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실 : “감독님 저는 왜 선물이 없어요? 미현언니꺼는 사주셨더라고요?”

승희 : “오면서 비행기 안에서 읽었던 책인데, 이거 뭐 선물이라고 치자. 줄 테니까 읽고 독후감 써 이거 좋은 책이야. 내가 고등학교 때 제일 좋아했던 책. 힘들고 외로울 때 유일하게 힘이 됐던 책이야. 여기 나오는 남자주인공이 꼭 나 같아”

복실 : (멀뚱멀뚱 쳐다보는)

승희 : “야. 이거 오랜만에 읽었는데도 좋더라. 여기 남자주인공 여동생이 나와. 이름이 피비야 방황하는 남자주인공한테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바로 그 여동생이지. 근데 그 여동생이 바로 너 같아. 만약에 내가 고등학교 때 너 같은 여동생이 있었으면 참 살기 편했을 텐데. 복실이 같은 여동생”

MBC TV 월화드라마 ‘넌 어느 별에서 왔니’(연출 표민수)의 두 주인공 승희(김래원)와 복실이(려원)이 나누는 대화다. 승희가 ‘독후감’까지 쓰라며 귀여운 복실이에게 일독을 권한 책은 제롬 데이비드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민음사. 2001)이다.

출간 당시 미국 청소년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동시에 ‘추잡한 책’이라는 낙인이 찍히기도 했던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주인공 홀든 코울필드의 독설과 유머다.

“대학에 간 다음에는 멋진 곳에 갈수 없을 거라고 말했어. 잘 들어봐 사정이 아주 달라질 꺼야. 나는 회사에 취직하여 돈을 벌고 택시나 매디슨가의 버스로 회사에 출근하고 신문을 읽든지 밤낮 브릿지 놀이를 하든지, 영화관에 가서 시시한 단편영화를 보던지 예고편이나 영화뉴스 같은 것 들을 보게 될 거야. 영화뉴스라는 게 또 사람 잡지. 언제나 경마나 배의 진수식에서 어느 귀부인이 배에다 대고 병을 깨뜨리는 장면이라든가 침팬지가 팬티를 입고 자전거를 탄다든가 하는 장면뿐이거든”(본문 중)

주인공 홀든 코울필드가 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집에 돌아오기까지 보낸 며칠간을 독백 식으로 써내려간 성장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은 출간된 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 세계 젊은이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으며 인기리에 읽히고 있다.

드라마 속 승희가 자신을 소설 속 주인공에게 비유한 이유는 방황하는 10대를 보낸 유년시절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다시 읽어도 좋더라”는 승희의 대사처럼 <호밀밭의 파수꾼>은 연령대와 관계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10대 주인공 홀든 코울필드가 만나는 사람과 사건은 20대, 30대를 거친 후에도 만나게 되는 삶의 ‘필연’ 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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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가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문학사상사. 2000) 이후 5년 만에 발표한 단편집 <도쿄기담집>(문학사상사. 2006)에서도 유려한 글 솜씨와 풍부한 감수성으로 독자를 사로잡고 있다. 각종 미니홈피, 블로그, 카페 에서 요시모토 바나나의 글과 함께 인기 스크랩 문장 1,2위를 다투는 하루키의 명대사는 <도쿄기담집>에서도 유감없이 빛난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에서 살던 때 직접 경험했던 일을 소개하는 첫 번째 단편 ‘우연한 여행자’의 명대사.

“당신을 만난 덕분에 지난 일주일, 꽤나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어요. 왠지 10대로 돌아간 것 같아서 즐거웠어요. 미용실에 가기도 하고, 단기간 다이어트를 하기도 하고, 이탈리아제의 예쁜 속옷을 사기도 하고...”

“꽤 많은 소비를 부추긴 것 같네요”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여자의 설렘 가득한 고백에 대한 남자의 재치 있는 대답. 하루키가 아니면 불가능한 문장이아닐까 싶다.

하와이에서 서핑을 즐기던 중 상어에게 한쪽 다리를 잃고 사망한 청년의 어머니 이야기 두 번째 단편 ‘하나레이 만’의 명대사.

“사치가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것은, 고교생이 된 이후였다. 그때까지는 피아노에 손을 대본 적조차 없었다. 그녀에게는 원래 절대음감이 있었으며, 귀도 남들보다 빼어나게 좋았다. 어떤 멜로디라도 한 번만 들으면 그것을 즉시 건반으로 옮길 수 있었다. 누구한테 배우지도 않았는데 열 개의 손가락들은 매끄럽게 움직였다”

주인공 사치의 뛰어난 피아노 실력을 묘사하는 하루키의 문장은 빠르고, 매끄럽다.

아파트에서 실종된 남편을 찾기 위해 사설탐정에게 찾아가는 여성의 이야기 세 번째 단편 ‘어디에서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서’의 명대사.

