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호에서 보낸 1460일 - 사상 최악의 전쟁, 제1차 세계대전의 실상
존 엘리스 지음, 정병선 옮김 / 마티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원한 건 일차 세계대전의 큰 그림을 보는 것인데 이 책은 참호전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한권에 걸쳐 설명하고 있다. 내가 원한 종류의 책은 아니어서 살짝 아쉽지만 사진들은 유용하게 보았다. 이 책보다 다비드 칼리의 `적`이 참호전과 전쟁의 참상을 더 짧고 굵게 설명하는 듯하다. 아무래도 감정과 감성을 건드리기 때문일 테지.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노아 2014-09-28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 찍어 형광펜 사용하는 건 참 편리하다. 사진 가로로 찍어도 제대로 올라가려나? 테스트해봐야겠다.
 
옷장 속의 세계사 창비청소년문고 10
이영숙 지음 / 창비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작 '식탁 위의 세계사'를 재밌게 보았다. 덕분에 기대치가 높아져서 이 책에 대한 만족도는 다소 떨어졌지만 다음 시리즈가 또 나온다면 기꺼이 지갑을 열 생각이다. 


앞의 책이 '식탁' 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먹거리에 얽힌 세계사였다면, 이번 책은 옷장 속, 그러니까 옷에 얽힌 역사를 다루고 있다. 


· 청바지: 금광을 찾아서!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 
· 비 단: 실크로드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 벨 벳: 짧았던 프라하의 봄과 부드럽게 이룩한 벨벳 혁명 
· 검은 옷: 블랙 마니아 펠리페 2세, “검은 옷만 입어라” 크롬웰 
· 트렌치코트: 전쟁의 참호에서 피어난 멋 
· 마녀의 옷: 잔 다르크가 마녀라고? 
· 바 틱: 인도네시아 인들의 삶과 함께하는 염색 옷감 
· 스타킹: 합성 섬유의 왕, 나일론 
· 비키니: 비키니가 섬 이름? 핵 실험의 진원지! 
· 넥타이와 양복: 말더듬이 왕 조지 6세, 양복 입은 황태자 히로히토


아마도 내가 덜 재밌게 느낀 것은 기대치도 있지만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책이기 때문에 무척 쉽게 서술되어 있다. 엄마가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청바지를 이야기하면서 미국의 서부개척사, 골드 러시를 언급하고 있다. 당연히 이곳에서 희생된 원주민들 이야기를 피해갈 수 없다. 



땅을 향한 인간의 욕망을 떠올려 보니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가 떠올랐다. 한껏 욕심을 부렸지만, 기껏해야 제 한몸 뉘일 관 자리 만큼밖에는 얻지 못하면서 욕망의 노예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 말이다. 


지식채널도 떠올랐다. 지식e를 처음 읽었을 때 맞닥뜨린 첫 영상이었는데 무척 감동적이었다. 



몇달 전에 죠니 뎁 주연의 영화 '론 레인저'도 바로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슬프고 우스꽝스러운 인디언 역의 죠니뎁이 떠오른다. 아,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 주연의 '파 어웨이'도 이 시대를 이야기 했지. 아마 찾아보면 더 나올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영화도 같이 보고 이야기도 나눈다면 더 좋겠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으로도 통한다. 참호 속에서 대치하고 있으니 전쟁은 길어지고 양측의 피해는 더 커져간다 섣불리 나올 수 없고, 섣불로 공격하기 힘든 이 구도를 깨게 만든 것은 탱크였다. 사진으로 보니 무시무시한 위력이 더 크게 느껴진다. 더불어, 미순이 효선이도 생각나네....



다비드 칼리의 '적'을 같이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바로 이 전쟁 중의 참호를 소재로 한 그림책이다. 아주 짧지만 깊은 여운을 남겨주는 좋은 책이다. 더불어 '크리스마스 휴전'도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 역시 지식채널로도 접할 수 있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제목이 뭐였더라... 아, '메리 크리스마스'였다. 다이앤 크루거 주연의...


할로윈 망토를 가지고 펼쳐낸 이야기의 주인공은 잔다르크다. 마녀로 몰려서 화형당한 비운의 영웅! 

이 책에서는 12세에 계시를 받았다고 하고, 인터넷 검색에선 16세로 나오고, 영화 잔 다르크에선 13세로 나온다. 도대체 어느 나이가 맞는 겐가!! 뭐, 크게 차이가 나는 건 아니지만 느낌으로는 제법 차이가 나서 말이다. 예전에 윤석화 씨가 뮤지컬 명성황후를 공연할 때 인터뷰에서 명성황후를 가리켜 한국의 잔다르크라고 했던 게 떠오른다. 그녀의 죽음이 안타깝고 참혹했지만, 그래도 잔다르크가 무덤에서 일어날 일 아닐까... 


아, 그러고 보니 또 가지를 치게 된다. 근래에 들었던 팟캐스트 방송 중에서 명성황후가 사실은 살아서 러시아로 도망을 갔다고 주장하는 분이 계셨다. 제시하는 근거들이 아주 황당하지는 않았는데 이분이 방송에서 자꾸 반말을 해서 기분 나빠서 더 이상 듣지 않는다.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니 다시 돌아가 보자. 


인도네시아를 식민 지배했던 네덜란드. 본인들도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았으면서 인도네시아를 아주 탈탈탈 털어 먹었다. 이 그림처럼!



그렇다면 인도네시아는 온전히 희생양인가! 그럴 리가! 인도네시아도 주변 약소국을 털어 먹었다. 그 과정에서 독립한 게 동티모르 아닌가. 이 부분을 읽으면서 김구 선생님이 떠올랐다. 


-백범 김구선생의 문화강국론 중에서-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는 우리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힘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도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이런 게 아름다운 나라인 것을... 오늘 이 이야기를 하다가 조카가 '아름다운 나라'면 미국 아냐? 라고 물었다. 하하핫, 글자가... 그러네. 거긴 쌀이 많이 나는 나라야...라고 고쳐줄까 하다가 관뒀다. 거기든 여기든, 제발 진정한 의미의 아름다운 나라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비키니 수영복의 이름은 비키니 섬에서 따왔다. 당시 이곳에서 이뤄진 핵 실험의 충격에 빗대어 새로운 옷을 강조한 것이다. 거대하다 못해 차라리 웅장하기까지 한 버섯구름이라니... 저자가 말한 것처럼, 이 장면이 기가 막힌 것은 이 실험이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이듬해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한순간에 '섬멸'해 버리는 위력을 보았으면서도, 그후 얼마나 많은 핵무기가 개발되어 왔던가. 그러니 그게 우리 것이든 남의 것이든 모두 반대해야 마땅하다. 


이 책 168쪽에는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일본에 있는 여러 도시 가운데 히로시마가 목표가 된 이유는 그곳에 일본의 군수 산업체가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해. 하지만 그 외에도 그곳이 아직 폭격을 받지 않은 평화로운 도시이기 때문에 핵폭탄의 위력을 더 잘 알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히로시마가 평화로운 도시였기 때문에 위력을 더 잘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나도 알아왔는데, 여기에 군수 산업체가 많은지 몰랐다. 그렇다면 왜 진즉에 군수산업체가 많은 이곳이 폭격이 되지 않았을까? 핵무기 아닌 다른 무기로 말이다. 지리적 요인이 있나? 문득 궁금해졌다. 


