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 되풀이해선 안 될 비극, 그림으로 보는 히로시마 이야기
나스 마사모토 지음, 니시무라 시게오 그림, 이용성 옮김 / 사계절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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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고학년 추천용으로 카테고리가 잡혀 있는 그림책이지만 어린이들만을 위한 책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어른이 먼저 보고 아이들과 대화를 나눠야 하는 그런 책이다.  

요즘처럼 우리나라에 방사능에 대한 관심과 공포가 고조된 적이 없었을 것이다. 필연적으로 책꽂이에 있던 이 책이 떠올랐다. 마음이 많이 무거워질 것 같아서 좀처럼 손이 가지 않았는데 심호흡과 함께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던 그 순간에 목숨을 잃었던 어린 소년이 영혼이 되어 다시 히로시마 창공을 날며 과거의 시간을 되짚어보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첫번째 그림은 1994년 8월 6일, 그러니까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그때로부터 49년이 지난 시점에 찍은 사진을 참고해서 그린 것이다. 해발 580미터 하늘에서 내려다본 광경인데 굳이 그 높이에서 찍은 이유는 당시 투하됐던 원자폭탄이 터진 높이가 580미터이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식민지와 점령 지역을 주황색 선과 면으로 표시했다. 보라색은 영국령, 분홍색은 프랑스령이다. 그밖에 네덜란드 식민지가 되어버린 인도네시아와 미국 밑으로 들어가버린 필리핀도 보인다. 온 세계가 전쟁통이었다. 그러니 세계 대전이라고 부를 만하다.  

전쟁 발발국이었던 이탈리아가 1943년에 항복을 했고, 히틀러의 독일도 1945년 5월에 무릎을 꿇었다. 일본만 남았다. 일본의 광기가 끝을 모르고 치닫고 있었지만, 과연 1945년 8월 6일 그 시점에, 원자폭탄이 아니었다면 전쟁을 끝낼 수가 없었을까? 트루먼과 히로히토는 그렇다고 수긍했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보다 원자폭탄의 위력을 보여주고 확인할 필요가 더 우선이었을 것이다.  

포츠담 회담을 시작하던 7월 17일 하루 전날, 뉴멕시코 주의 앨러모고도에서 첫 원자폭탄 실험이 있었습니다. 루스벨트의 뒤를 이어 미국의 대통령이 된 트루먼은 포츠담에서 이 실험이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이는 협상에 참가하는 트루먼에게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포츠담 선언이 발표된 7월 26일, 이미 두 개의 원자폭탄이 티니안 섬으로 운반되어 있었습니다. 트루먼은 하루 전에 이 폭탄들을 사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미국의 권력자들은 자기들의 힘을 온 세계, 특히 소련에 보여 주기 위해 전쟁이 끝나기 전에 반드시 원자폭탄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데에 들어간 비용과, 앞으로 이어질 연구에 들어갈 막대한 비용을 나랏돈으로 충당하는 일에 대해 국민들의 승인을 얻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 21쪽


20세기 초에 과학자들은 자연 방사 현상을 관찰하다가 원자핵이 커다란 에너지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불길하게도 핵분열 현상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9개월 전에 발견되었다. 원자폭탄 개발은 독일이 가장 먼저 시작했지만 그 성공은 미국과 영국의 몫이 되었다.  

 

자신의 이름이 역사에 남는다는 건 명예이지만, 그 이름이 이토록 무시무시한 무기를 만드는 데에 결정적 열할을 했다는 사실과 함께 기록된다면 그 명예는 치욕일 것이다. 많은 이름난 과학자들이 맨해튼 계획에 동원되었고, 원자폭탄 제작에 큰 역할을 감당했다. 게 중에는 이 무시무시한 무기의 위력과 폐해를 알아차리고 핵무기 규제에 애를 쓴 인물들도 다행히 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리틀보이와 사흘 뒤 나가사키에 떨어진 패트맨의 단면도다. 앞의 것이 우라늄으로 만들었고 뒤의 것이 플루토늄으로 만들어졌다. 둘 다 만 단위의 무수한 사람이 죽게 만든 원흉이지만 히로시마가 먼저 원폭 피해를 입었고 사상자도 훨씬 더 많았기에 원폭에 대한 이미지는 아무래도 나가사키보다 히로시마 쪽이 더 강렬하다. 그러니 이 책의 제목도 히로시마. 

이 책은 글이 꽤 많다. 당연하다. 그때의 상황을 제대로 설명해 주기 위해선 제시하고 설명하고 보탤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8월 6일의 사건 당일의 기록도 시와 분 단위로 자세히 담겨 있다. 맑은 날씨를 기록한 8월 6일에, 원자폭탄을 실은 폭격기 에놀라게이 말고도 폭발을 관찰하고 촬영하기 위한 두 대의 비행기가 더 따라갔다. 자신이 누른 버튼 하나에 수십 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게 했다는 사실에 그 조종사는 어떤 마음으로 살까 안쓰러웠다. 그런데 뒤에 기록을 보니 31년 뒤에 폭격기의 기장 폴 티베츠가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에어쇼에 참석한 것을 보았다. 인간이 참으로 무섭고 끔찍하다. 하긴, 1975년에 일왕 히로히토는 “히로시마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원폭 투하는 당시 상황을 볼 때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라고 말을 했으니 더 붙일 말이 없다. 

 

폭탄이 터지고, 눈부신 섬광이 발생했다. 이어서 거센 폭풍이 도시를 집어삼켰고, 몇몇의 건물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들이 모두 부서졌다. 사람들 또한 무참히 이리저리로 날아가 버렸다. 원폭 시험을 위해서 다른 폭격으로부터 제외되었던 이 도시가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하고 만 것이다.  

