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필독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230년 전만해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읽어선 안되는 '금서'였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1774년 발간 이후 수십년동안 속편, 모방작, 오페라, 연극, 노래, 향수, 보석, 부채, 조끼 등에 영향을 끼치며 유럽 전역을 휩쓸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피를 흘리고 새로운 생명의 불길을 타오르게 하기 위해 죽는 것은 몇몇 고귀한 사람들만의 것입니다"라는 편지를 남기고 자살한 소설 속 주인공 베르테르를 따라 독일과 프랑스에서 젊은이들의 자살이 잇따르자 라이프치히의 신학 교수들은 책의 판매 금지를 요청했고 시의회는 이틀만에 이를 수용 '금서'로 지정했다.

그래서 괴테의 1787년 최종판에는 독자들이 자살을 범하지 않도록 당부하는 내용이 첨가되기도 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는 또다른 이런 저런 이유로 이른바 '금서'가 된, 그러나 이제는 '정전(canon)'의 반열에 오른 책 100권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소개한 책 <금지된 책의 문화사-100권의 금서>(니컬러스 J.캐롤리드스, 마거릿볼드, 돈 B. 소바 지음/손희승 옮김/예담)'가 출간됐다.

'예술이냐 외설이냐'

1957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음란물에 관한 정의를 '성적 내용이 들어 있으면서 사회적 중요성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정립했다.
 
그러나 그 이전 수백년동안 음란한 표현은 곧 '저속한 작품'이라고 규정돼 많은 책들의 판매와 유통이 금지됐다. 매춘, 간통, 미혼모 같은 사회 현상을 다뤘다는 이유로 금서가 된 '주홍글씨' '미천한 사람 주드'와 같은 책도 있다.

'사랑의 시'라는 뜻으로 부부에게 주는 일종의 결혼 지침서인 '카마수트라'는 아예 성적 기교를 가르치는 책이었으니 "도를 넘어선 음락하고 가학적인 성행위의 충격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평가와 함께 금서가 된 것이 어찌보면 당연한 지도 모른다.
 
  

<100권의 금서>에서는 이런 성적 이유로 탄압받은 작품 '사랑의 기술' '데카메론' '아라비안 나이트' '율리시스' 롤리타' '채털리부인의 사랑' 등의 뒤엣 얘기를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책이 종교적 정설, 신앙, 도덕, 사회·정치적 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이유로 금서로 낙인찍혔다.

 
 
이 가운데는 성서와 탈무드, 코란 등이 포함돼 있다. 기독교의 교리를 흔들어 유럽 사회의 근간을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다윈의 '종의 기원'과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도 대중들과 차단됐다.

 
갈릴레이의 '두개의 주된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와 '이브의 숨겨진 얼굴'(나왈 엘 사다위), '악마의 시'(살만 루슈디), '이성의 한계내에서의 종교'(이마누엘 칸트)도 위에 언급한 책들과 마찬가지 신세가 됐다. 사상과 학문의 자유까지도 억압할 수 있는 '권력자'들에 대항한 책들의 신세야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토마스 페인의 '인간의 권리'과 해리엇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그렇고, '공산당 선언(마르크스-엥겔스)' '나의 투쟁'(히틀러) '군주론'(마키아벨리) '닥터지바고'(보리스 파스테르나크)도 정치적 이유로 탄압받았다.

특히 조지오웰은 '동물농장', '1984'로 두 작품이나 100권의 금서 목록에 포함되는 '영광(?)'을 차지했다.

 
 
영화로도 친숙한 '시계태엽 오렌지'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출구' '주홍글씨' 등은 강도, 강간, 싸움, 마약 등이 난무하는 '미래의 모습'을 제시했다는 이유와 출간 당시 사회적으로 금지된 간통을 다뤘다는 이유 등으로 '독서 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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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 관통 이병주 전집 발간


좌우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오로지 문학으로 시대를 이야기했던 작가 이병주(1921~92)의 전집(전30권·한길사)이 출간됐다.

전집은 ‘관부연락선’(전2권), ‘지리산’(전7권), ‘행복어사전’(전5권), ‘산하’(전7권), ‘그해 5월’(전6권) 등 이병주의 대표적 대하소설과 데뷔작 ‘알렉산드리아’를 포함한 중·단편을 실은 3권으로 구성돼 있다.

이병주는 교사, 강사, 언론인, 감옥생활 등을 거쳐 44세에야 등단했음에도 죽을 때까지 단행본 8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작품을 남겼다. 19세기 말 개화기에서 80년대 ‘제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그의 소설은 100여년에 걸친 한국 현대사를 관통한다.

‘관부연락선’은 신탁통치 문제가 제기되던 시대를 배경으로 소설가가 본문에서 표현했듯 “답답한 정세 속에서 가능한 한 양심적이며 학구적인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려고 한 진지한 한국청년의 모습”을 그린 소설이다.

작가는 해방공간의 좌우익 갈등 속에 지식인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옳았는지,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판단을 내려야 했는지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젊은 나이에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해야 했던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통해 시대가 빚어낸 아픔을 어루만진다.

