


▲ 이냐시오 라모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인과 박승흡 르몽드코리아 사장이 지난해 12월12일 프랑스 현지 본사에서 한국판 발간계약을 체결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프랑스의 <르몽드>가 54년 자매지로 창간한 월간지로 국제문제에 대한 깊이있는 분석과 대안 제시로 인권과 평등, 평화를 옹호하는 정론지로 위상을 굳혔다. 91년 이후에는 이냐시오 라모네 편집인이 주도하면서 미국 중심의 패권적 담론에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 대안 세계화 운동의 흐름을 확장시키는 등 권위지로 인정받았다. 현재 세계적으로 21개 언어로 총 150만부가 발행되고 있다.

22번째 언어이면서 오프라인으로는 아시아에서 처음인 한국판에는 프랑스 원판 번역기사 70%와 한국판 편집진이 기획·취재한 기사 30%가 실린다. 르몽드코리아는 “한국판은 프랑스판 편집 기조를 존중하면서 한국인들이 국제적 안목을 넓히고 언어와 인종, 국경을 넘어 세계 시민사회에 다가서도록 하는 안내자가 되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르몽드코리아는 국제관계 등 분야별 전문가 10명으로 한국판 편집위원회(위원장 박순성 동국대 교수)를 구성했으며, 그 밑에 국제팀, 경제통상팀, 사회문화팀 등 기획전문가 그룹을 뒀다. 프랑스판 기사의 정확한 전달을 위해 10명 이상의 박사급 번역팀을 구성했으며, 불어전문 편집위원들이 감수를 담당한다.

박승흡 대표이사 겸 발행인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사회연대를 확장할 뿐 아니라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평화를 위해 구슬땀을 흘리는 매체를 만들겠다”며 “정책결정자, 기업인, 시민사회 등 지성인과 세계적 안목을 가지려는 일반인이라면 누구나 곁에 두고 싶어 하는 벗이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한국판 창간 작업에 바쁜 최방식 편집장을 전화로 만났다. 최 편집장은 “서방 통신사 기사를 받아쓰는 ‘우물 안 개구리식’ 보도관행을 깨고, 이들이 무시해 온 또 다른 세계의 구석구석을 다 들여다볼 수 있는 매체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최 편집장은 <시민의 신문> 편집국장과 미주특파원을 역임했다.

- 기사의 30%를 직접 생산하는데 동북아의 이슈를 본사와 역할을 분담하는 것인가.
“국제정치와 외교에서 동북아는 관심지역 중의 하나다. 그러나 유럽의 다른 언론은 물론 국제관계 전문지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도 동북아와 관련해서는 기사의 양도 적고 전문성도 떨어진다. 따라서 한국판은 한반도 문제와 함께 동북아 관련 전문기사를 생산할 것이다. 이 기사가 좋으면 프랑스판에 실려 세계적으로 보급된다.”

- 지금 우리 사회에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발행이 필요한 이유는.
“우선 한국사회가 밖을 보는 시선이 아주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비교적 늦게 민주화가 되고, 국제적 관문을 넘나든 것도 늦었다. 국제사회를 보는 눈을 키워야 한다. 다음으로 국제사회를 보는 눈이 비뚤어져 있다는 것이다. 미국을 통해서 각종 정보가 들어오고 그것을 통해 세계를 본다. 편향이다. 국가마다 다른 시각이 있다. 이것을 우리사회에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다.

- 다른 매체 국제뉴스와 차별성은.
“기존 언론, 특히 일간지들은 AP 등 서방 4대 통신사의 국제기사를 받아쓴다. 그러면 그들의 시각을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북반구의 선진자본주의는 다루지만 그외 다수 나라들의 이슈는 중요해도 소외된다. 다뤄도 자신들의 시각에서 다룬다. 이런 관행을 깨고 세계 구석구석을 들여다본다는 것이 차별성이다.”

- 한국판 발행의 어려움은 무엇인가.
“우선 번역이다. 프랑스어가 형용사, 부사가 다양하고, 특히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표현 스타일이 직설적이지 않고 한바퀴 돌린다. 이런 표현들을 한국 독자들에게 쉽고 간결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번역과 감수과정에 고통이 따를 것이다. 또 국내판 기사를 만드는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명성을 유지해야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씨름을 하고 있다.”

