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는 곧 중심인물이 되었다. 처음부터 그들은 피카소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과 싫어하는 사람들로 뚜렷이 갈라졌다. 피카소는 원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의견에 화를 잘 냈고 자기의 신념에 대해서는 침묵을 고수했다. 또한 그는 늘 비밀스러웠고 자기만의 세계에 가라앉아 있다가도 삶의 환희로 넘치곤 했다. 이러한 면모는 그가 사랑받은 이유이면서 또한 미움받은 이유이기도 했다. -25쪽
1901년 봄에 피카소는 스무번째 생일을 맞았다. 이것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의미했다. 피카소는 파리로 돌아와 클리시가 130번지에 조그만 방을 얻었다. 이 방은 ‘청색시대’를 예고하는 <청색방>의 실제 모델이었다. 피카소는 청색을 가장 좋아했다. 그는 청색을 통해 세계와 사물을 보았고, 청색 옷을 입고 다녔다. 피카소는 청색이야말로 ‘색중의 색’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기는 ‘청색시대’로 불린다. -36-37쪽
그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복사하는 데에 만족하지 않고 자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만을 취했으며,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기 위해서 무한한 자유를 허용했다. 자연 속에서 그가 보았던 것은 차갑고 아롱진 빛을 발하는 수정 응고체의 면들과 잘려 나간 돌조각의 결정면이었다. 피카소가 존경하던 세잔의 표현을 그대로 빌자면 ‘자연을 원기둥과 구 그리고 원뿔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52쪽
양식적 변화가 기회주의의 소산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피카소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무엇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을때면 그것이 꼭 그렇게밖에 표현될 수 없다고 느끼는 방법에 따라 표현합니다." 피카소가 표현양식을 바꾼 것은 내면 깊은 곳의 필연성에 따른 것이었다. 피카소가 표현의 욕구를 느낀 여러 형태는 분출하는 내면의 흐름과 끓어오르는 사유의 내용에 토대를 두었다. 그에게 양식은 강력한 사유를 표현하는 가장 정확하고 적절한 방법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 시기에 피카소는 사실주의와 입체주의 두 가지 양식으로 작품을 제작했다. -72쪽
"화가란 수집가입니다. 타인들로부터 좋아하는 부분을 취해서 스스로 그린 그림을 수집하지요." – 피카소 -109쪽
"나는 찾지 않는다. 발견할 뿐이다." – 피카소
-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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