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야 몽규야 - 청춘 시의 전설
윤동주 지음 / 라이프하우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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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쓰릴 미"와 "윤동주, 달을 쏘다"를 같은 날 보았다. 쓰릴 미는 너무 졸면서 봐서 제대로 감동을 느끼기 어려웠고, 정신 차리고 저녁에 본 윤동주, 달을 쏘다는 폭풍 같은 감동에 휩싸이며 감상했다. 

쓰릴미의 진가는 올해 다시 확인하면서 개운치 못했던 감상을 떨쳐버렸고, 윤동주, 달을 쏘다는 다시 만난 기쁨으로 재회했다. 4월... 이었던 것 같다.

윤동주는 모두가 아는 이름이고, 송몽규가 궁금해진 건 영화 '동주' 덕분이었다.


영화 속 몽규는 좀 더 거친 느낌이 강했는데, 뮤지컬 속 몽규는 그보다 개구진 소년의 느낌이 강했다. 사진으로 확인 가능한 송몽규의 얼굴은 뮤지컬 배우 김도빈이 더 닮았다!

이 책은 동갑내기 사촌형제인 윤동주와 송몽규의 짧은 생애를 시간 순으로 나열하면서 때마다 발표했던 윤동주의 시들을 중간중간 삽입해 놓았다.

워낙에 윤동주의 그림자가 크고 더 익숙하기 때문에 함께 서술되지만 송몽규가 크게 빛나지는 않은 게 다소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고 보니 영화 동주에서 동주를 도와준 일본 여인이 이준익 감독의 '박열'에서 후미코 역을 맡은 최희서구나.


올해의 뮤지컬은 박영수, 온주완의 더블 캐스팅이었는데, 뭐 노래야 압도적으로 박영수가 더 좋았다. 사실 연기도 박영수가 더 좋았다. 서울 예술단 나와서 이 작품 주연 못 맡나 싶었는데 다행히 상관 없이 주연으로 나와 주었다. 뒤이어 신과 함께도~


이 책의 제목이 연관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뮤지컬에서 감옥에 갇힌 동주와 몽규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야 한다!라고 외치는 장면이 있다. 지금도 내 귀에 감기는데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더 짠하게 느껴졌나보다. 살아야 한다고 외쳤지만 해방을 목전에 두고 둘 다 생을 달리 했다. 여전히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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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7-08-10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릴 미> 저 회전문 관객 이예요
그 팽팽한 긴장감. 반전. 심리. 피아노 연주..

뮤지컬 보고 범죄심리학 책도 여러 권 읽게되더라구요..

마노아 2017-08-11 01:33   좋아요 0 | URL
회전문을 아니 할 수 없는 작품이지요. 전체 페어를 다 못 돌아서 너무 아쉬웠어요.ㅜ.ㅜ
제 친구는 이번 시즌에 45회 정도 봤더라구요. 저는 9번 봤어요.
90분이라는 짧은 시간을 압축적으로 몰아치며 사로잡는데... 아... 그리워집니다.
 
헤르만 헤세 시집 문예 세계 시 선집
헤르만 헤세 지음, 송영택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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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책을 본 지 한참 지났는데 사진만 찍어두고 방치해 두었음을 깨달은 리뷰이다. 

2년 전에 헤르만 헤세전을 다녀왔는데 지금은 꽤 일반화된 디지털 전시였다.

헤세의 그림들을 영상으로 펼쳐 보여주었는데 제법 예쁘장한 그림들이 몽롱하게 펼쳐진 게 보기 좋았다.



전반적으로 색감이 마음에 들었다. 이런 원단으로 치마 만들면 예쁘겠단 생각을 했다.

특히 여름에 어울리는 색감들이다. 저런 그림의 모델이 된 곳들은 공기도 맑았을 것 같다.



애석하게도 시들은 그렇게 기억에 남지 않았다. 웬만하면 밑줄긋기라도 했을 텐데 없네... 하다가 폴더를 뒤져 보니 밑줄긋기 써놓은 문서 발견! 아아 나는 이렇게까지 해놓고 왜 리뷰는 쓰지 못했던가..;;;;;





37쪽

밤에

 

습하고 미지근한 바람이 흐른다.

밤새들이 푸덕거리며

갈대를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먼 마을에서 어부의 노래가.

 

있지도 아니한 시대부터

서러운 전설이

가시지 않는 괴로움의 탄식이 비롯되었다.

밤늦게 이를 듣는 사람은 서러우리라.

 

얼마든지 탄식하고 나달거려라.

곳곳마다 세상은 괴로움에 무겁다.

우리들은 조용히 새소리나 듣자

마음에서 흘러오는 노랫소리도.

 

38

취소

 

너를 사랑한다고는 하지 않았다.

손을 잡아 달라고

용서해 달라고만 했을 뿐.

 

나와 비슷하다고

나처럼 젊고 선량하다고, 너를 그렇게 여겼다.

너를 사랑한다고는 하지 않았다.

