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쏘기의 선
오이겐 헤리겔 지음, 정창호 옮김 / 삼우반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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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은 "활쏘기의 선"이다. 즉 활과 선의 관계를 이 책은 쫓아가고 있다. 독일인 저자 오이겐 헤리겔이 일본에 와서 선을 배우기 위해 활쏘기를 배우는 과정에서 겪는 체험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이 이야기가 그가 독일로 돌아가 유럽에 동양의 선을 소개하는 안내서로 역할하게 된다. 활쏘기의 선이 유럽사회에 끼친 충격은 오랫동안 유럽사회를 뒤흔들게 된다.





활쏘기의 기예를 배우는 것은 "기예없는 기예"를 배우는 것이다. 그것은 선에서 "깨달음없는 깨달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활쏘기의 기술을 연마하는 것과는 다르다. 따라서 분절된 동작과 연습 속에서 자신을 뛰어넘는 '그 무엇'을 발견할 수 없다면 그 분절된 행동과 연마는 단순히 반복에 지나지 않게 된다.





저자가 활쏘기를 배워가면서 바뀌는 마음의 변화가 이러한 것을 잘 설명해준다. "내적으로 또는 궁사 자신에게 올바른 발사는 마치 이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듯이 느껴진다. 올바른 발사 이후에 궁사는 모든 올바른 행위와 더 중요하게는 모든 올바른 무위를 행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고 느낀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는 크나큰 즐거움을 준다."그 경험을 하지 않는다면 동양적 선을 배우려는 그가 이렇듯 5년이 넘게 활쏘기를 계속 배울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변화는 궁극의 자리, 즉 깨달음없는 깨달음까지 이어져야만 한다. 오직 갈 뿐이다. 그렇게 해서 활쏘기가 완성되는 지점에 달하면 "토끼의 뿔과 거북이의 머리카락으로 쏠 수 있는 사람, 즉 활과 화살없이 명중시킬 수 있는 사람"이 비로소 가장 진정한 의미에서의 명인이 되는 것이다.





스승 아와 겐조가 어둠속의 사선에서 두개의 화살을 정확히 과녁에 명중시킬 때 비로소 그는 이렇게 외친다. "이 두 개의 화살로 선생은 분명히 나도 명중시켰다. 밤새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 나는 더 이상 내 화살에 대해서, 그것이 어디로 가는지 걱정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선에서 진정한 선은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는 마음의 자리에서 바로 알아차려야 한다. 결국 이러한 현실적 확인은 깨달은 자의 눈에는 필요없는 사족에 불과할 뿐이다.





이렇게 기예없는 기예는 선의 궁극적인 깨달음을 지향하고 있으며, 이 깨달음에서는 그것이 어느 기예로 나아가든지 대가를 이루게끔 되어 있다. 검도든, 유도든, 시든, 화든, 꽃꽃이든.....





어떤 기술이 예술이 되고, 또 그 예술이 종교적으로 승화되기 위해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것이 마음 속의 비밀의 문이 되고, 그 문을 통과해서 나온 세상엔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어느 것이나, 어느 행동이나 선이 아닌 것이 없다. 삶의 어떤 영역이 한 단계 승화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 속에 참된 삶의 의미와 아름다움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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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4-12-09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예없는 기예, 깨달음 없는 깨달음, 분절된 동작과 연습 속에서 자신을 뛰어넘는 '그 무엇'을 발견할 수 없다면 그 분절된 행동과 연마는 단순히 반복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것...

도라 말하면 도가 아닌 경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그 경지...어렵습니다~~



근데 님도...비알테그의 압박에 놓여 계시나 봅니다.... 저도 그런데요... 한 줄 떼어 줬을 뿐인데.... 대여섯 줄씩 떨어져보이는 저... 여백들...!!!


달팽이 2004-12-09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래서였군요...님이 후에 좀 가르쳐주세요...벗어나는 방법을...

남들의 글이면 그 여백 속에 또 다른 무엇인가를 찾아보겠습니다만....

나의 글이라 이미 글과 글 사이 행간의 여백을 충분히 알고 있어서....ㅎㅎㅎ
 
용서
텐진 갸초(달라이 라마).빅터 챈 지음, 류시화 옮김 / 오래된미래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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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그 나름대로의 기운과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감동적인 순간이 다가오는 것을 이미 마음으로 먼저 알게 되었다. 마음의 떨림이 더욱 빨라지고 있으면 어김없이 내 마음을 깊은 곳으로 데려다주는 달라이라마의 말씀이 뚜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수행자로서 또는 불교수도승으로서 열반이나 깨달음을 제외하고 이 생에서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하는 질문에 달라이라마는 "행복"이라고 대답했다. 그 명쾌하고 단순한 대답 속에는 모든 인간 존재가 목적하는 것이 담겨져 있다. 누구나가 행복을 원한다. 하지만 그러한 행복은 외부세상에서 찾게 된다면 생로병사의 인간사에서 결코 찾아질 수 없다. 따라서 달라이라마가 말씀한 행복은 마음의 행복이다. 그리고 그 마음의 행복은 세상의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그것을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비밀이다.

