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최악의 출판불황, 책 안읽는 사회-경향신문 [05/01/05]
 
출판시장과 독서문화는 그 사회의 지적 인프라다. 출판산업이 무너지고 ‘책 읽는 문화’가 사라지는 것은 곧 그 사회의 정신적 황폐화를 의미한다. 출판 불황은 경제 불황에 기인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러나 경제 불황도 결국 정신적 활력 없이는 헤쳐나가기 어렵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3년 신간서적 발행이 1997년에 비해 58.6%나 급감했다고 한다. 특히 91.2%나 감소한 사회과학서적을 비롯해 인문학 분야가 큰 폭으로 감소한 반면, 만화나 실용서적은 도리어 발행부수가 늘었다고 한다. 우리 사회의 지적 수준을 단적으로 상징해주는 듯하다.

불황의 원인으로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책 읽을 여유가 어디 있느냐’는 이유가 첫번째로 꼽힌다. 하기야 경제가 어려워지면 문화적 소비를 줄이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끝없는 정쟁과 계층갈등, 만성적 실업 등 사회 전체의 분위기가 침체된 데다 디지털 문화의 확산이 삶의 여유와 독서욕구를 앗아가고 있다. 출판시장의 활력소가 돼야 할 공공도서관이 제 구실을 못하는 것도 불황을 구조화시키는 요인의 하나다.

문화가 힘, 문화가 경쟁력이라고 떠들지만 정작 그 근간인 출판·독서문화, 인문학 등은 빈사상태에 처한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태로는 우리의 미래라는 ‘지식경제’ 사회로 나아갈 수 없다. 어려울 때일수록 독서만한 투자가 없다. 책 읽기를 권장하는 기업은 희망이 있다. 성공한 리더들은 한결같이 부단한 독서 습관에서 동기를 얻었다고 말하지 않는가. 국민들의 왕성한 독서력에 힘입어 장기불황을 헤쳐나간 일본의 예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일이다.

정부는 구호로만 문화입국을 외칠 게 아니라 출판계에 대한 지원은 물론 도서관 활성화 등 인프라 구축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출판인들도 절체절명의 사명감을 갖고 분발해야 한다. ‘책 읽는 사회’에 우리의 미래가 걸려 있음을 모두가 직시해야 할 것이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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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기획'이 아니다! (기획회의, 2004.12.)
 

지난 12월 10일에 있었던 북에디터의 송년회 자리에서 어느 편집자로부터 "(편집자가 갖춰야 할) 기획 마인드와 교정·교열 마인드는 무엇이 어떻게 다르며 어느 쪽이 더 강조되어야 하는가"라는 요지의 질문을 받았다. 질문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나는 좀 뜨악해질 수밖에 없었다. 편집자에게는 그저 '편집자의 마인드'가 필요할 뿐, 백 걸음을 양보해서 출판물의 '기획'에 임하는 데 어떤 자세(마인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심지어 교정·교열에 그와는 다른 무슨 특별한 마인드가 필요하다는 것은 상상조차 해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은 언젠가 이 지면에 실린 "정답을 찾지 말고 의견을 구하라"라는 제목의 글에서 지적했던 바와 같이 교정·교열 작업에 대한 심각한 오해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기획'에 대해서도 상당한 오해가 잠재해 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일례로 출판 아이템에 대한 '아이디어 제시' 정도를 놓고 '기획'이라고 뻐기곤 하는 편집자를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분위기는 사실 출판 동네에서 그동안 출판 기획이 얼마나 주먹구구로 이루어져 왔는지를 생생하게 방증할 뿐이다. 모든 매체의 기획이 그러하지만, 출판물의 기획이란 저자에 의해 책이 씌어지는 순간부터 독자의 손에 들어가 읽히는 순간까지의 전 과정을 구상해 내는 일이다. 가령 마케팅에 대한 구체적인 관점이 확보되지 않은 기획을 기획이라 할 수 있겠는가. 지질부터 제본 형태에 이르기까지 제작의 방향이 포함되지 않았거나 디자인의 통일을 기하기 위한 컨셉이 제시되지 않았어도 마찬가지 반문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유독 책이라는 상품의 가장 중요한 전달 수단인 '문장'에 대한 구체적인 고려만이 이른바 '기획'에서 생략되어도 무방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일까. 아니, 문장 교열처럼 자질구레한(?) 일에는 신경쓰실 겨를이 없으시다는 자칭 '기획자'들께서 기획의 가장 핵심적인 과정의 하나라 할 수 있는 필자 선정을 하실 때는 무슨 기준으로 하신다는 것일까. 물론 '문장'만이 필자 선택의 유일한 관건은 아니겠지만, 필자의 문장을 살펴보지도 않고 집필을 의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두 번 말하면 잔소리지만 책을 기획하는 사람에게는 '문장'을 보는 자신만의 안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것은 '교열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인드'와 전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기획자가 디자인 컨셉을 제시한다고 해서 직접 디자인을 하지 않는 경우도 많듯이, 기획자가 직접 자신이 기획한 책의 문장을 만지지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기획자가 디자인을 모를수록 디자인 컨셉이 모호하게 뭉뚱그려져 하나마나한 원론 수준을 맴돌게 되고 결국 디자이너와의 효율적이 소통에 심각한 장애가 초래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듯이, 제 입으로 "문장 교열은 잘 모른다"고 부끄러움도 없이 떠드는 기획자가 제시하는 교열의 방향이 도대체 얼마나 '실제적인 내용'을 담지할 수 있을 것인가. 요컨대 '집행력'을 담보하지 않은 기획은 기획이 아니다.

