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을 줄 모르는 '나니아 연대기' 인기 … 관련 서적 줄이어

 

J R R 톨킨의 '반지의 제왕', 어슐러 르귄의 '어스시의 마법사'와 함께 세계 3대 팬터지 소설로 꼽히는 '나니아 연대기'. 전 세계 41개 언어로 번역돼 지금까지 8500만 부 넘게 팔린 팬터지의 고전이다. 국내에는 시공주니어에서 1996년 7부작 세트가 출간됐고 2001년 개정판이, 지난해 11월 영화 개봉에 맞춰 합본호가 나왔다. 7부작은 2001년 이후 약 50만부가, 합본호는 출간 넉 달째인 최근까지 13만부 이상 팔려나가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 덕에 '나니아 연대기 읽는 법'에 대한 관련 책들도 줄 잇고 있다. SF와 팬터지에 관심이 많은 소설가 송경아씨가 '나니아 연대기'의 매력을 해부한다. 옷장 문 뒤에는 도대체 어떤 마법의 세계가 있을까.

'나니아 연대기'를 어렸을 때 접한 사람들의 체험은 대부분 비슷하다.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이라는 묘한 제목의 책을 든 채 한두 쪽 넘겨본다. 그러다가 주인공 루시와 함께 옷장 속으로 들어간다(어린 독자들 중 여럿은 이 책을 읽기 전에 벌써 옷장 속을 한두 번쯤 파고들어 본 경험이 있다. 아늑한 옷장 안은 어머니의 뱃속 같은 느낌일까?). 가로등이 서 있는 눈 덮인 황야에서 우산을 쓰고 가는 파우누스(상반신은 사람이며 하반신은 염소의 모습을 한 숲의 정령)를 만날 때쯤이면, 어린 독자들은 이미 나니아의 세계에 매료돼 있다.

성스러운 사자 아슬란이 인간과 말하는 동물의 세계로 창조한 나라, 그후 2555년 동안 존재하다가 사라진 가상의 나라 나니아. 이 나라의 이야기를 그린 '나니아 연대기' 7부작은 출간 직후부터 날개돋친 듯 팔려나갔고, 출간 후 50년이 넘도록 상상력 풍부한 어린이들의 벗이 돼왔다. 과연 이 책을 쓴 사람은 누구이며, 그는 왜 '나니아 나라'를 창조했을까?

저자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흔히 C S 루이스라고 쓴다)는 1898년 11월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책이 가득한 집에서 말하는 동물과 기사 이야기를 읽으며 자랐다. 열 살 때 어머니를 여읜 뒤 아동을 학대하는 기숙학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옥스퍼드대에 입학해 그리스어.라틴어.고전철학.영어영문학에서 수석을 차지하고 옥스퍼드대 특별연구원이 됐다.

