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를 본 적이 없다. 물론 야한 영화를 본 적은 많다. 내가 말하는 야한 영화란 극장에서 개봉하는 류의 영화가 아니라 비디오가게에서 찾을 수 있는 작품들이다. 가만있자, 제목이 뭐였더라, <동물적 본능>도 있었고..또...

<동물적 본능>도 친구의 집에서 봤고, 그 친구가 한 번은 포르노를 보자고 불렀는데 가지 않았다. 굳이 밝힐 필요는 없지만 그 친구의 아버지는 목사님이었다. 어쨌든, 내가 야한 영화를 보고난 후의 감상이란 게 별 게 없었다. 재미가 없었으니까. '야하다'고 느껴지고 '재미있다'고 느껴지기 위해서는 그들이 옷을 벗고 끌어안아서만 되는 건 아니었다. 옷을 벗기 전, 끌어 안기 전의 남자와 여자(혹은 여자와 여자, 남자와 남자라도)의 긴장과 설레임이 있어야만 했다. 그래야 영화는 영화로서 재미를 더했고 그래야 내가 그 영화속의 누군가가 될 수 있었다. 어릴적(고등학생)에 봐도 별로 재미가 없었으니 어른이 된다한들 취미가 붙을 리 없었다. 나는 재미있는 영화가 야하기까지 하면 완전 좋아했지만 그냥 벗는 영화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그러니 포르노에 대한 관심도 없었다. 포르노란 내게 그저 남자들이 혼자 보면서 연구하는 영화, 정도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포르노 산업의 폭력적인 면에 대해 갑자기 확 와닿고 말았다. 포르노 배우들과 감독들 관계자들이 폭력적이란 얘기가 아니다. 돈이 없는 집에서 태어난 여자들이라면 폭력에 노출되기 쉬웠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딸들은 얼마나 많이 돈에 팔려가게 되는가. 그들이 파는건 성이다. 성을 팔아도 되는가 안되는가 그것에 대한 생각은 각자 다를 수 있어도, 그들이 일단 돈에 '팔려가게 된다'는 것은 본인의 의지와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어떤 행위이든, 내 의지에 반한다면, 그건, 폭력이다.


영화 [러브레이스]의 주인공인 '러브레이스'는 스무살에 사랑에 빠졌고, 그남자와 결혼을 해서 집을 떠났다. 그러나 남자는 마약에 중독됐고 섹스에 중독됐으며 돈이 없었다. 그에게는 아주 많은 돈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하는 걸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물론 열심히 일하지도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가르쳐서 오랄섹스를 아주 기막히게 잘하는 자신의 아내 러브레이스를 포르노 영화에 주연으로 내보낸다. 그녀가 얼마나 잘하는지 오디션장에서는 그녀와 자신의 섹스장면 비디오테입을 틀어주고. 영화는 이때부터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러브레이스는 그 영화를 찍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틈틈이 남편은 그녀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자신이 찍은 포르노가 극장에서 개봉하고 대박을 터뜨리지만 그녀는 거기에 대해 자신의 몫을 받지 못하고 또다시 폭력에 노출된다. 남편은 그녀를 포르노 배우로도 모자라 매춘으로도 팔아넘긴다. 남자들 여러명이 있는 호텔에 남편이 여자를 몰아넣었을 때,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그 떼거지의 남자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음이 분명할 때, 그 때 그녀가 느끼는 두려움과 수치심은 얼마만큼일까. 이 모든것들이 싫다고, 그만두겠다고 하면 남편은 총을 들고 협박한다. 내 말을 들어.



아직 그정도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때, 그녀는 남편을 피해 친정으로 도망을 왔었다. 엄마, 며칠만 여기 있게 해주세요. 엄마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너의 남편에게 돌아가라고 한다. 그녀는 울면서 엄마에게 말한다. 그가 나를 때려요. 그러자 엄마는 니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그가 너를 때리니, 라고 오히려 그녀를 나무란다. 착한 아내가 되라, 남편의 말을 잘 들어야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맞으면서도 순종적으로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요받았을까.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 장소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그런 삶을 살아온걸까.


결국,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도망친다. 그리고 자신이 포르노를 찍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자서전으로 풀어낸다. 세상에 그 일을 고발해낸 그녀는 그 뒤로 죽을때까지 포르노영화를 반대하는 운동에 앞장서며 살다가 53세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녀의 남편은 그 후에 또다른 포르노스타와 결혼했다는 데, 그 자막을 보는 순간 그 여자 역시 폭력적으로 그 앞에 서게 된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당연히 들었다.






영화를 보고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러브레이스 주연의 영화 [목구멍 깊숙이]는 실제로 있는 영화였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더니 저 영화 역시 진짜였다. 그러나 러브레이스에 대한 의견은 좀 갈리는 듯했다. 그녀가 남편의 폭력 때문에 포르노를 찍은 게 아니라 스타가 되고 싶어 찍었다는 말도 있다고 했다. 남편이 그녀에게 폭력을 휘두르긴 했지만 그건 남자배우와의 사이를 의심했기 때문이라고. 그녀가 폭력을 당했다는 자서전을 쓴 건 자신이 헐리우드의 스타가 되겠다는 야심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는데, 


1. 남편은 그녀에게 어쨌든 폭력을 휘둘렀고

2. 포르노 산업은 폭력앞에 아주 쉽게 노출될 수 있다


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가진 게 없고 그래서 힘 없는 여자들을 간혹 가족들이 매춘으로 내몬다는 기사를 본 적도 있는데, 더 많은 돈을 벌어다줄 포르노는 그들을 착취하기 위한 가장 쉬운 수단이 되지 않겠는가. 예고편을 보았을 때도, 그리고 이 영화 [러브레이스]의 포스터만 봐도 유쾌발랄상큼 코미디로 보이지 않는가. 젠장. 그런 영화인줄 알고 룰루랄라 극장을 찾았다가 결국엔 눈물을 흘렸다. 아..이런 영화인 줄 몰랐어 진짜. 

















아놔...이건 뭐.....참............할 말도 없고 재미도 없다. 내가 본 우디 앨런의 영화중 가장 재미없고 지루한 영화인 듯. 보면서도 보고 나서도 아무 생각도 안들어. 참...아! 페넬로페 크루즈는 참 이쁘다. 끝.




나의 엄마는 입병이 자주 생긴다. 간혹 병원에 갔을 때 물어보면 그때마다 '피곤해서' 생기는 거라고 해서 그래, 그렇겠지, 하고 말았는데, 그래도 너무 자주 생기는 게 아닌가 싶어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베체트병'이라는 증상이 입병이 자주 생기다가 실명의 위기에 처하고 한다더라. 무서워서 엄마한테 병원에 다시 한 번 가서 물어보라고, 그건 안과에 가서 물어봐도 되고 한의원을 찾아도 될 것 같다고 했는데, 며칠전 엄마가 눈이 아파서 안과를 찾은 김에 물어봤더니, 그건 피곤해서 생기는 거고, 이 눈의 염증은 늙어서 생기는 거라고, 나이들면서 점점 눈꺼풀이 쳐져서 그런다고 했다며 약을 처방해주었단다. 흐음. 그리고 입병도 다 나았고...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입병이 아주 오랜 시간 낫지 않는다는 데, 그건 아니고, 또 눈이 안보이거나 성기에 염증이 생기거나 하는 것도 아니니 베체트병이 아니긴 아닌것 같다 싶으면서도 좀 신경이 쓰인다. 여동생이 엄마 드시라고 이것저것 비타민을 챙겨드려서 그거면 괜찮겠거니 하고 난 무심했는데, 며칠전에 검색해보니 입 병에 좋은건 비타민 B 군 이라더라. 앗, C가 아니고? 그래서 또 검색해보니 비타민 B군은 토마토 등푸른 생선에 있고 그리고, 돼지고기에 아주 풍부하단다. 돼지고기 먹으면 비타민 B군을 섭취할 수 있다고. 오! 좋았어!! 나는 당장 엄마한테 문자를 보내 돼지고기를 많이 드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일요일 오전, 여동생 집에 가 있는 엄마와 통화.



입병은 다 나았어?

응 다 나았어.

돼지고기 먹어.

응. 나 집에가면 너랑 돼지고기 먹으러 다녀야겠다. 갈비도 먹고 삼겹살도 먹고.

그래. 나 봐, 돼지고기를 맨날 먹으니까 입병따위 안생기잖아.



아, 그런데 이렇게 말하자 엄마가 내게 이러는거다.



대신에 넌 뚱뚱하잖아.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난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얘기를 친구에게 하자 친구가 물었다. 뭘 선택할 거에요? 입병 생기는 거랑 뚱뚱한 것 중에? 하아- 둘 다....싫은데? 우짜지. 쩝. 


오늘 아침 동료가 아이유식단 아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하자 아침 사과 한 개, 점심 고구마 두개, 저녁 단백질 쉐이크 란다. 헐. 그거 다 합쳐도 한 끼로는 스트레스 받는 식단인데, 그걸 하루에 나눠서 먹는다고? 얼라리여. 너무한거 아니야? 그런 대화를 하다가 문득, 아, 나도 이제, 단백질 쉐이크로 저녁을 먹을까.........하는 생각에 도달하고 만 것이다. 생각부터 우울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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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2013-10-29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타민B는 돼지고기가 아닌 정제로 섭취해도 됩니다. 삐콤정 같은거 말이죠. 문제 해결.

