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코로나 뉴노멀 - 이택광 묻고 지젝 답하다
슬라보예 지젝.이택광 지음 / 비전C&F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 오늘은 상큼하게 책 한 권을 까면서 하루를 시작해볼까? 



더 늦기 전에 대기 오염과 환경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지젝, p.96



작년에 여러 지식인들이 함께쓴 책 《코로나 사피엔스》도 인간이 자연에 너무 깊이 침범해 들어갔음을 경고하고, 그러므로 자연과 화해해야 한다고 얘기했었다. 그래놓고 하드커버에 여백 짱짱하게 박아 책 내용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더랬지. 그런데 이 책, '슬라보예 지젝'과 '이택광'의 대담으로 만들어진 책은 그보다 더 심하다. 내가 코로나 관련 책을 처음 읽는 것도 아니니 내용이 새로울 것도 없을 뿐더러 도대체 이 책이 왜 하드커버여야 하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이 책은 내가 아는 그 어떤 책보다 hard 커버가 HARD 하다. 절대 구부릴 수도 태워버릴 수도 없을 것 같은 어마어마한 HARD 표지인데, 평생 꺼내볼 백과사전도 아닌데 도대체 무슨 쓸모로 이렇게 해놨는지 모르겠다. 아, 물론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수시로 꺼내볼 책이 될 수도 있으니 표지에 대한 얘기는, 하드 커버에 대한 얘기는 화나지만 이쯤하기로 하겠다. 문제는 본문이다. 자, 내가 너무 화딱지가 나서 본문을 좀 찍어봤다. 이런 식이다.




대담을 본문으로 옮긴 거라지만 이 어마어마한 공백을 어쩔것인가. 게다가 위의 왼쪽 페이지는 모니터와 거리두고 앉아라, 시작하자, 뭐 이런 내용이다.



대화가 표현된 행간.... 난리가 났다.



이게 가장 빽빽하게 들어찬 본문이다. 이택광 혼자 말하는 부분이라 그런지 아주 꽉 차있다. 제일 가득 차있는 페이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우여백을 어쩔 것이여... 열린책들은 이 본문을 보면 뭐라고 했을까?



대담 외에 우리가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렇게 파란 박스 안에 넣어줬는데, 하하하하, 굳이 두 박스 두 페이지다. 대환장..



코로나 관련해 유명인사들의 말들도 이렇게 본문 가운데 툭, 들어가 있다. 이런거는 늘 자기만의 페이지를 갖고 있어서 휑한 여백이 아주 여유롭게(!!) 드러난다.



위의 좌측은 본문에 나온 내용 다시 강조한거다. 미치고 팔짝 뛰겠다.






지젝 얼굴 한 쪽, 책 제목 한 쪽. 그래, 지젝과의 대담이니 지젝 얼굴 필요하다고 생각했겠지. 한페이지에 걸쳐서...



이택광 얼굴도 필요했겠지. 두페이지에 걸쳐서. 도대체 오른쪽 시꺼먼 페이지는... 가슴이 아프단 말이다.



그리고 또 이택광. 위에는 좌 이택광 아래는 우 이택광... 예..........




책의 내용에서는 좋은 말 실컷 해놓고, 그러니까 자연과 친해지자,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자고 해놓고서 왜 이렇게 책으로 나올 때는 종이랑 잉크를 낭비하는걸까? 책 내용과 완전히 반대로 행동하고 있지 않나. 왜그러세요? 세계에서 제일 최강의 하드커버 표지를 소프트로 바꾸고 여백을 보통의 책들과 같이 만들었다면, 본문 재강조 하느라 한 페이지 낭비하는 일을 다 쏙 빼버렸다면, 이택광과 지젝의 얼굴 저렇게 크게 하지 않았다면, 이 책은 지금의 절반의 두께로 충분했을 것이다. 종이와 잉크 낭비 그리고 공간의 낭비를 가져온다. 참.... 



이러지말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결코 중립적인 것이 아니며, 어떤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기존 지배 관계에 ‘예‘라고 순종하는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Slavoj Zijek - P76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킬빌2>에는 ‘오지심장파열술‘이라는 궁극의 무공이 등장한다. 베아트릭스에게 5개의 점을 가격 당한 빌은 짧은 대화 뒤 다섯 걸음을 떼자 심장이 파열되어 죽는다. 이 장면에서 매혹적인 것은 공격을 당한 시점과 죽음을 맞는 시점 사이에 시차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죽지 않은 그 순간에도 죽음은 이미 확정되어 있다. - P84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21-02-18 0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따구 책 사면 화딱지 무지 많이 내는 인간입니다. 와, 그중에도 이건 역대급인데요!!

다락방 2021-02-18 10:15   좋아요 2 | URL
와, 펼치자마자 화딱지가 나서 미치겠더라고요 ㅠㅠ 어떻게 이래요 진짜 ㅠㅠㅠ

막시무스 2021-02-18 09: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엔트가 왜 빡쳐서 전투에 나왔는지 이해가 갑니다! ˝나무야! 미안해!˝ㅠ

다락방 2021-02-18 10:15   좋아요 2 | URL
환경문제에 신경써야 한다고 말하는 저자들의 책을 그러나 가장 환경문제 생각 안하면서 만든거죠 ㅠㅠ

미미 2021-02-18 09: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거 보다가 소름..공백도 그렇지만 사진..참 게다가 사진은 올리렴 가격이 몇 배라던데요. 이 글을 출판사가 꼭 보길 바래요!

다락방 2021-02-18 10:16   좋아요 1 | URL
이택광 사진 넣고 싶었다해도 저렇게 넣을 일이랍니까. 어떻게 저렇게 두 페이지에 걸쳐 얼굴 클로즈업을 해놓습니까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잠자냥 2021-02-18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 미쳤어... ㅋㅋㅋㅋ 게다가 이택광 책인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 이 책 대담자가 이택광이라서 패스했는데 ㅋㅋㅋㅋㅋㅋ 아니 진짜 이택광책이넼ㅋㅋㅋㅋㅋㅋㅋ feat.지젝 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02-18 10:16   좋아요 0 | URL
도서관에서 빌려봤기에 이정도로 쓴거지 제가 돈 주고 산 책이었으면 이거보다 더 깠을 것 같아요. 어휴.. ㅠㅠ

페넬로페 2021-02-18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환경문제에 관심 갖자해놓고 이러다니!
너무 심했어요 ㅠㅠ
저 큰 인물사진은 뭐예요?
보기에 부담스러워요^^
근데 전 사진 밑의 다락방님 멘트 읽고 슬그머니 재미있어서 웃었어요
이 분위기에 이러면 안되는거죠?

다락방 2021-02-18 10:40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저걸 저자들도 좋아했을까요? 저렇게 두 페이지에 걸친 자기 사진을? 환장할 노릇입니다. ㅠㅠ 저는 제 얼굴 저렇게 박아놓으면 너무 싫을 것 같아요 ㅠㅠ

이 분위기에 이러면 안되는 게 어딨습니까! 웃으세요! 웃음이 난다면 웃으시면 됩니다! ㅋㅋㅋㅋㅋ

로제트50 2021-02-18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 본 사람으로, 편집에서 아쉬웠어요.
지젝의 말인지, 이택광의 말인지 구분안되는 곳도 몇군데 있었고...


다락방 2021-02-18 11:04   좋아요 0 | URL
지젝한테 원고료 많이 줘야 돼서 부러 저렇게 만든걸까요? 너무 어이없어요 ㅠㅠ

persona 2021-02-19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얼굴에 관심있는 건 아닌데요 ㅋㅋㅋ

다락방 2021-02-19 21:02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요 ㅠㅠ 깜짝 놀랐잖아요 ㅜㅜ

감은빛 2021-02-21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래서 책을 사기 전에 출판사도 꼼꼼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 책 편집 디자이너는 정말 해도해도 너무 심하네요.
이 정도면 지면 (종이)낭비 부문으로는 대상을 줘야 할 것 같아요.

다락방 2021-02-21 21:25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이게 대체 뭐하는거에요. 종이한테 너무 미안하잖아요. 이택광 사진 쓴거 보면 잉크도 너무 아까워요 ㅠㅠ
 
밀크맨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19년 10월
평점 :
품절


여자는 열여덟살이다. 길을 걸으며 책을 읽는 것이 그녀가 좋아하는 일인데 나중에야 그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여진다는 걸 알게 된다. 여느날처럼 걸으면서 책을 읽다가 '밀크맨'이 옆에 차를 대며 태워주겠다고 한다. 그녀는 거절했지만, 그 뒤로도 그는 예고도 없이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조깅을 하던 중이기도 했고 프랑스어 수업을 듣던 중이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갑자기 나타나서 말을 걸고 또 갑자기 사라진다. 그런 그녀는 신경줄이 팽팽해진다. 외출을 하면서도 혹시 여기서 나타나지 않을까 저기서 나타나지 않을까 두리번거리고 겁을 먹게 되고, 그가 자신의 어쩌면-남자친구(그러니까 확실한 남자친구는 아니고 공식적인 관계도 아니지만 비슷한 관계)에게 자동차 폭발 사고가 일어난다고 암시하기까지 한 마당에 그녀는 두렵다. 어쩌면-남자친구에게 운전하지 말라고 하지만 어쩌면-남자친구에게 그 말은 생뚱맞다. 그녀와 밀크맨이 함께 있는 그 잠깐 동안의 모습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그것은 부풀려져서 전해진다. 그녀는 그가 타라고 한 차에 탄 적도 없는데 그를 따로 만난 적도 한 번도 없는데 오히려 예상치 못한 곳에서 기습적으로 그가 찾아올까봐 두렵기까지한데, 사람들은 그녀에게 유부남이면서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반정부 영웅인 그의 정부라고 소문을 낸다. 그녀의 엄마조차도 그가 영웅인 것이 멋져보이겠지만 그러나 그의 세컨드가 되면 안된다고 그녀에게 지청구를 늘어놓는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말을 해도 사람들의 귀에 닿지 않을 것임을 알지만 그래도 엄마가 하도 걱정하는 통에 엄마 그게 아니야, 나는 그의 애인이 아니야, 나는 그를 멋지게 생각하지도 않아, 그가 내가 같이 있는 모습이 왜 목격되었느냐면, 그가 갑자기 나를 그 자신이 원할 때에 찾아오기 때문이야, 우리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말을 하고 엄마가 자신의 편이 되어주길 바랐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엄마는 그녀에게 '거짓말'이라고 화를 낸다. 엄마는 믿어야 하는 딸의 말을 믿는 대신 자신이 믿는 바를 확고히 한다. 그것이 설령 사실이 아닐지라도.