루이스가 '나니아 연대기'를 쓰게 된 경위에서 뺄 수 없는 것은 '반지의 제왕'의 저자 J R R 톨킨과의 우정이다. 그들은 동료(옥스퍼드대 영어학부 교수)로 처음 알게돼 서로의 글을 비평하고 신화와 철학을 주제로 토론하며 평생에 걸친 우정을 쌓았다. 무신론자였던 루이스는 1931년 기독교 신앙으로 귀의하는데, 여기에는 톨킨의 설득이 큰 역할을 한다. 독신의 고전영어 교수가 49년 어린이를 위한 팬터지 동화 '나니아 연대기'를 쓰게 된 데에도 20여년에 걸친 톨킨과의 우정과 교유가 큰 힘이 됐을 것이다(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톨킨은 '나니아 연대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기독교의 산타클로스, 그리스의 님프와 사티로스, 박쿠스, 노르웨이의 난쟁이와 거인 등 서로 다른 신화적 전통에 속하는 인물들이 함께 어울려 자유로이 돌아다닌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나니아 연대기'를 흠잡는 사람들이나 칭찬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이 책이 갖는 강력한 기독교적 함의다. 루이스도 인정하고 있듯이 7부작 중 '마법사의 조카'는 천지 창조 이야기와 악(惡)이 나니아에 숨어들어온 이야기를, '사자와 마녀와 옷장'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캐스피언 왕자'와 '말과 소년'은 기독교에 대한 귀의를 보여준다. '새벽 출정호의 항해'는 영적인 생활에서 마주치는 여러 가지 모험을, '은의자'는 어둠의 세력과 벌이는 끊임없는 전쟁을 예시한다. '마지막 전투'는 적(敵)그리스도의 도래와 함께 오는 세계의 종말에 대한 이야기다. '나니아 연대기'는 성서와 상응하는 나니아의 창세기로 시작해 묵시록적 종말로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의 동화화'라는 것만으로 이 책이 지금까지 수많은 어린이와 어른들의 사랑을 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니아 연대기'의 매력은 오히려 성서의 해석과 아울러 기독교에 한정되지 않은 여러 가지 신화 속의 인물과 중세적 전통, 말하는 동물들이 누리는 삶의 기쁨, '나니아의 예수'인 위험하고도 선하고 아름다운 사자 아슬란, 옷장.기차역이나 벽에 걸린 그림처럼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일상적인 물건 속에 또 다른 나라로 가는 길이 있다는 믿음, 이 모든 것이 함께 어우러진 결과다. 특히 마법의 나라로 통하는 문이 바로 우리 곁에 있다는 믿음은 너무도 강력하고 생생해서, '나니아 연대기'를 읽은 많은 아이들은 옷장 속에서 몇 시간 동안 나니아로 가는 길을 찾곤 했다. 해리 포터가 킹스 크로스 역 9 ¾ 승강장에서 호그와트 마법학교로 떠날 때, 아이들은 50년 전 학교로 돌아가는 기차역에서 마법을 통해 나니아로 불려들어간 페번시가(家) 아이들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송경아 소설가

깊이 읽고 싶다면 …

'나니아 연대기'는 '반지의 제왕'처럼 물샐 틈 없이 꽉 짜인 이야기가 아니다. '나니아 연대기'의 아이디어가 활달하고 창조적인 만큼 집필도 즉흥적이기도 했다. 오죽하면 작가 루이스가 세상을 뜨기 며칠 전까지 담당 편집자를 만나 이야기의 빈 곳을 메우는 문제를 상의했을까. 관련서가 많이 나오는 이유도 허술한 듯 하면서도 다양한 함의를 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니아 연대기'를 한 번 정도 읽고 나니아가 어떤 나라인지 한 눈에 보고 싶은 독자에게는 '나니아 연대기 가이드북'(마사 새몬스, 루비박스)과 '나니아 연대기 해설집'(콜린 듀리에즈, 규장)이 도움이 될 것이다. 각 권의 줄거리를 비롯해 나니아의 역사.지리, '나니아 연대기'의 신화적 상징을 정리해주고 있다.

'나니아 연대기'의 주제를 권별로 탐구하려는 독자는 '나니아 가는 길'(피터 J 섀클, 베이스캠프)이 좋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사자 아슬란과 바커스.파우누스 등의 이교도적 상징이 빚어내는 부조화를 눈여겨 본 독자라면 'C.S. 루이스와 나니아 나라 이야기'(데이비드 다우닝, 지식과사랑사)도 일독할 만하다.

혹 팬터지를 받아들이기엔 나이를 먹었다고 생각하는 독자는 '다시 찾아간 나니아'(샤나 코히 엮음, 랜덤하우스중앙)를 읽으면 어떨까. 신학과 문학 비평에서부터 '진보적 페미니스트이며 불가지론자인 내가 나니아를 사랑하는 이유'같이 미시정치적인 측면까지 두루 담고 있다.

▶기자 블로그 http://blog.joins.com/center/journalist.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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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리 포터 철학교실

톰 모리스 외 지음, 강주헌 옮김

재인, 358쪽, 1만5000원

이런 유형의 제목을 붙인 책은 일단 의심이 간다. 원작의 인기에 기대보려는 생각에 급조한 경우가 많아서다. 저자가 여러 명일 경우 특히 그렇다. '톰 모리스 외 16인의 철학자'가 지은'해리 포터 철학교실'역시 이런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그럼에도 이 책을 소개하는 이유는 하나다. 속편이 나올 때마다 세계 출판시장을 들었다 놓는 '해리 포터'시리즈에 대해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독서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텍스트에 대한 비판 능력이 부족한 어린이. 청소년 독자가 많은 소설이기에 이같은 제안이 더욱 반갑다.