- 국내판 기사는 어떻게 만드나. 상근기자가 있나.
“상근기자 체제는 아니다. 전문적인 프리랜서 기자나 국제관계에 밝은 전문가, 대학교수, 연구원 등 필자 풀을 만들고 있다. 해당분야의 이슈가 결정되면 국내외 네트워크를 통해 적임자를 선정해서 기사를 쓸 것이다.”

- 쉬운 글이 아닐 텐데 아무나 읽을 수 있는 수준인가.
“각 분야의 학자나 연구원, 정책생산자, 언론인 또는 대학원생들이 주요 독자층이 되지 않을까 싶다. 말 그대로의 국제관계뿐만 아니라 교육, 환경, 정치, 문화 등 국제적인 이슈가 없는 분야가 없으므로 모든 분야가 한국판에 담긴다. 그리고 여기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읽을 수 있게 만들 것이다.”

- 월간지인데 어떤 판형으로 만드나.
“흔히 우리나라 일간지가 취하는 대판과 타블로이드판의 중간 크기인 베를리너 판형을 택했다. 휴대와 읽기가 쉬워 유렵에서는 <르몽드>나 <가디언> 등이 이 판형이다. 국내에서는 처음 시도하는 판형이기도 하다. 매달 15일 50페이지 분량으로 발행할 예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난주 기사이긴 한데, 저명한 역사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렉의 서거 소식을 전하는 교수신문의 기사를 옮겨온다. 국내엔 <지나간 미래>(문학동네, 1998)이 번역/소개돼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가치를 '뒤늦게' 알게 된 건 몇달 전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 2004)를 읽으면서였다. 단토는 이렇게 적어놓았다.

 

 

 

 

"독일의 위대한 사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렉은 <지나간 미래>라고 하는 놀라운 제목의 책을 썼는데, 여기에서 그는 과거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현재를 살아갈 때 참조했던 미래가 과거의 중요한 일부가 된다고 주장한다."(200쪽) 나는 부랴부랴 국역본과 함께 '역사적 시간의 의미론에 대하여'란 부제를 갖고 있는 영역본을 구한 적이 있다. 기사를 보니까 국내학계에서도 곧 추모학회가 개최된다고 하는데, 이 참에 그의 주저들이 더 소개되었으면 싶다.

교수신문(06. 09. 09) 라인하르트 코젤렉(1923~2006)의 타계에 부쳐

개념사 이론의 창안자인 라이하르트 코젤렉의 올 2월 타계 소식이 국내에 뒤늦게 알려졌다. 그로부터 배우거나 영향을 받은 국내 학자들은 꽤 있지만 미처 소식을 접하진 못했다. 한림대에서 개념사 사전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박근갑 교수가 코젤렉이 남긴 학문적 업적을 짚어 보았다. 국내에서는 서양사학회가 뒤늦게나마 오는 9월 23일 추모발표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 편집자주

올해 2월 3일 세계 역사학계는 한 거장을 잃었다. 한국에서 그의 이름은 조금 낯설지 모르지만, 저명한 문화학자 헤이든 화이트의 말대로 그는 지난 세기에 역사학을 빛낸 ‘가장 탁월한 이론가들 가운데 한 인물’이다. 그는 독일 역사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이다.

뢰비트, 하이데거 등 사숙
오늘날 독일 인문학의 최대 성과로 손꼽히는 개념사 사전 ‘역사적 기본개념’을 처음부터 이끌고 마무리하면서 이름을 드날린 만큼이나 그의 학문생애도 이채롭다. 그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뢰비트와 가다머로부터 역사철학과 해석학을 배웠으며 하이데거를 사숙했다. 이런 점에서 그가 랑케와 마이네케의 대를 잇는 역사주의 역사학의 한 가운데에 섰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세기를 넘어 풍미했던 ‘주류사학’의 그늘 속에 편안히 머물지 않았다. 1967년에 그의 이름을 유럽 학계에 널리 알린 교수자격 시험논문 ‘개혁과 혁명 사이의 프로이센’은 전통 역사학의 경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사회사 영역을 탐사한 저술이었다. 이어서 그는 곧 신설된 빌레펠트대의 역사학과 창설에 참여하고 여기에 장차 ‘빌레펠트 학파’로 알려질 ‘젊은’ 사회사가들을 불러 모았다. ‘역사적 사회과학’의 기치 아래 고전적 역사주의와 대결했던 이들이 오늘날 독일 역사학계의 ‘新정통’ 헤게모니를 이룬다.

