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침묵속에서의 자유
크리슈나무르티 / 문조사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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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늘 끊이지 않는 생각 속에서 살아간다. 한 생각에 꼬리를 물고 또 다른 생각으로 넘어가면서 때로는 그 생각이 함박눈 내린 세상 산을 타고 내려오는 눈덩이처럼 불려져서 자신을 온통 에워싸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우리는 늘 끊이지 않는 생각으로 고통스러워 하고 쾌락을 추구하고 사랑을 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생각들이 인류를 위대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의 고리를 끊어보지 않아서 생각이 끊긴 세상과 지금 세상과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고요한 침묵은 그러한 생각의 고리가 끊기는 것을 말한다. 단지 말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탈출하여 영원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공간을 벗어나 영원한 곳에 존재함을 의미한다. 자아의 허울을 벗고 나의 의식이 온 우주로 확장됨을 의미한다. 생각을 헤아리는 것으로서 우리는 진리를 추구하지만 그 진리는 바로 헤아리려고 하는 그 생각이 멈출 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인류의 영적 스승 크리슈나무르티는 일반인들을 위한 명상록에서 평화와 자유는 우리 삶에서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그런 평화가 없는 곳에서는 아무것도 자랄 수 없고 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진정한 평화는 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평화와 자유가 고요한 침묵 속에서 사랑으로서 피어나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인간의 욕구를 누리며 사는 속세의 삶도, 그 욕구를 억제하면서 그 저항과 부정에 자신의 삶의 에너지의 대부분을 소비하는 피안의 삶도 모두 버리라고 충고한다. 따라서 마음에서 어떤 이상이나 깨달음에 대한 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나 인격을 절대화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 거부한다. 그리고 어떤 인격자나 영적지도자 절대자에 대한 의존 또한 거부한다. 하지만 이런 그의 의견은 "지도무난 유혐간택"의 증도가 사상과 어긋나지 않는다. 마음 속에서의 선과 악에 대한 어떤 기준을 버리게 되면 통연히 진리는 명백하게 드러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어떤 절대적인 인격자나 신의 권위를 거부했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신격화하고 영적인 지도자로 따른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문제는 아니지 않는가? 사회적으로야 자신이 절대화되는 것에 대한 문제점이 나름대로 있을 수도 있지만 언제까지나 그는 자신을 지도자의 권위로 무장하지 않았고, 그의 뜻을 따른 사람들의 마음의 문제일 뿐이지 않는가? 그들 또한 도매급으로 취급되어 그렇지 그 중 많은 사람들이 그의 뜻을 취하지 드러난 형체를 취하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문제가 될 것인가?

  그의 글에서는 참된 진리를 향한 글을 일상생활의 잔잔한 이야기를 통해서 하고 있다. 그의 마음의 눈으로 읽어낸 세상에 대한 묘사가 자신의 말 뒤에 부연설명되어 있는데 가만히 읽어보다보면 그것이 깨달은 자의 마음으로 들여다본 세상이다. 자아가 사라진 자리에 보이는 세상에 대한 묘사는 나의 마음을 묘사에 머물게만 하지는 않았다. 그가 찾는 진리가 무엇인지 그의 마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으로 나를 이끌었다.

  마지막 부분에 나와 있는 명상록 부분은 조용한 아침에 자신을 고요한 침묵으로 이끌고자 할 때 한 편 한 편 곰곰히 글을 따라가면서 마음을 맞추기엔 안성맞춤이다. 출근시간이 이른 내가 강변로를 따라 학교를 오며 보는 풀, 버들, 갈대, 강, 산을 보면서 학교에 도착해서 창문을 열고 풀벌레소리를 들으며 한결 차가워진 바람을 맞으며 읽기엔 참 좋은 구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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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둔이 2005-09-09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o you know what time is? Not by the watch, not chronological time, but psychological time? It is the interval between idea and action. An idea is for self-protection obviously.

