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을 팽개친…문학은 끝장났다” [04/11/26]
 
일본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
‘근대문학의 종말’선언

‘문학이 죽었다’는 말은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오래 전에 확인된 사실이라는 뜻이 아니다. 문학의 의연한 생존을 확신하는 이들에게 그런 선언은 양치기 소년의 되풀이되는 거짓말과 다를 바 없다는 뜻이다. 심지어는 문학의 죽음에 관한 풍문이야말로 거꾸로 문학의 생존 근거이자 양식이라는 주장조차 나오는 판이다.

그렇다면 문학은 살아 있는가. 여기 그렇지 않다고 단호하게 선언하는 글이 있다. <문학동네> 겨울호에 실린 일본의 문학평론가 겸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63)의 <근대문학의 종말>이 그것이다. 이 글은 지난해 10월 일본에서 행한 강연을 풀어 쓴 것이다.

가라타니의 논리는 ‘문학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영구혁명중에 있는 사회의 주체성(주관성)’이라는 사르트르의 정의에서 출발한다. 쉽게 말하자면 정치가 감당하지 못하는 혁명의 핵심을 문학이 담당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해체적 비평과 포스트모던 문학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근대문학’은 이런 혁명적 역할을 담당했지만, 그것은 일본의 경우에 ‘1980년대에 끝났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미국은 더 일러서 1950년대로 시점이 올라간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는?

가라타니 고진은 지난 2000년 서울에서 열린 한 문학행사에 참석해 ‘일본에서 문학은 죽었다’고 발언해 충격을 준 바 있다. 그는 문학평론가인 자신이 평론을 그만둔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런 발언을 했던 것인데, 그러면서도 한국에서만은 문학의 역할이 점점 강해질 것이라고 전망해 대조를 보였다. 그러나 이번 글에서 그는 한국에서도, 미국이나 일본과 마찬가지로, 문학은 끝장이 났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문학이 사소해졌다는 것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가라타니는 문학은 자신에게 부여되는 지적·도덕적 요구를 감당할 수 있을 때만 문학으로서 존립할 이유가 있다고 본다. “그러한 과제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워진다면, 문학은 단지 오락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어떤 ‘문학’은 오락이 될 수도 있다. 그는 나아가 일본 만화처럼 세계적인 상품으로 팔리는 문학을 권장하기조차 한다. 다만, 거기에다 본디 의미의 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는 말자는 것이다.

본디 의미의 문학에 충실한 사례로서 그는 역설적이게도 ‘문학을 그만둔’ 두 사람의 사례를 든다. 부커상 수상작인 <작은 것들의 신>의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 그리고 <녹색평론> 발행인인 ‘전직’ 평론가 김종철씨가 그들이다. “위기의 시대에 한가롭게 소설 따위를 쓸 수는 없다”는 로이, 그리고 “어느 사이엔가 문학이 지극히 협소한 것만 다루게 되었”기 때문에 문학을 그만두었다는 김종철씨야말로 “‘문학’을 정통적으로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반대로, “순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밖에는 읽히지 못할 통속적인 작품을 쓰고 있는 작가”나 “그 존재가 문학의 죽음을 역력하게 증명할 뿐인 패거리”는 문학의 생존을 말할 자격이 없다고 그는 일갈한다.

그는 “역사적 이념도 지적·도덕적인 내용도 없이 공허한 형식적 게임에 목숨을 거는” ‘일본적 스노비즘’이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면서 “문학을 떠나서 생각하라”고 결론 삼아 제안한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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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포럼]앙드레 쉬프랭의 충고 [2004. 11. 26]

미국 출판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지식인 사회의 존경받는 원로 앙드레 쉬프랭(69)이 지난주 한국을 다녀갔다. 그는 ‘역사란 무엇인가’로 잘 알려진 E. H. 카, 세계적 언어학자이며 비판적 지식인 놈 촘스키, 노벨상을 받은 스웨덴 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 등 수많은 저자들을 발굴해 무명의 지식인에서 세계적 유명 인사로 키운 장본인이다.