다락방 2013-10-29 10:30   좋아요 0 | URL
저는 돼지고기로 섭취할겁니다. 불끈!! ㅎㅎ

야클 2013-10-29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페이퍼 중 이토록 첫문장이 와닿지 않는 글은 처음이네요. ㅋㅋㅋ

농담이고, 간만에 알라딘 왔는데 왕성한 글쓰기는 여전하시군요. ^^

다락방 2013-10-29 10:3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계속 기억을 더듬고 있어요. 포르노 본 적 있나? 하고요. 그런데 있다면 생각이 나겠죠? ㅎㅎㅎㅎㅎ<동물적 본능>, <터보레이터>이런건 포르노가 아니죠? ㅎㅎㅎㅎ(왜 야클님에게 묻는걸까요, 전..)

아무개 2013-10-29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푸하하하핫
터보레이터!!!!! 비됴방에서 보다가 잠들었던 기억이 나요.
만나는 여자마다 응응하던 영화 맞죠? 크흐흐흐흐

2.역시 고기는 돼지고기죠. 하지만 돼지고기로 단백질 B군 섭취를 끝까지 고집하시니....
그럼 뭐 돼지고기 단백질 쉐이크로 저녁을 드심이........(생각만해도 토 쏠림 ㅜ..ㅜ)

3.가난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폭력적이게 만들거나 폭력적인 상황에 놓이게 만들죠.
그래서 무서운거에요.가난이.......
벗어날수도 없으니까요. 이젠.

다락방 2013-10-29 11:16   좋아요 0 | URL
1. 아..아...아니! 아무개님도 <터보레이터>를 보셨단 말입니까! 꺅 >.<
비됴방에서 보다가 친구가 토할것 같다고 나가자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ㅎㅎㅎㅎㅎ
남자주인공의 등장이 인상적이었죠. 마치 터미네이터처럼 알몸으로... ㅎㅎㅎㅎㅎ

3. 네, 가난이 사람을 극한으로 몰고가면 나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요. 그런 상황이라고 다 똑같이 행동하는 건 물론 아니겠지만,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람이 해서는 안될 생각도 하게 되곤 하니까요. 가난에는 폭력이 따라오고, 그래서 가난이 무서운 것 같아요. 어떻게해야 할까요, 어떻게해야 벗어나게 될까요? 가난에서도 폭력에서도 말입니다.

아무개 2013-10-29 12:34   좋아요 0 | URL
엥? 2번 댓글은 아예 없는겁니까? 돼지고기 쉐이크~쉐키~쉐키~

그런데 우리 이런거 봤다고 이렇게 막 쓰고 이래도 되는걸까요?
ㅡ..ㅡ::::::::::::::::::::::::::::::::::::::::::::
그런데 또? 혹시? <원초적 본능>의 아류작인 <원죄적 본능>은 안보셨어요? ㅋㅋㅋ

다락방 2013-10-29 12:58   좋아요 0 | URL
돼지고기 쉐이크는 상상도 하기 싫으므로 패쓰.......

<원죄적본능>이라고요? 제가 <플레이 게임>이란 영화는 봤는데 ㅋㅋㅋㅋㅋ지금 <원죄적 본능> 검색해봤는데 포스터 보니까 보고싶어요! 재미있어요? 다운 받아 볼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개 2013-10-29 13:23   좋아요 0 | URL
헛뜨 뭘 검색까지 ㅋㅋㅋㅋ
영화는 완.전. 재미없습니다!!!!!!이것도 보다가 중간에 졸았나 뭐 그랬던거 같아요.
차라리 터보레이터가 낫습니다요~

다락방 2013-10-29 13:26   좋아요 0 | URL
터보레이터는 중간 넘어가면서부터 아예 자막도 안나오잖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원죄적본능 이라니 뭔가 잼날것 같은데 ㅋㅋㅋㅋㅋㅋㅋㅋ그렇지만 터보레이터보다 재미 없다면 패쓰.(이러고 몰래 보기)

아무개 2013-10-29 13:32   좋아요 0 | URL
아...끝났어....
다락방님 서재 방문자 수도 많은데
아무개의 이미지는 아마도 터보레이터나 원죄적 본능으로 굳어지겠지...
끝.났,어. 흐흑.........ㅠ..ㅠ


다락방 2013-10-29 13:34   좋아요 0 | URL
제 생각엔 대부분의 사람들이 터보레이터를 모를것 같은데요. ㅎㅎㅎㅎ 무슨 얘기 하는지도 모를것 같아요. ㅋㅋㅋㅋ

아무개 2013-10-30 08:13   좋아요 0 | URL
하하하
이것봐 아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네.
터보레이터가 이렇게나 유명한 영화였네~~ 하.하.하.핫

다락방 2013-10-30 08:22   좋아요 0 | URL
저도 놀랐어요. 많이들...아시네요. 전..저만 아는 줄 알았어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자작나무 2013-10-29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터보레이터를 알고 계시다니 70년대생이시군요. 터보레이터 포르노 맞아요. 국내 들여오면서 상당 부분 삭제했죠. 근데 아주 자세히 기억하고 계시네요!

다락방 2013-10-29 14:04   좋아요 0 | URL
오, 자작나무님은 어떻게 그런것까지 그렇게 자세히 알고 계시나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10-29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
터보레이터 포르노 맞습니다. 70년대생이 아니더라도 80년대 생들도 터보'를 모를 리 없습니다.

터보레이터'는 포르노의 금자탑입죠.
제가 명색이 포르노 박사 아닙니까 ( 자랑자랑자랑 ~ )
터보레이터'는 원래 포르노인데 국내 비디오'로는 전부 삭제했습니다. 예를 들면 미디엄 샷이나 풀샷을 불로우업 작업을 해서
부분만 엄청나게 확대해서 실제 장면은 안 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린다 러브레이스의 < 목구멍 깊숙이 > 는 미국 영화 걸작 100편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포르노'입니다.
이 영화 한 편이 영화계에 미친 영향이 어마어마했습니다.
러브레이스는 자서전에서 남편에게 폭행을 당했다며 포르노 반대 운동을 펼쳤지만
사실은 그녀는 포르노 스타'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라는 것이 정설이 되고 있어요.
남편에게 폭력을 당했던 것 또한 사실이고, 남편 때문에 포르노를 찍기 시작했지만
포르노가 돈과 명예를 준다는 사실에 매혹된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 후에도 꾸준히 포르노를 찍었지만 다 실패했고 결국은 포르노 반대'로 돌아섰다고 하더군요.


다락방 2013-10-29 17:43   좋아요 0 | URL
저는 그것이 음지의 영화인지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거라고 생각했어요. <옥보단>같은 류의 영화와는 또 다르니까요. 포르노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 딱히 뭐랄까, 거부감있는 장면이 눈 앞에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비디오방에서 떡하니 빌려주는 영화이기도 해서였거든요. 물론 내용이 완전 허접해서 어처구니 없는 웃음이 터져나오지만, 그래도 비디오방에 있는건데...
그러고보니 그런 말을 들은것도 같네요. 원래 포르노로 만들어진건데 우리나라에서 비디오방에 들여 놓을라고 많이 삭제했다는 식의 말이요.


영화속에서 그녀가 반대 운동을 펼친건, 포르노산업이 폭력에 노출될 확률이 높아서인걸로 보였거든요. 그런데 영화를 보고 검색해보니, 그녀가 그걸 계기로 헐리우드의 스타가 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기 때문에, 또 그 다음 포르노를 찍으려고 했지만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포르노반대 운동을 하면서 이슈를 일으켰다고 하더라고요. 뭐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포르노는 폭력에 아주 쉽게 노출되어 있다는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목구멍 깊숙이>는 보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영화에요. -_-

2013-10-29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9 17: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13-10-29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만다 사이프리드를 아주 좋아해요. >.< 너무 예뻐서,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배우예요. 특히 그 긴 금발은.. ㅠ_ㅠ 이 영화에서는 실화의 이미지를 살리려고 갈색 머리에 주근깨도 그리고 나왔다더군요. 그래도 예쁘네요. 헤블레. +_+ 그동안 잊고 있었는데, 영화 찾아봐야겠어요. ^^

터보레이터라니. 제목 굉장하네요. ㅎㅎ

다락방 2013-10-29 17:49   좋아요 0 | URL
이 영화에서 주근깨가 되게 매력포인트로 나오거든요. 전 그래서 원래 주근깨가 있는 줄 알았지 뭐에요. 그리고 나온거구나...아직 극장에서 상영중일것 같긴한데 상영하는 극장이 얼마 없더라고요. ㅠㅠ

터보레이터는, 문나잇님, 보시지 않기를 권합니다. 네, 그럼요.

