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타민 주사 한 대 맞으시겠습니까?
[오마이뉴스 정명화 기자]
 
▲ <공중그네> 책표지
ⓒ2006 은행나무
유쾌한 소설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소설을 읽으며 실컷 한번 웃어보자는 마음으로 책을 구입했다. 누군가는 버스 안에서 절대 읽으면 안 될 소설이라고 했지만, 책장을 열어보니 그 정도로 폭발적인 웃음을 선사하는 책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독자들은 '피식'하고 새어나오는 웃음을 자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공중그네>의 주인공, 정신과 의사 이라부는 정말 특이한 인물이다. 그러니 소설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겠지만, 이런 의사라면 나도 한번 진료를 받아보고 싶을 정도다. 어떤 정신적 질환이 아니더라도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에 인간은 너무나 나약한 존재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자신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조언을 구하고 싶을 때가 종종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때때로 점집을 찾고, 인터넷으로 고민상담을 받는 것일 게다.

이라부에게 찾아오는 환자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이력의 소유자다. 이라부는 환자들에게 일단 무시무시하게 생긴 비타민 주사부터 한방 놓고 진료를 시작한다. 먼저 야쿠자 조직원 세이지가 등장한다. 세이지는, 보통 의사 같으면 고개를 조아리며 무서워 할 야쿠자임에도 정반대로 행동하는 이라부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세이지가 병원을 찾은 이유는 이쑤시개, 연필, 젓가락, 우산과 같이 끝이 뾰족한 물건만 보면 눈을 찌르는 듯한 이미지가 사라지지 않는 공포감에 있었다. 그런 그에게 이라부는 선글라스를 써보라고 권하며, 느닷없이 총을 한번 쏴보고 싶으니 그럴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한다.

다음으로는 공중그네 플라이어 고헤이가 등장한다. 고헤이는 지독한 자기혐오에 빠져 숨쉬기조차 힘든 상태로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병원을 찾았지만 오히려 이라부는 공중그네 견습생이 되고 만다.

세 번째 환자는 강박신경증에 시달리는 의사 다쓰로, 네 번째 환자는 '자기가 생각하는 바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고 그에 반하는 움직임'으로 고통받는 프로야구선수 신이치다. 마지막 환자로 여류작가 아이코가 등장한다.

..작가 생활 5년째에 그 책을 썼다. 가족의 붕괴와 재생을 그린 휴먼드라마다. 다리품을 팔아 자료를 구해 읽고, 공들여 취재를 하며 온 힘을 다해 쓴 작품이다. 가벼운 연애소설에서 탈피하고 싶었다. 영혼을 흔들 만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 보람은 있었다. 출간하자마자 여러 지면에서 소개했고, 대부분 절찬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말을 안 가리는 사쿠라까지 흥분한 목소리로 "이거 걸작인데!"라며 전화를 걸어 왔다. 아이코는 충만한 성취감을 맛보았다. 그걸로 자신도 변신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팔리지 않았다. - 본문 중에서

잘나가는 작가지만 아이코는 심혈을 기울여 쓴 자신의 역작이 팔리지 않는데 상심해 자꾸만 구토를 일으키게 되었다. 그래서 병원을 찾게 되었는데, 이라부는 아이코에게 좀 쉴 것을 권한다. 그러나 프로의 세계에서 쉼이란 곧 잊혀짐을 의미하기에 아이코는 절대 그럴 수 없노라고 말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이라부는 소설이나 한번 써볼까 하고 소설을 쓴다. 아이코는 어이없어 하며 출판사에 이라부를 소개시켜 주게 된다.

이라부를 찾아온 환자 모두는 마음의 병으로 병원을 찾은 이들이다. 각자 자신의 맡은 일로 인해 생긴 마음의 병이었다. 너무 열심히 달려왔기에 생긴 병이다. 그래서 좀 쉬면 나을지도 모르는 병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쉬기를 거부하고 대신 빠른 치료법을 위해 이라부를 찾았다.

그런데, 이라부가 내린 처방은 무엇이었나. 비타민 주사 하나 밖에 없었다. 이라부는 환자가 처해있는 상황에 직접 뛰어들어 그들이 자신의 직업세계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다시 말하면, 그들 스스로 현재의 상황을 환기하게 만든 것이다.

