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7 - 순조실록 - 가문이 당파를 삼키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7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출간 속도는 균일하게 유지되었건만, 비교적 정조실록을 읽은지 오래되지 않아서 순조실록은 아주 금방 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앞서 경종/영조실록을 미용실에서 퍼머하면서 읽었는데 오늘도 그렇게 되었다. 미용실에서 뼈다귀 말고서 기다리는 동안 순조실록 한 권을 다 읽을 수 있었다. 사장님이 만화로 공부하시나봐요? 하기에 네!했는데, 웬지 좀 찝찝. 나 만화로 공부하는 것 좋아하는데도 말이다.  

1800년 6월에 정조가 승하했을 때 그의 뒤를 이은 임금은 11세의 어린 순조였다. 임금이 어리니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 수렴청정을 해야 했다. 그가 정순왕후다. 이제껏 파다한 소문 속의 정순왕후는 권력의 화신이었다. 정조를 영웅으로 드높이면 드높일수록 안티의 눈총은 모두 그녀의 몫으로 결집했다. 저자는 그 시각의 부당함을 꽤 공들여 설명했다. 어린 나이에 시집온 정순왕후는 왕실의 온갖 풍파를 다 지켜본 노장이 되어 있었다. 카리스마와 존재감을 두루 갖춘 여장부였지만 권력을 틀어쥔 권력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명분에 따른 순리를 지키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자신의 가문을 좀 더 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왕이 스무살까지 수렴청정한 예가 없던 것도 아닌데 순조가 열 다섯을 앞두고 있자 바로 권력을 내려놓는 모습은 보기 드문 귀감이었다. 그녀처럼 내려놓을 때를 미리 알았더라면 흥선대원군도 덜 비극적이었을 거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정순왕후 김씨만큼이나 입방아에 많이 오른 이 시기의 대표 인물 김조순에 대한 설명도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흔히 세도정치의 대표인물로 손 꼽히지만 뜻밖에도 그는 생전이나 죽은 뒤 모두 세간에서 평가가 좋았다. 내려지는 모든 관직을 마다했고, 국구로서 마땅히 갖는 관직 하나만 유지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처신은 그의 가치를 더 높여주기만 했다. 그러나 본인의 행실만 잘 단속했을 뿐 친족의 행패는 내버려둔 것이 문제였다. 처신을 잘했다고 해서 그가 권력욕이 없었다고도 말 못하겠다. 이 시기 세도정치의 폐단은 몇몇 인물의 도덕성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500년 묵은 왕조가 쇠락한 나머지 무너져 가는 한 과정이라고 보여진다.    

 

시대는 이미 옛날 같지 않았다. 이앙법 보급 등에 따른 농업 생산력의 발전과 화폐경제, 상품경제의 발달은 조선 사회의 근간인 신분제를 크게 바꾸어놓았다. 과거에는 소수의 지배층에 다수의 피지배층이었다면 이제는 양반이 전체 인구의 절반을 훨씬 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영농 중심의 농촌 사회는 급격히 양극화의 길로 나아갔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자영농에서 부농으로 성장한 평민들은 양반으로 신분상승 시키기 바빴다. 방법은 여러가지였다. 국가에서 파는 공명첩을 사들이거나 곡식을 바치는 납속 등의 방법으로 합법적인 양반이 되거나 몰락한 양반으로부터 족보를 사는 편법까지 동원하였다. 초기 비용이 많이 들지만 각종 면역, 면세, 혜택을 떠올린다면 남는 장사였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반대편에 더더더 바닥으로 몰락하는 백성들이 생겨버렸다. 그들이 취할 수 있는 다음 길이란 뻔한 것이다. 홍경래의 난 때 반군 세력이 이미 끝장난 것이 보인 싸움에도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마찬가지라는 인식이 자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죽하면 그런 마음가짐으로 무기를 들고 일어섰을까.  

세상은 바뀌어 갔다. 그러나 중세적 질서에 지나치게 길들여져 있었던 조선의 시스템은 달라진 세상을 바로 보지 못했다. 여전히 양반을 위한, 양반에 의한, 양반의 나라였다. 그들은 지은 죄에 비해 지나치게 가볍게 처벌받았고, 누릴 수 있는 권한은 무한했다. 오늘날 이 나라 경제를 쥐고 흔드는 부자들의 입장과 통한다고 할까. 이 시기 천주교와 동학 등 백성들이 종교와 신앙에 매달리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어려서 왕이 되어 대비의 수렴청정을 받았지만 초기의 순조는 제법 싹수가 보이는 임금이었다. 그의 뒤를 이어야 마땅했던 효명세자도 그랬다. 허나 효명세자는 명이 짧았고, 순조는 부지런했던 것과 달리 비전 제시가 부족했다. 더구나 효명세자와 사랑하는 딸들을 연이어 잃은 뒤로는 더욱 의지가 꺾였고 건강도 좋지 못했던 임금은 정사를 비변사에 맡겨놓은 채 그저 버티기만 하였다. 온 세상이 들끓고 있던 19세기에 조선은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었으니 닥쳐오는 쓰나미에 대항할 힘이 있을 리 없었다. 인간적으로는 가엾고 연민을 느끼지만 그래도 그가 임금된 자이니 책임을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부분에서는 프랑스의 루이 16세가 떠올랐다. 그처럼 비극적인 죽음은 아니었다지만.... 

그래도 조선의 훌륭한 점은 이런 부분이다. 이리 답답한 임금을 향해 영의정이 직격으로 충언을 날린다. 이런 직언을 기꺼이 바치는 신하들이 왕조의 역사 내내 있어 왔다. 경우에 따라 목이 달아나기도 했지만, 그것을 새겨 듣는 임금도 있어 왔다. 