넥타이와 양복 편에서는 영국의 에드워드 8세, 스스로 왕좌에서 내려온 뒤 윈저공으로 남은 이 사람을 주목했다. 윈저 공은 제법 근사해 보이는데 옆의 심프슨 부인은 좀... 표정 때문인가, 머리 스타일 때문인가... 아무튼 패션의 아이콘으로 보아주기는 좀 힘들어 보인다. 끙!



비교적 대륙 간 균형도 맞추어서 목차를 짠 듯하다. 재미와 정보, 그리고 감동도 함께 주려고 노력했고 활자 속의 역사가 아닌 우리의 일상 속 역사를 끄집어낸 것이 무엇보다도 마음에 든다. 시리즈에 탄력을 받아서 다음 이야기도 계속 나왔으면 한다. 신발장이라든가, 책상이라든가 뭐 더 아이디어 없을까? ^^


덧글) 56쪽 4줄에 '위치한 정책에 힘입어' 라는 표현이 나온다. '위치한 정책'이 뭔지 모르겠다. 단순 오타일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망찬샘 2013-10-19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리스마스 휴전을 지식채널로 만날 수 있군요. 아이들에게 그림책 소개할 때 함께 보여주면 참 좋겠어요.

마노아 2013-10-19 14:52   좋아요 0 | URL
학생들에게 '세바시'를 보여주면 이게 보통 15분은 되어서 지루해 하더라구요. 지식e는 5분 내외에 영상과 음악이 좋아서 반응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짬짬이 많이 보여주려고 하고 있어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 - 망국 - 오백 년 왕조가 저물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마지막 권이다. 20부작 마지막의 제목은 '망국'이다. 오백년 왕조가 저무는 모습을 지금껏처럼 최대한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묘사하려고 애썼다. 이미 '실록'이라고 부를 만한 재료가 없어진 상태이므로 다른 자료들을 참고해야 했다. 여전히 성실하게 기술했지만 19권과 마찬가지로, 아니 19권보다 더 '요약'에 치중하게 되었다. 그럼으로 가치가 떨어진다거나 재미가 덜하진 않다. 물론, '유머'는 다소 잦아들었다. 웃어가며 읽을 내용이 아니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름 깨알 같은 장면들은 다음과 같다. 


일본이 서양의 기술과 문화를 '폭풍흡입'하는 장면이다. 소화불량 걸리지 않았나 모르겠다. 급히 먹는 밥은 체하기 마련! 그리고 백성에게서 걷은 온갖 세금들이 중앙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중간에서 새는 장면을 그려냈다. 쪼옥쪼옥쪽옥!!! 귓가에 쪽쪽거리는 소리가 울릴 것 같다. 명성황후 시해 주도세력들의 면면을 살피는 장면에서 저 노래가락을 들어보시라. '독도는 우리땅' 곡조에 저 가사를 맞춰부르면 딱 맞겠다. 어이쿠, 끔찍한 가사다. 그리고 마지막에 원조 '일진회'를 바라보는 학교 일진들의 모습이다. 찌질하기는 둘 다 마찬가지다.-_-;;;


19편에서 갑신정변으로 끝났으니, 그 다음 대목부터 20권이 시작한다. 삼일천하로 끝난 개혁세력의 쿠데타는 조선이라는 이 작은 나라에 얼마나 많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가까이 있는 주변국뿐 아니라 바다 건너 멀리 있는 나라들까지 호시탐탐 저울질을 해가며 간을 보았다. 심지어 영국은 거문도에 불법 정박해서 무려 2년이나 버티는 안하무인을 보여주었다. 그나마다 청나라의 중재로 물러가는 사태가...ㅜ.ㅜ 나라꼴이 정말 한심하게 돌아가고 있다. 



러시하의 남하 기미에 영국이 발끈하는 것에서 고종과 민비는 러시아의 활용가치에 주목했다.(인아거일!) 그리고 왕과 왕비의 이런 행보에 청 측이 발끈했다. 임오군란 때 납치한 대원군을 귀국시킨 것은 바로 그 '경고'일 것이다. 연금상태로 보낸 수년의 시간 동안 대원군은 그 원망을 누구에게로 향했을까? 필시 며느리에 대한 분노가 컸을 것이다. 이해는 가지만, 그래도 그 분노를 좀 더 생산적으로 돌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이후 갑오개혁 때와 을미사변에 이르기까지 대원군이 보여준 족적은 무척 실망스럽다. 과거 카리스마로 이루었던 개혁의 성과마저 희석시킬 만큼. 둘 모두 빼어난 지략과 정치감각을 지닌 영걸들이었건만, 그 에너지를 서로를 할퀴고 깎아내리는데 소모적으로 써버렸다. 나라가 풍전등화였건만... 참으로 안타깝고 또 안타까운 일이다.


갑신정변으로부터 갑오개혁까지는 꼬박 10년의 간극이 있다. 그 기간동안 애초에 개화에 관심 많던 왕과 왕비는 이것저것 다채로운 시도들을 많이 하였다. 외국어 교육을 담당할 육영공원이 세워졌고, 기독교 포교도 허용되었으며 외국 선교사들이 세운 사립학교도 곳곳에 세워졌다. 근대식 병원 제중원도 들어섰고, 전신이 가설되어 빠른 통신이 가능해졌다. 경복궁에는 처음으로 전깃불이 들어왔으며 곳곳에 양옥집도 늘어났다. 이렇듯 겉으로는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지만 이 황금같은 10년의 시간 동안 조선은 크게 변신하지 못했다. 개혁 주체가 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개화에 맛들인 왕과 왕비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왕실의 유지였다. 그리고 이런 신념은 고종이 죽을 때까지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조선이 곧 자신이었고, 제국 역시 곧 황제였다. 조선을 지킨다는 건 자신의 왕권을 지킨다는 거였고, 그러니 왕권을 위협한다고 느껴지는 모든 것은 배척되어야 했다. 개혁 주도세력의 마음이 이럴진대 온전한 개화가, 개혁이 이뤄질 수 있었을까. 


물론, 조선은 근대화를 목표로 했던 나라가 아니었다. 자발적으로 근대화에 다가가는 기미는 보였지만 그게 목표가 아니었으니 그걸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흉볼 일은 아니다. 그런데 세상이 그렇게 두질 않았다. 제국주의 열강들이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며 마수를 뻗치는데 좁은 우물에 갇혀서 왕권 타령만 하고 있으니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갑신정변의 실패에서 위로부터의 개혁이 보여주는 한계를 실감했다. 그러니 십년 뒤 동학농민혁명에서 제대로 방향을 잡았더라면 주체적으로, 민중과 함께 하는 혁명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종은 자국 백성을 제압하기 위해서 외국 군대를 끌어들였다. 전근대적 사고를 가진 인물의 한계성을 아무리 염두에 두더라도 그에게 후한 점수를 줄 수 없는 이유이다. 


