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권성권 기자]
 
ⓒ2006 르네상스
기독교에는 물질적인 것은 저급한 것으로, 신령한 것은 고귀한 것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을 마치 진흙에 묻힌 진주처럼, 천한 육신에 갇힌 영혼의 소유자로 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물질과 영을 나누는 이원론적 사고가 그것이다. 그 때문에 물질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악의 영역이고, 신령한 세계를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물질이든 신령한 것이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치 속에 있다고 여기는 부류도 많다. 물질과 영을 따로 나누거나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보는 것이다. 당연히 물질 세계를 지배하는 악의 영역도 하나님의 통치 속에 들어 있을 뿐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두 흐름이 기독교계에 크게 대두되기 시작한 때는 2세기였다. 그 뒤 3세기와 4세기, 그리고 5세기를 거치면서 더욱 분화되고 확대되었다. 이른바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구분, 신령한 세계와 악령의 대립, 그리고 그 대립과 분열 속에서 발생했던 '정통'과 '이단' 사이의 치열한 다툼이 그것이다.

이는 제프리 버튼 러셀이 쓴 '악의 역사 제 2권'인 <사탄>(김영범 옮김·르네상스·2006)을 보면 명백히 알 수 있다. 이는 제 1권인 <데블>의 연장선이기도 하지만, 그와는 별도로 초기 기독교 내의 이원론적인 경향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잘 엿볼 수 있다. 그것도 5세기까지를 중점으로 다루고 있다.

다른 종교들도 다르지 않겠지만, 기독교는 엄격한 의미에서 이원론적 종교이다. 기독교의 근간에는 이원론이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물질세계와 신령한 세계, 영혼과 육신이 언젠가는 분리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바로 죽음을 기점으로 그렇게 나뉜다고 믿는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까지도 그런 이원론적인 색채를 너무 짙게 드러내는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다. 이 세계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들을 신령한 세계와 악령의 세계, 성령과 사탄의 대립구도로 단정해버리는 것이다. 때때로 기독교 내에서 극심한 분열이 발생하는 것도 대부분 그 때문에 비롯된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들은 최근에서야 비롯된 일일까? 그렇지 않다. 이런 현상들은 초기 기독교 2세기부터 5세기에 달하기까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던 현상들이다. 로마의 기독교 박해와 기독교인들의 순교, 그를 둘러싼 기독교 내부의 상반된 평가, 그 속에서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던 신학자들과 성인들의 여러 가지 악에 대한 규정들, 그리고 그 속에서 일어났던 정통과 이단의 분열 등이 그렇다.

"어둠의 지배자인 악마가 이단자와 교회를 싸움 붙인다는 생각은 수세기에 걸친 결과물이다. 만일 세계가 빛과 어둠이 우주전을 벌이고 있는 전쟁터라면, 그리고 만일 그리스도의 지휘 아래 빛의 공동체인 교회가 어둠의 공동체와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다면, 기독교는 악의 화신과 전투 중이므로 적에게 자비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러나 사도 교부들은 이 교의를 폭력 사용의 정당화에 대한 논리적 근거로 사용하지 않았다."(42쪽)

적어도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교회를 지배하고 억압하는 세력들에 대해 소극적인 대항을 했다. 그건 다름 아닌 순교로 일관했던 일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 세력들을 악의 화신이나 마녀로 취급하여 가혹한 조처를 취하게 된다. 그때부터 관용적이지 못한 교회의 처신은 교회와 사탄이라는 두 세력간의 다툼으로까지 비화되고 확대되었다.

그래서 2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점차 '세상의 지배세력', 즉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기독교를 변호하려는 학자와 학파가 등장했다. 이른바 '변증 교부'들의 등장이 그것이다. 그 당시 유명한 교부 가운데 한 사람인 '이그나티우스'는 순교를 "지상의 군주인 악마와의 투쟁"으로 보았다. 또한 '바나바'는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라는 두 왕국이 서로 다투고 있고, 대부분 악마의 수중에 들어 있다"고 보았다.

