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그것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의 것이다./자신이 머물고 있는 자리의 아름다움을,/소유하고 있는 만물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을 때/ 비로소 행복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한상경 ‘인생은 정원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중에서)

툇마루가 생의 사계절을 관조하는 자리라면 정원은 그 중에서 제일 따스했던 봄날과도 같은 곳이라 하겠다. 황석영의 소설 <오래된 정원>(창비. 2000)도 봄날의 사랑이 담긴 추억의 장소다.

“70년대말 독재에 반대하는 지하조직 활동을 한 오현우는 광주항쟁 이후 수배가 되자 도피생활을 하면서 자신을 도와준 시골학교 미술교사 한윤희와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한적한 시골 갈뫼의 외딴 마을에서 몇 달 동안 둘만의 따뜻하고 오붓한 시간을 갖지만, 오현우는 다시 동지들을 규합하여 투쟁의 길로 나서는 과정에서 검거되고 만다. 그는 지하조직의 수괴로 몰려 무기형을 선고받고 18년을 장기수로 지내며 내면적으로 성숙해간다. 만기출옥 이후 전해진 한윤희의 편지를 통해서 오현우는 그녀가 불치의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음을 알게 된다. 오현우는 한윤희에 대한 추억을 찾아 과거에 둘이 함께 지냈던 갈뫼의 ‘오래된 정원’을 찾아가고, 그곳에서 한윤희가 남긴 기록을 통해 험난했던 80년대 이후를 뜨겁게 살아온 그녀의 삶과 죽음을 마주하게 된다.”

이 소설은 또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있어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영화배우 지진희가 오현우 역을, 염정아가 한윤희 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다. 임상수 감독은 “소설 속 주인공들의 숭고한 삶을 아름답고 슬픈 러브스토리로 보여주고 싶다”고 제작의도를 밝혔다.

이처럼 정원에는 인간의 내면에 숨어있는 감성을 활짝 꽃 피울 수 있는 이야기가 감추어져 있다. 프랜 소린이 지은 <정원통신>(뜨인돌.2006)에는 실제 정원을 가꾸면서 마음의 정원을 풍요롭게 살찌우는 얘기들로 가득하다. 저자는 그냥 마음이 가는 것을 좋아하면서 정원을 돌보면 인생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게 된다고 말한다.

“상상하기, 마음속으로 그리기, 계획하기, 심기, 돌보기, 즐기기, 완성하기”

이 문장을 보고 야릇한 상상을 하는 사람은 엉뚱한 정원을 다듬는 사람들이다. 저자가 제안하는 창조적 결과물을 만드는 7단계이니 새겨둘 필요가 있다.

주말에 시장에서 작은 화분 몇 개를 사서 나만의 정원을 꾸며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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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임흥재 기자] 글을 쓰기 위해 일어난 새벽, 오늘처럼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덜 깬 잠은 퍼뜩 달아나고 의식은 더욱 명징해진다. 빗물이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며 비 사이를 바쁘게 오고가는 바람의 발걸음 소리에 주위는 소란스러움에도 내 생각의 공간은 그 때문에 오히려 쥐 죽은 듯 고요하다. 아마도 비와 바람이 내 이성의 귀를 틀어막아 준 덕분일 것이다.

시간이 나는 틈틈이 중세 이슬람의 궁전에 숨어들어가 내밀한 그들의 문화를 훔쳐보기도 하고(술탄 살라딘) 하나의 사랑에 두 개의 시선이 머무르는 색다른 체험에 푹 빠져 살고 있는(사랑 후에 오는 것들) 어느 날, 갑자기 한 개의 화살이 날아와 내 가슴에 박혔다. 한국화가 김호석이 쏜 화살이다. 소포꾸러미를 뜯자마자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는 <문명에 활을 겨누다>를 펼치자마자 내 심장을 찌른다. 단숨에, 정말이지 단숨에 그 안의 수묵화에 빠져들고 말았다.