단발머리 2013-10-30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좋은 분위기에서 돼지고기 애기 좀.... ㅋㅎㅎㅎ
충격고백!
입병이 자주 나서 이것저것 안 해 본 것 없는 사람입니다.
돼지고기보다는 비타민 B 정제가 효과있고요(ㅋㅎㅎㅎ), 비타민 B 보다는 홍삼이 효과있어요.
전 "ㅈ관장 홍삼정환" 먹는데 이것 때문인지 근 일년간 괜찮았구요.
그리고.......
입병이 날려고 할때, 따뜻한 맹물로 입을 자주자주 행구시는것도 효과있어요.
이상, 입병 전문가의 소박한 조언... 휘리릭~~

다락방 2013-10-30 10:17   좋아요 0 | URL
아, 홍삼이 괜찮아요? 집에 홍삼 있는데..엄마한테 홍삼도 부지런히 드시라고 해야겠네요. 비타민 B 정제라니, 약국가서 또 상의해봐야겠고요. 드시는 비타민이 너무 많아서.. 히잉.
따뜻한 맹물, 오케이 알았어요. 그것도 꼭 전할게요.

입병 전문가라니..그런거 하지마요, 단발머리님 ㅠㅠ

아무개 2013-10-30 11:33   좋아요 0 | URL
정관장 제품에 홍삼이 아닌 수삼 세뿌린가...것도 완전 연식 딸리는...
그딴거 들어있다고 얼마전에 기사난거 봤어요.
저도 홍삼하면 정관장이라고 생각했는데 흠...흠....
울 엄마도 이거 먹으니까 안피곤하다며 열씨미 드시는데 흠흠.........

다락방 2013-10-30 12:08   좋아요 0 | URL
헐..이 나쁜것들. [정글만리] 읽으니까 중국에 짝퉁이 판치는 얘기가 나오는데, 정관장도 별 수 없나보군요. ㅠㅠ

레와 2013-10-31 13:34   좋아요 0 | URL
저기, 쓰시는 치약도 한번 체크해봐요. 불소 함유된거 말고 되도록 자연 성분으로 된 순한 치약 쓰시고 양치할 때 깨끗하게 헹구는 것도 중요하더라구요. ^^

프레이야 2013-11-01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어머니도 참 ㅎㅎ
돼지고기엔 비타민 B가 많아서 입병 안 걸리는 데 도움이 되는 건 맞을 거에요 ㅎㅎ
페넬로페 크루즈는 정말 예쁘죠. 동감^^ 로마위드러브,에서 귀엽지 않던가요?
지난 주 서울 간 김에 마리오 테스티노 전을 봤는데요, 페넬로페가 있지 뭐에요^^
매혹적이었어요. 기네스 펠트로우의 다른 모습들도 좋았고요.

다락방 2013-11-03 22:31   좋아요 0 | URL
페넬로페 크루즈는 [귀향]에서도 생각했지만, 참 가슴이 이쁜 배우인 것 같아요. 언제나 옷을 입으면 가슴이 돋보여요. 예뻐요. ㅎㅎ
앞으로 엄마 모시고 돼지고기 좀 많이 먹으러 가야겠어요. 불끈!
 

 

 

 

 

"계속 여기 있을 것 같아 다시 문을 열었네."

"생각에 잠겨 있었어요."

네루다는 마리오의 팔꿈치를 움켜쥐고 자전거를 대놓은 외등 쪽으로 단호하게 끌고 갔다.

"생각을 하려고 제자리에 가만히 있다는 말인가? 시인이 되고 싶으면 걸으면서 생각하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혹시 존 웨인처럼 걷는 것과 껌 씹는 걸 동시에는 못하는거야?" (p.29)

 

 

 

 

 

 

 

 

내가 사는 동네 근처에는 언덕이라 불러도 좋을 산이 있다. 그러니 등산이라기 보다는 산책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코스인데, 나는 주말이면 곧잘 그 산에 오르곤 한다. 산의 정상에 올라 '정상에 올랐다'고 하면, 그 때마다 식구들은 그게 무슨 산이냐며 퉁을 놓지만, 어쨌든 산에 오르락 내리락 산책을 하고나면 두 다리도 뻐근하니 운동을 한 기분이다. 식구들과 함께 산책을 할 때도 있지만 나는 혼자 다녀오는 걸 즐긴다. 걷다가 좋은 풍경이 보이면 멈춰 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음악을 들으면서 걷기도 한다. 아주 많이, 산의 냄새를 맡기도 한다.

 

사실은 그 시간동안 생각하는 걸 즐긴다. 숙취를 해소하고 싶을 때도 산책을 택하지만 생각을 하고 싶을 때도 산책을 택한다. 집에서부터 출발해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두시간이 채 안되는 시간을 걸으면서, 그 시간동안은 충분히 머릿속으로 내가 하고 싶은 생각을 한다. 생각을, 상상을 머릿속에서 마음껏 펼쳐나간다.

 

오늘은 그 시간의 대부분을 현빈과 소울메이트라면 나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대한 생각으로 보냈다. 그가 너무 잘나서(!) 내가 힘겹겠지, 우리는 그저 소울메이트로만 지내야지 결코 바디메이트가 될 수는 없을것이다, 바디메이트가 된다면 다른 사람들의 질투와 시기로 내가 지쳐버릴 것이고 그에게 이별을 통보하겠지. 그러나 이별한다한들 그를 생각하는 시간들, 그와의 추억을 곱씹는 시간들은 참으로 행복할 것이다, 하는 생각들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나는 소울메이트로 그를 영원히 내 곁에 두고 싶지만. 현빈과 소울메이트가 된다면, 나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가 나의 소울메이트란 사실을 비밀에 부칠 수도 있다. 끝내주는 의리로 우리의 소울을 안전하게 지켜나갈 수 있단 말이다. 

 

 

그런 생각들을 거듭하다보니, 나는, 나란 사람은, 대상 보다는 그 대상을 생각하는 시간을 더 사랑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상대를 만나 눈을 마주치고 대화를 하고 웃고 술을 마시고 손을 잡고 안는 그 모든 행위들을 사랑하지만, 그 상대를 만나기 전에 그를 생각하는 시간, 그를 만나고 난 후에 그를 생각하는 그 시간들을 사랑하는 것 같다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건 상대가 아니라 나 자신이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혼자' 있으면서 한 대상에 대해, 그 대상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내게는 무척이나 소중하고 아름다우며 간직하고 싶은 순간이 된다는 것. 그래서 나는 산드라 브라운의 소설에서 이런 부분에 아주 크게 공감을 한 것이다.

 

 

 

 

"방해해서 미안해요. 외출 준비하고 있는 줄은 알아요. 이 파일이 그만큼 중요하지 않았더라면 금요일 밤에 당신을 귀찮게 하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월요일에는 심각한 인터뷰가 두 개나 있고, 그 중 하나는 주제가 낙태 문제거든요. 당신도 그게 얼마나 논쟁거리인지 잘 알죠? 그래서 꼭 필요한 관련 자료를 담은 파일을 ‥‥‥."

"사랑해, 브린."

브린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아무 말도 못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심지어는 미소조차 짓지 못했다. 그가 자기 몸에서 흘러내린 물이 괴인 한가운데서 서 있는 모양이 우습다는 생각도 전혀 하지 못했다. 그의 눈에 담긴 진실함에 넋이 나가, 그저 멀거니 서서 듣기만 했다.

"외출 준비하고 있던 거 아냐. 집에서 혼자 조용히 당신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낼 참이었지. 매일 매 순간마다 그래 왔던 것처럼." (pp.115-116)

 

 

 

 

혼자 조용히 당신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낼 참, 이라는 그의 말이 백프로 이해가 됐다. 나 역시 가끔은 일부러 시간을 내어 상대를 생각해보고 싶을 때가 있었다. 혼자 있는 조용한 집에서라면 가만히 앉아 자, 이제 그를 생각해야지, 한 적 있었고,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에서 혼자 남겨졌을 때 좀 있다 나가자 잠시만 그를 혼자서 가만히 생각하고, 한 적도 있었다. 나는 강한 사람이라 어디에서든 잘 적응하며 잘 지내고 살아남을 사람이지만 이렇게 누군가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외로움과 그리움에의 상태에서도 잘 견뎌낼 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어떤걸 좋아하는지, 어떻게 고통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할지, 어떻게 버텨내고 어떻게 견뎌내야 할 지를 점점 더 잘 알게 되는 것 같다. 나는 내 자신한테 아주 관심이 많고 내 자신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점점 더 강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내가 강하기 때문에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선물을 줄 수 있다. 나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고 신경 쓰이게 하는 일들을 없도록,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그들에게 돈을 주고 보석을 주고 고기를 사 주는게 아니라, 나로 인해 염려하고 걱정하고 고민하게 하는 일들이 없도록 하는 일이다. 나는 그걸 아주 잘 해내왔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고기를 사주는 건 좀.. 좋지만.

 

 

 

아, 그런데 내가 처음에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인용할 때는, 역시 생각은 걸으면서 하는게 짱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는데, 그렇게 해서 나 역시 '생각하는 순간'을 좋아한다는 말로 끝맺고 싶었던 건데, 왜 결국 내가 강하다는 잘난척으로 끝맺게 된걸까.