여자는 이 일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음을 안다. 어쩌면-남자친구에게도 또한 가족에게도. 모든것이 그녀의 잘못으로 여겨지리라는 것이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누가 너더러 길을 걸으면서 책을 읽으랬니, 그거 이상하다고 예전부터 말했잖아. 사람들은 네가 밀크맨과 관계있는 것보다 걸으면서 책을 읽는 걸 더 이상하게 생각해. 누가 너더러 프랑스어 공부하러 다니라고 했니, 조깅은 왜 혼자 나간거니, 거기를 왜 혼자 걸었니 등등. 그녀는 그로 인해 두렵고 행동에 제약을 받고 이 모든 것 때문에 신경줄이 팽팽해져 어쩌면-남자친구와 다툼도 잦아진다. 그렇지만 만약 이 일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한다면 그녀의 경험부터 두려움까지 이해받지 못할 뿐더러 축소될 것이 분명하다.



왜 그렇게 두려워하는데? 그가 너를 때렸니? 라고 묻는다면 '아니' 라고 대답해야 하니까. 그러면 그가 너를 만졌니? 라고 물어보면 또 '그건 아니야' 라고 말해야 하니까. 그렇다면 대체 왜그래. 뭐가 두려워, 뭐가 겁나, 왜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있는거야, 네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그가 너를 만진 것도 아니라며, 라는 말들 앞에서 그녀는 뭐라 답할 수 있을것인가. 분명 나는 그를 피하고 싶고 그를 만날까봐 두렵고 집 밖으로 나서는 것도 걱정되고 집 안에서조차 혹시 그가 나를 보지 않을까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그러는거야, 할테니까.



서서히 피해자를 잠식해가는 가해자의 모습을 보는 건 피해자 뿐이다. 오히려 가해자는 세상에 알려지길 정부에 반하는 영웅이다. 만약 이 상태 그대로 피해자가 '그 때문에 두렵다'고 세상에 밝혔다면 '도대체 피해가 뭐기에 그러느냐, 그런 사소한 일로 한 남자의 인생을 망치지 말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것이 성폭행이냐, 네가 당한건 희롱 축에도 못끼지 않냐, 고 피해자도 아닌 제삼자들이 피해자가 당한 일의 경중을 재려들 것이다. 분명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것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될것이다. 그것이 네 피해의 전부이냐고, 그런것을 성폭력으로 퉁칠 수 있냐고, 그것은 아니지 않냐고, 피해자가 아닌 제삼자들이 입을 모을 것이다. 그 남자가 세상을 위해 한 일이 있는데, 너같은 여자와 단지 말을 섞었을 뿐인것 가지고 성범죄자가 되어야겠냐고, 그것이 정말 너와, 네 가족과, 이 지역과, 이 나라를 위한 일이냐고 손가락질 할것이다. 가해자가 그녀를 만진 것도 아니니까, 때린 것도 아니니까, 성기를 삽입한 것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너는 피해를 당한건 아닌데 피해를 당했다고 호소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너는 한 남자의 인생을 바닥으로 내팽개치고 있다고, 그것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거냐는 비난의 말들이 피해자에게 쏟아질테니까, 그녀는 침묵한다. 침묵은 그녀를 약하게 만들고 침묵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차에 타게 만든다. 아무런 약속 없이 불쑥 나타났던 가해자는 이제 그녀와 약속하고 만나는 사이로 성큼 자리할 수 있게 된다. 어떤 피해는 대의를 위해 눈감아야 하는가? 한 여성을 바닥으로 내팽개치면서 좇아도 되는 대의라는게 있는건가?


좆같아 진짜...




'애나 번스'의 밀크맨은 한 피해자가 어떻게 가해자에게 휩쓸려가는지를 잘 보여준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힌다는 건 실제 피해가 존재했다는 걸 의미한다. 피해자는 고립되어지고 그녀는 서서히 기운이 딸리고 있다. 그것이 이 이야기를 중심에서 잡아나가면서 그러나 소설 밀크맨은 한 늙은 남자가 한 어린 여자에게 접근해 자기 뜻대로 하려는 것만 보여주는 이야기는 아니다. 문제있는 여자들이라 불리는 페미니스트들과 사람들에 대한 감시와 부풀려지는 소문들과 이루지 못한 사랑과 드러내면 안되는 사랑까지 다 담겨있다. 문체도 특이하고 내용은 탄탄하다. 때로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으려는 작품들을 읽노라면 작가가 감당하지 못할만큼 욕심을 부렸네,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애나 번스에 대해서라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이야기들을 이렇게 자연스레 녹여낼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 나는 밀크맨을 한 번 더 읽을 것이다.



소설의 처음부터 애나 번스는 밀크맨을 죽이고 시작한다. 그 점이 고마웠다. 내가 죽이고 싶었는데 이미 죽여줘서 고마웠다. 때로 작가들은 이런 식으로 해야 할 일을 한다.



"너희 둘은 미쳤어." 언니가 말했다. "꽉 막힌 통제광들. 항문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강박적 미치광이들- 아니 대체 어떤 미친 새끼가 달리기를 하지?" - P30

어쩌면 우리 관계가 ‘어쩌면‘ 단계이기 때문에 참을 수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내가 공식적으로 그애와 같이 사는 건 아니고 우리가 공식 커플은 아니니까. 우리가 정식 관계이고 공식 커플로 같이 산다면 내가 가장 먼저 하게 될 일은 떠나는 것일 수도 있었다. - P63

이데올로기적 대의에 헌신한 사람들이 항상 대의를 위한 행동만 하지는 않는다는 건 나도 알았다. 개인적 편향, 이상한 변칙, 주관적 해석을 앞세우기도 했다. 미친 사람들도 있었다. - P241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불신이 너무 강해서 나를 도와주고 지지하고 위로해줄 사람이 있었을 텐데도 친구를 만들고 지원을 끌어낼 수 있었을 텐데도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사람들을 못 믿었고 나 자신을 못 믿었고 나한테 도움을 구할 자격이 있다는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기회를 놓쳤다. 하지만 그때에는 정신을 붙잡고 추스르는 게 내 최대 목표였고 그곳에서는 다른 사람들도 제각기 정신을 붙잡고 추스르려 애쓰고 있었으니, 어쩌면 나로서는 도움이나 위안이라는 개념을 알아차리거나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나에게 접근하기는 했고 그중 몇몇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고 정말 좋은 뜻으로 그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 움츠러들었는데, 두려움과 고집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전히 나는 무엇이라도 사람들에게 말할 만한 일이 있는지 아닌지조차 확신을 못하고 있었다. - P256

그런 식으로 일이 이루어졌다. 밀크맨이 아주 조금씩 접근하고 잠식하고 육식동물처럼 슬금슬금 다가왔기 때문에 뚜렷하게 집어 말하기가 힘들었다. 여기에서 조금, 저기에서 조금, 어쩌면, 어쩌면 아닌지도, 아마도, 모르겠다. 계속적인 암시, 상징, 재현, 은유가 있었다. 내가 받아들인 의미가 그가 의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아니었을 수도 있었다. 밀크맨이 한 말을 액면 그대로 놓고 보거나 각 사건을 따로 떼어 묘사한다고 해보자. 아무리 애써 말로 전달해봤자 별것 아닌 일이 될 것 같았다. - P257

"페기가 그 사람의 가슴을 찢어놓고 하느님에게로 가버리자 그 사람은 페기를 잊고 다른 사람하고 결혼하지는 않겠다고 해서 다른 모든 여자들의 가슴을 찢어놓았어." 그래놓고도 그는 계속 잘생겼다. - P359

여자들이 아무개 아들을 때려눕혔다. 아무개 아들의 행동 때문도 아니고 권총을 휘둘렀기 때문도 아니고 누군지 빤히 아는데도 복면을 쓰고 다녀서도 아니고 나, 여자, 그들의 자매 중 한명을 위협해서도 아니었다. 그런 게 아니었다. 남자이면서 여자 화장실에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 - P439

우리는 작은 대문을 열고 닫고 할 것도 없이 작은 산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었고 나는 초저녁의 빛을 들이마시며 빛이 부드러워지고 있다는 것, 사람들이 부드러워진다고 부를 만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저수지 공원 방향으로 가는 보도 위로 뛰어내리면서 나는 빛을 다시 내쉬었고 그 순간, 나는 거의 웃었다. - P492


댓글(7)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ellas 2021-02-04 10: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정말 다시 읽고 읽고 또 읽어도 재밌을 책이예요. :):):) 밀크맨 새벽에 다 읽고 왠지 좀 두근두근 하면서 한숨을 쉰 기억이 나요 :):)

다락방 2021-02-05 07:42   좋아요 1 | URL
문체도 좋았어요. 다 좋았어요. 저도 시간이 좀 지난 뒤에 다시 읽고 싶어요.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다고 말하는 책은 정말 좋은 책일 확률이 높다고 밀크맨 을 읽으면서 생각했어요. 후훗.

잠자냥 2021-02-04 10: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 미친 스토커 놈이 아주 그냥 주변에서 서성이면서 서서히 압박해 오는 거 정말 미치고 대환장.... 정말 죽여줘서 얼마나 고맙던지요. 이 작품 작가의 경험이 담긴 것 같은데, 작가가 정말 끔찍했을 거 같아요. -_-

다락방 2021-02-05 07:43   좋아요 1 | URL
처음부터 죽이고 시작해서 너무 좋았어요. 안그랬으면 읽는 내내 너무 쫄려서 심장이 터졌을거에요 ㅠㅠ
진짜 밀크맨 이야기도 너무 좋았어요. 남들이 뭐라 하든 자기 생각으로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것도 좋았고 그래놓고도 계속 잘생긴것도 좋았고요 ㅎㅎ

페넬로페 2021-02-04 11: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며 숨이 막히는 기분이란 이런것일까하며 읽었어요~~
만약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연!
누군가를 쉽게 비난할 수 없는 이유가 이 책에 있었어요^^

다락방 2021-02-05 07:44   좋아요 1 | URL
맞아요 숨이 막히죠. 이렇게 한 사람의 삶은 지배당하고 있는데 누군가에겐 이렇다 말할만한 게 없다 생각하게 되니 여자의 삶이란 대체 뭘까...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정말 좋은 독서였어요, 페넬로페님.

