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을 위한 고려유사 박영수의 생생 우리 역사 시리즈 3
박영수 지음 / 살림Friends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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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 삼국사기에 비해 야사 삼국유사가 보다 가볍고, 재밌고, 흥미를 돋운다는 것에 착안해서 이 책의 저자는 '고려유사'라는 제목으로 책을 만들었다. 정말로 그런 제목의 책이 있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 의미로 '재현'해 놓은 것이다.  

고려 초기, 고려 중기, 고려 말기. 이렇게 셋으로 크게 나누고 시대별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고, 각각의 장마다 하나씩 '문화 이야기'를 담았다.  때로 메인의 인물사보다 부록에 해당하는 문화 이야기가 더 재밌을 때가 있었다. 관심을 끌었던 주제는 이런 것들이다.

[문화 이야기] 신선은 왜 늘 노인으로만 그려질까
[문화 이야기] 영광굴비의 어원
[문화 이야기] 정자는 왜 팔각정이 많을까
[문화 이야기] 청와대의 유래가 된 청기와
[문화 이야기] 변방의 부족, 양수척
[문화 이야기] 왜 선비들이 거문고를 좋아했을까


'뜬금없이'의 '금(琴)'은 거문고를 의미한다. 거문고를 연주하려면 왼손으로 줄을 짚은 채 오른손으로 술대(단단한 막대기)를 잡아 줄을 뜯거나 튕겨야 한다. 팽팽한 줄을 누르자면 상당한 힘이 필요하므로 거문고는 여자보다 남자에게 적합하며, '뜬금'은 거문고를 술대로 뜯거나 튕기는 상황을 나타낸 말이다. 따라서 '뜬금없이'는 '뜯어야 할 금(거문고) 없이'의 줄임말로, 소리는 들리는데 거문고가 보이지 않는 괴이한 상태나 거문고도 준비하지 않은 채 소리를 내겠다는 엉뚱한 태도를 표현한 말이다.  -148쪽

 대체로 쉽고 재밌게 서술되었는데 '청소년' 대상이라기보다 초등 고학년 정도를 대상으로 쓴 듯한 느낌이었다. 그림도 익살맞았는데 현재의 유머코드가 적용되어 있어서 웃음을 유발하지만, 몇 해 지나서 보면 꽤 유치하게 보일 스타일이었다.  

 

표제에서 현존하는 최古의 역사서 '삼국유사'라고 적었는데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서는 '삼국사기'다. 제목의 연관성을 강조하려다 보니 이런 무리수를 두었다. 설마 몰랐을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  

몇몇 오타와 오류가 눈에 띈다.  

123쪽. 9줄에 '신동, 강종 두 임금을 >>> 신종, 강종 

177쪽 마지막 줄. 충선왕부터 공민왕까지는 고려 남자-몽골 여자의 혼혈인이라고 적었는데 충혜왕과 공민왕의 어머니는 고려 여인이었다. 물론 아버지가 혼혈이긴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저 도식은 오류다.  

187쪽의 맨 하단 '은천옹주'에 대한 설명은 황당하다. 문장이 이렇다.  

단양대군의 종이었는데, 충혜왕이 1342년(충혜왕3)에 은천옹주로 봉銀川翁主 1344년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간 뒤 쫓겨났翁主 아들 석기는 공민왕 때 역모왕이갠에 연루되어 아버2년임신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이게 당최 무슨 말인지. 문장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이렇게 황당한 편집의 실수라니.  

240쪽 이성계의 생몰연대를(1316~1388)로 적었다. 1388은 위화도 회군의 연도이고, 그가 왕위에서 물러난 것은 1398년이고, 사망 연대는 1408년이다.  

오타나 비문은 실수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전반적으로 서술방식이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썩 매끄럽지는 않았다. 재미와 흥미는 줄 수 있지만 역사서로서의 매력은 그다지 훌륭하지 않다. 그래도 주로 조선사에 치우쳐 있는 출판 현황과 독자들의 관심을 생각할 때 고려의 이야기를 풀어낸 책이라는 장점은 무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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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7-22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전문가의 예리한 눈은 다르군요.^^
123쪽의 오타는 나도 지적했지만, 다른 건 모르고 넘어갔어요.ㅜㅜ
187쪽을 찾아보니 본문이 아닌 하단의 보충설명이 그 따위로 돼 있군요.
240쪽 이성계 생몰연대는 저렇게 써놓고, 하단 보충설명에 재위기간은 1392~1398년으로 해 놨네요.

마노아 2010-07-22 22:59   좋아요 0 | URL
별 넷 정도를 생각하고 읽었는데 리뷰 쓰다 보니 괜시리 화딱지가 나서 별점이 또 깎였어요.^^;;;
'정사'의 입장으로 읽으면 무척 곤란하지만, '유사'의 느낌으로 읽으면 재밌는 책이었어요.
제목은 잘 지었다니까요.^^ㅎㅎㅎ

꿈꾸는섬 2010-07-23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전문가의 리뷰는 다르네요. 전 이 책 읽고 고려에 대해 좀 알게 되었다고 좋아했었거든요..ㅜ.ㅜ

마노아 2010-07-23 23:57   좋아요 0 | URL
저도 좋았던 부분들이 있었어요. 근데 쓰고 보니 리뷰는 좀 각박하네요.^^;;;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 - 국문
존 리치 지음 / 서울셀렉션 / 2010년 5월
절판


대구에서 찍은 아이들 사진.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신기했을 테지만, 어딘가 경직되어 보이는 얼굴들이다.
아이다운 해맑음을 유지할 기회를 박탈당했던 무수한 아이들.
무엇보다도 부모님과 함께 할 시간을 빼앗긴 아이들이 먼저 밟힌다.
고향을 떠나야 했던 어른들보다 더.

피난을 떠나는 엄마의 긴박감이 느껴진다. 뒤에서 밀어주는 아들은 기자를 보며 싱긋 웃는 것이 어린애스러워 보이지만 막내 동생을 깍지 낀 손으로 꼭 끌어안고 있는 딸 아이에게는 벌써부터 신산함이 느껴진다.

