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향기롭게 - 법정 대표산문선집
법정(法頂) 지음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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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법정 스님의 오래된 글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문득 길을 가다가 옆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를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과 신비로움이 그러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만난 느낌은 그렇듯 늘 내게 있었던 것을 문득 내가 발견했을 때의 느낌이었다. 이제 스님의 나이도 70대의 중반이다. 그의 글들이 이젠 익을 대로 익어서 열매로 맺히는 것일까? 최근의 글들은 또 조금은 새로운 맛으로 읽힌다. 차분하고 조용한 스님의 글들이 어느듯 대나무 숲의 그림자가 바람에 흔들리어 뜰을 빗질해내듯이 나의 마음을 빗질한다. 번거로운 일상생활의 잡다한 생각들을 빗질하는 것이다.

  당신은 세상 어디에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먼저 던진다. 그러면서 스님은 자신이 수행자임을 먼저 밝힌다. 혜가 스님이 달마 대사를 만난 이야기 속에 당신이 만들어내는 세상은 과연 무엇인가? 하고 우리에게 묻는다. 물질적인 욕망이 중심이 된 거꾸로 된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스님은 거꾸로 볼 것을 우선 권한다.우리의 일상에서 습관처럼 만들어내는 망상들을 버리고 새롭게 보기를 권한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바르게 보는 법을 배우게 된다면 세상은 더 이상 이러저러할 일이 없게 되겠지...

  이렇게 시작된 스님의 말씀은 이제 아주 평범한 자신의 일상으로 들어간다. 산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하루 속에서 자신의 수행은 말없이 빛난다. 화분을 기른다는 것, 새들의 소리를 듣는 것, 자신이 기거할 집을 짓는 것, 자연 속에서 해가 뜨고 지는 일을 맞는 것, 계절의 변화와 옷을 갈아입는 나무와 숲의 모습을 보는 것...이 모든 것이 스님에겐 공부가 되고 있다. 마음에서 펼쳐진 세상은 다시 마음으로 갈무리된다. 진정으로 우리의 본성이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스님이 우리에게 묻는다.  

  세상의 만남이란 모든 것이 자신의 부족한 것을 메우기 위해 존재한다. 나는 혹 외로움 때문에 사람을 만나고 있지는 않을까? 내가 돌아보인다. 정말 귀중한 인연을 우리는 마음의 망상으로 헛되이 만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내가 나의 길을 가는데 정말 부족한 것을 얻기 위해 우리는 세상을 만나는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떠서 보는 세상의 시작과 저녁에 마음 속으로 사라져가는 이 절실한 세상을 우리는 어쩌면 너무 쉽게 흘려보내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모든 만남이 가는 길이 스님에게는 수행의 길이다. 자신을 바로 보기 위해서 가는 길 속에 모든 것이 담겨진다.

  더운 여름 날, 책을 읽으면서 나는 무엇 때문에 이 책을 들고 있는 것인가? 하고 묻는다. 나는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묻는다. 음악을 들을 때 내 가슴에서 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또 묻는다.

하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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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06-21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무엇 때문에 책을 잡고 있는 것일까... 의문이 가득한 오후입니다.
점심 맛있게 드십시오.

비자림 2006-06-21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산에는 꽃이 피네' 를 읽고 정말 좋아 마음이 꽉 채워지는 듯도 하고 또 한순간은 마음이 싹 비워지는 듯도 하고... 그래서 여러 사람들에게 선물을 하기도 했던 기억이 나네요. 법정 스님은 우리 모두의 선생님이세요.

달팽이 2006-06-21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요즘 공부하시는군요..
네, 비자림님 저도 요즈음엔 마음비우는 공부의 비중이 커집니다.
비워야 새로운 것으로 채워질 수 있으니까요.

파란여우 2006-06-21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반동적 물질이기도 하고, 희망적 메시지이기도 해요
책 속의 길을 터 주는 스승이 있지만
책 속의 단말마같은 유흥가도 있지요
여우가 책을 읽는 이유는 뭘까요?
길상사에라도 함 찾아뵙고 여쭤봐야 할까 봅니다.

달팽이 2006-06-22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 책은 처음에 내 인생의 방향을 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이 때로는 언어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족쇄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삶이 힘들고 고될 때 그것을 넘어서서 자신의 중심을 만들게 해주는
특별한 책들이 있습니다.
나의 책읽기는 그런 책을 통해 삶이 지향하는 목표로 나아가게 해주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아직은 눈이 더 밝아져야겠습니다만..
 