히로시마 상공 580m 높이에서 일어난 폭발은 1조4천억 칼로리의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내뿜었습니다. 폭발 당시 폭심의 순간 온도는 섭씨 몇백만 도에 이르렀습니다. 폭발한지 0.1밀리초(1밀리초는 1,000의 1초) 뒤 지름 30m짜리 불덩이가 생겨났습니다. 불덩이의 바깥 온도는 섭씨30만 도에 이르렀습니다. 불덩이의 지름은 순식간에 500m로 커졌습니다. 불길은 10초 동안 눈부시게 타올랐습니다. 불덩이가 내뿜은 열선 때문에 폭심 근방의 온도는 섭씨3천에서 4천 도까지 치솟았습니다. 공중폭발로 생긴 충격파가 폭풍을 일으켰습니다. 이 충격파와 땅에서 반사되어 생긴 충격파가 합쳐졌습니다. 폭심 부근에는 폭풍의 압력이 평방미터 당 30t에 이르렀고, 이런 상태는 약 1분 동안이나 이어졌습니다. 재래식 폭탄이 폭발할 때 일어나는 폭풍의 압력이 겨우 몇 밀리초 동안 유지된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참으로 엄청난 위력입니다. – 46쪽  

저렇게 어마어마한 것이 터졌으니 사람이 무사할 리 없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그후의 방사능 오염이다. 도시에 있던 사람들 뿐아니라 그들을 구하러 온 사람들까지 연이어서 방사능에 노출되고 목숨을 잃었다. 사건 당일 히로시마에 있었던 사람은 대략 35만 명 정도로 추정하지만, 이후 방사능에 오염된 사람은 무려 45만 명이나 되었다. 그들의 고통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심지어 되물림 되고 있다.  

 

플루토늄의 반감기는 무려 24,000년. 할 말을 잃게 만든다. 누가 지었는지 이름도 기막히게 지었다.  

핵을 무기가 아닌 평화적으로 이용한다면서 지은 원자력 발전소가 전 세계에 대략 530여 개쯤 된다고 한다. 핵무기와 원자력 발전 때문에 방사능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어림잡아 350만 명에 이른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제 이 숫자는 지난 달을 기점으로 비할 수 없이 많이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도 원자력 발전소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후쿠시마 원전 폭발이 아니어도 결코 안심할 수가 없다.  

어쩔 수 없는 필요악이라는 변명은 너무 무책임하지 않은가.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오스트리아의 실례는 무척 감동적이었다.  

1978.11
오스트리아가 원자력 발전소 운영에 대한 국민 투표를 함. 그 결과로 오스트리아는 원자력 발전소 운영을 중단.
1986.9
오스트리아 정부가 이 나라의 유일한 원자로였던 츠웬텐도프 원자력 발전소를 해체하기로 결정. 이 발전소는 1977년에 완성되었으나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었다.

해마다 8월이면 히로시마에서 '히로시마의 날' 행사를 갖고 추모와 평화를 위한 움직임을 보여왔다. 책에서는 그들의 행보와 달리 일본 정부의 무분별하고 무책임하고 무개념적인 핵정책이 소개되고 있지만 8월 6일의 끔찍했던 기억을 갖고 있는 히로시마에서는 끊임없이 핵무기를 금지하고 방사능을 경고하는 메시지들을 보내왔다. 시장의 연설들은 얼마나 개념에 차 있던지.... 

1979.8
히로시마의 날 기념 연설에서 히로시마 시장이 “방사능 피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문제”라고 말함
1991.8
히로시마 시장이 히로시마의 날 기념 연설에서 2차대전 기간 중에 일본이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저지른 가혹한 범죄들에 대해 일본 전체를 통틀어 처음으로 공식 사과함. 히로시마 시장은 또한 히로시마가 전 세계의 핵실험 피해자와 핵 시설 관련 사고의 피해자들을 도와줄 의무가 있다고 강조.
1997.8
히로시마 시장이 일본 정부에 미국의 핵우산에서 벗어나라고 처음으로 요구. 이러한 요구는 지구상의 모든 핵무기를 없애기 위해서는 일본의 핵 정책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짐.

히로시마에서, 체르노빌에서, 그리고 후쿠시마에서 인류는 명부의 신과도 같은 무서운 물질의 정체를 확인했다. 그럼에도 아직도 이 무시무시한 악의 정체를 포기하지 않고 감싸 안는다면, 같이 명부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인류가 그토록 멍청하지는 않을 거라고, 그렇게 어리석지만은 않을 거라고 한 줌 기대를 보태본다. 이렇게 평화와 희망의 등을 띄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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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4-07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일 비 온대요.
봄비가 반갑지만은 않은 것은 방사능을 잔뜩 머금고 오기 때문이라지요~ㅠ.ㅠ

플루토늄의 반감기, 무시무시한걸요~

마노아 2011-04-07 01:56   좋아요 0 | URL
언니가 제주도에 다녀오자고 했는데 다음에 가자고 했어요. 여기서 거기가 무슨 차이겠냐 싶지만 그래도 두려워요. 비도 두렵습니다. 어휴...ㅜ.ㅜ

루쉰P 2011-04-07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들르는 서재들에 마노아님의 댓글들이 보여서 한 번 놀러와 봤는데 이렇게 좋은 책 리뷰를 보게 돼서 감사하네요.^^ 핵에 대해 알고 싶어도 내 인생에 상관없어라는 굉장히 무서운 방관자적 입장에서 이런 리뷰를 보니 눈이 확 뜨이네요. 사실 지금 당장 내 목줄을 죄지 않으면 그것이 진정한 공포인지를 모르는 것이 제 습성인 것 같아요. 후쿠시마 같은 사태가 제 주변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데 말이죠. 예전에 열심히 읽었던 <인물과 사상> 잡지에서 원폭피해자인 재일동포 분의 사투가 그려진 칼럼이 있었는데 정말 그 누구한테 탓할 수도 없고 오로지 피해만 입고 살아야 했던 그 사진 속의 재일동포의 눈매가 잊혀지지 않더라구요. 좋은 리뷰 정말 감사히 읽고 가요. ^^

마노아 2011-04-07 14:04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루쉰P님! 사람들이 대개 그런 것 같아요. 광우병 때도 그랬고 백두산 폭발 얘기 들었을 때도 그랬고, 지금 방사능 비를 걱정하는 지금도 그렇고... 그때그때 세상에 종말이 온 것처럼 마구 걱정을 하다가 또 다른 큰 사건이 터지면 금세 잊거나 덜 급해지곤 하지요. 이렇게 위기감기 고조되었을 때 또 다른 중요한 무언가가 잊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해요.
예전에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라는 책을 구입했어요. 원폭2세 김형률 씨의 평전이었는데 도저히 읽을 자신이 없어서 기증을 했거든요. 읽지 않고 보낸 그 책이 떠오르면서 고인께도 미안하고 여러 피해자들께도 죄송하단 생각이 들어요. 리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루쉰P 2011-04-07 15:54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제 삶을 봐도 그런 것 같아요. 뭔가 고민이 있을 때 세상이 종말 온 것처럼 난리를 치다가 또 다른 큰 고민이 터지면 또 우왕 하면서 전 고민을 잊어버리고 다시 반복...(-.-) 그래도 마노아님은 그런 문제들에 대해 이렇게 파악하고 계시니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들어요. 흠...오늘도 배우고 가요. 완전 감솨...