“25분후에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어머니의 상태가 대충 안정됐으니까 지금 계단으로 집까지 올라갈게. 당장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아침 식사를 준비해줘. 배가 무척 고프거든. 하고 남편은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즉시 프라이팬을 달구어 팬케이크를 굽기 시작했습니다. 베이컨도 구웠습니다. 메이플 시럽도 적당한 온도로 데웠습니다. 팬케이크라는 건 결코 복잡한 요리는 아니지만 순서와 타이밍이 중요하거든요. 하지만 그러고 나서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팬케이크는 접시위에서 점점 식으며 굳어갔습니다”

실종된 남편과 팬케이크 요리를 절묘하게 묘사한 문장이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인연에 관한 이야기 네 번째 단편 ‘날마다 이동하는 신장처럼 생긴 돌’의 명대사.

“남자가 일생 동안 만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여자는 세 사람밖에 없다. 그보다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지. 그러니까 만일 네가 앞으로 여러 여자를 만나고 사귄다고 하더라도 상대를 잘못 고르기라도 하면 그건 모두 쓸데없는 일이 되어버리지. 그 점을 똑똑히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아버지의 충고를 ‘의미심장’한 무게로 묘사한 하루키. 아버지의 말을 기억하는 주인공 쥰페이는 소설가가 되고 여자를 만나 이런 말을 한다.

“소설가를 만났다 하더라도 특별히 재미있는 일은 없을 거예요. 뭔가 특별한 재주를 갖고 있는 건 아니니까. 피아니스트라면 피아노를 칠 수 있고, 화가라면 스케치라도 할 수 있고, 마술사라면 간단히 마술이라도 보여줄 수 있겠지만... 소설가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거든요”

소설가의 직업을 재치 있게 표현한 문장이 돋보인다.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리는 한 여자의 기묘한 이야기 마지막 다섯 번째 단편 ‘시나가와 원숭이’의 명대사.

“이름이 그곳에 있으면 훔쳐가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습니다. 제 마음이 끌리는 이름은 따로 있습니다. 그런 이름이 있으면 그것을 손에 넣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쁜 일인 줄은 알고 있습니다만 어떻게 그걸 억제할 수가 없습니다. 폐를 끼친데 대해서는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이름을 훔치는 원숭이도 특이하지만 원숭이의 대사는 더욱 눈길이 간다. 잘못에 대한 대가로 엉덩이에 낙인을 찍어두자는 사람들에게 원숭이는 부탁한다.

“제발 그것만은 하지 말아주세요. 엉덩이에 묘한 마크가 새겨져 있거나 하면, 따돌림 당해서 원숭이 동료들 사이에 여간해서 끼어들 수 없게 됩니다. 무엇이든 숨김없이 다 말씀 드릴 테니까 낙인만은 제발 찍지 말아주세요”

이름을 훔친 ‘중죄’를 저지른 원숭이지만 하루키의 귀여운 대사가 원숭이를 미워할 수 없게 만든다.

5편의 독립된 소재와 장르에서 느껴지는 묘한 매력은 `역시 하루키!`라는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번역문학가 허 호는 추천글에서 "`기담`이란 기이한 이야기를 뜻하지만 결코 `괴담`은 아니다. 우리주변에 어디에선가 이따금 발생하고 있거나 언제라도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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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기록적인 강진이 강타하면서 '거룩한 땅' 파키스탄은 일순간에 수만명이 넘는 사상자의 신음소리만 넘쳐나는 악몽의 땅으로 변했다.

취재기자로 참사 현장을 누볐던 저자(고찬유)는 단순히 파키스탄 대지진 참사 현장을 알리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에 눈을 돌렸다.

종교전쟁으로 피비린내가 나는 이슬람지역에서 피부색과 문화, 생각은 달라도 구조현장과 의료봉사 현장에서 인류애라는 이름으로 움트고 있는 사랑의 씨앗을 발견했다.

"슈끄리아" 는 "감사합니다" 라는 뜻. 그런데 파키스탄인은 도와줘도 그다지 감사의 말을 하지 않는다. 이슬람에 묻혀 사는 시골은 특히 그렇다. 현지인들이 무정(無情)하거나 무례(無禮)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이들의 몸에 밴 종교문화 때문이었다.

이슬람의 5대 기본의무는 가난한 자, 아픈 자, 궁핍한 자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의무(자캇)라고 가르친다. 무슬림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받게 되는 남의 도움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본문 中)

▲ 고 기자의 파키스탄 엿보기 - 쪼그려 앉은 남자들

"남자들이 쪼그려 앉은 이유가 다름아니라 소변을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파키스탄 남자들은 소변을 볼 때 서서 보지 않고 쪼그려 앉아 상의로 하체를 가린 뒤 바지를 내려 (소변을) 본답니다. 술에 취하면 아무데나 기대 서서 노상방뇨를 하는 한국의 남자들과는 차이가 나죠.