결국 시공이란 자아를 가두는 굴레라는 뜻이겠지요. 자아로부터의 자유는 시공의 초월이고 관념과 생각으로 부터의 해탈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 모든 것 크리슈나무르티의 깨달음에서 빌어온 이야기입니다.

글샘 2005-09-09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It is the interval between idea and action.
그렇네요. 시간이 그 짧은 간격의 적분임을 깨닫게 되네요. 두 분 감사합니다.
 
산색 - 죽창수필 선역
운서 주굉 지음, 연관 옮김 / 호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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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서 주굉 스님의 '죽창수필'450여편 중에 일반인들이 생활하면서 지켜야 하는 계율과 간단한 마음공부에 대해 140여편의 글을 모아 묶어낸 것이다. 그래서 좀 더 마음공부에 관한 글을 읽고 싶었던 나는 머릿말을 보면서 조금 실망하였지만 글을 읽어가면서 내용에 집중하다보니 그런 마음은 사라졌다.

  비록 짧은 글들로 쓰여졌지만 각 각의 내용들이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하여 곰곰히 성찰하게 해주는 글들이다. 더운 여름 날 집 안에서 조용히 책을 보면서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들이 참 값진 시간임을 알게 되었다. 물론 사회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보니 사람도 만나야 하고 때로는 형식치레도 하며 살아야 하지만 아무래도 난 조용히 혼자서 보내는 시간에 매력을 더욱 느낀다. 조용한 곳에서 책 속의 내용에 푹 빠져 있을 때에는 책의 의식 속으로 쉽게 빠져들기 때문이다.

  책의 글귀도 이젠 하나 하나의 내용이 나한테 지금 맞는 내용인지 아니면 3요를 증가시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지금 이 순간에 내게 열리게 자극하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눈이 생긴 것 같다. 어떤 말을 들어도 그것이 화두로 모아진다면 세상에 나아가 번잡한 곳에서도 생활할 수 있겠지만, 아직 그런 의정이 생기지 않은 이상은 조용한 시간을 많이 갖고 더욱 노력할 따름이다.

  술도 앞으로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몸도 별로 받지 않는 술이지만 술에 취한 날이면 아무래도 잠자기 전 명상과 아침 명상에 큰 지장을 초래하고 심한 경우는 다음 날까지 비몽사몽하게 하니 그 해악이 막대함을 알고도 쉽게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있었는데...앞으로 좀 더 성실한 일과를 짜서 생활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좀 더 많이 걷고, 좀 더 차분한 시간을 많이 가지고 좀 더 집중해서 노력하여 어느 정도 힘이 붙으면 생활을 느슨하게 하면서 공부를 실험해도 늦지 않으리라...

  내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남을 돌아볼 시간도 없을 뿐더러 남에게 이러쿵 저러쿵 교훈의 말이랍시고 떠드는 내 모습이 때로는 한심하다. 동생에게도 친구에게도 때로는 학생들에게도...그저 교훈의 이야기는 책에도 널리 쌓여 있다. 문제는 내 마음이 맑아져서 그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말을 해주는 것인데...우선 내가 공부가 덜 되어 있는데 어찌 나서서 일을 그르치려 하는가?

  세상의 경계를 흐리려고 하면서 마음의 경계를 없애지 못하는 나를 제대로 보아야겠다. 마음의 경계는 없애고 세상은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가 생길 때까지 말을 더욱 참고 마음을 더욱 살필 일이다. 세상은 참 좋아져서 선지식의 좋은 말들이 책만 펼치면 보인다. 그것을 나침반 삼아 공부하기도 좋은 환경에 또 무엇이 갖추어져야 하겠으며, 또 어떤 조건을 필요로 해야 하나?

