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분에 읽는 달라이 라마 - 30분에 읽는 위대한 사상가 6 30분에 읽는 위대한 사상가 6
제네비에브 블레이스 지음, 강주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내가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달라이 라마에 대한 이름은 많이 들었지만,
정작 그에 관해서 티벳에 관해서 하나도 아는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달라이 라마' 라는 자체가 한 사람의 이름인줄 알았는데,
부처의 환생 즉 이름이 아닌 하나의 직위를 말하는 고유명사라는것을 알았습니다.

솔직히 환생을 통해 지도자를 찾는다는 자체가 지금의 현실로써는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기도 해요.
시험을 통해 '달라이 라마'인지 아닌지를 알아본다고 하지만, 과학적으로 설명할수 없는 부분들이 있는것 같습니다.

붓다의 환생이건 아니건간에, 달라이 라마로 지목이 되어 교육을 받는 순간부터 4살의 소년은 (14대 달라이 라마)는 평범한 소년이 아니라 지도자로써의 자질을 키워게 됩니다.

티벳 역시 작은 나라인줄 알았는데, 우리나라보다 더 큰 나라임에 놀랬습니다.
불교를 국교를 삼고 있는 탓에 비폭력주의에 폐쇄정치를 했는데,
그 때문에 티벳은 중국으로 부터 침략을 받게 됩니다.

솔직히 중국이 티벳국민들에게 자행하는 폭력들을 보면서 피가 끓어오르더군요.
일본이 우리나라를 억압하던 시절이 떠올라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더 안타깝고 서글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라이 라마는
중국에 대해서 어떠한 분노와 원망을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이 더 놀라웠습니다.

티벳은 종교 지도자가 정부 지도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달라이 라마'가 티벳의 종교 지도자이자 정부 지도자라는 이야기지요.

하지만 30분에 읽는 달라이 라마에서는 최근 14대 달라이 라마에 관한 이야기를 중점으로 다루고 있답니다.
14대 달라이 라마는 티벳과 중국의 관계를 계속 평화적으로 접촉하려 시도합니다.
그 덕분에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하지만, 아직도 중국은 티벳과 타협하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중국과의 관계 때문에 티벳을 공식적으로 도와주지 못하는 입장이라는 사실이 안타깝더군요.

30분에 읽는 시리즈를 통해 티벳이 처한 상황을 알게 되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가치가 충분한것 같습니다.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랍니다.

*

이 책 때문에 영화 '티벳에서의 7년'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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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에 읽는 달라이 라마 - 30분에 읽는 위대한 사상가 6 30분에 읽는 위대한 사상가 6
제네비에브 블레이스 지음, 강주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4년 3월
품절


30초 SUMMARY

● 고타마 부다는 싯다르타란 이름으로 태어난 왕자였다.
● 고타마는 왕권을 포기하고 영적 진리를 찾는 구도자가 되었다.
● 고타마는 보리수 아래에서 명상하며 해탈에 이르렀다.
● 고타마는 불교를 창시해, 그가 얻은 삶의 지혜를 후세에 전했다.
● 불교는 티벳에서 큰 환영을 받았고, 곧 티벳의 주된 종교가 되었다.
● 티벳 불교의 겔룩파는 달라이 라마의 환생이란 전통을 발전시켰다.
● 라모 톤둡은 생후 4년 6개월에 14대 달라이 라마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 달라이 라마와 그의 가족은 티벳의 수도, 라사에 있는 포탈라 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 달라이 라마는 6세부터 본격적인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 달라이 라마는 15세에 티벳의 지도자로 즉위했다.
● 24세에 중국의 침공으로 조국을 떠나야만 했다.
● 망명 후 달라이 라마는 45년 동안 인도에서 살고 있다.
● 달라이 라마는 지금도 여전히 티벳 국민과 정부의 영적 지도자로 여겨진다.
● 달라이 라마는 티벳 사람들이 있는 티벳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금도 평화투쟁을 벌이고 있다.-.쪽

30초 SUMMARY

● 불교의 창시자는 고타마 부다이다.
● 고타마는 싯다르타란 이름으로 인도의 왕자로 태어났다.
● 불교는 인도에서 시작되었다.
● 불교는 650년경에 티벳에 전래되었다.
● 티벳 불교는 본고, 소승불교, 탄트라 수련을 융합시켰다.
● 티벳 불교는 대승불교라 불리기도 한다.
● 달라이 라마의 전통은 티벳 불교의 겔룩파에 의해 시작되었다.
● 불교도는 환생을 믿는다.
● 종파의 차이를 떠나서 모든 불교가 해탈에 이르기 위한 수단으로 팔정도를 따른다.-.쪽