 

오른쪽은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중에 스물 둘, 젊은 나이로 사망했을 때 순조가 직접 지은 제문이다. 아들을 잃은 아비의 끓는 정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이번 편에서는 배꼽 잡고 웃을 만큼의 탁월한 패러디는 그닥 눈에 띄지 않았다. 시대적 특수성일 수도 있고, 저자가 힘에 부쳤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몇몇 장면은 피식 웃게 했다. 벽파 김달순의 자살골이나 홍경래 듣보잡, 그리고 졸지에 인간 백정과 동격이 되어버린 가엾은 순조까지... 그나저나 28만원이 아니라 29만원 아니던가?? 무려 전 재산의 1/29인데 틀리게 표기하면 안 되지, 암....;;;;;

 마른 수건도 비틀어 짜서 물을 나오게 하는 수령들과 탐학은 웃자니 슬프다.

 

순조실록은 앞서의 실록보다 기록이 부실한 편이었다. 뒷편은 더 심하다. 조선왕조실록은 철종까지의 기록만 담고 있는데 다음 18편에서 헌종과 철종을 함께 다룰 예정이지만 기록이 부실한 탓에 고민이 큰 저자의 입장도 끄트머리에 담겨 있다. 이 시리즈가 원래 20권 예정으로 알고 있는데 실록이 편찬되지 못한 고종과 순종실록은 그냥 지나치는 것인지, 아니면 승정원일기나 일성록 등을 바탕으로 마무리를 지을지 궁금하다. 제목을 생각하면 헌종과 철종실록이 끝인데 그렇다면 완결이 한 권 남았다는 얘기가 되지 않는가. 그건 너무 섭섭하고 안타까우니, 20권 다 채웠으면 좋겠다. 저자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이양선은 출몰하고, 열강은 조선을 탐내고, 이제 곧 어마어마한 쓰나미가 몰려올 차례. 500년 묵은 늙은 왕조가 쇠락해 가는 모습은 쓸쓸하기만 하다. 그래도 끝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겠다. 애정과 관심을 갖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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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6-06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조가 뭘 했는지 별로 기억나는 게 없네요.ㅜㅜ
29만원인데 어찌 만원을 줄여서 적었는지~~~~작가는 착각햇다고 쳐도 편집자는 뭐했담!ㅜㅜ
시리즈 열심히 사들여 막내만 읽고 나는 제대로 안 봤지만, 언젠가 보고 말거야! 불끈 다짐만 수없이~~~~~~ㅋㅋ

마노아 2011-06-06 00:49   좋아요 0 | URL
이렇다 내세울만한 게 별로 없었어요. 공노비 해방이 있지만 정조가 준비하고 정순왕후가 발표했다고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렇다 내세울 게 없어서 실록의 내용도 부실하다고 적혀 있네요.
순오기님은 완결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한번에 쭉 이어서 꿰어 읽어도 좋을 것 같아요.^^

꼬마요정 2011-06-06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조 죽고 난 후부터는 조선 역사가 영 땡기지가 않네요. 그 때부터 지금까지 당췌 역사가 앞으로 나간다는 생각이 안 드니 말이죠.. 마노아님의 어린왕자를 보면서 이승환 노래 중에 젤 좋아하는 그대가 그대를..을 듣고 있어요. 가사가.. 가사가.. 울컥 하지 않는다면 심장이 없다는 것일거에요~~~~ㅡ.ㅜ

마노아 2011-06-06 01:04   좋아요 0 | URL
정조는 정말 매력적인 임금인데 그 바람에 그 뒤쪽은 상대적으로 좀 약하긴 해요.
게다가 이 시기는 연민과 한숨을 많이 느끼게 해서 더 그렇고요.
제 서재 이름이 '그대가, 그대를'이잖습니까. 가사 쩔어요. 아, 울컥....!

루쉰P 2011-06-06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의 역사는 정말 읽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에요. 뭐랄까?? 하다 말다 하는 느낌...그래도 미용실에서 뼈다귀를 마시면서 독파하시다니 대단하신 듯...ㅋㅋㅋ

마노아님은 조선 매니아셔요.

마노아 2011-06-06 23:18   좋아요 0 | URL
하다 말다 하는 느낌이란 어떤 걸까요?
제가 조선 매니아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점점 더 공부하는 재미가 생기고 있다고 느껴져요. 즐겁게 공부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이런 책이 그래서 더 고마울 따름이에요.^^

소나무집 2011-06-13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도서관에서 정조까지 빌려 읽었는데 순조 나온 김에 전권을 다 살까 망설이는 중이에요.
울 얘들도 이 시리즈를 보고 나서는 다른 역사책은 시시해서 못 읽겠대요.

마노아 2011-06-13 16:11   좋아요 0 | URL
아이들도 같이 보기 좋은 책이니까 기왕이면 구입하셔요~
두루두루 빛날 책이라고 분명히 확신해요.^^
 
왕의 투쟁 - 조선의 왕, 그 고독한 정치투쟁의 권력자
함규진 지음 / 페이퍼로드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법학으로 대학 공부를 시작했던 저자는 다시 대학을 바꾸어 행정학과로 입학했고, 대학원은 정외과로 갔다. 그랬던 인물이 한국정치사상에 중점을 두기 시작해서 결국 박사학위까지 받고 말았다. 그의 관심은 끊임없이 정치였고, 그 정치를 해냈던 사람들에 머물렀다. 그리하여 이 책에는 조선의 유명한 네 군주를 꼭 집어서 비교 분석해 주고 있다. 등장 인물은 세종, 연산군, 광해군, 정조다. 