빨치산 이야기를 다룬 ‘지리산’은 이병주의 대표적 대하소설로 사실적 묘사와 방대한 스케일로 한국문학사에 큰 의미를 남긴 작품이다. 이 소설로 작가는 ‘과거 빨치산으로 활약했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그해 5월’은 박정희 정권 18년을, ‘행복어사전’은 70년대 암울한 사회상을 나약한 소시민의 눈으로 통해 그려나간다.

한편 지난해말 진보·보수 양 진영의 문학인, 언론인, 정치인이 참여해 발족시킨 이병주기념사업회(공동대표 김윤식·정구영)는 이번 전집 출간을 기념해 다음달 3일 오후 6시30분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이병주 문학의 밤을 개최한다.

이병주기념사업회는 그 외에도 이병주문학 독후감 공모, 이병주문학상 제정, 경남 하동과 부산을 무대로 한 이병주국제문학제 개최 등의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면서, 이병주를 매개로 한 범국민적 책읽기 운동을 전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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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경영도 인간을 상대로 하는 것이므로 경영에서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 역시 인간으로서 옳고 그른 것, 해도 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 등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도덕과 윤리를 그대로 경영의 지침이자 판단기준으로 삼았다. 나의 성공에 이유를 댄다면 단지 그 이유뿐이다. 나에게 재능은 부족했을지 모르지만 무슨 일을 하든지 “인간으로서 올바른 것을 추구한다”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지침에 따라 행동했다. ―본문 중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인생에서 두 가지를 추구한다. 하나는 ‘필요’이고 다른 하나는 ‘이상’이다. 필요만 추구하거나, 그렇다고 ‘이상’만 추구하면 삶의 균형을 잃기 쉽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중도(中道)의 길을 가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사업’이라는 것은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므로 그것을 ‘이상’과 직접 연결하기 어렵다. 그래서 사업가를 ‘이상주의자’로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교세라그룹의 명예회장 이나모리 가즈오는 자신의 저서 ‘카르마 경영’에서 기업과 리더의 역할에 대해 남다른 소신을 피력한다. 남을 위하는 마음이 비즈니스의 원점이며, 기업은 사회의 공기(公器)라는 것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약육강식의 비즈니스 세계에서 너무 배부른 소리 아닌가?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한 이나모리 회장의 생각은 매우 확고하다. 불교 신자인 그는 ‘이 세상에 무엇을 하러 왔는가?’란 질문에 “태어났을 때보다 조금은 더 훌륭한 인간이 되기 위해, 조금이라도 아름답고 숭고한 영혼을 가지고 죽기 위해”라고 말한다. 그에게 ‘노동’은 이러한 ‘영혼을 닦아 가는 수련 과정’이다. 따라서 온 마음과 몸을 다해 주어진 생업에 전념해야 한다. 그리고 사업의 최종 목적은 어디까지나 사회에 도움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을 이끄는 리더는 재능보다 덕을 먼저 갖춰야 한다. 최근 자주 발생하는 조직의 불상사, 넓게는 현대사회에서 일어나는 도덕적 해이 역시 지도자의 그릇이 되지 못하는 인물, 즉 재능은 있으나 내적인 규범이나 윤리 기준이 없는, 인간적인 중후함과 깊이가 부족한 인물들이 지도자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검(正檢)을 빼면 성공하지만 사검(邪檢)을 빼면 무덤을 판다.”

일본 거품경제가 한창이던 1990년대 많은 기업이 부동산 투자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은행들은 ‘교세라도 부동산에 투자해 보라’고 유혹했지만 ‘땀 흘리며 스스로 번 돈이 진짜 이익이다’라며 권유를 뿌리쳤다. 그 후 거품이 꺼지자 값이 올라야 할 부동산이 불량 채권으로 돌아와 부동산에 투자했던 수많은 기업이 그 후유증에서 지금까지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반면에 교세라는 일본이 거품 붕괴 후 장기 복합 불황을 겪을 때 오히려 승승장구하면서 소니를 앞지르는 순익을 창조하며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공했다.

“인간으로서 올바른 것을 지켜 나간다는 단순하지만 확실한 원리 원칙을 가지고 있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 투명경영 도덕경영의 선구자이자, 일본에서 ‘경영의 신’으로 불리며 가장 존경받는 기업가로 꼽히는 이나모리 회장의 동양적 지도관(指導觀)을 바탕으로 한 리더십은 그 어떤 경영 테크닉보다도 훨씬 단순하면서 강력하다.

경영을 삶과 인생 그리고 우주와 연결해서 생각해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전성철 세계경영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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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이자 고문실의 역사다. 인간은 신이 정해준 공간과 시간을 무시한 대가로 고문실에서 참기 어려운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인간이 그 고문실에 붙여준 이름은 '배'였다."

해양강국 네덜란드의 언론인이자 역사가 헨드릭 빌렘 반 룬(1882-1944)이 저서 '배 이야기-인간은 어떻게 7대양을 항해했을까?'(아이필드 펴냄)의 머리말에 쓴 첫 문장이다.