마노아 2011-04-07 16:27   좋아요 0 | URL
모두들 비슷하게 사는 것 같아요.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는 소수의 분들이 계시고요.
얼라, 그 사이 대표 이미지가 바뀐 건가요? 그림이 재밌어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6 - 정조실록 - 높은 이상과 빼어난 자질, 그러나...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6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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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읽어나가면서 정조를 어떻게 그려낼지 몹시 궁금했었다. 드라마로도 소설로도 많이 회자되는 것은 그만큼 이야깃거리가 많은 임금이었고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또 무성한 소문과 추측과 억측, 상상이 덧붙여졌으니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영조편을 읽으면서 그런 기대를 버려야 했다. 이 책의 제목이 '조선왕조실록'인 것처럼 저자는 실록에 충실히 기반을 둘 뿐, 독자의 기대를 맞추려 하지 않는다. 그랬기에 보다 극적일 것 같았던 정조시대의 이야기는 제법 건조하고 딱딱하게 진행된다. 심지어 그 유명한 정약용과 박지원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도 저자는 설명했다. 실록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수원 화성 축성에 활용된 거중기조차도 실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한다. 문체반정의 정조이니 열하일기가 나오지 않는 건 크게 의아하지 않는데 거중기도 나오지 않아서 다소 놀랐다. 독자들의 이런 궁금증을 미리 알아챈 저자의 선 문답이 재치 있다. 정치사 중심으로 풀어나가는 거니 너무 섭섭해할 필요는 없겠다. 

정조는 할아버지의 전폭적인 사랑을 등에 업고 왕위에 올랐지만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멍에도 온 몸으로 진 상태였다. 즉위 초기 그가 외척을 숙청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전광석화! 그야말로 준비되어 있었달까. 할아버지 영조가 권력을 조금만 더 일찍 내려놓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계속 남는다. 저자도 지적한 부분인데 15세면 성인 취급하던 시절이었으니 5년만 양보해서 스무 살에 재위에 올랐더라도 충분히 좋았을 법 싶었다. 역사에 '만약'은 무의미하다지만 정조가 쉰도 채 되지 않은 채 어린 세자를 두고 죽은 것을 생각하면 역시 아쉽다.  

그는 참으로 부지런하고 치밀한 임금이었고 문무를 겸비한 학자 군주였다. 게으름이란 걸 몰랐고, 완벽주의자였다. 그런 성향을 아랫 사람들에게까지 요구했을 터이니 같이 일하는 건 몹시 피곤한 일이었겠지만, 놀고 먹는 군주와 비교할 수는 없는 일. 일도 많이 했고 가슴에 맺힌 것도 많고 휴식이란 통 몰랐으니 몸이 쉬 병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책 속 그림도 점점 불어가고 머리도 하얗게 세어 버리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편애하는 임금으로서 안타까웠다.  

 

사진은 정조반차도로 정조가 혜경궁을 모시고 수원 행궁까지 가는 모습을 그린 김홍도의 기록화다. 청계천변 산책로 벽면에 도자 벽화로 재현된 것을 찍은 사진인데 날이 따뜻해지면 이 그림 보러 청계천 나들이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파와 벽파에 대한 기존의 설명은 윗 그림과 같은 도식으로 잡혀 있고는 했는데 그걸 바로잡기 위해서 무척 애를 쓴 모습이었다. 어휘 자체는 아래 그림처럼 '시류에 영합하는'과 '편벽한 무리'란 의미로 쓰였다. 저자는 노론 안에서의 시파와 벽파가 중요했던 거라고 강조한다. 그밖의 당에서는 시파든 벽파든 영향력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순왕후에 대한 시각 조정도 애를 썼다. 정조 죽음의 배후 인물로 사극에서 곧잘 지목되곤 하는 정순왕후인데 저자는 정치적 동지였고 꽤 큰 존재감을 보였던 인물로 그렸다. 어김 없이 이어지는 코믹 퍼레이드. 

 

미친 존재감의 정순왕후다.^^ 정조 시대 때 미국은 독립을 했다. 오등은 자에 아 미국이 독립국임과~ 아, 웃겨 죽을 뻔했다. 서울 놈만 대접받는 더러운 세상도 마찬가지. 이번에도 어김없이 빵빵 터지는 유머감각이었지만 다른 이야기들에 비해선 다소 약했다. 정조라는 인물이 좀 개그와 안 어울리기는 하다.   

저자 후기에서 홍인한의 세 가지를 알 필요 없다는 발언의 의미에 대한 설명이 나로서는 이 책의 가장 큰 수확이었다. 홍인한이 그런 발언을 했던 심상 자체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고 여기지만, 그런 말 자체는 다른 때에도 보여지는 말이었다는 것이 말이다. 가끔은 저자의 해석이 내게 100% 납득되지 않을 때도 있지만, 대체로 흥분하지 않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는 그의 목소리를 신뢰한다.  

실로 출중한 능력을 선보였고, 그 이상으로 노력했던 대단한 군주였던 정조. 그를 싫어했을 것 같은 신하들도 그의 자질과 노력을 부인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왕의 묘지문 일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세종 생각이 자꾸 났다. 학문을 좋아하고 학문을 많이 연마한 임금으로 서로 어깨를 견줄만 하지만, 그 성과와 평가에 대해서는 차이가 많이 진다. 정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세종이 정말 큰 인물이었구나...란 생각 말이다. 저자도 그랬나 보다. 이렇게 표현했다. 