그렇지만 그는 이들과 같은 길을 걷지 않았다. 그는 무려 25년에 걸쳐서 1백여 명이 넘는 학자들과 더불어 개념사 사전을 편찬하고 수많은 학술지의 편집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어떠한 학파도 만들지 않았다. 최근에 이르러 ‘언어적 선회’ 기류 속에서 그의 개념사 이론을 푸코나 데리다의 포스트모더니즘에 겹치려는 경향이 있었으나, 그는 그러한 문화주의와도 명백한 선을 그었다.

그렇지만 그는 어느 평자들의 말대로 “홀로 서면서도 여러 경계에 걸친 인물”이었으며, “위대하고도 성공적인 아웃사이더”이기도 했다. 왜 그를 뒤늦게나마, 그리고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도 추도해야만 하는가. 널리 알려진 대로 그는 현대적 개념사 이론을 창안했으며 이를 기념비적인 ‘역사적 기본개념’으로 체현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공적은 여기에만 있지 않다. 그의 이론과 실천연구는 ‘18세기 철학자’라는 별칭에 걸맞게 여러 학문영역을 넘나들고 있다. 이 짧은 글이 어떻게 그의 모든 지적 세계를 일별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우리 학계에도 절실하게 요청되지만 아직도 처녀지로 남아있는 개념사 연구의 지평에서 그를 잠깐 다시 만나보자.

코젤렉의 기본명제는 개념이란 사회적, 정치적 변화의 지표이면서 동시에 그 요소가 된다는 점에 자리하고 있다. 구체적인 시대상황에 담긴 지속, 변화, 미래성의 계기들을 개념 의미를 통하여 추적함으로써 사회상의 변화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언제부터 어떠한 개념들이 역사적 저류의 지표와 요소가 되었는가, 라는 질문이 개념사 연구의 핵심과제이다. 옛 언어들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고 신조어들이 등장하면서 ‘의미론적 투쟁’이 전개되는 위기상황이 그러한 시점에 해당한다. ‘근대’라고 명명되는 시기가 곧 그것이다. 이때부터 개념정립을 둘러싼 갈등이 사회적·정치적인 파괴력을 보인 것이다. 유럽 역사에서 보면 프랑스 혁명 이후에 이 투쟁은 첨예화되었다는 설명이다.

1백여명 학자 이끌며 개념사 사전 펴내
코젤렉은 이런 근대 운동개념의 동학을 추적하기 위해 ‘경험공간’(Erfahrungsraum)과 ‘기대지평’(Erwartungshorizont)이라는 새로운 인식범주를 창안했다. 그의 설명은 대강 이러하다. 경험은 사건들이 인간의 의식 속에 섭취되고 기억될 수 있는 현재적 과거이다. 기대 또한 현재 속에서 이루어지며, 현재화된 미래로서 경험되지 않은 것을 지향한다. 경험은 그 속에서 이전 시대의 많은 층위들이 이전과 이후 없이 동시에 드러나기 때문에 공간적이다. 이와는 달리 기대는 지평으로 열려있다.

그것은 아직은 볼 수 없는 새로운 경험공간을 나중에 열어주는 선을 의미한다. ‘근대’에 이르면 경험과 기대 사이의 차이가 점점 커진다. 다시 말해서, 기대들이 그때까지의 경험들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이때가 ‘새 시대’로 파악된다. 이때부터 개념들이 점점 추상화되어 지나간 기억을 불러오기보다는 다가올 미래를 미리 상기시키는 이데올로기로 고양되는 과정에서, 경험은 공간에 갇히고 기대는 지평으로 향한다. ‘공화주의’(Republikanismus)를 하나의 예로 보자.