  내 스스로 갖추어져 있는 불성, 그것이 있어 나는 찾게 된다. 내가 찾는 그것이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내가 찾는 삶의 의미이며 나의 게으름을 질책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사는 이유...그것이 오늘도 나로 하여금 앞으로 한걸음 내딛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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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선 - 조계종 수행의 길
대한불교조계종교육원 엮음 / 대한불교조계종교육원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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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불교는 대체로 조계종이다. 조계종은 조사선과 화두선을 중심으로 깨달을 지향하는 불교의 맥이다. 비로 재가자이지만 마음공부에 관심이 있어 공부한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지만 마음을 세워 공부를 한 경험들이 이 책에서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잘 정리되어 있다. 간화선이 무엇인지, 화두를 들어 참구하는 것이 깨달음으로 가는데 왜 필요한지, 선지식의 도움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자세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했기 때문에 재가자로서 혼자 공부하는 사람이라도 이 책을 지침삼아 공부할 수 있도록 만든 책이다.

  신심과 발심, 의심이 제대로 갖추어져야 화두를 들 수 있는데, 사실 나에게는 그 기초부터가 부족함을 알겠다. 화두는 그저 든다고 해서 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대신심과 대분심 그리고 대의심이 생겨 강하고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간절함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부족하다면 채우려는 뼈저린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 화두를 억지로 드는 것은 그 효과가 없는 것이며 그에 따른 부작용도 생기게 마련이다.

  화두를 들기 위해 아침 저녁으로 명상에 드는 방법은 큰 도움이 된다. 특히 그 시간에 화두를 들고 참구하는 버릇을 한 시간만이라 가지게 된다면 일상에서 행동에서 늘 그 화두가 침투하는 힘을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화두 공안에 관계되는 책을 몇 권을 읽어보았지만 책을 읽어갈 때의 마음이 일상생활에 침투되지 않는 것은 아직 3요에 관한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마음까지 놓아서는 안됨에도 불구하고 그간에 흩어지고 혼미해진 마음의 경계들이 다시 시작함을 어렵게 한다.

  우선 잠자리에 들기 전 명상과 아침 깨어나서 하는 명상을 다시 시작해야겠다. 특히 아침 명상에서는 잠을 뿌리치기 위해 절수행이라든지 걷기 명상이라든지 나름대로의 대책과 함께 시작해야 효과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화두 참구의 단계가 나의 경험으로는 동정일여 몽중일여의 단계가 뚜렷하지는 않고 혼재되어 조금씩 나타난 듯 했는데 역시 바른 공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나마 오매일여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으니 말이다.

  화두앞에서 깨어 있는 것, 만법귀일 일귀하처에서 그 하나가 돌아가는 곳, 그 곳에 대한 큰 의문으로 깨어있는 마음가짐을 내 속에서 만들어내고 키워가는 것이 필요한데,,, 그래서 의성이 생기고 그것이 큰 덩어리로 뭉쳐져 내가 화두와 하나되어 생활하는 지속이 이루어지게끔 해야 하는데....이 책에서 너무나도 자세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수행의 방법과 수행 중의 문제점에 대한 것까지 정리가 되어 있어서 실제로 화두참구를 하는 수행자에게 있어 주변에서 선지식을 만날 수 없을 때 아주 필요한 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자신에게 맞는 화두를 참구하는 것, 나에게는 어떤 화두가 맞을 것인가? 자신과의 인연으로 우연히 만나게 되는 그런 화두, 화두를 볼 때 좀 더 잘 잡히고 인연이 되는 화두를 찾는 것이 필요하고 그것이 찾아졌다면 이제 3요의 마음을 갖추고 화두 참구에 들어가보는 것이다. 일대사의 인연을 해결하기 위한 공부, 이미 빠르지 않게 시작한 공부에서 더욱 지체하고 게으름피울 시간은 없다. 조급해서도 안되겠지만 우선은 나의 나태해지고 게을러진 마음부터 바로잡아야겠다.