엄마는 피난 갈 때 나이가 다섯이었는데 큰 돈을 두 번이나 주워서 힘든 피난길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하신다. 엄마는 지금까지도 가끔 길바닥에서 돈이나 반지 등을 잘 주워 오신다. 로또를 사라고 한 번 설득을....

시가전 흔적이 선명히 남아있는 남대문. 전쟁 때에도 살아남았는데 어이 없게 사라져버린 우리의 문화 유산. 어휴...

폭격으로 부서진 건물의 잔해. 왼쪽으로 명동 성당이 보인다. 폭격을 맞았음에도 굴뚝 부분이 끝까지 남아 있는 게 신기하다. 유독 튼튼한 것일까?

비행기에서 바라본 피폭된 도시의 모습. 정찰기에 탑승해서 찍은 사진이다.
확실히 컬러로 찍은 사진이다 보니 보다 현장감이 느껴진다.
흑백 사진은 과거의 시간이 더 잡히는 느낌인지라 멀게 느껴지는데, 이 사진들은 모두 컬러 사진이어서 보다 현실에 가깝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흑백으로 보든 컬러로 보든 전쟁의 참혹한 흔적들은 아프다.

파괴된 수원 화성 장안문. 성벽 위쪽은 1/3이 날아갔다.
주변부도 모두 폐허 상태. 한국 전쟁 당시 수원이 입은 피해가 꽤 컸다 한다.

앳되어 보이는 소년 병사의 철모에 진달래가 피었다. 전쟁 속에서도 어김 없이 봄은 오는데, 소년의 지친 얼굴에선 표정이, 감정이 사라진 듯 보인다.
전쟁 속에서는 지나친 감상이 오히려 마음을 더 힘들게 했을 것이다.
이 소년병은 그 후 살아남았을까...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지프차에 오르고 있고, 그 뒤로 월튼 워커 장군이 서 있다. 초대 주한미군 사령관이었떤 워커 장군은 한국전쟁 초기 유엔군의 전면 철수가 제기되던 분위기에서 홀로 한반도 고수를 주장하며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 인천상륙작전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한다. 1950년 12월 23일, 그가 탄 지프와 트럭이 충돌하는 6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후에 한국정부는 미군을 위한 휴양시설로 호텔을 건립하는데, 워터 장군을 기리기 위하여 호텔명을 워커힐 호텔이라 이름 짓는다.

아가일 부대원이 미군 병사와 작전 회의를 하고 있다.
미군 장교의 부인들은 아가일 부대가 킬트 안에 속옷을 안 입는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물론 이들은 전투시에는 정규 전투복을 착용했다.

백파이프 연주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미 전함 아이오와 호의 16인치 함포가 북한쪽을 향해 불을 뿜고 있다.
당시 함포탄 한 발은 1만 달러 정도로 캐딜락 승요차 한 대 값과 맞먹었다고 한다.
사람의 목숨은 자동차 몇 대로 환산할 수 있을지...ㅜ.ㅜ

미군 폭격기 동체에 그려진 그림이다.
전투기에는 상어가, 폭격기에는 '핀업걸'이 그려지곤 했다.

폭격기에 탑재할 네이팜탄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전쟁 동안 미군은 매일 약 110톤의 네이팜탄을 투하했다고 한다.
알루미늄과 휘발유 등을 섞어 젤리 모양으로 만든 네이팜을 연료로 하는 네이팜탄은 3천 도의 고열을 내면ㅁ서 30미터 이내를 불바다로 만드는 잔혹하고 비인도적인 살상 무기로 현재는 국제적으로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초창기 휴전 회담이 열렸던 개성의 시장 모습.
북한군(중앙)과 미국측 사람들이 평화롭게 섞여 있다.
휴전 회담이 진행되었던 탓에 개성은 북한 전여게 퍼부어졌던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개성은 현재 가장 많은 한옥이 보전돼 있는 도시가 됐다.

주방도구부터 여배우들의 낡은 사진까지 각종 중고물품들을 팔고 있는 소년.
외국 배우가 더 낯이 익다. 오른쪽에서 두번째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일까??

초여름 시골풍경. 농부들이 모심기를 하고 있다.
전쟁 중에도 계절은 바뀌었고 논과 밭을 돌보는 일은 계속됐다.

휴전협정서.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장군과 김일성의 서명이 보인다.

이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미군 부대가 판문점 남쪽에서 대기중이었다고 한다.
결국 최후까지 양측은 서로를 믿지 못했던 것이다.


모두가 흑백 필름을 쓰던 시절에 아주 드물었던 컬러 사진으로 보는 한국전쟁은 남달랐다. 그렇지만 사진의 색깔이 주는 특별함을 제외한다면 이야기는 평범하다.
한국전쟁에 관한 사진집은 '지울 수 없는 이미지'를 추천한다. 울먹이며 봤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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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7-11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저런 일이 발생할까봐 이번에 무서웠습니다.
전쟁은 너무 끔찍합니다. ㅠ

마노아 2010-07-11 13:36   좋아요 0 | URL
국민들을 이렇게 무섭게 만들다니...슬퍼요..ㅜ.ㅜ

느린산책 2010-07-14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시 풍경이 늘 궁금했었는데 마노아님 덕분에 그 궁금증이 풀렸네요 ㅎㅎ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근데.. 책 값이 너무 비싸네요^^;;;

마노아 2010-08-10 20:04   좋아요 0 | URL
앗, 놓쳐버린 댓글이 있었네요. 책값이 너무 비싸서 도서관의 역할이 더 컸어요.^^;;;
앞으로도 비싼 책은 주로 도서관을 애용하겠어요.^^ㅎㅎㅎ
 
간송 선생님이 다시 찾은 우리 문화 유산 이야기 샘터 솔방울 인물 2
한상남 지음, 김동성 그림, 최완수 감수 / 샘터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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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재벌은 하늘이 내는 거라는 말씀을 하시곤 했는데, 그 말은 듣기 싫었지만 간송 선생님같은 경우는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뜻이 있어도 경제력이 없으면 그 많은 문화재를 다 보호하지 못하셨을 것이고, 돈이 있어도 뜻이 없다면 의미있는 일에 쓰지 못할 테니 말이다.  