이에 덧붙여 저자는 고대 전쟁 이야기에서 나오는 뱃노래나 선원들의 활약상도 극소수의 성공담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난폭한 바다에서 잔인하게 희생됐을 뿐이라고 단언한다.

저자가 전하는 '반휴머니즘적'이고 '살아있는 화석'인 배의 역사는 고대 이집트부터 19세기까지 파란만장하다.

신전과 피라미드를 짓는데 필요한 거대한 화강암과 현무암 덩어리를 강 아래쪽으로 나르기 위해 배가 필요했다. "두개의 오벨리스크를 실을 수 있는 매우 큰 보트를 건조하기 위해 나라 안의 모든 나무들을 모아야했다"고 적고 있는 이집트 비문을 보면 이 배를 움직이기 위해 피흘렸을 노예들의 노고를 짐작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배는 돈이 되는 장사였다. 낭비벽이 있던 루이 14세는 선대 앙리 4세가 구교와 신교의 화합을 위해 서명한 '낭트 칙령'을 파기하고 신교 사냥에 나선다. 배를 저을 노예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중세를 거쳐 근대에도 배안의 풍속도는 나아지지 않는다.

18세기 영국 선실의 풍경을 보자. "믿거나 말거나, 이들 12살짜리 어린이들이 자기 나이보다 4배쯤 많은 수병들 가운데 유능한 사람을 보고할 권리, 그리고 자신을 어리다고 우습게 생각했다는 심증만으로 수병들에게 채찍질을 가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었다."

19세기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1811년 이후 인간 매매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중죄인으로 취급돼 호주로 영구 추방당할 각오를 해야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영국전함에 나포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느껴지기만 하면 곧바로 '노예화물'들을 그대로 바다에 던져버리기도 했다."

저자는 배의 형식과 모양에 따른 구분법을 철저하게 무시한다. 그는 "배의 건조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변수는 노예제, 화약, 증기엔진 등 3가지 뿐"이라고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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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조 바사리(1511∼1574)의 '미술가 열전'(1550년)을 빼놓고 서양 미술사를 논할 수 있을까.

치마부에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르네상스 시대 거장들의 일생을 기록한 세계 최초의 본격적인 미술사책이 바로 '미술가 열전'이다.

'미술가 열전'을 통해 1250년 미술이 긴 잠에서 깨어난 트레첸토 시대의 치마부에와 지오토를 만날 수 있다. 또 건축의 브루넬레스키, 회화의 마사초, 조각의 도나텔로가 날리던 14세기 미술의 성숙기를 엿볼 수 있다.

그 다음으로 바사리와 동시대인이던 다빈치, 라파엘로를 거쳐 미켈란젤로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 당시의 현대미술, 즉 15∼16세기 미술을 만날 수 있다.

바사리는 '미술가 열전'을 통해 역사상 최초의 미술사를 써내는 동시에 미술 비평의 언어와 방법을 창안했다.

'미술사 열전'은 이탈리아 미술에 대한 단순한 목록집 차원을 뛰어넘어 자신의 취향에 따라 선택하고 자신이 아는 범위내에서 면밀히 검토하고 지성과 감수성을 발휘해 평가하고 자신의 열광을 전달한 일종의 미술사 소설이었다.

프랑스 그르노블 스탕달 대학에서 이탈리아 문학을 강의하는 바사리 연구 전문가인 롤랑 르 몰레는 저서 '메디치가의 연출가 조르조 바사리'(미메시스 펴냄)를 통해 바사리라는 인물이 갖는 역사적 의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바사리는 피렌체의 이미지를 만들고, 군주의 정책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그 시대 사람들과 그 후손들에게 하나의 '기억'을 형성하고 남긴 사람이다. 붓과 돌과 글을 사용해 어떤 정치적, 세속적, 문화적 조직을 헌양함으로써 바사리는 피렌체 신화의 창조자들에게 하나의 얼굴과 하나의 목소리를 부여했다."

바사리는 단순한 미술사가가 아니었다. 그는 '르네상스'와 '고딕'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피렌체 두오모 대성당의 천장 프레스코화, 베키오 궁의 벽화를 그렸으며 바사리 화랑, 우피치 궁을 설계한 건축가였다.

바사리의 전방위적인 활약 뒤에는 당시 피렌체 공국의 통치자이던 메디치가 출신 코시모 1세가 있었다.

바사리가 예술가 뿐만 아니라 문화행정가로 두각을 나타내기까지는 그와 코시모 1세 사이의 우정에 가까운 친분이 발판이 됐다. 코시모는 새로운 정치체제를 만들고 바사리는 젊은 국가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서로의 재능을 결합하고 보충했다.

바사리와 메디치가의 인연, 예술과 권력의 결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소묘 아카데미' 설립이다. 1563년 출범한 소묘 아카데미의 첫 임무는 미켈란젤로의 장례식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이 책의 저자 르 몰레는 바사리는 충실한 메디치가의 남자로 "모든 교황, 고위 성직자, 군주, 귀족, 그리고 대부르주아들에게 유용한 상담자요, 내밀한 벗이요, 완벽한 가신이요, 믿을 수 있는 심복이요, 영향력있는 실력자였다"고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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