꽤 극적인 인물들을 고른 셈이다. 앞 뒤로는 조선 시대 내내 훌륭한 군주로 평가받은 인물이고, 가운데 두 임금은 조선 시대 내내 임금 취급을 받지 못한 이들이다. 광해군이야 현대에 와서 재조명 받고 있지만 연산군은 여전히 폭군의 대명사로 불린다. 이렇게 서로 다른 행적을 갖고 또 다른 대접을 받아온 인물들이지만 그들은 모두 극적인 왕의 투쟁을 거친 인물들이었다. 우리가 사극에서 지켜보는 것 이상으로 복잡하고, 또 때로는 모순적이기까지 했던 투쟁사를 보여주었다. 그 모습을 책은 1부와 2부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는데, 1부에서는 그들이 거쳤던 지난한 정치 투쟁의 드라마를 보여주고 있다.  

각각의 주인공들은 한 문장으로 그 치세를 설명하고 시작한다. 세종은 이렇다.  

세종, 권력의 위임과 프로젝트형 업무관리로 대업을 완성하다 

다른 세 임금과 달리 버릴 것이 없는 찬사다. 뒤에 가면 여기에 살을 붙인 문장도 나온다. 

세종은 조선의 정점이었다. 세종 다음에 다시는 세종이 없었다.
이 책에 소개한 다른 세 사람의 왕을 포함하여, 세종 이후 23명의 왕 중
어느 누구도 제4대 왕 세종을 능가하지 못했다.
동의한다. 학창시절 가장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로 세종을 꼽는 것은 촌스러운 일이라며, 조광조 정도는 내세워야 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를 들었다. 초등학생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멋진 임금으로 꼽는 임금 세종이기에 지나치게 평이한 답변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세종의 위대함을 깎아내리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실로 역사의 거인이었다. 물론 그가 꿈꾸고 펼쳐 나간 세계는 유교적 이상주의 국가였지만 그가 살았던 시간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600년 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 시대 사람들이 꿈꾸는 가장 아름다운 세상을 세종은 그려보았고, 그 설계도에 따라 조선을 만들어갔다. 그는 조선의 네 번째 임금이었지만 조선이라는 왕조의 기틀을 또렷이 세운 첫 인물이었다.  

세종이 유독 마음에 드는 것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였다. 그는 일을 맡기는 CEO 스타일이었다. 해당 업무에 최적의 인사를 고르고, 그가 능력을 맘껏 펼쳐보일 수 있게끔 무대를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맡긴 결과 조선은 문화 대국으로 성장했다. 과학과 역법, 음악과 역사의 서술까지 전방위에서 눈부신 업적을 쌓아냈다. 신분제 사회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인사들이 자신들의 힘을 맘껏 펼칠 수 있게 기회를 주는 군주를 어찌 존경을 갖고 대하지 않을 수 있을까. 비록 국방 분야에서 다소 미진함 감이 있었고, 종친들이 횡포를 부림에도 너무 감싸주기만 한 것은 무척 아쉬운 부분이지만, 등극하면서 그가 안았던 상처를 떠올린다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책에는 세종의 큰 형님이자 원래 왕이 되었어야 했던 양녕대군의 '난행사'를 표로 정리해 주고 있다. 재위 기간 내내 그가 친 사고와 그의 아들이 친 사고를 보니 아찔하다. 이런 인물이 임금이 되었더라면 조선은 어떠했을지... 태종이 참으로 현명한 결단을 내려주어서 고맙고 또 고마울 뿐이다.  



세종은 조선이라는 크고 아늑한 집을 지었다. 그 집이 지나치게 편안해서 그의 후대 왕들은 그 집을 능가하는 더 좋고 큰 집을 짓고자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을 세종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는 노릇. 후손들에게는 '한글'이라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을 남긴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의 헌신과 그의 업적은 능히 '대왕'이라는 칭호를 아낌없이 바칠 만하다.  

두번째 인물 연산군에 대해서 저자는 이렇게 평가했다. 

연산군, 절대권력을 행사하다 측근에게마저 버림받다 

연산군의 실패에 대해서는 파트너십이 참 아쉽다. 왕과 신하가 모두 상대를 제압하려 들 것이 아니라 서로 의지하고 보좌하고 더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애를 썼어야 했는데 그들은 파워 게임을 했고, 상대를 압제하다가 판을 뒤엎어버렸다. 언론을 맡은 대간들은 꼬투리 잡기 식으로 왕을 물고 늘어졌고, 거기에 대처하는 연산군의 화법은 미숙하고 유치했다.  

 

때는 평화로웠고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신하들이 짜증이 났겠지만, 그래도 임금이니까 거기서 포기하면 안 되었다. 저자는 얘기한다. 그가 실패한 것은 그가 한 일보다 하지 않은 일에 있다고...... 세간의 추측과 달리 무오사화 이후 갑자사회 이전까지의 연산군 시대는 왕과 신하의 사이가 조화롭게 유지된 좋은 때였다. 왕은 참석해야 할 공식 행사에 대부분 참석했고, 핵심 의사결정은 자신이 하고 나머지는 적당히 위임했다. 한편 신하들은 꼭 필요한 비판은 하되, 전처럼 왕의 사생활까지 시시콜콜 따지고 들지 않았다. 왕권과 신권이 나름의 균형을 맞추었던 시기인 것이다. 하지만 연산군은 갑자사화를 기점으로 폭주하기 시작했고, 그가 해 나가야 할 개혁의 과제 대신 향락과 독재를 선택했다. 그의 그릇이 거기까지였다고 생각하지만 무척 아쉬운 일이다.  

책에 따라 중종반정의 씨앗을 연산군이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겁탈한 일에서 시작되었다고 하거나, 혹은 그녀와의 나이 차이가 지나치게 큰 것을 들어서 다른 이유가 있다고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 책에서는 그보다는 무인집단의 위기감으로 파악했다. 공포 정치로 왕권을 높이고 신하들을 제압해 오던 연산군의 다음 먹이가 무인이라고 파악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제껏 보았던 설명 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었다.  

