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138g 대 1.95kg.

책도 양극화(?)의 강풍을 받은 탓일까. 신문 한 부 무게(290g)에도 못 미치는 가벼운 책들이 잇따라 출간되고 있고, 한편에선 어지간한 아령 무게인 2kg에 육박하는 두꺼운 책들도 쏟아져 나온다.

보통 300∼400쪽짜리 책 한 권의 무게는 450∼550g 수준. 평균을 이탈해 경량화, 비대화해가는 책들은 성격도 두께만큼 다르다.

100쪽 안팎의 가벼운 책들은 인터넷 지식검색 시대를 맞아 기존 책보다 날렵한 기동성으로 시대의 현안에 대답하려 한다. 반면 1000쪽이 넘는 두툼한 책들은 디지털 데이터가 도저히 지닐 수 없는 ‘책의 물질성’에 승부를 건다.

가벼운 책의 대표 격은 삼성경제연구소가 펴내는 ‘Seri 연구에세이’시리즈. 2002년 펴내기 시작했으며 올해 들어서는 거의 매주 한 권꼴로 새 책이 나온다. 이번 주에도 49권째인 ‘역사에서 발견한 CEO 언어의 힘’이 출간됐다. 이 시리즈는 내년 2월까지 매주 출간될 책이 이미 확정됐다.

임진택 삼성경제연구소 출판팀장은 “각 분야 전문가가 쉬운 글쓰기를 통해 대중과 만나고 한국사회의 과제에 대안을 제시하는 지식의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 시리즈의 목표”라고 설명했다.

출판팀은 영역을 ‘좁고 깊게’ 잡아 100쪽 기준으로 원고를 받는다. 먼저 내다보는 문제제기가 이 시리즈의 강점. 고령화 사회가 본격적인 이슈가 되기 전에 ‘늙어가는 대한민국’을 펴내는 식이다. 책 주제 공모를 할 때 연구소 싱크탱크가 뒷받침이 되므로 가능한 일이다.

   
 
광고를 하지 않는데도 시리즈 중 ‘CEO 칭기스칸’은 10만 부가 넘게 팔렸다. 지난해 나온 최재천 교수의 ‘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도 2만1600여 부가 팔렸다.
 
 

2003년부터 지금까지 223권이 나온 살림지식총서도 100쪽 이내의 얇은 책으로 지식의 쉬운 전달과 기동성을 중시한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이슈가 됐을 때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을,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섰을 때 ‘신용하의 독도이야기’를 펴냈다. 기획부터 출간까지 두어 달에 끝나는 신속함이 장점이다.

반면 헤비급 책들은 한 손으로 들기 힘들 만큼 두꺼운데도 고정 독자가 많다.
 


단행본 7권을 1080쪽 한 권으로 묶은 ‘나니아 연대기’는 지난해 11월 중순 출간 이후 지금까지 16쇄를 찍고 15만 부가 넘게 팔렸다.

시공주니어 박진희 과장은 “성인용으로 두꺼운 한 권을 만드는 일에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판타지 마니아 독자층이 있어서 승산이 있다고 봤다”고 말했다.

1376쪽짜리 ‘히치콕’을 펴낸 을유문화사 정상준 상무는 “책을 여러 권으로 분철하면 특유의 아우라(Aura·흉내낼 수 없는 분위기)가 없어져 한 권으로 냈다”면서 “한 줄도 빼지 않고 완역했기 때문에 원서보다 더 두껍다”고 말했다.

두꺼운 책의 효시는 들녘출판사가 2001년에 낸 768쪽짜리 책 ‘교양’이다. 당시 출판사는 책이 너무 두꺼워 분철하려 했지만 흐름이 끊기는 통에 ‘울며 겨자 먹기’로 한 권으로 냈다. 이 책은 지금까지 35만 부가 팔렸다.

책이 두툼해지는 것은 얇아지는 책들이 신속한 지식의 전달에 중점을 두는 것과 정반대의 길이다. 장은수 황금가지 대표는 두 경향 모두 인터넷 시대가 가져온 지식환경 변화의 산물이라고 해석했다.

“일본에서는 현안에 신속하게 대응하고 콤팩트한 책을 신서(新書)라고 부르는데, 인터넷 검색 지식보다 깊으면서도 미디어처럼 발 빠른 대응을 모토로 삼는 책이다. 한국에서는 경제경영서에서 이 같은 경향이 활발한데 곧 인문학, 사회과학 분야로도 확장될 것으로 본다. 반면 두꺼운 책들은 인터넷의 무료 지식으로 해소할 수 없는 앎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무겁고 펴기도 힘들지만 그렇기 때문에 책이고, 특유의 읽는 맛을 지닌다. 요즘은 책 안 읽는 사람은 떨어져 나갔지만 읽는 사람은 더 읽는 시대다. ‘정독’을 요구하는 책을 찾아 읽는 고정 독자층이 이전보다 두꺼워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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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 미-래의 맑스주의/이진경 지음/448쪽·1만6900원·그린비

‘굿바이 프로이트’라는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한때 그를 믿었다가 버린 사람의 수로 쳤을 때 이 빈 출신의 의사(프로이트)를 능가하는 것은 마르크스밖에 없다.”