공쟝쟝 2021-03-08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흡.. 밀크맨... 짱이였어요... 😭 근데 다락방님 말대로 작가님이 욕심 잔뜩 부렸는 데 욕심 고마운 느낌이었어요
 
인간 섬 - 장 지글러가 말하는 유럽의 난민 이야기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너무 모르는 것 같아서 알고자 읽었는데 읽고난 지금은 차라리 모를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안다는 것은 괴로워진다는 걸 뜻한다. 모르는게 약이라는 말은 이럴 때 적합하다. 알면서 외면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죄책감과 불편함을 끌어안도록 한다. 알지말걸, 모를걸.. 계속 후회하고 있다.


그런 한편 읽는 내내, 다른 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다. 전생애를 다 걸지는 못하더라도, 생애 몇년쯤은 지금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지 않을까. 여기가 아닌 거기에서, 나만을 위해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누군가가 가지지 못한 인간의 권리를 조금이나마 누리고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생애 몇 년쯤은 그렇게 살아도 좋지 않을까. 어쩌면 이것은 누구나에게 주어진 임무가 아닐까.


장 지글러는 모르지 말라고 이 책을 썼을 테다. 또한 생애 몇 년쯤은 당신도 다르게 살아볼 수 있지 않겠느냐고 이 글을 쓴 것 같다. 나는 계속 생각한다. 생애 몇 년쯤은 다르게 살아보는게 가능하지 않을까,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을까.

2019년, 내가 현장 조사 임무를 수행하던 시점에 모리아 공식 수용소 내부와 외부, 즉 "올리브나무 숲 캠프"라고 이름 붙을 정도로 엄청나게 확대된 수용소 주변 올리브나무 숲엔 무려 58개 국적을 가진 난민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이란, 수단 출신으로, 대부분 자기 나라에서 교사나 엔지니어, 자영업자, 상인 전직 공무원, 회사원, 수공업자 등 중산층으로 살던 사람들이었다 농부나 노동자는 소수에 불과했는데, 이는 도시 또는 마을에서 도주하기 위해서는 이동에 필요한 교통비, 부패한 국경 관리들과 공갈범에 버금가는 경찰들의 입막음용 뇌물, 밀입국 안내인들에게 지불할 비용등 상당한 액수의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P17

시리아 출신 젊은 여성 사라 마르디니는 여동생과 같이 레스보스 해안에 발을 딛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유럽 쪽 바위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 두 사람을 비롯하여 다른 난민들(거의 다 시리아 출신의 가족 단위 난민들)을 태운 고무보트의 엔진이 고장 났고, 통제를 벗어난 보트는 제멋대로 표류했다. 사라와 여동생은 둘 다 수영선수였으므로 바라도 뛰어들으 고장 난 보트를 섬까지 끌고 갔다. 그때가 2015년 이었다. - P43

그 후, 사라는 독일에서 난민 자격을 얻었으며, 베를린의 바드 컬리지에서 학업을 이어 나갔다. 하루는 모처럼 시간이 나서 난바다에서의 구조 활동에 참가하기 위해 레스보스섬을 찾았다. 그런데 사라가 베를린으로 돌아가려 하자 그리스 경찰이 미틸레네 공항에서 그녀를 체포했다. 소식을 들은 사라의 동료 숀 빈더가 수감된 사라를 면회하려 하자, 스물네 살의 이 청년마저 체포되었다.
2015년에 고장 난 고무보트를 레스보스 해안 기슭까지 끌고 갔다는 이유로(그리고 그 때문에 십중팔구 일정 숫자의 난민들을 구했다는 이유도 더해졌을 것이다)그리스 법무부는, 프론ㅌ넥스 측의 고발에 따라, 현재 사라와 여동생을 "불법 인신매매" 혐의로 고소했다. 2019년 현재 재판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 P43

장 자크 루소는 1755년에 발표한 그의 저서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어느 한쪽에 일어날 수 있는 가장 고약한 경우는 자신의 운명이 상대의 재량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 P144

내가 물었다. "이 아이들은 왜 이렇게 신체를 훼손하는 겁니까?"
데메트리우스가 답했다. "이 소녀들은 정기적으로 경찰이나 일반 범죄자들에게 성폭행을 당합니다….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이들은 도둑질도 하죠. 그러면서도 이 아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건 본드 덕분입니다. 제일 값싼 마약이죠."
내가 또 묻는다. "그런데 왜 자기 신체를 훼손하느냐고요?"
데메트리우스가 답한다. "소녀들 말로는 나쁘게 살고 있는 스스로에게 벌을 주는 거라더군요." - P148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21-01-25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럽 난민 문제의 원인이 유럽에 있다는 걸 우리 모두 다 아니까요. 이런 생각.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삶에 대한 생각이, 그들에게는 일면 ‘책임‘의 측면에서 당연하다 생각해요.
하지만 우리가 누리는 안락함, 편안함을 생각한다면..... 우리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옳고 바른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쉽지 않은 일이예요. 그죠 ㅠㅠㅠㅠ

다락방 2021-01-25 10:40   좋아요 0 | URL
미국도 그렇고 유럽도 그렇고 자기네 선진국이라고 떵떵거리고 인권 의식 높고 평등의식 높은척 하지만 까놓고 보면 차별과 혐오로 가득차있는 것 같아요. 저라는 인간 개인을 놓고 봐도 부조리하고 불완전한데 세상 사람들이라고 뭐 다를까 싶기도 하고요. 다만 너무 모른 채로 외면하고 살았나 싶어서 다르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책을 읽는 일은 그래서 즐거우면서도 그래서 무거운 일인 것 같아요. ㅠㅠ

잠자냥 2021-01-25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 지글러 글을 좋아해서 이 책 장바구니에만 담아뒀는데요, 다락방 님이 읽으셨기에 별점 평가 보고 구매할 때 참조하려고 했으나... 별점 안 주셔서 시무룩... 별 몇 개에요?(저한테만 알려주세요)

다락방 2021-01-25 12:11   좋아요 0 | URL
이 리뷰에 별 다섯개 했습니다, 잠자냥 님! 저기 저렇게 다섯개가 똭- 있는데요!! ㅋㅋㅋㅋ

저는 장 지글러 이 책이 처음이었는데요 장 지글러의 다른 책들도 찬찬히 찾아 읽어보려고 합니다. 훗.

잠자냥 2021-01-25 12:13   좋아요 0 | URL
아니 어저께 북플에서는 읽었어요만 있고 별 없었는데... 시무룩 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01-25 12:22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건 오늘 아침에 급히 쓴 글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열심히 살겠습니다. (응?)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육식의 성정치 - 여혐 문화와 남성성 신화를 넘어 페미니즘 - 채식주의 비판 이론을 향해 이매진 컨텍스트 68
캐럴 J. 아담스 지음, 류현 옮김 / 이매진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읽고나서 나는 여자들이 꾸밈 노동을 멈춰야 한다고, 남성에게 선택받기 위한 노력을 그만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어째서 그런 결론이 되냐고 물으면 한마디로 설명하기가 힘들어서 책을 읽고난 뒤에도 계속해서 내가 내게 물어야 했다. 그러니까, 왜? 왜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됐지? 이 책을 읽고난 후의 내 감정은 한마디로 정리 되질 않는다. 한 문장으로 요약 가능하지도 않다. 내가 이 책을 예전부터 읽고 싶었으면서도 자꾸 미뤘던 것은 내가 육식을 지나치게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내가 이 책을 읽는다면 이 책에서 육식의 비윤리성을 지적할테고, 그것에 나도 동의할테고, 그렇다면 죄책감에 몸부림 치겠지, 라는 짐작으로 자꾸만 읽기를 미뤄왔던 거다. 뭐가 됐든 읽어보자, 괴롭다면 그것 또한 내가 가져가야할 몫이다, 했는데, 예상외로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육식을 한다는 것에 크게 죄책감을 얻거나 괴롭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잘하고 있다는게 아니라, 이 책에서는 그보다 다른 많은 것들을 주었다는 것이다. 한 번 읽어서는 확연히 정리되지 않는 것이지만, 그러나 자꾸만 질문하게 만드는 것들을 준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이 책을 읽던 도중, '정말 육식은 인간에게 맞지 않는 것일까?'를 생각해야 했다. 책에서는 동물이 동물을 잡아 먹는 세계에서는 그 동물을 익혀 먹지 않는데 인간은 동물을 먹기 위해서는 굳이 익혀 먹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본연의 모습을 자꾸 지워낸다는 것.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새로운 요리법으로 가공해서 내가 먹는 것의 실체를 지워낸다는 것. 동물이 살기 위해 다른 동물을 잡아먹을 때는 그 동물을 잡는 것도 스스로이며 해체헤 먹는 것도 스스로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다른 인간에게 시킴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멀어진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자연스러움에 대해 생각한다. 만약 동물을 먹는게 자연스러운 일이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그 동물을 죽이고 해체하고 먹는것까지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 또한 다른 동물의 살이 내 몸에 들어간다는 것은 어떠한가. 굳이 익혀서 혹은 튀겨서 그것을 먹는다는 것, 그것은 그렇다면 정말 자연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먼 게 아닐까. 인간은 사실 동물의 살을 먹기에 적합한 구조는 아니지 않을까. 정말 그렇지 않을까. 그러나 애써 우리 몸을 그에 맞추는 것은 아닐까. 이 책 속에서는 채식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지켜나가는 사람들의 사례들이 나오는데, 굳이 그렇지 않더라도 사실 고기를 좋아하는 나도 내 몸이 무겁거나 어떤 질병을 앓게 되면 아 당분간 고기 좀 자제하자, 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나. 저녁에 고기를 먹으면 가볍게 밥과 김치를 먹는 것보다 소화하는데 더 시간이 걸리는 것도 사실이잖아. 어쩌면 나는 내 몸을 고기에 너무 길들여놓은게 아닌가, 길들이려고 애썼던 게 아닌가. 자연스럽지 않은 것을 애써 적응하려고 한걸까? 정말 인간의 몸에 육식은 딱히 어울리지 않는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게 되는 거다.