 

어쨌든 지금은 일요일 밤 아홉시가 다 되어가고 있고, 나는 이제 곧 맥주를 마실 것이다. 아니면 우울하니까. 이 우울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맥주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세탁기가 돌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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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7 2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8 0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Forgettable. 2013-10-27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아치 만나서 한 대화랑 비슷. 상대방보다 나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 or 상대방을 사랑하는 내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 같아 ㅎㅎ

다락방 2013-10-28 09:28   좋아요 0 | URL
난 나이들면서 확실히 깨달아요. 그 누구보다 내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내가 이런 사람인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는데 말예요. ㅎㅎ

아무개 2013-10-28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모두 다는 아니겠지만 첫사랑 이후는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그 감정에 사랑에 빠지는거라고들 합디다....

2.정말 강한 여자는 외로워도 술 안마시는겁니다요....

3.저는 어제 소주 한병반 마셨어요........흠....

4.참 그리고 요새 "아름답다"라는 게
내가 아름답다 라고 '생각'을 하는건지
아름답다 라고 '느끼는'건지...
본능인지 교육인지...헷갈려요..

다락방 2013-10-28 09:36   좋아요 0 | URL
1. 저는 '사랑에 빠졌'다고 스스로 느낄 수 있었던 적이 되게 오래전인것 같아요. 사랑에 빠졌다는 건, 뭔가, 다른 차원의 것으로 느껴져요 이제는.

2. 저는 외로워서 마시는 게 아니라 취하는 게 좋아서 마셔요. 하하하하하

3. 저는 어제 500짜리 맥주 세 캔..

4. 아, 저도 헷갈려요. 아름답다라는 게 교육인지 본능인지. 성형 미인들을 보면 확실히 교육인 것 같아요. 다 똑같잖아요. 쌍커풀 오똑한 코 같은거 말예요. 그렇지만 음악이나 그림 영화 소설들을 접하고 아름답다고 감동하는 건 본능적인 것 같기도 하고..

단발머리 2013-10-28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그 시간의 대부분을 현빈과 소울메이트라면 나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대한 생각으로 보냈다."

저는 어제, 그리고 오늘, 내가 소지섭과 소울메이트라면 나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난, 너무 세속적인가봐요. 자꾸 그의 어깨가, 튼튼하고 단단한 그의 어깨가, 어깨가 생각나요.
난 소지섭이랑 소울메이트는 어려울것 같고. 그 어깨만, 잠깐 빌리고 싶어요. 백만원이던가요? *^^*

"혼자 조용히 당신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낼 참, 이라는 그의 말이 백프로 이해가 됐다. 나 역시 가끔은 일부러 시간을 내어 상대를 생각해보고 싶을 때가 있었다."

난 이 단락이 너무 좋아서요, 내가 다락방님 책을 가졌다면 좋았을걸, 이게 다락방님 책이라면 여기에 보라색 색연필로 밑줄을 쫙쫙 그었을텐데.. 그런 생각을 했어요. 책이 없으니 (책을 내세요~~) 마음에다가 밑줄을 쫙쫙 그어요~~~

다락방 2013-10-28 10:07   좋아요 0 | URL
오늘 누군가 식당에서 현빈을 봤다고 말을 해줘서 저 지금 멘붕이에요. 왜 그 식당에 내가 없었는가..회사 그만두고 그 식당에 취직할까..하고 말이지요. 아놔. 식당 주인 아저씨는 현빈인 줄 모르고 그냥 키크고 인물 훤한 청년으로 생각했다고.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미춰버리겠네요. ㅠㅠ

2013-10-28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8 13:54   수정 | 삭제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8 1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9 0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3-10-29 10:33   좋아요 0 | URL
비밀....이야기니까요.... ( ")

2013-10-28 15: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8 1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당신이 지진이라면



여보세요, 떠나겠다는 나의 결정이 나는 두려워요. 당신으로부터 먼 곳에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당신이 지진이라면 먼 곳에서 지진이란 무엇일까요? 호숫가의 오리들도 놀라지 않아요. 나는 낮잠을 깨지 않아요. 네 시간 다섯 시간이 흘러가요. 나의 낮잠은 비뚤어진 입을 틀어막고 한량없이 귀가 커져요. 펄럭이는 귀는 검은 밤에 젖어요. 귀가 커다래지니까 이곳이 얼마나 조용한 곳인지 알겠어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내가 옛날 전화기를 들고 있다면 검은 전화선을 따라 수억 개의 지붕 위를 건너 텔레파시의 화신처럼 나타날 수 있을까요. 옛날 연인들은 전화선을 손가락에 감거나 목에 감았어요. 주술 같은 것이었어요. 허공을 만지는 일도 그런 걸까요? 허공에 대해 공부했다는 한의사는 내게 생활 습관을 고치라고 말했어요. 밤에 잠을 자고 아침에 밥을 먹고 그리고 허공을 자꾸 만지지 말라고 했어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귀를 막은 채 비명을 지르지 말라고 했어요. 침을 맞으라고 했어요.



나의 아침에 당신은 저녁 8시예요. 당신의 새벽에 나는 오후 2시예요. 먼 곳, 먼 곳, 먼 곳을 향해서 당신이라고 부르는 오후 2시에 나는 또 손이 저려요. 오후 3시에 침을 맞아요. 식전 30분에 나는 한약을 먹어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나는 먼 곳의 지진을 느끼지 못해요. 먼 곳에서 당신이 죽을까 봐 두려워요. 당신이 죽은 지 일 년이 지났는데 나는 슬퍼하지도 못했을까 봐 진짜 두려워요.




지난 주말에 에피톤프로젝트 콘서트에 다녀왔다. 그가 「시차」란 노래를 불렀을 때, 나는 김행숙의 위 시가 생각났다. 김행숙이었던것 같은데, 내가 산 시집에 있었던 것 같은데, 시차가 꽤 크게 느껴지는 곳의 사람을 사랑했던 시가 분명 있었는데. 시집을 꽂아둔 책장 앞으로 가서 차례대로 시집들의 제목을 읽었다. 역시 김행숙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꺼내들고 한 장 한 장 다시 넘겼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문장들로 가득한 시들 속에서 당신이 지진이라면, 이란 제목을 본 순간 앗! 이걸거야, 이걸거야! 했다. 



지금쯤 그대는 몇 시를 사는지?
오랜만에 먹는 아침이
가벼워진 나의 마음이 꽤 좋아 보여
느긋한 트램을 타고서 달리면 
옆 자리의 꼬마 아이도,
좁은 골목길의 모습도 꼭 그림 같아
아직은 멀기 만한 나의 시간이
졸린 눈을 비비게 해도
스쳐가는 많은 것들을 다 끌어안고
지금쯤 그대는 몇 시를 사는지?
오랜만에 먹는 아침이
가벼워진 나의 마음이 꽤 좋아 보여
지금쯤 그대가 몇 시를 살던지
누구와도 같지 않으니
누구라도 다른 거니까, 큰 걱정 말고          -에피톤프로젝트, 시차









내가 사는 시간과 다른 시간을 사는 곳의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어떤걸까. 거기엔 어떤 낭만이 있을까. 지금 당장은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 보는 달을 그는 지금 볼 수 없다는 것. 달 봤어요? 아주 커요, 소원을 빌어도 좋겠어요, 같은 말을 내가 지금 전화기를 붙들고 말해보았자, 혹은 문자메세지로 딩동- 하고 보내봤자 그곳에서는 아직 달이 뜨기 전이거나 이미 달이 사라지고 난 뒤일텐데. 그래서 시무룩해질 즈음, 이런 생각이 고개를 쳐든다. 그러나 만약 내가 오늘 밤하늘엔 별이 무척 많았어요, 쏟아질듯이. 라고 말했다면 그는 그렇다면 나도 오늘 밤엔 고개를 들고 별이 얼마나 많은지 확인해볼게요, 라고 대답할 수 있을테고, 그렇게 자신의 시간에서 밤이 오기까지 내내 밤이 오면 별을 봐야지, 하고 나를 생각하고 염두에 두는 시간이 더 길 수 도 있으리란 생각. 


베가본드란 만화에서 주인공이(이름이 생각안나..) 안보이면 잊혀질 줄 알았더니 가슴에 더 선명하게 새겨진다고 했다던 말이 생각났다. 멀리 살기 때문에, 열세시간쯤을 날아가야 그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열세시간을 날아가기 위해서 비행기표를 할부로 긁어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를 자주 볼 순 없겠지만, 한 번 보게 되면 그만큼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겠지, 볼 날만 내내 기다리며 지내겠지.



그렇지만 김행숙의 시, 당신이 지진이라면, 저 시의 마지막 연 때문에 다시 슬퍼진다. 나는 먼 곳의 지진을 느끼지 못해요. 먼 곳에서 당신이 죽을까 봐 두려워요. 당신이 죽은 지 일 년이 지났는데 나는 슬퍼하지도 못했을까 봐 진짜 두려워요. 먼 곳에 그가 있는데, 먼 곳에 있는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전혀 알지 못한다면, 그의 소식을 알 수 있는 방법이 그와의 연락 뿐이라면, 그런데 그와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는다면, 그가 아프다면, 그가 이 세상에서 존재를 감췄다면, 나는 이 곳에서 발만 동동 굴러야 하지 않을까. 그게 슬프다. 아무도 내게 그의 소식을 대신 전할 수 없으니 그의 안부를 내 머릿속에서 썼다지웠다 해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 슬퍼해야 할 때, 제 때 슬퍼하지 못할거란 사실이 더 슬프다.





