맨 살을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 풍속 때문인지는 알쏭달쏭합니다. 하지만 확실한건 파키스탄 남자들의 소변 보는 자세입니다. 쪼그려 앉은 남자 중 열에 열은 소변을 보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 사실을 모르고 다가가면 여자들은 낭패를 당하기 일쑤입니다.

조심할 일이 또 있습니다. 여자들이 멋모르고 장에 나갔다간 봉변을 당하기 십상입니다. 파키스탄 시골 남자들은 남자 대신 시장에 나오는 여자를 정숙하지 못한 여성으로 여깁니다. 혼자 살거나 이상한(?) 직업에 종사하는 여자로 치부하죠. 그래서 막 대합니다.

심지어 시장에 나온 여자들의 몸을 만지거나 추행을 하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곳 남자들은 태연하기만 합니다. "제대로 된 여자라면 시장에 나올 리가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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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측천무후’에서 탐욕적이지만 지혜롭고, 풍요롭지만 외로웠던 중국 여황제의 삶을 시적으로 그려 낸 중국계 프랑스 작가 샨사의 신작 소설 ‘음모자들’(현대문학)이 번역돼 나왔다.

분류상 스파이 소설에 가깝지만 저자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액션과 음모, 계략 대신 스파이들의 인간적 고뇌와 사랑, 자유에의 열망 등에 더욱 주목하고 있다.

긴 흑발, 도도한 표정의 주인공 아야메이는 1989년 ‘천안문 사태’를 주도한 민주화 운동의 선봉자였으나 지금은 중국 정부에 포섭돼 프랑스에서 스파이로 활동하고 있다.

어느날 뤽상부르 공원이 내려다보이는 그녀의 스튜디오에 키 190㎝, 탄탄한 근육질의 미국인 조나단이 이사온다.

그는 다국적 기업의 컴퓨터 엔지니어로 행세하지만 사실은 아야메이에게 접근해 정보를 캐내는 임무를 맡은 미국 CIA 요원이다. 조나단은 이사온 날부터 목표물인 아야메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서서히 접근, 결국 그녀의 세계를 침범한다. 하지만 오랜 기간 스파이로 살아온 아야메이는 처음부터 조나단의 정체를 눈치채고 있었다. 서로를 이용하는 아야메이와 조나단.

그러나 아무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스파이의 숙명적 외로움을 잘 아는 두 사람은 서로에게 진짜 사랑을 느낀다. 사랑은 거짓된 삶에 영혼과 진정성을 되돌려줄 수 있지만 대신 목숨을 요구한다.

72년생인 젊은 작가 샨사는 9세 때 이미 첫 시집을 출간, ‘문학 신동’ 소리를 들었다.

90년 정부 장학금으로 파리로 유학을 떠났으며, 97년 프랑스어로 첫 소설 ‘천안문’을 썼다. 이어 ‘버드나무 네 가지 삶’ ‘바둑 두는 여자’ ‘측천무후’를 잇달아 내놓으며 촉망받는 작가 반열에 올랐다. 다음달 8~13일 ‘2006 서울, 젊은 작가들’ 행사에 초청작가로 처음 내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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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민호 기자]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 있다. 1340년대 유럽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사건 중 하나인, 훗날 '흑사병시대'라고 회상하게 만드는 페스트가 유럽을 강타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페스트가 어떻게 유럽을 강타했고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아는 사람이 있을까? 또한 페스트가 유럽을 지배할 당시 유럽인들이 어떤 혼란을 겪었는지, 그 와중에 유대인이 학살당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 이가 있을까?

 
▲ <흑사병시대의 재구성> 겉그림
ⓒ2006 소소
이럴 때는 돋보기가 필요하다. 거대한 역사의 장면을 세밀하게 관찰하게 해주는 도구가 필요한데 존 켈리가 <흑사병시대의 재구성>을 통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책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저자는 페스트가 어떻게 창궐했고, 어떤 경로로 이동했는지를 꼼꼼히 살피며 흑사병시대에 유럽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도록 미시적으로 그 시대를 '재구성'한 것이다.

그럼 저자가 어떻게 역사를 재구성했는지 책 속을 들여다보자. 저자는 페스트의 이동경로에 초점을 맞췄는데 첫걸음은 중세의 무역항인 카파에서 시작된다. 제노바인이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카파는 한때 잘 나갔지만 무적이라고 불리던 몽골군과의 싸움으로 지쳐가고 있었다. 카파는 고립된 채 죽을 날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몽골군이 퇴각한다. 덕분에 카파의 주민들은 살 길을 찾게 된다. 그리하여 1347년 4월 혹은 5월, 해방된 주민들은 서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한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몽골군을 피해 구원의 도시를 찾아 떠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르고 있었다. 무적을 자랑하던 몽골군이 퇴각해야 할 정도로 죽음의 그림자로 뒤덮인 페스트가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으며 그곳에서 도망치던 제노바인들 때문에 유럽에 페스트가 상륙하게 되리라는 것을.