조선의 국운이 기우는 과정 속에서 양반 사대부들은 꾸준히 나라의 독립과 자주성을 위해 싸웠다. 그 공을 폄하하고 싶지 않다. 그들이 신분제 사회 속에서 절대적 '갑'의 위치를 휘두른 것은 사실이지만 망해가는 나라를 일으키려고, 이미 망한 나라를 되살리려고 재산도 목숨도 내던지며 싸워온 공도 큰 게 사실이다. 기왕에 전근대성도 좀 버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농학 농민국은 실전 경험이 풍부했다. 그들이 의병전쟁에 제대로 합류해서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었다면 일본과의 싸움은 보다 수월했을 것이다. 그러나 양반들은 천한 잡것들을 자신들의 무리에 끼워주지 않았다. 어이 없는 역량 분산이었다. 


개인적으로 명성황후를 그닥 좋아하지는 않는다. 고종과 함께 먹어야 마땅한 욕을 그녀가 독박쓰듯이 과하게 욕먹는 것도 인정하지만, 안 먹을 욕을 먹는 것도 아니다. 세조가 꽤 정치를 잘 하고도 안하무인 공신세력을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본인의 면죄부를 스스로 구겨버린 것처럼 명성황후 역시 민씨 척족의 전횡으로 백성의 고혈을 짜냈다. 집안 단속 못하고 그 장단에 춤을 춘 죄는 충분히 물어야 한다. 그러나 그건 조선 백성의 몫이었지 일본의 야만적인 테러로 갚을 게 아니었다. 조선의 처지만큼 비참한 왕비의 죽음이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공식적인 사과 한자락이라도 받아본 일이 있던가? 


제 나라의 궁궐 안에까지 쳐들어와 왕비를 시해하는 놈들에게 둘러싸인 고종의 공포가 충분히 그려진다. 오죽하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을 갔을까. 박수를 치긴 어렵지만 인간적인 동정은 일어난다. 일년 만에 환궁한 고종은 새로운 조선을 표방했다. 이른바 대한제국, 황제의 나라를 만든 것이다. 황제의 나라는 점점 번쩍거리게 되었고 그만큼 필요한 자금도 많았다. 자금은 어떻게 마련하는가? 다 매뉴얼이 있다. 그동안 매관매직을 비롯한 각종 불법으로 내탕금 쌓아두던 전력이 있지 않은가. 바로 이 과정에 적극 투입된 인물이 이용익이다. 



당장 주머니에 현금은 만들었지만 모두가 대한제국의 미래에 먹구름을 뿌리는 조치들이었다. 저런 걸 허용하는 황제나, 그걸 부추기는 신하나 오십보 백보다.



황제는 3만의 상비군을 만드느라 국가 재정의 40%를 소비했다. 그러나 이 정도 숫자는 국가 안보는 택도 없고 정권 안보를 위한 군대에 불과했다. 같은 시기 일본은 육군만 120만이었다. 하아...;;;;


현실적 힘의 불균형을 인정한 고종은 중립화 국가론에 관심을 쏟았다. 이 시기 열강들로 하여금 온갖 이권들을 넘긴 것은 그렇게 해서 중립화를 이루려는 고육지책일 수도 있다. 한편으로 이해가 가지만 그럼에도 당연히 씁쓸하다. 줄 것 다 내주고 그 다음은 어찌하려고? 조선에 무한대의 금과 은이 있는 것도 아니고 먹을 것 다 빼먹은 뒤 저들이 어떻게 나올지 아느냐는 것이다. 고종은 이렇게 당하고도 아직도 제국주의 국가들의 본모습을 눈치채지 못했다. 애석하고 답답한 일이다. 



이후 러일전쟁, 을사조약,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 정미 7조약 그리고 한일 강제 병합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근현대사 교과서에서 쭈우욱 보아온 일련의 사건들이 차례대로 등장한다. 사건의 요약에 집중해서 이전 편들에 비해서 저자의 빼어난 통찰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렇다고 교과서 수준의 요약으로 그친 것은 절대 아닌다. 시간 순서야 맞아 떨어지지만 보다 인과 관계가 뚜렷해서 이해를 크게 돕는다. 근현대사 교과서에 지친 수험생들은 조조록 20권으로 수능을 대비해도 좋겠다. 흐름을 쫘아악 파악하고 그 다음에 교과서로 돌아간다면 이 시기를 정리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나라 팔아먹는 놈들을 반복해서 보니 울화는 좀 치미겠지만.



우유부단의 아이콘 고종이 모처럼 단호한 모습을 보인 것은 강제 퇴위 때였다. 황제 자리에 대한 집착이라기보다 일본의 의도를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왕권과 황제권을 지키기 위해서 그동안 보여왔던 행보를 생각한다면 이때만 단호한 고종에게 고운 말은 나오지 않는다. 진작 좀 제발, 부디, 꼭 필요한 때에 그렇게 결단력과 행동력을 보였어야죠!!!


임진왜란 때도 그랬지만, 이 시기 망해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각지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다. 이런 조상을 두었다는 것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으로 거사를 앞두고 귀가한 일은 참...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조선이여, 조선이여...ㅜ.ㅜ


안중근 의사는 꼭 현장 사진을 갖다 놓은 것 같은 생생함을 안겨주었다.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장면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간지난다!라고 속으로 말해버렸다. 아, 이럴 때에 튀어나온 말이 간지라니...ㅜ.ㅜ 의사님께 면목 없습니다.



백발백중의 실력을 자랑했던 그는 이토에게 세 방을 먹이고, 혹시 그가 이토가 아닐까 주변에 있던 사람도 같이 저격했다. 저 중에 한 인물은 훗날 안중근에게 매료되어 자신에게 총알을 먹인 상대를 존경하기까지 했다. 이름은, 생각이 안 나는구나...;;;;


(뮤지컬 '영웅' 속 재판 받는 안 의사님!)


이토 히로부미는 죽었지만, 제2의 이토는 많았다. 조선은 끝내 일본에게 먹혔다. 500년을 넘게 이어온 왕조가 그렇게 스러져 갔다. 그러나 여기서 끝은 아니다. 쓰러진 나라를 다시 일으키고자 제 한몸은 물론 가족 모두를 희생하며 애써온 애국지사들이 넘쳐났다. 그후 35년 동안 쭈욱!



그렇게 힘써준 그 분들 중에는 해방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들도 있고, 해방된 조국을 만났으나 오히려 그곳에서 더 핍박받고 암살당한 인물들도 있다. 뿐인가. 친일파가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는 조국의 역사를 온몸으로 부대끼며 여전히 이어지는 가난과 모욕의 시간을 견디는 분들도 있다. 자랑스러운 조상님들 앞에 부끄러운 현실이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 또 다시 이런 국난이 닥친다면 그때 그분들처럼 온몸을 사르며 독립운동을 할 분들이 얼마나 있을까 싶다. 그럴 가치는 있는지도 묻게 된다. 씁쓸하고 고약한 오늘날이다. 