객관과 주관 넘어선 경계에 홀로서기
칸트는 처음으로 여러 정체들 중의 하나였던 ‘공화제’(Republik)를 그의 ‘실천이성’에서 도출하여 인류사회의 지속적인 목적으로 형상화하면서, 거기로 가는 과정을 새롭게 ‘공화주의’로 지칭했다. 이 용어는 이후로 ‘진보’라는 추상적 기대를 정치적 행동공간에서 수행하는 ‘운동개념’이 되었다. 이로써 하나의 상태를 가리켰던 예전의 ‘공화국’이 ‘주의’라는 어미를 통해 목적으로 전이되었던 것이다. 이 개념은 다가오는 역사적 운동을 이론적으로 선취하면서 실천적인 영향을 끼쳤다. 전승된 모든 통치형식들의 경험공간과 아직은 멀리 보이는 정치체제의 기대지평 사이에서 벌어진 시간적 차이가 개념화되었던 것이다. ‘근대’의 정치적, 사회적 개념들이 그렇게 역사적 운동의 조종간이 되었다.

코젤렉은 이렇듯 객관주의와 주관주의, 구조와 문화, 그리고 사실과 언어 사이의 해묵은 역사연구 경계선에서 홀로 서기를 자처하였다. 그의 이론적 성찰이 우리 학계에 어떠한 본을 보여줄 수 있을까. 우선 개항 전후의 정치적 혼란기를 개념의미의 경험과 기대가 서로 어긋나는 위기상황으로 새롭게 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농민전쟁, 정변, 개혁, 쇄국 등의 사건들이 혼재된 이 시기야말로 역사적 시간체험과 미래의 도전을 함축하고 있는 수많은 텍스트들이 분출하던 시대이다. 따라서 민족사의 견지로선 ‘궁핍한 시대’가 풍성한 개념의 시기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개념사 사전 편찬도 시급한 시대적 과제라 할 것이다.(박근갑 / 한림대, 독일사)

06. 09. 14.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노아 2006-09-14 00:33   좋아요 0 | URL
지금 역사용어 바로쓰기라는 책 보고 있는데 거기서 라인하르트 코젤렉의 이름이 잠깐 언급되었어요. 앗! 해버렸답니다.

로쟈 2006-09-15 00:34   좋아요 0 | URL
예, 역사학의 거장이라고 하는데, 국내에서는 좀 덜 알려진 감이 있습니다...
 

지난 화요일자 한국일보에 게재된 과학기사를 옮겨온다. 스크랩해놓은 것인데, 이 정도 기사는 많은 분들이 함께 읽어도 좋을 듯하다. 필자는 발군의 과학기사들을 쓰면서 현재 매주 화요일 '과학을 읽다'를 연재하고 있는(그래서 화요일엔 한국일보를 본다) 김희원 기자이다. 며칠전 복잡계 과학에 관한 책들을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소개한 바 있는데, 거기에 '링크'에 관한 책 몇 권을 보태기로 한다. '링크' 혹은 '넥서스'의 교훈?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한국일보(06. 09. 05) 내가 쓴 1달러 3년후엔 어디에...

-미국의 인터넷 사이트 중에는 '고무도장'이 표시된 달러 지폐를 입수했을 때 달러의 일련번호와 입수 위치를 등록하는 사이트가 있다. 1달러 지폐에 그려진 대통령(조지 워싱턴)의 이름을 딴 '조지는 어디에?(Where's George?)'(www.wheresgeorge.com)라는 이 사이트는 고무도장이 찍힌 지폐의 이동경로를 파악하는 순전히 재미를 위한 게임 사이트다. 누구든 지폐에 고무도장을 찍어 돌릴 수 있고, 등록한 지폐가 돌고 돌아 많은 사람들이 기록할수록 점수를 많이 받아 순위에 이름을 올린다.

-이 단순한 게임사이트가 사람의 이동경로를 파악하는 복잡계(Complex Systems) 연구의 데이터 생산지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복잡계 연구는 복잡다기한 변수들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정치 사회 경제현상 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의 이동은 분자와 같다?
-복잡계 물리를 연구하는 일군의 물리학자들은 1998년 이후 '조지는 어디에?'에 축적된 100만여건의 지폐이동 데이터를 분석, 수학적 모델을 수립했다. 독일 막스 플랑크연구소의 D 브록만, T 지젤 박사와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의 후프나겔 교수는 이를 지난해 1월 네이처에 발표했다. 최근 이들은 이 모델을 전염병 사스(SARS)의 확산에 적용, 해석했다.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 김승환(포스텍 물리학과) 교수는 "전지구적 차원에서 인간(지폐)의 이동을 실제 데이터를 분석해 수학적으로 모델화한 최초의 연구사례"라고 말했다.