프랑스 출신 판테온사 대표 쉬프랭이 서울에 온 건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회사 대표인 페터 바이트하스, 출판유통 변호사 베레나 지히, 출판인 프랑크 투르만(KNV 사장), 영국의 피터 킬본, 브라이언 그린, 일본의 마에다 간지 등 거물 출판인들과 함께 한국 출판유통진흥원이 주최한 ‘한국출판포럼 2004’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세계화에 따른 출판계의 득실과 인류 미래의 향방에 관한 이 포럼은 양질의 책보다는 팔리는 책만 내고 있는 세계 출판계가 인수·합병을 거듭하면서 연예·오락·영상물과 연계된 다국적 복합출판기업 중심으로 재편되는 추세와 독립계 서점들의 급감, 책방 네트워크의 소멸, 책 안 읽는 사회 등 역경 속에서 출판유통의 활로 등에 대해 이틀 동안 스터디했다.

본격적인 토론은 인사동 뒷골목에 마련된 주최측과 외국 초청인사들의 저녁 식탁에서 더 활발하게 이어졌다. 쉬프랭은 미국출판 50년의 추이를 지켜본 세계 지성계의 리더답게, 세계화로 인한 영미 출판계의 위기와 미국 내 미디어 환경의 변화가 세계 다른 나라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하고 있었다.

“내가 최초로 낸 책이 카프카의 첫 책이었어요. 처음 600권을 찍고, 다시 800권을 찍었죠. 요즘 같으면 불가능한 일이죠. 대형 출판사들은 수익성 계산서를 미리 뽑아보고 등급이 낮은 책은 아예 중소업체로 미루거나 기획을 폐기하니 문화다양성 측면에서도 가치 있는 책들이 죽어버리죠. 학술서적을 내는 대학출판사도 마찬가지예요. 예전엔 컬럼비아대 출판부에서 유일하게 한국 책을 냈었지만 이젠 안 해요. 옥스퍼드대 출판부도 출판환경이 변했다며 현대시 출판을 중단했고, 학술적으로 중요한 ‘오푸스’와 ‘모던 마스터스’ 시리즈, 가치 있는 계열출판사 클라렌든프레스도 아예 없앴죠.”

책이 안 팔리니 팔리는 책 발굴에 혈안이 되고, 더 많은 종류의 책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양이 늘었다고 내용의 다양성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전파매체와 인터넷에 빼앗긴 독자들은 엄청난 쓰레기 정보 속에서 헤엄치고 있다. 강대국 위주 정보의 오버플로(overflow) 현상이 심해질수록 그 정보의 질을 변별하는 판단력과 새로운 창의력을 길러줄 독서·출판의 필요성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그러나 실제론 책이 더 많이 출간될수록 더욱 더 서로를 열심히 베끼고 있을 뿐, 적지만 가치 있는 책들의 출간은 점점사라지고 있다는 게 쉬프랭의 분석이다. 인류의 미래를 책임질 열린 마음과 비판적 사고력의 원천인 인문학적 교양의 부재는 독서 부족 때문이다. 나 역시 한국의 현실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장 큰 문제는 복합미디어의 등장과 ‘대중 취향에 맞추는 눈치보기’가 세계를 지배하게 됐다는 점이다. 쉬프랭은 이라크전쟁 발발 후 2년간 미국의 65개 방송국이 모두 한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제대로 된 비판서적이 한 권도 못 나온 점을 예로 들었다. 모두 미국인 75%가 “이라크 내 무기사찰은 옳은 일”이라고 응답한 여론조사 결과가 나온 뒤의 일이다. 쉬프랭은 촘스키의 비판서를 7000부 찍었지만 신문들이 실어 주지도 않았다고 했다. 지적인 작은 출판사와 의미 있는 이견(異見)들이 실종된 이후의 세계엔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문학 역사 철학 신화의 복원을 꿈꾸며 가시밭길을 가고 있는 한국의 출판인들을 위해 쉬프랭은 대기업 위주의 출판사 인수·합병 방지와 정부의 직접 지원, 인터넷을 통한 저자들의 다양한 출판 콘텐츠 전달과 소량 고급 출판의 활성화를 제안했다. 모두 국가가 출판의 중요성을 인식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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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인간의 일기통한 자아찾기  [04/11/24]
 