제목이 몹시 길어서 입에 착 붙지 않는 단점이 있다. 아무튼 다시 읊어보자. 간송 선생님이 다시 찾은 우리 문화 유산 이야기. 

선생은 일제 강점기 때 누구라도 쉽지 않을 우리 문화 유산 지키기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신 분이다. 수만석지기인 두 할아버지 집안의 늦둥이로 태어난 그는 집안 어른들과 형제들이 모두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직 어리다할 나이에 엄청난 상속자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재산을 허투루 쓰지 않고 외국인들에게 넘어간 우리 문화 유산을 되찾아오거나, 값진 유물들을 정당한 대가로 사오기, 그리고 지키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  

한국사傳 전형필 편에 보면 경매 현장의 분위기를 재현해낸 부분이 있는데 제법 긴장감을 느끼게 하였다. 선생님이 지켜낸 보물들 중에는 이미 국보로 지정되어 우리 눈에도 익은 것들도 꽤 여럿 눈에 띈다.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가 대표적인데 덕분에 간송 미술관은 지지난 해 신윤복 열풍이 불 때 몸살을 앓다시피 했다. 너무 많은 관람객 때문에 말이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고려청자'의 대표 예로 역시 우리 눈에 익숙하다.  

도자기, 그림, 글씨는 물론 탑도 되찾아 오셨다. 가장 유명한 것은 경천사지 십층 석탑인데 103쪽 사진에는 소재지가 '경복궁'으로 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1층 홀에 모셔진지가 수년인데 옥의 티다. 탑을 해체해서 일본까지 실어간 나아쁜 사기꾼은 일본 측에서도 얼굴 팔리는 일로서 결국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탑조차 가져갈 수 있었던 그들이었으니 좀 더 가벼운 것이라면 무엇인들 못 가져갔을까.  

일제 강점기 때도 살아남았던 보물들이 한국 전쟁 때 유실되거나 파손된 일들은 무척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때 보물 지키기에 또 목숨을 걸었던 분이 손재형과 최순우. 최순우 씨의 이름을 여기서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 

책은 전기로도 읽히고 역사책으로도 읽히고 예술서적으로도 읽힌다. 어느 쪽이든 유의미한 독서가 될 테니 문제 없지만, 126쪽에 보면 조금 걸리는 표현이 있다.  

원자 폭탄이 떨어지고 일본의 패배가 확실해졌을 때, 조선 총독 아베는 일본에 협력할 우리 나라 인사를 물색했습니다. (126쪽)

일본에 협력할 인사를 물색했다고 쓰니까 어쩐지 여운형 선생님의 모양새가 좀 우스워지는 느낌. 읽기에 따라서 사실이 좀 왜곡되어 느껴지지 않을까? 

이 책은 할인률이 꽤 좋았는데 5월되면서 갑자기 할인율이 떨어지면서 값이 올라갔다. 덕분에 사서 보려던 게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신청한 것도 나니까 별 차이는 없지만.. ^^ 

해마다 두차례씩 보름 동안 전시회를 가지는 간송 미술관인데, 지금 때마침 전시 중이다. 입장료도 없고 홈페이지도 없다. 그렇지만 찾아가는 게 어렵지는 않다. 4호선 한성대 입구에서 마을버스를 한 번 타도 좋고 걸어도 그리 멀지 않다. 돌아오는 가을에는 또 어떤 전시회가 열릴 지 자못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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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찌 2010-05-26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송미술관 꼭 가보고 싶었는데 좋은 정보 감사해요~

마노아 2010-05-26 14:59   좋아요 0 | URL
네, 즐겁게 다녀오셔요.^^

순오기 2010-05-26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에 '선생님'만 안 넣었어도 입에 착 붙는데 그랬어요.ㅜㅜ
한국사전에서 전형필 봤어요. 그많은 재산을 의미 있는 일에 썼으니 위인이 따로 없지요.
부정한 방법으로 상속하는 그 인간들과 비교되죠.

마노아 2010-05-26 19:55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제목 센스가 좀 부족했어요.^^;;;
이 책 스타일에서는 김동성 작가님 그림이 빛날 여지가 별로 없더라구요. 아무래도 분위기가요. 그것도 좀 아쉬웠어요.^^
이런 분들이 거부가 되어야 하는데, 참 엄한 사람들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서 탈이에요..;;;
 
한국사 인물통찰 - 폄하와 찬사로 뒤바뀐 18인의 두 얼굴
김종성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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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념으로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의 진상은 이렇게 다르다-는 식으로 구성된 책들은 많이 쏟아져 나왔다. 기실 우리가 그 시대에 살았던 것이 아니기에, 새로이 연구 성과가 축적되고 1차 사료를 비롯해서 다양한 자료가 공개되면 기존의 시각은 수정되는 게 마땅하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책들은 늘 호기심을 동반하고, 잘못 알았던 것들의 진실에 다가가는 기쁨을 함께 안겨준다. 이 책 역시 그랬다. 18명의 인물에 대해서 기존에 받아들여지던 관점에 수정을 요구하는 이야기들을 뽑아내는데 인물 자체로만 본다면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이야기는 드물지만, 익숙해진 이야기도 보다 설득력 있는 근거로 저자의 생각들에 독자를 끌어들인다. 

그러나 전반적인 평가는 그랬지만, 시작은 좀 삐걱거렸다. 장수태왕이 첫번째 인물이었는데 그가 위대한 대고구려의 군주로서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중국에 48번 조공한 군주라는 소제목부터가 좀 곤란했다. 대립된 제목으로 인해 두 가지 사실이 극으로 대비되는 것 같지만, 저자의 논리처럼 중국에 조공했다는 사실만으로 장수태왕이 고구려의 위대한 군주가 되지 못하란 법은 없다. 교과서의 서술도 그렇거니와 이제는 '조공'이라는 것이 동아시의 독특한 외교 형식이라는 것을 많이들 알고 있는데, 마치 처음으로 그 사실을 공개하는 것처럼 너무 호들갑을 떨었다. 만약 대상이 '광개토태왕'이었다면 사람들이 좀 눈길을 주겠지만, 사실 장수태왕은 좀처럼 기억도 잘 못하는 인물이다.-_-;;;; 

오히려 이런 자극적인 제목은 장수태왕은 중국에 48번 씩이나 조공을 바친 별볼일 없는 인물로 인식되기 쉽지 않을까? 더군다나 기왕이면 조공을 받고 회사를 내릴 일이지 하필이면 조공을 바치고 회사를 받았을까 하고 불편한 기분이 들 수도 있다-라는 서술은 몹시 불편했다. 보통의 사람들이 그런 시각을 갖고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라 해도 그런 표현이 등장하는 것 자체가 '기분 나빠하면 지는 거야'라는 유행어의 뉘앙스로 들리기 때문이다.