그렇다. 프로이트도 울고 갈 만큼 수많은 개종자를 양산했던 그 마르크스에 대한 개종을 거부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 1980년대 운동권의 대표적인 논객이었고 1990년대 탈(脫)근대사상 연구에 주쪄?왔던 박태호 서울산업대 교수다. 필명 이진경으로 더 유명한 그는 한때 사회주의혁명을 꿈꾸다 감옥까지 다녀온 뒤 한동안 푸코와 들뢰즈의 사상에 푹 빠져 지냈다. 그러다 2004년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발표하며 마르크스의 사상을 집단주의적이고 경제결정론적인 공산주의가 아닌 자유로운 개인의 공동체로서 코뮌주의로 재해석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 책은 그 연장선상에 놓였다. 그가 주장하는 코뮌주의는 익숙한 마르크스 사상과 많이 다르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DNA로 꼽히는 변증법적 유물론, 노동가치설, 계급투쟁론, 자본주의 붕괴론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모든 것이 물질적 요소에 의해 좌우된다는 ‘경제주의’와는 다른 ‘외부에 의한 사유’라고 주장한다. 관념론이 모든 문제를 체계 내부의 인과관계에서 바라본다면 유물론은 이를 초월해 우리 삶을 규정하는 체계 외부 조건에 대한 통찰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는 노동가치설에 대해 기계나 화폐, 지대도 가치를 생산한다는 측면에서 인간중심주의적 노동가치설의 폐기를 주장한다. 또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 계급질서 내 노동자계급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계가 포착할 수 없는 ‘비(非)계급’으로 바라볼 것을 주장한다. 그것은 다양한 비주류 소수자 그룹으로 재해석돼야 한다는 것이다. 코뮌주의는 바로 이런 소수자들이 자본주의라는 체계 외부의 공간을 마련하려는 모든 불온한 노력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것이 과연 마르크스주의일까. 근대적 사상가였던 마르크스에게 온갖 탈근대적 사유를 주입한 뒤 이게 본래의 마르크스라고 주장하는 것은 한국 유생들이 중국 취푸(曲阜) 공자 생가에 걸려 있는 초상화가 공자를 안 닮았다고 버럭 화를 내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고 했던 선불교의 기개가 못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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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우리 아이가 컴퓨터 게임에 빠져 공부를 안 해요.” 부모들이 자녀의 게임 몰두 현상을 걱정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의 자녀가 게임에 시간을 빼앗긴 나머지, 대학입시 등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뒤처지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이런 우려는 미국·유럽 등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하게 관찰된다. 미국의 미래학자인 존 벡과 정보컨설턴트인 미첼 웨이드가 펴낸 이 책은 부모들의 이런 우려를 기성세대(베이비붐 세대)의 자기중심적 사고라고 일축한다. 이른바 비디오게임과 인터넷게임을 즐기면서 자란 ‘게임세대’가 바로 21세기의 주역이라는 주장이다. 저자들은 2500명의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와 200여 명과의 심층인터뷰를 통해 어린 시절부터 게임기를 만지고 자란 세대가 미국 비즈니스 세계의 주역으로 부상하고 있으며, 빠른 속도로 현재 주도세력을 대체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게임세대’의 특징으로는 전문가 지향 문화를 비롯하여, 멀티태스킹(multitasking) 능력, 시행착오를 통한 학습능력, 글로벌 지향 문화 등을 꼽았다. 게임기를 만지면서 혼자 시행착오를 통해 목표를 달성하고, TV를 보고 전화통화를 하면서 게임을 동시에 즐긴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어 현재 사회를 이끌고 있는 베이비붐세대에 대해, 게임세대들을 이끄는 방안을 조언한다. 우선 게임세대들의 머리모양, 옷차림 등 피상적인 문화에 과민반응을 보이지 말고, 영웅심리를 자극하라고 권한다. 또 그는 게임세대가 돈보다 자부심을 소중하게 여기고, 멀티태스킹에 강하기 때문에 적절하게 동기부여를 하면서 산만해 보이는 가운데 목표를 성취하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은 게임세대를 피동적 소비자가 아니라, 능동적 리더의 관점에서 해석함으로써, 게임세대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특히 게임 강국으로 꼽히는 한국 사회에서 많은 논의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다만, 게임세대의 장점을 강조하기 위해 게임 중독 현상을 비롯하여 광범위한 인문적 소양의 결핍, 폐쇄성 등 게임 문화의 어두운 측면들을 너무 간단하게 부정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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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자기를 지키려는 자는 때로 오만해야 합니다. 돈이면 다냐, ‘나’는 조건에 넘어가는 세속적인 인간이 아닌데, 하고 버티는 세속적인 오만도 없이 어찌 조건 좋은 이들의 오만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오만에는 오만으로! 그것이 ‘오만과 편견’의 당찬 아가씨 엘리자베스입니다.