30초 SUMMARY

● 1933년 13대 달라이 라마가 입적한 후, 티벳의 총독과 고승들은 달라이 라마의 환생을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실마리를 찾아 나섰다.
● 라모이 라초 호수에서 총독은 달라이 라마의 환생에 관련된 환상을 보았다.
● 고승들은 비밀리에 티벳 전역을 샅샅이 뒤져 마침내 탁처에서 라모 톤둡을 발견했다. 당시 그는 겨우 두 살이었다.
● 라모는 달라이 라마의 환생인지를 확인하는 모든 시험을 통과했다.
● 하지만 라모를 탁처에서 안전하게 빼내기 위해 고승들은 달라이 라마의 환생을 찾았다는 사실을 비밀에 붙였다.
● 라모와 그의 가족을 데리고 나오기 위해 중국측 허락을 받는 데 거의 2년이 걸렸다.
● 중국측은 달라이 라마를 보내는 조건으로 몸값을 요구했다.
● 라모 가족은 탁처를 떠난 지 3개월 반이 흐른 후에야 수도인 라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 달라이 라마는 라사의 모든 시민에게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쪽

30초 SUMMARY

● 달라이 라마는 티벳의 영적인 지도자인 동시에 정치 지도자이기도 하다.
● 티벳 문화는 1950년대까지 서구세계와 단절된 채 유지되었다.
● 중국이 티벳을 강점하기 전에 티벳의 인구는 600만 정도였다.
● 중국은 1959년 이후로 5~8만 명의 중국인을 티벳으로 이주시켰다.
● 티벳에서는 카타(실크 스카프)가 만남의 선물로 주어진다.
● 티벳 사람들은 매우 종교적인 국민이다. 대부분이 불교도이다.
● 티벳 사람들은 미래를 읽어내는 수단으로 신탁을 이용한다.
● 달라이 라마는 네충 영매와 중요한 문제를 상의한다.
● 티벳 사람들은 점성학과 천문학을 결합시켜 ‘하늘의 학문’을 만들어냈다.
● 티벳 의학에 따르면 감정상태가 건강을 좌우한다.-.쪽

30초 SUMMARY

● 달라이 라마는 형이상학, 예술과 공예, 의학, 변증법, 산스크리트까지 배웠다.
● 달라이 라마는 기계를 수리하길 좋아했다.
● 달라이 라마는 하인리히 하러라는 오스트리아인과 특별한 친구로 지냈다. 하인리히는 달라이 라마에게 외부세계와 다른 나라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었다.
● 달라이 라마는 16세에 티벳의 정부 수반이 되었다.
● 1950년대에 중국은 티벳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 베이징에 파견된 티벳 정부관리들은 중국이 티벳을 지배한다는 17개 조항 협약에 서명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 달라이 라마는 직접 협상해서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시키기 위해 중국으로 향했다.
● 달라이 라마가 인도를 여행하는 동안 중국의 억압에 항거하는 폭동이 티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쪽

30초 SUMMARY

● 9세기에 티벳의 지도자와 중국 황제는 영구평화조약을 맺고, 한 사찰의 벽에 그 조약의 내용을 새겨두었다.
● 5대 달라이 라마는 한 몽골 족장의 환생이었다.
● 몽골은 달라이 라마에게 티벳을 통치하는 정치적 권력을 주었다.
● 신정일치체제는 16세기에 티벳의 정부 형태로 확고히 성립되었다.
● 1949년 중국인민해방군은 티벳을 "해방"시키겠다고 선포했다.
● 중국은 티벳을 평화적으로 다스리겠다고 수없이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한번도 지켜지지 않았다.
● 달라이 라마는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 1959년 달라이 라마와 그 가족은 안전을 위해 망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쪽

30초 SUMMARY

● 달라이 라마는 은밀히 티벳을 탈출할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
● 달라이 라마는 군인처럼 변장하고 군중의 틈을 빠져나갔다.
● 미국 CIA는 티벳의 자유의 투사들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훈련까지 시켰다.
● 지방의 사찰들과 농가들은 달라이 라마의 일행에게 먹을 것을 제공했다.
● 티벳 게릴라들은 달라이 라마가 그들의 주둔지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안전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 일행 중 선발대가 먼저 인도로 들어가 입국허가를 요청했다.
● 세계 각지에서 기자들이 인도로 달려와 달라이 라마의 망명을 보도했다.
● 수많은 인도 시민들이 무수리 기차역으로 몰려나와 달라이 라마를 환영했다.
● 인도 정부는 정치적으로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도 티벳 난민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 망명지 인도에서는 티벳 학교가 세워지고 티벳의 고유한 문화를 이어가기 위한 모임이 결성되었다.-.쪽