이 책은 몇 가지 측면에서 '해리 포터 '시리즈에 대한 '뒤집어 보기'를 시도한다. 대표적인 것이 마법사들의 집안 일을 돌보는 '집 요정' 문제다. 소설에서 집 요정들은 사실상 노예다. 이 부분을 쓴 스티븐 패터슨(미국 매리그로브대 조교수)은 "이 시리즈에는 끔찍할 정도로 많은 차별 행위가 엿보인다"고 말한다. 말포이 같은 악당은 그렇다 치더라도, 해리 포터 같은 '착한' 인물들까지 노예 노동에 눈을 감는다는 것이 말이나 되느냐는 얘기다.



해리의 절친한 친구 론은 심지어 "(집 요정은) 노예로 지내는 걸 좋아한다"('해리 포터와 불의 잔' 2권 60쪽)는 말까지 서슴지 않는다. 수 백년간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삼았던 서구인들의 자기 합리화와 거의 비슷하다.

패터슨은 "마법 세계의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죽음을 먹는 자들'과 선한 세력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데, 한가하게 집 요정의 권리나 읊어댈 때가 아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통렬한 비판을 가한다. '안보'를 위해서 '사회 정의'를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실 시리즈의 저자 조앤 K 롤링도 주요 등장인물인 덤블도어 교수의 입을 빌어 이 문제에 대한 '반성'의 뜻을 밝힌 바 있다. "우리 마법사들은 오래 전부터 다른 종족들을 홀대하고 지나치게 부려왔지. 그래서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거야."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5권 241쪽)

이와는 다른 관점에서 '해리 포터'시리즈의 남녀 평등 사상을 해석하는 부분도 흥미롭다. 미미 글래드스틴(엘파소 텍사스대 교수)은 "소설 속에서 좋은 사람과 악인, 능력있는 사람과 무능력자의 구분은 성별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말한다. 이것이 이 시리즈가 진정한 양성 평등을 주장하고 있는 증거란 것이다. 그는 마법사들의 운동 경기인 '퀴디치'가 남녀 혼성팀으로 치러지는 것도 이같은 사고 방식의 표현이라고 해석한다.

이 책에는 '철학 교실'이란 제목답게 인식론.존재론 등 본격적인 철학 주제를 다룬 글들도 실려 있다. 아쉬운 점은 글의 수준이 고르지 못하다는 점이다. 어떤 저자의 글에는 성인도 쉽게 이해하기 힘든 아인슈타인상대성 이론이 등장하고, 어떤 저자는 초등학생에게 도움이 될 법한 충고를 하기도 한다. 순서대로 읽는 대신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 부분만 골라 읽는 것이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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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3-25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작가가 쓴 해리포터 사이언스, 에 이어 이런 책도 나왔군요... 흥미있겠어요.
 

살림의 여왕 김혜영에 도전하는 요리의 여왕

19년째 MBC표준FM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쇼‘를 진행해 온 방송인 김혜영(44)씨의 별명은 ’살림의 여왕‘이다.

TV를 통해 공개 된 그녀의 살림솜씨는 혀를 내두를 만 했다.

주방 조리기구 하나하나까지 구별해 놓은 정리정돈 기술과 스무 명 손님상도 뚝딱 차려내는 요리솜씨. 못하는 게 없는 만능 재주꾼의 모습이었다.

요리 대가들이 출연하는 요리 프로 EBS ’최고의 요리 비결‘의 진행자로 4년간 활약 하며 쌓은 요리 노하우로 <김혜영의 싱글벙글 요리>(중앙m&b. 2006)라는 책도 냈다.

방송, 살림, 요리 모두에 능한 김혜영이지만 ‘네이버 요리 블로그 부문 1위’에 빛나는 ‘로즈의 풀 하우스‘( http://blog.naver.com/jheui13 ) 운영자 현진희씨 앞에선 위기감을 느낄 만 하다.

하루 평균 방문자수 5000명이 넘는 놀라운 히트수를 자랑하는 블로그 주인 현씨는 평범한 주부.

결혼 초 집안 행사에서 ‘썰기’ 조차 제대로 못한 현씨는 자신이 만든 요리에는 손도 대지 않고 시어머니가 만든 짱아지에만 젓가락을 내밀던 손님들을 보며 “배우고 말겠다”는 결의를 다졌다고 한다.