외로운 현대인들이 안고 살아가는 갖가지 문제점들이 소설에는 다섯 가지 직업으로 집약되었지만, 이라부를 찾고 싶은 사람은 정말 많을 것이다. 숨가쁜 달리기를 멈추고, 자신이 살아온 삶을 한번 뒤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이라부를 만난 것에 버금가는 효과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가벼운 웃음과 재미있는 이야기로 속도감 있게 읽히지만, 가볍지만은 않은 소설이었다. 우리의 삶을 한번 되돌아보게 하는 소설 <공중그네>는 오랜만에 만나는 유쾌한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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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와 소녀, 친구가 되다
[오마이뉴스 홍성식 기자]
 
ⓒ2006 오즈북스
여기 오척 단구의 몸으로 전 유럽을 집어삼키고 아시아대륙까지 점령하려 했던 코르시카섬 출신 프랑스 황제가 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일각에선 영웅이라는 평가도 받지만, 19세기 초반 그가 주도한 정복전쟁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 탓에 그를 '무자비한 전쟁광'으로 격하시켜 부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수백만 군대와 프랑스 국민의 존경과 두려움을 동시에 받던 제왕적 권력의 소유자였지만, 영광이 있으면 불명예가 있고 승리의 환호가 있다면 패배의 탄식도 있는 법. 워털루전투에서 패한 나폴레옹은 영군군의 포로가 됐고, 이어 세인트헬레나섬에 갇힌다. 인생무상.

그런데, 이건 또 뭔가? 어느 누구도 감히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던 그 앞에 맹랑한 14살 소녀가 나타난다. 땅을 치며 울고싶은 유배지 세인트헬레나섬에서다.

나폴레옹이 묵게 된 농부의 집. 그 집 딸 벳시 발콤은 바로 얼마 전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황제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뿐이랴, 은근슬쩍 친구가 되려는 제스처까지 보인다. 불경도 이런 불경이 없다. 하지만, 왜일까? 나폴레옹은 그 소녀가 밉지 않다.

'황제와 시골 소녀가 나눈 특별한 우정'을 담아낸 스테이턴 래빈의 소설 <벳시와 황제>(오즈북스·박아람 역)가 번역·출간됐다. "사실과 문학적 상상력을 결합해 나폴레옹이라는 인물과 그 인물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릴 수 있는 이야기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은 책은 2005년 뉴욕공공도서관 '십대를 위한 책', 미국서적상협회(ABA) 선정 청소년 우수도서 등으로 선정됐다.

아래는 둘의 첫 대면을 묘사한 대목이다. 상상력을 동원해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보자. '내가 만약 며칠 전까지 대통령이었던 사람을 코앞에서 본다면'이라는 가정을 하고.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렸다. 맙소사, 내가 얼굴을 맞대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폴레옹이었다. 왜인지를 모르겠지만 황제를 여기서 마주친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는 듯이, 그러니까 아주 태연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프랑스어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 황제는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보았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두 발, 그리고 헤지고 낡은 잠옷에서 잠깐씩 시선이 멈추는 것 같았다….

변질된 오늘날의 우정을 반성케 해주는 황제와 소녀

황제와 시골 소녀의 첫 만남은 이처럼 어색한 그림이었지만, 머지않아 둘은 서로의 내면에 숨겨진 것들을 공유하며 허물없는 친구가 된다. 벳시는 변덕스럽고 독단적인 나폴레옹에게서 친절한 아저씨의 모습을 발견하고, 황제 역시 때묻지 않은 당당한 자세로 자신을 대하는 벳시가 아첨꾼 신하들보다 좋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1821년 나폴레옹이 외롭게 사망할 때까지 '마지막 친구'로 우정과 희망을 황제에게 선물한 벳시. 어깨와 목에 잔뜩 힘이 들어간 근엄한 황제가 아닌 '인간 나폴레옹'의 매력에 흠뻑 빠진 벳시는 유배지의 고통에서 그를 해방시킬 방법을 고심하다 결국엔 역사에 기록될 수도 있었을 '작전' 하나를 세우기도 했다. 그 작전이 뭐였냐고? 궁금증은 책이 모두 해소해줄 것이다.