도축과 도살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먹는 고기로부터 멀리 있다. 그것이 동물이었을 때로부터 아주 멀리 있다. 내가 삼겹살을, 스테이크를 먹고 싶어서 사 먹거나 구워 먹을 때, 내 눈앞에 있는 것은 그저 고깃덩어리다. 잘 익혀내면 맛있는 고기. 나는 돼지나 소가 그리고 닭과 오리가 내 입으로 들어가기 전에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굳이 상상하지 않으며, 그것들이 어떻게 죽어갔을지 역시도 상상하지 않는다. 칼로 찔렀을까? 목을 졸랐을까? 죽도록 때렸을까? 같은걸 생각한다면 아마 미쳐버렸을 것이다. 그런과정을 건너 뛰고 내가 만나는 건 순수한 고기 그 자체이다. 나는 삼겹살을 먹으면서 돼지의 삶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이 돼지는 자신이 결국은 인간의 먹이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인간은 돼지와 소와 거위와 닭과 양을 그저 인간 마음대로 태어나게 하고 살게 하고 또 죽이는 어떤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지난번 페이퍼에서 영화를 언급했던 것처럼, 도축업을 하는 사람을 멸시하면서(그들은 도살당하는 짐승으로 태어나게 될거야, 라고 영화 주인공은 말했더랬다) 고기를 먹는 삶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책 속에서는 결국 고기가 될 동물들을 키우면서 그 동물들을 학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도 나온다. 항문에 막대기를 찔러넣는 것부터 발로 차고 때리는 것까지. 그런 일들을 하는 그 사람들. 그들이 아마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닐것이다. 처음에 그 일을 하게 됐을 때부터 나는 돼지 똥구멍에 막대기를 꽂는 사람이 되어야지 같은거 결심하고 그리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을 계속하는 시간이 쌓이면서 그들은 처음에는 자기가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바뀌게 된 게 아닐까.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몇차례 '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를 떠올렸다. 


전쟁 당사자 중에서 가장 잔인한 의사(意思)를 가진 인간, 즉 전쟁 개시를 결정하는 최고 권력자만큼 적으로부터 심리적, 물리적 거리가 멀리 떨어진 위치에 있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었다. 백악관에서 만찬회에 출석하고 있는 대통령은 적이 흩뿌린 피를 뒤집어쓰지도, 육체를 파괴당한 전우가 내뱉는 단말마의 외침을 듣지도 않는다. 살인에 뒤따르는 정신적 부담을 거의 받지 않는 환경에 있다. 군대 조직이 이러한 형태로 진화하고 과학 기술 덕에 병기가 개선되고 있는 이상, 근접전에서 살육이 격렬해지는 것이 당연했지만 전쟁의 의사결정자는 아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대규모 공중 폭격을 명령할 수 있는 셈이다.


(중략)


권력욕에 사로잡혀서 모든 정치적 투쟁을 승리한 인간은 정상의 범위에서 이탈한 호전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면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그런 인간을 리더로 선출하는 시스템이 국민의 뜻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뽑힌 사람이야말로 집단의 의사를 체험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전쟁의 심리학은 권력자의 심리학이라고 바꾸는 것도 가능했다. - [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pp.255-256



결국 인간이 동물을 먹기 위해 다른 인간으로 하여금 동물을 죽이고 해체하게 한다는 것은, 권력자가 전쟁 개시를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 아닌가. 근접전에서 살육이 격렬해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전쟁 의사결정자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것처럼, 고기를 먹는 인간도 살육을 눈앞에서 자신이 보는게 아니기 때문에 육식이 가능해지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제노사이드 에서는 전쟁의사를 결정하는 대표자를 선출하는 것이 국민들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도축과 도살을 직업으로 삼게끔 하는 것은, 육식을 하는 육식인들이 아닌가. 우리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부터 그 거리가 얼마나 먼가. 혹은 얼마나 가까운가. 



대부분의 책속 주장들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거나 짐작 가능한 것이었는데, 육식을 하지 않음으로써 여성이 부엌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은 놀라웠다. 내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햇던 부분이었다. 



19세기 여성들은 기름기 많은 음식을 만들고 뜨거운 스토브 옆에서 일하는 시간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며 채식주의를 반겼다. 페미니스트이자 노예제 폐지론자인 새러 그림케Sarah Grimke와 앤젤리너 그림케Angelina Grimke 자매는 자기들이 받아들인 실베스터 그레이엄의 채식이 "'건강에 이로울 뿐 아니라 ……  여성이 고된 부엌일에서 해방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했다"(Lerner 1971, 253)


그러고보니 내가 집에서 요리를 할 때도, 나가서 고기를 사 먹을 때도 고기 요리에는 시간이 걸렸다. 불 앞에서 고기가 익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고기를 먹기 위해서라면 필요했다. 그러네, 하루 세끼 가족들의 식사를 차려줘야 하는 대부분의 가사 노동자인 여성들이 고기 요리를 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가사노동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정말 그렇네. 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 그러나 그것은 일방적으로 여자들의 몫이었지. 내가 먹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고기를 익혀야 했다. 어쩌면 나는 가사노동에 그다지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못햇던 것일 수 있겠다. 나는 주말 외에는 딱히 요리라 할만한 것을 하지 않으니까, 가사 노동이 고되다는 것은 알아도 내가 그것이 어디서 얼마나 고된 것인지에 대해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그래서 또 생각한다. 그렇다면 정말 고기를 안먹어야 하는 건 아닐까. 아니 나로 말하자면 그래도 지금보다는 덜먹어야 하는게 아닐까.



그러자 나는 다른 사람들의 육식중단에 대한 시작이 궁금했다. 육식을 그만두기로 한 사람들, 그들은 처음에 어떤 계기로 그것을 그만두게 되었을까? 어쩌면 동물학대 영상을 보고나서 그 참촉함에 육식에 동조하지 않기로 했을 수도 있을 것이고, 몸을 좀 더 가볍게 만들기 위해 채식을 선택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불 앞에서 가사노동하는 것에 시간을 들이는 게 싫어 육식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고, 고기를 먹으면 몸에서 소화시키지 못해 선택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어떤 계기로 선택을 했든 그들의 선택으로 인해 동물이 도살당하는 확률은 줄어들었을텐데, 그들은 처음에 어떻게 마음 먹게 되었을까? 



2013년에 어느 지역 경찰국은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는 주민들의 전화를 받기 시작했다. 경찰서장은 지역 신문에 이렇게 설명했다. "그 이상한 소리는 송아지를 잃어버린 어미소들의 울음소리로 밝혀졌다. 그러니까 송아지와 새끼들을 강제로 떼어버려야 하는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어미소들이 내는 소리다" <육식의 성정치 슬라이드 쇼>를 본 뒤 어느 젊은 여성이 내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자기가 낳은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세상을 떠났는데, 퉁퉁 불은 젖가슴은 아기에게 줄 모유로 가득하지만 죽은 아기는 먹을 수 없다는 현실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말했다. 사람들이 채식주의자가 된 이유를 물을 때, 그 여성은 그런 변화는 비극을 통해 알려진 개인적인 결정이라고, 그 일에 관해 이야기하기가 버겁다고 느낀다. 그렇지만 그 젊은 여성은 슬픔에 잠긴 어머니에게서 모유가 어떻게 나오는지 알고 있다. -p.371



이 책의 에필로그에는 육식의 성정치를 읽고난후 사람들이 보내준 사진들이 삽입되어 있다. 낙농가에서 육우용 소로 태어나 기계화된 시스템으로 우유를 짜내는 소들의 사진이기도 하고 하체는 인간 여성의 신체와 합성하여 선택을 기다리는 돼지와 소들의 사진들로 손님을 끌려는 가게들의 광고 이기도 하다. 버거킹은 커다란 햄버거 옆에 비키니를 입은 여자가 엎드려 있는 광고를 내걸기도 했다. 햄버거와 비키니를 입은 여성이 나란히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은 과연 무슨 뜻일까. 게다가 인간 여성의 하체를 가진 동물들의 광고는 성적인 이미지를 강조한다. 다리 한쪽을 구부리고 요염하게 서있거나 가터벨트를 입고 있는 것. 그러니까 소나 돼지가 고기로써 선택받기를 원한다는 것 '나를 선택해주세요' 라고 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의 이미지는 성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차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어제 시장에 갔다가 이런 풍경을 보게 됐다.



'자연산 미녀' 참도미.. 라고 한다. 왜 참도미는 '자연산 미녀'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어야 할까? 왜 선택받기 위해서 '자연산' 이며 게다가 '미녀'라는 수식어가 필요한걸까? 왜? 왜 자연산 미녀는 더 잘 팔리게 하기 위한 꾸밈어가 될까? 왜 자연산 미녀가 더 가치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걸까? 그건 어디서부터 온것일까? 자연산 미녀를 굳이 선택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아주 오래전에 읽은 잡지에서는 독자들이 사연이나 고민을 보내온 것을 실어주는 코너가 있었다. 거기에 한 여자가 억울하고 속상하다고 보냈는데, 사연인즉, 자신의 고등학교 동창은 공부도 못해서 대학도 못갔는데 얼굴이 너무 예뻐 부자 남자를 만나 시집을 갔다는 거다. 자신은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며 월급을 받는데, 그 동창의 집에 갔다가 자신은 살 수 없는 명품 가방이 가득 쌓인걸 보고 놀랐다는 거다. 그러면서 몇 번 안들었는데 갖고 싶으면 가져가라고 했다는 것. 공부 열심히 해서 잘했던 자신이 왜 더 초라하게 느껴져야 하는지, 얼굴이 예쁘면 열심히 살지 않아도 이렇게 부자로 살 수 있다는 게 너무 억울하다는 거였다. 이게 정말 오래전의 사연인데(고등학교때 본 것 같다), 그 때는 이런 정서가 지배적이었다. 여자는 예쁘기만 하면 된다는 것, 무조건 예쁘면 팔자를 고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부자 남자한테 시집을 가서!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취직해봤자 부자 남자한테 시집가는 것만큼 돈을 벌 수가 없으니 무조건 여자는 예뻐야 한다는 것, 착해야(에쁜게 착한거니까!) 한다는 것. 


이것은 아주 많은 것을 의미하는데, 일단 그 예쁘다는 평가 자체가 누구로부터 오는 것이냐는 거다. 누구한테 예뻐 보여야 할까? 남자한테다. 왜? 남자한테 선택을 받아야 하니까. 누구한테 섹시한 여성이 되어야 하는가? 남자한테다. 남자한테 선택을 받아야 팔자를 필 수 있으니까. 그것은 평가를 하는 입장이, 그러니까 너는 예쁘구나 너는 못생겼구나 기준을 정하고 평가하는 쪽이 남자라는 걸 의미하고 남자가 그렇게 여자를 평가할 수 있었던 것은, 남자가 더 가진게 많은 권력자라는 뜻이다. 돈을 가진 쪽도 힘을 가진 쪽도 이 사회의 기준을 정하는 것도 남자였고, 여자는 아무리 애를 써도 사회에서 위로 올라가는데에 한계가 있었다. 선택받아야만 비로소 더 나은 삶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선택받기 위해 애쓰는 삶을 살아야 했던 것. 