3세기의 교부인 '클레멘스'는 악은 선의 반대이기에 결핍 또는 결여 자체로 보았고, '오리게네스'는 하나님의 자비와 자애는 모두를 포용하기에 악마까지도 구원될 수 있다는 견해를 내 비치기도 했다. 참으로 포용력 있는 관대한 접근방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당시 이단으로 지목됐던 '도나투스'는 박해의 공포에 떠는 자, 이교도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자, 교회를 배반하는 자는 용서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로 복귀될 수 없다는 강한 신념을 내비쳤다. 그 때문에 이단의 배면에는 분명히 악마가 있으며, 박해에 굴복한 자들은 사탄의 하수인이라고까지 쏘아 부치기도 했다.

그 뒤 4∼5세기를 거치면서 기독교 전통은 그리스와 라틴을 기준으로 동서로 분화된다. 그 당시 대표적인 학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은 오직 선만을 행하시는 분으로, 악은 그 외의 다른 존재에 의해 행해지는 것으로 파악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 위대한 선을 위해 이 악행을 용납하고, 더 위대한 선은 우주에서 행해지는 자유의 모습이라고 보았다.

그런 이원론의 틈 속에서, 기독교 내의 유명한 '변증 교부'들은 이른바 기독교 내의 '정통'이 되고, 그와는 다른 견해를 내 비치거나 좀더 극단으로 나가면 모두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정통에서 밀려난 자들이 이단으로 내 몰렸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그런 이원론적인 사상이 기독교 내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그래서 좀더 온건한 쪽에 서면 주류 정통이 되고, 극단으로 나가면 이단으로 내 몰리게 된다. 하지만 이원론이라는 스펙트럼 안에 넣어 놓고 보면 모두들 그 속에 들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극과 극, 그 어느 사이에선가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자기 쪽이 정통이라며 목청을 높이는 꼴을 보면 꼴불견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이원론의 양극단보다는 서로의 간격에서 균형을 이루는 게 중요하다. 물질과 영의 대립, 사탄과 천사의 대립, 악령과 성령의 다툼이라든지, 정통과 이단의 대립이라는 그 칼끝을 세우기보다는, 그것들 나름 대로를 인정하면서도 참된 선을 증진시킬 목적과 그 방향으로 세워 나아가는 게 더없이 소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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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지침서가 쏟아지고 있다. 눈에 띄는 것은 글쓰기 책의 범주가 논술을 겨냥한 청소년 대상 글쓰기에서 벗어나 성인 전체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소설가 이외수의 <글쓰기의 공중부양>(동방미디어. 2006)을 필두로 <모든 사람을 위한 과학 글쓰기><사이언스북스. 2006),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마음산책), <명쾌한 디지로그 글쓰기>(글누림. 2006) 등 다양한 글쓰기 지침서들은 독자 전체를 대상으로 ‘글 잘 쓰는 비법’을 공개한 책들이다.

이에 <논리적이면서도 매력적인 글쓰기의 기술>(원앤원북스. 2006)는 ‘실무’라는 보다 구체적인 지점에서 글쓰기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보고서, 기획서, CEO 신년 인사말, 칼럼, 자기소개서 등으로 나뉜 구체적 글쓰기 사례는 실무에 바로 적용시킬 수 있는 글쓰기 노하우이기에 직장인들에게 도움을 준다.

‘보고서는 단순히 보고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제안서와 기획서는 설명이 아니라 설득을 해야 한다’ ‘비즈니스 레터와 이메일은 상대방 입장을 고려해 써라’ 등의 소제목은 업무능률을 올릴 수 있는 글쓰기 비법을 예고한다.