남자는 파리를 사랑하고 파리에서 살고 싶다. 그러나 남자의 약혼녀는 남자가 헐리우드에서 일하면서 말리부에서 살기를 원한다. 여자는 남자가 돈벌이도 안되는 소설을 쓴다는 게 못마땅하고, 친구의 애인처럼 모든것에 전문가가 되지 못하는 것도 못마땅하다. 남자는 파리 거리를 산책하기 원하고 여자는 온갖 관광명소를 다니며 설명을 듣길 원한다. 그런 남자에게 1920년대에 만난 매력적인 여자가 묻는다.


그녀를 사랑하죠?


남자는 대답한다.


사랑해요.

사랑하는 것 같아요.

결혼하면 사랑해야겠죠.



남자는 자신의 사랑에, 자신의 결혼 상대에 대해 확신이 없다. 대답의 강도는 점점 약해진다. 여자는 다시 묻는다. 그래도 그녀와 중요한 것에 있어서는 공통된 의견을 보이지 않나요? 남자는 대답한다. 


사소한 것에서는 잘 맞죠. 인도음식을 둘다 좋아해요.

아니 사실 인도음식을 둘다 다 좋아하는 건 아니고 그 난 이라는 빵, 그건 둘 다 좋아해요.


생각해보니 둘에게는 사소한 것조차 공통된 게 거의 없다.



남자가 바라보는 세계, 남자가 꿈꾸는 세계가 여자가 바라보는 방향과는 완전 틀어져있다. 남자는 길을 가다가 콜 포터의 음악이 들려오면 멈춰야하지만 여자의 귀에는 콜 포터의 음악이 들리지 않는다. 남자는 헤밍웨이와 피카소를 만났다는 사실에 흥분을 해서 그 기쁨을 전하고 싶지만 여자는 내일 관광을 위해 오늘 빨리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이런 둘이, 과연 사랑을, 결혼 생활을 잘 유지할 수 있을까? 


영화의 초반, 남자가 자신이 그토록 꿈꾸던 1920년대의 파리로 돌아가 헤밍웨이를 만났을 때, 내가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읽었기 때문에 더 재미있고 머릿속에 쏙쏙 들어왔다. 알어, 알어, 저랬지, 저랬어!! 중간에 남자가 '파리는 날마다 축제란 말도 있잖아' 라며 영어로 Moveable Feast 라고 하는데, 아우, 이건 내가 저 책을 읽었으니까 아는거야, 하면서 막 으쓱으쓱. 움화화화핫. 



사랑에 있어서는 거리가 큰 방해물이 되진 않는다. 열세시간을 날아가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게 될 수도 있다. 반면 함께 붙어 있는 시간이 길어도 사랑이 완성되진 않을 수도 있다. 우리가 바라보는 방향이 같지 않다면 함께 사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게 바로 사랑의 가장 큰 위대함일지도 모르겠다. 거리와는 상관 없다는 것. 아울러 이 영화속처럼 시간을 초월한다는 것. 2000년대의 남자가 1920년대의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게 가능하다니, 사랑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 이 시대를 뛰어넘어 가능하겠는가. 내가 이 시대를 살고, 여기에 살고, 이 나이를 살고 있으면서도 당신을 사랑한다는 거, 그래서 사랑이 다른 무엇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질 수 있는 것 같다.



(뜬금없는 영화속 남자에 대한 불만 한 가지. 아니, 길, 대체 왜! 핏츠제럴드가 아니라 헤밍웨이한테 더 흥분하는거죠? 네?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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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금 이순간도 난 널 기다리고 있어.
    from 마지막 키스 2015-07-12 22:19 
    센트럴 파크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여러가지였다. 홀든과 피비를 생각하고 싶었고 할과 로라를 떠올리고 싶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에 가면, 그 위에서 첫키스를 나누고 뉴욕이 아름답게 느껴졌다던 노래를 떠올리며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센트럴 파크를 갔고, 역시나 할과 로라를 또 홀든과 피비를 생각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에 가서는 이 위에서 저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름답게 보일 수 있겠지, 이 위에서 누군가와 키스를 했다면, 하고 생각을 했다.
 
 
Forgettable. 2013-10-25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인관계는 시차를 통해 더욱 로맨틱해지기보단 멀어지더라구요; 친구 관계가 오히려 더 돈독해졌던듯. 저 같은 경우엔 말이죠. 밤에 센치해져서 문자보내면 일하는 중이거나, 걔가 취해서 연락오면 나는 자고있거나 일하는 중. 뭐.. 저는 지금도 남들과는 시차있게 일하고 중인데, 연애할 때 플러스 요소는 제로....... 백수를 만나야 할듯. ㅠㅠ

다락방 2013-10-25 16:44   좋아요 0 | URL
아 그러고보니 제 친구 하나가 그러더라고요. 외국에 있을 때 여자친구가 자꾸 전화를 하는데, 그 때 자기는 일끝내고 너무 피곤해서 자고 있을 때라고. 그런데 번번이 자지 말고 자기랑 통화하자고 요구하는 바람에 정이 떨어져 버렸다고...서로 다른 시간을 살면 그런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네요. 흐음.

백수 보다는, 음, 뽀님이 일하는 시간에 일하고 뽀님이 노는 시간에 노는 사람을 사귀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아니면 먼 데 있는 남자 사귀어요. 여자친구와 짧게짧게 연애하던 내 남자사람 친구가 지금 여자친구와는 3년째 사귀고 있는데, 그게 먼 데 살기 때문이래요. 가끔 보니까 싸울 일도 없고 가끔 보니까 서로에게 질리지도 않고 오래 간다고...아, 그러니까 외국같은 먼 데 말고 음...강원도 정도? 강원도 유지라든가....강원도 땅부자라서 농사 짓는 남자....라면 한달에 한두번쯤 뽀가 금요일에 일 끝내고 내려가서 전원을 배경삼아 편하게 술을 마시고..................아니면 제주도에서 말 이천마리 키우는 남자 만나서 금요일 밤에 제주도 내려가서 주말에 같이 말타고 제주도를 달리고.................(상상이 안끝나네 -_-)

Forgettable. 2013-10-25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빵터짐ㅋㅋㅋ 저도 장거리 연애할 때 가장 오래 만났어요. ㅋㅋ
다락방은 참 말을 좋아해......... ㅋㅋㅋㅋㅋ 여기서 또 한번 달콤쌉싸름 생각 해주고;
여튼 그런 장거리 연애라면 아주 좋네요. 하지만 난 연애는 당분간 금지라. 멘탈파괴상태 ㅋㅋ

다락방 2013-10-25 17:01   좋아요 0 | URL
그치. 말이 나오면 달콤쌉싸름 나와줘야지. ㅋㅋㅋㅋㅋ 무려 발가벗은 여자를 앞에 태우잖아!
파괴된 멘탈이 얼른 제자리를 찾길 바랍니다 뽀 ㅠㅠ

배고프네요 ( ")

자작나무 2013-10-27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하면 결혼해야 하나요?