[책벌레의 책돋보기-말테의 수기]고독한 인간의 일기통한 자아찾기

1904년 로마에서 쓰기 시작하여 1909년 파리에서 완성시키고 그 이듬해 라이프찌히에서 출간한 ‘말테의 수기’(1910)는 시인 릴케가 남긴 단한권의 소설이다. 그러나 릴케의 ‘말테’는 전통적인 소설의 주인공에 비해 너무나 낯선 모습으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이 ‘소설’의 첫부분은 여늬 일기와 같이 시작한다. ‘9월11일, 투리에 거리,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여기에 온다는데, 내보기에는 오히려 여기서 죽어 가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소설의 다음과 같은 결말은 처음 시작과는 논리적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그가 누구인지 어느 누구도 몰랐다. 그를 사랑하기는 무척 어려웠고, 단지 한 존재만이 사랑할수 있다고 그는 느꼈다. 그러나 그 존재는 아직 그렇게 하려들지 않았다.’ 소설의 결말에서는 주인공 말테의 일기속의 ‘나’는 ‘그’로 모두 대체되었다. 자아와 초자아, 의식과 무의식, 개체와 사회사이의 변증법이라는 주제의식은 릴케만의 전유물은 아니나, 전작품을 관통하는 전체 줄거리 없이 71개의 단락으로 이뤄진 ‘말테의 수기’는 호프만스탈에 의해 주도되고 하임, 무질, 카프카를 거쳐 되블린으로 이어지는 소위 산문혁명기의 정점을 이루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주인공 말테에 대해서 독자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파리에 온 젊은 덴마크 태생의 시인이며, 나이는 28세다. 말테는 영락한 귀족가문 태생이지만, 이제는 안주할곳 없이 이곳 저곳으로 방랑하는 사람이다. 그는 낯선 대도시에서 아는 사람도 없고, 물질적 기반도 없이 그저 홀로 내던져져 있다. 작품의 전반부에는 릴케의 파리체험으로 이뤄졌는데, 그가 체험하는 파리는 병원과 무료 숙박소, 질병과 죽음, 가난과 비참으로 가득찬 도시다.

삶과 죽음의 익명성, 자아의 상실과 소외 등의 표현을 통해서 말테의 실존적 불안이 투영되어 나타난다. 다음 단계에서는 유년기 및 청년기에 대한 회상이 이뤄지는데, 현실체험을 결정짓는 것과 동일한 불안과 정체성의 위험들이 이미 말테의 유년기 체험에 내재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소설의 후반부에서는 개인적 체험 공간을 넘어서, 독서체험에 근거한 서구의 역사와 문학속의 인물들에 대한 에피소드를 나름대로 해석하면서 자신의 현재적 삶의 문제의식과 연관시킨다.

‘말테의 수기’는 통일성을 지닌 서술형식에서 벗어나 있으며, 인과적인 줄거리의 연관성이나 완결성도 없고, 이야기의 시작과 끝도 없는 셈이다. 단지 한 고독한 인간이 오로지 자기자신과 일기쓰기를 통해서 대화를 나누고, 자신의 실존 및 세계속의 현존의 의미를 찾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따라서 작품속의 모든 사건은 말테의 내면의 사건이며, 모든 내용은 말테 자신의 내면의 기록이다. 외부 사건은 인과적이 아니며, 외부현실은 말테의 내면으로 파고 들어온다. 그리고 이 모든 근저에 놓여 있는 것은 말테의 자아탐구와 인간의 존재방식에 대한 성찰이다.


(김영룡 문학평론가)=파이낸셜뉴스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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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출판가는 ‘삼국지 전쟁’  [04/11/24]
 
거침없는 작가 장정일(42)이 10권짜리 ‘삼국지’(김영사·각권 8900원)를 냈다. 이에따라 출판가에 ‘삼국지 열풍’이 거세질 조짐이다.