아홉 마당으로 풀어 쓴 선
심재룡 옮김 / 한국학술정보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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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에서 붓다가 처음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다음 그가 설했던 초기의 설법들은 원시불교의 내용을 이루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원시불교는 중국으로 티벳으로 한국으로 일본으로 산스크리트어로서 된 경전으로 전래되면서 새로운 불교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중국에서는 이미 도교나 유교 등의 제자백가에 의한 깨달음과 수행을 일상화시킨 문화가 존재해왔고, 이러한 문화적 배경하에서 달마에 의해서 새롭게 부흥된 깨달음의 길인 선불교가 혁명적으로 제시되었다. 경전과 학문 공부에서부터 비롯된 불교공부가 '선'이라고 하는 활발자재하고도 직접적인 방법으로서 사람들에게 제시되었던 것이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만나게 되는 바위 틈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풀 한포기를 완전히 알게 되면 이 세상과 나의 모든 것을 알게 된다고 한다. 전체 속에 부분이 들어있고, 부분 속에도 전체가 들어 있다는 불교적 세계관 속에서는 참된 진리가 현현하지 않는 곳이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참된 진리가 현현해 있는 어떤 대상 속에서도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선사들의 불교의 핵심을 묻는 대답도 천차만별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뜰 앞의 잣나무" "마른 똥 막대기" "손가락을 치켜 드는 행동"이라든지 "할"하는 소리나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 "신발을 벗어 머리에 이고 나가는 것"이라든지 "세계일화" 등 등 상식과 언어적이고 논리적인 세계를 떠난 펄펄 살아 있는 선의 언어가 보여진다.

  어떤 말을 하든지 그것은 그들의 마음 속에서 비롯된 것이다. 참된 진리의 마음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의문 속에서 우리는 밤을 새워야 한다. 세상은 그대로 여여한 진리인데, 그러면 세상 그대로 의문이 필요없는 답만이 있는 세상인데 미혹한 우리들은 스스로 의문을 만들어낸다. 그러니 어찌하겠나? 스스로 만든 의문을 스스로 없애는 수밖에...그것은 의문을 언어적 논리적으로 다루어본 다음에 더 이상 이런 방법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그제서야 비로소 방향을 바꾸게 되고 선의 시작은 여기서부터이다.

  선은 옛날에는 근기있고 재능이 있는 제자들을 선사가 알아보고 그들을 지도하는 방법으로 사용했다. 또한 선사들은 매우 엄격하고 냉정하게 그들을 대했다. 따라서 스스로의 노력과 힘으로 자신의 본바탕을 보아내고 그들은 대담하고 파격적이고 힘있는 선을 토했다. 그만큼 선은 자신의 깨달음을 이루는데 절실했고, 또한 스승의 귀함도 알았기 때문에 오로지 스승의 가르침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가운데 스스로의 힘으로 빨리 깨달음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선불교가 대중화되면서 예전과 같은 파격적이고 천지를 가르는 힘은 줄어들었다. 그만큼 부드럽고 쉽게 일반화된 선적인 이해가 보다 근기낮고 우둔한 대중들을 대상으로 자상하게 제시되고 있다. 덕분에 근기 낮고 어둔 내가 선의 자세한 가르침에 따라 조금씩 마음을 닦아나갈 수 있게 되었지만, 아무래도 하근기의 내가 더디게 더디게 하는 공부에 큰 진전이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세상에 요즈음 요구되고 있는 선의 대중화에 따라 사람들이 예전에는 그저 자신의 복덕을 위한 불교에의 귀의나 시주, 믿음을 가졌던 것이 이젠 직접 부처님의 마음을 따라가는 좌선과 명상에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불교의 발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위해서 '공안'을 주로 사용한다. 선사가 그의 제자들을 가르칠 때 사용하는 선의 도구로 상식을 초월하고 논리를 초월한 화두로서 제자의 마음 속에 큰 의문을 일으켜서 마음이 일어나는 에너지를 한 곳에 모아서 깊은 빈탕의 체험을 유도한다. 공안을 마음으로 녹혀내야 한다는 것은 바로 그 공안 앞에서 깨어있는 마음으로 마음없는 한 점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무르익었을 때 그 한 점의 마음조차 타파되고 공안은 풀리는 것이다.

  이제 언어적으로 이러한 선에 대한 이해가 되고 있는 나를 알게 된다. 따라서 공부의 방향이 지식적으로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마음 속의 체험이다. 지식적 이해가 때로는 나의 참된 공부를 방해한다는 느낌도 들게 된다. 책을 들 때 그 책을 관통하여 내 마음의 상태를 짚어 보고 그 저자의 마음이 무엇인지에 계속 마음을 놓치 않고 매진하는 공부가 필요하다.