강감찬 편에서는 박정희 군사 정권이 군부통치의 정당성을 주지시키기 위해서 동아시아적 차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장군을 좁은 틀 안에 가두어 두었다고 했는데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동아시아적 평가를 받는 게 부당하다는 게 아니라, 군사정권이 일부러 그랬나 싶어서 말이다.  내 생각에는 동아시아적 차원에서의 업적이라는 걸 못 알아차린 게 아닐까? 일부러 축소한 게 아니라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더 설명해 주셨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공민왕 편은 무척 재밌었다. 공민왕이 신돈을 개혁의 선두주자로 내세워 왕권을 강화한 이야기를 해주기 위해서 오스만제국의 노예 출신 대제상 얘기를 해주었는데 무척 신선하고 크게 공감이 갔다. 오늘날 대통령 중심제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얼굴 마담인 국무총리가 필요한 이유도 엮어서 설명해 주었는데 역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정하고 냉혹한 정치판의 모습이야 새로울 게 없지만 가끔 우리는 어떤 인물에 대해서 과도하게 감정이입을 해버려 정치가의 기본 속성을 잊어버리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성계 편도 읽는 재미가 탁월했다. 용비어천가에서 노래하는 그의 조상들의 근거지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고, 그의 출신이 여진족 계일 거란 얘기도 종종 들어왔지만, 이후 조선 왕조의 행보에서 왕조의 출신 콤플렉스를 극복하려는 의도를 찾아낸 것이 몹시 신선했다. 또 세종 때 한글창제에 반대했던 양반들의 논리가 단순히 사대가 아니라 '경쟁력' 때문이라는 지적도 충격적이었다. 오늘날 영어 공용화 얘기나 영어 몰입 교육 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도 쉽게 연결되는 부분인데 너무 도식화해서 생각해왔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파악이 쉬운 건 아니지만 그런 노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물론, 그걸 도움받기 위해서 이런 책들을 열심히 읽게 되는 거지만.

정도전에 대한 평가가 새롭지는 않았지만, 그걸 설명해주는 논리를 일종의 자본주의적 가치관에서 제시해준 게 독특했다. 민심과 하나되어야 하는 왕권의 입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는 이기기 마련인 신권이 가진 기득권의 경쟁력. 살벌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논리 앞에서 씁쓸함을 느낀다. 자본주의 경쟁이 미덕인 양 평가되는 오늘날의 서민이 조선의 백성만큼이나 가엾게 느껴져서.

양녕대군에 대한 평가도 신선하진 않았다. 드라마 대왕 세종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로서는 양녕대군에 대한 과도한 포장은 '용의 눈물'에서 접했는데 이 인물에 대한 평가도 오늘날엔 좀 수정된 게 아닐까 싶다. 

신숙주 편도 그가 탁월한 외교관이었다는 얘기를 이미 접했었기에 놀랍지 않았지만, 서술 과정에서 일본과 대마도, 그리고 우리와의 관계 등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게 큰 소득이었다. 그리고 사육신이든 생육신이든, 일반 백성들의 이익과는 아무 관계도 없었다는 얘기에도 동의한다. 대의명분뿐인 북벌이 일반 백성들과 전혀 무관했던 것처럼.

연산군 편도 정도전 때처럼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는가의 관점에서 접근했다. 비교 예시로 박정희를 들었는데 너무 적절한 표현인지라 밑줄을 박박 그었다. 오늘날 박정희 향수에 젖어 마치 '성군'인 양 떠받드는 사람들은 모두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다. 혹은 그렇다고 믿고 있어야 정신이 망가지지 않는 사람들. 우리가 배운 훈구파의 사림파의 대립 구도에선 마치 사림파가 선인양 포장되기 마련이지만, 부패의 정도 차는 있어도 백성 입장에서는 50보 100보였을 것이다 훈구 세력도 처음부터 부패했었던 게 아닌 것처럼, 사림파도 뒤로 가면 얼마나 어이 없게 망가지던가.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얘기도 잘 들어맞는 듯하다. 사림파를 진보 세력으로 볼 수 있는가는 좀 생각해봐야겠지만.

윤원형 편도 흥미로웠다. 그가 서얼차별을 완화하기 위해서 애썼다는 것은 다른 책에서 이미 보긴 했는데 역시나 이 책은 비유가 탁월하다. 예를 들면 '유능한 인재를 집안에서 썩힌다는 측면에서 보면 사회적 손실이고, 똑똑한 사람을 불평분자로 만든다는 측면에서 보면 사회적 위협이었다.'라는 대구가 훌륭하고, 적자보다도 더 똑똑하고 글을 잘 아는 자식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할 때 아비가 느끼는 안타까움에 대한 예시도 적절했다. 그가 비록 외척으로서 권력을 손 안에 틀어쥐고 전횡을 일삼았던 것까지 미화시킬 순 없지만, 서얼허통법 자체는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움직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연말이면 늘어나는 졸부들의 고아원 방문이 몹시 속보이는 짓일지라도, 그마저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게 훌륭한 거고, 대개 그걸 욕하는 사람은 남을 위해서 동전 한닢 내놓지 않는 사람들이 아닐까?