숙명여대 언론정보학구 교수인 저자 강미은은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은 논리적이면서 감성적”이라고 강조했다. 같은 내용을 쓰더라도 자신만의 생생한 표현으로 살아 있는 글을 써야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저자는 논리와 감성이 체계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글쓰기 방법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설득력 있게 전개했다.

글쓰기를 두려워하거나 비즈니스 글쓰기에 자신이 없는 직장인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실무글쓰기 비법을 담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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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강임 기자]
 
ⓒ2006 북폴리오
미친 듯이 돈을 벌고, 번 돈으로 다시 미친 듯이 물건을 사들이고, 남에게 뒤질세라 정보를 수집하고, 유행을 쫒아가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값비싼 자동차, 큰집, 정기적인 휴가, 여행... 이런 것들이 과연 그렇게 힘들여 얻을 만큼 가치 있는 것들일까? 지구 구석구석에서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속속들이 다 안다고 좋을 게 뭔가?

-본문 중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행복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이 있을까? 돈, 명예, 큰집, 값비싼 자동차….

사람마다 소유의 가치척도는 다르겠지만, 언제부턴가 우리사회는 소유욕의 절대지수가 극에 달하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달라져 가는 세상. 언제부턴가 제3의 물결이 밀려오면서 인간이 가진 욕망의 한계는 무한의 늪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이렇다보니, 인간의 지녀야 할 최소의 미덕과 틈새의 여유를 잃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때 욕망의 늪에서 빠져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한권의 책이 그 해답을 제시했다.

‘조금 가질수록 행복은 커진다. 내가 가진 물건이 적을수록 근심도 적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논리를 제시한다면 사람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 그러나 이 문제를 놓고 1%라도 고민을 하고 있다면, 이는 곧 레스니스를 실천하는 사람일 것이다. 돈과 욕망에서 자유로운 삶. 즉, 1%를 가지고도 행복해 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 사람은 군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시 말해 99%를 가지고도 1%를 쫓아가며 발버둥치는 시대에 소박의 아름다움을 제시해 주는 한 권의 교과서는 마치 성서와 불경 같은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자발적 가난을 지향하는 레스니스는 어쩌면 다른 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이데올로기인 것 같다. 그러나 돈과 욕망의 다이어트 교과서는 이렇게 말한다. “더 높이, 더 빠르게, 더 멀리는 이제 그만”이라고.

합리적인 소비와 여론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망상, 다양한 음식문화와 스위트 홈. 사랑과 부모의 역할에 이르기까지 레스니스는 보통사람들에게 사랑의 매를 들고 질타를 가한다. 그러나 돈에 지배 받지 않는 인생을 살아가기란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다. 우리 문화 깊숙이 배어있는 소비의 미덕, 나눔의 미덕, 공유의 철학 등이 고정된 틀을 벗기지 못한다.

잠시 급행열차를 타고 달려왔던 사람들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뒤돌아보게 하는 ‘다이어트 교과서’. 이 교과서는 보통사람들을 적게 원하고, 적게 소유하는 삶 속으로 초대하고 있다.

레스니스란?

캐나다 작가 더글라스 쿠플랜드의 소설 에 나온 말로, 독자적 라이프 스타일을 뜻한다. 즉, 레스니스란 누구의 강요가 아닌 오직 자신의 의지로 적게 원하고, 적게 소유하는,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고 ,그 상태를 즐기겠다는 삶의 방식이다. 즉 합리적으로 소비하고 정말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물건만 소유하는 삶을 즐기는 것이다.
누구나 행복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으로 돈을 꼽는다. 그러나 아무리 물질문명 시대라 할지라도 무엇이든 지나치면 독이 되는 문명의 이기. 이 책에서 저자는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삶이 버겁다면 사는 방식을 바꾸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부족한 삶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지혜. 세상에 뿌려진 유혹의 손길을 걸러낼 수 있는 정수기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좁은 소견으로‘다이어트 교과서’에 태클을 걸어 본다면, 어느 누구도 가슴으로는 레스니스를 추구하지만 행동으로는 소유를 꿈꾼다는 사실이다. 아마 그것은 자본주의사회의 사람들의 근성이며, 군중 속에 살아남기 위한 원초적 본능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 공간 즐기기’레스니스 작전은 삶을 신선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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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최육상 기자] 사람들은 흔히 “기업은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한다”고 말한다. 또 대개 그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이윤 이외에 ‘기업윤리’와 ‘사회에 대한 책임’ 추구도 목적으로 해야 한다면 어떨까? 아마도 이윤과 윤리, 책임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가능하냐며 고개를 갸웃거릴 지도 모른다.