 

이제 남은 이야기는 4권으로 마무리될 터인데 다음 편은 어떤 구성으로 갈지 궁금하다. 아무래도 순조와 헌종과 철종은 세 권으로 나오긴 그렇지 않나? 고종을 또 한 권으로 표현하긴 부족할 것도 같고... 아무튼 독자는 기다릴 뿐이다. 묵묵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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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3-29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조실록까지 샀는데 제대로 읽은 건 없다는... 다행히 우리 애들이라도 읽었으니 됐지요.^^
언제든 1권부터 차례로 읽어야 되는데~~~~~

마노아 2011-03-29 21:44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댁에서는 가격대비 독서 효과가 갑절의 갑절이에요. 여러 사람이 읽으니 참 좋아요.
순오기님은 완간된 다음에 몰아서 읽으셔도 좋겠어요.^^

꿈꾸는섬 2011-03-29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완간되면 몰아서 읽어야겠어요.^^

마노아 2011-03-29 23:29   좋아요 0 | URL
현준이와 현수도 자라서 즐겨볼 책이 될 거예요.^^
 
일제 강점기 - 식민 통치기의 한민족 수난과 저항의 기억 눈빛아카이브 한국근현대사 2
박도 엮음 / 눈빛 / 2010년 8월
품절


삼일절날 읽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글밥이 많아서 덮기까지 오래 걸렸다. 주로 사진이 많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기록에도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전작 '지울 수 없는 이미지'와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제목처럼 일제 강점기를 다루고 있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의 시간을 정치,행정/사회,경제/문화,생활로 나누어서 간략하게 설명을 하고 주요 사건들을 날짜별로 기록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해당 시기에 찍힌 여러 사진들을 실었다.

1915년의 사진이다. 조선총독부는 한일합방 5주년을 기념하고자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51일간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열었다. 이 행사를 위해 근정전과 교태전, 경회루 등이 진열장으로 변신했다. 그러고도 공간이 부족하자 나머지 건물도 헐어 4만여 점의 출품작을 진열했다. 철거한 경복궁 구조물은 민간에게 불하되어 별장, 요정, 일본 불교사원, 일본인 부호의 저택 자재로 팔려나갔다. 조선물산공진회는 고무신바람, 호롱불바람, 눈깔사탕바람, 화투바람 등을 불러 일으켰다.

화려한 볼거리들은 식민 통치의 성과를 과시하고 식민 통치의 정당성을 선전한 대표적인 제국주의 이벤트였다. 이런 식의 관제 이벤트는 100년이 지나고도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 비교하기에는 약하지만 요즘 서울 시내 곳곳에서 보여지는 서울시 표창장을 볼 때마다 아주 불편하다. 어휴...

조선총독부 건물이다. 주변에 저만한 위용을 자랑하는 건물이 없으니 더 위압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조선총독부 건물은 경복궁의 일부를 헐어내고 1916년 착공하여 꼬박 10년 뒤인 1926년 완공되었다. 해방 후 한국 정부의 청사(중앙청)로 사용되다가 나중에 국립중앙박물관 건물로 사용되었다. 1995년 김영삼 정부 때 철거되었고 청사 윗부분 돔만이 현재 천안 독립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어린이의 풍차바지 사진이다. 1920년대 서울의 명소 엽서인데 한 선비와 아이들이 성균관 명륜당 뜰에서 놀고 있는 장면이다.
풍차바지는 아기가 스스로 용변을 가릴 수 있을 때까지 남녀 구분 없이 입히던 유아복인데 남자의 바지와 비슷하다 뒤가 터진 것이 특징이다.

영친왕 이은과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의 결혼사진이다. 1920년 4월 28일
이방자 여사는 일본 황족으로 일본 이름은 나시모토 노미야다.
혼인 이듬해 아들 이진을 얻었으나 다음 해 고국을 방문했을 때 병으로 잃게 되었다.

이 시기 사진들을 보면 오늘날의 우리나라 사람들의 체형이 얼마나 서구화되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느낀다. 영친왕도 그렇지만 사진 속 인물들이 대개 키는 작고 얼굴은 지나치게 크다.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그래도 그때는 모두가 그런 편이었으니 그걸로 스트레스 받는 사람은 없었을 것 같다.

활 쏘는 부녀자들의 모습이다.
멋있다. 포스가 느껴진다.
평범한 집안은 아닐 것 같다.
1920년대의 모습.

이 시기 라디오 한 대 값은 쌀 열 가마니보다 더 비쌌다고 한다. 라디오 방송은 1926년에 시작되었는데 개국 무렵의 라디오 수신기 등록 대수는 1,440대였고 이중 일본인이 1,165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 무렵 두산그룹 창업자 박승직이 만든 박가분은 국내 최초 관허 화장품으로 하루에 무려 5만 갑이 팔려나갈 정도로 여성들을 사로잡았다.
사진 속 부녀자들도 박가분을 사용했을 것 같다.

1926년에 아사히카와 신문에 게재된 사진이다.
홋카이도 나카가와의 한국인 토목노동자들인데 온몸의 상처가 끔찍하다.
도망가거나 반항을 하면 담금질을 당했다.
혼이 나간 듯한 얼굴들이다.

1930년대 말에는 축구와 권투 열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합법적으로 일본인을 두들켜 팰 수 있었으니 말이다.

반도의 무희 최승희
1926년 숙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쿠에게 배웠다.
세계 10대 무용가의 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였으니 그녀가 누린 영광은 어마어마했으리라.
하지만 친일 행적으로 그 이름은 빛을 바래고 말았다.

노출이 심한 사진보다 고구려의 사냥꾼 모습으로 분한 사진이 더 눈길을 사로잡는다. 네번째 사진은 콜롬비아 축음기 광고모델 사진이다.

1930년대에 여성 교육가 박인덕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남편에게 위자료를 주고 이혼하여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중간중간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인물들의 녹취록이 실려 있고 뒤쪽으로는 위안부 할머니들과 강제 징용된 할아버지들의 증언도 실려 있다. 이미 돌아가신 분이 대부분이다. 처참한 기억을 갖고 병든 몸으로 일생을 사신 분들이 한 마디 사과를 받지 못하고 한을 갖고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니 더 마음이 미어진다. 강제 이주 당해서 고향을 등지고 가족과 생이별 하신 분들도 여전히 동토의 당에서 한을 품고 계시다.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로 가고 있는가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가야 할 길이 참 멀고 할 일이 참으로 많은 우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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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3-05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정말 읽고 싶네요.
너무 흥미로와요.