다락방 2013-10-27 23:23   좋아요 0 | URL
사랑하면 결혼해야 한다고.. 제가 썼나요? 그렇다면 잘못 썼네요. 전 방향이 맞지 않는 사람과 함께 사는것은 제가 추구하는 바가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J는  K의 학교 후배다. K 가 어학연수를 가기전, 한 번 밥이나 먹자며 만나길 청했고 그 자리에 J 를 데리고 나온거였다. K와 내가 살갑게 늘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도 아니었고 자주 만나는 사이도 아니었으니 설사 어학연수를 1~2년 가있는 게 아니라 해도, 그러니까 그동난 내내 한국에 있었다해도 우리가 만날 일은 없었을 텐데, 가기전에 얼굴 보자고 한 건 좀 웃기다. 어쨌든 나는 K 를 만나러 갔건만 K 는 J 를 불렀다고 했다. 예정에도 없는 추가된 멤버는 내 기분을 약간 상하게 했는데, 뒤늦게 도착한 J 를 보는 순간 기분이 더 망가지고 말았다.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지나치게 당당한 모습이었달까. 그래서 나 역시 그에게 친절을 베풀기 보다는 첫만남 첫대화부터 틱틱거렸다. 내가 불편한만큼 너도 불편함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것도 같다. 그런데 웬걸, 하하하하하, J  를 만난지 한 시간도 채 되기전에 나는 J 에게 완전 흠뻑 빠져들고야 말았다. J 는 학교내에서 선배들로부터 '싸가지' 라고 불린다고 했다. 그게 그의 별명이라고 했다. 나를 만났을 때에도 그런 모습이었는데, 그러면서도 수시로 꽤 다정한 모습을 보이는거다. 나는 언제나 이런 남자들한테 강하게 매력을 느꼈다. 늘 그랬다. 당당하고 자신감있고 강하고 싸가지 없어 보이지만 '나한테는' 말투가 부드러워지는 그런 남자. 모든 여자들한테 다정하고 매너좋고 친절하고 살갑게 구는 남자들은 뭐 그러든지 말든지 하게 됐지만, 쌀쌀맞은 말투를 가진 남자를 보면 이상하게도 '나한테 다정하게 만들고 싶다' 는 생각이 막 자라나는거다. 하하하하. 여튼, J 는 여전히 싸가지 없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내가 무엇이 부족하다 느끼는지를 잽싸게 파악하고 손을 들어 마늘을, 술을, 쌈장을 더 시켜주곤 했다. 그 날 그는 비니를 쓰고 왔었는데 열심히 삼겹살을 집어 먹다가도 내가 그거 한 번 벗어봐요, 라고 하면 눌린머리가 웃음거리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곧잘 벗었다. 나는 또 까르르 웃고 잠시후에 또 벗어봐요 하고 까르르 웃었다. 그 때는 눌린 머리가 우스워 웃는것처럼 행동했지만, 사실 나는 이렇게 키가 크고 몸이 좋고(응?) 당당하고 강한 남자가 내 말 한마디에 움직인다는 게 엄청 좋았던 것 같다. 2차로 옮기는 내내 J 는 내 옆에서 걸었다. 취한 나를 데리고 움직인거였는데, 2차에서는 내가 화장실에 갈 때마다 따라와서는 화장실 앞에 서서 나를 기다렸다. 그 때까지 한 번도 같이 술마신 남자가 취한 나를 부축하겠다며 화장실 앞에서 기다린 적이 없었는데! 나는 취한 와중에도 녀석에게 완전 쑝 가버리고 말았다. 정말 정말 매력이 터지는 남자였다. K 가 나보다 어렸으니 J 는 나보다 더 어렸는데, 와, 이토록 강하게 '매력있는 남자' 를 만난 게 얼마만인가 싶게 너무 좋았다. 


그렇다고 내가 그와 어떻게 되기를 꿈꿨다거나 그를 향한 연정에 밤을 지새웠다던가 한 건 아니다. 그저 와 매력터져 매력터져 하면서 '남자'로 인식했던거지. 설사 그쪽에서 나를 여자로봤다 한들 그토록 자신감 넘치는 남자를 내가 과연 내 연애상대로 삼았을지는 의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강한 매력으로 나를 풍덩 빠지게 한 남자를 몇 번 만났지만 그들 모두와는 연애를 하지 않았다. 연애상대는 늘 다른 사람이었다. 왜 나는 강한 매력이 폭발할 듯 쏟아지는 남자와는 연애하기가 두려울까. 어쨌든 녀석은 나를 엄청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좀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는 과정에서도, 취직을 하고 나서도 끊임없이 나에게 연락을 했으며 그 사이사이 녀석은 연애를 했고 헤어졌고 또다른 연애를 시작했다가 헤어지고를 했다. J 와 단둘이 만나면 거의 내가 얘기를 하는 편이었는데, J 는 언제나 내가 신기하다고 했다. 내가 동생들과 우애가 좋은게, 내가 책을 읽는 게, 나의 학교 생활들이. 나를 만나고 돌아가노라면 너무 웃어서 얼굴이 아프다고 했고, 나는 J 를 많이 웃게 해서 아주 기분이 좋았었다.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J 와 사랑하고 싶다거나 연애하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을 해본적은 없지만 불순한 욕망이 여러차례 끼어들었던 적은 있다. 쿨럭.


시간이 흘렀고 J 는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우리의 연락은 끊긴지 오래다. 그리고 당연히 나는 그를 잊고 살았다. 그와의 추억이란 게 별로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오늘 꿈에 그가 나온거다. 맙소사!! 이게 뭔일이람.



꿈에서 나는 어찌된일인지 지금 현재를 살고 있었는데 대학생이었다. 늙은 대학생인거지. 아주 약한 비가 내렸고 또 나는 어찌된일인지 집까지 걸어가기로 작정했다. 그렇게 걷고 있는데 갑자기 키가 작고 늙고 소심해 보이는 남자가 몇 살이냐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처음에 뭔가 도를 아십니까를 물으려고 하나 싶어서 무시하는데 그는 계속 내 옆에 걸으면서 작업을 거는거다. 현실의 나라면 완전 매몰차게 저리 꺼지라고 했을텐데 꿈속의 나는 왜 가만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 짜증나..라고 생각하면서도 몇 개의 질문에는 대답해주면서 걷고 있는데, 정말이지 마법처럼!! J 가 나타났다. 여전히 키가 크고 여전히 당당하고 여전히 강한 모습이었다. 꿈에서 나는 너무나 반가워서, 와, 너 몇년만이야!! 라고 소리를 질렀고 녀석도 오랜만이라며 웃으며 다가왔다. 누가먼저랄것 없이 우리는 반가운 마음에 서로를 끌어안았고,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놓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J 는 나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옆의 저 늙은 남자는 누구냐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자꾸 따라온다고 좀 싫은티를 냈다. 그랬더니 J 는 갑자기 멈춰서서 그 남자에게 저리 가라고 말했다. 싫어하니까 저리 가라고. 그러자 그 남자는 사라졌다. 나는 J 가 반갑고 또 좋아서 기분이 너무 좋았는데, J 가 이끄는대로 J 의 모교로 가서 그 안에 자리한 이상한 골방같은 데로 함께 들어갔다. 그리고 우리는 나란히 누워 심하게 다정했다. 그 방에 K 가 뜬금없이 들어오는 바람에 기분이 좀 안좋았지만...대체적으로는 좋았다. 그리고 꿈이 깨서는 와- 엄청 반갑네, 진짜 매력 터지는 녀석이었는데, 하면서 기분이 막 좋았다. 현실에서도 한 번 안아보고 싶다고 생각도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런데 왜 갑자기, 오만년만에, 뜬금없이, 그가 꿈에 나온거지?






















어제 퇴근하며 읽은 책은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이었다. 나는 오늘 아침 출근 준비를 하며, 아, 이 책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초반에 이런 구절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는 회한에 잠겨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빨랐던 그들 사랑의 초기 시절을 생각했다. 그녀를 정복할 필요도 없었다. 첫 번째 순간, 그녀는 정복되었다. 그녀를 돌아본다고? 무엇 때문에? 처음부터 그녀는 그의 곁에, 코앞에,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다. 처음부터 그는 강했고 그녀는 약했다. 그들 사랑의 기반에는 이런 불평등이 깔려 있었다. 정당화될 수 없는 불평등, 부당한 불평등. 그녀는 연상의 여자였기 때문에 약했던 것이다. (p.46)



아침에, 출근준비하느라 그 바쁜 와중에 다시 책을 펼쳐 보았다. 아, 이것 때문이었나봐. 이것 때문에 그런 꿈을 꾼건가봐. 이래서 꿈에 J 가 나온건가봐. 나는 순간, J 도 오늘 똑같은 꿈을 꾸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J 는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아마도 이 책을 읽지 않았을테고, 설사 이 책을 읽었다고 해도 저 부분을 읽고 꿈을 꾸게 되는 상대가 내가 아닐 수도 있을테지.


밀란 쿤데라는 그의 소설 『불멸』에서도 '연상의 여인은 자수정'이란 표현을 한 적이 있다. 이 책, 『정체성』에서는 단순히 연상의 여자 뿐만이 아니라 상대보다 조금 더 나이든 육체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연상의 여자는 연하의 남자와 사랑에 빠질 수도 있지만 연하의 남자에게 불안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 혹은 초조하거나 신경쓰이거나 하는 마음을 갖게 될 수도 있으니까. 아, 물론 이건 연상이기 때문에만 생기는 건 아니지만, 어떤 젊은 육체 앞에서는 속절없이 약하고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하니까.



그는 문 옆에 서서 그녀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그녀로부터 여섯 발자국 떨어져 있었는데 이 짧은 거리가 무한히 먼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빨갰고, 불타고 있었으며,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녀 앞의 남자는 거만하게 젊었고 그녀의 불쌍한 육체를 거만하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불쌍한 육체를! 젊은 남자의 시선을 받으니 자신의 육체가 그 시선 아래 환한 세상에서 빠른 속도로 늙어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p.114)



사실 내가 가장 이 책 속에서 놀라웠던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신뢰를 느낀 그는 말했다. "혹시 호텔 이름을 가르쳐 줄 수 있나요? 샹탈이 와 있는지 전화를 걸어 확인하고 싶습니다."

를르와는 아무 말도 없다가 물었다. "샹탈이 가르쳐 주지 않던가요?"

"아니오."

"그렇다면 죄송하군요." 그는 정중하다 못해 거의 아쉽기까지 하다는 투로 말했다.