퇴계 이황의 얘기도 재밌었다. 그가 전면적으로 관직에 나가서 뜻을 펼칠 만큼의 그릇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렇게 미적지근하게 관직에의 미련을 못 버리던 사람이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오늘날 그에게 주어진 이미지가 실제 그의 모습과 많이 다르다는 생각에 쓴 웃음이 나온다. 임금의 시야에서 멀어지면 무려 '뒷북'성 상소문까지 올려 날 좀 봐달라 떼 쓰는 천원 지폐의 주인공이라니! 물론, 그런 그의 처세가 일방적으로 비난 받을 성질은 아니다. 다만 우리에게 각인된 이미지와 사뭇 다르기 때문에 당황스러울 뿐. 대유학자로 불리는 인물도 사실은 인간이었다는 당연한 깨달음과 함께...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꽤 충격적이었다. 그를 가리켜 실패한 개혁가로 부르는 데에 별 이견이 없음에도, '역사의 죄인'이라고 부르니 마음이 좀 아팠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불운했던 일생에 연민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가 지적한 대로 개혁이 실패하면 그 후폭풍은 개혁 이전보다 더 심각해진다는 것을 우리가 경험으로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가혹한 평가가 서럽긴 하지만 반박은 못하겠다. 그 영민했던 군주가 폐모살제와 과도한 궁궐 건축으로 자충수를 두며 무너진 것을 보면 인정하긴 싫지만 그게 광해군의 한계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만약 다른 군주가 그가 지은 죄몫으로 돌을 맞았다면 적어도 광해군처럼 쫓겨나진 않았겠지만, 그 역시 그 시대의 형편에 따른 광해군의 운명이었을 테니까. 더불어, 돌아가신 노무현 전대통령이 자꾸 생각난다. 실패한 개혁가였다고 말은 해도 감히 '역사의 죄인'이라고는 결코 부르기 싫지만.

김상헌은 몹시 싫어하는 인물이다. 그가 아들 앞에서 자살 소동을 벌였던 '쇼'를 인조실록에서 읽으면서 오만가지 정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송시열이 그랬던 것처럼 앞 다르고 뒤 다르단 생각을 했었다. 이 책에선 좀 더 자세한 설명이 곁들여졌는데, 그가 척화파의 대표주자로 인식하게 된 근거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폭소를 쏟고 말았다. 이렇게 비겁하고 소심한 사람이 그렇게 강직한 인물로 둔갑을 했다니, 천 년 묵은 여우가 꼬리를 내리겠다. '1637년 병자년'에 대한 기술도 놀라웠다. 그동안 양력과 음력이 혼용되어서 실제 연도와 다른 시간 대를 추정하게 했으니 어마어마한 오류다. 남한산성에서 그토록 추위에 떨었던 임금과 백성들의 모습이 족히 상상이 간다. 

송시열 편은 이덕일 씨의 주장보다는 다소 완화된 표현을 썼지만 근본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고 여긴다. 다만 효종이 정말 북벌을 원한 것이 아니라 왕권강화가 진짜 목적이었다는 설명은 김종성 저자에 동의한다. 

정조 편에서 그를 조선 중흥의 르네상스 군주이기 보다 한중일 르네상스 경쟁의 낙오자라는 표현은 꽤 충격적이었다. 정조에 대한 일종의 로망과 연민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더 그럴 것이다. 표현도 충격이었지만 그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당시 세계사 속의 르네상스 기운이었다. 동양과 서양이 다 함께 문화 경제적으로 엄청난 비약을 보여준 시기라는 것. 일본에게 있어 '통신의 나라'는 조선과 오키나와고, '통상의 나라'는 네덜란드 뿐이었다는 설명도 인상적이다. 적절한 비유와 '대구'가 김종성 저자의 장기인 듯하다.
 
'결과'를 이미 아는 우리로서는 정조의 개혁 정책이 많은 부분 실패했다는 것을 안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후계자가 지나치게 어렸다는 것 자체는 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그 후계자를 뒷받침해줄 세력이 너무 빈약했다는 것은 그에게 책임의 소지가 분명히 있다. 그가 집권했을 때 얼마나 힘이 없었는지, 얼마나 오래도록 신변의 위협을 받으며 힘겹게 왕권을 키우려고 노력했는지를 생각한다면 변명의 여지도 충분하지만 그 역시 그의 숙명이었을 것이다. 광해군의 불운과 마찬가지로. 

나로서는 그의 한계를 카리스마 넘치는 제왕적인 군주 주도하에 단행하는 전면 개혁을 뛰어넘는 모델을 찾지 못한 것을 들고 싶다. 사실, 그 모델이란 국민이 나라의 주인(민주주의)이 되는 것인데 그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밖의 일이라는 것 역시 동의하지만. 그는 혁명적인 새 시대를 꿈꾸지 못했고, 개혁을 완수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더 안타깝고... 저자 분이 왜 그를 한중일 르네상스 경쟁의 낙오자라고 했는지는 직접 확인해 보길 바란다. ^^

김대건에 대한 평가는 더 보탤 것도 없이 저자의 시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황사영의 백서 사건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데 김대건 신부 역시 서양 침략에 이용당했다고 생각하니 지나치게 씁쓸하다. 더군다나 그 중간 도우미로 '종교'가 이용당했다는 것에 더더욱. 그리고 그런 일은 비단 그때뿐 아니라 지금도 진행되고 있으니......

흥선대원군이 꽉 막힌 강경 쇄국론자라는 시각은 이제 많이 수정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가 물리친 상대가 미국이었다는 점에서 과도한 비난을 받고 있다는 저자의 진단에 또 따끔하니 아프다. 그때의 전투를 과연 '이긴' 전투로 생각할 것인가는 둘째 치더라도 우리 사회의 몰상식할 정도의 미국 충성과 사랑에는 어떤 약도 듣지 않는 것인가 묻게 된다. 맙소사!