저는여, 친일 행적에 대해서 읽을 때마다, 만일 저 시대에 태어난 천재라면 어떻게 했어야 할까 라는
물음 앞에서 굉장히 답답해져버려요. 아마... 일본에 항복하지 않는 이라면, 자신의 재능을 결국 묻어버려야했겠죠.
슬퍼요. 이 문제는 좀 더 공부를 하고, 생각해봐야할거 같아요.
마노아님은 국사를 저보다 잘 아시니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무척 혼란스럽거든요.
꼭 읽어봐야겠네요... 이 책.

마노아 2011-03-05 15:51   좋아요 0 | URL
영화 '타인의 삶'이 생각나요. 예술을 버릴 수가 없어서 사랑하는 사람을 밀고했다가 죄책감에 자살해 버린 그 여자가요.
저 시대에 태어나 살았다면 나는 이랬을 거다란 장담은 못하겠어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친일을 한 인물들을 옹호할 수 없는 건 목숨 걸고 싸워 지켜낸 사람들도 분명 있기 때문이지요. 사진이 많고 두꺼운 책이라 비싸서 저는 도서관을 이용했어요. 근현대사 관련 책들을 읽을 때는 늘 갑갑함에 몸서리쳐져요. 어휴...

순오기 2011-03-06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제강점기를 아픔없이 보기는 어렵겠죠~~~~~~ ㅠㅠ

마노아 2011-03-06 15:03   좋아요 0 | URL
무감각하게 보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해야겠죠? ㅜ.ㅜ

로드무비 2011-03-09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륜당 뜰의 저 나무는 낯이 익은데요.
정기용 건축가가 그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본 기억이...

마노아님 결혼사진인가 싶어 달려왔습니다.
흥미로운 페이퍼들이 보입니다.^^

마노아 2011-03-09 00:45   좋아요 0 | URL
와, 유명한 사진인가봐요. 저는 처음 보았어요.^^
아아, 그나저나 사진 속 신혜양같은 새색시가 저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정말 푸릇푸릇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옆에는 무려 이승환! (>_<)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5 - 경종.영조실록 - 탕평의 깃발 아래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5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조선의 임금들을 보면 자질은 좋아보이는데 왕이 되는 과정의 무리수 때문에 발목 잡혀 무척 아쉬움을 남기는 인물들이 있다. 전기에 세조가 그랬다면 후기에는 영조가 그렇다. 물론 그 길을 열어준 것은 아비 숙종의 책임이 참 크지만... 

경종은 왕이 되기 전에 세자 시절만 30년을 보냈다. 어머니 장희빈이 아버지에 의해 죽고 나서의 시간은 그야말로 살얼음 판이었을 것이다. 아비도 신하들도 누구도 그의 편이 되어주지 않으니 조심에 또 조심을 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래야만 목숨을 보전할 수 있고, 그래야만 임금이 될 수 있었을 테니. 철저히 몸을 낮추고 속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온 세월 끝에 그는 마침내 임금으로서의 정치력을 보일 때가 있었다. 임금을 능멸하던 노론 신하들을 갈아치우고 그 자리에 소론 인물들을 앉혔던 것이다. 그렇게 환국이 진행 되면 옥사는 바늘 뒤의 실처럼 꼭 따라오기 마련. 그러나 놀랍게도 그 와중에 연잉군(훗날의 영조)은 살아남는다. 전혀 가담하지 않고 이름만 거론되어도 죽어나가기 쉬웠던 역사 속에, 역안에 이름이 정확히 오르고도 살아남은 놀라운 경우다. 세제가 되는 과정도 무례했고 무엄하기 짝이 없었지만, 거기까지만 나아가고 멈췄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쉬웠다. 대리청정까지 요구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까지 욕심 부리지 말고 시간의 힘을 믿고 기다렸더라면 그는 정통성에 의한 부담을 덜어내고 좋은 임금이 되었을 것 같다. 의미 없는 바람이지만... 

 

저자의 유머 감각이 이번에도 읽는 동안 잦은 즐거움을 선사했다. 지금 유행하고 있는 것들을 잘 섞어내는 게 박시백의 특징인데 그래서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읽게 된다면, 혹은 동시대의 유행어에 전혀 깜깜하다면 재미가 다소 감소할 것 같다. 내게 해당되지는 않지만. 

'반사!'라든가, '이거슨 진리!', 영조의 뇌구조와 '탕평이라 쓰고 노론 정권이라 읽는다' 등이 심각한 읽기 중에 잠시 쉬어갈 짬을 준다. 세손을 바라보는 영조의 하트 뿅뿅 눈매도 저자의 센스를 잘 보여준다.  

그래도 뇌구조를 보니 마음이 쓰라리다. 평생 눈물을 뿌리며 눈물의 정치를 보여준 영조의 양면성을 보는 것 같아서 말이다. 임금은 눈물조차도 정치적이건만 그의 지나친 눈물과 다혈질 성격 등이 함께 결합하면서 주변 사람을 참 힘들게 했다. 저런 성격은 그 비위를 잘 맞추는 사람과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을 극과 극으로 갈라놓게 만들기 쉬우니 말이다. 화완옹주와 사도세자가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한 뱃속에서 나왔음에도. 

 

영조가 했던 일 중에서 가장 잘했던 일 중 하나인 균역법. 물론 이름 그대로 역을 균등하게 만들지는 못했어도 균등하게 만들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디딘 게 중요하다. 부족한 세금을 채우기 위한 이후 조치들에 대한 주변 인물들의 반응이 아찔하다. 저 반응들, 권리무한 책임 제로... 지금도 지나치게 자주 보는 행태들이 아닌가. 역시, 속이 쓰리다.  

출간된지 한참 지나서 읽긴 했지만, 이 책 나올 때 평소보다 늦게 출간되었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영조가 워낙 장수했고, 재위기간도 길었던지라 저자 분이 실록을 읽는 데에 시간이 더 걸렸다고 한다. 마땅히 그랬을 것이다. 박시백 고유의 시각으로 읽어내는 평가들이 기다려졌는데 경종이 죽을 때에 대해서는 별 얘기 안 한 게 다소 아쉽다. 그에 비해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사건의 재구성이 흥미로웠다. 꽤 공감이 가는 편이었는데 그래도 노론 신하들의 역할을 너무 축소한 것 같았다. 영조와 신하들과 사도세자 식구들의 사전 공모에 의한 세자갈이라고 하기엔 신하들의 위험부담이 너무 큰 게 아닐까? 영조의 눈길이 세손에게 가 있는데 그가 세자의 아들이니. 사도세자의 아들들이 더 있기는 했어도 동궁을 또 갈아치울 결심을 미리 하고서 사도세자를 제거하는데에 동의했다고 보기도 무리니까. 또 세손이 왕이 되기까지의 험했던 과정을 생각했을 때도 노론 신하들의 역할을 너무 축소했지 싶다.  