 

63

 

깊은 밤거리에서

 

어둠을 헤치고, 젖은 포석 위에

가로등이 비치고 있다.

이 늦은 시간에도 잠들지 않은 것은

가난과 악덕뿐이다.

 

잠들지 않은 너희들에게 나는 인사를 보낸다.

가난과 고뇌 속에 누워 있는 너희들에게

어런더런 웃고 있는 너희들에게

모두 나의 형제인 너희들에게.

 

108

둘 다 같다

 

젊은 날에는 하루같이

쾌락을 쫓아다녔다.

그 후에는 몹시 우울해서

괴로움과 쓰라림에 잠겨 있었다.

 

지금 나에겐 쾌락과 쓰라림이

형제가 되어 배어 있다.

기쁘게 하든 슬프게 하든

둘은 하나가 되어 있다.

 

하느님이 나를 지옥으로든

태양의 하늘로든 인도한다면

나에게는 둘 다 같은 곳이다,

하느님의 손을 느낄 수만 있다면.

 

131

만발한 꽃

 

복숭아나무에 꽃이 만발했지만

하나하나가 다 열매가 되지는 않는다.

푸른 하늘과 흐르는 구름 속에서

꽃은 장밋빛 거품처럼 밝게 반짝인다.

 

하루에도 백 번이나

꽃처럼 많은 생각이 피어난다-

피는 대로 두어라. 되는 대로 되라지.

수익은 묻지 마라.

 

놀이도, 순결도,

꽃이 만발하는 일도 있어야 한다.

그렇잖으면, 세상이 살기에 너무 좁아지고

사는 데에 재미가 없어질 것이다.

 

138

이 세상의 어떠한 책도

너에게 행복을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살며시 너를

네 자신 속으로 돌아가게 한다.

 

네가 필요한 모든 것은 네 자신 속에 있다,

해와 별과 달이.

네가 찾던 빛은

네 자신 속에 있기 때문에.

 

오랜 세월을 네가

갖가지 책에서 찾던 지혜가

책장 하나하나에서 지금 빛을 띤다,

이제는 지혜가 네 것이기 때문에.

 

162

눈 속의 나그네

 

한밤이 골짜기에서 한 시를 울린다.

벌거숭이 추운 달이 하늘을 헤매고 있다.

 

눈과 달빛에 싸인 길을

그림자와 함께 나는 걸어간다.

 

봄풀이 파릇한 길을 많이 걸었다.

따갑게 내리쬐는 여름 해를 많이 보았다.

 

걸음은 피로에 지치고 머리칼은 하얗다.

아무도 이전의 나를 몰라본다.

 

야윈 나의 그림자가 피로하여 머물러 선다.

그러나 기어코 이 길을 다 가고 말 것이다.

 

홍성한 세계로 나를 끌고 다니던 꿈이

나에게서 손을 뗀다. 이제야 나는 안다, 꿈이 나를 속인 것을.

 

골짜기에서 한밤이 한 시를 울린다.

, 저 높이에서 달이 아주 쌀쌀하게 웃는다.

 

눈이 아주 차갑게 이마와 가슴을 안아 준다.

내가 생각던 것보다도 죽음은 상냥하다.

 

173

교훈

 

사랑하는 아들아,

사람들의 말에는

많든 적든

결국은 조금씩 거짓말이 섞여 있다.

비교해서 말하자면

기저귀에 싸였을 때와

후에 무덤 속에 있을 때

우리는 가장 정직한 것이다.

그럴 때에 우리는 조상 옆에 누워

드디어 현명해지고

서늘한 청명에 싸여

백골로 진리를 깨우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거짓말을 하며

다시 살아나고 싶어 한다.

 

203

봄의 말씀

 

아이들은 모두 봄이 소곤거리는 것을 알아듣는다.

살아라, 자라나라, 피어나라, 희망하라, 사랑하라.

기뻐하라, 그리고 새 움을 트라.

몸을 내던지고 삶을 겁내지 마라.

늙은이들은 모두 봄이 소곤거리는 것을 알아듣는다.

늙은이여, 땅속에 묻혀라.

씩씩한 애들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몸을 내던지고, 죽음을 겁내지 마라.

 

210

회상

 

비탈에는 히드가 피어 있다.

금작화는 갈색 빗자루 모양 꿈쩍 않는다.

보송보송한 5월의 숲이 얼마나 푸르던가를

오늘도 누가 알고 있을까.

 

지빠귀의 노래와 뻐꾸기의 울음이 어떻게 울리던가를

오늘도 누가 알고 있을까.

그렇게 황홀하게 울리던 것이

이제는 잊히고 노래 속에 사라졌다.

 

숲 속의 여름 저녁 향연을

산 위에 높이 걸린 둥근 달을

누가 적어 두고, 기억하고 있을까.

이제는 모두가 흩어지고 없다.

 

머지않아 너를, 나를

아는 사람도 이야기할 사람도 없어질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여기에서 살며

우리를 애석하게 여기지도 않으리라.