달라이라마 스스로 행하고 있듯이, 자신의 나라를 침략하고 많은 불교사원과 문화재를 파괴하고 수많은 티베트인을 죽이고 탄압했던 중국에 대해 그가 보여주는 "용서"는 인간 존재의 행복이라는 목적을 위해 상호의존하는 우리 존재의 깊은 본질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분이 실천해내고 있는 용서라는 행위는 상대방의 마음을 깊이 성찰하고 그 상대방의 영적인 성장을 위한 것이고 무엇보다도 용서하는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되찾고 삶의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삶에 대한 보다 우주적인 통찰과 인간 존재에 대한 보다 깊은 통찰이 그로 하여금 중국의 지도자들과 힘들게 성사시킨 회담을 무산시켜버리게 되는 줄 알면서도 천안문 사태에 대해 단호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중국에 대한 깊은 배려를 담은 담화문을 발표할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

세상 그 누구를 만나더라도, 그 사람이 아무리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이라할지라도 그 사람을 대하는 시간만큼은 상대방의 마음을 충분히 배려하는 그의 모습 속에서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감동을 느끼게 된다. 아마 우리 인간존재로서의 영적 성장이 이루어낼 수 있는 최대의 위치에 그는 고고하게 서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가 전지구에 드리우는 자비의 기운이 너무나도 깊은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가 중국인인 저자와 오랫동안 사적인 친숙함을 유지하며 티베트의 자비와 용서의 정신을 전달하고자 했던 이유가 책의 마지막 부분에 서술되어 있었다. 하지만 저자가 어떠한 인연으로 이렇게 달라이라마와 사적으로 깊은 친분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이 끝내 없어서 책을 덮은 후에도 밀려드는 궁금함을 어찌할 수 없다. 아무에게도 잘 이야기하지 않는 영적 수행의 내밀한 체험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사이라면 정말 보통 인연은 아닐 것인데, 또한 달라이라마 사택에서의 많은 사적인 만남들이 가능했던 그만의 이유가 나는 더욱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말을 못하면 그럴 이유라도 좀 알려줬으면 하는 미련이 남는 것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갈등과 그 갈등을 통해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를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게 해주었다. 달라이라마가 말씀하셨듯이, 어떤 일과 대상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그것을 깊이 분석할 수 있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사물과 사람과 자연과 사건을 대하는 모든 것에서 내 마음 속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없애고 모르는 그 마음으로 돌아가게 만들어준다.

아는 것이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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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4-11-07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왜 사는가 1 - 무량 스님 수행기
무량 지음, 서원 사진 / 열림원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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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산스님의 제자로 현각스님과 함께 예일대학교에서 숭산스님의 법문을 듣고 출가를 한 인연을 가지고 있는 무량스님의 출가의 과정과 구도의 과정을 자서전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삶을 살아가면서 갖게 되는 특별한 경험과 그 경험을 받아들이는 의식은 늘 자신이 가고자 했던 방향에 대한 표식을 본능적으로 찾아가는 무언가가 있다. 무량 스님 역시 어머니의 죽음에서 그리고 자신의 성장과정에서 늘 무언가가 채워지지 않은 것으로 남아 자신의 삶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도대체 이 많은 생각들이 어디서 오는 걸까? 지금까지 받았던 교육은 대체 내게 무슨 도움을 준 것인가? 침대정리를 하고 먹을 것을 만드는 사소한 일 하나에도 보탬이 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하는 찾을 수 없는 존재의 공허함은 그의 인생을 더욱 많은 방황과 모험으로 이끌게 된다. 요가를 배우고, 태극권을 배우고, LSD를 복용하고 세상 어디를 돌아다녀도 그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이 많은 방황들이 자신에게 꼭 필요한 과정이었음을 자신은 안다. 나에게 있어 20대의 위태로운 방황이 나의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만들어내었던 것처럼.....내 삶의 어느 단편도 버릴 것이 없듯이 그의 삶도 역시 버릴 것 없이 그 자신의 의식에 쌓여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많은 방황을 거치고 그것에 대한 경험들이 내면화되어 의식이 그것을 정리하고나서야 비로소 숭산스님과의 타이밍있는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만남의 인연은 그렇게 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말한마디로 정리해내고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시원하게 뚫어주는 말 한마디가 바로 우리의 의문이 해결되어야 할 방향을 가리키고 있으므로....숭산스님을 따라 나서는 것이 당연하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절을 짓기 위해 자신의 노동만으로 세월을 견디어가며 그가 하는 만행은 결국 "왜 사는가? 나는 누구인가?"라고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다. 그 답은 자신이 세상 어디를 다니건 어떤 경험을 하고 있건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언어장벽을 뛰어넘어 한국의 산천을 누비고 다니고, 숭산 스님의 가르침을 쫓아 졸업만 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성공의 길을 접어두고, 사막 한 가운데에다 온전히 자신의 힘과 땀으로 태고사를 짓는 그의 만행은 너무나도 친절하고 배려심많은 스승 아래서 의문 하나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고 온갖 질문을 퍼부어대는 내게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하고 강한 의지없이 게으르고 나태한 내 모습을 다시 돌아보게 해준다.