  선의 나침반을 돌아서 세상에 다시 태어난 날이 나에게도 반드시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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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란 무엇인가?
스즈키 다이세쓰 지음, 이목 옮김 / 이론과실천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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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즈끼 순류의 '선심초심'을 읽고 난 후 이 책의 이름을 접하고서 동명인줄 알았다. 하지만 다시 보니 서양세계에 선불교를 소개했던 교과서격인 스즈끼 다이세츠의 '선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희노애락을 타고 감각의 끝에서 그 선율을 타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내고 우수에 젖고 사랑의 감정을 품고 하던 시간들을 보내고 있던 내가 다시 돌아갈 곳은 초심이었다. 그래서 다시 백지의 상태에서 내 마음의 선율의 첫 음을 잡고 싶었다. 내가 느끼는 기쁨이 온전한 기쁨이도록...내가 사랑하는 그 사랑의 느낌이 온전하고 더 넓은 사랑이도록...내가 느끼는 슬픔이 인생의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배움이 되도록....그러기 위해선 내 음악의 첫 선율을 타고 그 첫 음속으로 들어가 절대음을 느껴야 했다.

  그렇다면 선은 나에게 있어 내 삶 속에서 끄집어내야 할 무엇이었다. 다이세츠는 말한다. 될 수 있는 한 서양인들이 선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자신의 삶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 의문에서 그는 시작한다. 동양적인 사고에 익숙하지 않은 서양인들이 낯설은 직관적인 마음을 어떻게 하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들이 어떻게 하면 최대한 불교를 역사적으로 접근하여 그 배경을 이해하기 쉽게 이해하고 선의 의미와 공부방법을 보다 언어적으로 다룰 수 있을까? 그것은 내가 그동안 읽은 책으로 이 책을 접하면 별로 새로울 것이 없고 감동이 덜하다는 것을 느꼈지만 될 수 있는 한 그의 시대로 돌아가서 그의 마음을 읽으려고 했던 이유였다. 그러자 갑자기 나에게 초심같은 것이 생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번역자의 티를 그냥 넘길 수는 없다. 좀 더 선적인 이해가 깊었더라면 좀 더 선적인 글들로서 내 마음 속의 의문을 자아내게 할 수 있었는데...언어의 길을 따라 한 길을 내고, 또 마음의 길을 따라 한 길을 내어 그 두 길을 합쳐놓아야 하는 번거로운 과정이 필요했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아는 선생님의 서재에 들러서 구판인 '아홉마당으로 풀어쓴 선'이라는 책을 다시 구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심재룡 교수는 자신의 평생의 공부로 불교와 철학에 대한 기본 배경을 바탕으로 풀어낸 점이 내 마음을 끌었다. 따라서 번역은 또 다른 저서다. 자신의 마음의 눈으로 새로운 창조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도구적 역할에 머물 뿐이기 때문이다.

  6조 혜능 이후로 선불교는 능엄경에서 금강경으로 소의경전이 바뀐다. 쉽게 얘기하고 치열하게 실천하는 선이 대중불교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잡다하고 심오한 불교 경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일자무식의 농부나 아낙이라도 마음으로 직접 부처의 세계로 갈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 때부터 선불교는 경전과 이별하여 마음으로 직접 체험하는 것이 중요한 공부가 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오늘날의 마음공부의 주된 흐름과도 일치한다고 생각된다. 이제 굳이 승려가 되지 않아도 재가자들이 자신의 마음을 직접 보아 깨달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선공부가 수월하거나 대충대충 할 수 있다는 말은 터럭만큼도 맞지 않다.

  어느 스님의 말이었던가? '불교란 어느 무지랭이 농부가 바위 위에 걸터앉아 그 한 생각을 잊은 것이다."라고 했다. 일체의 사회적 지위와 학식과 사고력과 상관없이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보아 그 한 마음을 잊는 것이라고 했다. 일자무식의 혜능 스님이 제 6대 조사가 되면서 선의 황금시대가 도래한 것은 현대의 불교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있는 그 자리서 마음을 들여다보고 공부하는 것이 내 앞에 주어진 길이 아닌가 하고...

  '선이란 무엇인가?' 의문은 공부의 시작이다. 문제는 이 의문과 내가 어떤 화학적 과정을 거쳐 전혀 다른 생성물을 만들어내느냐에 있다. 의문의 문을 지나 그 의문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넣는 노력들이 나에게 필요하다. 의문에서 온갖 논리적인 사고를 굴린 것은 이미 오래전...이제 마음의 방향은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던가? 의문을 가지고 또 다른 의문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의문 그 자체를 녹여서 답으로 만들어내는 것....모르는 그 마음을 아는 마음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이루어지는 연금술이요 신비 상자이다.