 

우리는, 저녁 별과

처음 끼는 안개를 기다리기로 하자.

우리는 하느님의 위대한 정원에서

기꺼이 피었다가 시드는 것이다.

 

234

(해설. 송영택)

그의 그림에는 사람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인물화를 그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풍경화에도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 모두가 수채화이며, 구름과 산과 물과 수목 등이 단순화된 선과 색채로 표현되어 있다. 투명한 순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그림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의 시작詩作 행위로서 그려진 것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마지막으로 헤르만 헤세전 갔을 때 찍은 사진 하나 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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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쇳물 쓰지 마라
제페토 지음 / 수오서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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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염에 청년이 사그라졌다.

그 쇳물은 쓰지 마라.


자동차를 만들지 말 것이며

가로등도 만들지 말 것이며

철근도 만들지 말 것이며

바늘도 만들지 마라.


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


그 쇳물 쓰지 말고

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

살았을 적 얼굴 흙으로 빚고

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

정성으로 다듬어

정문 앞에 세워주게.


가끔 엄마 찾아와

내 새끼 얼굴 한번 만져보자, 하게.


<그 쇳물 쓰지 마라> - 25쪽


이 책의 표제작이다. 스물 아홉 청년이 섭씨 1600도가 넘는 쇳물 용광로에 빠져 숨졌다. 당연히 시신은 찾지 못했다. 2010년의 일이다.


어찌 됐건

생을 마친 종이를 부활의 초입까지 나르는 일은

늙은이들의 몫이 되었다


언덕을 오르던 정오

말보로 상자는 납작해진 주둥이로

브라질 숲에서 왔노라 자랑을 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작에 고향을 잊은 노인은

의심스러운 저울에 무거운 시선을 보태느라

눈이 시렸다

영락없는 푼돈이지만

당분간 목숨은 그럭저럭 붙은 셈이다


장차 자신의 장례비를 외투에 넣고 돌아선 그는

곤궁한 처지를 푸념하는 대신

그깟 외로움 하나 견디지 못한

아들놈의 죽음을 나무랐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어째서 사람은 부활하지 않는가, 하고


<부활>  - 27쪽


밀린 집세를 남겨놓은 채 생을 마감한 송파 세모녀도 함께 떠올랐다. 여름은 더 더워지고 겨울은 더 추워지는데 곤궁한 살림의 가난한 이들은 한숨이 더 깊어진다. 


높은 양반 말씀하시기를

나더러 산업역군이란다

나의 일터는 경제의 최전선이고

전선에서는 다들 죽는 거란다

일 년에 이천 명씩

다치기도 부지기수


그런 거란다

원래 그런 거라는데

억울하다

석연치 않다


나는 역군 아닌데

종현이 아버지인데

지수 씨 남편인데

썩 괜찮은 아들인데


나는 사람인데


<나는>  - 33쪽

아들 같아서 그랬다고.. 공관 사병을 종 부리듯 했던 별 네개 장군 부부가 생각난다. 누가 당신 아들 취급을 원했다고. 걸핏하면 자식 같아서 그랬다고 핑계를 대나. 그건 성추행범들이 주로 하는 변명들이지.


고통에 절규하는 새끼 곰을 죽이고 자살한 어미 곰


최근 영국의 '데일리메일'은 중국의 한 농가에서 산 채로 쓸개즙을 채취 당했던 곰 모녀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보도했다. 어미 곰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새끼 곰을 죽이고, 벽에 스스로 머리를 들이받다 죽었다.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문제가 된 중국 북서부의 한 농장에서는 곰의 쓸개즙을 채취하려고 살아 있는 곰의 쓸개에 호수를 꽂아 수시로 쓸개즙을 뽑고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날에는 농장 일꾼이 한 새끼 곰을 쇠사슬로 묶어놓은 채 쓸개즙을 뽑아내고 있었다. 이날 새끼 곰의 절규에, 어미 곰은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곰은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해 철창을 부수고 탈출했고 새끼 곰에게 뛰어갔다. 한 목격자에 따르면 달려온 어미 곰은 새끼 곰의 쇠사슬을 끊으려 했다. 하지만 쇠사슬을 끊을 수 없었던 어미 곰은 새끼 곰을 끌어안고, 질식시켜 죽였다. 자신의 새끼 곰을 죽인 뒤, 이 어미 곰은 스스로 벽으로 돌진했고 머리를 부딪쳐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일보 2011.09.02  - 48쪽


축생문으로 들어가 산 채로 쓸개즙을 죽을 때까지 착취 당하는 곰으로 다시 태어나야 마땅한 사람들. 어미 곰의 절규가 절절히 들린다.


