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산드라의 식구들은 가난했다. 늘 배가 고팠지만, 음식을 마련할 돈은 없었다. 아버지는 오래전에 아주 극찬을 받을만한 책을 한 권 쓴 적이 있지만 그 때 이후로는 어떤 작품활동도 하고 있질 않고, 새엄마는 화가의 모델이 되어주는 직업을 갖고 있었지만 카산드라의 아버지와 결혼한 후에는 그 직업을 계속 하고 있지 않다. 카산드라의 언니인 로즈는 할 줄 아는게 없고 카산드라와 동생 토마스는 너무 어리다. 그들은 집 안에 있는 돈 되는 가구들을 다 팔고 이제 더 이상 팔 가구도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가난하다. 이 가난은 지긋지긋하다. 그래서 카산드라 가족이 임대료를 내지 않은채 살고 있는 성에 미국 부자형제들이 방문했을 때, 언니 로즈는 기회로 삼는다. 형 '사이먼'의 재물을 보고 '반드시 그와 결혼하겠어' 라고 다짐을 하게 된 것. 그와 결혼을 하고나면 배불리 먹고 아름다운 욕실에서 목욕을 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예쁜 옷을 입을 수 있고 식구들도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녀, 로즈는, 기꺼이 돈을 보고 그에게 달려든다. 



 (돈벌이 하러 가는 이른 아침의 풍경)



(이만원에 세 병하는 와인이지만, 이렇게 책장에 쟁여두기 위해서는 돈벌이를 해야한다. 아니면 돈보고 남자랑 결혼하든가..)




돈을 보고 사이먼을 유혹하지만, 사실 사이먼이 딱히 마음에 들었던 건 아니다. 사이먼에게는 수염이 덥수룩하게 있었고, 그것은 정말이지 끔찍했던 것. 사이먼은 아름다운 로즈에게 첫 눈에 반하고,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로즈에게 반한 사이먼이 키스하려던 순간, 로즈는 그에게 '수염을 깍고 와야만' 키스를 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이먼은 그녀의 말대로 수염을 깍고 그녀에게 키스를 하고 그녀에게 청혼을 한다. 당연히 로즈는, 그 청혼을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동생 카산드라에게 수염을 깍은 사이먼이 정말 잘생겼다고 말한다.



"사이먼이 얼굴을 닦고 돌아서기까지 1분이 100년 같았어. 그 사람이 처량한 목소리로 '가장 흉한 꼴도 봤으니 뭘 숨기겠어요.' 라고 하더라. 화는 풀린 것 같았어. 대신 어딘지 자신 없고 측은한 표정이었는데, 너무나 잘생긴 거야! 지금 보니 사이먼 잘생기지 않았니, 카산드라?"

"응. 굉장히 잘생겼어. 그 다음엔 어떻게 됐어?"

"내가 '멋져요, 사이먼, 당신이 천 배는 더 좋아졌어요. 나를 위해 그렇게 해주다니 정말, 정말, 감사해요 라고 했지. 그랬더니 그 사람이 청혼했어." (p.280)



로즈는 사이먼을 사랑하고 '싶었다'. 이왕 결혼하기로 마음 먹었으니 그를 사랑한다면 더할나위없이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에게 수염을 깍으라 말하고 드러난 잘생긴 얼굴을 보며 감탄하고 키스를 한 뒤 그를 사랑하게 됐다고 동생 카산드라에게 말한다. 카산드라는 그래서 언니가 정말 사이먼을 사랑하게 된 줄 알았다. 사이먼의 동생 닐이 로즈는 형의 재산을 보고 결혼하기로 한거라며 끔찍하게 여길 때, 언니를 위해 변호해준다. 아니라고, 언니는 사이먼을 정말 사랑하는 게 맞다고. 그러나 어리기만 한 줄 알았던 남동생 토마스 조차도 로즈 누나는 사이먼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대체 무슨 근거로 언니가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는 거야?"

"음, 일단, 로즈 누나는 사이먼 형 얘기를 거의 안 하잖아. 해리네 누나도 사랑에 빠졌는데 그 누나는 입만 열었다 하면 자기 약혼자 얘기야. 해리와 내가 내기 걸고 세어보기까지 했다니까? 지난 주말에 내가 해리 집에서 지낼 때 세보니까 그 집 누나가 자기 약혼자 얘기를 쉰한 번이나 하던데?"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언니는 과묵한 편이라서 그래."

"과묵? 로즈 누나가? 로즈 누나는 자기가 관심 있는 것에 대해서는 쉴 새 없이 지껄이잖아. 로즈 누나가 나한테 보낸 편지에 사이먼 형 얘기가 단 한마디도 안 나온 거 알아?" (pp.378-379)



카산드라는 사이먼을 사랑했다. 언니와 결혼하게 될 남자를. 그리고 사이먼을 사랑했기에,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돈 때문에 결혼하려는 언니를 질책한다. 자신도 그 결혼이 이루어지게끔 도와줬지만, 사이먼을 사랑하게 되자 사이먼의 입장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화내고 분노하고 질책하는 카산드라에게 로즈는 말한다.



"너, 사이먼을 좋아하는구나." (p.411)



가난히 지긋지긋한 로즈가 부자 남자를 잡아 결혼하려고 했다고 해서 그녀를 비난할 수는 없다. 인생의 목표가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였고, 눈 앞에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부자 남자를 택하는 거였다면, 그걸 거절하라고 하는 건 당사자가 아닌 타인의 입장이다. 화려한 욕실을 갖고 싶었던 여자에게 화려한 욕실을 줄 수 있는 남자가 나타났다면 그걸 잡고 싶은 건 당연하다. 그러나 로즈도 카산드라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을 알게 된다. 사랑을 알고나니 사랑하지 않는 게 역시 어떤 건지도 알게된다. 로즈는 사이먼을 사랑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잘 되지 않았다. 사랑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그 사랑이 되는 건 아니었다. 카산드라는 사이먼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내내 사이먼 생각뿐이라 좋아하는 마음을 들킬 수밖에 없었다. 사랑도 사랑하지 않는것도, 숨겨지지가 않으니까. 이응준은 자신의 소설 <내 연애의 모든것>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모르고 있을 수는 없다'는 말을 한다. 자신을 짝사랑하던 여자에게 남자가 하는 말인데, 오랜동안 한쪽이 사랑을 하고 있는데 상대가 모르고 있다면, 그건 모르는 게 아니라 '모르는 척' 하는게 맞을것이다. 일부러 보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보는 순간, 알게 되는 순간, 어떤 식으로든 결론 지어야 할테니까. 



로즈는 사이먼에게 수염을 깍으라고 했다. 수염을 깍은 사이먼을 보면서 잘생겼다고 환호한다. 그전보다 더 좋아할 수 있었다고. 나는 연애를 하게되면 상대에게 금방 싫증을 낸다. 내가 이런 사람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어느 시점이 되면 상대의 장점을 계속 스스로 열거한다. 이렇게 해줄수 있는 남자는 이사람 뿐이야, 이 남자에겐 이런 장점이 있지 등등. 장점을 열거하게 되면 대체 이렇게 좋은 남자가 왜 나를 사랑한단 말인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데, 그러나,


그 순간이 사랑이 사라진 순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상대의 장점을 열거하는, 바로 그 순간.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됐던건 그의 장점들 때문이 아니었는데. 내 변덕은 이미 오락가락하다 이미 애정이 식었음을 확인한거고, 그걸 애써 부인하기 위해 장점을 찾아내려고 했던거다. 로즈는 사이먼이 잘생겼다고 환호했지만, 돈도 많은 사이먼이 심지어 잘생기기까지 했다고 좋은점을 하나 더 찾아냈지만, 그걸 찾아냈기 때문에 로즈는 사이먼을 사랑했다고 볼 수가 없는거다. 사랑은 그렇게 마음먹어서 나타나는 게 아니니까. 사랑은 장점으로 구성되어진 것도 아니고 사랑은 장점으로 완성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사랑과 장점은 별개의 것이다. 사랑은 사랑이고 장점은 그저 장점일 뿐인 것이다.





카산드라는 사이먼을 사랑하게 됐다. 사이먼은 카산드라가 이야기를 쓴다는 사실에 노트를 선물해주고, 카산드라와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카산드라가 좋아할만한 음악을 골라서 들려주고 음악에 대해 이야기 나누기를 즐긴다. 사이먼은 카산드라의 생일에 카산드라가 좋아할만한 선물을 해줄수 있는 사람이다. 



"<쿠들의 노래>란 시를 썼던 체스터톤의 개 쿠들은 어떤 냄새를 맡을 수 있었더라? 물, 돌, 이슬, 천둥 ‥‥‥."