저자는 종종 '세계적 기준'으로 볼 때를 언급하는데, 중국이나 기타 전제 군주가 있던 나라들의 역사와 비교하면 연산군의 폭정은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었다. 물론,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겠지만. 어찌 됐건 그가 왕노릇 했던 곳은 조선이었고, 그를 인정할 수 없는 유자들로 가득한 곳도 그곳 조선이었으니 그 역시 그의 운이 거기까지였다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세번째 주자는 광해군이다. 저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광해군, 안전을 최우선하다 나락에 떨어지다 

그랬다. 임진왜란의 후유증 속에서 즉위한 그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있었고 해야할 일도 무척 많았다. 세자로 있었던 16년의 시간은 고난길이었고 가시밭길이었다. 선조와 명나라 사이에서 마음 고생을 하고, 영창대군의 출생으로 인해 또 위축되었던 그의 가여운 영혼을 생각하면 전쟁의 도가니 속에서 육신이 고달펐던 때가 차라리 덜 힘들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할 정도다. 그 역시 연산군처럼 파트너 복이 없었다. 그의 지지 세력 대북은 타협할 줄도 몰랐고 상대를 품어 안지도 못했다. 인진왜란 당시 누구보다 앞장서서 의병을 일으켰던 그 기개가 정치판에서는 쓸모있는 리더십으로 구현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을 적절하게 배치하지 못하고 끌려다닌 광해군 역시 리더십이 아쉬운 것은 물론이다.  

인조반정 당시 내세운 광해군의 폐위 명분은 세가지였다. 폐모살제와 지나친 토목공사, 그리고 재조지은을 배신한 것 등등은 연산군과 마찬가지로 세계적 기준으로 보면 지나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것의 본질이 파워게임이고 정권 쟁취라고 할지언정 광해군을 희생자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는 임금이었다. 불안하고 힘들고 답답해도, 그것을 궁궐을 계속 짓거나 연이은 옥사로 힘을 쏟을 것이 아니라 극복해낼 방법을 찾아야 했다. 십대 후반에 전장을 누비며 백성의 지독한 처지를 온몸으로 느끼고 확인하던 그때의 초심으로 돌아갔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너무 멀리 갔다. 

15년을 재위하고 폐위된 광해군은 그후 19년을 더 살다가 죽는다. 아들 내외와 부인까지 앞세우고도 2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남은 것이다. 넓은 궁에서 불안하게 지내던 그 시절보다, 오히려 갇혀 지내면서 더 심신의 안정을 찾았던 것일까? 그의 인생 여정이 참으로 안쓰럽고 아이러니하다.  

네번째 인물은 요즘 여러 매체에서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정조다. 저자는 이렇게 한 줄로 요약했다. 

정조, 개혁군주는 어떻게 전제군주가 되어 개혁에 실패하나 

그를 개혁군주라고 부르는 것에 인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천재적 두뇌를 자랑하던 그는 여러 분야에 걸쳐 다양한 개혁 시도를 했고, 성과를 보인 부분도 꽤 있다. 하지만 그 개혁은 완성되지 못했다. 그 자신이 모든 걸 통제하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는 완벽주의는 세종처럼 맡기는 정치를 해내지 못했고, 따라서 협력도 얻어내지 못했다. 그는 지나친 당쟁의 폐해를 어려서부터 목격한 인물이었다. 심지어 아버지까지 잃었던 그는 신하들이 똘똘 뭉치기 전에 흩어놓는 정책을 펼쳐냈다. 그리하여 등장한 회전문 인사로 아침 벼슬과 저녁 벼슬이 달라질 만큼 많은 인사들이 계속 물갈이가 됐다. 연산군처럼 형벌을 남용하지 않았지만 유배를 자주 보냈고, 벼슬을 계속 갈아치우면서 신하들의 자율권을 많이 침해했다. 무엇보다도 그가 계획하고 꿈꾸는 조선이라는 나라는 성리학적 세계관에 따른 유교국가이기 때문에 시대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한 손으로는 개혁을 진행하고, 또 다른 한 손으로는 그 개혁의 문을 닫는 이중성을 보여주었다. 그의 개혁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자신의 손을 거쳐야만 안심할 수 있었던 이 완벽주의 군주는 쉽게 피로해졌다. 문무를 모두 겸비한 인물이었음에도 체력이 버텨내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외로웠을 것이다. 믿을 만한 남인들은 서학 문제로 튕겨나갔고, 신문학을 주도하던 박지원과 그 제자들은 문체반정으로 밀어내었다. 나름의 균형은 잡혔지만 여전히 그의 주변엔 사람이 없었다. 결국 정조는 미완의 과제를 남기고 일찍 쇠한 몸으로 어린 아들을 남기고 죽고 말았다. 그 자신이 지양하고자 했던 측근 정치를 순조 곁에 박아둔 채로 말이다.

1부 사왕별곡이 네 임금을 종합적으로 보여주었다면, 2부에서는 객관적인 자료들 제시하며 각 임금들을 비교 분석하고 있다.  

조선의 왕이 마땅히 해야 할 네 가지 노릇으로 첫째, 성학에 힘쓰며 수신에 전념할 것, 둘째 개인적인 취미와 오락을 멀리하며 사치에 빠지지 말 것, 셋째 군자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할 것, 넷째 언로를 열고 신하들의 간언을 용납할 것이라고 전한다. 명색이 임금이니 뭔가 남부럽지 않은 화통한 면도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마땅히 해야 할 네 가지 노릇을 보다 보니 한숨부터 나온다. 이건 순전히 도덕군자로서 일만 하는 기계에 가깝지 않은가.  

그밖에 신하와의 경연을 분석해 주었는데 뜻밖의 결과에 당황했다. 