고향 떠나온 지 반백 년

시멘트 독에 잘린 발가락

휘청이는 몸으로

사랑도 힘에 부치어

자식 하나 남김 없음이 서러운데

본전 생각에 박제라니,

하지 말아라

그만하면 됐다

아프게 가죽 벗겨

목마르게 말리지 말아라

먼지 앉고 곰팡이 필

구경거리로 세워놓고

애도니 넋이니

그거 말장난이다

사라 바트만처럼

사무치게 그리웠을 

아프리카

흙으로


<고리롱 >  - 51쪽

서울동물원 인기 스타 고릴라가 숨졌다. 사람 수명 80~90세에 해당하는 49년을 살았으나 노환으로 새끼 고릴라 하나 없이 숨을 거뒀다. 의료팀은 숨진 고리롱에게서 인공수정을 검토하고 있다고. 게다가 표피와 골격은 박제 처리를 해서 일반에 공개한다고... 그래서 동물사랑에 대한 경각심도 일깨워줄 계획이라고... 뚫린 입이라고 말도 잘하는구나. 욕심이 배를 뚫고 나오는구나. 참으로 독하다. 


우리 반 십육 번

박정호가 죽었네

영어학원 건너려다

뺑소니를 당했네


레커차 달려오고

경찰차 달려오고

사이렌 요란한데

그 애의 텅 빈 눈은

먼 하늘만 보았네


박정호가 죽었어요

훌쩍대는 전화에

울 엄마는 그 아이

몇 등이냐 물었네


<학원 가는 길>  - 87쪽


한참 전 일이다. 조카가 백점 맞았다고 얼굴이 잔뜩 상기된 책 집까지 뛰어왔다. 잘했다고 축하부터 해줬으면 좋겠는데 언니는 제일 먼저 이렇게 물었다. 너네 반에 백점 몇 명이야? 


친구 동생이 죽었다는 말에 엄마는 아들이냐 딸이냐고 먼저 물었다. 그 다음엔 교회 다니냐고 물었다.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내린다는 말보다

온다는 말이 좋다


너도 눈처럼 

마냥 오기만 하여라


<눈이 오네>  - 131쪽

서럽고 서러운 글들 속에서 모처럼 방긋 웃게 해주는 싯귀였다. 눈처럼 너도 마냥 오라니... 


봄날에는 떠나지 말자

어린 순경 코 찌르지 않게

동짓날 새벽에 떠나자

더웠던 양

홑이불 제쳐놓고

창문 활짝 열어놓고

보일러에는 열흘 치 기름을 남겨놓자

노인데, 돈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 듯하게


머리맡 일기장에는

살 만큼 살았다는 양

복에 겨운 푸념을,

제일 뒷장에는

복지사 미안해하지 않게

천상병의 귀천을

그러나 쓰다 말자

꼭 떠나려던 것은 아닌 듯하게


그런대로 세상 살 만했던 양

새끼들 욕먹지 않게


<벼랑에서>  -133쪽

강풀 작가의 '그대를 사랑합니다'가 떠오른다. 치매 걸린 아내 병수발 하다가 함께 먼길 떠나기로 결심한 노인이 자식들 욕먹지 않게 밀봉했던 테이프 미리 치워달라고 부탁했던 것... 씁쓸하다.


62세 치매 아내 10년째 웃음으로 돌보는 박종팔 씨


(전략) "처음엔 잘못한 학생 혼내듯 했는데, 하루는 아내가 '당신 말을 이해했으면 내가 왜 그렇게 했겠느냐. 모르니까 다른 걸 따지'라고 하면서 서럽게 울더라고... 마음이 철렁했지. 그다음부턴 칭찬만 했어."

박씨는 아내를 보살피면서 터득한 '치매 환자와 함께 잘 사는 법'의 핵심이 바로 '칭찬'이라고 했다. 박씨는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를수록 나는 지치고 아내는 위축됐다"며 "'잘한다', '예쁘다' 같은 칭찬을 많이 해주면서 서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웃는 일도 많아졌다"고 했다. 


조선일보 2013.03.10  -140쪽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세상도 맴맴 돌아

제자리로 와버렸다

진화한 것은 욕망뿐


십칠 년 매미 같은 아이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매미, 너도 알 필요가 있다


아직도 뭍을 밟지 못한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양보해다오

사람이 울 차례다


<매미에게>  - 189쪽


댓글 시인 제페토를 내가 알게 된 게 이 시 때문이다. 양보해다오 사람이 울 차례다....ㅠ.ㅠ

선플달기 운동 요란하게 하던 때가 있었는데, 인터넷 댓글을 예술로 승화한 사람도 나왔다.

그의 시가 마음에 닿는 것은 그 속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착취당하고 서러움 가득한 사람과 생명들...