결국 여자의 삶이란 사회적 약자로서, 선택받기 위해 살아온 삶이 아닌가.



동물을 고기로 소비하면서 그들에게 여자의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 동물의 의지는 전혀 상관없이 나를 선택해달라는 그림을 그려놓는 것, 이 모든 것은 무엇을 말하는걸까. 동물은 과연 고기로 자신을 선택해주기를 바라고 있을까? 그들이 바랄 거라는 것은 인간의 추측이며 인간의 표현이 아닌가. 결국 가장 힘있는 자에게 선택받기를 원할것이라는 짐작은, 가진자의 시선에서 온 것일테다. 당장 육식을 멈추는 것이 이 사회를 바꿔가는데 필요하며 중요한 일이겠지만, '자연산 미녀'로 도미를 포장하는 일부터 없어져야 하지 않을까. 햄버거 옆에 비키니의 여자를 엎드려 놓는 것부터 없어져야 하는게 아닐까. 고기를 선택하는 것, 어떤 고기를 먹을지 어디에서 먹을지 어떻게 먹을지는 육식을 하는 육식인이 선택할 일이겠지만, 그러나 선택을 받기 위해 자연산 미녀라고 내세우는 것은 도미의 일이 아닐 것이다. 더 선택을 하게끔 고기를 여성화 시키는 것부터 그만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들이 선택받는 입장이라는 것으로부터도 우리가 빠져나와야 하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결국 나는 하고야 만것이다. 



물론 사회의 미의 기준을 정하고 그것을 내보이고 강요하고 억압하는 것은, 나아가 유리천장으로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을 막는 것은 힘있는 자들의 횡포이고 명백한 잘못이다. 그것은 너무도 견고하여 쉽게 무너지지도 부서지지도 않는다. 아직 많은 권력이 남성들에게로 기울어져있는데 그 사회를 바꾸는 것을 여자에게 짐지우는 것은 부조리하고 불합리해 보이지만, 그러나 선택받기 위해 사는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게 너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나는 너에게 선택받기 위해 살지 않아. 나는 너의 선택 없이도 잘 살아 보이겠어.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할거고, 나는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애쓸거야. 그 모든 순간들마다 번번이 후려침과 내동댕이 쳐짐이 나를 공격하겠지만, 그러나 나는 너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내 성격을 죽이지도 않을 것이고 너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 밥을 굶지도 않을 거고, 너에게 선택받기 위해 가터벨트를 입지도 않을 거야. 그리고 이런 사람이 하나씩 둘씩 늘어난다면, 그러니까 사회 전체적으로 '여자는 남자들의 선택과 무관한 삶을 산다'는 것을 계속해 보여준다면, 어느 순간 '자연산 미녀'라고 도미를 광고할 수 없게 되지 않을까? 돼지에게 가터벨트를 입혀서 광고로 내걸 순 없지 않을까? 그런것은 다 무용해지는 일이므로. 마치 여자를 먹는 것처럼 가터벨트 입은 돼지를 먹기 위해 레스토랑으로 들어가는 일들이 사라진다면, 모두가 육식을 그만두는 세상은 아니더라도 지금보다는 육식과 멀어지는 삶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캐럴 제이 애덤스는 '메리 매카시'의 아메리카의 새들》 의 추수감사절 저녁 만찬 사건을 언급한다. 




어떤 특정한 소비 윤리에 상관없는 내용을 다루던 이 소설은 식사 중에 갑자기 채식주의장 ㅕ성 스콧이 말을 시작하면서 이 채식주의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에, 그리고 이 채식주의자가 무어슬 먹지 않는 지에 관심이 집중된다. 중단은 여러 수준에서 일어난다. 미국인 여성인 로버타 스콧은 자기를 초대한 어느 나토 소속 장군이 식탁에 내놓은 고기를 거부한다. 충격을 받은 장군은 고기 써는 나이프를 내려놓은 뒤에 스콧에게 정중히 묻는다. "칠면조 고기를 싫어하나요?" 고기 써는 나이프는 장군의 힘을 상징하며, 포크로 찍어놓은 고기는 군인으로서 위신을 드높인다. 그러나 스콧의 고기 거부는 이런 상징적인 수단들을 사용하는 장군에 대응하는, 다시 말해 장군의 권력에 맞서는 도전이다. 장군이 사용하는 수단들은 여자가 채식주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무용지물이 되고, "오늘은 추수감사절이니까!" (MaCarthy 1972, 166) 라고 말하면서 장군이 "서둘러" 발뺌하게 만든다. -p.268



나는 위의 부분에서 또다시 제노사이드를 떠올린다.


직업으로 몸에 익힌 기술이라곤 살인 기술밖에 없는 남자들은 무력한 기분 속에서 침묵했다. 예거는 500미터 앞에 있는 사람을 단 한 방의 총알로 처리할 수 있었다. 적이 단말마의 비명조차 못 지르도록 등 뒤에서 신장을 한 번에 찔러 즉사시킬 수도 있었다. 아들 저스틴은 그런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평화로운 사회에서는 있을 장소가 없는 아버지를, 자유를 위해 싸우는 영웅으로 여기고 있었다. 저스틴의 순수한 존경심을 느낄 때마다 예거는 입맛이 썼다. 자기 스스로가 전투복으로 몸을 단단히 감싼 하찮은 사기꾼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p.120



 

무용지물.

나는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

나이프를 드는 것은 육식을 할 때 필요하고, 칠면조 고기를 먹지 않기로 선택한다면 나이프가 필요 없다. 

멀리 있는 사람을 단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총쏘는 기술도, 평화로운 때라면 무용지물이 된다. 


예쁨을 섹시함을 무용하게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 선택받는게 최고 가치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을 무용하게 만든다면.

예쁜게 착한거라는 인식을 무용하게 만들고, 선택하는 게 권력과 힘이라는 것을 무용하게 만든다면.

선택받기 위해 살아간다는 것을 무용하게 만든다면.

미의 기준을 무용하게 만든다면, 자기관리 안하는 여자는 정말 싫다는 말을 무용하게 만든다면. 

가터벨트를 무용하게 만들고 한쪽 다리를 요염하게 구부리는 것을 무용하게 만든다면. 자연산 미녀를 무용하게 만들고 자연산도 미녀도 모두 무용하게 만든다면. 이 모든 것들이 무용해진다면 간판에서 립스틱 바른 돼지는 사라지지 않을까. 햄버거 옆의 비키니 입은 여자는 사라지지 않을까. 

꾸미는 것, 선택받는 것? 우리는 그런거 관심없어. 우리는 우리의 건강한 삶을 위해 달리고 걷고 스쿼트하고 플랭크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외국어를 익히고 돈을 벌고 밥을 하고 앞으로 나아갈거야. 결국은 그런 태도와 삶에 대한 방향은 광고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광고가 바뀐다면 선택도 달라지지 않을까? 



머릿속에 생각이 너무 많고 그것이 한문장으로 정리되지 않아 결국 글이 길어지고 말았다.


육식을 거부하는 행동에 혐오자라는 딱지를 붙일 때, 지배 사회는 육식 거부에 관한 해석을 왜곡한다. - P304

가부장제 문화에 둘러싸인 여성들에게도 우리는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먹히는 사람이고, 한편으로는 고기를 먹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비자이자 소비 대상이다. 우리는 귀가 없어서 듣지 못하는 위를 가진 사람들이고, 귀가 달려 있지 않은 위를 통해 들으려 하는 사람들이다. - P350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미 2021-01-24 17: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뒤로 갈수록 고조되는 느낌이 좋은데요!!이 흐름에 동조하지 않는 것.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선택지들이 떠오릅니다.
제목은 <육식의 성정치>인데 여러모로 영감을 주었던 책이어서 더 좋았어요. 수고하셨어요. 👍👍

다락방 2021-01-25 09:20   좋아요 1 | URL
시키는대로 하지 않는게 필요한 것 같아요. 흐름이 틀렸다면 그 흐름에 따라가지 않는 것도 필요하고요. 물론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같이 읽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미미님. 미미님이 읽고 글 남겨주시는 걸 보는 것도 제가 읽고 쓰는데 힘이 되었답니다. 감사해요! :)

난티나무 2021-01-24 17: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으면서, ‘자연산 미녀’라고 써붙인 가게 주인에게 그 팻말을 빼라고 롸잇 나우 요구하는 장면을 상상합니다. 가게 주인은 비유를 갖고 뭘 그러냐고 하겠지만. 동시다발적 노력이 필요한 일 같아요.ㅠㅠㅠㅠㅠㅠ

저는 꾸밀 일이 없어 자연 그대로 살지만 ㅎ 꾸밈노동과 관련해서 제가 할 일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집 남자들 생각 바꾸기. 번번이 견고함에 부딪히지만 계속 해야 할 일인 거죠.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계속 하는 것!!!! 다락방님 화이팅!!!!

다락방 2021-01-25 09:26   좋아요 0 | URL
난티나무님, 저도 언젠가부터 꾸미지 않고 살고 있어요. 처음엔 볼터치를 안하다가(저는 볼터치 매니아였답니다? ㅋㅋ), 그 다음엔 피부 화장을 안하고 눈썹과 립스틱만 남겼다가, 이제는 눈썹 립스틱도 아예 안해요. 이게 안하다보니까 너무 편해서 도대체 어떻게 그동안 화장하고 살았나 싶더라고요. 이제는 하라고 해도 못할 것 같고요, 화장품 다 버리고 있어요. ㅋㅋㅋㅋㅋ
저는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인 제가 화장을 하지 않는 것은 그것 자체로 운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 저 사람은 회사 다니는데도 저러고 다니네, 라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만으로도 누군가는 ‘나도 그래도 되나보다‘ 하게될 수도 있으니까요. 난티나무님 말씀대로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다보면 조금씩 변화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할 수 있는 것들을 계속합시다, 난티나무님. 그리고 이 책 읽기도 함께 해주셔서 기쁘고 감사드려요! >.<

공쟝쟝 2021-01-24 17: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선택당할 수 밖에 없는 약자로서의 처지. 으아, 저도 리뷰 읽으니까 무슨 맥락인지 느낌이 왔어요. 동물의 의사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권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고 더 힘있는 남성에게 선택당해야 그나마 안전하고 덜 고생했으니.. 생존전략으로서 꾸밈노동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선택하는 입장’인 그 힘을 가진자들 -전통적으로 남성/육식인들의 - 시선이 고기나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과 비슷할 수 밖게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되었고 몰랐으면 몰랐지 그 폭력의 시선을 우리 스스로에게는 투사하지 말자고 말씀하신 것 같아요. (지송..거칠게 요약하게 되네요ㅋㅋㅋ)

네, 그래요. 우리는 착취하지 않는 시선, 선택하지 않는 시선 적어도 선택 당하려 노력하지 않는 시선 ㅡ 그들의 시선이 아닌 우리 자신의 시선을 갖추기 위해서 노력합시다!!