●숨겨진 인물복원 ‘우리식 판본’

5년여의 산통 끝에 나온 장정일 버전의 ‘삼국지’는 나름의 차별점을 찍고 있다. 기존의 ‘삼국지’들이 ‘나관중본’ ‘모종강본’ 등을 재해석한 번역판본이었다면 이번엔 영웅 중심에서 벗어나 숨겨진 인물들을 복원시켜 소설에 가깝게 이야기를 재구성했다는 대목에서다.“춘추사관, 춘추필법, 한족 중심의 중화주의에서 벗어난 ‘우리 판본’”이라고 출판사측은 강조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출판가 안팎의 시각이 환영일색만은 아니다.“돈벌이 기획출판”이라고 대놓고 비판의 화살을 꽂는 목소리도 있다. 한 출판사 대표는 “유명 작가 몇몇의 삼국지가 국내 양대 메이저 출판사를 먹여살리다시피 하는 현실 아니냐?”며 꼬집었다.“기획출판에 순발력 있기로 소문난 김영사로서도 그런 계산이 없지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도 덧붙였다.

실제로 국내 서점가를 평정한 대표 삼국지는 이문열의 ‘삼국지’(민음사·전10권)와 황석영의 ‘삼국지’(창비·전10권).1988년 출간된 이문열의 것은 지금까지 무려 1500만부를 팔아치웠다. 지난해 6월 나온 황석영의 것도 현재 100만부 판매실적을 올린 상태. 민음사 정대용 영업부장은 “IMF사태 여파로 95년 이후 판매량이 떨어지던 것이 지난해는 100만부까지 올라갔고, 올해는 60만부 판매가 가능할 것 같다.”면서 “지난해 황석영 삼국지의 가세로 오히려 시너지 효과를 봤다.”고 말했다.

●“돈벌이用 기획출판” 비난 목소리도

삼국지 출판시장 규모는 지난해의 경우 약 200만부. 유행에 민감한 여타 출판물들과는 달리 삼국지 시장은 끊임없이 신규독자들을 포섭해내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박종화 김구용 김홍신 이지함 조성기 등 ‘버전이 다른’ 삼국지들이 그야말로 백화제방(百花齊放)이다.

시장이 혼전양상을 띠다 보니 이래저래 괴담성 뒷말도 무성하다.“어떤 책은 서문을 쓴 이가 진짜 평역자이고, 그 작가는 이름만 빌려줬다더라.”는 식의 허탈한(?) 소문까지 나돌 정도다.

국내 서점가의 ‘삼국지’ 유형은 크게 둘로 나뉘어진다.‘나관중본’‘모종강본’을 원전삼아 번역에 충실한 ‘정역’, 필요한 부분을 변형·재구성한 ‘평역’이 그것. 김구용·조성기 버전은 전자에, 이문열·황석영 버전은 후자에 들어갈 만하다. 이들 책을 요리조리 뜯어 오류를 지적하거나 설명을 붙인 해설서도 한 흐름을 이룬다.

●우리시대 대표판본 어디에

그러나 독자들의 삼국지 감상 취향은 몇몇 인기작가들의 작품 쪽으로 지나치게 편향돼 있는 게 현실이다. 삼국지를 수십년 연구했기로 유명한 김구용의 정역 삼국지를 펴낸 솔출판사 관계자는 “작가의 독특한 세계관과 색깔을 담아낼 수 있다면 삼국지는 얼마든지 다시 쓰여져도 좋을 것”이라면서 “그러나 지금까지의 사례로 보면 삼국지가 오락적 책읽기의 한 텍스트로 활용된 경향이 짙다.”고 주장했다. 지난 2000년 솔출판사에서 3차 개정판으로 나온 김구용의 삼국지는 한문의 고졸한 언어감각을 충실히 살린 책으로 꼽힌다. 현재는 인터넷 무료 다운으로 e북으로 볼 수 있게 해 사실상 시장판매는 포기한 상태다.