양보해다오. 사람이 울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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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창비시선 219
박성우 지음 / 창비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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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거미가 허공을 짚고 내려온다 
걸으면 걷는 대로 길이 된다 
허나 헛발질 다음에야 길을 열어주는 
공중의 길, 아슬아슬하게 늘려간다
 
한 사내가 가느다란 줄을 타고 내려간 뒤 
그 사내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 올라와야 했다 
목격자에 의하면 사내는 
거미줄에 걸린 끼니처럼 옥탑 밑에 떠 있었다 
곤충의 마지막 날갯짓이 그물에 걸려 멈춰 있듯 
사내의 맨 나중 생(生) 이 공중에 늘어져 있었다
 
그 사내의 눈은 양조장 사택을 겨누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당겨질 기세였다 
유서의 첫 문장을 차지했던 주인공은 
사흘만에 유령거미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조장 뜰에 남편을 묻겠다던 그 사내의 아내는 
일주일이 넘어서야 장례를 치렀고 
어디론가 떠났다 하는데 소문만 무성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그 사내의 집을 거미집이라 불렀다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다    -8쪽



귀퉁이

 

 세 시간 동안 꺼져 있었다 나는 자명종 시계보다 10

분 늦게 일어났다 현기증이 결근을 유혹했지만 허겁지

겁 봉제공장에 출근도장을 찍었다 미싱들이 여성용 내

의를 쉴새없이 만들어냈다 나는 포장대 위로 올라온 내

의를 여덟 시간 동안 기계처럼 상자에 집어넣은 후 그

것들을 창고로 운반했다 트럭이 오면 제품을 실어보냈

다 일과는 늘 그렇게 끝났다

 

 그날도 성냥개비처럼 버스를 빠져나와 빈방으로 퇴근

했다 비어 있어야 할 방안엔 현기증이 들아와 앉아 있

었다 신경 쓸 힘조차 없었다 윗도리를 막 벗으려 했는

데 뭔가 내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망치질은 멈출 줄

몰랐다 나는 모난 곳이 없었으므로 정을 맞아야 할 이유

가 없다고 우겨댔지만 현기증은 막무가내였다 넌 사각

형의 귀퉁이야! 진작에 떨어져나갔어야 했어!  망치질

은 멈출 줄 몰랐다 내 몸의 많은 부분이 패어져나갔다

난 쓰러진 채 중얼거렸다 그래 난 떨어져나가야 했을

귀퉁이에 불과해

 

 그제야 현기증이 창을 열고 나갔다 아침이 걸어오고

있었다 - 30쪽



거미. 2 

한달 만의 식사다 
나방은 즙이 많아서 좋다 
위턱과 아래턱을 놀린 지 오래여서 
입이 좀 뻐근하다 집주인이 돌아온다 
저 남자는 시를 쓴다 
한달 전, 저남자가 이사를 왔을 때 
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인은 게을러서 
화장실 귀퉁이에 세들어 사는 내 집을 
빗자루로 걷어낼 일이 없기 때문이다 
간만의 식사 탓일까 
소화가 잘 되지 않아 자꾸 신트림이 난다 
밥 먹는 내 모습을 처음 보았겠지, 남자가 
칫솔을 문 채 한참이나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날개라도 한쪽 떼어줄까 
남자도 나처럼 오랫동안 굶었는지 깡말라간다 
생각하면 저 남자가 있어 외롭지 않았다 
이 곳에 들어 올 때마다 지금처럼 
내가 잘 있는지 먹이는 언제쯤이나 잡게 될런지 
쳐다보곤 하던 따뜻한 눈길, 알기나 할까? 
남자가 아픈 배를 누르며 변기에 앉아 있을 때나 
양치질을 하다가 욱욱거릴 때면 나는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는 것조차 잊은 채 
내가 대신 뒤틀려주고 싶었다 
남자가 알몸을 씻은 날은 
주린 아랫입에 손가락을 물려 또 다른 허기를 달랬다 
남자가 밖으로 나간다 
다시, 지루한 기다림이 시작된것이다    - 32쪽






 

  

출항하기 직전에야 섬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풍경을 오리기에 바빴다 찰칵찰칵,

앞다투어 가위질을 하는 통에

바다는 금새 너덜거리는 신문지조각으로 변했다

저기요 잠깐만 비켜줘요

뱃머리에 서 있던 내 신체의 일부도

오려져나가고 있을 터였다 나는

오려져나간 오른팔로 담배를 피웠다

뻥 뚫린 해가 연기를 빨아마신 뒤

힘없이 떨어져 젖었다

겹겹이 잘려지던 바다로 배가

천천히 빨려들어갔다 공기방울처럼 떠오르는 섬

그 섬에 닿으려면 얼마나 더 가야 할까

멀미에 시달리던 나는 몸을 움츠렸다

속이 울렁거려 눈조차 뜰 수 없을 때

배는 이미 그 섬에 도착해 있었다

혼몽했던 나는 맨 마지막으로 배에서 내렸다

짙은 안개가 섬 전체를 감싸고 있어서

앞서 내려 걸어가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뱃고동 소리가 들렸을 뿐

섬을 떠나고 있을 배조차 보이지 않았다

희미하게 깔려 있는 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울렁거리던 속이 가라앉을 즈음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순간 나는

어느 곳으로도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젠장, 바다를 밟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파도에 휩쓸려 안개섬을 빠져나왔을 때

탁구공처럼 떠오르는 해가 막 뭍으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안개섬과 앞서 내린 사람들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동안