20권 시리즈가 드디어 막을 내렸다. 작가님처럼 독자도 역시 가슴이 벅차다. 이 시리즈를 십여 년간 지켜봐 오면서 많이 감동받고, 많이 웃었으며 큰 도움을 받았다. 작가님께도 독자로서 빚을 진 셈이다. 



원래도 좋아하는 역사지만 이 책으로 더 좋아졌다. 그리고 더 가까워졌다. 이토록 생생하게, 이토록 설득력 있게!

조선의 왕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맨 왼쪽부터 재위 순서대로 서 있다. 누가 제일 잘 생겼나~~~


정식 출간본이 나오기 전에 '스토리북'을 먼저 받았다. 이렇게 생겼다. 


똑같은 책인데 고종 그림만 빠졌다. 내부에 목차나 부록 등등이 빠져서 쪽수도 조금 부족하다. 



그림의 차이를 보시라. 색을 입힌 것과 입히지 않은 차이는 무척 크다. 게다가 기본 골격만 입힌 스토리 북에는 지도나 사진 등도 빠져 있어서 저 상태로는 확실히 완성에 부족하다. 이런 식으로 작업하는구나... 싶어서 신기하고 재밌었다. 그렇지만 독서는 정간본으로~


예약도서로 구매했는데 배송 지연으로 약간의 아쉬움을 남겼다. 그렇지만 오래 기다린 만큼 더 꼭꼭 씹으며 그 맛을 음미했다. 쓰고 독했지만 영양가 있었다. 몸에 좋은 약이다. 


이 시리즈가 끝나갈 때마다 이 작품 이후의 박시백 화백의 행보가 궁금해졌다. 지금껏 실록 공부하면서 쌓아둔 역량이 아쉬워서 이 기세를 좀 더 몰아 역사책 좀 더 써주셨으면 좋겠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이나, 해방 이후 정치사라든가... 관련 책은 많지만 이렇게 온 가족이 함께 보기 좋은 만화 교양 서적은 드물었다. 긴 시간 고생하신 작가님께 휴식은 필수지만, 충전이 된 다음에는 꼭 고려해 주셨으면 좋겠다. 


조조록은 진정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 작품을 생산시킨 기본 시작은 조선왕조실록이다. 조상님들의 놀라운 기록 정신에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한다. 이 나라를 자랑스럽게 만드는 한 축이 바로 이 대단한 역사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현 시대의 역사기록은 어찌 되어가고 있는지 되묻게 된다. 하아... 역시 부끄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사의 숲, 조선왕릉 (한글판)
국립문화재연구소 엮음 / 눌와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북한에 있는 왕릉 2기를 제외하고 서울 시내와 근교에 있는 왕릉 40기를 역사성과 문화재 관리의 행정적 편의에 따라 개별 능역을 포함한 왕릉군의 개념으로 나누면, 왕릉지구 18곳이 된다.
다시 서울 시내와 서울 동쪽, 서울 서쪽으로 나눌 수가 있다.
왕릉을 조성할 당시 도성인 한양을 중심으로 반경 4km 밖 40km 안에 왕실의 능역을 두도록 정한 국법이 있었다.
영월에 조성된 단종의 능은 예외로 하자.

조선왕릉은 죽은 자가 머물며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성역이라는 개념 아래 성과 속, 신분이라는 유교적 이념상의 위계질서가 반영되도록 능역을 조성하였다.
능역은 크게 능침(성역)-제향(성역과 속세가 만나는 공간)-진입(속세)의 세 공간으로 나뉜다.
능역 그 자체가 자연 환경의 일부라 생각되도록 전통적인 풍수사상에 따른, 능역의 자연 친화적인 조영 방식은 같은 동양권인 중국과 일본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함이다.

왕릉의 가장 핵심인 능침 공간은 오직 죽은 자를 위한 신성한 곳으로 산 자의 접근이 엄격히 제한되므로,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에 조성하여 다른 공간과 구별되게 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침 공간은 제향 공간인 홍살문 등에서 보면 시선이 차단되어 완전히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반면, 홍살문에서 참도로 이어지는 정자각에서는 능침 공간이 열려 보이도록 처리되었다. 능침 공간의 성역성과 신비감이 드러나도록 건축적으로 처리한, 조선왕릉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시각적 즐거움이다.

제1대 태조 건원릉
태조 원비 신의왕후는 제릉(북한 개성), 계비 신덕왕후는 정릉(서울 성북구)에 각각 모셔졌다.

건원릉은 고려왕릉 중 가장 잘 정비된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 제도를 따랐으나, 석물의 배치 등에 변화를 주고 봉분 주위로 곡장을 두르는 등 새로운 양식을 도입하여, 조선 능제의 표본이 되었다.

건원릉 봉분은 푸른 잔디가 아니라 억새를 사초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죽기 전 유독 고향을 그리워하였기에 태종이 고향인 함흥 땅에서 가져오도록 했다.
건원릉의 봉분은 조선왕릉 가운데 가장 높게 조성되었다.

제5대 문종 현릉
문종과 현덕왕후가 잠들어 있는 현릉은 두 개의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이 각각 자리한 동원이강릉이다.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은 다음 날, 24세 나이에 산후병으로 죽어 경기도 안산의 소릉에 묻혀 있다가 문종 사후 합장되면서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그러나 단종이 죽임을 당하면서 생모의 유해가 파헤쳐져 안산 바닷가에 방치되었다가 중종 때 복위되면서 다시 현릉으로 모셔졌다.

제14새 선조 목릉

선조, 원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이 일정한 거리를 둔 세 개의 언덕에 따로 모셔진 동원삼강릉으로, 유일한 형식이다.
'남우여좌'에 따라 제일 오른쪽이 선조, 가운데가 의인왕후, 왼쪽이 인목왕후 능이다.

살아서 금슬이 좋았더라면 모르지만, 살아서 내내 소 닭 보듯 한 부부라면, 죽어서 합장되거나 곁에 묻히는 건 어떤 기분일까. 과연 망자가 좋아할지 의문이다.

제 16대 인조왕비(장렬왕후) 휘릉

장렬왕후(1624~1688)는 원비 인렬왕후가 4남인 용성대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죽자 15세의 어린 나이로 44세인 인조와 가례를 올려 계비가 되었다.
인조 생전에는 임금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인조 사후에는 15년에 걸친 두 차례의 예송 논쟁으로 몸살을 앓았다.
임금의 명이 길지 않은 왕실에서 인조, 효종, 현종, 숙종 대까지 4대에 걸쳐 왕실의 어른 노릇을 했으나 개인적인 삶은 무척 외롭지 않았나 싶다.
눈보라 치는 왕릉의 모습이 장렬왕후의 마음을 대변하는 느낌이다.

제 18대 현종 숭릉

현종과 명성왕후의 쌍릉으로 조성된 숭릉이다. 홍살문 안쪽에서 정자각까지 곧게 뻗은 참도가 잘 드러나 있다.