이런 딱한 사정은 '교정·교열'에 대한 오해에도 어김없이 작용한다. 도대체 책 전체의 기획 방향을 염두에 두지 않고, 필자가 애써 작성해 온 원고를 단 한 글자라도 고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아마도 많은 편집자들이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좋게 보아야 시대착오이며, 심하게 말하면 무책임한 일이다. 우리는 지금, 필자가 원고 용지에 육필로 써내려간 원고에 편집자가 온갖 조판 지시를 첨부한 '원고'를 교정쇄와 대조하며 교정(校正)을 하던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만일 예전처럼 작업 지시서로서의 원고 용지가 존재하던 시대라면, 교정을 하는 사람이 책의 내용과 기획의 방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면 당연히 훨씬 더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겠지만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작업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교정을 하는 사람에게는 그저 한 글자의 잘못도 놓치지 않는 '꼼꼼함'이 다른 누구에게보다 더 필요할 뿐이라고 여겼음직하다.(그 시절에도 감히 필자의 '문장'을 교열하는 것은, 그 책의 '책임 편집자'나 할 수 있는 일이었지 단순히 '교정 업무'만을 맡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원고'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필자가 보내온 원고는 이미 워드프로세서로 깔끔하게 타이핑이 되어 있으며, 필자가 원고 작성상의 실수로 오타(誤打)를 냈다 하더라도 그것이 순수한 의미의 오타인지 필자가 고의로 낯설게 표현한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본래적 의미의 '원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이핑을 이용한 원고 작성의 수월함은 육필로 원고 용지에 써내려갈 때에 비해서 실수로 인한 오자 발생의 가능성을 엄청나게 증가시켰다. 이 딜레머는 단순하게 오·탈자를 확인하는 작업조차도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문장의 맥락과 흐름을 총체적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로 만들어 버렸다. 요컨대 이제 교정과 교열을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어렵사리 수긍을 한다 해도 또 한 가지의 결정적인 문제가 남아 있다. 책의 기획 방향과는 무관한 '문장 교열'의 절대적 기준이 따로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다. 그리고 그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것을 정확히 숙지하여 철저하게 실현시키는 것이 '교열하는 사람이 갖춰야 할 마인드'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런 식의 기준 따위는 존재한 적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으며, 존재해서도 안 된다. 편집자가 '교열'이라는 이름으로 필자의 원고에 '훼손'을 감행할 수 있는 유일한 목적은 오로지 그 책의 상뭄으로서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것이며, 그것은 애당초 원고의 내적 필연성으로부터 유래한 자기 완결성에 근거한다. 따라서 이때 문장 교열의 유일한 준거는, 그 책의 핵심 독자에게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효과적으로 전달되고 있는가일 뿐, 다른 준거가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핵심 독자'가 구체적으로 누구인가를 상정하지 않고 또 저자가 그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어떤 의미에서는 '저자보다도 더 잘') 이해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저자에게 귀속되는 저작물에 어떻게 함부로 '교열'을 가할 수 있을 것인가. 요컨대 이러한 성격의 준거를 확보하는 것을 '교열자의 마인드'라고 할 때, 그것은 '기획자의 마인드'와 전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문장을 다듬는 과정도 또는 지면을 디자인하는 과정도 모두 책의 '기획'을 구체적으로 실현해 내는 과정의 일부이다. 기획의 컨셉과 방향을 공유하지 않고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닌데도, 마치 '기획'은 저 높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대단히 창조적인 일이기라도 한 양 제대로 된 소통과 공유의 과정을 생략한 채 "시키는 일이나 열심히 하라"는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출판사가 아직도 많다. 나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그 알량한 '기획'의 정체를 알다가도 모르겠거니와 그렇게 해 봤자 '시키는 일'(?)인들 제대로 될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더 우스꽝스러운 일은 그런 엉터리 '기획'을 밀어붙이곤 하는 자칭 '기획자'들일수록 디자이너나 편집자들의 능력과 자질이 모자라다는 개탄을 입에 달고 다니며 자신의 무능과 무책임을 전가하기에 바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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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책 읽는 국가라야 부흥한다 - 국민일보 [2005. 1. 5]