30초 SUMMARY

● 달라이 라마는 잠시 인도에 체류한 후 곧 티벳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 인도는 티벳의 정치적 자주권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티벳 난민들을 따뜻하게 맞아주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 1959년 유엔은 처음으로 티벳 국민의 인권 보장을 지원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 스위스는 티벳 난민들을 앞장서서 지원한 국가들 중 하나였다.
● 달라이 라마는 처음에 델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벌라 하우스에서 지냈다.
● 그 후 인도 정부는 달라이 라마의 일행을 다람살라라 불리는 산악지대로 이주시켰다.
● 달라이 라마는 티벳 정부구조를 민주적인 형태로 개혁했다.
● 중국은 티벳 사찰의 98퍼센트를 파괴했다.
● 1987년 달라이 라마는 5개 조항 평화안을 제안했다.
● 1988년 두 번째로 스트라스부르 제안이 중국측에 제시되었다.
● 중국 정부는 어떤 협상에도 응하지 않고 무력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1989년 달라이 라마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쪽

30초 SUMMARY

● 달라이 라마는 벌써 45년째 망명지에서 살고 있다.
● 전세계에 퍼져있는 티벳 난민의 수는 12만 정도로 추정되며, 대부분이 인도에 살고 있다.
● 인도 정부의 도움으로 티벳 난민은 자체의 학교와 문화센터, 사찰과 대학을 세울 수 있었다.
● 10대 판첸 라마는 고문당하고 투옥되기도 했지만 달라이 라마와 티벳 국민을 향한 충성심을 배반하지 않았다.
● 10대 판첸 라마는 1989년에 입적했다. 그의 후계자는 게둔 초키 니마였다.
● 중국은 자체의 판단으로 다른 인물을 11대 판첸 라마로 선포했다.
● 지금 티벳에는 티벳 사람보다 중국 사람이 더 많이 살고 있다.
● 마오쩌둥이 죽은 후 티벳은 외국인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 달라이 라마가 제시한 평화안들을 중국은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 중국과의 공식적인 협상은 1993년으로 막을 내렸다.-.쪽

30초 SUMMARY

● 달라이 라마는 1964년 이후 35권 이사으이 책을 썼다.
● 달라이 라마는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비폭력과 대화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 달라이 라마는 세계의 모든 나라가 서로 의존관계가 있다고 믿는다.
● 달라이 라마는 누구나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 한다고 믿는다.
● 달라이 라마는 가난과 인구 과잉, 환경파괴 등과 같은 전지국적 문제의 해결책으로 보편 책임을 강조한다.
● 달라이 라마는 물질적 풍요와 테크놀러지만으로는 행복을 지속적으로 꾸려갈 수 없다고 보았다.
● 달라이 라마의 가르침에 담긴 기본적인 메세지는 사랑과 연민과 비폭력이다.
● 특졍한 종교를 갖는 것보다 선한 마음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쪽

30초 SUMMARY

● 달라이 라마는 비폭력적 방법으로 조국을 되찾으려 애쓴다.
● 티벳은 중국에서 맞서 무력으로 싸울 만한 자원을 갖고 있지 못하다.
● 달라이 라마는 망명한 후에 티벳의 망명정부를 민주적인 구조로 재구성했다.
● 달라이 라마를 공식적으로 대표하는 기구들이 세계 전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 티벳 난민을 지원하고, 티벳을 자유화시키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는 국제 자선단체와 조직이 있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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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이효연 기자]
 
▲ <멋대로 요리 맛나는 요리> 겉그림.
ⓒ2006 부키
얼마 전 요리책을 한 권 냈습니다. '스트레스 받지 말고 내 멋대로 요리해서 맛있게 먹고 즐기자'는 내용을 담은 '요리 비전문가'의 엉뚱한 요리책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제목도 <멋대로 요리 맛나는 요리>입니다. 출판 제안을 받은 것이 2004년 2월이었고 올해 2월이 다 갈 무렵 책이 출간되었으니 만 2년, 햇수로는 3년이 걸려 책 하나를 낸 셈입니다.

한 달 반 전, 홍콩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들어올 이삿짐을 꾸리느라 정신이 없던 어느 날, 한국에서 배달되어 온 책을 손에 쥐었을 때는 그야말로 가슴이 먹먹해지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아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한동안 못 만났던 자식을 만나 쓰다듬어 주듯 표지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어루만지기만 했습니다. 그리고는 바쁜 이삿짐 정리도 뒤로한 채 혼자 조용히 지난 2년간 책을 준비했던 과정들을 하나하나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10년만의 무더위, 요리책 위해 '피땀' 흘리다

▲ 다 끓여서 익힌 생선매운탕에 저렇게 파란 고명이 오른 것을 본 일이 있으십니까? 사진 때문에 매운탕을 다 끓인 후 고명을 얹은 것이지요. 파란색 야채가 김 때문에 숨이 죽을까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지요.
ⓒ2006 이효연
ⓒ2006 이효연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정말 말 그대로 '피땀 흘린 아픈 추억'입니다. 하필이면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홍콩에 10년만의 무더위가 찾아왔었던 재작년 여름, 찌는 듯한 폭염의 한가운데에서 1차 원고 마감을 앞두고 날이면 날마다 수십 가지의 요리를 하느라 불 옆에서 비지땀을 흘려야만 했습니다.