괜한 걱정이라고? 삼성의 경영권 승계문제, 대우의 분식회계, 최근의 론스타와 현대차의 논란 등 국내외를 막론하고 발생하는 기업의 비윤리적인 행태를 보면 걱정은 바로 현실이 된다. 기업의 비윤리를 열거하면 수두룩하다.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에게 윤리와 책임은?

 
▲ <전략적 윤리경영의 발견> 책표지.
ⓒ2006 삼성경제연구소
<전략적 윤리경영의 발견>은 기업이 목표를 추구함에 있어 ‘이윤’과 ‘윤리’는 상충된다는 전제를 깔고 대립하는 두 가지 이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기업의 목표는 이윤 극대화일 뿐이고, 다른 모든 고려는 효율성을 저해할 뿐’이라고 주장하는 극단적 자유주의 이론 VS ‘기업은 사회의 한 시민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를 다해야 하며, 이윤은 그 다음 고려 사항’이라고 주장하는 극단적 대안학파 이론.

저자는 기업인들을 만난 경험을 통해 많은 한국인들이 이 같은 이론에 경도되어 있다며, 기업과 시민단체의 논쟁이 치열하게 계속됨에도 이윤과 윤리 사이의 타협점을 찾지 못하는 이유라고 지적한다.

기업에게 이윤과 윤리는 정말 서로 충돌하는 개념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은 ‘그렇지 않다’는 진단을 내린다. 진단은 이론에만 머물지 않는다. 기업경영에 적용된 사례를 찾아 대안을 모색하게 한다. 비록 ‘윤리경영’ 앞에 ‘전략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는 했지만.

‘전략적 윤리경영’은 크게 기업 내부에서 이뤄지는 ‘인적자원관리’와 기업 외부와 연관을 맺고 이뤄지는 ‘사회책임경영’의 두 분야로 나뉜다. 내부 고객들인 임직원들과의 관계를 기업 전체 경영 전략과 어떻게 통합시킬 수 있는 지와, 미래의 직간접적인 외부 고객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고 유지할 수 있는지가 핵심 내용이다.

먼저 전략적 인적자원관리를 살펴보자. 저자는 여러 조사를 통해 사람들이 일을 하는 근본적 이유는 ‘급여수준’이 아니라 ‘배움’과 ‘기술습득’ 등에 있음을 증명한다. 임직원들을 성과급 체계로 관리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며 ‘임금에 대한 잘못된 신화’를 깰 것을 주문한다.

저자는 임직원들이, “의사로서의 양심을 걸고, 법조인으로서의 양심을 걸고, 기자로서의 양심을 걸고” 같은 표현처럼 ‘전문가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일반 직업인도 전문가들이 직업윤리를 저버렸을 때 아주 비도덕적인 일로 취급되는 것처럼 평가되고, 전문가들처럼 일에 대한 ‘자긍심’과 ‘자율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이익을 내는 것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이익을 내는 것이다.”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1970년 9월 13일자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유명한 글의 제목이다. 이 글에 따르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게임의 룰만을 지키는, 다시 말해 부정이나 거짓을 저지르지 않는”데서 끝난다는 것.