다음 인물은 명성황후다. 요약하자면 명성황후는 고종을 뒤에서 움직인 실세가 아니라, 고종 자신이 진짜 실세라는 것,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과장되었다는 것이다. 명성황후에 대한 일간의 시각이 과장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는 동의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민씨 척족들이 주도권을 잡고 마구 흔들었던 점들이 상쇄되지 않고, 고종의 친정 후의 정치를 후하게 평가하기도 어렵다. 재정 면에서 보았을 때 흥선대원군 치세 10년 동안과 고종 친정 이후의 나라 살림은 무색할 만큼 차이가 크다. 거기에 왕실이 솔선수범(!)해서 사치부리고 매관매직을 장려한 것은 또 어찌할 것인가.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것은 고종 뿐이었다는 주장은 솔깃하다. 그런데 최고 실세가 진짜 고종이었다면, 고종이 진정한 브레인이었다면, 궁궐까지 들어와서 칼부림한 일본은 왜 민비를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을까. 민비가 그에게 큰 도움이 되는 인물이 아니었다면 민비를 죽이는 무리수를 과연 두었어야 했을까. 고종의 외교 노선을 세력균형정책이라고 했지만, 이 이권 저 이권 모두 빼주고 외세를 툭하면 끌어들이는 것을 균형잡힌 외교라고 부르는 데에는 좀처럼 동의하기 어렵다. 풍전등화 같은 나라의 위기 앞에서 군자의 도를 논할 순 없지만 비겁하고 무기력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가 처세에 능한 인물이라고 가정을 해도, 당시 상황으로서는 그게 최선이었을 거라고 후하게 생각하려고 해도, 그가 정말 지키려고 한 게 조선의 안녕인지 그 자신의 안위인지 재차 물어보게 된다. 

명성황후에 대한 통념의 수정은 뮤지컬에서 보여주듯이 잔다르크 식의 구국영웅적 시각이어야 하지 않을까. 고종을 조종할 만한 능력을 가졌는지 여부보다 말이다. 그리고 정말 고종은 국제정세에 밝았던 무능하지 않은 군주였을까? 이 책의 주장만으로는 아직 동의하지 못하겠다.

마지막 인물은 김옥균이다. 그에게 붙은 꼬리표 '친일파'라는 명칭의 한계와 부당함을 설파하고, 그에게 더 적절한 이름은 '반청파'라는 게 핵심 내용이다. 모두 동의한다. 일본에 대한 우리의 감정이 우월감과 멸시, 경계심과 적대심, 자신감, 열등감, 증오심, 그리고 恨에 이르기까지 복잡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잘 풀어주었다. '친일 인명 사전' 소동 등을 생각해 보면 '친일파'라 마땅히 손가락질 받아야 할 사람이 아직도 돈과 명예를 거머쥐고 이 나라의 실세가 되어 있는 게 화딱지 나고, 김옥균처럼 부당하게 친일파 대우를 받는다는 것에 또 한숨이 나온다. 그가 젊은 혈기에 지나치게 일을 서둘렀고, 준비가 부족했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지만 일본과 친했다를 넘어 일본에 나라를 팔아넘긴 매국노급으로 취급되는 건 결코 옳지 않다. 

이 책에는 기존의 시각vs실제 모습(으로 추정되는 평가)를 대립 구성으로 서술했는데, 어떤 인물들은 기존의 시각을 포함해서 저자의 시각으로 확대된 모습으로 평가받는 게 마땅하고, 또 어떤 인물은 정 반대의 성격으로 알려져서 수정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옛날 일이고 옛날 사람일 뿐이라며 일축하고 넘어가기엔 그 역사적 진실이 오늘날에도 지독할 정도로 되풀이 되고 재현된다는 점에서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역사의 한쪽 얼굴만 본 것은 아닌지, 다른 쪽 얼굴은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아닌지 재고해볼 일이다. 그 관점에 이 책이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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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3-18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꽤 구미가 당기는데요,, 엊그제 주문했는데, 거기에 보관함과 장바구니에 또 책이 차있는데...
이렇게 구매하고픈 책이 많다니 큰일이예요... ㅠㅠ

마노아 2010-03-18 21:42   좋아요 0 | URL
책을 거의 사재기하다시피 하는 우리들의 중독성은 이제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듯해요.
이거 불치병이에요.ㅜ.ㅜ

L.SHIN 2010-03-18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마노님은 보기 편하라고 글자에 흰색 바탕칠을 한 거 같아요.
근데, 전 바탕화면의 흰색-푸른색 부분을 지날 때, 흰 바탕칠이 흰 바탕에 스르르- 사라지는게 재밌어서
계속 스크롤바를 드래그질 하면서 놀고 있어요. 아하항항~( -_-)

마노아 2010-03-18 21:42   좋아요 0 | URL
아앗, 그게 실수로 설정이 됐는데 해제를 못해서 저리 되었답니다...;;;;
그런데 재밌었다니 다행이네요. 소 뒷걸음 치다가 쥐 잡았어요.^^ㅎㅎㅎ

이매지 2010-03-18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나 마노아님이나 기존의 이론을 까는(?) 책을 ㅎㅎㅎ
전 지금 <조선의 힘> 읽고 있는데, 여기도 광해군에 대한 평가가 저 책과 비슷하네요.
광해군의 궁궐 공사를 MB의 4대강 사업과 비교하기까지;;

마노아 2010-03-19 10:06   좋아요 0 | URL
이 책 몇 달 전에 읽었는데 출간 전에 쓴 리뷰라서 혹시 뭔가 수정됐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지만, 아마 그닥 차이가 없을 것 같다는 믿음(?)으로 그대로 올렸어요.
아, 근데 광해군과 MB의 4대강을 비교했다고요? 버럭이에요..ㅜ.ㅜ

turnleft 2010-03-19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에서 역사 전문가 냄새가 폴폴 나는데요? ^^

마노아 2010-03-19 10:07   좋아요 0 | URL
과찬의 말씀을 하십니다.^^;;;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 이덕일의 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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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역사 저술가인 이덕일씨의 저술 목록들은 꽤 방대하다. 더구나 이 분야 다른 서적들에 비하면 절판본들이 수시로 개정판으로 다시 나온다는 점에서도 남다르다. 어제도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이 개정판으로 나왔다. 단순히 표지나 제목만 갈아타는 것은 아닌 듯하다. 목차를 보니 내가 갖고 있는 구판보다 2개의 소제목이 추가되었는데 분량상으로도 40여 페이지 정도 추가된 듯하다. 그 정도 성의는 보여야 하지, 암... 이러면서 이 책을 다시 들여다 본다.  