한 쪽에서는 에어컨이 쉼 없이 돌아가고 바로 옆에서는 프라이팬에 불이 붙을 정도로 강한 화력의 가스불이 열기를 내뿜고 있는 웃지 못 할 상황이 여름 내내 연출되었던 것이죠. 상상이 되시나요? 거의 탈진할 듯 너무 힘이 들 때에는 '내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 짓을 한다고 했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정말이지 괴롭고 중도에서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가득했었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무릎이 다 까져 피가 날 정도로 바닥을 기어 다녀야만 했던 일입니다. 디지털 카메라로 직접 요리 사진을 찍었지만 아마추어인지라 짧은 시간에 좋은 사진을 만들어 내기는 어려웠습니다. 나름대로 가장 좋은 구도를 잡는다고 생각하며 행한 방법이 요리를 식탁에 올려놓고 무릎걸음으로 기어 다니면서 사진을 찍는 방법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그렇게 수십, 수 백 장을 찍다보니 나중에는 무릎이 까져 옷에 피가 스미는 줄도 모르고 셔터를 눌러댄 적도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아픈 추억'이었습니다.

엄마 생각에 요리하며 눈물을 쏟다

▲ 스터프드 에그와 참치 초밥 같은 저렴하면서 색감이 화려한 요리들이 제가 좋아하는 요리들입니다. 사진을 찍어도 예쁘게 나오고 맛도 가격도 부담없으니까요
ⓒ2006 이효연
두 번째는 '엄마의 사랑에 대한 추억'입니다. 옆에서 누가 보았더라면 이상하게 생각했을 정도로 도마 앞에서 요리를 하다가 또는 컴퓨터 앞에서 글을 쓰다가도 수시로 펑펑 울었습니다. 엄마 생각이 너무 간절했기 때문이죠.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들 '엄마가 돌아가셨나보다'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저희 엄마는 아직 건강하게 살아 계십니다. 그런데도 엄마가 늘 해주셨던 무말랭이며 생선구이 같은 반찬들에 대한 원고를 쓰고 또 제 손으로 직접 요리를 만들다보면 저도 모르게 가슴이 미어지면서 눈물이 나더군요.

어려서는, 그리고 무심히 먹을 때는 몰랐던 '엄마의 사랑과 수고'가 새삼 가슴 절절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을까요? '엄마는 가족을 위해 이 반찬을 만드실 때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내가 반찬투정을 하며 오기로 유독 이 반찬만 도시락에 남겨왔을 때 엄마의 마음은 어떠셨을까?'하는 따위의 생각들이 꼬리를 물 때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쏟아지곤 했습니다. '요리에는 사랑이 담겨 있어야 하고 사랑이 담긴 요리가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맛이 있다'는 평범한 사실에 눈을 뜬 시간이었습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진리를 깨닫다

▲ '오이배를 탄 호두'라고나 할까요? 사진을 잘 찍기 위한 작업입니다.(왼쪽), 오이로 고임을 한 덕분에 호두알이 잘 보이지요.(오른쪽)
ⓒ2006 이효연
세 번째는 좀 '개똥철학'적인 얘기가 될 수도 있는데요, 요리를 하고 사진을 찍기 위해 예쁘게 꾸며 담고 하면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란 깨우침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호두죽을 만들던 날, 죽 위에 호두 반 알씩이 가지런히 올라가야 음식의 식감도 살고 사진도 잘 나올 텐데 이 호두알이 워낙 무거워서 죽 아래로 자꾸만 가라앉는 것이었어요. 할 수 없이 방책을 마련한 것이 죽 아래에 오이 동강을 잘라 고임을 하고 호두알을 올린 후 다시 죽을 부어서 오이를 가리는 '공사'를 하는 것이었지요.

또 된장찌개의 진정한 맛은 호박이며 조갯살을 푹 끓여 우러나오는 맛에서 찾을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곤죽이 되어서 도저히 요리책용 사진으로 쓸 수가 없지요. 그래서 파릇한 호박이과 입 딱 벌어진 조개 안에 통통한 살을 보이는 조갯살은 슬쩍 익혀 찌개에 얹어내는 '장난'을 쳐야만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비록 뭉그러진 호박과 곤죽이 된 된장찌개일지라도 그 맛은 기막히듯, '세상에서 꾸며지지 않은 볼품없는 성근 모양새의 것이라도 그 안의 참된 맛과 가치가 있을 수 있겠구나'란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론은? 맘 편하게 만들고, 즐겁게 먹자!