세자가 죽었기 때문에 세손이 뒤를 이은 것이 아니라, 세손이 뒤를 잇게 하기 위해서 세자를 제거했다고 보는 저자의 얘기가 가슴 아팠다. 꽤 재밌게 읽었던 '사도세자 암살 미스터리'에서 보면 자신은 이미 틀렸고 아들을 살려내기 위해서 중죄인의 이름으로 죽어가는 사도세자 이야기가 나온다. 문학적 상상력을 극적인 사건에 잘 대입한 경우다.  

시리즈가 20권 계획이라고 알고 있는데 16권까지 나왔으니 80%가 진행된 셈이다. 아직도 몇 년은 더 걸려야 완간이겠지만 벌써부터 뻐근하고 뿌듯하다. 

덧글) 21쪽에 경종의 재혼 왕비 서씨라고 나온다. 경종의 계비는 선의왕후 '어씨'다. 오타가 있고, 236쪽의 가계도에서 사도세자와 경빈 박씨 사이의 은전군이 누락된 게 다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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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 2011-02-25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기.. 생뚱질문 하나..
저 사진들의 붉은색 형광펜의 흔적은 마노아님이 하신거에요, 아님 중고책을 구입하셨는데 저렇게 치장-_-;해서 마노아님께 안착한거에요?

마노아 2011-02-25 21:01   좋아요 0 | URL
제가 칠한 거예요.ㅎㅎㅎ 중고책이었으면 화르륵!!! 불타올랐을 거예요.ㅎㅎㅎ
근데 어제 도착한 중고책이 등급이 '상'이긴 했는데 위쪽에 약간 곰팡이가 피어 있어요. 아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에요...ㅜ.ㅜ

송도둘리 2011-02-26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정말 역사만화 중에 단연 돋보이는 시리즈인것 같아요. 영조편은 아직 읽어보진 않았는데 재미있겠네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아주 엽기적인 방법으로 죽게 된 건 '영조의 심리적 문제'가 가장 큰 원인일 것 같아요. 물론 노론신하들과 식구들 뒷 배경을 빼놓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런 방식으로 죽게 된 건 영조가 이성을 잃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어요. 왕정의 한계죠...1인 권력의 한계...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도 뭐...시스템이 무너져서 영조시대로 회귀한 느낌도 들어요.ㅋㅋ 에고 뻘소리가 길었네요. 리뷰잘읽었습니다. ^^;;

마노아 2011-02-27 13:19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박시백 화백도 소제목에서 '엽기적인 결말'이라고 썼어요. 어처구니 없는 죽음이었어요.ㅜ.ㅜ
이번 책은 앞서의 책보다 작가 고유의 시선이 약했어요. 특히 경종의 죽음에 대해선 거의 침묵했고, 두 임금의 죽음 뒤 사관의 총평도 없었고요. 그런 아쉬움에 별점 하나 깎을까 하다가 노고에 대한 고마움과 열정 때문에 차마 별점은 못 깎았어요.^^;;;;

순오기 2011-02-27 0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순전히 마노아님 리뷰로 보고 있지만, 앞으로 헐렁한 일정을 살면 1권부터 차분히 봐야겠어요.^^

마노아 2011-02-27 13:19   좋아요 0 | URL
헐렁한 일정은 휴식이 되어주고, 헐렁한 통장은 다른 복의 입구가 되어주었음 좋겠어요.^^

순오기 2011-02-27 18:24   좋아요 0 | URL
헐렁한 일정은 환영하고, 헐렁한 통장은 한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서~ ㅋㅋㅋ
앞으로 채워질 일만 남았겠죠.^^

마노아 2011-02-27 21:54   좋아요 0 | URL
분명 다른 한쪽 문이 열릴 거예요.^^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 18세기 조선의 문화투쟁
백승종 지음 / 푸른역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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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비록 정조를 편애하는 편이긴 하지만 이 책이 끌렸던 것은 제목의 정조가 아니라 '불량선비' 때문이었다. 불량식품이 꾸준히 인기를 끄는 것처럼 반듯할 것 같은 선비의 불량함이라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강이천은 표암 강세황의 손자다. 김홍도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강세황은 문인이면서 뛰어난 그림 실력을 가진 이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강이천은 조부의 손에서 길러졌는데 자연스레 자유분방한 가풍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특이사항으로는 태어나면서부터 한쪽 눈이 애꾸였고 종기 때문에 다리도 불편했다 한다. 어려서부터 총명해서 일찍이 정조의 눈에 띠어 실력을 보인 바 있고 성균관 유생 시절 학점도 좋은 편이었다. 북인 명가의 후예였던 강이천은 1797년 혹세무민의 죄로 유배형에 처해졌고, 1801년 신유박해 때 청나라에서 밀입국한 주문모 신부와의 연계성으로 재조사 받는 과정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혹세무민'이라고 명명한 그의 죄명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그는 정감록 류의 진인을 기다렸고 조선이 곧 멸망하고 새 나라가 세워질 거라고 기대했다. 특유의 언변으로 사람을 끌어들였고 자금도 모으고 전국 규모의 비밀결사도 꿈꾸었다. 이쯤 되면 불량하다기보다 '불온'해 보인다. 그의 이상은 큰 그림이 그려지기 전에 발각되어 접혀졌지만 성리학 질서의 조선 사회의 전복을 꿈꾼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강이천 사건은 발생 당시 그 전모가 비교적 빨리 수습되었고 정돈되었다. 관련자들이 유배를 가는 선에서 끝내고 더 이상 확대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사실 확대시키지 않으려는 모종의 정치적 타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이천과 같이 회합을 가졌던 김건순이 같이 걸렸고, 김건순은 천주교에서 영향력이 컸던 인물이었다. 김건순을 처벌하자니 노론 명문가가 타격을 입고, 더불어 천주교를 많이 믿고 있던 정조가 키우는 남인 세력들도 같이 위험해졌다. 형평성에 어긋났지만 정조는 사건을 키우지 않음으로 인해 정치적 부담을 덜어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정조는 강이천이라는 인물이 가진 상상력의 크기, 그 몽상의 여파가 장차 큰 해일을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제동을 걸기로 작정했다. 이른바 '문체반정'이다. 물론, 정조의 문체반정은 강이천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 이미 진행되고 있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정조는 대대적인 '문화투쟁'을 기획/실시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소품은 글의 성격상 글쓴이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더러 그런 마음을 글로 옮기다 보면 글씨체 역시 글의 내용에 상응하여 비뚤고 기울어지고 나부끼는 모습이었던 모양이다. 정조는 이런 풍조를 참지 못했다. -127쪽 

 일찍이 소품문을 경계했던 정조는 이제 아예 글씨체까지도 단속하기에 이르렀다. 과거 시험에서 굵고 반듯하지 않은 글씨체의 글은 아예 받지도 않게 했던 것이다.