"가르쳐 드릴 수 없어요." (p.161)



장마르크는 샹탈의 애인이며 현재 같이 살고 있다. 그리고 를르와가 샹탈의 회사 동료임을 알고 있다. 자신이 알고 있으니 그가 자신에 대해 아는것도 당연할 터. 그러나 를르와는 장마르크에게 샹탈이 묵는 호텔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장마르크가 아무리 샹탈의 애인이라 한들, 샹탈이 장마르크에게 가르쳐주지 않았으니까. 샹탈이 자신의 애인에게 말해주지 않은 것을 자신이 말해주는 것은 선을 넘어가는 일일테니까. 이런 태도가 필요하지 않은가 싶었다. 뉴스나 드라마속에서 두드려맞는 여자에게 사람들이 쉽게 손 내밀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그 남자가 '내가 이 여자 남편이야' 라고 말하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대체 남편이라면 아내를 함부로 다루어도 좋단 말인가. 그게 합당한 이유가 된단 말인가. 다른 부부 사이에 끼어들어서는 안되는 일이야, 란 말로 그들을 방치하기 보다는, 아내가 말하지 않았다면 제삼자도 말하지 않아주는 게 합당한 게 아닐까. 뭐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나는 이제 J 의 연락처도 모르는 데, 어쩌면 좋담. 뭐 연락처를 안다한들 오만년만에 네가 꿈에 나왔단다 하고 연락하기도 좀 뭣한 일이지만. 오늘은 하루종일 J 를 떠올리며 히죽히죽 웃게될 것 같다. 나에게 건넸던 맥스봉 소세지와-그러고보니 내가 강하게 이끌렸던 두 남자 모두 나에게 소세지를 줬네!!!!!!!!소름돋아!!!!!!!!!!!!!!!!!!- 술취한 나를 바래다 주겠다며 내 핸드백을 대신 들고 내 손을 꼭 잡고 걸었던 일 같은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떠오른다. 다 밀란 쿤데라 덕이다. 체코에서 태어나 프랑스에 정착한 한 남자가 대한민국의 여자를 추억에 잠기게 했고 꿈 꾸게 했다.



밀란 쿤데라는 정말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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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3-10-24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히히.... 혼자 막 웃어요. 옆에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네요.
저번에 다락방님이 그랬죠?
어떤 사람이 꿈에 나왔다면, 꿈에 나온 그 사람이 날 생각하고 있는 거라구요. 다락방님 친구가 그랬던가요? 암튼.
다락방님 오늘, 너~~~무 좋으시겠다. 당당하고, 자신감 있고 강하고 싸가지 없어보이지만 다락방님께 친절했던 J씨가 오늘은 다락방님을, 아니
어제부터 계속 다락방님을 생각하네요. 얼레리~~

저는 저 책 50페이지 정도까지 읽었는데, 다락방님이 말했던 구절은 기억이 안 나요. 다시 처음부터 읽어야겠어요.

다락방 2013-10-25 16:30   좋아요 0 | URL
추억할 수 있고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꽤 즐거운 일이에요, 단발머리님. 잠깐동안이나마 그 시절 생각하며 두근두근했어요. 아, 그런 남자가 내게 있었지, 하면서요. 하핫.
아무래도 그렇잖아요. 모두에게 친절한 게 아니라 나에게만 친절한 남자라면,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 그런 느낌 때문에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헤헷. 녀석이 일상에 치어 지쳐있는 와중에 잠깐동안 뜬금없이 제 생각을 한걸까요? 그래서 제 꿈에 나온걸까요? 이렇든저렇든 꿈에서라도 보니 참 반갑더라고요. 헤헷

자작나무 2013-10-24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밀란 쿤데라보다 다락방의 꿈 이야기가 더 좋아요 :)

2013-10-25 16: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7 2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8 09: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9 0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9 1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9 1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3-10-29 14:03   좋아요 0 | URL
노!!!!!!!!!!!!!!!!!

자작나무 2013-10-30 08:47   좋아요 0 | URL
아니 왜요? 왜 나만 빼놓고 놀아요?

아무개 2013-10-24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그리고 우리는 나란히 누워 심하게 다정하려면 어떻게 하는겁니까? 쿨럭~

2.다락방님을 유혹하려면 우선 맥스봉 부터 준비를 해야겠군요. (남자사람님들 참고하세요!)

3.지금 '시적정의'읽기 시작했어요. 이거 다음은 '참을수 없는~'입니다. 오랫만에 기대되는 작가를 만나서 흥분됩니다^^


다락방 2013-10-25 16:35   좋아요 0 | URL
1. 아무개님. 심하게 다정하면 되는겁니다.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합니까! 심하게 다정한 게 어떤건지 직접 보여드릴 수 없는점이 좀 안타깝네요.

2. 아뇨, 이젠 맥스봉에 넘어가지 않아요. 제가 좀 늙은 관계로다가....이젠..음.....어....그러니까......스테이크 정도는 되야...쿨럭.

3. 시적정의도 아닌, 밀란 쿤데라도 아닌, 쇼펜하우어 페이퍼를 쓰셨던데요!!

무해한모리군 2013-10-24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꿈을 꿀 수 있다니 밀란 쿤데라는 정말 대단하군요!
다락방님 꿈 이야기는 늘 좋아요 ㅋㄷㅋㄷ

저도 강하게 끌린 사람들과는 연애하지 못했어요.
연애대장에다 먼저 고백하는데 주저함이 없는데도 내게 너무 멋진사람에게는 그러지 못한듯해요.
가장가까운 기억은 감성이 충만하다 못해 똘끼가 있는데다 아마추어 연극인이고, 등산이 취미인(나랑 같은!!!) 남자를 만난거예요. 산을 같이타면서 하루종일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정말 너무너무너무 마음에 들었는데, 애인도 없는거 같았는데 왜왜 꼬셔볼 엄두도 내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꼭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면 저런 사람이 날 좋아할리 없지 마음이 늘 앞서는거 같아요...

다락방 2013-10-25 16:38   좋아요 0 | URL
강하게 끌린 사람과는 왜 연애하지 못했을까요? 그들중에 어떤이는 제게 연애하자고 덤벼든 적도 있었는데 거부했어요. 엄청 매력을 느꼈으면서도. 왜그랬을까 곰곰 생각해봤는데, 그건 아마도 제가 불안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일단 상대의 초매력에 기가 죽은것도 사실이지만, 이런 남자는 어디가서도 초매력일텐데 나랑 사귀는 동안에도 여기저기서 유혹을 받을것이고 그 모든것들에 있어서 내가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고.....뭐 이런 생각을 한 게 아닐까요? 그래서 연애상대는 초매력보다는 안정에 좀 더 중점을 두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초매력남과 연애하면 만날때마다 번번이 가슴이 뛰어서...뭐랄까. 초매력남은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할 것 같아요. 초매력남으로 그저 남아줬으면 좋겠어요. 어디 다른데 정착해서 변질되지 말고....연애를 안해도 좋으니 초매력남들을 많이 알고 지내고 싶습니다 ㅠㅠ

아, 휘모리님. 저 [톰크루즈에게 전화오게 하는 방법] 책 샀어요. 다 읽으면 페이퍼 쓸게요. 물론 당분간 읽을 생각 없지만;; 헤헷
 















이 책의 프롤로그가 끝나고 본문이 시작되기 전, 이런 그림이(책에는 흑백으로) 실려있다.



이 그림 밑에는 이런 설명이 첨부되어 있다.


Dan Jones|Cable Street Anniversary. 1936년 영국 파시스트들이 유대인 지역을 관통하여 행진하려는 것을 50만 민중이 막아 낸 일을 기념하는 축제.



나는 이 축제가 뭔지 궁금한 마음에 검색창을 열고 검색해 보았지만 결과를 찾아낼 수 없었다. 유래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데. 내가 검색 병신이라서 못찾는 것 같긴 한데...어쨌든 저 짧은 설명 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50만 민중이 막아냈다는 것이. 그들이 연대하여 막아냈다는 사실이.


사실 끝까지 다 읽고나면 이 책의 저자인 류은숙이 얼마나 열정적이고 대단한 인권운동가인지 알 수 있지만(덧붙여진 유해정의 글로 알 수있다), 정작 류은숙 본인은 자신이 인권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었고 서툴렀는지를 고백한다. 좀 더 나은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그녀가 고민해왔던 순간들이 이 책에 고스란히 드러나있는데, 그건 우리 모두가 의심을 품고 생각을 해보았던 고민이기도 해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이를테면, 프롤로그의 공포영화에 관한 부분은 공포영화를 보았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의심을 가져보지 않았을까.



나는 겁이 많아서 공포영화를 못 본다. 아찔한 장면이 나올 때마다 붙잡고 고개를 처박을 수 있는 친구가 옆에 있을 때만 간혹 곁눈질로 몇 편을 봤을 뿐이다. 그런데 도무지 이해 안 가는 공통적인 장면이 있다. 언제 죽을지 모를 정말 무서운 상황인데 등장인물들이 꼭 "난 이리 가 볼 테니 너는 저쪽으로 가 봐." 라고 하고는 흩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무서울 때는 서로 꼭 붙어 있는 게 정상이지, 왜 째지는 거야? 당장 괴물이나 괴한이 나타날 상황인데 저건 말도 안 돼!' 이러는 것은 내 생각을 뿐이다. 그렇게 흩어놔야 피 흘리는 희생양이 생기는 것이 잔혹공포영화의 여전한 규칙이다. 이와 반대로, 사소하지만 무섭기 때문에 살고 싶어서 꼭 붙어 있는 것이 연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pp.14-15)



세상이 공포영화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그 안의 등장인물들이고. 우리는 이 세상이 얼마나 난폭하고 잔인한지 잘 알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나와 너를 분리하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이 부분에 이르러서야 들었다. 연대의 중요성을 가장 잘 설명한 글이 바로 이 글이 아닐까. 