 

저 유명한 학자 군주 정조의 경연 개체 횟수가 연산군 만도 못했던 것이다.(재위 기간은 두 배이건만!) 이미 즉위 당시 더 이상 배울 게 없었던 천재군주 정조로서는 경연에서 무얼 배운다는 게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도리어 신하들을 앉혀 놓고 강연을 하는 전강을 베푸는 게 서로에게 생산적이긴 했다. 물론, 신하들은 못마땅 했겠지만. 그밖에 광해군은 거의 병적으로 경연을 빼먹었는데 이 정도 수준이면 대인 기피증을 의심할 만하다. 그래놓고는 친국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빼먹지 않고 참여했으니, 그의 불안이 얼마나 도가 지나쳤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그밖에 제왕의 취미생활과 왕의 여자, 왕과 언론, 왕의 인사권 행사, 왕의 형벌권 행사, 서책 간행, 시대와 호흡하는 왕의 평가가 뒤따라 온다.  

조선은 중국에 비해서 왕권이 약하고 신권이 지나치게 강한 편이었다. 때문에 왕의 스트레스 지수는 상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꼭 중국의 전제 군주제가 더 우수했거나, 조선이 그만 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양쪽 모두 갈등적 파트너십을 유지하면서 공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인데 조선은 왕과 신하가 서로를 견제하면서 또 서로 협력을 다지면서 더 나은 정치를 하기 위래 노력했었다.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낭만적으로 접근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고, 어느 한쪽은 보수, 또 어느 한쪽은 진보라고 틀을 씌워서 단순히 이해하는 것도 지양해야겠다. 그들이 지나온 자취에는 무수한 고민과 치열한 투쟁이 묻어 있다. 역사의 평가는 냉정하지만 시대를 읽어나가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책을 무척 진지하고도 재밌게 읽었는데 옥의 티로 자리 잡은 오타 몇 개는 언급해야겠다. 

102쪽 홍문과 부제학 최진>>>홍문관
248쪽 남인과 소인이 퇴조하면서>>>남인과 소론이
331쪽 왕 자신이 개인적으로 의지할 수 없는 측근은>>>의지할 수 있는
339쪽 처형된 1인은 지신의 외종조부이자>>>자신의 

더불어 디자인 이야기. 내지의 금가루는 왜 칠했는지 모르겠다. 자꾸 때가 탄 것처럼 보여서 꽤 불편했다. 불필요한 덧칠로 보였다. 내 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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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5-26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세종과 연산군, 광해군, 정조를 비교했다니 흥미롭네요.

마노아 2011-05-26 09:18   좋아요 0 | URL
무척 재밌게 읽었어요. 동 저자의 다른 책도 더불어 샀답니다. 기대가 되어요.^^

pjy 2011-05-26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충분히 기대되는 책입니다~ 리뷰가 환상적입니다요^^

마노아 2011-05-26 19:02   좋아요 0 | URL
하핫, 함 읽어보셔요. 생각보다 흡인력이 높아서 금세 읽게 될 거예요.^^
 
히스토리아
고종석 지음 / 마음산책 / 2003년 3월
평점 :
품절


고종석의 발자국을 먼저 읽고서 보다 앞에 쓴 히스토리아를 찾아 읽게 되었다.  

하루에 하나의 일들을 기술했으니 매일매일 한 장씩 읽게다는 각오였지만 애초에 1월 1일부터 읽기 시작한 게 아니니 잘 안 됐다. (난 원래 중간부터 읽지 않는지라...) 

아무래도 여러 차례 쓰고 난 뒤니 발자국 쪽이 좀 더 문장이 정제되어 있다고 느꼈다. 물론, 그렇다고 히스토리아의 문장이 나빴다는 것은 아니다. 고종석의 문장은 깔끔하다. 진중권 느낌의 냉소는 아니지만 적당히 차가운 미소가 흐른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들은 서늘하면서 아주 약간의 한풀이를 해준다. 이런 한풀이도 못한다면 그 억울함들을 어찌 할까. 

1월 22일 김상옥
한국의 자칭 ‘주류’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명예심이다. 그들은 친일을 외치던 그 입으로 해방된 조국에서 애국을 외치면서도 아무런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만큼 둔감하거나 교활했다. – 34쪽  

4월 22일 지구의 날
지구는 태양계에서 고등생물이 서식하는 유일한 행성이다. 그래서 ‘하나뿐인 지구를 사랑합시다’라는 구호는 상투적인 만큼이나 절실하다. – 126쪽  

4월 26일 게르니카 폭격
1936년 7월 프랑코가 이끄는 모로코 주둔군의 반란으로 시작된 스페인 내전은 세계 양심의 시험장이었다. 이 내전은 지식인 사회에서도 좌파와 우파를, 우파와 우파를, 좌파와 좌파를 분열시켰다. 예컨대 프랑스의 우파는 대개 프랑코의 반란을 지지했지만, 클로델이나 베르나노스 같은 가톨릭 작가는 파시즘과 스페인 교회를 비판하고 나섰다. 당초에 프랑코의 반란에 호의적이었던 모리악도 결국 공화파 지지로 돌아섰다. 좌파 내부에서도 스탈린주의자와 트로츠키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분열했다. 승리를 파시스트에게 돌아갔다. 양심은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 130쪽  

5월 14일 조명하
그들이 자기 희생적 실천으로 노현한 그 열망이 없었다면, 우리의 해방은 훨씬 더 늦춰졌을 것이다. 이들의 반대편에는 일제에 대한 소극적 순응을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천황 폐하 만세를 부른 이들이 있었다. 역사를 잊은 이에게 역사는 반드시 복수한다. 박정희 기념관이 세워져서는 안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다. – 148쪽  

6월 14일 스토 부인
노예 제도는 사람이 평등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평등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다. 노예 제도는 외국인 노동자나 혼혈인들을 멸시하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고, 여성들을 깔보는 남성들의 마음속에 있고, 장애인들을 백안시하는 비장애인들의 마음속에 있다. 그것은 차이의 권리를 권리의 차이로 바꿔치기하는 우리들의 교활함 속에 있다. – 179쪽  