2003년 한해 동안 출간된 신간 서적(만화 제외)은 7800여만 권으로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의 1억8800만권보다 58.6%나 급감했다는 보도다. 사회 전반이 불황으로 허덕이고 있지만 지식기반시대로 일컬어지는 2000년대의 출판현황이 1990년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면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니다.

이중 사회과학 서적은 10분의 1도 안되는 물량을 기록했고 철학과 종교분야 신간도 각각 54.8%와 33%의 감소율을 보여 사회 전체적으로 사회과학과 철학의 빈곤을 드러냈다. 그런가하면 국내 최대 서점인 교보문고 광화문점은 지난해의 매출이 1981년 문을 연 이래 23년 만에 처음으로 감소했다고 밝혔다. 외환위기 때도 없었던 현상이다. 판매가 늘어난 부문은 경제 경영서나 외국어 학습서 등 실용서일 뿐 인문서와 예술서 등은 작게는 2%에서 많게는 9% 가까이 판매 부수가 감소했다.

한 마디로 말해 책 읽는 힘은 국력이다. 미국 출판통계사 보커의 발표에 따르면 2003년 미국의 도서출판은 19% 증가했다. 전기,역사,종교서적과 청소년도서의 성장이 돋보인다. 중국도 2003년에 12%의 증가율을 보였다. 중국은 사상,항공,우주과학 분야에서 큰 성장을 보였다. 읽는 힘이 왕성한 나라는 경제적 활력이 넘치고 읽는 힘이 쇠퇴하는 나라는 불황에 허덕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이런 독서쇠퇴 현상을 두고만 봐서는 안된다. 빠른 시일 내에 출판 및 인쇄진흥법을 개정해 출판인쇄산업이 국가 중추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지원시책을 추진해야 한다. 올해는 타이베이 도서전(2월)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10월)에 한국이 주빈국으로 초청돼 우리나라 출판산업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다. ‘독서 새물결 운동’ 등 다양한 독서진흥 운동과 해외진출 지원사업 등을 통해 내수 진작과 해외 진출에 국가적 힘을 기울여야 한다.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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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책 읽는 사회라야 희망 있다-한국일보 [05/01/04]
 
우수한 한글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독서량이 줄고 있어 걱정이다. 도서 출판량이 준 것은 장기불황 탓도 크다고 할지라도, 독서량 자체가 줄고 있는 데 심각성이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3년 출간된 신간서적은 7,800만 권으로 1997년보다 59%나 감소했다. 또한 한국일보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지난 해 연평균 독서량은 6.6권에 머물렀다. 지금까지 평균 독서량은 2002년에 10.0권, 1999년 9.3권, 96년 9.1권이었다.

독서 취향도 경박해지고 있다. 지식과 교양을 넓히기 위해 인내심을 지니고 읽던 인문사회과학, 철학, 종교 등의 출판량과 독서량이 동시에 줄었다. 대신 읽기 편한 문학서나 경제경영ㆍ건강ㆍ요리 등 실용서로 쏠리고 있다.

진지한 자기성찰과 이성적 사유를 멀리하고, 당장의 즐거움과 쓸모를 추구하는 문화풍토가 가볍고 위태로워 보인다. 개인이든 민족이든, 출판과 독서에서 경중(輕重)이 균형을 이룰 때 건전한 사회발전을 기약할 수 있다.