▲ 집안에서 키우는 관상목의 이파리를 뜯어서 소품으로 활용했습니다.
ⓒ2006 이효연
이런 추억과 더불어 만들어진 제 요리책의 핵심은 '즐겁게 요리하고 즐겁게 먹자'입니다. 쉽고, 편하고, 즐겁게! 너무 격식에 구애받지 말고 편하게 즐기면서 정 '그 맛'이 안 나면 아주 가끔은 조미료도 좀 쳐 가면서 맘 편하게 만들고 즐겁게 먹고 살자는 이야기가 담긴 책이지요.

전문 요리사가 아닌 '비전문가'가 만든 책이라서 부족한 부분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채워지지 않은 부분들로 인해 요리하기가 겁나고 자신 없는 사람들에게 친근한, 친구 같은 요리책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런데 평소에 맛집을 찾아다니는 미식가도 아니요, 요리학원 근처에는 가 보지도 않았던 사람이 낸 책이라서 그런 것일까요? 책과 관련한 주변 사람들의 인사도 아주 묘합니다.

"책 냈다면서? 축하한다. 잘 팔려?"와 같은 '상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도대체 네가 요리책을 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폭탄주 제조 비법을 담은 책이라면 몰라도 도저히 상상이 안 간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니 말입니다.

그러면 저는 씩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지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아나운서일 하다가 때려 치고 나와서 요리책을 다 쓰고, 정말 '멋대로 인생'인가 봐요. 나중에 '멋대로 폭탄주'나 한 잔 만들어 드릴게요."

요리 사진을 '잘' 찍는 요령 몇 가지

▲같은 요리지만 찍는 각도에 따라서 전혀 다른 사진이 나옵니다.(첫 번째), 자연광을 이용해 찍은 갈치조림 사진은 마치 물엿을 바른 듯 윤기가 흐르고 촉촉한 느낌이 살아있습니다(두번째).
이효연
사진 전문가도 아닌 주제에 감히 이런 글을 쓴다는 것이 무척이나 쑥스럽습니다만, 때로는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초보가 초보에게 설명하는 요령이 더 쉽게 귀에 쏙쏙 들어오는 경우가 있지요. 책을 만들면서 터득한 몇 가지 기초 요령을 간추려 봤습니다.

1. 최대한 자연광을 이용할 것

똑같은 요리라도 자연광을 이용해서 찍은 것과 실내에서 조명을 켜고 찍은 것과는 자연스러움에서 차이가 많이 납니다. 특히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형광등을 켜고 요리 사진을 찍으면 절대 요리가 가진 색감을 제대로 표현해 낼 수가 없습니다. 홍콩에 가기 전에 살았던 집의 채광조건이 상당히 안 좋았기 때문에 한국에서 찍었던 사진의 반 이상을 버리고 홍콩에서 다시 찍은 사진들을 책에 넣기도 했습니다.

2. 눈높이 사진을 찍자

가끔 요리 사이트에 올려진 요리 사진들 중에는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고 찍은 것들이 눈에 띕니다. 대개 초보자들이 이런 방식으로 사진을 많이 찍더군요. 저도 몇 년 전 요리 사진을 처음 찍을 때에는 일단 식탁의자부터 찾아 밟고 올라가곤 했으니까요. 위에서 찍으면 둥그런 접시와 그 안에 담긴 요리 전체가 다 표현되긴 하지만 이렇게 되면 요리의 느낌이라든지 특징이 잘 살아나지 않습니다.

가능하면 식탁에 음식을 놓고 무릎걸음을 걸으며 그릇에 음식이 담긴 정도 부분에 시선을 맞추어 사진을 찍으면 실패할 확률이 적습니다. 그릇에 담긴 요리 전체를 찍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도 중요합니다.

3. 절제의 미덕을 지키자

내가 만든 요리의 사진을 찍다보면 보다 화려하게 보이고 싶다는 욕심에 이것저것 색스러운 고명 따위를 잔뜩 올리게 됩니다. 또 카레나 샐러드, 스파게티 같이 소스가 곁들여지는 요리의 경우, 소스를 철퍼덕 부은 다음 사진을 찍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경우 요리의 포인트가 살려지지도 않을뿐더러 애써 만든 음식의 식감이 떨어져 보이는 낭패를 겪을 수도 있습니다.

고명은 한가지나 두 가지 정도로 단순하게 포인트만 주는 식으로 올려 주요리에 악센트를 주는 용도로 사용되도록 최대한 쓰임을 절제하는 것이 좋고요. 소스의 경우는 국수나 밥 등이 약간 보일 수 있도록 살짝만 뿌리는 것이 좋습니다. 샐러드는 먼저 소스를 살짝 뿌린 후 그 위에 파슬리라든지 방울토마토 같은 색감이 화려한 재료를 얹는 것이 보기 좋습니다.