하지만 불황으로 맥빠진 출판가에 어떤 계기로든 운동이 일어난다는 건 반가운 일이다. 개성있는 세계관을 담아 작가의 이름값을 해주는, 명실공히 ‘우리시대 판본’으로 남을 삼국지를 또 기다려볼 일이다.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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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를 다시 읽는 밤 [04/11/23]
 
[시론] 체 게바라를 다시 읽는 밤

지난 12일 오후 3시. 카이로에서 30여만명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야세르’를 연호하며 투쟁의 구호를 외치는 시간, 나는 신촌의 한 영화관에서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보고 있었다. 아니 체 게바라와 아라파트와 빈 라덴을 떠올리고 있었다.

영화 상영을 기다리다 친구에게 문자 메시지를 날렸다.‘체 게바라, 아라파트, 그리고 빈 라덴의 공통점은?’ 응답 메시지가 즉시 달려왔다.‘잘 모르는 자들임! 약한 자들을 위해 노력하신 분들임!’ 내게도 그렇지만 특히 그 친구에게 체 게바라는 모택동, 호치민, 파농 등의 이름 한가운데서도 가슴 설레는 가장 빛나는 오라(aura)를 내뿜었던 인물이다.

꿈과 이상의 무한지점을 향해 가열차게 나아갔던 이름, 체 게바라. 그는 이제 우리에게 향수 어린 혁명가이자 몽상가이자 모험가이자 이상주의자이자 낭만주의자의 이름이기도 하다. 끝내 이루어질 수 없는, 결국은 미완으로 끝날 그 무엇을 향해 한 시대의 억압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했던, 그리하여 시인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했던 그는, 자신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메시아를 기대한 마지막 세대’가 아니었을까?

21세기에 들어서도 지구촌 도처에서 전쟁과 테러와 납치와 암살과 음모와 억압과 착취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더욱 강력해지고 교묘해지고 있다. 명분 없는 이라크 전에서는 무수한 병사와 민간인들이 죽어나가고 있으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는 끊임없는 보복전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폭력에 총과 혁명으로 대항했던 게바라와 달리 비폭력으로 대항했던 간디는 ‘일곱 가지 사회적 악’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 바 있다.

원칙이 없는 정치, 노동이 없는 부, 의식이 없는 쾌락, 인간이 없는 지식, 도덕관념이 없는 거래, 인류가 없는 과학, 희생이 없는 신앙. 주변을 둘러 보라.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 아닌가!

우리는 바오바브나무와 같은 이 폭력과 악의 뿌리는커녕, 잎 혹은 가지들이라도 제대로 눈치채고 있는가. 긴 안목으로 우리 사회의 흐름을 앞서 볼 줄 아는 진정한 혁명가, 아니 지식인들조차 설 땅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은 아닌지….

진정한 혁명 혹은 지식은 지금 체제순응주의로 개종중이다. 실용과 정보와 취미에 묻혀 상품으로 소비되고 향수로 추억될 뿐이다. 영화 밖에서 게바라는 내게 묻고 있었다. 우리가, 내가, 정말 한때 혁명적 삶을 꿈꾸기는 했던 것일까. 우리는, 나는 너무 쉽게 우리의 적(敵)을 닮아버렸다.

게바라는 이렇게 말했었다. 세계 어디서든 불의가 저질러지면 그것에 깊이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고. 이것이야말로 혁명가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자질이고, 완전한 혁명에 도달하는 유일하고도 가장 확실한 길은 끊임없이 내부의 혁명에 충실하는 것이라고.

정직하게 분노할 줄 아는 한 우리는 여전히 혁명을 꿈꿀 수 있다. 정직하게 분노할 줄 알아야 나는 비로소 시인일 것이다. 혁명을 원치 않는 사회일수록, 시가 위기인 사회일수록 우리가 혁명과 시를 논해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의 적은 늘 우리의 내부에 뿌리깊이 자리잡고 있고, 나는 나에게서부터 분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게바라를 다시 읽는 가을밤이 아련하고 소슬하다. 영화 속 젊은 게바라는 천식으로 쉴 새 없이 기침을 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김수영의 시 ‘눈’의 한 구절을 떠올리곤 했다.“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눈을 바라보며/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마음껏 뱉자.”


(정끝별 명지대 국문과 교수· 시인)=서울신문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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