다락방 2021-01-25 09:28   좋아요 1 | URL
개떡같이 써도 찰떡같이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공쟝쟝님 ㅠㅠ 소중한 사람이야 정말 ㅠㅠ
공쟝쟝님 댓글 보니 그거 생각나네요. 남자들이 보통 페미니스트 욕할 때 ‘남자친구도 없는‘, ‘남자한테 사랑도 못받는‘ 못난이들로 정체화하잖아요. 남자 없어서 여성주의 하는것처럼요. 그런것 부터가 여자가 남자를 필요로 한다는 걸 전제로 하는데, 우린 남자 따위 없어도 살아가는데 전혀 문제없다는 것을 보여주는게 중요한 것 같아요. 아니, 오히려 없어야 더 잘살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는 그저 우리 자신만으로 당당하고 건강하고 행복합시다!!

공쟝쟝 2021-01-25 19:14   좋아요 0 | URL
무슨 소리야. 물론 페미니즘 하면서, 있던 남자와 헤어지긴 했지 ㅋㅋㅋ 실컷 욕해라 이 바보들아!! 그래도 난 잘산다~ 나는 남자 없이 잘살아 ~! 빰! (bgm. 미스에이 남자없이잘살아)

바람돌이 2021-01-24 1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하... 육식의 중단이 꾸밈의 거부로 넘어가는 의식의 흐름이 이해되었습니다. ㅎㅎ
제도나 법의 변화보다 저런 의식의 문제는 정말로 변화가 어려운 부분이죠. 더구나 이제는 여서뿐만이 아니라 남성도 꾸밈이 당연하다는듯 떠드는 자본의 무수한 부추김 광고들을 보면 더하죠. 이제는 꾸밈이 상대에 대한 선택받음을 위한 것이ㅠ아니라 자아실현이라는 광고로까지 뻗어갔잖아요. 그래서 꾸밈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도 전통적인 견해에서 변화가 오지 않을까싶기도 합니다. 무엇하나 세상이 바뀌는건 쉬운게 없네요.

다락방 2021-01-25 09:41   좋아요 1 | URL
제 의식의 흐름이 이해되시나요? 다행입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저는 제가 생각하고 또 제가 써놓고도 이게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생각일까, 글일까, 고심했거든요.
꾸며서 타인에게 아름답게 인정받는게 마치 최고 가치인것처럼 그동안 매스컴에서 엄청 얘기했잖아요. 과감히 그걸 부수고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여성의 경우 굶어가면서, 먹을 걸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미의 기준을 따라가려 하다보니 힘이 더 약해지는 것 같아요. 우리가 타인의 인정이나 선택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깨달아야 할 것 같아요. 한 명이 두 명 되고 두 명이 네 명 되다 보면 세상이 바뀔 수 있겠지요.

수이 2021-01-25 0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를 읽자마자 제가 든 생각은 그래! 영어공부를 진짜 많이 해버리도록 하자! 그래야 후회를 안하겠다 확고하게 결심을 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조금 더 가열차게 읽어야겠구나 다짐도 했고. 이 글 다 읽고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스쿼트 30개.

다락방 2021-01-25 10:22   좋아요 0 | URL
크- 스쿼트가 우리를 건강하게 해줄것이고 스쿼트가 우울증도 없애준다고 합니다. 수연님, 스쿼트는 정말 잘한 선택이십니다. 저도 스쿼트 한달 챌린지 할까 생각하다가 ‘하겠다‘ 하면 정말 한달동안 꼼짝없이 해야 하니까 그게 싫어서 안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영어공부 계속 생각해요. 아오 진짜 영어공부는 왜 자꾸 생각‘만‘ 하는걸까요. 싫다 증맬루.. ㅠㅠ
실천, 실천! 행동으로 옮기겠어요! 불끈!!

psyche 2021-01-25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다른 건 다 끄덕끄덕인데 고된 부엌일 해방이라는 것은 갸우뚱이에요.
옛날에는 생고기 사서 손질등등을 다 해야해서 그랬을까요?
지금은 고기요리가 제일 간단하고 일이 없거든요. 고기는 그냥 소금 후추만 쳐서 구워도 되니까요.
채식 위주로 하려면 주부가 정말 부지런해야해요. 냉동실에 넣어두고 먹을 수 있는 고기와 달리 야채는 매번 신선한 걸 써야하니까 장도 자주자주 봐야하고 맨날 샐러드만 먹을 수 없기 때문에 데치거나 해서 양념도 하고 장아찌를 만드는 등 수고가 들어가야 하고. 고기의 경우는 고기 하나에 김치만 있어도 되니만 나물 같은 반찬을 하려면 한개가 아니라 몇가지를 해야 하는걸요.

다락방 2021-01-25 10:25   좋아요 0 | URL
맞아요, 프시케님. 채소 요리라고 사실 생으로만 먹는 것도 아니고 저는 야채 씻는 것도 너무 싫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겨울에 씻을라면 손도 시렵고.. 부엌일 해방이라는 것은 사실 채식을 하든 밀키트로 요리를 하든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어요. 내가 해방된다면 다른 누군가가 하겠죠. 그러고보니 장아찌를 만들려도 부엌에서 오래 있어야 하고요. 저는 야채도 샐러드 보다는 익힌 야채가 좋더라고요. 그렇다면 삶거나 볶거나 끓이거나 하는 과정이 필요하고요. 아마 저 때는 지금보다 고기를 익히는 일이 더 수고스러워 나온 생각이겠지만 그러고보니 지금은 뭘 먹든 부엌에서의 노동을 피할 수가 없네요.
 
모든 사람은 혼자다 - 결혼한 독신녀 보부아르의 장편 에세이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박정자 옮김 / 꾸리에 / 201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피뤼스Pyrrhus, BC319~272는 주변의 많은 나라를 정복한 고대 희랍의 왕이다. 시네아스Cineas라는 신하가 왕의 끝없는 정복 전쟁을 저지하고 싶어 했다. 특히 로마 원정에 반대하였는데, 이때 왕과 나눈 대화가 유명하다. 시네아스는 끊임없이 "그다음에는?" 이라고 묻다가 피뤼스가 마지막 정복 후에 휴식을 취하겠다고 말하자 겨우 질문을 끝낸다. 그리고는 원정의 허망함에 대하여 왕에게 충고한다. 그 모든 제국들을 정복하느라 고생하고 결국 나중에 돌아와 쉴 텐데 굳이 뭐하러 떠나느냐는 것이다. -역자 후기 中, p.155-156



SNS에서는 가끔 초콜렛, 사탕, 아이스크림, 쿠키,빵들을 자르고 녹이고 굽고 쪼개서는 다시 섞어서 새로운 디저트로 만드는 영상들을 마주치게 된다. 따로따로 먹어도, 그것들중 하나만 먹어도 이미 달고 맛있는데 굳이 이런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는 건 도대체 왜 그러는걸까? 굳이 왜 이래야할까? 이렇게까지 해서 더 달고 맛잇는 걸 먹어야 하나? 나는 이 영상들을 무용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들을 만드는 사람은 내가 아닌데, 과연 내가 타인의 행동에 대해 무용하다고 생각해도 되는 것일까?


내가 이런 나의 생각을 반성하게 된건, 나 역시 누군가 무용하게 생각할만한 일들을 누구보다 많이 한다는 걸 깨닫고 나서이다. 쉽게 예로 들자면 여행이 그렇다. 나는 여행이 이루어지는 모든 과정을 사랑한다. 계획을 세우는 것부터 짐을 싸고 공항에 가는 리무진을 타는일, 공항에 도착해서 수속을 밟고 라운지에 들르고 면세점을 들르고 비행기에 탑승하고 기내식을 먹고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낯선 공항에 도착해서 그곳의 공기를 들이마시고 호텔에 도착하고 낯선 거리를 걷고 낯선 음식을 먹고 호텔에서 잠을 자는 그 모든 순간과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바로 그 순간까지. 그렇게 내 집, 내 방, 내 침대로 돌아오면 그제야 비로소 여행이 완성된 느낌이고 나는 그 느낌을 몹시 사랑한다. 와, 내 방 내 침대 너무 좋네, 나는 내 침대가 얼마나 좋은지 깨닫기 위해서 여행하는가봐, 라고 여행에서 돌아올 때마다 말하는데, 그런 나의 말을 들으면 아빠는 어김없이 "나는 여행 안해도 내 침대 좋은거 아는데 너는 왜 굳이 시간과 돈을 들여서 여행해야만 그걸 아는거냐?" 라고 물으시는 거다.


한 번은 가족이 모여서 텔레비젼을 보는데 캐나다에서 오로라를 기다렸다가 만나는 사람들이 나오는거다. 와, 저걸 눈앞에서 실제로 본다면 어떤 기분일까? 너무 좋겠다! 라고 내가 감탄하고 부러워하자 예의 아빠는 또 그러시는 거다. "내 집에서 가만 있어도 다 볼 수 있는데 왜 부러 저기까지 가서 저걸 봐야되냐?" 라고.