궁중요리사 출신 증조 시할머니부터 내려온 시집의 ‘요리비법’을 배우기 시작했고 혹독한(?) 시어머니의 훈련과정을 거쳐 요리의 여왕이 됐다.

현씨가 올리는 요리사진과 레시피에 방문자들은 ‘퍼가요~’라는 덧글을 남기며 열광적으로 스크랩한다.

블로그 내용을 수정, 보완해 낸 <베비로즈의 요리비책>(21세기북스. 2006)는

▲손맛의 깊이가 느껴지는 생활요리 ▲우리집에 오시는 특별한분께 ▲사랑하는 아이를 위한 요리 ▲남편과 오붓한 시간을 위한 요리 ▲가족을 위한 특별 건강식 ▲우리 가족 외식하고 싶은 날

로 구성돼 있다. 비싼 재료비가 드는 요리보다는 가족을 위한 사랑으로 빚어진 소박한 요리들이 담겨있다.

시중에 파는 상품에 버금가는 고소한 크래커, 빵도 어렵지 않게 만들어 내는 요리솜씨도 돋보이지만 살림 솜씨도 만만치 않다.

페트병을 이용한 밀폐용기 만드는 법, 안 입는 겨울 니트 옷 정리법, 요구르트 케이스를 이용한 싱크대 정리법 등 ‘센스’ 빛나는 살림솜씨 덕에 SBS TV `생활의 달인` KBS2TV `세상의 아침` 에 출연하기도 했다.

현씨에겐 “골라 달라”며 주방가전, 조리용품 리스트를 보내오는 ‘의뢰형’ 쪽지와 메일이 폭주한다고 한다. 살림과 요리에 관심 많은 이들의 ‘멘토어’ 역할도 해주고 있는 셈이다.

오늘 ‘딱히’ 저녁식탁 메뉴가 생각나지 않는 다면 <베비로즈의 요리비책>(21세기북스. 2006) 들춰보며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장금이’로 변신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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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종교가 아니다!"
[오마이뉴스 최성민 기자] 벌써 곡우(4월 20일)가 2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곡우는 봄의 마지막 절기이자 '곡식을 위한 비'가 내려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때여서 농촌 들녘은 부산해진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곡우는 차인(차를 만들거나 차 마시기를 좋아하는 이)들을 한껏 설레게 하는 절기이기도 하다.

이른바 '우전차'라는 것 때문인데, 곡우전에 나오는 연한 잎의 차를 우전차라 하여 가장 좋은 차로 여긴다. 맛과 향이 연하면서도 그윽하고 깊어서 잘 빚어진 우전차를 마시면 가히 선경에 이를 수도 있다.

그런데 웰빙을 부르짖는 오늘날, 차가 웰빙식품의 대표격으로 뜨고 있는 현실에서 우전차니 무슨 차니 하는 차의 이름과 종류와 차의 질을 제대로 알고 차를 대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리고 국내 대규모 제다공장에서 나오는 차 가운데 '선다일미'의 말뜻을 풀어주거나 '끽다거'라는 상징어의 목적어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을 만큼 향과 맛을 갖춘 차가 과연 하나라도 있을지 의문이다. 대중은 그저 차가 몸에 좋은 건강식품이라는 매스컴의 호들갑에 커피 대신 티백 녹차를 마시고 녹돈 삼겹살을 좇고 녹차 화장품을 선호할 뿐이렸다.

또한 번잡한 준비와 까다로운 형식 때문에 차 마시기를 기피하는 사람들 가운데 '다도'라는 이름의 형식주의와 엄격주의가 왜색 차문화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요즘 농약 묻은 중국 차가 이땅에 범람하는 '차 사대주의' 사태 속에서 진정한 우리 차와 차문화를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중국 차의 밀어붙이기에 한국 차의 판매가 줄면서 '한국 차 위기 상황'이 심각하게 거론되고 있다. 한국 차 무엇이 문제인가?

 
▲ <혜우스님의 다반사> 책표지
ⓒ2006 초롱
<혜우스님의 다반사>(부제 '오롯한 차 만들기, 차 쉽게 마시기')는 이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책이다. 햇차가 나오는 시기에 맞춰 20여년 간 오로지 토굴에서 '차 안거'를 해 온 저자(순천 혜우 전통덖음차 제다교육원 원장)가 한국 최초로 제다법과 차 생활의 대중화를 위해 자신의 '차 수도'를 혼신의 대중언어로 풀어놓았다.