참도는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박석을 깐 보도인데 높낮이가 다른 두 가닥으로 나뉜다. 높이가 한 단 높은 쪽이 신도이고, 낮은 쪽이 어도이다. 신도는 홍살문을 통과한 영혼이 들어오는 길이고, 어도는 왕 또는 제관이 영혼을 맞이하여 들어가는 길이다. 참도의 바닥이 거친 이유는 참도를 걸으면서 고개를 숙여 아래를 살핌으로써, 선왕의 영혼에 존경을 표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현종은 후궁도 없이 왕비 하나만 조강지처로 둔 임금이었다.
죽어서도 부부는 꼭 붙어 있다.
어쩐지 애처가보다는 공처가의 느낌이 강하다.
숙종은 아무래도 아버지보다 엄마 성격 닮았을 듯!

제21대 영조 원릉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가 잠들어 있는 원릉이다. 역시 쌍릉 형식으로 되어 있다.
원릉 앞으로 흐르는 금천과 곡장의 꽃담 장식이다.
엷게 굽이쳐 흐르는 금천과 그 위에 쌓인 눈이 아름답고, 꽃담의 자연스런 문양도 아름답기만 하다.
절대로 오버하지 않는 절제된 미의식이 수준 높아 보인다.

제24대 헌종 경릉

헌종은 효명세자(추존 문조)의 맏아들로, 아버지 효명세자가 요절함에 따라 순조의 뒤를 이어 8세에 왕위에 올랐다.
효현왕후와 계비 효정왕후 두 왕비를 얻었으나 슬하에 자손이 없었고, 궁인 김씨에게서 딸을 하나 얻었는데 그마저 일찍이 죽었다.
경릉은 헌종과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세 능이 한 언덕에 나란히 있는 삼연릉으로, 조선왕릉 가운데 유일한 형식이다. '남우여좌'의 형식에 따라 제일 오른쪽이 헌종의 능이고, 가운데가 효현왕후, 왼쪽이 계비 효저오앙후의 능이다.
병풍석 없이 난간석을 터서 연결한 것은 한방을 쓰는 부부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제26대 고종황제 홍릉

홍릉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합장릉이다.
홍릉과 순종황제 유릉은 다른 능과 달리 황제 능의 격으로 조영되어, 상설의 규모와 종류, 배치와 구조 등이 기존 왕릉과 다르다. 능을 조성함에 있어서는 명나라 황제 태조 효릉의 제도를 따랐다.

문,무석인외에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 등 석물이 사열하듯 참도를 따라 홍살문까지 줄지어 서 있다.
여기서 등장한 사자도 기린이나 해태와 마찬가지로 상상의 동물이다.

제7대 세조 광릉

광릉은 조선왕조 최초의 동원이강릉 형식이다. 본래 세조 능이 단릉으로 조성되어 있었는데, 정희왕후가 승하한 뒤 능을 새로 만들면서 세조 능의 정자각을 중간 지점으로 옮겨 동원이강릉이 되었다. 능제를 간소히 하라는 세조의 유언에 따른 것으로 여겨진다.
광릉은 참도가 생략된 유일한 조선왕릉이기도 하다.
세조는 능 주변의 나무를 잘 가꾸라는 당부도 하였는데, 덕분에 광릉 일대의 숲은 조선왕조 내내 풀 한 포기도 뽑지 못하게 할 정도로 잘 보호되어, 현재 동식물의 낙원이자 천연 그대로 살아 있는 자연 박물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왼쪽의 사진은 지세를 따라 자연스러운 높낮이를 갖는 곡장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오른쪽 사진은 위에서 보니 기다란 모양의 하트처럼도 보인다.

제6대 단종왕비(정순왕후) 사릉

사릉은 유난히 많은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데, 이 소나무 숲은 문화재 지역으로 생태자원의 영속성과 유전적 보전을 위해 조선시대 왕궁과 능원에 필요한 나무를 기르는 묘 포장이다.

초록의 싱그러운 색과, 능을 감싸고 있는 안개 낀 여운이 이곳을 보다 영적인 공간으로 느끼게 만든다.

제6대 단종 장릉

조선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강원도 영월에 위치해 있다.
영월의 하급 관리인 엄흥도가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이곳에 묻었다고 한다. 이후 숙종 때인 1698년 복위되면서 왕릉으로 추봉되었다.
단종의 사연을 모른다 하여도 왕릉의 분위기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을씨년스럽고 쓸쓸하다.
측면과 반대편에서 보면 이 정도는 아닌데 유독 정면에서 보는 풍경이 서럽게 보인다.

제13대 명종 강릉

강릉은 한 언덕에 명종과 인순왕후의 봉분을 나란히 마련한 쌍릉이다. 열두 면의 병풍석과 열두 칸의 난간석을 둘렀는데, 난간석을 터서 두 봉분을 서로 연결하고 있다.

눈오는 날과 마찬가지로 비오는 날의 왕릉 풍경도, 특유의 분위기에 걸맞아서 더 신령스러운 느낌을 만들어준다.
홀로 우산 하나 쓰고 저 안에 놓여 있다면 그 고요한 시간에 흠뻑 젖을 것만 같다.

제19대 숙종왕비 인경왕후 익릉

숙종 원비 인경왕후의 단릉인 익릉은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가는 참도가 계단식으로 되어 있는 점이 독특하다.
붉은 칠을 한 홍살문은 신성한 장소임을 알림은 물론 부정을 막는 역할을 한다. 홍살문 중앙에는 홍살을 꼬아 삼지창을 만들고 태극으로 단청을 한다. 태극은 하늘, 땅, 사람을 의미한다.
푸른색과 붉은색의 대조가 눈에 띈다.

제11대 중종왕비(장경왕후) 희릉

희릉은 장경왕후 단릉이나, 중종 사후 동원이강릉 형식으로 중종과 함께 안장되어 정릉이라 불린 적이 있다. 중종 제2계비 문정왕후가 중종 능만을 현재 서울시 강남구 정릉으로 옮기면서 능호가 다시 희릉이 되었다.

정자각의 뒤로 나지막한 언덕이 보인다. 언덕 위에 장경왕후의 봉분이 있다.
가을날의 능도 무척 운치가 있다. 사실 사계절이 모두 아름다운 공간이다.
자연이 가득하고 사람 손은 최대한 덜 탔기에 그런 게 아닐까?

제11대 중종왕비(단경왕후) 온릉

중종왕비 단경왕후가 홀로 잠든 온릉이다. 중종을 왕위에 올려놓은 반정 세력에 의해 친정아버지인 신수근이 죽임을 당하는 바람에 왕비 책봉 7일 만에 사가로 쫓겨났다. 1739년 영조 때 복위되면서 왕비 능으로 추봉되었기에 상설이 간소하다.
살아서도 신산스러웠지만 죽어서도 스산한 느낌. 초라한 것은 둘째 치고 참으로 외로워 보이는 봉분이다.

제9대 성종왕비(공혜왕후) 순릉

성종 원비 공혜왕후의 단릉인 순릉이다. 12세에 자을산군과 혼인하여 14세에 왕비로 책봉되나 19세에 왕비로 책봉되나 19세에 슬하에 자식이 없이 세상을 떠났다.

한명회는 살아서 큰 권세를 누렸으나 왕비가 된 두 딸이 모두 명이 짧았다.
그것도 일종의 업보였을까? 글쎄다...