스물아홉에 뉴욕으로 드디어 가게 되었을 때, 그것은 나의 중학교때 부터의 목표였으므로 나는 너무나 기쁘고 떨렸다. 하루하루 빨리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터에 친구들과 만나 얘기를 나누는데, 그중 한 친구가 내게 그랬다. 고작 일주일 동안 미국에 가다니 너무 돈지랄이라고, 비행기값이며 호텔값이며 그 먼데를 가는데 고작 일주일 가느냐는 거다. 나는 그 친구에게 그렇게라도 나는 꼭 가고 싶고, 그게 내가 원하는 바라고 얘기했다. 나는 직장을 다니고 있었고 내게 주어진 휴가는 일주일 뿐이었다. 만약 그 친구 말대로 그곳이 먼 곳이기 때문에 더 오래 머물기 위해 때를 노려야 했다면, 여전히 그 직장에 다니고 있는 나는 아무데도 가지 못한 채로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멀기 때문에 가지 않기를 택하는 것은 그 친구가 선택하는 것이지 나의 선택은 아니다. 나를 세상 한심하게 보았던 그 친구의 냉소는 나로서는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왜 힘들게 굳이 여행을 하면서 그래봤자 어차피 집이 좋다는 걸 깨닫느냐는 아빠의 냉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나는 보부아르의 이런 문장을 읽는다.



스키 선수는 오로지 내려가기 위해 올라간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그가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은 단순히 오르락내리락하는 운동을 아무렇게나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산꼭대기 혹은 계곡의 바닥을 목표로 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종합적 의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으며, 그의 행위의 모든 요소들은 그 의미들을 향하여 스스로를 초월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오르내림은 산보나 운동을 위한 초월적 행위인데, 이와 같은 좀 더 넓은 총체의 관념을 배척하는 것은 너무 자의적인 결정이다. 결정을 내리는 것은 스키를 타는 사람이지 냉소가가 아니다. - p.42



앞서 말한 디저트를 새로 만드는 영상을 보고 내가 한 것도 바로 그 냉소였던 것 같다. 내가 그 디저트를 만드는 혹은 그 영상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면서 나는 냉소가가 되어 바라보지 않았는가.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만의 방향과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 무용하다 생각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냉소가가 아닌가. 내려가기 위해 올라갈거라고 냉소하는 사람은 스키를 탈 수 없다. 돌아올건데 뭐하러 떠나냐고 말하는 사람은 여행을 할 수 없다. 먼데에 그 짧은 기간 뭐하러 가느냐고 말하는 사람 역시 여행할 수 없다. 우리는 각자 분야가 다르지만 자기가 생각한 것들을 목표로 하고 있고 방향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이걸 생각하다가 책을 읽는 것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했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이 '읽었는데 내용 다 까먹었어, 이럴 거면 책을 왜 읽을까.' 그러나 까먹을 거라서 안읽는다면, 거기에는 책을 읽지 않는 내가 남는 거다. 어떤 행위를 하면 하는 사람이 된거고, 그 행위를 한 내가 미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혼자 여행하는 것도 좋아한다.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혼자 준비하는 것, 그리고 낯선 장소와 낯선 음식, 낯선 사람을 오롯이 혼자 만나는 것에서 오는 충만한 기쁨과 만족이 있다. 얼마나 짜릿한지 매 시간이 행복으로 가득찬다. 그러나 그렇게 혼자 걷고 먹고 보는 걸 마치고 호텔방에 들어와 침대에 누우면 외로움이 찾아든다. 오늘 내가 보낸 이 시간, 내가 보았던 것과 먹었던 것과 느꼈던 것을 함께 나눌 누군가가 이 밤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어디가 특히 아름다웠는지, 어느 음식은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든지, 어디를 걸을 데는 좀 두려웠다든지 하는 것들을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좀 더 근사하고 완성된 여행이 될 수 있을텐데. 그렇게 아쉬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고 또 나는 혼자 이 거리를 걸어야 하니까! 이런 경험들이 쌓일수록 '나는 혼자인 걸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혼자이고 싶다는 건 아니야' 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인간이란 무릇 그런 존재라고 보부아르가 말해주고 있다.



때때로 우리는 타인의 도움 없이 우리의 존재를 완성하려 한다. 나는 들판을 걸어간다. 풀을 꺾고, 발로 돌을 차고, 언덕에 오른다. 이 모든 것을 아무런 증인 없이 한다. 그러나 누구라도 평생 이러한 고독에 만족할 수는 없다. 산책을 끝내자마자 나는 친구들에게 그 산책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다. 칸다울레(BC 8세기 리디스의 왕) 왕은 왕비의 미모가 만인의 눈에 아름답게 비치기를 원했다.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몇 년동안 숲 속에서 혼자 살았지만, 그러나 숲에서 나와 『월든』을 썼다. - p.89



캬- 나는 위의 인용문이 너무 좋다. 자지러지게 좋다. 특히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몇 년동안 숲 속에서 혼자 살았지만, 그러나 숲에서 나와 『월든』을 썼다'는 부분.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다.



이 책은 2016년 12월에 읽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재독해야겠다고 이미 리뷰를 썼던 책이다. 그 당시에 도대체 뭐라는거야, 당황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언젠가 재독할거라고 생각했던 책이어서 2020년 12월에 재독했는데, 한장 한장 너무 재미있고 신나게 읽으면서, 도대체 내가 2016년에 이걸 왜 이해하지 못한걸까 궁금했다. 어쩌면 내 독서근육이 그 때 더 약했기 때문인걸까. 이 책에는 평소에 내가 늘 생각해왔던 것, 그래서 알라딘에서도 썼던 모든 것들이 담겨 있다.


친구랑 홍콩에 여행갔을 때는, 홍콩 호텔에서 그 다음에는 태국으로 여행가자고 비행기표를 검색하고 있었다. 몇해전 내가 이 일을 계속하는 게 과연 맞는 걸까 답답한 마음에 사주를 보러 갔을 때, 사주 선생님은 내게 '너가 그게 무엇이든 하물며 네 적성에 꼭 맞는 직업을 갖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시간 너는 너를 돌아보며 이것이 맞는걸까 답답해하고 나를 찾아왔을 것이다' 라고 했더랬다. 나는 자꾸 앞으로 가려고 하고 그리고 이렇게 가는게 맞는건지 중간중간 멈춰서 돌아보는데, 보부아르는 인간이 원래 이런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 거다. 내가 혼자라면 내 생각대로 됐을 일들이, 그러나 세상은 나 혼자 사는게 아니기 때문에 내 예상과는 다른 일들로 변해버리게 되는 것, 보부아르는 세상이 원래 이렇게 돌아가는 거라고 한다. 내가 누누이 말했던 바로 그것.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은 자기 자신이 온전히 자신으로 잘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던 것을, 보부아르 역시 말해주고 있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고 또 살아가기 위해서 다른 이들의 안녕을 바라야 하는 거라고, 우리는 다른 사람과 섞여서 살아가고 그들이 우리를 밀어주거나 반대하거나 끌어주더라도 그것이 바로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방법이며 모습이라는 거다. 다만, 보부아르는 이 모든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이야기,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 우리가 삶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이야기에 '기투', '초월', '초월성', '지양', '실존' 등의 철학 용어를 더했다. 이 용어들이 낯설어서 중간중간 책을 읽다가 턱- 하고 막힐지도 모르지만, 이 책의 <역자 후기>는 크- 한줄기 빛이 되어 이 용어들에 대해 설명해준다. 너무 알기 쉽게 설명해줘서 아니, 이 사람 뭐하는 사람이지? 했더니 옮긴이 '박정자'는 '사르트르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역자 후기를 먼저 읽고 이 책을 읽어도 좋겠고, 이 책을 읽고 역자 후기를 읽어도 좋을 것이며, 이 책을 읽고 역자 후기를 읽은 후에 이 책을 다시 읽는 것은 더 좋을 것 같다. 나도 언젠가는 또 이 책을 읽을 것이다.



나는 항상 애인에게도 친구들에게도 그러니까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물론 가장 처음 나 자신을 포함해서,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가자고, 지치지 말고 나아가자고 말하고 다닌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 때로는 '앞으로 나아가자고 하는 게 그런데 절대선인걸까?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을 선으로 생각하는 건 아닌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의문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이제 와서 '뒤로도 가자'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설사 우리가 돌아가고 뒷걸음질 치더라도, 결국은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함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보부아르는, 나의 이런 생각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이 책 한권을 통해 이야기해준다. 인간은 현재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미래에 던져진 존재라는 것, 우리가 지금 사는 이 현재는 미래의 나를 구성하는 것이고 그 미래는 또다시 현재의 내가 되어서 또 그 다음 미래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거다. 내가 항상 작은 목표라도 만들고 꿈을 꾸고 그것을 이루면서 살고자 하는 모든 것들이 환하게 설명될 수밖에 없다. 내가 자꾸 여행을 떠나는 것, 어차피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부득이 그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자 내가 잘 살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살아가는 이 모든 순간은 분명 의미가 있고 어떤 식으로든 미래에서 나를 맞이할 것이며, 나는 잘 살고 있다. 내가 잘 살고 있다는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바로 얼마전에 이 책을 읽었던 과거가 있고, 그 과거는 그 책을 읽는 동안에는 현재였다. 이런 미래를 위해 준비된 현재였다.




피뤼스는 정복하기 위하여 출발한다. 그러니까 그는 정복할 것이다. "그럼 그다음은?" 다음 일은 차차 알게 될 것이다. - p.78











고착되어 있는 순간은 결코 새롭지 않다. 과거와의 관계 속에서만 비로소 순간은 새로워진다. 바로 지금 출현한 형태는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배경이 뚜렷하고 분명해야만 자신의 모습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나무 그늘의 시원함이 귀중한 것은 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대낮의 길가에서이다. 휴식은 고된 일과를 마친 뒤의 편안한 긴장 이완이다. 작은 산꼭대기에서 나는 내가 돌아다녔던 길을 바라본다. 내 성취감의 기쁨 속에 현존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길 전체이다. 이 휴식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은 보행이다. 그리고 이 한 잔의 물을 귀중하게 만드는 것은 나의 갈증이다. - P33

인간이 기투企投인 이상, 인간의 행복은 인간의 쾌락과 마찬가지로 기획일 수밖에 없다. 행운을 잡은 사람은 곧 다른 행운을 잡으려고 한다. 파스칼이 정확하게 말했듯이, 사냥꾼이 흥미를 가진 것은 토끼가 아니라 사냥 그 자체이다. 자기가 그 안에서 살 생각도 없이 낙원에 들어가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그런 행위를 비난할 수 없다. 목적지는 저쪽 깊숙한 곳에 있을 경우에만 목적지일 수 있다. 목적지에 이르면 그곳은 곧 새로운 출발점이 된다. - P39