정조가 청산 대상으로 여긴 소품문의 특성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글의 형식과 내용 면에서 종래 선비들의 애호를 받아온 “고문”과 어떻게 달랐을까. 안대회 교수에 따르면, 형식 면에서 볼 때 소품은 고문에 비해 문장의 길이가 짧다. 구어를 많이 섞어서 사용한다. 그리고 고문과는 글의 구성 방법도 달랐다. 소재와 내용도 현저한 차이를 보였다. 소품은 고문에서 불문율로 되어 있는 금기 사항을 무시했다. 사회적 소외와 개인의 비밀, 자질구레한 일상생활 등을 주로 다뤘다. 요컨대 생활인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소품의 가장 큰 특징은 글쓰기의 주관성에 있다. 감성적인 글쓰기, 자기 고백적이고 감정이 듬뿍 담긴 주관적인 글이 소품의 대종을 이루었다. 자기 고백적인 산문의 출현, 이것이야말로 소품의 문학사적 기여였다. 소품을 좋아하면 자연히 성리학적 가치에서 멀어진다. 정해진 격식을 떠나 글쓴이의 눈으로 사물을 직접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가치의 다원화가 이루어진다. 중국에서 양명학파의 사상이 소품에 깊이 스며든 것은 우연이 아니었고 정조는 바로 이 점을 두려워했다. 왕은 이단의 문이 한 번 열리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올 것이라며 걱정했다. -115쪽 

이 책에서는 '소품'과 같은 단어 정도는 독자가 이미 알 거라고 여긴 것인지, 아니면 찾아서 확인하라는 것인지 친절한 설명 같은 것은 없다. 소품은 산문류의 글쓰기로 받아들이면 적당하겠다.  

정조의 문체반정은 대중들이 정조라는 국왕에게서 기대하거나 혹은 설정해둔 이미지에서 꽤 벗어나는 검열의 칼이었다. 그에게 덧입혀진 개혁군주라는 이름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행적이었다. 그리하여 정조를 개혁군주라 부르고 그 시대를 르네상스라 부르는 것을 마땅치 않아 하는 이들에게는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무시무시한 증거물이 되곤 한다. 확실히 아쉬운 부분이긴 하다. 그런데 그가 살고 있던 시대와, 또 그의 삶의 궤적에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던 한계도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조선의 임금은 본시 권력이 약했다. 양반 개개인과 비교하면 왕 개인의 권력이 강하겠지만, 양반 전체로 묶어버리면 임금은 약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더군다나 그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멍에를 짊어진 사람이다. 즉위 전부터, 또 즉위하자마자 생명의 위협까지 받아온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보수적이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 아닐까?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성리학으로 무장해야만 하는 임금으로서 그의 사상적 한계는 뚜렷했다.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가치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왕의 자리를 지킬 수도 없고, 왕으로서 개혁을 추진할 수도 없고 그가 소중히 키워내고 길러내고 밀어주던 인사들마저도 지킬 수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그에게 천주교와 접촉하고, 나아가 진인의 도래를 기다리며 왕조의 멸망을 내다본 강이천 같은 인물은 지극히 위험분자였을 것이다. 그러니 누구보다 예민하고 꼼꼼하고 치밀했던 국왕이 내민 카드는 그가 취할 수 있는 정치적 선택으로서는 최선이었다. 그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이참에 원수 같은 노론을 쓸어버리겠다고 사건을 확대했으면 어땠을까. 그의 최후가 연산군을 닮지 말란 법도 없을 것이다.  

저자의 상상력은 무척 재밌었다. 역사의 소수자이며 그늘에 가려질 법한 인물을 재조명해서 거기에 얽힌 정치, 사회, 경제, 종교에 걸친 조선의 문화투쟁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으니까. 보통 역사학자들은 어떤 주제를 연구할 때 참고문헌을 일단 모두 읽고 조사한 뒤 작업에 들어가기 마련인데 본인은 미리 가설을 만들어 놓고 접근하는 습관을 가졌다고 한다. 관련 논문이나 참고도서를 다 읽는 것은 애초에 무리이므로 발상을 전환한 것이다. 하나의 아이디어로 보이는데 우려도 든다. 본인이 세워둔 가설의 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주관성이 많이 개입되지 않을까 하고. 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어떤 주장들에 자꾸 갸우뚱하게 되었다.  

이를 테면 이런 거다. 흔히 신유박해의 원인에 대해 당시 집권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천주교 신자가 많은 남인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탄압을 했다는 것에 동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당시 남인은 어차피 권세가 약했고, 굳이 집권층인 노론이 천주교 박해 사건을 일으켜 남인의 일부를 처단해야 했냐는 것이다. 글쎄, 과연 그럴까? 이미 권력을 가진 자들이라고 해서 권력을 더 독점하려는 마음이 없을까? 숙종 때의 환국만 보더라도 한쪽이 권력을 잡으면 다른 한쪽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있는 데로 밟아주던 것이 그들의 암묵적 룰이었다. 저자는 신유박해의 원인에 대해서 설득력이 약하다고만 해놓고 그러면 자신은 어떤 게 원인이라고 생각하는지 밝히지도 않았다.  

저자는 천주교가 평등사상을 전파했기 때문에 인기가 있다는 말도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고 말했다.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난 것은 1789년이고, 그때 천주교는 프랑스 혁명의 적이었는데 그런 천주교가 조선에서 평등사회 건설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면 그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글쎄, 그게 왜 말이 안 되는지 이 문장에서 나는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나폴레옹은 혁명의 격변기에 황제가 되려 했지만, 그의 정복 전쟁이 오히려 프랑스의 혁명 정신을 유럽에 퍼뜨리게 된 것처럼 역사의 아이러니는 얼마든지 있다. 이 책에서도 나온다.  