카파에서 도망치던 이들이 정확히 어느 도시에 상륙했는지는 모호하다. 몇몇 도시의 이름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인데, 중요한 건 도시의 이름이 아니라 이로 인해 유럽이 페스트의 사정거리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랬다. 도망치던 선박이 잠시 땅에 닿기만 해도 페스트는 놀랄 정도로 빠르게 그 지역을 '접수'해버렸다. 그 지역의 군대가 이상한 분위기에 당황스러워하며 불길한 선박을 쫓아냈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직후였다. 더욱이 이렇게 쫓겨난 선박들은 다른 도시에서 똑같은 일을 만들어냈고 그리하여 페스트는 곳곳에서 유럽을 관통하기 시작한다.

저자는 페스트가 기승을 부리기 전에 기근 등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던 유럽과 페스트의 종류 등을 살핀 뒤에 1347년 10월의 시칠리아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이때부터 도시와 시기에 따라서 페스트가 어떻게 유럽을 강타했는지를 세밀히 살피고 있는데 그 결과는 상상이상으로 끔찍하다. 페스트는 얼마나 위력적이었는가? 마을 인구 3분의 1이 죽었다는 보고가 평범하게 여겨질 정도로 페스트는 인간을 학살했다. 세계 2차 대전에 뒤이어 인류 역사상 두 번째로 큰 규모인 재앙이라고 할 정도니 그 참상이 오죽했겠는가.

페스트가 어떤 피해를 끼쳤는지를 살펴보는 것과 더불어 <흑사병 시대의 재구성>에서 관심을 갖고 지켜볼 것은 페스트의 공격에 대한 인간들의 '다양한' 반응이다. 반응 중 가장 일반적인 것은 살기 위해 가족을 버리는 몰염치한 행동인데 저자는 당시 많은 도시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외면하고, 남편이 아내를 외면하는 일이 당연하게 일어났다고 알려주고 있다. 그나마 좀 나은 경우가 환자가 자는 사이에 도망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 상황이 오죽이나 끔찍했으랴.

두 번째 반응은 이런 와중에도 도리를 지키려고 했던 인간들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시체를 들판에 버리지 않고 장례식을 치러주는 일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그것은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일이니 거대한 질병 앞에서도 도리를 지킨 인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반응은 유대인 학살이다. 당시에 엉뚱하게도 페스트의 원인이 유대인이 우물에 독극물을 넣어서 발생한 것이라는 주장이 등장했는데 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얻어 하나의 진실처럼 여겨졌다.

흡사 관동대지진의 원인이 조선인들에게 있다고 주장한 일본인들처럼 사람들은 유대인에게 책임을 물고 분풀이를 했던 것인데 유대인에게 책임을 무는 인간의 모습은 페스트만큼이나 잔혹한 것이었다. 그 외에 언제 죽을지 모르니 쾌락을 즐기자는 사람들이나 하느님께 용서를 비는 의미로 공개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하는 고행자들도 등장했는데 이들은 교회의 권위를 약화시키는데 한몫했다.

페스트를 쫓던 저자의 발걸음은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양지에 도달한다. 자연적으로 페스트가 끝났기 때문이다. 뒤에 계속해서 페스트가 창궐하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사람들은 만세를 지르며 거리로 뛰어나온다. 인구는 격감했고 로마의 시절처럼 텅텅 빈 건물들이 많아 유령의 도시 같은 곳이 많았지만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럽은 다시 살 궁리를 한다.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야 했으니 말이다.

이처럼 <흑사병시대의 재구성>은 겉모양은 전염병을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중세 유럽의 솔직한 풍경을 엿볼 수 있다. 더욱이 돋보기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려는 듯 기존의 문헌 자료를 토대로 성직자, 귀족, 평민 등 다양한 계층의 모습을 비교하는 것은 물론 페스트로 인한 벌어진 사회 현상들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데 이는 평시에는 볼 수 없는 유럽인의 과거이기에 <흑사병시대의 재구성>은 흔치 않은 만남을 제공하고 있다.

책 사이사이에 생생한 묘사가 풍부하다. 또한 뚜렷한 서사구조로 구성돼 있어 저자의 발걸음을 따라가는 것이 어렵지 않다. 소설 못지않게 재미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니 더 말해 무엇 할까. <흑사병시대의 재구성>, 미시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특별한 즐거움을 선사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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