스키 선수는 오로지 내려가기 위해 올라간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그가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은 단순히 오르락내리락하는 운동을 아무렇게나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산꼭대기 혹은 계곡의 바닥을 목표로 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종합적 의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으며, 그의 행위의 모든 요소들은 그 의미들을 향하여 스스로를 초월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오르내림은 산보나 운동을 위한 초월적 행위인데, 이와 같은 좀 더 넓은 총체의 관념을 배척하는 것은 너무 자의적인 결정이다. 결정을 내리는 것은 스키를 타는 사람이지 냉소가가 아니다. - P42

인류가 소멸할 것이라고 단언할만한 근거는 하나도 없다. 개개인의 인간은 반드시 죽지만 인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 P60

사람은 무산계급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바쳐 일하면서 동시에 인류 전체를 위해 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무산계급을 위해 투쟁하는 유일한 방법은, 무산계급과 함께, 무산계급 이외의 인류에 대항하여, 어떤 기획을 추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무산계급과 더불어 일한다는 것이 계급의 차이가 없어질 미래의 인류를 향하여 하는 일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러려면 우선 오늘날의 자본가로부터 한 세대 혹은 수 세대에 걸쳐 재산을 빼앗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사람들을 위하여 일한다고 하는 것은 언제나 그 이외의 사람들에 반反하여 일하는 것이다. - P66

자기 행동의 예상치 못한 결과를 바라보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외쳤던가? "나는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는데!" 노벨은 자신의 일이 과학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결과적으로 전쟁을 위해 일했던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자신의 학설을 뒷날 사람들이 향락주의라고 부를 것을 예상하지 못했고, 니체는 니체주의를, 그리스도는 종교재판 같은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은 곧 역사의 밀물과 썰물에 떠밀려 새로운 순간마다 새로 만들어지고, 그 주위에 무수한 생각지도 못한 소용돌이를 만들어 낸다. - P69

나의 행위가 완료되면 그것은 최초에 내가 바라던 바와는 다른 행위가 된다. 그렇다고 하여 그 행위가 완전히 낯설게 변질되는 것은 아니다. 즉 그 행위는 자기의 존재를 완료하는 것이고, 이때 비로소 그 행위가 진실로 완성되는 것이다. - P72

피뤼스는 정복하기 위하여 출발한다. 그러니까 그는 정복할 것이다. "그럼 그다음은?" 다음 일은 차차 알게 될 것이다. - P78

어떤 사람이 여행을 한다. 그는 오늘 저녁 리옹Lyon에 도착하려고 서두른다. 그 이유는 내일 발랑스Valence에 가고, 모레 몽텔리마르Montelimar에, 그리고 그다음 날에 아비뇽Avignon에, 또 그다음 날은 아를Arles에 가기 이ㅜ해서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비웃을 수도 있다. 아무리 해 보았자 실제로 그는 님Nimes이나 마르세유Mareille도 보지 못핫 채 집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니 말이다. 본Beaune이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상관없다. 그는 자신의 여행을 할 것이다. - P79

사람은 죽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이유 없이, 목적 없이 존재한다. 그러나 장 폴 사르트르도 『존재와 무』에서 밝혔듯이 인간 존재는 사물처럼 응고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매 순간 자신의 존재를 존재해야 한다. 순간마다 그는 자신을 존재시키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바로 기투이다. 인간 존재는 기투의 형태하에서 실존하고 있지만, 그 기투는 죽음을 향한 기투가 아니라 각기 개별적인 목표를 향한 기투이다. - P82

때때로 우리는 타인의 도움 없이 우리의 존재를 완성하려 한다. 나는 들판을 걸어간다. 풀을 꺾고, 발로 돌을 차고, 언덕에 오른다. 이 모든 것을 아무런 증인 없이 한다. 그러나 누구라도 평생 이러한 고독에 만족할 수는 없다. 산책을 끝내자마자 나는 친구들에게 그 산책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다. 칸다울레(BC 8세기 리디스의 왕) 왕은 왕비의 미모가 만인의 눈에 아름답게 비치기를 원했다.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몇 년동안 숲 속에서 혼자 살았지만, 그러나 숲에서 나와 『월든』을 썼다. - P89

아들이 원하는 결혼을 막는 권위적인 아버지는 자신이 아들을 위하여 헌신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들 대신 이 상황 아닌 저 상황을 선택하여 주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자기가 아들의 행복을 위해 행동하고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그는 자기 자신의 의지에서 살짝 벗어나, 건간이라든가, 부라든가, 명예라든가 하는 기존 가치의 객관성을 제시한다. - P95

하나의 생명을 준다는 것은 생명을 받은 사람의 자유까지 좌지우지할 권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아이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으므로 아이에게 최대의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이는 알고 있다.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이 현존해 있음에 의해서만 그에게 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는 자신의 기획에 의해서만 자기 자신일 수 있다. 태생이나 교육은 그가 반드시 지양해야 할 사실성facticite일 뿐이다. 사람들이 그에게 해 준 일은 상황의 한 부분이며, 이 상황을 초월하는 것은 바로 그의 자유이다. 그는 이런 상황 혹은 저런 상황에 있게 될 것이지만, 그 어떤 상황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항상 다른 곳에 있는 존재이므로. - P103

우리는 타인에게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칸트의 말처럼, 비둘기에 저항하면서 비둘기를 밑에서 받쳐주고 있는 공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의 장애물일 때조차 우리는 타인의 도구가 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든 그에게 일어나는 것은, 언제나 타인에 의해서이다. - P110

만일 내가 이 길을 가지 않았고, 그런 말들을 하지 않았고, 거기 없었더라면, 아마 타인의 삶은 전혀 다른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그의 인생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말이나 몸짓이 어떤 뜻을 가지게 되는 것은 타인에 의해서다. 그는 자유롭게 그 의미를 결정한다. 내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그의 주위에서 모든 것은 똑같이 충만되어 있었을 것이다. - P111

부동의 자세이건, 아니면 마구 움직이는 자세이건 간에, 우리는 언제나 지구 위에 올라앉아 있다. 모든 거절은 선택이고, 모든 침묵은 목소리이다. 우리의 수동성조차 우리 의지의 소산이다. 선택하지 않기 위해서는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을 또한 선택해야 한다. 선택에서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 P114

"철도나 비행기가 없었던 옛날에는 어떻게 살았을까? 라신느Jean Baptiste Racine 없는 프랑스 문학, 또는 칸트 없는 철학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인간은 지금 현재의 만족을 넘어서, 자기 뒤로, 회고적으로, 하나의 필요를 던져 놓는다. 물론 그가 살고 있는 지금, 비행기는 하나의 필요에 부응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물건이 존재함으로써 생겨난 필요이고,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의 존재로부터 사람들이 만들어 낸 필요이다. - P121

우리들의 행위 하나에주어지는 칭송이 우리들의 전존재全存在를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자신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기를 바란다. 이름은 대상 속에 마술적으로 집합된 나의 총체적 현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행위들은 분산되어 있다. 우리는 행위를 하고 있는 한에서만, 다시 말해 분열된 존재 속에서만 타인을 위하여 존재한다. - P124

내가 정립할 대상들을 정의하는 것과 나 자신을 정의하는 것은 결국 동일한 기획이다. - P135

사람들이 나를 위해 세계 속에 하나의 자리를 마련해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들 각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세계를 우선 내 주변에 출현시켜야만 한다. - P136

나의 기획이 그들의 기획과 일치하느냐 혹은 저촉되느냐에 따라 그들은 동맹자로서 혹은 적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이런 모순 또한 나의 책임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를 만들어가면서 그 모순을 존재시킨 것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 P137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0-12-10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 책 재독이란 말입니까?! 전 그 옛날 사두고 아직 한 번도 안 읽었는데!
다락방 님 리뷰에 힘입어 조만간 저도 읽겠습니다!!!

다락방 2020-12-10 13:36   좋아요 0 | URL
저도 나오자마자 사서 읽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그 때는 도대체 이게 뭔말이여...했었습니다. 그런데 4년만에 읽으니 와, 너무 재미있는 거에요! 씐나서 읽었습니다. 후훗. 잠자냥 님도 재미있게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빠샤!!

라로 2020-12-10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보고 싶어요!! 아~~~ 근데 이러면 안 되는데. 😓

다락방 2020-12-10 18:21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아쉽게도 전자책이 없네요. 종이책도 아주 얇은데 비싸고요. ㅜ

난티나무 2020-12-10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 고고!!
밑줄 하나하나 읽다가 어제 읽은 <스토너>가 생각났어요...

다락방 2020-12-10 18:22   좋아요 0 | URL
크- 스토너 참 좋지요? 스릴러만 읽는 제 동생도 스토너 읽더니 한참 지난 후에도 생각나는 책이라고 말하더라고요. 즐거운 독서가 되실거라 감히 예상합니다. 후훗.

2020-12-10 14: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10 1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0-12-10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12월에도 보부아르를 읽었다죠 ㅎㅎㅎㅎ 전 처음 보는 책이에요. 다락방님이 재독하셨다니 달리 보입니다.

다락방 2020-12-10 18:24   좋아요 0 | URL
그러네요?! 작년 12월에도 보부아르를 읽었네요? 아하하하. 근데 저는 보부아르랑 한나 아렌트랑 자꾸 헷갈려요. 바부팅 ㅜㅜ

서니데이 2020-12-10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올해의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축하드립니다.
따뜻하고 좋은 연말 보내시고,
항상 행복과 행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다락방 2020-12-11 09:03   좋아요 1 | URL
아이고, 축하 감사합니다. 그러고보면 서니데이님은 해마다 축하해주시네요.
연말 잘 보내시고 건강하세요, 서니데이님. 새해 복도 많이 받으시고요!

파이버 2020-12-10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첫여행이 고작 일주일이었는데, 다들 아깝다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ㅎㅎㅎ 그래도 그때 일주일만이라도 갔다오길 잘한것 같아요
다락방님 글을 읽으니 다시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습니다 현실은 방콕이지만요ㅎㅎ

다락방 2020-12-11 09:04   좋아요 1 | URL
저는 일주일 여행이 결코 나쁘지 않거든요. 주어진 일정에 따라서 여행을 즐기는 것이 저는 너무 만족스러워요. 직장생활 하면서 휴가를 그만큼 쓸 수 있으니 아 어느 때 어느만큼 가면 되겠구나, 계획 세우고 다녀오는 게 저는 행복합니다.
파이버님, 우리는 언제 다시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요. 흑흑 ㅠㅠ

scott 2020-12-10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드디어 푸코 탈출! 추카 ㅋㅋㅋ

다락방 2020-12-11 09:04   좋아요 0 | URL
푸코 탈출 못했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어떻게 탈출하나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