저자는 “기업의 책임은 이익을 내는 것이고, 합법적으로 이익을 내고 있는 기업에게 다른 사회적 책임을 묻는 것은 오히려 공공선을 해치는 잘못된 행위”라는 게 이 글의 변명의 논지라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 논의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사회책임경영은 이익을 필요 불가결한 전제조건으로 삼되, 사회가 당면한 특정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다고 주장한다. 사회적 기업들은 어부들에게 고기를 잡아주거나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치는 데서 만족하지 않고 어업의 산업구조를 혁신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인적자원관리와 사회책임경영에 대한 사례를 제시하며 ‘전략적 윤리경영’이 어떻게 가능한지 보여준다. 전력적 윤리경영은 저자가 제시한 사례처럼, 유에서 무를 창조한 ‘발명’이 아니라 존재했던 것에서 찾아 낸 ‘발견’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발견은 마이크로스포트, 나이키 등 세계적인 기업들의 사례를 통해 전략적 윤리경영을 보여준다.

저자는 기자 활동과 거시경제 컨설팅 회사에서의 인턴 활동 및 삼성경제연구소의 수석연구원으로 재직하며 만났던 많은 기업들을 통해 전략적 윤리경영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전략과 윤리가 만난 윤리경영이 자본주의 신뢰회복할까?

저자는 “전략과 윤리가 만나야 윤리경영이 완성된다는 이 책의 주장은 기업에서 전략을 고민하는 사람이나 윤리를 고민하는 사람 양 쪽 모두에게 낯설 수도 있다”고 전제하면서도 “윤리경영은 ‘주먹구구식 자선행위’라는 오명을 벗어나 전략적 설계를 통해 끌어나갈 수 있는 어엿한 경영 전략 행위”라고 강조한다.

또한 저자는 “윤리경영 담당자들은 전략기획 전문가 이상의 잔략가가 되어야 한다”며 “프레임워크를 제시하고, 기업 전체 전략과 윤리경영 전략을 연결시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과 몇 년 전,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계속 터지는 대형 기업 스캔들로 인해 자본주의의 신뢰가 위기라고 했다. 그래서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윤리경영’이 구원투수로 등장했다. 하지만 갈수록 치열해지는 자본주의 시장논리와 지속되는 기업 스캔들 속에, 초기의 윤리경영은 현실성을 의심 받으면서 흔들리고 있다.

<전력적 윤리경영의 발견>은 이제 ‘전략적 윤리경영’이 또 다른 구원투수로 등장할 차례라고 말한다. 경쟁과 전략을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들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를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들 사이의 소통과 대화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때라며 전략과 윤리의 만남이 필연적이라고 주장한다.

저자가 말하는 ‘전략적 윤리경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기업 스캔들로 인한 자본주의의 신뢰 위기는 오늘도 계속 진행중이기에 그렇다. 국내 최대 기업의 연구소가 발간한 책인 만큼 모쪼록 수많은 ‘회장님’들이 읽어보시길 권해본다.

'전략적 윤리경영'의 몇 가지 사례

존중하는 인적자원관리, 자긍심을 생산성으로 이끈 서비스마스터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가 한창 성장하던 1987년부터 1995년까지 이 두 기업의 주주가치 상승분을 합친 것보다 더 높은 주주가치를 창출한, 첨단기술과는 거리가 먼 청소용역업체대행기업 서비스마스터.

병원이나 학교 등에서 청소나 빨래 같은 일을 하는 인력을 관리해주는 회사인 서비스마스터는, 열악한 임금 조건에서 불안정하게 일하는 인력들에게 직업에 대한 자긍심과 직장에 대한 충성심을 불어넣어 생산성을 높였다.

“청소도 기술이다. 스스로를 계발해 더 나은 청소 기술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라”는 것을 내걸고 청소에 대한 연구개발과 교육훈련을 통해 계약직 청소원들이 자신의 일을 ‘단순기술’이 아니라 ‘숙련기술’이라고 느끼게끔 했다. 서비스마스터는 기술과 가장 관련 없는 것 같은 사람들에게 ‘기술자’라는 자긍심을 제공함으로써 고성장 신화를 이뤄냈다.