  화두, 그것으로 조사님과 부처님의 그 마음 속으로 들어가보자. 그들과 다름없는 진정한 나를 찾아보자. 세상의 많은 깨달은 자와 앞으로의 또 많은 부처님들, 자유롭고 자유로운 삶 속에서 걸리지 않는 뜻을 펼쳐보자. 내 죽음을 넘어 나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 보자. 과연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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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틱낫한 지음, 오강남 옮김 / 모색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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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틱낫한 스님의 책을 오랫만에 들었다. 일생을 베트남 전쟁에 대한 참상을 세계에 알리고 전쟁 종식을 위해 노력하신 분, 전쟁이 끝나자 전후의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박은 두려움과 공포를 사랑과 자비로서 감싸안기 위해 노력하신 분이다. 그는 단순히 자신의 종교인 불교를 사람들에게 심어놓기 위한 승려만은 아니었다. 유럽과 미국과 세계를 돌아다니며 전세계의 인류가 자신이 자리한 위치에서 자신의 믿는 종교의 뿌리로 돌아감으로써 모든 종교가 반목과 적대감에서 벗어나 상호간의 이해와 사랑을 높임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영적으로 더욱 성숙해지는 것을 원했다.

  프랑스의 보르도지방에서 플럼빌리지를 운영하고 계신 스님은 우리들의 참된 존재는 지금의 드러난 세상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불국토와 서방정토는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숨쉬며 살아가는 때로는 고통스럽고 때로는 기쁘고 행복한 바로 이곳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곳에서 우리가 부처님과 만나는 법은 '마음 다함'이라고 한다. 숨쉴때는 온전히 숨쉬는 것을 느끼고, 걸을 때는 온전히 발걸음에 온 마음을 집중하고, 먹을 때는 음식에 모든 마음을 집중하는 것, 바로 현재에 온 마음을 기울여 사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마음 다함은 마음 없음이 된다. 온마음을 모르는 마음으로 만들고 생각과 관념을 떠나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을 묻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의 본래 모습과 더욱 가까워진다. 그 곳이 바로 우리의 참된 고향이다.

  우리가 보는 작은 생명체 하나에 들어있는 온 우주를 보는 것, 그래서 나와 그 작은 생명체 하나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보는 것, 모든 생명체의 육신은 사라져도 그것의 본체는 사라지지도 없어지지도 그리고 생겨나지도 않음을 보아야 한다. 그것은 내 눈 앞에 있는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과 통찰을 필요로 한다. 내 눈앞에서 느티나무 작은 잎들이 바람에 일렁인다. 그 잎새사이로 언뜻 비쳐지는 하늘, 이 모든 것이 신비롭기만 한다. 나무아래로 시원한 바람은 그치지 않고 불어오고 나는 그 바람 속에서 틱낫한 스님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듣는다. 내 속에 있는 진정한 내 모습에 관한 이야기를....

  스님은 지구에 사는 온 인류가 타인과 타종교에 대한 배제와 억압을 버리고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기를 원한다. 그래야만 지구인이 보다 성숙한 정신적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질테니까. 그러기 위해선 우선 남에게 자신의 종교를 강요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종교의 뿌리로 돌아갈 것을 강조한다. 어떤 종교든지 그 원래 뿌리는 순수하고 인간 존재의 본래모습과 닿아 있으니까. 그 종교의 뿌리에서 멀어지면서 우리는 서로가 다르고 독립된 개체인 것처럼 생각한다. 원래 나무를 보라. 그 뿌리는 대지 흙으로 서로 같은 영양분과 에너지를 받으며 자라지 않는가?