"그리고 일요일 아침 냄새. 일요일 아침만의 독특한 냄새가 있어. 그걸 집어내다니 대단한 시인이야." 사이먼이 말했다. 아, 내가 아는 시를 함께 아는 사람과 있는 건 정말 가슴 훈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p.233)



시에 대해, 음악에 대해 함께 얘기하는 사이먼과 카산드라를 보노라면, 그들이 사랑에 빠지지 않는게 이상할 지경이다. 보는 내가 이토록 만족스럽고 즐거운데.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의 형태를 잘 알아채지 못하기도 한다. 사랑은 뭔가 대단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첫눈에 반하'는 것이 반드시 '사랑'인 것은 아니라는거다. 첫눈에 반하는 것은 말 그대로 반하는 것뿐, 그것이 사랑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둘 사이에 함께 쌓이는 어떤것들, 그것이 어떤 형태로 존재하느냐가 결정짓게 될것이다. 사이먼은 카산드라와 있는 것이 즐겁고 유쾌하다. 좋다. 그러나 자신이 여전히 로즈를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로즈는 뭘 입어도, 어떻게 해도 아름다운 여자니까. 로즈와는 음악에 대한 얘기도 시에 대한 얘기도 할 수 없었는데, 그 얘기를 나누는 카산드라와의 시간이 좋으면서도, 사이먼은 로즈를 사랑한다. 일전에 한 드라마에서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이 있는 곳에 자꾸만 나타나고, 자꾸 그녀의 손을 잡고 싶고, 그녀가 가는 곳에 자기도 가고 싶어했던 장면들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남자는 자기가 왜 그러는지도 모르는채로 그러고 싶었는데, 그것이 사랑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사랑은 다른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 이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자꾸 부르고, 나를 자꾸 찾고, 내가 여기있는지 끊임없이 확인하고, 내 상태를 묻는 것이, 그것이 나를 사랑한다는 게 아닐까? 그러나 사랑이 아니라고 해서 알겠다고 돌아선 적이 내게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그놈은 병신이라고 생각한다. 지 감정도 제대로 모르는 병신.




카산드라는 유머감각이 넘친다. 자신의 감정도 들여다볼 줄 안다. 음, 그렇지만 이 소설이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 이라는 것은 '정말일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카산드라가 사랑스러운건 사실이지만....'성 안의 카산드라' 라고해서 어둡고 우중충한 이야기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유머감각이 통통거리고 튀어나와 유쾌했다. 게다가 아직 어리기만 한줄 알았던 카산드라의 동생 '토마스'가 아주 현명한 독서 취향을 드러내주기도 한다.



"그리고 말이야, 항상 모든 걸 다 이해해야 한다고 누가 그래? 이해하지 않고도 좋아할 수 있는 거야.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더 좋아질 수도 있는 거라구." (p.435)




맞다. 이해해야 좋아하는 건 아니다. 이해가 안되지만 좋아할 수도 있고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좋아할 수도 있다. 이해하고 좋아하는 게 반드시 맞물러야만 되는 건 아니다. 이해는 이해대로, 좋은건 좋은것대로 그렇게 갈 수도 있는거다. 좋아한다는 건, 사랑한다는 건,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감정인것이다. 다른 것들과는 별개로 생겼다가 사라지기도 하는, 그런거다. 장점과 이해와는 별개로 움직이면서 동시에 '그래서'와 '그럼에도불구하고'를 모두 품는 감정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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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12-30 14: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임X한 작가라면 아주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했을텐데요..

사이먼이 로즈와 카산드라와 함께 결혼해서 산다는 결론....(우워워워..막장은 위대하다..)

다락방 2013-12-31 08:40   좋아요 1 | URL
그러나 우리의 도디 스미스는 이 소설을 막장으로 만들어버리는 대신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ㅎㅎ

moonnight 2013-12-30 14: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메피님의 시원한 해결책 @_@;;;;;;

다락방 2013-12-31 08:40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그랬다면 완전 자극적인 책이 되었을 것이고, 영국인이 가장 사랑한 소설은 될 수 없었겠죠? ㅎㅎㅎ

단발머리 2013-12-31 07: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리뷰도 엄청 좋아요, 다락방님...
사랑은 사랑이고, 장점은 장점이다, 라는 말도요.
예뻐서 보고 싶은 여자와 같이 있고 싶은 여자에 대한 통찰도 너무 시원하고요.
남자분들이 많이씩 읽으셔야 할텐데...ㅋㅎㅎㅎㅎ
이 책 찜하겠어요^^

다락방 2013-12-31 08:42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 제가 읽은 책으로 보내드릴게요. 주소 삼종셋트 적어주세요. 늘 제 글에 칭찬을 해주셔서 고마워요 ㅠㅠ 이에 연말 선물로 보내드리는겁니다. (주소 삼종셋트-주소, 이름, 전화번호) 적어주시면 제가 문자 한 통 넣어드립니다. 므흐흐흐흣

단발머리 2013-12-31 10:53   좋아요 1 | URL
크학!! 전 진짜 받아도 되나요? 으앙~~~
감사해요. 연말 선물+생일선물+결혼기념일 선물로 할께요.

고맙습니다, 다락방님~~

2013-12-31 1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4-01-01 23:27   좋아요 1 | URL
더 들이대셔도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네가 세상에 태어나서 접하는 모든 것들이 다 처음이듯이, 나도 너를 통해서 엄마가 되는 게 처음인 거다. 네가 새롭게 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그런 아이를 가진 엄마로, 그렇게 처음 엄마가 되는 거니까." (p.58)










이 세상 누구에게나 '엄마'가 되는 것도 '아빠'가 되는 것도 '처음' 찾아온다. 이미 그런 역할이 주어진채로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게 아니다. 미처 준비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새로운 역할이 하나 더해져 온통 몸과 마음이 쏠릴 수 있다. 준비했다고 해도 더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새로운 상황이야 말해 무엇하랴. 새로운 사람 하나가 온통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달라 빽빽대는데. 물론, 누구나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 마찬가지로 '좋은' 아빠도 되고 싶다.



그러나 내 기준에서의 '좋은'과 받아들이는 입장에서의 '좋은'은 그 느낌과 역할이 많이 다르다. 내가 내 식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해서 그것이 상대에게 반드시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조금 더 나은 역할을 맡기 위해서, 우리는 시행착오를 거쳐야 한다. 내가 아프고 내가 다치다가 상대를 아프게하고 상대를 다치게 하기도 한다. 바라건데 부디, 그것들이 그렇게 치명적이지는 않기를.









「나는 내 딸이 행복해지라고 뭐든지 했어.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걔가 더 행복한 건 아니었지.」(p.102)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아버지는 사실 살짝, 아들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다. 자신은 우수한 두뇌, 우수한 외모를 가진채 이 사회에서 성공해 한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는데 자신의 아들은 너무 내성적이고 욕심도 없어서. 그게 못내 아쉽다. 자신의 방침대로 그에게 여러가지를 교육시키지만, 그리고 아이를 사랑하지만,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상황앞에서 그는 '역시 그랬군' 이라는 대응을 하고야 만다.


아이가 어릴적에 바뀌었단다, 병원에서.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 앞에 양쪽 아버지는 만날 수밖에 없고 서로에 대해 이해 안되는 부분과 짜증나는 부분들을 보아야만 했다. 낳은정이냐 기른정이냐 도 중요했지만, 그것이 어떻든 그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결국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렇게 아버지 역시 '성장' 하게 되고, 그렇게 성장해서 좋은 아버지에 한걸음 더 가까워진다.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여러명의 아버지가 있는 것이 좋을거라고. 여러명의 어머니도 물론. 그들 모두 자신의 역할이 처음일테니 함께 모여 아이들을 키운다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거다. 그렇게 된다면 다양한 교육방법들 속에서 최선을 찾을 수있을테고, 다양한 사랑이 아이들에게 쏟아져 더 나은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잔잔하게 그리고 묘하게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영화이고, 영화에 삽입된 피아노 곡들은 오!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들이다. 들어서 안 건 아니고 자막을 보고 알았다. 킁.





<글로리아>의 배경은 칠레다. 글로리아는 50대의 여인이고, 일이 끝나면 그녀는 춤을 출 수있는 장소로 가 술을 마시며 춤을 춘다. 그러다 남자를 만나 외로움을 달래기도 하며, 그렇게 연애가 시작되기도 했다. 그 장소를 뭐라 불러야할지 모르겠는데, 캬바레 라고 해야하나 락까페 라고 해야하나. 나이트클럽과도 또 다른 장소인듯 한데, 우리나라에도 저런 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을 했다. 어른들이 찾아가 자유롭게 술 마시고 춤을 추며 교제할 수 있는 그런 장소. 불량스럽게 보여 손가락질 받을까 두려워하는 장소가 아니라 '나 어제 거기 갔다왔거든' 이라고 말해도 누구도 뭐라하지 않을 그런 장소.


이 영화의 미덕은, 나이든 남자와 여자의 자연스런 육체라고 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그들의 축 쳐진 살과 둥그렇게 나온 배는(그렇다고 해도 나보다는 덜나왔더라), 그들의 나이와 살아온 세월, 그 시간동안 그들은 그저 시간의 흐름에 그들을 맡겼음을 드러낸다. 영화를 보고나서 친구들과 이런 대화를 했다. 이 영화를 우리나라에서 찍었다면, 글로리아 역을 맡은 배우는 당장 몸을 만들었을 거라고. 


크- 생뚱맞은 이유로 이 영화는 내게 힘들었는데, 그건, 하앍- 이 영화속에서 등장인물들이 와인을 마시는 장면이 수시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만나는 식사자리에서 뿐만 아니라 그냥 혼자서도 집 안 곳곳에 와인 병과 잔이 놓여있다. 어휴. 어찌나 와인을 마시고 싶어지던지. 영화가 끝나고 친구들과 소주에 삼겹살과 갈비를 먹고, 맥주에 치킨을 먹었으면서도, 결국엔 참지 못하고 피자에 와인을 마시는 3차까지 가기에 이르른 것이다. 아- 나는 영화의 지배를 너무 잘 받아!