마테오 리치는 교황에게 편지를 보내 중국에 선교사를 파견해주되 단순히 유능한 신부가 아닌 정말 탁월한 신부만 엄선해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선교 대상인 중국인들이-정확히 말하면 중국의 고관대작과 황실 인사들이겠지만-유식하고 똑똑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그런지 중국에 파견된 초기 예수회 신부들은 하나같이 특출했다. 언어적 재능은 물론이고 인문과학적 박식함을 넘어 자연과학과 기술 또는 예술에 정통한 선교사들만 중국으로 건너왔다.
여기서 하나의 아이러니가 생겼다. 교황이 이끌던 서양의 천주교회는 과학과 근대에 대한 반동 세력이었지만 중국과 한국에서는 천주교가 기계문명의 애호자, 창달자로서 기능했다. -188쪽 

정조의 보수성을 얘기하면서 우리가 으레 역사상 뛰어난 인물들은 진보 성향을 띠기 마련이라는 선입관을 갖고 있다는 지적도 했다. 동의한다. '진보'라는 단어가 주는 시대적 과제가 또 우리를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곤 한다. 그런데 원래 '보수'라는 게 나쁜 것이 아니지 않은가. 보수의 외피를 뒤집어 쓰는 반동이 나쁜 것이지 보수 자체를 욕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정조가 정약용이, 박지원이... 그들이 보다 진보적이어서 시대를 견인해 가는 훌륭한 바퀴가 되어주었더라면 더더더 좋았겠지만, 기대하는 진보성향이 부족하면, 그들은 더 이상 훌륭한 인물이 되지 않는 것일까? 아쉬움은 남을지언정 그것을 성토하는 것은 좀 마뜩찮아 보인다. 심지어 정조의 문체반정이 고종의 개화정책의 실패의 원인이었다고 소급하는 것은 지나친 침소봉대라 여겨진다.  

마찬가지로 강이천이 새로운 문화를 지향했으며 그것이 동정심과 자애가 가득한 세상이라고 본 것도 좀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저자가 추정해 본 강이천이 꿈꾸는 새 나라는 정치형태상 여전히 왕조 체제를 답습할 것이고, 차별적인 신분제 역시 폐지되지 않을 것이라 했다. 하지만 새나라의 가치체계는 성리학 지상주의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여전히 왕조 국가에 신분제도 그대로인데 성리학 지상주의만 벗어나면 그 나라는 새나라인가? 백성들도 그런 나라를 새나라로 여기고 기다리고 행복해할까? 내가 보기에 강이천은 '혹세무민'이라고 했던 그의 죄명이 그대로 들어맞는 그저 몽상가 쯤으로 보인다. 1999년에 지구가 멸망한다고, 휴거설을 믿는 어떤 종교집단의 사람들이 재산을 다 처분했던 해프닝이 떠오른다.(강이천도 김신국에게 말세를 얘기하며 쓸데없는 곳에 돈을 쌓아두고 있으니 자금을 내놓으라고 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수신이 되지 않는 사람이 평천하를 어찌 할까 싶었다. 책에서 소개된, 그러니까 강이천이 심문과정에서 보여준 행보 등은 지극히 실망스러웠다. 어떻게든 역적의 이름은 쓰지 않으려고 죄를 축소시키기 위해 얼마 전까지 동지였거나 자기 때문에 끌려들어온 사람들을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진다. 그뿐 아니라 김건순의 배교 과정도 몹시 실망스러웠다. 천주교에서 순교자로 추앙하는 인물이라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천주교와의 관계를 축소하거나 부인하기에 급급했다. 물론, 그에 대한 실망은 주문모에 대한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애초에 이 사건은 정조가 의도적으로 축소해 버려서 몇몇의 유배형으로 끝날 일이었다. 정조 사후 신유박해 때 무수한 천주교 신자들이 줄줄이 걸려들어간 것은 제발로 자수한 주문모가 관련자 명단을 죄다 불었기 때문이다. 조사 과정에서 고문도 받지 않은 주문모가 이름이 드러나는 순간 모든 게 끝장일 사람들의 이름을 다 댔다는 것은 도무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자의 추정대로 누군가에게 속거나 어떤 타협이 있었을 것 같다. 그렇다 하더라도 실망이 가시지 않는다. 그의 무지나 혹은 무분별로 넘어가기에는 흘린 피가 과하기 때문이다.  

강이천의 사건을 계기로 정조가 예민한 촉수를 들어 문화투쟁을 벌였다는 저자의 가설에 설득력이 있다. 그 파급 효과까지는 쉬이 동의하지 못하더라도... 뭐랄까... 그런 기분이다. 정조에 대한 과도한 미화와 이상화에 대한 반발로 과하게 깎아내리는 인상? 그러니까 '빠'가 싫어서 '까'가 되는 그런 느낌. 속된 표현에 조금 죄송하지만...^^ 

어떤 부분은 몹시 재밌었고 또 설득력도 있었다. 그런 반면 또 어떤 부분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고 좀처럼 동의하지 못하는 것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런 시도와 접근은 반갑다. 다음 기회에는 정조와 이옥에 대해서 공부해봤으면 좋겠다. 다시 한 번 문체반정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보는 거다. 

덧글) 책에 오타가 있다.  

191쪽 18세기 후반에는 한동안 신지식을 중시하는 사대적 흐름이 있었다는 것이다. >>>시대적 흐름이 맞는 것 같다.
226쪽 전에 배우던 육임 등에 관한 책을 무도 불살라버렸다고 합니다. >>>'모두'가 맞지 싶다.
329쪽 순조원년(1801)>> 순조는 1800년에 즉위했으니 1800년이 순조의 원년이다. 표기나 연도 둘 중 하나가 틀린 듯. 

264쪽은 무려 제본 불량이다. 



고작 저것 때문에 책을 교환해야 하는가? ㅠ.ㅠ 

좌우 여백이 너무 넓은 것도 흠이다. 보통은 북다트를 끼우면 글자가 가려지는데 끼우고도 공간이 남는다. 좌우 여백을 조금만 줄였더라면 종이를 많이 아꼈을 것이다. 책값도 조금 줄었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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