진실된 우정과 사랑이란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는 것이라는 자명한 진리를 새삼 깨닫게 해주는 <벳시와 황제>는 자신이 사는 아파트 평수와 아버지가 몰고 다니는 차종을 잣대로 친구를 만나는 요새 아이들에게 약이 될 수 있는 책이다.

덧붙여 정보 하나. 책은 곧 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고, 나폴레옹 역은 <데블스 에드버킷>과 <베니스의 상인> 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알 파치노가 맡는다고 한다. 여주인공 벳시 역에 누가 캐스팅될 지 점쳐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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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고매한 식견에서 보자면 당신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탁월한 심리 연구자입니다’라고 프로이트는 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1862∼1931)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털어놓은 적이 있다. 프로이트의 동시대인으로서 그와 같이 비엔나를 무대로 살았던 슈니츨러의 문학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과론적 과학만능주의의 그늘에 가려 있던 여러 금기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밝혀내고 있다. 슈니츨러의 문학에는 성적인 충동과 같은 인간 무의식의 측면들이 이성의 제어를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당신이 여기를 떠날 수 있는 시간이 아직은 남아 있어요. 당신은 이런 곳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에게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아이즈 와이드 셧’의 원작으로 유명한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꿈의 노벨레’에서 호기심에 집단 혼음의식에 잠입한 의사 프리돌린에게 가면을 쓴 낯선 여인은 이렇게 탈출을 종용한다. 프리돌린은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결국 정체가 발칵될 처지에 놓이고 그 낯선 여인의 희생으로 그 곳을 가까스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서구 문학사에서는 이러한 집단 혼음의식의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때로는 그것이 사실적이 아니라 몽환적으로 묘사되어 지기도 하고 때로는―근자에는 ‘다빈치 코드’에서 암시되어지듯이―종교적인 의식의 일환으로 읽혀지기도 한다. ‘꿈의 노벨레’(1926)에서는 이러한 성적 금기의 문제가 남편인 프리돌린에게는 실제의 일로서, 부인인 알베르티네에게서는 꿈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사회종교사적 배경을 모른다 손 치더라도 ‘꿈의 노벨레’에서 이야기되어지는 상황은 평범한 시민의 사회 규범에서 보자면 더 이상 들춰내고 싶지 않은 금기의 영역에 속한다. 헛된 발걸음으로 자칫 침범하지 말아야할 영역을 넘어 갔다고 한다면 짐짓 놀란 눈빛으로 발걸음을 되돌리면 그만일 수 있는 금기의 영역이지만 어느 누구도 한번 깨트린 금기를 되돌릴 수 없어 보이는 것이 보다 인간적이랄까.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아르투어 슈니츨러는 세기말의 비엔나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작가로 여겨진다. 비엔나의 전통적인 부르조아 사회가 물려준 사회규범들 사이에서 꽃 피울 수 있었던 리버럴한 문화적 풍토가 뿌리채 흔들리고 있다는 시대적 진단은 슈니츨러 문학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슈니츨러의 문학적 형상들은 특유의 회의적인 아이러니와 심리학적 엄밀성으로 말미암아 동시대의 전형성을 획득하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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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식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일까
[오마이뉴스 정아은 기자] 돈 많은 부모는 자식에게 얼마만큼의 재산을 물려주어야 할까. 절반? 십분의 일? 아니면 전부 다? 자식이 여러 명일 경우엔 얼마만큼의 비율로 물려주어야 할까. 전부 다 같은 비율로 공평하게 똑같이? 아니 그건 너무 억울하다. 그렇다면 부모에게 조금이라도 더 효도했던 자식에게 좀 더 나누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 <낙타> 겉그림
ⓒ2006 문이당
<낙타>는 시아버지의 돈을 둘러싼 가족의 해프닝의 한가운데에 서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며느리 '고야목'의 이야기이다. 야목의 남편은 야목이 첫 아이를 낳은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을 때 승려가 되기 위해 집을 나간다. 남편이 멀쩡히 살아 있으면서도 생과부 신세가 되어 버린 며느리를 가엾게 여긴 시아버지는 야목을 위해 커다란 레스토랑을 하나 차려주고, 아버지의 풍요로운 재산을 눈독들이던 큰 아들 '민석'은 이를 못마땅해 한다.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주기 보다는 자신의 인생을 즐기려하는 시아버지가 자신에게만은 예외적으로 큰 재산을 마련해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야목. 그녀는 나머지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재산이 많은 부모는 자식에게 그 재산을 물려줘야 한다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민석과 시누이가 파렴치하게 느껴진다.