이 글을 읽으며 여러 군데에 포스트잇을 붙여 놓았다. 어떤 부분에서는 바로 내 생각이 그러하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어떤 부분에서는 그저 막연히 눈물이 핑- 돌았다. 이런 부분들이다.



상상의 요구만으로도 지레 겁먹은 친구들이나 나 자신도 방어 본능에 따르고 쿨한 그런 관계보다는 당연히 더 깊고 따뜻한 관계를 원한다. 사실 적당한 거리 두기를 하고 살면서는 늘 허전하다. 적당한 거리라는 것은 상상의 위치이지 현실의 위치는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서로 알고 있다. 이런 우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세상사가 좀 많은가. (pp.21-22)




1996년, 나는 런던 앰네스티에서 연수를 받고 있었는데, 어느날 펴 본 신문 1면에 활짝 웃는 여성 네 명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려 있었다. "평화의 여성들, 무죄 선고 받다."라는 제목에, 관심을 확 잡아끄는 내용이었다. 그녀들은 그해 1월 영국의 방위 산업체인 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의 호크 전투기에 침입해 주요 조종 장치를 망치로 때려 부쉈다. 그 전투기가 인도네시아에 수출돼 당시 인도네시아의 식민지였던 동티모르의 민간인 살해에 이용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2002년에 비로소 독립국이 된 동티모르의 당시 인권 문제는 정말 심각했다. "나는 눈물 속에서 태어났고 눈물 속에서 자랐고 눈물 속에서 죽을 것입니다."가 당시 동티모르 인권 보고서의 제목이었다. 30년 가까운 식민 치하 속에서 제목 그대로 대량 학살 등 갖은 만행이 자행되고 있었다. 호크 전투기의 조종 장치를 부순 여성들은 조종석에 동티모르의 학살 희생자 사진을 붙이고 자신들이 한 일을 언론에 전화로 알렸다. 이들은 재판에서 동티모르의 민간인 대량 학살에 사용될 호크전투기를 무장 해제시킨 자신들의 행동은 유엔의 '집단살해방지협약'에 비추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또, 영국 정부가 그런 학살 행위를 지원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들이 온갖 평화적 노력을 다 기울였고, 그 뒤에야 전투기를 무장 해제하는 직접행동에 나서게 됐음을 증언했다. 그 결과 법원은 "더 큰 악을 방지했다."는 이유를 들어 다수결로 무죄를 선고했다. (pp.43-44)




 몇 해 전 한국의 나이지리아 대사관 앞에서는 당국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은 환경운동가 켄 사로-위와 Ken Saro-Wiwa의 구명을 위한 집회가 있었다. 초국적 기업 셀과 그 기업과 결탁한 군부의 석유 채취와 인권 탄압을 고발한 것이 켄의 죄명이었고, 전 세계적인 구명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켄의 사형은 집행됐다. (p.128)




자기 사유를 실천하는 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런 만남의 끈 가운데는 쌍용자동차 해고자, 가족과의 집단 상담으로 연대란 무엇인가를 보여 준 정신과 의사 정혜신 씨도 있다. 정혜신 씨와 고문의 경험을 나눴던 강용주 씨와 고문 피해자들은 쌍용자동차의 상처와 자기들의 상처가 서로 통하는 것이라며 고문 피해에 대한 국가배상금을 지원금으로 썬뜻 내놓았다. 그런 연대를 통해 싸용자동차 노동자들과 만나 세상에 자기 상처를 내보이고 함게 어루만지는 일이 생긴 것이다. 또, 그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평택에서부터 물집이 터져 가며 걸어서 부산에 있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만나러 갔다. 그리고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서울에 차려진 쌍용자동차 관련 희생자 합동 분향소를 지키러 올라왔다. (p.157)





나는 주인이니 주체니 하는 단어보다 '자기'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나 자신을 스스로 사랑스럽게 부르는 말로 느껴져서이다. 내가 없다면 세상도 없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없는 연대는 있을수 없다. 기껏해야 머릿수를 채우고 세를 과시하려는 동원일 것이다. 내가 고유한 자기를 느끼지 못하고, 자기를 초라하고 보잘것없다고 학대할 때 그렇지 않다고 야단 떠는 이들이 있기에 다시 웃게 된다. 나에 대한 모욕에 같이 싸워 주는 다른 자기들이 없으면 나를 지킬 자신이 없다. 그런 자기들이 만나서 서로의 낯을 세워 주는 것이 연대하는 개인주의일 것이다. 어쩌면 시인 정희승의 <숲>이라는 시가 그 어떤 기나긴 설명보다 이를 잘 드러내주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숲에 가 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pp.160-161)




사실 나는, 이 책의 저자처럼 그리고 이 책의 저자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처럼 인권을 위해 운동을 할 자신은 없다. 그들이 하는 일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은 분명 들지만, 내가 그 운동에 뛰어들 자신은 없다. 나는 아직은 그런 사람인가보다. 사람답지 못한 대우를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고 그들이 살만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는 그런 사람이기보다는, 내 자신 하나를 위해 더 관심을 기울이는 그런 사람. 척 보기에도 힘들어보이는 길을 갈 생각이 좀처럼 없는걸 보면, 어쩌면 내가 지나치게 가진 게 많은 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서투른 연민을 가진 자일지도 모르고, 동정은 하되 공감은 하지 못하는 자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며 눈물 몇 번 흘린다고 세상이 바뀌는 게 아닌데. 입맛이 쓰고 마음이 편치 못하지만 다시 슬쩍, 고개를 돌리게 된다. 다만, 다른 사람들과 내 주변과 이 세상을 보는 나의 시선과 태도가 조금쯤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아씨..머릿속이 좀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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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10-23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이 진정 '철'이 드는 순간은 내가 아닌 남을 자신을 봤던 객관적 시선으로 바라볼 때 라고 생각해요.

다락방 2013-10-24 16:55   좋아요 0 | URL
철이 들었다고 생각했다가도 계속해서 내가 얼마나 무지했는지 깨닫게 되곤 해요. 사람은 죽을때까지 배워야 할 게 엄청 많은 것 같아요. 완벽하게 철이 들 순 없을것 같아요.

감은빛 2013-10-23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able Street Anniversary'로 검색하면 영어 페이지가 몇 개 나오네요.

http://www.mirror.co.uk/news/uk-news/75th-anniversary-of-battle-of-cable-street-83081
http://www.demotix.com/news/855376/battle-cable-street-75th-anniversary#media-855343
http://www.qmul.ac.uk/media/news/items/56775.html

짧은 영어실력으로 살펴본 바를 간단히 옮기면 아래와 같습니다.

독일 나치의 영향으로 영국에서도 오스왈드 모슬리와 영국 파시스트 연합이 반 유대주의를 바탕으로 힘을 모으고 있었다.

1936년 10월 4일 모슬리는 7천명의 파시스트들과 런던의 이스트 엔드 거리를 가로질러 행진을 할 예정이었고, 4천명의 기마경관과 1만명의 경찰관이 이를 호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30만명 이상의 민중이 길을 막았고, 경찰은 길을 뚫으려고 애썼으나 쉽게 뚫지 못했다. 이때 경찰청장 필립 게임 경이 모슬리에게 돌아가던가 살육을 감수하던가 해야겠다고 말했다. 결국 파시스트들은 치욕적으로 돌아섰다.


저도 이 책을 읽고 모자라는 글 하나 썼던 기억이 나네요.
같은 책을 읽은 사람을 만나면 반가운 법이지만,
그게 다락방님이어서 더욱 반갑습니다.

감은빛 2013-10-23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들은 포석(보도블럭)과 낡은 침대(매트리스)로 바리케이트를 쌓고 의자 다리와 썩은 야채로 무장했다."
라는 기사 부제가 무척 인상적이네요.
다락방님 덕분에 흥미로운 사건을 하나 알게 되어 좋습니다.
(왜 저는 이 책 읽으면서 이 사건 혹은 이 그림에 관심을 두지 않았을까요?)

다락방 2013-10-24 16:58   좋아요 0 | URL
이 책을 읽고 감은빛님이 쓰신 글을 안그래도 읽었던 참입니다.

같은 책을 읽었다고 어떻게 같은 것을 기억하겠습니까. 서로 관심사가 다른데요. 저도 다른분들의 독서 후기를 읽을 때마다 오, 이 책에 이런 부분이 있었던가..하고 생소한걸요. 하하핫.

찾아서 옮겨주신 부분은 무척 흥미로운데 제가 영어가 안되는게 안타깝네요. 안그래도 검색하니 죄다 영어라 어머? 이러고 휭- 돌아서 나왔거든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