허우적거렸을 팔이 심하게 결렸다    - 38쪽


참새 / 박성우 

 

 1

 

봉제공장 안에서 그 참새는 바빴다

미싱기술이 없었으므로

옆구리합봉, 소매부착, 어깨끈달이 언니들에게

원단을 날라야 했고 실을 날라야 했다

그 참새는 문이 열려 있어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아니 나가지 못했다

 

화장실에 박혀 눈이 퉁퉁 부어 나오기도 하던

스무살도 안된 그 참새는

안마시술소가요주점여인숙모텔룸싸롱간판들에

한번쯤 앉아볼까

생각한 적이 있었단다

 

왜나고 묻지 않고도 알 수 있는 답이 있다

봉급날이 제일 싫어요

 

2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저 참새는 미싱사다

어깨끈달이,

사람들은 저 통통한 참새를 이렇게 부른다

고급 속옷의 어깨끈 봉합은 저 여자의 몫이다

 

어깨끈달이는 생리를 하지 않는다

그의 나이 스물셋

어깨끈달이는 토요일 오후가 없다

 

해태 브라보콘 흘러내리지 않았지만

어깨끈달이의 손가락이 하얗다

바늘에 찔려 반창고가 감진 검지

휴식시간엔 홀어머니 전화번홀 눌러야 한다    - 64쪽

 



생솔

 

 

눈은 언제나 치매밭골이 먼저 녹았다
구슬치기에 소질이 없던 나는
춘란이 유난히 많은 그곳에 올라 겨울방학을 보냈다
빨치산이 살았다 하여 아이들은
내 뒤를 따르지 않았지만
꼭, 엄마 치맛자락처럼 생긴 그곳은 혼자 가도 좋았다

 

아버지는 빚 때문에
그해 겨울도 돌아오지 못했다
우리집엔 여느 집처럼 외양간 옆에
장작더미가 없었고 낯익은 얼굴들이
아버지의 소식을 묻곤 했다
정지에서 시래깃국 끓이던 셋째 누나는 가끔
생솔가지를 아궁이에 넣고 움츠려 있었다
한번은 연기가 맵다고 투덜거리는
내 등을 한참 동안이나 안고 있었는데
불에 던져진 생솔보다 더 끈적이는 송진을 흘렸다

 

성냥개비가 되어가는 줄 모르는 어머니는
베틀에 앉아 삼베 품을 팔고 늦은 밤에 돌아오셨다
그런 이유로 우리들은
남의 집 반찬에 익숙해져 갔다
국민교육헌장 외우기에 좋았던 치매밭골,
그곳에선 솔방울 반 포대 줍는 동안
외우지 못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갈퀴나무를 하기 위해 그곳에 올랐다
갈퀴나무 흩어지지 않게 생솔가지 꺾어
칡넝쿨로 묶어오곤 했다

 

서울로 돈벌러 갔던 큰누나 내려오던 날
성적표를 본 누나는 부지깽일 들었지만 나는
따순 물 끓이며 생솔에 묶여진 갈퀴나무
아끼지 않았다, 밥 안치던
큰누나는 눈 속에 생솔을 태우고 있었다   -66쪽




누에 
  
 
   누에가 안방을 가져갔다
 
   뒹굴며 숙제하기에 좋았던 마루는
   뽕잎을 썰거나 다듬는 장소로 적당했고
   우리는 광을 고친 방에서
   둥근 잠을 자면 둥근 꿈을 꾸었다
   누에가 가져다줄
   모나미 연필 한 다스와 새 가방이
   누나 입가에서도 웃고 있었다
   잠꼬대를 하기에도 턱없이 비좁은 방이었지만
   갓 따온 뽕잎에 엎드린 누에처럼
   여덟 식구 모두 싱싱한 잠을 잤다
 
   막내의 그림일기장에 그려진 통통한 누에는
   겨우 연필로 뭉개진 뽕잎을 먹어야 했다
   청소 시간에 주운 초록색 크레파스를 내밀던 날,
   막내는 그것을 받자마자 그림일기를 썼다
   큰누나는 훔친 것이 아니냐며 다그치기도 했지만
   내 뒤통수를 측은해했다
 
   누에는 실을 토하기도 전에 안방을 비워주었다
   누엣구더기 때문이라 말했다 아버지는
   누에섶에 불을 질러
   우리들의 꿈도 함께 태워주셨다
 
   그날 밤, 만취한 아버지는 누운 채로
   명주실을 밤새 토해냈다
   둥글고 거대한 고치 하나가
   다음날 오후까지 이불에 덮여 있었다
 
   막내는 더 이상
   그림일기장에 누에를 그려넣지 않았다    - 74쪽





강천사에서



흙길이다

한적한 진입로를 따라

속살 훤히 보여주는 피라미떼,

폴짝폴짝 뛰어 햇살 감아 올라간다

물살이 거칠어서

이 길 선택했을 저 무리들은

잘 닦인 길은 거슬러오르지 않는다

길은 넓을수록 따분하다

어느 절이었을까

아스팔트로 문 열던 그 절은

흉흉한 안팎의 소문들이 귀를 먹게 했다.