  그것은 우리의 자아로부터 비롯된 생각들과 감정들을 보다 큰 대아의 생각과 감정으로 바꾸어내고 나에 갇혀 있는 생각을 해방시켜 너와 우주로 뻗어가게 만든다. 내가 나이면서 동시에 전체 존재일 때 세상의 모든 일들은 완벽하고 손하나 댈 것없는 그대로의 우아한 우주가 된다. 그 우아한 우주에서 기뻐하고 슬퍼하고 사랑으로 가슴이 떨리고 행복함을 느끼고 싶다. 스산하게 내리는 비가 멎고 청명해진 하늘 위로 기분좋은 구름이 둥실 떠간다. 내 인생의 꿈도 그 위에 실리어 둥실 떠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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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이웃종교로 읽다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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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즈음 서양에서 더욱 폭넓고 대중적으로 퍼져가는 불교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작년 초에 열반에 드신 숭산스님도 그런 한국불교의 세계화에 힘쓴 분이다. 한국불교와 티베트 불교, 일본 불교, 그리고 남방 불교 등 여러 종류의 불교가 미국을 위시한 서양세계에 소개되고 또 서양 사람들의 마음에 싹트고 있다. 이러한 불교인구의 확대와 더불어 종교로서의 불교가 선과 명상을 중심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뿌리내림으로써 행복한 삶과 생활을 중심으로 한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세계적으로 중요한 불교국가로서의 한국 불교에 시사하는 점은 무엇인지, 또한 한국불교가 서양의 현대불교의 변화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 오교수는 할 말이 있었을 것이다.

  우선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를 통한 불교의 형성과정과 그것의 확장 과정 그리고 불교 경전의 형성 과정을 다룬다. 초기 부처님이 설했던 사성제와 팔정도를 통한 불교의 기본 교리의 성립과 초기 인도불교와 대승불교의 성립, 그리고 인도 불교의 쇠퇴과정이 나타난다. 그리고 중국을 시작으로 동아시아 국가로 불교가 전래되는 과정과 지역과 국가에 따른 불교의 민족적, 지역적 특징과 색채들을 살펴본다. 동아시아 불교에서 중국 불교를 건너뛸 수 없다. 중국은 인도의 달마 조사를 시작으로 불교의 꽃을 피우게 되고 그것이 한국과 일본으로 전래되기 때문이다. 또한 선불교의 전통과 맥이 가장 잘 전수되고 있는 한국불교도 불교 역사에서 차지하는 현재적 위치를 무시할 수 없다.

  한국 불교의 특징은 선불교다. 고려시대까지 불교는 국교로 지정되거나 국왕의 지지를 받았는데 조선시대로 넘어가면서 유교를 숭배하면서 불교는 탄압받게 된다. 그러면서 불교의 종파는 크게 교종과 선종으로 양분되는데 이것이 한국 근대에 와서는 선종으로 통합된다. 물론 천태종, 화엄종, 법화종 등의 종파와 원불교 등 여러 가지 대중화된 불교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한국 불교의 주된 맥은 역시 선불교라고 할 수 있다. 선불교는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경전을 떠나 직접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아 본성을 보고 깨친다는데 중심을 둔다. 참선 방법으로는 좌선을 사용하는데 그 방법의 차이에 따라 간화선과 염불선 묵조선으로 나뉜다. 우리 나라 선불교는 간화선을 그 근간으로 한다.