오픈북 경영과 주인의식, 스프링필드 리매뉴팩처링

스프링필드 리매뉴팩처링을 설립한 서른 세 살의 잭 스택은 ‘오픈북 경영’을 외치며, 회계 및 경영 자료의 완전 공개와, 공개된 자료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모든 사원에게 경영 교육을 시켰다. 또한 모든 사람이 회사에 대해 책임과 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종업원 주식 소유와 실적 연동 급여를 도입했다.

1983년 119명이던 공장 직원은 1999년 1000명을 넘어섰고, 매출은 1240만 달러에서 1억5000만 달러 이상으로, 주식 가치는 주당 10센트에서 33달러로 뛰어 오르는 엄청난 결과를 빚었다.

잭 스택이 실행한 오픈북 경영의 핵심은 모두가 비즈니스 게임의 법칙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비즈니스는 선수들에게 홈런 몇 개를 치라고 주문할 때는 그만큼의 홈런이 다른 사람들이 달성할 안타와 도루와 방어율 등과 합쳐져서 전체 팀의 성과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를 알려줘야 하는 스포츠경기와 같다는 것. 오픈북 경영은 장부와 정보 공유를 통해 자율성과 주인의식을 불러 와 결국 생산성 향상을 이뤘다.

투명한 회계의 전략적 의미, 마이크로소프트

마이크로소프트는 이익 전망치를 줄여 주가 거품을 미리 방지하려고 노력하는 특이한 기업이다. 주식시장에 상장된 1986년부터 1999년까지 순이익은 매분기, 전년 같은 분기보다 늘어났고, 분기 매출액 성장률은 전년 같은 분기에 견줘 한 번도 15% 이하로 떨어진 일이 없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언제나 시장의 예측을 넘어섰다는 사실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투자자들이 경영자의 허풍을 믿고 주식을 비싼 값에 샀다가 얼마 뒤 거품처럼 주가가 빠지면서 생길 재산 손실을 미리 걱정해 애초부터 이익을 최대한 낮게 발표하려 노력했다. 다른 기업들이 주주 중시 경영을 외치면서 공격적 배당이나 과장된 경영 전망 발표를 통해 인위적 주가 관리에 나서 주가 거품을 조장하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창업 초기의 엄청난 이익 증가세가 언젠가는 끝나고 실적 둔화가 따라올 것이라는 우려를 갖고 이익이 많이 났을 때 보수적 회계 기준을 적용했다. 이는 기업 투명성을 높이는 주주 책임경영, 즉 윤리경영일 뿐만 아니라, 전략경영이기도 하다. 경영진들이 회계를 전략적인 윤리경영을 실현할 수 있는 의사소통 수단으로 올바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혁신적 기업이 제3세계 노동문제 해결사로 나선 이유, 나이키

1996년 미국 잡지 <라이프> 6월호에는 젊고 세련된 나이키 스포츠용품이 대부분 아동들의 노동을 착취해 만들어졌다는 비판 기사가 실렸다. 이 뉴스는 미국과 유럽 사회를 들쑤셔 놓았다. 사람들은 “저스트 두 잇(Just do it!)”이라는 광고문구를 빗대 “어린이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켜서라도 무조건 생산하고 보란 얘기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나이키는 본사가 디자인과 마케팅만 맡고 생산은 모두 다른 회사에 아웃소싱하는 혁신적 비즈니스 모델로 세계화의 맏아들 역을 자임하고 있었다. 나이키 제품은 처음 일본에서 시작해 한국을 거쳐 최근에는 중국, 인도, 파키스탄 등 주로 제3세계 각지에서 생산된다. 그런데 <라이프>의 보도는 이 모든 이미지가 거짓이었다는 배신감을 안겨줬다.