책은 수묵화첩이다. 맨 앞 장은 고은 시인이 쓴 발문이다. 그는 김호석의 수묵화를 적멸(寂滅)이란 의미심장한 열반의 세계로 소개한다. 그림 느끼기는 곧 ‘적멸. 아니, 적멸의 삶. 삶의 적멸’이다. 그 어려운 불교용어는 그림을 보기 전부터 기자를 주눅 들게 한다. 그러나 걱정할 것이 없다. 시원한 여백에 두터운 붓터치로 그려낸 대상들은 어렵지 않다. 대지가 있고 동물이 있으며 그들과 벗하여 살아가는 인간이 있다.

대지, 이는 인간의 고향이자 어미의 자궁 같은 곳의 이름이 아니던가. 그 광야에 화가 김호석이 섰다. 때로는 어미의 품속처럼 아늑하고 때로는 무서운 자연의 형벌이 인간의 욕심을 단죄하는 곳, 수묵으로 일렁이는 대지의 그림자가 책 속에 있다. 40여점의 수묵화 뒤에 관전기(觀展記)를 쓴 시인 김형수에 따르면 화가는 그 대지를 무려 마흔여덟 번, 날수로 천여 일을 그 곳에 다녀왔다 한다.

▲ 어느 하오/74*142cm/종이에 수묵 담채/2005, 개를 앞세우고 연료로 쓸 쇠똥을 지고가는 유목민의 발길이 마치 화가의 고단한 대지 여행을 보는 것 같다
ⓒ2006 김호석/문학동네
화가의 집요한 작가정신에 경이를 표하고도 부족하다. 이성의 죽음, 예술의 위기를 경고하는 죽은 활자들이 흉흉한 소문을 만들어 내는 때에 화가는 원시의 대지, 태고의 자연과 당당히 맞선다. 그것은 삶에 대한 불타는 의지, 죽어가는 혹은 정체되어 있는 자신의 예술혼에 생명을 다시 담아내려는 처절한 희생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하찮은 일상에 허덕이고 작은 욕심에 연연하며 시간의 노예로 살아가는 내게 그의 수묵화는 짙은 먹빛만큼이나 깊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부끄러움이고 졸렬한 핑계와 변명을 단칼에 베는 날카로운 비수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미술관과 공연장에 가는 또 다른 이유는 전망의 혼돈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에너지를 흡수하기 위함이다. 그렇다. 나는 그의 그림을 보면서 내게는 잊혀졌던 의지의 푯대를 다시 세우기도 하고 지지부진한 일상의 찌꺼기들을 치워버릴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그의 대지에서, 그 광야를 휘돌아 오르는 돌개바람에서, 자연의 재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가는 인간의 겸손함 속에서 나는 내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고 실감한다.

많은 그림들이 있다. 화첩의 말미에 게재된 시인 김형수의 관전기나 미술사학자 이태호의 평론은 그림을 이해하는데 유용한 관점을 제공해준다. 그러나 그들의 눈길을 따라 그림을 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나는 내 삶과 그 안에 중첩되어 있다 내 시선을 따라 나오는 내 경험의 눈길로 그림을 볼 뿐이다. 독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림이며 모든 예술작품들이 그 안에서 수많은 이야기들을 속닥거리지만 구태여 그것을 들으려 애쓸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오직 나와 그림과 교우할 뿐이고 그것을 창조한 작가의 정신과 고민을 가끔씩 훔쳐보는 것으로 족하다.

 
▲ 늑대가 오는 밤/103*141cm/종이에 수묵/2003, 늑대 울음소리에 잠 못 드는 유목민 노파의 사실적인 표정이 그들이 사는 대지의 일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2006 김호석/문학동네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그림을 보면서 문득 이육사의 시 <광야>를 떠올렸다. 내게는 원시의 대지를 수묵으로 담아낸 김호석의 붓이 마치 초인의 붓처럼 느껴졌다. 초인이 별건가. 이 시대 이 땅의 죽어가는 정신의 그림자에, 삶이란 반드시 참고 살아내야 하는 숙연한 소명인 것을 우리에게 일깨우면, 그것이면 초인으로 충분한 것 아닌가. 그 초인의 수묵화에는 죽음이 있고 그 죽음을 딛고 다시 살아나는 장엄한 생명이 있다. 그 초인의 붓에서는 대지의 바람이 일고 재앙 속에서도 담담히 자신의 숙명을 일구는 사람들의 표정이 살아난다.