이 영화는 이렇듯 화려하고 예쁜 색채와는 어울리지 않게 참으로 슬프다. 너무너무 슬프다. 


오스트리아의 50대여성이 휴가차 케냐로 간다. 이 늙고 살찐여성은 케냐의 아름다운 풍경에 반해서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바로 그곳에서 사랑을 찾고자 한다. 이미 다른 관광객으로부터 이곳의 남자들의 살냄새를 한 번 맡으면 헤어나올 수 없다는 얘기도 들었던터다. 해변엔 자신이 만든 물건을 팔려는 사람들과 몸을 팔려는 남자들이 가득하다. 그곳에서 호객행위를 하지 않으며 어느정도 거리를 둔 남자가 그녀를 지켜보고, 그녀는 그에게 '이정도로 거리를 지켜준 사람은 네가 처음' 이라며 그를 사랑하게 된다. 그는 '남들은 내가 너한테 돈 받는 줄 알겠지만 나는 너를 좋아해서 이러는거야' 라며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고 모텔을 함께 간다. 여자는 그에게 '너는 아름답지만 나는 이렇게 늙고 가슴도 쳐졌어' 라며 자신의 육체를 조금 부끄러워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예쁘다고 한다. 예쁘다고, 아름답다고. 그녀는 행복해졌다. 사랑하는 남자, 자신을 예쁘고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남자.


그런 그가 시간이 지나자 자신의 조카가 아파서 입원했다며 지갑에 있는 돈 모두를 원하고, 자신의 삼촌에게 데려가더니 삼촌에게도 돈을 주라고 한다. 그녀가 환전해둔 돈이 모두 떨어지고, 돈이 떨어지고 나자 그도 행방을 감췄다. 그녀는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가 자신을 이용했음을 아프게 깨닫는다. 그런 그녀에게 다시, 사랑이 나타난다.


그 역시 그녀와 섹스를 하고 그녀의 미소가 예쁘다고, 그녀가 입은 옷이 예쁘다고 말한다. 그 다정한 속삭임들에 그녀는 활짝 웃는다. 이건 사랑이겠지, 이제야 진짜 사랑인거야. 그러나 그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형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돈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녀의 표정은 변한다. 또, 


사랑이 아니었다.


그녀가 사랑을 갈구했지만 그녀의 돈만 보고 접근한 남자들이라 슬프냐고? 맞다. 그게 슬프다. 그런데 더 슬픈건, 돈 때문에 몸을 파는 아프리카의 남자들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 먹고살기 위해서 다른 나라의 여자들 앞에서 옷을 벗어야 하는 그들. 사랑인 척 다가갈 수밖에 없는 그들. 유럽관광객인 여자 네 명은 돈을 주고 남자를 한 명 산다. 그들중 한 명의 생일이라며 파티를 해야한다고, 그에게 스트립쇼를 시킨다. 남자는 옷을 벗고 시키는대로 춤을 춘다. 나는 그 장면이 몹시도 슬펐다. 



사랑을 찾지 못한 여자와, 돈을 받고 옷을 벗어야 하는 남자 때문에 슬픈 영화다. 파라다이스는 무슨 개뿔, 파라다이스라는 게 존재하긴 하는거냐. 





(비밀댓글님의 조언에 따라 중요부위 하트가리기 수정보완 하였습니다. 전 안가려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긴 하지만..)






하하하하. 이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빵빵 터졌는데, 김상중이 특유의 억양으로 정유미와 대화를 시작할 때부터 웃었다. 게다가 이민우의 장난에도 웃었고. 하하하하. 홍상수는 자신의 영화에서 '선희'의 성격에 대해 얘기한대로, 자신 역시 내숭없이 솔직한 성격인듯하다. 이 영화에서도 꾸미거나 감추지를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찌질함이 다 드러난다고 할까.




'진짜', '정말로', '너무' 같은 부사를 남발함으로써 외려 더 찌질해져버리고 마는 남자 주인공들 때문에 웃을 수있다. 이선균이 정유미와 술을 마시면서 '넌 내 인생의 화두야' 라고 말하고 연이어 '내가 만든 영화는 다 너 때문이야' 라고 할 때도, 그가 술에 잔뜩 취했기 때문인지 어떤 감동을 주는 게 아니라 뭐랄까, 술 먹고 꼬장부리는 것 같달까. 확실히 소주 마시는 장면을 가장 맛깔스럽게 찍는 감독은 전 세계에서 홍상수가 유일하며 최고인 듯. 그리고 이 영화속에서 술 마시고 취한 연기는 정재영이 탑이었다. 하하하하. 이십대 중반시절, 늙은 애인을 두고 연애한 적이 있었는데, 영화속의 술취한 정재영을 보노라니 그 십수년전의 늙은 애인이 떠오르는거다. 정재영도 술에 잔뜩 취해 선희의 손을 꼭 잡고 선희 니가 제일 예쁘다, 라고 혀꼬인 소리로 주정을 하는데, 내 늙은 애인이 내 손을 붙잡고 주정하던 장면들이 스르르륵- 스쳐 지나가...


그러다가 갑자기 <응답하라1994>의 칠봉이 생각이 났다. 꼬박 챙겨보는 건 아니고 어쩌다 보게 되는데 그래도 대략적인 스토리는 알고있다. 거기에서 엄청 잘나가는 야구선수 칠봉이는, 크- 내가 여태 살아오면서 가장 뜨겁게 좋아했던 남자를 닮아있었다. 그 큰 키...때문인가. 너무 좋아해서 오히려 헤어지고 싶었던 남자였는데, 내가 본 부분에서는 칠봉이가 잠깐 한국에 들르러 오고, 그렇게 잠깐 나정이를 만나는거다. 그 때의 설레임이 갑자기 내 것이 되었어. 아- 칠봉아. 니가 그렇게 돌아오면 나는 어쩌란 말이니!! Orz






지난주에 회사에서 전체 회식을 했다. 소갈비를 먹었는데, 어떻게 하다보니 내 자리는 영 안좋았다. 고기 있는데까지 좀 멀달까. 팔을 아주 쭈욱- 뻗어야만 고기에 손이 닿는데 그러자니 번거로울 것 같아, 옆자리에 앉은 K 대리에게 내 고기 챙겨달라 말을 했다. K 대리는 커다란 고기들을 내게 쉬지 않고 집어줬고 나는 신나게 먹었는데, 그러다가 잠깐 그릇이 빌라치면, 오, 앞자리에 앉는 H 사원이 드세요, 라며 고기를 챙겨주는 거다! H는 내 앞자리라 역시 나처럼 고기가 먼데, 그와 나의 차이라면 키가 한 25센치 미터....에서 오는 팔 길이 차이? 그는 내 앞에 앉았으면서도 고기를 건져 내 그릇에 놓아주었다. 우히히히. 이뻐 죽겠네. 지난번 회식에서도 예뻤는데 이번 회식에서도 예뻐. 


그러다 오늘 점심, 식당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 부서 사람들이 밥 먹으러 우리랑 같은 식당으로 들어온다. 남자들만 있어 그런지 밥 먹는 속도가 너무 빨라, 우리보다 늦게 들어왔는데 빨리 나가더라. 그들은 우리에게 맛있게 드시라 인사하며 나가고 우리도 역시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하는데, H 가 나가는 걸 보고 내가 크게 소리내 불렀고 인사를 했다.



"H 씨, 안녕~~"



나와 함께 있던 직원들을 비롯해서 H씨도 웃었는데, 웃음이 그치기도 전에 나는 나와 함께 앉은 직원들에게 말했다.


"나는 우리회사에서 H 씨가 제일 좋아요." 라고. 물론, 바로 뒤에 이유도 말했다. "회식 때 나 고기 챙겨줬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바로 그 이유가 내가 그를 제일 좋아하는 이유다. 하루에 한 번 마주치는 일도 좀처럼 없는 그를 제일 예뻐하는 이유. 므흐흐흣. 





어제 친구가 겨울밤엔 주전부리라며 이것저것 바리바리 간식을 싸 보냈다. 고구마 말린것부터 소세지 맛밤 그리고 액상커피가 박스안에 들어있었다. 탐앤탐스의 액상커피는 뜨거운 물이나 우유에 붓기만 하면 커피 한 잔이 뚝딱! 탄생하는건데, 오, 맛이...없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건 걍...쌍화탕이네? 이건 커피가 아니잖아?? 


어제 도착한 고구마 말린것과 소세지 맛밤은 지금,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다. 다 먹어치워버렸.....친구는 며칠치 분량을 보내준 것 같은데....난 걍 다 싹...........




이 노래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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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7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27 1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27 11: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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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7 11: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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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7 11: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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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7 1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27 11: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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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7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3-12-27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이미 다른 관광객으로부터 이곳의 남자들의 살냄새를 한 번 맡으면 헤어나올 수 없다는 얘기"

이건 이미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사랑이다 보니 완전하진 못하겠지요. 완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모든 걸 바라는 것 자체가 모순일 뿐더러.........