제22대 정조 건릉

정조와 효의왕후를 합장한 건릉이다.
도심 속에서 왕릉은 도시민의 휴식 공간이 되어주고 모처럼 눈을 정화시켜 주는 자연을 한껏 보여준다.
눈으로 보지만 낙엽 밟히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왕실에서는 국상을 당하면 장례를 담당하는 임시기구인 3도감을 설치하고, 3개월에서 5개월 정도의 국장 기간 동안 왕릉이 들어설 터를 가려 골랐다. 왕릉 터는 풍수지리를 기반으로 한양에서 10리 밖 100리 이내에서 정했으며, 해자나 화소(능 바깥에서 발생한 불길이 능 구역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방화벽), 주변의 산이나 지형지물로써 경계를 삼았다.

조선왕릉은 유형문화재인 능에서 주기적, 지속적으로 무형의 문화재인 산릉제례를 치르고 있는 점에서 세계의 여느 왕릉과 뚜렷하게 차별된다.
태조 건원릉 산릉제례(기신제)는 매년 양력 6월 27일 태조 건원릉에서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의 주최로 관계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봉행되고 있으며, 일반인도 누구나 참관할 수 있다.
태조 건원릉 산릉제례 이외에도 '종묘제례'를 비롯하여 역대 왕과 왕비에게 제사 지내는 산릉제가 전국 50여 곳에서 매년 봉행되고 있다.

2007년 6월 27일에 있었던 태조 건원릉 산릉제례 모습이다.
준비부터 제례를 마치고 돌아가는 장면까지를 담았다.
사진들이 훌륭하고, 다양한 각도와 사계절의 모습을 함께 담아내어서 눈이 즐거운 책이다.
간략하게나마 이곳에 잠든 왕과 왕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어 나름의 역사 공부에도 도움이 된다.
다만 오타가 좀 있고, 조사가 많이 생략되어 있어 편집에서 좀 허술한 면이 보인다.
심지어 74쪽과 75쪽은 하얗게 비어 있다. 인쇄 오류지 싶다.
99쪽에는 경혜공주가 정순왕후의 묘를 집안 묘역에 모신 것처럼 기술했는데 경혜공주는 정순왕후보다 무려 50여 년 전에 죽었다.
134쪽에는 문정왕후를 문종왕후라고 기술했다.
233쪽에는 성종과 예종을 형제지간으로 기술했다. 둘은 삼촌 조카 사이다.

자잘한 것들을 뺀다면 책을 본 소감은 만족스럽다. 보고 싶었던 책인데 비싸서 선뜻 구입하지 못하던 차에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냉큼 빌려왔다. 무겁지만 전혀 무겁지 않았고 발걸음도 가벼웠다. 이제 반납해야겠다.


역사의숲, 조선왕릉, 왕릉, 조선, , , 왕비, 무덤, 동원이강릉, 쌍릉, 단릉, 능역, 능침, 성역, 제향, 속세, 진입, 풍수사상, 홍살문, 참도, 정자각, 건축, 제례, 태조, 건원릉, 신의왕후, 제릉, 신덕왕후, 정릉, 공민왕, 노국공주, 현정릉, 석물, 봉분, 곡장, 억새, 함흥, 문종, 현릉, 산후병, 소릉, 합장, 선조, 목릉, 의인왕후, 원비, 계비, 인목왕후, 동원삼강릉, 남우여좌, 인조, 장렬왕후, 휘릉, 용성대군, 가례, 예송논쟁, 효종, 현종, 숙종, 숭릉, 명성왕후, 박석, 신도, 어도, 공처가, 애처가, 릉조, 원릉, 정순왕후, 금천, 꽃담, 절제미, 헌종, 경릉, 효명세자, 문조, 순조, 효현왕후, 효정왕후, 삼연릉, 고종, 순종, 홍릉, 유릉, 명성황후, 황릉, 명나라, 효릉, 문인석, 무인석,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 상상의동물, 세조, 광릉, 정희왕후, 하트, 봉종, 사릉, 소나무숲, 문화재, 생태자원, 장릉, 강원도, 영월, 엄흥도, 동강, 복위, 추봉, 명종, 강릉, 인순왕후, 병풍석, 난간석, 인경왕후, 익릉, 삼지창, 태극, 단청, 하늘, , 사람, 후경왕후, 희릉, 문정왕후, 강남구정릉, 단경왕후, 온릉, 중종반정, 연산군, 신수근, 영조, 성종, 공혜왕후, 순릉, 자을산군, 한명회, 정조, 건릉, 사도세자, 효의왕후, 도감, 국장, 해자, 화소, 산릉제례, 종묘제례, 국립문화재연구소, 눌와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13-06-17 0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눌와에서 나왔네요.
이런 책은 도서관에 꼭 소장해야겠군요. 궁궐의 우리나무와 더불어~

마노아 2013-06-17 23:35   좋아요 0 | URL
도서관 책들은 겉표지가 없어서 눌와 책인 걸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리뷰 쓰면서 알았어요.
어쩐지 더 반갑더라구요. 눌와 책들은 소장했을 때 유독 '뽀대'가 나요.^^ㅎㅎㅎ

oren 2013-06-17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왕과 왕비의 무덤인들 후세인들의 심금을 건드리지 않는 게 없겠지만, 저는 단종의 무덤인 영월 장릉과 정순왕후 사릉이 특히 애닯다는 생각이 드네요.

몇 년 전에 영월에서 단종의 무덤에 제향을 올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http://blog.aladin.co.kr/oren/4108126),
산릉제례가 다른 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우리 고유의 문화재인만큼 소중하게 간직되었으면 싶네요.
마노아님께서 빌린 책으로 여러 장의 사진까지 올려 주신 정성 덕분에 고맙게 잘 봤습니다.

마노아 2013-06-17 23:36   좋아요 0 | URL
예, 저도 그렇더라구요. 아무래도 감정이입이 되어서 그런가 봐요.
영월을 가보지 못했는데 관광으로도 훌륭해 보이지만 유적지로도 훌륭한 답사지가 될 것 같아요.
소개해주신 페이퍼 글 저도 읽어볼게요. 고유 문화가 아름답게 전승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늘 있지요~
 
새로 만든 먼나라 이웃나라 15 : 에스파냐 먼나라 이웃나라 15
이원복 글.그림 / 김영사 / 201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먼 나라 이웃나라의 대미를 장식하는 나라는 에스파냐다. 스페인으로 더 익숙한 바로 그 나라!

 

읽는데 시간이 엄청 걸렸다. 내용이 무척 방대하기 때문이다. 무척이나 파란만장한 역사인데다가 얽혀 있는 이웃 나라와의 관계도 보통 복잡한 게 아니어서 정리하면서 읽을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지레 겁먹지는 마시라. 복잡해도 충분히 재미있으니까. 한 나라의 수천 년 역사를 이야기하는데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다면 오히려 실례일 것이다.

 

에스파냐 하면 생각나는 게 뭐가 있을까? 투우, 축구, 시에스타, 카르멘에 돈키호테 정도? 아무튼 뭔가 역동적이고 열정적인 느낌이 가득한 나라다. 실제로 들여다보니 정말 열정 그 자체였다. 너무 열정적이어서 과할 정도로...