-물리학자가 왜, 어떻게 인간의 여행법칙에 관심을 갖는 것일까. 사람의 움직임을 분자의 운동과 같이 여기는 것은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사람의 움직임을 분자들이 무작위적으로 서로 부딪히면서 균일하게 확산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아서, 대형 운동장을 설계할 때 군중의 입·퇴장을 유체의 흐름으로 계산하곤 했다. 교통의 흐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최근 복잡계 연구가 발달하면서 인간의 여행은 비로소 본격적으로 방정식을 찾아냈다. 복잡계란 변수가 너무 많아 언뜻 무질서하게 보이는 현상이다. 날씨예보, 주가의 등락, 단백질의 3차원 구조, 생태계 분석, 유전자의 조합 등이 복잡계의 문제들이다. 이 문제들을 솜씨 있게 다루는 이들이 바로 통계물리학에 뿌리를 둔 연구자들이다. 고체가 액체가 되고 액체가 기체가 될 때 무수한 분자들이 무작위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가를 연구하고 계산해내던 통계물리학자들은 최근 경제물리학자, 구조단백체학자 등으로 놀라운 변신을 하고 있다.

●게임에서 시작된 복잡계 연구성과
-브록만 박사 등의 연구는 분자 확산을 설명하는 아인슈타인 확산법칙과 비교해 사뭇 다른 점들을 시사한다. 아인슈타인 확산은 분자들이 두 배 멀리 퍼질수록 시간이 제곱만큼 소요된다고 요약된다(상대성이론으로 유명한 아인슈타인은 스위스 통계청에서 일하던 1905년 분자의 확산 이론은 발표했다). 즉 분자들이 1m 퍼지는데 10초가 걸렸다면 10m 퍼지는데는 16분, 100m 퍼지는데는 2시간 46분이 걸린다.



-브록만 박사 등은 '조지는 어디에?' 사이트에 수록된 100만여건의 지폐 이동 데이터를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가, 얼마나 멀리 움직였는가 라는 시간, 거리 척도에 따라 입력해 분포곡선을 그려 방정식을 구했다. 그 결과 공간적으로 지폐의 이동은 짧은 거리를 자주 움직이지만 간혹 먼 거리를 도약하는 멱급수(冪級數)함수로 설명되며, 속도에 대해선 초확산(super-diffusive spread)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아냈다(*무슨 말인가?). 아인슈타인 확산과는 비교할 수 없이 신속하고 효율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도 가까운 동네에서의 움직임이 아닌 전세계적 범위에서 그렇다. 이는 당연히 현대인이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해 세계여행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의 초확산 분포는 전염병 확산을 예측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2004년 전세계가 사스의 공포에 휩싸였던 것은 질병 자체가 치명적이어서가 아니라(사스의 사망률은 독감이나 폐렴보다 낮다) 전염 범위와 속도가 유례없이 넓고 빨랐기 때문이었다. 김승환 교수는 "게임 사이트가 방대한 로 데이터(기초 자료)를 제공했고, 현대인이 초확산법칙을 따라 여행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점에서 현대에서나 가능한 흥미로운 과학"이라고 말했다.(김희원 기자)

06. 09. 07.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일레스 2006-09-08 15:56   좋아요 0 | URL
김희원 기자의 기사는 저도 잘 보고 있습니다. 집에서 한국일보를 보거든요. 여기서 만나니까 반갑군요. :)

로쟈 2006-09-08 20:05   좋아요 0 | URL
저는 황우석 사태 때 논리적인 분석기사로 처음 이름을 기억해두게 됐습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검색할 때 가장 자주 애용하는 것은 구글이다. 그리고 구글에서 인명을 검색할 때면 어지간한 경우에 인터넷백과사전 '위키피디아'의 내용이 가장 먼저, 혹은 적어도 최초 화면에 뜨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래저래 참조하는 일이 잦은데, 그와 관련한 기사를 읽게 되어 옮겨놓는다. 한국일보의 최근 기사는 중국 당국의 인터넷 검열에 대한 위키피디아와 구글의 각기 다른 대응방식을 지적하면서 언어권별로 게재항목의 양적, 질적 차이를 비교하고 있고(물론 한국어 자료는 대단히 빈약하다), 몇달 전 한겨레의 인터뷰기사는 현재 한국에서의 위키피디아의 현황에 대해서 알려준다. 한번쯤 읽어볼 만하다.