그가 숭산 스님의 시봉을 그만 두고 홀로 수행의 길을 개척해가듯이, 마음 속에서 자신의 의문을 스스로 헤쳐가는 용기와 모험정신이 나에게도 필요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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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4-10-23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문득 읽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님의 리뷰로 더욱 마음을 굳히게 되는군요.
추천합니다...글 잘 읽었습니다^^
 
깨달음의 거울 - 선가귀감
서산 지음 / 동쪽나라(=한민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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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기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나지도 죽지도 않았다. 이름 지을 길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 이 한 물건은 무엇인가? 나의 알음알이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서산대사 휴정스님이 경전과 조사어록을 간추려 훗날 마음공부하는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선에 접근하도록 한 마음을 낸 것을 법정스님은 다시 마음의 눈으로 풀어내었다.

선에 대한 직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의 긴장이 유지되어 현악기의 현이 팽팽히 당겨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세상은 한 순간 순간마다 내 마음이 만들어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만법은 하나로 귀일되고 있는데, 그것은 마음이다. 한데 그 마음은 또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 곳이 어드메뇨?

뜰 앞의 잣나무, 삼 서근, 마른 똥막대기, 할, 방망이, 손가락..... 이 세상 그 무엇이라도 되고, 또 이 세상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그것은 다만 의문을 내 마음 속에 비추어 보아서 녹여내야만 얻을 수 있으리라...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 있든 내 마음 속에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그 마음이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어 어디로 귀결되고 있는지 잘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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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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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잔차키스, 그는 영적 스승(구루)라고 부르는 삶의 길잡이를 한 사람 선택해야 했다면 틀림없이 조르바를 선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굶주린 영혼을 채우는 수단으로 늘 책만 파고들었던 그에게, 세월을 책 속에서 묻혀지내며 깨달은 진리들을, 조르바란 인물은 자신의 몸으로 삶 속에 직접 맞부딪히며 온전히 그 삶을 기어다니면서 체험에서 우러난 직설적 행동과 언어로서 보여주었던 것이다.

"일할 때는 말 걸지마슈! 뚝 부러질 것 같으니까."

"나는 일에 몸을 빼앗기면, 머리꼭지부터 발끝까지가 잔뜩 긴장하여 이게 돌이 되고 석탄이 되고 산투리가 되어 버린단 말입니다. 두목이 갑자기 내 몸을 건드리거나 말을 걸면 돌아봐야죠? 그럼 꼭 부러져 버릴 것 같다는 말입니다. 이제 아시겠어요?"

그는 어떤 일을 할 때에는 그 일에 몰입한다. 과거의 생각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전혀 없이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면서 자신의 육체를 너머 정신적인 성스러움으로 들어가는 메토이소스(거룩하게 되기)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행동이 산투리를 연주하거나 춤을 출 때이다. 이 산투리를 연주하는 것과 춤을 추는 것은 그 누가 강요해서도 아니고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것에 대한 강렬한 열정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두가지 행위는 조르바의 메토이소스의 두 날개가 된다.

조르바는 카잔차키스에게 충고한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말고 가슴으로 느끼고 직관에 의해 행동하라고.... 여자를 보면 가슴이 이끄는대로 행동하라고....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쾌락만은 아니다. 자신의 육체가 이끄는 행위를 통해 정신적 승화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확대경으로 보면 물 속에 벌레가 우굴우굴한대요. 자, 갈증을 참을거요, 아니면 확대경을 확 부숴버리고 물을 마시겠소?" 삶과 우주를 대하면서 늘 생각이 앞서고 앞뒤,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을 따지지 말고 자신의 내면에서 과연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솔직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어떤 행동을 통해서든지 그는 인간이 가진 한계를 뛰어 넘어 성화를 이루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삶을 살아가며 그 곳에서는 이미 희망도 정복되고 따라서 절망도 정복되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비로소 두목의 돈을 모두 탕진하고 그 모든 잃어버린 것들을 한 판의 춤으로 승화시켜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현실세계를 외면하고 정신적 신성함만을 쫓아서 사는 수행자들을 대하면서 그들의 마음 속에 정복되지 못하고 회피하려고만 하는 그 무엇이 있음을 알게 되고 그것을 완벽하게 극복하고 정복한 인물로서 조르바는 그에게 있어 그 누구보다 깊은 깨달음을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한다.

육체적인 인간적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조르바 안의 조르바, 우리들 모두는 조르바이다. 우리의 몸과 인간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우리 안의 또 다른 우리의 경험을 그대들은 가지고 있는가? 그것이 우리 스스로가 찾아야 하는 메토이소스, 성화(聖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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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4-09-08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제일 좋아하는 책 중에 하나입니다. 10년에 한 번씩 읽기로 하고 20살에 한번 30살에 한번 읽었습니다. 앞으로 5번은 더 읽어야지...(오래 오래 잘 살겠다는 이야기죠)^^
잘 봤습니다.

달팽이 2004-09-09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을 보니...저도 언젠가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좋은 소설에 대한 공감...문체도 아주 매력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