  자신의 존재 밑바탕까지 보아야 그 많은 종교가 바로 그 밑바탕에 이르는 하나의 길일 뿐,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고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대지 흙으로서 서로를 만날 수 있게 되고 서로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줄기를 타고 가지로 갈수록 잎으로 갈수록 우리는 자신이 독립된 개체인양 생각하고 자신의 물질적 삶이 전부인양 생각한다. 자신이 가진 것을 위해 타인을 짓밟고 희생시키면서 정작 중요한 자신의 밑바탕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삶은 늘 역설적이다. 물질적 삶에 치우칠수록 자신의 정신적 삶은 황폐해지고 자신을 버릴수록 오히려 더욱 자신의 본래모습을 되찾는다. 원래 참된 진리는 역설적이지 않은가? 길 없는 길, 문 없는 문을 지나 우리 본래의 모습으로 가는 여정은 세상 모든 곳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으나 그 세상 어디에도 없는 법이다. 오늘 나는 내 몸 담은 이곳에서 대도로 가는 길을 모색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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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연금술 - 나를 통하여 이르는 자유
게이트 지음 / 유란시아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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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과 문학, 그리고 사회과학 분야를 기웃거리며 허송세월한 오랫동안의 외유를 접고 잠시 내 안으로 돌아오리라는 작은 다짐과 함께 든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그런만큼 내 마음의 준비가 이 책을 읽어낼만큼 파동을 유사하게 맞추어보려고 했던 탓인지 책의 메세지가 내 마음으로 돌아가도록 해주었고, 모처럼 다시 오롯한 마음을 세워볼 수 있었다.

  마음은 만능의 보물상자이다. 세상의 모든 권력과 부, 명예가 시간과 공간이라는 인연따라 반드시 그리고 예고없이 허물어지게 되어있는 시한부 조건이라고 한다면 마음은 우리가 상황으로써 받아들이는 외부의 조건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선택가능성을 제공해주어서 언제라도 한 생각 돌이키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자유롭게 해준다는 점에서 무한한 사용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부처님이, 예수님이, 그리고 인류의 전역사를 걸어갔던 수많은 깨우친이들, 그들이 역사적으로 실재했었는지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말과 글이 후대에 전해져 우리가 문자로서 그것을 접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맑아지고 밝아져 그들이 깨달았던 경지를 수많은 사람들이 겪었다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 그 자체가 이 우주의 모든 현상과 마음의 폭을 담아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따라서 마음은 이 우주에 존재하는 가장 신비로운 물건(?)이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서는 가슴이 떨리고, 아름다운 절경 앞에서는 마음을 뺏긴다. 너무나도 기구하고 불쌍한 사연앞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서로를 죽이고 죽여야 하는 전쟁터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전쟁기계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상황에 즉해 우리가 마음 먹기에 따라서 우리들은 세상의 모든 폭의 감정과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 마음이 일어나는 그 곳에 참된 우리의 실재가 자리한다. 그 마음이 사라지는 그 곳에 진정한 내가 있다. 삶과 죽음이 없는 그 곳도 우리가 삶과 죽음을 만들지 않을 때에 비로소 가능한 일이 된다.

  이렇듯 세상 모든 것이 마음에 담겨질터인데 진정 그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알면 우리는 스스로 부처가 된다. 스스로 영원한 존재임을 알게 된다.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구속과 환상의 틀을 깨고 자유로운 대자유인이 된다. 이 책은 그러기 위해서 가장 손쉽고 늘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스스로를 관찰하고 탐구함으로써 깨달음에 이르도록 안내한다. 그렇지 않겠는가? 모든 책과 경전은 사구요 활구의 도리는 스스로의 마음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

 한 생각의 차이가 부처와 중생을 가른다. 한 생각의 차이는 우리에게 왔다가 지나가는 한 생각이 완전히 지나가버리기 전에 그것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잘 관찰하라는 것이다. 그 생각에 매달리지 말고 그 생각이 나오는 빈탕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 빈탕에서 바라본 세상은 지금과 여전하지만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는 도리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나에 대한 관찰은 바로 이 한 생각에 대한 관찰과 탐구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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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05-06-01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근에 이 책을 읽었습니다. 요즘은 무슨 책을 읽어도 예전에 받았던 만큼의 큰 감동을 받는 일은 적어진 것 같습니다. 좋은 책이지만, <좋은 책을 읽는 것만으론 부족한 무엇>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도 참 좋은 느낌은 아직도 살아있네요.
리뷰를 못쓰고 있었는데, 대신(?)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달팽이 2005-06-01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그 부족한 무엇은 저에게도 필요한 것이죠...내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탐구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