정착문명인 농경문화와 달리 고단한 이동 또는 유랑의 숙명을 안고 살아가는 목축문명 속의 대지는 원시의 모습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그것을 담아낸 화폭은 그래서 크고 넓어질 수밖에 없다. 몇 번의 붓질로 그려낸 대상의 윤곽보다 그래서 김호석의 수묵화에는 남은 여백이 더 많은 이야기와 삶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조드(‘강’이라 불리는 여름의 가뭄 뒤에 찾아오는 겨울의 극심한 가뭄과 혹한의 재앙)를 이기기 위해 먹을 풀을 찾아 눈밭을 헤치다 그대로 얼어 죽은 소 그림(하늘에서 땅으로)에서는 처연한 생의 의지가 엿보이고 몰살된 가축더미(목축민의 전재산이다) 곁에서도 담담한 표정으로 숙명적 삶을 받아들이는 노파의 표정(조드, 사는 것과 죽는 것, 대지의 수줍은 주인들 등)은 쉽게 포기하고 너무 쉽게 지치는 우리네 삶에 대한 조소다. 하늘마저 말라 갈라진 대지, 죽은 소의 썩어가는 시신 사이에서 패랭이꽃은 피고(소갈비 사이에 핀 패랭이) 나비는 삶의 윤회를 상징하듯 날아오른다(죽음과 나비).

말이 매어 있어야할 자리에 죽은 말가죽만이 그려진 죽음의 대지(소멸)를 독수리는 알을 깨듯 땅거죽을 찍으며 태어난다(생성). 동물들은 죽어서도 인간과 대지를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치고(하늘의 애도, 죽은 염소, 양은 가죽을 남기고 등) 그 고귀한 희생 위에서 대지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아르가르의 향기). 무참한 재앙이 몰고 올 대지의 죽음(대자연에게 살해되다, 대지의 마지막 풍경, 쓰러진 야크 등) 앞에서도 그들의 삶은 초연하고(형제, 천국의 아이들, 거인의 잠, 나담의 뒤켠) 대자연의 공포 앞에서도 천연덕스럽게 똥을 누는 아이들의 순수한 동심(초여름)과 자연에 순종하고 그 자연을 숭상하는 신앙(셔먼)은 곧 대지의 야생이 문명에게 보내는 준엄한 경고다.

대지를 사는 사람들(소녀, 보이르 호수, 경계 등)은 소박하다. 이방인의 침입에 놀란 그들의 시선은 인간에 대한 경계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불안을 드러낸다. 말 타기 경주에서 낙담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젊은이의 뒷모습에서는 진한 연민(그리움)이 솟고 하늘 위에서 벌어진 말타기 경주(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에서는 이성을 자랑하며 야만을 비웃던 서양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았던 저 먼 옛날의 웅자가 배어 있다. 그들 또한 초인(草人)이다. 초원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욕심 없이 살아가는 그들 앞에서 우리는 더 없이 작은 존재일 뿐이다. 적어도 내게 김호석은 그렇게 일깨우고 있는 듯이 보인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바람은 창밖에서 이신들이 꿈틀대는 밤의 여윔과 죽어감을 슬프게 호곡하고 있다. 보고 또 보고 서양그림에 익숙해진 일천한 내 심미안에, 진정한 의미에서 처음으로 다가온 수묵화는 이 밤을 행복하게 견디도록 해준다. 불혹의 나이를 넘어서야 내게 다가온 그림들은 어쩌면 버리고 잊으며 산 아름다운 기억의 순정(純晶) 같은 것이다. 독자 여러분과 그 아름다운 경험을 나누고 싶어 플래시로 만들었다. 독자 여러분도 저 위대한 대지의 적멸을 함께 느끼며 어제와 다른 내일의 삶을 발견하기 바란다. 밤은 빗속에서도 부지런히 제 갈 길을 간다.



ⓒ 김호석/문학동네

* 아래 사각형 버튼에 마우스를 대시면 해당 그림으로 이동합니다.