 

투우 이야기가 앞부분에 짧게 소개된다. 투우야 자료 화면으로 잠깐씩만 보았을 뿐, 경기 전체를 본 적이 없는데 소가 죽어야 끝난다는 것을 알고 좀 놀랐다. 스포츠나 오락이 아닌 ‘문화’ 면에 기사가 실리는 투우는 그들 나라에서는 ‘의식’에 가깝다고 하니 내가 평가할 입장은 아니지만 다소 잔인해 보이긴 하다.

 

역사 교과서에서는 ‘알타미라 동굴 벽화’로 에스파냐 이름이 등장하곤 했다. 여기에 얽힌 이야기가 재밌다. 취미로 고고학을 연구하는 아버지와 여덟 살 난 그의 딸이 동굴을 발견했는데, 아이가 먼저 동물 천장의 그림을 발견하고는 '알타 미라!'라고 외친 것이다. 알타는 '위'라는 뜻이고 미라는 '보라'는 의미. 그러니까 위를 보라고 말한 게 이 유명한 구석기 벽화가 남겨진 동굴의 이름이 된 것이다. 오홋!!

 

에스파냐의 역사에서 빼먹을 수 없는 게 강력한 가톨릭 국가라는 것이다. 이슬람교가 파죽지세로 힘을 뻗어나갈 때, 에스파냐가 있는 이베리아 반도도 이슬람 세력에 의해서 덮여버렸다. 북부의 산악지대만 제외하고. 모퉁이에 몰린 그리스도교 국가들은 이를 악물고 버텨내더니 급기야는 800여 년 만에 이슬람 세력을 모두 쫓아낸다. 그 해가 1492년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해 에스파냐는 콜럼버스를 통해 그들이 알지 못하던 새로운 대륙을 찾아냈다. 그야말로 승승장구하던 시절이었다. 에스파냐인 들에게 1492년은 영광의 해다. 그랬기에 그로부터 500년 뒤인 1992년에는 again1492를 외치며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개최했다. 88올림픽 다음 개최지였기 때문에 기억이 난다. 성화 봉송 마지막 주자가 불화살을 쏘아서 과녁을 맞히던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야말로 간지 좔좔~

 

 

 

다시 역사로 돌아가서, 이 무렵은 카스티야이레온 왕국의 이사벨 공주와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자가 결혼을 해서 그리스도교 연합 왕국을 결성했을 때의 일이다. 서로 독립된 나라를 다스리면서 공동 왕으로 군림하며 거대한 제국을 이뤄낸 이들 부부에게는 열 명의 자녀가 있었다. 영아 사망률이 높던 시절이니만큼 살아남은 아이는 다섯. 이 아이들이 유럽 각국과 결혼으로 맺어지면서 제국은 더 거대해진다. 군사를 동원하는 것보다 더 쉽게, 더 유리하게 영토를 넓히는 방법이 혼인이었다. 비단 에스파냐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다른 유럽 여러 나라들도 그렇게 사돈에 사돈으로 얽혀 있고, 지나친 근친혼으로 인해 기형 출산이 잦았던 시절이었다. 모든 일에는 작용과 반작용이 따르는 법. 쉽게 얻은 영토는 쉽게 잃을 수 있었다. 대가 끊겼을 때 그 후사를 다른 왕실의 가문이 냉큼 이을 수가 있으니 말이다.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죽게 되자 유럽 각국은 그 후사를 자기 나라 사람이 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이칠란트 후보 호세 페르난도는 외할머니가 카를로스 2세의 이복 누나였던 점에서 다음 왕위의 자격을 주장했고, 오스트리아 황제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레오폴트 1세의 아들 카를은 아버지 레오폴드 1세의 외할머니가 에스파냐 공주였다는 점에서 자신에게 왕관이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물론 이런 주장들은 그들 뒤에 있는 어른들이 내세운 거지만 하여간!) 심지어 앞서 나온 페르난도와 방금 나온 카를은 조카와 삼촌 사이이기까지! 마지막으로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의 손자 필립이 왕관을 노렸다. 필립의 할머니가 카를로스 2세의 이복 누나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그 자격을 주장하는 할머니나 누나는 모두 고인이 되었지만 그 혈통은 자신들에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니 충분히 자격이 있다는 것! 이들 나라뿐 아니라, 이들이 에스파냐 왕관을 가져감으로 인해 유럽의 세력 균형이 바뀌는 것을 경계하는 다른 나라들까지도 이 왕위 계승 문제에 뛰어들어 아주아주 시끄러웠다. 그 꼬라지를 다 지켜보고 산 에스파냐 백성들이 얼마나 신물이 났을까 싶다.

 

유럽 제일의 가톨릭 국가라지만 이들의 가톨릭 순혈주의는 무서울 지경이었다. 뭐든 극단적이면 도가 지나친 법! 나라의 근간이 되었던 아랍 출신 농민들이 쫓겨났고, 두뇌 역할을 하던 유대인들도 쫓겨났다. 가톨릭 이외의 종교는 물론이요, 과거에 개종한 자들마저도 탄압을 받았다. 조상 중에 누군가가 이슬람교나 유대교를 택해 가톨릭을 버린 경력이 있으면 고등 교육을 받을 수도 없고 이미 갖고 있던 관직이나 성직도 박탈당했다. 심지어는 종교 재판에 회부되기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상상초월의 연좌제다. 밀고와 모함이 판을 치고 억울한 마녀 사냥이 자행되었다. 이러니 조상의 경력을 조작하거나 족보를 고치고 과거를 세탁하는 비리 유행했다고. 어째 지나치게 기시감이 든다.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하고 어마어마한 황금을 본국으로 끌어들였지만, 이것이 에스파냐에게 얼마만큼의 도움이었는지 모르겠다. 막대한 황금을 끝없이 쏟아 부었어도 잦은 전쟁으로 인한 부채를 해결하지 못해 국가 파산에 이른 적이 여러 번이었고(심지어 저 유명한 펠리페 2세 때 무려 네 번!), 지나치게 방대한 해외 영토를 관리하지 못해 국내 정치가 더 어지러워지기도 했다. 그들이 신대륙이라 부른 그 대륙이 받은 타격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그야말로 대재앙! 문명이 파괴되었고, 병균이 옮아가 민족 자체가 말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렇게 400년의 시간이 흘러 에스파냐의 언어, 종교, 문화는 남미의 스타일로 굳어버렸고, 정복자의 동상이 곳곳에 서 있기까지. 참으로 묘한 역사의 귀결점이다.