책은 모두 네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기실, 이전에 주장했던, 혹은 책에서 다루었던 주장들의 반복이기는 하다. 하지만 묻지마 재탕은 당연히 아니다. 반복된 주장은 그만큼 강조하는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고, 저자의 연구 성과에 따라 논박의 근거는 더 촘촘해질 수 있다. 큰 주제 네 가지를 먼저 살펴보자.

1부 한사군은 한반도 내에 존재했는가? 
2부『삼국사기』 초기기록은 조작되었는가?
3부 노론사관은 어떻게 조선 후기사를 왜곡시켰는가? 
4부 독립군의 항일 무장투쟁은 존재하지 않았는가?

네 개의 주장은 기실 하나의 주제로 통합된다. 아직도 떨쳐내지 못한, 혹은 떨쳐낼 의지가 전혀 없는 식민사관의 줄기라는 것. 자국의 역사를 확대 포장하여 신화로 만드는 것은 당연히 지양해야 하고 경계해야 마땅하지만, 자국의 역사를 일부러 축소 은폐하는 것 역시 지탄받아야 하지 않을까? 주장하는 근거에 대한 반론은 제기할 수 있지만, 우리 고대사가 이러했다, 우리 영토가 이러했다... 라는 얘기만 나오면 무조건 민족주의 국수주의의 산물로만 보는 것도 곤란하다.   



저자가 사료를 들어서 따박따박 따지고 들며 한사군의 위치를 추적한다. 이병도와 그의 제자들이 추종하는 쓰다 소우키치의 식민사관의 허술하다 못해 심한 비약들을 성실히 반박한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북한 학계의 연구 성과도 충분히 고려해야 하건만, 북한의 주장이기 때문에 무조건 덮어놓고 거부하는 자세는 정말 곤란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90년대 이후 주체사상을 강조한 나머지 황당하게도 평양에 조성된 단군릉 같은 것은 걸러들을 필요가 있지만...;;;

개인적으로 두번째 주제인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은 무척 재밌게 읽혔다. 더불어 식민사관 뺨치는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 연구 결과는 분통을 터지게 만들었는데, 국민 혈세가 이렇게 농단당하고 역사가 마구 짓밟히는 데에 참담함을 느껴야 했다.  

아울러 국정 교과서의 엉터리 서술들은 거듭해서 읽어도 역시 마찬가지로 울화가 치미게 만든다. 내가 6년 동안 마주한 국사 교과서의 서술도 그때그때 조금씩 바뀌어 갔는데, 그것이 새롭게 발견된, 혹은 새로운 연구 성과로 내용이 추가되거나 수정된 것이 아니라 주먹구구식으로 짜맞춰진 서술이라면, 그 책을 토대로 역사를 공부하는, 또 주입받는 이 나라 학생들은 보통 가여운 게 아니다. 이러니 역사 과목은 만년 암기 과목으로 눈총을 받고 기피 대상이 되고 만다.  

   
 

삼국사기의 정확성은 1971년 우연히 발견된 충청남도 공주시의 백제 무령왕릉 지석에서도 여실히 입증되었다. 이 릉이 무령왕의 무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삼국사기 덕분이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에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고 새겨져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령왕조'는 "왕의 휘는 사마인데, 혹은 융이라고도 한다"고 적혀 있어서 무령왕의 무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는 무령왕이 재위 23년(523) 5월 "세상을 훙하셨다"고 전하는데, 무덤에서 나온 지석에는 "계묘년(523) 5월 7일 임진일에 붕하셨다"고 적혀 있다. 김부식은 황제의 죽음을 뜻하는 붕만 제후의 죽음을 뜻하는 훙으로 바꾸었을 뿐 내용 자체는 사망월까지 정확하게 기재한 것이다. 이를 통해서도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의 허구성과 악의적 왜곡을 여실히 알 수 있다. – 203쪽

 
   

김부식이 사대주의자였던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저작물까지 함께 폄하되는 건 옳지 않다. 삼국사기의 정확성은 위에서 제시한 무령왕릉뿐 아니라 광개토대왕릉비문에서도 여실히 파악된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같은 주장의 뿌리인 쓰다 소우키치의 고민에 먼저 접근해야 한다.  

   
 

실증주의를 표방한 쓰다 소우키치에게는 고민이 있었다. 일본서기를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허위사실이 많이 발견된 것이다. 쓰다 소우키치는 일제 식민통치를 위해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조작으로 몰았지만 일본서기를 연구할 때는 진지했다. 그 결과 쓰다 소우키치는 1942년 비공개재판에서 금고 3개월, 집행유예 2년의 판결을 받았다. (232)
일본 제15대 오진천황 이전의 천황들은 그 실재가 불분명하다는 쓰다 소우키치의 말이 황실을 모독했다는 것이다. 쓰다 소우키치가 대표적 황국사관론자라는 점에서 이는 일본서기가 갖고 있는 고민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제14대 쥬아이천황까지는 아무리 찾아도 흔적이 없다. 일본서기 초기기록은 사실로 볼 수 없는 내용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주갑제’가 등장한다. 주갑이란 환갑, 회갑과 같은 말로 60년을 뜻한다. 일본서기는 120년 정도를 끌어내려야 사실과 들어맞는다. 일본서기는 유랴쿠(21대 천황) 20년(476)이 되어서야 비로소 삼국사기와 연대가 맞아 들어간다.일본서기는 삼국사기와 비교해 그 진위를 가려야 한다. 삼국사기가 진위를 판정하는 저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주류 사학자들은 거꾸로 삼국사기에 주갑제를 적용해 시기를 끌어내렸다. 삼국사기는 백제의 온조왕이 재위 27년(서기9) 마한을 정복했다고 기록했는데 이를 3주갑(180년) 끌어내려 초고왕 24년(서기 189)의 일로 보거나 4주갑(240년) 끌어내려 고이왕 16년(서기 249)의 일로 본다. 심지어 6주갑 끌어내려 근초고왕 24년(서기 369)의 일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180년에서 360년 사이를 오간다는 사실은 주갑제가 아무런 원칙이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233)

 
   

고고학적 유물로도, 1차 사료로도 파악이 되고 있는 것들을 식민사학의 후예인 주류 사학자들의 입맛에 따라 우리 역사가 부정되고 있다는 건 지극히 비극적이다. 더 큰 비극은 그같은 일이 여전히 진행형이고, 앞으로도 걷어내기란 참 힘들다는 현실적 자각이다.