어느 날 인생의 끝자락에 근접한 시아버지에게 사랑이 나타난다. 인생의 마지막 선물처럼. 그는 남은 인생을 최대한 건강하고 아름답게 살고 싶고, 늘그막에 만난 귀한 인연과 결혼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자식들의 반응은 냉정하고 야멸차다. 오직 아버지 사후의 재산이 갑자기 나타난 여인에게 넘어간다는 사실과, 남은 여인이 짐스러울 것이라는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 자식들.

..."솔직히 까놓고 얘기합시다. 막말로 아버지가 살면 얼마나 사시겠어요. 그러고 나면 최소 20년 이상 그 여자를 어머니로 모셔야 하잖아요. 제수씨나 나나 이런 황당한 경우가 어디 있답디까. 낳아 준 부모도 귀찮아서 갖다 버리는 세상인데, 이 좁은 바닥에서 명색이 어머니라고 자리 차지하고 있으면 나 몰라라 할 수도 없고요. 혹시 알아요? 아직도 임신할 수 있는 상탠지. 그러면 정말 절망이에요. 막말로 나야 어렵다면 어려운 사이가 될 수 있지만, 제수씨는 혼자인 데다 같은 여자라서 편하다는 이유로 이쪽으로 빌붙을 확률이 더 많아요. 그러니까 자신 없어요, 이러면 안 된다니까요. 혹 떼는 절박한 심정으로 매달려도 될까 말까 한 일이에요. 노인네 고집이 엔간해야지요"...

생활자금과 정치자금으로 아버지의 재산 상당부분을 억지로 뜯어내고도 늘 더 받지 못해 불만이었던 시아주버니 민석은 아버지의 결혼발표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야목에게 분노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런 그가 쏟아내는 타산적인 말에 야목은 실소를 금치 못할 뿐이다.

야목은 이해한다. 사랑에 빠진 늙은 노인의 마음을, 그의 인생 말기에 피어난 꽃 같은 사랑이 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지를. 이에 가족들은 야목이 큰 재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시아버지를 싸고돈다고 공격한다. 그러나 야목은 시아버지를 단지 이해할 뿐이다. 그의 노년을. 홀로 사는 이의 외로움을. 역시 홀로 남겨진 자로서 야목은 시아버지를 이해하고, 도와주고 싶고, 그리고 솔직히는 너무나 부럽다.

육신이 멀쩡한 남편이 야목을 영원히 떠나버린 것은 순전히 그의 정신세계 때문이었다. 허공의 무언가를 찾아 헤매던 남편의 눈빛. 부재를 예감하며 느꼈던 사랑. 세상에는 떠나게 되어 있는 자에게서만 나오는 정취 같은 게 있는 법이다. 야목은 '동반자의 부재'를 운명처럼 대물림하는 자신의 인생을 쓸쓸하게 관조하며 사랑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시아버지의 당당한 모습을 남몰래 부러워한다.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에 대해 한참을 생각하게 된다. 부모는 자식에게 어떤 존재인가. 자식은 부모에게 어떤 존재인가. 흔히 말해지듯 부모는 자식의 인생의 반을 이미 결정한다. 그렇다면 자식은 어떤가. 자식도 부모 인생의 많은 부분을 결정하지 않는가. 부모자식간의 돈관계에 대해서도 새삼스럽게 생각해보게 된다. 부모의 재산은 반쯤은 자식의 것이나 마찬가지인가. 부모가 재산을 물려주지 않고 다른 이에게 주거나 사회에 환원한다면 자식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까.

부모가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다.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자식에게도 오히려 장기적으로 더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라고 혹자는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만일 자신의 이야기라고 가정해 본다면 사람들은 과연 그렇게 대답할 수 있을까. 100% 확신할 수 있을까. 부모가 내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아도 나는 서운하지 않다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으니 좋은 일에 쓰시라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모든 인간관계에서 그렇듯, '재화에 대한 욕망'은 부모 자식 관계에 있어서도 복잡한 그물망을 형성한다. 재물에 대한 욕심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끈적끈적한 욕망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성욕보다도 더한.