3. 적절한 소품을 이용한다

집 안팎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요리 사진에 좋은 소품으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중국요리 사진의 배경으로 흔히 쓰이는 빨간색 매트가 없다면 등산용 점퍼를 벗어 접시 아래에 깔고 찍어도 되고요. 싱그러운 느낌을 살려 사진을 찍고 싶다면 아파트 베란다에서 키우는 화초이파리를 뜯어다가 쓰면 됩니다. 반드시 돈을 주고 사지 않아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찾아보면 분명 음식을 돋보이게 할 소재들이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4. 요리는 아기 다루듯이 다뤄야

다 만들어진 요리를 접시에 담는 순간 사진의 성패가 좌우될 수 있습니다. 요리의 순서상 재료의 색이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맨 나중에 넣는 재료들이 있습니다. 가령 브로콜리라든지 파 같은 것들이 그렇지요. 하지만 접시에 담다 보면 냄비 윗부분에 있는 그런 재료들이 가장 아래쪽에 깔려 담기기 쉽습니다.

냄비를 들이붓듯 접시에 담으면 냄비 아래쪽에 가라앉은 지저분한 양념찌꺼기들이 접시의 맨 윗부분에 담기기 때문에 요리의 맛과 모양을 살려 사진을 찍는 것이 불가능하지요. 국자나 수저로 살살 퍼 담으면서 요리의 주재료가 접시의 가장 윗부분에 오도록 조심스럽게 요리를 다뤄야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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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비에브 블레이스 지음, 강주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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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가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알려진 세계적인 명사가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얄궂게도 세기적인 비극의 결과였다. 다름 아닌 50여 년 전 중국이 달라이 라마의 나라, 티벳을 침공해 점령한 비극의 결과였다. 달라이 라마는 불교계의 지도자로서 산악지대에서의 은둔 생활을 청산하고 인도로 피신해, 티벳 국민을 대표해서 조국의 독립을 되찾기 위한 투쟁을 계속해오고 있다.

그 후 티벳과 달라이 라마에 대한 책과 기사가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티벳의 역사와 티벳 불교의 믿음을 학문적으로 접근한 책부터, 티벳을 잃어버린 샹글리라로, 신비로운 유토피아처럼 묘사한 젊은 서양 불교도들의 글도 있었다. 심지어 중국의 강점을 미화한 글도 있었다. 달라이 라마는 국제적인 명사가 되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의 진면목에 대해 모르고 있다. 더욱이 그의 배경과 믿음과 꿈에 대해서는 더더욱 모른다. 따라서 제네비에브 블레이스(Genevieve Blais)가 쓴 이 작은 책은 티벳의 "신격화된 군주"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소중한 길잡이가 되리라 믿는다.
블레이스는 전반부에서 티벳 불교의 주된 특징을 간략하지만 포괄적으로 설명해냈다. 또한 부처의 환생으로서 달라이 라마가 티벳 국민과 그들의 종교 및 문화에서 갖는 위치도 훌륭하게 설명해주었다. 종교는 티벳의 영혼 자체이다. 티벳에서는 종교가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달라이 라마를 향한 존경과 사랑과 경외로 표현된다.-.쪽

이 책은 크게 3부로 나누어 달라이 라마의 삶을 설명한다.

1. 중국과 국경을 접한 티벳 북동부의 한적한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4세에 달라이 라마로 간택되어 수도 라사에서 추대식을 갖고, 그 후 엄격하고 까다로운 교육과 훈련을 이겨내는 어린 시절이 소개된다.

2. 1950년 중국의 침공이 있은 직후에 국민의 요구로 불과 16세의 나이에 세속세계의 왕권을 계승해 점령군과 타협점을 찾기 위해 많은 시도를 하지만 모든 노력이 수포도 돌아간다. 한편 중국도 티벳의 전통적 가치와 종교, 관습과 정치제도 등 모든 것을 끊임없이 공격하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마침내 1959년 국민적 봉기가 일어난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는 티벳 국민의 곤경을 바깥 세계에 알리기 위해 인도로의 망명을 결심한다.

3. 폭력적 억압과 학살, 정치적 일체성의 강요, 무도한 인권침해는 지난 한 세기 동안 티벳에 있었던 모든 것이었다. 국민의 6분의 1이 죽임을 당했다. 중국은 티벳의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유산을 집요하게 파괴했다. 달라이 라마의 표현대로 문화의 집단학살이었고 환경의 파괴였다. 결국 대대적인 이주가 있었다. 이제 티벳 국민은 그들의 고향에서조차 소수민족이 되었다. 막강한 권력을 지닌 군부와 보안대가 자행한 인종차별 정책의 결과였다.-.쪽

달라이 라마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고타마 부다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달라이 아라마는 고타마 부다(자비의 보살로도 알려짐)의 환생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가 한 사람의 이름이줄 알았는데, 고유명칭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쪽

간혹 달라이 라마는 간단히 쿤둔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현존하는 영적 존재"라는 뜻이다.