다락방 2013-12-27 14:31   좋아요 0 | URL
관광지를 파라다이스라고 생각하고 그곳에서 진실한 사랑을 찾을거란 희망을 가진 것부터가 슬퍼요. 결국 자기가 있었던 현실에서는 자신들이 사랑을 찾을 수 없었다는 걸 전제하니까요.

그나저나 메피스토님, 올 한 해 제 서재에 댓글 많이 달아주신 분 1위 하셨습니다. 으흐흐흐흐흐흐흐흐

Mephistopheles 2013-12-27 14:45   좋아요 0 | URL
어 그럼 뭐 선물같은 거 있나요..?????

다락방 2013-12-27 14:47   좋아요 0 | URL
어..그러니까...음....선물은...........저의 변함없는 애정? ( ")

Mephistopheles 2013-12-27 15:54   좋아요 0 | URL
어.....이 마구 부대끼는 부담감은 무얼까...??? (")

다락방 2013-12-27 15:5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노이에자이트 2013-12-27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장상사 놈!들 중에는 회식할 때 좋은 반찬은 자기 앞에만 두고 부하직원들에겐 안 주는 놈들도 있습니다.

다락방 2013-12-27 14:47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전 부하직원들로부터 고기 챙겨먹은 상사입니다. ㅋㅋㅋㅋㅋ

비로그인 2013-12-27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의 차이가 있는 법이라..

저도 안가려도 될 것 같은데.. ^^

네.. 슬퍼요.. ~~ 저 경우.. 저런 경우.. 네...정말 생각만 해도 슬퍼지네요 ㅠㅠ

다락방 2013-12-31 08:44   좋아요 0 | URL
사실 뭐 저도 가리긴 가렸지만 가릴 필요까지가 있었을까 싶기도 해요. 그렇지만 이왕 가린거.... 뭐 ㅎㅎ

도처에 슬픔이 쌓인 연말인데, 개인적으로 들어가면 기쁜일도 있었죠, 새벽숲길님? 엽서가 아주 많이많이 꾸준히 판매되기를 바랄게요. 예뻐서 정말 예뻐서 그렇게 될 거에요!

마태우스 2013-12-27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기 챙겨주는 동료가 있다니, 회사생활 잘 하신 거네요. 글구 글로리아랑 파라다이스 러브, 시네21에서 평만 읽었어요. 글로리아가 좀 보고싶긴 하지만 요즘 사정으론 어려울 듯 싶어요 ㅠㅠ 과거엔 영화 참 많이 봤는데.... 영화를 안보게 되는 건 낭만을 잃는 거라 생각하기에 좀 갑갑해집니다.

다락방 2013-12-31 08:45   좋아요 0 | URL
고기 챙겨주는 동료가 있어서 저 역시 행복했습니다, 마태우스님. 제가 인복은 있구나 라는 생각을 올해 특히 더 많이 했어요.

마태우스님 말씀대로라면 전 아직 낭만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거네요. 헤헷. 마태우스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새해엔 알라딘에 더 많이 글 써주세요. 마태우스님의 글을 읽는건 정말 즐겁답니다.
^_____________^

단발머리 2013-12-27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파라다이스' 보고 싶어요. 벗은 아프리카남자 보고 싶어서 아니구요. 진짜 아니예요.
그런데 잘 생겼나요?하고 묻고 싶군요.

그나저나 다락방님, 올 한 해 제 서재에 댓글 많이 달아주신 분 1위 하셨습니다. 으흐흐흐흐흐흐흐흐

축하드리고 ㅋㅎㅎ 감사드리고 선물 드려야되나요?

제 마음드려요*^^*

다락방 2013-12-31 08:47   좋아요 0 | URL
음. 미모평가는 주관적이므로 그들이 잘생겼는지에 대해서는 단발머리님께 직접 판단하실 기회를 드리고 싶네요. ㅎㅎ

아, 제가 단발머리님 서재에 댓글 1위로군요. 얼쑤~ ㅋㅋㅋㅋㅋ 단발머리님 마음 받겠습니다. 내년엔 더 많이 주세요! 우헤헤헤

프레이야 2013-12-28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라다이스 러브,를 봐야겠어요^^ 다락방님~~

2013-12-31 0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16 0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30 1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30 1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30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31 0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 일은 환한 대낮에 벌어졌다. 대지뢰장갑차를 타고서 흑인 거주 지역을 순찰하던 군인들과 경찰이 마구잡이로 총을 쏘았다. 내가 보지 못한 것을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경찰과 군인들이 아무 집이나 움직이는 물체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 어떻게 우리 아이가 죽을 수 있단 말인가? 총알이 날아와 우리집 창문 하나가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우리가 직장에 가 있는 동안 외손자를 돌보던 엄마는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엄마는 아이를 안고 옆집으로 달려갔다. 옆집에 들어섰을 때에야 비로소 엄마는 가슴속 아이를 감싼 담요가 축축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자신도 모르게 피로 얼룩진 손을 내려다보던 엄마는 자신의 품에서 움직이지 않는 꾸러미에 시선이 갔다. 그 순간 외손자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자신을 탓하기 시작했다 ‥‥‥. ('은자불로 은데벨레', 「아들의 죽음」中 p.287)

















'나딘 고디머'는 자신이 존경하는 작가들에게 편지를 써보낸다. 가수들이 모여 자선공연을 하듯, 우리도 작품으로 자선 활동을 하자고. 그 편지들에 작가들이 모두 응답해주었고, 그렇게 작가들이 자신의 대표작들을 모아 이 책, 『내 인생, 단 하나뿐인 이야기』라는 책을 만들어냈다. 이 책의 수익금은, 우리나라에서도 물론, 전액 다 에이즈예방협회에 기부된다고 책 날개에 밝혀져 있다. 


이 단편들중, 위에 인용한 작품의 작가 '은자불로 은데벨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작가이다. 그가 보낸 작품 「아들의 죽음」은, 인용문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갑작스레, 어처구니없이 아들의 죽음을 맞은 부부의 이야기이다. 군인과 경찰은 무차별 폭격을 가했고,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이, 자신이 왜 죽는지도 모르는채로, 심지어 자신 앞에 죽음이 와 있는지도 모르는채로 죽음을 맞는다. 이런 일이 대체 왜 일어나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일이 여기, 이곳에서도 일어난다는 건 알고있다.




진우는 스무살 평범한 대학생이다. 그는 친구들과 책을 서로 빌려 읽어가며 '좋은책 읽기' 라는 독서모임을 하고 있고, 밤에는 야학에서 여공들에게 공부를 가르친다. 그런 그와 친구들에게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쳐와 가족들에겐 말 한마디도 없이 그들을 끌고간다. 그들은 각종 고문을 당한다. 고문을 당하면서, 결국은 그 괴로움에 못이겨,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자술서에 기록하며 지장을 찍는다. 그들의 몸엔 멍투성이고, 그들의 머리와 마음도 마찬가지 멍투성이라, 그들은 겁에 질려 경찰이 하라는대로 하고야만다.


한편 아들이 어디로 간건지, 갑자기 왜 사라져버린건지 알지 못하는 부모들은 속을 끓이며 찾아다닌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체까지도 찾아다녀야 한다. 그들은 자신의 자식들이 빨갱이가 아님을 알지만, 나라는 그들을 빨갱이라 부른다. 가족들은 자식의 몸에 들어있는 멍을 보며 대체 그들이 왜 맞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왜 그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를. 아무런 이유도 알 수 없는채로 만신창이가 되는 자식을 보는 부모들의 마음이 어떠할까. 



은자불로 은데벨레의 소설 「아들의 죽음」에서 부모는 심지어 나라에 돈을 내고 아들의 시신을 찾아와야 한다. 게다가 자신들이 한 짓을 목격한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함구하기를 명령한다.



얼마 후, 계속해서 총을 쏘아 대던 경찰은 우리 집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집 안으로 밀고 들어온 그들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목격했다. 처음에는 엄마를 데리고 나가 이 일을 함구한다고 약속하지 않으면 끌고 가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다 다시 돌아오더니 아이의 시신을 빼앗아 갔다. 이렇게 하면 자신들의 학살 행위가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다니 이처럼 괴상한 논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은자불로 은데벨레', 「아들의 죽음」中 p.287)



영화 <변호인> 에서 증인석에 오른 경찰은 고문한 사실이 있는냐는 검사의 물음에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위증'을 했으되, 그 '위증'은 '증거'가 된다. 죄 없는 학생들을 데려다가 때리고 물먹이고 잠을 안재우고 나무에 거꾸로 매달았던 그는, '아니' 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에 쐐기를 박는다. 그 일들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의 앞에 피멍이 들고 망가진 대학생들 여러명이 앉아 있는데, 그런데, '아니'라고 말한다. 피멍이 들고 만신창이가 된 대학생들을 보면서 판사는 '아니'라는 위증을 증거로 채택한다.