부모와 자식 관계에 대해 깊게 사유하는 기회를 주는 이 책은 그러나 다른 주제로 옮겨가면 금방 구성적 한계를 드러낸다. 야목이 젊은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상황설정이나 육체적으로만 사랑을 나누는 K의 이야기는 구성이 너무 엉성해서 전형적인 통속소설의 이미지를 준다. 또한 중이 되기 위해 돌도 안 된 딸아이를 두고 가출하는 남편이라는 인물의 성격은 너무 추상적이고 개연성이 없어 이야기 자체에 전혀 울림을 주지 않는다.

야목이 자신 본연의 목소리에 충실하고 싶어할 때마다 나타난다는 짐승의 실체가 낙타라는 설정도 너무 엉성해서 이야기로 그럴싸하게 형상화되지 못하고 있다. 그 낙타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어떻게 해서 소설의 제목이 '낙타'가 되었는지가 소설 전체를 통해 한 번도 제대로 드러나지 못한 채 그저 중간 중간 '털갈이하는 짐승'의 이미지로 모호하게 나타날 뿐이다.

시아버지와 며느리라는 관계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조명하여 부모 자식간의 여러 문제, 특히 금전 문제에 관한 근본적 의문을 이야기로 형상화해낸 것은 이 소설이 갖고 있는 특별한 미덕이다. 그러나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그 밖의 여러 화두들은 결국 이야기로 형상화하지 못하고 결국 큰 줄기의 이야기마저 훼손하고 있다. 중간 중간 나타나는 작가의 감각 있는 문장들을 생각해볼 때 자꾸만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아쉬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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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바 '오타쿠 문화'(또는 '폐인문화')에 빠져 지내는 현대 젊은이들의 감성적 문화코드를 유쾌하게 그려낸 일본의 나오키상 수상작가 이시다 이라의 신작소설 '도쿄 아키하바라'(이가서ㆍ전2권)가 번역돼 나왔다.

소설의 배경은 서울 용산전자상가와 비슷한 도쿄의 아키하바라. 최신식 기기가 눈 깜짝할 새에 구식이 돼버리고 무언가에 한없이 빠져 지내는 '폐인'들이 넘쳐나는 뒷골목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풍부한 지식을 가진 페이지. 뛰어난 음감과 리듬감을 타고난 다이코. 법대를 졸업한 달마. 최고의 격투기 소녀 아키라. 어떤 프로그램도 해킹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이즈무. 인터넷 고민상담 사이트 운영자 유이.

이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특별한 능력을 지닌 소위 '폐인'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또한 가슴 속 깊숙이 자신만의 고민을 가진 외로운 인물들이기도 하다.

페이지는 심한 말더듬이며 다이코는 여성공포증이 있고 달마는 은둔형 외톨이다. 아키라는 뛰어난 미모 때문에 오히려 콤플렉스가 있고, 유이는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

유이가 운영하는 인터넷 고민상담소를 통해 우연히 한데 모인 이들은 아키라의 아이돌 사이트를 개설한 뒤 인공지능 검색엔진 크루크를 개발해 인터넷 유저들의 폭발적 인기를 끌어낸다.

이들의 욕심은 자신들의 생활에 필요한 정도의 돈을 버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필요없다. 검색엔진 크루크도 모두가 무료로 자유롭게 쓰길 바란다. 이것이 '폐인'들의 순수함이다.

그러나 거액을 제시하며 크루크 매수를 제안했다가 거절당한 디지캐피 사의 나카고미가 페이지 일행 사무실을 습격해 크루크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훔쳐가는 일이 벌어진다. 결국 6인의 '폐인'들은 크루크 탈환을 위한 깜찍한 테러를 계획하는데….

은둔형 외톨이, 오타쿠, 이종격투기, 인터넷 댓글문화, 플래시몹 등 기성세대가 우려의 눈길로만 바라보던 새로운 시대의 감성코드를 작가는 긍정적 시각에서 풀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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