우리 교육ㆍ문화환경을 총체적으로 재점검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사회가 강조했던 고등학교 때까지의 독서교육이 지나치게 문학서 위주로 진행되는 점도 하나의 원인으로 지적하고 싶다. 인문사회과학서나 철학서 등과 균형을 맞추어, 성인이 된 후에도 폭 넓은 독서를 하도록 바탕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독서 취향이 바뀌는 바탕에는 기본적으로 책문화에서 인터넷 등 전자문화로의 변화가 깔려 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기 시작한 ‘TV 안 보기’ 운동도 의미가 작지 않지만, 우리의 독서환경을 보다 획기적으로 변화 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이를테면 일본의 6분의 1 규모에 불과한 도서관(2003년, 국립 1개, 공립 462개)을 대폭 선진화 시키고 확대하는 일 등을 서둘러야 한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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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을 빛낼 인물]-김우창 교수 ‘문학 韓流’도 세계로  [05/01/04]
 

김우창(68) 고려대 명예교수는 올해 국내외에서 열리는 대형 국제적 문화행사를 주관하는 조직위원회 2개의 위원장을 맡았다. 5월 서울에서 열리는 서울국제문학포럼과 10월 독일에서 열리는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주빈국 행사가 그가 기획하고 주관해야 할 일들이다.

문화계에서는 이 두 행사를 계기로 우리 문학과 출판의 우수성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만큼 그의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다. 김 교수가 행사 2개의 조직위원장을 함께 맡게 된 것은 미국과 유럽 등의 사조에 정통하고, 우리 문화가 어디쯤에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정확히 진단해온 국제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문화계의 일반적인 평이다.

김 위원장은 “두 행사는 한국이라는 ‘브랜드’를 세계 지식인사회에 널리 알릴 수 있는 중요한 기회”라면서 “하지만 ‘한국을 알아 달라’고 떼써서 위엄을 잃기보다, 한국 역시 세계에 관심이 많으며 다른 나라들과 어울려 얘기할 게 많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우선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해 물어 보았다.

“3월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열리는 학술세미나를 시작으로 주빈국 조직위가 현지 활동에 들어갑니다. ‘전쟁의 유산’ ‘사회의 재건’ 같은 주제들이 잡혀 있는데, 다소 심각한 내용들이어서 유럽 사람들이 얼마나 호응할 지 궁금해요. 자본주의와 함께 커온 유럽 현대문화는 개인주의적 면이 강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우리 문화는 유럽이 잃어버린 ‘진지한 것’을 보여줄 수 있을 겁니다.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서유럽에서 관심을 끈 것은 그들의 가벼움을 건드렸기 때문이죠. 우리는 식민지배와 전란을 딛고 세계에서 유례 없는 속도로 근대국가를 건설한 힘의 근원이 바로 문화라는 것을 알릴 수 있을 거예요.”

-서울국제문학포럼을 통해서는 어떤 것을 얻을 수 있나요.

“이 포럼은 세계 작가들에게 ‘평화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플랫폼’이 되도록 할 예정입니다. 각국의 작가와 학자들은 5월에 세계 평화와 작가의 할 일에 대한 ‘서울 선언’ 같은 것을 채택하려고 벌써부터 얘기를 나누고 있어요.”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은 한류(韓流)를 유럽으로 확산시키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텐데요.

“한류는 우리와 외국인의 정서를 끈끈하게 연결시키는 측면이 있어요. 한국 현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독일의 ‘앙상블 모데르노’가 연주하는 공연을 독일에서 개최하려고 합니다. 한국의 대중음악 페스티벌도 독일에서 추진 중이지요. 또한 빌레펠트대학의 외르크 드래프스 교수를 비롯해 독일의 언론인 작가 평론가들로 이뤄진 ‘편집위원회’를 이미 만들었어요. 이들은 도서전이 끝난 뒤에도 한국의 논문이나 작품들을 독일에 계속 ‘중개(仲介)’하는 역할을 할 겁니다.”

-1990년도 이후 일본 포르투갈 헝가리가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주빈국을 맡은 후 노벨문학상을 받았는데, 우리의 경우도 그렇게 될 수 있는 건가요.

“노벨문학상은 그걸 받겠다고 운동해서 되는 건 아닙니다. 자기중심이 있으면서도, 보편성이 있는 작가들이 우리 문학계에 많을수록 그 상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우리 문제를 생각하면서도, 다른 나라 사람의 눈으로 봐서 공감할 수 있는 문학과 문화를 만들어나갈 때 우리는 더 크게 인정받을 거예요.”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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