그런데 대지뢰장갑차가 또 나타났다. 시신을 돌려받기 며칠 전 트럭이 굉음을 내며 나타났을 때 나는 엄마와 함께 집에 있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느 소리와 고함으로 거리가 매우 소란스러웠다. 취재할 때 항상 보았던 대지뢰장갑차였다. 그 차들은 다섯 번이나 아주 빠른 속도로 우리가 사는 거리를 달려가면서 닥치는 대로 최루탄을 쏘았다. 네 번째로 지나갈 때 우리 집에 명중했다. 산탄통이 창문을 박살 냈고 그동안 익숙해진 그 끔찍하게 자극적인 냄새가 집 안에 가득 차 질식할 것만 같았다.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려고 우리는 헐떡거리며 집 밖으로 달려 나갔다.

우리 아들도 이런 식으로 죽었단 말인가? 저들이 우리 아들을 죽게 만든 바로 그 군인들인가? 이제는 아주 냉담하게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하는가? 아니면 저들은 확실한 임무 수행을 위해 새로 뽑힌 군인들인가? 저들은 큰 소리로 웃어 가며 장갑차를 몰고 갔는가? 가족들이 지나가도록 길을 터놓는 것인가? 어떤 길을?

이 집이 우리의 보금자리였던가? 그럴 리 없다. 이곳은 단지 약탈을 일삼는 커다란 새를 기다리는 작은 새의 보금자리에 불과했다. ('은자불로 은데벨레', 「아들의 죽음」中 p.292)



<변호인>에서의 경찰은, 아들을 죽인 첫번째 대지뢰장갑차이고, 판사는 다시 또 나타나 집을 파괴한 대지뢰장갑차이다. 경찰과 군인의 원리 원칙은 국가를 구한다는 명분 아래 국민을 파괴한다. 그런데 여전히, 지금도, 그들은, '원리원칙대로' 하겠다고 한다. 역시나, 그들만의 원리 원칙이다.



시간은 흐르고, 변호사는 불법시위란 죄목으로 판사 앞에 서게 된다. 검사는 그에게 죄가 있다 말하고, 피고인이 된 변호사의 변호인들은, 자신들의 수가 많으니 전원 참석을 했는지 이름을 불러달라고 판사에게 요구한다. 판사는 그렇게, 99명의 변호인의 이름을 차례대로 부른다. 99명의 변호인은 모두, 재판을 받기 위해 판사 앞에 서 있는 변호사를 변호하기 위해 참석했다. 그들은, 변호사의 편이 되어준다. 변호사의 편이 되는 것이 옳은길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옳은 길을 가기 위해 행동으로 옮긴것이다. 나는 그 시간들을, 그 사건들을, 그래서 그 변호사를 잘 몰랐다. 잘 몰랐기 때문에 편을 들어준 적도 없다. 편을 들어준 적이 없는데, 이제는 편을 들어주고 싶어도 편을 들어줄 수가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점이 너무 속상해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앓고싶다, 고, 아프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이 미안함이 조금 덜어질 것만 같아서. 흠씬 앓고 싶어졌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갈 때, 나는 '한창훈'의 소설 『꽃의 나라』를 떠올렸다. 그 소설의,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마지막 문장을.


오래지 않아, 사령관은 대통령이 되었다. (한창훈, 『꽃의 나라』p.272)
















나는 저 문장을 떠올리며, 꼭 이런 문장을 상상한거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변호사는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걸로 끝난 게 아니었기에, 차마 저 문장을 마지막으로 쓸 수가 없다. 그 후의 비극이 그에게 찾아들기에. 저 문장이 마지막 문장이 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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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3-12-26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 안철수 국회의원이 이런 트윗을 남겼어요.
@cheolsoo0919 동료들과 함께 <변호인>을 보았습니다. 마지막 장면의 여운을 느끼면서 "법치란 법준수를 국민에게 강요하는것이 아니라, 공권력의 남용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말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런글을 남기며 리트윗 했지요. "이제 그 생각을 행동으로 보여주세요 쫌!"


마지막 장면의 여운을 느끼는 그 여유가 참으로 부럽지 않소?! 이것은 비꼬는 말이 아니라오. 내 말을 믿어주시오. -.-


변호인이 있었던 진우말고 변호인 조차 없었던 사람들은, 이 비슷한 사건의 희생양이 되어 유죄 판정을 받고 지금도 고문의 트라우마로 고통 받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은 대체 어디서 누구에게 자신의 원통함을 말할까. 지금도 죽은듯이 엎드려 세상과 담쌓고 있지 않을까. 그 사람들에게 미안했어요.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것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얻은 것이라면 나는 뭘 해야 할까. 이렇게 살면 안되는데. (엉엉.. 댓글 방향이 점점 .. )

믿을 수 있어요? 영화보다 더 끔찍한 지금이?!


다락방 2013-12-26 18:41   좋아요 0 | URL
아침에 트윗에서 레와님의 리트윗보고 저게 누구한테 한말인가 했는데 안철수였군요. 몰랐네. 하핫;;

극중 변호사는 진우를 변호한 게 아니라 진우 外 피고인을 모두 변호한거죠. 그들 모두에 대한 변호였어요.

영화속 경찰도 국보법 원칙을 그렇게나 잘 지켜대더니, 지금도 여전히 원리원칙에 충실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네요. 남이야 죽든말든 원칙대로 하겠다는 사람들요. 그 원칙은 대체 누구의 원칙일까요..

에르고숨 2013-12-26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가슴이 너무 아프고 치 떨려서 막상 영화를 보러 가지 못하겠어요. 미안함을 정작 느껴야 할 것들은 (잠깐 실례)씨발, 안녕하겠지요. 다락방 님과 같이 앓겠습니다, 네.

다락방 2013-12-27 10:00   좋아요 0 | URL
전 정말 몰랐어요. 지나치게 무심한 사람이었어요, 전. 영화를 보는동안은 제가 무심한 사람이란 게 그렇게나 미안하더라고요..

dreamout 2013-12-26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금치 된장국을 끓여 먹고 싶어졌어요.
어제, 2014년에 읽어보고 싶은 소설 리스트를 정리해 보았는데, 정말 내가 읽고 싶은 건지... 읽어야 할 것 같아서 적어 두는 건지.. 그것 조차 잘 모르겠더라구요.

내 맘대로 되는게 별로 없는 세상. 정말 오랜만에... 먹고 싶은 메뉴라도 떠올라 줘서 기분이 좋아질려구 해요.
(심지어 먹는 것조차, 지금 내가 정말로 먹고 싶긴 한건지. 정말 먹고 싶은 메뉴인지 모르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다락방 2013-12-27 10:02   좋아요 0 | URL
드림아웃님, 시금치 된장국은 끓여 드셨어요? 근데 그런 것도 끓일 줄 아세요? 아..저는 상상도 못하겠어요. 그런 어려운 요리는...

드림아웃님 댓글을 읽고나니 저도 2014년에 읽고 싶은 소설 리스트를 한 번 써보고 싶어지네요. 그런데 읽고 팔아야 할 책이 먼저 떠올라서...뭔가 슬퍼요. 흠흠.(그건 미미여사의 솔로몬의 위증...)

드림아웃님, 오늘 금요일이에요. 잘 지내요!

dreamout 2013-12-27 12:33   좋아요 0 | URL
내일 근무해야 해서 금요일을 만끽하지 못하고 았어요. (시무룩)
시금치 된장국. 네. ^^. 제가 했는데도... 맛이 좋아서... 이제 본격적으로 요리의 신세계에 발 담궈볼까하는 생각까지. ㅎㅎㅎ

다락방 2013-12-27 12:45   좋아요 0 | URL
아...................그렇게 슬픈 소식이 ㅠㅠ 전 토요일 근무 걸리면 금요일에도 우울해서.. ㅠㅠ
아니, 시금치 된장국을 잘 만드신다니. 진짜 대박이네요! 요리의 신세계에 발 담그신 후..본격적으로 요리 블로거로 혹시 거듭나시는겁니까? 네? (기대기대 ㅎㅎ)

단발머리 2013-12-27 0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발이 부들부들 떨면서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이 아주 많은 것 같아요.
제일 슬픈 건, "빨갱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위력이 아직까지도, 오늘까지도 건재하다는 거지요.
여러모로, 마음 아픈 연말이네요.

다락방님, 따뜻한 거 드시고 출근하세요.
(이미 출근하셨나요?)

다락방 2013-12-27 10:07   좋아요 0 | URL
빨갱이란 단어의 위력이 어마어마한건, 아마도 전쟁 탓이겠죠. 전쟁이 무서우니 빨갱이가 먹히는거고, 빨갱이가 먹히니 무조건 빨갱이로 몰아붙이면 된다고 생각하게 되는거겠죠. 빨갱이라고만 하면 다...어휴..

미안해서 억울해서 화나서 부들부들 떨렸어요. 제 무식함 때문에 부들부들 떨렸어요..

단발머리님 댓글 시간 보니 저는 이미 출근해있었네요. 지금은 커피 한 잔 마시고 있어요. 오늘이 금요일이라 다행이에요.

비연 2013-12-27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이후의 비극까지 연상되어 영화보는 내내 미안하고 힘들었더랬어요...

다락방 2013-12-27 14:06   좋아요 0 | URL
제가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공부하고 싶어지더라고요..

섬사이 2013-12-27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나 아픈 글을 쓰시다니..
아직 영화 변호인을 보지 못했어요.
여전히 볼 자신이 없어요.