이 책을 내게 된 동기는 요즘 우리 전통차와 차문화의 참모습 찾기보다는 형식과 허례허식, 차 호사에 치우쳐 차에 관한 인식이 심각하게 왜곡되고 있는 현실에 화두를 던지기 위한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 차 문화 왜곡의 주범인 '전통 제다법'의 문제점에 대해 신랄히 지적하고 그 해결을 명쾌히 제시하고 있다. 즉 한국 전통차가 가마솥 덖음차인 이유, '전통 덖음차 제다법'으로 잘못 알려진 '구증구포'에 대한 오해와 진실, 오롯한 차 덖기, 좋은 차와 그른 차 구별 및 그른 차를 좋은 차로 치유해 바꾸기 등 일찍이 다른 제다인들의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한국 차의 치부에 대해 가르침을 내놓고 있다.

즉 차의 출발은 차 만들기(제다)인 바, 그동안 국내에서는 차가 인기상품으로 뜨면서 차 상업주의 팽창 속에 차의 가격 수준에 걸맞은 차의 질에 대한 고민과 토론은 기피돼 왔다. 일부 고가의 차를 내는 제다인들은 자신의 제다법이 마치 전가의 보도인 양 공개를 마다하고 자신의 차가 천하의 명차인 양 배타적인 행태를 보여오고 있다.

그 결과 최근 들어 한국 전통차가 정체성의 방황 속에서 인기가 시들해지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 '차사대주의'가 겹쳐 허례허식의 일본식 다도가 횡행하고, 값싸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보이차 등 중국 차가 밀려 들어와 한국 전통차와 차문화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진단이다.

한국 전통차 제다 및 차 생활에 관한 유일한 고전은 조선 후기 초의선사의 <다신전>과 <동다송>이 있다. 그러나 문화와 차 환경이 바뀐 현대에 이르러 이 두 저술은 한국 전통차의 고전은 되고 있으나 시대에 걸맞은 정밀한 제다나 상세한 차 생활에 대한 지침이 더 요구돼 왔다.

특히 중국에 차 학과가 무수히 많고 일본이 10여 곳의 차시험장을 운영하면서 제다법 및 차 품질관리, 특히 비료와 농약을 사용을 줄이는 품종개발 등에 국가적인 힘을 쏟고 있는 반면 한국은 민간 차원의 차 상업주의만 극성을 부릴 뿐 옳은 제다법 기준 마련이나 차의 품질 제고에 관한 공적인 관심이 전무한 상태이다.

이런 차에 <혜우스님의 다반사>는 '오롯한 제다법'을 비롯한 제다와 차 생활 전반에 관해 저자가 '토굴 차 생활 수도' 현장에서 오랜 기간 몸소 겪은 고민과 해법을 쉬운 말로 풀어놓은 것이기에 한국 전통차와 차 생활의 이해에 대중을 전례없이 쉽게 인도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이 책에 대해 한국 전통차의 본가인 해남 대흥사 주지 몽산스님은 "초의스님이 <다신전>을 쓰실 적 품었을 법한 고민과 같은 맥락을 갖고 있는 다서로서, 이 책이 초의스님 이후 한국 차문화를 재정립하는 작은 초석이 되기를 기대한다"면서 일독을 권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차는 종교가 아니다!"라고 외치고 있다. 이는 차에 대한 신비주의와 허영과 우상을 단박에 허물어 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 한마디로 그동안 차에 주눅 들어 감히 범접하기를 주저했던 사람들이 허물없이 차에 다가갈 수 있게 됐다.

이 책은 차에 대한 허례허식과 중구난방식 주장으로 오히려 차로부터 멀어지게 된 대중들로 하여금 다시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차 곁으로 다가오게 할 것이다. 특히 차계에서는 <혜우스님의 다반사>가 차를 생업으로 하는 차 농가들에게 쉽고 제대로 된 제다법을 가르쳐줌으로써 제다의 교과서로 쓰일 것이며, 차 생활의 허영과 위선을 벗겨줌으로써 일반인들의 차 생활을 한결 가볍게 인도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저자 혜우스님은 섬진강변 순천시 황전면 비촌리 비룡초교 폐교자리에 '혜우 전통차 제다교육원'을 열고 차농가들에게 무료 제다교육을 베풀고 있다. 이는 자신의 검증 안 된 제다법을 보물단지처럼 껴안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표가 될만한 일이라고 하겠다.