3부 노론사관의 조선 후기사 왜곡 문제는 이미 수차례 반복해서 언급했었다. 아마 이 책을 나오게 만든 가장 큰 동기가 되어준 건 새롭게 발견된 정조의 어찰 때문이지 싶다. 노론 영수 심환지와 주고 받은 편지의 내용을 빌미 삼아 저자를 가장 유명하게 만들어준 '정조독살설'에 대한 일제 공격이 감행되었는데, 꽤 흥분했을 법하지만 나름 감정을 누르고 저자는 다시 또박또박 반박을 한다. 제시된 것들이 정조독살설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증거가 되는 거라고. 

전문가가 아닌 내가 생각하기에도, 새롭게 발견된 편지들이 당시 정조와 노론 신하 사이의 어떤 관계에 대해 추정할 수 있는 하나의 자료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들에 의해서 정조가 죽임당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보기는 비약이 심해 보인다. 즉위 전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껴왔던 정조는 즉위년부터 국왕 살해 기도와 맞닥뜨리는 위기 속에서 꾸준히, 그리고 천천히 왕권을 강화시키고 군사력을 길러냈다. 그리하여 노론 벽파들은 현실적으로 군사 쿠데타로는 정조를 끌어내릴 수 없었으며 동시에 자신들의 기득권은 물론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수 있다. 그러나 정조 역시 그들을 일방적으로 제압할 만큼의 압도적인 힘을 갖추지 못했다. 정조와 심환지 사이의 편지들은 그렇게 온전히 상대를 제압하지 못한 그들이 대안으로 내놓은 일종의 '짜고 치는 고스톱'으로 보인다. 그런 맥락을 주류 사학자들이라고 몰랐을 성 싶지는 않다.  

더군다나 정조가 죽기 직전까지 자신이 죽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점, 정조 사후 정순왕후와 심환지 등이 보여준 행보를 생각하면, 서찰이 심환지가 정조의 충신이었다라는 비약은 거의 엽기적으로 보인다.  

이런 노론 정치 세력에 대한 역사 왜곡은 결국 다시 식민사관으로 귀결된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인 독립운동사 말살 정책은 읽는 내내 몹시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다.   

   
 

‘복도와 응접실, 침실, 아이들 방’은 물론 ‘니스와 페인트’라는 도료 이름까지 상세하게 적은 국사 교과서가 지면이 부족해 삼부의 활동내용을 일체 적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기술한 속내는 조선시대의 상소문의 표현을 빌리면 “길가의 돌도 그 마음의 소재를 아는 것”으로, 식민사관이 뿌리 깊게 박혀 있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기술이다. (328)

 
   

근현대사 교과서를 보면 실제로 독립운동의 무장투쟁 부분은 몹시 축소되어 있고 건너뛰기가 많다. 반면 당시의 생활상은 무척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 저간의 의도를 파악해 보면 일제 식민살이가 우리에겐 '축복'이었다고 말한 K대 교수님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시에는 그 교수님 한 사람의 망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말로 표현하지 않을 뿐, 그같은 시각을 가진 주류 사학자들이 너무 많은 듯하다.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3부 조직에 대한 부분은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근현대사의 대목이다. 여기쯤 오면, 근현대사를 선택해서 수능을 치르려고 결심했던 아이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간다. 교과서 기술 자체가 느닷없고 뜬금 없기만 하다. 이 부분은 현대사 연구 자체가 금기시되었던 우리의 참담한 정치적 파탄의 비극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데, 부끄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독립운동사 연구가 금기가 되다 보니 정의부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인 ‘정의부연구’가 나온 것은 1998년이고, ‘참의부연구’가 나온 것은 2005년이다. 참의부연구는 그나마 참의장 김승학의 증손자가 만학으로 역사학에 투신해 거둔 성과이고 신민부는 아직도 박사학위 논문 하나 없는 형편이다. (334)

 
   

독립유공자들이 비참하게 살다가 조상을 원망할 지경에 이르게 만드는 나라에서 친일부역자들의 후손이 떵떵거리고 살며 친일인명사전에 이름 한 줄 올라간 것 마저도 치러야 할 대가라고 생각하지 않는 나라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 후손의 도리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도리로서 참으로 부끄럽기 그지 없다.    













한일합방조약으로 일제로부터 작위를 수여받은 명단을 보면서도 역시 얼굴이 확확 달아오른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왕실 인물들과 무수한 노론 인사들... 그 이름이 부끄러웠다면 역사를 왜곡할 생각을 할 게 아니라 반성하고 참회할 생각을 해야 하는데, 얼굴짝이 두꺼운 그들에게는 너무도 소원한 일이다.  

비록 내가 이덕일 씨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이 책에서 펼치는 저자의 모든 주장에 대해 완벽하게 다 수긍을 하는 것은 아니다. 간혹 이 주장은 좀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겠구나... 혹은 여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라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전체적인 동의에 비하면 크지 않은 비중이다. 이름 석자만 보고 무조건 덮어둘 것이 아니라 좀 더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였으면 한다. 비판은 그 다음에 하시라.  

덧글) 오타가 몇몇 있다. 분명 다음 쇄가 찍힐 터, 수정 반영되었으면 한다.  

200쪽과 201쪽에서 광개토대왕을 '광대토대왕'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266쪽에 학문권력이 얼마나 위허한 지경>'위험한' 지경
318쪽. 아래의 목록은 ‘한일합방 공로작 수여자들의 본관과 소속 당파’는....으로 이어지는 문장이 몹시 긴데, 자연스럽게 읽히지 않는다. 문장을 끊든가 조사를 바꿔줘야 할 것 같다.
328쪽에 복도와 응접실, 미실, 아이들 방.... 중에서 '미실'은 설마 선덕여왕의 그 미실 같지는 않고 응접실의 오기가 아닐까 싶다. 본문 소개에는 '응접실'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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