다락방 2014-01-02 16:24   좋아요 0 | URL
극장에 갔는데 관객이 꽉 차서 놀랐어요. 그리고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했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보면 좋겠어요, 섬사이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artks01 2014-01-10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가끔 다락방님 서재에서 글을 구경하는 사람입니다...
변호인을 보고 저도 다락방님과 꼭 같은 기분이었네요. 그동안 일부러 모른척 하며 산 건 아니었나 많이 자책하게 되더군요.
정말 속상했어요. 이런 제자신이. 아직도 완전히 바뀌지 않은 현실이.

다락방 2014-01-10 15:58   좋아요 0 | URL
차라리 몰랐더라면 덜 속상했을텐데, 하는 생각도 들어요. 알아야 고칠 수 있지만, 모르면 모른다는 핑계로 속이나 편할 수 있을테니 말이죠. 변호인을 본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다 비슷한 감정을 가지지 않았을까요?

반갑습니다, artks01님.
 











"나는 매일 당신과 함께했었소. 그랬다는 것을 아시오?"

"네, 그러셨다는 걸 알아요." 마르티네가 말했다.

"내게 남은 나날 역시 당신과 함께할 거요. 오늘 밤처럼, 매일 저녁 나는 당신과 저녁을 먹겠소. 육신으로가 아니라 영혼으로. 어차피 육신은 의미가 없으니. 오늘 밤 나는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배웠소, 소중한 자매여." (p.68)



로벤히엘름 장군은 청년시절, 목사의 딸인 마르티네에게 반해 연정을 품었지만,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 그는 승진을 하고 결혼을 하고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그에게 31년후, 그녀의 집에서 열리는 저녁식사에 가게 될 기회가 생긴다. 삼십일 년. 이제 그들은 더이상 젊지 않고 각자의 삶에 안착하고 있었던 그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곳에서 그는 마르티네의 요리사인 바베트가 만든 환상적인 식사를 먹다가 '무언가 빈 것 같았던' 자신의 삶을 떠올린다. 그 식사의 감격 후, 그는 집으로 돌아가며 그녀에게 말한다. 매일 당신과 저녁을 먹겠다고, 영혼으로.


얼마전에, 오래전에 읽었던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하느님의 보트>를 다시 구매했다. 읽었을 당시엔 뭐야, 이건 동화야? 라며 시큰둥했던 기억이 나는데, 요즘 자꾸 그 소설이 생각났다. 오래전에 읽어 정확히 기억할 순 없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 소설의 줄거리가 맞다면, 나는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 여자가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를 잊지 못하고 내내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소설. 그리고 여기는 엄청난 스포일러가 될텐데, 결국, 마치 소설처럼(!) 그가 문을 열고 그녀에게로 돌아오면서 끝을 맺는. 나는 이 내용을 다시 한 번, 지금 읽어보고 싶었던 거다. 


그렇다고 내가 누군가가 돌아오기를 바라며 살고 있는건 아니다. 그러나 간혹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는 건 사실이다. 이건 누구나 그럴테지만, 아주 가끔은, 그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나는? 하는 가정을 해보곤 한다. 내게 연인이 있는 상황이라면 그 사람에게 안녕을 고하고 그를 만날것인가, 지금 내 상황이 변했으니 당신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할것인가, 하고. 나는 여기에 대해서 정말이지 답을 내릴 수가 없다. 그래서 그가 다시 내 눈 앞에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똑같은 크기만큼, 차라리 나타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기도 한다. 그가 거기 있기 때문에,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먼 곳에 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리워할 수 있는거고 아름다운 거라고. 나타나는 순간 비극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바베트의 만찬을 읽으며, 그리워하는 방법에는 아주 여러가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그와 식사를 하자. 나는 로벤히엘름 장군처럼 매일을 그와 식사하진 않을테다. 나는 간혹 다른 누군가와 식사를 할텐데, 그 때는 앞에 있는 상대에게 집중하고 싶고, 혼자 식사를 하는 중에는 나에게 집중하고 싶다. 그러나 그 중에 한 끼쯤은, 간혹 혼자 앉아 식사를 하며 천천히 씹을 어떤 때에는, 그를 생각하며 함께 식사하고 싶다. 


커피를 마시는 어느 아침에는 혹은 오후에. 뜨거운 커피가 든 컵을 양 손으로 잡고 호호- 불면서 그를 떠올리며 함께 커피를 마시고 싶다. 그 순간에는 그를 향한 나의 영혼이 아주 강해서, 그에게 가 닿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바로 그 때, 그도 커피를 마시며 잠깐 숨을 고르고 나를 떠올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자체로 완벽한 순간이 될텐데! 우리의 영혼은 함께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실텐데. 간혹 그 순간들에 쿠키를, 케익을 함께 내어놓기도 해야지.






나는 '이자크 디네센'의 소설은 처음 읽어보는데, 책을 펼쳐 책날개에 실린 작가 설명을 보니 이렇게 써있더라.



1885년 덴마크 코펜하겐 북부의 롱스테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카렌이며, 필명인 이자크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 이삭('웃음'이라는 뜻)에서 따온 것이다. 28세에 브로르 폰 블릭센 남작과 결혼하여 남작부인이 되었다. 제국주의 시대에 동아프리카 케냐에서 커피 농장을 경영했고, 영국인 사냥꾼 데니스 핀치 해튼과 사랑에 빠졌으나, 운명의 장난으로 연인과 농장을 모두 잃은 후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메릴 스트리프가 열연한 바로 그 주인공이다. (책날개 中)



악. 이 여자가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바로 그 주인공이라고? 나는 아직 그 영화를 보지 못했는데? 그러다 몇해전 한 알라디너가 내게 한 말이 떠올랐다. 내가 아직 그 영화를 보지 못했단 말에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락방님이 아직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니 반칙이에요' 라고. 그 댓글을 보자마자 반드시 이 영화를 보고야말리라, 고 결심했었는데, 시간이 이렇게 흐르는동안 나는 대체 이 영화를 안 보고 뭘한걸까? 혹시나 책이 있진 않을까 검색해보니, 오, 역시 원작이 있었다!



















으악, 책부터 읽어야겠다. 게다가 무려 30프로 할인된 가격에 이 책이 판매되고 있다. 맙소사!! 내가 산다!!








<바베트의 만찬> 속에서 바베트가 차려내는 음식들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할수없이 영화를 봐야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만찬에 참석한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마시는 장면을 보고싶다. 그 음식의 색깔과 빛깔을, 흔들리는 와인잔속의 와인이 로벤히엘름 장군의 입 속에 들어가는 장면을, 그가 그 와인을 마시면서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복잡한 생각들이 드러나는 장면들을 확인하고 싶다. 청년시절, 사랑고백조차 하지 못했던 로벤히엘름 장군과 삼십일 년이 흐른 지금의 로벤히엘름 장군을 보고싶고, 그런 그가 영혼으로 매일 저녁 당신과 식사하겠다고 말하는 그 눈빛을 보고 싶다.





그후에 일어난 일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손님들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마치 수많은 작은 후광들이 하나로 합쳐져 거룩한 광채를 내기라도 한 듯 천상의 빛이 집 안을 가득 메웠다는 것 외에는. 말수가 적은 노인들은 말문이 틔었고, 수년간 거의 듣지 못했던 귀가 열렸다. 시간은 영원 속으로 녹아들었다.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각, 창문이 황금처럼 빛났고 아름다운 노래가 바깥의 겨울 공기 속으로 흘러나갔다. (pp.66-67)




오늘은, 당신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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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2013-12-24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락방님 오늘 저녁 만찬을 여시겠군요. 메리크리스마스예요.
ps) 아웃오브아프리카는 영화관에서 보지않으면 큰 의미가 없답니다.

다락방 2013-12-24 13:55   좋아요 0 | URL
네, 오늘 저녁엔 만찬을 열 예정입니다. 와인을 마실거에요. 안주는 뭐가 좋을까, 생각하다가 엄마가 사둔 파프리카로 하기로 했습니다. 치즈도 준비 되어 있고요. 고기를 사갈까 말까..계속 고민중이에요. 어제 회식에서 배터지게 고기를 먹었기 때문에...

영화는, 영화관에서 보지 않아도 저는 의미를 찾을 수 있을것 같아요.

Mephistopheles 2013-12-24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보단 영화가 더 낫다...라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댓글 하나가 이런 페이퍼가 양성되는군요..ㅎㅎㅎ)

다락방 2013-12-24 13:56   좋아요 0 | URL
네, 책이 막 확- 좋지는 않더라고요. ㅎㅎ
덕분에 보고 싶은 영화가 생겼지 뭡니까, 메피스토님!! 굿 다운로더로 다운 받으려고 했더니 없어서..할 수없이.......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밖에 없겠어요. ( ")

Mephistopheles 2013-12-24 14:28   좋아요 0 | URL
므하하하하하하(이 웃음의 의미는...)

http://blog.aladin.co.kr/mephisto/1596239

다락방 2013-12-24 14:34   좋아요 0 | URL
헐. 메추리 요리는..진짜 메추리 원형 그대로..이네요. 어쩐지 멘붕... 하하하하하

Mephistopheles 2013-12-24 15:03   좋아요 0 | URL
양꼬치집에 가면 메추리구이 파는 곳이 있어요. 원형 그대로 쫙 펴서 구워주는데...
뼈채 오도독 씹어 먹음 제법 고소합니다.