극락교 지나온  사람들은

대웅전에서 합장을 한다

간절한 소원이 누구에게나 한가지쯤 있는 법

허나, 일찌감치 세상에 단풍든 나는

빌어야 할 것들이 지나치게 많아 그냥 지나친다

내 육신 외의 것들에 대하여

손을 모아본 적이 있었던가

운동화가 더이상 커지지 않기 시작한 뒤에도

긴박한 속보조차

숭늉처럼 쉽게 소화시키지 않았던가

쉰내 나는 몸, 씻어보자는 속셈인가

약수 한대접 거뜬히 마신다

길다란 쇠줄로 연결된 구름다리를 건넌다

한발만 움직여도 흔들린다

벼랑도 마음을 닮은 걸까

올려다볼 때보다

내려다볼 때 더 위태롭다    - 82쪽




 
 두꺼비
 
   아버지는 두 마리의 두꺼비를 키우셨다
 
   해가 말끔하게 떨어진 후에야 퇴근하셨던 아버지는 두꺼비부터 씻겨주고 늦은 식사를 했다 동물 애호가도 아닌 아버지가 녀석에게만 관심을 갖는 것 같아 나는 녀석을 시샘했었다 한번은 아버지가 녀석을 껴안고 주무시는 모습을 보았는데 기회는 이때다 싶어 살짝 만져보았다 그런데 녀석이 독을 뿜어대는 통에 내 양 눈이 한동안 충혈 되어야 했다 아버지, 저는 두꺼비가 싫어요
 
   아버지는 이윽고 식구들에게 두꺼비를 보여주는 것조차 꺼리셨다 칠순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날이 새기 전에 막일판으로 나가셨는데 그때마다 잠들어 있던 녀석을 깨워 자전거 손잡이에 올려놓고 페달을 밟았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아버지는 지난 겨울, 두꺼비집을 지으셨다 두꺼비와 아버지는 그 집에서 긴 겨울잠에 들어갔다 봄이 지났으나 잔디만 깨어났다
 
   내 아버지 양 손엔 우툴두툴한 두꺼비가 살았었다   -92쪽



시인의 말


쓸쓸하고 지루한 날들이었지만

고만고만하게 견딜 만했다.

애벌레의 상태로 첫 시집을 묶는다.

이제 내 손을 떠나는 시들이므로

나비가 되든 나방이 되든 어쩔 수 없으리.


흙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와

여전히 나에게 몸으로 책을 읽히시는 어머니께

이 시집을 바친다.


2002년 8월

석상마을에서 박성우   - 124쪽



어디선가 시 한구절이 가슴에 탁 걸려서 보관함에 담아두고, 그리고 시집을 한 권 사면, 내가 마음에 들었던 그 시 하나만 좋을 때도 더러 있는데, 이 시는 시집 전체가 다 좋았다. 어쩌면 그것은 시인의 정서적 울림이 내 가슴을 동하게 해서 그런 것일 텐데, 가난한 시인의 노래에 내 걸음이 멈춰섰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하는 사람이라고 배부르면 안 되라는 법 당연히 없고, 그들도 넉넉한 환경에서 아름다운 작품 활동하면 더 좋은 것일 텐데, 어쩐지 배부른 시인은 시인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건 역시 선입견일 테지. 


날이 너무 더워서 낮동안에 집에 있지 못하고 어디론가 뛰쳐나가게 된다. 만만한 게 극장이지만 그밖에 전시회나 공연도 두루 관람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외출하면 커피 일잔하러 카페에 들르기 마련. 두꺼운 책은 가방이 무거워서 가볍게 시집 한권씩 들고 외출하고 있는 요즘이다. 가방은 가볍지만 그 책의 깊이는 가볍지 않다. 음악도 꺼버리고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기분이 꽤 좋다. 내일도 덥다는데... 내일은 또 어떤 시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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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7-08-07 0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에 공감하며 맘 아파했는데...

마노아 2017-08-07 14:32   좋아요 0 | URL
제가 이 책을 보관함에 담아둔 게 순오기님 때문인 것 같아요.
사놓고도 한참 뒤에야 시들을 만났네요. 아련하게 마음이 아파오는 시들이었어요.

순오기 2017-08-08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군요~^^
이후에 나온 박성우 시집도 줄줄이 다 샀는데, 거미가 제일 깊이 박힌 듯...

마노아 2017-08-08 15:45   좋아요 0 | URL
첫 시집이 가장 좋은가 보네요. 역시 ‘처음‘이 늘 인상 깊기는 해요.^^
 
녹턴 문학과지성 시인선 483
김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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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살


나는 너의 그늘을 베고 잠들었던 모양이다.

깨보니 너는 저만큼 가고.

나는 지는 햇살 속에 벌거숭이로 눈을 뜬다.