엘리자베스는 가진 게 없어 기가 죽어있는 존재가 아니라 가진 게 없어 오히려 판단력을 키우게 된 근대적 여인입니다. 조건 좋은 남자에게 잘 보이려고 조급하게 구는 걸 천박하다 여기는 그녀는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분별력을 키우게 된 오만한 처녀인 거지요.

엘리자베스의 오만한 상대는 다아시입니다. 처음에 그는 모든 조건이 완벽해서 오히려 사랑하는 이에게 다가가는 방법조차 배우지 못한 야릇하고도 고독한 남자였습니다. 귀족에다가 엄청난 부자이고 잘생기기까지 한 이 신중한 남자의 편견은 손만 뻗으면 모든 여자가 자기 여자가 되는 줄 아는 겁니다. 당연히 이 남자는 자기에게 잘 보이려고 기를 쓰는 여자들을 철저히 경멸합니다. 그렇게 기를 쓰는 여자들은 그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분과 재산을 사랑하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지요. 덕택에 그는 여자의 결점을 찾아내는데 누구보다도 능했습니다. “여자를 보면 반드시 흠을 찾아내고야” 마는 그는 그를 귀하게 만든 좋은 조건 덕택에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도 마음으로 다가서는 법을 몰랐던 고독한 영혼이었던 겁니다.

‘오만과 편견’은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힌 남녀가 사랑을 통해 어떻게 오만과 편견을 자각하는 지 그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쁘고 착한 전통적 맏딸 제인에서 매사 충동적인 리디아까지, 베넷가의 딸들이 빚어내는 사랑의 사건들은 도무지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물론 주인공은 똑 부러지고 당찬 태도로 근대적 주체성을 확립하고 있는 오만한 엘리자베스입니다.

사실, 오만과 편견은 때때로 자신을 지키는 힘입니다. 신분이면 다냐, 신분이 인격이 아닌데, 돈이면 다냐,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만 돈으로 할 수 없는 진짜 중요한 일이 있는데, 하는 오만도 없었다면 별 볼 일도 없고 미인도 아닌 엘리자베스가 어떻게 그렇게 진취적이고 생기발랄할 수 있었을까요. 다아시가 자기가 가진 조건에 덤벼드는 여자들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면 그도 자기가 가진 조건으로 환원 당했을 것입니다. 그저 예쁘고 그저 예의 바르고 그저 조건이 괜찮은 귀족 여인을 만나 사무친다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 채 지루하고 무표정하게 잘 살았겠지요.



그렇지만 끝까지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은 구제될 길이 없습니다. 캐서린과 콜린스처럼 말입니다.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생은 고인 물처럼 썩어가고, 오만의 장벽을 넘어서지 못하면 생은 빛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진정한 사랑이 빛입니다. 오만과 편견의 곰팡이를 거둬내 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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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없던 시절에도 사람들은 읽었다



[조선일보 신용관기자]

왜 ‘독서’가 아니고, ‘읽는다는 것’인가. 12명에 이르는 필자의 글을 책임 편집한 로제 샤르티에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교수에 따르면, ‘독서’는 책을 읽는 것을 지칭하지만 ‘읽는다는 행위’는 책의 탄생 이전에도 존재했다. 따라서 이 책은 인류가 탄생한 이후의 모든 ‘읽기’를 다루고 있기에 독서의 역사가 아니라 읽는다는 것의 역사라는 것이다.

사실 그리스인들은 씌어진 것은 그 자체만으로는 불완전하다고 여겼다.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읽는 행위가 필요했다. 게다가 띄어쓰기가 없고 통일된 정서법이 결여된 문자는 소리를 내어 읽어야만 비로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음독(音讀)에서 눈으로만 읽은 묵독(默讀)으로 변한 건 13세기 무렵이다. 수도원 시대(글을 보존한다는 성격이 강했다. ‘장미의 이름’을 떠올리시길)에서 대학 시대로 넘어 오면서 책은 지적 탐구를 위한 대상인 동시에 도구가 됐다. 눈으로 읽는 독서법이 전파되면서 독자는 책과 훨씬 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다루고 있는 지역이 유럽에 국한돼 있다는 결정적 한계가 있으나 책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를 통사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이미지 과잉인 현재 우리의 삶에 시사하는 바가 큰 역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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