8월 27일 부전조약
“평화를 위해서는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속언은 군국주의자들의 금과옥조였지만, 전쟁 준비는 늘 전쟁으로 마무리됐다. – 256쪽  

9월 3일 호치민
호치민은 공식적으로는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의 지도자였지만, 그의 이름은 외세에 맞서 싸우는 남북 베트남 민중 전체의 단합을 상징했다. 남북을 통틀어 그런 지도자를 가져보지 못한 우리로서는 부러워할 만한 점이다. – 263쪽  

9월 11일 아옌데
아옌데가 몸을 피했다면 목숨을 보전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사실 그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피신을 권했다. 그러나 이 ‘노동자들의 대통령’은 조국의 민주주의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정했다. – 271쪽  

11월 2일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앙투아네트의 죽음은 참혹하다. 그러나 그 사실이 그녀가 형편없는 여자였다는 사실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명성황후 민씨의 죽음은 그보다 훨씬 더 참혹했지만, 그것이 민씨를 좋게 볼 이유가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 325쪽  

11월 10일 창씨개명
장준하는 생전에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 셋 있는데, 첫째는 오카모토 미노루, 둘째는 다카키 마사오, 셋째는 박정희”라고 말한 바 있다. 세 사람은 동일인이다. – 333쪽  

12월 6일 파농
그와 더 닮은 사람은 체 게바라일 것이다. 그들은 어떤 종류의 질병은 진료실에서가 아니라 사회 변혁의 과정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359쪽  

12월 14일 워싱턴
워싱턴은 1796년 3선 대통령으로 추대됐지만 민주주의의 전통을 세워야 한다는 이유로 고사했다. – 367쪽

지금도 집에서는 하루에 한 장씩 넘기는 미니 달력을 쓰고 있지만, 정확도가 다소 떨어지고 어린이 눈높이에 맞추었기 때문에 흥미 이상을 주지는 않는다. 매일매일 그렇게는 못하지만 '발자국'과 '히스토리아'를 동시에 넘겨가며 그날그날 있었던 역사의 자취를 가끔 밟아본다. 그때 그 일이 이 계절에 있었구나, 이 날은 여러 사람이 죽거나 태어났고, 역사적인 일들이 있었구나... 하며 한 번씩 되새김하게 된다.  

'발자국'에는 사진이 없는데, '히스토리아'에는 아주 작은 사이즈라도 사진을 실었다. 그 덕분에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이렇게 미남일 줄이야!하며 놀라기도 했다. 영화 '왕중왕'에서 예수님 역을 연기했던 제프리 헌터 느낌이었다.(앗, 찾아보니 이 배우 죽은 지 한참 지났네!) 

그렇지만 옥의 티가 있었으니, 바로 오타다. 

113쪽에는 4월 9일인데 4월 8일이라고 소제목부터 오타가 났다. 

338쪽 케플러 편에서는 두번째 줄에서 띄어쓰기가 안 되어 있다. '한길에서급사했다'로 적혀 있다. 

351쪽 마젤란 해협 편에서 1921년으로 표기되어 있다. 1521년으로 고쳐야 한다. 

368쪽의 아이히만 사형 선고 밑에서 세 번째 줄의 '그러나'는 앞뒤 문맥상 어색한 접속사다. 

369쪽의 보스턴 차 사건에서는 1975년이라고 적었는데 1775년으로 고쳐야 한다. 

376쪽의 쳇 베이커 편에서 중간 즈음에 '쿨 재즈를 주도하며 베이커과 멀리건의'>>베이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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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11-05-10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종석 읽으셨군요. ^^ 후기작은 초기작보다는 못한 것 같아요. 이 책은 물론 성격이 조금 다르지만. 요새는 뭐하시는지 모르겠네.

마노아 2011-05-10 12:15   좋아요 0 | URL
초기작이 더 좋단 말이지요? 문장이 깔끔해서 관심이 가요.
초기작도 찾아 읽어봐야겠어요. 요새는 아프님 서재에서 칼럼으로 만나게 되네요.
칼럼 말고 또 뭘 하시는지...ㅎㅎㅎ

양철나무꾼 2011-05-10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종석을 참 좋아해서 그의 책들을 꽤 읽었는데...이 책은 아직이예요.
이 분의 <여자들>을 읽고...황인숙이 참 부러웠었는데 말이죠.
아니다, 황인숙 같은 사람을 친구로 둔 고종석이 부러웠나 보다~^^

마노아 2011-05-11 20:49   좋아요 0 | URL
여자들을 읽어야겠다고 보관함에 넣어놨는데 책장을 올려보니 저 그 책 갖고 있는 거 있죠...ㅜ.ㅜ
하마터면 두 권 살 뻔했어요....(>_<)

순오기 2011-05-11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는 '마음산책' 편집자가 봐야 다음 쇄 찍을때 고치겠군요~~~ ^^

마노아 2011-05-11 20:49   좋아요 0 | URL
오타 지적은 매번 리뷰에만 했는데 출판사에다가 줄기차게 메일을 보내볼까봐요.ㅎㅎㅎ

2011-05-11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12 0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11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11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국 근대사 산책 5권 - 개화기편, 교육구국론에서 경술국치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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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강제병합까지의 내용이 담겨 있다. 

장인환과 전명운의 의거 장면은 비장해야 마땅하지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먼저 쏜 것은 전명운이지만 불발이었고, 장인환이 쏜 3발 중 2발은 스티븐스가, 나머지 한 발은 전명운이 맞았기 때문이다. 사건 당시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던 이승만은 장인환과 전명운에 대한 미국 변호사의 통역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거절함으로써 교민사회의 비난을 받았다. 학생 신분이며 기독교도로서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이유였다. 그래놓고는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사회에서 항일 단체를 만들다니, 참 밉상이다.