한국일보(06. 08. 31) 위키피디아

-역시 지미 웨일즈(40)였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http://en.wikipedia.org)의 창시자 웨일즈는 최근 중국어판 위키피디아 회의에서 "위키는 중국 본토에서 이용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지만 원활한 접근을 위해 독립성을 희생시키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구글과 같은 상업성 포털들이 돈벌이에 눈이 멀어 중국 정부의 정치적 검열을 받아들인 것과 대조된다. 전 세계 네티즌들의 헌신과 열정을 먹고 자라는 위키피디아의 이념을 다시 한번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갈채와 함께 경의를 보낸다.

■ 2001년 미국에서 시작된 위키피디아는 네티즌들이 항목을 고르고 집필ㆍ편집하는 온라인 백과사전이다. 지금은 200여 개 언어로 돼 있다. 위키 때문에 브리타니카 백과사전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영어 위키에 오른 항목만 130만 개. 브리타니카는 고작 7만5,000 항목 정도다. 네티즌들이 너나 없이 올린다니까 내용은 엉터리일 것이다? 천만의 말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위키에 들어가서 어느 항목이라도 읽어 보면 그 분야 최고의 전문가가 아니면 절대 만들 수 없는 내용이라는 걸 알 수 있다.

■ 세계적 과학전문지'네이처'가 작년에 위키와 브리타니카의 과학 관련 항목 50여 개를 골라 신뢰성을 비교한 결과 대등한 것으로 나타났다. 업데이트 기능은 아예 게임이 안 된다. 작년 4월 교황 베네딕토 16세 기사를 쓰면서 위키피디아를 참고했는데 즉위식 시작 직후 그 내용이 바로 추가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오늘 다시 베네딕토 16세를 검색하면서 예상은 했지만 또 한번 놀랐다. 영어 위키 22쪽, 독일어와 프랑스어 위키 각 11쪽, 일본어 위키 3쪽, 한국어 위키 3분의 1쪽. 지식기반사회라는 21세기에 각 나라(언어권)의 지식 수준이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 양적 차이보다 더 큰 것은 질의 수준이다. 영어 위키의 경우 단순 서술 외에 관련 내용 외부 링크가 아주 치밀하게 돼 있다. 클릭 한번으로 교황이 처음 발표한 회칙 전문을 라틴어 영어 등 10개 언어로 바로 볼 수 있다. 이런 수준이 가능하려면 우선 그만큼 아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또 그런 사람들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지식을 공유하려는 헌신이 있어야 한다. 한국어 위키(위키백과ㆍhttp://ko.wikipedia.org)는 이제 겨우 게재 항목이 2만 2,000여 개다. 우리는 영원히 게임이 안 될 것 같은 자괴감이 든다.(이광일 논설위원) 

한겨레(06. 05. 31) ‘위키백과’는 공산주의? 중립시각 ‘열린사전’이죠

-한국어명 ‘위키백과’인 위키피디아는 누리꾼에게 이제 생소하지 않다. 정보의 양에서 브리태니카 백과사전과 마이크로소프트의 엔카르타를 능가할 정도다. 350만 건 이상의 글이 수록돼 있으며, 방문자 조사 사이트 알렉사닷컴에 따르면 시엔엔닷컴을 앞지르고 16위에 올라있다. 그 성장 비결은 바로 누리꾼의 자유로운 참여에 있다.



-지난달 31일 낮 12시 현재 한국판 위키피디아에는 2만4146 건의 정보가 담겨있다. 영어권에 비해 정보량은 부족하지만 성장하고 있다. 한국판 위키피디아의 관리자 정경훈(20·서울대 컴퓨터공학과)씨를 만났다.

-위키피디아는 무엇인가?

=열린 백과사전으로, 배타적인 저작권을 갖지 않고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 및 출판할 수 있다. 위키백과는 리차드 스톨만이 설립한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Free Software Foundation)에서 만든 라이센스(GNU Free Document License) 형식으로 배포된다. 즉 상업적인 이용도 가능하지만 구입자나 인터넷 사용자나 별 차별 없이 이용할 수 있다.

-세계적인 현황은?

=위키피디아는 언어별로 제공돼 현재 214개 언어로 서비스된다. 한국어 위키백과 역시 한국어만 알고 있으면 국적에 상관없이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다.