 

 

 

긴긴 역사의 과정을 보면서 우리와 무척 닮은 모습들에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특히 근현대사로 넘어오는 부분이 그랬다. 자립하지 못하고 외세를 끌어들이는 나약한 군주의 모습에서 고종이 떠올랐고, 외국 군대가 쳐들어오는 위기가 닥쳐오자 왕이 식민지로 먼저 도망칠 궁리를 한 부분에서 임진왜란 당시의 선조가 떠올랐다. 심지어 스페인 내전은 몇 년 뒤에 벌어지는 한국 전쟁의 평행이론 같았다. 여러 나라의 대리전 성격이었고, 전쟁이 끝난 후 독재 정권이 장기 집권했던 것도 그랬다. 그러나 프랑코 사후 국왕으로 복귀한 후안 카를로스의 자세는 우리 역사와 무척 비교되는 부분이 있었다. 어게인 프랑코를 외치는 쿠데타 세력 앞에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 헌법의 수호를 재차 천명한 국왕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우리 역사의 어느 대통령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물론, 부러운 부분만 있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역동적이고 지나치게 열정적이어서 말도 못하게 혼란스러웠던 이들의 정치판은 우리 역사의 이면을 떠올리게 했다. 한 왕조가 무려 500년 이상씩 가곤 했던 우리 왕조의 긴 생명력의 원천 같은 것 말이다. 백성들이 지나치게 순종적이어서가 아니라, 그 백성들을 어느 정도 눈치 보고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했던 문화의 힘 말이다.

 

그런데 또 재밌는 부분은 이 극단적일 만큼 열정적인 민족의 지극히 느릿한 성격이다. 대화와 타협보다는 감정과 일방적인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고집과 독선, 그것이 서로 충돌해서 폭동, 반란, 쿠데타 전쟁의 연속으로 이어진 에스파냐인 들의 기질인데도 모든 것은 여유롭고, 너그럽고, 서두르지 않는 전형적인 남쪽 나라의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패스트푸드를 먹고 시간을 쪼개 쓰며 모든 것에 ‘빨리빨리’를 외치는 데 비해 에스파냐인 들은 느긋하게 낮잠을 즐기고 저녁 열 시가 되어서야 가족들과 함께 식당에 나와 새벽 두 시 세 시까지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삶을 살고 있다. 모든 것이 슬로우, 슬로우, 슬로우. 더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성격이 에스파냐의 옛 식민지였던 남아메리카도 거의 같다는 것이다. 언제나 조급하게 서두르는 우리나라 사람이 에스파냐에 가서 적응하려면 꽤 힘들 것 같다. 그것을 틈새시장으로 노릴 격정적인 기질이 우리에게 또 있기도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천천히 삶을 걸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게 참 재밌다. 세계 역사에서 보면 변방에 속했던 유럽이 그 변방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신항로를 개척했고, 순수한 종교를 앞세워 폭력을 행세 했고, 레판토 해전의 승리로 최고 정점을 찍었던 에스파냐가 순혈령으로 인해 내리막길을 걸었고, 바다의 왕자는 영국과 네덜란드(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한!)의 몫이 되었다. 영국보다 200년이나 앞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자랑했지만 화려한 영광만큼이나 그 그림자도 짙고 어두웠다. 사실 읽으면서 이 나라가 망하지 않고 버틴 게 신기했다. 그것도 분명 그들의 저력이리라.

 

프랑코 독재 정권이 2차 세계대전 때 보여주었던 박쥐같은 자세는 전쟁이 끝난 후 서방 세계로부터 왕따 대접을 받는 이유가 되고 말았다. 전쟁으로 인해 망가진 국토와 경제 상황을 다시 일으키는 데 극적인 구원투수 역할을 해준 것은 한국전쟁이었다. 아, 이거 우리 덕분이라고 으스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속이 무척 쓰렸다. 우리가 일본만 살린 게 아니었구나. 이 나라는 1차 세계대전 때도 전쟁 특수로 경제를 극적으로 살려놓았는데 또 다시 다른 나라의 전쟁으로 기사회생하고 말았다. 이것도 천운이라면 천운이다.

 

긴긴 이야기를 알기 쉽게 잘 정리해 주었다. 무척 복잡한 역사인지라 조금은 천천히, 공을 들여 읽을 필요가 있다. 그 덕분에 유럽의 복잡한 이해관계도 어렴풋이 정리가 되리라. 이 책을 읽으면서 스페인 내전도 읽고 싶어졌고 카탈로니아 찬가도 읽고 싶어졌다. 피카소와 달리의 그림이 더 정겹게 느껴졌고 돈키호테 음악(맨 오브 라만차)도 더 듣고 싶어졌다. 평소 에스파냐에 가보고 싶다고 크게 충동을 느끼지 못했는데 이 복합적인 나라의 면면을 직접 느껴보고 싶어졌다. 정열적인 붉은 색이 무척 잘 어울리는 이 나라의 자연과 문화를 모두 체험해 보고 싶다.

 

먼 나라 이웃나라 시리즈는 대학교 때부터 읽게 되었는데,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들은 소장하고 있지 못하다. 한참 역사를 배우고 있는 조카를 생각하니 남은 시리즈도 모두 채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마 이 시리즈를 다시 읽어도 충분히 재밌으리라.

 

덧글) 몇몇 오타와 수정되었으면 하는 부분들이 있기는 하다. 여러 차례 찍을 테니 다음번에는 수정이 될 것으로 보인다. ^^

 

21

소의 등에 맺어둔 리본을 >>> 묶어둔의 의미 같다.

53쪽과 54쪽의 지도가 서로 배치된다. 53쪽에서 카스티야이레온 왕국령으로 설명한 지중해의 섬들이 뒷장에선 아라곤 왕국 령으로 표기되어 있다. 53쪽이 틀린 것으로 보인다.

59

그라나라의 함락으로 >>> 그라나다

68

태조 왕건은 부인이 무려 열 명이나 되었는데>>> 29명이었다. 왕후가 6, 부인이 23.

70

가톨릭 왕들의 셋째 딸 후아나>>>둘째 딸

76

마르가레테와 후안나의 오빠>>>후아나

82

폴랑드르>>>플랑드르

140

황제를 재판도 없이 처행했다고?>>>처형했다고?

148

700년간에 걸친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 >>>800년

161

프랑스 황태자 루이를 루이 14세의 처남이라고 표기했다. >>> 장남

181

반란의 앞장에 페르난도 왕자가 서서 지휘를 하니 >>>문장 부자연스럽다. 페르난도 왕자가 반란에 앞장서서 지휘를 하니

192

그들 존경해서 >>>그를 존경해서

202

왕당파는 권력을 잃은 되찾기 위해 >>> 잃어버린 권력을

208

알폰소 12세의 치세 중 초반 12년간은>>> 재위 기간이 12년이었다. ‘중 초반’ 생략

208

에스파냐의 국운이 상승하는 하던 시기>>> 국운이 상승하던 시기

214

전투가 주로 벌어진 지역이 북아메리카 리프 산맥이어서 >>> 북아프리카

217

1917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 끝나갈 무렵(전쟁이 1918년에 끝났으니까)

232

소련의 스탈린은 어떻게든 공산주의를 퍼뜨려 유일한 공산 국가 처지를 벗어나>>> 1936년에 몽골도 이미 사회주의 국가였다.

233

공화파에는 무려 53개 국가에서 3만 2,000명의 젊은이가 국제 여단을 조직해서 국민파 군대 편에 서서 >>> 인민 전선 편에 서서

261

대서양 너머를 가르키고 있어. >>> 가리키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