몸에게 죽음을 연습시키는 이런 시간이 좋아.

아름다운 짐승들은 떠날 때 스스로 곡기를 끊지.


너의 그림자를 베고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는 지구의 시간.

해 지자 비가 내린다.

바라는 것이 없어 더없이 가벼운 비.

잠시 겹쳐진 우리는

잠시의 기억으로도 퍽 괜찮다.


별의 운명은 흐르는 것인데

흐르던 것 중에 별 아닌 것들이 더러 별이 되기도 하는

이런 시간이 좋아.

운명을 사랑하여 여기까지 온 별들과

별 아닌 것들이 함께 젖는다.


있잖이, 몸이 사라지려 하니

내가 너를 오래도록 껴안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날이야.

알게 될 날이야.

축복해.


43쪽


봄의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다


믿기지 않았다. 사고 소식이 들려온 그 아침만 해도 구조될 줄 알았다. 어디 먼 망망한 대양도 아니고 여기느니 코앞의 우리 바다.

어리고 푸른 봄들이 눈앞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동안

생명을 보듬을 진심도 능력도 없는 자들이

사방에서 자동인형처럼 말한다.

가만히 있으라, 시키는 대로 해라, 지시를 기다려라.


가만히 기다린 봄이 얼어붙은 시신으로 올라오고 있다.

욕되고 부끄럽다, 이 참담한 땅의 어른이라는 것이.

만족을 모르는 자본과 가식에 찌든 권력,

가슴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오만과 무능이 참혹하다.

미안하다, 반성 없이 미쳐가는 얼음 나라,

너희가 못 쉬는 숨을 여기서 쉰다.

너희가 못 먹는 밥을 여기서 먹는다.


환멸과 분노 사이에서 울음이 터지다가

길 잃은 울음을 그러모아 다시 생각한다.

기억하겠다, 너희가 못 피운 꽃을.

잊지 않겠다, 이 욕됨과 슬픔을.

환멸에 기울어 무능한 땅을 냉담하기엔

이 땅에서 살아남은 어른들의 죄가 너무 크다.

너희에게 갚아야 할 숙제가 너무 많다.


마지막까지 너희는 이 땅의 어른들을 향해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말한다.

차갑게 식은 봄을 안고 잿더미가 된 가슴으로 운다.

잠들지 마라, 부디 친구들과 손잡고 있어라.

살아 있어라, 산 자들이 숙제를 다할 때까지.


98쪽

달걀 삶는 시간


(엄마는 반숙을 좋아한다) 냄비에 물을 채우고 달걀을 넣은 후 가스 불을 켠다 말갛게 쫄깃한 흰자 속의 노른자 목숨이 되려던 우주 (우리는 먹고 먹이고 먹힌다) 물이 끊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7분 반숙의 최적 기술은 시간을 맞추는 일


물이 팔팔 끓는 순간부터 시계를 본다 1분이 지난다 놀라며 흔들리는 2분이 지난다 견디는 3분이 지난다 2분 전의 그 달걀이 아니다 다른 우주 회오리친다 4분이 지난다 1분 전의 그 세계가 아니다 엉기기 시작한다 인생처럼 5분 6분 7분이 지난다 가스불을 끈다 매 분마다 죽음ㅇ르 통과해 매 분마다 달걀은 변한다 찬물에 집어넣는다 찬물 속에서 다시 5분


자주 내 이름을 잊는 팔순 엄마의 입속에 4등분한 달걀 반숙을 넣어드린다 (기억은 먹고 먹이고 먹힌다) 엄마가 웃는다 괜찮다 어떤 순간이 오더라도 변화해가는 것일 뿐이다 달걀도 엄마도 나도 정신도 마음도 존재한다면 신 역시 그러할 것이라고 그러니 있는 힘껏 잘 변해보자고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나를 향해 엄마가 웃는다


147쪽


花飛, 먼 후일


그날이 돌아올 때마다

그 나무 아래서

꽃잎을 묻어주는 너를 본다


지상의 마지막 날까지 너는 아름다울 것이다

네가 있는 풍경이 내가 살고 싶은 몸이니까


기운을 내라 그대여

만 평도 백 평도 단 한 뼘의 대지도 소속은 같다

삶이여

먼저 쓰는 묘비를 마저 써야지


잘 놀다 갔다

완전한 연소였다


160쪽


10억 광년의 신호가 내내 떠올랐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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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je 2017-08-03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그런생각을 했어요. 예전에 가끔 시를 올려주셨던 분이 계셨는데. 오랫동안 그분 서재에 가보지 못했구나 하구요. 그랬는데 마노아님이 올려주신 글을 보았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저 10억 광년의 신호 지금 들으려구요.

마노아 2017-08-05 23:45   좋아요 0 | URL
가끔은 시가 필요한 날이 있더라구요.
이렇게 지칠 만큼 더운 날씨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에어컨 빵빵한 카페에서는 시 한구절이 최고의 사치 같기도 했어요. ^^

2017-08-05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05 2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