나이키는 불거진 문제 자체를 해결해 ‘기업 시민권(corporate citizenship)’을 되찾겠다고 선언하고 노동 및 환경 관련 업무를 모아 기업 책임부서를 신설했다. 신발 공장 종사자의 연령을 18세 이상으로 제한하는 등 안전, 건강, 경영자 태도, 인력개발, 환경 관련 내용을 담은 생산지침을 만들었다. 이후 지침을 지키지 않으면 계약을 맺지 않는 것은 물론, 기존 업체의 물량과 자격을 평가하는데도 이용했다.

또한 개발도상국의 환경과 청년근로자들의 교육훈련 환경 향상을 위해 활동하는 ‘근로자와 공동체를 위한 국제연대’를 공동 창립하는 등 근본적 변화를 추진한 뒤에야 비로소 시장의 신뢰를 되찾을 수 있었다. 나이키가 남긴 교훈은 세계화의 수혜를 입으려면 그에 합당한 세금을 내고 의무를 지키며 국제사회의 시민권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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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포스트모던 문학담론을 뒤?v다 보면 역설적으로 작가란 어쩌면 거대한 픽션의 세계 속에, 즉 소설의 세계 안에 실재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픽션의 세계 밖에서 군림하듯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지시하던 ‘작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스토리텔링이 만들어 놓은 허구의 세계 속에 정주한 작가의 모습을 종종 만나게 된다.

가령 폴 오스터의 소설 ‘뉴욕 3부작’에서는 작가가 극중 인물의 한사람으로 등장하고 있다. ‘뉴욕3부작’의 첫 번째 소설인 ‘유리의 도시’에서 탐정소설을 쓰는 작가 다니엘 퀸은 폴 오스터를 찾는 잘못 걸려온 전화로 인해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전화선 너머의 수화기에선 폴 오스터라는 탐정을 간절하게 찾고 있어, 주인공 퀸은 폴 오스터의 역할을 떠맡게 되는데, 폴 오스터에 의해 쓰여진 소설 속의 주인공이 폴 오스터를 찾는 전화를 받고 작가가 아닌 탐정 폴 오스터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전화번호부에서 찾아내 진짜 폴 오스터라는 인물은 탐정과는 거리가 먼 이름 없는 작가다. 작가는 더 이상 픽션을 창조하는 존재가 아니라 픽션의 세계 속에 살아가는 주변인물에 불과하다. 작가와 소설의 화자, 소설 속의 등장 인물들이 모두 한 공간에 어울러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화자가 이야기 하는 것은 함께 살고 있는 픽션의 세계들에 대한 리얼리티를 재생산하는 역설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더 이상 읽혀지는 세계와 살아가는 세계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인식이 폴 오스터 소설의 공간적 전제가 되고 있다.

폴 오스터는 뉴 저지의 오스트리아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대학 졸업후 잠시 프랑스와 유럽을 둘러본 경우를 제외하고는 줄곧 뉴욕에서 살고 있으며, 그의 소설에는 마치 우디 알렌과 비견할 만하게 숱한 뉴욕의 거리명과 골목 풍경들이 세세하게 이야기되어진다. 뉴욕은 무진장 널려 있는 공간이자 한없이 걸을 수 있는 미궁이라고 소설속의 주인공은 이야기한다. 주인공은 그 미궁과도 같은 뉴욕의 거리들을 한 없이 걷는다. 무엇인가를 찾거나 특정 장소에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방황하고 배회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퀸에 의해서 감시당하는 피터 스틸만이 하루 종일 시내를 걸으면서 하루 하루 만들어내는 글자들처럼 결국 방황과 배회의 흔적은 삶의 리얼리티를 형상화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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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4-20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해하기 힘든 책이지요.

보슬비 2006-04-21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의 궁전'을 읽어서인지 폴 오스터의 책들을 한번쯤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책도 구입했는데, 한국 양장본들이 다 마음에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