'혜우 전통 덖음차 제다 교육원'(전화 011-9308-7979)은 해마다 제다시기의 절정기인 5월 중순 이후 차 농가와 일반인들에게 무료로 전통 덖음차 제다 교육을 실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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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폭력이 앗아간 '들소의 꿈'
[오마이뉴스 임흥재 기자]
 
ⓒ2006 시공사
김남중의 장편동화 <들소의 꿈>(낮은산 간)은 어린이를 위한 동화라기보다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이다. 오랜 가뭄으로 마른 풀조차 구경하기 힘든 척박한 들판이지만 들소들은 자신의 땅에서 굶주림을 견디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중이다. 자연에 순응하며 본능에 충실하며 살아가는 들소들의 들판에 어느 날부터인가 들소들의 '질주'가 사라졌다.

그 들판에 인간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질주'하지 못하는 들소는 이미 들소가 아니듯 인간이 점령하기 시작한 들판은 더 이상 들소들의 들판이 아닌 것이다. 들소들의 들판은 미군의 군홧발에 유린당한 오늘날의 이라크를 상징한다. 들판을 점령한 인간은 곧 미국(본문에서는 '소맥국'이라 지칭된다)이다. 정확히 말하면 미국을 비롯한 인간의 폭력을 은유한다.

들소가 있다. 무리 중에서도 열등들소에 속하는 '깨진뿔'이다. 굶주림에 지친 깨진뿔은 먹을 것을 찾아 온 들판을 헤매인다. 자신도 자신이지만 임신한 아내 '고운눈'을 먹여야 한다. 그러나 계속된 건기에 풀뿌리조차 말라 죽은 사막에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인간들이 친 남쪽 울타리로 가면 인간이 주는 건초더미가 있는 것을 알지만 차마 그곳으로 갈 수는 없다. 들소의 자존심이다. 들판의 주인인 들소로서의 자긍심이다. 물론 대장로 '서리갈기'의 감시도 두렵다.

깨진뿔의 아내 고운눈 역시 열등들소다. 숱한 병치레로 제 몸 하나 건사하기에도 힘들다. 그러기에 저 같은 들소를 사랑해주는 것이라 깨진뿔은 생각한다. 벌렁코, 눈곱쟁이, 처진눈, 잘린꼬리, 침줄줄이 등등 깨진뿔의 친구 모두 무리에서 소외되어 하루하루를 눈치나 보며 살아가는 열등들소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위해주며 힘든 삶을 살아내는 중이다.

▲ 라스코 동굴벽화의 들소와 사람. 원시공동체에서도 들소를 잡기 위한 수렵은 행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생존을 위한 꼭 필요한 양만큼을 사냥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더 가지려는 인간의 탐욕이 생겨나면서 인간과 자연의 공존은 깨어지기 시작한다.
ⓒ2006 시공사
깨진뿔에게는 그래도 꿈이 있다. 자신의 분신이 곧 태어나는 것이다. 그 아이가 태어나는 날, 깨진뿔은 아이에게 '큰머리'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다음과 같이 축원한다.

"빗방울이 모여 강물이 흐르듯/ 수만 년을 잇는 생명 중 하나/ 오늘 태어난 큰머리는/ 특별한 사랑을 받을 것이며/ 더 큰 사랑을 나눠 줄 것이며/ 용맹보다는 지혜로/ 배부른 오만보다는 배고픈 이해로/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리라/ 그리하여 이 험난한 때를 살아남아/ 훗날/ 모래알 같을 자손을 인도하는/ 장로가 되기를/ 아버지의 권리로 축복함이라"

그러나 아버지의 기대대로 살아갈 수 있는 들판은, 세상은 이미 아니다. 들판의 황금(석유일 것이다)에 탐이 난 인간의 욕심과 자신의 헛된 야욕과 망상에 사로잡힌 지도자 '황금뿔'(후세인을 은유한다)의 무모한 도발은 들소들의 생존을 앗아가 버렸다. 황금뿔의 도발을 분쇄한다는 명분으로 들판을 점령한 인간의 폭력은 들판을 날틀(비행기)의 불쏘시개로 위협하면서 들소의 질주를 금한 것이다. 이제 땅의 주인은 달리는 본능까지 빼앗긴 신세가 되었다.