=>영화 '티벳에서 7년'과 '쿤둔' 그리고 '싯타르타'가 생각나네요.-.쪽

불교도는 카르마(karma, 업)와 환생을 믿는다. 그들은 모든 행동이 반드시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고 본다.-.쪽

중국은 산아제한까지 강제로 시행했다. 이제 티벳 가정에는 두 자녀만이 허용된다. 셋째 아이를 임신할 경우 강제로 낙태시키고 산모에게 불임수술을 강요한다.
티벳에는 우라늄이 풍부하다. 중국은 핵무기 개발을 위해 우라늄을 무지막지하게 캐가고, 대신 위험한 핵폐기물을 티벳에게 내다버리고 있다.

=>21세기에 아직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자체가 믿기지 않네요.-.쪽

망명지에서 보낸 45년 동안, 달라이 라마는 티벳과 티벳 국민을 악의 수렁에서 구해낼 유일한 해결책은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이어야 한다는 믿음을 잠시도 버리지 않았다. 중국과 무수히 협상을 벌였지만 지금까지 만족스런 해결책을 구하지 못했다. 중국은 티벳에 대한 권리를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좌절과 실패의 연속이었다. 어떤 합의점도 찾지 못한 까닭에 긴장관계가 지속되고 민중시위가 반복될 뿐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티벳 국민도 막다른 낭떠러지까지 내몰리면서 자위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끝까지 평화주의를 견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달라이 라마의 굳은 의지와 투철한 믿음을 엿볼 수 있다. 이제 달라이 라마는 굳은 의지와 투철한 믿음의 표상이 되었다.-.쪽

노벨 평화상 수락 연설

비폭력적 성향 덕분에, 또한 1950년 이후 중국이 강점한 티벳의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끈질긴 노력 덕분에 달라이 라마는 1989년 12월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다음 글은 수락 연설문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 저는 세계 곳곳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또한 세계평화를 위해 분투하고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모든 사람들을 대신해서 이 상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저는 비폭력으로도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는 표본을 보여주신 분, 비폭력적 삶으로 저를 가르치시고 용기를 주신 분, 바로 마하트마 간디에 바치는 찬사의 뜻으로 이 상을 받아들이렵니다. 물론 600만 티벳 국민, 티벳 땅에서 살아가며 고통받는 내 사랑하는 동포와 여성을 대신해서 이 상을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의 정체성을 조직적으로 파괴하는 세력에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진리와 용기와 결단력을 무기로 삼을 때 티벳이 언젠가는 해방될 것이란 우리의 확신을 재확인해주는 것으로 이 상을 받아들이렵니다 …

… 이 땅의 어디에서 태어났든 간에 우리는 기본적으로 똑같은 인간입니다. 우리 모두가 행복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 합니다. 우리 모두가 기본적인 욕구와 근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똑같은 인간이기에 자유를 원하고, 개인으로서나 한 민족으로서 우리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권리를 갖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동유럽에서 아프리카까지 세계 방방곡곡에서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가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

… 불승(佛僧)인 까닭에 저는 인간 가족 모두를 생각합니다. 아니 고통받는 모든 생명체에 관심을 갖습니다. 모든 고통은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만의 행복과 만족을 추구하려는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안깁니다. 하지만 진정한 행복은 형제애와 자매애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 대해서 보편 책임을 키워갈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동정하는 마음, 심지어 적이라 생각되는 사람까지 사랑하고 동정할 수 있는 마음을 키워가는 데 제게는 불교가 도움이 되었지만, 종교가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모두가 선한 마음과 보편 책임을 키워갈 수 있다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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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물만두 >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 실비 제르맹

그 여자가 책 속으로 들어왔다. 그 여자는 떠돌이가 빈집으로, 버려진 정원으로 들어서듯 책의 페이지 속으로 들어왔다. 그 여자가 들어왔다, 문득. 그러나 그녀가 책의 주위를 배회한 지는 벌써 여러 해가 된다. 그녀는 책을 살짝 건드리곤 했다. 하지만 책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직 쓰여지지 않은 페이지들을 들춰보았고, 심지어 어떤 날은 낱말들을 기다리고 있는 백지상태의 페이지들을 소리나지 않게 스르륵 넘겨보기까지 했다. 그녀의 발자국마다 잉크 맛이 솟아났다.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말들 사이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언어의 숨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 소설은 어쩌면 작가의 이런 생각을 정확하게 구현하고 있는 작품일 것이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책 속으로 들어간 그 여자의 행적을 뒤쫓는다. 그녀는 “쓰여지지 않은” 책 속에서 새처럼 날아오르고, 강과 물과 강둑의 기억에 귀를 기울이고, 프라하에 내리는 밤에 귀 기울이고,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 세상의 물 위에 어리는 별그림자가 찰랑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 모든 말과 사물에 깃들인 언어의 숨소리를 듣는다.