다락방 2013-12-24 16:00   좋아요 0 | URL
아차산 입구에 가도 메추리 원형 그대로 구워서 파는 사람들 많아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무개 2013-12-24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다락방님은 역시 가족과 함께 하는 성탄전야인가요?
저는 오랫만에 옛 부서 동료들과 만나기로 했어요.
제가 잠시 마음을 줬던 친구도 온답니다.
오랫만에 취해 볼까나~~ ^0^

2.아웃 오브 아프리카 영화 봤는데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아요. 헐!

3.제가 만약 오늘 저녁에 족발을 먹으면서
다락방님을 간절하게 떠올린다면 함께 먹는거니까
족발 안주는 피해주세요 ㅇㅎㅎㅎㅎㅎ

4.사랑하는 다락방님....
올 한해도 성실히 글 읽고, 글 쓰고 또 사랑하느라 고생했어요.
덕분에 많이 즐겁고 따뜻해진거 같아요....
우리 모두 내년에는 조금만 더 행복해져 봅시다!
메리 크리스마스 앤드 해피 뉴이어~ ^^


다락방 2013-12-24 14:37   좋아요 0 | URL
1. 오오오오 술 취하면 꼬장문자 보내요, 아무개님. 내가 다 받아줄게 ㅋㅋㅋㅋㅋ 저는 엄마랑 와인 마실까 생각중이에요. 엄마의 스케쥴은 묻지 않았지만 제가 와인마시자고 하면 냉큼 오케이 하실듯요 ㅋㅋ

2. 전 아웃오브아프리카도 일단 책으로 먼저 볼랍니다!

3. 저는 저녁에 아마도 족발은 안 먹을거에요. 고기는 어제 배터지게 먹기도 했고 엄마는 족발을 잘 안드셔서...그래서 어쩌지..뭐먹지..뭘로 안주를 하지.. 남동생이 회사에서 케익 받았다고 가져온다는데 케익을 안주로 할까...뭐, 고민중입니다.

4. 아무개님, 내년에도 따뜻하게 해줄게요!
:)

아무개 2013-12-24 14:51   좋아요 0 | URL
1.폰....수신거부 설정 해놓으십쇼!!! 캬하하하

2.삽겹살 먹고 돼지갈비 먹고 치킨 먹고 피자까지 먹고
집에가서 햄계란볶음 해 먹는 ***님이!
파프리카와 케익만으로 안주를 한다굽쇼!!!!????


다락방 2013-12-24 15:59   좋아요 0 | URL
그렇게 쉬지 않고 먹는 *** 님이 대체 누굽니까? 그 사람이 인간이 정녕 맞단 말입니까? 네? 누구냐고요, 누구!!

레와 2013-12-24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나의 메뉴는 볶음쌀국수+홍합탕=와인 ^^v


파프리카랑 버섯이랑 양파랑 같이 볶아먹는건 어때요?
와인과 함께라면 모든 음식이 축복!

메리크리스마스~*

다락방 2013-12-24 15:58   좋아요 0 | URL
아 귀찮아서 오늘은 못볶겠어요. 어제 회식이라 열나 먹고 늦게 잤더니 피곤.. 일단 집에 가서 컨디션 보고 볶든지 말든지 해야할듯. 나 이러다가 집 가자마자 잘지도 몰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난주 금욜에도 집에가자마자 밥도 안먹고 바로 잤다능. 그리고 물론 일어나서 밥 먹고 와인마시고 혼자 쑈했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

메리크리스마스, 레와님~ :)

blanca 2013-12-24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바베트의 만찬은 영화가 더 더 정말 너무 좋아요! 그리고 세상에나, <아웃오브아프리카>를 안 보셨다니요. 저는 세 번 정도 봤는데 볼 때마다 눈물이 줄줄 나더라고요. 추천 또 추천합니다. 그래서 원작도 읽어보려고 했었는데 글씨가 너무 작더라고요. 그래서 변명같지만 아직 시도하지 않았어요. 크리스마스 이브. 저는 지금 몹시 배가 고픈데 마트에 식료품을 주문했는데 주문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내일 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더불어 에쿠니 가오리의 저 소설은 장바구니에 담아갑니다. 너무너무 기대되네요. 마지막 스포일러를 읽지 말았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은 조금 남지만요^^;; 메리 크리스마스!

다락방 2013-12-26 11:38   좋아요 0 | URL
<영혼의집> 사려고 검색하다가 블랑카님의 페이퍼를 봤어요. 그래서 지금 이걸 어쩌나, 망설이고 있답니다. 저도 이사벨 아옌데의 작품을 아무것도 읽어보지 못한 상태로 에세이를 먼저 접하게 된거거든요. 제 경우에 마르케스의 마술적리얼리즘은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이사벨 아옌데의 에세이에서 가끔 점을 치고 맹신하는 게 음, 좀 지나쳐 보였던 것도 사실이거든요. 그래서 <영혼의 집>을 읽고 싶었는데 확- 도전을 못하겠네요. 흐음.
그래도 이 책은 참 좋았어요.

아니, 식료품은 왔나요? 도착 한거에요? 크리스마스에 맛있는 것 좀 드신겁니까?!!

프레이야 2013-12-25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베트의만찬,은 올 시월 부산국제영화제 행사의 하나로 박찬일 쉐프가 한 음식과영화에 대한 강연에서 알게 됐어요. 아웃오브아프리카,도 언급했었죠. 찜만 해두곤 잊었는데 디비디가 있군요. 담아야지. 다락방님에게도 메리 크리스마스^^

다락방 2013-12-26 11:39   좋아요 0 | URL
저도 바베트의 만찬을 꼭 챙겨봐야겠어요. 블랑카님도 극찬하시고 밑에 댓글 달아주신 라일라님도 극찬하시니 꼭 보고야 말겠어요. 만찬 장면 너무 궁금해요!
아웃오브아프리카도 잊지 말고 다음에 지를 때 꼭 포함할겁니다. 불끈!

크리스마스 잘 지내셨어요, 프레이야님?
:)

LAYLA 2013-12-25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다시 생각해도 명작인거 같아요. ^^

다락방 2013-12-26 11:39   좋아요 0 | URL
오케오케 접수합니다!!
 

아침 출근길.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려면 아직 좀 더 가야하는데, 정류장에 서있던 마을버스가 막 출발하려고 한다. 나는 냅다 뛰었다. 사실 저 버스를 타지 않아도 괜찮다. 그 다음버스, 그 다음버스를 타도 나는 지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눈 앞에서 버스를 놓칠순 없지. 어느틈에 나는 입밖으로 소리내어 외치고 있었다. 가지마, 가지마!!


내 앞에서 뛰던 아저씨 때문에, 그 앞에서 뛰던 여고생 때문에 버스는 출발이 자꾸 늦춰졌고, 결국 나도 간신히 헉헉대며 그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으학. 감사합니다- 라고 외치며 버스에 타고 숨을 고른다. 크- 아침마다 빡 세...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갈치구이, 계란말이와 함께 밥을 먹고 왔는데 소화가 다 됐네? 버스에서 내린 뒤 까페에 들러 샌드위치를 산다. 그리고 사무실에 와서 커피를 내렸다. 



파트리크는 짙은 레드 와인으로 가득 채운 와인잔을 그녀에게 건넸다. 에리카는 와인 향이 풍기도록 잔을 살짝 돌리고, 코를 잔 안으로 깊숙이 넣은 다음, 입을 다문 채 향을 들이마셨다. 강한 오크향이 콧구멍으로 빨려 들어가 발끝까지 쫙 퍼지는 듯했다. 기분 좋았다. 에리카는 와인을 조심스럽게 맛보았다. 입안에서 와인을 굴리며 공기를 약간 빨아들였다. 향만큼이나 맛도 좋았고, 파트리크가 와인에 꽤 돈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파트리크는 기대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환상적이야!"

"그래, 지난번에 네가 와인 맛을 안다는 걸 깨달았어. 유감스럽게도 난 한 상자에 50크로나 하는 와인이랑 한 병에 수천 크로나나 하는 와인이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지만."

"너도 알 수 있어. 이건 습관의 문제이기도 해. 와인을 제대로 맛보려면 벌컥벌컥 마시지 말고 시간을 들여야 하거든."