  서양으로 간 불교는 주로 중상류층 이상의 엘리트층이 향유하는 문화로서의 성격을 가지며 기복적이거나 사후세계의 관심보다는 현실생활과 행복을 그 목적으로 한다. 주로 명상과 선을 하고 있으며 일상생활과 수행을 병행하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불교가 서양으로 건너가면서 더욱 대중화되고 명상과 선이 강조된 점을 볼 수 있다. 한국 불교는 아직도 출가스님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기복적이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거나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에 바탕을 둔 것이 대부분이다. 이제 우리의 재가불가자들의 종교로서의 불교도 서양의 흐름과 성장을 보고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종교로서의 불교도 시대가 변하면서 더욱 대중화되고 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자화되고 언어화된 형식적이고 예식적인 면들이 보다 많이 축소되고 그 정신과 의미를 얻으려고 하는 점들이 더욱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마음 속에서 종교의 의미가 새롭게 조명되지 못하고 창시자의 마음을 공유하지 못할 때 그것은 신비화되거나 절대화된다. 나아가 그것이 극단적으로 나타나면 '근본주의'의 형태를 띠게 된다. 다른 종교나 다른 신념에 대해 배타적이고 비판적인 근본주의는 인류사에 있어서 늘 문제를 빚어왔고, 인류의 성숙한 삶을 방해해왔다. 이제 두 종교를 사이에 두고 대립하고 갈등하는 한 줄기의 강같았던 종교가 모든 종교들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자신의 종교 안에서 더욱 성숙하고 자비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바다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21세기의 새로운 종교의 역할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이 책은 또한 불교를 비교사적으로 접근한 책이기 때문에 종교가 현대 사회에서 가지는 의미와 사회참여적이고 대중화된 의미에 주안점을 두게 됨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선의 가르침과 체험은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나게 된다. 하지만 불교에서 선적 체험이 없이 성숙하고 행복한 삶이 진실로 가능한 것일까? 역사적으로 알려졌던 소수의 깨달은 자들만을 신비화시키는 종교가 아니라 인생이라는 여정을 통해 인간영혼의 성숙을 위해 누구나가 걸어가야 할 길로서의 불교가 참된 내적 깨달음없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주인으로 살 수 있으며, 세상의 평화와 자비가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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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챙김의 지혜 100 - 조선선비들에게 배우는
윤홍식.오병문 지음 / 봉황동래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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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나라 조선 시대 선비들의 마음공부가 어떠했는지를 그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간 글들을 추려 놓았다. 조선역사에서 흔히 이름을 들었던 사람들도 사실 그 마음 됨됨이가 어떠했는지는 몇 가지의 일화를 통해서 알 수 있었을 뿐이었다. 저자는 백두산족 전래의 정신수련학 및 민족고유의 지덕체 양성법에 관심을 갖고 홍익학당과 홍익정신연구회, 민족 전래의 체력 양성법을 몸으로 익히는 종무회를 운영하고 있다.

  깨달음과 마음 공부에 대한 옷은 참으로 다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종교와 중국의 제자백가 사상, 그리고 우리 나라의 유교도 나름대로의 마음 수양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각 각의 종교나 문화에 따른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 속에서 체험해내고 인생을 보다 넓은 시각에서 바라보고 성숙하게 대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문제는 어떠한 옷이 나에게 맞는지를 탐색하기 위한 과정으로 책들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주로 우리 선비들이 사용했던 정신수련법은 '호흡법'이었다. 자신의 호흡이 드나드는 것을 지켜보면서 항상 깨어있는 것이 일상화되면 '원신'이 그 진리를 드러낸다고 한다. 우리가 감정에 휩싸이게 되면 먼저 고르던 호흡이 파괴되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듯이 우리의 마음상태를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것이 호흡이었고 따라서 우리의 선비들은 호흡에 집중하는 명상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다듬었던 것이다.

  그렇게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들러붙은 마음을 자신의 안으로 돌려 스스로를 성찰하는 자세로 수기했던 우리 선비들은 남들이 보나 보지 않으나 항상 신독하는 자세를 유지했다. 화담을 유혹하려고 황진이가 늦은 밤 화담의 문 앞을 옷을 벗고 왔다갔다 하지만 화담의 마음은 요지부동....모든 사물과 우주가 생겨나는 그 자리, 즉 모든 사물과 우주가 사라지는 그 자리에 마음이 머물렀던 화담 선생이 황진이의 몸짓에 움직였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경으로 자신의 마음을 깨어있게 했고, 그 경의 극치에서 성의 기쁨을 맛보았던 많은 선비들은 부, 귀, 명예에 초연하여 사회로 나아가기도 했을 것이고, 또 물러나 자신의 정신수련에 인생을 보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외부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챙기고 있는가 놓치고 있는가 였을 것이다. 거문고의 줄을 고르듯...너무 팽팽해도 안될 것이고 너무 느슨해도 거문고의 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듯이 자신의 마음과 계합하는 글로써 자신의 마음을 호흡지간으로 놓치지 않고 공부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공부를 점검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내가 공부를 함에 외롭지 않은 이유는 세상에 외롭지 않은 공부는 없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전에 이 땅위에서 홀로 공부하며 벗들과 어울렸던 선비들에게도 떨쳐버리지 못한 스스로의 외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외로움을 기름 삼아 불을 밝히고 공부에 매진했던 연금술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 누구나가 자신의 인생의 성장의 길을 걷는다. 누구나가 자신만의 토양 위에 홀로 선 나무이다. 내가 선 이 자리서 내 몸 마음을 들여다보고 가는 홀로의 길을 잘 걸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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