-다른 백과사전과의 차별성은?

=우선 공짜다. 돈이 없어도 정보의 공유 및 생산이 가능하다. 이론상으로는 컴퓨터가 없는 사람까지도 이용이 가능하다. 또 편집자가 없거나 전부일 수 있다. 이 때문에 중립적인 시각을 유지하도록 관리자가 노력한다. 예를 들어 독도 문제의 경우 한국 입장과 함께 일본 입장도 병기한다. 읽는 이들도 하여금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정확성에서 떨어질 수 있을텐데.

=한국판의 경우 3000여명이 계정을 갖고 있다. 이들 중 전문가도 있고, 비전문가도 있다. 하지만 의견을 공유하고 고쳐나가기 때문에 점점 정확성을 갖춰나갈 것이다. 또 다양성을 갖추고 있다. 기존의 기계적인 분류보다는 참여자의 관심사를 반영하기 때문에 색다른 항목도 나온다. 생일에 죽은 사람, 펠레의 저주 등 기존 백과사전에 찾아볼 수 없는 정보도 제공한다.

-관리자의 역할은?

=저작권 위반 여부나 낙서, 광고 등을 감시하는 등에 그친다.

-비판이나 해프닝도 있을 것 같은데.

=영어판에서도 있었는데 한국판에서도 ‘위키피디아는 공산주의다’ ‘위키피디아는 주체다’ 등의 악성 글이 남기도 한다. 또 유명인을 사칭해 약력이나 팬사이트를 소개하는 경우도 있었다.

-영어권에 비해서 정보량이 부족한데.

=국내 포털사이트처럼 저작권 개념이 없다. 일단 포털사이트에 자신의 정보를 제공하면 저작권은 사이트에 넘어가고 평점 등의 대가를 받는다. 저작권이 없는 대신 대가도 없어 아직 활동이 부족한 것 같다. 하지만 자유로운 참여가 가능하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활성화를 위한 방법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비용은 어떻게 충당하나?

=영어권의 경우 서버 관리를 위해 미국 플로리다주에 기술자 3명을 고용하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자원봉사자다. 한국어판 역시 야후가 기증한 서버를 사용해 따로 비용이 들어갈 일이 없다.

-참여방법은 어떻나?

=영어판(www.wikipedia.org)이나 한국판(ko.wikipedia.org)을 방문해 계정을 만들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앞으로 전망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지식을 자발적으로 모아 우리 모두의 지식으로 공유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위키백과가 하는 일이다. 참여자가 많을수록 인터넷 상에서 이뤄지는 정보 불균형 등이 바로잡힐 것으로 생각된다.



위키피디아(Wikipedia)는?
200여개 이상의 언어로 서비스되고 있으며, 모두가 함께 만들며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다국어판 인터넷 백과사전이다. 또 배타적인 저작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용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2001년 1월15일에 시작된 위키백과는 비영리 단체인 위키미디어 재단에서 운영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창립자는?
1995년 미국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워드 커닝햄이 네티즌들끼리 협동해서 웹 페이지를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를 낸 것이 위키피디아의 시발점이 됐다. 이후 지미 웨일스 등이 비영리재단인 위키피디아재단을 설립해 온라인 서버를 관리하고 있다. 상근 편집진은 없으며, 1200명의 자원자들로 구성된 편집자들이 네티즌들이 올린 자료들의 정확성, 저자권 침해 여부 등을 검증한다. 웨일스는 올해 타임지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06. 08. 31.


댓글(2) 먼댓글(1)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위키시대의 지식인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05 09:59 
    한겨레의 오피니언 란인 훅(hook)에 가끔 들러보는데, 인터넷 액티비즘에 관한 눈에 띄는 칼럼이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http://hook.hani.co.kr/blog/archives/9879). 필자는 이진순 교수다. 다른 기사를 보니 "1985년 김민석(민주당 최고위원)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과 함께 총여학생회장으로 활동했던 그는 현재 미 올드도미니언대에서 시민저널리즘과 뉴미디어, 국제커뮤니케이션 등을 가르치고 있다." 
 
 
딸기 2006-09-04 16:52   좋아요 0 | URL
흐아앗 이거 기사 쓸까 하고 있었는데... ㅠ.ㅠ

로쟈 2006-09-04 21:21   좋아요 0 | URL
한발 늦으셨나 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