파트리크는 부끄러워하며 손에 든 와인 잔을 바라보았다. 벌써 3분의 1이나 비어 있었다. 그는 에리카가 스토브에서 요리를 확인하려고 등을 돌렸을 때 그녀의 와인 시음법을 흉내 내려고 애쎴다. 정말 전혀 새로운 와인을 맛보는 것 같았다. 그는 에리카가 했던 대로 와인 한 모금을 입안에서 굴렸다. 그랬더니 갑자기 완전히 다른 맛이 났다. 심지어 아주 약간의 초콜릿 맛, 다크 초콜릿 맛, 다소 강한 레드베리 맛, 약간의 딸기 맛이 섞여 있다고 느끼기까지 했다. 굉장했다. (pp.258-259)


















12월에는 약속이 가득차버렸다. 더이상 약속을 잡기 곤란해져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약속이 없던 어제. 퇴근한 후 바로 들어가 드디어 와인을 입안에서 굴려보기로 했다. 아 설레인다. 집에 돌아가 옷을 후딱 갈아입고 손을 씻고 식탁을 앞에 두고 앉았다. 와인과 잔을 꺼내두고 흐흣 따랐다. 안주는 밥과 볶은김치였던터라(응?), 와인을 먼저 마셔보기로 했다. 김치를 먹은 후에 와인을 마시면 어쩐지 제대로 맛을 음미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언제나 급하게 마시는 사람인지라, 의식적으로 입안에서 굴려야 한다. 와인을 한 모금 입안에 물고, 안에서 굴려보았다. 어떻게 굴리는지 몰라서, 그러니까 굴린다는게 대체 뭘 어떻게 해야하는건지 몰라서 그저 와인을 입에 물고 혀를 왔다리갔다리 해보았다. 혀 전체가 찌릿찌릿했다. 뭔가 살짝- 오는 것 같았는데, 그렇다고 거기에서 다크 초콜릿 맛이라든가 뭔 베리..어쩌고 하는 맛이 느껴지진 않았다. 아, 갈 길이 멀구나. 조금 더 연습해야겠어. 와인의 맛을 느껴보기 위해 집에 와인을 떨어지게 하지 말자. 언제나 쟁여두자. 지금도 책장에는 두 병의 와인이 날 기다리고 있다. 솔직히, 모든 약속을 모조리 다, 취소하고, 매일 집에 가서 와인을 입에 머금고 맛을 느끼고 싶다. 그렇지만...그렇게 되서 결국 와인 맛을 알게 될까봐 두렵기도 하다. 그러면 더이상 싸구려 와인을 사마시려고 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지금은 싸구려 와인으로 충분히 만족하는데, 앞으로 점점 더, 더더더더 비싼 와인을 마시고 싶어지면 어쩌지? 난....그럴 돈은 없어...그냥 지금처럼 벌컥벌컥 삼켜버리기를 고집해야할까? 그게 사는 방법일까?




에리카는 한숨을 쉬며, 허리가 고무줄로 처리되어 있는 헐렁한 조깅바지와 간밤에 입고 잔 티셔츠를 그대로 입었다. 그녀는 월요일부터 다시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시작해 봐야 소용이 없었다. 오늘밤에 이미 세 코스짜리 저녁식사를 준비하려고 계획했던 데다, 요리로 남자를 매혹하려면 크림과 버터를 빼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월요일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에 안성맞춤인 날이다. 그녀는 월요일부터 운동을 시작하고 웨이트 와처스 다이어트 프로그램을 따르겠다고 만 번째로 엄숙하게 다짐했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p.241)



아, 에리카, 사랑합니다. 나 역시 어제부터 108배를 매일 하고 잠들자고 새롭게(!!또 새로워!!) 다짐했던 터다. 그런데 어제는 안됐다. 어제는 와인을 음미해야 했기 때문에. 와인을 마시기 전에는 속히 와인을 느끼고 싶은 마음에 백팔배를 하지 못했고, 와인을 마시고 나서는 와인을 마셨으니까 하지 않았다. 그렇게 월요일이 지나버렸으니 이를 어쩐다. 에리카도 이미 밝힌 터다. 월요일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에 안성맞춤인 날이라고. 그러니 다음 월요일부터 시작하자. 그러나 오, 다음 월요일엔 회사에서 전체 회식이 있다. 그렇다면 그 월요일도 그냥 넘겨버릴테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면 다시 그다음 월요일을 기다려야 한다. 그래. 새해다. 새해에 시작하자. 월요일보다는 새해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에 더 맞춤하지 않은가! 지금은 일단, 새해가 오기 전까지, 허리가 고무줄로 처리되어 있는 바지와 간밤에 입고 잔 티셔츠를 그대로 입고 지내자. 새로운 삶을, 2주후엔 시작할 테니까.


아니, 근데, 나 이 책 읽고 처음 알았는데,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서는 크림과 버터를 준비해야 하는거냐? 그건 나를 유혹하려고 하는 게 아니란 말이냐, 정녕? 오호라. 



그녀는 잘 때 입는 티셔츠를 벗었다. 티셔츠를 입고 재면 항상 몇 그램 정도가 더 나갔기 때문이다. 그녀는 심지어 팬티도 무게가 나가는지 궁금했다. 아니겠지.에리카는 오른발을 먼저 올려놓았지만 아직 바닥을 딛고 있는 왼발에 체중을 어느 정도 싣고 있었다. 그녀는 점차 오른발에 체중을 실었고, 체중계 바늘이 60킬로그램에 도달했을 때 그대로 멈춰 있길 바랐다. 그러나 아니었다. 마침내 모든 체중을 싣자, 체중계 바늘은 무자비하게도 73킬로를 가리켰다. 그렇군. 그녀가 걱정한 대로, 예상 몸무게보다 1킬로그램이 더 나갔다. 1킬로그램 정도는 더 나갈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지난번, 그러니까 알렉스를 발견한 날 아침에 몸무게를 쟀을 때보다 무려 2킬로그램이나 더 찐 셈이었다. (pp.240-241)



나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항상 몸무게를 재고, 오늘도 그랬다. 저울 위에 올라가서 바늘의 눈금을 보는 순간 정확히, 늘어날 줄 알았지만 또 늘어났군, 했기 때문에, 엉엉엉엉, 에리카가 저울과 사투하는 저 장면을 도무지 눈물 없이는 읽을 수가 없다. 무게가 또 늘었다고 생각되는 날이면, 나 역시 옷을 벗고 다시 재야겠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옷을 벗고 재기도 했고. 그렇게 해서 몇그램 정도 빠졌다한들, 어마어마한 숫자가 바뀌지는 않는다. 아, 에리카. 우리 같이 질리안 마이클스 언니를 만날까요, 진득하게? ㅜㅜ
















난 이제 이 언니의 dvd 가 어디에 가 처박혀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여튼, 새 삶은 새해에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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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7 0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17 1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무개 2013-12-17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아 왜 태그에 아직도 얼음.공.주.가????

2.저는 평상복도 허리에 고물줄......쿨럭~ ㅠ..ㅠ

3.종로에도 와인빠가 있을까요?

4.전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새해 계획을 아예 세우지 않고 살고 있네요....

5.혹시<오래오래>라는 책 읽고 페이퍼 쓰실 생각 없으신가요?
강신주 책에 <오래오래>라는 책이 나오는데 보자마자 다락방님이 떠올랐고
검색해보니 역시 다락방님도 관심이 있으신거 같던데.....
근데 난 왜?? 내가 이책을 읽고 싶은게 아니고
다락방님이 읽고 쓴 글이 읽고 싶은걸까요....하.하.하.

다락방 2013-12-17 11:32   좋아요 0 | URL
1. 저 책의 제목이 얼음공주 니까요. 하하하하

2. 저는 고무줄 조차 없는 항아리 치마를 입기도 합니다. 펑퍼짐한 원피스..( ")

3. 와인바가 있다한들 가격이 너무 비싸서 차마 갈 수 없어요. ㅠㅠ

4. 전 늘 세워요. 다이어트..

5. 그 책은 오래전부터 보관함에 넣어두었고, 아무개님의 댓글을 보자마자 <중고알림등록>신청해 두었습니다. 중고로 나온다면 제가 읽고 페이퍼를 쓸 지도 모르겠어요. 물론 시간을 정할 순 없습니다. 전 7년전에 산 책도 읽지 않고 있으니까요...orz

2013-12-17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18 0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19 15: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주태백 2013-12-21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혹시 다락방 님이 "이 유경" 작가 님이신가요?

우연히 "독서 공감, 사람을 읽다." 라는책을 사서 보게되었는데 너무 좋와서 한 5시간을 웹서핑 끝에

겨우 "이 유경" 작가님의 블로그라고 생각되는 곳에 이렇게 찾아 오게 되었습니다.

혹시 맞으시다면 매우많이 영광입니다.

책 너무 잼있게 읽었어요 ^^...

재 주위에 짐승같은 녀석들이 많은데 그 매마른 정서에 불꽃이 될거같아서 설레였고,

그래서 이렇게 불쑥 방명록 남깁니다.

몇권사서 이 짐승들에게 나눠 주고싶어요.

다음책도 언제일지 몰라도 기대하고 물러갑니다. ^^

자주 들러서 눈팅할게요 감사합니다.!




PS. 검색하다가 Tstori 에 "레와 _ing" 다락방님? 친구분 티스토리에 방명록도 남겨보고... (방명록은 수정.)

밤새 뜬눈으로 책읽고 잠을청할려니 다락방님의 책속에 나오던 블로그 이야기 때문에 여기저기 뒤지다

드디어 오게 되었습니다.

흑... 이제 뒹굴거리로 가야겠습니다.

다락방 2013-12-22 00:19   좋아요 0 | URL
아하하하, 제대로 찾아 오셨습니다. 다섯시간이나 걸리셨다니, 참 죄송하네요. 책에 주소를 넣는걸 제가 꺼려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네요. 즐겁게 읽어주셨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책으로 내면서 여러가지 걱정이 많았는데, 이렇게 책이 재미있어 친히 찾아와주시는 분도 계시고..전 오늘 제가 자랑스럽습니다.

다음 책을 낼지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지만, 누군가 기다려준다는 생각을 하니 행복합니다. 고맙습니다. 헤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