* 그림 중 몇 점은 플래시 제작을 위해 중심 이미지만을 잘라 게시하거나 가로 세로 균형비를 맞추기 위해 약간의 왜곡이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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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유영일 지음 / 양문 / 2000년 12월
절판


사랑은 관계가 아니다. 사랑은 존재의 차원이다. 사람이 사랑 속에 있는 게 아니다. 사람이 사랑이다. 물론 사람이 사랑일 때 그는 사랑 속에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의 결과고 소산이지 근원이 아니다. 근원은 그가 사랑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각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사랑일 수 없다. 그대는 두려울 것이다.

두려움은 사랑의 정반대이다. 사랑 속에서 사람은 확장되고, 두려움 속에서 사람은 움츠러든다. 두려움 속에서 사람은 닫혀지고, 사랑 속에서 사람은 열린다. 두려움 속에서 사람은 의심하고, 사랑 속에서 사람은 신뢰한다.

두려움 속에서 사람은 외롭게 남겨지고, 사랑 속에서 사람은 사라진다. 따라서 외로움이라는 문제는 전혀 없다. 사람이 사라지고 없는데 어떻게 외로울 수 있겠는가? 그때는 나무와 새와 구름, 태양과 별 역시 그대 안에 있을 것이다. 사랑은 그대가 내면의 하늘을 알 때 존재한다.

- 라즈니쉬-.쪽

욕망은 뭇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천상의 바람이다. 그 바람 때문에 만물이 살아 움직이며 춤을 춘다. 바람 한 점 없이 마음이 잠잠하다면, 어디서 생명의 아름다움을 찾아야 할까? 사람들은 흔히 욕망이 없는 상태를 꿈꾸곤 하지만, 무욕에의 욕망은 욕망이 아닌가? 깨달음에의 욕망은 욕망이 아닌가?
가슴 안에 일렁이는 바람이 없다면, 무엇을 통해서 배울 수 있겠는가? 욕망을 향해 달려가고, 욕망을 거머쥐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고, 욕망에 걸려 넘어져 쓰러지고, 그렇게 욕망과 더불어 성장하게끔 되어 있음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욕망이 어떻게 일어나고 스러지는지 순간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욕망과 벗하며 즐겁게 가라. 그러나 욕망에 휩쓸려 그대 자신을 잃어버리지는 마라. 욕망의 노예가 되지는 마라. 욕망을 지켜보면서 그것에 감사하고,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고 스러지는지 지켜보라. 욕망을 일으키는 그대 자신을 지켜보는 또 하나의 자아, 그 안으로 들어가라. 그 끈을 놓치지 마라. 욕망의 노예로 전락하느냐 당당한 주인 자리를 차지하느냐는 거기에 달려 있다. 슬퍼하되 슬픔에 빠지지 않고, 기뻐하되 기쁨에 빠지지 않는 것, 그것이 비결이다. 지켜보는 자로 남는 것, 그것이 우리 육체와 감정의 참다운 주인인 영혼에게 자아를 돌려주는 비결이다.-.쪽

세상사의 모든 비극이 쥘 때와 펼 때를 알지 못해서 일어난다. 쥘 때와 펼 때를 알지 못함은, 우리 자신의 욕망에 갇혀서 시야를 멀리 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장 쉬운 진리이건만 그 진리를 깨닫기까지가 어려운것 같습니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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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내용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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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회에 대해 궁금한 몇 가지
크리스티아네 테빙켈 지음, 함수옥 옮김, 라텔슈네크 삽화, 이용숙 감수 / 열대림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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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음악을 듣고 즐기기위해 무엇을 꼭 배워야 할 필요는 없지만, 좀 더 많이 안다면 더 재미있게 즐길수 있다는 사실이 있다.

=>저 역시 와인을 모르고 마실때는 그냥 쓰고 폼나는 술이다 생각했는데, 와인을 알고 마시니 그 맛의 미묘함도 함께 즐기게 되더군요. 음악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요.-.쪽

훌륭한 음악가들의 연주는 그들이 원래의 작품이나 그 작품의 어떤 부분들을 아주 새롭게 선보인다는 느낌을 준다. 이럴 때 해석은 연주하는 예술가와 작품과의 대화이며, 또한 그들이 그 작품에 대해 청중과 나누는 대화이기도 하다. 같은 작품을 가지고 어떤 연주자는 이렇게, 다른 이는 또 다르게 해석하여 연주하는 것이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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