새타령에 의병투쟁의 애환이 담겨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알고 들으니 애잔하게 느껴진다. 전문을 옮기자니 너무 길구나...

허동현의 박노자 비판도 눈길을 끌었다.

“저는 사회진화론이 만연하던 19세기 말이나 지금이나 세계 어디에서도 박 선생님이 이야기하는 차별과 착취 없이 평등이 구현된 이상 사회가 존재한 적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박 선생님이 갖고 있는 현실 비판의 바이어스 즉, 미래에 언젠가는 구현돼야 할 역사적 당위로서의 이상 사회를 기준으로 한 세기 전이나 현재의 우리 사회를 비판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우리 선각자들이 개화기 당시 현존하던 국가체제 중 상대적으로 우월한 제도와 문물을 갖추고 있던 미국을 발전 모델로 본 것은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 탁견입니다.”

이재명 의사의 의거 실패에 대해 김구가 땅을 치고 후회한 일이 착잡하다. 그가 갖고 있던 총을 압수했는데 나중에 총 대신 칼로 거사를 실행한 이재명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애꿎은 인력거꾼만 목숨을 잃었으니 말이다. 

이어령 “미국은 기독교 사회이지만 대통령이 아무 곳에서나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하지 못하며,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정말 희한하고 행복한 나라다. 서울 시청 앞마당에서는 늘 진보와 보수의 싸움이 벌어지지만, 그곳에 세워진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나 연등에 시비를 거는 이는 없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한국 특유의 ‘엇비슷 신화’의 방증이다. 우리말 가운데 ‘엇비슷하다’는 말은 세계 어느 나라 말로도 바꿀 수 없다. 굳이 설명하면 ‘엇비슷’은 어긋났는데 비슷하다거나 닮았지만 닮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말에 기독교와 불교를 엇비슷하게 보는 한국인의 의식이 그대로 녹아 있다. 어긋나고 비슷한 것이 하나의 단어가 된 것은 바로 한국인 특유의 포용의식의 상징이다. 우리 문화에는 21세기 다원주의를 흡수할 수 있는 여러 가치가 공존한다. 엇비슷하다는 말은 아시아적 화이부동 철학을 담고 있다.” – 183쪽 
 
지극히 자연스러워서 생각해보지 못한 문제였는데, 듣고 보니 매우 신기한 일이다. “맥주 두서너 병 주세요!”라고 말을 해도 알아서 갖다 주는 것처럼, 우리 말에서는 그런 것들이 크게 문제되지 않고 통한다. 분명하지 못하니까 단점으로 파악할 게 아니라 특유의 포용의식이라고 여기면 보다 이해가 쉬울 것이다.

조선은 시간개념의 규정을 받는 걸 거부한 나라에 가까웠다. 서양인들의 눈에는 한심하고 게으르게 비쳐졌다. 그런데 1세기도 지나지 않아서 한국은 ‘빨리빨리’의 나라가 되어버렸다. 시간에 죽고 시간에 사는 나라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역사의 풍경이다. 게다가 게으름의 극치로 입방아에 오르던 나라였지만 외국에 나가 있는 한국인들은 부지런함의 대명사다. 어떤 땅이건 억척스럽게 일구고 살았고, 어디서건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삶에 대한 만족도 지표를 생각하면 한숨이 나오지만, 그만큼 지난 1세기의 우리 역사가 겪어온 시간이 벅찼다는 느낌을 받는다. 

 5권의 마무리에서는 조선은 왜 망했는가에 대한 집중 고찰이 이뤄진다.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제시하고, 그 논거들의 문제점도 같이 살펴보고, 종합적인 정리를 해주었다. 혹여 식민사관이라는 틀에 너무 얽매여서 정작 비판해야 할 것들을 놓치는 것은 아닌지 되짚어보게 했다. 쓴 소리였고, 아픈 역사이지만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이제는 정면승부할 때도 되지 않았던가. 유교적 가족주의의 양면성을 짚어준 것도 인상 깊었다. 그것이 많은 문제를 낳았지만 동시에 국가적 성공의 원동력이 된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미친 듯이 일하는 동력이 되어버린 유교적 가족주의라니. 한 가지 법칙으로 도식화할 수 없는 역사의 역동성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맞다. 그게 역사의 아이러니다.    

오타 문제
105쪽 양계초는 1899년에 쓴 「한국의 근상」이라는 글에서는 한국의 위태로운 처지의 가장 원인으로 정치의 불량을 지적했다. >>>가장 큰 원인으로 
147쪽 그 청년은 스물세 살 된 이재명이었다.>>>이완용을 죽이려고 했을 당시 이재명의 나이는 20세였다.
160쪽 경술국치 1주일 전인 1910년 7월 20일>>>우리가 경술국치일이라고 말하는 날짜는 1910년 8월 29일이다.
191쪽 1872년부터 철도를 놓기 시작해 1891년에 전국 종단 노선을 완성한 일본의 철도정책의 기본은 ‘중앙집권적 성격의 강화’였다.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의 기공식은 1897년이었고 완성은 1899년이었다. 경부선이 1905년, 경의선이 1906년이었으니, 종단은 이때 가서야 가능했던 것 아닌가?
234쪽 1906년 전국의 인구는 132만 3029명으로 현재 남한 인구의 1/3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1320만 아닐까?
250쪽 임진왜란의 패배는 왜국이 부산 앞바다에 나타난 4월 14일 새벽부터 >>>4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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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1-04-26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찌나 오류가 많은지,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다가 포기...(ㅡㅡ;;;)

순오기 2011-04-26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저자의 이름과 출판사 이름만으로도 신뢰가 가는데 어찌 이리 오류가 많을까요?ㅜㅜ
전문가 아닌 독자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텐데...