마을에 징이 울리고 모인 사람들 앞에서 군관은 두 명의 장정을 선발한다. 저 멀리 동맹국(소맥국)의 전쟁터에 나갈 사람인 것이다.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재건대의 일원으로 참가하는 것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고 매달 지급되는 백미 두 가마면 농사짓는 것보다 훨씬 나은 일이니 축복인 것이다. 순심이와 결혼할 꿈에 부푼 용신이 친구 순철을 대신하여 들소의 땅으로 가는 배에 오른다. 소맥국이 벌인 전쟁에 이 땅의 젊은이가 참전하는 것이다.

들판에서 군막을 치고 울타리를 치던 용신에게 독사에 물린 송아지 한 마리가 발견된다. 농사를 짓다 참전한 용신에게 송아지는 들소이거나 고향의 누렁이거나 같은 대상으로 다가온다. 송아지를 치료해준 후로 용신과 송아지는 친구이자 부모 자식 같은 사이가 된다. 송아지는 큰머리다. 그렇게 남의 전쟁에 끌려간 젊은이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전쟁터에 내동댕이쳐진 들소는 사랑과 우정을 나눈다. 그러나 그들 앞에 놓여 진 운명은?

"장차 우리가 만든 울타리 안으로 들소들을 다 몰아넣을 거라네. 건초를 끊이지 않고 대 주면 들소들이 배 굶을 이유는 없을 테고, 그렇게 들을 비워서 황금을 캐내려는 소맥국의 계획이 있어."(97쪽)

"그래서 소맥국에서는 이 기회에 들소를 아예 근본부터 고쳐 놓으려고 한다는 거야. 황금뿔이란 놈이 옥에 있는데도 전쟁이 끝나지 않는 이유가 그거야… 그러려면 말 안 듣는 들소들을 다 잡아 죽이거나 남은 놈들이 울타리에 익숙해져야 하는데 이놈들도 눈치가 있거든."(98쪽)


인간의 폭력 뒤에 숨겨진 욕망의 정체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들소들의 땅인 들판에 인간이 진주하는 순간부터 인간의 탐욕과 자연으로부터 물려받은 들소의 본능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전쟁은 불가피하다. 때문에 들소들은 저항하지 않을 수 없다.

"죽지 않을 만큼은 먹을 수 있겠지. 하지만 우리의 삶은 이런 게 아니었어. 우리의 자유는 어디로 간 거지?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자유는 반골들소들의 자유와 군인들이 주겠다는 자유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았다. 황금뿔도 군인도 열등들소도 우등들소도 없는 자유, 그런 세상이 올까?"(86쪽)

깨진뿔의 자조 섞인 이 독백에서 기자는 최인훈 작 <광장>의 이명훈을 생각하였다. 하필이면 들소일까? 하는 물음에서는 이문열의 오래된 이야기 <들소>를 생각하였다. 가장 오래된 인류의 모습과 함께 등장하는 들소는 공동체 생활이 무너지고 사유재산의 욕망이 성립되고 권력이 형성됨으로 인하여 빚어지는 인류애의 실종과 그 맥이 닳아 있다. 생존을 위한 수렵에서 더 갖기 위한 전쟁의 태동을 상징하는 것이다.

바야흐로 역사의 시원에서부터 인간의 탐욕은 전쟁이란 수단을 통해 늘 정당화 되었다. 저자는 그래서 묻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일으킨 전쟁은 당신 아이의 미래를 위한 건가요?" 그렇다면 "당신 아이를 위해 다른 아이의 부모를 해칠 수 있는 건가요?"

큰머리와 용신의 순결한 우정은 인간의 욕망에 의해서 애초부터 비극적 결말이 정해진 불행일 뿐이다. 저자는 인간의 폭력에 의해 무참히 깨어진 들소의 꿈을 통해 우리에게 따끔한 충고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돌아보면 슬픈 역사가 너무 많습니다.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한다면 미래에 또 일어날 일들입니다." -저자 서문

이 밤 들판을 무리지어 내닫는 들소의 질주를 꿈으로나마 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임흥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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