“오늘날 프랑스 문단에 재능 있는 작가들은 부족하지 않을 만큼 많습니다. 그러나 실비 제르맹은 그냥 재능 정도가 아니라 어쩌면 천재가 아닐까 하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이 책을 옮긴 김화영 선생은 2003년 봄, 소설가이자 갈리마르의 출판 선정회 위원인 로제 그르니에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어떤 작가에 대해 좀처럼 과장된 평가를 하는 법이 없는 그의 예외적인 소개말에 이끌려 김화영 선생님 즉시 실비 제르맹의 책들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그중 처음 접한 책이 바로 이 책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였다.
작품의 제목 ‘La Pleurante des rues de Prague’에서 ‘La Pleurante’라는 말은 그냥 ‘우는 여자’가 아니라, 흔히 무덤 앞에 조각하여 세우는 ‘상복 차림의 눈물 흘리는 여인상’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런데 소설 속의 여자는 무덤 앞에서 꼼짝 않고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프라하의 거리거리를 울면서 돌아다닌다.
그녀의 뒤를 쫓으며 우리는 어두운 역사의 자취가 찍힌 거대한 무덤과도 같은 프라하의 거리거리들, 그 모퉁이들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차츰 안개 속의 프라하라는 이국의 도시는 독자들의 내면의 풍경이 되고, 개인적 집단적 역사와 기억의 어둠 역시 깊게 파인다.

한 여자가, 거대한 여자가 프라하의 안개 속에서, “낮의 빛을 부식시켜버린 것 같은” 안개 속에서 저만큼 걸어가고 있다. 헌 누더기를 펄럭이며…… 뒷모습을 보이며 걸어가고 있는 여자는 가끔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어 저만큼 걸어가고 있지만 마치 투명인간과도 같다. “그녀에게는 어떤 물질도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푸드득 날개치며 날아오른 백조가 그녀의 몸을 공기처럼 관통하여 지나가기도 한다. 그녀는 떠돌아다니는 개들처럼, 방랑자들처럼, 바람에 불려다니는 나뭇잎처럼 지나간다. 그녀가 지나가면 바람이 인다. 그녀의 발자국 속에는 숨소리가 나고 잉크 바람이 일어난다. 그녀는 난데없이 나타났다가 또 자취 없이 사라진다. 그녀는 존재하며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여자는 살과 피가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눈물과 집단적 기억의 압축으로 만들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가 나타날 때마다 작품 속 화자의, 그리고 독자들의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어떤 추억, 명상, 작품의 분위기, 혹은 고통의 편린들이 솟아오른다.

“그 여자는 책에서 밖으로 나갔다. 이제 그녀를 위한 페이지는 없다. 잉크는 지워져 투명해진다. 그러나 그 여자, 프라하의 거리에서, 이 세상의 모든 길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가 여기 있다. 그 여자가 여기 있다.”


경계지대의 신비적 비전, 실비 제르맹의 세계

어느 가을날 저녁 프라하의 구시가 골목으로 한 여자가 걸어간다. 심하게 다리를 전다. 그녀의 왼쪽 다리는 오른쪽 다리보다 훨씬 짧다. 그녀가 다리를 절뚝거리는 것은 두 세계 사이를 번갈아 딛고 가기 때문이다. 여자는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 현대의 세계와 과거의 세계, 현재의 세계와 과거의 세계, 살과 숨의 세계와 먼지와 침묵의 세계 사이에서 끝없이 다리를 절뚝거리고 있다. 그 여자는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 사이를 오간다. 사라진 자들과 살아 있는 자들의 것이 한데 섞인 눈물의 남모르는 밀사가 되어. 그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 침묵 위에 한 발을 디딘 다음 다른 한 발은 언어의 세계로 조심스레 내려놓는다. 그래서 그녀의 뒤를 따라가는 우리 독자들의 마음도 심하게 다리를 전다.
(……) 책을 덮으면서 ‘프라하’라고 발음해보라, 버림받음, 고통, 악, 역사, 연민 같은 말들이 그냥 추상적인 단어가 아니라 흐린 거리 저만큼에서 절뚝거리며 울고 가는 거인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텍스트는 고독, 부재가 환하게 밝혀지는 장소, 공허가 날카롭게 우는 소리를 내고 침묵이 노래하는 장소”임을 마침내 깨닫게 될 것이다. ―김화영

 아마존 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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