마노아 2011-04-27 00:27   좋아요 0 | URL
위 댓글의 오류는 알라딘 오류인데, 오타 지적을 많이 해놔서 책의 오류처럼 느껴지네요.
하핫, 책도 오류 투성이긴 해요..ㅜ.ㅜ
그나마 4권보다는 줄었어요. 4권은 무척 심했답니다.
대체 편집자는 뭐했을까요. 독자보다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읽었다는 걸까요.
뭐, 그 얘긴 저자도 마찬가지네요.^^;;;

양철나무꾼 2011-04-27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오류나 오타가 신뢰를 떨어뜨리는 것 같아요.
제가 주로 읽는 소설류는 그래도 덜 하지만,
이런 학술서를 읽다가 저래버리면 짜증이 나서 말이죠~ㅠ.ㅠ

마노아 2011-04-27 18:03   좋아요 0 | URL
오타를 만나면 마구 노여워지는데 심지어 오류도 있으면 정말 분노하게 되죠.
그럼에도 별 다섯을 주다니, 제가 참 너그러워요.(응?)
 
한국 근대사 산책 4권 - 개화기편, 러일전쟁에서 한국군 해산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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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부터 1907년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시기에는 애국계몽운동이 활발히 일어났었고, 당연히 신문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꽤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으므로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하기에 좋을 것이다.  또 러일전쟁의 발발 전부터 전후 문제까지의 과정이 무척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정로환'과 같은 이야기는 잠깐씩 분위기를 바꿔주는 감초 역할을 해준다. 

개화기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의 공통된 반응으로 '호기심'을 들었는데,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고 궁금해하는 정도가 병적이다. 그것이 좋은 에너지로 분출되면 성장의 동력이 되겠지만, 선정적인 언론보도와 함께 연상되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얼마 전에 서태지-이지아 사건에 대해서 배철수 씨가 남의 일에 관심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는 걸 들었을 때 참 멋있다고 여겼는데, 호기심에도 제발 분별력이 있었으면 한다.  

순국자결한 민영환의 이야기가 놀라웠다. 혈죽 매화라니. 그것을 100년 간 보존해 온 후손이라니! 몇 해 전에 박물관에서 전시회도 가졌다는데 미리 알았더라면 다녀왔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밖에 유길준과 손병희 등등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 인물들이 많았고 전반적으로 인상 깊게 읽었다.

그런데 어째 뒷권으로 갈수록 오타가 더 심해지는 것 같다. 

24쪽
랴오둥수복론수복론이 18세기 말부터 등장했는데 >>>수복론이 두 번 겹침 

39쪽
영일동맹 직후 러시아는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차원에서 한반도로 군대를 파견해 일본과 충돌을 빚게 했다. 아직은 자신이 없던 일본은 충돌을 피하기 위해 38도선을 기준으로 한반도를 양분해 각각 영향력을 행사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39도선 분단안을 제시해 담판은 결렬되었다.

>>>38도선이 마음에 안 든 러시아가 39도선을 제시했다는 것은 좀 말이 안 된다. 내용이 틀린 것이 아니라 설명이 부족하다. 일본이 38도선을 제시했을 때는 러시아가 부동항에 대한 집착으로 제안을 거부했지만, 다음에 일본의 영향력이 더 강화되자 아쉬운 대로 39도선을 제시한 것인데 위 문장만 보면 기준선이 뒤바뀐 게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96쪽
의관정재한 한국인이 뉴욕 맨하탄에 나타났을 때 미국인들이 보일 순수한 호기심과 다를 없는 정도의 것이라고 했다.>>문장 어색
 
119쪽 사진 밑 설명  
러시전쟁 와중에서 >>>러일전쟁

130쪽 첫 줄
훗날 발굴된 비밀문서들은 미국과 영국의 일본 지원이 당시 알려진 것도 훨씬 더 적극적이었다는 걸 보여주었다.>>>것보다

135쪽
이미 6일 전인 7월 19일 가쓰라-태프트 비밀협약을 맺게 한 루스벨트>>>7월 29일

163쪽
고종의 밀명을 받은 헐버트가 호놀룰루,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피츠버그를 거쳐 워싱턴에 도착한 것은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다음날인 11월 17일이었다.
>>>앞쪽에서는 줄곧 11월 18일로 기술되어 있었다. 11월 17일에 가졌던 회의가 자정을 넘어 체결되었기에 18일로 보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여겨도 통념의 17일을 떠나 16일로 기술한 것은 오타로 볼 수밖에 없다.


230쪽
신용하는 “애국계몽운동을 을사조약에 의하여 국권을 박탈당한 후 개화자강파가 중심이 되어 완전한 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전개한 민력 개발과 민족독립역량 양성운동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정의했다.>>문장 어색

239쪽
『아리랑』은 유인석 부대는 세력이 왕성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으면서도 유인석이 평민 장수 출신 김백천을 처형함으로써 파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며....>>>김백선

297쪽
박에스더의 생년을 1877년으로 기술했다.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와 위키백과는 1876년으로, 네이버 백과사전은 1879년 생으로 나온다.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1885년 홀의 도움을 받아 미국 유학길에 올라 1886년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했다.
>>>1877년에 태어난 것이 맞다고 할지라도 유학길에 오른 나이와 대학 입학 나이는 말이 되지 않는다. 박에스더가 미국 유학길에 오른 것은 1895년이고,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한 것은 1896년이다.(참고로 1886년은 이화학당 입학한 나이)

317쪽
“고종이 살아있었고 즉위 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나타나고 있어 순종을 고종의 뒤를 있는 황제로 보기가 어렵다.”>>잇는

363족
박은식의 검속 사건 이후 신문사 정문에는 ‘일인불가입’까지 방까지 내걸었다. >>>‘일인불가입’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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